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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언어를 위해서 쓴다 - 융합과 횡단의 글쓰기 ㅣ 정희진의 글쓰기 5
정희진 지음 / 교양인 / 2022년 7월
평점 :
“융합은 아는 것을 버릴 수 있는 용기와 다른 입장에 대한 탐구력이다.” -155쪽
이 사회에 차고 넘치는 말들이 정작 소통을 방해하고 사회갈등의 주 원인이 되는 까닭에 대한 규명이며, 이를 넘어서기 위한 앎에 대한 지향을 역설하는 신랄한 비평 에세이다. 그것을 저자는 ‘융합’이라 표현하며, “지식의 필요성과 쓸모와 가치에 관한 질문과 논쟁하는 일(51쪽)”, “인간 스스로 자신을 아는 과정(110쪽)”이며, “의미의 도덕을 추구하는 마음가짐(16쪽)”이라 정의한다.
우리는 어떤 언어로 말하고 있는가? 우리가 극복해야 할 인간들의 언어로 우리의 현실을 말할 수 있는가는 중요한 물음이다. 또한 내가 알고 있는 것은 극히 부분적이라는 것을 인식하지 못하는 것, 즉 아는 것만을 보고, 모든 것을 하나의 잣대로만 평정하려는 무지의 폭력을 휘두르는 것에 대한 판단정지의 용기에 대한 물음이기도 하다.
세상을 보는 시각이 마치 하나라는 양 “이 사회를 거대한 돌처럼 변화없는 단일한 조직(160쪽)”으로 인식하는 권력화된 무지, 자신이 한 말의 의미를 모르면서 여론을 주도하고 지도자가 된 작금의 현실만큼 우리 공동체가 위험해졌다는 인식이 근접했던 적이 없다. 왜 이러한 상황이 발생했을까? 저자는 이 파국의 시대를 재촉한 요인의 하나로 한국 사회의 낮은 문해력을 설명하고 있으며, 그 둘째는 지배자, 강자, 착취자의 언어인 문화권력, 즉 보편성이라는 언어의 폭력성을 지적하고 있다.
사실 책에 열거된 세계 다르기 보기를 위한 쓰기에는 자유, 표절, 이성, 이분법, 미국주의, 환원주의, 구조적 모순 등 무수한 문제적 사유의 물음들이 담겨있지만, 어쩌면 문해력과 보편성이라는 두 주제어의 범주로 설명가능 할 것이다. 물론 그 총체적 단일 언어는 ‘융합’ 혹은 ‘횡단의 정치’로 수렴하겠지만 말이다. 결국 이 모든 문제의식의 출발은 앎의 문제이다.
“자신의 위치를 모르는 앎은 무의미하거나 대개는 사회악이다.” - 59쪽
고작 편협하게 알고 있다고 여기는 것들의 관념의 변죽만 울려대며, 실상은 아는 것이 없는 까닭에 모든 문제 제기가 돌고 돌아 좌빨, 페미니스트, 틀딱 같은 차별과 혐오의 언어로 귀결된다. 이렇게 세상의 모든 현상이 하나의 출구로 빠지는 ‘깔때기 이론’을 환원주의라 한다. 이것에는 세상을 보는 시각이 하나 밖에 없다는 편협성이 놓여있으며, 마치 그것이 보편성이라는 진리의식을 갖는다고 여기는 우매한 폭력성 또한 똬리를 틀고 있다. 지금 우리의 공동체를 불안한 위험에 빠뜨리고 있는 권력이 말하는 ‘보편적 가치’란 이 깔때기 주의의 다른 이름이다.
지금의 권력은 스스로 자신을 아는 과정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다. 대체 어떤 보편적 가치를 수호하겠다는 것인가? 부자 감세의 보편성? 공기업 민영화의 보편성? 사회안전망 해체의 보편성? 이처럼 보편적 가치의 대상도 문제지만 오늘의 세계는 불변하는 보편적 가치는 존재치 않는다. 기회의 평등? 이것은 불평등 앞에서는 아무런 의미도 없는 헛소리에 불과하다. 보편적 가치를 적용할 수 있는 조건이 사람이 처해있는 위치마다 모두 다르기 때문이다. 무수한 차별의 조건들이 현재하는 데, 보편적 가치란 그야말로 거짓의 언어, 무지한 대중 속이기의 잡설에 지나지 않는다. 게다가 ‘자유’를 부르짖기까지 하는데, 이건 정말 위험하기 그지없는 무서운 말이다.
자유란 극복되어야 할 대상이 무엇인가에 따라 달라지는 개념어이다. 경쟁사회, 소음과 먼지, 타인의 시선, 신분차별, 신자유주의..., 무엇으로부터의 자유인가에 따라 그 의미가 달라지는 말이다. 자유는 결코 그냥 주어진 적이 없다. “모두 투쟁으로 쟁취해 얻어야 하는 것이기에 많은 사람들이 힘들어서 그냥 부자유 상태로 산다.(28쪽)” 그런데 자유, 자유를 외치는 윤정권의 자유는 개인적 차원의 자유이다. ‘내 뜻대로, 내 맘대로’의 자유이기에 소름끼치는 것이다. 그런 자유는 혼자 있을 때 맘대로 하면 된다. 공동체에서 자신의 이런 자유를 행사하려하면 타인을 다치게 한다. 결국 이 자의 자유는 타인이라는 국민 대중의 존재를 무시하고 자기 생각대로 하겠다는 것의 표현일 뿐이다. 조물주라도 된 듯 생각대로 자유를 행사하게되면 그 삶은 오래지 않아 멸망하게 된다.
왜 이런 무지와 무능력이 이 사회를 지배하는 권력이 되었을까? 저자는 분단(分斷)체제를 기반으로 하는 이분법이 한국 사회를 장악하고 있음을 제시하고 있다. 이 이분법이 한국사회의 낮은 문해력을 설명할 수 있다는 것이다. 반북, 반미, 친일 ... “이러한 언설을 생명줄로 삼는 반국가적 사회에서 어떻게 문해력을 논하겠는가?(95쪽)”라는 한 문장이면 그 설명으로 족할 것이다. “앎의 궁극적 목적이란 배제없는 온전함(108쪽)”이다. 경계와 선입견 없이 모든 것을 수용하는 자유로운 가능성의 상태, 적어도 상상력이라도 갖추는 것이다.
문해력이 낮다는 말은 실제로 문해력이 낮다는 것과, 이해하지 않겠다는 맹목의 의미를 갖는다. 낮은 문해력은 소통에 장애를 일으킴으로써 사회갈등의 주 원인이 된다. 인터넷 검색창을 통해 정보를 얻는 것은 이미 아는 것의 구체화이지 새로운 정보의 획득이 아니다. 모르는 것은 검색하지 못한다. 이 말은 자기 옹졸한 한 움큼의 지식을 굳게 하는, 즉 변화하지 않겠다는 것 이외에는 아무런 지식도 품지 못한다. 더구나 긴 글이나 조금만 익숙지 않은 문장에도 스트레스를 받으며, 자기 무지는 외면하기 일쑤다. “문해력은 자신의 가치관과 무지에 대한 자기 인식의 문제”라는 지적처럼, 나는 모른다는 겸허한 앎의 태도는 우리의 사회를 위해 중대하고도 또 중요한 출발점이다.
내 자신이 무지하다고 가정하는 것은 정말 굉장히 어려운 노력을 요구한다. 공부가 중노동인 이유이다. 사유는 고통스럽고 외로운 노동이다. 이러하다보니 많은 사람들은 자신이 아는 범위 안에서 편협하고 속된 믿음을 만들어낸다. 일례로 1934년 한 일간지에 연재되던 일제 강점기 식민지민의 침해된 권리를 말하던 이상의 詩 「오감도(烏瞰圖)」가 무슨 말인지 모를 시의 게재를 중단하라고 항의하던 독자들로 인해 연재를 이어가지 못했다는 것이다. 역사는 이렇듯 독자의 수준이 만들어간다. 무지가 역사를 만들어내는 이 폭력성이 결국 자신들을 신음하게 하는 것임을 알지 못하는 이 낮은 문해력이 문제인 이유이다.
낮은 문해력은 궁극적으로 좋은 지식 생산의 토양을 파괴한다. 지식 생산을 궤멸시키는 요인에는 표절도 한 몫하고 있는데, 마치 단순한 사적 윤리의 문제처럼 치부하고 마는 만연한 도덕 불감증이다. 표절은 윤리문제가 아니라 법적 문제로 심각하게 다루어야 할 문제라는 것이다. 자본주의 사회의 공정거래를 해치는 가장 부정의한 도적질이라는 점이다.
표절로 받은 학위로 돈벌고 고용의 수혜를 입는 것이라면 이보다 악질적 행위가 있을 수 있는가의 물음이다. 보석 훔치는 것보다 훨씬 쉬운, 그냥 아무것도 안 해도 되는 표절이라는 이 절도에 대해 이 사회는 왜 이리 무감하며, 표절자의 당당함은 어찌 가능한 것일까? 이 표절자가 버젓이 지식인 행사를 하다보니 이 사회의 지식 생산은 바닥을 해매고 천박함이 오히려 권력을 행사하며 양양거린다. 자신이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을 인지하는 방법은 쓰기와 과학적 실험이라는 방법 외에는 별 개 없다. 그래서 쓰기는 앎의 중요한 출발점이다. 쓰지 않고 베끼고 복사하는 세계에 진정한 지식은 결코 생산되지 않기 때문이다.
저자는 이 사회의 여론을 온통 지배했던 세 가지 사건을 예시하고 있는데, 저마다 다른 동기와 유형을 지닌 사건이다. 그런데 이 사회는 이들 모두에 동일한 결론을 내린다. 다른 사건인데 결론이 같다는 것은 지식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것이고, 이는 곧 하나의 잣대로 모든 것을 재단하려는 폭력의 다름 아니다. 사회변화, 차별받고 배제되는 약자들은 새로운 언어로, 지식의 재해석을 통해, 나아가 기존의 지식을 넘어 새로운 앎을 향한 경계넘기를 시도해야 한다. 그 방법론이 곧 새로운 지식 생산이 가능한 자기 무지의 고통스런 인식이다.
안다고 여기는 순간 그 어떤 지식 생산의 영역에도 들어가지 못하게 된다. 이렇게 지식이 생산되지 않을 경우 그 사회적 고통은 오롯이 현실에 대처할 수 없는 약자들의 몫이다. 다른 시각에서 볼 수 있고, 제시된 언어의 개념 내부에 도사린 차이를 드러내고 파악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하기 위해서 우리는 앎을 위해 부단히 공부를 하여야 한다. 그 공부가 곧 문제의식이요, 융합이다. 역사는 공동체의 안목을 넘어서지 못한다. 그 결과는 바로 그 공동체의 안목의 결과일 뿐이다.
이 책의 ‘새로운 언어를 위해 쓴다’는 표제는 바로 이러한 앎, 융합의 출발을 함의한다. 이 책은 세상을 보는 열린 시각을 지니기 위한 그 지향의 제시로 가득하다. 지배이데올로기와 계급을 끊임없이 재생산하여 기득권을 항구화하려는 주류의 언어를 탈피하여 진정한 시민의 언어를 재창조하기 위한, 또한 우리네 좁아터진 앎에 훌륭한 채찍이 되어 줄 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