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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리커버 특별판, 양장) - 상실, 사랑 그리고 숨어 있는 삶의 질서에 관한 이야기
룰루 밀러 지음, 정지인 옮김 / 곰출판 / 2021년 12월
평점 :
품절
우주자연, 인간이 발을 딛고 서 있는 이 세계는 그야말로 소용돌이치는 혼돈 그 자체이다, 사실 이 혼돈이라는 가차 없고 뚜렷한 진실에도 불구하고 거의 불가능해 보이는 질서를 만들려는 인간의 집요함을 바라보는 것은 마치 장엄하고 위대한 의지처럼 경외의 감정을 솟구치게 하기도 한다. 그런데 그 질서 기획의 의지는 정말 숭고한 것인가? 존재의 의미를 찾을 수 없는 이 세계에서 생의 목적이란 것을 만들어내야 하는 인간에게 어쩌면 이러한 무모해보이기까지 한 의지로부터 무언가 발견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작은 열망이 피어날 수도 있다. 과연 이 말은 진실일까?
과학 전문기자인 저자 ‘룰루 밀러’는 존재의 무의미, 의미 부재한 삶, 시련의 늪에서 허우적 거리는 자신의 절망으로부터 구원해 줄 가능성을 20세기 전후에 지대한 과학, 철학, 정치적 성취자로 미국의 곳곳에 흔적이 새겨진 분류학자 ‘데이비드 스타 조던’의 엄청난 투지의 정체로부터 발견하고자 한다. 그것이 구렁텅이에 빠진 자신에게 어떤 돌파구, 의미를 던져 줄 것이라고.
이 책의 매 문단이 발산하는 매혹적 긴장은 시선을 뗄 수 없도록 한다. 과학, 역사, 인간 인식 작용과 심리적 경향, 삶의 좌절과 투쟁, 철학적 사색, 젠더와 범주화 등, 어쩌면 이 다채로운 성찰적 사유들이 너무도 자연스럽게 경계 없이 어우러져 아주 깊은 진실의 어떤 목소리가 되어 동화되도록 하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그래 경계 없음, 그 뒤섞임의 혼돈이 이 세계의 진실이기에 내 통제 불능의 마음이 같이 함께 진동한 것인지도.
“목적이 한 사람의 인생을 바꿔 놓았다.” -76쪽
우연한 실수와 성공들을 각인하고 있는 생물들, 그 무질서함 속에서 질서를 만들어 내려는, 분류학자 데이비드 스타 조던의 삶의 여정을 쫓는다. 명명되지 않은 물고기를 찾아 새로운 학명을 붙이고, 이들로부터 진화적 관계를 통찰하여 어떤 질서를 천명하는, 그래서 이 혼돈의 세계에 질서정연함과 행위 주체성을 부여하는 것이 목적인 삶이다. 이 인물은 수많은 물고기의 수집을 위해 세계를 누비며 자신이 상상하는 질서 속으로 그 혼돈을 무수하게 채집한다. 미지의 생물에 자신의 깃발을 꽂으며 그 혼돈의 양, 물고기가 든 에테르 병이 건물 두 층의 높이가 될 때까지 쌓인다.
아내의 죽음도, 아이의 때 이른 죽음조차도 자연의 질서를 세워 진화 꼭대기에 선 인류의 진보를 도와 줄 실마리를 찾아 입증하고자하는 목적을 지체시키지 못한다. “나는 이미 지나간 불운에 대해서는 절대 근심하지 않는다!” 이 ‘낙천성의 방패’로 무장된 인간은 1891년 갓 마흔 살에 스탠퍼드 대학 초대 학장으로 취임한다. 질서에 이르는 경로의 지도가 되어 줄 물고기가 든 병들은 1906년 4월 18일 오전 5시 12분, 샌프란시스코 대지진으로 깨지고 뭉개지고 널브러진다.
30년간 쌓아올린 의지의 산물을 한 순간에 무너뜨리는 급소를 찌르는 한 방. 우리는 아마 이러한 절망적 상황에서 이 세계는 혼돈이 지배한다는 처절한 메시지를 실감 할 것이다. 데이비드 조던은 그 어떤 인간도 엔트로피를 멈 출수 없다는 이 메시지에 귀 기울이지 않는다. 저자처럼 이 사건에 대한 조던의 행위로부터 “망해버린 사명을 계속 밀고나가는 일을 정당화”할 수 있게 하였던 그 내적 동기는 무엇일지에 시선이 집중된다. 패배를 인정치 않도록 하는 그 낙천성과 긍정성의 본질은 대체 무엇일까?
“무지(無知)는 세상에서 가장 유쾌한 학문이다. 아무런 노동이나 수고 없이도 습득할 수 있으며, 정신에 우울함이 스며들지 못하게 해주니 말이다.” -125쪽 (조르다노 브루노)
데이비드 조던은 자신의 책 『절망의 철학』에서 “어느 쪽으로 눈을 돌리든 생명의 과정을 묘사하려면 기운 빠지게 하는 은유를 사용할 수밖에 없다.” 며 삶의 의미를 찾고자 할 때 그 세계관이 보여주는 것은 허망뿐이라 썼었다. 이런 사람이 “운명의 형태를 만드는 것은 사람의 의지다.”라며, 자기가 한 말에 정면으로 배치(背馳)되는 행위를 하는 것이다. 이 위선적이고 거짓을 담은 듯한 ‘의지’의 본질은 무엇일까? 받아들이기 어려운 진실을 차단하고 자기만의 의미를 만들어내는 것. 이것을 심리학에서는 ‘기만’이라 부른다. 중립적 표현으로 ‘긍정적 착각’이라고 하는 것, 인식을 긍정적 빛으로 물들이는 장밋빛 자기기만의 그 본질이다.
존재의 의미, 늪 속에 빠진 절망스런 삶의 구원을 위해 찾았던 인물에게서 발견된 것은 하찮고 삿(邪)된 결함에 불과하다. 현실에 대한 건강한 태도를 취하는 관점의 변화를 강변하는 ‘스토리-에디팅(story editing), 리프레이밍(reframing), 그릿(Grit)’ 등 자기계발서 따위들에 깃든 새로울 것 없는 거짓된 말들의 본질이다. “긍정적 피드백이 없는데도 매우 장기적인 목표에 로봇처럼 뛰어들게 해주는” 끈질긴 투지는 긍정적 착각의 힘이다. 자신의 이미지를 해칠 수 있는 정보를 교묘하게 편집하거나 삭제하는 재주, 그래서 비판의 따가움도 심장에 닿지 않는다.
“겸손을 유지하라는 수천 년 이어져온 경고는 잊어라.
이것이 신 없는 세계의 시스템이 작동하는 방식이다! ” - 146쪽
이것은 기만의 기이한 연금술이다. 결국 좌절과 절망에도 불구하고 집요하게 일관된 목적을 향해 한걸음도 주춤거리지 않았던 인물의 힘이란 것은 지속적인 자기기만과 오만의 복용, 자기 과신이라는 괴물에 불과한 것이었음이다. 자기 손으로 혼돈을 통제하고 질서를 세울 수 있다는 데이비드 조던의 믿음은 이러한 터무니없는 어리석음에 기초하고 있는 것이다. 결국 이러한 자기고양(自己高揚)과 낭만적이고 긍정적인 착각은 비판적 타자에 대한 사나운 공격으로 나타난다는 심리학자들의 주장을 한 치의 빗나감도 없이 보여준다.
“가장 위험한 사람은 자신을 우월한 존재로 보고 싶다는 욕망이 강한 사람들이다. 거창한 자기상을 확인받는 일에 집착하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자기를 비판하는 사람들을 사납게 공격한다.” - 151쪽 (바우마이스터, 『threatened egotism』)
자신과 친한 제자들을 중심으로 대학의 교수진을 채우는 일종의 족벌 운영체제와 자의적인 경비지출에 대한 고용주인 ‘제인 스탠퍼드’의 지적은 데이비드 조던에게 예속 상태에 대한 분노와 살인적 증오로 자라나 독살을 자행하는 데 이른다.(물론 당대의 수사력은 미해결 사건으로 결론이 났지만) 그는 『물고기 연구를 위한 안내』에서 ‘물고기를 확보하는 방법’에 대한 챕터에서 자랑스레 독의 살포를 설명하면서 치명적 독인 ‘스트리크닌’의 사용을 권한다. 스탠퍼드 대학의 설립자이자 자신의 고용주인 제인의 위(胃)에서 발견된 것 역시 스트리크닌이다.
위협받는 학장직을 지키기 위한 분명한 살해동기와 살해수단인 독은 한결같이 데이비드 조던을 향한다. 증언들, 증거에 대한 학자들의 견해는 모두 그를 살인자로 지목한다. 고갱이까지 철저히 썩은 인간이건만 세상은 칭송하고 찬양하며 동상을 세우고 건물과 지명과 자연에 그의 이름을 붙여댄다. 이 과신과 긍정적 착각은 어디에까지 이를까? 20세기, 아니 21세기 지금까지 그 혐오스러움과 사악함으로 이름을 떨치는 ‘우생학’의 주축중의 주축인 인물로서 인간을 구별하고, 배제한 인간을 살해, 박멸하는 선봉자가 되는 것이다.
“빈곤과 타락은 유전된다. 유전자 풀의 정화 옹호, 적격자와 부적합자로 구분, 살 자격 있는가를 자신의 주장에 따라 판별, 강제불임수술과 처형을 자행” -183쪽
미국에 우생학을 강력하게 보급하고 법제화에 중추적 역할을 하며, 거짓과학의 위험성을 공격하던 전력과 달리 가장 앞장서서 큰소리로 우생학을 선전 옹호한다. “부적합해 보이는 인간들은 박멸되어야 한다며, 백치들은 모두 자기핏줄의 마지막 세대가 되어야 한다고 단언”하기에 이른다. 1907년 우생학적 불임화가 인디애나 주에서 최초 합법화되고, 캘리포니아 , 코네티컷, 아이오와, 뉴저지 등 미국의 모든 주로 확산되었으며, 1968년부터 점진적으로 폐지되었으나, 지금까지도 미국 대법원의 우생학적 불임에 대한 신념은 유지되고 있다고 한다.
우생학 이데올로기는 지금까지도 죽지 않았다. 노스캐롤라이나 주 우생학위원회는 1970년대에도 흑인 여성들을 찾아 불임화 수술을 강행했으며, 2006~2010년 캘리포니아 주 교도소 150명의 여성을 동의 없이 강제 불임화 수술을 자행하였고. 2017년 테네시 주에서는 잡범들을 대상으로 불임화 수술 시행했다. 이 잔인성과 무자비함, 생명 파괴적 광란은 구토를 유발한다. 이것은 “한 남자의 자신의 생각에 대한 확신이 너무나 강한 나머지 이성도 무시하고 도덕도 무시하고 자기 방식이 지닌 오류를 직시하라고 호소하는 아우성도 무시한” 긍정적 착각, 그 자기 확신과 기만이 낳은 충격적 결과이다.
“긍정적 착각은 견제하지 않고 내버려 둘 경우 그 착각을 방해하는 것은 무엇이든 공격할 수 있는 사악한 힘으로 변질된다.” -202쪽
자연, 이 세계에 사다리가 내재하고 있다는 믿음, 비이성적 신성한 계층 구조에 대한 믿음을 버리지 않았던 이 질서 신봉자의 터무니없는 착각은 인간에 대한 차별과 폭력의 정당화가 되는 악의 힘으로 변질되어, 역설적이게도 질서가 아닌 혼돈이 세계의 진실임을 반증한다. 자연에 생물의 지위를 매기는 단 하나의 방법, 그 질서의 위계를 증명하는 것을 목적으로 했던 한 인간의 삶의 행적을 쫓다보면 우리는 놓치고 있던, 아니 보지 않으려 외면했던 진실을 마주하게 된다.
자기 긍정의 철학이 지닌 그 사악함이라는 부패한 미덕의 본질, 인간이 자신들의 편리함과 게으름을 회피하기 위해 그어 놓은 범주화라는 선들 너머를 보기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것, 이를 이해하고 실천하지 못하면 그것은 인류 공동체에 심각한 위협이 되어 자신들의 목을 조이게 된다는 것이다. 거기에는 어떠한 낙관도 긍정도, 정작 찾으려 하는 삶의 의미도 없는 세계라는 점이다.
‘Deus Ex Machina“ - 파국 직전의 기적적인 구원
그렇다면 ‘데이비드 스타 조던’이라는 인물이 세우려 했던 질서의 수단이었던 물고기, 어류(魚類)라는 것이 생명의 나무, 생명 진화의 가지에 과연 존재하기는 하는 것인가의 물음에 이른다. 1980년 대 이후 분류학의 그 엉터리 사다리는 무너지고 그를 대체한 분기학의 범주, ‘포유류, 양서류, 조류’, 에 어류는 없다. 물고기처럼 보이는 모든 것들을 과학적으로 타당해 보이는 한 집단에 몰아넣겠다는 고집으로 만든 어류란 단 한 번도 존재한 적이 없으며, 그런 범주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어류라는 이 완전한 헛소리, 무의미한 말에 인간의 역사가 농락당한 것이다. 인간은 직관에 대적하기에 취약한 생물이다. 자연의 복잡함과 그 혼돈을 이해하기 위해 편안함과 진실을 맞바꾼 것이 직관이다. 여전히 우리의 직관은 지구는 평평하고 하늘의 별들은 내 머리 위에서 돌고 있다고 여긴다. 복잡한 사고를 회피하는 인간은 무능력하고 게으르다. “뇌를 재배선하고 새로운 비전을 받아들이는 일은 그만큼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좀처럼 자기 직관, 즉 자기 확신을 무너뜨리는 데 적극성을 갖지 않으려 한다.
【열광적인 우생학자, 데이비드 스타 조던은 권력투쟁, 질서의 사다리를 놓지 않았다.
본문 200쪽 이미지 촬영】
어류란 자연의 복잡성을 감추고 그저 편히 살기위해, 인간은 실제보다 그들과 훨씬 멀다고 느끼기 위한 저열하고 경멸적인 단어에 불과하다. 상상 속 사다리에서 정상을 유지하기 위한 자의적이고 편리한 방법으로 타자를 과소평가하려는 기술적이고 정치적인 언어, 범죄와 폭력성을 은폐한 음흉한 언어적 파티의 마술쇼에 불과하다. 어류로 범주화 한 것들은 저마다 포유류거나 양서류거나 조류의 가지의 진화적 계통에 속 할 뿐이다.
“자연은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것보다 더 경계가 없고 더 풍요로우며 아무런 기준선도 그어지지 않은 것임을.” -257쪽
자신의 곁을 떠나버린 곱슬머리 남자를 기다리며, 의미없는 세계에서 삶의 목적, 살아야 할 이유를 발견하려 했던 한 여성의 이 치열한 탐구는 그토록 확신했던 남자의 필요로부터 자신의 다양성 발견, 즉 범주화된 젠더의 경계를 부수고 나올 수 있게 한다. “모든 범주는 상상의 산물이다.”
비로소 보이기 시작하는 세계의 진실, 저자 ‘룰루 밀러’가 발견한 것은 판단의 잣대를 들이밀지 않는 세계라는 타자와의 연결, 서로서로 가라앉지 않도록 띄워주는 관계라는 작은 그물망이다. 우리는 우리 발밑과 둘러싼 세계를 사실 거의 알지 못한다. 확실성이 아니라 회의와 수정 가능성이 열려있는 의심의 회로를 닦는 것이 아마 우리의 길일 것이다. “모든 자(Ruler) 뒤에는 지배자가 있음을 기억하고, 하나의 범주란 잘 봐주면 하나의 대용물이고 최악일 때는 족쇄임을 기억해야 한다.”는 이 겸허한 의심의 사유를 촉구하는 문장은 아마 이 책의 마무리 언어가 되기에 충분할 것이다.
그 어느 때보다 인간이 자신의 이기적 편의성을 위해 편협성과 무지에 터 잡은 오만이 세상을 휩쓰는 시대인 것만 같다. 이렇게 인위적으로 구분하여 수많은 장애와 장벽을 세우고, 자신들과 다른 타자들에게 가하는 폭력의 정당화를 지속시키고 있는 것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역겨움으로 고통스럽기까지 하다. 절망에 완전히 집어삼켜지지 않으려면 ‘운명의 형태를 만드는 것은 사람의 의지’라는 이 거짓말이 진실이기를 믿어야 한다는 것은 완전한 거짓말이다.
자신을 기만하지 않고, 직관 너머를 보기 위해 사고하며, 도덕적 정신 상태를 의심하는 삶, 편리와 범주화된 모든 척도를 재검토하는 것은 어쩌면 주도적인 자기 삶을 위해 놓치지 말아야 할 것들일 것이다. 읽고 난 뒤 우리들은 조금은 다른 세계관, 다른 이해를 할 수 있는 인간으로 변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직관과 진실의 충돌에 대한 치열한 통찰력이 빛나는 감동적 저작이다. 책을 펼치는 순간 감히 시선을 뗀다는 것은 어쩌면 신성 모독(?)이 될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