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사랑의 완성
로베르트 무질 지음, 최성욱 옮김 / 북인더갭 / 2015년 3월
평점 :
이 작품집에 대한 리뷰는 두 차례에 나눠 기술하기로 했다. 그 까닭은 무질이 생전 의도하여 출간했던 의지에 따름이기도 하고, 감상자 역량의 한계이기도 하다. 우선 「사랑의 완성」과 「세 여인」에 대한 감상을, 그리고 두 번째에 『생전의 유고』에 실렸던 「지빠귀」를 비롯한 15편의 단편들에 대한 리뷰로 분할하여 남긴다.
『사랑의 완성』 ❶ - 「사랑의 완성」과 「세 여인」에 대해
Robert Musil (Klagenfurt, 1880 - Ginebra, 1942)
무질의 작품을 읽기에 앞서 전통적 형식과 내용을 벗어나 ‘이야기 될 수 없는 것의 이야기’, 즉 사실주의적 이야기로는 삶의 심연에 이를 수 없다는 그의 문학관에 대한 이해의 선(先)지식이 요구되는 것 같다. 무질에게 문학은 경험적 현실의 재현에 있는 것이 아닌 인간의 인지능력이 미치지 못하는 현실의 포착 노력이며, 개념을 벗어난 사고의 표현을 시도하는 것이라는 점이다, 이것이 독자들이 무질의 작품을 회피하게 하는 요인일 것이다.
특히 인간 이성이라는 합리적 논리에 길들여진 오늘의 사람들에게 인과적 논리에 대한 혐오나 비논리적 감성, 비현실성, 불가능의 경계를 향해 돌진하는 무질의 문학은 “이성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것을 작품으로 쓸 필요는 없다.”는 그의 선언처럼 어떤 확정적 의미를 찾을 수 없게 한다. 따라서 그의 소설은 아무것도 확정된 것을 말하지 않으며 단지 시도된 표현들의 여정에서 생성되는 것이기에 독자 각자의 발견에서 비롯되는 것이 된다. 참으로 어려운 말이기도 한데, 이야기 아닌 이야기 그 자체를 통해 스스로 만들어지는 어떤 확실성을 발견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아마 이 책의 표제를 『사랑의 완성』으로 한 것은 무질을 대표하는 문학론적 의미를 따르기 위해서였던 것으로 보인다. 무질은 학문적 개념체계, 즉 이성의 논리 강요를 폭력으로 비유하며, 문학의 논리를 사랑에 비유하듯, 그의 소설들은 다분히 비논리적 감성, 어떤 비의를 향하고 있다. 그러나 이성을 표방하는 학문의 ‘현학적 정확성’은 오히려 객관성이라는 환상에 의존하고 있으며, 오히려 ‘환상적 정확성’을 표방하는 문학이 사실에 근거를 두고 있다는 그의 생각처럼 문학이야말로 작가에 의해 창조된 세계의 완전한 모습임에 공감할 수 있다.
1. 「사랑의 완성」
무질의 작품 선집인 이 책은 그가 당초 발표했던 작품집의 의도가 드러나지 않는다. 단편 「지빠귀」가 생뚱맞게 별개로 제일 앞에 수록되어 있고, 각기 별도로 발표되었다가 후일 「세 여인」이라는 단편집에 묶여 출간된 작품이 두 번째이고, 「사랑의 완성」은 『합일』이라는 단편집을 위해 무질이 의도하여 개작하고 집필한 「조용한 베로니카의 유혹」과 함께 구성된 작품으로 독립하여 세 번째에 수록되어 있으며, 끝으로 「생전의 유고」는 무질이 분류하여 수록한 30편의 작품 중 그 절반만이 무질서하게 구성되어 있다.
출판사 혹은 번역자의 의도는 사건이나 행위 대신 회상과 상상에 의해 진행되는 「조용한 베로니카의 유혹」의 선형적 시간 순서를 파괴하는 전개가 독자에게 이해될 수 없다고 판단하여 배제한 듯하다. 또한 『생전의 유고』중 부분만을 선택한 까닭도 이러한 연유로 이해되지만, 이러한 편집은 어떤 의미에서 오만함이고 부주의함으로 읽힐 수 있다.
어쨌든 무질의 작품에 대한 출판시장의 척박함은 사실 한국만의 문제는 아니지만, 미완성 장편 『특이성 없는 남자』를 제외한 그의 작품집 하나 제대로 된 것이 없는 출판독서시장의 현실은 많은 아쉬움을 남긴다. 수록 순서를 바꿔 표제작인 「사랑의 완성」에 대한 감상을 시작해야 할 것 같다. 이 작품은 출판사의 청탁에 의해 2년에 걸쳐 집필된 두 편의 단편으로 출간된 모음집 『합일(Vereinigungen)』 중 한 편이다.
이 소설은 “이야기에 대한 혐오에서 썼다.”고 할 만큼 실험적 시도가 지나치게 압도한 나머지 소설적 긴장이 결여되어있음을 작가도 고백할 만큼 독자의 이해를 불가능하게 하는 소설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러한 사정은 당대의 문제일 뿐이지, 무수한 실험적 시도의 작품에 익숙해진 오늘의 독자에겐 그리 낯선 것도 아니며, 독해 불능에 빠질만큼 어떤 난해성을 지닌 작품이 아니라 할 수 있다. 사설은 이쯤에서 멈추고 작품 속으로 들어가 보자.
소설은 몇 안 되는 대화의 장면으로 시작된다. 사실 소설의 대부분이 기억의 회상과 몽상, 독백으로 이루어진 것에 비해 극히 예외적 장면이다. “정말 함께 갈 수 없어요?”, “안되겠소, 당신도 알다시피 급히 끝내야 할 일이 있소.” 딸 아이 릴리의 기숙학교 방문의 동행에 대한 남편과 주인공 ‘클라우디네’의 지극히 평범한 대화다. 그런데 이 대화에서 부부의 어떤 균열을 읽는다면 지나치게 과도한 해석이 될까? 딸 리아는 지금 남편의 소생이 아닌 결혼 전 치통으로 찾아간 미국인 치과의사의 자식이다. 여자는 홀로 기차 여행을 떠난다. 이 기억은 당시 열정과 과격하게 사로잡혀 저지른 평범한 충동일 뿐으로서, 본질상 자신과는 무관하다는 것을 한시도 잊은 적이 없는 흐르는 시냇물과 같은 것에 불과하다.
사실 여자의 회상과 몽상과 독백은 하나의 원 주위를 뱅뱅 돌 듯 은밀하게 숨겨둔 욕망, 과거의 문란했던 충동적 해방의 시절에 대한 강렬한 희구와 남편과 이룬 안정되었지만 억제된 삶으로부터의 도주라는 경계를 선회한다. 그런데 이 순환 반복되는 상념이 가져오는 낯설고 이질적 세계, 그 ‘다름‘의 상태를 드러내려는 것이 아마 작가의 의도인지도 모르겠다. 이성과 비이성이 반복되는 오고 감의 반복 속에서 마주하게 되는 조화? 혹은 통일?, 이 점진적이며 눈에 뛰지 않을만큼 미세하게 이동하는 진행에서 클라우디네는 어떤 합일(合一)의 체험에 이른다. 소설의 모티프라야 정말 보잘 것 없다. 흔해빠진 유부녀의 관능적 욕망과 간통이라는 진부한 통속적 내용이지만, 이 소설은 이야기가 아닌 이야기라는 점에서 이 모티프는 하나의 소설적 구실에 불과한 듯 여겨진다. 즉 성적 부정(不貞)에 대한 윤리적 탐구가 아니란 점이다.
무질의 작품들 전반에 자리잡은 독특성인데 주인공을 현실로부터 격리하여 고립시키는 것이다. 클라우디네는 폭설로 인해 소도시에 한동안 고립되는데, 이를 통해 현실 세계에서 작동하는 온갖 제약, 그 제한성을 이탈함으로써 “어디에도 얽매이지 않는 감정의 세계”라는 다른 세계에 진입하게 되는 것 같다. 소설은 이러한 다름의 세계에 대한 느낌이 도처에서 표현되고 있다. “길을 떠난 사람만이 느끼는 세상에서 가장 깊은 낯섦의 행복”, “자욱한 안개 속을 달리다보면 모든 것이 실제보다 크고 어렴풋한 제 2의 윤곽을 띠는 것처럼”...등등 인습적 틀의 사고를 벗어나 진실의 또 다른 면을 직시하게 하려는 장치일 것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이 작품은 무질 자신이 지향하는 문학을 말하려는 것이라 읽을 수 있을 것 같다. 때문에 ‘사랑의 완성’이란, 이성과 비이성(감성 등)의 합일을 추구하는 주인공을 통해 문학의 완전성을 말 하려한 것이 아닐까?
2. 『세 여인』
사실 연작처럼 묶여있지만 ‘세 연인’을 구성하는 세 편의 소설은 각기 단행본으로 출간되었던 작품들을 1924년에 단편집으로 엮어 출간한 것이다. 따라서 3부작으로 계획 집필된 작품이 아니라는 점이다. 수록된 세 작품에는 분명 여인들이 등장하지만 여자들은 실제 거의 말하는 인물들이 아니며, 남자의 상대역으로만 존재를 알릴뿐이다. 그런데 왜 ‘세 여인’이라 제목을 붙였을까? 무질은 자신이 추구하는 비현실성과 비이성의 진실을 말하는 자기문학의 지향점으로서 여자를 설정한 것으로 이해된다. 즉 능동적 이야기의 주체가 아닌 침묵의 존재로 보이지만 실제는 바로 그 여자들이 소설이 말하고자하는 말 할 수 없는 것이라는 진실이기 때문일 것이다.
2-1. 「그리지아(Grigia)」
이 소설은 무질의 문학 정신을 대표하는 유명한 문장으로 시작한다. “살다보면 계속 이렇게 살 것이냐 아니면 방향을 틀 것이냐를 망설일 때처럼 인생이 눈에 띄게 느리게 흘러 갈 때가 있다.(40쪽)” 소설은 이 시작 문장을 구체화한 기록이라 해도 무방할 것 같다. 이 작품도 예외없이 주인공인 ‘호모’는 오래된 금광 개발에 초빙되어 가족을 떠난다. 다시 말해 일상적 환경에서 벗어나 새로운 세계로 이동하며, 그곳은 곧 외적 환경으로부터의 고립을 뜻하고, 이로서 낯선 경험의 세계 속으로 들어간다.
이 낯섦의 공간은 소설 초입부에서 해당 지역에 있었던 일화로 설명되고 있는데, 미국에 돈 벌러 갔다 돌아 온 남편과의 동침을 했던 농부 아내의 기억에 관한 것인데, 남자는 남편을 흉내 낸 사기꾼이었다는 것이다. 여자는 “자기 기억과 남자의 말을 비교해 보곤 듣자마자 자신의 기억과 다르다는 것을 눈치 챘음에도 어느 누구도 자기의 기억에 확신을 가질 수 없어 감히 입 밖에 낼 수 없었다(48~49쪽)”는 것이다. 이성과 논리에 대한 전복이다. 갑자기 세상사의 모든 것이 불안에 빠진 듯한 이런 상황이 지배하는 곳, 왠지 꽤 오래 현실 세계와 격리된 공간을 연상시킨다.
이곳에서 호모는 그리지아라는 여인과 함께 살게 되는데, 그것은 “동화같은 숲”이 있으며, “자기 몸을 생전 처음 만져보는 것 같은”, “자기 삶의 생명력을 다 소진해버린 것 같은” 그래서 그의 마음은 “거지처럼 가난해”짐을 느끼게 하는 곳이다. 여기에 반전이 있는 것 같다. 이성으로 무장된 엔지니어인 호모가 마주한 여인과 장소가 “허공에 떠있는 유희”처럼 느끼게 하는 순수 자연의 세계, 문명이 스며들지 않은 비이성의 인간 세계라는 점이다.
일상적 현실 세계와는 다른 세계로 진입한 호모는 어느 날 버려진 갱에서 그리지아와 함께 쾌락을 나눈 후 잠시의 몽상 후에 여인은 없고, 갱 출구는 한 줄기 빛이 비치지만 큰 바위로 막혀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소설은 이렇게 끝난다. 황당한 밑도 끝도 없어 보이는 이 동화같은 소설은 독자에게 잔뜩 수수께끼를 남기고 종료된 것이다. 호모는 탈출을 포기하고 죽음을 맞이하는데, 탈출의 가능성이 부재한다고 단언 할 수 없음에도 벗어나려는 시도를 중지한 그의 행동에 대한 해석이 남겨진 것이다.
평론가들은 이를 20세기 초 유럽이 처한 ‘출구 부재’의 상황을 의미한다고 하지만, 일상적 삶으로의 복귀를 거부한 것으로, 이성이라는 현학적 환상에 대한 혐오, 즉 신비와 비이성적 각성의 세계인 이 다른 공간에 머무는 것이 오히려 정직한 삶이라고 주장하는 것으로 해석하고 싶어진다. 물론 호모의 내적 동기를 알 수는 없지만. 따라서 호모의 죽음 수용은 삶의 의지의 포기가 아니라 역설적으로 삶의 열정적 추구처럼 보인다.
2-2. 「포르투갈 여인(Die Portugiesin)」
이 소설의 배경은 중세의 외딴 수직 암벽 위의 성이다. 자 또 고립이다. “오백 걸음 밑에는 작지만 물살이 센 강이 흐르고 있었는데, 물소리가 워낙 거세 ...교회 종소리가 울려도 듣지 못할 정도(77쪽)”의 공간이다. 이 고립이 의미하는 바는 일상적 현실과 무관하다는 것이 아니다. 무질은 단지 외적 현실의 영향을 배제한 표본적 공간으로서, 일종의 실험 공간으로 설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자연과학 박사 출신의 무질은 외적 영향 요인을 배제한 상태에서 순수 공간에서 인간들의 행동과 정신의 변화를 관찰하는 것이다.
주인공은 케텐의 영주 또는 케텐이라 불린다. 외부에서 결혼 할 여자를 취해야 하고 오랫동안 계속되고 있는 트리엔트 주교와의 싸움을 수행하여 승리하는 것을 소명으로 하는 존재다. 케텐은 주도면밀하고 냉철한 사람이며, 그의 아내 포르투갈 여인은 마법과 같은 행위를 보이는 사람이다. 이성과 비이성을 상징하는 존재라 할 수 있을 것 같다. 몽환적 이야기는 주교와 마침내 종전에 합의함으로써 추구할 과제를 상실한 케텐의 상황으로 나아간다. 주인공 케텐은 케텐종족의 삶의 목표와 자아를 동일시한 인물이기에 종전의 결과는 자아 상실과 같은 것이기도 하다. 마치 이를 증명하듯 케텐은 병들어 수척한 환자의 모습으로 변해간다.
그런데 이 변화를 가속화하는 존재가 출현한다. 언젠가부터 성에 와 있는 이방인 청년이다. 아내의 곁을 맴도는 인간에 대한 질투와 병마와 싸워야 하는 것이다. 케텐은 사경을 벗어나지만 점차 기력이 쇠잔해 간다. 소설에는 모호한 상징으로 늑대와 고양이가 등장하는데, 일종의 암시로 작동하는 것 같다. 자아의 상실로 쇠잔해가는 케텐은 무언가 행해야만 살아 있는 존재다.
케텐 사람들이 고양이를 죽이는 사건은 이를 자신의 행동에 대한 암시로 받아들이고, 이방인 청년을 죽이기로 결심한다. 마치 행동의 실천, 의지만이 삶을 구원할 수 있다는 듯, 다 죽어가던 케텐은 오르기 힘든 성벽을 기적처럼 올라간다. 청년의 방에 도착했지만 이미 그는 떠나고 없다. 아내도 떠났으리라 생각하고 아내의 침실로 가 확인하지만 아내는 잠에 빠져 부드럽게 숨 쉬고 있을 뿐이다. 케텐은 불안감을 떨쳐버린 기쁨에 거의 노래라도 부르고 싶은 기분에 빠진다. 그리곤 “아무것도 증명된 것이 없고,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았지만 그녀는 묻지 않았다”며, 정말 모호한 문장으로 소설은 끝난다. 대체 무얼 읽어내야 하는지 알 수 없는, 해석을 허용하지 않으려는 듯한 작품이다. 아마 도전을 요구하는 이 활짝 열린 이야기를 어찌 해석해야 하는 지는 두고두고 음미해보아야 할 숙제이다.
2-3. 「통카 (Tonka)」
이 소설의 테마는 정말 얄궂은 데가 있다. 지극히 자명한 사실이 불분명한 지대를 거닐게 만든다. 남자 주인공은 이름 없이 다만 ‘그’인 화학을 전공한 장래가 촉망되는 인물이다. 그는 빈민 출신의 통카를 대도시로 데려와 동거한다. 어느 날 이들의 평범한 일상에 균열이 생기는 사건이 발생한다. 의사진찰 결과 통카의 임신과 성병이 발견된 것인데, 과거를 거슬러 잉태의 시점을 재구성하였을 때 그는 오랜 출장 중이었다. 결국 통카의 임신과 성병은 부정을 의미하는 것이다.
세 편의 작품 중 가장 흥미롭게 읽은 작품이랄 수 있다. 그는 통카에게 진실을 말해 줄 것을 지속하여 요구하지만 통카는 침묵으로 일관한다. 과학도인 그에게 이 침묵은 의학의 진실을 부정할 가능성을 인정하기 어렵게 한다. 통카의 특징으로 ‘별로 말하지 않는 소녀’라는 말 할 수 없음이 곧 통카의 결백을 입증하는 것은 아니다. 무질의 유머를 발견하는 것은 의외의 즐거움이다. 그는 ‘한 여름에 내리는 눈송이’, ‘마리아의 잉태’만큼이나 존재하기 어려운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침묵은 시간이 흐를수록 그에게 기적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게 만든다.
그는 ‘확률과 기적’, 이성과 비이성의 갈등에 빠져 허우적대고, 믿고자 하는 소망은 의학의 높은 확률의 가능성에 휘청댈 뿐이다. 여기 다시 역사적 진술에 관한 무질의 멋진 신념이 드러난다. 잉태의 시점, 즉 역사의 재구성이란 사건 현장의 확인성을 벗어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즉 실증적으로 해명될 수 있는 성격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것은 “실제의 현실이 사고 속에서의 현실보다 적어도 100년은 뒤져있다”는 무질의 주장이 의미하는 바와 같다. 역사란 창안되는 것이지 수집된 자료들을 꿰맞추어 객관성이라 주장하는 것은 허구일 뿐이라는 것이다.
이는 역사란 “인간 삶의 해석을 과제로 하는 학문”이어야 한다는 주장과 맥락을 같이한다. 작가에 의해 자유로이 창작되는 세계야말로 완전한 세계라는 역사의식이 지닌 통념을 전도시키는 이 믿음의 수행이 무질의 문학이라는 것을 아마 가장 생생하게 실현하고 있는 것이 바로 이 작품일 것이다. 통카의 침묵은 단지 해석의 대상이 될 뿐이다. 주인공 화학도는 이성의 확실성에 집착하지 않고 통카의 침묵을 이해하려 한다.
무질은 이를 통해 그의 문학 논리인 사랑의 차원을 드러낸다. 그럼에도 그는 통카가 죽을 때까지 “난 당신을 믿어요.”라는 말을 전하지 못한다. 평론가들은 통카의 침묵을 부정한 사실에 대한 시인이나 은폐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 나는 이에 동의한다. 침묵은 침묵자체로 존중되어야 한다는 것이 무질의 의지였을 것이다. 그래야 무질의 역사에 대한 인식과 일치하기 때문이다. 무질의 냉철한 이성과 비논리적 대담성의 통합, 즉 이성과 비이성의 합일 추구는 그의 소설 전체에 일관되게 흐르는 문학의 환상적 정확성에 대한 독특함일 것이다. 아마 그의 대표작인 『특성없는 남자』에서 울리히의 목소리를 빌어 주장하는 “그 어떤 사물도, 그 어떤 자아도, 그 어떤 형식도, 그 어떤 원칙도 확고한 것은 없다.”며 무한한 가능성의 감각을 열어놓으려는 의도의 실천을 체험하는 사뭇 새롭고 흥미진진한 문학이라 하겠다.
*두 번째 리뷰 참조- <지빠귀> 및 <생전 유고>
https://blog.aladin.co.kr/729034103/1462086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