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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속의 평등 - 강자를 길들이는 거꾸로 된 위계
크리스토퍼 보엠 지음, 김성동 옮김 / 토러스북 / 2017년 4월
평점 :
절판
"평등주의란 단순히 위계의 부재로 나오는 결과가 아니다. 오히려 평등주의는 아주 특별한 유형의 위계, 즉 반(反)위계적인 태도들에 기초하는 흥미로운 유형의 위계이다." - 32쪽
'지배와 종속'이라는 단어가 품은 개념은 사람들을 긴장하게 만드는 어떤 불쾌감을 수반한다. '누군가가 '나'를 지배하고 종속시키려 한다고? 내 자율을 속박하겠다고? 대체 누가 이런 사악한 짓을 하려 한다는 것인가?' 여기에 의식 깊숙이 자리잡고 있는 것은 어떤 개인의 자율을 타인이 해칠 수 없다는 '평등'에 대한 인식이다. 문화인류학자이자 생물학 교수인 '크리스토퍼 보엠'은 바로 이 평등 의식이 과연 인간의 정치적 본성, 다시 말해 자연선택에 의해 오늘의 인류에 유전적으로 내재되어 있는 것인가를 규명하려 한다. 이 물음이 너무도 중대한 것은 급변하는 세계에 대처하기 위해 새롭게 수립되고 구체화하여야 하는 가치와 제도의 창출에 있어서 토대의 견고성과 관련하기 때문이다.
대략 B.C.3000년경부터 강력한 일인(一人) 또는 소수의 지배자에 의한 대다수 인간들의 복속이라는 체제가 시작된 이래, 18C 일부 서구 사회의 시민혁명으로 민주주의라는 인간 개인의 자유와 평등이라는 정치 도덕적 덕목이 지역적으로 흩어져 있는 인간 세계에 점진적 확산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인간의 역사시대는 지배와 복종이라는 위계(hierarchy)의 사회였으며, 비록 민주주의 이데올로기로 인해 인간 개인의 존엄성을 근간으로 개인의 자율적 사유와 행위에 대한 권리 보장, 인간 개인의 평등성을 신념으로 하고 있지만, 여전히 계급적인 지배 권력이 법제도에 의해 승인되어 존립하고 있다.
이러한 역사적이고 경험적인 실체에 비추어 볼 때, 특히 '인간의 평등성'이란 개념은 왠지 불안정하고, 오히려 불평등의 위계가 인간의 본능으로 여겨지기까지 한다. 만일 위계가 자연선택된 것이라면 인간 사회에서 개개인의 평등을 유지한다는 것은 살얼음판 위를 걷는 것처럼 위태로울 수밖에 없다고 할 것이다. 언제고 이 불안한 평등의 개념은 전복되고 지배와 복속이라는 불평등의 정상화가 자리 잡을 것이라 예견하는 것은 지극히 인간다운 것이 될 수 있다는 얘기이다. 아마 이 저술의 탁월성은 평등과 위계의 종잡을 수 없는 이 미심쩍은 인간의 본성에서 '평등주의'를 현생 인류(homo sapiens)의 시작이랄 수 있는 대략 10만년 전후의 먹거리(수렵채집) 무리로부터 길어 올리는 인류학적, 진화론적 추적 연구라 할 것이다.
"우리들 중 하나가 타자들을 지배하도록 허용하기보다는, 우리 모두는 우월자가 될 통계적으로 작은 기회를 포기하기로 동의한다. 우월이나 지배를 추구하기 보다는,
개인적인 자율성에 그저 만족하기로 동의한다." - 210쪽에서
침팬지와 보노보, 인간 혈통을 포괄하는 고등 유인원에서 인간 혈통이 분화된 것을 대략 500만년 전으로, 그리고 이 분기에서 엄청난 두뇌와 털 없는 몸뚱이 등 해부학적, 그리고 상징적 문화와 언어를 발달시킨 오늘의 근대적 인간의 출현을 적어도 10만년 전후로 추정하는 데 학계간의 의견 일치가 있는 것 같다. 이 시기의 인간을 수렵채집(먹거리)인이라 부르며, 이들은 무리로 이동하는 군집 생활을 하였으며, 어떤 특정한 지배자 알파가 나머지 무리를 예속시키는 그런 정치 행위가 불가능했다고 지적하고 있다. 인간 조상들은 타인을 정치적으로 위압하는 행동의 실행을 심각한 도덕적 위반들 중의 하나로 보고 이를 금지하기 시작했다고 이해하고 있다.(현생 수렵채집 생활 무리에 대한 민족지학적 보고들 참조)
즉 집단이 어떤 잠재적 일탈자도 지배적 알파가 되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려는 "두려움에서 비롯된 지배에 대해 분노에 찬 저항"이 신념화 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이는 보통 개인들이 연대한 집단이 선제적으로 그 잠재적 일탈자에 재갈을 물리는 반응을 수행함으로써 위계 형성 과정을 저지하였음을 의미한다. 일례로 큰 사냥감을 잡은 사람이 성과 배분에 참여하거나 노획을 자랑하는 것은 곧 정치적 권력으로 전환을 시도할 위험으로 간주되었으며, 따라서 겸손한 말과 분배 주체에 관여하지 않는 것이 무리의 정치적 긴장을 완화하는 방법이었다는 것이다. 여기서 흥미로운 양상을 보게 되는데, 자랑스러워하는 사냥꾼은 과도한 부정어법과 완곡어법을 사용함으로써 겸손을 보여 어떠한 권력에의 도전 의도가 없음을 보이는 것과 함께 무리(집단) 구성원들은 그 사냥꾼을 조롱하거나 비난의 표현을 하며 선제적으로 깔아뭉갠다는 점이다.
잠재적 알파의 등장을 저지하기 위한 집단의 행동 양식으로 조롱과 무시, 배제, 추방, 살해 등의 통제적 처벌 수단을 통해 집단에 대한 위협을 제거하는 것뿐만 아니라 일탈자를 친사회적 방향으로 되돌리고, 구성원 개개인의 정치적 평등을 강제하는 작은 도덕 공동체를 이루고 있었음을 설득력 있게 전개하고 있다. 결국 이들 수렵채집인 무리가 의도했던 것은 참된 평등과 절대적 평등을 추구한 것이 아니라, 개인의 자율성을 온전하게 내버려두는 상호존중이었다는 것이다. 일종의 '평등주의 기풍'이라는 의도적인 지도 메커니즘을 통해 집단내의 사회적 삶을 조절했음을 의미한다. 아마 반(反)경쟁적, 반권위적 삶의 형태가 소위 부족국가의 왕과 같은 전제정이 시작되기까지 오랜 시간 인간 조상들의 삶의 형태였음을 발견하는 것은 새로운 시대의 공동체 설계에 어떤 시사점을 던져준다 하겠다.
핵심은 이것이다. 인간에게는 약자이든 강자이든 지배 욕망이 바닥에 흐르고 있다는 것이다. 수렵채집인들은 이러한 인간 본성을 이해하고 있었으며, 개인의 자율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반권위적인 도덕적, 정치적 청사진을 내면화하고 있어야 함을 알고 있었다는 것이다. 즉 평등주의 청사진이 공동체에 일단 자리하게 되면, 이러한 비전에 반대하는 어떤 존재가 아무리 강력할지라도 그를 지배 또는 제거할 수 있게 된다는 점이다. 물론 이처럼 평등주의 사회들은 내구력이 있지만 동시에 공격받기도 쉽다는 점이다. 결국 평등주의 삶의 방식을 유지 지속시키기 위해서는 주의 깊은 헌신을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것이다.
고등 유인원인 침팬지 등 전제주의적 폭군 알파에 의한 무리의 생활은 팽팽한 긴장의 연속이다. 여기서 분기된 인간이 전제주의적이지 않다는 것은 넌센스라 할 것이다. 그럼에도 10만년 전 인간 먹거리꾼(수렵채집인)들은 평등주의에 기초한 무리의 삶을 정착 시켰으며, 사회적 지배 위계를 역전시켜 평범한 다수의 집단이 알파를 지배하는 평등한 개인이 가능케 했다. 사실 여기에는 역설이 존재한다. 경쟁과 허세, 싸움이라는 지배의 본성이 작동하지 않는다면 지배 위계의 역전이라는 평등주의적 사회적 행위가 필요할 이유가 없게 된다. 유전적 자기 이익을 추구하는 영장류의 경쟁은 회피할 수 없는 본성이다. 즉 지배와 복종이라는 위계적 경향은 인간 종의 특징이다. 다만 종속에 대한 반감 역시 선천적인 것이라는 점이다.
"인간 본성이 매력적이지 않게 만드는 성향이 있는, 다른 개인에게 복종해야만 하는 것을 피하기 위하여, 인간 본성이 매력적으로 만드는 성향이 있는, 개인적인 지배 가능성들을 포기한다. 이러한 독특한 '행동적 타협'이 인간의 정치적, 사회적 삶을 변형시킨다." - 370쪽
복종 행위를 잘게 잘라보면 몇 개의 경쟁적 동기 요소들로 구성되어 있음을 알게 되는데, 대표적으로 바닥에 숨어 있는 지배 욕망, 그리고 두려움이다. 복종은 '양면 가치'를 가지고 있는데, 복속이라는 부정적 느낌은 지위 경쟁을 향한 경쟁적 기질에서 비롯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복속된다는 것에 대한 분개가 평등으로 이끄는 기질이다. 이 책의 파격성은 바로 여기에 있다고 할 것이다. 오늘의 진화생물학, 진화심리학, 인간생태학, 인류학 등에서 집단간 선택이론과 이타주의적 본성의 유전에 대한 논의가 어떤 결론에 이르렀는지는 모르겠다.
이타주의적 유전자가 유전자 공급원에서 유지될 수 있으며, 집단간 선택에 의해서 추가적으로 고양된다고 주장하고 있다. 평등주의가 인간의 정치적 본성으로 오늘의 인류에 내장되어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또한 위계적(지배와 복종) 본성 또한 유전되어 계승되고 있다는 것이다. 특히 하나의 유전자가 여러 개의 표현형 효과를 가질 수 있다는 ‘다면발현(pleiotrophy)의 가능성’ 또한 수용되어야 한다고 역설한다.
인간의 정치적 본성을 이해한다는 것은 이 세계에 대한 도덕적 청사진을 꾸려 낼 수 있다는 의미가 될 수도 있다. 이 책을 읽게 된 직접적인 동기가 있다. 오늘 자본의 거대한 집적과 축적 시스템은 극단적 불평등의 중심적 원인이며, 나아가 제2 기계시대로 불리는 인공지능과 디지털 플랫폼 기반의 기술은 이러한 자본 권력의 첨예한 부상(浮上)을 가속화하고 있다. 또한 실업자의 점진적 양산과 부의 비대칭적 배분, 민주주의 가치의 지속적 훼손으로 인한 껍데기 민주주의만 잔존하는 형국이다. 이들은 인간의 자율과 존엄성을 지속적으로 건드리며, 궁극적으로 인간 평등주의의 근간을 파괴한다.
만일 새로운 인간 사회를 설계해야 한다면 과연 어떠한 형태가 되어야 할 것인가에 있어 지금까지 진화해 온 인간의 본성을 고려치 않고서는 1871년 파리 코뮌의 좌절이나 1894년 동학농민들의 새로운 삶의 단위로서 집강소의 실현되지 못한 인간 평등의 공동체를 그려낼 수 없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어쩌면 이 책은 인간 본성에 철저한 현실주의자였던 수렵채집인들의 평등주의 청사진을 통해 인류학적 순진함을 떨치고 새로운 정치적 청사진을 그리는 데 분명 어떤 가능성을 엿보게 해주었다고 말 할 수 있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