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트] 블론드 1~2 - 전2권
조이스 캐롤 오츠 지음, 엄일녀 옮김 / 복복서가 / 202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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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초적 시선이 지배하던 시대, 여성은 한낱 대중 욕망의 대상화된 상품이어야 하는 시대, 플래티넘 블론디로 탈색된 머리처럼 가공되어 소비될 수 있어야만 했던 한 여성의 삶이 쓸쓸하게 울려 퍼진다. 거장의 솜씨로 지펴낸 시니컬한 음성이 독자의 마음을 움켜쥐고 놓아주질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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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런 안전가옥 앤솔로지 9
최구실 외 지음 / 안전가옥 / 202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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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인간의 행위가 무릇 타자를 고통스럽게 하는 결과를 초래하는 것들로 가득 차 있다는 생각을 배제하지 못한다.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도 무심코 하는 발언이나 행동을 스스로 경계하고, 다치는 사람이 없도록 주의하려 할 것이다. 그런데 타자에 대한 무관심과 무지가 점차 이 세계를 점령하는 인상이 짙어지고 있는 듯 하기만 하다. 대체 버젓이 악행을 저지르는 자들은 어떤 존재인가? 빌런(villain;악당)을 제재로 하는 이 작품집을 손에 든 이유이다.

 

인간 뇌의 신경생리학적 구조에 기댄 샐리가 샐리를 만났을 때라는 작품부터 오늘 AI의 첨병역할로서 현실의 모든 물리적 세계를 재구성해 인간을 디지털 세계로 모델링한 세계로 급속하게 전환시키고 있는 메타버스의 윤리적 정치적 실체를 이야기하는 수정궁의 유령, 그리고 우상화된 연예인과 팬의 관계를 바라보는 우세계의 희망, 자연의 절대 지배자로 자임하는 인간의 오만과 편견을 우주 동화로 지펴낸 치킨 게임, 마지막으로 세계의 모든 타자들을 한낱 도구로 여기는 어느 투견업자의 패악질을 그리고 있는 송곳니까지, 이들 다섯 작품은 이 세계를 구성하고 있는 우리 인간의 적나라한 자화상일 것이다.

작품집의 첫 편에 앞서 서문에는 이런 문장이 있다. 기쁨과 슬픔이 함께 하듯, 선과 악도 공존하며 서로의 거울 역할을 한다며, 우리는 항상 정의로운 마음을 가져야만 하는 걸까요?”라며 인간 악()의 보편성을 당위시하고 있다. 물론 인간의 저 밑바닥에 침잠해있는 심연의 어두운 그림자를 부정하고 싶은 마음은 조금도 없다. 그러나 이러한 중립적 표현들로 인간의 악과 그릇됨을 정당화하거나 혹은 본질을 흐리멍텅하게 하여 도덕적 기회주의적 성향과 자기기만적 존재임을 합리화하려는 의도에는 저항감을 느끼게 된다.

 

인간들마다 어떤 도덕적 믿음을 하고 있는가는 그야말로 천차만별일 것이다. 그러함에도 인간을 자연의 대상과 다른 대상들과 구분해주는 의지, 즉 도덕적 공과에 대한 개념의 선험적 능력을 지녔다는 칸트의 지적처럼, 인간은 선하고 악한 것, 옳거나 그른 것 사이에서 선택할 수 있다. 만일 이를 부정하게 되면 어떠한 악이나 그릇됨에 대해 도덕적 비난을 가할 원천 자체가 사라지고 만다. 결국 인간에게 도덕성이라는 것 자체를 박탈하여 혼돈이 휩쓰는 무법천지의 세상이 바른 세계라고 주장하는 것과 다를 바 없게 된다.

 

빌런을 선의(善意)로 해석하는 이들에게 나는 강한 불쾌감을 갖는다. 이러저러한 상황과 배경의 불가피성이 한 인간을 악한으로 만들었으니 그 존재에게 도덕적 처단이 아니라 연민과 동정, 관용의 마음을 가져야 한다는 야릇한 논리를 내세우곤 한다. 더구나 이러한 이데올로기에는 이분법에 대한 강한 회의가 있는데, 정말 우리네 믿음에 중립적인 지대가 존재하는 가에 대해 나는 반감을 표시하게 된다. 이를테면 계급과 지배이데올로기를 인정하면서 계급투쟁을 부인할 수 없는 것과 같이 우리는 본디 당파적인 존재임을 부정하는 것은 위선이요 기만으로 여겨지는 것이다. 성선설과 성악설을 모두 인정하면서 선하기도 하고 악하기도 하다는 말은 사실 아무런 의미도 없는 하나마나 한 말에 불과하다. 도덕이란 인간 의지의 선택으로 발생한 결과에 대한 규범이다.

 

김구일 작가의 단편 송곳니는 가장 직접적이고 저열한 빌런을 등장시키고 있다. 외딴 산골 지역에 투견을 길러 투견도박으로 더러운 부를 쌓는 인간의 잔악성이 진동하는 썩은 내와 함께 작품 전반을 채우고 있다. ‘수기라는 어린 소녀는 투견 우리에서 학대받고 신음하는 개들을 풀어주고 보호하기위해 자신의 위험을 무릅쓰고, 악의 화신인 투견업자 서재형에 대항한다.

 

읽으면서 지역의 대표자로 선출되어 행세하는 현실의 한 인간을 떠올리게 된다. 분쟁있는 호텔을 사들여 은밀히 지하층에 도박장을 운영하며, 지상에서는 지역 유지행세를 하는 인간. 사람이라 보기 어려운 전형적인 악인이다. 자기 이익에 반하는 모든 타자는 폭력의 대상이며, 생명을 죽이는 것에 어떤 도덕적 의식조차 없다. 악을 선택한 인간, 아니 인간에 경멸을 표하기에 가장 적절한 모델인 존재로부터 작가는 성악설을 길어 올린다. 빌런은 단지 악한 존재이지 때론 선한 존재라는 말로 희석되는 그런 부류가 아니다. 내 도덕적 신념과 가장 가까운 작품으로 느껴졌기에 그만큼 깊은 인상을 남긴다.


 


이에 상응하는 이유있는 빌런, 즉 악행에 정당화를 부여하려는 존재를 부각시키는 최구실 작가의 샐리가 샐리를 만났을 때는 기억하고 싶은 것만 기억하는, 스트레스나 트라우마가 되어 정신을 고통에 빠뜨리는 기억으로 기능하는 뇌 세포만이 파괴되어 긍정적 신호만으로 삶을 살아가는 인물에 대한 기만을 주제로 하는 것 같다.

 

김샐리는 기억하고 싶은 것만 기억하는 변이 뇌세포를 가진 존재이고, 자신의 뇌세포를 연구하여, 트라우마로 고생하는 세상의 인간들에게 고통을 지우고 정상적 삶의 존재로 회복시키려는 기억소거협회연구책임자다. 여기에 옛 동창생인 최은수가 연구원으로 입사하지만 김샐리는 친구를 기억하지 못한다. 최은수는 미국 유학시절 김샐리의 신경과학의 발견을 읽게되고, 최샐리가 되어 트라우마 증폭세포의 기습적 증식이란 논문을 써낸다. 두 인물의 성격과 행위를 바라보며 독자는 영구적 행복만을 추구하는, 그리고 이타적 행동만을 하는 김샐리와 인간의 고통을 실감하며 사는 최샐리를 통해 인간다운 삶이란 진정 무엇인지를 생각게 된다.

 

샐리야..., 내 이름 기억나?” 김샐리는 최샐리의 물음에 고개를 내젖는다. 뻥 뚫린 기억, 쪼그라든 뇌의 어설픈 기억, 그 긍정의 기억만 하는 뇌, 매양 행복하기만 한 인간의 이타적 삶이란 것이 친구도 알아보지 못하는 것이라면 과연 그것이 진정한 기쁨이고 행복이겠는가라는 물음일 것이다. 이것은 이에 저항하는 빌런 최샐리의 행위를 정당화하는 논리로 작동하며 도덕적 회색지대를 드러내려한다. 이러한 경우 두 인물 중 진짜 빌런은 누구인가를 먼저 물어야 한다.

 

만일 행복 만능의 이타적 존재의 맹점을 지적하는 것이라면, 그리고 이러한 맹점이 지닌 인간적 존엄성의 결여를 지적하는 것이라면 두 인 물 모두 빌런이라 할 도리밖에 없다. 결국 빌런에 대한 연민, 그 동기의 도덕성을 가지고 논의하여야 하는 까닭이다. 즉 동기가 애초에 그릇된 것이라면 모두 부도덕하다는 칸트의 도덕논리에 이른다. 결과주의냐, 동기주의냐는 여전히 고달픈 인간 의식의 한계를 지적하는 것 이상이 아닐 것이다. 우리는 항상 이러한 딜레마를 상정하고 도덕적 상대성을 주장하지만 도덕은 시대가 지니는 상황적 의식을 배제하지 못한다. 모든 시대와 장소에 한결같은 진리란 없다. 이러한 관점에서 빌런을 정의하려는, 도덕논리는 사실 아무런 의미도 지니지 못한다. 단지 정서적 갈등의 문제일 뿐인 것 아닐까?

 

김상원 작가의 수정궁의 유령은 희망찬 미래 세계라는 메타버스, 가상의 공간 속 인간들의 분신이야말로 정신’, 그 자체인 세계를 추구하게 된다며, 그 선점을 선전하는 디지털 세계에 잠재된 문제들을 수면위로 부상시킨다. 한 여성이 고글을 쓴 채 미친 듯 춤을 추면 사지와 몸통과 머리가 뒤틀린 채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하고 이를 추적하는 추리물의 형식을 띠고 있다. 실재하는 인간은 본체로 불리고, 가상공간의 아바타는 실재처럼 설명된다.

 

본체가 사망한 아바타의 아이템이나 리플레이 영상까지 상업적 자산으로 거래되는 오직 경제적 효율만 존재하는 비정한 공간이다. 아바타와 실존하는 인간을 살해하는, 즉 가상의 이미지가 본체를 살해하는 괴물화된 디지털 세계를 그리고 있다. 메타버스가 지향하는 세계를 마치 유토피아처럼, 전통적 지식들의 세계를 전복하며 인간 욕망이 평등화된 세계를 주장하지만 실제, 현실이란 소수의 플랫폼 소유주와 돈을 추구하는 정보기술 독점자들의 추한 세계의 디지털화로의 이전일 뿐임을 회의하지 않을 수 없게 한다. 유머와 재치넘치는 문장들과 메타버스 세계에 넘쳐나는 쾌락과 도덕적 부패의 근원을 탐색하는 흥미로운 작품이다.

 

김달리 작가의 우세계는 희망과 엄성용 작가의 치킨 게임 또한 빌런이란 제재에 부합하고 있지만 서사의 축을 이루는 제재는 새로운 지평을 여는 데에는 다소 아쉬움이 남는다. 우세계...는 남자 영화배우 스타의 팬카페 구성원인 여성들의 시기와 질투, 소유 욕망의 진부한 다툼과 이를 이용하는 배우의 탐욕적 이해의 놀이에 대한 비극적 전경이다. 치킨 게임또한 흔한 자연의 지배자로 우뚝 선 인간의 오만과 편견을 유전자 조작으로 탄생한 돌연변이로서 인간지능을 초월하는 슈퍼 닭을 등장시킴으로써 인간 호모데우스를 농락한다.

 

사실 인간이라는 종 전체를 대상으로 하는 인류를 빌런이라 칭함으로써 빌런이란 의미를 지워버린다. 인간의 도덕적 경계를 범주화하는 용어가 대상의 전체에 미치면 실제로는 아무 뜻도 없는 말이 되어버리고 만다. 이야기를 끌어가는 힘은 돋보인다. 즉 뛰어난 서사의 구성적 역량으로 페이지를 넘기게 하는 재미만큼은 독보적이다. 그럼에도 너무 투명해서 마치 킬링타임용 영화 한 편을 본 인상과 유사한 기분이다. 아무튼 독특한 표제를 한 이 작품집은 요즘 범람하는 회색지대의 인간들을 다시금 생각해보는 계기가 되어 준 것은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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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바꾼 엉뚱한 세금 이야기 - 세금은 인류의 역사를 어떻게 바꾸어 왔는가?
오무라 오지로 지음, 김지혜 옮김 / 리드리드출판(한국능률협회)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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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일본 쇠퇴의 직접적 추진 가속기가 된 세계에서 가장 악질적인 소비세라는 간접세의 도입으로 신음하는 자국 국민들에게 제발 정신 차리라고, 적극적인 세금 정책 참여와 감시를 하라고, 일본 전()국세청 조사관 출신의 저자가 흥미를 통해 세금이 국민의 생활을 어떻게 조작하는지 알려주려는 저작이라 할 수 있다. 세금제도와 정책은 나라를 가리지 않는 국민 생활에 직결되는 공통의 관심사이며 주제이다. 세계에는 시대와 장소(지역, 국가)를 불문하고 정말 엉뚱하고도 탐욕스런 세금들이 즐비하다. 이들 모두는 권력자, 사회 상층 기득권자들의 이익을 위해 만들어진 것이지 진정 국민의 삶과 국가경제를 진작시키기 위한 것들이 거의 없다는 것이다.

 

매양 반복되는 논란이지만 한국 사회 또한 권력만 잡으면 자기들의 배를 불리는 정책을 밀어 붙이려는 양아치 무리들로 민생은 무시되어 피폐함에 내몰리곤 한다. 작금에도 소수의 초()대기업들을 위한 감세 정책, 공기업 자산의 무차별적 매각, 시민대표 민간단체들의 지원중단 및 해체지시, 각종 복지, 국방 예산 감액 등과 함께 존재치 않던 상속 재산 취득가액에 대한 세금 부과라는 다분히 역진적(逆進稅 : 낮은 수입자가 더 많은 비율의 세금을 부담하는 세제)이고 악질적 세제의 도입을 시도하기 까지 하고 있다.

 

이러한 세제 정책들은 오직 부자 감세로 기득권자의 재산을 불리고, 이로 인해 부족해진 세수는 물론 대국민 선전용 과시적 행정을 위한 세수 증대를 위해 역진적 세제 정책을 무차별적으로 펼친다. 이명박 정권도 들어서자마자 대기업 감면과 급여생활자 연말정산 감면 항목들을 무더기로 축소 폐지하여 부족 세원을 서민의 얄팍한 소득으로 충원하는 파렴치를 서슴지 않았다. 이들 정치배들에게 맡겨두면 국민의 삶은 무한 나락으로 곤두박질치고 말 것이다. 국민들이 세금 정책을 눈을 부릅뜨고 지켜보지 않는다면 그 피해는 오직 국민들, 약자들의 몫으로 돌아갈 뿐이다.

 

이렇듯 세금 징수 정책들은 기득권 집단의 세력을 키워 권력을 공고화하여 지배력을 항구화하기 위한 수단으로 활용되는 것은 역사적이고 현재적이다. 어쩌면 세제는 권력자와 다수 국민사이의 끝없는 투쟁의 본질을 보여주는 가장 적나라한 보기 일 것이다. 프랑스 혁명의 방아쇠가 된 타이유(taille)(일명 농민세)’는 성직자, 귀족은 면제되고 오직 일반 평민과 농민에게 부과되던 악명 높은 세금이었다. 당시 삼부회(성직자, 귀족, 평민대표)에서 평민대표는 이 타이유세의 감면을 촉구했으나 귀족과 성직자는 회피, 반대했다. 이것이 평민의 대대적인 봉기를 촉발했으며, 세계사를 바꾼 혁명으로 이어졌다. 사용하는 농기구에까지 세금을 부과하는 이 파렴치한 세금으로 국민들의 삶은 그야말로 처참한 지경으로 내몰렸으나 지배층은 이를 외면하고 오늘 한국의 총리가 말하듯이 지배자가 배부르면 평민에게도 그 이익의 일부분이 돌아갈 것이라는 궤변을 논리로 삼았다. 역사 이래 부자의 이익이 빈자에게 이익이 된 사례가 없다는 것은 명망 있는 경제학자들의 한결같은 목소리다.

 

이보다 더 야만적이고 자신들의 탐욕을 숨기기 않은 적나라한 세금들은 모두 나열할 수 없을 만큼 비일비재하다. 소금세는 인간 모두가 소금을 섭취해야 하며, 그렇다고 부자는 더 많이 먹고 가난한자는 덜 먹는 그런 것이 아니다. 결국 이러한 세금은 더러운 부의 축재로 자기 세력을 키우는 목적을 가진다. 실제로 소금세를 부과하던 고대의 나라들은 소금세를 회피하기 위한 밀매업자들을 양산하는 정책의 다름 아니었다는 것이다. 즉 밀매업자가 곧 권력자, 지배자가 되거나 지배자였다는 점이다.

 




영국 엘리자베스 여왕은 더욱 직접적이다. 적국 선박을 노획, 약탈하는 사략선을 허가해주고 그 노획품의 5분의 1을 받아 챙기는 해적세를 만들어 영국 왕실의 재원을 축적했음은 세금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가장 극명하게 밝혀준다. 아마 영국이야말로 파렴치한 세금의 천국이었던 모양이다. 1662난로세를 부과하여 가난한 이들에게 막대한 부담을 안기는가하면, 1696년 도입되어 1871년까지 유지되었던 창문세(거주하는 집의 창문 수에 따라 세금 부과)는 그야말로 악독한 역진세의 대표라 할 수 있다.

 

애덤 스미스는 국부론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 도시 비싼 집에 사는 사람보다 지방의 싼 집에 사는 사람이 더 많은 세금을 내야만하니 불공평하다.” 이러한 역진적 성격을 지닌 세금은 바로 양극화를 심화시키는 주요인이다. 오늘날 총체적 국력 쇠퇴의 근본 요인이 된 일본의 소비세는 세계에서 가장 악질적인 세금의 대표다. 실제 소득이 낮은 사람일수록 부담이 큰 아주 나쁜 제도이다. 혹여 유럽 선진 각국들은 각종 물품에 부과하는 간접세가 이러한 역진적 성격으로 불평등을 심화시킬까봐 생필품의 경우 극히 낮은 세율로 설정토록 강제하여 양극화를 최소화하려 노력한다. 일본의 소비세는 이를 역행하는, 즉 부자에게 실질적 감면 효과를 부여하고 가난한자에게 부담을 가중시키는 부도덕한 세금정책이라 할 수 있다.

 

생필품에 부과하는 간접세란 태생적으로 불평등을 내재하고 있다. 부자나 가난한자에게 똑같이 부과한다는 것은 곧 가난한자를 더욱 궁지로 몰아대는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간접세는 소비 물품의 구입시 부과되는 세금이다보니 사람들은 물품가격과 세금을 분리하여 생각지 않기에 세금의 규모라는 본질을 가리는 은폐된 음험함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한다. 간접세의 대표격인 담뱃세는 아마 높은 세율로 엄청난 국가 재정 수입원일 것이다. 재원 기여도에서 손꼽을 수 있는 수준일 것이다.

 

사회경제적 정의 차원에서 소극적인 노블레스 오블리주’, 즉 부자들의 사회 기여를 누진적으로 그 폭을 높여야 한다. 일종의 부유세, 사치세를 늘리는 것은 분명 양극화 완화에 일조하는, 사회정의 실현에 작은 도움이 될 것이다. 실제 이 같은 세제가 많은 선진 강대국들에서 실행되고 있다. 한국의 우파보수 권력들은 이러한 제도를 가능한 폐지, 축소하며 정의 관념에 역행한다. 종부세의 부과기준을 높이거나 폐지하여 부자를 돕는 것은 그 대표적 악덕의 예라 할 것이다.

 

특이하고 별난 세금들도 있다. 독일, 네덜란드, 중국 등은 현재 반려견 한 마리마다 견세(犬稅)를 부과하고 있으며, 일본은 등록비로 3만원을 부과하고 있다. 헝가리는 국민 비만 문제 해결책으로 감자칩세, 대만은 정크푸드세를 부과하고 있다. 덴마크는 포화지방산 2.3%이상의 식품에 2011년부터 비만세를 부과하고 있다고 한다. 중국 공산당정부는 전통과자인 월병에 지금도 월병세를 부과하고 있다. 일본의 협소주거집합주택세(일명 원룸세)’ 2004년에 창설하여 인구문제를 개선하겠다고 지금까지 세금을 부과하고 있다. 러시아의 수염세는 물론 굴뚝세, 모자세, 숄세, 중국의 독신세, 하다못해 중세 유럽의 초야세까지 야릇하고 추악한 세금들이 일반 시민의 삶을 괴롭혀 오고 실행 중인 것이 현실이다. 사실 가장 형평성과 정의에 기초해야 할 세제가 역설적으로 가장 불평등하고 불공정한 권력유지 수단으로 사용되는 것은 인간의 추하고 우울한 실체의 반증일 것이다.

 

세상을 바꾼 엉뚱한 세금 이야기라는 표제처럼, 그 변화는 양극화, 권력의 항구화, 서민대중의 불가피한 변화라는 부정적 의미에서의 바뀜이다. 그러니 엉뚱하다는 것일 게다. 아무튼 이 직관적이고 흥미로우며 짧은 글들로 이어진 세상의 세금 제도들을 읽으며 오늘 우리네 세금 정책의 보다 진지한 이해를 갖는 데로 나아가는 작은 출발점이 될 것이다. 국가가 산으로 가지 않도록 하기 위해 우리 모두 정신 바짝 차려야 하는 시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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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스 2022-09-04 20:5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좋다는 말 말고 댓글로 달 내용이 없네요
필리아님 리뷰하시는 책들은 다 저장해두게 됩니다.

필리아 2022-09-04 21:25   좋아요 0 | URL
오~, 그레이스림, 과분한 말씀이세요, 공감의 말씀 만으로도 황송합니다. 고맙습니다 , 꾸벅 ~
 
낭만주의의 뿌리
이사야 벌린 지음, 석기용 옮김 / 필로소픽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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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유사한 신조를 지닌 사태가 광범위한 인간 무리와 지역에서 발생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물론 이것이 일순간 이루어지는 일은 아니지만 점진적으로, 그러나 비교적 이전 시대의 흐름과는 달리 빠른 속도로 확산되는 동인(動因)이 분명 있을 것이다. 더구나 인간 역사의 오랜 시간 중추적으로 이어져온 믿음에 많은 인간이 비로소 의심과 회의의 시선을 겨누게 되는 어느 순간이 오고야 만다. 아마 인류 역사에 있어 이러한 전복적 변환의 사태를 몰고 온 것이 낭만주의(Romanticism)’라 말하는 것이 이 책의 논지이다.

 

물론 낭만주의를 획일적이고 명료하게 정의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고 저자는 말한다. 'XX주의(主義)'라는 하나의 범주에 몰아넣어 어떤 시기의 사회문화적 조류를 뭉뚱그리는 것은 사실 가당치도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향하는 사상의 방향에서 공통적인 부분이라 할, 특히 그것이 너무도 이전과 다른 중대한 것일 경우, 그것을 하나의 전환적 사태로써 범주화하는 것이 가능할 것이다.

 

고대에서 중세까지 거의 흔들림 없이 이어져온 서구 전통의 척추라 할 명제들, 즉 원리상 해답(진리)은 존재하며 알려질 수 있다는 것과 참된 가치인 해답을 발견하는 방법을 배우고 가르칠 수 있으며, 참인 명제들은 서로 양립할 수 있다는 믿음이다. 즉 세상과 인생은 직소퍼즐처럼 완벽하게 짜 맞추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사실 이성과 과학의 대두에 따른 계몽주의라 해서 이러한 전통적 이해와 다를 바가 없다. 다시 말해 낭만주의는 단순히 계몽주의의 반동으로 태동한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계몽주의는 단지 해답들이 이전의 전통적 방식들 - 계시, 교리 등등 - 로는 획득되지 않으며, 오직 이성의 올바른 사용으로만 가능하다고 살짝 비튼 것일 뿐이다. 계몽주의라 해서 서구의 전통적 주류의 사고를 이탈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 계몽주의가 서구의식의 대반동이며 대변혁인 낭만주의를 촉발했다. 계몽주의자는 말한다. 도덕에 관한 저술, 정치나 비평, 어쩌면 문예적인 저술마저도 모든 것을 고려했을 때, 기하학자의 솜씨로 이뤄낸다면 더 훌륭해질 것이다.”라고. 즉 패턴과 단일한 진리가 있다는 것이며, 이는 이성으로 규명할 수 있다는 생각이다.

 

이것은 보편타당성을 갖는 일반명제를 수립할 수 있고, 인간은 무엇을 하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하나의 해답이 있다는 것이다. 이 엄격한 논리적 관계 네트워크의 실재에 대한 믿음은 사실상 세상에는 존재하지도 않는다. 그 자신도 계몽주의 철학자인 데이비드 흄은 바로 이러한 믿음에 심각한 파열을 만들어낸다. 그는 인과율을 의심하고, 외부 세계 존재의 앎에 대한 연역 불가능성을 지적하며 이성주의의 이상을 깨뜨렸다.

 

사람들은 이 세계가 둘 더하기 둘은 넷과 같이 이러한 것이 삶과 사유의 토대이며, 모든 것은 필연적 논리의 연쇄 산물에 불과하다는 이 고정되고 닫힌 체제에 숨 막히는 고통을 느끼게 된다. 계몽주의의 자연과학과 이성주의는 인간 정서를 차단해버림으로써 인간의 모든 반()과학적 열망과 욕망이라는 배설구를 이해하지 못했다. 계몽주의는 누천년을 지배해 온 궁극적 진리에 대한 믿음, 퍼즐식 사고방식에 결정적 쐐기를 박는 계기가 되어 준 셈이다.

 

. 독일, 낭만주의의 원천

 

저자는 이러한 전통적 사고방식과 계몽주의에 대한 반동의 발원지를 17~18세기 독일로 규정하고 있다. 즉 낭만주의는 독일에서 뿌리를 내리게 되었다고 보는 것이다. 이사야 벌린은 독일 지역에서 30년간 벌어진 프랑스군 중심의 외국 군대에 의한 대규모 살해와 초토화된 재기불능의 재난이 독일인들을 심각한 민족적 열등감으로 몰아넣었다고 파악하고 있다. 이렇게 야기된 콤플렉스와 모욕감은 루터주의를 계승하는 경건주의의 토대 하에 자기 내면의 성채로 움츠려드는 은둔의 결과를 초래하고, 주변에 단단한 성벽을 쌓아올림으로써 자신의 취약한 외양의 노출을 축소하려 노력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주변국, 즉 프랑스를 비롯한 계몽주의(이성, 과학)에 대한 증오로 발산되었으며, 반문화, 반지성, 외국인혐오, 민족(지역)주의에 빠져들게 하였다는 것이다. 상처입은 국민적 감수성의 산물이자 국민적 모욕감의 산물로 낭만주의 운동의 뿌리가 내렸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사실 이보다 앞선 시기에 계몽주의에 대한 반동이 다른 지역에서 공통적 의식으로 대두된 사례를 발견할 수 없다는 측면에서 부정하기 어려운 추정이라 할 수 있다. 하만, 레싱, 칸트, 헤르더, 피히테, 헤겔, 셸링, 실러, 휠덜린, 클라이스트, 노발리스, 슐레겔, 호프만에 이르는 엄청난 인물들만으로도 낭만주의의 원천이 독일이 아님을 반증하기 어렵다.

 

계몽주의에 대한 총체적 반항의 과정에 물꼬를 튼 인물인 요한 게오르크 하만은 어쩌면 독일 낭만주의의 시조라 해도 될지 모르겠다. 그는 책과 그림, 그리고 무수한 대화들을 과학적이고 일반적 명제로 분석하려는 시도는 반드시 실패한다고 설파했다. 우리는 책을 읽을 때 다른 책과 공통으로 지닌 요소들, 즉 일반화된 것들에는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 또한 서로 다른 화가들이 그린 그림에 어떤 원리가 적용되었는지는 굳이 알고 싶어하지 않는다.

 

우리가 책을 보고 그림을 보는 이유는 그것들이 전해주는 특유의 메시지, 특유의 실재에 반응하고 싶기 때문이다. 인간이 원하는 것은 원리나 일반명제를 알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각자의 능력이 풍요롭고 격렬한 방식으로 사용되는 것, 즉 창조의 욕망에 대한 갈구이다. 계몽주의는 이 풍요로운 감각의 세계 대신에 창백한 대체물을 제공하려 했다. 계몽주의는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는 행위에 아무런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생의 약동, 개체성, 창조의 욕망을 일반화하고 분류하여 고정시키고 이로부터 이성적 배열을 추출하는 경향성에는 아무런 생명성도 없다는 것이다.

 

계몽주의는 살아있는 총체를 조각들로 쪼개는 정신적 살해 행위로 간주된다. 하만의 제자랄 수 있는 헤르더는 유럽 이성주의 몸통에 가장 무시무시한 단검을 찔러 넣은 인물로 평가되고 있다. 그는 통일성의 부정, 조화의 부정, 이상들의 양립 가능성을 부정하며, 자기에게 보이는 대로의 진리는 다른 사람들에게 보이는 것만큼이나 타당한 진리라 주장했다. 사실 각각의 시대와 지역에는 그 나름의 서로 다른 내면적 이상이 있다


우리는 우리가 살고 있는 무수한 유무형의 세례가 뼛속까지 아로새겨져 있지 않은가?  한국이라는 영토에 살고있는 나는 독일에 살고있는 사람과 너무도 많이 다른 전통적 관습과 행동 양식을 지니고 있다. 양자를 일반화한다면 고작 인간 형체의 유사성이나 몇 가지 이해 가능한 일상적 양식일 것이다. 아마 두 사람은 많은 윤리적, 의례적, 정치적, 문화적 가치가 다르다는 것을 알 것이다. 여기에 이성과 과학이 개입해서 무엇을 규명할 수 있을까? 이 둘의 삶의 방식을 일반 명제화 하면 둘 다 적응하지 못하고 고통을 겪을 것이다.  이제 서구 의식을 지배해왔던 영원의 철학이라는 신화는 전복된다.

 

. 독일 낭만주의자들


이 책의 가장 흥미있는 부분은 낭만주의자들에 대한 2 개장()에 걸친 논의이다.  절제된 낭만주의자들과 고삐 풀린 낭만주의자들로 구분하고 있는데, 이는 역동성과 상상력의 확장 정도, 그리고 시기적 전후에 따른 의미의 변화라 할 수 있을 것 같다.

 

-1. 절제된 낭만주의

 

서구 세계의 감정, 사상, 행동 등 가치관에 급진적 전환을 가져온 낭만주의는 사실 온전히 낭만주의적이라 정의할 수 있는 예술가나 사상가와 같은 특정 인물로 규정할 수 있는 그런 순수한 신조가 아니다. 단지 어떤 속성이나 경향, 이상적 유형이라는 운동이나 신조의 양상으로 포착할 수밖에 없다. 이러한 관점에서 칸트는 거의 절대적이라 할 만한 유형의 지식에 이르는 것이 가능하다고 믿은 계몽주의자이다. 과학의 신봉자였으며, 논리와 염격을 좋아했다. 그러나 사물의 본성을 쫓았던 이전의 서구 사상의 전통과 달리 그는 사물의 본성 때문에 성이 난 사람이었으며, 특히 도덕철학에 있어서는 자유’, 선택하는 인간에 강박적으로 매달렸다는 점에서 낭만주의 아버지 중의 한 사람이라 할 수 있다.


 



칸트는 인간은 원형적으로 타고난 자유를 지니며, 이 자유가 자아의 특권을 제공하고 나 자신을 만든다고 믿었다. 자연과 달리 인간은 인과율에 지배를 받지 않으며, 자신이 소망하는 바를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는 의지가 있다는 것이다. 칸트는 그의 저작인 계몽이란 무엇인가에서 계몽은 타인의 굴레에서 자기를 해방하는 것이라 규정했듯이 자기 책임 행위를 강조했으며, 착취, 격하, 비인간화에 열렬하게 반대했다.

 

가치란 스스로 생성하는 무엇이라는 생각, 특정 행동 방침을 알고있는 인간 의식을 단언했다. 칸트를 결정적으로 낭만주의자로 이해케 하는 것은 결정론에 대한 극단적인 반감 때문이다. 자연에 의심의 여지없이 참되게 적용되는 이른바 인과율이 인간 생활의 모든 측면에 참되게 적용된다면 실제로 세상에는 도덕성이란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라는 천명은 낭만주의의 핵심 골격을 이루는 불굴의 의지 사물의 구조같은 것은 없다는 끝없는 자기 창조의 표현과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이사야 벌린은 절제된 낭만주의자로 칸트 외에도 실러와 피히테를 꼽고 있는데, 실러의 자연을 딛고 일어서 자유롭게 행동하는, 더 드높은 곳에 도달하는 인간에 대한 찬양은 그야말로 낭만주의의 본령이라 할 수 있다. 사회가 나쁘고, 합당한 도덕성을 획득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면 그 사회를 타도하고 파멸시켜 이상을 향해 돌진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이른바 위대한 죄인은 이 낭만주의에서 탄생한다는 것이다. 아마 도스토예프스키와 함께 실러의 도적떼에 등장하는 도적 우두머리인 카를 무어같은 약탈, 방화범이 영웅적 지위로 격상되는 것은 자신의 이상에 전념하는 새로운 인간상의 대두를 의미한다.

 

마지막 인물로 피히테는 단지 자유라는 이름의 언급만으로도 그 앞에서 내 마음은 활짝 열리고 꽃이 피어오른다.”고 선언했듯이 칸트의 사도이다. 삶이란 본성의 초연한 사색에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행동과 더불어 시작된다고 하였다. 앎이란 행동에서 비롯되는 것이라며 인간과 우주란 일종의 지속적 행위이지 사색으로 지식의 영역에 요구해 해답을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낭만주의는 이렇게 고취된 개인을 향해 나가가려는 거대한 충동의 출발을 한다.

 

-2. 고삐 풀린 낭만주의

 

낭만주의 화려한 분출이다. 이제 낭만주의는 고결한 운동의 핵심을 구축했다. 자아란 직접적 자각의 대상이 되는 어떤 것이 아니라 연쇄적인 경험들을 가리키는 것, 바로 이런 것들로부터 인간의 성격과 인간의 역사가 만들어 지는 것이라는 결론이다. 무언가 단일한 진리가 있으리라 믿지만 실상 그런 것은 없다는 것이다. 이것은 다음과 같이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한 인간으로서의 특성이란 오로지 노력하고 시도하고 장애물에 덤벼들어 나 자신을 온전히 느끼게 될 때에만 체득될 것이라는 의미일 것이다. 평소에는 느껴지지 않던 자아라는 감각이 저항과 대치 국면에 뚜렷해지는 것을 우리는 경험으로 알 것이다.

 

낭만주의의 개화기에 드디어 일반 독자에게도 친근한 낭만주의의 두 가지 현상이 나타난다. ‘노스탤지어망상이다. 노스탤지어는 나는 언제나 고향으로 가고 있다.”는 노발리스의 자기 예술에 대한 답변처럼 무한한 동경이자 갈망이다. 그래서 이 때의 낭만주의 문학들은 이국적 사례를 찾아다니며, 온갖 종류의 환상을 탐닉한다. 그런데 망상은 이 노스탤지어와는 아주 대척점에 있는 것처럼 보인다.

 

본성의 확장, 걸림돌의 파괴, 그리고 자신의 해방으로 무한히 솟구쳐 올라가는 갈망을 향하는 것과 달리 비관적 형태를 띤다. 도달하려 하지만 이를 방해하는 어둠 속의 무엇, 일종의 냉담하고 적대적인 자연이다. 이건 허무이며 음모론의 발굴로 나아가는데, 숨어있는 음모를 수색하는 더 큰 개념을 발굴하려는 일련의 움직임이 그것이다. 이해할 수 없는 무언가에 대한 이러한 두려움은 19세기 내내 축적되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카프카의 소설처럼 방향을 상실한 불안, 저변에 깔린 근심의 독특한 감각으로 출현하기도 하며, 술레겔이나 호프만의 소설처럼 악몽, 거대한 비인격적 힘의 충격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아마 거의 격렬하다고 할만큼 '호프만(E.T.A.Hoffmann)'사물의 본성이 존재하고 사물의 구조가 존재한다서구의식을 뿌리부터 거부하며, 인간을 가두는 그런 구조는 없다고 선언한다. 이제 낭만주의는 잠재적인 것이 현실적인 것보다 더 실재적이라고 주장하기 시작한다. 그의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과 사물이 수시로 뒤바뀌며 진정한 심리적 망상들로 가득차 있는 이유이다. 희미한 감지, 파편, 암시, 신비한 조명이야말로 실재를 파악하는 유일한 방법이라는 것이다. 환각과 현실, 의식과 무의식 사이를 차단하고 있는 장벽을 부수고 단호히 빗장을 열어젖힌 우주에 대한 감각, 영속적 변형에 대한 감각을 생성하는 것이다. 낭만주의는 급기야 논리의 굴레를 벗어던지고 족쇄풀린 자유로운 의지를 마음껏 구가한다. 낭만주의는 사물의 본성이 존재한다는 이 토대를 공격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낭만주의는 실재에 대한 참된 지식이 있다는 오래된 생각에 대항해 벌이는 전쟁이다.

 

낭만주의란 결국 인간이 적응해야하는 패턴이란 없으며 오직 우주의 끝없는 자기 창조만이 있을 뿐이다. 라는 생각, 사물을 모종의 관념화나 계획에 순응하는 것들로 바라보려는 자기 탐닉적 형태의 자멸적 어리석음에 대한 저항이다. 사실 우리가 어떤 상황을 고정해두려고 주도면밀하게 실행하려 하지만 늘 새로운 심연이 펼쳐지고 헛수고가 되기 일쑤인 경험을 하기 마련이다. 쉼 없는 흐름을 멈춰 세우려는 시도, 가둘 수 없는 것을 가두려는 노력, 존재하지도 않는 진리를 추구하려는 시도에서 얻게 되는 것은 비현실과 환상뿐이라는 것이다.

 

. 마무리하며

 

이제 사회를 이성적으로 분류하려는 모든 시도가 얼마나 얄팍한 짓거리에 불과한 것인지 드러났다. 과학, 공리주의, 기계류의 사용이 국가를 대신해 주지 않는다.”는 국가에 대한 천명처럼 낭만주의는 무한히 활동적이며 살아있는 총체로서 국가를 정의한다. 이는 객관적 법칙이 존재한다는 인간적 환상에 대한 경멸이다. 낭만주의는 이처럼 규칙과 법률과 예의범절과 지극히 꼼꼼하게 잘 조직된 삶의 형식을 날려버리라고 외친다. 이러한 극단까지 밀고 나가면 인간적 이상의 심각한 대립의 결과만 초래하게 된다. 어떤 면에서 는 낭만주의는 삶의 불완전성에 대한 자각이며 고양된 이성적 자기 이해의 촉구이다.

 

오늘날 우리의 삶은 바로 이들 낭만주의자들이 세워놓은 자유주의적 양식, 다원성과 삶의 불완전성에 대한 자각, 고양된 이성적 자기 이해와 같은 생각들로 구성되어있다. 이는 바로 지금을 사는 많은 사람들은 알지 못하는 사이 이들 낭만주의자를 상속받고 있으며, 우리 안에 이러한 사상, 신조를 품고 있다. 우리들 모두는 이들 낭만주의의 광기를 안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우리는 단지 거대한 인과적 과정을 구성하는 하나의 조각들이 아니다. 그렇다고 완전히 별개 차원의 소외된 존재도 아니다.

 

우리는 사회에서 서로 소통하고 사는 존재들이다. 다른 인간이 하는 말을 이해하지 못하거나 아무런 공통의 가치도 없다면 우리는 아마 인간이 되지 못할 것이다. 결국은 타협해야 한다. 아마 우리는 불완전한 평형을 보존하며 아슬아슬하게 살아가야만 하는 존재인지도 모르겠다. 점점 더 많이 자기 이해가 요구되는 사회이다. 무엇이 이 불안한 평형을 유지하는 관념, 행동이 될 수 있을까? 아무튼 이 낭만주의자들의 모종의 가치들은 삶의 위대한 지표의 하나가 되어 줄 수 있을 것이다. 그 불굴의 의지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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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ni74 2022-10-07 21:4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필리아님 당선 축하드립니다 *^^*

필리아 2022-10-07 22:03   좋아요 1 | URL
아~, mini74님 축하의 말씀 감사드립니다. 편안한 연휴 되십시요~~

그레이스 2022-10-07 22:1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음!
갖고 있으나 아직 읽지 않은 책이어서 안보고 좋아요만 누르고 나왔던 리뷰군요;;
당연히 필리아님은 잘 쓰셨을테니까!
축하드려요 ~~

필리아 2022-10-07 22:05   좋아요 2 | URL
좋은 리뷰로 책이 깊이를 더해주시는 그레이스님~
댓글 고맙습니다. 즐겁고 건강하신 연휴 보내시길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
 
양들의 침묵 (리커버 에디션)
토머스 해리스 지음, 공보경 옮김 / 나무의철학 / 2021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FBI의 앳된 수사관 클라리스가  하키 마스크가 씌워진 채 체인으로 묶여있는 연쇄살인범 한니발 렉터와 쇠창살을 사이에 두고 마주하고 있는 영화의 한 장면은 그 낯설고 기괴하고 음습한 분위기로 인해 기억의 저장소에서 쉽사리 끄집어 내진다. 이 장면은 서로의 신뢰를 줄다리기하며 진실을 거래하는 그 미세한 심리적 긴장을 떠올리게 하고, 두 사람이 예사로운 지능의 소유자들이 아님을 동시에 상기토록 한다.

 

소설 원작이나 영화 모두 독자와 관람객에게 깊은 인상을 남긴 덕에 이 작품에 대한 감상은 새삼스럽기까지 하다. 그런데 이 소설을 읽으면서 생각으로 이어지지 않은 부분이 있었는데, 바로 지식이 지향하는 가치에 대해서는 물음을 가지지 못했다는 점이다. 여성학 연구자인 정희진은 그의 책에서 정신의()인 렉터의 지식의 양()적 측면은 결코 윤리적 선악과 무관한 것임을 지적하며, 지식은 양이 아니라 가치라는 측면에서 검토되고 요구되어야 한다고 쓰고 있다. 이 글을 통해 그간 나는 무지(無智)를 지식의 양적 측면에만 시각을 겨누는 헛다리짚기를 연속했다는 내 무지함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사실 이 각성만으로 충분했을 테지만 떠오른 김에 이 작품을 읽어보아야 마음이 후련해질 것 같았다.

 

렉터 박사는 소설 속에서 관찰과 면밀한 분석 능력을 비롯한 절대적 기억력을 지닌 정신과 의사로 묘사되고 있다. 클라리스 스탈링과 첫 대면에서 렉터는 스탈링이 사용한 스킨 크림의 이름과 향수를 뿌리지만 오늘은 뿌리지 않았음을 맞춘다. 신분증을 꺼내기 위해 핸드백을 열 때 얼핏 맡았을 뿐이라는 렉터의 대답은 그의 찰나(刹那)적 관찰능력과 기억력을 보여주기에 전혀 부족하지 않다. FBI 행동과학부 잭 크로포드부장의 명령으로 훈련생인 스탈링을 범죄자 심리 설문이라는 명목 하에 렉터의 대담자로 투입시킨 것이지만 이미 여섯 명의 여성을 살해하고 지속되고 있는 오리무중의 연쇄살인, 일명 버팔로 빌사건을 위한 일말의 단서라도 잡기 위한 전술이다.

 

살가죽이 벗겨진 채 강에 버려진 여성의 사체, 알코올 저장병에 담긴 깔끔하게 잘린 머리통, 얼굴 가죽을 뒤집어 쓴 렉터, 무심하고 일말의 죄의식도 지니지 않은 채 사람을 살해하는 장면 등을 읽으며 어떤 문학적 감흥을 생각한다는 것이 왠지 독자 자신이 낯선 존재인 것만 같이 여겨진다. 아마 열광하는 냉혹한 독자라는 이 모순어가 전혀 모순이 아닌 순간을 체험한다.

 

소설의 제목인 양들의 침묵은 스탈링의 어린 시절 고통스런 기억, 양들의 울음소리가 깨운 임박한 죽음들로부터의 도피, 그 한시적인 완결의 의미로 이해된다. 이것은 스탈링이 연쇄살인범 버팔로 빌의 단서를 얻기 위한 두 차례의 추가적 면담에서 정보의 거래 대가로 렉터의 요구에 의해 스탈링이 들려주는 어린 시절의 이야기를 통해 그 의미를 축적해 나간다. 스탈링의 성장기에 어린 렉터의 연민이었을까? 사실 이 소설의 커다란 흠집으로 보이는 것인데, 응급대원, 보안대원을 살해하는 방법이나 그의 처리에서 보이는 완전한 평정심은 인간에 대한 공감능력을 발견할 수 없다. 더구나 스탈링의 첫 대면에서 옆방에 수감된 자가 스탈링을 향해 뱉어낸 추한 성적욕설에 대가로 자신의 심리적 수완을 발휘하여 바로 자살케 하는 것과 렉터의 연민은 결코 공존 가능한 감성이 아니기에 납득하는데 저항감을 느끼게 된다.


 



소설의 중심 제재는 버팔로 빌이라는 단서조차 찾을 수 없는 범인의 실체를 밝혀 체포하거나 사살하여 잔혹한 여성 연쇄살인 사건을 종결짓는 것이다. 이미 다수의 여성이 살해되었음에도 정부 고위층 인사나 언론의 진지한 관심이 동원되지 않은 사건이 테네시주 상원의원의 딸이 동일한 흔적을 남기고 피납되자 보이는 경찰관서, FBI, 고위층 인사들, 언론의 집중된 시선이다. 아마 작가는 이러한 기울어진 사회적 양상을 지적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실종된 상원의원의 딸이 살던 아파트를 수색하던 스탈링을 발견한 상원의원은 그녀를 도둑취급하며 모욕한다. 이때 렉터를 떠올리며 마음속으로 속삭이는 스탈링의 말은 흥미롭다. 재수없는 상류층년. 이렇게 말하면 렉터 박사는 하층계급의 분노라며 즐거워하며 지적했을 것이다. 모유로 전해진 분노가 내면에 잠재돼 있는 탓이라며, 스탈링은 교육과 지성, 외모면에서 상원의원 마틴 루스보다 뛰어나면 뛰어났지 못한 인간이 아니다. 단지 신분이라는 계층적 권위를 수단으로 사람에게 함부로 하는 권력화된 무지이며, 주변의 질서는 이에 뇌동(雷同)한다.

 

꼴불견인 세상의 흔한 일면이다. 스탈링과 크로포드를 시기한 렉터를 수감하고 있는 볼티모어 정신질환 범죄자 수감소장 칠턴은 도청장치를 통해 스탈링과 렉터의 대담을 엿듣고는 자신의 영예와 부를 위해 상원의원과 렉터의 직접 면담을 주선하며 사건을 미궁으로 치닫게 한다. FBI의 수사를 중지시키고 직접 자신의 딸을 구출해내겠다는 어미의 심정을 이용한 기만적인 장난에 이용되는 것이다. 여기에도 흔해빠진 교훈이랄 것이 있는데, 인간은 어떤 일이든 자신의 이해관계에 직결되는 일이 될 때 냉정하고 객관적인 지위를 상실한다는 것이다. 전문 집단의 노력과 역량을 폄훼하고 자기 이익을 우선시 할 때 그 결과는 대개는 실패요, 좌절이라는 것이다.

 

소설은 꽤나 다양한 기관이 등장하여 이 세계에서 벌어지는 어떤 사건이든 무수한 집단들과의 협력과 공조가 뒤따르는 것임을 보여준다. 버려진 사체의 목에서 발견된 번데기의 특성을 규정하기 위해 스미소니언 자연사박물관의 곤충학자들이 밤을 새워 규명하고, 범죄 용의자를 추출하기 위해 사적 자유의 보장을 위해 마련된 보안상 차단된 병원 기록의 협조를 받아야 한다. 그런데 모두 자연스레 기꺼이 협조하지 않는다. 어디서든 자신들의 이익과 권위 보호를 내세우며 경각에 달린 사람의 목숨 앞에서도 자기 권리의 우선을 내새우곤 한다. 그 알량한 것들 앞에서 우리는 항상 주춤거리기 일쑤다. 어쩌면 인간의 영원한 누추함일 것만 같다.

 

이제 다시 돌아와 지식에 대해 생각해보아야 할 것 같다. 소설은 두 측면의 윤리적 방향을 달린다. 렉터의 지식은 결코 선의에 의해서 활용되지 않는다. 반면 스탈링의 지식은 선을 지향하고 타인의 이해와 공감을 향하고 있다. 지식의 양 측면에서 렉터 박사의 그것이 스탈링에 비해 월등하다. 그러나 그의 지식은 사회적 선을 추구하는 가치변화에 소용되지 않으며 자기 쾌락과 이익을 위해서일 뿐이다


그는 실제 범인인 “‘제임 검을 클라리스에게 어떤 방법으로 내줄지 생각 중이었고...” 에서처럼, 버팔로 빌의 실체를 놓고서도 자기 안위, 수감 조건의 완화 등을 거래 조건으로 내세운다. 오늘날 우리는 지식이 양적으로 부족해서 인간답지 못한 것이 아니다. 여기저기 석박사가 넘쳐나고, 지식인입네 하는 자들이 도처에서 허접하고 알량한 지식을 자랑하지만 정작 인간 같지 않은 것들이 얼마나 많은가? 지식, 앎이란 가치 지향적인 것이며, 그 양은 사실 그다지 쓸모있는 것이 아니다. 구태여 여기서 지식을 오용하는, ()사회적으로 이용하는 자들과 사례를 너절하게 열거하는 낭비는 하지 않겠다. 소설의 마지막 장에 렉터가 클라리스에게 보낸 편지글에서 발견한 하나의 무지를 지적하면서 맺는다.

 

당신이 사건을 해결할 때마다 양들은 한동안 축복처럼 침묵하겠지.

양들의 울음소리는 당신을 움직이게 하는 원동력이고,

그 울음은 아마 영원히 멈추지 않을 거야. ....

'어쩌면 같은 별들을 지향하고' 있을 테니.”     -502쪽


클라리스의 삶의 과거와 미래에 대해 교감과 예견을 표시하고는 두 사람이 같은 곳을 지향하고 있을 거라며 어떤 지적 동지애를 나타낸다. 결단코 같은 별을 지향하고 있지 못하다는 측면에서 이 소설의 작가는 지식을 양적 측면에서만 이해하고 있는 것 같다. 혹은 지식이란 본래 당파적인 것이라는 점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지식은 선한 가치를 지향할 때 그 의미가 존중되는 것일 게다. 여름 날 나기에는 이처럼 냉혹한 독서도 없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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