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주 트리플 28
김남숙 지음 / 자음과모음 / 202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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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된 세 편의 단편에서 시시하다라는 기분에 잠식된 인물들을 공히 만나게 되는데, 여기서 사용되는 의미는 아마 너무 익숙하고 뻔해 하찮게 여겨지는 기분이어서 하고자 하는 것도 별 신통함도 없다는 뜻으로 이해된다. 사실 대다수 사람들의 삶의 여정에 무어 그리 신통방통한 일이 비일비재하게 일어나겠는가. 어쩌다, 아니면 예기치 않게 정말 대단하고 기상천외한 일이 일어날 수도 있겠지만 거의 보잘 것 없는 일상의 연속 아닌가? 그런데, 순간 스치는 생각이 내게 이러한 시시함의 느낌을 경계하라고 일깨운다. 그 익숙해서 보잘 것 없음의 이면에 속살거리는 무수한 함의, 삶의 진실들이 있음을.

 


표제작 파주에서 일산 변방 논술학원에서 좆같은 맞춤법이나 알려주며 밥벌이하는 화자 윤정이 아이들의 평가하는 눈이 싫다고 할 때, 현철이란 인물은 이렇게 말한다. 미워하는 거보다 무서워하는 것 같은데요. (...) 너무 무서워 하다보면 그게 미워지는 거거든요.”라고, 어떤 감정이 오래 지속되면 결국 시시껍절하게 되고 만다는 말일 것이다. 현철은 윤정과 함께 살고 있는 정호란 인물에 의해 군 생활 내내 맨 날 뒈질 것 같은폭력과 괴롭힘을 당했던 인물이다. 현철은 정호에게 당한만큼 잔혹하게 복수하고 싶은 마음이었지만, 그 반복된 고통의 기억이라는 익숙함과 3년이라는 시간 속에 하찮음, 시시함으로 묻어두려 했지만, 그 시시해지는 감정을 떨쳐내고 복수(?), 사죄로서의 보상을 요구한다.

 

이와 달리 가해자인 정호는 이렇게 말한다. 지금 그게 언제 적이야.”라거나, 괴롭히는 축에도 못 끼었다.”고 말한다. 소설은 가해자의 기억과 피해자의 고통이라는 진부한 또 하나의 주제를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정호와 현철이란 인물들의 상황을 가까이에서 지켜보는 시선으로서 윤정이 느끼는 현철의 시시해 보일만큼 긴 미움에 대한 감응이다. 그래서 현철의 비열하고 역겨워도 보상 받고 싶다는 말을 윤정은 잘 헤아릴 수 있다. 정호는 자신이 현철에게 뭘 잘 못했는지 이해하지 못한다. 시시함 속에 하찮아진 것인데, 어쩌면 이 시시함이 함의하고 있는 오래시간의 축적, 익숙함이 가져온 둔감함에 묻혀버리는 생생한 미움의 감정을 망각한 까닭일 것이다. 화자 윤정은 소설의 마지막에서 이렇게 말한다. 내가 너무 시시해서 죽어버릴 수도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종종 한다.”. 변화없는 규칙적 단조로움이 가져온 익숙함에 매몰되어가는 자신에 대한 항변의 목소리처럼 여겨진다. 그런데 그녀는 왜 정호를 떠나지 않을까? 시시함을 자각하지 못하는 불감증 인간을. 내겐 풀지 못한 숙제로 남았다.

 

두 번째 작품인 그런 사람의 주인공 는 가벼워지기 위해 서울에서 3,870킬로 떨어진 후아힌의 락사수바 리조트에서 3개월 째 머물고 있다. 가벼워진다는 것은 무언가 삶의 무게로 짐 지워지는 것을 떨어내려 한다는 것인데, 사실 그 떨어낼 대상이란 것에 대한 몇 가지 정황이 발설되어 추정될 수는 있지만 그리 명확하지는 않다. 직장 상사인 유부남 K와의 관계가 가져온, 이를테면 유부남을 꼬신 어디서 굴러 들어온지 모르는 애, 다 알면서도 만난 어리석은 애, 머리채를 잡고 가기에 딱 좋은.”과 같은 시선이 가져온 고통인지, 아니면 7년 전 문화센터 소설수업을 맡았을 당시 선배와의 어떤 부적절한 사건인지 불확실하다. 다만, 이들 모두가 화자인 를 무겁게 하는 것임에는 분명하다.

 

7년 전, 소설 작품을 발표하기도 했던, 그러나 이후 쓰기를 멈춘 채 일반 사무직원으로 살아왔다. 그러다 K와의 관계가 가져온 상황으로부터 도피처럼 보이는 후아힌으로의 가벼움을 위한 떠남은 체류 3개월이 되던 어느 날 기억 속 멀리에서 유영하다가 곧 사라져도 무방한수강생의 연락을 받는다. ‘는 가벼움에 방해가 되는 기억의 무거움으로 거부감을 갖지만 후아힌에 1개월째 체류하고 있다는 남자와의 마주침을 불가피하게 피하지 못한다. 그는 7년 전 소설수업을 하던 선생님, 더구나 배우고 싶었던, 아끼고자 했던 선생이 아님을, 변화된 인간을 보게 되고, 그녀를 도우려 한다. 그것이 순수한 보호의 심정인지는 알 도리가 없지만 말이다.

 

어찌되었건 가벼움을 방해하는 남자의 불편함으로 는 후아힌을 떠나 돌아온다. 그리고는 친구의 권유에 따라 병원의 도움을 받는다. 치료법인 모양인데 나비와 꽃을 색칠하는 것이 나를 고쳐주었다고 하며, 그런 시시한 생각을 자주했다. 아주 가볍게라고, 삶을 무겁게 하던 것들로부터 벗어나고 있음을 시사하는데, 중요한 것을 놓쳤다. 제목인 그런 사람의 지칭된, 타인에게 인지된 변화된 범주로서의 인간, 그것의 인정이라는 것, 그대로의 수긍이라는 의미로 이해된다. 소설 제목에 답을 제시하고 있었던 것 같다. 바로 이 직시가 가벼움을 만들어 낸다. 그래서 화자는 이렇게 말하는 것일 게다. 다 잊고 새로운 껍질로 갈음한다는 것이 얼마나 편한 것인지를.”이라고. 변화된 자신, 바로 그 자체로서의 자신을 인정함으로써.

 

세 번째 작품 보통의 경우보통이라는 수식어처럼 이상도 이하도 아닌 지극한 다수성, 바꿔 말하면 이 또한 시시함에 대한 연속된 또 다른 이야기를 상상케 한다. 방송사 외주 사무실에서 구성작가로 일하는 막내사원 지수는 선배인 희진 언니가 직장을 떠나 환해서 눈이 멀 것 같은 곳, 토레스 델 파이네로 떠날 때, 머리카락이 거의 모두 빠져 모자를 벗을 때 가발이 함께 벗어지는 것을 보게 된다. 이때 희진은 지수에게 말한다. 이건 말하자면 비슷한 애들끼리의 결속 같은 거야라고. 비밀은 비슷한 애들끼리만 가능한 거라고.

 

지수는 소위 짬밥이 쌓이지 않은 막내 작가이기에 협찬 코너 원고를 쓰거나 온갖 잡다한 일을 버텨내야 한다. 그녀는 스트레스와 수면부족, 음식섭취로 축약되는 탈모의 원인들로 인해 정수리와 두피 부분이 미치도록 가려워 진물이 날 정도로 긁어댄다. 그리곤 이 증상을 언니가 말한 결속에 속하는 것은 아닐까하고 생각한다. 또한 긁어내지 않으면 죽을 것 같은 순간들이 (...) .매순간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고 버텨내야 하는 고통을 말하기도 한다. 아직도 대학 등록금 대부금을 갚기에는 20개월 남짓 남았기에, 물론 그것만이 이유는 아니겠지만 그녀는 버텨내느라 그 보상으로 인한 것인지 초고도비만과 고도비만 사이를 오락가락하며 뚱뚱해진다. 보복, 음식고문으로써.

 

지수는 밉보이지 않기 위해 융통성이라는 것을 보이지만, 그녀에게 관심을 가져주는 동료직원은 어디에도 없다. 그러던 중 한 신입 남자 피디가 건네는 말 한마디에 생각한다. 나의 다음을 궁금해 할까, 아니, 누군가는 나를 조금 궁금해 할까. (...) 내 이유에 대해서, 체념과 절망 사이, 꿈과 현실 사이를 오가는 가운데 그 익숙해지는 삶의 슬픔의 감정은 사실 꽤나 끈질긴 모양이다. 이윽고 프로그램 개편과 함께 그녀는 자신도 하나의 독자적인 방송을 맡기를 기대한다. 그러나 그 제안은 다이어트 프로그램의 실제 참여자가 되어 체중 감량의 출연자가 되는 것이고, 이후 결과에 따라 메인 작가로 발탁되기를 기대해야 한다는 조건이다. 그녀는 수락하고 직접 체중 감량의 실연자가 된다. 그녀의 유일한 대화 상대자가 되어주던 피디는 왜 그 작업을 수락했느냐고, 그냥 못한다고, 하기 싫다고 그러지 못했느냐고 묻는다. 그녀는 대답하지 못한다.

 

촬영 구성안이라는 허용된 말 속에 내가 진짜 하고 싶은 말을 숨겨 놓을 때만 작은 희열을 느꼈다.”, 한 협찬코너의 원고에 올 겨울은 어떨까요? 버티지 말고 나가 보세요.”라고 써 넣지만, 최종 방송분에는 버티지 말고 나가 보세요는 삭제되어버린다. 지수는 보통의 삶, 시시한 삶을 당분간 꾸려가기로 한 것일 게다. 시시함, 이 하찮고 보잘 것 없음의 단어에는 우리네 삶의 온갖 곡절이 숨어있는 듯하다. 익숙함이 가져오는 무감응이나 망각, 반면에 체념이나 그대로의 순응이 주는 안정감과 자기 보존의 의식처럼 우리가 살아가는 어떤 지혜가 버무려진 언어, 삶이 농축인 것만 같다. 왠지 시시하기 그지없는 내 삶을 긍정할 수 있는 시간이 된 것 같은 평온을 느끼게 된다. 김남숙 작가의 앞선 소설집 아이젠을 읽어보고 싶어진다. 알고 싶은 또 한 사람의 작가를 발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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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지와 운명 1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51
카를로스 푸엔테스 지음, 김현철 옮김 / 민음사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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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은 의지와 운명1,2권  통합 감상입니다.


막스는 운명을 만들어 내기 위해 의지와 운명이 자유롭게 놀 수 있도록 방치했어...

그렇다면, 선생님, 필연은요. 그 빌어먹을 필연은요? 필연이 없는 의지나 운명이 있을 수 있단 말입니까?“ (206)

 

소설은 오늘을 구성하는 멕시코의 현대사를 관류하며 형제의 의지와 운명이라는 부조리한 삶의 형식인 시간의 악을 드러내고, 그 악의 형상이 어떻게 오늘의 인간문화에 깊숙이 불가항력적 힘이 될 수밖에 없는지를 가히 신화적으로 묘파(描破)해내고 있다. 그것은 이렇게 시작한다. 나는 잘린 머리다.“, 이 이야기의 종국이 비극임을 전제하는 이 문장은 비장(悲壯)하게 다가온다. (註: 카스토르와 폴룩스, 카인과 아벨, 이들 신화와 성경 속 인물과 소설 속  여호수아와 예리고를 읽으면 더욱 풍부한 얘기로 읽을 수 있다.)

 

태평양 연안 게레로 주 연안, 바닷가에 야자열매처럼 버려져 모래밭에 뇌수가 흘러내리는 몸통을 잃은 머리통이 자신의 짧은 삶의 여정과 시대의 역사를 술회한다. 그런데 이렇게 잘린 자신의 머리통이 멕시코에서 천 번째임을 밝히는 통계 숫자는 그 사회가 만연한 범죄의 장소임을, 뿌리 깊게 부패한 곳임을 천명하는 것이다. 술회하는 머리통, 화자는 여호수아 나달이라는 스물일곱 살 젊은이다.

 

연안 모래밭에 나뒹구는 잘린 머리통, 여호수아는 자기 삶의 여정을 소년시절부터 거슬러 술회하기 시작한다. 코주부로 놀림 받던 어느 날, 에롤이라는 동급생 불량소년들의 우두머리인 에롤로부터 폭력을 당한다. 이때 예리고란 소년이 나타나 그를 보호하고 에롤을 망신시켜 더는 여호수아를 괴롭히지 못하게 처리한다. 여호수아와 한 살 많은 예리고는 평생동안 유지될 동맹, 신성한 형제로서의 의무를 맺는다. 그런데 두 소년 모두 의지가지 할 부모를 알지 못하고 성장한다. 누군가의 정기적 도움으로 살아가지만 둘 은 그 누군가나 그 행위의 의미를 알고자 하지 않는다. 둘은 자신들이 확신하는 각각의 진리, 그들이 학습한 독서와 지식에 기초한 비평의 틀을 통과한 의견만을 받아들이며, 여느 평범한 사람들과는 차별화된, 사회가 설정한 모든 근거나 기준으로부터 해방된 자유로운 존재가 되기를 갈망한다.

 

두 사람은 그들의 지적 성장에 도움을 준 피로파테르 신부의 가르침인 스피노자 철학을 중심으로 성 아우구스티누스와 페라기우스의 논쟁으로 대변되는 자유에 대한 관점, 즉 펠라기우스의 자유의 철학과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교회라는 중개자가 없다면 개인의 자유란 존재할 수 없다는 두 철학처럼 둘의 삶의 세계에 대한 신념은 조금씩 달리 진행된다. 에리고의 그 어떤 귄위와 위압적 체계에 대한 부정은 어느 것도 진실이 아니라는 사실의 인정으로, 여호수아에겐 확실함을 잃어버렸다는 두려움으로 다가온다. 두 사람과 친구가 된 에롤이 이 둘에게 건네는 말이 있다. 너희가 원하는 것과 사회가 너희에게 허용하는 것 사이에서 길을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르지. 아니면 운명과 내기를 걸어보거나 (63).”

 

이제 두 청년은 운명과 내기를 거는 의지라는 자유의 발걸음을 시작한다. 그러나 그 걸음의 길은 그들의 신념만큼이나 다르다. 여호수아는 실제가 허구를 능가함을 안다. 그의 성장통으로 신경증을 앓고 있을 때 그를 간호했던 간호사와의 세속적 신음과 기다란 감탄사로 표현되는 최초의 정사이후 깨달은 것이라면 헛소리가 될까? 이를테면 여호수아는 현실론자이고 예리고는 이상주의자라면 아마도 어설픈 구분이 될 것 같다. 여호수아는 철학으로 이루어진 뼈대에 살을 붙이는, 현실성을 부여하기 위해 법을 공부하기 위해 멕시코국립자치대학 법학부에 진학한다. 둘은 같은 현상을 보지만 그 드러난 문제점의 해결에 접근하는 방식이 다른 것이다. 예리고는 갑작스레 자신은 프랑스로 떠날 것을 선언하고, 두 사람이 추구하는 가치는 이제 보이지 않게 변해가기 시작한다. 어쩌면 이 대화의 문장은 이들의 가치를 상징하는 하나가 될 듯하다.

 

오감에 근접한 손으로 붙잡을 수 있는 세계가 있는 반면, 실제와 허구를 구별할 수 있어야만 존재하는 상상의 세계, 환상의 모든 권리를 갖춘 그런 상상의 세계가 존재한다.” (80)

 

사람을 망치는 게 뭘까? 여호수아는 명예? ? 섹스? 권력? ...” 거론하지만, 예리고는 그 반대쪽에 있는 실패, 무명으로 남는 것, 가난, 성불구...”를 호명한다. 여호수아의 주장에는 항상 의문부호가 있는 불확실성을 전제한 주장인 반면, 예리고는 부정성에 기초한 단정이다. 예리고가 떠난 이후 여호수아는 대통령과 통신사업으로 멕시코 최대의 부를 가진 막스 몬로이의 자문역인 변호사 상히네스 교수로부터 법과 이론의 실제적 통찰을 위한 스스로의 관찰이라는 경험을 위해 살아있는 자들의 무덤이고, 멕시코의 시베리아이자 황무지 안의 황무지인 감옥중의 감옥인 교도소를 출입한다. 인구의 절반이 가난 아니면 범죄를 선택할 수밖에 없는 멕시코의 실상인 하부 세계를 경험한다. 여기서 한 독특한 죄수를 만나게 되는데, 스스로 수감되기를 원해 석방을 거부하고 교도소의 질서자로 군림하는 인물, 미겔 아파레시도를 관찰하게 된다.

 


여호수아는 졸업에 즈음하여 상히네스 교수로부터 <마키아벨리와 국가의 탄생>이라는 변호사 자격취득 논문의 주제를 받는다. 이때 프랑스에서 귀국한 예리고와 만나게 되고 두 사람은 영문을 알지 못한 채 상히네스에게 호출되어 불려간다. 여기서 예리고는 대통령 자문위원으로 추천되어 대통령실로, 여호수아는 막스 몬로이의 통신사업제국에 입사하게 된다. 소설은 이때부터 음모와 배신, 비열함과 추악함, 탐욕으로 일그러진 멕시코 사회를 철저하게 해부하기 시작한다. 막스 몬로이의 어머니인 망령이 여호수아에게 건네는 꿈 속 같은 훈계들은 배신과 거짓말, 만행과 복수로 점철된 멕시코의 현대사를 관통하고, 그것은 운명에 마주선 의지의 시험대가 된다. 이십년이나 지속된 내전, 그로 인해 백만 명이 목숨을 잃었어. (...) 이 나라는 배신의 나라야.(202)”

 

젊은 피를 수혈받은 대통령은 예리고에게 주문한다. 투표만 해서는 민주주의를 살 수 없다고, 사람들의 관심을 딴 데로 돌릴 수 있는 시간을 만들어 내야 한다.”, 그를 위해 욕구와 갈증과 허기를 다독일 수 있는 축제를 조직하라고. 사실 오늘날에는, 특히 한국사회에서는 누구나 다 아는 퇴락한 후진 전술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민과 국민을 상대로 뻔한 농락을 행하려는 자들이 여전히 이 퇴행적 기만수법을 시도하고 있다는 것은 멕시코 사회와 국민들에게 뿌리깊게 자리잡은 기득권 계층의 집요한 수구적 탐욕과 이를 위한 기만과 거짓, 부패라는 악의 세습이다. 다시금 마이클 존스턴의 한국사회의 부패유형을 지적한 말이 떠오른다. 그것은 많이 배운 놈들이 조직적으로 뭉쳐, 국민을 등쳐먹는 엘리트 카르텔 유형이라는 아픈 말이었는데, 딱 소설 속 멕시코의 유형이랄 수 있다.

 

이야기 속 대통령은 예리고에게 말한다. 의식(儀式)은 우리 모두가 누더기를 가리기 위해 어께에 두를 수 있는 품위 있는 망토라고. 에리고는 대통령의 이 명령을 수행하기 위해 전국을 돌며 이벤트를 준비하지만, 이것은 그의 신념인 이상주의, 즉 무능하고 부도덕한 권력을 전복하는 혁명의 준비로 활용한다. 아주 흥미로운데, 이때 대통령의 유일한 경쟁자인 막스 몬로이는 대통령에게 경고한다. 이런 기만적 수단은 오히려 국민의 불만과 저항만을 만들어낼 뿐이라고, 정보 사회인 오늘은 그런 비밀스런 통치는 더 이상 먹히지 않을 뿐 아니라 권력의 실패를 가져올 수 있다고. 경쟁자가 하는 경고는 조언이 아니다. 자신들의 권력을 항구화하기 위한 기득권집단의 암묵적 협력이다. 반란의 싹을 미리 잘라내 자신들의 기득권이 손상되는 일이 없도록 지원하는 것이다, 표면적으로는 경고요 협박인 듯 하지만 그 속으로 들어가면 공조이자 동업자의 협력인 것이다. 예리고는 실패하고, 권력에 쫓긴다, 잡히면 죽음이다.

 

최종 목적지에서 우리가 발견한 것은 모든 운명이 숙명이라는 사실이었다. 운명은 우리 손에서 빠져나가고, 철문이 닫히듯 삶의 문이 닫히고 만다. (...) 많은 시간이 흘러야 우리는 깨달을 수 있을까? 우리의 의지가 아무리 강해도 운명을 점 칠 수 없다는 사실을, 불확실함이 인생의 실체적 기후라는 사실을....” (246)

 

운명에 도전하여 자신의 의지를 시험한 젊은이는 그 어설픈 낭만적 이상주의의 독단에 의해 실패한 것이다. 이 소설이 얄궂은 것은 여호수아를 정점으로 형제의 동맹을 맺건, 교도소의 지배자인 죄수 미겔이 되었건 막스 몬로이와 맺게 되는 관계다. 이 관계에서 빚어지는 증오와 복수, 빼앗긴 욕망, 그리고 운명과 의지라는 그늘에 덮인 실체가 수면에 떠오르면서 무자비한 폭력의 역사에 토대를 둔 사회에서 의지라는 것은 한낱 숙명으로서 허무에 불과한 것이 되어버리는 양상을 세밀화로 그려낸다. 사실 지구 반대편 남의 나라 역사거나 현실의 실체만이 아니다. 한국 사회는 그야말로 참혹한 폭력의 토대에 구축된 기득권 계층사회이다. 일본의 주구들, 미군정에 기생한 일제 부역자들의 후손이 그대로 오늘의 한국 정치와 경제 권력을 점유하고 있는 까닭이다. 이 진부하게 된 오늘의 현실은 그만하기로 하고, 다시 소설의 마지막으로 가 봐야하는 까닭이 있다.

 

막스 몬로이라는 경제 권력의 거대주체는 여호수아의 믿음인 실제는 허구를 능가한다는 진술이 바로 허구임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현실을 제압하는 것은 허구이기 때문이다. 망상과 다를 바 없는 신화가 현실을 기만하고 세계를 호도하기 때문이다. 막스는 운명을 만들어내기 위해 의지와 운명이 자유롭게 놀 수 있도록 방치했다는 그럴싸한 환상을 만들어내고 그것에 사람들은 현혹되어 실제가 허구를 능가한다고 착각하고 산다. 필연이 없는 의지나 운명이 있을 수 있겠는가라는 필연에 대한 믿음은 폭력사회에서 결코 가능하지 않다는 얘기이다.

 

이것이 현실을 제압하는 허구의 세계인 멕시코요, 바로 허구의 다른 말인 조작이 판치는 한국이며 악의 형상이다. 젊은이들에게 위협을 느끼는 늙은 겁쟁이들이 권력을 확고히 만들고자 하는 수구의 심리는 자신의 아들들을 피비린내 나는 희생양으로 던져 놓는 짓을 서슴지 않는다. 여호수아는 왜 머리가 잘려 해변가 모래위에 던져져야 했을까? 추악하게 일그러진 이 비정한 비극적 드라마는 음모와 배신으로 점철된 권력에 집요하게 매달린 인간들의 염오(厭惡)의 역사, 그 현실을 생생하게 들여다 볼 수 있게 한다. 인간의 조건, 인간이란 무엇인가를 다시금 생각하는 시간이 된다. 이 걸작을 이제라도 읽어 볼 수 있어 다행스럽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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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힐 2024-11-21 11: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책을 읽지 않고 필리아님의 리뷰만 봐도 영화의 장면들처럼 떠올라 지네요. 결국 우리가 사는 세상이 허구임을 다시 한번 일깨워 주는 걸작인 것 같습니다. 좋은 글 감사 합니다.

필리아 2024-11-21 12:21   좋아요 1 | URL
소설에는 이런 문장도 있어요. ˝허망함은 우리의 운명이지만 자유는 우리의 야망이며, 자유를 위한 투쟁 말고는 자유를 얻을 수 있는 방법이 없다는 사실을 배우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린다.˝
결국 의지라는 수단으로 운명을 돌파해 내려하지만, 거대하게 구축된 권력의 세계에 희생될 수 밖에 세계를 고발하고 있는 작품이기도 하답니다. 무엇보다 푸엔테스의 이야기를 이끄는 힘을 느끼게 됩니다. 괜찮은 소설이에요. 댓글 고맙습니다. 마힐님 ~~
 

천쓰홍 작가의 <67번째 천산갑> 리뷰대회 수상자가 발표되었네요.

선정되신 분 모두 축하드립니다. 저도 기분 좋은 하루가 되었네요. ^^



고독과 치유의 여정을 영상미 넘치는 문장으로 

유창하게 그려낸 훌륭한 작품입니다.


많은 독자분들께 추천드리고 싶은 작품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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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넬로페 2024-11-19 15:5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수상자가 닉네임이 아닌 본명으로 발표되었네요.ㅎㅎ
필리아님!
축하드려요^^

필리아 2024-11-19 17:38   좋아요 1 | URL
네, <유령의 시간>에 이은 연타석 홈~런.
기분 좋네요. 고맙습니다. 페넬로페님 ^*

yamoo 2024-11-19 17:5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리뷰대회라는 걸 참가해 본 적이 없으요~~
아주 아주 오래전에 감상문 대회 몇 번 참가한 이후로는 없다는..
1등 상금 2-3백 걸린 대회는 하도 잘쓰는 사람들이 많아 생각도 하지 않는데, 지인이 저번 서울북스오브리류 야심차게 도전했다가 탈락했으요~~ 여기 제출 마감 1주일 전에 만났는데, 은근히 수상을 기대하더라구요. 그래서 제가 그랬죠. 여기 정말 어마무시하게 잘 쓰는 사람들 많이 제출한다고...참가에 의의를 두는 게 좋다는 취지로 얘기해 드렸는데...그래서 그런지 탈락의 후유증을 잘 감내하시더라구요..ㅎㅎ

그나저나 필리아 님...이전에 리뷰대회 수상하신거 봤는데, 또 수상하셨네요! 감축드려요~~

필리아 2024-11-19 18:17   좋아요 0 | URL
고맙습니다, yamoo님 ~
저는 제 감상이 다른 이들에게 과연 수용될 수 있는
것인지를 가늠하는 기회로 리뷰대회를 활용하고 있어요.
선정되면 더욱 좋은 거구요...

꼬마요정 2024-11-20 18:2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우와 축하드립니다!!!
너무 멋진 글이에요. 늘 느끼지만 필리아 님 글 너무 잘 쓰십니다. <67번째 천산갑> 읽고 싶어집니다. ㅎㅎㅎ

필리아 2024-11-20 19:31   좋아요 1 | URL
꼬마요정님 고맙습니다.
네, 천산갑은 생각지 못한 재미가 있는 작품이랍니다.
좋은 꿈 꾸세요. ^^
 
급류 오늘의 젊은 작가 40
정대건 지음 / 민음사 / 202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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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품의 역주행 소문을 듣고는 책장 어딘가에 꽂아 두었다는 기억을 살려냈다. 아마 몇 차례 자리를 옮기며 책은 자기 자리를 찾지 못하고 방황하던 책 중 하나였던 것이 분명했다. 앞뒤로 배열된 뒷줄에서 찾아냈다. 바로 첫 페이지를 펼치고 읽어보았다. 불안한 예감은 결국 현실로 닥쳐왔다. 진평강 하류에 떠내려 온 두 사람의 시신을...”로 시작하는 문장을 읽으며, 어떻게 이 문장의 유혹을 보지 못했는지 까닭을 스스로에게 물으며 걷잡을 수 없는 이야기 속으로 빠져들었다.

 

숭고하다며 가치를 부여하는 일들은 어쩌면 아무 생각 없이 벌어지거나 무모함과 닮았는지도 모른다. 세상을 유지하기 위해 나중에 의미가 부여된 것일 수도 있다.” -39쪽에서

 

이 소설은 사랑과 숭고의 재발견에 대한 이야기로 읽힌다. 물론 위에 인용한 소설 속 숭고에 대한 주인공 도담의 이해처럼 어떤 고결성과 같은 드높은 고양의 언어는 늘 과장의 가면을 쓰기 마련이다. 그래서 이 과장의 언어에는 무엇인가가 은폐되어 무지의 유보상태로 남겨지기 일쑤다. 이러한 측면에서 소설은 사랑과 숭고라는 언어에 드리워진 음영을 발견하는 여정인지도 모르겠다. 때문인지 이야기는 초입부터 수영을 배우기 위해 아빠 창석을 졸라 진평강을 찾았다가 미장원 원장 미영의 아들 해솔이 물속에 빠져 허우적댈 때 부지불식간에 해솔을 구하기 위해 물에 뛰어드는 도담의 모습을 보여준다.

 

피부가 하얀 서울에서 갓 내려온 도시적인 해솔에 무의식적으로 매혹되었을 수 도 있으며, 아빠로부터 배운 생명 구조에 대한 자기희생의 마음이 작용했을 수도 있다. 동기야 어떻든 물에 빠져 곧 익사할 수도 있는 사람을 보고 뛰어드는 사람들을 우리는 뉴스를 통해 자주 접하게 된다. 우리들은 그 행위를 아주 고결한 정신으로 이해하고, 그것을 숭고함이라 말하기도 한다. 숭고란 말은 이처럼 항시 죽음에 근접한 어떤 생명 초월의 현상과 관련하여 등장하는 것 같다. 따라서 그 행위 또는 정신에 은닉된 수수께끼같은 이성을 넘어서는 고귀함에 대한 표현 불가능한 개념의 언어일 것이다. 도담은 소방관인 아빠에 대한 헌신적인 생명 구조의 노력을 자랑스러워한다. 그런 아빠가 기관지 질환으로 입원한 엄마의 부재 속에서 해솔의 엄마와 부적절한 관계를 맺고 있음을 감지하게 된다.

 

해솔을 물속에서 구조한 이후 도담은 해솔과 우정을 쌓아가고, 이윽고 어린 사랑의 싹이 피어난다. 그리고 둘 만의 비밀 장소에서 더욱 특별한 관계가 된다. 도담은 아빠와 해솔 엄마의 관계를 확인하기 위해 아빠의 핸드폰을 훔쳐보고 그들이 숲속 계곡에 있는 칠성폭포에서의 만남을 알게 된다. 도담은 해솔을 설득해 아빠의 소방관용 랜턴을 손에 쥐고 어두운 숲속 밤길을 오른다. 해솔은 그만 둘 것을 청하지만 도담은 듣지 않는다. 그녀는 존경하던 아빠에 대한 믿음이 훼손 된 것에 대한 분노를 억누르지 못하는 것인데, 이윽고 현장 근처에 도달한 도담은 두 사람의 만남을 보고 비명을 지르려 한다, 그때 해솔은 도담의 입을 틀어막고, 급작스레 랜턴을 폭포 용담에서 사랑을 나누는 두 사람에게 비춘다.

 


폭우가 쏟아지는 계곡에서 당황한 두 사람은 급류에 휩쓸려 떠내려간다. 해솔의 엄마 미영을 보호하려는 창석은 속수무책으로 떠밀려간다. 수일간의 탐색 끝에 소설의 첫 문장처럼 두 시신이 발견된다. 빼곡하게 다슬기로 덮인 부패한 두 구의 시신. 작은 마을은 온갖 악취나는 상상력으로 뒤덮인다. 고아가 된 해솔은 외할머니와 함께 살기 위해 서울로 떠나기 전 도담의 집을 찾지만, 도담의 엄마 정미로부터 악의에 찬 독설을 듣는다. 너희는 악연이야, 얽혀서 좋을 게 없어, 절대로 연락하지 마.”, 그리고 도담으로부터도 그 어떤 기약의 말도 듣지 못하고 발길을 되돌린다.

 

정미의 차가운 언어는 해솔의 엄마 미영과 남편 창석의 관계라는 수치스러움과 분노에 대한 고통의 외침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어린 해솔이 어떤 죄책감을 가져야 했을까? 외로웠던 엄마, 친절하고 존경받는 의인이었던 도담의 아빠 창석에 대한 호감, 그들의 사랑에 대한 책임을 소년이 질 수 있었을까?

 

정말 사랑 했나 아니면 그저 욕망에 도취한 불장난이었나

그 둘은 어떻게 다른가.”   - 82쪽에서

 

거침없이 휩쓸 듯 무서운 속도로 흐르는 물이 급류다. 그런데 이 단어는 어떤 현상의 급작스러운 변화라는 비유의 의미 또한 지니고 있다.  이 소설은 이 둘의 의미를 그 물리적 속성을 지닌 급류 실체로서의 장면과 이 장면을 겪은 후 깊은 내적 영향을 갖게 된 두 사람의 변화로 그려내고 있다.

 

참으로 그 경계를 규정할 수 없는 오래된 질문이 다시 출현한다. 사랑과 욕망의 도취, 과연 다른 것인가? 다르다고 제시하는 혼인으로 취득된 가정의 불가침성에 대한 법 규정과 도덕의 덕목들, 그런데 사랑이 과연 법과 도덕으로 무 자르듯 재단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던가? 대체 사랑의 정의가 무엇인가? 해솔은 할머니와 함께하는 궁핍함 속에서 작은 약국을 운영하는, 소박한 꿈의 실현을 위해 약학과에 진학한다. 도담의 그리움에 대한 갈망을 억제하며, 약사가 되어 도담과 함께 하는 삶의 시간을 위해.

 

이후 도담과 해솔의 삶의 시간을 오가며, 3년 만에 우연한 만남으로 시작된 두 사람의 오랫동안 참았던 그리움, 그리고 다시 만났다는 안도감과 서로에 대한 안쓰러움, 미안함, 그간의 외로움과 설움을 한꺼번에 쏟아내는 시간을 보여준다. 두 사람은 3년이란 시간의 공백을 없애려는 듯 다급하게 하나가 된다. 서로의 존재가 아팠던두 사람은 절박하게 서로에게 안긴다. 나는 서로의 존재를 아파할 수 있는 것이라는 이 사랑의 정의가 어쩌면 숭고와 어울리는 우리가 찾는 그 사랑이 아닐까하고 생각하게 된다.

 

이렇게 폭포 사건을 시작으로 사랑이라는 주제는 도담과 해솔을 중심으로 그네들의 삶의 단면들을 비추며, 작가의 말처럼 급류처럼 느껴지는 삶 속에서안녕을 찾아가는 여정을 쫓는다. 아빠를, 엄마를 죽음에 이르게 한 죄책감과 그리고 존경의 마음이 훼손된 것에 대한 분노, 한편으론 해솔과 도담 서로에 대한 미안함이 얽혀 두 사람의 상처입은 마음은 갈등과 치유 사이를 오가며, 고통의 기억을 떠나지 못한다. 이 여정 속에서 사랑에 대한 무수한 정의가 직간접적으로 표현되고 있는데, 아마 그러한 사랑의 정의들은 성장, 혹은 성숙 과정의 언어일 것이다.

 

도담은 상처입은 사람의 냄새를 도처에 풍기며, 그녀에게 각인된 사랑이란 언어는 급류와 같은 위험한 이름이었다, 휩쓸려 버리는 것이고, 모든 것을 잃게 되는 것, 발가벗은 시체로 떠오르는 것, 다슬기가 온몸을 뒤덮는 것이었다.” 그래서 도담에게 사랑은 사기이고 기만인, 자신조차 설명하기 어려운 마음을 두 글자로 퉁 치는치사한 말에 불과한 것이 된다. 이는 여전히 자신이 가진 불행의 엄청난 크기에 대한 도담의 오인 때문일 것인데, 다른 사람은 이를 알지 못하기에 사랑을 가장 좋은 것이라 믿는다고 사랑 예찬론자인 친구를 비난하기까지 한다.

 

해솔은 도담과 함께 있다가 정미에게 발각됨으로써 다시금 강제 이별을 하게 되고, 졸업 후 소방서 구조대원이 된다. 그리고는 각종 화재와 재난 현장 속에서 생명을 구출하는데 헌신하고, 수차례에 걸친 화상과 생명이 위태로운 부상을 입기도 한다. 동료들은 그의 행위를 자살행위라고, 정말 목숨을 던질 기세였다고 말한다. 다른 사람을 구조하는 데는 이상할 정도로 필사적이면서 자신을 구하는 데는 신경 쓰지 않는 것 같은 행위를 반복한다. 왜 해솔은 약사라는 안전한 직업을 뒤로하고 위험하기 그지없는 소방관이 되었을까?

 

도담이 물리치료사로 일하는 병원에 해솔이 중화상을 입고 실려 옴으로써 8년 만에 두 사람은 다시 재회하게 된다. 두 사람의 만남은 필연이었을까? 이는 도담이 해솔에게 하는 말속에 그 답이 있는데, 너는 너를 용서했니?”라는 두 사람 모두 12년간 자신들에게 한 번도 하지 못한 질문을 한다. 두 사람은 서로의 거울이 필요했음을 비로소 알게 된다. 어쩌면 이 서로에 대한 거울은 앞선 서로의 존재에 대한 아픔의 감응이었을 것이다.

 

로버트 제임스 월러의 잘 알려진 소설에 그녀가 유일하게 느끼며 살고 싶어하는 현실, 짓눌리고 짓눌려 산산이 부서지고 말았을 존재를 버티게 해 주었던 생존의 문제였던 사랑의 기억이라는 문장이 있다. 사랑은 이처럼 한 존재가 버티는 거대한 힘일 것이다. 그것은 잘 포장된 욕망이나 이기심이 아니며, 멋대로 핑크빛으로, 하트 모양으로 정하는 마케팅 같은 것도 아니다. 또한 외로움이나 정욕을 채우기 위한 것도 아니며, 내 상처만이 더 크다며 남의 상처를 가볍게 치부하는 그런 냉소적 오만의 잣대를 들이대며 사랑의 진정을 폄하하는 가난한 마음도 아니다. 특히 사랑은 허술한 교리 따위는 더욱 아니다. 만일 그렇다면 그건 사랑이 아닐 것이다.

 

아마 대형 화재 현장에 출동했다 매몰된 현장에서 눈이 감겨 오는 데, 그래도 다행이라 생각했다는 해솔의 말처럼 그때 생각했어. 누군가 죽기 전에 떠오르는 사람을 향해 느끼는 감정, 그 감정을 표현하기 위해 사랑이란 말을 발명한 것 같다고. 그 사람에게 한 단어로 할 수 있는 말을 위해 사랑한다는 말을 만든 것 같다고하는 바로 그것일 것이다. 여기서 도담이 사랑은 기만이고 사기라고, 그저 설명할 말이 없어 한 단어로 퉁 치는 그런 말이 아니게 된다. 드디어 사랑은 지고한 숭고함에 이른다. 해솔이 도담에게 말하지 못했던 진실의 이야기가 주제에 이르기 위한 전복의 언어로 발설되는데, 이 문장은 소설을 읽는 독자들을 위해 비밀로 하기로 한다.

 

바다에 재가 되어 뿌려졌던 아빠 창석의 기일을 한 번도 치룬 적 없었던 도담은 사랑의 숭고성 앞에 해솔과 함께하는 삶을 결정하는 듯하다. 그리고는 해솔과 함께 추모선을 타고 하얀 국화송이를 바다에 띄운다. 아빠 창석이 하던 일은 생명을 저 건너편으로 건너가지 않도록 맞서는 일이었음을. 두 사람은 앞에 파도가 일고 있었지만 그들은 수영하는 법을 알았다.” 는 마지막 문장처럼, 삶의 급류라는 휘몰아치는 시간을 견뎌내고 사랑과 생명에 대한 숭고한 의지를 배웠던 것일 게다.

 


누구든 급류에 휩싸여 그 흐름에 떠내려 갈 수밖에 없는 상황에 맞닥뜨리게 된다. 그 급류는 현실의 폭우 속 강물일 수도 있겠지만, 그보다는 이 세상이라는 급류에 더 많이 속수무책이 될 때가 있다. 이 두려움은 우리를 한동안 잡아 얽매이게 한다. 이를 벗어나는 길은 바로 그것과 마주하는 방법 이외에는 없는 듯하다. 도담과 해솔은 그 마주함에 이르는 데 12년이 걸렸다. 그리고 바로 자신의 책임을 덮기 위해 급류라는 그 사건의 기억들로 회피하고 있었음을, 두 사람은 그것을 서로라는 거울을 통해 발견하고, 바로 그 거울 됨이 사랑임을 확인한다. 그래  "소용돌이에 빠지면 수면에서 나오려 하지 말고 숨 참고 밑바닥까지 잠수해야 하는 것"일 게다. 이 사랑 이야기에 순식간에 빠져들었다 나오려니 조금은 더 머물고 싶은 아련함이 남는다. 해솔과 도담의 그 절박한 사랑의 순간들을 떠나보내고 싶지 않은 심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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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넬로페 2024-11-14 21:2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 소설이 역주행 되는 이유를 알 수 있을까요?
도서관에도 예약이 꽉 차 있네요^^

필리아 2024-11-14 22:02   좋아요 1 | URL
저도 명쾌하게 역주행의 이유를 알지 못하지만, 제 견해는 이렇습니다. 요즘 한국문학은 은유와 상징 등 책읽기의 숙련(?)된 사유를 요구하거나, 사변적인 경향이 있지요, 그런데 이 작품은 아주 일상적이고 직관적인 언어로 쓰여 있어요, 그리고 사랑이라는 주제가 두 어린 인물들(열일곱살)의 성장(서른살)과 함께 정서적으로 친근한 의미로 풀어내고 있거든요, 그럼에도 천박하지 않으면서 어떤 고결한 품위가 손상되지 않은 이야기라는 점이 아닐까하는 생각이에요, 또한 다소 충격적(?)인, 일종의 트라우마가 될 수 있는 사건에 대한 당사자들이라는 점에서 그들이 지니게 된 죄책감을 서로 다른 성격의 두 인물을 통해 그것을 이해해나가는 과정이 결코 이야기의 재미를 손상시키지 않고 더욱 빠져들게 하는 점이 아닐까해요. 두서없는 제 소견입니다. 댓글 고맙습니다, 페넬로페님, 좋은 꿈 꾸는 밤이 되시기를요. :)

p.s. 통속적이라는 의견도 있네요. 네, 그 통속성이라는 친근함이 생명을 위협하는 위험에 맞서고자하는 어떤 숭고함으로 소설 전체의 배경처럼 흐르는 탓에 얄팍하지 않다는 것도 하나의 이유가 될 수 있겠네요.

필리아 2024-11-14 22:2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 역주행하는 소설에 대한 이런 소박한 분석도 있네요. 최진영 작가의 <구의 증명>도 역주행한 소설인데요, 두 작품 모두 소위 ˝피폐한 사랑 이야기가 인기가 있다?˝는 공식에 들어간다는군요. 그리고 무엇보다 이지 리딩(술술 읽힌다)이라는 거구요, 특히 10~20대가 선호하는 사랑 이야기이기 때문이라는 설명이네요. 뭐 다 거기서 거긴인 얘기 같네요.... , 결국 이 작품을 어떻게 읽어내고 있는가, 어떤 평을 할 수 있는가는 독자들의 몫이겠지요.

페넬로페 2024-11-14 23:03   좋아요 1 | URL
자세히 설명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최진영 작가의 작품을 몇 편 읽었는데 감상을 쓰지 못하고 있어요.
어떻게 받아들일지 아직은 감이 안 와서요. 계속 읽어 보도록 하겠습니다^
 

 아래 글은 케임브리지종신 석학 교수인 피터 버크의 무지의 역사, Ignorance: A global history2무지의 결과11장에서 13장에 이르는 정치와 재앙, 비밀과 거짓말에 대한 읽기에서 떠오른 상념의 記述입니.

 

1. 무지의 사회적 분배

 

비밀과 은폐, 공작 또는 음험한 기획에 열중하는 권력이 자신들의 관심사 이외에는 무관심과 함께 무지가 따르는 것은 불가피한 양상일 것이다. 해서 이들 권력집단의 구성원들은 이러한 무지를 아주 폭넓게 공유한다. 그렇기에 만일 그들의 무지와 무관심으로 인해 국가적 재난이나 위기, 또는 불의한 사정이 드러나면 이들은 부인, 부정, 거짓말, 무책임으로 방어하곤 한다. 즉 관련된 인물들, 아래로는 지방부처의 수장에서부터 장관, 대통령에 이르기까지 이들은 공적 부인을 통해 거짓말로 상황을 돌파하려하며 그 거짓말의 취약부분이 들통 나면 거짓말했다는 사실을 다시 부인하면서 또다시 거짓말을 한다.

 

부인하는 거짓말을 하게 되면 반드시 그에 대한 거짓말이 연쇄적으로 이어진다는 것이 사회, 정치학자들의 일관된 견해이다. 즉 그 권력 집단의 무지의 사회적 분배를 드러낸다는 것이다. 분명 전 정부에서는 총명한 관리였는데, 급작스레 아주 멍청한 각료가 되어 횡설수설하며 그 어떤 소신도 밝히지 못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은 적잖이 당혹스럽기까지 하다. 그것은 기억나지 않는다거나 침묵으로 응답하고, 또는 모른다고 하는 양상이다.

 

국회 청문회에 소환된 각 기관 수장들이 예고된 재난을 재앙으로 만들어 버린 후, 하나같이 자신들의 책임을 인정하는 자가 없었으며, 자신들의 무지와 무관심을 태연스레 드러내기까지 했다. 피터 버크 교수는 결함을 지닌 결정권자들이 놀라울 정도로 불완전한 정보를 가지고 사람들을 위협하는 기술을 지휘하는 세상을 살아가고 있다고 지적하면서, 재난을 재앙으로 만드는 사태는 불가피한 무지가 아니라 비난받아 마땅한 무지준비 부족’”이라 단정한다. 지금 재난에 대한 권력의 무책임을 비판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 행태에 내재된 무지의 속성을 살펴보고자 하기 위해 일례로 시작한 것일 뿐이다. 뜬금없이 누군가는 무지는 즐거움이라는 당치도 않은 말을 주절거리지만 무지는 대부분 삶에 대한 부정적 요소를 구성한다.

 

2. 무지는 공적 부인(否認)이라는 거짓말 형태로 표출된다

 

오늘의 우리네 사회는 오랜 학습을 통해 재난에 대한 대비책을 알고 있다. 결국 효율적이고 장기적 대비를 할 수 있으며, 할 수 있다는 것이 재난전문가들의 한결같은 견해다. 따라서 현대사회의 재난은 거의 모두가 인재(人災)’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 정부의 책임이라는 말이다. 그런데, 정부의 어느 책임자도 자신의 책임이 아니며, 불가피한 재난이었으며, 오히려 피해자들의 부주의 탓이고, 나아가 불의한 세력의 사건 날조라고 떠들며, 반국가세력의 음모라고 궤변(詭辯)을 주절거리기까지 한다. 공적 부정은 허위 정보의 한 형태이며, 사적 부정이나 침묵은 고의적 무지라 했다. 즉 알지 않으려 하려는 것을 알고 있다는 것이기에 이들은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1959~1962년을 중국에서는 대약진 운동의 시기라 부른다. 이때 3,000만 명이 굶주림으로 죽었다. 세계사의 어디에도 이만한 규모의 아사(餓死)를 기록한 기근은 없었다. 서구를 따라잡겠다고 자신의 천재성과 무오류라는 무지와 오만으로 파종과 수확을 해야 할 농민에게 철 생산을 독려 했다, 이것은 위신구라는 농촌 공간을 배경으로 황허유역 모래밭에서 흙철을 모아 철 생산에 내몰린 농민의 고통스러운 삶을 적나라하고 풍자적으로 묘사한소설가 옌롄커의 四書그것이다. 결과는 심각한 식량부족과 대기근이었다. 마오쩌뚱 정권은 자신의 실수는 은폐하고, 생산통계는 조작하고, 인민의 삶에는 무관심했다. 마오는 물론 정권의 그 누구도 책임지질 않았으며, 프롤레타리아 독재에 반대하는 농민 탓, 인민 탓이었다. 이 끔찍한 엉터리 운동이 대실패로 끝난 것은 너무도 자명한 순리였다.

 

이 실패한 약진 운동에는 아주 흥미로운, 지금 한국 사회에 펼쳐지는 희극 장면으로 다시 반복된다. 여기서 우리는 역사와 인간 권력의 반복 유사성에서 드러나는 또 다른 무지의 양상을 발견하게 한다. 마오쩌뚱은 곡물 생산을 늘리라고 종용하기 위해 현장을 방문하는데 방문 이동 경로는 하나의 연극무대로 사전에 철저히 연출된 현장만을 방문하였다는 것이다, 권력자의 무지는 항상 현실을 왜곡하게 만든다. 이것은 전제주의나 독재권력이 있는 곳이면 여지없이 반복되는데, 농협의 대파 한단 가격으로 인해 야기되었던 상황이 바로 이러한 연출된 무대에서 벌어진 부득이한 연극일 게다. 바로 이 권력이 권위주의 독재 권력을 지향하고 있음의 반증으로 해석될 수 있는 하나의 지점이다.

 

사실 이처럼 자신이 모른다는 것을 모를 뿐 아니라, 서민 대중의 삶에 대한 정보를 중요하지 않은 것으로 무시하는 독재자들에게 흔히 보이는 무의식적 무지이자 허용된 무지만이 발견되는 것이고, 그나마 무지의 단순성 때문에 비난의 대상을 명료하게 할 수 있다. 그런데, 모두에서 언급한 무지의 사회적 분배로 인해 권력 집단에게 광범위하게 무지가 작용할 때 그 무지는 대개 알고 싶지 않거나 알아서 무시하는 무지이기에 그 결과는 사회적으로 심대한 손상을 가져오기에 예사로운 무지가 아니다. 이 역사적 사실에서 우리는 특히 권위주의 권력이 구사하는 여러 형태의 무지를 보았는데, 그것은 무시, 은폐와 조작, 부인이라는 양태로 나타났다.

 

그리고 또 하나의 요인이 더 내재되어 있는데, 무관심으로 인한 무지가 무능과 안일함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그 결과는 오로지 시민의 고통으로 안겨지는 것이기에 아주 나쁜 무지다. 마오쩌뚱은 기근이 발생했다는 사실 자체를 부인했다. 어떤 사실이 발생했음에도 부인하면, 공식 대응이 되지 않았다는 것은 자명한 이치다. 결국 재앙을 피할 수 있는 조치들이 취해지지 않고, 무시되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실제 마오쩌뚱은 기근에 대해 알고 싶어 하지 않았으며, 측근의 고위관리들 역시 무지를 가장한 채 책임을 회피했다. 어째 너무 닮지 않았는가?

 

어떤 사회적 문제가 발생했고 진행 중인데, 그 문제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부인하거나 무시하면, 당연 무지로 인한 무능, 즉 아무 일도 하지 않는 방치가 발생하고, 문제는 곪아 터져 국민의 삶을 곤두박질치게 만든다. 국민을 볼모, 희생양으로 삼아 벌이는 권력의 행태는 정말 끔찍한 것이다. 정치 퇴행은 물론이고 경제적 사회문화적 몰락으로 이어지기에 그렇게 일시적이거나 단순하게 취급될 사안이 아닌 것이다. 희생양이라는 단어가 등장한 마당에 무지와 관련한 희생양 증후군(또는 집단 편집증)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근자에 소설가 한강의 노벨문학상 수상을 비난하는 저열한 수구적 무리들의 역사 왜곡과 날조에 편승한 무지도 바로 하나의 집단 편집증 현상인데, 어떤 예상치 못한 재앙이 일어났을 때, 특정 개인이나 집단에 책임을 돌려 가해 당사자의 책임을 회피하는 기만 책략이다. 인류의 역사에서 이러한 사태는 너무 비근하게 벌어지는 일이기에 그리 새로운 현상은 아니다. 1666년 런던 대화재가 발생하자 기득권 세력인 영국 국교 집단은 박해받던 가톨릭 신자들이 일부러 불을 질렀다는 거짓 소문을 내서 자신들의 적을 쓸어버리는 발작을 했다. 이른바 희생양 증후군이다. 범죄행위의 가해자인 자신이 속한 집단의 책임을 회피하려는 추악한 무지의 일면이다. 이들은 결코 진실을 알고자 하지 않는다. 자신은 알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기에 알고 싶지 않은 것이다. 결코 깨어나지 않을 무지이다, 때문에 이에 기초한 지식은 항상 왜곡되고 조작되어 있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3. 집단 편집증(희생양 증후군)은 곧 무지의 한 양상이다

 

1923년 일본 관동 대지진의 조선인 대학살(조선인을 포함 15만 명이 사망)도 조선인의 방화와 약탈, 그리고 우물 독극물 투입으로 일본인이 무고하게 죽어나가고 있다는 거짓 소문을 퍼뜨려 일본 정부의 책임을 회피하려는 희생양 증후군의 대표적 사례이다. 다시 말해 재난 대비 부족에 대해 응당 책임져야 할 권력이 자신의 책임을 피하기 위해 희생양에 뒤집어씌운 것이다. 이는 대중의 무지를 토대로 한다. 정보가 부족해지면 그 진실의 빈 공간을 소문이 대체하는데, 이는 예외 없이 왜곡과 조작된 허위와 거짓 정보로 채워졌다는 것이 역사의 실증이다. 1980년 광주시민이 무참하게 학살된 민중항쟁 운동 또한 북한 특수부대가 쥐도 새도 모르게 침투하여 벌인 정당한 군사행위라고 터무니없는 헛소리를 떠드는 것 또한 이와 유사한 의도된 고의적 무지의 한 형태일 것이다.

 

제주 4.3사건 또한 학살의 책임을 피해자로 돌리는 무도함과 무지함의 반복이라 할 수 있는데, 한동안 우리 역사에서 4.3사건은 금기어였다. 마치 중국에서 천안문 사태를 발설하면 투옥되듯, 철저한 금기어로서 기억에서 지워야하는 어휘였다. 알고 있지만 모른다고 인식하는 알려진 무지였다. 이웃이 끌려가고 무수한 총소리와 화약 냄새가 진동하는 데 어찌 모를 수가 있겠는가. 마을 사람들은 알지만 몰랐다. 안다고 말하는 순간 군경에 의해 똑같이 죽을 수 있었기에 기억에서 어떻게든 지워버려야 하는 사실이었다. 이와 동일한 사건은 세계 도처의 독재정권에 의해 무수히 벌어졌고, 그 진상을 밝히는 데 대부분 50여년의 끈질긴 추적의 노력이 이루어져야 했다. 19404~5월 폴란드 장교 2만 명이 비밀경찰에 의해 조직적으로 사살되고 카틴 숲이라는 곳에 묻혀버린 역사가 있다. 폴란드 공산당 정권은 논의를 금기로 하고, 실종된 장교들의 날짜를 조작 날조했다. 그리고는 독일에 그 책임을 돌렸다.

 

1989년에야 진상이 규명되고, 러시아 보리스 옐친은 바르샤바 기념탑에 서서 사죄했다. 보지 말아야 할 것, 알면 안 되는 것을 알고 있으면 기억을 지워야 한다. 그래서 그것을 기억하던 이들이 모두 죽으면 영원히 그 사회는 기억상실증에 걸리고, 동일한 사태를 반복되어 맞이하게 된다. 누군가 기억상실증은 국가가 후원하는 스포츠다!”고 말했단다. 고위 정치인들의 청문회에서 우리는 기억나지 않는다고 말하는 무수한 기억상실증에 걸린 인간들을 보게 된다. 선택적이고 고의적인 무지는 모두 거짓말임을 역설한다. 독재 권력에 편승해 무지의 사회적 분배를 나누어 가진 고위 정부 관료들은 소위 고의적 허위 정보, 디스인포메이션(disinformation)’을 공유하는 것이다. 즉 더러운 속임수, 기만 게임에 동참하는 것인데, 자기들만의 폐쇄적 정보를 이용하여 조작, 날조, 은폐를 일삼으며 일반 대중을 무지 속으로 몰아넣고자 한다. 독재 권력은 항상 자신들의 성공을 위해 대중의 무지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끊임없이 제거하고 싶은 정적에게 조작된 범죄 사실을 대중에게 선전하고, 권력(檢警言)을 이용하여 상대의 평판을 훼손하며, 정치적 반사이익을 얻으려는 저열하고 악질적 행위를 하는 것도 결국 무지에 대한 의존이 배경이다. 때문에 그토록 언론기관을 권력의 하수인으로 삼으려 안달하고, 언론에 대해 사전 검열을 자행하고, 금서 목록을 지정하며, 블랙리스트를 작성하여 독재 권력에 반하는 사회문화 및 정치 인물을 공적 진입에서 배제하려는 것도 대중의 무지를 유지, 지속하려는 의지의 다름이 아니다.

 

자신이 모른다는 사실을 모르는 가장 심각한 형태의 무지가 이 사회를 좌우하고 있기에 비밀주의와 은폐, 조작과 날조된 거짓으로 진실의 공간은 늘 빈자리가 되어 그 자리에 의심과 혼란이라는 소문이 꿰차는 것은 필연이다. 그만큼 사회는 분열과 극한적 적대를 결코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이 사회의 각종 미디어가 온통 거짓말과 조작, 왜곡, 날조된 말들로 채워져 거짓이 활개 치는 것은 온라인 플랫폼의 알고리즘이나 생성형 AI 탓만이 아니다. 바로 이러한 광범위하고도 다양한 무지의 형태가 비옥한 토양을 만들어내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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