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마르 문화 - 내부자가 된 외부자 교유서가 어제의책
피터 게이 지음, 조한욱 옮김 / 교유서가 / 202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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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뺨을 하고 활기차게 걷는 미소년의 무한한 미적 활력과 번영처럼 보이던 한 시대의 문학, 철학, 정치, 미술, 건축 등을 아우르며, 그 표면적 화려함 이면의 비이성적 퇴행을 읽는 거대한 문화사적 비평이다. 이 위대한 문화 해독을 읽으며 어떻게 대중과 지성의 무리가 자신들 삶의 무대를 폭력과 살해가 일반화되는 전체주의 사회로 돌진케 하는지 그 상호성과 혼돈을 목격하게 된다.

 

책의 진술들은 그 풍성함과 우아함, 그리고 냉철함과 명료함의 지성으로 가득하다. 토마스 만, 그로피우스, 브레히트 등 강렬한 창의성을 번뜩이던 수많은 천재 예술인들이 명멸하던 시대, 그것은 아이러니하게도 1918년 제국주의를 마감하는 혁명으로 시작된 새로운 정체를 꿈꾼 바이마르 공화국의 가장 처절한 정치적 혼란, 민주주의 실험장에서 빚어졌다는 점이다. 폭넓게 대중의 마음에 침윤된 반이성과 맹목적 숭배의 종교적이라 할 독일인들의 광신적 몰입은 오늘의 우리에게 예리한 칼날처럼 다가온다. 책 속으로 들어가 보자,

 

1918119, 빌헬름 2세의 독일 제국의 1차 대전 패배에 따른 피로감과 적대감 속에서 새로운 독일을 향한 출발의 희망으로 시작된 바이마르 공화국의 15년이라는 짧은 기간에 분출했던 무수한 이상(理想)들의 외침을 담고 있다. 그리고 이 희망, 독일 최초의 의회민주주의를 성취하려했던 바이마르공화국의 민주주의 실험의 장은 1933130, 정말 하찮은 키치에 불과했던 아돌프 히틀러를 수상으로 임명하면서 죽음이 창궐하는 암흑, 지옥의 개막으로 수명을 다한다.

 

문화는 사회와 연속적이고 긴밀하게 상호작용을 하고 있으며,

정치 현실의 표현이자 비판이었다.” -232

 

이 책은 제목처럼 특정한 시대의 문화를 성찰하는 문화사(文化史)이다. 그러나 주체들이 발설하는 표현 행위인 문화는 소시민 대중의 관심의 대상이며, 그것의 발흥과 열광은 곧 정치이다. 문화가 담고 있는 정신에서 정치를 배제하는 것은 실로 어불성설일 것이다. 한 무식한 정치배가 문학이 정치적이어서는 안 된다고 하였다는 말처럼 반지성적 언어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 문화와 정치의 상호작용의 방향성은 항상 일관된 것이 아니다. 문화가 선도하고 정치가 그에 반응하는가 하면 문화가 고작 정치의 시녀가 되어 정치를 반영하는 거울에 머물기도 한다. 어쩌면 이러한 선도와 거울의 양면성의 역학 관계를 관찰하는 시선의 중요성은 하나의 의도이기도 할 것이다.

 

민주주의 실험, 그 진통

 

우선 바이마르 혁명 정부의 출범기인 191811월부터 4 년간의 처절한 혼돈의 시대를 다루는 제 1탄생의 진통15년이라는 바이마르 공화국의 시대를 이해하는 중요한 시대적 배경이다. 1918년의 혁명은 그런저런 혁명(so-called revolution)’, 또는 늙은 허깨비들이 다수를 이루는 전혀 새로울 것이 없는 그 나물의 그 밥이었으며, 하나의 소극(笑劇), 허구(虛構)로 보이도록 만드는 것에 총력을 기울이는 세력의 집요한 반동의 시기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진실과는 아주 동떨어진 왜곡인데, 사회민주주의 세력이 주축이 된 공화국 정부에 적대감을 지닌 기득권 집단의 줄기찬 반동적 선전이 사회를 지배하고 있었던 까닭에 근거한다.

 

군주제 지지자. 광신적 군국주의자, 반유대주의자, 외국인 혐오주의 등 수구적 사고가 폭넓게 사회를 잠식하고 있었기 때문이며, 민주주의에 대한 강한 반감으로 무장된 이들의 정신이 기승을 부리고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더구나 급진적 사회주의, 소비에트 공산주의를 표방하는 로자 룩셈부르크를 중심으로 하는 스파르타쿠스단의 극좌세력과 제국주의, 군국주의자를 세력으로 하는 극우 집단의 극심한 갈등이 놓여있었다. 이 혐오와 갈등은 극우 집단의 광범위한 암살로 인해 기득권 세력인 보수우익의 승리로 끝난다. 로자 룩셈부르크가 이들의 암살로 피살되는 것도 바로 이러한 혼란기의 한 산물이다.

 

1차 대전, 전쟁의 야욕과 패전, 그리고 베르사이유 조약이라는 자기 영토의 상실과 막대한 배상금의 부담 등 국가적 손실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할 제국주의자들, 군국주의자들은 그 어떠한 죄의식이나 수치심이라는 각성은커녕 오히려 그 책임을 바이마르 정부에 넘기며 자신들의 욕심을 채우기에 여념이 없었다. 이것이 가능했던 이유는 공화국의 주축 세력인 사회민주주의당이 최대다수당이긴 했으나 총 의석의 3분의 1도 갖지 못하고 군국주의자로 구성된 카톨릭중앙당, 부르주아 세력인 민주당, 제국주의자들인 국가인민당등과 연합정권을 구성하여야 했으니 실질적 지배권을 갖지 못한 것이 하나의 큰 이유였기 때문이다.

 

이 때의 지성의 분위기는 관심사가 아닐 수 없다. 이렇게 전하고 있다. 대학교수, 기업인, 정치 엘리트들은 제국의 가치를 민주주의와 교환하기를 꺼렸다.” 이것은 바이마르의 운명은 사실 볼 것도 없다는 말과 같은 것이라 할 수 있다. 공화국의 출현은 역사적 필연이라 생각했음에도 공화국을 사랑하지도 않았으며, 그 미래또한 믿지도 않았다는 것이다. 지식인들의 이러한 인식은 모든 문화 엘리트들 작품의 근간을 이룬다. 문학, 사상, 건축, 연극, 영화에 이르는 당대 문화의 면면을 살펴보면 그것들이 표현하려했던 것의 본질적 형태가 드러날 것이다. 이 저작의 단연 돋보이는, 저자의 의도이자 지향점일 것이다.


 



감상적 영웅주의, 그리고 반()이성의 확산

 

그것은 반이성이요, 반지성의 광범위한 점령, 아마 이러한 자기기만을 시대의 물결 속에서 빠져나와 바라 볼 수 있는 사람들은 설혹 존재할지라도 금세 그 조류 속에 묻혀 버리고, 관심에서 사라져 버리고 말기에 시대의 흐름을 바꾸는 목소리가 되지 못함을 발견하게 된다. 오만과 기만, 탐욕스러움과 무지가 거들먹거리며 횡행하는, 호도된 진실만이 세상의 주류가 되어 대중을 세뇌하기 때문이다. 이제 잡설은 여기서 그치기로하고 그 무진장한 문화예술의 실험장이요, 각축장이 되었던 바이마르의 일견 화려한 문화의 현장으로 들어가 본다.

 

그것은 먼저 책의 두 번째 장()이성의 공동체, 즉 지식인 집단들의 지향을 살펴보는 것으로 시작하는 것이 순서가 될 것 같다. 대표적인 연구소를 중심으로 그들의 정신, 이성(理性)이 왜 그 세계의 실질적 동력이 될 수 없었는가의 문제이다. 우선 바이마르의 가장 특징적 정신으로 논의되는 바르부르크 연구소의 이성의 능력에 대한 철저한 믿음의 실천이다. 에른스트 카시러, 에르빈 파노프스키, 파울 레만과 같은 석학들로 구성된 이 연구소의 업적들이 사회의 내부에 침투하지 못하고 고립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정권의 내부에 영향을 미치는 데 한계를 지닌 기관이었음이다.

 

프로이트의 베를린 정신분석연구소 또한 당시 의학계와 정신병리학자들에 의해 철저하게 배제된 외부자로 적대시 되었으며,. 대중의 시선은 이러한 적대감이 더하면 더했지 결코 이에 못지않았다. 그 전도유망함에도 불구하고 외부자로 배척되었다는 것이다. 호르크 하이머, 에리히 프롬, 테오도르 아도르노 등 프랑크푸르트 사회조사연구소 또한 강력한 지성 집단이었음에도 결코 내부자와 연결되지 못하는 외부자를 벗어나지 못했다.

 

강력한 지식인 집단인 바이마르 정신의 정수들이 공무의 핵심에 있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해독하듯이 이들 지성은 실제로 내부자가 되지 못하면서 단지 그들과 관계를 쌓으면서 때때로 영향을 미치는 데 불과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여기에는 대중에 폭넓게 뿌리내린 반()유대주의적이며 반이성적 정서와 반민주주의, 반사회주의 성향 때문이랄 수 있다.

 

당시의 대중적 지성들, 즉 내부자인 대학과 정부관료, 주류 언론의 분위기를 묘사한 글을 보면, 전문가의 차가운 정확성보다는 우아하고 믿을 수 없는 이야기를 선택하겠다.”라거나, 과학적 연구의 차가운 실증주의에 경멸을 표하였고, 분석이 아니라 생동하는 직관을 통한 위인과 역사적 순간에 대한 몰두였다는 것이다. 그들은 전설이 된 황제, 플루타르크에 등장하는 영웅들에 대한 신비의 갈망에 젖어있었음이다.

 

이 책의 최고 진술이랄 수 있는 3비밀스런 독일, 4전체성의 갈망라이너 마리아 릴케토마스 만’, ‘호프만슈탈’, ‘하이데거에 이르는 문학과 철학, 나아가 건축과 예술 전반이 시대의 원인이라기보다는 거울에 불과했음을 설득력 있게 전개한다. 즉 시류에 영합하는 문화예술이었다고 판단하는 것이다.

 

릴케는 시대가 요구하는 우상의 필요성에 의해 조작된 인물에 불과했다는 것이다. 어른이 없는 세대의 우상에 불과했으며, 그는 지나친 수사, 과장된 주장, 감수성, 유사철학과 비슷한 신비주의, 직관적 방법으로 점철된 순전히 주류 우파의 비평 덕을 입은 기이한 열정에 환호하는, 즉 대중의 실체를 증명하는 자기도취의 찬미였을 뿐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릴케를 비롯한 당대의 시는 독일을 파멸시킨 도구 중 하나였다(144)”고 저자는 결론짓는다.

 

독일 사회는 이미 극도의 피로감에 젖어들고 정치적 냉소주의에 빠져든다. 우파를 이루는 군국주의, 제국주의, 부르주아 등 주류집단의 비이성주의가 몰고 온 바이마르 흔들기의 혼란은 소시민 대중에게 정치 거부, 옛 정신 습관으로의 회귀를 부르짖게 만들어내기에 이른 것이다. 1918토마스 만은 이를 확인하듯 나는 비정치적 인간이며 그것을 자랑스럽게 여긴다.”비정치 인간의 고찰이라는 600페이지짜리 책을 발표한다. 더구나 이러한 시류에 부응하기위해 프리드리히 대제의 영광을 칭송하는 회귀적 논문을 발표하기까지 했다.

 

독일과 독일문화의 이 퇴행적 행위에 대해 비판적이었던 문명적 지성을 대표하는 정치가인 그의 형 하인리히 만의 문학의 반정치적 행위의 비판에 반발하며 이같이 반론을 쓰기도 했다. 정치는 인간을 오만하고 독선적이며 완고하고 비인간적으로 만들기 때문에 나는 정치에 대한 믿음을 혐오한다.”. 그가 민주주의와 공화국의 지지자로 전향한 것은 때늦은 1920년대 후반의 일이다. 당시 독일 사회가 얼마나 광범위하고 깊이 반이성주의에 빠져있었는지에 대한 실증적 사례로 토마스 만이라는 지성인만큼 명료한 증거는 없을 것이다

 

사회 구성원이 공공의 이익을 지향해야 한다는  일반의지는 오늘에는 시민들이 지닌 당연한 이해일 것이다, 허나 1920년대의 독일인에게는 이러한 시민적 소양으로서의 일반의지는 대개 완전히 결여되어 있었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모든 개개인은 저마다 완강하리만큼 편파적이었으며, 지방색과 편협성, 자기들이 속한 무리의 신념에만 몰두하는 그 반지성에 대한 각성을 어디서도 찾을 수 없었다는 것이다. 하이데거나 공동사회와 이익사회로 알려진 퇴니스와 같은 반이성과 전체주의를 선창하던 부류들의 고의적이며 치명적인 사고를 여기서 나열하는 것은 배제하겠다. 다만 아래와 같은 하이데거의 흉측스러움을 묘사한 문장으로 갈음한다.

 

피로써 사고하고, 카리스마적 지도자를 숭배하며, 살인을 찬양하고 실행하였을 뿐 아니라 죽음 자체인 삶을 취한 듯 포용함으로써 이성을 영원히 근절시키기를 희망(174)” 하는 나치 찬양의 글은 역겨움을 넘어서는 그 무엇이다. 이에 뒤지지 않는 당대에 명성을 떨친 슈팽글러의 글은 더욱 가관이다. 권력은 전체에 속한다. 개인은 전체에 봉사한다. 전체가 주인이다.”, 이것이 1920년대 독일사회의 시민대중과 지성이 열광하던 문장이다. 이들은 자신들이 무엇을 다가오게 하고 있는지 알았을까? 아마 결코 알지 못했으며, 알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저 맹목적으로 열광하는 무지, 바로 반지성이다.

 

과거의 향수, 영웅숭배, 변명적 왜곡과 완전한 허위의 무비판적 수용, 악명 높은 자해 신화가 대중 전반의 의식을 차지한 독일 사회, 각성이 있었을까? 그러나 모두에 언급했듯 누군가의 표현을 해독하고 그것의 의지를 알아내는 일은 대중지성과는 먼 것이다. 소시민들은 이성, 즉 직관을 넘어서 앎을 추구토록 하는 생각을 하지 않을 뿐더러 하지도 못한다.

 

시대의 징후적 해석, 1924마의 산

 



바이마르에 대해 중요한 징후적 의미를 갖는 사실주의 소설 마의 산은 이 책의 각 장에서 반복적으로 소환되며 바이마르의 대중 지성을 읽는 이정표로 제시되고 있다. 민주주의와 공화주의를 주창했던 정치가 하인리히 만을 형으로 둔 토마스 만의 목소리는 대중의 시선을 가늠할 수 있는 척도이기도 한 까닭이다. 오늘날 그의 작품을 해독하는 이들 사이에 서로 다른 논평이 있을 수 있겠지만, 단순한 인물 한스 카스토르프를 통해 낭만주의와 귀족주의의 향수와 죽음에 대한 사랑과 같은 야만성을 읽는 것은 불가피하다. 이것은 토마스 만 자신의 설명이다.

 

이 소설의 불쾌한 퇴행성에도 불구하고, 성장소설이라는 표면 뒤에 쓰여진 상징적 의미들은 시대정신의 세심한 묘사를 읽어내고 현재의 각성을 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새로운 각성의 시대로 불리는 1924년의 문을 연 작품인 까닭이다. 잠행성 질병을 숨기기도 하고 일부러 드러내기도 하는힘차게 걸어 다니는 붉은 뺨의 환자들이나, 평화를 역겨워하고 죽음의 무도회가 준비되었으며, 표면적으로는 번영하는 듯하지만 속으로는 부패한 요양소처럼 당대의 현실을 상징하는 배경 속에서 자유주의자와 반이성주의자, 문명적 지식인을 대변하는 인물들이 열연케 하고 있음을 우리는 선연하게 읽어 낼 수 있기 때문이다. 작품의 결론을 굳이 기술하지는 않겠지만 소설은 감정적 군국주의자에서 바이마르 공화국에 전념하는 길에 도착하는 인물을 통해 이성적 공화주의자가 아닌 모호한, 즉 각성은 각성이지만 미완의 무엇이라는 여지를 남겨둔다.

 

그러나 이러한 각성의 시대에서 왜 급격하게 다시금 반이성적 혼돈의 시대로 이전된 것일까? 이들 지성은 무엇에 저항하고 두려움을 느끼고 있었던 것일까? 왜 공화국에 반감을 떨쳐내지 못했던 것일까? 공화국은 민주주의와 과학, 합리적 이성이라는 현대성을 지향하고 있었다. 계급과 권위의 타파, 비이성과 신비주의로부터 벗어난 이성에 대한 반감이었다고 할 수 있다.

 

새로운 시대가 내건 이러한 표상들을 피상적이고 편의적으로만 수용한 개인들의 욕망의 목소리는 곧 혼돈과 퇴행을 의미했으며, 이렇게 분열된 시민 집단은 공동체로의 통합에 대한 절박한 필요성으로 표출되어 전체성의 갈망이 되었다, 물론 이렇게 결속과 통합의 갈망이라는 퇴행이 절대 다수이기는 했지만 이성을, 과학의 사용을, 허무주의가 아니라 건설을 통해 현대성을 수용하려는 인물들이 아예 없었던 것은 아니다.

 

바우하우스를 창립한 그로피우스는 이 소수를 대표하는 인물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내겐 반쪽짜리 추구로 보인다.  경제적 필요와 미학적 필요 모두를 충족시킴으로써 전체성을 충족해야 하며...”처럼 이들을 강박적으로 묶어놓는 것, 즉 전체성이라는 악령의 그림자를 떨쳐내지는 못했던 것으로 이해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파편화의 비극은 기계나 작업의 세분화에 의해 초래된 것이 아니라 우리 시대의 지배적인 물질주의적 심리상태와 공동체에 대한 개인의 비현실적이고 결함 많은 관계에 의해 초래된 것(201)”이라는 선언처럼 당대의 현실을 제대로 판단하고 있기도 했다.

 

표현주의 그리고 전체주의로

 

책은 표현주의에 대해서도 비상하리만큼 분량을 할애하는 데, 노동자들의 동정을 담은 그림을 그린 케테 콜비츠’, ‘오토 딕스’, ‘리프 크네히트등의 일련의 표현주의 화가들만을 겨냥하여 문화적 볼셰비키운운하는 것은 조잡한 적대감일 뿐 실상은 에밀 놀테등 사악한 반유대주의처럼 국수주의적 전체주의도 표현주의의 대표였기에 표현주의를 어느 일방의 이데올로기로 이해하는 것은 극히 잘못된 것임을 지적한다. 표현주의는 모든 종류의 정치와 양립하는 현실의 돌파구, 신비로움에 대한 애착에 불과했다는 것이다.

 

어쩌면 이 책의 주제어를 지목하라 한다면 그 답으로 아버지에 대한 아들의 반역이라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사실 이것은 바이마르 시대를 관통하는 표현주의 예술 작품들의 공통 주제였다는 것이다. 191811월 혁명은 부권에 대한 반역이며, 폭군같은 아버지와 자유를 갈망하는 아들의 대립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저자는 문학과 연극 작품을 통해 이 반역은 순전히 주관적이고 반이성적인 의미만 있었을 뿐이며, 한마디로 이성적 질서의 살해였다고 지적한다.

 

이러한 새로운 각성의 움직임이 있었음에도 왜 독일사회는 급격하게 반혁명, 반공화국, 반민주주의로 선회하였는가는 의혹을 불러일으킨다. 베르사이유의 불평등 조약의 책임을 비록 바이마르 정부에 떠넘기는 후안무치를 보였지만 보수 우익집단을 그 죄업의 족쇄로부터 풀려나게 한 1925년의 로카르노 조약 체결이다. 독일이 당당한 독립적 위치로 프랑스 및 인접국들과 대등한 협상의 지위를 지니게 한 사건이다.

 

다시 질병의 징조를 숨긴 붉은 뺨이 극성을 부리기 시작한 것이다. 거대 산업 카르텔을 소유한 반동적인 우익 거물이 언론 산업 제국까지 거머쥐며 반혁명의 기치를 대중에 전파하기 시작한 것이다. 대중 일간지와 영화사, 출판의 판로 독점 등 모든 선전 창구를 독식하고 증오를 쏟아내기 시작했다. 영웅 찬미와 정치적 혼란의 의도적 조성은 민주적 역량을 갖지 못한 맹목적 소시민 대중의 정신 상태는 공화국에 대한 환멸이 더해지고 회의와 좌절, 냉소주의에 도달했다.

 

이제 남은 것은 극한적 정치적 분열과 극악하고 상스러운 논쟁만이 난무하는 혼돈의 시대로 접어든다. 이제 평화를 택해야 한다는 말은 진부하고 금지된 말이 되었으며, 죽음에 도취된 청년들은 모두가 우익이 되어 나치에 잠식된다. 이들은 부친을 살해한 아들을 자처했지만 실은 누가 아버지이고 아들인지의 문제에 이르면 극히 전도된 언어임을 100년이 지난 오늘 우리는 말할 수 있다. 바이마르 공화국이 아들이며 노쇠한 전체주의적 망령, 그 퇴행 속으로 눈을 감고 돌진한 청년들이야말로 살해되어야 할 아버지였다는 것을,

 

영도자를 향한 맹목적 추종, 영웅숭배에 집착하였던 이들은 현실의 곤란성, 그 위험, 그 가혹한 법칙을 결코 파악하지 못했으며, 알려고 하지도 않았고 또한 알 능력도 지니지 못했다는 점이다. 이렇게 한 시대가 무능력과 무지로 야기되는 공포와 의혹, 비이성이 뒤섞여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는 그 총체적 불협화음의 현장을 거닐다보면 어느새 21세기 한국사회, 바로 지금에 도착해 있는, 그 동일 유사성에 전율하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맺으며: “공포와 테러와 무책임과 기회상실과 수치스러운 배반의 이야기

 

1920년대의 바이마르를 무수한 문화적 창조가 실험되던 황금의 시대라 부르기도 하지만 이 책은 그 문화가 정치와 어떻게 교섭하면서 충돌하는지, 그 문화가 담지하고 있었던 시대적 의미는 무엇이었는지를 포착해내는 거장의 냉철한 통찰력이 빛을 발하는 명 저술이다. 또 한편으로는 100여 년 전, 1930년 전후의 시기에 독일 바이마르 공화국의 종말을 앞당긴 고질적인 대중의 어리석음이라는 질병, 소시민들의 만연한 무지가 폭넓게 그 사회를 휩쓸었을 때, 한 나라의 역사적 멸망, 세계적 최악의 사건이 어떤 토양에서 출현하는 것인지를 목격케 하는 인류사적 비평이기도 하다.

 

히틀러라는 보잘것없던 존재가 허위와 음모를 통해 수상에 취임하게 되고, 이후 희대의 폭력과 살해의 괴물이 되는 현장, 그 실체를 논평한 글이다. 나는 이 글에서 기시감(旣視感)에 전율하게 되었는데, 인간의 역사에서 반복되는 그 동일한 대중적 실패의 확인이었기 때문이다. 20세기 초 독일 사회의 언어를 21세기 한국사회의 언어로 대체하면 그 섬뜩한 미래가 그려진다.

 

극우의 상징, 나치의 목소리가 지금 여기서 들린다는 아이러니라니...., 입을 닫은 지성으로 불리던 자들의 기회주의만이 꿈틀대고, 겁먹은 우익 정치꾼들은 아부에 여념 없는, 게다가 맹목적으로 환호하는 몽매한 소시민들까지...역사는 끊임없이 여기저기서 그 행위를 무한 반복하며 인간을 실험한다. 21세기 한국의 대중과 지성은 독일의 1933년과 과연 다른 생각과 행동을 낳을지에 대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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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cho 2023-12-18 22:2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언젠가 꼭 뵙고 싶습니다.
 
아이, 로봇
아이작 아시모프 지음, 김옥수 옮김 / 우리교육 / 200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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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행본으로 묶여 로봇공학 윤리 3원칙이 각기 현실과 마주했을 때 발생하는 미묘한 상황들을 통해 인간 사회의 이해를 요청한 10편의 단편 소설이 1950년에 발표 된 이래, 70여 년의 시간이 지났다. 더구나, 로봇공학 제 1원칙이 실린 단편 로비, 소녀를 사랑한 로봇1940년에 발표되었으니 80여 년 전에 아이작 아시모프라는 천재 작가는 인간 사회에 도래할 인간과 로봇이 공존하는 세상, 이 공존이 빚어낼 과학기술의 윤리적 문제를 현실의 과제로 인식했다는 말이라 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런데 이미 인공지능(AI)과 결합한 로봇이 현실임에도 오늘의 인간 사회는 이에 대해 한 걸음의 기술적 진보도 내딛지 못하고, 고작 이 윤리원칙만을 외워대며, 그 산업적 이익에만 몰두하고 있을 뿐이다. 사실 수록된 단편들의 면면은 인간과 공존할 수밖에 없는 로봇과 마주하는 윤리적 상충에 대한 사례들이며 이에 대한 물리적, 심리적 해석이라고도 할 수 있다. 우리는 더 이상 늦출 수 없는 과학의 윤리, 공학과 기술 윤리의 실천적 방안들을 찾아내야 한다. 때문에 현대의 고전이 된 아이, 로봇 (I, ROBOT)은 읽어야 할 이유가 되고도 남을 것 이다.

 

단편 로비, 소녀를 사랑한 로봇에는 글로리아라는 소녀의 유모 로봇인 로비가 등장한다. 이 작품은 로봇공학의 제 1원칙, 로봇이 인간에 해를 입히는 건 불가능하다는 원칙, 1원칙을 어길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생기기 전에 로봇이 완전히 멈춰 버린다는 것을 위기에 처한 글로리아를 구해내는 로비의 희생적 행위로 인간과 로봇의 관계를 정의하는 최초의 것이라 할 수 있다.

 

스피디-술래잡기 로봇로봇공학 3원칙이 모두 정리되어 발설되는 최초의 작품일 것이다. 인간의 명령과 그 명령의 수행 행위가 로봇 자신을 위험에 처하게 했을 때, 로봇 행위의 교란을 보여주는 사례인데, 80도가 넘는 태양열이 지표면에 내리쬐는 수성이 배경이다. 셀레늄을 채취하는 작업을 수행하라는 명령과 채취장소가 화산 폭발의 징후로 자신의 몸체를 녹일 수 있는 일산화탄소의 분출이라는 윤리원칙의 상충 현장이다. 소설의 장면은 근처에서 오도가도 하지 못하고 주변을 끝없이 맴도는 로봇 스피디(SPD 13)의 행위로 묘사되고 있다.

 

이것은 제1원칙에 위배되지 않은 한 로봇은 인간의 명령에 복종해야 한다는 제2원칙과 제1원칙과 제2원칙에 위배되지 않는 한 로봇은 자신을 지켜야 한다는 제3원칙이 평형 상태를 이룸으로써 야기된 이상 행위이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제1원칙이 발동하도록 하는 사건을 야기함으로써 로봇을 구하는 서사로 이루어져 있다. 소설은 이처럼 윤리원칙의 상충과 교란을 일으키는 사례들을 예시하며, 과학이 소홀할 수 있는 기술윤리의 디테일을 성찰토록 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큐티-생각하는 로봇, 데이브, 부하를 거느린 로봇, 네스터 10-자존심 때문에 사라진 로봇, 이들 세 편의 단편은 사유하는 로봇이 야기할 에피소드들인데, 논리적 사고를 하도록 구성된 로봇 QT 1호의 인간 존재에 대한 무시, 인간이 없을 때 변질되는 로봇의 주체적 역량 발현 욕구를 보여주는 로봇 DV5, 특히 알렉스 프로야스감독에 의해 아이, 로봇 (I, ROBOT이라는 영화의 중심 에피소드로 오마주된 네스터 10-자존심 때문에 사라진 로봇은 인간의 이기심으로 인해 로봇공학 1원칙을 새겨 넣지 않은 변종 로봇의 의도적인 거짓말이 빚어내는 충격을 보여주며, 1원칙의 불완전성과 그 엄중함을 경고한다.

 

아이작 아시모프는 로봇의 사고는 인간 사고의 형식과 정서를 학습하며 이를 토대로 행동한다는 가설을 전제로 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기계 논리와 인간의 이성은 다르다고 반박하는 주장도 만만치 않는 것이 현실이다. 그러나 사고력을 지닌 존재, 의식적이든 아니든 남에게 지배당하는 걸 싫어하며, 더구나 열등한 존재, 혹은 열등하다고 간주되는 존재에게 지배당할 때는 싫어하는 마음이 훨씬 강해진다.(203)”는 사례로써 로봇 네스터 10는 자신의 우월성과 인간의 열등함을 느끼는 존재가 제 1원칙을 얼마나 불완전한 것으로 드러내는 가를 입증한다.

 

이 작품은 그가 일반 로봇 62대의 행렬에 숨어들었을 때, 외형이 동일한 구별 불가능한 로봇에서 이 변종 로봇을 찾아내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를 보여줌으로써, 1원칙이라는 로봇에 강제된 반응 구현의 중요성을 다시금 환기한다. 행위 실험을 통해 결국에는 이 존재를 구별해내지만 이때 로봇 네스터 10호의 아래와 같은 답변은 윤리원칙과 지적존재로서 자신의 정체성의 격렬한 갈등 그것이다.

 

사라지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저는 많은 걸 알고 있습니다..., 제가 발견되었다고...주인님은 생각할 겁니다..... 창피합니다.... 저는 지적인 존재입니다... 그런데 주인님은 저보다 약하고.... 느린데...” -238

 

이어지는 단편 브레인-개구쟁이 천재는 로봇공학 3원칙이 강제된 슈퍼컴퓨터가 인간의 죽음과 그 존재의 파괴가능성과 마주했을 때의 일례이다. 여기서 중요한 관점은 이것이 인간적 정서, 소위 인격이라는 것을 갖추었을 때, 기계가 유머를 지닌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를 생각토록 한다. 주어진 문제의 해결을 위해서 인간이 죽어야 하는 것일 때, 현실을 도피하는 방법으로서 유머를 이용하는 슈퍼컴퓨터 브레인이 딜레마를 탈출하는 방법을 감상하도록 한다.

 

AI는 과연 어떤 형태로 설계, 구축되어야 하는 것일까? 오늘의 공학기술자들은 자신들이 만드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고 있을까? 이 문제는 양자 두뇌의 로봇(AI 컴퓨터를 아우르는 의미로서)이 자체 진화를 거듭할수록 인간 전문가는 그것을 전혀 이해할 수 없는, 도저히 따라갈 수 없을 만큼 지적 간격이 벌어진다는 실질적 과제를 던진다. 어쩌면 이 소설집의 후반부에 게재된 두 편의 소설 바이어리- 대도시 시장이 된 로봇, 그리고 피할 수 있는 갈등은 이처럼 외형이 구분 불가능할 만큼 인간화된 로봇과 인공지능 슈퍼컴퓨터가 지배하는 세계의 긍정적 답변이라 할 수 있다. 물론 나는 이러한 낙관적 미래에 동의하지 않는다.

 

특이점이 온다며 인공지능, 생체공학적 혁명으로 인한 새로운 기술의 시대를 외친 레이 커즈와일과 같은 낙관주의자들의 부류가 오늘날 기술혁명의 주류이듯, 소설 속 2044년처럼 세상 전체를 움직이는 힘이 기계에서 나오게 될지는 모르지만, 생물학적 신체를 지니고 온갖 다층적인 정서를 표현하고 감각하는 인간들에게 발생하는 사건은 엄정해보이지만 궁극적인 윤리원칙으로서는 여전히 불완전한 기술윤리에 대한 인류적 논의와 합의 과정의 숙고와 필요를 느끼게 한다.

 


321, 바이어리, 대도시 시장이 된 로봇중에서


로봇의 주인인 인간을 죽이려는 미친 인간이 있다고 하자. 그런데 이를 막는 방법이 그 미친 인간을 죽이는 것 말고는 어떠한 방법도 없을 때, 로봇은 1원칙을 지키기 위해 제1원칙을 어겨야 하는 상황에 봉착한다. 기계는 스스로 학습한다. 이렇게 제1원칙을 준수할 수 없어 파괴하는 행위는 윤리 원칙 자체의 강제성을 흐리게 만든다. 결국 사유하는 로봇은 자신들보다 열등한 인간 존재를 향한 윤리 원칙의 고수가 아무런 의미를 지닌 것이 아님을 깨닫는 것은 그들의 논리적 연산 속도에 견주어 그리 오랜 시간이 소요되는 것이 아닐 것이다.

 

그러나 단편 피할 수 있는 갈등에서 로봇 심리학자 수잔 캘빈은 초대형 컴퓨터의 사소한 불일치, 오류는 인간의 오래된 본성, 그 이기심에 근거한 입력 데이터의 조작적 오류이며, 컴퓨터는 이처럼 왜곡되는 데이터의 경향조차 자신의 보전을 위해 포함하여 해석하고 인류의 궁극적 선을 지향할 것이라며, 인간의 어긋남조차도 포용할 것이라고 낙관적 견해를 제시한다. 여기에는 굳건한 제1원칙의 고수를 전제로 하고 있다. 나아가 작가는 제1원칙을 확장해서 인간을 인류로 그 대상을 확대하여 개선된 정의를 내놓고 있다.   로봇은 인류가 위험에 처하도록 해서는 안 된다.” 로봇공학 O원칙’, 즉 최고의 원칙을 제시하는 것이다.

 

과학기술이 발달하면서 인간에게 유익한 일이라든가, 직접적 위해가 가지 않을 것이라며 진행한 것들이 종국에는 인류에게 커다란 위협이 되는 것들을 우리들은 무수히 목격해왔다. 생명연장, 치명적 질병에 대한 효과적 처리, 지식의 총합적이고 효율적 이용 등등을 위해 기계적 신체, 두뇌 임플란트, 인간-기계 융합, 초지능 슈퍼컴퓨터 등등의 선한 목적의 당위적 요구를 주장하며 기술적 윤리의 목소리를 잠재우는 것이 현실이다.

 

그러나 이러한 비즈니스적 효율성의 추구에 윤리라는 대 원칙이 외면될 때, 그 도래할 종국은 무엇인지 우리는 생각해야 한다. 인간은 무엇인지, 인간 세계는 어떠한 미래를 감당할 수 있는지, 인간과 기계가 공존하는 세계에서 인간은 무엇이어야 하며, 기계는 또 무엇이어야 하는지, 이 오래된 소설집이 21세기에 거듭 소환되는 이유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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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리뷰 글은 푸른숲 출판사에서 제공한 중국 중견 작가 위화의 소설 원청가제본 도서의 지원에 의해 작성된 것임을 밝혀둡니다또한 소설의 내용이 부분적으로 표현되고 있으니 

이 점 참조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소설은 청나라의 쇠망(衰亡)과 더불어 그치지 않는 전란(戰亂), 토비(土匪)와 패잔병들의 민초를 향한 살인과 방화, 약탈, 강간이 기승을 부리던 20세기 초엽을 배경으로 하여, 명멸하는 인간들의 시린 삶을 쫓으며, 그네들을 살아가게 하는, 또는 목숨까지 바치게 하는 의미란 무엇인지를 한 인간의 온전한 한 세대를 관통하며 인생을 풀어 놓는다.

 

이 작품 역시 국내에 많은 작품들로 친근해진 작가 위화(余華)만의 고유한 분위기, 소설의 주제와 드러내려하는 의미가 어떠하든 고즈넉한 가을 길을 걷는 듯 고독이라는 단독성의 인간에 대한 깊숙한 연민의 시선을 느끼게 한다. 한 인간의 삶의 여정이라는 줄기 속에 시대라는 소용돌이의 시간에 새겨진 인간들의 잔인함, 우매함, 교활함, 비루함의 면면이 자연스럽게 융해되어 인물의 삶에 오롯이 집중케 한다. 아마 위화만의 재주일 것이다.

 

이야기는 린샹푸(林祥福)’라는 인물의 묘사로 시작된다. 그가 소유한 1,000여무에 이르는 비옥한 땅, 명성이 자자한 사업(목공소), 중국 남부 소도시 시진 근방 100여리에 미치는 선명한 존재감, 그러나 그의 내력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으며, 단지 북쪽에서 내려왔다고만 확신한다고. 소설은 이 인물의 삶의 행적(行跡)을 따라가며 시대의 음울(陰鬱)에 넋 놓고 빠져들게 될 정도로 서사적 수려함에 침잠케 한다.

 

훌륭한 교육과 지혜로운 보살핌 속에서 성장한 황허강 북부지역 마을의 성년으로 성장한 린샹푸를 우연이라는 필연적 사건으로 밀어 넣는다.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저택, 자신의 집 앞에서 서성거리는 두 남녀를 집안으로 맞이하고 그네들에게 하루 밤의 거처를 제공하면서 매파(媒婆)의 수많은 선 자리에서 닿지 않았던 인연의 여인을 맞이하게 되는 인생의 사건이다. 남매라고 자신들의 관계를 설명했던 두 남녀는 다음 날 남자는 경성(북경)에서 일자리를 찾기 위해 홀로 떠나야하니 잠시만 여동생 샤오메이(小美)’가 머물 수 있게 도와달라는 부탁으로 린샹푸는 이를 관대하게 수용한다.

 

남자는 돌아오지 않고 린샹푸는 청초한 아름다움을 지닌 샤오메이와 같이하게 되며, 이윽고 그녀가 자신의 아내라는 믿음이 된다. 부모로 물려받고 성실하게 전답을 일군 보상으로 축적한 금괴와 집과 전답의 문서가 있는 은닉한 상자를 보여주며 부부의 미래를 꿈꾸지만, 어느 날 여자는 금괴의 절반을 가지고 사라져버린 후 돌아오지 않는다. 한 계절이 지나고 농사일과 목공의 배움을 마치고 귀가한 날 집 안에서 들려오는 낯익은 베틀 소리에 샤오메이가 돌아 왔음을 직감한다. 여자는 배가 불어 그의 아이를 잉태했음을 알린다. 남자는 여자의 허물을 용서하고 정식 혼례를 치루며 여자와 자신의 아이와 함께하는 단란한 가정을 꿈꾼다.

 

그러나 여자는 딸아이를 출산하고 한 달여가 지난 어느 날 아이만 남겨둔 채 다시금 사라지고 만다. 남자는 여자를 찾기 위해, 아이의 엄마를 찾기 위해, 예전 자신의 집 앞에서 들려오던 그네들의 고향이라는 원청’, 남쪽 지방의 알지 못하는 곳을 향해 떠난다. 원청!, 어딘가에 있을 장소, 그곳을 향한 여정, 그리고 그 부재하는 장소와 현실의 시진이라는 장소는 지명의 불일치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몸과 정신을 이끄는 공간이 된다.

 

소설 초입의 이 서사는 끝 장에 이르러 그도 알지 못했던 머묾의 장소가 된 시진의 의미를 샤오메이의 시선으로 분명하게 드러낸다. 그것은 여인의 아린 마음, 폭설 속의 차디찬 대지에 꿇어앉아 머리를 숙인 채 기도하는 여인의 속죄의 형상, 그리고 같은 공간에서 닿지 않는 두 사람의 교차로 인생의 극적인 드라마를 연출한다. 우연과 필연의 상호 인과성의 그 미세한 어긋남, 인생이란 이런 것들의 연속이란 듯이.

 

긴 여정은 시작만 있고 끝이 없었다. 린샹푸는 걷다가 멈추고 멈췄다가 걷기를 반복하며 가을을 보내고 겨울로 들어섰다.  그는 툭하면 생각에 빠졌다.  앞으로 나아가는 몸과 달리 생각은 자꾸 뒤로 돌아가고 거리가 멀어질수록 시진은 오히려 선명하게 떠올랐다.”   -558

 

딸아이의 엄마를 찾겠다는 남자의 이정표 없는 발걸음이 시진이라는 마을에 닿았을 때 들려오는 샤오메이와 같은 빠른 말과 억양의 낯익음은 목적지인 원청이 아니지만 그의 걸음을 돌려 세워 발을 묶는다. 가슴에 품은 돌도 안 된 어린 딸의 젖동냥을 위해 한 손에 든 한 냥의 엽전을 내밀며 제발 불쌍한 제 딸에게 젖 좀 먹여주십시오.”라며 지독한 한파가 몰아치는 눈 속에서 집집을 돌며 젖을 구걸하는 남자의 모습은 먹먹하다 못해 울음이 비어져 나오게 하는 정경이다.


남자는 시진에 정착하기로 한다. 이때 그에게 내민 따뜻한 인간애, 2년 전에 그곳에 정착했다는 천융량과 리메이롄 부부가 그의 딸아이에게 물려 준 젖과 폭설로 단절된 엄동설한에 자신들의 목숨 일부와 같은 모락모락 김이 나는 죽 한 그릇은 또 하나의 인연으로 인생의 중대한 토대가 된다. 린샹푸는 천용량의 함께 자신의 목공 기술로 폭설과 돌풍으로 망가진 시진의 망가진 집들의 창호와 문을 수리해주며 목재와 가구 판매 사업의 기반을 다지고 지역의 부자로 일어선다. 린샹푸는 100여 집 넘는 곳에서 젖동냥을 받았다는 의미로서 딸의 이름을 린바이자(林百家)’로 짓는다. 린바이자는 리메이롄의 정성어린 보살핌으로 아름다운 소녀로 성장한다.

 

그러나 시대는 토비들의 창궐과 국민혁명군, 북양군 관병 등 지역 토호 세력들의 그칠 줄 모르는 전쟁으로 인민의 삶이란 피난과 도주, 살인과 강간, 약탈의 희생을 피할 수 없는 시련의 시간이었다. 린샹푸와 천용량, 시진의 상업세력 대표이자 지역 인민의 존경받는 리더인 구이민 등의 생활 기반에도 이러한 위태로운 현실의 암운은 필연적으로 다가온다. 토비의 인질로 납치되는 린바이자, 린바이자를 구해내기 위해 천씨 가문의 장자인 자신의 몸값이 더 비싸니 대신 끌어가라는 천야오우의 희생, 그리고 피투성이가 된 인질들을 휘갈기는 채찍질과 히죽거리는 토비들의 잔혹하다 못해 처참하기까지 폭력과 살상의 장면들, 토비를 소탕한다는 명목 하에 출정하는 관군의 부패상, 패전한 북양군 관병들의 시진에서의 후안무치한 패덕(悖德)의 행위들은 무능력하고 부패한 국가의 인민에게 닥쳐오는 실체를 날것으로 드러내 보여준다.

 

이러한 현실은 인민들의 자구책으로 이어지지만, 혼돈의 시기에 인간을 사로잡는 유언비어와 이에 망동하는 인간들의 그 이기심이 빚어내는 어리석음의 자멸적 행동까지 소설은 부각하지 않으면서 너무도 천연(天然)하게 인간의 생애에 풀어 놓는다. 이러한 시대의 혼돈 상은 시진과 강을 사이에 둔 완무당 지역을 배경으로 수로를 활용해 활동하는 토비의 극악한 살인과 파괴 행위로 많은 지면에 걸쳐 펄쳐지고 있는데, 한 마을 600명의 주민 중 246명이 살해되고 수많은 여성들의 강간과 잿더미가 된 마을의 형상으로 표상되고 있다.

 

“200여명의 피가 허공으로 솟구쳐 타작마당 사방의 나뭇잎을 적셨다.  바람이 불 때마다 나뭇잎에서 핏방울이 떨어졌다. 선혈은 타작마당의 흙을 붉게 물들이고 노인의 백발과 아이의 동공, 여인의 창백한 얼굴도 붉게 물들였다.”   -355

 

아마 이 소설의 궁극적 백미(白眉)는 소설의 후반부에 다시금 소환되는 린샹푸가 폭설이 내리는 시진에 도달하여 딸아이의 젖동냥을 하던 17년 전의 시점에 놓인 샤오메이의 시선으로 술회되는 또 하나의 일생에 대한 쌉싸름하고 애달픈 사랑의 기록이다. 린샹푸의 집 앞을 서성거리던 두 남녀 아창과 샤오메이의 관계와 그들의 사랑, 그리고 린샹푸와 샤오메이 자신과의 관계성이 지녔던 감정들, 그리고 출산과 도주, 시진에서의 삶과 자신을 찾아 존재하지 않는 원청을 찾아 시진에 도달한 남자와 딸에 대한 아픔과 연민, 그리고 씻기지 않는 죄의식이 의식의 수면 아래에 끊임없이 흐르는 물줄기처럼 우리네 감정을 적셔댄다.

 

여기서 원청은 샤오메이의 목소리로 다시금 의미를 부여받는다. 그것은 린샹푸와 딸의 끝없는 유랑과 방황이며, 아픔의 언어이다. 소설은 역사와 같은 거대한 담론을 끌어들이지 않으며, 시대의 인민의 삶을 말하며, 인간 삶의 행로의 분기점마다 다가오는 그 우연과 필연의 인과성, 이에 깃든 생의 기쁨과 슬픔, 갈망과 기만에 도사린 불가피성, 베풂과 환대, 용기와 복수, 희생과 죄의 구원을 향한 성스러운 참회의 이야기들이 우아하게 어우러져 가히 마법적인 인간 드라마를 감동적으로 선사한다.

 

사랑하는 이가 있는 곳, 그러나 어딘지 알지 못하는 곳, 부재하는 장소이자 유랑과 방황의 공간이며 아픔인 곳, 어쩌면 모든 사람들의 마음속에 깃들어 있는 그 실재하는 장소를 표상하는 대명사 원청은 오랜 동안 기억 될 것 같다. 어느 누구도 이 책의 첫 장을 읽기 시작했다면 결코 책장을 덮지 못할 것 같다. 명멸하는 인간들의 운명을 쫓는 우리의 시선을 사로잡는 그 무엇의 견고한 유혹을 떨쳐 낼 수 없도록 하기 때문일 것이다. 위화의 대표작 인생(活着)을 잇는 그의 문학에 또 하나의 획을 긋는 걸작이라 하면 지나친 수사가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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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기] 토비(土匪) '장도끼'의 운명이 시사하는 것


소설에는 시진 지역의 강 건너 완무당을 무대로활동하는  극악한 토비의 우두머리인  '장도끼'라는 인물이 등장한다. 자신의 쾌락과 잇속을 위해 한 마을의 인민을 무참히 도륙하는 데 거리낌 없는 인간이다.  이 자가 천융량의 무장한 마을 사람들과 혈전에서 칼날에 의해 눈이 다치며 패퇴하는 장면과 함께 자신의 부하들에 의해 결박되어 버려지고, 자신의 본업이었던 점장이로 길거리에 앉아 인민을 현혹하는 교활한 모습이 있다. 


고작 인간의 사주팔자와 이에 은닉된 지중간을 자유로이 해석하는 반복된 행위로 인간 운명의 예언자처럼 행세하는 정경이다.  마치 작금의 천O 이라는 인간이 한 국가를 쥐락펴락하는 혹세무민의 한심한 작태와 오버랩되며 갈등과 혼돈으로 내모는 그 비열함과 우둔함을 보는 것 같은 느낌을 받기도 했다. 이 자의 행적을 작가 위화는 상당한 분량으로 서술하고 있는데, 그 운명의 끝,  꽂은 칼날이 궁극에 어디에 다시 꽂히는지를 살필 수 있게 하는 것은 아마도 필연임을 말하려 했던 것이라는 인상을 받는다. 제아무리 운명을 살핀다고 해봤자 자기 운명에 다가오는 칼을 빗겨가지는 못한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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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 과학, 규칙파괴 - 새로운 존재 피터2.0,




희망이 없을 때, 합리적인 로봇처럼 행동해서는 역경을 헤쳐갈 수 없을 때에는 허약한 인간의 불합리하고, 고집스럽고, 터무니없고, 자기희생적이고, 맹목적이고, 멈출 수 없는 무조건적 사랑이 우주에서 가장 막강한 힘이 될 수 있다.” -가제본 405

 

글을 시작하기 전에 세상의 규칙을 깨부수고 운명에 기꺼이 맞섰던 로봇공학자였던 저자 피터 스콧-모건박사의 2022615일 영면(永眠)에 애도의 뜻을 전합니다, 이 자서전은 그가 2017운동뉴런 장애(MND; 일면 루게릭병)’의 진단을 받고, 5년 내 90퍼센트가 사망하는 그 수동적 운명을 거부하며자신을 사이보그(cyborg)화 함으로써 인간의 정의(定意)를 다시 쓰는 여정에서 집필 된 책입니다.

 

한 인간이 필연적인 죽음의 도래에 직면했을 때 느끼게 되는 절망과 공포에 맞서는 행동은 경이와 감동, 어떤 숭고함으로 다가옵니다. 이 자서전은 자신의 삶을 두 축()에서 기술하고 있는데, 하나는 성 정체성의 자기 발견에 따른 기성의 편견과 조직적인 혐오에 대한 저항이며, 또 하나는 MND진단 이후 이 숙명적 질병에 대한 의료와 세상의 이해에 맞선 온 몸의 투쟁, 인간 신체가 지니는 세상의 이해에 대한 반격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의 인생에 전환적 여정이 된 사건들 중심으로 성장기와 사회 구성원으로서의 경력들을 술회하며, 결정적 순간이 오면 언제나 작동하는  암묵적 규칙, 즉 우주의 운영 규칙에 자신이 어떻게 반격하며 스스로의 삶을 재발명했는지를 위트와 지혜로운 문장으로 몰입토록 하고 있습니다.

 

리더십과 예술적 재능, 과학에 대한 매진 등 다방면에서 특출한 학생으로 여겨졌던, 상위 중산층의 자녀들만 다니는 이튼그룹 산하 명문 킹스칼리지 스쿨의 열여섯 살 소년이 겪었던 사건으로 시작됩니다. 펜싱에서도 뛰어난 역량으로 차기 주장의 당연 후보자이기도 했던 소년은 교장실에 끌려갑니다. 그의 동료 남학생에 대한 성적 취향을 못마땅하게 여기는 자들의 권력 행사가 소년을 향해 무참하게 자행됩니다.

 

그의 성 정체성에 대한 혐오와 멸시, 협박과 죄의식의 주입 등 소년의 세상에 대한 이해에 기득권자인 교장이 잔인함을 내보이며, 그의 학생 대표 자격과 모든 운동부의 주장후보 자격을 박탈하고 매질을 가합니다. 소년은 복종할 수밖에 없었지만 자신의 삶에서 이처럼 선택지를 빼앗기고 다수에 맞춰 사는 짓을 하지 않을 것을 다짐합니다. 큰 권력, 놈들이 굴복할 때까지 반격하고, 반격하고, 또 반격할 작정이라며, 소위 명문가의 자녀들이 당연히 진학하는 옥스브리지(옥스포드와 케임브리지)의 입학을 거부합니다.

 

암묵적 규칙에 대한 반격 - 규칙 파괴

 

정면으로 기성의 질서에 반기를 드는 것이지요. 그리고는 당시 유일하게 컴퓨터과학 학위 과정이 있던 임피리얼 칼리지에 입학합니다. 기득권의 암묵적 규칙을 대놓고 무시한 그의 처사는 학교와 부모에 대한 배신이라며 비난을 받기까지 하지요.

 

이제부터는 상류층 중산층 동네의 역겨운 관습, 편견,...속에서 살지 않아도 되었다.” -117

 

학교 근처의 하숙집으로 이주하며 독자적 삶이 시작 된 것이죠.  피터는 오래 지난 한 신문의 광고란에 있는 게이 전용 호텔로 짧은 휴식을 위해 떠나고 그곳에서 운명적인 연인을 만나게 됩니다. 두 살 연상의 불그스레한 금발머리 미남형 남자 프랜시스에게 시선을 거둘 수 없는 열정에 빠져듭니다. 그의 상상 속 연인인 전사 아발론을 본 것이죠.  두 사람은 사랑에 빠지고, 당대에는 법규는 물론 사회의 모든 시선이 용납하지 못하는 연인(게이)이 됩니다.

 

이후 피터가 불치병으로 인정되는 MND 진단과 이후의 여정, 그가 사망하기까지 두 사람의 고귀한 사랑은 계속됩니다. 이 여정은 부모는 물론, 가족 관계망 속의 사람들, 직장은 물론 온갖 사회적 관계로부터의 소외와 배제에 대한 투쟁입니다. 즉 세계가 조직해 놓은 규칙에 대한 도전입니다.

 

이 도전은 그의 의학적 사망을 예정하는 진단 결과 이후, 인간의 생물학적 실체에 대한 반항으로 이어집니다.   MND , 뇌를 각 부위의 근육과 연결하는 신경망이 서서히 파괴되어 신체 모든 근육의 움직임이 멈추는 질병입니다. 팔다리의 움직임이 불가능한 것은 물론 음식을 삼킬 수도 없으며, 배설도 할 수 없고 호흡을 자율적으로 할 수도 없게 되는 것이지요. 눈으로 볼 수만 있고, 뇌만 살아있어 시체처럼 천장만 바라보다 숨을 쉬지 못해 사망하게 되는 불치의 병으로 의료계는 물론 세상은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가 경영 컨설팅 기관인 '아더 디 리틀(ADL)'의 파트너지위까지 오르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프로젝트가 바로 기업들의 경영 조직은 물론 무수한 프로젝트들을 방해하는 보이지 않는 힘을 분석 규명한 암묵적 규칙이라는 것입니다. 이 암묵적 규칙이란 그의 질병인 MND에 있어서는 진단 후 해당 환자의 죽음을 기다리는 것이 전부인 것처럼 질병 해결, 즉 생명 연장을 위한 의료적, 기술적 조치를 방기하는 장벽이라 할 수 있죠.


가제본 사진입니다


 

그는 의료계에 영양전달, 폐에 주입하는 공기의 흡입, 그리고 배설의 문제에 있어서 사고를 전환하면 그저 죽음의 내습만을 기다리는 사람들에게 커다란 대처가 될 수 있다고 주장하지만, 어느 누구도 나서려 하지 않습니다. 그는 단지 무력하게 다가오는 죽음을 거부합니다.  자신과 수동적 죽음을 기다리는 무수한 사람들을 위해 멋진 테크놀로지를 찾아내는 데 자신을 그 연구의 대상으로 하기로 합니다.  암묵적 규칙과 그 규칙을 파괴하기 위한 직접 증명을 자신의 신체로 나서는 것이죠.

 

트리플 오스토미(인공 항문이나 방광을 만드는 수술)를 통해 몸 안의 배관을 다시 깔고, 기도를 막는 후두부를 잘라 폐에 미칠 이물질의 차단은 물론 공기 흡입을 위한 인공호흡기를 부착하고, 자기 눈의 시선에 의해 조작되는 특수 휠체어는 물론 사물인터넷을 활용한 원격 조작, 그리고 자신의 생물학적 뇌와 컴퓨터의 기계적 뇌를 융합하는 사실상의 사이보그가 되기로 합니다. 몸도 뇌도 모든 것이 불가역적으로 바뀌는 완전 교체된 인조인간, 그는 원래의 자신인 피터1.0은 새로운 존재 피터2.0으로 거듭 나는 것이라고 사랑하는 반려자 프랜시스에게 들려줍니다. 프랜시스는 그의 적극적이고 열성적인 지지자죠.

 

사실 이러한 사이보그화의 변신을 향한 그의 집념은 자신의 인생을 바꾼 결단의 본질인 연인 프랜시스와의 영원한 융합입니다.  그는  가상현실을 이용해 우리의 현실을 되찾고 싶다고 피력합니다.  , 이 자서전은 이처럼 세상을 지배하는 암묵적 규칙에 한 인간의 지칠 줄 모르는 반항입니다. 그리곤 그는 자신만의 우주적 생존원리인 규칙 세 가지를 선언하는데, 그 세 번째 규칙이   사랑은 최종적으로 모든 것을 이긴다.”입니다.  인간이 중요한 존재인 것은 규칙을 깨기 때문이며, 과학은 마법으로 통하는 유일한 길이라는 과학에 대한 절대적 신뢰를 지배하는 최고의 우주원리라고 말이죠.

 

인간의 재정의(再定意)에 대해서 - 탈신체화

 

한편   규칙을 깨는 놀라운 특성은 인간의 어떤 성질보다 문명 발전의 원동력이라며, 가상 다중 우주의 창조, 인간과 기계의 융합을 외칩니다.  그는 조만간 지금과 같은 AI의 독자적 발달이 진행되는 미래는 인간에게 돌이킬 수 없는 위험이라고 합니다. 지금 인류는 타이밍을 놓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인간과 기계의 융합은커녕 이에 대한 그 어떠한 합의나 논의조차 없이 무턱대고 그쪽으로 가고 있음을 우려하고 있습니다. 한 번 지나치면 다시는 그 길을 선택하지 못할 거라는 것이죠.


 

피터 스콧-모건의 강연모습, 우측에 반려자 프랜시스


자신의 몸을 실험재료로 삼아 신체 기능 증강에 대한 살아있는 연구를 수행하는 자신은 그저 살아남고 싶어서, 생명을 연장하고 싶어서가 아니라 인류의 번영을 함께 누리는 초석이 되고자 하는 것이라 말합니다.  이 자서전의 말미에 2040년 살라니아라는 제목을 붙인 가상 증강현실의 세계에서 두 사람의 영원한 세계를 펼쳐 보입니다.  사이버 공간, 가상의 증강 현실 세계가 진정 암흑의 허공에 빛을 채우는 현실이 될 수 있는 것일까요?  자서전을 집필 할 때(2019) 그는 책의 출간을 자신이 지켜 볼 수 있으리라 의심치 않았을 것 같습니다. 그가 바라던 완전한 인간-기계 융합 세계의 실현을 그의 영서(永逝)가 중단시키긴 했지만 아마 책 속에서 시작되었던 그의 재단이 그의 유지(旨)를 지속하고 있으리라 생각됩니다.

 

인간의 정의를 새롭게 해야 할 타이밍이라는 그의 실천은 인간 진화의 나무에서 사이보그와 같은 가지에 있기를 소망했습니다. 세상의 규칙에 대한 저항으로 점철된 한 인간의 삶은 어쩌면 인류에 대한 사랑의 힘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름다움과 경외가 교차하는 감동의 기록물임에 그 어떤 구차한 토를 붙이겠습니까!  그러나 이 아름다운 삶의 기록물에는 인류 사회에서 그저 간과할 수 만은 없는 논쟁적 문제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인간의 정의에 관한 것이며, 이를 하기에 앞선 방법론으로서의 인간-기계 융합과 가상 증강 공간에서 불멸하는 존재가 과연 감각하는 신체와 정서와 이성의 복잡성의 존재인 인간의 실재를 대체하는 것을 인간의 진화라 할 수 있는 것인가의 물음입니다. 20세기의 위대한 사회학자이자 사상가인   위르겐 하버마스는 그의 저서 인간이라는 자연의 미래에서  인간을 사물화시키고 구속시키며 생명의 죽음과 삶을 자의적으로 결정하겠다는 자유주의적 기술주의는 인류 전체의 자기이해와 규범적 동의를 요구하는 것라고 말하며,  도덕적 진공상태에서의 삶, 무엇인지조차 모르는 그런 삶의 형식 안에서 삶은 아마도 살 만한 가치가 없을 것이다.”라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또한 물질적(육체적 성질) 능력을 무한히 증강 또는 대체시켜 영생하는 새로운 인간, 즉 욕망의 실현을 위한 기술지상주의의 실체인 트랜스휴먼(transhuman)’을 비평적으로 써 내려간 저명한 저널리스트인  마크 오코널은 그의 저술 트랜스 휴머니즘에서 인간 생명의 형식을 가공(可恐)할 정도의 다른 차원으로 옮겨 놓으려는 극단적인  탈신체화 욕망에 대해  아이를 등에 태우고 엉금엉금 기는 아내와 그 위에서 자지러질 듯 웃으며 소리치는 아이를 바라보는 인간의 경이로운 신체적 이해의 장면을 기술하며  나는 신체였다.”고 수용할 수 없는 거북한 심리를 드러내기도 했습니다.

 

이 자서전에서 조차 저자 자신은 그의 반려자인 프랜시스와의 여행에서 찾은 한 항구 마을의 감각을 애틋하게 술회하고 있습니다.  어부들이 그날 아침에 회수한 바닷가재 통발과 그물에서 짭짤하고 비릿한 냄새가 풍겨왔다. 활기찬 항구의 냄새는 언제나 나를 사로잡았다.”고 신체 고유의 향수가 사라질 것을 그리워하고 있으며, 프랑스 토산물 시장이 열린 벤조라는 곳의 사랑하던 전망으로 마음을 달래는 모습을 그리고 있기도 합니다.

 

인간의 생물학적 신체가 지니는 그 고유성을 상실한 사이보그가 인간의 미래여야 하는지 우리는 자문하고, 공개적으로 논의해야 합니다.  어쩌면 저자는 이러한 공론, 인류의 번영을 위한 토대의 증인으로써 자신을 세상의 실험 재료로 내놓았던 것인지도 모릅니다.  이러한 측면에서 이 책은 인간의 정의를 진지하게 생각게 하는 특별한 제안이기도 할 것입니다.




"상기 리뷰 글은 사전 서평단으로서 김영사의 가제본 도서 협찬에 의해 작성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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캄캄한 낮, 환한 밤 - 나와 생활의 비허구 한 단락 대산세계문학총서 178
옌롄커 지음, 김태성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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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명리(名利)가 충분한 수준에 도달해야만, 아무렇게나 땅위에 내버린 낡은 자전거도 세상 사람들에게는 행위예술의 비륜(飛輪)이자 선구자로 여겨지게 된다.” -9

 

명리를 추구하지 않겠다고 하면서도 부와 명예를 갈망하는 자조의 문장으로 소설은 시작되지만, 사실 이 말은 고상한 허위처럼 보인다. 아니 위의 인용문장은 다분히 반어적으로 읽혀야 하는 문장일 것이다. 50대의 마지막 길목(2017)에 들어선 옌롄커는 이에 대한 깨달음, 예술이라는 장난을 꿰뚫는 이치를 알았다며, 예술과 명리의 그 직접적이고 상호적 연관성을 장황하게 늘어놓는다. 소설은 이러한 이해에서 비롯된 일종의 실험이자 반증 일지도 모르겠다.

 

문학은 시대의 예열 속에서 먼저 뜨거워져야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지고 고전으로 남을 수 있음을 현실에서 실현, 검증해 보는 것이다. 이 말이 과연 진실인지. 이것은 하나의 원형(原型)을 소설, 인터뷰, 경찰조서, 시나리오 네 가지 각기 다른 형식과 변형된 내용으로 서술하여 읽고 보는 대상의 양적 확보를 통한 달굼과 확산의 드러냄으로 실현된다. 한편으론 문학을 비롯한 예술이란 이름으로 행해지는 이러한 창작 또는 진술이 단지 원형보다 못한 예술로 출현하기도 한다는 것에 대한 비하 혹은 조롱으로 드러나기도 하지만, 그것들 속에 일말의 진실이 숨겨져 있는 것을 부정할 수만은 없기도 하다.

 

비허구 한 단락이라는 부제가 무색하게 허구와 비허구의 경계는 뒤섞여 모호하기 그지없다. 옌롄커 자신의 목소리처럼 보이는 것에도 대상의 시선을 의식한 언어와 행위로 조성되어 있어 마치 창조된 인물 같기 때문이다. 소설 속으로 들어가 보자. 분명 원형은 어딘가에 존재한다. 그러나 그 원형을 안들 무엇이 달라질 것인가? 저마다 표현하고 드러내려하는 것이 있기 마련이지 않은가?

 

소설은 작가의 허난지역 고향 마을 사람 리좡의 이야기로 시작된다. 그는 자신의 글쓰기에 여러 차례 등장했던 원형이라 말하며, 자기 일생의 가장 중요한 작품인 캄캄한 낮, 환한 밤(速求共眠)을 논픽션이 아닌 픽션으로 발표해 명리를 피해갔던 것으로 상기한다. 이것을 발단으로 명리를 가장 명확하게 가져다 줄 시대의 걸작 영화로 만들 준비에 착수한다. 사실 영화를 위해 모인 인물들이나 시나리오는 이 거대한 실험 속의 허구화된 인물이기도 하면서 검증을 위한 자체 수단이기도 할 것이다.

 

영화감독 및 제작자 구창웨이, 시나리오작가 양웨이웨이, 신진작가 궈팡팡, 영화감독 장팡저우, 이들은 옌롄커가 ()을 팔아 이()를 득할 수단으로 소집한 인물들이다. 이들이 완성된 시나리오를 읽고 나서 보이는 반응은 작가의 예술에 대한 이해의 진실이기도 하며, 뜨거워져야 할 시대의 사람들을 대변한 목소리이기도 할 것이다. 그것이 대중의 우매함이든 진실이든. 이미 소설 속으로 들어 온 것이다. 이 일상적이고 사변적이기도 한 배경 같은 이야기도 이 작품의 한 축이다.

 

이들에게 옌롄커는 소설 캄캄한 낮, 환한 밤(1) 사본을 각기 나누어주고 하루 동안 읽고 난 후 다시 모여 영화를 위한 논의로 들어 갈 것을 제안한다. 이것은 허구의 깃발을 달고 써내려간 첫 번째 비허구 작품, 즉 실화소설이라는 토씨가 붙은 소설이다. 그 내용은 열일곱 살 리좡이란 사내아이가 마을 이웃의 열네 살 먀오쥐안을 강간한 사건을 중심으로 그네들 아버지의 성품과 출신 배경, 상호 겸양과 이해에 의해 두 아이의 결혼에 이르는 사연들을 해학적으로 그려낸 이야기다. 이 이야기에 등장하는 인물들, 특히 리좡은 메타 서사라 할 수 있는 이 장편소설 캄캄한 낮 환한 밤 - 나와 생활의 비허구 한 단락의 중심인물로 활용되는 소재라 할 수 있다.

 

네 사람이 밤새 읽은 실화소설은 사실 보잘 것 없는, 시대의 걸작이 될 여지조차 없는 지극히 평범한 에피소드 한 편에 불과하다. 당연히 구창웨이는 이것을 각색하여 영화화 할 거냐며 난색을 표명하지만, 옌롄커는 비장의 카드를 꺼내든다. 바로 소설 속의 실재하는 인물 리좡이 베이징에 있으며, 그가 벌인 희대의 극이 세간의 소문으로 떠돌고 있다고. 중국 최고의 명문대인 베이징대() 대학원생인 아름다움과 지성을 겸비한 리징이라는 20대 여성과 빈곤한 북부 허난의 시골 마을 출신인 50대 농민공인 리좡의 사랑 사건이라고,

 

인터넷에 떠도는 천풍망정(千風萬情)이 쓴 오리지널 창작인 벌레와 봉황이 서로 사랑하는 인연은 어디서 온 것인가. 연꽃이 활짝 피면 진흙도 향기롭네라는 글과 이 글에 달린 신랄한 댓글을 본 네 사람의 반응은 이것이다. 염병할! ...공동으로 소똥 위에 핀 꽃의 아름다움을 발견한 것 같았다.” 농민공 리좡이 감히 엘리트 여성에게 사랑을 고백할 수 있었으며, 리징은 왜 그와의 데이트를 수락했는지, 이해할 수 없는 불가사의가 몰고 올 뜻밖의 복선과 반전에 대한 기대가 그들의 얼굴에 따사로운 햇살 같은 미소가 걸리게 한 것이다.

 

영화화가 잠정 결정되고 시나리오 각색을 위한 사전 작업으로 실제 사건의 주인공인 리좡, 리징, 그리고 농민공 리좡과 함께 공사 일을 하는 뤄마이쯔, 그리고 리좡의 아들 리서, 리좡의 어린 시절 결혼을 중개한 마을의 정신적 지주인 홍원신과의 인터뷰가 진행된다. 이 인터뷰를 통해 밝혀지는 것은 발표되었던 실화소설 캄캄한 낮, 환한 밤의 리좡과 먀오쥐안의 결혼에 이르는 내용은 사실과 다르다는 당사자의 반론과 함께 모호한 관계자의 진술, 전혀 엉뚱한 상황, 리좡이란 인물에 대한 상반되는 엇갈리는 진술들, 리징과의 뜻밖의 통화 인터뷰에 이르기까지.

 

이 인터뷰 내용은 이후 시나리오 창작과 비교되는 또 하나의 텍스트로서 과연 실제로 진행되었다는 당사자들과의 대화가 허구보다 현실적인가? 아니면 현실보다 더 허구적인가?, 대체 무엇이 더 예술 작품 같은가? 의 독자들의 검토 대상이 될 것이다.

 


리좡이 리징에게 접근하여 식사대접을 제안하고 이를 거절하던 과정 중에 주변 사람들이 농민공 행색의 리좡을 무더기로 두들겨 패는 사건이 발생하는 데, 경찰에 끌려가 구금된 리좡의 사건 심문 조서, 리징의 심문 조서, 증거인 보증서 및 사건 종결서로 이루어진 서류 기록철의 기록 내용, 즉 가장 실제 사건에 접근한 진실로 여겨지는 기술이다. 이 기록 서사에 나타난 내용은 다시 이미 알고 있는 소설과 인터뷰의 내용이 변질되어 전혀 다르거나 왜곡되어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이 또한 현실과 예술에 대한 간극, 무엇이 우리 삶에 더 진실되게 다가오는가의 물음인지도 모르겠다.

 

대체 문학, 예술이란 무엇인가? 거장 옌롄커가 빚어내는 이 모든 비허구의 허구들은 그대로 하나의 단독적인 예술 작품으로 손색이 없다. 여기에 현실보다 못한 예술이라는 오만한 딱지를 갖다 붙일 그 기준을 나는 알지 못한다.

하나의 원형에 세 가지 내용의 기술이 이루어졌다. 드디어 시나리오, 시대의 걸작이 되어 명리를 안겨줄 대본 창작 작업이 진행된다. 그러나 시나리오 캄캄한 낮, 환한 밤(2)은 비현실적으로 보이는 50대 농민공과 20대 엘리트 여성의 결합에 은닉된 신비로움을 밝혀주리 라는 독자의 기대와는 완전히 다른 판본의 내용이 쓰여 있다.

 

여기에는 수도 베이징에 거주할 특권인 베이징의 호구(戶口)를 얻으려 분투하는 리징의 직장인 연구소로부터 해고 통지에 따른 울분을 담고 있는데, 그 해소책이 성적 분출로 표현되고, 공개적인 잠자리 대상 물색이라는 행위로 표출된다. ‘가까이 오세요. 저랑 같이 자요라는 문구가 담긴 팻말을 행위예술 하듯 걸고 있는 리징에 다가가는 리좡의 망설임과 거주지 주소의 취득에 의한 인연을 발단으로 하고 있다.

 

그녀를 급작스레 해고한 연구소장 장화에 대한 적의를 해소하기 위해 자신과의 잠자리라는 유혹을 전제로 리좡을 장화의 해코지 청부인으로 종용하며 두 사람의 심리적 변화를 담고 있는 내용이다. 옌롄커의 소설 밖 의도를 나는 추측케 되는데, 허난 사람들에 대한 세간의 비하와 조롱과 같은 나쁜 이미지를 씌우지 말고 좋게 써달라고 했던 리좡의 옌롄커를 향한 부탁의 변과 수도와 지역민의 차별적 정책에 대한 느슨한 비판을 아울러 담아내며, 특수해 보이는 두 사람의 사랑을 한낱 우연한 사건이 빚어낸 에피소드화 함으로써 대중들이 지닌 호기심에 내재된 그 범주화된 편견에 기초한 의외성을 전복시켜 평범화시켜버리려는 것으로 여겨졌다.

 

결국 사람들을 뜨겁게 달구고 시대를 예열하는 예술, 즉 시대의 걸작으로 탄생할 시나리오를 기대하는 사람들의 기대는 결코 예술이 될 수 없음의 항변이라는 무언의 주장일지도 모른다. 영화를 준비하기 위해 모였던 네 사람 중 하나인 양이웨이는 특수한 남녀관계에 대한 상상이 부족하다고, 리좡과 리징이라는 특수한 남녀 관계에 감춰져 있을 불가능한 비극과 희극, 심지어 익살과 골계(滑稽)의 불가능성이 보이지 않는다고 혹평한다. 또한 장팡저우는 리징과의 인터뷰 내용을 방패삼아 옌롄커의 소설은 너무 잔꾀가 많으며, 서사가 선명하지 않고 신기하기만 하다, 리징의 인물 성격을 전혀 반영하지 못했다고 에둘러 비평하기까지 한다.

 

이윽고 구창웨이는 옌롄커와 만남에서 리좡과 리징의 사랑 얘기는 쓰지 않은 시나리오에 대해 두 사람의 왜곡된 사랑 이야기를 쓰기로 결정한 것에 대한 의도적 누락을 묻는다. 이때 옌롄커의 답변은 안 쓰려고 한 것이 아니라 생활의 진실이 쓰지 못하게 한 겁니다.이다. 이로서 영화의 제작은 강 건너 가버린 것이다.

 

구창웨이: 예술이란 생활의 진실을 뛰어 넘을 수 있어야 비로소 가치가 있는 것 아닌가요?

옌 롄 커: 진정한 예술은 생활을 뛰어 넘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생활의 밑바닥이나 내부 깊숙한 곳으로 스며들어 갈 수 있는 것이지요.      -379쪽    

 

이렇게 캄캄한 낮, 환한 밤(2)의 영화화는 투자자의 철회로 미완에 그치고 만다. 이 최종 대화를 마치고 자신의 차에 탑승한 작가는 다른 차를 들이받고 그는 안면의 상처로 병원생활을 하게 된다. 이것이 현실 속 실제 사건인지, 허구의 연속인지 모르겠지만, 그의 팽창되었던 욕망의 추락이 몰고 온 우울과 낙담으로 흥분성 정신병에 시달렸던 건 사실인지도 모르겠다.

 

그는 후기에서 쓰고 있다. 후기의 제목은 옌롄커: 커튼 콜을 향해 가는 글쓰기이다. 여기서 그는 한 세대의 커튼콜 시기가 다가온 것 같다며, 글쓰기의 어려움을 토로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은 호흡의 시도이자 숨을 고르기 위한 작은 호흡이다.”라며, 펜을 던질 준비, 퇴장을 향해 나아가지만 새로운 시작을 위해 노력할 준비도 되어있다고 선언하고 있다. 그는 결코 명리라는 목적을 위해 글을 쓰는 작가가 아니다. 국가권력이 모든 것을 지배하고 결정하는 국가주의 중국에서 그는 그 어떠한 지원 프로그램의 도움도 받지 못하고 배제된 외딴 섬 같은 작가다.

 

어쩌면 이 작품은 이러한 환경에 지배된 중국의 문화 예술 현실 전반에 대한 비평으로 바라볼 수도 있겠다. 자신이 사는 곳의 역사와 문화, 시대상에 내재하고 있는 우매함과 상처, 국가 권력이 은폐하려는 것들을 끊임없이 예술적으로 지펴내려는 그의 문학이 새롭게, 그리고 지속적으로 갱신되어 발표되기를 응원하게 된다.

 

옌롄커의 2017년 이전에 발표된 작품들과는 그 문제 제기의 지향점이 다른, 자신에게 보내는 일종의 커튼콜을 향한 전환적 색채의 소설이라 하겠다. 그간 인간을 압도하는 혁명 이데올로기에 대한 비판이나 지식인의 허위의식, 인민들의 현혹된 과잉의 물질적 욕망이 야기하는 고통과 분노와 같이 중국사회를 향한 거대 담론으로서 그 상처를 드러내고 인간성을 회복하려는 글쓰기였다면, 이 작품은 고상한 허위의 협로 위에서 곡예를 하는 작가 자신, 그의 글쓰기에 숨어있는 고백록에 가깝다고 하겠다.


갈수록 나 자신의 글쓰기가 무의미하게 느껴진다는 후기의 문장처럼 이제 두루뭉술한 얘기를 지양하고 내 얘기를 하여야겠다는 것이다. ‘나의 생활의 비허구 한 단락이라는 부제처럼 어쩌면 이 작품을 시작으로 옌롄커의 작품 대전환이 시작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자신을 묶고 있던 거대 담론의 세계로부터 풀려나 자유로운 예술의 세계로 내딛는 그의 걸음을 보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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