테레사의 오리무중 트리플 23
박지영 지음 / 자음과모음 / 202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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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음과모음의 트리플 시리즈는 세 편의 소설과 한 편의 에세이로 구성된 정형화된 형식(포맷)을 지닌 소설집이다. 아마 박지영 작가의 이번 작품집은 이 일정한 형식성에 소설의 내용이 가장 잘 부합한다고 생각된다. 수록된 소설들이 바로 인간 조건, 다시 말해 오늘을 사는 사람들의 삶의 토대, 내면화된 삶의 형식을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삶의 양식 그 자체이기에 당연시하고 의문시 되지 않는 인식들 말이다. 임시직, 계약직, 단기직, 영업직 그 무엇으로 불리든 극도로 불안한 고용상태에 놓인 사람들을 이 사회의 계급적 안전 담보물처럼 보전시키면서 멸시와 깔봄, 혐오의 대상으로 삼으며 우월감과 존재감을 지탱하는 양상 말이다. 우리들이 내면화시킨 불공정의 공정성에 대해서.

 

우리들 삶의 태도에는 너무도 무심히 이러한 터무니없는 환상이 깊숙이 체화되어있다. 이런 사회, 정상이란 것이 존재해서 그 정상을 향한 열망같은 것이 조성되면 그 사회가 병들고 있는 것이라고 프랑스의 행동하는 철학자 시몬 베이유는 그의 책 뿌리 내림에 썼다. 사회적 굴종이 이미 위험한 정도에 이르렀음의 지표라는 것이다. 단편 올드 레이디 버드에 등장하는 박물관 계약직 사원 영우란 인물은 이러한 계층적 경계가 철저하게 내면화되어 있어 학예사 이라는 인물로 상징되는 정상성을 갈망하고 신비화하기까지 한다. 그의 언행은 정의 심사를 거스르지 않으려는 노심초사로 이루어져 있으며, 정의 무심한 일상적 행위조차 자신의 행동에 대한 어떤 반응으로 여긴다.

 

그런가하면 표제작인 테레사의 오리무중바른 먹거리 센터에서 포장 일을 하는 단기직 노동자 테레사는 작업반 임시직에서 어부지리로 중간관리자가 된 주경으로부터 여사님은, 마스크를 쓰시는 게 좋겠어요라며 모든 작업자들이 마스크를 쓰지 않고 있음에도 당신은 드러난 자아를 감추지 못하니 마스크를 써서 얼굴을 감추라고 지적하는 것도 이러한 맹목적 차별과 지배 의식 때문이다. 하라면 좀, 그냥 하라는 대로 하세요함부로 하대해도 될 존재가 항상 거기에 있다는 듯이, 지배에 통제되는 것이 당연한 존재란 듯이, 당신과 같은 부류들은 얼굴에 마음을 드러내는 표정을 가려야만 된다고, 절대 태도란 것을 지녀서는 안 된다고. 그게 사회생활의 정상성이라고 암묵적 압박을 가한다.

 

테레사는 이러한 상황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안다. 그래서 손상되는 자존감, 모멸감으로 부르르 떠는 자아를 분리하여 집에 두고 출근하기 시작한다. 그러니 일터에 나온 테레사에게는 자아가 없다. 자아가 없는 존재니 내면이 표정에 드러나는 법이 없고 마스크를 벗어도 더 이상 무어라는 시비가 없어진다. 제목에 있는 오리무중은 이 분리된 자아, 특히 아홉 번째, 아니 일곱 번째로 밝혀지지만 그 자아의 행방이 묘연해졌음을 뜻한다. 사라진 테레사의 자아인 성 테레사의 행방을 주경과 함께 찾아 나서는 이야기다. 떠도는 영혼들의 외로움과 불온하게 변질된 위계의 심리를 돌아보게 하는 작품이다.

 

단편 올드 레이디 버드는 고양이 양육 집단이 하나의 신분과 계층적 상징물로 등장하는데, 계약직으로 여기저기 떠도는 영우란 인물은 이렇게 말한다. 고양이의 귀여움은 취향의 문제가 아니었다. 선악의 문제였다.”, 그가 떠돌았던 직장들에서 사람들은 한결같이 고양이의 귀여움을 입이 닳도록 이구동성으로 떠들었다. 그런 세계에서 영우는 자신의 취향과는 무관하게 동조하여야만 했다, 만일 그 귀여움에 섞여들지 않는다면 곧 이질적 존재, 외부자로 배제되는, 즉 존재가 부정될 수도 있는 문제였기 때문이다. 사실 이 소설에는 통제에 대한 욕구”, “안전에 대한 감각이라는 문구가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데, 이는 현대적 삶의 형식에 내재된 타자를 향한 환상 소유라는 지배 감각의 전형적 양식들이기에 아마 오늘을 사는 사람들에게 굴절된 사물화와 소유 의식이 일상적으로 점유된 양상을 읽을 수 있다고 말해도 될 것이다.

 

한편 박물관의 학예사인 이란 인물은 계약직인 영우에게 솔직하고 소소하게 직원들의 험담을 이야기하는데, 그는 정에게 동일한 형태의 말을 할 수 없다. 정이 자신의 취약성을 영우에게 드러낼 수 있다는 건 강자였기에 가능한 것이라고, 허락된 자만이 할 수 있는 말을 영우가 발설하는 순간 외면당하고 만다. 하나의 단편적 장면인데 강렬한 인상을 주는 대화가 있다. 영우가 박물관 경비인 염씨가 건네주는 박카스를 받아 마신 것에 대해 정은 염의 친절이 지나치고, 그 음료에 무엇이 들었는지 어떻게 신뢰할 수 있겠느냐며, 경비라는 직업의 인물에 대한 혐오와 불신의 신호를 보내며 은근한 동의를 구하는 것이다.

 

이때 영우는 자신의 표정에 신경쓰며 무언의 공감을 소극적으로 표시하고 만다. 자기 표정에 신경을 쓴 것은 염의 친절에 대해 정의 말처럼 경계했던 적이 없었기 때문이고, 수동적인 공감을 표시하는 것은 상급자인 정의 견해에 대해 계약직으로서 다른 의견을 말하는 것이 타당하지 않다고 여겼던 까닭이다. 계약이 만료되고 퇴직 인사를 위해 정을 찾아 간 날, 정은 연차로 출근하지 않아 텅 빈 책상에 먹지 않고 버려지듯 쌓인 음료병들을 보게 된다. 염이 주었으나 마시지 않고 방치된 것들이다, 염의 앞에서는 차별없음과 친절을 가장하지만 정은 의심스럽고 변변찮은 불쾌한 사물로 취급하는 것이다. 영우가 이를 제대로 읽었는지는 불명확하다. 정이 치어죽인 박물관 영내 삼색고양이 사건과 관련하여 계층 경계에 선 그의 열망이 고양이를 떠나지 못하고 맴도는 양상은 지독하게 내면화된 예속의 성질을 생각게 한다.

 


고양이는 장례 세일에 앞선 두 편의 작품 모두에 등장하는 주경이란 인물과 함께 다시 등장하는데, 생각해 본적 없는 선의(善意)”의 매개체인 불공정한 선의로 작중 인물에게 그 의미를 전달하는 듯하다. 내겐 이 작품이 가장 인상적이었는데, 세 편의 작품 모두 검정색 해학이 문장들에 스며있어 뒤틀린 가벼움으로 절로 비판적 목소리가 울려퍼지게 하지만, 단연 유머의 진가를 유감없이 발휘하고 있기 때문이다. 압도적인 유혹이었다고 할까? 죽음을 앞에 두고 벌이는 오락성의 발칙함, 그 무례함 뒤에서 울먹이는 존재를 보았기에 죽음의 상업적 놀음에 아무런 가치판단을 하지 못하게 된다. 우리들을 인식의 무능력 지대와 직면시키기 때문일 것이다.

 

소설은 첫 문장부터 조금은 못되고 무례한 언어로 시작한다. 아버지 독고씨의 묘비명으로 토사구팽(兔死狗烹)’을 생각하는 병원 장례식장 3교대 계약직 경비원인 현수란 인물이 직면한 삶의 실상을 따라가다 보면 문득 정서적 무능력을 실감하게 된다. 토사구팽이란 필요할 때면 쓰이고 쓸모가 없어지면 야박하게 버려진다는 말이다. 이 말처럼 우리들에 내면화된 삶의 형식인 자본주의를 정의하는 표현이 어디에 있겠는가?

 

또한 토사구팽은 은유가 아니라 독고씨와 현수의 삶속에 실제로 일어났던 일이기도 한데, 토끼를 산 채로 잡아 영업사원인 아버지 독고씨가 회사 상사들과 함께 집에 돌아 온 날의 기억이다. 굽실거리며 산 토끼를 잡아 탕으로 끓여 술안주로 내오고 순종적인 아버지를 닮으라는 어린 현수에게 주절거리는 회사 상사의 무례한 언어는 독고씨의 삶의 모습을 그대로 드러낸다. 현수가 토사구팽을 떠올린 것은 필연적인 것이고, 독고씨의 묘비명이 그래도 싼것이기에 불공정하지만 일견 정당하다고 여겨질 수도 있을 것이다.

 

독고씨의 죽음 값이 그래도 싼 것인지, 아니면 불공정한 것인지에 대한 고뇌가 소설의 한 줄기이고, 한 생명의 가치를 가늠한다는 것이 대체 무엇인지, 그 가치를 가늠한다는 것이 정말 가능한 것이기라도 하다는 것인지에 대한 윤리적 사유가 또 하나의 줄기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장례 세일이 제목이 되었을까? 현수는 계약 만료를 앞두고 있으며, 직원에게 할인혜택을 주는 장례비용 30퍼센트 할인 기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아버지 독고씨는 의식이란 이미 사라진 채 연명줄로 버티며 요양병원에서 죽을 시점만이 남아있다.

 

인생은 타이밍이다. 죽음 역시 타이밍이 중요했다. 존엄사라는 건 그런 거였다.” -143

 

가진 것 없는 현수나 자식에게 아무것도 남겨 줄 것 없는, 의식없이 누워있는 독고씨의 보잘 것 없는 생은 독고씨의 죽음에 드는 비용으로 고민하는 남루한 삶을 살아가는 이에게 지극히 죽음의 타이밍이 중요한 사안이다. 현수는 텅 빈 장례식장의 그 공허를 피하기 위한 계획을 세운다. 독고씨의 죽음 비용은 현수가 고려중인 그래도 싼수준조차도 언감생심이거나 지나치게 고평가된 것일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자식인 자신조차 싼 인생으로 취급받는 것은 피해야하지 않겠나? 그래서 흥행계획을 진행시킨다. 흥행성을 결정할 오락적 면을 효과적으로 부과하기 위한 일명 마감 임박 세일을 위한 기본 포맷을 수립한다. 그것은 아주 사소해서 세상에 이런 기억을 아직까지 간직하고 있었다니, 이 정도의 감사함을 죽을 때까지 가슴에 품고 자식을 통해 꼭 전하고 싶어 한 삶이란..”라고 자신이 감사한 사랑이었음을 일깨우는 감사 편지를 독고씨가 스쳐지나간 사람들 모두에게 보내는 것이다. 감사 편지를 받은 사람들은 현수에게 독고씨가 운명하면 꼭 상()에 불러달라고 회신한다. 흥행계획은 일단 소기의 성과를 이룬 것 같다. 그런데 독고씨가 숨 쉬는 것을 단념하지 않는다.

 

아니나 다를까, 아버지는 살아서도 맞추지 못했던 타이밍을 죽을 때조차 맞추지 못한다. 계약기간이 끝나서 더는 직원 혜택을 받을 수 없게 되었을 때 죽는다. 이제 관계라는 것이 남아있지 않은 사람에게 누가 조문을 오겠는가? 아무리 플러스를 만들려고 해봐도 어떨 수 없는 마이너스 인생이었던 독고씨는 할인된 죽음, 세일 된 맨의 죽음을 완료한다. 이 풍자적 언어의 해학에도 불구하고 우울함이 이 뒤틀린 언어의 감각을 뒤덮는다. 세일 된 죽음! 그나마 현수의 흥행 작업이 소기의 성과를 낳아 조문객들이 들어차서 너도나도 고인이 자신들에게 사소한 행위에 감사했음을 자랑스레 떠들며 죽음을 품위있게 만들어 낸다.

 

소설의 후반부는 싼 인생을, 마이너스 인생을 살다간 아버지 독고씨의 장례를 품위있고 고결하게, 그리고 가성비에 맞추어 치러냈으나 공정하지 못했다는 기분을 떨쳐내지 못한다. 아버지의 죽음 앞에서 제대로 슬퍼하지 못하고 장례비용과 화장비용, 장지비용, (,..) 조의금의 최종 액수 따위를 계산해보는 자신 또한 그래도 싼 인생을 벗어날 수 없음에 사로잡힌다. 사실 소설에서도 말하고 있지만 위풍당당한 죽음과 의기소침한 죽음이란 이 대비의 말이 얼마나 천박한 말인가. 그렇다고 애도에 가성비를 따져야 하는 세상도 우리들이 오늘 어떤 세계를 살아가고 있으며, 무엇을 당연시하고 있는지 일깨운다.

 

우리들의 행위를 결정하는 삶의 형식이 된 내면화된 믿음들, 얼마나 가증스러운 것들인가? 등급을 나누고, 차별하고, 굴종을 강요하고, 모욕으로 외로움과 고립으로 몰아넣고, 어쩔 수 없음의 윤리와 신념로 침윤(浸潤)되게 하는 세상은 벗어나야 하지 않겠나?  인간 존엄과 공정성, 삶의 형식에 대해 생각하는 시간이다. 엄숙한, 아주 근본적인 변화를 사유케 하는 이야기가 지극히 경쾌하고 재미있는 서사로 써질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소설들이다. 그러면서 재미에 매몰되지 않고 우리들의 무능력지대를 지속해서 떠올리게 하는 문장들이 촘촘히 게으른 우리들의 마음을 흔들어 깨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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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 , 인상 깊은 하나를 말하지 못한 것 같다. 세 편의 소설 모두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책을 읽는다. 자신이 접하고 있는 당면 현안을 돌파하기 위한 소소한 책들을, 물론 작가가 읽었던 책들일 것이다. 그 책들을 찾아 읽는 것도 또 하나의 즐거움이 될 것 같다. 그리고 마지막에 수록된 에세이는 각 작품들의 장면에 대한 작가의 고민이 씌어 있다. 작가가 의도했던 바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어 줄 텍스트로 읽어도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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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을 위한 혁명 - 죽음의 체제에 맞서는 새로운 저항들의 의미
에바 폰 레데커 지음, 임보라 옮김 / 민음사 / 202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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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형식으로서의 자본주의 비판


우리가 사는 지금 이 세계를 어떻게 묘사할 수 있을까? 먹고 잠자고 가족을 보호하고 자손을 양육하는데 요구되는 재화를 벌어들이기 위해 고용주를 위한 노동을 하여야만 하고, 자신의 상품가치를 유지시키기 위해 끊임없는 재투자와 재생산의 노력을 지속하며, 경쟁자를 누르고 보다 높은 자리에 올라서려 몸부림을 치고, 낙오된 자들을 보며 당분간의 안전감을 느낀다. 그런가하면 미세먼지와 탄소 배출로 인한 대기오염과 기후 온난화로 바이러스가 창궐하고, 묻지마 혐오 살인으로 여성과 소수자들이 살해되며, 상품가치가 떨어져 노동력을 값싸게 팔아야만 하는 사람들에 대한 사회적 부담을 축소하거나 아예 없애버리면서 자기 주머니 채우기에 급급한 우익 파쇼들이 극성스럽게 인간을 갈라치기하는 세상이기도 하다.

 

아마 이런 식으로 죽 열거하자면 억만 겁이 지나도 모두 표현하는 것이 불가능할 것이다. 즉 우리 삶의 토대 전체를 명확하게 묘사한다는 것은 가능한 일이 아닐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들 삶의 토대를 상상해 낼 수 있어야 그것을 개선하든지 완전히 다른 세계로 변화시키던지 할 문제들을 파악할 수 있기에 현실 세계의 실체를 규명해야만 한다. 이 책은 우리 삶의 토대를 훼손시킬 뿐 아니라 망가뜨리는 파괴를, 즉 우리 삶의 형식이 초래하는 전체적인 파괴를 증언하려하지만, 그것을 완전히 포괄적인 시나리오로 만드는 것은 불가능하기에 재앙을 생생하게 재현하는 방식으로 압축적으로 전달한다. 9장으로 구성된 이 책은 5<혁명>을 기점으로 앞의 4개장은 우리네 삶의 형식을 조건지운 토대에 내재된 위기들을 역설하고 있으며, 4개장은 이들 문제를 지닌 세계를 어떻게 변화시켜야 하는가에 대한 논의이다.

 

이 책을 읽다보면 절로 떠오르는 트로이의 여성이 있다. 그 누구도 그녀의 예언을 믿지 않았으며, 이 여성을 저주로 몰아 살해한 권력자들과 대중의 몽매함을 후세에 전하는 카산드라말이다. 철학자이자 지구상의 모든 포괄적 위기에 행동가로 나서는 저자 에바 폰 레데커가 현대의 카산드라로 환생하여 나섰다고 해도 그릇된 이해는 아닐 것이다. 2015년 스웨덴 의회 앞에서 지구 생태계에 가져 올 결과 목록을 낭송하면서 흐느끼는 어린 소녀 그레타 툰베리 더 이상은 안 된다는 다가오는 지구적 재앙에 대한 무방비와 무감한 모든 인간들을 향한 호소, 바로 그것이다. 그리고 망가진 삶의 형식을 바꿀 수 있다고, 우리들의 행동 양식에 대한 믿음을 향한 외침이다. 이 외침을 듣고 어떻게 행동하여야 하는가는 어쩌면 절로 방향이 설 것이다. 때문에 책의 전반 부 4개장() 만으로도 이 책은 소임을 다한 것이다. 후반부 4개장은 그 대안의 모색이니 천천히 이 세계 삶의 구성원인 각자가 실천의 가이드로 삼으면 족할 것이다.

 

내 삶의 형식이 된, 이 세계를 살아가는 내면화된 인식이란 무엇일까? 카산드라인 에바는 크게 네 범주로 설명하고 있다. 첫째는 재산의 지배이다. ‘사유재산제, 이것은 내 것이다, 내가 원하는 바를 그것으로 할 수 있다.”는 절대적 사물지배의 소유형태에 대한 믿음이다. 이것은 근대화의 산물인데, 이러한 생각은 이전에는 없었던 원리다. 이것의 등장부터가 교활성과 폭력성을 동반한 것인데, 자유와 평등을 이름으로 실현된 것이라는 점에서 교활한 위선이고, 들판과 공유지에 울타리를 치고 토지와 농부를 갈라치기함으로써 극단적 방식으로 점유함으로써 사유재산이 형성되었다는 점에서 폭력적이다. 소유한 자가 원하는 대로 관리 처분할 수 있다는 점에서, 그리고 노예와 농노의 해방이라는 이름에서 자유가 정의되었다는 점이다.

 

그리고는 모든 인간은 스스로 자산가가 될 수 있는 권리를 지닌 존재, ‘자기 자신의 주인이라 천명되었다는 것은 발칙함이다. 실제 토지에서 뿌리뽑혀 생계수단을 잃어버린 자들에게 자기 자신의 주인으로서 자유를 행하라고 하였으니, 무산 계급은 살기 위해 노동력을 팔아야 되는 존재로, 다시 말해 자기 노동력을 고용주에게 팔아넘기는 시간의 속박이라는 새로운 방식의 노예가 되어야 했으니 대다수의 사람들에게는 자유를 확보할 대상이 없었다는 말이다. 즉각적인 자유를 상실한 사람들에게 너는 네 자신의 주인이라는 굴레를 씌워 자유를 표방했으니 가히 공허한 개념이요, 부르주아의 말잔치에 불과했다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다. 사유재산은 물질적 재산을 손에 넣었다는 의미가 아니라 사회적 지배력을 가졌다는 의미로써 인식되는 지점이다. 21세기 오늘에 이르는 근대 400년간은 이것이 인간에게 내면화되는 시간이었으며, 이 개념은 모든 인간들의 삶의 형식이 되었다. 이 내면화의 과정이 그저 순일(純一)하게 진행된 것은 아니다.

 

가부장적 혼인법과 종교재판을 통한 남성의지에 반하는 여성 사냥, 식민지 정복을 통한 피부색이라는 상표화(흑색)된 사유재산 표시로 사물 지배의 원칙이 강화되는 역사였다. 즉 모든 인간의 완전하고 훼손되지 않은 자기 소유의 합법적 층위에서 보호하는 법제의 역사를 강화하며 뼛속 깊이 내면화시켜왔다는 것이다. 오늘의 우리들은 이러한 모범과 계급들을 정체성으로 내면화했다. 그럼으로써 자기 소유의 경계를 확립했으며, 이것은 다시금 등급화된 차별 의식인 환상 소유라는 맹목적 지배 욕구로 각인 되었다. 환상소유란 깔보기 위해, 우월감을 느끼기 위해, 안전감을 지키기 위해 소외시킨 언제든 지배 가능한 물질적(노동력 포함) 대상을 가리킨다. 사유재산의 승인이라는 이 중립적인 언어처럼 보이는 개념의 내면화란 이처럼 실로 엄청난 의미를 품고 있는 말이다. 이 개념에서 타자에 대한 비밀스러운 폭력의 욕망과 모든 대상의 사물화를 통한 지배 욕구, 지구 온난화라는 생태학적 버전의 사물지배욕이 출현하는 것이다. 독일의 지하철에서 구타당하던 한국인에게 그래, 왜 도망가지 않는 거야?”, “다른 곳에 살았다면 이런 일이 없을 거 아냐라는 말에 담긴 의미에서 사유재산의 물적 지배와 환상 소유의 개념이 얼룩져 있음을 우리는 읽게 된다.

 

두 번째는 모든 대상의 상품화. ‘칼 폴라니는 자본주의란 인간을 형상 없는 대중으로 갈아버리는 악마의 맷돌이다.”라고 말했다. 이건 은유가 아니다. 영국은 라이프치히, 워털루, 크리미아의 전쟁터에서 뼈를 캐고, 시칠리의 지하 묘지에 쌓인 여러 세대의 뼈를 빻아 분말가루로 포장, 운반 가능한 상품으로 변형하여 판매, 이윤을 얻었다. 인위적으로 합성되지 않는 잎, 뿌리, 골격구조의 필수요소인 인(P)을 얻기위해 뼈를 가는 공장이 1800년대 초부터 극성을 부리기 시작했다. 사실 이 불경스러움은 자본주의적 축적과정에서 쌓은 잔해더미에 비하면 오히려 무해한 것에 불과하다. 상품이란 폐기된 잔여로부터 분리된 생산물이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분리된 잔여물, 배기가스, 포장재는 버려지며 주인 없이 남겨진다. 우리는 상품과 폐기물이라는 이 분리의 개념을 또한 내면화했다.

 

이 말 또한 무시무시한 폭력성을 내재하고 있다. 상품화란 투자와 수익 사이의 평형만을 고려하는 철저한 이익개념의 언어이다. 해서 상품화의 폭풍으로 빚어지는 피해나 난파선에는 아무런 관심을 가지 않기에 미래에 심각한 상처를 남긴다. 한 인간은 노동력을 제공하는 하나의 상품으로 강제된 재산의 한 양태가 되었다. 우리는 스스로를 써버림으로써만 살아가야하는 물질적 존재가 되었다. 그렇기에 상품으로서의 가치가 완전히 탈락할 때까지 이웃과 경쟁한다.

 

당신의 이웃을 제거하라!”가 표어가 된다. 영역 내 순위가 높을수록 제거 원칙에 따라 공개적 권력의 지위가 부여되고 안전하기에 기를 쓰고 경쟁한다. 이 상품화의 내면화에는 사유재산의 물적지배와 환상소유가 얽혀 미래가치에 배팅하는 대신에 다른 사람의 미래가치가 무가치하다는 데 배팅하게 하거나, 약한 사람들을 향한 일정한 가해 속에서 자신의 무가치함이 우월감이 된다. 하다못해 TV 연애 프로그램조차 경쟁자를 제거하는 내용으로 짜여 있지만 너무도 익숙해서 그 내용이 시사하는 바를 알아차리지 못한다. 타자를 혐오의 대상으로 삼음으로써 자신의 멸시를 피하는 것, 상품화는 이렇게 물질 지배와 타자 말살에의 의지 사이의 연관성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상품의 가치란 것은 전체 사회적 맥락의 영향과는 아무런 관련도 맺지 못한다. 오직 물질적 속성으로 간주하기에 사물지배가 우리에게는 잘 인식되지 않는다.

 

자본주의의 목표는 즉각적이며 경쟁으로 돌진해 나가는 이윤이다. 이 이윤이 있는 곳에 대량의 페기물이 남는다. 그러나 자본은 이 폐기물에 관심이 없다. 수많은 붕괴, 잔해, 무용함이 자본에 의해 어떻게 생산되고 은폐되는지 사람들은 인식하지 못한다. 이러한 곳이 우리 삶의 토대를 형성하는 세계이다.

 


세 번째는 노동의 소진이다. 우리가 길을 걸으며 둘러보면 보이는 포석과 금속 대문, 플라스틱 창문 등은 석회공장, 크레인, 컴퓨터가 동원되었지만 인간의 손이 만들었다. 그러나 그것들에는 만든 인간 손의 흔적이 아니라 브랜드 명이 새겨져 있을 뿐이다. 사실 그것들은 많은 손들이 염세 세정제, 석회 먼지, 손목 터널 증후군에 시달린 흔적이다. 거리 하나하나는 인간 구성원들로 이루어진 네트워크를 가리킨다. 우리가 세상을 이렇게 만들었다, 계속해서 이렇게 만들어 나 갈 수 있다, 그러나 계속해서 이렇게 만들어 나갈 것인가? 우리의 많은 손들로 다르게 만들어 나갈 수도 있다.

 

그런데 우리는 임금 노동을 통해 작업대 주인에게 상품을 넘긴다. 임금 노동이 이루어지는 순간 우리는 자신의 활동성을 더 이상 통제하는 주체가 아니다. 생산 과정과 방식은 개인의 이성이나 본능으로 제어할 수 없는 오직 고용주인 자본의 주인이 소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상품은 구매자의 요구나 생산의 비전으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오직 이윤을 예측하는 회사의 투기가 상황을 통제하는 것이다. 보이지 않는 실들이 인간의 손을 노동력 착취에 연결시킨다. 인간은 섬세하게 분절된 마리오네트, 즉 사물이다. 해서 이윤은 이 사물의 삶과 죽음에 관심이 없으며, 단지 상품에만 관심이 있다. 우리는 이제 세상을 바라보는 눈을 잃어버렸다.

 

자기가 자신을 소유한다고 간주하는 법적 사실을 오늘 우리들은 의심하고 있지 않지만 노동자의 자기 소유권은 실은 분열되어 있다. 고용계약이 체결되는 한 순간에만 존재하는 자기 소유권은 이내 상품화된 노동자의 시간이 고용주의 소유로 넘어간다. 임금 노동이란 오직 고용주를 누구로 선택하는 가의 문제 이외에는 다른 선택권은 존재하지 않는 자유이다. 실제로 현대 사회는 자본가에게만 온전히 자기 소유권을 부여하는 세계이다. 이러한 인간 상품화의 논리가 내면화된 것은 21세기 자본주의가 갑자기 발명한 것이 아니다. 우리가 근대라 부르는 16세기부터 시작되어 인간 모두에게 스며들어 본래부터 존재했던 당연한 것으로 인식된 것이다.

 

정신과 신체의 이원론을 주장한 데카르트를 근대사상의 시조로 받들며, 너도나도 그의 방법서설을 뒤적이지만 은폐된 것을 읽지 못한다. 그는 귀족과 부르주아 계급의 사유재산구조의 합리적 타당성을 옹호하는 이론을 제시하기 위해 총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그 시대를 지배하던 우주전체가 인간의 몸에 반영되어 있다는 중세 세계관은 방해가 되었으며, 이를 깨부수어야만 했다. 신체는 무생적이라는 사물 지배의 도그마를 정당화하기 위해서는 기존 인식을 부수는 것이어야 함을 그는 알아차렸던 것이다. 데카르트는 영혼이 있을 수 없는 동물을 비롯한 신체는 고통을 느끼지 못하여야만 했으며, 해부학을 신설하고 해부극장을 열어 관객들 앞에서 시체를 파헤치며 몸을 소유하듯 구경거리로 삼았다. 자본주의의 핵심인 사유재산이라는 추동력은 이렇게 세상 모든 존재의 사물화를 전시하는 것으로 시작했다. 이런 의미에서 데카르트가 자본주의 기원을 열었다고 거칠게 주장해도 될 것이다.

 

사유재산의 형태를 갖추지 못할 것은 우주 자연에 존재하지 않게 되었으니, 이제 가치 추출 기계만 작동하면 되었다, 가치 있는 것과 폐기물 분리의 상품화, 다시 말해 가치창출의 개념은 이렇게 모든 인간의 삶에 주입되었다. 가부장제와 물질지배의 상품화는 여성 노동의 실재성을 은폐하였는데, 여성을 가부장의 소유물로 만듦으로써 돌봄을 여성의 성취가 아니라 타고난 본성으로 취급하는 터무니없는 언어의 정당화가 가능했다. 노동력의 활동성과 에너지의 충전을 위한 출산과 육아, 교육을 비롯한 제반 돌봄의 노동력을 자본은 공짜로 이용할 수 있게 되었다. 자본은 이러한 노동력 착취의 토대에 서 있다.

 

이 모든 것은 환상 소유라는 현대 자본주의 핵심 정체성과 맞닿아 있다. 이 환상소유는 모든 인간에게 뿌리깊게 내면화되어 있는데, 마땅히 거기 있어야 할 물질 자원으로 취급되는 것의 존재를 남겨두는 것이다, 이로부터 계급 분열의 이익인 우월주의라는 환상 소유가 작동한다. 정규직 노동자의 비정규직 노동자의 차별, 아파트 주민의 경비원을 향한 폭언과 폭력, 권력자의 실업자에 대한 모멸의 발언이 가능한 것은 바로 이로부터이다.

 

이것은 파쇼나 우익의 계급정치에 약탈의 역학을 조장하고 착취와 자본 종속의 논리를 강화한다. 이렇게 해서 하층 계급의 노동력은 항상 환상소유로 남아있게 된다. 이를 위해 교활한 관료주의는 사회법적 연대를 이용하는 사람들을 압박하며 그들에게 주어지는 혜택을 축소하거나 박탈해버리며, 윽박지른다. 실업 수당을 받는데 브랜드 옷을 입고 창구에 나타나다니!, 게으른 자들!, 사회적 기생충들!”, “너 스스로 책임져라!”라며 각자도생의 악을 질러댄다. 그럼으로써 환상소유의 대상을 항구적으로 남겨두어 멍청한 우월감을 지속시키려 한다. 폐기(廢棄)하면 그뿐이다, 상품의 논리다. 폐기하는 데는 돈이 들지 않는 까닭이다.

 

삶의 형식을 지배하는 네 번째의 범주는 생명을 파괴하다이다. 대기 오염의 71퍼센트는 100개 기업에 책임이 있으며, 세계 인구의 가장 부유한 10퍼센트가 전체 탄소 배출의 절반을 배출한다고 한다. 이렇게 자본주의는 삶과 삶의 토대를 소진시킨다. 사유 재산은 무자비한 횡포를 부릴 수 있는 울타리를 세우고, 상품화는 자본을 풍요롭게 만들지만 독과 폐가스를 사방으로 흩뿌린다. 노동 또한 그 자체로도 소진되며, 우리는 전부 이처럼 지구 황폐화 속에 얽매여 있다. 실제적인 사물지배로서 자본주의는 우리 삶의 형식이 되었다. 우리에게 다른 형식의 삶은 없다. 아직 없다!

 

저자는 공공의 관심사에 신경쓰지 않은 내면의 기원을 고대 기독교의 자기 영혼 구제에만 관심을 기울여왔던 자기 보전의 이기심에서 찾고 있지만, 구태여 수천 년을 거슬러 올라갈 필요는 없다, 그저 400년 전 16세기 근대 초기의 데카르트의 사유재산 정당화 논리로도 충분할 것이다. 사유재산의 정당화는 절대적 사물지배의 논리를 출현시켰고, 이는 삶의 전체적 맥락에 대한 감각을 배제하고 나만의 세계인 자기 재산에만 관심을 갖도록 가르쳐왔기 때문이다. 오늘 대다수의 사람들은 명확하게 정의된 영역에서 의지를 집중하고 그 안에서 자신이 원하는 것을 하도록 훈육되고 성장한다. 결국 울타리 너머의 세계는 자신의 일이 아니다. 오로지 나! ! ! 만을 외치게 한다.” 그런데 세상이 이런 식으로 흐르고 있을까?

 

청년들이 작동되어야할 공권력의 치안 외면 속에서 무수히 죽어갔을 때에도, 호우와 같은 재난으로 인한 인명의 희생에도 아무런 감정을 느끼지 못하고 그저 순간의 호기심 충족 소재로 받아들이는 불감증, 공감 부재는 자본주의 속성 자체가 내재하는 사유재산과 분리의 정체성에 근인(根因)하는 것일 게다. 성공한 상품이라는 가치를 지니지 못한 것, 사유재산이 아닌 것은 폐기물이며, 배기가스이고, 버려지는 포장재일 뿐, 상품에서 분리된 모든 것은 무효로 선언된다. 자본주의는 이렇게 손실을 고려하지 않기에 이윤을 창출할 수 있다. 오늘을 사는 세계의 사람들은 이렇게 삶의 토대를 회복할 수 없는 상실감에서 허우적거리게 되었다. 저자는 이에 대해 어떠한 비관도 낙관도 하지 않으며 다만 이렇게 말할 뿐이다. 상상할 수 있는 가장 큰 상실(인류의 종말)은 우리에게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그저 계속 살아간다. (...) 우리는 자신을 하나의 물건으로 여기고, 작은 땅 한 평의 무제한 처분으로 자유를 측정한다.”.

 

책은 5<혁명>을 정점으로 이러한 삶의 형식과 삶의 토대를 다르게 할 수 있음을 그 실천의 역사와 방식들, 사유들을 논의한다. 그것은 더 이상은 안 된다(Ni una mas)’는 하나의 문장이 대변한다. 가부장제, 신자유주의, 수탈주의, 식민주의 질서의 무력화를 향한 저항이요, 다르게 살기의 시작이다. 우리의 삶의 형식이 된 자본주의 형식은 피로와 모멸감, 생태계의 파괴로 빚어지는 바이러스의 창궐이요, 거주지역의 침수며, 탄소가스와 플라스틱 알갱이로 그득한 지구이다. 그래도 우리는 살아 갈 것이지만, 악화된 삶의 토대에서 일 것이다. 미래의 후손들은 종말이 다가온 불가항력의 세계와 마주할 것이다. 그래도 지구는 남아 있을 것이다. 그러면 괜찮은 건가?

 

착취가 아니라 공유하는 것,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울타리를 개방하는 것, 훨씬 더 멋있는 자유를 향한 연대의 약속, 서로 반영되는 욕구의 무한한 상호성의 세계로 나아가는 다른 방식이 있음을 가리키고 있다. 인간 삶이 속해 있는 세계 자연은 모두의 공유임을 인식하는 길을 향해 작은 한 걸음을 내딛기 위한 설득의 변들이 쉼 없이 지면을 채우고 있다. 어쩌면 이 파괴적인 자본주의라는 삶의 형식의 무수한 위기들을 읽으며, 우리는 파괴적이지 않은 다른 세계관을 받아들이기 위한 스스로의 시작점을 이 책에서 찾거나 영감을 얻어 창조해 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우리들의 손으로 이런 세상을 만들어냈으니, 이것을 다르게 변화시키는 것도 할 수 있을지 모를 일이지만 어쨌든 또 다른 400년을 위한 작은 변화의 행보를 시작 할 수 있을 것이다. 정말 우울하고도 끔찍한 현실 세계의 날카로운 비판서이지만 사랑과 용기를 주는 진지한 비전의 글이기도 하다. 새로운 세계를 향해 부활한 카산드라, 에마의 인류에게 보내는 사랑의 선언이며, 또 하나의 위대한 걸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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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편엽서
안느 브레스트 지음, 이수진 옮김 / 사유와공감 / 202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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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계통수에는 소화되지 못하고 우리가 계속해서 부담을 벗으려고 

노력하는 정신적 충격의 장소가 있다.” 

- 알레한드로 호도로프스키(Alejandro Jodorowsky;1919~ )


우리들은 이야기를 왜 읽는가? 스토리 컨설턴트인 리사 크론(Lisa Cron)’Wired for Story에서 소설을 읽는 것은 힘겨운 현실로부터 이야기 속으로 도피하려는 것이 아니라 현실을 탐색하기 위해 읽는다.’고 말했다. 이 말을 뜬금없이 서두에 하는 것은 안느 브레스트의 소설 우편엽서야 말로 우리가 발을 딛고 살아가는 이 현실사회가 인간 삶의 역사에 어떻게 작동하는가를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야’, 라거나 그럴 줄 몰랐어.’와 같은 세상에서 벌어지는 일이 자신과는 무관하다는 외면의 무지이거나 방관적 협조이다. 소설은 프랑스에 동화하려는 한 유대인 가족의 낙관적 욕망이 실제를 보지 못하게 됨으로써 초래된 가혹한 참상을 통해 인간 보편의 정서를 성찰하게 한다.

 

이 소설이 끝나는 후기 속에서 작가 안느는 이 책은 어머니의 조사(調査)와 글쓰기가 없었다면 쓰이지 못했을 겁니다.”라고 밝히고 있듯, 이 작품은 자전적이고 실화적인 20세기 일백년을 가로지르는 한 가문의 가족사라 할 수도 있다. 또한 이처럼 기록과 조사라는 사실성을 표면에 드러내지 않으면서도, 객관적 진실을 말하고 있음을 말하지 않으면서 말하는 독특한 방법을 읽을 수 있다. 때문에 소설에는 잘 알려진 문학과 예술인들의 글들과 기록된 사실로서의 이야기들이 양념처럼 이야기 속에 등장하여 역사적 상황을 입증하기도 한다.

 

이를테면 악착스러울 정도로 반()유대주의의 선봉에 섰던, 제멜바이스로 잘 알려진 루이 페르디낭 셀린 유대인은 85%의 찌꺼기와 15%의 빈 공간으로 이루어져 있다.”라던가, 그 아둔한 유대인 놈이 누구(프로이트를 지칭)였는지 기억도 안 나지만...똥을 싸질러 놓았다.”며 상식을 벗어난 궤변으로 유대인종을 비방하는 글을 썼음을 드러냄으로써 당대(1930년대) 프랑스 내 유대인들의 입지가 좁아지는 분위기를 전하기도 하고, Suite Francaise(프랑스 조곡)의 작가 이렌 네미롭스키가 아우슈비츠로 끌려가는 수용소의 이송 동선으로 소설 속 유대인 가족인 노에미와 자크의 가스실 죽음의 여정을 겹치도록 해서 사실로서의 역사성을 부각하기도 한다.

 

그런가하면 시인 르네 샤르의 레지스탕스로서의 적극적 저항 행위 속에서 독일 협력의 방관적 협조자였던 자연 예찬의 작가 장 지오노의 집 대문을 폭발시키는 일화가 그려지는가 하면, 그의 연인과 자손들이 라비노비치가() 생존자(미리얌-화자의 할머니)의 후손인 화자()와 연결됨으로써 프랑스 지성사적 인물들의 윤리적 현재성을 암시하기도 한다. 특히, 할아버지인 빈센트의 어머니와 변기(작품명 (Fountain))로 현대예술의 미에 대한 의문을 던졌던 '마르셀 뒤샹'의 내밀한 관계를 통해 레지스탕스 자금지원의 사실도 표면화하고 있다.

 


이야기는 표제처럼 익명의 우편엽서로부터 시작된다. 1942년 아우슈비츠에서 사망한 에브라임 라비노비치의 가족 네 명의 이름만이 적힌 엽서가 61년이 지난 2003년 화자의 어머니인 렐리아의 집에 배달된 것이다. 화자인 렐리아의 딸인 안(안느)은 자신을 뿌리까지 프랑스인이라 생각하는 유대인 여성이다. 그녀는 자신이 프랑스 사회에 완벽하게 동화(同化)된 성공한 프랑스 중산층 부르주아 계층이라 생각하는데 익숙하다. 굳이 유대인이라는 인종적 범주를 상기할 이유가 없으며, 살아가는 데 어떠한 불편도 없다고 느낀다. 엽서는 곧 망각 속으로 사라진다. 그런데 이러한 생각은 실제 일상에서 균열과 충동을 일으킨다.

 

소설은 총 443장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1장은 너무도 읽기가 고통스러운 장이다. 에브라임 라비노비치, 즉 화자의 증조부를 중심으로 그의 연애사로부터 시작해서 출생지인 러시아를 떠나 리투아니아를 거쳐 프랑스로 이주해 자신과 자식들이 유대인으로서가 아니라 서구의 찬란한 자유의 빛을 마음껏 쬐며 성장하는 삶을 꿈꾼다. 적극적인 프랑스 국민이 되기 위한 몸부림에도 불구하고 프랑스는 그의 귀화 신청을 거부한다. 프랑스 공적 사회는 그(유대인)를 향해 수많은 부정적 신호를 보낸다. 주변의 소리들은 유대인 축출의 분위기를 전하고 있음에도 그는 별거 아닌 호들갑으로 들리고, 자식들인 노에미와 자크가 학교에서 따돌림을 당하고, 유대인을 모욕하는 행위로 고통받고 있음에도, 이 모든 건 파리로 쳐들어 온 독일 출신 유대인들 때문이야. 프랑스가 침범 당했다고 느낀 거지, 그래. 그게 맞아.”라고 자신에게 닥친 위기를 타자의 탓으로 돌림으로써 자기 몽매함을 부인하고 나아가 정당화한다.

 

이러한 분위기를 에브라임은 고작 앞으로는 조용히 사는 게 좋겠어.”를 삶의 답변으로 내놓는다. 파리의 집을 피해, 별장으로 사용하던 포르주의 작은 마을로 거처를 옯긴다. 19393월 독일이 체코를 침공하고, 194010월 폴란드를 침공하며, 친독 정부 비시정부가 제정한 유대인 신분법에 의해, 도청에 유대인 등록을 하면서도, 기만적인 독일의 노동자 구인 포스터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기까지 한다.

 

안 될 이유도 없지, 프랑스를 위해 우리가 몇 달 독일에서 일하는 게 귀화에 도움에 될지도 모르잖아? 우리의 노력,(...) 선의를 증명할 수 있을 거야.” 자기 욕망에 눈멀어 사실을 가리게 만들었을 때, 그것이 무얼 의미하는지 그는 알지 못했던 것인데, 현실을 부정함으로써 자신에게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거라는 믿음은 비참한 결과, 즉 자신의 아이들과 아내와 자신의 참혹한 죽음으로 뒤바뀐다. 안타까움과 미련할 만큼 우매한 한 인간의 동화의 열정이 죽음으로 대답하는 여정을 읽는 것은 정말 힘겨운 일이었음을 고백한다.

 

이로서 소설의 중요한 탐색 중 하나가 끝났던 것 같다. ‘나와는 무관한 일이야. 그런 정치적 일들은 나와 내 가족의 일상과는 관련이 없어.’, 과연 정치적 행위가 그 사회의 일원과 관련이 없을 수 있을까? 이 물음이 곧 답변이 될 것 같다. 안타까움과 미련할 만큼 어리석은 한 인간의 동화의 열정이 죽음으로 대답하는 여정을 읽는 것은 정말 힘겨운 일이었음을 고백한다. 이로서 소설의 중요한 탐색 중 하나가 끝났던 것 같다.

 

그리곤 두 번째 탐색에 몰입했는데, 그것은 역사의 기억으로부터 아무런 경험도 도출해내지 못하는 무능력의 문제일 것이다. 1925, 1950, 1985, 그리고 현재에 지속되는 유대인을 향한 동일한 의미를 지닌 행위와 언어의 위협과 폭력이다. ‘더러운 유대인이라며 날아오는 돌멩이들이고, 집 담 벽에 그려진 나치문양이며, 우리 집에서는 유대인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무심한 배타적 언어이다.

 

한편으론 독일 점령기간 중 일어난 부역과 밀고, 무관심의 양상들이 레지스탕스의 활동과 대비되어 인간들의 혐오스러운 광기들이 열거된다. 비시 정권이 독일군에 보내기 위해 프랑스 청년들을 비롯한 건강한 남자들을 강제 동원하려 할 때, 이에 저항하는 이들과 이에 동조하는 사람들을 조장하고는 함정으로 유인해 독일군에 넘겨 돈을 버는 민족 배신자들과 밀고자들, 그리고 철저한 무관심으로 사실을 외면함으로써 독일에 동조하는 신호를 보냈던 사람들을 펼쳐 놓는다.

 

이러한 이야기들은 전쟁과 점령 기간이 지나고 해방된 1945년 이후의 프랑스 사회의 책임 회피와 사실의 부인이라는 행위로 죽은 자들이 1996년에 이를 때까지 부정되어 왔음을 지적하고 있다. 무관심 그것은 또 다른 형태의 협력이 아닌가요?”, 역사적 사실로부터 배우는 것이 없을 때, 이 무관심은 다시금 부정의 화살이 되어 되돌아온다. 오늘에도 여전히 반유대주의 정서는 사그라들 줄 모르고, 이젠 자신에게는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을거라 믿는 현실 부정은 얼마나 위험천만한 인식인지를 깨워댄다. 불행의 역사가 반복되는 건 이런 어리석은 믿음과 눈 먼 욕망 때문이다. 한국의 역사에서 반복되는 외세의 반복되는 침략에 거듭 무력하게 굴복하는 상황들도 이것과 결코 다른 것이 아닐 것이다.

 


소설의 중심에는 물론 유대인이라는 정체성 문제에 대한 고뇌어린 사유가 저변을 이루고 있다. 하지만 이는 한 인종이라는 개별성으로 이해되기보다는 인간에 대한 보편적 차별에 내재한 의식의 문제이기도 하다. 내밀하고 굴절된 타자에 대한 혐오의 감정은 마치 은밀한 성적욕망과 닮아있는 모양이다. 그래서 스티븐 소더버그감독의 영화 <섹스, 거짓말, 그리고 비디오테이프>아트 슈피겔만: 한 생존자의 이야기를 읽으며 정서적 유사성으로 화자인 안에게 떠오르기도 한다.

 

소설에는 아주 적절한 비유의 이야기가 나오는데, 안은 자신으로부터 거슬러 올라가는 조상들의 계통수를 그리게 되는데, 그녀의 그림에는 불가피하게 아우슈비츠라는 마을이 자주 등장하게 된다. 증조부모 에브라임과 엠마가 그렇고, 스페인계 프랑스인과 결혼함으로써 유일하게 생존하게 된 할머니 미리얌을 제외한 그녀의 동생들인 노에미와 자크, 증조부모의 형제들, 외조부모와 그 후손들이 아우슈비츠를 비롯해 트로스티네츠 절멸 수용소등이 등장하는 것이다. 조상들의 계통수를 그려 제출하라는 과제를 본 학교 선생이 이후 다정함과 애정이란 애초에 없었다는 듯 어린 안에게 멸시를 보내는 것으로 현실의 상황을 애처롭게 보여주고 있다.

 

유대인이라는 단어에 은닉된 비밀스럽고 미스터리한 의미들, 이 끊임없이 따라다니는 낙인찍힌 정체성을 안은 이렇게 묘사한다. 마치 피부 아래에 있는 또 다른 피부 같아, 우리 이전에 존재했고, 우리를 초월하는, 우리보다 더 큰 역사의 피부라고. 안은 신분증을 포함한 지갑 일체를 잃어버려 재발급을 신청하려 했을 때, 프랑스인임을 스스로 증명할 수 있어야 한다고, 부모가 프랑스인인지를 증명 할 수 있어야 함을 요구했음을 쓰라리게 기억한다. 오늘의 프랑스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이다.

 

이 철저한 배제와 차별의 정서가 그들 사회에 동화하려는 이방인을 분리된 존재임을 각성시킨다. 만일 이러한 구별의 폭력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과연 이 고통스러운 동화의 문제가 이렇게 계속해서 제기될 수 있었을까를 생각게 된다. 그리고 안은 이러한 감정이 “1942년 프랑스에 살았던 유대인 에브라임과 그 가족들이 느꼈던 것과 다르지 않음을 상기한다. ‘나는 프랑스인이야, 내겐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을 거야.’, 그렇게 생각하고 안주하는 순간 그들은 죽음의 소각장에 이르렀음을.

 

이 소설을 읽는데 나는 여느 작품들과 달리 오랜 시간이 걸렸다. 이야기 중 에브라임 라비노비치 가족이 아우슈비츠로 끌려가기까지의 상황들과 그네들이 가스실에 밀려들어가 죽음에 이르는 기록의 여정을 읽는 데만 며칠이 걸렸기 때문인데, 안타까움과 이주와 탈출의 많은 시간을 허비하며, 자기 합리화라는 무지에 매몰되는 것이 미련해보였던 까닭이다. 정말 힘든 독서였다. 계속 읽어야 할지, 그만 두어야 할지, 읽어나가는 데 무수한 갈등을 겪었다. 결국 거대한 재앙으로서의 역사는 지속하여 증언되어야 한다는 것, 끊임없이 정의를 놓치는 단어에 의문을 제기하는 것이어야 한다는 것일 게다.

 

우리의 역사도 일제 부역자 처리를 제대로 해결하지 못한 과거를 안고 있다, 또한 이러한 경험으로부터 일정한 국민적 윤리기준을 만들어내지 못한 것이 오늘 터무니없는 정치적 술책의 출현까지 빚어내고 있는 현실이다. 그리고 이러한 현실을 만들어내는 근인(根因)에 역사적 무관심과 무지가 자리잡고 있음을 이 작품 또한 복기해내고 있다. 특히 나치의 선전부장 괴벨스의 유대인 혐오의 프로파간다나 수용소에서 발송된 친지들을 안심시키려는 내용들의 편지를 이용하여 잔혹성을 부인하는 역사 수정주의자들의 왜곡된 주장, 이를 여론으로 세뇌하려는 조작 행위는 사실 그 동기에서 아무런 차이가 없다. 여기에 가세한 담론 권력을 쥔 자들의 기회주의적 동조까지 우리들의 역사 인식을 방해하는 요소들이 그 어느 때 보다 극성인 지금이다.

 

이 소설은 자신의 부모와 동생들을 죽음으로부터 지켜내지 못한 화자의 할머니인 미리얌의 자기 생존을 위한 몸서리나는 일생을 추적하며, 역사의 기억을 자기 정체성 고유의 언어로 되새긴 기록물이라 해야 할 것 같다. 600쪽에 이르는 이야기의 분량만큼 다양한 감동의 언어로 가득 차 있다. 우편엽서에 적힌 네 사람의 이름은 기억을 잃지 말 것을 당부하는 일생을 자책감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했던 한 생존자의 마지막 메시지였음을 이해하게 된다.

 

다시 거듭 기술해본다. 역사를 기억하지 못하는 민족은 재앙의 역사를 반복하게 된다. 홀로코스트라는 광기의 역사는 그 동일성에도 불구하고 매양 빠져들게 한다. 아마 인간 본성의 근저를 지속하여 자극하는 본질적 물음이 도사리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 소설의 매혹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오늘의 현실에 여전히 작동하는 위선의 실체를 다시금 깨우고 있다는 점일 것이다. 해결되지 않는 것은 반복될 수밖에 없고 한 세대 혹은 몇 세대 이후의 후손 중의 누군가에게 도달하게 된다.”는 한 시인의 경고는 어쩌면 이 소설을 관통하는 하나의 문장이 될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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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도라 덩컨의 영혼의 몸짓 - 진정한 자유는 내 안에 있다 이다의 이유 8
이사도라 덩컨 지음, 서나연 옮김 / 이다북스 / 2022년 5월
평점 :
절판


 

미래의 무용은 인류 전체의 것이 되리라. (...)  

그녀는 여성의 자유를 춤출 것이다.  (...)  

미래의 무용가, 그녀가 온다.  

새로운 여성의 육체를 감싸는 자유로운 영혼이여.”

- 49, 50, 51쪽 발췌정리

 

한 인간이 시대정신이라 부르는 것, 세상이 너무도 자명하게 받아들이는 것을 돌파하고, 새로운 무엇을 사람들에게 인식시킨다는 것은 실로 어렵고 고통스러운 행보가 아닐 수 없다. 형식과 인위적 규칙들로 구성된 동작으로 표현되는 발레’, 춤을 추어, 이것의 기교를 세련되고 능숙하게 구현해야만 시대의 지성들에게 인정받는 세계에서, 알려진 적 없는 새로운 표현을 내밀며 이것이 진정한 춤이라고 선언 할 수 있다는 것은 단지 춤, 무용 예술의 혁명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바로 새로운 시대정신으로의 전환이라는 인간의 정신 혁명이라고까지 할 수 있을 터이다.

 

책은 이 새로운 정신, 새로운 표현을 세계에 실현하려는 한 인간의 힘의 의지’, 시대를 초월한 인류 예술을 향한 집념의 기록이라 할 것이다. 반감과 외면, 비난과 질시의 시선 속에서 인간사회의 그 오래된 믿음의 사슬을 끊어버리고 이것이 바로 지금 인간 정신의 올바른 반영이요!’ 라고 선언하는 것은 단지 용기를 뛰어넘는 것 정도가 아니다. 덩컨은 자신의 무용가로서의 사명을 말하는 가운데 내게는 의지가 있다.”고 천명한다. 이 의지는 인간 개체 안에 응축된 움직임이며, 춤은 이 의지의 자연스런 표현이라고 부연(敷衍)한다. 어쩌면 덩컨은 이 문장을 쓸 때 쇼펜하우어와 니체를 이미 체화하고 있었는지 모르겠다. 여기서 덩컨은 단지 춤추는 여성 무용수의 차원을 넘어선다.

 

덩컨의 야망은 미국의 정신을 담아낼 진정한 춤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여겼으며, 거대한 대륙을 개척하던 불굴의 용기, 하늘 높이 머리를 치켜들고 위대한 생명의 진동을 담아대는 아름다움과 힘의 춤을 꿈꾸었다. 덩컨에게 스커트와 타이츠 안에서 춤추는 일그러진 근육, 근육 안에 변형된 골격이라는 몸에 무리한 변형을 강요하는(39)” 발레, 여성의 몸을 옥죄는 기성의 규칙에 대한 혐오가 흐른다.

 

덩컨은 인간의 몸, 그 자연을 구속하는 감금과 위선의 표현은 예술의 퇴보이자 살아있는 죽음일 뿐이라 말한다. 자연의 본질과 조화하지 못하고 이를 파괴하는 경직된 육체를 해방시켜 유연성과 자유로운 영혼으로 회복시키는 것이 그녀의 소명이 된다. 그녀에게 자연을 닮은, 자유로운 영혼의 표현인 춤, 자연(自然)인 무용은 곧 코르셋과 구두로 변형되고 조여진 허위와 위선으로부터의 탈출, 여성과 인간 정신의 해방이다.

 

덩컨은 이러한 정신을 고대 그리스의 힘의 응축과 힘의 전개를 자연으로부터 재현한 조각들, 신전들, 화병의 그림들에서 발견한다. 그것은 바다의 물결과 바람의 흐름과 대지의 변화, 그리고 건축과 회화, 조각의 선 및 형태에 대한 인식을 반영한 인간의 몸짓, 즉 자연의 파동이다. 그녀는 대체 어떤 예술이 작품을 위해서 자연을 고치는가? 라고 묻는다. 시인도, 화가도, 조각가도, 극작가도 어느 누구도 자연을 고치지 않는다. 이것은 인위적으로 변형시킨 발레를 비롯한 왈츠, 마르주카, 미뉴에트 등 기성의 춤들에 대한 비판이다. 음악과 춤추는 인간의 기형적 어긋남, 퇴색한 감상주의, 비굴함과 답답함에 얽매인 표현으로부터의 자유를 추구하는 것이다.

​【사진: 덩컨은 머리를 뒤로 젖혀 하늘을 올려다보는 동작을 반복적으로설명한다. 생명의 고양감과 자연과 합일이라는 황홀경,힘에의 의지를 표현하는, 자연스럽게 육체를 통해 표현되는 최고의 춤 동작이었던 듯하다.189992번째 Street Performance의 한 장면

덩컨은 인간의 고유한 몸짓, 본성에 대응하는 자연 본질과의 조화를 위해 대지와 자신의 몸이 일체화되는 맨발의 춤을 춘다. 또한 춤은 육체인 자연의 동작이기에 당시 유행하던 화려한 의상은 고려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 가벼운 한 겹의 천이면 족한 것이다. 그녀는 쓴다. “2천 년간 감금된 예술에 자유를 돌려주려 애써왔다.(85)”.

 

한편 덩컨의 글에는 그녀의 정신에 깊게 스며든 바그너와 니체의 영향이 곳곳에 드러나는데, 특히 디오니소스 축제의 황홀경에 빠진 영혼을 반영하는 육체의 표현처럼 니체의 비극의 탄생은 제자들에 보내는 편지에서 주요 참조 문헌으로 거듭 숙독해야 할 지표로 당부하기까지 한다. 지상의 세계보다 더 높은 영혼의 고양(高揚)을 향한 염원으로서 춤을, 진정한 예술로서의 무용을 위해 일생을 바쳤던 숭고한 인간 정신의 진지한 술회를 읽는 것은 어떤 숙연한 존경과 인류애를 느끼게 한다.

 

덩컨의 글은 감정적으로 정제되어 있어 어떤 수다스러운 사적 감정의 표현이 지극히 절제되어 있어 그녀가 겪었던 삶의 고통을 제한적으로 느낄 수밖에 없다. 1913년 자신의 두 아이 디어드라와 패트릭을 자동차 추락사고로 잃는데, 아주 짧게 당시의 고통이 표현되고 있다. 두 아이를 잃은 이후로 내가 어떤 고통을 당했는지 아무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146)” 그것은 착란에 빠질 정도 억제할 수 없는 고통이었음을, 음악과 하나 된 영혼, 이로부터 탄생한 자신의 춤이 주는 위로를 제자들에게 말하는 글에서 흘리듯 언급할 뿐이다. 아이들의 아버지인 각기 다른 두 남자, 그리고 유일한 결혼 배우자였던 시인 예세닌의 자살 또한 그녀의 글에는 얼씬 거리지도 않는다. 다만 다음의 문장과 같이 지극히 담백한 언어로 순탄치 않았음을, 그녀의 조화에 대한 철학과 달리 불화하였음을 상상할 수 있을 뿐이다.

 

나는 평생 사랑과 예술만 알고 살아왔다. 그리고 종종 사랑은 예술을 파괴했다.

예술의 오만한 부름은 사랑에 비극적인 종지부를 찍곤 했다.

둘 사이에는 일치란 없으며, 끊임없는 전투만이 계속될 뿐이다.” -164

 

자연의 고유한 언어, 자연과 합치하는 내적 충동의 춤을, 그 자유의 몸짓을 추구했던 새로운 시대의 정신을 지펴냈던 한 인간의 기록에서 진정 아름다움이란 무엇인지, 기꺼이 인생을 바칠 삶에 대한 소명의식을 생각게 된다. 성숙한 인간으로서 스스로 의식하고 자각하는 아름다운 한 영혼의 응축된 의지를 거닐며  자유로운 춤, 그 숭고한 이상을 표현하는  동작을  그려본다. 아마도 책은 현대 무용을 기획하고 공연하는 이들에게 귀중한 사상적 바탕을 제공해 줄 것이겠지만, 나아가 시대정신을 깨부수고 과감히 새로운 세계를 창조하려는 모든 사람들에게 매혹적인 지표가 되어 줄 터이다. 진솔하고 아름다운 정신을 읽는 것은 항상 기쁨이다. 우리를 에워싼 지식의 질서를 깨부수자, 그때 비로소 새로운 세계의 가능성이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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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원전 (컬러 도판 양장본) - 역사의 목격자들이 직접 쓴 2,500년 현장의 기록들
존 캐리 엮음, 김기협 옮김 / 바다출판사 / 202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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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이 책의 성격을 규명하는 것으로 감상의 글을 시작해야겠다. 편저자(이하 저자라 표기함)존 캐리는 서문에서 해설의 덧칠이 없는 순수한 현장기록으로써 목격자가 기록한 것이어야 한다는 글의 선택기준에 따라 엮은 르포르타주 성격의 모음집임을 밝히고 있다. 즉 글의 현장성을 담보하는 한에서 생생한 현실의 사건으로 독자가 안내되기를 바랐던 모양이다.

 

그런데 저자 자신도 지적하고 있지만 현장성이 지닌 숨이 빠르고 주관적이고 불완전하기에 진실의 느낌을 준다는 유익이 있기도 하지만, 글의 정교함과 객관적 재현성의 불비라는 한계도 또한 지니고 있다. 이에대해 그는 무서운 현실, 뜻밖의 현실과 대면시키는 언어의 힘이라는 르포르타주의 성격이야말로 어떤 의도된 덧칠이 없어 진실에 가까운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진실의 규명과 관련해 제기될 수 있는 물음은 후일로 미루기로 한다.(책의 본질을 벗어난 얘기가 될 테니 말이다.)

 

한편 이 책의 한글 번역 제목이 왜 역사의 원전인가의 물음이다. 물론 2500년에 걸친 글들(르포르타주 성격)이다보니 당연히 연대기적 역사서의 모습을 하게 된 것인데, 이는 자칫 저자의 의도를 곡해할 수 있다는 점이다. 이는 역사의 주체가 되는 기록의 원형들이니 가능한 제목이긴 하지만, 181개 꼭지의 글들 개개의 문체가 지닌 개별성에 주목해서, 닳고 닳은 언어의 추상화를 이겨낸 기록자 개인의 경험으로 읽히기를 의도한 것이라는 측면에서 의도가 변질될 우려가 있다는 점을 지적하고 넘어가야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즉 여기에 수록된 글들은 어지러운 다양성을 정돈하기 위해 포괄적 용어들을 이용해 일반화하여 언어의 회색담요 밑으로 사실을 가리지 않은 기록들로 구성되었다는 점이기 때문이다. 저자도 밝히고 있듯 생명력 없는 객관성의 재현으로서의 역사 서술과 다른 글들이라는 것이다. 바로 내 눈으로 봤다!”는 글들이라는 점에 중점을 두고 읽어야 한다는 뜻이다. 따라서 우리 기병대가 적의 우익에 심대한 타격을 가했다.”라는 따위의 기록같지 않은 기록, ()살상의 구체적 표현을 철저히 피하는 이러한 완곡한 서술은 실제를 감출 필요가 있다고 판단하여 현실이 감추어져 있는 글로서 여기 수록된 기록들과 그 성격이 완연히 다르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1576114일 스페인군의 네덜란드 앤트워프 약탈 기록의 한 문장은 다음과 같다. 기록자인 영국 상인은 시체와 핏덩이로 엉망진창이 된 길거리의 추하고 더러움도 기록하지 않겠다. 매장하지 않는 시체가 썩어가면서 뿜는 독기가 공기에 가득 차 살아남은 자들을 괴롭히는 상황에 대해서도 불평하지 않겠다.”고 쓰고 있다. 기록하지 않겠다고 다짐하지만 그의 기록은 현재성과 구체성을 담고 있다. 열흘 넘게 지속된 도살장을 방불케 하는 앤트워프 시민들에 대한 무자비하고 무차별적 학살이 전달되고 있는 것이다. 이 글은 스페인의 만행을 제3국 이방인의 시선으로 기술하고 있으며, 어떤 황급함으로 인해 예리한 위기감을 주고 있지만 그만큼 현장성이 생동하고 있다. 이러한 글들이 대형판형인 이 책의 페이지들을 빼곡하게 채우고 있다,

 

끝으로 르포르타주가 지닌 선정성(煽情性)의 문제이다. 사실 선정성이라 표현하는 것이 적절한 수사인지는 모르겠다. 르포르타주란 인간이란 어떤 존재인가에 대한 생각을 불러일으키기 위한 호기심의 도구이다 보니 오늘날 우리네 뉴스 기사처럼 살인, 학살, 사고, 재해, 전쟁...등등 인간의 고통과 죽음이라는 주제를 피할 길이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마치 르포르타주가 죽음이라는 주제에 집착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는 점인데, 어쩌면 이조차도 인간 욕망의 본질이지 않을까라는 생각이다. 다른 사람들이 겪는 참혹하고 불쌍한 죽음이나 소외와 고통을 생생히 그려내는 것이 바로 사람들이 알고자 하는 것이라는 사실 그것인 까닭이기도 할 것이다.

 

저자는 이러한 내용을 봄(듣거나)으로써 사람들은 자신이 지금 겪지 않고 있다는 불멸의 안도감을 갖게 된다고 지적한다. 곧 이것은 일종의 종교와 같은 역할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르포르타주는 그래서 종교의 자연적 후계자라 불릴 수 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의미심장한 말이다. 저자의 말처럼 르포르타주에 열광하는 현대인의 심리 저류에는 진정 이러한 종교적 갈망이 흐르고 있는 것인가?

 


2500년 인간 역사의 르포르타주 성격의 기록들이 지닌 생명성과 선정성으로 인해 마치 살인 선집(殺人選集)”이 될 우려가 있어 이를 완화하려 의도했음에도 인간의 역사적 현장은 피로 얼룩진 것임을 회피할 수 없었다는 것이 진실일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181개의 기록들 중 3분의 2를 넘는 기록이 인간의 죽음과 관련된 기록들이다. 수많은 전쟁과 약탈, 각종 재난과 또 죽음과 살인, 비열한 학살과 보복으로서의 학살, 정치적 적에 대한 고문과 처형, 그리고 또 살인, 농민, 노동자 저항과 학살..., 사실 읽다보면 인간의 본성에 대한 물음을 피할 길이 없어진다. 그래 아예 인간 역사의 기록은 살인과 죽음의 기록이라고 해두자.

 

책을 처음 여는 기록이 BC 430년 투키디데스가 전하는 아테네를 강타한 역병의 모습이다. 대책없이 죽어가는, 즉은 사람들의 시체가 거리에 가득 차 있으며, 이로인해 법질서가 붕괴되고 매장 예법의 대혼란으로 절망에 빠진 아테네의 현실을 전하고 있다. 펠로폰네소스 전쟁이 시작될 무렵이니 이 기록은 오늘날 스파르타와 아테네의 전쟁 초기 상황이 아테네에 불리했음을 이해하는 하나의 중요 사건으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이어지는 기록은 BC 401년 그리스 용병 부대원으로 페르시아 정벌에 참전했다 패퇴하여 혈로를 찾아 헤매던 크세노폰(소크라테스의 변명>을 쓴 크세노폰 맞다)의 생생한 글이다. 설맹(雪盲)으로 시력을 잃은 병사들과 동상으로 발가락이 떨어져 나간 동료들을 버려두고 생존의 도주를 하는 한 인간의 혼돈의 걸음이 눈에 밟히는 것 같다. 굶주린 배를 채우기 위해 도주로에 발견된 마을을 불시에 덮치는 장면들...,2000년의 시간을 뛰어넘어 한 인간의 생존을 향한 의식에 여전히 공감할 수 있다는 사실에 그의 철학토론의 글들이 친근하게 여겨지기까지 한다.

 

읽다보면 역사의 반복되는 동일유사성이 저절로 느껴지는데, 12세기에 국왕 헨리와의 반목으로 처형되는 캔터베리 대주교 토머스 베게트의 살해 현장을 기록한 한 사제의 글은 16세기 크랜머 캔터베리 대주교의 처형으로 반복되는 수도사의 현장 기록으로 복사된 듯 출현하는데, 죽음에 처하는 두 사람의 대주교 모두 왕에 빌붙어 그 지원으로 대주교가 되자 왕과 대립하기 시작했다는 것까지 닮아있다. 야심을 위해 최고 권력의 심복처럼 굴다가, 척을 지는 것이 어찌 그렇게 동일한지 인간 욕망의 끝에 기다리는 것은 오직 비참한 죽음임을 후대에 알려주려 했던 것만 같다.(지금 한국 정치권력의 동일 유사함은 구태여 말하지 않으련다.)

 

농민과 노동자의 저항과 그 진압에 가해지는 권력의 잔악한 학살의 역사도 영국, 독일, 러시아, 프랑스 등 지역을 망라해서 수없이 똑같이 반복되고 있음을 마주하게 된다. 1851124일 나폴레옹의 파리 진압 현장을 쓴 빅토르 위고의 기록은 인간이란 종의 극악함의 극치를 보여주고 있다. 병력 16,400명이 파리에 집결해 눈 깜짝 할 사이에 하나의 도시를 도살장으로 변모시키는 지옥의 현장을 묘사하고 있다.

 

총소리 한 방을 신호로 하여 탄환의 소나기가 군중에게 쏟아지지 시작했다.(...) 파리 전체의 4분의 1이 날아다니는 탄환과 끔찍한 비명으로 가득 찼다 (...) 병사들은 아이를 끌어내 죽였다. 웃어대면서 아이의 상처를 칼로 벌려가며 구경했다. (...) 빈둥대다가는 이런 꼴을 당하는 거야. (...) 지하실에도 공기구멍으로 총을 쏘아댔다. 학살일 뿐이었다. 학살은 방사(放射)되어 나갔다. (...) 병사가 행인을 죽인다. 찔러라, 후려쳐라, 베어라! 광란의 살육이었다. (...) 이 범죄, 이 도살, 이 비극을 나는 목격했다.” - 빅토르 위고, <루이 나폴레옹 군대의 파리 진압, 1851.12.4.>

 

190519일의 상트페테르부르크 피의 일요일은 잘 알려진 역사이다. 기자가 쓴 르포르타주인데, 차르가 있는 겨울궁전을 향해 청원을 위해 평화행진을 하던 노동자와 그 가족 15만 명이 궁전 앞 광장에 이르자, 도열해 있던 병사들이 무차별 사격을 통해 거의 몰살시키다시피 한 대()유혈 사태의 현장 취재기록이 있는가하면, 191671, 1차 대전의 한 격전장이었던 솜 강() 전투의 부상자 구호소에 참여했던 한 신부의 참담한 기록도 있다. 하늘과 땅이 뒤집어지는 듯 광란의 시간이 시작되었다. (...) 부상자들은 문자 그대로 쌓아놓을 수밖에 없었다. 수술을 못 받아 죽는 자들이 부지기수다. (...) , 너무 피곤해서 더 쓰지 못하겠다. (...) 이제 전쟁의 흉측함을 좀 알 것 같다. 하루에 1,000명씩 중상자가 나오는 판에 (...) 시체가 산처럼 쌓인다.”

 

아주 눈에 띄는 기록이 있는데, 아돌프 히틀러를 직접 대면하고 들었던 이야기이기에 그 현장성이 주는 생동감이 높은 글이다. 1933227일 독일 의사당이 화재에 휩싸였는데, 이 날은 히틀러가 수상에 취임한지 한 달이 지난 시점이다. 화재 현장에 히틀러가 직접 나온 것이다. 외신기자인 영국인은 히틀러와 그 측근들의 무리를 따라 현장을 함께 둘러보고 있었다. 히틀러가 내게 돌아서며 말했다, ‘공산주의자들의 소행임을 하느님은 알고 있소, 당신은 독일 역사의 위대한 새 시대가 열리는 것을 보고 있소, 이 불이 그 시작이오.’” , 이 화재 사건은 히틀러 나치가 자신들의 정치적 반대를 탄압하고 독재 권력을 구축하기 위해 조직적으로 기획한 사건으로 추정되고 있다. 또한 화재현장을 관리하던 내무장관 괴링 대령에게는 하늘이 내린 계시오. (... ) 이 못된 해충들을 우리의 철권으로 박멸하는 데 아무 망설일 필요가 없소라고 주위사람들이 들으란 듯 정치적 적대자들을 숙청할 기회임을 시사한다.

 

폴란드 도시 오수비엔침 인근에 1940년 세워진 제1수용소가 아우슈비츠이고, 194110월에 추가로 세워진 제2수용소를 비르케나우라 부른다. 비르케나우에 SS(나치 친위대)가 직접 처형시설을 만들어, 시간당 1천명을 소각할 수 있는 거대한 지옥을 완성했다. 유대인 생존자의 증언 기록이다. 트럭이 서자 마치 감자나 석탄 짐 내릴 때처럼 짐칸을 기울여 올려 우리를 쏟아냈습니다. 샤워장 같이 보이는 방이었습니다. 조그만 창문에서 연기가 쏟아져 들어오는 것이 눈에 띄었습니다....”

 

출처폐허가 된 드레스덴 시가 전경첵 755


2차 대전 전쟁 기록과 함께 생체 실험의 역겹고 참혹한 실상의 기록이 구체적으로 기록되어 있다. 유대인이지만 프랑스에서 의학공부를 하고 외과의사 면허 소지자였던 기록자는 독일 의사들의 조수로써 해부 외과의로 생명을 유지할 수 있었다. 독일을 현대 의학의 선도자로 만들게 했던 사악한 각종 생체 실험들이 즐비하게 구체적으로 묘사되고 있다. 지독하게 잔인한 실험의 상세 기술 내용은 옮기지 않겠다. 인간 아닌 인간들, 이 모순어를 사용할 수밖에 없는 언어의 한계가 안타까울 따름이다. 1945214일 영국과 미군 폭격기에 의해 독일의 도시 드레스덴이 완전히 파괴되고 도시민이 몰살된 현장의 참혹한 기록은 시민들의 잘못된 국가 리더의 선택이 어떻게 자신들에게 돌아 오는지에 대한 냉혹한 반면교사일 것이다.

 

이 방대한 인류 역사의 현장을 기록한 글들을 읽다보면 과연 나는 이들과 얼마나 다른 존재인가를 다시금 생각게 된다. 아마 이러한 자기 성찰적 물음은 눈을 감을 때까지 반복해야 하는 것일 게다. 한국전쟁도 세 꼭지의 기록이 실려 있다. 그리고 1970년대의 한 사건으로 맺고 있다. 인류는 자신들의 문명을 으스대고 있지만, 여기 수록된 르포르타주들은 그 문명이란 것의 민낯이란 타인의 죽음을 딛고 선 것이라는 점을 부인할 수 없다고 증언하고 있는 것 같다. 그것도 살해와 학살이란 적나라한 언어로만 표현될 수 있는 것으로 말이다.

 

이집트 피라미드와 그리스 신전의 부조물에 이르기까지 각종 문화재의 약탈과 파손, 약소국의 노동력과 자원 약탈을 위한 무자비한 탄압과 광범위한 학살이 동반되는 현장의 기록들이 살해선집으로서의 오명을 피하기 위해 구성된 일견 낭만적이거나 새로운 문화적 이기의 현장 이야기들로도 좀처럼 완화되지 않는다. 아마도 이 책은 르포르타주, 즉 보도기획 기사를 작성해야 하는 사람이거나 소설문학을 창작하는 사람들에게는 문체기술에 대한 참조 도서가 될 수 있으리라. 또한 역사와 문화에 관심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원전(原典)을 참조하는 안내서로서 유용한 도서가 되어줄 수도 있을 것 같다. 인간들은 대체 2,500년간 무슨 짓을 한 것인가? 지금 이 문명이란 것은 대체 무엇을 품고 있는 것인가? 어쩌면 이 책은 인간 존재에 대한 지엄한 성찰을 촉구하는 메시지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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