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동북아, 니체를 만나다 - 19세기 말과 20세기 초 동북아시아 사상의 전이와 재형성
김정현 외 지음 / 책세상 / 2022년 12월
평점 :
반(反) 시대적으로 사유하고... 시대정신, 지배적 이상과 대결하면서 거기에 돌파구를 내는, 그런 점에서 ‘시대의 양심’이 되는 자들이 많아지는 세계를 그리며. -필리아(2022.1.14.)
시대정신 또는 시대의 가치가 바뀌어야 하는 순간이 온 것이 아닌가하는 목소리는 사실 매양 들려오는 진부하기 이를 데 없는 습관적 문구처럼 들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이대로의 정치적, 문화사회적, 도덕적 가치체계가 새롭게 마주하게 되는 세계와 조화롭지 못한 이질감을 체감하게 되고, 이에 대한 정신적 돌파구를 찾으려하는 것은 생명의 유지존속이라는 본질을 지닌 존재들에게 당연한 의문이지 않을 수 없다.
시간이 지나고 나면 이러한 고민의 흔적들은 인간 정신사의 어떤 흐름의 족적을 남기며, 바로 지금의 가치가 형성된 근원적 사상이 무엇이었는지 드러내준다. 책은 한국을 비롯한 일본, 중국의 19세기 말, 20세기 초, 사회정치적 맥락과 깊은 연관을 맺게 된 정신사로서 ‘니체’의 독해와 수용과정의 연구를 통해 이 지역의 역사적 문명적 격변의 저류를 탐색하고 있다. 이로서 우리는 역사의 반성적 성찰과 그 구성원들의 정신에 흐르고 있는 지배적 사상을 목격할 수 있게 된다. 설혹 탐색과 연구, 근원이 된 텍스트나 아카이브의 해석 상 오류가 있었을지언정 그러한 실체로 수용되었기에 그 자체가 곧 시대정신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1. 일본의 니체 수용
어느 시점에 누가 어떤 관점에서 하나의 사상을 접하고 그것을 공개적 지면을 통해 자국에 소개하였는가는 결코 간과할 것이 아니다. 그것을 접한 사람의 다소(多少)를 떠나 사상적 관심과 비평의 촉발을 가늠하게 되고, 이러한 과정을 통해 사상의 확산이나 외면을 파악하는 단초(端初)가 되기 때문이다. 일본의 경우 신학적 배경을 지닌 러시아 모스크바 대학 유학생인 ‘고니시 마스타로(小西增太郞)’가 1893년 <유럽의 대표적 두 명의 도덕사상가 프리드리히 니체 씨와 레오 톨스토이 백작의 견해비교>라는 글을 니콜라이 신학교 기관지인 《심해》에 게재한 것이 최초인 것으로 소개되고 있다.
니체를 언급하는 최초의 이 글은 이후 일본에서 니체의 사상을 어떻게 수용하는지에 대한 흥미로운 변화를 관찰토록 하는데, 톨스토이 사상과 비교의 측면에서 말하고 있다는 측면에서, 또한 ‘도덕 사상’이라는 틀에서 바라보고 있다는 점이며, 특히 이 최초의 관점이 거의 절대적이라 할 만큼 전환되고 있다는 점이다. 고니시는 문학비평의 권위자인 모스크바 대학교 지도교수인 ‘니콜라이 그롯’의 제자이자 톨스토이와 《도덕경》을 함께 번역하며 교류를 쌓아갔던 인물이다.
한편 1890년대의 러시아는 “주도적 이념적 경향이 없어진 이데올로기 진공상태”였기에 러시아의 정치적 사회적 개혁의 필요성에 답하기 위한 정신적 갈망이 절실하게 요구되고 있었던 시기라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니체의 이타주의적 도덕비판에 대해 당대의 지식층은 부정적 태도가 주류였으며, 이를 대표하는 인물이 그롯이라 할 수 있다. 주류 지식층의 이러한 부정적 니체의 시각 속에서 철학자 ‘프레오브라젠스키’는 1892년 <프리드리히 니체: 이타주의 도덕 비판>이라는 논문에서 상대주의적 가치로서의 도덕과 이타주의 내면에 숨겨진 허위를 주장한 니체에 공감하면서 니체로부터 새로운 이상의 길을 발견할 수 있음을 주장한다.
이것으로 촉발된 주류의 비판론 중 하나가 그롯이 쓴 <우리시대의 도덕적 이상들: 프리드리히 니체와 레프 톨스토이>며, 여기에서 그는 두 사상가를 영적 적대자로 비교하며 니체를 부도덕의 사도, 금욕주의와 이타주의의 기독교적 가치를 전복시키는 악마로 묘사한다. 반면 톨스토이는 종교적 가치의 담지자이며 도덕적 이상의 최종적 승리를 위한 도덕적 세계관의 대표자로 제시한다. 즉 고니시가 최초로 일본에 소개한 니체는 이러한 그롯의 도덕적 가치관을 그대로 수용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러시아의 필터를 낀 니체, 부정적 니체, 톨스토이의 도덕적 이상주의를 내세우기 위한 반면교사로서 등장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니시는 니체와 톨스토이를 ‘도덕 개혁론자’로 공히 인식하고 있었으며, 욕망에 대한 견해차이가 도덕과 종교에 대한 관점의 차이를 낳게 되었음을 파악하고 새로운 세계를 위해 ‘도덕 개량’과 ‘정신의 개량’을 주장했다. 특히 <유럽에서의 덕의 사상의 두 대표자>라는 논문에서 니체의 글을 길게 인용하며, ‘인간 개량’과 같은 우승열패를 인정하고 강자를 두둔하는 초인의 필요성과 톨스토이의 편파적 유심론과의 균형을 역설하기도 했다.
이러한 사상의 최초 수용기인 고니시 이후에 니체의 일본 수용에 커다란 영향을 끼친 인물로서 도쿄제국대학 철학과 출신의 ‘다카야마 조규’는 니체를 ‘위대한 문명비평가’로 평가하면서 “강대한 개인의 의지의 힘이 드러나는 곳에는 반드시 영원한 생명이 있다.”며, 개인주의와 생명주의를 결부시키며 ‘미적 생활론’이라는 본능의 만족이 곧 미적 생활이라며 일본의 제국주의적 사상의 기틀을 제공한다.
조규의 이러한 사상적 토대가 소위 일본주의로 불리는 야마토(大和) 민족의 포부 및 이상을 표명하는 일본의 국민적 실행 도덕의 원리 기초다. 이것은 후일 사회진화론과 결합하여 윤리적 제국주의 이론으로 변질되고, 일본 제국주의의 양면성, 즉 사회적 이중성이라는 기묘한 사회공익론을 낳는다. 중요한 것은 국가이고 국가의 이익이 합치되는 행위만이 선이며, 자국의 이익을 위해서는 타국의 이익을 희생시켜도 된다는 제국주의 정당론으로 나아간다. 세계 문명 및 정치 참여를 위해서 타국을 점령하는 것은 침략적 의미가 아니라 문명화라고 주장하기에 이른다. 일본은 서구의 침략적 팽창주의와는 다른 아세아 국가들의 개혁 유도 촉진을 돕는 자연적 팽창주의라고 니체의 힘에의 의지를 주장하기도 한다.
니체가 제국주의 윤리의 사상 기반을 제공한 사상가로 변질되어 수용된 것이다. 수용 초기에는 반도덕주의자라는 낙인을 찍어 부정적 이미지를 씌우다 청일전쟁, 러일전쟁의 승리로 지역 패권자임을 인식하기 무섭게 낙인은 찬양으로 급속하게 전환된다. 사실 니체 사상의 실체를 수용한 것이라기보다는 텍스트의 수많은 문장과 논의에서 하나의 논리적 틀을 길어오는 수단으로 활용한 것이라 보는 것이 적절하지 않을까?
일본인 개인의 자유와 인권 보장을 니체로부터 배우고, 이를 실행하기 위해 아시아 패권 장악이라는 침략주의적 야만성을 정당화하는 논리 또한 니체를 기반하고 있는 일본의 이중성을 바라보면서 오늘 니체의 철학을 읽는 나는 당대 일본인들의 실로 어처구니없는 그 교활한 무지의 역사와 정신에 헛웃음만을 짓는다.
2. 중국의 니체 수용
중국의 니체 수용의 과정에서는 독특한 점이 발견되는데, 니체 당사자도 부정했고, ‘디르크 존슨’과 같은 니체 연구자들이 진화론과의 친화성을 부정했음에도 이에 못지않은 진화론과 니체의 친연성에 대한 연구가 수용 초기 중국학자들에게 강렬한 영향을 미쳤다는 것은 21세기 사람으로서 아이러니를 느끼지 않을 수 없는 점이다.
서구 열강에 굴욕적인 개항과 조계와 같은 조차지를 내놓아야 하는 치욕의 삶을 살아가야 했던 중국인이 서구 제국주의자들의 이론적 수단이 된 헉슬리와 스펜서의 사회진화론에 열광했다는 것이다. 국가의 집단적 힘을 기르기 위해서 그 구성원인 개인, 국민의 소양이 개선되어야 한다는 관점인데, 수천 년 노예로 길들여져 온 의존과 복종의 정신을 깨부수고 스스로 자유로운 존재임을 인식하는 자유의지의 존재로 부상해야 한다는 사고다. 사회진화론자인 량치차오의 민주주의 실현은 부정하면서 국민의 계몽, 경쟁을 통한 사회개량을 주창했던 엉터리 같은 이들 초기의 과정은 여기서 줄이기로 하고, 1907년 니체의 견해를 직간접적으로 시사한 ‘루쉰(魯迅)’의 최초의 논문을 통해 니체의 중국 현지화와 이론적 해석에 관심을 집중해보도록 하겠다.
루쉰은 량치차오의 사회진화론 사상을 반성적으로 비판하면서, “인간적 각성이 없으면 중국이 일본과 같은 강대국이 되더라도 수성(獸性)의 일면을 벗어날 수 없다.”며, 개인의 주체성과 의지 확립, 정신적 인간의 세움(立人)을 통해서만 가능하다고 니체의 초인 사상에 공감을 표시했다. 다시 말해 루쉰은 니체를 통해 “국민정신 개조의 사상자원을 얻어 중국 국민성 개조”라는 새로운 과제를 열었다.
중국 역사의 대변혁의 시기인 1915년부터 시작된 신문화운동으로 시작된 5.4운동 전후의 시기인 1918년부터 1925년은 반봉건, 반전통의 목소리와 함께 국민개조 운동이 본격화된 시기라 할 수 있다. 시대의 각성자, 니체의 초인을 닮은 《광인일기》에서부터 루쉰은 니체의 패턴을 그의 작품의 중심축으로 하였다. 중국 전통 가치의 죽음 선언, 광인일기의 문장에는 니체의 《차라투스트라》서문 3절의 문장은 물론 많은 구절들이 흡사할 만큼 모든 가치의 재평가, 의식의 완전한 전환, 국민의 후진성이라는 말인(末人)의 전형성을 비판하며 국민의 무감각과 무지를 비판했다. 이밖에도 《들풀(草野)》은 판박이처럼 중국화 된 《차라투스트라》로 불릴 만큼 니체의 정신적 기질을 통해 니체 철학사상을 구국과 존망을 위한 중국 사회의 실천에 끌어들였다.
그러나 대중이 읽어야 하는 소설 작품이 읽히지 않았다. 중국 인민은 전통과 노예적 삶에서 깨어나려 하지 않았을뿐더러 자신들의 가치 재평가와 전통에 반항하는 사상, 고독하고 절망적인 정서로 그득한 소설은 대중이 수용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더구나 ‘마오둔(茅盾)’ 같은 기성의 작가는 《광인일기》를 ‘기발하고 괴팍한’것이라며 폄훼하기까지 했다. 루쉰의 니체 수용과 대중 전파는 일본의 그것과는 확연히 다른 양상임을 알 수 있다. 필터를 낀 제2, 제3의 왜곡된 이해가 아니라 제1의, 자신의 것으로 소화한 독자적 수용이라는 점이다.
루쉰의 니체 패턴을 거부하던 초기의 중국 대중과 달리 점차 북경대를 비롯한 대학생, 해외 유학 엘리트, 지방 청년층에까지 독자층이 점차 확대되면서 루쉰에 대한 사회적 공감대가 높아지고, 1923년 이후 루쉰은 경전적 인물로 자리잡기에 이른다. “루쉰의 책 두 가지만 있으면 서점을 열어도 얼마든지 장사가 된다.”고 할 정도로 그 영향력이 커지면서 중국의 니체 루쉰이라는 인식이 형성되고, 새로운 가치와 문화 개혁에 대한 대중적 이해가 넓어졌다는 점이다.
이는 오늘의 우리에게도 주목하게 하는 부분인데, 일본의 수용이 신학과 철학계로부터의 수용이었는데 반해, 중국은 문학의 대중화를 통한 인식의 대중적 개혁이었다는 점이다. 일본은 엘리트 지배계층의 사회 국가적 차원의 이념적 도구였다는 점에서 위에서 아래로의 수직적 주입과정이라 하겠지만 중국은 아래인 대중의 점진적 수평적 확산이라는 점에서 그 수용의 과정은 판이하게 다르다 할 수 있으며, 이는 니체의 독법에 깃든 이해와 어떤 관계가 있음을 상상해 볼 수 있게 한다.
니체의 중국화 확장에 루쉰만큼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있는데, 니체의 중국화 과정에 획기적 역할을 한 현대문학의 대가인 ‘선총원(沈從文)’이다. 루쉰과 접촉하지 않은 인물이지만 자신의 사상을 니체의 개인 중심의 과대고립주의라 하였으며, 末人들의 우매함과 봉건적 예교에 대한 본질적 거부와 비판이었다. 그는 《중국인의 병(中國人的病)》에서 “중국인의 병은 봉건적 전제와 봉건문화의 통치하에서 자유로운 사색, 자유로운 연구, 자유로운 창조의 주체 정신이 결여된 것”이라며, 무지와 미신에 매여 있는 인민의 삶을 비판했다.
선총원은 사회 공리적 측면에서의 니체의 수용을 예술적 심미와 생명관으로 니체를 발전, 중국화를 추진한 인물이다. 어떤 의미에서 중국은 일본의 그것과는 다른 진정한 니체 정신의 폭넓고 깊은 이해에 기반을 둔 점진적 평등적 확산이라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3. 식민지 조선의 니체 수용
20세기 전후의 시기란 유럽은 물론 지구촌 전체가 새로운 도전에 직면한 시대라 할 수 있다. 서구는 산업사회로의 전환이후 야기된 물질문명에 대한 회의와 자본적 질서의 주도자로서 소비기지의 개척이라는 제국주의적 야욕으로 세계적 갈등을 만들어내는 장본인이었으며, 동북아 지역은 이러한 도전에 상처를 입고 고통을 겪던 혼돈의 시기였다.
또한 메이지 유신을 통한 근대화와 산업화와 함께 지역 팽창의 욕망으로 부풀었던 일본의 주도적 세계질서의 참여나, 오랜 전통적 질서와의 고별과 새로운 질서의 수립을 스스로 사유할 수 있었던 중국과는 달리 식민지 조선은 그 어떠한 질서에도 주체적으로 참여, 사유할 수 없었던 한계를 지닌 소외된 지역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조선은 갑오경장, 동학혁명 등을 겪으며 민권과 개인의 자유에 대한 시야가 싹트기 시작했으며, 일본에 의한 강제병합에 의한 민족적 반성의 시기이기도 했다. 따라서 인민 개체의 관점에서 일본에 의해 간접적으로 유입된 근대화와 이를 산업화라 부를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물질자본의 수용에 노출되어 착취되는 현실을 모를 수는 없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결국 니체의 수용이라는 측면에서 당대의 일본과 중국과 나란히 논의한다는 것에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고 해야 하겠다.
이처럼 식민지 조선에 니체가 처음 소개된 것도 제국주의 윤리라는 일본의 극우 국수주의자인 ‘우키타 가즈타미(浮田和民)’가 쓴 <윤리총화>의 4개장이 번역되어 1909년 《서북학회월보》에 소개된 것이 처음이지만 이것이 어떤 반향을 가져온 것인지 이 책은 설명하고 있지 않다. 아마 기록의 의미 이상은 아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나마 지식계층의 논의가 시작된 것은 일본 유학생들이 발간한 《학지광(學之光)》에 1914년 ‘최승구’가 “사회진화론의 맥락과 생명주의와 문화주의의 영향이 중층으로 얽힌 식민지 지식인 문제”를 드러낸 것이 처음이라고 소개하고 있다.
이후 재일유학생인 주종건, 현상윤, 이광수, 전영택 등 다섯 명이 니체를 논의한 것이 전부였던 모양이다. 우생학적 인종주의 및 제국주의 합리화 논리의 기반인 사회진화론을 맥락으로 했다는 것도 이들이 일본 지식계층의 영향을 벗어나지 못했음의 반증일 것이며, 고작 그것으로부터 “침략적 서양에 저항하기 위해 강자가 되기 위한 실력 양성”이었다는 논의도 사실 실소를 멈추지 못하게 한다. 어쩌면 당시 일본의 평범한 대중들이 지나며 주절거리는 일반적 목소리 이상의 것으로 여겨지지 않는가?
더구나 이들의 자각이란 것도 고작 ‘이쿠다 조코(生田長江)’가 쓴 《근대사상 16강(近代思想16講)》이라는 루소, 니체, 토스토옙스키, 입센, 다윈, 졸라, 플로베르 등의 사상을 소개한 책에 기반한 조잡한 제3차 번안된 인식에 불과했으며, 일본에 수용된 서양 사상에 대한 이해가 전부였던 것으로 이해된다. 여기에는 최승구의 발표된 글을 통해 “자아의 혁명 가능성 모색”이라며 식민지 청년의 저항의식을 과장하여 소개하고 있지만, 일본이 러시아 필터를 낀 니체를 이해하였듯이 일본의 필터를 낀 니체와 서구 사상의 이해였음을 부정할 수 없다.
현상윤의 새로 태어나기 위한 조선의 강력주의 주장이나 주종건의 니체적 개체의 자아실현, 이광수의 '에른스트 헤켈(Ernst Haeckel)'이 주창한 국가주의적 사회진화론에 토대를 둔 약육강식의 원칙에 대한 운영의 논의처럼 왜곡된 니체의 수용, 즉 강자의 특권에 대한 경도는 이후 이들의 행보가 반민족적인 민족 배신으로 드러나듯 식민지 조선의 수용이라 할 것이라 할 수 없을 것이다. 특히 식민지 조선이 아닌 일본 본토에 있는 유학생의 지식인 흉내에 불과한 것이라 폄훼하는 것이 그리 잘못된 인식은 아니지 않겠는가? 책은 이들의 글을 기반으로 식민지 청년들의 문제인식이라 설명하고 있지만 사실 과장된 수사에 불과한 것으로 이해된다.
오늘날에도 니체는 이러한 곡해와 왜곡, 니체의 원서(혹은 자기말로 완역된 1차 번역서 포함)를 읽어보지도 못하고 남의 말을 귀동냥한 것으로 마치 니체를 아는 것처럼 주절거리는 사람들의 오류가 그대로 전해지는 형국을 무수히 발견하게 된다. 이러한 무지를 위장한 겉핥기식 이해가 어떤 사상의 수용으로 이해되는 것은 냉정한 인식이라 할 수 없지 않을까? 동북아 3개국이 하나의 사상을 자신의 것으로 수용하는 역사적 과정을 한 권의 책을 통해 탐사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준 이 책의 저자들에게 고마움을 느낀다. 그럼에도 여전히 아쉬운 것은 저자들도 언급하고 있지만 본격적인 자료 조사와 연구가 아직 일천한 단계에 머물러 중국과 일본의 수용사에 비교할 것이 되지 못하고 있다는 점도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오늘 우리는 정신적 결핍에 놓여있다. 마치 1890년대의 러시아가 이념적 진공상태에 놓여 거듭되는 반란과 혁명으로 인민이 신음하던 시기와 겹치는 것은 나만의 환각인 것일까? 철학 부재의 시대, 사상 결여의 시대, 정치리더와 그 일꾼들의 사상적 무지는 마치 나침반을 잃은 배의 좌초를 예견케 하듯 정말 우려스럽기만 하다. 일본의 수용, 중국의 수용에서 우리는 그네들이 자신들의 윤리적 가치를 정립하기 위해 어떠한 과정을 겪었는지, 그네들이 어떤 지적 노력에 참여했는지는 아마 바로 지금 중요한 시사점이 될 것이다.
동일한 역사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루쉰이 니체의 영원회귀를 어떻게 그의 문학에 남겨놓았는지, 그것이 중국 인민대중의 정신에 어떻게 영향을 미쳤는지 외면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나는 루쉰 전집을 다시 책장에서 끄집어낸다. 그리고 번역본이 거의 없다시피한 선총원의 유일한 단편집을 읽는다. 니체의 초인과 새로운 윤리를 어떻게 구현하려 하고 있는지. 몇 차례 이 저술 《동북아, 니체를 만나다》를 샅샅이 읽는 기회를 가져야 할 것 같다. 뜻 깊은 저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