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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체의 역사 읽기 - 동굴벽화에서 가상현실까지 ㅣ 현대의 지성 173
안드레아스 뵌.안드레아스 자이들러 지음, 이상훈.황승환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20년 1월
평점 :
“우리 사회에 관해,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에 관해, 우리가 아는 것은
대중매체를 통해 아는 것이다.” - 니콜라스 루만, 『대중매체의 현실』 P 9에서
사람들의 삶의 언어와 행동의 동기는 자신을 자극하는 무수한 매체들이 쏟아놓는 말과 글을 비롯한 각종의 시각이미지들을 무시하고 생각할 수 없다. 따라서 이러한 매체의 속성을 이해하는 것은 이 세계에 대해 보다 성숙한 인식능력을 갖추기 위한 원초적 앎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니콜라스 루만’의 지적처럼 우리 개인들이 지니게 되는 세계상은 이들 대중매체가 전파하는 것에 의존하게 되고, 그렇게 그 세계상에 익숙해져 인식되지 않는다. 때문에 이렇게 인식된 세계상은 편협하거나 왜곡된 이데올로기를 체화, 강화시키고 또한 재생산한다.
이 책은 이러한 매체를 이해하는데 필요한 기본적 의사소통 이론과 기호이론을 토대로하여 매체란 무엇인지, 매체가 우리들의 일상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 매체윤리란 무엇인지, 그리고 이들 매체의 발생과 발전에 따라 개인과 사회의 정신에 어떤 변화를 초래하게 되었는지를 설명하는 매체 역사에 관한 입문서이다. 특히 책은 ‘마셜 맥루언’이 포괄적으로 정의한 매체(media)처럼 인간의 행동반경을 넓혀주는 인간확장의 도구로서 도로, 전기, 철도와 같은 대상 영역을 지나치게 광범위하게 규정하는 매체를 지양하고 의사소통적이고 기호(문자, 이미지 등)를 기반으로 한 상호작용의 연관관계로 제한한 기호학적 매체개념으로 국한하고 있다.
기호를 통해 어떤 내용을 전달하거나 답하는 메시지의 소통을 매개하는 매체가 오늘날에는 인간의 역사 내내 축적된 것들이 모여 어쩌면 잠정적 최종산물들이 함께하는 시대라 할 것이다. 회화에서 책과 신문, 텔레비전, 인터넷기반의 각종 사회적 연결망(SNS)에 이르기까지 각 매체의 차별화된 특성이 발신하는 정보들이 홍수를 이루고 있다. 이들 매체의 발명과 발전의 역사와 이에따른 사회적, 정신적 영향에서부터 각 매체의 특성이나 매체 그 자체의 이론적 기술은 물론 중요한 배움이지만 나는 매체의 속성으로부터 발생하는 매체가 지닌 문제성에 초점을 맞춘 읽기를 하였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의도적인 편협성은 불가피한 것이겠지만 시의성이라는 측면에서 요청되는 읽기라 할 수도 있을 것이다.
1. 매체의 간략한 역사
매체와 관련해서 작금의 한국 사회뿐 아니라 세계 모든 지역에서 거의 유사한 상황이 펼쳐지고 있다, 매체를 장악하려하거나 점거한 매체에 압도적인 사람들을 불러들이고, 그 사람들을 묶어두기 위한 전쟁이 한창이다. 한정된 인간의 두뇌 기억에 의존하던 구술문화시대를 밀어낸 문자의 발명은 공간적 거리나 시간을 초월한 의사소통을 가능하게 했으며, 밀도 높은 정보 생산과 그의 전파와 보존으로 지식의 복잡화와 전문화가 가능해졌다. 그러나 시공을 공유하는 상황에서 벗어난 문자의 소통은 명료성 상실이라는 문제를 야기하고 해석의 필요성이 대두되었으며, 동일 내용에 대한 갈등이라는 내재적 문제를 지니게 되었다.(문자언어는 이렇게 모호성으로 욕망 갈등을 내재한다)
15세기 인쇄술의 발명으로 동일 내용의 대량 복제 생산이 가능하게 됨으로써 문자 읽기에 대한 욕구의 생성은 물론 의사소통 공동체가 달성되었으며, 지식의 보편적 접근이 가능하게 됨으로써 사회 전반적인 정신 변화로서 시민의 정치적 의식화가 이루어지는 근대 사회 성립의 토대가 되어주기도 했다. 구술이라는 동시성의 언어 매체에서 문자로 인쇄된 책이라는 매체로의 진전만 보아도 인간 삶의 행동 양식 변화가 매체 의존적임을 확인하는 데 부족하지 않다.
일례로 책 생산의 증가로 인해 인쇄할 가치가 있다고 간주되는 선택 문턱이 낮아졌다는 것은 책이라는 매체가 곧 개인과 사회의 도덕적, 정신적, 감정적 기반 변화에 직접적 영향임을 보여준다. 책이 생산되고도 신문이라 불리는 주기적 간행의 시사적 대중 매체가 출현하는 데에는 많은 시간이 지난 후였다. ‘하나의 발신자로부터 불특정 다수의 수신자에 동일한 메시지를 전달하는 대중매체로서 신문의 탄생’은 실로 엄청난 문명 전환적 사건이라 할 수 있다.
인류 최초의 대중매체인 ‘신문’은 시간과 장소의 거리로 인해 접할 수 없었던 정부(政府)의 행위나 사건들에 대한 정보와 의사소통의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젖힌 것이다. 소수가 점유하던 정보가 열림으로써 시민의 앎에 대한 욕구를 충족함과 동시에 시민계급의 자의식이 명료하게 표출될 기회도 창출했다. 초기의 신문 매체들은 이처럼 시민의 자유를 뒷받침했다. 그러나 신문매체, 즉 고전적 언론의 자유는 거저 성취된 것이 아니다. 소위 기득권을 지닌 지배계급의 마음에 들지 않거나 비위에 거슬리는 견해가 유포되어 그 영향력이 커지자 또한 최초의 대중매체 ‘검열’과 ‘판매금지(販禁)’라는 권력의 대항 조치가 나왔으며 언론자유는 인간 역사의 무대 위에 등장했다. (저항의 피로 얼룩진 역사는 생략한다.)
사실 언론자유는 보호할 다른 가치 있는 권리들과 경합한다. 대중을 자극 선동하는데 주력하는 소위 조중동 삼류 황색신문을 비롯한 신문매체가 저지르는 개인의 인격침해부터 사회적 약자 보호에 대한 부인 등 매체의 윤리적 탈선은 매체의 자체적 윤리 능력에 의심을 보내게 된다. 이제 사진, 라디오와 영화, 텔레비전이라는 매체가 연속적으로 출현함으로써 인간의 시공을 초월하려는 소망과 결합하여 안방에서 동시적으로 먼 거리의 정보를 청취할 수 있게 되었다. 사진과 라디오, 영화, 텔레비전 매체의 특성들은 서로 경합하거나 상호 혼종되면서 정보에 대한 독특한 재현방식으로 수신자의 관점에 개입했다.
이제 컴퓨터, 스마트폰과 같은 플랫폼은 인터넷만 접속되어 있으면 장소의 구속성에 제약됨 없이 동시적 의사소통을 가능하게 하는 시대가 되었다. 특히 모든 문자와 이미지를 디지털로 구현하면서 실재의 사실이나 객관적 정보에 대한 판단이 불가능하게 되었다. 누구나 원본을 조작 가공할 수 있으며, 개인 방송을 통해 불특정 다수를 향한 의사소통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진본을 알 수 없는 시대, 그러하니 가짜가 난무하는 시대가 되는 것은 자명한 결과일 것이다.
그 어느 때보다 많은 매체가 총집결되어 경쟁하는 시대다. 이렇게 증대된 정보의 양은 마치 공론장의 외형이 커진 듯 보이지만 부분 집단으로 파편화되어 국가와 같은 단일 논의의 수렴이 요구될 때 그것의 총화는 불가능한 경향으로 치닫고 있다. 이 간략한 매체 역사를 시간 순으로 거닐다 보면 무수히 분열된 매체들의 욕구를 개인과 사회가 어떻게 필터링하고 관리해 나갈 수 있는가라는 의문이 자연 발생한다. 대체 무엇이 진실이고 원본이란 말인가? 어떤 정보를 채택하고 버릴 것인가의 문제다.
2. 대중매체를 어떻게 인식할 것인가
대중매체는 불특정 다수를 향한 정보의 송출이라는 정의처럼 수용자 측의 관심이나 수용자의 조건을 예측해야 한다. 이 예측이 중요한 것은 매체의 경제적 생존과 직결하기 때문인데, 수용자가 좋아하는 것에 맞추어야 수용자를 확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단순한 이치로 인해서 매체는 특정 이데올로기나 경향성을 강화하여 수용자를 만족하게 하거나 자극하는 전선에 나선다. 이것은 결국 매체 자신이 지향하는 가치를 극단화 시켜야 하는 것이며, 모든 행위는 여기에 집중케 된다.
대중매체인 신문은 이러한 편향성과 갈등을 초래하는 전형적 사례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호기심 충족과 자신들과 다른 모든 존재를 적대화하면서 뒤틀리고 왜곡된 여론을 조성한다. 이는 자기 매체의 수용자들을 붙들어두기 위한 매체의 본래적 성격 때문이다. 여기에 또 매체 본연의 위계를 전도시키는 요소가 매체의 가치를 압박하는데 언제나 신문사업의 핵심역할을 하는 광고의 영향이다. 매체의 1차적 기능은 수용자와의 의사소통이다. 그리고 광고의 지위는 2차적이지만 실제에서는 이 위계질서가 역전된다. 광고주의 영향이 곧 신문매체의 가치이며 이 가치와 일치하는 수용자를 형성하는 것이 지금 한국사회 신문매체의 역할이다. 신문매체의 광고주 구성을 보면 곧 그것이 그 매체의 가치라고 해도 어떠한 오류도 없을 것이다.
여기서 문제가 제기된다. 언론의 공익성, 그리고 불편부당(不偏不黨)이라는 매체 윤리다. 이를 기초로 해서만 언론의 자유는 성립될 수 있다. 그런데 특정 기업이나 이해관계가 얽힌 집단에 의해 매체의 가치가 결정되면 결코 파당성을 벗어날 수 없으며, 이는 사익성이지 공익과는 요원해 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따라서 건강한 공공담론의 장소가 부재하게 된다. 소위 실재하는 사실성, 진실한 정보를 읽게 되리라는 수용자의 기대는 결코 성취되지 않는 원초적 구조를 하고 있다는 점이다. 한국 사회의 신문 매체는 민간기업이 운영하는 텔레비전 방송매체들과 더불어 공적 담론 생성매체의 기능을 지니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는 이들에게 과연 언론의 자유라는 표현의 자유권을 인정할 수 있는가의 첨예하고 중대한 문제를 낳는다.
물론 매체는 의사소통을 위해 특정 주체에 대한 허용 여부의 권한을 지닌다. 즉 그들은 자기가치에 입각한 공론장을 조성할 수 있다. 그런데 태생적 문제가 있다. 어떤 정보를 전달할지 전달하지 말지를 선택하는 ‘문지기 기능(Gate-keeping)’은 은폐와 노출, 특정 시점에 주제화하는 등 선택의 자의성이라는 속성의 문제이다. 때문에 조중동을 위시한 황색 매체들은 검찰권력에 대한 어떠한 현안도 기사화하지 않음으로써 시민적 물음을 외면한다. 이 기사 선택의 자의성은 소위 언론매체의 출생적 흠결이다. 여기에 선택된 기사의 서열화인 ‘안건 설정((Agenda-setting)’은 이 자의성을 심화시킨다. 매체의 가치에 반하는 인물이나 상황의 긍정적 요소는 지면의 배치와 기사의 규모를 축소 차별하고, 자기 생존에 유익한 권력은 1면에 대량 할당 게재하여 실재를 왜곡하는 것이다. 지면배치, 기사 분량, 노출빈도를 매체의 유불리에 따라 기사화하는 것이다.
[상호 매체성의 일례: 중립적이라 생각되는 사진의 다큐멘터리적 특성이 저널리즘의
맥락에서 의심쩍게 되고 동시에 사진의 이데올로기적 의미가 인식된다. - 책 282쪽에서]
신문 매체의 이러한 자의성은 이처럼 태생적인 것에 국한되지 않는다. 소위 ‘매체의 혼종성’이라는 일종의 취급방식의 문제인데, 사진 이미지와 텍스트의 상호 매체성을 이용하여 왜곡, 조롱, 기만을 공적 담론장이라는 신문매체의 외면적 권위에 올라타 자행하는 것이다. 이를테면 자신들과 지향하는 가치가 다른 국회의원이 사망하자 그 기사 옆에 파안대소하는 스포츠인의 사진을 게재하여 공공연히 조롱하는 것이다. 전혀 관련 없는 텍스트와 사진 이미지가 결합할 것을 편집자가 의도했다는 것은 삼척동자도 알 수 있는 것이지만 결코 인정하려 들지 않을 것이다.
이러한 양상은 텔레비전 매체도 동일하게 전개되고 있다. 시각이미지와 신속성 측면에서 텔레비전은 신문을 능가한다. 소위 종편채널이라 해서 이명박 정권이 탄생시킨 무수한 방송채널들(채널A, TV조선, YTN etc.)들은 그야말로 상업적 이익을 지향하는 공익성을 담보하지 않는 매체들이다. 그런데 이들의 편향된 가치는 매체로서의 영향력을 그대로 발휘한다. 수구적 수용자들은 항상 이 상업채널들의 시사프로그램으로 자신들의 가치를 강화한다. 이 강화는 지속적으로 심화되어 극우화한다. 현 정권의 극우화는 이들 집단에 기초해서 탄생했기에 매체의 흐름과 같이 가는 것은 당연한 귀결일 것이다.
여기에 장소의 구속성마저 완전히 벗어난 인터넷 기반의 소셜 미디어는 물론 인터넷 포털들은 그야말로 그 어떤 매체도 지니지 못한 모든 매체가 지닌 특성을 통합하여 갖추고 있다. 문자 정보의 동시성, 시공의 초월성, 하이퍼 텍스트성, 구술대화의 즉시성, 책과 잡지 등 매체의 전문성, 정보의 양적 거대성과 검색의 용이성까지 총합적 최종 매체라 할 수 있다. 게다가 원본 위조와 조작 능력까지 지녔으며, 그 파급범위는 전(全) 지구적이기까지 하다. 그런데 이 매체는 개별 주관에 의한 매체를 기반으로 한다는 객관적 담보의 불확실성은 물론 조작과 위조의 개연성까지 더해진 정보들이 난무한다. 바로 이것들이 언론의 자유라는 권리에 올라타 세계 인식을 왜곡하고 위험한 세계상을 전파한다. 바로 모든 매체 본연의 속성인 광범위하게 전파될수록 무의식화되어 판별, 비평의식이 들어설 공간이 없어진다는 점이다. 그렇게 시민대중의 인식은 모르는 사이에 왜곡되어 판별력을 상실한다.
3. 맺는 말
다음의 문장을 인용하면서 이 책의 소회를 마쳐야 할 것 같다. “인간은 누구나 세상을 보는 자신만의 관점에 갇혀있다. 관점은 인간이 무엇을 어떤 시각에서 인식하는 지를 규정한다. 개별 인간의 세계상은 주관적일 수밖에 없으며 세계의 일부분에 제한되어 있다.(297쪽)” 즉 세계는 인간 행위를 배경으로 사건이 펼쳐지는 지평이며, 그것은 곧 매체의 영향이다. 이렇게 이해한다면 오늘 우리들을 에워싸고 있는 매체들을 우리들이 어떻게 인식하여야 하는지 중심이 설 것이다. 오늘의 매체는 거의 대부분 진실과는 한 참 떨어진 이야기를 들려준다. 여기에 현혹되어 자기의 이성을 넘길지 말지는 각자의 몫이라는 말이다. 결국 앎에 대한 게으름은 곧 개인은 물론 사회적 파국으로 직결되는 곤경에 우리들을 처하게 한다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어쩌면 프로이트의 말처럼 결핍을 초래하는 욕망에 기초한 우리들의 문명은 이 결핍들을 메우기 위한 끝없는 대체물에 대한 목마름일 것이다. 매체가 이것을 넘어서지 못하는 한, 그리고 이 사회공동체 개인인 우리들 또한 쾌락원칙 너머, 새로운 이상을 향한 전환을 시작하지 않는 한 쓸모없는 이러한 읽기와 인식을 순환해야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개인적 인식은 언제나 사회적 개념, 즉 의사소통으로 중개된 개념에 따라 각인되어 왔다. 정말 똑똑해져야 건강해지는 세상이다. 어리석은 한 번의 투표가 오늘 우리들의 세계를 얼마나 퇴행시키고 있는가를 반복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매체의 역사 읽기라는 이 매체사 입문서는 매체 일반에 대해 우리들의 앎을 조금은 증진 시켜준다. 방송과 언론을 장악하여 권력의 선전도구로 삼으려는 권력, 도서 출판과 영상물 제작에 금지어를 명령하는 기만적 사전 검열을 획책하는 파렴치한 권력이 이 땅의 민주주의적 요소들을 파괴하고 있기에 이 매체사는 현실을 걱정하고 분노하는 시민들에게 유익한 지식의 토대가 되어 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