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타니스와프 렘 <존재주식회사>의 예술적 존재론

 

폴란드 출신의 Sci-Fi 작가 스타니스와프 렘의 소설 존재주식회사(Being Ins.)라는 익살맞은 제목을 한 다분히 과장된 상상력의 작품을 읽다가 존재론에 얽혀있는 한 문장이 스치듯 떠올랐다. 존재론의 근본적 특징은 사람다움을 이해하기 위한 인간 조건을 규명하기 위한 것이라는 문구다. 우리는 대개 지금 사는 자신의 삶의 여정과는 다른 삶의 가능성을 꿈꾸는 존재들이다. 물론 이를 부정하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그건 그들의 생각에 맡겨두고 논의의 대상으로 할 생각이 없다.

 

다시 말해 인간조건이라는 존재의 비밀을 찾으려는 필요가 존재론이라는 말이라 할 수 있을 것 같다. 따라서 존재론이란 여기 있는 세계와는 다른 세계에 대한 탐색이고, 무언가 성취를 위해 달려가야만 할 것 같은 시대에 번번이 실패하는 것들이나 어떤 불명확한 모호함을 말해야겠다는 생각이라 할 것이다. 이 소설을 읽으려니 존재론에 대한 간단한 이해가 전제되어야 했기에 기억을 떠올려 봤다. 어쩌면 이 문장이 이 소설의 전제이자 주제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다.

 

렘의 <Being Inc.>는 미국도서관이 발행, ‘앨리스타 웨인라이트가 지은 동명의 소설 Being Inc.에 대한 일종의 비평문의 형식을 한 소설이다. 사실 비평의 대상이 된 웨인라이트의 소설은 이 지어낸 존재하지 않은 허구의 작가와 저작물이고, 하나의 유머로서 비평 임직한 형식을 취하는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렘은 인간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삶의 영역에 대해 말하기 시작한다. 존재주식회사란 바로 이러한 개인들의 삶의 영역에 존재하지 않는, 지금 여기 없어서 있지만 없다고 간주되는 것을 더듬어 찾는 일을 해주는 비즈니스 회사다.

 

우리가 삶에서 기대하는 것

 

사람들은 상품이나 서비스를 구입할 때 그것만을 구입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에 어떤 친밀한 감각이나 호의적 관계에 대한 기대가 포함된 비용을 지불한다고 여긴다. 이를테면 변호사를 선임한다는 것은 전문가적 조언 + 안전하다는 감각을 함께 구입하는 것이고, 비행기표 가격에는 목적지 도착을 위한 기체의 이용 + 승무원들의 아름다운 미소와 정중한 친절’”이 포함된 것이라 생각한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소위 프라이빗 터치(Private Touch)’에 비용을 지불하는 경향이 있다는 말이다.

 

문제는 우리들의 삶 자체는 이러한 접촉만으로 흘러가지 않고, 그 반대로 우리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접촉과 관계는 돈을 내고 구입하는 서비스 영역을 넘어서는 영역에 있다는 것이다. 참 얄궂은 것이 인간이 삶에 기대하는 태도다. 이제 세상은 전통적으로 비시장 규범이 지배하던 삶의 영역으로 시장이 확대되면서 돈으로 살 수 없는 것이란 없다는 듯, 시장의 도덕적 한계가 붕괴되고 있다. 생명과 죽음까지 거래 대상으로 밀고 들어오고 있어 아마 우리의 민법 103조   선량한 풍속이나 기타 사회질서에 위반하면 무효라는 조항은 사문화될 가능성이 높다고 예상할 수 있을 정도다.

 

소설로 돌아가서, 돈 내고 구입하는 서비스 영역을 넘어서는 것이란 우리가 기대하거나 꿈꾸던 대로 행동해주기를 주문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뜻이다. 이를테면 어떤 호의나 타인이 자발적으로 나에게 느끼는 호감이나 충직함을 구입하는 것이 불가능 한 것처럼, 이해관계와 상관없는 감정들에 대한 그리움으로 사람들은 괴로워한다는 것이다. 이같이 삶의 기대란 어떤 강력한 권력이나 돈으로 강요해서 구입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결국 막대한 재력이나 특권을 가지고도 넘을 수 없는 이 벽이 자신들을 갈라놓을 때, 이들은 특권을 내려놓고 진정성이란 것을 찾아 나선다. 우리네 일상에서 이러한 예는 곧잘 화제가 되기도 하는데, 재벌총수가 뒤늦게 순수한 사랑을 찾아나서는 것이나, 대중 속에 은근히 다가서려는 사회관계망 속에 나타나는 행위 등등을 이러한 징후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존재론적 물음으로써 존재주식회사

 

거의 모든 것이 상품화되고 거래의 대상이 되었지만 친밀하거나 공식적이거나 사적이거나 공적인 일상생활의 본질적 본분이며 그 결과 저 자질구레한 패배, 비웃음, 근심, 반목, 경멸에 우리는 시달릴 수밖에 없는 것이고, 때문에 돈 주고 피할 수도 없으며, 결국 개인의 운명에 달린 문제로 이해될 도리밖에 없다는 것이다. ‘존재주식회사는 바로 이 지점을 거대한 일상생활의 서비스 산업으로 삼은 기업이다. 즉 인간의 모든 삶을 강력한 서비스 산업의 주의 깊은 통제 하에 놓아 그 어떤 우연한 사건들도 존재할 수 없도록 완벽하게 미리 준비된 사건들로 조직하는 것이다, 그래서 인간 삶에서 어떤 우연도 없는 개인 자신이 원하는 삶만이 펼쳐지는 인생을 만들어 주는 것이다.

 

이전 사회의 불행은, 타고난 성정과 실제 삶의 길을 조화시킬 방법을 찾아내지 못했다는 데 있다는 것, 즉 역할이 무작위적 운이 결정하는 일이 얼마나 자주 일어났던가.”

 

존재주식회사는 바로 이 무작위적 운이 결정하는 삶을 개인의 타고난 성정에 부합하는 삶으로 완벽하게 일치시켜주는, 즉 개인의 의지가 타인이나 운에 의해 충돌하는 경우를 제거한 완전히 소망이 충족된 삶을 보장해주는 일을 하는 곳이다. 예를 들어 어느 고객이  엄격한 판사가 되어 사형을 언도하고 싶어 한다고 하면, ‘존재주식회사는 그 소원에 따라 사형으로만 다스릴 수 있는 범죄자들이 기소되어 그의 앞에 늘어서게만들어내는 것이다. 이 고객은 자기 삶의 의지에 반하는 어떤 경우도 일상에서 만나지 못함으로써 그 어떤 조잡한 실패조차도 끼어들지 않는 삶을 살게 되는 것이다. 존재주식회사는 수천 명의 사람들이 연관되는 우연의 덩어리를 조직해서 완벽하게 한 인간의 삶에 펼쳐질 모든 사건을 조작해 내는 것이다. 다시 말해 고객의 운명을 돌보면서 눈에 보이지 않게 모든 실패와 좌절, 장벽이 말끔히 제거된 삶을 펼쳐주는 것이다.

 

이제 모든 인간 삶의 세계에는 더 이상 아무도 자연적으로 태어나지도 사망하지도 못하고, 아무도 아무것도, 직접 자기 혼자서 끝까지 경험하지도 못하는데, 모든 사람의 생각 하나하나, 모든 두려움, 고통 또한 존재주식회사의 거대한 컴퓨터의 대수학적 계산들을 연결하는 고리가 되었기 때문이다. 삶의 완전한 조정으로 시장 바깥의 가치들이란 것이 존재하지 않기에 죄와 벌이라든가, 선악의 개념도 공허한 개념이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완벽하게 미리 마련된 삶, 책임감이라는 짐을 영원히 벗어던진 삶을 살 수 있게 된 세계만이 펼쳐진다. 일체의 우연이란 존재하지 않는 삶, 완벽하게 논리적 조작에 의해 주체의 자발성과 자유라는 감각과도 충돌하지 않는 조작을 만들어내는 서비스가 제공되는 세계가 진정 펼쳐질 수 있다면  누가 알겠는가, 삶은 덜 괴로워질지도 모른다.”고 소설은 비평의 글을 맺는다.

 

마이클 샌델이 지적했듯, 우리는 어떤 대상이 돈으로 거래되는 것에 대해 거북함과 불쾌감, 부정적 의식을 느끼며, 이 감정을 느끼게 하는 본질적 요인을 설명하는데 애를 먹는다. 아마 그중 가장 불쾌한 것은 인간의 생명자체를 상품으로 취급하고 우리의 도덕적 감정을 잠식하는 생명, 인륜, 개인의 자유 등에 대한 파괴의 감정들일 것이다. 결국 이러한 비시장의 규범이 지배하는 삶의 영역에 부패성을 내재한 시장이라는 것이 침식해 들어오는 것에 대한 반감이다. 그것은 우리들이 지니고 있는 도덕적 미덕이나 도덕적 양식의 파괴이고, 그러함으로써 계층의 구별짓기와 소통의 단절, 적대화 등 인류 사회의 건강성 훼손에 대한 강한 거부감이다.

 

그런데, 렘의 이 소설은 인간 삶의 여정 자체가 상품화되어 거래되는 세계이다. 이러한 세계에서는 소위 돈으로 살 수 없는 것이라는 비시장적 규범에 의해 전통적인 가치라는 것이 존재할 여지가 없는 세계이다. 이렇게까지 시장이 끝까지 밀어부친 세계에 도달하면 존재론이란 것도 무용해지는 데, 인간 조건의 규명이라는 것도 더 이상의 의미를 상실해버리기 때문이다. 이제 갈등도 충돌도 없이 소망하는 세계만이 펼쳐지는 삶으로, 모든 인간들이 완전히 충족하는 세계가 펼쳐질 수 있다면 렘의 긍정적 비평처럼 제법 쓸만한 세계라고도 말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소설의 사기성, 그 실패로서의 예술

 

한편, 이 소설이 사기인 것은 소설의 대상인 소설에도 이야기하듯 존재주식회사는 독점이 아니라는 것이다. 담합 금지법에 따라 거대한 경쟁기업인 헤도니틱스(Hedonitics)와 참삶사(True Life co.,)가 있어 어떤 고객에 펼쳐질 미래의 사건이 경쟁사 고객의 미래 사건과 충돌하는 경우가 발생한다는 점이다. 경쟁사들의 컴퓨터에 의한 조작이 각자 자기 고객 삶의 전개에 충실하려 하기 때문에 조작의 격렬화(조격)’라는 대재앙이 발생한다. 소설은 이러한 재앙이 9년에 2회 발생했다고 축소 과장하지만, 이는 경쟁사간의 충돌 문제를 떠나서 인간 삶의 문제란 바로 이러한 무수한 갈등과 충돌로 이루어져 있다는 점이다. 사실 소설이란 과장된 허구로, 가능성의 예술로 이해하는 것이지만, 잠깐의 허풍스러운 상상에 취하는 즐거움이면 충분하다고 관대함을 베풀면 될 것이다.

 

정말 중요한 이야기가 남아있다. 괴짜 백만장자인 제사민 체스트 부인이란 여인이 자신이 가진 모든 재산을 마지막 한 푼까지 지불할 준비가 되어있다며, 모든 조작의 개입에서 벗어난 순수하게 진정한 삶을 갈망하며 이러한 소망을 실현시켜 달라고 주문하는 것이다. 이미 조작된 세계에서 조작의 부재를 조작하는 것은 이제 그 어떤 요청보다 어려운 것으로 판명된다. 그리고 이 조작의 부재 가능성을 탐구한 결과 삶의 자발성이란 없으며, 이미 오래전부터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임을 밝혀낸다.

 


, 오늘 우리들이 사는 삶이란 이 말처럼 어느 만큼은 이미 조작된, 미리 연출되지 않은 채로 진행되는 사건이란 존재하지 않는 것이라는 말이기도 하다. 젠장, 정치에서의 권력이 하는 작의적인 무수한 조작들, 기업들과 상업시장에서 이루어지는 또한 무한한 조작들, 인간들 간의 자질구레한 인위적이고 전략적 조작들 속에서 이미 살아가고 있는데 이 조작들의 개입에서 완전히 벗어난 순수한 삶을 산다는 요구야말로 실현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단 번에 지금까지의 존재주식회사의 세계는 한 방에 와해되고 만다. 한바탕 꿈속을 거닐다가 추락한 느낌이다.

 

삶의 가능성을 탐사하는 존재론이란  우리를 인도하는 빛이 아니라 모든 규정이 지워지는 어둠이다.”라는 말이 성큼 마음 깊은 곳을 깨어나게 한다. 존재론은 거절당한 자의 사유이며,  잡힐 듯 잡히지 않는 존재를 읽기위해서는 예술이 필요하다.”고 철학자 이진경예술 존재에 휘말리다에 썼다. 이렇게 생각하면 렘의 이 소설은 인간 삶의 존재란 무엇인지 분명하게 인식시키려했던 것이 아니라, 인간 존재의 취약함을 간취하고, 모호한 다의성 속으로 끌고 들어가려 한 것이라는, 존재의 확실한 이유를 찾기보다는 이유없이 말려들게 되는 운명적 사태를 보여주려 했다는 생각에 이르게 된다.

 

한 방에 와해되었다고 느낀 것, ‘앨리스타 웨인라이트의 소설 Being Inc.의 드러난 사기성, 그 실패란 뜻하지 않은 것을 보게 함으로써, 세계의 진실은 실패 속에 있음을, 비록 존재주식회사라는 과학의 성공을 향한 걸음에도 불구하고 예술은 실패를 향해 감으로써 진실을 보여준다는 정말의 존재론을 증명하는 것이라는 지점에 이르게 된다. 존재는 밝은 빛으로 비추면 달아난다고 한다. 인간 존재의 가변적이며 모호한 존재를 붙잡는 것은 이렇듯 실패의 예술을 통해서만 어렴풋 다가서는 것일 테다.

 

스타니스와프 렘의 소설들은 하나의 에피소드적 상상력이자 아이디어에 대한 실험 사고라 할 수 있을 것 같다. 을 불가해한 인간 존재를 탐험하는 미래의 철학자라 말하지만 나는 그를 타고난 예술가라 말하고 싶다. 그는 결코 근거의 확실성을 확인하고 진리와 거짓을 입증하는 데 관심을 두지 않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의 존재론을 설명하거나 주장하는 이가 아니라 단지 지금 여기없는 것들을 불러내는 예술가인 까닭이다. 뒤늦게 예술작품을 발견한 기쁨을 만끽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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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드르와 이폴리트 열린책들 세계문학 210
장 바티스트 라신 지음, 신정아 옮김 / 열린책들 / 201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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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치스러움이 내 시선을 동요케 하는구나, (...) 내가 정신을 잃었구나, (...).

얼굴이 붉게 달아오른다. 내 마음이 내 손처럼 결백하면 좋으련만! (...)

내 손은 순진무결하나, 내 영혼은 오점이 있다!” - 13에서

 

17세기 프랑스 고전주의 희곡작품인 장 라신의 비극을 읽게 된 이유는 프레데리크 그로의 정치, 사회철학서인 수치심에 대한 비평적 저술을 통해서다. 아무튼 이 책은 내게 무진장한 정치적, 윤리적 영감을 주었으며, 그 진술을 위해 이용된 저작들은 마치 읽어두어야 할 것 같다는 어떤 의무처럼 여겨졌던 까닭이다.

 

라신서문에서  여주인공(페드르;파이드라)의 충동은 자기 의지의 발로가 아니기에 죄의식의 순교자가 아니다.” 라고 말하듯,  죄의식과 수치심을 구분할 줄 알았다.  우리들은 자신이 했거나 방치한 행동에 대해 자신의 자유를 잘못 사용한 데 대해서는 죄의식을 느끼지만,  자신의 욕망에 대해서는 책임을 느끼지 않는다. 대신 자신의 안에서 낯선 기괴함으로 끓어오르는 충동에 휩싸일 때 우리는 수치심을 느낀다.

 

이 작품은 수치심에 대한 이야기다. 의붓아들인 이폴리트를 사랑하게 된 여인의 말하고 행동할 수 없는 은폐되어야만 하는 욕망의 이야기다.   페드르(Phaedra*파이드라)는 사랑의 정념에 빠지기 쉬운 동시에 그 정념을 고백하지 않을 정도로 강하진 않지만 이를 절대적인 도덕적 자질로 여기는 인물이다. 그럼으로써 이 끔찍한 정념을 자신이 지녔다는 이유만으로도 죽음과 맞바꿀 만큼 침묵을 지키려 한다는 점에서 끊임없는 내적 혼란을 겪는 여인이다.

 

때문에 불온한 사랑의 정념을 외부에 발설하거나 행위로 옮긴다는 것은 스스로 용납할 수 없는 것이기에 자신의 욕망을 가혹할 만큼 억압하며, 박해한다. 그녀에게 이 엄청난 정념의 고통은  너무 생생한 나의 상처에는 곧 피가 흘렀어.”라고 말할 정도이며, 황폐해지고 약탈당한 자아의 고통으로 죽음의 충동으로까지 나아가는 극심한 절망에 붙들려있다. 이러한 수치심을 무어라 불러야 할까? 이 작품에 주목한 이유이기도 한데, 16세기 데카르트 이후, 수치심을 의례화되고 억압적인 사회적 메커니즘에서 개인적 비극 속에 자리잡게 한, 즉  개인의 과도하게 예민한 감수성으로서 내면적 불안 속에 응축된 정서로 축소된 왜소한 감정을 반영한 작품으로 의심했기 때문이다.

 

페드르는 내면의 법정인 자신을 지켜보는 엄격한 눈의 감시를 두려워한다 나의 죄는 이제 도를 넘었다. 나는 숨 쉴 때마다 근친상간을 뿜어내는구나. (...) 불쌍한 것! 그런데도 살아있어? 그러고도 살아서 나를 낳아준 신성한 태양을 보고 있다고?” 처럼, 지엄한 신의 눈에 포획되어 있다. 물론 페드로의 근친상간이라는 욕망을 옹호하는 것이 아니다. 녀의 수치심이 지나치게 과도한 도덕성에 붙들려 자신을 죽음으로 몰아대는 그 윤리적 잣대의 불온함은 재()사유되어야 하는 문제라는 것이다. 페드르는 타자를 장악하려는 가해자로서 근친상간의 폭력적 힘을 행사하는 존재가 아니다. 오직 내면에 지닌 수치스러운 침묵으로 극심한 고통을 겪을 뿐이다. 우리는 자기의식의 완벽한 내적 판관이 될 수 없다.

 

내 의식과 분리되어 외재적으로 투사된 완벽하게 독립된 법정을 자기 안에 설립할 수 있는 인간이 있을 수 있나? 아마 불가능할 것이고, 설혹 있다고 주장한다면 그것은 인간이 아닐 것이다. 결국 이 엄격한 검열에 메인다는 것은 수치심을 개인의 심리로 위축시킨 까닭이 아닐까? 수치심의 사회적 역학관계를 배제함으로써 온전히 개인의 정서적 책임으로 몰아 댄 법과 죄의식의 확장 때문에 말이다. 근대 이후로 수치심을 치유해야 할 상처이고 청산해야 할 독성이자 뿌리 뽑아야 할 것으로 말하는데 익숙해진 오늘의 우리들은 수치심의 사회적 역학관계를 무시하려한다.

 

사실 페드르가 자신의 욕망을 발설하지 못하고 침묵으로 아파하는 것은 발설하는 순간 자신으로부터 세상이 모든 것을 빼앗아 가리라는 총체적 재앙의 두려움이다. 자신의 문제가 아니라 가족의 해체, 세상을 더럽힌 존재로 낙인찍힐 것이라는 공포다. 다시 말해 수치심은 사회적 메커니즘의 작동을 배척하고 사유될 수 없는 감정이라는 점이다. 작품은 테제가 사망했다는 전언이 전해짐으로써 페드르의 은폐된 정념이 사건화 된다. 남편의 사망 소식은 페드르의 유모이자 심복인 외논의 자극에 의해 그녀의 입을 통해 이폴리트가 발설됨으로써 급격히 전환되고, 급기야 아버지 테제의 죽음 이후 자신의 입지를 확실히 하기 위해 아테네로 출항하려는 이폴리트를 붙잡고 오랜 침묵 속에 잠겨있던 수치를 고백한다.

 

그녀의 이폴리트를 향한 사랑의 정념은 그야말로 밖으로 흘러넘치고 만다. 결코 누구도 들어서는 안 될 것을 말해버린 것이다.   내 수치를 고백했어, 희망이 나도 모르게 맘속으로 미끄러져 들어왔었다.”며 도주하는 자신의 정숙함이 전의를 상실했음을, 이 말을 당사자에게 발설함으로써 정숙함의 의무를 벗어 던진 것이다. 작가의 치밀함은 총 1654행으로 짜인 희곡의 딱 절반인 827행에서 극적 전환을 가져온다. 테제가 살아서 귀환하고 있다는 소식과 함께 남편 테제가 페드르를 향해 다가오는 것이다.

 

잠시 화제를 돌려서 이 욕망의 통제와 관련하여 상극에 있는 루크레티아의 신화 이야기를 살펴보는 것은 이 욕망이 수치심과 죄의 경계를 어떻게 분리하는 가의 하나의 사례가 되어 줄 것 같다. 동료 전우인 콜라티누스의 고결하고 완벽한 아내 루크레티아에게 느낀 시기어린 노여움으로 타르퀴니우스는 전장에서 이탈하여 늦은 밤 그녀가 홀로 있는 집에 찾아들어 여자의 정절이란 모두 허튼소리라며 미래의 보상과 편의로 유혹하지만 거절당한다. 루크레티아는 버티고, 함께 쾌락에 빠져들길 완강히 거부한다. 이때 타르퀴니우스는 치명적 협박을 가한다. 계속 거절하면 그대를 죽이고 남자 노예 한 명을 죽여 침대에 발가벗겨 나란히 눕혀 놓고 부정한 여인을 친구를 대신해 복수했음을 알리겠다고 죽음보다 더 최악의 일처럼 보이는 수치심 앞에 굴복하게 하곤 강간한다.

 


사실 욕망이란 언제나 우리 인간 안에서 끓어오르고 요구하는 터무니없는 타자다. 툭하면 우리를 넘어서고, 벗어나며, 초과하고 규정하는 괴물성이다. 억누를 길 없는, 우리 안에서 절대적으로 불복종하는 것이지만, 대부분의 인간은 이 충동을 주어진 환경에 맞추어 억제한다. 그런데 이 욕망을 소유했다는 것이 수치심을 갖게 하지만 단지 품었다는 이유로 책임을 져야하거나 죄가 되지 않는다. 경계는 그 통제의 문턱을 넘는 순간 혼란에 빠뜨려 난폭해지는 욕망이다. 통제에 불복종해 문턱을 넘어 행해질 때 그것은 죄가 되어 처벌의 대상이 된다. 그런데 이 답변은 석연치 않다. 수치는 발설됨으로써 죄가 되는 것인가? 그렇지만은 않다. 그렇다면 법의 설정이 있음으로써 죄가 된다는 것인가? 수치심이 법의 지대로 나아감으로써 죄가 된다는 얘기인데, 그럼 수치심이라는 정념의 효용은 무엇인가?

 

페드르는 오직 너를 사랑해라고, 물론 근친상간에 해당하는 언어이지만 그 발설이 중대한 문제가 된다. 이것을 돌아온 테제에게 감추는 것은 그녀의 충성스러운 유모 외논의 비열한 계략, 페드르의 언어로  불행한 왕자들의 약점을 살찌우고, 그들의 마음이 이끌리는 비탈길로 몰고 가서, 감히 그들 앞에서 범죄의 길을 평평하게 닦아 놓는 자의 간언으로 인해 비극을 고조시킨다.  외논이 테제에게 이폴리트가 페드르의 침실을 넘봤다고 간음의 죄가 있었다고 거짓 간언하는 하는 것이다. 이 사실을 알게 된 페드르는 외논에게 분노를 쏟아 놓는다.  가증스러운 아첨꾼, 하늘의 분노가 왕들에게 내릴 수 있는 가장 치명적 선물을. (...) 귀가 솔깃한 간언들이야말로 잘 다스려진 도시와 인간들의 거주지를 파괴하는 것이라며 독설을 퍼붓는다.

 

외논은 바다의 파도 한 가운데로 들어가 자결한다. 그 정당성 여부는 차치하고 자기 죄에 대한 죗값을 지불한 것이다. 사실 아첨꾼들, 간신배들과 관련하여 권력의 나르시시즘 행태 등 할 말이 무진장 있을 수 있지만 후일의 기회로 미룬다. 수치심의 효용은 조심성과 신중성 등 행위에 앞서 도덕성을 검열케 하여 자신과 타인의 세계에 위협의 요소를 제거하는 윤리적 성격이다. 페드르는 의붓아들인 이폴리트에 대한 사랑의 정념을 가졌다는 자신의 수치심을 테제에게 적극적으로 말하지는 않았지만, 외논의 거짓된 누명의 말을 부정하지도 않음으로써 이폴리트는 아버지 테제의 분노에 의해 추방되고, 마차를 달리다 어이없는 죽음을 맞는다.

 

수치심으로 시작된 이 비극작품은 자신이 방치한 행동에 대한 책임인 죄와 그 응분의 댓가로 맺는다. 에우리피데스의 비극 작품에서 페드르는 목을 매고, 세네카의 페드르는 검으로 가슴을 찔러 자결한다. 라신의 페드르는 독약을 마시고 스스로 생을 끝낸다. 수치심은 죄가 되어 소멸한다. 그런데  그토록 음험한 행동의 기억마저 그녀와 함께 사라져 버릴 수 없는가!”라는 테제의 마지막 방백은 기묘한 모순의 언어가 되어 소멸되지 않는 것임을 암시한다. 수치심의 성분은 결코 죄로 환원되지 않는 것이다. 정말 끈질기고 집요한 감정이다. 수치심은 죽어서도 사라지지 않고 세계를 맴돈다. 여기서 루크레티아의 자결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게 되는데, 루크레티아는 자신이 강간당했음을 남편과 모든 시민에게 알리고 자신의 수치심을 소멸시키기 위해 자살한다. 프레데리크 그로는  당사자의 죽음(루크레티아의 자살)은 수치를 죽이는 유일 방법이라 말하면서, 이것이 민중적 저항의 불씨가 되었고, 공화국의 수립, 즉 정치의 성적 계보로서의 토대가 되었다고 주장한다.

 

라신의 페드르 또한 페드르의 죽음으로써 테제는 왕권의 재정립과 후계의 적통성 확립을 이룸을 마지막 문장에 담음으로써 성의 정치적 계보를 잇는다. 이러한 측면에서 이 작품이 정념 비극의 최고봉이라는 당대 비평계의 칭송이나, 이보다 더 미덕이 더 많은 조명을 받은 작품을 결코 쓴 적이 없다는 사실이라고, 모든 이들이 필경 호의적인 평가를 내릴 것이라 애착과 자부심을 보인 작품임에도 불구하고 오늘의 관점에서 비판적 시선을 가질 수밖에 없게 된다. 정치의 성적 계보라는 의미는 남성과 여성의 고정적 자리를 틀 지우는 젠더의 고착화이고, 정숙한 여성의 성이 정치적 안정을 담보한다는 논리를 확대 생산하기 때문이다.

 

사실 이 작품은 애매한 경계에 서있다. 사랑의 정념의 대상을 근친상간을 전제하는 대상으로 세움으로써 금기를 방어막으로 하고 있다는 점이다. 때문에 이 작품의 주인공 페드르의 수치심은 작가의 죄의식과 분리된 의도에도 불구하고 애초에 죄의 개념을 떨어버릴 수 없었다는 한계를 느끼게도 한다. 이 작품은 수치심과 죄라는 주제 말고도 악의 이행과 자기 행위의 정당화라는 관점에서 논의할 중요한 주제도 있다.

 

이는 이폴리트의 관점에 스며있는 폭풍우 이는 바다의 해안에서 폭풍 속 타인의 고통을 관조하는 방관자의 논리가 이해 당사자의 논리로 변화할 때의 인간의 비열한 자기 합리화와 그에 내재된 괴물성이다. 별도의 지면에서 다시 논의할 일이 있을 것 같아 후일의 사유로 미루어둔다. 어쩌면 이 작품은 페드르의 유모가 자신의 수치심을 자책하는 페드르를 향해, 사랑에 패한 사람이 어찌 마마 뿐일까요? 인간이라면 약점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것이지요. 인간인 이상 마마도 인간의 운명을 따르세요.” 라는 말이 독자이자 관객인 우리 유약한 인간들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말이지 않을까 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해소할 수 없는 정념의 내적 명령에 마주했을 때 과연 극복하는 것이 가능한 것인지를 골똘히 생각해보지만 내겐 떠오르는 방안이 없다. 아마 페드르와 다를 바 없지 않을까?


참조: 페드르(그리스 신화이름;파이드라,Phaedra)관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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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산드라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41
크리스타 볼프 지음, 한미희 옮김 / 문학동네 / 201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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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와 화재, 부패의 맛이 나는 이름을 계속 입에 올리려면

인간이 발휘할 수 있는 것 이상의 인내심이 필요할 것이다.” - 91쪽에서

 

그래, 너무 더럽고 추잡하며 역겨운 것들을 입에 계속 올려야 한다는 것은 정말 수치스럽고 분노가 치미는 일이다. 하지만 그것들의 무례함과 무도함을 처단하기 위해 우리들 자신의 입을 더럽혀야 하는 것은 고통이요, 인내를 요구한다. 트로이의 예언자, 고대 신화 속 여인을 호출하여 그로부터 오늘의 불쾌한 현실에 은폐된 의미들을 해독하는 일은 결코 헛된 행위가 아닐 것이다.

 

카산드라는 예언자이자 진실의 증언자로서의 인류 역사 속에서 그 이름이 끊임없이 계승되어 온 하나의 개념이 된 존재이다. 트로이의 왕 프리아모스와 왕비 헤카베의 딸이자, 사제로서 예언자의 길을 걸었던 여성이다. 크리스타 볼프는 이 신화 속 인물을 통해 모호하게 감지되지만 그 실체와 동력이 무엇인지 알 수 없는 불투명성을 먹고 자라는 모든 차별 의식에 은닉된 강압하는 불의(不義)의 힘을 적나라하게 볼 수 있고 경험할 수 있도록 실재를 드러냄으로써 눈멀고 귀먹은 민중의 잠자는 의식을 흔들어 깨운다.

 

소설은 스스로 자멸, 패망의 길로 내닫는 트로이 정치권력의 인식 부패와 민중의 우매함을, 권력이 저지르는 날조와 기만, 그 징후들에 저항하는 카산드라를 통해 자신들의 죽음이라는 상상할 수 있는 가장 큰 상실이 올 때까지 진실을 회피하는 인간군상의 어리석음에 슬퍼하며, 그 전환되지 않으려는 인식에 분노케 한다.

 

전쟁이 시작되기 전에 이미 트로이 사회는 적을 만들어내고 그 적에 대항하기 위해 언어조작과 역사왜곡, 여론조작 등 다양한 사전 조처를 취한다.”

 

트로이가 한 문명에서 완전히 지워져버리기까지 진실을 추구하는 의지와 용기들이 어떻게 허물어지고, 권력 스스로가 미쳐 날뛰며 멸망의 길을 향해 달려가는지 그 점진적 부패의 양상을 목격하게 된다. 나는 이 작품을 여성주의적 시선을 넘어 정치사회적 삶의 형식이라는 관점에서 독해하고자 한다. 오늘 우리네 정치적 현실에서 빈번하게 수치심을 느끼게 하는 외교의 실패, 그 천박성이 어떻게 감추어지는지를 이제는 민중 대부분이 잘 알고 있을 정도가 되었다. 소설은 패망해 그리스군에 의해 포박되어 미케네 항구에 도달한 죽음을 앞 둔 카산드라의 10여 년간의 트로이에 대한 정치사회적 정황에 대한 회고로 시작된다.

 

아마 트로이 자멸의 징후를 보인 시발점일 것이다. 헬레스폰토스 해협을 오가는 해상 권리의 협상을 위한 그리스로 출항한 첫 번째 배로 상징되는 외교적 실패를 가리기 위해 조잡하게 꾸민 이야기를 통해 실정을 감추려한 행위이다. 극비임무를 띠고 출항했던 왕의 사촌 람포스는 협상에 실패하고 그리스인 사제 판타오스와 함께 귀항한다. 사제 하나를 끌고 오고자 델포스로 간 것이 아님에도 자기들끼리 똘똘 뭉친 폐쇄 집단인 그들이, 절반은 실패한 사업에서 뒤늦게 허풍을 떨며 첫 번째 배를 만들어낸 것이다. 협상은 결렬되었으며, 왕의 이미지는 실추되었다. 실패를 감추기 위해 명분을 만들어낸다.

 

왕의 누이인 헤시오네가 스파르타인 텔라몬에게 납치당했다는 날조된 명분을 내세워 왕이 누이를 찾지 않는다면 트로이의 체면이 서지 않는다고 두 번째 배를 띄운다. 민중들은 깃발을 흔들고 환호한다. 헤시오네가 아니면 죽음을!”, 두 번째 배가 돌아왔다. 헤시오네는 보이지 않았으며, 배에 동승했던 예언가 칼카스도 보이지 않았다. 이제 헤시오네의 귀환 문제는 뒷전이 되고, 당장 칼카스의 문제를 해결해야 했다. 국가기밀을 속속들이 아는 트로이의 존경하는 예언가가 돌아오지 않은 문제를 어떻게 해명할 것인가?

 

그리스인들에게 인질로 잡혔을까? 트로이를 배신하고 그리스에 투항했다고 할까?, 민중이 원한다면 그렇게 믿게 하면 된다. 그리스인에게 나쁜 평판을 뒤집어씌우면 된다. 사회에는 거짓과 기만이 점령하고 민중에게는 침묵이 강요된다. 이제 파괴된 정의와 진실, 그리고 거짓과 기만은 반복 될 터이다. 낙관적 예언을 강요한 왕실 권력의 문책이 두려워 칼카스는 그리스에 남기로 결정한 것이었다. 소설은 이 불의한 정치적 결정에 저항할 때마다 카산드라의 통제 불능의 착란과 발작으로 그 부당함의 상징적 기표를 반복한다. 카산드라는 사람들이 너무도 명료한 사건의 적나라하고 무의미한 실상을 깨닫지 못하는 것을 이해할 수 없어한다. 어떻게 내가 본 것을 모든 사람들이 볼 수 없는지, 대체 그들은 무엇을 보지 않으려는 것일까? 바로 자기 자신을 보지 않으려는 그 천박한 본성을 카산드라는 후일 이해하게 된다.

 

이 소설이 흥미로운 건 크리스타 볼프가 본 1980년 침몰을 향해 돌진하던 동독사회건, 2024년 역사를 왜곡하고 진실을 조작 날조하는 한국의 정치권력이건 카산드라가 회고하는 소설 속 이야기가 지나칠 만큼 닮아있다는 것에 있다. 아직 그리스군이 트로이와 전쟁을 벌이기 전이다. 메넬라오스가 트로이에 우정의 손님으로 찾아 왔다. 왕실은 성대하게 그를 맞이하지만, 곧 트로이의 왕실 권력은 자기 거짓을 완성하기 위해 그리스의 이 사절에게 적대감으로 전환한다. 이제 어느 누구도 메넬라오스를 우정의 손님으로 불러서는 안 된다고, 단어의 사용조차 불가능함을 을러댄다. 사람들은 갑자기 의심의 대상이 되고, 궁정 경비대 배지를 단 인간들은 안하무인으로 날뛰기 시작한다. 경비대장 에우멜로스와 그에 붙은 무리는 갈수록 소란스럽고 무례해진다.

 

에우멜로스와 결탁한 파리스는 뻔뻔스러움이 극에 달하고 방자함을 거침없이 행한다. 왕의 누이를 적의 손에서 구할 사람은 바로 나, 파리스라 주장하며, “그들이 누이를 못 내주겠다면 다른 여자, 더 예쁜 여자가 있다, 세 번째 배를 출항시켜야 한다고 패망의 길로 향한다. 부패한 권력의 거짓을 덮기 위한 또 하나의 거짓말이 보태지는 순간이다. 카산드라는 그르렁거리며 입에 거품을 물고 배를 보내지 마라!”, 부당함을 직언하지만 감금당하고 만다. 이제 카산드라는 진실의 말이 수용되지 못하는 것에 무력한 항의를 하는 자신의 가식을 끝내기 위해 광기를 선택한다. 참을 수 없는 고통에서 자신을 지켜줄 수 있는 것이 오직 광기에 매달리는 것뿐이었음을.

 


이제 소설을 예측할 수 있는 단계가 된다. 지금 한국에서 벌어지는 실상을 그대로 대입하면 되었기 때문이다. 에우멜로스의 부하들이 일했다. 추종자를 만들고 (...) 핵심은 적을 비방하고, 이적 행위의 혐의가 있는 사람들을 의심하는 데 있었다.”, 그리고는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고 적을 자신들의 행동기준으로 삼고 전쟁을 준비한다.” 그들에게 왜 적이 필요했을까? 조작과 기만, 거듭되는 거짓이 드러나 공적(公敵)이 되는 것을 회피하는 절대적 수단인 까닭이다. 세 번째 배가 출항하고 돌아오지만 역시 헤시오네는 없으며, 유괴했다는 헬레네는 파리스의 방탕한 여정에서 이집트의 왕에게 빼앗겼다. 다시 거짓말이 선전된다. 스파르타 왕의 아내 헬레네를 유괴했으며, 그래서 왕 프리아모스가 누이의 납치로 당한 굴욕을 갚았다. 이제 모든 사람들의 입에는 족쇄가 채워지고, 밀고의 눈초리가 에워싼다. 진실의 목소리는 위협과 억압으로 사라지고 거짓이 온 세상을 뒤덮는다.

 

전쟁은 헬레네를 돌려달라는 스파르타 왕의 요구를 거절함으로써 발발했다. 그러나 헬레네는 트로이에 없다. 멍청한 놈! 파리스가 이집트 왕에 빼앗겼으니. 허깨비 때문에 하는 전쟁은 질 수밖에 없어요. (...) 왕이 심각하게 물었다. 왜지? 우리가 할 일은 병사들이 계속 허깨비를 믿게 만드는 거야.“, 존재하지 않는 인간을 두고 벌여야 하는 전쟁, 누적된 거짓, 그 추악함으로 인해 자신들이 절멸할 때에 이르기까지 십 년간의 전쟁을 벌이는 것이다. 이제 전쟁 권력 편에 서지 않는 사람은 적을 돕는 이적 행위자로 간주되는 것으로 둔갑한다.

 

거짓과 왜곡, 날조로 무능과 부패를 가려야 하는 권력은 바로 그것을 은폐하기 위해 수없이 거듭되는 동일한 기만의 패턴을 반복하게 된다. 이것을 더 이상 거듭할 거짓 수단이 바닥을 보일 때 그들은 전쟁을 야기하고 그를 통해 되돌아 올 처벌을 회피하려한다. 정말 끔찍한 수순이다. 이때 우매한 민중들은 전쟁에 끌려들어가 바로 그 우매함의 죄 때문에 공멸해야 한다. 이것이 역사가 후대에 가르쳐주는 교훈이다. 이어가는 소설 속 문장은 이렇다.

 

전쟁을 모르는 사람들의 거짓말을 점점 믿는 것을 보았다. 전쟁을 모르는 사람들이 전쟁에서 싸우는 사람들을 치켜세웠다. (...) 인간의 본성을 경멸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카산드라는 뒤통수가 비겁한 민족이라고 자기모멸, 수치심에 잠긴다. 보이지 않고 냄새 맡을 수 없고 들을 수 없으며 만질 수 없으면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것, 명확한 구분 사이에 짓눌린 다른 것은 존재 않는다고 생각하는 것이 바로 무구함이며, 안다고 믿는 해악이다. 민중이 이러한 상태에서 벗어나려 하지 않는 한 구토나는 권력을 토대로 한 삶의 형식은 한 치도 바뀌지 않을 것이다. 무구함의 반대말은 통찰력이라 했다. 카산드라는 자멸의 길을 걷는 트로이의 실상을 냉철하게 통찰하는 여성이었다. 그녀는 지속하여 진리를 말하지만 아무도 그녀의 말을 들으려 하지 않았으며, 그녀의 육신을 감금하고 자신들의 세계에서 격리 추방했다.

 

카산드라가 인간을 향해 고통스럽게 외치는 이 문장은 오늘의 우리네 실체를 거울처럼 보여준다. 사람들이 서로에게 저지르는 만행은 끝이 없으며, 우리는 고통의 최고점을 찾기 위해 다른 사람의 내장을 헤치고 그의 머리통을 깨뜨릴 수 있다는 걸 인정해야 한다. 나는 우리라고 말한다. 우리를 말할 때가 가장 힘들다. ‘짐승 아킬레우스를 말하는 것이 우리를 말하는 것보다 훨씬 쉽다.”.

 

볼프는 카산드라를 통해 일리아드의 영웅 아킬레우스를 혐오스러운 짐승으로 명명한다. 어떤 숭고한 목적도 없는, 단지 자신이 겁쟁이가 아님을 전시하기 위해 극악하게 싸우고. 동성애자처럼 보이지 않기 위해 여성들을 능욕하는 추악한 인간으로 이해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트로이 또한 아킬레우스와 전혀 다를 것이 없는 역겨운 집단이다. 서로를 닮은 존재들. 카산드라는 사랑하는 사람 아이네이아스가 새로운 세계를 향해 동행의 손길을 내밀었을 때 거절한다. 그녀는 그 이유를 언어로 드러내지 않지만, 그 하나는 영웅이라는 남성적 조건을 세우기 위한 여성의 희생, 노예화의 세상에 반대하기 때문이고, 또 하나는 증인이 되리라, 내 증언을 요구하는 사람이 단 한명도 없을지라도 끝까지 증인이 되리라.”는 마지막 구절처럼, 그녀는 그리스 미케네까지 끌려와 죽음에 이르기까지 트로이의 운명을 마지막까지 증언하는 증인으로 남기 위함이다. 그녀는 희망한다. 미래에는 승리를 삶으로 변화시킬 줄 아는 사람들이 나올지 모른다고.

 

2024, 오늘의 세계에도 도처에서 수많은 카산드라(낸시 프레이저, 에바 폰 레데커, 목수정, 정희진, 가야트리 스피박, 도나 해러웨이, 주디스 버틀러...)들의 목소리가 깨어나라고, 삶의 형식을 바꾸라고, 새로운 세계를 우리의 손으로 만들 수 있다고 울려 퍼진다. 그러나 아무도 귀 기울이지 않거나 사욕에 가득 차 기만적 반박을 가한다. 어쩌면 볼프가 새롭게 재탄생시킨 카산드라는 바로 이러한 각성을 촉구하는 가장 우아한 방법일 것이다. 문학이 하는 가장 위대한 기능으로서. 민중의 삶의 향방을 결정하는 전환점에 섰다고 느낄 때, 이 소설은 우리들이 행할 방향을 결정하는 데 중요한 이정표로서 힘이 되어 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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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 같군, 내가 죽고 나도 수치는 살아남을 것 같다.” -프란츠 카프카, 소송

 

프랑스의 사회철학자 프레데리크 그로는 그의 저술 수치심은 혁명적 감정이다에서 장 폴샤르트르  우리는 대중 앞에서만 수치심을 느낄 수 있다.’ 빈틈 많은 주장을 인용하면서 타자는 꼭 외부에 있는 것이 아니다라고 인간 내부에 있는 수많은 눈과 같은 무엇이 있음을 지적한다. 요즈음 많은 사람들이 사욕으로 똘똘 뭉친 한 인간의 끔찍한 짓, 비열한 짓거리와 그 타락하고 부패한 처신을 보며, “대체 저 인간은 어떻게 수치심도 안 느끼고, 자기 눈길을 견딜까?”라며 수치심이 부재한 인간에 대한 의아의 탄식과 분노를 쏟아낸다.

 

프란츠 카프카의 단편작품에 개의 연구(이하 연구로 표기함)라는 의미심장한 미완성 소설이 있다. 카프카의 생애 말년 소설인데, 주인공인 는 작가를 대변하는 유대인이다. 이 개는 그 유례가 명확히 밝혀진 존재인데, 갈색 노트로 알려진 1922년에 기록된 글을 담은 카프카의 네 번째 노트에 제목도 없이 미완성으로 써진 이야기다. 카프카는  이것은 전기가 아니다. 하지만 더없이 축소된 요소들에 대한 발견이자 탐구이다.”라고 썼다. 이 말은 그의 생애를 장악한 당치 않는 모욕으로 벗어날 수 없는 해결 불가능한 수치심에 고뇌했던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질문의 집요한 연구임을 의미한다.

 

조금 사유를 건너뛰어, 유대인을 향해 적들이 사용하던 ()’가 왜 프란츠 소설의 주인공이 되었는가부터 이야기를 풀어가야 할 것 같다. 개는 주변의 부정적 시선이 유발하는 수치스런 단어다. 그런가하면 이 단어를 유대인 내부에서 다른 유대인을 향해서도 뱉어내는 단어이기도 했다. ()들과 함께 누워있으면 벼룩이 옮는다.”. 프란츠와 우정을 나누는 동유럽 출신의 유대인 친구인 뢰비를 향해 아버지 헤르만 카프카가 모욕적 언사로 내뱉기도 한다. 프란츠는 아버지에게 격렬한 분노를 터뜨리고, 즉각 이 말을 기원으로 문법적으로 반박할 수 없는 두 개의 문장을 만든다.

 

그것은  벼룩이 옮은 자는 그 자신이 벼룩이다.”와  개들과 함께 누운 자는 그 자신이 개다.”이다. 아마 카프카를 읽은 사람이라면 모두 아는 잠에서 깬 잠자가 자신이 거대한 갑충임을 발견하는 변신이 바로 변형시킨 첫 문장을 출발점으로 한 것임을 알아차릴 것이다. 그리고 후자는 여러 작품에 사용되는 데, 그 첫째가 소송의 마지막 부분인  개 같이죽는 자신의 모습이고, 두 번째가 <유형지에서>의 탐험가 행위다.  내가 이 일을 보고도 묵인한다면 난 개다!”라고 말하면서 곧 네 발로 달리기 시작하는 장면이다.

 

그리고 그 대단원이 바로 연구. 즉 유대인들 자신들이 처한 해결 불능의 수치심에 작동하는 메커니즘의 집요한 탐사 이야기다. 제목이 아주 얄궂은 데, 이는 두 번째 문장을 변형한 2차 변형문장으로부터 출현한 것이다.(이 모두 카프카의 일기와 노트에 근거한 것이다.)  유대인이 개라면 개는 유대인이다.”라는 것이다. 즉 소설 연구의 주인공인 개는 바로 유대인인 작가의 분신이라는 뜻이다. 여기서 소설의 줄거리를 장황하게 늘어놓을 생각은 추호도 없다.

 

다만 이 이야기는 개를 주인공으로 한 우화가 절대 아니며, 절망한 유대인 남자가 또렷한 정신으로 내면으로부터 세세하게 관찰한 구체적 현실의 이야기라는 것만을 밝혀둔다.  사회적으로 아주 그럴듯한 직책을 맡고 있던 나였지만 말이다. 아니 매우 자주 주변의 친밀한 관계에마저 어떤 불편한 감정이 깃들어 있었다. 그래서 내 동료들을 그저 보기만 해도, 어떤 새로운 각도에서 보는 것만으로도 나는 불편함과 두려움, 당혹감을 느껴야 했다.”  소설의 이 한 단락만을 인용해도 곧바로 유대인이라는 단어가 텍스트에서 절로 떠올라 유령처럼 쫓아 버릴 수 없음을 경험하게 된다.

 

자기애성 수치심을 말하기 위해 에둘러왔다. 수치심은 대중 앞에서만 느끼는 것이 아니라 자기 안의 타자로 인해서 느끼는 것이라는 말로 다시 돌아가면, 카프카는 자기의식의 판관이 될 수 있는 완벽하게 분리된, 즉 외재성처럼 투사하는 내면의 법정이 있었다. 압도하는 도덕적 의식이라는 내면의 지엄한 눈에 사로잡힌 존재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사실 우리들은 내면에 무수한 타자를 지니고 있다. 프레데리크 그로가 자아의 형태에 따라 세 가지 수치심을 설명하는 글이 카프카로 냉큼 건너뛰게 했는데, 이 널뛰기의 욕구는 현실 한국사회의 수치심 부재, 혹은 수치심을 자기 것으로 삼을 줄 모르는 원초적 나르시시스트, 정신이 성장하지 못한 어린아이 짓거리에 대한 그 불모성의 이론적 확인 가능성 때문이었다.

 

프란츠 카프카는 삼중의 수치심에서 해방되지 못했는데, 개인성을 주눅 들게 하는 주변 환경의 시선이 일차적이고, 그 수치심의 근원인 유대 집단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주류 사회에 동화(同化)하려는 행위에 내재된 부당함을 지지하고 승인하는 스스로에 대한 수치심이 이차적이며, 동화를 희구하는 유대인과 다른 유대인이 서로 경멸하는 유대공동체 내부에서 벌어지는 꼴사나움, 스스로에게 눈먼 바로 그들과 동족이라는 데서 연원하는 수치심이다. 이처럼 한 인간은 온통 도덕의식에 휩싸여 인간 실존의 고통에 대한 후대를 향한 풍부한 탐구의 초석을 남겼는가하면, 오늘 이 땅의 어떤 인간들은 이 엄중한 실재하는 도덕적 정서가 어떻게 부재할 수 있는가의 의문을 던지게 한다.

 

이 물음이 중요한 이유가 있다. 수치심이란 개인의 심리 문제가 아니라 사회적 역학에 달린 것이기에 카프카를 에워싼 수치의 고뇌는 자신과 가족, 유대 집단에 대한 연민과 유대를 토대로 한 것일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때문에 수치심이 부재하다는 것은 애초에 사회 공동체에 대한 자신의 뿌리를 내리지 않거나 않으려는 인간임을 의미한다는 점이다. 즉 공동체의 이익과는 무관한 사적 이익에 집착하는 무리는 절대 수치심이란 것을 갖지 않는다는 것이다. dl 이 수치심을 야기하는 내면에 대해 좀 거칠게 프로이트의 자아 분류를 사용한다면 초자아, 이상적 자아, 자아 이상’, 세 유형으로 분류할 수 있다.

 

초자아란 나를 제압하는 내면의 판관으로서의 눈이다. 즉 나의 도덕적 의식을 키우는 기준이기에 내면의 법정이 야기하는 수치심은 내 행위에 앞서 조심성과 신중함을 부여해 부당하거나 불의한 것을 하지 않도록 제어하게 해준다. 사실 수치심을 좋은 것 나쁜 것이라 말하는 것이 그리 적절한 표현이 되지는 않겠지만, 이를테면 윤리적 수치심이라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수치심이 마냥 유익한 것만은 아니어서 엄격한 판관일 경우 지나치게 삶을 옥죄게 되어 과잉의 수치심, 즉 굴종이 예사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사회적 문제를 크게 야기하는 것은  이상적 자아 또는 자기애성 자아란 것이다. 바로 지금 한국의 정치권력에서 볼 수 있는 것인데, 자신의 정신이 전능한 힘을, 완벽히 제어할 수 있는 전제적 자아를 지니고 있다는 환상을 지니고 있음을 의미한다. 해서 이 전능함이 현실의 벽에 부딪칠 때 자기애성 수치심은 손상을 입게 되고, 패배의 자각을 하게 한다. 이때 이 이상적 자아는 스스로에게 수치심을 허용하지 못하게 하는데, 바로 손상된 상처를 회피토록 하는 것이다. 자신의 무가치함을 참을 수 없는 전제적 자아이기에 이 수치심은 곧바로 타인에게 전가시키는 작업에 돌입하고, 타인을 향해 고함과 욕설을 퍼붓는다. 다시 말해 자신을 희생자로 여기고 자기애성 자아를 쓰다듬는 것이다. 이상적 자아에 결박된 이 자아를  원초적 나르시시즘, 또는 광적 자기애, 아기 폐하로 부르는 이유이다. 학교 폭력의 주체인 아이들, 제왕처럼 군림하려는 작금의 검찰 독재 권력 집단이 수치심이 부재한 뻔뻔함으로 일관하는 것이 바로 이 자기숭배라는 얼빠진 넋을 먹고 자라기 때문이다.

 

이것은 프란츠 카프카를 억압하던 반사된 수치심이기도 한데, 바로 주류 사회에 동화하려는 유대인들에게서 발견되던 그것이기 때문이다. 헤르만 카프카로 대표되는 유대인이면서 반유대주의자인 인간, 프란츠는 아버지로 상징되는 이 어리석음에 대한 수치심과 초자아로서 법이라는 사회적 주류의 시선이 부여하는 수치심에 얽매여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여기에 자아-이상이라는 타인들의 눈에 보이고 싶거나 그들 담론 속에 어울리고 싶은 모습으로서 자아인, 사회적-모델로서의 실패로 인한 수치심, 즉 자기 비하 메커니즘의 작동으로 인한 수치심에 더불어 얽혀있음을 자각하는 것이다. 사회-이상적 수치심은 그 메커니즘의 본질로 인해 프란츠 개인이 돌파해 낼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불능성으로 인해 그의 모든 연구는 실패할 수밖에 없는 숙명을 지니고 있었던 것이리라.

 

프레데리크 그로는 이상적 자아라는 자기애성 인격장애의 일화로 199319일 프랑스에서 발생했던 아내와 두 아이의 살해, 그리고 부모와 개까지 살해한 장클로드 로망이란 인물을 소개하는데, 이는 후일 에마뉘엘 카레르의 실화소설 L'adbersaire으로 알려져 제법 많은 이들이 알게 된 사건이기도 하다. 가짜 의사 면허, 국제 보건기구 관리라는 날조된 삶으로 점철된 거짓말의 악순환을 거듭하던 인간의 이야기다. 자기 전능성의 손상이 전부 외부의 탓으로 전가되어 기만적 삶이 축적된, 가면이 자신의 얼굴이 된 인간이 종국에 돌이킬 수 없게 되자 벌인 희대의 파국적 사건이다.

 

이 이야기는 안느 브레스트의 소설 우편엽서에 등장하는 유대인 에브라임 라비노비치라는 인물을 호출하게 하는데, 바로 주류사회에 동화하기 위해 유대인의 표식을 알아차릴 수 있는 자신의 이름을 프랑스식으로 바꾸려하고, 프랑스인이 되기 위해 귀화신청까지 하는 사람이다. 독일의 프랑스 침공이 눈앞에 다가오고 반유대주의 열풍이 불 때조차 그는  이 모든 건 파리로 쳐들어 온 독일 출신 유대인들 때문이야. 프랑스가 침범 당했다고 느낀 거지, 그래. 그게 맞아.” 라며, 붕괴된 자아를 남의 탓으로 싸매려 한다. 이 자기애성 자아인 이상적 자아는 수치심을 수용하지 못하기에 결국 가족과 자기 파멸이 눈앞에 다가올 때까지 현실을 이해하지 못한다. 가장이 이러할 때, 나아가 국가의 리더가 이렇게 자기애성 자아에 매몰되어 있을 때, 가족과 국민은 파멸에 끌려들어가게 된다.

 

연구의 개는 철학자이자 현자이다. 작가의 이 지적 분신은  내가 아직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그 공동체의 모든 근심을 공유하면서 개들 중에서도 개였을 당시를 뒤돌아보며 세밀히 관찰해 본 결과 애초부터 거기에 뭔가 비정상적인 것, 작은 균열이 있었음을 알게 되었다.” 소설의 도입부에서 무엇을 말할 것인지를 미리 고지하고 시작한다. 카프카는 자기 자아의 성분과 그 작동 메커니즘을 간파하고 있었다. 소설 연구는 유대인이라는 단어에 깃든 끊임없는 억제의 역동성에 작용하는 요소, 힘들을 집요하리만큼 꼼꼼하게 질문하고 답하는 치열한 자기 탐사다.

 

늦었지만 오늘 우리 사회가 잊어버리거나 상실한 것이 무엇인지 스스로 성찰해 볼 때인 것 같다. 우리들은 수치심을 느끼고 있는가? 프란츠 카프카의 문학 전부가 온통 자신과 공동체 내면의 성찰인 것에 동종의 인간으로서 겸허와 경외를 느끼게 한다. 더 이상 이 땅에서 수치를 모르는 것들!’이란 외침이 나오지 않도록 하기 위해 다시금 나를 돌아보는 시간을 갖는다.



참고 문헌 (이 글은 프레데리크 그로와 마르트 로베르의 아래 책에 많은 부분 빚을 졌습니다.)


1) 프란츠 카프카 프란츠 카프카, 현대문학, 세계문학 단편선37

2) 프레데리크 그로 수치심은 혁명적 감정이다, 책세상

3) 엠마뉘엘 카레르 , 열린책들

4) 안느 브레스트 우편엽서, 사유와공간

5) 프란츠 카프카 소송, 문학동네

6) 마르트 로베르 프란츠 카프카의 고독, 동문선

7) 막스 브로트 나의 카프카, 출판사 솔

8) 장 폴 샤르트르 존재와 무, 동서문화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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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치심은 혁명적 감정이다
프레데리크 그로 지음, 백선희 옮김 / 책세상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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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우리는 수치심의 위기를 지나가고 있다. 무례함이 부상하고, 천박함이 번성하고, 뻔뻔함이 늘어나며, 조심성, 수줍음, 절제, 거리낌은 이제 통용되지 않는다. (...) 이 세계의 위기가 있다면 그것은 무엇보다 수치심의 위기다.”

- G. Hanus, A.Finkielkraut <레비나시아 학습 노트>에서


책은 수치심에 대한 구체적 메커니즘을 다룬다. 그러기위해 수치심의 역사 궤적을 통과하고, 그 변화하는 개념 아래에서 사회적 모멸이며 사회적 사실로서 개인과 집단을 감금하는 악으로 작동하는 수치심의 유형을 탐사한다. 그리고 그 수치심을 도치, 전복, 파괴, 정화함으로써 윤리적 힘, 혁명적 힘의 동력으로 발현될 수 있음을 역설한다.

 

모두(冒頭)의 인용 문장처럼 오늘 우리들은 그야말로 수치심 위기의 시대에 살고 있다. 가치론적 다수인 소수 기득권자들의 뻔뻔함과 몰염치와 무례가 이 세계를 점령하여 곳곳에서 수치도 모르는 것들!’이란 분노의 외침이 대기를 가득 채우고 있다. 그런가하면 국제외교무대에서 이것들의 천박함은 국민들의 몫이 되어 수치심을 이중으로 겪어야하는 고통까지 안긴다. 이것들은 수치심을 알지 못하기도 하지만, 성장하지 못한 정신적 유아에 머물러 광적 자기애로 자기의 무가치함을 자각하지 못할뿐더러 그 저열함을 타인의 탓으로 쏟아내기에 수치심이 이것들의 내면에서 어떤 조심성이나 신중함을 만들어내지도 못한다.

 

수치심이란 무엇인가? 오늘의 수치심은 신자유주의가 지구촌을 휩쓸기 이전의 것과 그 성분이나 형식이 다르다. 개인과 가족, 가문의 명예가 더럽혀지고 상처입고 훼손되는 명예의 실추에 따르는 전통적 수치심은 이제 존재하지 않는다. 16세기 데카르트는 수치심은 자기애에 토대를 둔 슬픔으로 비난받으리라는 생각에서 온다.”정념론에 썼다. 자본주의 발흥과 시기를 함께하며 수치심은 이렇게 소심한 불안 속에 응축된 정서로 그 개념이 축소되어, 죄의 문화로 변질되어 버렸다. 수치심에 내재되어있던 정의가 몰수되고, 개인화되었으며, 자본주의 상품화논리에 수치심 본질의 한 축이었던 가족적 윤리를 맥 빠지게 만들어버렸다.

 

저자는 발자크의 소설 곱세크의 주인공인 고리대금업자 곱세크 집 문턱을 넘으려면 읽게 되는 문장을 소개하고 있는데,  여기 들어서는 그대, 모든 수치심을 버려라!”이다. 즉 자본주의라는 현대성은 명예없는 사회를 구축했다는 것이다. 이것은 콘래드의 소설 로드 짐의 이등항해사 로드 짐이 자신의 이미지와 이름의 손상이라는 수치심을 남기지 않기 위해 홀로 재판정에 서 죽음을 수용하는 이야기 속 명예있는 존재로서의 수치심과 그 차이를 식별할 수 있게 한다. 자본주의 그리고 오늘의 신자유주의 질서가 지배하는 공동체는 공공법률+상거래+개인적 자유의 역할을 둘러싸고 조직된 사회이다. 영리적이고, 부르주아적이며 심리적 얼굴로 수치심의 얼굴이 바뀌었다. 명예는 변모하여 체면과 정상성(正常性)’, 표준이라는 미묘한 사회적 행동모델로 변했다. 명예없는 현대세계에 정상성이라는 혐오스러운 단어가 새로운 명예가 된 것이다.

 

정상성이란 지극히 상대적이고 주관적인 괴물같은 언어다. 오늘 이 정상성의 기준지표는 지극히 단순화되어 돈과 안락함이 지배한다. 비정상성의 기호는 가난이라는 추상적 판단에 의해 사회적 멸시가 되었다. , 말하고 먹고, 걷는 방식, 이빨 빠진 사람들, 작고 어둡고 계급없는 사람은 정상성을 구분하는 기호이다. 타인들의 말과 눈길 속에 작동하는 비교, 우리를 억압하는 멸시는 이렇게 출현한다. 오염, 얼룩, 불투명성이고 들러붙은 끈끈한 부정성, 내밀한 감정으로 축소되지 않는 실체, 자신의 좌표에 대한 수치심, 문화적 무의식으로 내면화된 수치심이 상징적으로 배제하는 폭력으로, 수모와 수치의 반복된 경험으로서 작동하는 사회가 된 것이다. 사회철학자 디디에 에리봉은 랭스로 되돌아가다에서  나로서는 사회적 수치심보다 성적 수치심에 대해 쓴 것이 한결 쉬웠다.”, 세계의 분리와 경계, 문턱과 문을 발견하게 하여 자리의 박탈을 의미하는 사회적 출신이라는 멸시 기호의 끔찍함을 토로하기도 했다.

 

가난은 선험적으로 수치스러운 것이 될 수 없음에도 신자유주의는 몇 십 년(40여년)에 걸쳐 가난을 패배로, 개인의 실패(의지결핍, 게으름, 비겁함 etc.)라고 윤리적 얼굴이라 내면화시키는 학습화를 집요하게 추진했다. 가난의 수치라는 사회적 멸시를 내면화한 결과가 인간 행복의 열쇠를 엄청난 소득에 두고 그것을 성공의 지표로 삼는 세계를 만들어냈다. 많은 사람들은 이제 세상은 당연히 이런 것이라고, 아무도 바꾸지 못한다고, 사욕의 뿌리를 정당화하기까지 한다. 빅토르 위고는  잠에서 깨시오, 수치심은 이제 그만!”라고 1850년에 이미 자본주의 물질성에서 깨어나라고 일침을 가하기도 했다.

 

정치적 분노를 할 줄 모르는 나태한 상상력의 어리석음을 일깨우는 유명한 글이 있다. 카뮈의 미완성 소설 최초의 인간에는 작가의 분신인 어린 자크의 분노하는 수치심이 있다.  내가 어머니를 부끄러워하는 건 어머니가 멸시당할 만하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사실은 용감하게 쉬지도 않고 우리를 먹여 살리기 위해 희생하고 있는데, 그러자 곧 나의 수치심에 대해 수치심이 든다.”,  수치심을 느끼는 자체에 대한 스스로에 대한 수치심! 불공정한 가치 체계를 그렇게 쉽게 지지한 자신에 대한 분노로서의 수치심이다.

 

수치심은 멸시와 고결한 분노의 두 가지 태도만 있는 것이 아니다. 극복할 수 없는 혐오로서 우울의 수치심이 있다. 졸라의 목로주점에는 가로등 불빛에 비친 자신의 거대한 그림자를 보고 수치심에 잠겨 거리에 자신의 매력을 팔기위해 서있는 제르베즈의 마지막 쇠락 장면이 있다.  끈끈하게 들러붙는 지상 조건의 낙인인 몸 자체에 대한 수치심이다. 수치심에는 세 가지 큰 영역이 있다. 사회적 가난, 정신적 치욕, 육체적 불결. 몸은 영혼에 수치심을 안긴다.

 

모파상의 <비곗덩어리>가 감수해야하는 타인의 무심한 눈길로부터의 외면, 무리의 구성원으로 받아들여지지 않는 고질적 두려움의 명치를 얻어맞은 듯한 고통. 비곗덩어리와 함께 마차를 타고 여행 중인 소위 사회적 품위를 지녔다는 인간들의 품위가 얼마나 비겁하게 주어지는 지를, 타자의 사회적 멸시를 통한 배척을 토대로 구축되는 그 더러운 품위를 소설은 말하고 있다. 부끄러운 줄 알라!”, 원통함과 엄청난 분노가 끓어오를 것이다. 이렇게 수치심에는 혁명의 씨앗이 움튼다.

 

사회적 모멸은 사회적 사실로서 외상성 수치심이라는 깊은 상처를 개인들에게, 집단에게 각인시키기도 하는데, 강간, 근친상간과 같은 윤곽도 분명한 오욕적 장면의 기억이 지닌 치명적 수치심이다. 남성우월주의, 가부장 권위주의 장치를 통해 사회적으로 구축된 합의 결과로 생겨난 이 수치심은 수줍음의 도덕적 가설을 여성성의 특징으로 내세움으로써 희생자를 겨냥한 가해자들의 폭력성을 가라앉히는데 주력한다. 더는 저항하고 받아들이지 않았습니까?”, “결국 자업자득이지 않습니까?”와 같은 악의적이고 비뚤어진 희생자 여성을 향한 심문은 강요당하지 않고 자유롭게 원했다는 의미로 둔갑시킨다. 이러한 강간 희생자에 대한 가해자 중심의 공적 판단 논리는 권위적 국가를 마주한 시민들에게도 동일하게 가해진다.

 


2009년 용산 재개발을 강행하려는 상가철거에 맞선 상인 6명을 죽음으로 몰고 23명을 중경상에 빠뜨린 당시 폭력사태를 지휘하던 서울시장(오세훈)과 서울경찰청장(김석기)은 시민의 억울한 죽음에 대해 자업자득의 논리, 저항의 극렬함만을 강조하고 시민 안전, 인권 보호와 같은 자신들의 책무에 대해서는 아무런 관심조차 보이지 않았다. 강간이건 국가폭력이건 다들 가해자는 항시 희생자가 순수한 희생자가 아님을 입증하려 든다. 저항을 진정으로 입증하려면 죽어야 한다는 생각을 지배적으로 하는 이 구토나는 혐오스러움이 이 사회를 짙게 덮고 있다.

 

저자는 사회적 모멸과 사회적 사실로서의 수치심을 설명하며 영원한 굴종자의 역할을 받아들이라 강요하는 불의한 이 세계의 체제를 드러내고자 한다. “폭력을 받아들이도록 우리를 내모는 체제는 폭력 자체보다 더 견디기 힘들다.”, 타자들의 소유를 점유하면서 커지는 이 부당한 점유가 발가벗은 힘’, 타자들을 장악하고 함부로 하려는 권위주의적, 신자유주의 체제라는 발가벗은 힘의 상징적 제도화임을 입증한다. 강간, 학대, 근친상간 폭력에 대한 사법과 공권력의 시선은 이 세계의 추잡한 정치 체계를 요약한다. 피해자가 수치심을 느끼게 하는 체계, 이 역전된 수치심을 가해자의 진영으로 전환시켜야 하지 않겠나? 그것이 정의 아닌가? 신자유주의 자본주의 체계가 수치심에서 정의를 제거해버렸지만 우리는 이를 회복시켜야 하는 책무를 안고 있다.

 

익숙하면서도 흥미로운 이야기가 소개되고 있다. 남편 콜라티누스의 동료인 에투루리아의 왕자 타르퀴니우스에게 강간당한 루크레티아의 자결 신화는 정치적 성적 토대를 제시한다. 동침을 거절하는 루크레티아를 그녀의 노예와 동침한 부정한 여인이라는 누명을 씌우겠다는 협박에 그녀는 자포자기한다. 루크레티아는 이 수치를 남편에게 알리고 자살하는데 그녀의 시신을 마주한 로마인들의 대중적 저항을 불러일으키고 이는 로마 공화국 수립을 초래한다. 이 신화의 정치적 의미는 보완성의 약속이었다고 저자는 해석한다.

 

이 수치심에는 교묘한 이중의 얼굴이 숨어있다. 여성의 다소곳함, 여성의 정절을 찬양하는 불순한 젠더화가 있으며, 사회적 사실로서의 폭력에 대한 수치심, 윤리적 수치심이라는 두 얼굴이다. 공화국이란 이처럼 남성과 여성을 고정된 자리와 보완적 의무를 맡김으로써 성립했다는 것이다. 공화국을 보장하기 위하 라틴식 질문이란 이런 것이라는 것이다. 그녀는 충실한가? 여성의 성생활이 남편의 정치적 완성을 보장한다. 남성에게는 정의를, 여성에게는 수치심을 안겨라.”, 이 세계를 지탱하는 정치쳬라는 것의 불온성과 불모성을 엿보게 하는, 오늘에도 무심히 읽히는 신화다. 우리들은 무의식중에 이러한 태도를 학습하고 내면화한다.


이 불온성과 불모성의 실체인 파렴치함이란 조심성의 부재로 알아본다고 한다. 반면에 수치심은 어떤 일을 행하기에 앞서 그 도덕적 성질에 따라 정지시키고 한계 짓는 능력이다. 다시말해 파렴치는 수치심의 부재라는 의미기도 하다. 고대 그리스는 이처럼 악을, 불의를, 멈출 수 있는 생각으로서 윤리적 수치심을 뜻하는 아이도스(Aidos)라는 개념을 가지고 있었다. 오늘날 우리들은 수치심을 영혼의 독으로, 중대한 장애물로, 행복을 가로막는 최악의 적으로 규탄한다.” 그렇기에 수치심을 윤리의 기둥을 표상하는 정서로 상상하지 못하게 되었다. 그럼에도 플라톤이 향연에서 언급하듯 수치심은 선한 인간을 인도하는 원칙이기도 하다. 수치심은 허영심, 착각, 말과 행동사이의 괴리에 앞서 조심성과 신중함으로 본성을 과장으로 왜곡되지 않게 막는 하나의 원칙이기도 하다. “만약 ...라면 난 너무 수치스러울거야라는 우리네 일상 속 문장처럼 윤리적 수치심은 상상력으로 지지되는 생각의 경험을 먹고 자라는 자가-정서이다.

 

우리들이 알고 있는 철학이란 바로 앎에 대한 오만, 사회적 안락에 대한 확신을 모욕하는 학문이다. 그래서 철학은 우리들에게 수치심을 지속적으로 안겨 영혼을 발가벗기고 관통하며 박탈하고 화나게 노출시킨다. 그럼으로써 억견(臆見) 직전에 어리석음과 영적 저속성에 빠지지 않도록 막아주는 것이다. 무지보다 훨씬 위험하고 해로운 것은 바로 안다고 믿는 것이다라는 말은 한나 아렌트가 말하는 안다고 믿고서 타인들에게 그 알량한 지식을 강요하길 즐기고 뻐기면서 경멸의 이유를 찾는 악의 평범성이기도 하다. 타인을 모욕하려는 욕망, 철학은 이러한 진실의 테러리스트들에게 수치심을 안긴다.

 

소크라테스가 왜 아테네에서 죽어야만 했는지를 상기해보라. 대중 앞에서 영혼이 발가벗겨진 거들먹거리는 정치인들, 거만한 법관들, 건방진 예술가들은 드러난 천박성으로 인한 자신들의 수치심을 견디지 못했다. 소크라테스는 이 불의한 힘에 의해 죽어야만 했음을 오늘 우리들에게 상기토록 한다. 지금 벌어지는 70~80년대 이 땅에 민주주의 토대를 만들어낸 민주투사들을 폄훼, 평가절하하려 총공세를 가하는 기득권의 추한 토끼몰이식 저열함을 보라, 수치심을 모르는 것들에 부하뇌동하는 우매한 대중들을 보라. 세상에 대한 수치심을 느낀다는 것은 혐오논리의 복귀, 폭력의 두려운 반복을 예방해준다. 고통을 보지 못하는, 혹은 외면하는 기만적 무구(無垢)함이 죄를 구성한다. 무구함의 반대말이 죄의식이 아니라 통찰력인 것은 이러한 연유에서이다. 수치심을 느끼는 사람은 통찰력이 있어 불의와 불공정이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주의깊게 바라본다. 계통적 수치심이라는 것이 있다, 이는 동류로서 공감할 줄 아는 자의 수치심, 인간이라는 수치심을 이르는 말이다.

 

계통적 사회 멸시, 계통적 권위주의, 계통적 (인종) 차별주의, 계통적 가부장주의, 큰 행운을 누렸음을 인정하는 진지한 목소리, 객관적 지배자의 수치심이다. 우리는 모두 권리 승계자로서 태어난 마땅히 치러야 할 수치심을 지녀야 한다. 인간이라는 수치심은 밑바닥에 떨어진 인류를 마주하고 보이는 일종의 저항이고 넌덜머리 난 초탈이며, 다른 되기에 휩쓸리려는 욕망이라 한다. M.쿠체는 추락에서 백인으로 고통스러운 상속자의 수치심을 말한다. 아파르헤이트로 유색인종에 대해 지속적으로 가한 모멸과 가학의 가해자임을 스스로 인정하는 주인공의 통찰력을 보여준다. 이것이 계통적 수치심이요, 윤리적 수치심이다.

 

이제 우리는 수치심의 진영을 바꾸어내야 한다. 수치심이 피해자, 희생자의 몫이 아니라 바로 가해자의 것이 되어야 함을. 로스탕의 극작품 시라노 드 베라주라크의 코가 기형적으로 커 조롱의 대상이 된 주인공이나, 장 주네의 소설 도둑 일기에서 감화원의 그 극한의 치욕의 현장에서 수치심의 진영을 바꾸고, 치욕의 장소를 점유함으로써 새로운 차원을 입히는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수치심은 반전 시킬 수 있으며, 그 속성은 이미 도치와 투사, 전복, 정화를 통해 변화시키는 에너지, 실존의 연료로 삼을 수 있음을 이해할 수 있다.

 

수치심은 윤리의 기둥이며, 연대의 표식기다. 세상의 어리석음, 운 좋은 자들의 잔인한 악의에 대한 분노이자 증오이고, 자기 자신에 대한 은밀한 분노이기에, 또한 부당한 멸시에 대한 공개적 복수를 바라는 비통한 욕구이며, 정의에 대한 부정을 강요하는 멸시에 대한 분노, 이 구속에 맞서는 생명의 힘이기도 하다. 때문에 수치심은 혁명적이라 말 할 수 있다. 사회체제와 대중문화가 비록 우리들의 상상력을 좌절시키도록 작동하고 있지만 우리는 타인의 자리에 서보거나 다른 세상을 상상할 수 있다. 또한 수치심은 한계를 느끼는 감정이기에 언제나 변화를 향한 부름이기도 하다.

 

책은 이처럼 수치심 작동의 메커니즘에서부터 수치심의 다양한 형태들, 야기된 수치심들이 개인과 집단에게 기대하는 불온한 효과들, 그리고 사회적 모멸과 사실로서의 수치심을 비처럼 쏟아부어 무시의 눈길이 축적되고 딱딱한 껍질이 되어 영혼을 옥죄어 인간을 수동화시키는 광범위한 악의 파렴치가 점령한 세계의 현상을 마주하게도 한다. 임레 케르테스의 말처럼 오늘 우리들은 산다는 수치심을 살고 있는것일지도 모르겠다. 여성성이나 계층과 인종적 차별이라는 상투성의 항구적 재()할당으로 벗을 수 없는 공식 속에 인간을 가두려는 본질주의가 판을 치고, 작은 차이나 격차를 포착하여 배척의 효과를 만들어내는 낙인찍기가 이 사회를 부패하게 하고 있다.

 

우리들은 모르는 사이에 자신과의 관계의 투명성에 빼내져 힘과 특권을 누리는 타인들의 광기 속에 구속되기 일쑤인 세상에 살고 있다. 정말 불온한 세계이다. 아마 이 화려하고 박학한 글을 읽다보면 저자의 진심과 노고를 절로 헤아릴 수 있을 것이다. 이해를 돕고 철학과 신화, 문학(소설,희극,)작품들의 이야기를 예시하며 수치심의 잎맥을 재구성하여 그 구체적 메커니즘을 신랄하고 극적이고 섬세하며 진지하게 다루어 내고 있는 명 저술이다. 책을 읽고나면 수치심이 바로 현대를 사는 우리들의 주된 정서임을 숙지하게 되고, 한편으론 새로운 삶의 세계를 향한 투쟁의 기표임을 발견하게 된다. 갈수록 무례함과 무람없음이 늘어만 가는 이 세계가 너무 불온하다고 생각되지 않는가!? 이 세상에 대해 수치심을 품고 상황이 달라질 수 있다고 말하려면 상상력이 필요하다. 타인이 모욕을 받고 어쩔 줄 몰라 할 때 우리들은 함께 수치심을 느낄 수 있어야 한다.

 

오늘 한국의 정치 사회는 급격하게 최악으로 치닫고 있다. 수치심을 모르는 것들이 장악한 세계에 체념해서는 안 된다. 저항할 능력을 온전히 간직할 힘을 주는 것은 인간으로서의 수치심이요, 세상에 대한 수치심이라 프리모 레비가 말했다. 이 책은 이 불가해하고 불가피한 수치심의 정체를 거의 완벽하다시피 할 정도로 파헤쳐내고 있다. 이제 이것을 가공, 구상, 다듬어서 순화하여 새로운 형태의 삶의 동력으로 삼는 것은 우리들의 태도일 것이다. 도덕적으로 발가벗는 순간을 안간힘을 다하여 모면하려는 마음 속 두려움은 윤리적이고 혁명적 동력이 될 수도 있지만, 아주 사악한 폭력의 힘으로 작동하기도 한다. 오늘 우리는 후자가 난무하는 세계에 살고 있다. 우리는 이를 전자로 전환할 수 있다. ~, 이 저술은 수치심이라는 정서에 대한 고전적 지위의 명저로 남을 것 같다. 아니 인간 세계에 오랫동안 읽힐 위대한 명저로 손색이 없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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