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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스카사스의 혀를 빌려 고백하다
박설호 지음 / 울력 / 2008년 10월
평점 :
“당면한 문제점과 부딪칠 때 견지해야 할 사항이 저항의 지조라면,
미래의 먼 목표를 설정할 때 견지해야 할 사항은 꿈의 정서일 것입니다.”
『꿈과 저항을 위하여 - 에른스트 블로흐 읽기Ⅰ』, 박설호, 2011년, 울력刊
에른스트 블로흐를 읽다가 단 한 문장에 스치듯 지나가는 ‘라스카사스(Las Casas)'란 인물명이 내 마음을 떠나지 않았다. ‘인류의 명예, 그 자체’로 호명되는 인물에 대해 어째서 한국사회에는 전혀 알려져 있지 않을까? 하는 의구심에서 비롯된 것이다. 16세기 에스파냐가 서인도제도, 즉 오늘날의 중남미 대륙을 마구잡이로 정벌하던 식민주의 시대에 살았던 수도사다. 이 책 『라스카사스의 혀를 빌려 고백하다』는 한신大 박설호 교수가 2008년도에 바로 이 인물 일생의 언행을 모범삼아 한국사회 소시민들과 역사학도들이 들어주기를 바라면서 펴낸 정치와 문화를 아우르는 굳이 범주화 하자면 역사 에세이라 할 수 있겠다.
루터와 칼뱅 두 사람은 16세기 종교 개혁가로 교과서에 등장해 알려져 있다. 그런데 정작 진짜배기 종교개혁가인 ‘토마스 뮌터’와 ‘바르톨로메 라스카사스’는 배운 적도 없을 뿐 아니라, 그네들의 이렇다 할 저작도 번역 출간된 것이 없다 보니, 대체 이 사회는 내게 무얼 가르쳐 온 거지? 하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많은 저술을 남긴 라스카사스의 국역(國譯)물은 고작 ‘콜럼부스 항해록’이라는 무색무취한 책 하나다.
루터와 칼뱅은 체제 순응적이고 봉건적 계층 사회를 옹호하던 수구주의자들로서 종교개혁가라는 희한한 타이틀을 부여받아 진실 호도에 한 몫 한 자들이다. 루터는 1525년 <...쓰레기 같은 농민들에 반대하며>라는 하층민에 대한 악명 높은 발언을 담은 책을 발행하여 귀족과 성직자 계급의 이데올로기와 이익에 헌신한 지독한 보수주의자였다. 이 분파주의자가 교과서를 채우고 있는 반면에, 사상과 행동의 일치를 보여준 인물들로서 농민혁명을 주도하며 진정 교회의 개혁을 주창했던 토마스 뮌처는 한국의 교과서에 없다. 더구나 종교재판의 광기가 극에 달했던 시기에 현대의 종교적 관용을 선취했던 담대하게 변화의 기독교를 주창하고 실천했던 라스카사스를 한국의 학계에서조차 외면하고 있는 것은 정말이지 그악스러운 일이기도 하다.
반공주의 망령이 여전히 떠돌며 역사의 정의와 진실의 앎을 방해하려는 듯하다. 이 16세기 인물에 대해 에스파냐의 국수주의 역사가들을 비롯한 유럽중심주의 사가들의 음해론인 그가 알지도 못했던 먼 후대의 인물인 마르크스를 덧씌워 공산주의 괴물이라 비난한 것을 지식으로 삼아 서구가 은폐하려는 사고의 의지를 그대로 답습한 것이 작금의 한국 학계의 현실이라는 것이다. 라스카사스는 생의 전부를 신대륙 정벌의 현장과 유럽을 오가며 서인도제도에서 벌어지는 에스파냐 사람들의 잔혹한 인디언 착취와 학살을 금지할 것과 그네들의 문화에 대한 존중과 평화의 공존을 위해 일생을 바쳤던 수도사이며 주교였던 고귀한 개혁자였다.
이 책은 매우 알차게 구성되어 있는데, 라스카사스라는 인물과 그에게서 발견할 수 있는 교훈에서부터 이를 토대로 하여 오늘의 한국사회를 향한 저자의 목소리가 있으며, 신학자와 역사학자들에게는 낯설지 않은 유명한 1550년에 펼쳐졌던 ‘바야돌리드 논쟁’에 대한 주요 쟁점과 그 역사적이고 철학적이며 정치적이고 신학적인 의미를 다루고 있으며, 어쩌면 이 책의 발단이랄 수 있는 서인도제도에서 저질러졌던 인디언들에 대한 무차별 대학살을 현장에서 목격한 진술을 다룬 『인도 제국의 황폐화와 인구 섬멸에 관한 짧은 보고서』를 비롯한 라스카사스의 논설 몇 편을 포함해 보론으로 실려 있다. 문헌적으로도 국내에서는 귀한 책이다.
1. 라스카사스를 우리들은 오늘 왜 알아야 하는가?
수많은 역사의 기록들이 전해 오고, 또 그를 시대의 관점에서 재해석하여 기술하고 있지만, 그럼에도 또 그만큼의 역사가 가려져 있어 알려지지 못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아마 그렇게 은폐된 역사들은 그 역사 속에 포함된 사람들의 양심이나 이해와 충돌하기에 비난되거나 숨겨지고, 배제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라스카사스는 에스파냐의 소시민들과 수구 역사학자들에 의해 “조국의 경제를 망치는 매국노”라 매도되고, “둥지를 더럽히는 자”라며 자신들의 역사에서 지워버리고 싶어 하는 인물이다. 이에 가세하여 서구와 백인 중심적 사관을 지닌 미국의 우파 사회학자 엘프리드 크로스처럼 인디언 멸망은 살육으로 인한 것이 아니라 천연두에서 비롯되었고 에스파냐의 피 비린내 나는 정복의 역사를 희석시켜, 자신들의 식민주의와 제국주의, 그리고 패권주의의 야욕을 축소 은폐하거나 부정하려 한다.
라스카사스의 『인도 제국의 황폐화와 인구 섬멸에 관한 짧은 보고서』(1520년)는 황제 카를 5세의 알현을 기다리며, 서인도제도(신대륙)에서 벌어지는 온갖 살육 사건을 보고하기 위해 작성한 짤막한 문서이다. 인디언들의 무차별 학살을 막고, 그들의 노예화를 금지하며, 문화와 생명을 보호하기위한 노력이었다. 이 보고서는 “신대륙 개발의 역사를 끔찍한 착취와 살인의 역사로 규정”하고 “유럽 중심적 관점에서 나온 휴머니즘의 카테고리를 완전히 뛰어넘는” 보편적 인류 개념을 선언한 기록이다. 당대의 시각인 인디아언은 열등한 인종이므로 당연히 백인의 노예로 이용되는 도구이어야 한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노예이론에 대한 정면의 저항이랄 수 있다. 악명 높은 피차로, 코르테스, 나르바예즈, 알바라도 등의 에스파냐 정복자들을 위시한 추악한 가해자들은 이러한 논리에 의해 인디언 삶의 터전을 불법적으로 강탈하고 도륙하는 것이 정당화 되었다.
50년에 걸쳐 서인도제도와 에스파냐 등 유럽대륙을 오가며 에스파냐 정복자들의 신대륙에서의 참혹한 만행을 목격하고 그를 저지하기 위해, 또한 낯설고 이질적인 신대륙 사람들의 문화와 신앙에 대한 다름의 수용을 이해시키려 한 박애주의자이다. 또한 당대 기독교 독단주의의 관점을 뛰어넘은 다원주의 시각을 통해서 자신과 타인의 문화를 어떻게 수용해야 하는 지에 대한 세기를 앞선 탁월한 예지자이기도 했다. 그의 노력이 실천되던 이 50년의 세월이 지나면서 서인도제도에서 인디언을 발견하는 일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 될 만큼 그들은 멸종되었다. 2,000만 명으로 추산되는 이 참담한 인종학살의 역사가 부인됨으로써 인간들은 그로부터 아무것도 배우지 못하게 되었다. 이 앎의 회피와 양심에 대한 무감증은 오늘에도 계속되고 있는 인종 학살, 인종에 대한 편협한 차별과 배제로 인한 갈등과 전쟁의 역사를 보여준다.
타자에 대한 연민과 사랑, 평화와 공존을 위해 자기 삶의 전부를 투여했던 한 인물의 행적으로부터 여러 형태의 교훈을 이끌어 낼 수 있을 터이지만 아마 하나의 핵심적 질문을 할 수 있을 것 같다. 그것은 어째서 정의를 관철시키는 일은 그렇게 오랜 시간을 요하는가? 사람 죽이는 일은 눈 깜짝 할 사이에 자행되는 반면, 선의 실천은 그다지도 오랫동안 애면글면한 노력을 필요로 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아마도 간단히 ‘반동주의적 간섭’ 때문이라고 답할 수 있을 테지만, 남의 재물에 대한 질투, 경쟁심, 이기주의, 수구적 경제 실리주의, 소시민주의 등의 이유를 들이댈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이러한 이권에 대한 탐욕과 결탁한 세력들의 정의라는 도덕적 정서에 대한 반감이라는 오래된 인간의 심리 구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서구인들의 무의식과 의식적 사고와 행동을 오랫동안 좌우했던 폐쇄적인 구대륙에서의 기독교의 부패가 절정을 향하던 시대에 새로운 대륙과 전혀 이질적인 문화를 어떻게 이해되어야 하는지에 대한 지향을 제시하였다는 점에서 라스카사스는 재조명되고 그가 향하고자했던 인간애는 오늘 우리들에게 앎과 양심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깨우치게 한다.
2. 「서인도 제도의 일반적이고 자연적인 역사」와 바야돌리드 논쟁
「서인도 제도의 일반적이고 자연적인 역사」라는 간행물은 당대 정복자의 관점에서 써진, 즉 라스카사스의 인도적 조처에 대한 비난을 위한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실제 오늘날 에스파냐의 역사가들은 이 제국주의 정당화와 정복행위의 합리화로 가득한 일방적 거짓말의 책을 모범적 문헌으로 활용하고 있다. 이 유럽중심의 정통주의와 국수주의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않은 온갖 편견으로 채워진 책의 진술들이 오늘의 세계에 주류로 자리매김하고 있다는 것이 대체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이 불순한 책은 서인도 제도의 정복행위에서 단 하나의 원주민 살인과 강탈, 착취, 강간도 서술하지 않는다. 오직 인디언들의 희생제의를 야만성으로 부각하고, 그네들의 종교적 이단성을 문제 삼아 폭력과 전쟁의 대상이 되는 것은 당연한 에스파냐인의 권리라고 주장한다. 여기에는 정말 가소롭고 터무니없는 주장들이 난무하는데, 6세기 교황 그레고리우스가 세계 모든 곳에 구원의 신비를 내린다는 칙서를 공포했으므로 인디언들이 그 신성한 기독교 신앙을 모른다는 것은 망각했거나 파기한 것이므로 그들 신대륙의 원주민에게 폭력을 사용하는 것은 정당하다고 주장하기까지 한다.(유럽대륙의 어느 한 명이 했던 말을 15세기 말에 첫 조우를 했던 인간들이 대체 어떻게 안다는 말인가?) 사실 이러한 논의 가치조차 없는 말을 하려는 것이 아니라 바로 이 가당찮은 거짓말의 책이 서구 역사학자들의 모범적 문헌이라는 점이다. 온갖 편견을 침소봉대하여 자신들과 다른 사람들을 비인간적 야수로 몰아가기 위한 의도로 써진 것이 이 세계의 진실된 앎을 가리고 있다는 것 바로 그것이다.
신대륙에서 벌어진 모든 사건을 희생자의 관점에서 묘사한 라스카사스의 짧은 보고서의 대척점에 있는 금광 채굴제련소 감독관이 쓴 이 거짓으로 도배된 책은 정말 지독하게 극단적 간극을 보여준다. 에스파냐 사회의 모든 인간들은 자신들의 무주선점으로 인한 무한한 이익, 즉 무어인과 막 끝난 전쟁으로 피폐해져 파멸해가는 에스파냐 국가경제의 뜻밖의 젖줄이었으니, 설혹 알지 못하는 먼 대륙의 이질적 인간들의 희생은 아무것도 아니었기 때문인데, 라스카사스의 진실한 보고가 자신들의 이익을 방해하는 것으로 이해되는 관점 이상의 그 어떤 도덕적 성찰도 성가시고 불쾌한 것이었을 테다. 에스파냐인들은 자신들을 살인의 원흉으로 몰아넣는 진실에 심리적 거부감을 느꼈으며, 진실을 왜곡, 역사에서 지워버리는 과정을 택했다. 그리고는 라스카사스를 자신의 둥지에 침을 뱉는 정신병자, 미친개 취급을 했다. 실로 인간의 역사는 이런 것이다. 저자 박설호 교수는 이를 이렇게 쓰고 있다 . “역사적 죄악은 유감스럽게도 당대에 분명히 척결되거나 청산되지 않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우리와 무관해 보이는 역사적 사실에서 현대를 살아가는 어떤 가르침을 배워야 할 것입니다.”라고 불의한 역사의 진실을 반면교사로 삼아 하나의 경고로 이해하여야 한다고 말이다.
역사는 권력과 금력의 이데올로기 그리고 이로부터 파생되는 부당한 폭력이 주류의 질서가 되는 것을 수없이 보여준다. 그렇다고 이러한 불의한 현실을 마냥 팔짱끼고 수수방관하기만 했던 것은 아니다. 라스카사스와 같이 저항과 거역의 실천을 통해 시대를 살아가는 민초들의 근본적 자세가 어떠한 것이어야 하는지를 보여준다. 역사는 이러한 고결한 인물들의 끊임없는 출현으로 아주 더디게 선의 길을 조금씩 진척시키며 걸을 수 있게 된 것일 게다. 1550년에 두 차례 이뤄진 ‘바야돌리드 논쟁’은 카를 5세의 요청에 의한 황태자 필립2세의 명의로 1550년 4월~5월, 그리고 8월~9월 라스카사스와 세풀베다 두 사람이 각기 세 시간씩 자기 입장을 피력하는 식으로 전개되었다.
이 논쟁의 계기가 된 것은 황태자를 가르치던 권력을 늘 기웃거리며 기득권에 취해있던 세풀베다라는 신학자의 또 하나의 거짓말로 채워진 「인디언에 대항하는 정당한 전쟁의 이유」라는 신대륙 원주민 학살의 정당화를 주장하며 라스카사스를 비난하는 책이었다. 야만적 원주민들을 기독교로 개종시키기 위해서 무력 사용은 불가피한 신의 명령이라는 것이다. 특히 당국의 허락도 없이 터무니없고 이단적인 주장들로 채워진 책을 썼다고 라스카사스를 정면으로 반박하는 소책자까지 발행하기도 했다. 황실은 정치와 학문의 차원에서 극단적으로 대립하는 견해를 공적으로 조정할 필요성을 느꼈으며, 지배계층 역시 인디언 학살극에 대해 반신반의하는 태도였다는 것이다. 이것이 체제 옹호적 보수주의자인 어용학자 세풀베다와 힘없는 신부 박애주의자 라스카사스의 토론이 벌어진 배경이다.
세풀베다는 신대륙으로부터 이득을 얻는 자들의 입장을 대변하고 있었으며, 이 논쟁에는 뚜렷한 한계를 가지고 있었는데, 세풀베다는 서인도제도 현지의 그 어떤 상황도 경험한 적이 없었다는 것이며, 더욱이 인디언들이 어떤 품성의 존재인지, 그네들의 정신적 수용능력이나 문화의 양상에 대한 그 어떤 이해도 갖지 못했던 인물이라는 점이다. 때문에 이 논쟁은 대부분 기독교 교리의 타당한 적용에 대한 격론과 유럽이 아닌 새로운 지역에서의 기독교 선교 활동의 교리적 적법성의 문제라는 종교적 쟁점이 주가 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결국 세풀베다는 라스카사스를 이단으로 몰아 그를 죽음에 몰아넣고자하는 의도의 공격이요, 라스카사스는 이러한 함정을 피하면서 새로운 시대에 적절한 기독교 교리의 타당한 관점 변화를 지적하는 것이었다.
많은 논쟁의 쟁점 중 하나를 소개한다면 세풀베다는 아우구스티누스를 근거로 기독교 전파를 위해 필요한 것은 총과 칼이라는 폭력의 도구를 이용한 들어오라고 강요하기를 용인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라스카사스는 세풀베다의 인용이 잘못되었다고 지적하며 맥락을 무시하고 한 문장만을 빼서 마치 그것이 진실이라 말하는 것은 학자로서 하지 말아야 할 저열한 짓이라 지적하고, 아무런 조건 없이 지구상에 살고 있는 15세기까지 존재하는지도 알지 못했던 수많은 이교도들에게 막무가내로 적용할 수 없는 것이라고 반박한다. 선교의 원칙이란 인간과 시간, 장소를 초월한 보편타당한 원칙으로 확정 될 수 없는 것이고, 선교의 원칙은 언제든 변형 될 수 있는 것이며, 교회가 전쟁을 허용하는 것은 복음의 정신에 위배되는 것이라 선언하기도 한다. 신앙은 강요에 의해 전파될 수 없는 것이며, 기독교 교리를 따르지 않는다고 인간 법정에서 그들을 처벌하는 것은 인간의 권리가 아니라고 주장한다. 오로지 신에 의해서만 가능한 것이고, 때문에 이교도들의 ‘용서받을 수 있는 무지’를 용인해야 한다고 주장하기까지 한다. 아마 당대의 광기가 지배하던 기독교 세계에서는 위험천만한 발언이었을 것이다.
그는 새롭게 변화된 세계적 상황을 고려하면서 교회법이 새롭게 정립될 필요를 역설한 것이다. 파격이다. 유럽이라는 구체적 현실의 조건에서 적용되던 것으로 그 밖의 세계에 그것을 그대로 적용할 수 있겠는가라는 자기 인식과 반성의 필요를 역설한 것이다. 서구의 잣대로 동양을 제식으로 재단하는 오리엔탈리즘처럼 그 시선에 내재한 무한한 오류를 인식한 선취적인 지적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3. 결어; 라스카사스의 혀를 빌려 고백하다
우리 인류는 역사에서 아직도 무언가를 배우지 못하고 있다, 라스카사스를 읽는 이유는 에스파냐인들의 16세기 서인도제도에서 벌였던 만행을 일회적 사건으로 읽는 것에 있지 않다. 그의 저항과 투쟁이라는 일생의 행적을 통해 낯선 문화와 인간 사이의 침탈과 학대와 살해라는 범행의 기록을 역사의 상징적 범례로 이해하는 것이다. 이 지구상의 16세기에 발생한 대학살극은 외면되어왔으며, 인류는 정말 그로부터 아무것도 배우지 못했다. 아마 인간의 태생적 탐욕과 이기심이 가로 막은 탓일 게다.
이 책은 역사 연구란 무엇이어야 하는지를 제시하는 한 편의 지향일 것이다. 그 지향은 바로 ‘찾아서 얻어낸’ 지식이야말로 진정한 의미에서 진리를 포괄하는 역사임을 전하려는 의지일 것이다. 은폐된 16세기 서구 백인들의 이 야만의 역사는 아주 뚜렷한 문제를 드러낸다. 바로 앎과 양심이라는 복합적 문제이다. 이것은 라스카다스와 세풀베다의 역사적 논쟁이 시사하듯, “재화와 정의 사이의 문제이며, 이로움의 추구와 의로움의 추구 간의 대결이며, 경제적 실리와 도의적 명분의 싸움”이다. 새는 좌우의 날개로 난다. 무엇이 재화와 정의를 함께 날 수 없도록 인류의 비행을 방해하는 것일까라는 시대 모순을 지적하는 이 오래된 질문을 다시 자문하게 되는 것이다.
라스카사스의 혀를 빌린 박설호 교수는 말한다. 이 역사의 한 장면을 보며 우리가 인간임을 가장 부끄럽게 하는 것은 인디언들에게 가한 끔찍한 범죄를 교묘하게 은폐하려는 태도, 범죄를 은폐하려는 자세 속에 도사리고 있는 앎과 양심의 문제라는 것이다. 우리들은 자신의 잘못을 공개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다. 그 진실의 발설이 마치 자신의 모욕, 자기 존엄성을 해치는 것으로 이해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러한 자기 죄의 은폐가 21세기 오늘에도 우리의 정치 상황과 역사인식에서 아주 쉽사리 발견되는 이유일 것이다. 1923년 9월 관동대지진이 발생하자 일본 내무성은 조선인 폭도들의 짓이라 선동하여 6,000 여명의 조선인을 학살했다. 그때 일본인들의 구호는 “야만인 조센징(朝鮮人)을 절멸(絶滅)하라!”였다, 오늘의 일본 역사가들은 이 사건을 금기로 하며, 역사적 사실을 부인한다.
에스파냐의 역사가들도 자신들의 선조가 저지른 16세기 인류사의 가장 무참한 대량학살을 부인하기는 마찬가지다. 에스파냐의 역사학자 라몬 메넨데즈 피달은 「라스카사스 수사, 그 음험한 인간성」이라는 소책자를 펴내 터무니없는 음해로 가득 채워 역사를 노골적으로 부정한다. 부패한 민족주의와 국수주의가 인류가 배워야 할 진실을 집요하게 호도한다. 세계를 끝없이 음침한 불의의 세계에서 탈출하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것임을 알지 못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러한 다름에 대한 불관용과 적의가 사라지지 않고 반복하여 인류의 역사를 어지럽히는 것일 게다.
저자는 베르톨트 브레히트의 희곡 『상처 입은 소크라테스』를 인용하며 전장에서 비굴하게 도망치다 선인장 가시에 발이 찔려 주저앉게 됨으로써 우연히 전쟁 영웅이 된 주인공의 진실을 털어놓기로 결정하게 된 사연을 소개하고 있다. 앎과 양심의 역사적 중요성을 시사하는 것인데, “너의 죄, 혹은 비겁함을 은폐하지 말라!” 이 자발적 비판의 말이야말로 앎과 양심의 문제를 해결하는 핵심적 관건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궁극적 역사를 찾아서 얻어내게 하는 근본이유임”을 가르쳐준다. 라스카사스의 혀를 빌려 고백하는 주제는 무려 25가지 제언에 이른다. 이제 이 중 하나의 제안을 소개하는 것으로 잊혀진 역사 찾아 읽기의 감상을 마치련다.
얼마 전 작고하신 홍세화 선생의 『쎄느 강은 좌우를 나누고 한강은 남북을 가른다』라는 책의 인용 문장이다. 책은 프랑스 《르몽드》기자의 글을 재인용하고 있는데, “프랑스를 사랑한다는 것, 그 정체성을 쓰다듬는다는 것, 그 미래를 건설하는 것이 다만 잃어버린 위대한 과거를 돌이키는 것이 아니라, 그 이름으로 저질렀을 수 있는 잘못을 기억하는 것이다.”라는 문장이다. 남이 저지른 잘못은 심한 질책의 대상이 되지만 자신의 죄는 쉽사리 용서하는 인간 개인과 집단, 국가의 심리적 무능력을 지적하는 것이다. 이는 또한 피해자로서의 자기 권리를 찾는 것 보다 가해자로서 자기반성을 더욱 철저하게 행하여야 함을 일깨우는 말이기도 하다. 혹여 반복되는 죄악을 저지르며 더 이상 수치심을 느끼지 않기 위해 작동하는 습관화에 매몰된 마비 상태로 둔감해진 것이 아닌가를 수시로 경계하고 자기 성찰을 거듭해야 함에 대한 지적일 것이다.
눈앞의 이익, 권력과 인습, 여러 유형의 권위에 결탁하여 기회주의적이거나 소시민적 무사안일의 삶을 살고 있는 것은 아닌지, 정치와 경제라는 이데올로기에 순응하여 자기 독립성과 새로운 세계에 대한 전망을 잃은 것은 아닌지 돌아보아야 할 것이다. 금력과 권력의 묘약은 비판력을 순식간에 앗아가곤 한다. 다른 생각을 지닌 자들은 내쫓고 처단하며, “우리가 남이가”를 부르짖으며 당동벌이(黨同伐異)하는 파벌이 사회의 건강성을 얼마나 무참하게 파괴하는지를 지금 목격하고 있지 않은가? 이 수구 이데올로기에 사로잡혀 있는 자들의 세계가 역사의 진실을 왜곡하고 어둠으로 가린다. 요즈음 나는 기득권에 봉사하는 그 어떤 범주의 것이든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보게 되었다. 참됨과 새로움을 견지할 수 없게 하는 어둠의 그림자를 헤치고 숨겨진 진실의 장소를 찾는 일로부터 내 무지와 편협을 떨치기 위함이다.
“모르면서 중립을 취하는 자는 바보이며, 알면서 중립을 취하는 자는 배반자이다.”
-베르톨트 브레히트, 『갈릴레이의 삶』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