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튼, 현수동 - 내가 살고 싶은 동네를 상상하고, 빠져들고, 마침내 사랑한다 아무튼 시리즈 55
장강명 지음 / 위고 / 202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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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고 싶은, 아니 삶을 사랑하며 살아 갈 수 있는 동네에 대한 바람의 글이라 해도 될 것 같다. 삶에 대한 시선이 물론 같을 수 없지만, 소설가 장강명이 함께 이루고 싶은 동네는 전망 좋고, 자전거 타기 좋으며, 산책로가 있고, 개들과 새들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으며, 도서관이 있고, 역사와 설화까지 있으면 금상첨화라고 말하는 곳이다.

 

이에 이르기 위해 그는 추리고 추려 역사에서 인물, 전설, 상권과 도서관에 이르는 일곱 가지의 더 나은 세상을 위한 현실 가능한 궁리를 펼쳐놓는다. 그것은 삶을 사랑 할 수 있게 해주는 동네라 정의 하는 듯하다. 제목에 표기된 현수동(玄水洞)’은 실제 행정 명칭에는 없는 곳이지만, 마포 광흥창역 일대라는 구체적 위치가 있는 동네의 가상 이름이다.

 

작가는 밤섬을 포함하여 마포구 현석, 신수, 구수, 서강, 하중, 창전동 일대를 가상동네인 현수동이라 부른다. 30대 중반 6년 동안 살며 그 일대를 사랑하게 된 사람의 지역 찬가일 수 도 있겠다. 그럼에도 이들 동네가 지닌 일곱 가지 궁리를 따라가다 보면, 광흥창역 일대가 아니어도, 보통 사람들의 평범한 삶을 기리며, 바로 그 자체를 소중히 여기는 사람들이 있는 곳이면 그 어느 곳이나 현수동이라 불러도 될 것이다.

 

이들 궁리를 말하는 각각의 제목은 작가에게는 없는 것이거나 두려워하고, 가본 적 없고, 질색하며, 모르는 사람이라는 수식어가 붙어있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삶을 충만하게 하는 것들이란 사유가 담겨있다고 할 수 있다. 이를테면 미신을 질색하지만 하소연할 데 없는 사람들의 기원을 들어주고 그네들을 위무하는 마을 수호신을 모아놓은 부군당과 도당굿 전승의 가치를, 그 보존을 말하듯이.

 

또한 도시 서민과 빈민의 무참한 죽음을 야기한 와우시민아파트 붕괴 현장 어디에도 위령비가 없으며, 한국 사회가 이런 죽음들을 적극적으로 지워버리려 함을, 마치 일어나지 않은 척 하는 인간에 대한 무관심을 발견하며, 동네의 역사, 동네를 이루었던 대장장이, 메주 말리는 여인, 양 치던 소년 등 보통 사람들의 동상과 목상이 보행을 방해하지 않으면서 눈을 마주칠 수 있는 있는 곳에 편하게 설치된 곳을 상상한다.


 


이름도 낯선 조선조 양반의 아호는 남아 지명이 되고, 정작 지배당하고 살던 대부분을 차지하던 갑남을녀들의 삶의 현실은 지워버리는 그런 위계와 권력의 언어가 더 이상 주장되지 못하는 세상을 향한 궁리이기도 할 것이다. 지명이나 동네 이름에 전승되는 이야기들은 그 완성도가 심히 떨어지거나 아귀가 잘 맞지 않는다고 한다. 바로 이러한 어설픔과 모순의 이야기 자체가 피지배민인 백성들의 신산한 삶의 비극성의 반영이며, 꿈같은 이야기로나마 타협하려 했던 그네들 심정의 표현이었기에 부득이한 불완전성, 미흡한 모방이었으리라는 것이다.

 

권력과 자본의 폭력이 행사된 1968년 밤섬의 폭파 제거 행위는 여의도 개발을 통한 막대한 사익을 챙기기 위해 홍수 방지 명분으로 강행된 사건이다. 이로 인해 오랫동안 이곳을 거주지로 살아가던 사람들이 쫓겨났다. 그렇게 사라졌던 밤섬의 남아있던 수면 아래 암석에 해마다 토사가 쌓여 이제는 폭파 전보다 큰 섬이 됐다. 그리곤 생태경관보호지역으로 지정되었고, 람사르 습지로 등재되기까지 하며 보호되는 장소가 되었다. 인간들의 몰염치에 의한 파괴는 자연의 힘, 시간의 힘에 의해 되돌려진다. 오만한 한 줌의 권력도 존재할 수 없는 세상을 꿈꾸는 것이 결코 불가능한 것이 아니잖은가!

 

작가는 공공도서관을 동네의 커뮤니티 공간이자 자유롭게 타인의 사상과 마음을 읽고 나누는, 꿈꾸는 이상적 마을의 필수 시설로서 역설하기도 한다. 그리곤 부록인 초단편 소설인 현수동의 아침주인공인 강아지 새롱이의 산책에서 마주하는 평온한 일상의 모습을 통해 반려견과 함께 자유로운 산책이 가능한 지역을 꿈꾸기도 한다.

 

사실 공동체에 대한 이해에는 항상 갈등이 따른다. 어찌 획일적으로 동일한 취향과 요구만 있겠는가. 공공도서관을 이용하며 정신의 교류를 하는 동네라면 슬기로운 협의가 가능할 것이다. 가벼운 마음으로 작가가 전하는 현수동의 각 장소에 깃든 설화에 귀 기울이고, 도시의 미래에 대한 소견을 들어보며, 우리의 동네, 우리들의 세상은 어떤 것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상상의 나래를 펴보는 시간이 된다. 아마 그의 궁리들은 보통사람들의 이해를 그리 벗어나지 않는 푸근하게 공감하며 읽어나갈 수 있는 그런 희망의 이야기들일 것이다.

 

아 참, 작가는 그의 기 발표되었던 뤼미에르 피플의 속편으로 밤섬 새 당주가 등장하는 모험의 이야기로, 가제(假題) <시간의 언덕, 현수동>을 예고하고 있다. 발표된 많은 단편과 장편 소설에는 현수동이 직접 또는 간접적 이미지로 등장하고 있다고 한다. 아마 새해 벽두를 연 이 책을 읽고 나면 작가의 인간미와 친근함 탓에 그의 소설로 다가가게 할지도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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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존재론적 형상을 모두 품고 있는 도시라면 지나친 수사가 될까? 에로스와 타나토스의 두 얼굴을, 그 이중적 내재성을, 인간의 속성이란 그러한 것임을 그 자체로 투영하는 장소에 대한 불가피한 이끌림일지도 모른다. 이 도시에 대한 속설은 밀애와 이별이라는 두 상반된 결과를 발설하곤 한다. 낯선 이들을 사랑의 열정에 휩싸이게 하는가하면 연인들을 갈라서게 만드는 곳, 도시의 여기저기를 가르는 소()운하와 발목까지 물이 차오른 보도, 그 거울 같은 표면위에 불을 밝힌 상점의 간판들, 허영을 부추기는 주위의 장식과 기둥과 벽공들의 아름다움, 그리고 눅눅하고 춥고 좁은 안개 낀 골목길은 인간을 비논리적 동물적 욕망에 침잠하게 한다.



 


프랑스의 젊은 시인 뮈세가 연인 상드를 졸라 한없는 밀애를 기대했던 곳, 그에게 베네치아는 자신과 닮은 욕망의 공간, 열정의 대기였을 것이다. 여기에는 이성(理性)의 냉철이 자리 잡아서는 안 되는 곳이었다. 오갈 데 없는 정신은 시인에게 한 편의 이야기를 쓰게 한다. 방탕한 정열을 한껏 태우는 쾌락의 게으름이 흐르는 세계를.

 

사람들의 눈을 피해 안개 낀 운하 위를 미끄러지듯 유영하며 밀애의 장소로 다가가는 곤돌라는 그야말로 에로티시즘과 일체가 되어 연인을 기다리는 폭발할 것만 같은 부푼 연심, 그 혼돈의 설렘을 감각할 수 있을 만큼 선명하게 각인할 수 있게 한다. 뮈세는 단편 티치아노의 아들에서 자신의 반영인 주인공 피포와 베네치아 최고의 여인 베아트리체 도나토와의 사랑을 그려낸다.


 



최고가문의 상속녀이자 미망인인 귀족 여성의 사랑의 헌신은 연인의 잠자는 재능의 회복에 대한 희망찬 기대다. 나는 베네치아를 떠올리면 미로같은 좁은 골목길, 미궁(迷宮)에서 욕망의 제물을 기다리는 미노타우로스의 이미지와, 이성(理性)과 사랑의 끈을 상징하는 아드리아드네의 실이 내 지각에 재생된다. 길을 잃지 않고 목적을 성취토록 돕는 실, 뮈세가 그린 주인공은 이 실을 끝내 놓지 않으면서도 자기 열정의 자유까지 움켜쥔 인물을 만들어내고 있지만 현실의 삶은 인내 할 수 없을 것이라 내게 말한다. 내 안의 미궁에 웅크린 욕망 덩어리를 인지하기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테세우스는 아드리아드네의 손을 놓음으로써 자멸하지 않았나!

 

이 한 토막의 이야기(뮈세의 소설)는 사랑을 소유하려한 천재 바이올린 장인의 이야기를 읽고 연상 작용이 촉발된 것인데, 장인(匠人)은 첫눈에 순수하고 신적인 목소리의 여인을 향한 사랑에 빠져들고, 그녀의 목소리를, 그녀를 소유하기 위해 혼신의 노력을 기울여 흑단의 바이올린을 제작한다. 그것은 예술의 지고한 고뇌와 절망적 대비를 통해 사랑과 예술의 존재와 소유 양식에 대한 물음으로 이어지며, 인생의 의미를 되뇌게 하는 작품이었다. ‘막상스 페르민검은 바이올린은 이 장인의 주검을 실은 채 망자의 섬인 산미켈레(San Michele)’ 묘역을 향해 떠 있는 검은 곤돌라의 정경을 묘사하고 있는데, 그것은 내게 기억을 파헤치고 상상을 사방으로 펼치게 했다. 이 글은 이 장면으로 비롯된 소박한 단상이다.

 

상여를 실은 검은 곤돌라 ... 베네치아에 비가 내렸다. ...물방울들이 대운하 위에서 내는 소리. 곤돌라의 허리를 때리며 찰랑이는 물의 소리. 이따금 건물들 사이를 지나며 바람이 우는 소리만이 들렸다.       - 막상스 페르민 , 검은 바이올린, 난다 2021.7

 

이 장면은 상반된 감응으로 두 문인에 의해 써지고 있는데, 시인 조지아 브로드스키베네치아의 겨울 빛에서 물 위를 미끄러져 가는 그 길에는 유독 에로틱한 면이 있다며, 고르게 옻칠한 듯한 검은 수면과 완벽하게 합을 이루는 요소들의 에로티시즘을 발견한다. 이와 달리 소설가 토마스 만베네치아에서의 죽음에서 변치 않고 전해 내려온 이 이상한 배는 ...관처럼 보일 정도로 색깔이 너무 특이하게 까맣다. ...그것은 범죄적 모험을 생각나게 할뿐더러, 더욱이 죽음 그 자체같다며, 곤돌라의 타나토스적 아름다움을 묘사하고 있다.


 


사실 타나토스는 에로스의 다른 이름이라 할 수 있다. 황금 화살과 납 화살, 사랑과 생명의 거부, 에로스의 폭주는 타나토스로 탈바꿈하며 존재를 뒤바꾸기 일쑤인 것처럼 우리 인간 삶의 실체이다. 이중성, 태생적, 즉 존재론적으로 이 양면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는 우리는 미궁 속 미노타우로스와 테세우스의 끊임없는 투쟁의 존재자이다.

 

베네치아, 황금 빛 햇살이 튀어 오르는 수면과 수세기 동안 변함없이 인간의 시원적 모습들이 도처에서 존재를 환기케 하는 곳, 이 존재 반영의 도시는 그래서 사람들을 사랑에 도취케 하고, 도취된 인간들은 그 열정에 휘말려 가까이 있는 연인을 잊는다. 사랑과 이별의 도시, 에로스와 타나토스의 도시, 제어되지 않는 욕망과 이성의 실이 함께하는 도시, 베네치아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문학과 예술이 그치지 않는 이유일 것이다. 올 여름 가보게 될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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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화, 치유, 인간 - 삶이 흔들릴 때 신화가 건네는 치유의 말들
신동흔 지음 / 아카넷 / 202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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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네 마음은 항상 무엇인가로 들끓는다. 그것은 기쁨과 행복의 충만한 끓음일 때도 있지만, 무기력과 두려움, 슬픔과 공허의 혼란으로 내몰림이기도 하다. 내적 평화와 복락을 이루기란 얼마나 힘겨운지, 삶의 시선을 새롭게 일신하기에 너무도 고달파 좌절과 포기, 분노와 공격성으로 전락하기는 또 얼마나 쉬운지, 내 존재의 가없는 흔들림에 고통스러워하는 것이 바로 우리 인간들이다.

 

이 책은 바로 이러한 우리네에게 한낱 이야기로서의 들려지던 신화와 전설, 설화로부터 우주자연의 섭리, 우리 안의 선과 악, 힘과 가치에 대한 '자기서사(story-in-depth of self)'를 발견케 하여 내 안에 공존하는 본원(本源)성을 목격토록 견인한다. 신화가 품고 있는 서사 속에서 인간의 이면적 심층에서 삶을 움직여 가는 존재의 본질을 통해 삶의 실체를 목도함으로써, 깊이 잠들어 있는 나의 내적 실존(實存)을 깨워지금의 나를 돌아보고 새로운 삶의 가능성을 사유토록 하는 것이다. 신화는 우리 존재의 본원을 비추는 마법의 거울이라는 것이다.

 

이것을 저자 신동흔 교수는 창조, 자연, 영웅, 애정, 생사의 다섯 신화로 구분하여, 존재의 시원, 그리고 세계와 나와의 관계, 인간적 삶의 한계와 그 극복을 위한 투쟁, 세상과 타자와의 연결과 확장, 삶과 죽음에 대한 이해를 어떻게 우리의 서사로 수용할 수 있는 지를 명상케 하고, 삶의 치유로서의 서사로 이해할 수 있는지의 여정을 안내한다.

 

한국의 신화와 전설은 물론 동서양을 막론한 세계의 신화를 오가며 대체 인간의 본원이란 무엇이며, 창조와 자연의 신화로서 그것들은 우리와 우주자연의 섭리가 어떻게 연결되고 상호 교섭하고 있는지를 깨닫게 한다. 또한 영웅, 애정, 생사의 신화에서는 인간적 존재로서 서사를 바라봄으로써 역동하는 천변만화의 세계와 어떻게 투쟁하고 초극함으로써 내 존재의 거듭남의 길을, 생명적 섭리를, 존재적 숙명을 헤쳐 나갈 것인지를 깨우치게 돕는다.

 

아마 이 책의 덕목은 거의 절반을 차지하는 한국의 신화를 기반으로 우리의 오랜 이야기를 통해 를 돌아 볼 수 있음에 있을 것이다, 물론 잘 알려진 이집트와 그리스, 북유럽의 신화가 또 다른 절반을 차지하며 미처 발견하지 못했던 우리들의 실체, 그 자화상을 통해 삶의 갈래길에서 어느 길을 걸어야 할 지에 대한 신선한 이정표를 발견 할 수도 있다. 인간 존재를 비롯한 우주 자연의 창조에 대한 신화는 서양의 것만이 있는 것이 아니다. 제주 창세 신화 <초감제>’가 있으며, 함경도 구전 신화인 <창세가>’도 있다. 거대한 창조신 미륵이 땅과 하늘이 뭉쳐진 혼돈의 세계를 분리하여 기둥을 받쳐 하늘을 만들고, 땅을 만든 이야기, 그리고 하늘을 향한 축원을 통해 내려진 생명 금벌레, 은벌레라는 원초적 생명체로부터 햇살과 이슬, , 바, 곡식과 열매 등 온갖 자연의 기운을 취해 인간을 만들어 낸 이야기다.

 

수성(獸性)을 지닌 미력한 물질성(物質性)의 존재인 벌레가 맞물린 인성(人性), 세상 만유와 연결된 존재인 바로 라는 존재는 과연 물성을 쫓는 존재인가, 신성(神性)을 쫓는 존재인가를 묻게 된다. 한편 우라노스에서 크로노스로 다시 제우스로 야생 자연의 폭력성, 신들의 투쟁사로부터 세계 질서 체계의 변화를 반영하는 인간 존재의 운명적 서사를 길어 올리고, 우리는 창조적 파괴, 죽어야 다시 태어날 수 있음의 그 근엄한 우주적 질서, 자연의 본성으로부터 내 존재의 살림이란 무엇인지를 반성적으로 사유할 수 있게 되기도 한다. 대홍수 신화는 부조리와 타락으로 퇴행하는 인간에 대한 거듭남의 서사로서 동서를 막론하고 존재한다. 우리에게는 나무도령 이야기로 씻김, 재탄생의 신화가 전해져 온다고 한다.

 

그 내용은 제 욕심만 찾는 사람들로 가득한 세상에서 본래의 자연성을 지키고 있던 유일한 존재인 나무도령만 대홍수에 살아남도록 하였던 신성을 어기고 물에 휩쓸려 죽어가는 소년을 구해 주었으나, 바로 그 소년이 나무도령을 배반하고 자리를 차지하려는 재앙으로 씻음과 재창조가 완수되지 못한 세계가 계속 될 수밖에 없음을 이야기한다. 바로 지금의 세계는 선한 생명의 세계와 욕망과 배반의 세계가 공존하고 있는 세상이라는 것이다. 우리 안에는, 우리들의 세계는 이 둘이 공존하는 것이라는 가르침일 것이다.

 

나는 지금 어떤 삶을 살아가고 있는 존재일까? 그리고 지금 우리들은 어떤 세계, 혹여 대홍수의 물결에 접어든 세계를 살고 있는 것은 아닌가를 반성해야 하는 것은 아닐까? 어쩌면 바로 지금, 우리는 깊은 침잠과 재탄생의 시간을 가져야 하는 것은 아닐까? 문명이란 이름의 광기, 이 방주, 혹은 열차는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일까? 심란한 시대다. 이처럼 우리는 매양 나는 대체 누구인가를 묻는 존재다. 왜 여기에 있는 거지? 대체 내 앞에 길은 있는 건가? 라는 물음이 그치지 않는다. 황막한 세계에 속절없이 휘둘리는 나는 이 부유가 근심스럽기 때문일 것이다. 존재의 뿌리를 묻는 신화를 원형적 신화라 부른다.

 

<원천강 본물이>라는 신화가 있다. 산 사람은 갈 수 없는 본원적 세계, 그 근원의 강이 원천강이다. 주인공 오늘이가 이 존재의 뿌리를 찾아서 원천강을 찾아가는 여정의 이야기다. 여정에서 만나는 무수한 존재들은 자신들이 처한 삶의 곡절에 대한 물음의 답변을 오늘이에게 부탁한다. 여의주를 세 개씩이나 입에 물었으나 용으로 승천하지 못하는 이무기에서부터 그저 책만 읽는 두 남녀 등등, 자기 자신을 돌아보지 못하는 존재의 우매함, 여의주는 입에 한 개면 족하다. 세 개가 필요 없는 것인데, 그 욕망의 무거움을 내재하고 있는 바로 자신인 여의주를 놓지 못하는 것이다. 스스로 빛나고 가벼워지기 위해서는 두 개의 여의주를 입에서 뱉어내야 하는 것, 꽃이 떨어져야 열매가 맺고 다시 새로운 꽃이 피어나는 그 단순한 자연의 이치를 우리는 망각하곤 한다. 가벼워지기. 오늘이가 만나는 존재들의 물음이 곧 존재에 대한 답이다. 우리에게 이러한 신화가 있다는 것을 말지 못했다. 새로운 앎이다.

 



영웅?, 세계에 결연히 맞서서 틀을 바꾸고자 한 예외적 인간들, 불굴의 투지와 도전을 통해 성취한 과업이 세상에 기여함으로써 집단의 존숭 대상이 될 때, 우리는 일컬어 영웅이라 부른다. 나는 이 적극적 힘과 용맹보다는 불굴의 투지와 도전성에 더욱 매료된다. 아마 코린토스의 왕이었던 시시포스가 지옥이라는 거칠고 험한 어둠의 세상에서 끊임없이 반복적으로 굴려 올리는 그 반복된 형벌을 수행함으로써 신적 질서에 도전하는, 세상의 부조리에 맞서 포기하지 않고 살아있음을 증명하는 그 맞섬이야말로 바로 영웅이라는 생각 때문이다.

 

나는 도망치고 싶었던 반복된 과업들에 그 얼마나 진저리를 쳤던지 모른다. 이제 그것이 형벌이 아님을 안다. 삶이란 본디 그런 것임을, 나아가 그것이 삶의 축복임을, 살아서 움직일 수 있음, 그 자체로 강복(降福)임을 이젠 안다. 노예적 삶이라 비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인간 삶의 양태의 그 다양성은 그리 간단히 재단 할 수 있는 것이 아닐 것이다.

 

영웅에 대한 신화 하나를 더 소개하련다. 북유럽 신화의 신이자 영웅인 오딘과 토르, 요즘 신세대가 열광하는 날 것으로 다가오는 그 야생적 면모의 주인공들이다. 망치 묠니르를 휘두르며 자연에 맞서는 길을 여는 존재. 우리에게 이 토르같은 신이 있다. 제주 작은 마을의 신이자 영웅인 궤네깃또, 대륙을 완벽하게 제압하고 제주 구좌읍 김녕마을의 신이 된 존재다. 너무 작은 곳의 신이라고? 신화의 사유 체계는 모든 곳이 세상의 중심이다. 그에게는 바로 그곳이 우주의 중심이었을 뿐이다. 자연에 맞서는 것은 고난의 여정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새로운 길을 위해 때론 맞서 싸워 이겨내야 한다. 우리의 신화를 발견케 하는 이 책의 미덕에 자꾸 감사하는 마음이다. 아마 더 깊은 독서로, 새로운 앎의 세계로 나가는 초석이 될 것 같다.

 

 

이제 오늘의 우리들 행위를 빈번하게 자극하는 어휘, ‘욕망에 대한 신화다. 나는 미노타우로스와 테세우스, 아리아드네가 열연하는 미궁(Labyrinthos)에서의 투쟁을 나의 서사로 품고 있다. 그래서 안개 낀 좁은 골목길의 베네치아를 사랑하는 지도 모르겠다. 크레타 섬의 왕 미노스의 아내 파시파에로 인해 야기된 사연 많은 신화다. 파시파에와 소의 교접 결과가 반인반수의 괴물 미노타우로스다. 즉 인간의 범람한 욕망이 만든 산물, 소유욕과 성욕, 지배욕이 합쳐진 욕망 덩어리다. 테세우스는 이 욕망을 제압하러 나선 존재다. 미노타우로스를 죽여 승리하지만 그는 조력자인 아리아드네의 손을 놓음으로써 자멸한다.

 

아리아드네의 실, 이성의 끈이자 사랑과 인간적 연결을 놓는 것, 즉 자기 안의 라비린토스를 소홀함으로써 무너지게 되는 비극적 신화다. 나는 이 신화에서 영웅과 이성과 타자와의 관계, 그리고 내 안의 선악의 이중성을 반성적으로 돌아보는 모범으로 재생해 보곤 한다. 길을 잃고 헤맬 때면 내가 망각하고 있는 것, 외면하거나 소홀히 하는 것은 무엇인지, 신화는 이렇듯 자기 안의 실제를 반추케 함으로써 내적 존재를 확장해 가는 길잡이, 혹은 치유의 서사가 되어준다.


이 책을 읽게 된다면 아마 저마다의 현실적 상황에 따라 더욱 시선이 가는 장을 마주하게 될 것이다. 지금 사랑하는 연인과의 애정에 고심하고 있을 수도 있으며, 미래의 갈래 길에 서서 삶의 운영을 고민하고 있을 수도 있으며, 삶과 죽음, 필연적으로 도래할 죽음에 대한 상념과의 연결성에 대한 사유에 빠져있을 수도 있다. 어쩌면 이 모든 현실적 고뇌를 새로운 거듭남으로 인도할 단서를 발견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독자들은 지면을 가득 채운 한국을 비롯한 동서양 신화들을 거닐며 자기만의 서사를 분명 발견해 낼 수 있을 것이다.

 

자기 안의 나와 싸워야 한다. 우리는 우리들 각자 고유한 서사를 지닌 존재자들이다. 하늘에 배반당하고 땅에 치여 휘청대기도 하고, 소유 욕망에 시달리며 더 큰 결여와 불화가 만든 문제에 부딪쳐 절망하고 있을 수도 있다. 또한 자신에게는 죽음이란 영원히 도래하지 않을 것처럼 오만과 폭력으로 점철된 삶을 살고 있을 수도 있으며, 나이를 먹었으나 내적으로는 어린아이인 자녀서사에 갇혀 유아적 퇴행의 삶으로 타인을 고통스럽게 하고 있는 존재일 수도 있다. 에로스는 황금 화살과 납 화살 두 개를 지니고 있다. 사랑과 사랑의 거부, 생명력과 스러지는 생명을 상징하는 삶과 죽음의 이중주’, 그는 곧 죽음의 상징 타나토스이기도 하다. 이처럼 우리는 결코 선한 존재도 악한 존재이기만 한 것이 아니다. 에로스가 선을 넘어 폭주하면 부지불식간에 타나토스로 탈바꿈하여 공격적이고 공허로 그득한 존재로 뒤바뀌기 일쑤인 것이 우리들이다


책은 한편으로는 황당하기 그지없고, 다른 한편으론 지엄하고 숭고하기 이를 데 없는 신화에 친근하게 다가가서 자기만의 서사를 발견하게 이끈다. 세계의 신화를 거울삼아 자기서사의 속성과 좌표를 살펴보고 나아갈 방향과 목표를 찾아보고자 하는 이들, 내 안의 나를 찾고자 하는 이들에게 이 저술은 분명 나를 만나고 그 길을 이끌어 줄 것이다. 모처럼 이 책에 감히 추천한다는 문구를 남기고 싶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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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네치아의 겨울빛
조지프 브로드스키 지음, 이경아 옮김 / 뮤진트리 / 202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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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러시아 시인이 한 도시에 대해 우아한 찬가를 쓸 수 있도록 신적 속성이 자본의 무참한 탐욕에 의해 변용되지 않고 양태들을 제약토록 한 도시의 가라앉음이라는 예견된 재앙에 감사한다. 매 순간 해수면 아래로 조금씩 잠기는 그 근심이 어쩌면 내밀한 성소(聖所)보다 더 시간을 초월한 곳처럼 느껴지게 하는 베네치아의 물과 빛, 무수한 석상과 부조들, 안개 낀 좁은 골목길과 수면 위를 유영하는 곤돌라, 비논리적 욕망의 도시를 오늘에도 노래할 수 있게 되었으니 말이다.


 


이 시적 정취 그득한 에세이는 베네치아의 시각적 이미지로 가득하다. 눈이 제일 먼저 인식하는 도시의 외면이 발산하는 이야기는 남들의 시선에 노출될 운명이라는 사실을 아는 도시라는 선언처럼 자기 존재가 품고 있는 무한한 반영에 담긴 이야기를 스스로 쏟아낸다. 17년간 겨울이면 찾아간 베네치아에 첫 걸음을 내딛던 이방인의 인상부터 시작되는 글은 안내자로 만난 여인의 돌아가는 발길조차 화려한 문장으로 써 내려간다. 나의 아리아드네는 고가의 향수로 만든 향기로운 실을 길게 늘어뜨린 채 사라졌다.”.

 

아마 그녀의 향기가 베네치아의 미로같은 좁은 골목길에서 길을 잃지 않도록 돕는 그 유명한 실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었던 모양이다. 그러나 이 몽상은 그녀의 건축가 남편에 의해 끊어졌으니, 베네치아에서의 그의 걸음은 오히려 자유로워졌을 것이다. 물의 도시, 거울이 도처에서 반짝이며 존재함으로써 모든 것을 반영하는, 눈이 말 그대로 헤엄을 치는 도시이니 가히 시각의 도시라 할 만하다. 이 시각성, 반영은 우리의 콤플렉스와 불안을 부채질하고, 사람들은 자신들을 에워싼 아름다움에 뒤떨어지지 않으려 그 어느 곳에서도 볼 수 없는 화려함으로 치장한다. 시인은 2주 만 살면 아마 재산이 거덜 날 것이라고 너스레를 떨기도 한다.

 

이것은 도시를 구성하는 시각적 대상들인 대리석 레이스들, 상감 장식들, 기둥머리들,...소조물들,...케루빔들, 여인상 기둥들, 벽공들, 고딕과 무어 양식이 뒤섞인 창문들....”에 이르기까지 인간의 허영을 부추긴다. 특히 겨울의 베네치아를 묘사하는 문장은 무한한 신적 속성을 보는 듯한 몽상에 빠져들게 하고, 시간을 잊은 도시의 아름다움에 매료되게 한다.


일요일이면 헤아릴 수 없는 종소리에 눈을 뜨게 된다. 흡사 면 커튼 뒤 

진주빛 영롱한회색하늘에 뜬 은쟁반 위에서 커다란 도자기 세트가 진동을 

하는 것 같다. ... 창문을 활짝 열어젖히면 .... 커피 향기와 기도 소리인,

진주가 가득 맺힌 실안개가 바깥에서 곧장 밀려들어온다.      -40

 

이렇게 도시에 의해 생겨난 자기 망각의 시간을 지냐다보면 시인은 불현 듯 수잔 손택과 동행한 베네치아에서의 한 일화로 이끌며, 바이올리니스트 올가 럿지와의 한담을 통해 그녀의 연인이었던 시인 에즈라 파운드의 윤리적 변론을 듣게 한다. 파시스트의 선전자였으며 반()유대주의자였던 바람둥이를 변호하는 쓰레기 같은 시간에 대해서. 아마 에즈라 파운드의 ‘, 캔토스베네치아 빛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던 모양일 것이다.

 

이 불현듯한 침입의 글이 인간 양태(樣態)의 별난 현상을 생각나게 하여 짜증스럽기는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시인은 도시 베네치아의 어디에서나 발견하게 되는 바실리스크, 스핑크스, 케르베루스, 미노타우르스. 켄타우루스, 키메라, 우리 종에 남아있는 진화의 유전적 기억을 보여주는 신화의 자취들을 열거하며, 물에서 튀어나온 이 도시, 바로 이곳에 부조와 석상으로 수많이 존재하는 이유, 곧 우리네 자화상을 드러내 보여주는 도시임을 입증하려 한다.

 

나는 결연하게 시인의 말에 동의하며, 길을 잃고 헤매기 십상인 안개 낀 베네치아의 골목길이 바로 다이달로스의 천재적 두뇌의 소산인 미궁(迷宮)처럼 여겨지고, 인간의 원형적 이야기를 품고 있는 신화, 곧 인간의 존재론적 의미를 그대로 품고 있는 도시라는 증거를 더하고 싶어진다.

 

아마 망자의 섬인 산미켈레 성당으로 운하를 미끄러져 가는 곤돌라로부터 유독 에로틱한 감상을 나열하는 시인의 문장에서 나는 토마스 만의 소설 베네치아에서의 죽음의 한 문장과의 유사성을 발견한다. 발라드가 유행하던 시절부터 하나도 변치 않고 그대로 전해 내려온 이 이상한 배는 ... 그냥 관처럼 보일 정도로 색깔이 너무도 특이하게 까맣다. 그것은 ...죽음 그 자체, 음울한 장례식을 생각나게해주는 타나토스적 아름다움을 느끼게 한다 쓰고 있다. 아마 고르게 옻칠을 한 듯한 검은 수면과 완벽하게 합을 이루는 곤돌라의 에로티시즘은 야릇한 중성적 갈망을 상상하게 하게 하는 까닭일 것이다.

 

산자카리아의 프론토네 거리, 비발디가 세례 받았음을 적은 간판을 내건 분홍색 벽돌 교회, 라구나의 수면 위를 뽐내며 걸어가는 태양 빛, 벨리니의 아름다운 그림이 있는 마돈나 델 오르토대성당..., 수로처럼 거울 같은 표면이 된 보도를 자박거리며 걷는 밤의 산책과 닫힌 가게의 위에서 불을 밝히는 간판들의 자기애적 행위를 상상하다보면 이 도시가 왜 수많은 문학작품의 배경이 되고, 밀애와 이별이라는 양 극단의 장소로 적합한 장소인지를 수긍하게 된다.

 

태고의 분위기를 간직한 물과 빛의 낙원, 신화를 간직한 이 도시의 매력을 만끽한 시간이다. 아름다움이 무엇인지 알기 위해서라도 한 번은 체험할 장소일 것만 같다. 소비에트 전체주의에 저항하며 강제노동과 감옥을 드나들던 저항시인, 1987년 노벨문학상 수상자이기도 한 시인의 시간과 이미지 속을 유영하게 된 것은 순전히 막상스 페르민알프레드 뮈세가 쓴 작품의 배경 덕분이다. 어쩌면 이들의 작품으로 베네치아에 관한 짧은 문학적 소품 하나가 쓰여 질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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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바이올린 색채 3부작
막상스 페르민 지음, 임선기 옮김 / 난다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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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 작품을 읽으며 바이올린의 선율이 들려오는 안개 낀 물의 도시 베네치아와, 바이올린의 장인 에라스무스의 주검을 실은 운하에 떠 있는 특이하게 검은 곤돌라의 타나토스적 아름다움으로부터 누군가의 마지막 여행을 음울하게 상상한다. 명치끝을 아리게 하는 슬픔, 그러나 마치 무언가를 알아차린 것만 같은 기쁨이 뒤 섞인 그런 정념에 휩싸인다. 


새벽안개가 미로같은 이 도시의 골목을 뒤덮고 섞어 놓을 때, 가장 놀랍고도 이상한 도시에서 길을 잃고 헤매는 나는 수면에 반짝이는 베네치아의 빛을 발견한 느낌에 흠칫 놀라기도 한다. 음악을 자신의 삶으로 옮기려는 지고한 예술적 지향에 온 존재를 내맡긴 두 천재의 이야기에 깃들어 있는 세상의 모든 고통들과 행복, 그리고 기쁨의 외침들에 귀 기울이며, 진정한 자유와 자기완성의 기쁨이란 무엇인가를, 자아의 감옥을 초극하는 주체적 체험으로서의 존재 양식에 대해서 생각해 본다.

 

단 하나의 존재 이유만을 갖게 된, 자신의 생인 영혼을 음악으로 옮기는 것, 그것은 음악을 삶으로 옮기는 것이라는 바이올린 연주자 요하네스, 바이올린 제작 장인 에라스무스의 삶의 이야기는 사랑과 예술의 지고함, 시간의 인내를, 오랜 비극으로부터의 깨어남으로 어느덧 나를 인도하는 것만 같다.

 

장인(匠人) 에라스무스의 산마르코 광장(San Marco) 지척의 모세 거리의 한 저택벽에 걸린 검은 바이올린, 그가 사랑에 빠졌던 페렌치 공작의 딸 카를라의 가장 순수하고 가장 신적인 목소리를, 그녀만을 위해, 그녀의 목소리를 소유하기 위해 혼신의 노력을 기울여 제작한 흑단으로 제작한 바이올린은 내면에 의해 보증되는 자기창조로서의 존재양식과 자극의 무한 욕구에 종속된 소유양식의 폭력성을 절망적 대비를 통해 사랑과 예술의 존재 방식이란 무엇인지, 우리네가 쫓는 것의 실체를 드러내 보여주는 듯하다.

 


비바람이 불고 천둥 번개가 치는 날, 그는 완성된 바이올린을 시험하기로 결심한다. 카를라와 모든 것이 똑 같은 검은 바이올린의 울림이 확인되는 날, 카를라는 생사의 기로에서 싸우고 있었다. 아프기 시작한 그 흉한 밤에 카를라는 목소리를 잃고 끝내 사망한다. 사랑을 소유하려는 것, 음악을 물질에 가두려 한 행위가 사랑하는 여인을 영원히 잃고 자신마저 파괴하는 행위가 될 줄을 그는 알지 못했다.

 

단 한 번의 연주 뒤에 벽에 걸린 채 다시는 연주되지 않은 검은 바이올린, 에라스무스는 그 비극적 비밀과 함께 요하네스가 지켜보는 가운데 영면한다. 예술과 사랑, 아니 삶의 그 어떤 대상이든지 그 본성에 일치하는 행위의 일체성이라는 존재 지향성, 공존의 즐김을 아는 것이 우리에게는 꽤나 어려운 이해가 되었음을 발견토록 하려는 것만 같다. 장례식에서 돌아와 분노에 휩싸여 바이올린을 땅에 내팽겨치는 요하네스의 행위와 그때 땅에 닿으며 깨지는 악기에서 여자의 비명소리가 들리는 것은 어쩌면 소유로부터의 해방, 존재 자체로의 돌아감의 외침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스친다.

 

요하네스는 에라스무스와 검은 바이올린의 이야기를 애써 지우려 하며, 또한 천상에 들려온 듯 했던 여인의 목소리, 그가 작곡하려 했던 오페라의 목소리를 담아내기 위해 그는 31년이 결렸다. 마침내 완성한 음표들이 적힌 노트를 벽난로에 던짐으로써, 일생의 작품이 순식간에 사라지는 것을 바라보며 그는 비로소 자기 삶의 이야기와 결별 할 수 있게 된다. 그는 인생에서 처음으로, 자신이 행복하다고 생각했다.”. 허구적 혼합물과 뒤엉킨 자아로부터 벗어남으로써.

 

우리가 사는 지금의 세계는 자신을 확인하는 경험적 토대가 물질, 대상의 소유라고, 자신임을 확인하는 방법은 오직 소유라고 말한다. 그러하다보니 지식, 예술과 장인의 창작물조차 소유 양식이 자리 잡고, 자기실현의 장애물이 되어 아집과 소외와 굴종의 세계에서 허우적거리게 만든다. 그래서 세상에는 죽음과 폭력, 비극만이 휘몰아친다.

 

단 한 번 주어지는 인생이란 무대에서 펼쳐지는 생()의 의미를 무수한 성당들이 아침 삼종기도의 종을 울리고, 안개가 조금씩 피어오르는 사이로 아침 태양의 빛이 튀어 오르는 바다의 여왕인 도시, 베네치아의 신비로움과 함께 읽어나가는 두 천재의 이야기에 취한 읽기였다. 삶의 행복이란 진정 무엇인지, 그 고즈넉한 사랑과 예술의 이야기에 침잠케 하는 시적 언어들에 휘감기는 시간을 조금은 오래 붙잡고 싶어진다왠지 이 감응에서 깨어나기 싫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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