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서사 교유서가 어제의책
오카 마리 지음, 김병구 옮김 / 교유서가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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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주된 물음은 이것이다. 어떤 부조리한 폭력적 사건의 당사자 혹은 그 사건의 내부에 존재함으로써 정신적 외상이라는 고통을 입은 사람의 기억, 그 증언이 말로 완전하게 표현될 수 있는가와, 외부에 있는 사람이 그 사건을 표상하는데 어떤 결여도 없이 온전하게 모두를 재현할 수 있는가의 논의다. 그 답은 물론 불가능일 것이다. 그렇지만 사람과의 관계성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공동체인 이 세계의 사람들에게 말 되어지지 않는다면, 불의하거나 부조리한 사건외부에 있는 우리들은 타자에 이르는 길을, 그 회로를 영영 알 길이 없어지며, 지금 존재하는 세계와 다른 세계를 만들어내는 데 무관심할 것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불의와 부조리한 폭력이 반복되는 세계의 도래에 무능과 무력함만이 남는다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사건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기억의 표상과 그 표상인 서사의 한계란 무엇인지를 사유하고, 말로 이야기 할 수 없는 사건의 잉여, 바로 이 말로 표상될 수 없는 잉여를 잉태하는 사건의 표상 불가능성을 넘어서 어떻게 이를 타자와 나누어 가질 수 있는가를 생각해 보는 것이다. 이 비평적 논설은 1982년 이스라엘군의 레바논 침공 때 베이루트 시내에 있던 팔레스타인 난민촌을 기습한 레바논기독교민병대의 남녀노소를 불문한 무차별 대학살 사건으로 시작된다. 유대인 군사조직의 이같은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학살은 반복되어 온 사건이지만, 이 사건은 세계에 전달되지 못한 망각된 과거였다. (나누어 갖지 못한 기억이 그 불의가 반복 실행 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이것은 팔레스타인 여성 작가 리아나 바드르1991년에 발표된 소설 거울의 눈(The eye of the mirror)을 통해 전해지는데, 이는 베이루트 난민촌인 탈 자아타르포위와 학살 사건에서 살아남은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7년에 걸친 인터뷰 끝에 얻어낸 증언들을 토대로 픽션으로 재구축한 작품이다. 소설의 서문에서 작가는 사건의 기억을 나누어 갖기를 바라는 바람을 담아 썼으며, 겪어 온 고난의 역사를 지속적으로 망각하고 있는 전 세계 사람들이 이 사건의 기억을 공유해주기를 바라는 절박한 요청을 담아내려 했다고 말한다.

 

이 소설의 중요한 점은 사건을 재현하려는 것에 목적을 둔 것이 아니라는 점에 있다. 그것은 뜨거운 물에 손을 넣고 있는 사람은 찬물에 손을 넣고 있는 사람과 똑같이 느낄 수 없다.”는 것, 사건의 외부에 있는 사람은 내부에 있는 사람과 다르다는 것으로서, 사건의 참혹한 고통은 결코 말로, 글로 표현된 것을 넘쳐흐르는 잉여, 그것에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는 점이다. 더욱이 "경험자의 증언을 바탕으로 한 리얼(real)하게 보이는 서술이라 하더라도 그것을 사건그 자체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는 금지명령을 텍스트에 써 넣은 작품"이라는 점에서 이 책의 주제의식을 대변한다. 책은 두 개의 장으로 구성되어 1장에서는 말 되어지기의 한계와 2장에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건의 기억을 나누어가지기 위한 서사를 사유한다.

 

1. 기억의 표상과 서사의 한계

 

일본군 위안부였던 김학순 할머니의 이야기인 듯한데, 탈출하다 붙잡혀 일본군 병사에 의해 태워지던 동료 위안부여성의 신체가 타는 냄새로 인해 고기 타는 냄새조차도, 그래서 고기조차 입에 대지 못한다는 증언을 통해 기억의 폭력성을 우선 문제시 한다. 잊어버리고 싶은 폭력적 사건이 자신의 의사와 상관없이 되살아와 폭력적 사건 전체가 그 오랜 세월이 지났음에도 과거로만 순치할 수 없는 생생한 폭력으로 그녀의 신체에 살아 일어나고 있기 때문이었음을 말한다. 이것은 무언가 근원적일 경우, 먼저 느낄 수밖에 없는 사실은 인간의 언어가 완벽하게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이며, 우리가 가진 언어의 윤곽 속에 완전히 담기지 않은 채 흘러넘치는 사건의 조각, 잘려나간 부분에 많은 것이 있다는 의미로 이해될 수 있다고 사유한다.

 

어쩌면 이 책의 백미(白眉)라 할 수 있는 부분인데, 1830년에 발표된 발자크의 소설 아듀(Adieu)를 통해 바로 이와 같은 신체에 세차게 흐르는 강물이 되어 회귀하는 기억 또는 그 기억이 매개하는 사건을 나누어 갖는 것의 불가능성을 탐사하는 여정이다. 혹독한 전쟁에서의 후퇴 길에 이별한 연인을 오랜 세월이 지난 후 만났지만 여인은 정신을 잃은 미치광이 여인이 되었다. 여자는 남자에게 아듀라는 낱말만을 반복한다. 남자는 여자를 지극정성으로 보살피지만 여인의 정신은 돌아오지 않는다. 남자는 여자의 기억을 되살리기 위해 최후의 방법으로 이별 당시의 장면을 그대로 재현하는데, 그 장면에 놓이자 여자는 기억을 되찾지만 아듀를 외친 그 순간 여자는 죽어버린다는 이야기다.

 

이것은 기억의 문제를 우리들에게 당혹스럽게 던지는데, 여자에게 과거 이별의 사건이 가하는 폭력에서 육체가 오랫동안 살아남게 하기 위해 그녀는 자신과 자신의 몸에 일어난 모두를 잊어버려야만 했던 것이고, 그래서 철저하게 망각했던 것이다. 그것이 충실하게 재현됨으로써 과거가 현실의 세계로 회귀했을 때 그 엄청난 폭력을 그녀는 감당할 수 없었던 것이다. 생각지도 않은 돌연 도래하는 사건의 기억은 곧 폭력이라는 말로, 표현될 수 없는 고통 그 자체인 것이다. (작품의 세부 내용은 후일 별도 논의할 기회로 미룬다.) 소설에서 아듀라는 말은 자신의 것으로 할 수 없는 말, 자신에게 들씌워져 놓아주지 않는 말, 기억 속에 자리 잡은 그 끝을 알 수 없는 사건의 흔적인 것이다. 이 소설의 위대성은 전쟁이라는 폭력적 사건을 완결시키지 않음으로써 작품 자체를 하나의 사건으로서 독자의 정신적 외상으로 전이(轉移)시킨다는 점에 있다. 그리고 또 하나 중대한 물음을 던지는데, 전쟁과 같은 폭력적 사건을 리얼하게 표상하려는 욕망의 불순함을 고발하고 있다는 것이다.

 

저자 오카 마리는 이 리얼리즘을 예리하게 비판하는데, 표상과 실제를 얼마나 정확하게 재현하고 있는가를 가늠하는 이 단어에 숨겨진 확신의 오만이다. 소설 아듀의 주인공 남자는 충실하게, 즉 리얼하게 장면을 재현한다. 그리고 스티븐 스필버그감독이 영화 <라이언 일병 구하기>에서 첫 장면에 전장의 리얼리티한 재현은 누구를 위한 것인가? 하고 묻는다. 아듀의 남자는 여자에게 연인이었던 자신을 인지시켜(즉 여자가 상실한 여성성의 복구) 자신의 나르시시즘적 욕망을 채우려는 것이며, 스필버그는 재현 불가능한 실제와 사건의 잉여, 타자의 존재를 부인하는 행위로써 전쟁이라는 폭력의 기억을 억압하기 위한 욕망으로서 과잉의 리얼한 재현을 사용한 것이라 비판한다. 즉 서사는 근원에서부터 사건의 폭력성을 부인하고 있기에 과잉으로 리얼리티하게 폭력을 재현하고 보충한 부인(否認)된 사건의 폭력성 자체라는 것이다.

 

<라이언 일병 구하기><쉰들러 리스트>는 사건의 기억으로서 고통을 외면하고, 인간의 숭고한 사랑의 찬가로 소비함으로써 사건의 폭력성을 그로테스크한 희화(戱畵)로 만들어버렸다는 것이다. 스필버그와는 그 접근방법에서는 다르지만 고레에다 히로카즈감독의 <원더풀 라이프(1998)> 또한 사자(死者)들의 기억이라는 영상을 통해 전쟁이나 위안부의 폭력적 사건에 도사린 무의미하게 죽어간 희생자들의 죽음이라는 사건자체에 자신들이 필요로 하는 의미를 채워 넣음으로써 사건 자체를 부인하는 기만, 즉 그것에 내셔널한(national;국수주의적) 욕망이 마치 없는 것인 양 부정하는 토대로 삼고 있는 기억의 횡령”, “서사의 횡령이라 비난하고 있다. 이처럼 사건의 충실한 재현들이 모두 기만이고 위선에 머물 수밖에 없다면, 다시 말해 이러한 사건의 폭력성들이라는 것이 원천적으로 표현되고 표상할 수 없는 사건기억이라면 대체 이것을 어떻게 타자와 나누어 가질 수 있을 것인가?

 


2. 표상 불가능을 넘어 - 어떻게 기억을 나누어 가질 수 있는가?

 

사실 이러한 사건으로서의 역사를 구성, 기술하는 존재는 사건과 기억을 경험하지 않은 살아남은 우리들, 곧 타자들이다. 때문에 비록 말로 표현할 수 없으며, 현실에 재현될 수 없는, 근원적으로 표상의 한계를 가진 사건을 이 외부에 있는 타자에게로 이르는 길을 만들어 낼 수 있는가는 중차대한 문제이다. 기억의 문제를 둘러싼 역사수정주의자들의 역사 왜곡이 수시로 사건을 부정하고 터무니없는 의미를 쑤셔 넣는 일이 다반사로 일어나는 현실을 볼 때 이는 결코 간과될 수 없는 논의이다.

 

이러한 역사 왜곡의 양상을 표현하는 말이 있다. 그것은 사건의 기억이 타자와 공유되지 않고 사건의 기억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존재가 외부 세계에 방치되어 온 그 자체와, 사건이 타자에 의해 일방적으로 자리매김 되고 서술되어 왔다는 것 자체로서 타자에 의한 일방적 표상이라는 폭력의 뜻으로서 타자에 의한 표상의 폭력이라고 말한다. 일본의 역사수정주의자들을 비롯한 이에 뇌동하는 오늘 한국사회의 역사 부정주의자들인 뉴라이트라 자처하는 친일집단들이 이러한 표상의 폭력을 대표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들 무리는 위안부 여성이었던 최후의 생존자였던 김학순 할머니의 증언을 모두 부정하고, 식민지 여성에 대한 그 어떤 폭력도 존재치 않았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이 증언이란 본성상 수동적이고 주체의 언설 무능성에서 나온다는 점이기에, 역사수정주의자들의 의혹은 의미를 상실한다.

 

저자는 매우 중요한 점을 지적하고 있는데, 사람이 사건을 영유하는 것이 아니라 사건이 사람을 영유한다.” 것이다. 달리 표현하자면 폭력적 사건으로서의 기억은 당사자의 의사에 의해 떠올려지는 것이 아니라 불현 듯 심연에서 돌연 도래하는 것이라는 의미이다. 때문에 사건과 이의 기억은 그것이 억압된 존재를 통해 결코 말로 표현되지 못하고 항상 표현되지 않은 잉여를 지니고 있다는 말이다. 우리들은 이러한 폭력적 사건의 희생자들과 그 관련자들을 인물로 하는 서사를 아주 많이 접할 수 있다. 이들 작품들은 우리에게 이해와 감동을 주기는 하지만 결코 묘사되는 사건에 빠뜨려 불안이나 위협하는 일 없이 알 수 없는 끈으로 이어져있다는 공감과 실감을 준다. 그럼으로써 무자비하게 낯선 폭력의 사건을 보편성의 시각으로 안전하게 감상하게 한다. 그런데 지금까지 지적되어 온 사건의 잉여, 그 사건의 본질이라는 불가능한 진실을 영원히 막아버리는 봉인 행위가 되어, 한낱 지나간 과거의 일화로 휘발시켜 버리고 만다.

 

바로 이같이 인간이 영유할 수 없는 사건의 기억을 말하고자 의도적으로 써진 하인리히 폰 클라이스트의 소설 칠레의 지진사건기억이 소유하는 인간에 대해, 그리고 타자에 의한 표상으로서의 폭력의 서사로서 관동(關東)대지진으로 무참하게 학살되는 조선인 사건과 함께 인용되는데, ‘사건기억을 마치 한 때의 추억으로 서사와 한께 과거로 매장시켜 그 어떤 흔적도 남기지 않으려는 행위에 내재된 폭력성을 들춰내는 것이다. 칠레의 지진1647년 칠레 산티아고에 발생한 대지진을 배경으로 하는 픽션이다. 수녀원에서 수녀가 임신함으로써 남자를 수녀원 정원에서 처형하려는 날 대지진이 발생한다. 이 엄청난 혼란으로 남자와 수녀인 여자는 수녀원을 벗어나 마을 주민의 도움으로 출산과 행복한 날을 보낸다. 그리고 지진이 끝나고 일상을 되찾아가던 어느 날 성당 미사에 참석하게 되지만, 사제는 대지진이 부도덕한 타락에 대한 신의 징벌이라며 수녀원 정원에서 일어난 신에 대한 모독행위 탓이라 비난한다. 이 규탄행위는 성난 폭력으로 발전하여 두 남녀는 맞아 죽고, 갓난아기는 교회기둥에 휘둘러 머리를 박살내 조각이 나도록 내려쳐진다. 뇌수가 흐르고 표현할 수 없는 고통을 온몸으로 느끼며 사람들은 현장을 물러난다는 내용이다.

 

이 소설은 우리를 견딜 수 없게 하는데, 바로 두 남녀와 갓난아기의 두개골을 박살내 죽인 바로 그 사람들이 자신들의 기억 속에 어떤 흔적도 남기지 않는다는 것이다. 소설은 정신적 외상이어야 하는 그 기억을 역설적이게도 기쁨이라 명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클라이스트는 사건에 위장 플롯을 부여함으로써 결코 매듭지을 수 없는 사건을 어긋나게 함으로써 우리들의 마음에 상처를 남긴다. 사건에 다른 서사를 부여함으로써 사건의 폭력을 망각하도록 하는 것인데, 작가는 이렇게 폭력의 기억을 부정하는 이야기를 만들어냄으로써 더욱 비장하게 사건에 사람들을 빠뜨려 신체화 한다. 반면에 관동대지진시 난무했던 일본인들의 기만적 플롯인 조선인이 공격해 온다.”는 서사는 후일 일본의 방송기획 프로그램을 통해 한 여성의 옛날 하나의 삽화로 추억을 완결하듯등장해 사건의 어떤 흔적도 남기지 않는다. 역사의 한 사건을 기억, 증언한다는 것은 타자와 서로 나누어 갖는 것이라 한다. 역사를 결정하는 저 높은 곳에 서 있는 것이 아니라 역사를 견뎌내고 있는 낮은 곳에 몸을 두는 것이라고.

 

소설 칠레의 지진과 일본 방송 프로그램 서사의 공통점은 인간을 영유한 대지진이라는 사건의 폭력에 대해 인간 스스로 그 압도적인 폭력을 행사함으로써 사건에서 부정된 자신들의 주체성을 회복하기 위해, 자신들의 주체성을 징벌한 기만적 플롯(신이나, 헛소문)이 행한 폭력으로서 사건 자체가 지닌 폭력의 기억을 부정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물음이 하나 떠오른다. 어떤 기억 서사도 그 사건의 당사자에 포함될 경우 그 서사를 자명한 것으로 읽거나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다. 자명한 것으로 향유하고 있던 것이 모두 내팽개쳐지고, 의미는 희미해져 이해 불가능한 것이 되고, ‘사건이 된다는 것이다. 결국 그 어떤 서사에서 우리가 자명성을 읽을 수 있다면 그것은 사건의 나누어 가짐이 아니라 한낱 이야기의 소비로 멈추었다는 의미이기도 할 것이다. 이로서 우리는 하나의 결론에 도달하게 되는데, 표상 불가능한 사건을 표상하는 것, 말할 수 없는 사건에 대해 말하는 것은 사건의 말할 수 없음 자체를 증언하는 것이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이 책은 그 어떤 주체의 의사와 상관없이 통제 불가능한 것으로 신체에 습격해오는 폭력적 사건인 역사의 기억에 대한 우리 인간의 언어인 서사적 한계를 사유함으로써, 그 한계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이 세계의 사람들이 나누어가지는 서사로 말해지고 써질 수 있는가의 진지한 탐구이다. 대체 어떻게 사건에 있지 않은 외부자인 사람들이 그 사건의 기억과 증언의 표현과 표상을 함부로 재단하고 정의할 수 있다는 말인가. 더구나 리얼리티라는 그 터무니없는 재현의 온전함을 확신하는 신화적 기만은 역겨움이라 할 것이다. 역사의 기억과 그것의 재현을 위한 서사의 정의를 향한 긴요한 사유의 단서를 제공하는 저작이라 하겠다. 이 기억과 서사와 관련된 많은 논의가 이미 존재하지만 이 저술은 특히 그 한계를 냉정하고 날카롭게 파헤쳐 직시하고 있다는 점에서 탁월하다. 이 저술을 읽고 나면 아마도 여타 문학과 역사 읽기의 안목이 이전과는 결코 같을 수 없으리라 생각된다. (절판되었던 책을 이렇게 다시금 출간한 출판사에 고마움을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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끌리는 이야기는 어떻게 쓰는가 - 사람의 뇌가 반응하는 12가지 스토리 법칙
리사 크론 지음, 문지혁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2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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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는 행위는 결코 수동적이지 않아요. 오히려 독자는 서사 속에서 맞닥뜨린

각각의 새로운 상황에 대해 능동적으로 정신적 시뮬레이션을 하게 되지요.”

-신경과학자 니콜 스피어, 113쪽에서

 

책의 제목은 어떻게 쓰는가?’라고 글 쓰는 이가 주체로 내세워져 있지만, 실은 글 읽는 이, 즉 독자를 주체로 하여, 독자의 기대를 지속케 하여 책의 마지막 페이지까지 이끌기 위해 이야기를 창작해 내는 주의깊은 코칭이라 하겠다. 결국 독자인 대다수의 사람들이 왜 이야기를 읽으려고 하며, 읽음으로써 획득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한 탐구라 할 수 있다. 이는 달리 말하자면, 이들이 호기심을 갖고 계속해서 읽어나갈 수 있도록 하는 요인들이 무엇인가 하는 것이고, 그 요인들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표현해 나가는가에 대한 방법론에 대한 강의라 하겠다.

 

인용한 니콜 스피어의 말처럼 읽는 행위는 능동적인 정신 작업이다. 그저 종이 위의 글자를 수동적으로 따라가기만 하는 넋 놓은 행위가 아니라는 말이다. 특히 산문 문학의 경우, 독자는 해당 작품을 통해 감정적 이해 능력의 폭을 넓히고, 평범한 삶에서라면 결코 마주하지 못할 낯설고 두렵기조차 한 인물들과 교감함으로써 타인들과의 공감 능력을 키울 수 있기를 기대한다. 또한 타인의 욕망과 의도들과 우리들이 좀처럼 마주하지 못할 삶의 장벽을 헤쳐 나가는 인물들의 행위를 통해 안전한 장소에서 그러한 행동 방식이나 삶의 태도를 이해 할 수 있기를 바란다.

 

저자 리사 크론은 이미 세계적인 문학 편집인이며 영화 시나리오 컨설턴트이기도 하지만 이 책의 이론적 근간을 이루는 신경과학과 심리학과 이야기의 상관관계에 대한 분야에서 독보적인 지위를 지닌 연구가(*TED 강연 참조)이기도 하다. 따라서 이 책은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방법론이기도 하지만, 이야기를 읽는 사람의 심리적 욕구와 신경과학의 이론들을 배경으로 ’, 그렇게 써야만 의미 있는 이야기가 될 수 있는가에 대한 과학적 입증이기도 하. 때문에 독자는 첫 문장부터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알기를 원한다.”는 문장은 인간의 뇌가 그렇게 생겨먹은 까닭에 근원하는 것이다. 인간의 적응 무의식(또는 인지적 무의식)이나 직관은 어떤 이야기이든 첫 문장이나 첫 장면에서 좋고 나쁨을 바로 판별한다는 것이다. 즉 자신에게 무엇이 중요한지 여부를 곧바로 알아차린다는 것이다. 생존을 위해 진화한 뇌의 반응 방식 때문이다.

 

신경생물학적 심리에 토대를 둔 이야기 창작의 글이기에 기성의 많은 글쓰기 관련 도서들과 그 구성 방식이나 견인해나가는 힘에서 다른 흥미를 불러일으킨다. 우리들이 이야기를 읽을 때 기대하는 것은 무엇인가? 를 생각하며 저자가 안내하는 길을 따라가는 것이 곧 즐거움이 되고, 마치 재미있는 소설을 읽을 때와 같이 저자의 글에 코를 빠뜨리게 된다. 강력한 이야기는 뇌를 재설계하는 힘을 지녔다.”고 하듯, 이 책 또한 어쩌면 이야기를 창작하고픈 사람들에게 이야기를 만드는 재주를 지닌 뇌로 재부팅 해줄 지도 모를 일이다. 아무튼 그만큼 저자의 조언 한 마디 한 마디를 놓치고 싶지 않을 정도로 압도적으로 신체에 와 박힌다.

 


우리들이 읽으려는 이야기란 무엇일까? 그저 누군가의 일상적 뒷담화같은 너절한 흔한 담화는 아니다. 여기서 이야기란 달성하기 어려운 어떤 목표를 위해 노력하는 누군가에게 일어나는 일들이, 그에게 어떤 영향을 주며, 나중에 그를 어떤 모습으로 변화시켜주는가를 보여주는 일이다. 독자는 아무나의 지루한 이야기를 읽으려 문학이나 영화를 찾는 것이 아니다. 더구나 독자들은 문학작품 읽는 것 말고도 삶 그자체로 바쁜 존재들이다. 때문에 소설이나 시나리오가 되는 이야기란 삶에서 지루한 부분을 뺀 나머지라 할 수 있다. 우리들의 뇌는 생존과 이에 이익(보상)을 주는 것을 즉시 구별한다. 즉 뇌가 작동할 욕망을 자극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야기의 첫 문장은 독자의 주의를 재빨리 낚아채는 것이어야 한다.

 

책의 내용은 이렇게 추상적 이론을 나열하는 것이 아니다. 책은 아주 구체적이고 예시적이며, 실제적이다. 재빠르게 낚아채기 위해서 첫 페이지의 문장들에 담겨 있어야 할 내용이 무엇인지에 대해 시시콜콜 설명한다. 누구의 이야기인지,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그리고 어떤 위태로운 일이 일어날 것인지 세 가지가 반드시 있어야 한다고 지적한다. 이것을 주인공의 문제, 주제, 플롯이라는 이야기가 만들어질 때 어우러져야 할 삼 요소라 한다. 이 베테랑 편집자자는 놀라울 정도의 뇌과학자이자 심리학자처럼 인간의 본성을 꿰뚫는다. 그리고 그에 해당하는 문학적 쓰기와 수단들을 설명한다.

 

장시간 비행기를 타야하는데 읽을 것을 아무것도 가져오지 않았다. 공항 내 서점에서 읽을거리를 빨리 찾아내야 한다, 문학이론가 스탠리 피시는 책의 첫 문장을 읽고는 바로 엘리자베스 조지의 소설을 골랐다, 그 첫 문장은 다음과 같이 시작된다.  당시 열한 살이었던 조지 캠벨은, 버스에 타는 것으로 끝내 살인까지 이어지는 추락을 시작했다.”, 삼요소가 모두 있다. 주인공 조지 캠벨, 버스에 올라타고, 그를 살인에 이르게 한다. 그리고 누군가의 목숨이 위태롭다. 여기에 이야기의 맥락, 일어날 일에 대한 어떤 정서적 의미까지 하도 강력해서 나라도 이 책을 집어 들었을 것 같다.

 

우리 뇌는 언제나 구체적 맥락 속에서 사건을 평가한다.”는 신경정신학자 리처드 레스탁을 인용하며, 뇌는 유용한 정보를 찾기 위해 의미를 찾으므로 의미를 부여하는 맥락은 이처럼 강한 흡입력을 갖는다는 것이다. 이렇게 뇌의 비밀과 이야기의 비밀을 오가며 리사 크론은 이야기를 시작하고, 이야기의 초점과 주인공의 목표를 만들고, 변화와 갈등은 어떻게 설계되어야 하는지, 하다못해 주인공을 어떻게 상처 입혀야 하는지에 이르기까지 섬세하고 명료하게 설명하고 있다. 물론 간과하기 쉬운 부분들까지 놓치지 않는다.

 

플롯, 서브플롯, 전제와 플래시백의 사용은 어느 순간에 필요한지, 또 어떻게 사용되면 이야기가 망가지는지, 또한 복선이 왜 필요한지, 그리고 언제, 어떻게 사용돼야 가장 효과적인지를 우리들은 바로 뇌의 신경망 덕에 더욱 쉽게 납득하게 된다. 아마 독자가 지닌 욕망을 충족시켜준다는 이익 때문에 집중력이 흐트러지지 않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우리는 타인의 행동 이유와 그 아래 감춰진 문제를 탐구하기 위해 이야기를 읽을 것이다. 사실 커다란 범주에서 이 같은 이야기의 본질인 뇌의 인지적 무의식의 작동 본질을 이해하고 있다면 아마 끌리는 이야기를 쓰는 방법론은 그 어떤 새로운 책도  더 이상 이 책의 경계를 넘어서지 못할 것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사람들이 본능적으로 좋아할 수밖에 없는 글을 쓴다는 것, 끌리는 글을 쓰는 이 끌리게 쓴 글쓰기 방식의 설명이 왜 그 수많은 글쓰기 책들 중에서 현대의 고전이 되었는지 절로 수긍하게 된다. 이야기를 인식하고 처리하는 우리들 뇌가 지닌 능력과 한계의 비밀을 토대로 써진 이 독특한 설명은 글쓰기에 대한 새로운 믿음을 선사해 주리라 믿는다. 우리의 삶과 이야기에서 가장 큰 장애물은 타인의 의미를 밝혀내는 것이라는 사실 하나의 이해만으로도 작가나 독자 모두에게 이 책은 이야기에 대한 매혹적인 접근법이 되어 줄 것 같다. 정말 흥미진진하게 읽을 수 있는 저술이다.

 

우리의 뇌는 미래에 닥칠 어려운 일을 미리 경험해보기 위해 이야기를 사용한다.

(...) 이야기의 역할은 주인공을 꿈에서도 통과할 수 없으리라 생각하는 시험 속으로 밀어 넣는 것이다.”   -9시험 들기와 상처 입히기, 274쪽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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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시우행 2024-03-24 03: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피지기라는 사자성어를 떠올리게 합니다.ㅎㅎ 멋진 리뷰입니다.

필리아 2024-03-24 11:01   좋아요 0 | URL
고맙습니다, 호시우행님~~
책에는 ˝타인의 욕망과 의도를 설명하기 위해 다른 사람이 무엇을 알고 있는지 추론하는 데 도움을 주는˝ 모든 사람들의 뇌에 있는 ‘거울 뉴런‘을 설명하고 있어요. 아마 말씀하시는 ‘지피지기‘도 이것 때문이겠지요? 아무튼 리사 크론의 이 책은 글쓰기에 대한, 혹은 이야기 읽기에 어떤 빛을 비추어주는 저술임에 틀림없답니다.
 
조선에 반反하다 - 벌거벗은 자들이 펼치는 역류의 조선사 지배와 저항으로 보는 조선사 3
조윤민 지음 / 글항아리 / 201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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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하는 말

 

앞선 저술인 지배질서를 정당화하며 신분우위와 특권행사의 근거를 마련하던 조선 양반 지배집단의 헤게모니 전략의 본거지로서 기획된 조선 건축조물에 드리운 그림자를 탐사했던 문화유산의 두 얼굴에 이은 두 번째 조선(朝鮮)역사 읽기이다. 우리는 역사 배우기를 항시 시대의 주류 흐름과 지배세력 중심으로 기술된 교육으로 강요받아 왔기에, 역사의 또 다른 한 축, 아니 실질적 줄기인 (백성)의 눈물과 땀이 밴 노역과 산물은 물론, 당해 사회가 내재한 근본적 모순성이나 기만성에 대해서는 사유되는 것이 차단되어 역사의 진실을 제대로 알지 못한다.

 

이는 달리 말하자면 앎에 대한 방벽을 세워 사유의 방법적 모색 자체를 원천적으로 차단하는 결과를 초래함으로써, 지배자의 시선을 내면화하게 하여 역사와 그 실체에 대한 곡해를, 그리고 역사수정주의라는 극단적 역사부정자들을 양산하는데 이르렀다. 역사의 진실은 외면되거나 부인됨으로써 이제 친일매국 세력이 버젓이 역사를 농단(壟斷)하기에 까지 이르렀다. 이 책은 지배집단이 은폐한 역사를 엄정한 역사의 줄기로서 드러내어 기울어지고 왜곡된 역사를 균형잡힌 정직한 역사로 기틀을 세우는 작업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역사를 읽는 것은 지나간 과거를 단지 감상하고 공감 또는 부정하기 위한 것이 아닐 것이다. 바로 지금의 현재와 미래를 위한 예리한  질타의 칼을 마음에 들여놓는 작업일 것이다. 우리들의 사회와 정신에 깊게 새겨진 빛과 그늘을 새김으로써 동일한 실패의 반복을 불가능하게 하는 자성(自省)의 칼()’ 말이다. 조선에 하다는  ()와 도()라는 유교적 윤리의 얼굴 뒤에 숨어 구축한 억압과 착취의 사회구조가 지닌 부조리와 모순에 대해 균열을 내고 거스르며 맞서 싸웠던 민초들의 역류와 항쟁의 역사이다. 특권을 항구화하기 위해 조선조 500년 내내 유교적 질서를 앞세워 얼마나 극악하게 백성을 차별하고 억눌러왔는가의 폭력의 시간적 자취라 할 수도 있을 것이다.

 

민초들의 저항의 역사 속으로

 

책은 연대기적 기술이 아니라 신분제 질서에 대한 저항, 변란과 모반, 그리고 거대한 백성의 봉기인 항쟁의 역사로 구분하여 기술하고 있는데, 감상글은 이와는 달리 연대기적 기술을 선택하였다. 이렇게 서술함으로써 민초의 저항이 조선조 내내 진행되어 왔음을, 그리고 그만큼의 참혹한 억압과 폭력의 지배가 극악하게 저질러졌음을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조선은 군주를 정점으로 한 상하의 위계적 통치관계와 귀천의 신분질서가 합리화되고 정당화된 시대이다.  또한 삼강오륜이라는 의와 예, 효와 충을 사회질서의 덕목으로 하여 백성과 관료의 관계를  강상(綱常)의 윤리라 불렀다. 백성은 자식으로 양반 지배계급을 어버이로 하는 부자관계라 내면화시킨 사회다.

 

그런데 조선조 500년간 단 한순간도 백성에 대해 어버이와 자식 관계의 윤리적 실천이 실행된 적이 없다는 점에서 이 강상의 윤리라는 허무맹랑한 유교의 지배질서 체계의 허위와 기만에 실소를 터뜨리게 된다. 한글창제의 왕으로 추앙받는 군주이지만 세종은 결코 백성을 자식처럼 쓰다듬은 인물이 아니었다. 이미 문화유산의 두 얼굴에서도 지적한 바 (*링크 글 참조) 있지만, 그는 자신의 절대 왕권 유지를 위해 그 어떤 아량이나 베풂도 허락하지 않은 냉혹한 인물이다.

 

오늘날 부총리격인 의정부 찬성 허조는 세종에게 간한다. 부민과 수령의 관계는 아버지 아들의 관계이므로 절대로 변할 수 없습니다. 그 허물과 악함을 고소하게 되면 아비의 허물을 들추는 것과 같습니다. 이를 범한 자에게는 강상죄를 적용하여 능지처사로 다스려야 합니다.(세종실록, 1443년 세종13). 세종은 둔전의 지대를 거두러 온 어영청 관리가 이를 빌미로 농부들의 전답까지 강탈하자 이에 분을 이기지 못한 농부의 저항에 대해 능지처사를 명한다. 지배권력의 불의에 항거하는 것을 곧 왕권에 도전하는 것이요, 강상의 윤리를 저버린 포악한 행위로 보았다는 것이다. 바로 이 지배논리가 지닌 모순과 부조리에 끈질기게 지속된 저항의 목소리가  책의 지면을 가득 채운다.

 

1495년은 연산군이 집권하던 시기다. 경상도 동래 수군 신분의 박을수가 수령의 불법을 조정에 호소하지만 묵살되자 궁궐에 난입하여 소란을 피운 사건이 있었다. 이후 조선 후기에는 이러한 궁궐 난입이 증가하는데, 이는 왕실의 권위가 추락하고 있었음의 반증일 것이다. 물론 박을수는 능지처사되었다. 왕을 비롯한 지배계급은 이를 단지 지배질서에 도전하는 악행으로만 비난하고 처벌하여 민의를 짓밟으면 체제가 유지된다고 생각했던 것인데, 이러한 양상은 그 사건의 모양만 달리하지 사라지지 않았다. 당연한 것이 근본 원인을 제거하여야 하는데, 문제의 근본이란 것이 곧 지배질서 체제를 유지하는 유교의 의와 예의 논리였기 때문이다. 사회적 모순과 부조리를 끝없이 잉태하고 출산하는 그 괴물스러운 강상의 윤리를 놓을 수 없었던 까닭이다.

 

1561년 명종 때에 임꺽정무리가 대거 준동한 것인데, 착취와 조세 수탈에 시달리던 양민과 농민, 상인, 헐벗은 천민까지 합류한 거대한 도적 세력이 양반부자들의 재산을 강탈하여 백성들에게 배분하는 의적으로 행세하였다. 오늘의 말로 하자면 물적 재분배라는 일종의 복지정책을 이들이 실행한 것이다. 이때 지배계급의 목소리는 이렇다. 지금 도적세력이 성하여 적국(敵國)과 같으니 엄히 다스려야.”, 이 말은 그저 탄압하여 눌러버리면 그만이라는 목소리다. 사회 기층민의 억울한 목소리에 깃든 근본적 사회 문제를 해결할 의지라는 것이 아예 존재치 않았음을 확인 할 수 있다.

 

참으로 수치스러운 기록이 남아있는데, 조선을 찾은 중국 사신이 명종에게 논하는 말이다. 몸이 병난 것만 알고 병이 생기는 근본은 생각하지 않는 것과 같다. 도적 무리가 생긴 까닭은 도적질하기 좋아해서가 아니라 굶주림과 헐벗음을 견디지 못해 하루라도 연명하려는 자가 많기 때문이다. (...) 벼슬을 산 자들이 지방관이 되어 백성을 약탈하니 백성이 어디 간들 도적이 되지 않겠는가.” (명종실록, 1561. 10.17)

 

오히려 중국의 사신이 근본문제를 살필 것을 이웃나라 국왕에게 논할 정도이니, 그 패악은 가늠하고도 남을 것이다.

 

1629년 인조(仁祖)부터 숙종, 경종, 영조, 정조에 이르는 17~18세기는 그야말로 크고 작은 민란과 변란이 전국 곳곳에서 우후죽순으로 발생하는데, 그 발흥의 신분은 천민에서부터 몰락 양반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한 백성을 아우른다. 17세기 말 10년 이상 준동한 의적 장길산이나 개국대전(改國大典)을 내걸고 봉기한 이충경, 정감록 변란 사건이라 부르는 역성(易姓)혁명에 이르기까지 양반관료의 악랄한 침해와 착취, 신분제에 의한 정의의 실종은 왕조를 부정하고 새로운 나라를 꿈꾸는 민의로 꿈틀대기 시작한다. 체제 모순의 심화, 제도의 파행적 운용, 억압과 착취의 심화, 해소는커녕 불만의 목소리를 잠재우기 위한 무도한 폭력만이 자행되는 세계였으니 국가는 자멸의 길을 일찍이 이즈음부터 그 행보를 가속화했다고 단언할 수도 있을 것이다.

 

순조 2, 1812년 평안도 청천강 유역 다북동에서 출발하여 지배계급에 대항하여 119일간의 처절한 항쟁을 하였던  홍경래의 난은 이처럼 곪아터진 조선사회 기득권계층인 양반세력의 오랜 파행적 부패에 대한 항거였다. 관군의 무자비하고 광기어린 진압은 역사의 기록으로 남아 지배계급의 포악질을 생생하게 증명하고 있다. 2,983명을 체포하여 처형하였으며, 어린아이와 부녀자 1,917명을 무차별 도륙하며 난은 평정되었다. 이 반란의 여파는 이후 각종 민란의 본보기가 되어 1813년부터 1817년까지 전국방방곡곡에서 그치질 않았다. 홍경래의 죽음을 부정하는 백성의 목소리가 있었던 모양인데, 그의 목소리가 오래 살아남아 백성의 마음에서 끊임없이 부활하고 있었다는 증거일 것이다.

 

1862진주민란은 과도한 수취, 이를테면 땔감으로 생계를 이어가는 초군, 남의 땅을 경작하여 근근이 살아가는 병작농에게 토지에 물리는 전세를 부과하고 토지 주인은 세 부담에서 제외하여 주는 황당한 조세부과 원칙과, 관료와 구실아치의 집중적 수탈로 생존이 불가능하게 된 민초들의 거대한 봉기였다. 여기에 삼정의 문란으로 일컫는 황구첨정과 백골징포까지 군역의 폐단이 더해져 이후 삼남지방은 민란이 끊이지 않는 지역이 되었다. 아마 이때 처음으로 피지배층인 백성이 지배층의 언어인 을 들고 제대로 준수하라고 외쳤다고 하니, 더 이상 법은 지배층이 독점하는 언어가 아니었다는 말이다. 아마 이후 민란부터 민중과 결합한 정치적 변란의 성격으로 저항 운동이 한 단계 고양되었던 것으로 보아도 될 것 같다.

 


1882715서울에서 발생한 최대의 정치적 민란이 발생한 날인데, 선혜청 책임자의 횡령으로 13개월 동안 하급 군병의 급료가 지급되지 않다가, 모래알 섞인 쌀을 한 달치 급료로 규정에 미달하게 지급함으로써 발생한 사건인 임오군란에 이은 민겸호 등 민씨 척족의 부정부패와 반일(反日)의식으로 발생한 사건이다. 민씨 척족 정권의 무능과 부패로 인한 정책 파탄에 대한 주범인 중전 민씨에 책임을 묻는 사건의 일환이었는데, 고종이 내린 토벌 요청서를 받은 청나라 군대에 의해 임오군란 진원지인 왕십리와 이태원 일대의 급습으로 인한 백성들의 저항으로 촉발된 사건이기도 하다. 11명이 참수되고 170명이 체포 감금되며 사건은 일단락 되었는데, 도망쳤던 민비는 이때 청군의 호위를 받으며 입성, 다시금 조정을 장악하고 척족 세력의 착취를 더욱 노골화한다. 이 사건이 이 땅에 외세의 침탈을 유인하는 결정적 계기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일본은 이 사건의 피해자라며 군대를 주둔시키고, 일본에게 국토를 유린하는 권리를 양허하는 불평등 조약을 체결해주어야만 했으니 말이다. 1894년 갑오 동학농민전쟁의 궤멸은 바로 이러한 일본군의 조선반도 내 본격적 진입과 경상도 안동, 의성, 예천 등 서원을 중심으로 한 양반 유림들의 일본군에 대한 적극 호응 지지의 결과이다. 경상도는 일본군의 병참기지 역할을 확실히 수행했는데, 스스로 민보군을 조직하여 일본군 관군과 협력하여 동족인 동학농민군을 참살하는데 앞장섰으니, 대한제국의 일본 병탄은 국가의 기층민인 백성의 약소함이 아니라 양반 유림들의 민족 배반과 기득권 유지에만 급급했던 몰지각과 무능이 초래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멸족되었어야 할 이것들의 후손이란 것들이 나라를 일본에 갖다 바치고선 그 매국의 더러움을 망각하고 뻔뻔스러운 주둥아리를 오늘에도 놀려대고 있다. (*경상도 서원 유림의 친일행각은 링크된 리뷰참조)

 

이것들은 친일 극우를 자처하며 오늘 더러운 아가리를 놀려댄다. 일제의 대한제국 병탄은 백성이 자기 수호의 능력을 지니지 못하고 병약해서 자초한 것이지, 일본의 무력 침략은 없었다.”고 주장한다. 한국인의 열등감이지 일본은 잘못한 것이 없다는 것이다. 참회와 반성은 실종되고 추악한 것들이 그들 조상의 패악질을 잊은 채 망령된 헛소리를 지껄인다. 영남의 유림들이 조직한 민보군은 외세와 맞서 함께 싸우자는 농민군의 연합전선을 거절하고, 일본군에 붙어 동족 학살에 적극 협력했다. 아마 망국은 바로 이러한 유림세력들로부터 시작되었다고 해도 역사의 그릇된 이해는 아닐 것이다. 조선 지배층 다수는 자신들의 지배체제와 신분질서를 지키기 위해 외세 침략이라는 나라 전체의 위기조차 고려하지 않았다. 이들의 극단적 이기심이 나라를 패망의 길로 이끈 것이다. 이들은 포로를 아예 잡지 않았으며, 동학교는 모조리 살육하라!”는 토벌 구호를 그대로 실행에 옮겼다.

 

친일파의 뿌리는 깊다 이미 1880년대부터 시작된 것으로 일본의 조선 침탈은 1905년 을사늑약이 시작이 아니다. 1882년 임오군란과 1884년 갑신정변이라는 지배계급 간의 권력 투쟁에 외세를 불러들인 양반유림계급의 사대주의가 시작이며, 이로 인해 일본군의 조선 주둔과 1894년 갑오년 동학전쟁으로 농민을 비롯한 일반 백성인 외세 저항 세력이 궤멸되었기 때문이다. 동학전쟁은 일본군과 백성의 전면전이었다. 여기에 양반 지배계급과 관군이 일본군에 합세함으로 인해 초래된 굴욕이 바로 1910년 한일병탄의 치욕이다. 결국 국가를 말아먹은 당사자는 바로 500년을 기만적 유교논리로 기득권을 누렸던 양반유림 세력이다. 이들이 매국노 집단이요, 이 땅의 발전을 가로막는 추악한 족속들이다.

 

다음은 1894년 갑오년의 대표적 친일파 매국노의 일례이다. 이때 중앙군영인 자위영의 영관(領官)이었던 이두영이란 인물이 있는데, 일본군이 앞세운 동학농민군 토벌 선봉대장이 되어 백성을 무자비하게 유린 학살했으며, 이 토벌의 승리를 대가로 일본에 의해 1908년 전라북도 판사, 조선멸망과 함께 전라북도 도지사를 역임한다. 또한 일본이 양성한 교도중대 지휘관 이진호1907년 중추원 부찬의를 거쳐 평안남도 관찰사, 한일병탄 뒤 도지사를 거쳐 조선총독부 중추원 참의와 고문을 지냈다. 1895년 동학의 교주인 전봉준은 일본의 영향력 아래 신문을 받고 교수형에 처해지는데, 당시 이 신문의 최고 책임자는 일본이 만든 법무아문(오늘의 법뮤장관) 서광범이다. 갑신정변의 주동자인데, 일본으로 도주해서 미국 망명길에 오르고 미국 시민권을 취득한다. 그리고는 일본 외무성 주선으로 조선에 돌아와 법무장관에 임명된 대표적 친일, 민족 배신자이다.

 

결국 조선(대한제국)의 패망은 이들 지배계급의 탐욕이 불러온 자멸이다.  동학농민전쟁이 외세없이 수행되었다면 아마 백성이 세운 흥국안민(興國安民), 통치의 도리와 지배의 의리가 토대가 된 새로운 세계가 열렸을 것이다. 지배계급으로 자처하는 잘난 족속들이 자기 이익에 매몰돼 역사의 진실한 축을 외면할 때 그 나라의 미래는 곧 자멸의 길을 향하게 된다. 조선조의 뿌리깊은 배제와 차별의 억압과 폭력의 정치는 그 추악한 유림 세력을 통해 일제 식민지 치하의 기득권으로 이어지고, 오늘 극우 친일의 배은망덕으로 다시금 그 더러운 모습을 뻔뻔스레 드러내고 있다. 이들은 엄중하게 징치(懲治)되어야 할 대상이지 감히 나댈 것들이 아니다.

 

실행된 적 없는 조선의 상하 소통제도

 

조선조에도 백성이 지배층을 향해 고충과 억울함을 호소하는 형식적 제도가 있었다. 지배체제에 용인한 합법적 항의 방법으로  등소(等訴)’라는 것이 있었는데, 실현된 적이 없다고 한다. 지배체제의 본질과 구조로 인해 아래 것이 상전에 무엇을 요구하는 것은 가당치 않다는 것이었다. 또한  거화(擧火)’라는 것도 있었는데, 일종의 직접 간언 제도로써 왕과의 면담을 요청하는 횃불을 올리면 그를 확인하고 대응하는 제도이다. 이것은 단 한 차례 실행되었는데, 1824년 순조 때 이인백이라는 인물이 거화하고 상소를 올린 사건이다. 이에 좌의정 이상황이 왕에게 전언하는데,  지척에서 변괴가 일어났습니다. (...) 상소 양식으로 첫머리가 시작되고 말이 나라의 길흉에 관계되어 아주 흉악했습니다....”이다. 존재하는 제도였으나 조선 역사 이래 단 한 차례 실행되자 지배계급의 인식을 여실히 드러내고 있다. 백성의 간청이 변괴이고, ‘흉악으로 돌변하는 것은 양반 권문세가들의 백성에 대한 인식이란 오직 찍어 누르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부민고소(部民告訴)’ 라는 것도 있었으나, 백성이 지방관을 고소하는 것은 앞서 언급했듯 금지되어 있었으므로 유명무실한 것이었다.  단지 모반대역죄와 불법 살인죄만 허용되었는데, 즉 지배권력에 위해가 될 여지가 있는 것만 조정에 알릴 의무가 주어진 것이지 사회적 약자인 백성의 정당한 고소 수단과는 애당초 한참이나 먼 것이었다. 마지막으로  왕의 거둥이라는 것이 있었는데, 능과 사당에 참배하기 위해 궁궐 밖으로 행차하는 국왕의 행렬을 말한다. 거둥길에서 왕은 길가에 엎드린 백성의 목소리를 듣는 것이었다. 사실 군주의 위엄을 과시하고 통치 권위를 확보하는 일종의 정치 쇼로서 기만적 몸짓이라 할 수 있었는데, 거둥길의 이 소통 이벤트를 통해 불만을 가진 백성을 지배질서로 포섭하고 민심을 잠재우기 위한 것이었다.

 

이 소통 이벤트인 정치 쇼는 1777년 정조에 이르러 다소 완화되어 거둥길에 백성이 앞으로 나와 소란을 피우지 않을 정도의 거리만 떨어져 있으면 용납되었지만, 그 이전에는 일체 허용되지 않았다, 마치 작금에 용산 청사를 비롯해 이동할 때마다 거리가 차단되고 수많은 경호차량과 경찰 오토바이가 에워싼 무례한 권력자의 행차와 닮아있었다. 1861년 철종에 이르러 국왕의 거둥길 행차에 돌멩이가 날아들었다. 왕의 가마 꼭대기 황금봉황 장식을 부러뜨린 사건이다. 즉시 범인은 색출되어 국왕의 온갖 고문으로 계속된 친국 속에서도 당사자 조만준은 굴복하지 않았으며, 자신의 단독 행위임을 주장했다. 그는 사지와 목이 찢기는 능지처사 되었다. (국민의 대표로써 한 사람 한 사람이 하나의 입법기관인 의회 다수당인 야당 대표의 목에 칼을 찔러 넣는 희대의 살인 미수사건이 벌어져도 수사가 오리무중인 작금의 현실과 엄청난 대조를 보여준다)

 

신격화된 군주의 심기에 거스르는 행위는 도의를 부정한 것이라는 대역부도(大逆不道)’, 오늘이라면 참으로 가당치도 않은 죄목으로 주살되었다. 조선의 지배질서란 지배계급 자신이 영구히 상전인 것은 하늘의 신성한 뜻이라는 것이었다. 감히 하늘의 뜻을 넘봐? 아래 것들이 죽을라고!, 이것이 500년 조선사, 아니 오늘의 패덕한 극우 정치인에 이르기까지 이러한 야만적이고 반인륜(反人倫)의 파렴치가 지속되고 있다. 조선조는 백성이 지배계급에 정당한 요청을 하는 길이 철저하게 차단되어 있던 사회라 할 수 있다. 백성은 오로지 지배계급의 요구에 순응하여 따르는 예의만 요구되던 사회라는 것이다. 그러니 유일한 수단은 봉기이고, 민란이요, 반란이며, 혁명을 위한 전쟁 뿐이었다. 때문에 이러한 저항운동은 주류의 관점에서 바라 본 부정이나 부도덕, 또는 부정의와는 그 성격이 근본적으로 다른 것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그것은 소통의 통로가 단절된 유일한 민의의 표시였기 때문이다.

 

맺는 말

 

조선 사회는 모두에도 말했지만 의와 도라는 유교적 윤리의 얼굴 뒤에 숨어 그 자체가 내재한 무수한 사회적 모순과 부조리로 추한 민낯을 감추기 위해 백성을 수탈하고 차별하며, 모욕하고 원한과 설욕의 욕망을 뒤엉키게 한 불의한 비극의 세계였다. 사회자체의 본질과 구조로 인해 회피할 수 없는 모순과 신분제의 부조리함이 깊게 똬리를 틀고 있는 사회였다. 양반 지배질서는 백성에 그러함에도 어질고 예의바름을 요구했다. 오로지 상전을 향한 의와 예를, 단 한 번도 존재한 적 없는 아래를 향한 그 의()와 예()! 양반계급의 지배와 교화는 의로웠던 적이 한 순간도 없었던 잔혹한 사회였다.

 

1597년 양반 오희문은 자전일기인 쇄미록에 다음과 같은 글을 쓴다. “한복이 죽은 것은 족히 아까울 것이 없다. 다만 (...) 갑자기 죽었으니, 마치 더러운 물건을 삼킨 것 같아 밤새 잠을 자지 못했다.”. 자신의 노복 한복에게 빌려준 땅의 농사와 달리 자신의 전답을 소홀히 한다는 이유로 관아에 고발하여 죽음에 몰아넣고는 그 죽음에 어떤 연민이나 슬픔도 보이지 않으며, 고작 계산의 잣대를 들이댄다. 그 소유 물건이 없어진 것만이 안타까운 것이다. 이것이 조선조 양반 지배계급이 백성을 대하는 고착된 관점이요, 방식이었다. 사람이 아니라 물건이요, 동물이었던 것이다.

 

1704년 숙종 때에는 성균관 유생을 시중들고 건물을 운용하며, 온갖 식음과 제사의 비용을 감수해야 하는 사령 두 사람이 자결했다. 숙종조 승정원일기에는  재원은 줄어들었는데 받들고 수행해야 할 일은 전과 같으니 최소의 임무조차 행하기 힘든 상태입니다. ...성균관 노비가 역()을 감당하는 게 얼마나 괴로운지 알 수 있습니다.”고 기록되어 있다. 아마도 양반 사대부들은 자신들은 한 푼도 부담하지 않으며, 자신들, 양반의 지배체제를 유지하기 위한 교육기관의 운용 재정 전반을 백성에게 부담시키며 그 혹독함을 모르지는 않았던 것 같다.

 

그러나 이러한 현실이 1727년 영조 3년의 승정원일기에 다시 반복 되어 나타난다 백성의 신역(身役)중 성균관의 신역보다 괴롭고 무거운 경우는 없습니다.”라고 쓰고 있다. 절대 양반 지배계급의 의식은 바뀌지 않았던 것이다. 오히려 그 부담은 더 가중되어,  이들에게 형조, 사헌부, 한성부에 속전으로 바치는 돈이 거의 수천 냥에 이릅니다. 하급 벼슬아치도 함부로 돈을 요구합니다.”고 실상을 왕에게 고하고 있다. 건물 관리, 제사 업무 전반에 대한 책임, 유생의 뒷바라지, 음식을 만들어 받드는 식사 책임, 성균관 운영에 대한 전반적 재정 감당까지 여기에 더해 속전까지 요구한다, 사람이 죽지 않을 수 없는 조건이다.

 

이것을 조선이 자랑하고 오늘도 이들을 계승하고 있다며, 거들먹거리는 후손들은 유교의 윤리가 이 땅의 정신이라는 터무니없는 헛소리를 지껄이기까지 한다.  이 책, 조선의 역사를 읽는 다는 것은 고통과 울분을 마음에서 삭이는 인내의 시간이라 할 수 있다. 이 불의함이 오늘에도 여전히 작동하고 있는 까닭이다. 이 추악한 사슬, 연결의 고리를 잘라내야 하는데, 우리는 지나친 관용의 말로 그 패악을 희석하고 만다. 결코 이 역사를 잊어서는 안 된다. 오늘 민주주의를 연구하는 석학들은  민중의 지속적인 감시와 견제 없이는 민주주의란 언제든 부식될 수 있는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고 역설한다.  잘 안착된 민중의 평등과 자유와 인권에 대한 제도조차 이렇게 불안한 것이 인간 세계이다.  하물며, 철저하게 민의가 봉쇄된 억압 사회에서 백성의 삶이란 어떤 것이었겠는가?

 

역사를 주류, 기득권의 관점에서만 기술하려는 자들, 그리고 조선조 말 외세에 의존하여 나라를 팔아넘긴 양반 유림 세력들, 그리고 일제부역자들과 청산되지 못한 이것들의 후손이라는 것들이 더 이상 이 땅의 역사를 왜곡하고 더럽히는 일을 하지 못하도록, 아니 하는 순간 매장되는 제도적이고 윤리적 장치를 마련해야 할 것이다. 나아가 신음하며 고달픈 삶을 살아내야 했던 많은 백성들의 후손인 오늘의 우리들은 이 역사를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저자의 말처럼 나 또한 이들 민초의 지난한 고통과 저항의 역사가 역사 변혁의 주체였다고 단언하지는 않으련다. 그러나  그들이 외쳤던 절규의 목소리와 정직한 몸짓은 다가오는 우리의 역사적 도전에 중요한 자성의 칼이 되어 줄 터이다.  조선의 패망은 책임을 다하지 못한 양반 기득권 지배계층의 위선과 무능이 불러 온 것이라 할 수 있지만, 오늘은 이러한 지배권력과 질서를 만드는 책임이 국민에게 주어져 있다. 잘못된 자유의 선택은 독재자를 부르고 공멸의 길을 열어젖히기도 한다. 역사 읽기는 이러한 미혹의 시선으로부터 우리의 시선을 한 단계 올려놓는 일이 될 것이다. 이제 세 번째 조선사 읽기인 조선의 두 얼굴로 달려 가보아야 할 것 같다. 선비라 부르던 사대부들의 그 이중적 얼굴의 모습을 확인하기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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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전집은 카프카의 일기, 편지, 소설을 포함한 산문들에서 시적(詩的)116편을 떼어낸 것이다.  여기에 카프카의 자유로운 정신적 흐름의 산물인 드로잉 스케치 작품들이 곁들여져 카프카 문학에서 표현될 수밖에 없는 세계와의 친밀성을 더해준다. 카프카 전기를 쓴  막스 브로트는 카프카의 스케치는 화가로서의 능력과 독창성을 뚜렷하게 드러내기에 적합했다고 말하면서 그 누구도 스케치 환상과 서사 환상의 유사점을 추적하려 하지 않았음을 지적하고 있기도 하다.

 

시집의 첫 지면과 마주하게 되는 시(詩)는 열네 살 카프카가 쓴 조금은 통속적 분위기의 시구다.

 

오고

이별이 있다.

그것도 자주 - 재회는 없다. (1897.12.20.)

 

단어 또는 문구 한 구절 마다 행을 달리함으로써 우리 사고의 지연을 요구하여 대립된 이미지의 묘한 통합을 이루게 한다. 그러면서 마지막 행에 이르러 어떤 숙명의 작용을 생각하게 한다. 이 어린 시인의 감성에 이미 삶과 죽음의 기묘한 어울림에 대한 이해가 있었다는 점은 놀랍기도 하다.


이 드로잉에는 청원자와 지체 높은 후원자라는 설명이 붙어있는데, 각자의 내면을 상징하는 듯한 모자를 쓴 그들의 작은 얼굴표정과 표면화된 얼굴의 이중성이 대비된 희화성을 읽을 수 있다.


나는 12번째 시를 한동안 응시했는데, 소설 소송요제프 K’변신그레고르 잠자의 마음이 이러한 것이 아니었을까? 하며 인간으로서의 막연한 공감을 하게 된 작품이다.

 

침대에서,

무릎을 약간 세우고,

주름진 이불을 덮고 누운 채,

----(중략)----

군중과 멀리 떨어져서,

군중과 전혀 이해할 수 없는

그런 먼 관계를 맺는다.

 

동화하려 하지만 불가능한, 또한 하나의 고정된 관념처럼 되어버린 유대인으로서 분리될 수 없는 정체성과 이 세계의 끈질긴 억견으로부터 고립된 한 인간의 고통을 느낀다. 그리고 그에게는 애증의 도시인 프라하의 풍경을 묘사한 2번째에서 4번째에 이르는 시구는 그 처연함과 외로이 걷는 한 청년의 처진 어깨를 떠오르게 한다.

 

오늘 서늘하고 칙칙하다,

구름은 굳어 있다.

바람은 잡아당기는 밧줄이다.

사람들은 굳어 있다.

---(후략)--- (1903.11.8.)

 

그런데 카프카의 음울한 사변과 다른 조금은 명랑해보이기까지 해서 감긴 눈을 뜨이게 하는 시가 있다. 하늘하늘한 봄바람이 굳은 마음을 열어 폴짝폴짝 뛰는 경쾌함이 미소짓게 한다.

 

작은 영혼이여,

그대는

---(중략)---

반짝이는 풀밭에서,

두 발을

쳐드는 구나. (1909. 9)


단편소설 시골 의사가 출처인 듯한 작품인데, 우리들은 그리스 비극에 등장하는 코러스의 합창, 인물들이 말하지 못하는 세상의 인식을 대변하는 목소리를 연상케 하는 구절이다. 아마 카프카를 읽어 본 독자들은 이 시를 대하고 친밀함에 반갑기도 할 것이다.

 

그의 옷을 벗겨라, 그러면 그가 치료할 것이다.

그리고 그가 치료하지 않으면, 그를 죽여라!

그는 단지 의사일 뿐, 단지 의사일 뿐.

 

침대에 누워있는 환자의 치료를 주저하는 시골의사를 향한 마을 주민들의 은근한 압력의 장면이 떠 오를 것이다. 기이한 관계역설을 일으키는  카프카스럽다는 말을 절로 내뱉게 하는 대표적 장면일 것 같다.

 

아마 다음의 시구는 단편 돌연한 출발이 그 출처일 것이다. 지금 여기라는 그의 정체성을 묶어두는 것으로부터 떠나는 것, 그러나 그것이 목표인 한 그것은 실패할 수 밖에 없는 불가능한 것이 아니었을까?

 

주인 나리, 어디로 가시나요?

모른다.” 나는 말했다.

단지 여기에서 떠나는 거야, 단지 여기서 떠나는 거야.

끊임없이 여기에서 떠나는 거야,

그래야 내 목표에 도착할 수 있어.

 

그러시다면 나리께서는 목표를 아신단 말씀인가요?”

그렇다네내가 대답했다.

내가 이미 말했잖아”.

“‘여기-에서-떠나는 것’, 그것이 내 목표야.” (1922.2)

 

옮긴이의 한 문장이 어쩌면 카프카 시문학의 많은 부분을 대변하는 것 같다.  슬픈 미래와 전쟁에서  폐허 더미를 목격한 살아남은 자의 기록이라는 말이다. 자신 안에 이 세계의 질서를 부여할 수 없다는 사실과 정직하고자 하는 절대적 요구에 의해, 혼돈을 목격한 증인으로서 카프카의 내면은 가혹한 전쟁터였을 것이다.

 


두 권의 카프카 평전을 쓴 마르트 로베르는 세기 전환기인 19세기 말  이상(理想)의 몰락으로 인류의 지성들이 현기증 나는 심연과 마주했을 때 이를 메우고 진실을 열어 보이기 위해 이상의 대치물로 문학에 최고의 지위를 기대했다고 주장한다. 신의 죽음에 대한 선언이 있고서부터 신이 떠나고 없는 자리를 대신하게 된 신비와 맺어주는 능력을 시가 담당했다는 것이다. 인간의 접근 불가능한 경험 저편의 세계로 이르는 길을 열어준 카프카 산문의 출현은 이러한 시의 신비와 경이의 교량기능을 가져왔다고 지적한다.

 

카프카의 시()전집 번역자인 편영수는 카프카에게는  시와 산문 사이의 과도기가 존재하지 않는다.”면서,  카프카의 산문이 시에 가깝듯 카프카의 시는 산문에 가깝다.”,  산문에 근접할 때만 독창적이라 카프카의 시를 혹평한 집단을 향해 마르트 로베르의 시대정신을 품은 문학의 의미로서 카프카의 시를 대변한다.

 

작품에 대한 해설에서 카프카는  세계와 세계질서의 도래하는 파괴를 예감한 횔덜린을 잇는 파편적 글쓰기의 선구자라 이해하며, 이  파편(fragment)이 곧 카프카의 문체가 완성되는 유일한 형식이라 말하고 있다. 사실 많은 문학이론가들이 앞서 이 파편의 축조물로서 카프카의 소설을 해독하고 있다, 파편인 실존의 폐허를 재료로 삼아 완성한 성(城)은 축조된 조각들 사이에 메워지지 않은 무수한 틈을 지니게 된다. 아마 완성되었으나 여전히 미완성인 이 모순적 상황이 카프카의 시와 산문일 수밖에 없는 원인일 것이다.

 

책의 편집에 대한 작은 아쉬움의 변으로 감상을 맺어야 할 것 같다. 수록된 시들은 카프카의 산문글 어느 것으로부터 분리된 글들이다. 즉 시들 중 많은 것들이 어떤 맥락 속에 있던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이를테면 19161224일자 일기라던가, 단편 <어느 단식 광대>와 같이 그 출처를 밝혀 독자들의 읽기를 도울 수 있었을 텐데 작품해설에서 몇 편에 대해서만 이를 표기하고 있기에 감상에 어려움을 갖게 되는 것은 이 책의 흠결(欠缺)이다. 차후 개정을 하게 될 때 반영을 고려했으면 좋겠다.

 

그럼에도 이 시전집은 카프카는 시인일까? 라는 회의적 질문에 대한 당찬 도전 작업으로서의 가치를 지니는 듯하다. 아마 카프카의 문학을 사랑하는 많은 독자들에게 카프카에 이르는 새로운 접근 통로가 되어 줄 터이다주목할 만한 시적 재능을 지닌 시인”,  카프카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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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민주주의는 무너지는가 - 우리가 놓치는 민주주의 위기 신호
스티븐 레비츠키.대니얼 지블랫 지음, 박세연 옮김 / 어크로스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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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은 산뜻한 봄기운을 알리고 있는데, 우리 사회는 화창한 기운이 스러져가는, 그래서 이 음울한 어둠의 징후를 쓰는 마음이 무겁기만 하다스웨덴의  '민주주의 다양성 연구소(V-Dem)'가 2024년 3월 최근 발표한 민주주의 보고서에서 한국을 '민주화에서 독재화로의 전환이 급속하게 진행되는 국가'로 발표했듯, 지금의 한국 사회는 모든 민주주의 구성 요소들이 무자비하게 파괴되고 있다. 바로 정치검찰이 권력을 잡고 1년 6개월 사이에 벌어지고 있는 일이다.


두 명의 하버드정치학 교수가 쓴 이 책은 대다수의 사람들이 인지하지 못하는 가운데 점진적으로 무너지는 민주주의의 파멸에 대한 경고와 위험 신호를 미국을 비롯한 세계 여러 국가의 패턴 사례를 통해 인지토록 하고 있다. 이러한 신호를 우리들은 인식함으로써 우리의 제도와 정치적 규범과 관습의 미흡함과 결여를 수정, 개혁하도록 정치권에 압력을 행사할 수 있을 것이다. 비록 불완전한 제도이긴 하지만, 입법과 사법, 행정의 삼권 분립(三權分立)의 균형을 기조로 하여 국민의 자유, 평등, 공정, 인권, 국토수호 등의 가치를 지지하는 민주주의는 바로 우리들 삶의 균형을 지탱하는 토대이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에서 노골적인 독재로 민중을 탄압하던 시대는 가버리고, 공고한 민주주의의 뿌리가 이 땅에 깊숙이 내릴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하지만 이러한 믿음은 환상임을, 결코 민주주의는 민중의 지속적인 감시와 견제 없이는 언제든 부식될 수 있는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함을 이 저술을 통해 다시금 상기하게 된다. 세계 각국의 민주주의 제도의 모델로서 역할을 해왔던 미국의 민주주의가 그 토대부터 침몰하고 있으며, 수많은 국가들의 민주주의가 독재와 전제적 정치권력에 의해 죽음을 맞는 걸 우리는 알고 있다. 저자들은 이제 미국이라고 그동안 손가락질했던 남아메리카 여러 나라와 동남아시아, 이탈리아를 비롯한 헝가리, 터키, 폴란드 등 유럽 국가들처럼 극우 독재정권과 다른 예외지대가 아님을 증언하고 있다.

 

우선 대중 인식의 오만을, 그 착각을 깨우는데, 민주주의를 지키는 건 국민이 아니다.”라는 정의다. 대중은 너무 자주 조작된 여론의 유혹에 넘어간다는 것이며(대중의 우매성-이것이 민주주의의 약점이자 곤란이다), 자신의 의지대로 정부를 구성할 수 없다는 것이다. 실제 정당이 내세운 인물에 국민은 그저 투표할 뿐이고, 선출된 자는 자기 입맛대로 국가행정을 방해 없이 실행 할 수 있는 까닭이다. 우리의 각 정당별 대선 후보 지명의 과정을 복기해보라, 정치 야망에 눈이 먼 인간을 필터링 하는 것은 우선은 주류 정당의 역할이다.

 

벨기에, 영국, 프랑스, 핀란드를 포함한 서북유럽 선진국들의 정당은 경험없고, 권력 욕망에 사로잡힌 아웃사이더인 대중적 인기인이나 선동가가 주류 정치에 끼어드는 것을, 다시 말해 권력의 자리에 오르지 못하도록 잘 막아내는 정치적 문지기역할을 수행해낸다. 이러한 인물들이 권력의 중앙무대에 올라서지 못하도록 방어하는 기능을 정당의 이익을 초월하여 민주주의의 근간을 위해 적극적으로 수행하는 도덕적 역량을 갖추고 있다는 것이다. 때문에 이들 사회는 극단적(대개 극우)인물이 대중 인기에 영합하여 등장하려 할 때 기성의 진보와 보수 정치인은 연합하여 그들을 고립시키고 무력화하여 민주주의를 훼손으로부터 지켜낸다.

 

이는 사전에 독재자를 감별하는 뚜렷한 조짐을 알아차리는 규범과 규준을 가지고 있는가의 문제이다. 저자들은 반민주적 정치인을 가려내기 위한 예일정치학 교수 후안 린츠의 미완성의 리트머스 테스트를 기반으로 독재자 감별 경고 신호를 적시하고 있는데, 그것은 첫째, 말과 행동에서 민주주의 규범을 거부하고, 둘째 경쟁자의 존재를 부인하며, 셋째 폭력을 용인하거나 조장하고, 넷째 언론의 자유를 포함하여 반대자의 기본권을 억압하려 한다는 것이다. 이 중 한 항목만 충족하더라도 그 인물은 독재자라 정의하고 있다. 하버드와 예일대 정치학 교수라는 검증된 저술자들의 지적이다.

 

이러한 인물이 국가 정치권력의 핵심에 자리 잡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는 주요 정당의 문지기 역할, 즉 극단적 인물의 등장을 억제할 힘이 있어야 하며, 민주주의 수호에 대한 강한 의지를 지니고 있어야 한다. 전제적 독재자로 인해 민주주의가 붕괴된 국가들은 한결같이 바로 이러한 문지기가 없었다는 것이다. 이들 국가들이 민주주의가 붕괴한 것은 정당이 이념적 스펙트럼에서 반대쪽으로 이동한 것이 아니라, 극우, 친일과 같은 국익을 해치는 극단적 인물과 정당의 이익을 위해 손을 잡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선거는 이기기도 하고 지기도 하는 것이며, 의회에서 소수 정당이 되기도 하는 것임에도, 한 때의 대중 여론에 편승한 인기인과 손잡아 선거의 우위를 잡으려는 유혹에 빠져, 독재자에게 자리를 내어주는 결과를 초래한다. 유럽 민주주의 국가들의 정당은 당의 이익보다 민주주의 수호에 더 중요한 가치를 두었다는 점을 우리는 눈 여겨 보아야 한다. (*벨기에, 오스트리아, 핀란드가 대중인기에 영합한 인물에 맞서 민주주의를 지켜낸 정당 문지기 역할 사례는 책 본문 참조), 나는 극우로 기운 작금의 여당 내 국회의원들의 사정을 알지 못한다. 과연 그들이 지금도 진심으로 권력자를 지지하고 있는지를.

 

사실 극단주의적 선동가들은 답답한 정치에 염증을 느낀 대중들에게 신선한 자극, 마치 정의로운 인물처럼 비치기 일쑤다. 기성 정치에 대해 저열하고 혹독한 말을 마구 내뱉기에 대리 만족을 선사한다. 또한 사적 이익에 집착하는 언론기업들의 반복된 조작 선동은 가짜를 진짜로 만들어낸다. 작금의 극우 황색지로 전락한 조중동을 비롯한 기득 집단은 자기 이익 말고는 민주주의나 국익에는 관심이 없기에 독재자도 선택한다. 이들은 국민의 오랜 분노를 활용하여 자신들의 권력과 이익을 지키는 데 적극적이다. 대중은 대개 여기에 유혹되고, 종국에는 파괴된 민주주의 체계 속에서 신음과 고통을 껴안게 되는 것이 실상이다. 책은 특히 대통령제에서 문지기 역할에 대해 풍부한 연구사례들을 적시하고 있다.

 

트럼프를 사례로 한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큰 부분이 있는데, 실제로 도널드 트럼프가 권력의 자리에 올랐을 때 독재자 감별 신호 리트머스 테스트를 실행 본 결과, 네 항목 모두 양성 반응을 보였다는 것이다. 우선 그는 민주주의 규범을 준수하려는 의지가 없었다는 것이다. 선거 절차의 정당성에 의문을 제기하고, 2016년 대선 결과를 받아들이지 않을 수 있다는 전례 없는 주장을 선거도 하기 전에 내놓음으로써, 부정 사례가 불가능한 미국의 선거 제도와 방식을 부정했다.

 

두 번째는 경쟁자인 상대의 정당성에 대해 부정을 하는 것인데, 트럼프는 힐러리를 범죄자, 파괴분자, 매국노, 국가안보 및 국민 삶에 위협적인 존재라고 비난했다. 그는 힐러리를 구속해야 한다고 끊임없이 주장했다. 세 번째는 폭력의 조장과 용인인데, 자신에 반대하는 시위자들에 대한 폭력을 용인하고 은근히 독려했다. 옛 날 같았으면 너 같은 사람은 끌려가서 죽도록 얻어터졌을 거야.”, 네 번째는 경쟁자와 시민권을 억압하는 것이다. 자신을 비난하는 어떠한 이들에게나 권력을 이용하여 고통의 구덩이(지금 한국사회는 무차별 압수수색과 자의적 기소 남용)에 몰아넣는 것이다.

 

리트머스 시험지가 모두 붉게 그가 독재자임을 가리켰다는 것이다. 작금의 한국사회는 어떤가? 아마 완벽하게 동일한 현상임을 읽을 수 있을 것이다. 그 구체적 실태들의 적시를 위해 내 노고를 사용하는 것은 지양토록 하겠다. 어쨌든 책은 이렇게 전제주의 행동을 가리키는 네 가지 신호를 적시하며, 우리들에게 민주주의의 침몰을 경고하는 징후들을 알려준다. 그럼에도 대중의 우매함이라는 민주주의의 약점은 그대로 발휘되어 대통령에 부적합한 인물이 선출되기도 한다. 물론 이러한 자를 선출한 나라들은 곧 전제주의적 독재국가가 되어버렸지만 말이다.

 

민주주의는 민주주의의 규범을 허무는 독재자와 위기를 느낀 기성 정치 세력 사이에 고조되는 갈등의 결과로 붕괴된다고 한다. 책은 이들 독재자들이 한 국가를 끔찍한 지옥으로 몰아가는 단계적 상황을 기술하고 있는데, 처음에는 험악한 말로 시작된다고 한다. 비판자를 적이나 체제 전복자, 심지어 테러리스트라며 도발적으로 비난한다고 한다. 이를테면, 야당 대표를 범죄자라거나, 자신을 무능하거나 무도하다고 비판하는 언론인을 마구잡이로 압수, 수색, 기소하여 일상적 삶의 수행을 불가능하게 하여 인권을 말살하는 것이다. 더구나 자신의 세력을 옹호하는 언론을 이용하여 이러한 거짓을 정당화하고 오히려 상대에게 가짜 뉴스를 퍼트린다고 주장하여 대중이 이를 진지하게 받아들이도록 하여 탄압을 정당화한다는 것이다.

 

그리곤 말을 넘어 행동으로 옮겨, 대중 간에 상호 공포와 적대감과 함께 불신을 부추기고 사회 분열을 조장한다. 민주주의는 본래 험난한 과정의 연속으로 이루어 진 것이다. 사회란 결코 수직적이고 획일적으로 움직여지는 것이 아니다. 무수히 서로 다른 견해와 욕구로 연결된 곳이 인간 사회이다. 따라서 민주주의를 운영한다는 것은 협상과 양보, 타협이 무엇보다 중요한 절차이고 규범이다. 후퇴는 피할 수 없고 승리도 언제나 부분적인 것이다. 실제 이해관계가 다른 정당의 정치인은 이러한 제약이 고통스럽고 어려운 일이지만, 민주주의를 지지하는 정치인은 이러한 제약들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을 이해한다. 이것은 법제도의 차원을 초월한 민주주의 정치의 윤리 규범인 것이다. 경쟁자인 상대 정치인은 동료이다. 적으로 인식하는 순간 민주주의가 들어설 길은 차단되고 만다.

 

오늘의 한국사회에 노정된 문제는 바로 이러한 정치적 윤리 규범이 존재하지 않는 까닭이다. 저자들은 두 가지 핵심적인 기본 규범을 적시하고 있는데, 첫째는 상대 정당을 정당한 경쟁자로 인정하는 상호관용과 이해이고, 둘째는 제도적 권리를 행사할 때 신중함을 잃지 않는 절제의 원칙이다. 이것이 민주주의를 보호하는 절대적인 연성(軟性) 가드레일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얼마나 적절하게 작동하는 가의 여부가 파멸을 결정한다고 지적한다. 민주주의는 이 두 규범이 작동하지 않을 때 파괴되기 시작하는데, 제아무리 공고하게 설계된 헌법도 허물어진다. 어떤 구기 경기에서 심판이 매수되고, 상대 팀 주전 선수를 뛰지 못하게 막고, 경기 규칙을 상대에게 불리하게 만들면 우리들은 그 시합을 불공정하고, 폭력이라 말하는 데 주저치 않을 것이다.

 

여기서 심판의 매수란 검찰, 경찰, 법원, 감사원, 정보기구, 기타 감찰기구, 공정거래위, 국세청, 각종 규제기관 등 중립적 중재 기관들의 독립성을 훼손하고 독재 권력자의 하수인으로 삼음으로써 마음대로 법을 어기고, 시민권을 위협하며, 수사나 검열에 대한 걱정 없이 권력을 남용하는 것. 또한 이 공적 권력을 이용하여 상대 경쟁자를 탄압하는 것이다. 작금의 한국의 정치권력은 애초에 이 심판 매수라는 가장 나쁜 위험을 안은 정치검찰에게 대권을 주었다는 점에 있다. 독재권력 자신이 심판인 것인데, 이는 이미 민주주의의 파괴에 대해 용인을 해 준 것이나 다름없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독재자는 이들 손에 넣은 무기를 이용하여 법률을 차별적으로 적용하고, 정적을 처단하고, 동지는 보호하는 강력한 도구로 사용하게 된다. 이미 민주주의는 괴멸하고 있는 것이다. (기소권을 독점하는 검찰의 자의적이고 선택적 기소행위를 보라, 그리고 그 남용을 보라.)

 

독재 권력은 권력의 유지와 공고를 위해 규칙 바꾸기에 나서는데, 법률(법령 포함)을 자의적으로 만들어 시행하거나, 입법기관인 의회가 결의한 일반 법률이나 특별법(특검안을 포함)을 거부함으로써 반대세력이나 자기집단의 이익에 반하는 모든 저항 세력을 약화하는 것이다. 또한 선거시스템이나 각종 국가 계획을 자신에게 유리하게 바꾸려는 기만 전략을 감행한다. 이렇게 획책하여 결정 시행하게 되면 수십 년 혹은 그 이상의 시간동안 혜택을 누릴 수 있기 때문이다. (도로 계획의 절차무시 임의 변경행위, 총선 선거공약으로 그린벨트의 무차별 해제 남발 등등)

 

독재자는 위기의 순간에 음모를 꾸미고, 정적으로부터 권력을 보호하기 위한

방어막을 쌓는다.” - 4. 합법적으로 전복되는 민주주의, 123쪽에서

 

우리들의 눈앞에서 민주주의가 해체, 파괴되고 있는데, 시민들은 이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한다. 그저 자기 삶이 영위되고 있기 때문인데, 이러한 흐름이 자신의 삶의 이해관계에 밀고 들어 올 때 되어서야 아우성을 치기 시작한다. 또 이들 독재자가 벌이는 한결같은 최악의 행위가 기술되고 있는데. 이들  독재자는 필연적으로 국가위기를 만들어낸다는 것이다. 예외없이 독재자들은 경제 위기, 폭동, 전쟁의 위기와 같은 안보위협을 구실로 대중의 불안감을 증폭시켜 사회적 공포를 조성한다. 이를 통해 비난의 목소리를 잠재우고 정적의 힘을 빼앗을 수 있기 때문이다. 독재자들은 이러한 위기를 절실하게 필요로 하고, 실제로 이들을 실행에 옮기다가 패망한 사례가 즐비하게 적시되고 있다. 독재자와 국가 위기가 결합할 때 민주주의는 치명적 손상을 입으며, 국민은 끝없는 고통에 빠지게 된다.



총선을 앞둔 작금의 한국 사회에서도 현 정권의 수장이란 자는 선거 부정 의혹이 있다고 역시 선거부정이 희박한 환경임에도 실시되지도 않은 선거에 문제를 제기한다. 트럼프와 지나치게 닮은꼴의 이 행위는 저자들이 독재행위로 지목한 가장 나쁜 행위의 하나이다. 이와 더불어 야당 대표를 임기 시작부터 2년에 이르는 기간 내내 압수와 수색, 기소 등 인신의 압박을 가함으로써 구속 위협을 그치지 않고 있다. 정적 제거 목적임을 모른다는 국민이 있다면 아마 자신의 눈과 귀를 막았기 때문일 것이다. 국민이 지켜보는 가운데 학생, 국회의원, 의사 등 자신의 심사에 거슬리는 말을 하는 누구에게나 폭력적 행위를 가하는 것을 버젓이 용인하는 것도 빼닮았다. 모두가 아는 사실은 여기서 줄여야겠다. 피곤하고 짜증나는 일이니까.

 

모든 성공적인 민주주의는 비공식적인 규범에 의존한다.”

- 5, 민주주의를 지켜온 보이지 않는 규범, 131쪽에서

 

민주주의는 잘 설계된 헌법으로 보호할 수 있는가? 란 물음에 두 저자는 결코 그렇지 않다고 답한다. 존경받는 법치국가들이 수없이 독재자에 의해 허물어졌음을 우리는 많은 사례로 접할 수 있다. 모든 헌법은 불완전하며 수많은 공백과 애매모호함이 존재한다. 더구나 제정시기와 달리 현대사회는 급속히 변화하고 있으며, 이로인해 우연히 발생하는 모든 경우의 수는 예측 불가능하다. 때문에 헌법조항은 예측하지 못한 방식으로 해석되어 악용될 소지가 무진장하다. 이는 너무도 중요한 지적인데, 법체계에 본질적으로 내재된 개념적 공백과 의미의 모호함 때문에 헌법 조항에만 의존해서는 민주주의를 독재자의 횡포로부터 지켜낼 수 없게 된다는 것이다.

 

결국 민주주의란 국민 대중과 정치인의 윤리적 역량에 의존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공동체 및 사회 내부에 널리 공유된, 인정하고, 존중하고, 강화하는 행동으로서의 규칙인데, 이미 앞서 기술한 것처럼 상호관용과 자기 통제인 절제의 윤리다. 상호관용이란 선거 패배를 재앙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다. 그러함으로써 자신과 다른 의견도 인정하는 정치적 집단 의지라 할 수 있다. 서로 경쟁을 벌이며 사회를 통치할 동등한 권리를 갖는다는 사실을 서로 인정하는 것이다. 상호 정당한 존재로 인정하는 것이다. 이것이 파괴될 때, 즉 경쟁자를 압살할 적()으로 간주하게 될 때, 상호관용은 무너지고, 사회의 갈등은 골 깊은 분열로 이어지며 민주주의는 쏜살같이 실종된다.

 

둘째로 자기 통제 대통령제에서 가장 극명하게 절제를 잃게되는 중대한 윤리적 역량인데, 바로 이 때문에 검증되지 않는 아웃사이더가 등장하지 못하도록 막아내야 하는 정당의 문지기 역할이 중요한 것이다. 자기통제, 절제와 인내는 법적 권리를 신중하게 행사하는 태도를 뜻한다. 현 정부는 출범하자마자 상위 법률의 시행이 정치검찰의 입맛에 맞지 않자 하위 법령인 시행령을 자의적으로 만들어 의회를 우회하는(즉 상위법을 위배하는) 위헌적 행위를 거침없이 자행했다.

 

나아가 대통령의 거부권을 남용하여 단 하나의 입법도 실행 될 수 없게 하여 다수당인 야당의 입법 기능을 괴멸시켜왔다. 의회가 승인(가결)한 모든 법안을 무효화해버리는 작태는 전형적 독재자의 행위임을 적시하고 있다, 특히 가장 나쁜 독재자의 행위로 사법부가 판결한 범죄자를 자기편이라 하여 바로 사면권을 행사하여 풀어주는 것인데, 이 사면권 남용의 행위는 대통령의 행정권력 남용을 견제하는 사법부의 판단을 무시함으로써 민주주의 초석인 삼권분립을 노골적으로 무력화시키려는 반()민주주의적 행위이기 때문이며, 사회정의를 송두리째 흔들어버리는 파멸적인 비윤리적 행위인 까닭이다.

 

오늘 한국사회는 민주정치의 핵심윤리인 가드레일이 이미 사라졌음을 보여주고 있다. 때문에 지금의 한국사회는 그 어느 때보다 정치판의 분열이 고착화되어 완전히 배타적인 진영이 되고 있다. 서로 공존이 불가능한 상호 고립된 양상을 보이고 있다. 사례는 이럴 때 민주주의 시스템을 전면 부정하는 집단이 등장했음을 보여주고 있다. 민주주의는 사망하고, 국가와 사회대중은 죽음의 소용돌이에 휘말렸음은 더 말 할 것도 없다.

 

자제의 규범이 무너지면 권력 균형이 무너진다는 것은 너무도 당연할 것이다. 정당이 대권 후보자를 선정할 때 기성 정치인들이 착각하는 것이 하나 있다고 지적한다. 자기 정당의 선거 이익을 위해, 즉 수권정당으로 서기 위해 부적합한 후보를 영입하곤 그 자를 자신의 입맛대로 통제, 조종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는 것이다. 가장 어리석은 생각임이 입증되는데, 이렇게 추대된 자가 단 한 번의 예외도 없이 정당은 물론 모든 권력을 장악하여 독재자가 되었다는 것이다.

 

결국 이 교훈은 주류 정당이 필터링 기능을 포기할 때 그것은 민주주의의 파멸적 징후로 볼 수 있다는 점이다. 미국의 수구정당인 공화당이나 한국의 극우화된 여당이나 모두 문지기 기능을 지니지 못함으로써 정당의 이익보다 고차원의 가치인 국가의 민주주의를 버렸다는 것에 있다. 책은 이러한 규범 파괴의 사례들을 통해 민주주의를 지켜내기 위해 우리 민중들이 무엇을 주의 깊게 감시하고 분별해야 하는가를 알려준다.

 

그렇게 짧은 시간 안에 수많은 불문율을 파괴한 대통령은 지금껏 없었다.”

-트럼프의 민주주의 파괴, 245쪽에서

 

이제 우리 사회의 정치국면에서 전환적 순간이 될 수도 있는 국회의원의 선거가 눈앞에 다가왔다. 책의 8장에는 트럼프가 어떻게 민주주의를 파괴해 나갔는지에 대한 각종 민주주의 파괴 행위로 채워져 있다. 검찰 등 국가규제기관을 통한 비우호적 언론 압박하기에서부터, 자기 이익에 반하는 기업들과 언론사에 대한 막대한 세금의 부과는 물론 인신구속의 압박, 가장 비민주적이고 위헌적 처사였다고 지적되는 공정선거대통령자문위원회 설립을 통한 투표 억제의 시행을 통한 투표권 행사의 위축과 선거 전부터 선거가 조작되었다는 주장을 함으로써, 상대 정당에 대한 윤리적 손상을 공공연히 도모하려 했으며, 전방위적인 중립기관들인 검찰, FBI, CIA, 대법원, 각종 규제기구인 심판을 매수, 협박함으로써 총체적이고 극단적으로 규범을 파괴했다는 것이다.

 

선출된 대통령이 되면 정치 선진국들은 정당의 대권 후보자로서의 지위를 버리고, 국민의 대표가 됨으로써 중립적인 정치 행위자가 된다. 따라서 경쟁자를 정치의 동반자로 대우하고, 그 다른 의견을 수렴하기 위해 노력한다. 여기에는 보이지 않는 정치 윤리의 두 축인 상호관용과 타자에 대한 절제와 인내의 정신이 자리 잡고 있다. 또한 자신의 권력이 혹여 전제주의적 성향을 지니고 있는 것은 아닌지 수시로 성찰해야 한다. 이것은 선진 민주주주의 정치인들의 기초 덕목이고 불문율이다.

 

한편 빈틈이 드러난 권력 견제를 위한 법률 제도를 보완하여 민주주의 근간을 흔드는 독재자가 출현하지 않도록 방지하고, 독재자가 될 수 없는 강력한 견제와 감시 제도를 확충해야 한다. 지금 안하무인이며, 법 위의 황제인양 중립유지 의무인 대통령이 일상적 행정기구 의견 청취 행위라고 사전 선거를 하고 전국을 누비며, 법 체제를 무시하고 있다. 이 모두 독재의 전형적 표시라고 두 저자는 입을 모은다. 선거에 대한 신뢰가 무너지면 민주주의 제도에 대한 신뢰도 무너지는 것이고, 이는 곧 민주주의를 파괴하겠다는 의지의 다름 아닌 지극히 사악한 기만이 된다.

 

저자들은 마지막으로 대중 인식에 있어 중요한 요인을 지적하고 있는데, 바로   독재자가 하는 불문율의 위반(파괴)이 계속되면 사회는 이 일탈의 범위를 축소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기준을 하향 조정한다는 것이다. 예전에 비정상으로 보였던 행위가 정상적 행위로 이해되기 시작한다는 것이다. 거짓말하기, 규범의 일탈, 반국가적(친일)행위, 경쟁자인 상대에 대한 일상적 모욕과 괴롭힘 등 이들 정치적 규범의 일탈에 대한 기준을 하향조정하게 됨으로써 독재자의 권력남용의 허용 기준을 높여준다는 것이다. 즉 간덩이가 붓는 다는 것이다.

 

간덩이가 부어올라 상대를 모욕하고 멸시하며 괴롭히는 데 더욱 그악스럽고 포악해지며, 자기 이익과 관련없는 국민다수는 언제든 멸시하고 무시해도 되는 종속된 개나 돼지로 취급하게 된다. 책은 마지막 장에서 민주주의 미래 시나리오 세 가지를 예시하며, 어떻게 손상된 민주주의를 구할 수 있는지를 기술하고 있다. 가장 가능성 높다는 우울한 시나리오인 뚜렷한 양극화와 규범 붕괴로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은 배제하고 신속하게 회복되는 낙관적 형태를 생각해본다.

 

그것은 어쨌거나 독재 정권의 정치, 경제 외교를 망라한 총체적 무능과 권력 남용, 법치의 파괴 등 실정을 묻고 지지를 철회하여 사임이나 탄핵을 통해 새로운 정권을 세우는 것이다. 이번에도 주류 정당들이 부적합한 후보를 거르지 못할 경우 해당 정당에 대한 국민적 압박이 가해져야 한다. 국가적 손실이 얼마인가? 수치로 표시되지 않는 국가 위상의 추락과 국민의 도덕적, 지적 수준까지 한없이 낮추어버린 수치심까지 더하면 대체 이들에게 물려야할 죄과는 가히 천문학적 수준이 되지 않을까?

 

민주주의란 국민의 절반 이상이 절반 이상의 경우에서 옳다고 말하는 생각에 대한 끊임없는 의심이라고 한다. 그래, 민주주의란 아직 반증되지 않은 이념이며, 타락하지 않은 노래일 뿐이다. 그럼에도 아직은 이를 대체할 만한 체제를 우리 인류는 구상하지 못하고 만들어내지 못하고 있다. 지금으로서는 민주주의가 최선의 체제이다. 이를 파괴로부터 지켜내는 일은 동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뿐 아니라 근미래의 후손들을 위해서도 가치 있는 의무일 것이다. 이 책의 주요 대상은 미국의 정치 현실이지만, 그들의 민주주의 헌법체계와 정당 정치는 오랜 갈등과 타협 속에서 안정을 만들어 온 유서깊은 체제이다. 그럼에도 유지해왔던 정당의 문지기 기능과 오랜 관습으로 정착되어 온 불문율인 정치의 핵심 윤리를 저버림으로써 부적합한 인물이 대권을 차지하게 되고, 한 순간 민주주의는 송두리째 허물어지는 상황을 겪었다,

 

현재 미국의 수권정당인 민주당은 트럼프가 망가뜨린 민주주의 체계들의 복원에 고통을 겪고 있다. 아마 망가뜨리는 것은 순간이지만 그것을 복원하는 데는 몇 배의 시간과 노력이 요구될 것이다, 이 모두가 국민의 몫이다. 우리 한국은 더 오랜 시간과 필요 없었을 재정 낭비를 감수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이제 우리에게는 이 곤경의 시간을 어떻게 희망의 시간으로 돌릴 것인가라는 도전의 과제가 남았다. 어쩌면 이것은 비관적 미래가 될 수도 있겠지만 이 기이한 경험을 우리들이 했다는 관점에서 전화위복의 낙관적 시간을 만들어 낼 수도 있을 것이다.

 

이 책이 2018년 국역되어 출간된 이래 20241월, 18쇄에 이르렀다. 아마 시민 독자들의 관심이 그 어느 때보다 현실에 대한 답답함을 이 저술이 어느만큼 해소해주었기 때문일 것이다. 침몰하는 민주주의의 위기의 요인들을 인식하고 이해함으로써 우리는 손상된 민주주의를 회복시키고 보다 깊은 뿌리를 내리는데 작은 힘들이 될 수 있을 것이다. 풍부하고 치밀하며 섬세한 사례들과 분석 내용을 모두 전하지 못함을 안타깝게 생각한다. 많은 분들이 읽어주셨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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