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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웰의 장미 - 위기의 시대에 기쁨으로 저항하는 법
리베카 솔닛 지음, 최애리 옮김 / 반비 / 2022년 11월
평점 :
한 그루의 나무와 꽃을 심으며 시시콜콜한 정원 생활을 말하면 그 수동적 삶의 무위(無爲)에 대해 여기저기서 비판의 소리들이 들려온다. ‘베르톨트 브레히트(Bertolt Brecht)’가 말했다던가? 서정시를 쓰는 것이 불가능한 시대가 되었다고. 그런데 이 문장이 결코 완전한 삶의 세태를 포착한 것은 아닌 것 같다. 이러한 관조의 삶을 아무것도 하지 않는 무관심, 도피, 회피로 단순히 해독하는 것에는 생산성, 혹은 불의에 대한 강박이 느껴지기도 한다. 조금 더 나간다면 물량화, 상품화의 가능성으로부터 일체의 벗어남으로 보는 관점에는 지극히 단순화되고 기성의 권위에 대한 굴종이라는 의심을 보낼 수 있다고 반론을 펼 수도 있다.
‘리베카 솔닛’은 이러한 반론에 공감하는 듯, ‘조지 오웰’의 에세이 「나 좋을 대로」의 한 소박한 일상의 장면으로 시작한다. “1936년 봄, 한 작가가 장미를 심었다.”라고. 총 7장에 걸쳐 이로부터 시작된 오웰의 삶의 면모들과 관련한 시대적 현상들, 그리고 불가분의 양상들을 통해 ‘장미(Roses)’로부터 파생될 수 있는 인간 세계의 무한한 양태들을 지펴내고 있다. 그것은 삶의 주된 임무와는 무관해 보이는 아름다움으로 향하고, 때론 나치즘과 파시즘으로 이어지기도 하며, 미학적 심미안으로, 생태학적 관심사로, 거짓말과 전체주의, 제국주의의 자기 기만성과 권력화 된 언어의 부패성과 폭력성으로 나아가기도 하고, 글쓰기의 소명이란 무엇일까에 이르는 무한한 사유의 장을 열어놓는다.
그런가하면 『동물농장』, 『카탈루냐 찬가』, 『1984』, 『파리와 런던의 밑바닥 인생』, 『위건 부두로 가는 길』, 『나는 왜 쓰는가』 등 오웰의 소설과 에세이, 일기, 기고문 등을 종횡누비며, 획일적으로 알려지거나 이해된 해독들과 다른 낯선 오웰을 들려주기도 한다. “정치적 기괴함에 대한 냉철하고 비판적 시각”에 철저했던 일관성의 작가는 꽃과 나무, 아름다움과 즐거움이라는 무위의 자연, 인간 자유의 가능성에 대한 희망을 추구한 사람으로 변모한다. 아니 양자의 균형을 이루려 실천했던 인물임을 살려낸다. 암울해 보이기만 하는 『1984』의 흑백 전경이 햇살 가득한 총천연색 컬러로 보이기 시작할 만큼.
영국 시골 마을, 오웰의 하류 지향의 삶을 대변하는 1936년 장미를 심었던 월링턴의 집을 향해 거니는 리베카의 걸음처럼 이 책은 한 인간에 대한 깊은 이해와 관대한 애정의 산물이다. “글 쓰는 본업 외에 내가 가장 좋아하는 일은 정원 가꾸기, 특히 텃밭 가꾸기이다.”라는 오웰의 공개적 표현처럼 그에게 꽃과 나무를 가꾸는 일은 충직한 자유의 기쁨이었으며, 이러한 믿음과 태도는 초기작에서부터 마지막 작품인 『1984』에 이르기까지 곳곳에 스며들어 표현되고 있다고.
가장 많이 읽혔을 『동물농장』의 배경인 월링던(willingdon) 매너 농장의 큰 헛간은 실제 오웰의 월링턴(Willington) 시골집 모퉁이를 돌아서면 당당하게 서 있다고 리베카는 보고하고 있다. 가공의 장소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에는 영국의 전원 풍경을 상기시키는 장면들이 있으며, 식물을 채집하고 새를 구경하며 작품을 키우던 즐거움들이 담겨있다. 『숨 쉬러 나가다』에는 주변의 자연 환경에 매혹된 인상들을 환기하는 장면들이 길게 서술되고 있기도 하다. 오웰에게 농장과 목초지와 물방앗간 등 시골의 전원은 인간의 자유라는 풍요로운 삶과 다른 것이 아니었음이다. 정치와 이념의 행위들로 인해 빚어지는 거짓과 왜곡, 암투와 기만의 흉측함 등, 인간을 옥죄고 강요하는 불의한 권력 행위를 비판하는 것은 바로 이것을 위한 것이라 할 수 있다고 리베카는 이해한다.
오웰의 장미는 이 책에서 일곱 번의 변신을 도모한다. “1924년은 한 여자가 장미를 사진 찍었다”고 시작하며, 볼셰비키에 헌신했던 사진작가 '티나 모도티(Tina Modotti)'의 일생을 쫓으며, 장미는 “인간을 지탱하는 종종 훨씬 더 섬세하고 손에 잡히지 않는 무엇“으로서, 또한 ”즐거움 속에 속하는 그런 것들을 추구할 내적 삶”의 의미로 당대의 노동운동과 사회주의 페미니즘 운동에서 출현한 상징어 ‘빵과 장미(Pan & Roses)'속에서 풀어 놓는다.
또한 “1946년, 한 독재자가 레몬을 심었다. 아니 심으라고 명령했다.”로 시작되는 장(章)에서는 전체주의 독재자 스탈린의 '압하야기 별장'에 심은 아열대 종인 레몬나무를 정원사들로 하여금 살아남도록 매일 채근했던 일화를 소개하며, 추위에 적응하지 못하고 죽어가는 레몬 나무로 인한 처벌을 면하기 위해 거짓말을 하여야 했던 정원사들로부터 거짓말 위에 세워지는 것의 실체가 무엇인지를 일깨우기도 한다.
이것은 오웰의 에세이 「문학의 예방」으로 시작하여 『1984』로 이어지며 ‘거짓말이란 전체주의의 명료한 필수적 요소’임을 입증하는 데 이른다. “사실상 탐욕스런 지배계급은 자기 지위를 유지하기 위해 실수란 없다고 생각되어져야 한다고 여기며,....사건들을 새로 짜 맞추는 일에 전념한다. 이에 따라 과거를 계속 변조하며, 결국에 가서는 객관적 진실의 존재 자체를 믿지 말 것을 요구하기 이른다.”는 것이다.
이 지배 권력이 하는 거짓말은 여느 범인(凡人)의 거짓말과는 차원이 다른 공포의 문제라는 것이다. 아마 다음의 인용 문장은 왜 통치자가 하는 거짓말이 반드시 지탄되어야 하는 것인지에 대한 하나의 이해로 충분할 것 같아 길게 인용해 본다.
“거짓말로 이루어진 체제가 그 치하에 사는 사람들로 하여금 다른 사람들의 생각 및 언어에서 진실과 정확성을 찾기를 포기하게 함으로써,...지적 굴복, 순응성, 냉소주의, 무엇도 믿지 않으려는 태도, 모두 다 썩었다는 단언의 형태를 취하게 만든다. ...진실과 허위의 구분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되는 세상이 열리는 것이다.” -301쪽에서
리베카는 자신의 글쓰기 스승이라 할 수 있는 오웰의 글 모두에 공감하고 무조건 찬양하는 것은 아니다. 그의 모든 서평과 문학 에세이에서 여성 작가들이 거의 고려되지 않았다면서, 인종차별에서 보였던 명확한 인식과 달리 여성에 대해서는 침묵하며, 당대 여성들의 운명성을 묵과했음에 아쉬움을 토로하기도 한다. 그럼에도 오웰의 작가로서의 삶은 위선과 회피에 대한 통상적 혐오였다고 정치적 삶에서의 거짓과 제도적 기만을 쓸 수밖에 없었음을 지적하며, 그의 스페인 전쟁 참전기록이랄 수 있는 『카탈루냐 찬가』를 통해 설혹 자기편이라 할지라도 그것의 부패를 알아보는 시각의 소유자였음을 확신하기도 한다.
이 책의 한 절에 불과하긴 하지만 그 함의는 질적으로 엄청난 무게를 지니고 동시대에 출간된 ‘한나 아렌트’의 『전체주의 기원』과 ‘조지 오웰’의 『1984』가 지닌 동일한 관점, 즉 진실과 허위 사이의 구분을 무너뜨림으로써 인간의 사유와 경험 능력을 동시에 상실시켰음을 날카롭게 드러내어 알려주기도 한다. 이 두 권의 책은 발표된 지 70여 년이 지난 오늘 더욱 현실적인 목소리가 되어 우리들의 앎의 지각을 깨운다.
여기에는 바로 지금 아주 깊게 다가오는 지적이 있는데, 단어의 죽음과 관련된 것으로 『1984』에 등장하는 진리부의 ‘뉴스피크’, 즉 언어의 단축이 일으키는 궁극의 목적에 관한 것이다. 주인공 ‘윈스턴 스미스’의 동료는 “자네는 뉴스피크를 만든 목적이 사고의 폭을 좁히는 데 있다는 걸 모르나?”라고 반문하는 장면이다. 모든 단어는 일련의 직간접적 관계를 나타내는 것이며, 생태계의 한 종이다. 즉 한 단어의 죽음은 그만큼 언어와 사고의 가능성을 깎아내는 것이며, 종국에는 사고 자체가 불가능하게 되어 체계가 저절로 무너져 내린다는 점이다.
한국 사회의 '공정(Justice)'이란 언어가 남용되어 피로감과 함께 그 의미를 상실케 하는 것은 부정한 권력의 이와 유관한 전형적 전술이다. 이제 공정을 말하면 아무런 의미도 없으며, 마치 소용없는 불필요한 단어처럼 되어버리고 있는 지경이다. 공정이 없으니 불공정이 정상이 되고, 사회는 불평등과 차별의 불의를 알지 못하게 된다. 범죄와 타락이 버젓이 횡행하는 사회, 그것이 전체주의 사회이고 독재 사회이다. 지금 사회는 보이지 않는 내부의 부패가 그 어느 때보다 심화되고 있을 것이다.
사실 이 책은 아름다움과 삶의 자유에 대한 우아한 수상록이라 해야 한다. 오웰의 만년 삶의 거처였던 스코틀랜드 외딴 섬 주라의 작은 농장 주택 반힐로 돌아가며, 인적 없는 비 내리는 날, 젊은 아내 아일린의 무덤 앞에 쭈그리고서 땅을 파고 폴리앤서 장미를 심는 마음 아픈 장면으로 돌아가야 될 것 같다. 가장 가까운 곳의 전화도 12KM가 떨어진 곳, 그러나 그곳은 꽃과 나무와 농장과 자연이 있는 곳이다. 리베카는 그곳이 세상에 엄격한 시선을 보내기 위해 준비해야 곳으로서 오웰에겐 생의 균형을 맞추는 장소였다고 읽어낸다.
아마 『1984』에 이러한 문장이 있었는지 낯설기까지 하지만 “무익한 행동이라 해서 무의미하다고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누군가를 사랑하는 것이고, 달리 줄 것이 없을 때라도 사랑만은 줄 수 있는 것이었다.” 며, 윈스턴 스미스가 사랑을 나누던 골든 컨트리에서의 개똥지빠귀가 딱히 목적없이 노래하는 것을 들으면서 두려움과 상념에서 벗어나 순수한 존재의 상태로 변화하는 대목에서 오웰이 인식하는 자연의 삶이 그의 건조해 보이는 작품에서조차 어떻게 숨 쉬고 있는지를 발견하게 한다.
오웰의 ‘장미’는 이제 대변신을 한다. “효용성의 바깥에 있는 무용성이란 일종의 저항이며, 더 미묘한 목적에 봉사하는 것”이라는 발견이다. ‘이건 그들이 미처 바꿔놓지 못한 역사의 한 조각이야.’, 그 어떤 권력도, 그 어떤 체제도, 간섭하거나 영향을 미칠 수 없는 꽃과 나무를 가꾸는 것은 오웰의 인간으로서의 기쁨이자 즐거움, 불가침의 자유였으리라는 것이다.
리베카는 오웰이라는 한 인간의 저작과 사사로운 일상의 기록과 현장을 추적하면서 결론을 맺는다. “인간됨의 본질은 완벽을 추구하지 않는 것이고, 때로 신의를 위해 기꺼이 죄를 저지르는 것이며, 정다운 육체관계를 불가능하게 만들 정도로 금욕주의를 밀고 나가지 않는 것이고, 결국에 생에 패배하여 부서질 각오를 하는 것”이라고.
결코 삶을 이상화된 것으로 바라보지도 않았으며, 자연과 인간의 그 불완전한 아름다움을 알아보는 능력을 가졌던 한 위대한 작가의 삶의 행적으로부터 정말 소중하고 귀한 삶의 선택이 무엇인지를 이 맑은 시선을 지닌 저자는 진정 향기로운 인생에 대해서 각다귀처럼 변질된 오늘의 우리들에게 우아하게 제시한다. 이 책을 읽으며 나는 안팎으로 차가워진 세상에서 삶의 온기를 되찾으며, 그 길을, 삶의 도리를 발견하는 더없이 따뜻하고 소중한 시간이었다고 기록한다. 아름답다는 말은 이러한 글에 사용하는 표현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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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기] 그 어느 때보다 바로 지금의 한국사회는 '조지 오웰' 읽기를 필요로 하는 것만 같다. 반대자는 절멸의 대상으로 보는 것, 비판의 언어는 공허한 단어가 되어 소멸시키려 하는 것, 검찰이라는 공권력을 거느린 전체주의 사회의 길목에 접어든 인상이다. 뒤늦은 감은 있지만 조지 오웰 전집이 H출판사에서 미흡하지만 출간 예정인 것 같다. 환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