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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유산의 두 얼굴 - 조선의 권력자들이 전하는 예와 도의 헤게모니 전략 ㅣ 지배와 저항으로 보는 조선사 4
조윤민 지음 / 글항아리 / 2019년 8월
평점 :
앎의 문제는 세계를 바라보는 시선, 믿음과 생각의 경향성에 있어 개인의 불가피한 지적 역량과 행위의 기준이 될 수밖에 없다. 알지 못하니 그 앎에 대해 생각도 행위도 할 수 없으며, 고작 좁쌀만 한 알량한 것에 의지해 자기 삶의 지평이 의존 될 도리밖에 없게 된다. 이는 수동성을 낳고 남이 부과한대로 주입한대로 순응하는 삶, 생각할 필요가 없는 삶으로 이끈다. 그래서 사회의 주류의식이며 지배의식이 가리키는 것만을 바라보며, 그 가리킴으로 은폐된 것, 실재(實在)를 보지 못한다. 그리고는 자신이 본 것이 사실의 형상이라고 우겨댄다. 그것이 진실이라고. 이 의심하지 않는 혹은 못하는 주체에게는 바로 앎이란 것, 의심하고 사유하는 존재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공부가 필요하다. 통상적이고 보편적이라고 주류의식이 말하는 것이 무엇을 가리고 있는지를, 그 무엇을 알아야 하나의 현상을 전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게 되며, 비로소 판단이라는 것에 이르러 어떤 숙고된 의사결정을 내릴 수 있게 된다,
오늘 우리들의 세계에 여전히 남아 ‘문화유산’이라는 광휘(光輝)를 발하는 축조물과 건축물들은 우아함이나 장려함과 같은 그 예술적 미로 찬양되곤 한다. 이 책은 조선조의 왕릉과 궁궐, 성벽, 그리고 서원과 사찰의 유산적 가치라는 이면에 가려진 사상과 이념, 권력의 욕망을 보게 함으로써 빛으로서의 문화유산만이 아니라 그것이 드리운 그림자를 ‘정면에서 직시’하는 지혜를 제공한다. 이들 “유산에 서린 아픔을 보듬을 때 이 세상에 대한 더 넒은 지평이 열릴 것”이라는 저자의 말에 공감하지 않을 이가 있을까? 물론 역사를 부정함으로써 이익을 얻는 인간들이 있으니 그러한 것들에게 공부를 말해 무엇 하겠는가.
【 책 247쪽 부분 발췌】
이 인용 글은 이미 병자년 전쟁이 한참이나 지난 효종조에 남한산성 성벽 축조에 대한 대신의 항소 내용이다. 백성의 고혈을 짜내는 고통스런 공역의 중지를 요청하는 글이다. 오늘날 우리네가 유흥을 위해 찾는 그 남한산성의 성벽 증축 및 보수공사다. 이 공사는 누구를 위한 것이었을까? 백성인가? 아니다, 북방으로부터의 침략을 두려워 한 오직 왕과 그 일족의 안위를 위한 것이었다. 이렇게 오늘날 남아있는 성벽을 비롯한 건축물이란 백성의 땀과 피눈물의 소산이지 어느 왕이나 대신의 노고가 아니라는 점이다.
이들 축조물 및 건축물은 그 조성으로 얻고자 하는 목적이 숨어있다. 그것은 위세와 존엄, 통치 행위를 정당화하는 기제이자, 권력행사를 순조롭게 하는 지배전략으로서의 욕망, 권력이 복종시키고자 하는 순응의 요구이며 자신의 안락을 위한 장치다. 결국 지배층의 욕망충족 이상의 것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 왕릉, 궁궐은 오늘 우리들에게 자부심이기만 한 건가?
조선 시대에 조영된 왕과 왕비의 능이 44기인데, 북한에 있는 2기, 광해군과 연산군 2기를 제외한 40기가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되어있다. 등재 이유는 “살아있는 유교문화의 정수를 간직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살아있다는 유교규범과 풍수지리 사상이 어우러진 건축미와 조경(造景)미가 왕과 왕비 능의 존재 보전 의미 전부인가? 그저 그 예술성만을 받아들여야 하는 것일까? 이것이 오늘을 사는 사람들에게 과연 자부심의 대상이기만 한 것인가?
왕과 왕비의 능을 조성하기 위해서는 우선 영역 선정이 필요하며, 그 영역 내에 있던 기존의 집과 묘는 모조리 철거 이전해야 한다. 또한 능역은 능을 중심으로 사방 500보라는 광활한 조성 구역이 필요했으며, 이는 목재와 기타 식물을 생존 수단으로 삼던 곤궁한 백성들에게는 위협이 될 수밖에 없었다. 더구나 능을 조성하는 데 필요한 노동력과 소요 물질이 백성에게 전가되었으며, 능을 경계하는 수호군이라는 신역(身役)을 져야했으며, 능 관리 비용을 부담해야 했다. 능은 왕과 지배세력의 권력 과시 도구이자 절대권력을 상징하는 공간이었으며, 정례적 제례와 규범화된 의례를 통해 권력자에 대한 숭배와 자발적 복종을 체화시켜 지배정당화를 강요하는 공간이었다.
지배 권력을 위해 공역을 부담하고 생존을 위협당하면서 게다가 자기훈육까지 당해야하는 참담함의 형상이 바로 왕릉임을 알아야 한다. 우리 조상들의 눈물과 땀과 피가 배어있는 곳이기도 하다는 뜻이다. 빛 뒤에는 그림자가 있음을. 그 그림자를 외면하는 역사는 올바른 역사가 아니다. 소수의 지배층을 위해 다수의 백성이 신음해야했던 철저한 신분제 사회 조선의 음영이, 그 슬픔이 간직된 것이다. 문화유산임을 부정하자는 것이 아니라 그것의 예술적 역사적 가치와 더불어 은폐된 그 실재의 의미까지 아울러 보듬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풍수지리와 유교 논리를 통해 정치적 세력 다툼의 재료로 왕릉은 줄 곧 이용되어 빈번하게 능을 옮기는 천릉(遷陵)과 많은 인력과 물자를 필요로 하는 왕의 능행까지 백성의 부담과 고통은 늘 가중되었다. 한편 궁궐의 건설은 조선조 내내 진행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 조선조 개국으로 인한 한양 천도로부터 시작된 궁궐 공사는 조선조가 망할 때 까지 계속되었다.
저자는 조선 궁궐에 대한 오늘의 주류 학자들의 글을 인용하고 있는데, 미술평론가 유홍준은 “자연과 어울림이라는 미덕을 지니고 있으며, 포스모던적 어울림”이라 했으며, 한국학자 최준식은 창덕궁을 “꽉 짜인 질서보다 느슨하고 자유로운 구도를 좋아하고 대칭적인 것보다 다양하고 비균제적 것을 좋아하는 한국인의 미의식이 작동한 것”이라 했고, 미술사학자 최순우 는 “잔재주를 부릴 줄 모르는 한국인의 성정과 솜씨를 가늠하며, 실질미와 단순미를 지닌 한국의 멋”이라 했다고 소개하고 있다. 저자는 이들 모두에서 “한결같이 자연이나 심성이라는 인식 틀만을 갖다대는 것”을 본다. 조선의 궁궐을 바라보며 이 외에 다른 해석개념은 마치 없다는 듯 말하는 이들을 점잖게 비판하는 것 같다.
한글 창제로 백성에게 글을 준 성군(聖君)이라 칭송되는 세종의 경우를 보자. 모든 임금이 궁궐 증개축과 보수, 더불어 이궁의 신축까지 궁궐공사를 하지 않는 자가 없다, 왜 그러했을까? 이것은 곧 왕권강화와 관료의 위계질서 확립, 즉 지배제체 강화를 의미하는 작업이었기 때문이다. 때문에 이를 둘러싼 왕과 지배층의 힘겨루기와 지배계급 간의 정치 세력 다툼이 그친 적이 없다. 세종은 경복궁 강녕전, 경회루, 남대문 토축공사, 물시계 조성공사 등등 수많은 공역을 동시에 추진했다. 한재와 홍수로 어려움을 겪는 백성의 피해가 커 공사시기를 재고해달라는 상소가 있었으나 세종은 이를 무시하고 백성들의 공역을 가속화했다. 그에게는 왕권의 신성화와 위계라는 계급적 질서의 강고화를 통한 권력의 항구적 안정화가 중요했지 백성의 삶이란 그의 유교질서에 자리가 없었던 까닭이다.
때문에 분별과 차등, 위계에 따른 역할과 책임 의식 고취를 위한 궁궐의 배치, 세부적 장식, 극히 작은 제사에 이르기까지 사전 연습의 시행은 물론 예규로 정해놓기까지 했다. 그의 과학적 업적이라는 물시계 또한 궁궐에 설치한 것은 자신이 직접 관리하는 권력자의 권위를 나타내는 상징물이었기 때문이며, 만백성의 일상행위를 제한하는 장치(세종실록 77권, 1437년6월28일)로 삼았음을 기록이 전하고 있다. 이는 행동에 동시성을 부여하여 일사불란한 사회질서 유지를 통해 지배체제를 강화하려는 왕의 욕망의 실현물이었다고 할 수 있다.
■ 당파의 온상이자, 착취 도구로서 성곽과 서원, 향교
성곽 건설과 증개축 및 보수 공사는 그렇다면 적의 침입을 방어하기위한 방어전략을 위한 군사적 목적이었을까? 조선은 엄격하고 철저한 신분제 사회였음을 기억해야 한다. 유교의 인(仁)과 덕(德)은 명분을 위해 소용되었지 정작 백성을 위한 덕목이었던 적이 없다, 단지 예를 실현하기 위한, 즉 지배계급에 복종하기 위한 순응성을 위한 가치였을 뿐이다. 차별과 특권으로부터 백성을 분리하기 위한 덕목.
서울 성곽은 지배계급과 그 가솔, 그리고 성곽 내의 이들 지배계급의 일상생활이 가능케 하는 모든 노동과 생산자인 백성은 성곽 외로 나누어져 있었다. 실제 성곽은 5미터에 불과할 정도로 낮았으며, 여타 방어물조차 존재하지 않았다. 즉 신분의 차별을 위한 분리 책략의 도구였을 뿐이다. 그 분리 장벽에 내몰려 국가의 보호로부터 배제된 이들 성곽 밖 백성들의 공역으로 축조되고 유지 보수된 것이다. 이 기괴함, 착취적 행위의 산물임을 오늘 우리들은 잊어서는 안 된다.
지방의 성곽이란 정치 세력간 다툼의 지대였다. 군사를 배치하여 자기 당파의 세력화를 도모하기 위한 수단으로 성곽이 축조되었다. 남한산성 외성의 축조와 관련한 치열한 당파 싸움의 실상이 고스란히 실록에 전해져오고 있다. 조선조의 성곽들에 서린 그 천박한 양반무리들의 이전투구와 백성의 신음소리가 들려오는 듯하다. 일제가 조선 병탄 전후하여 성곽 철거와 궁궐의 훼손에 나선 것은 곧 조선 왕조와 지배계급의 권위라는 지배질서를 파괴하려는 것이었다. 백성의 심신에 각인된 그 오래된 존엄과 숭배의 상징을 해체한 것이다.
1907년 일본은 숭례문 좌우 성벽 철거를 시작으로 경희궁, 창덕궁, 창경궁, 경복궁을 훼손, 파괴하고, 궁중 의례와 제도를 파기했다. 오늘 한국의 총리는 당시 일제가 적국이었는지 생각해보아야 할 문제라며 이들의 침략 역사에 대한 실제를 회피하기까지 한다. 궁궐과 성곽이 왕의 존엄성을 해쳐서가 아니라 백성의 고혈이 쌓아올린 민족의 유산이기에 분노하는 것이다. 일본은 궁궐의 헐린 전각과 초석, 댓돌을 연못 조성에 써버리거나 경매에 넘겨 일국의 얼을 조롱했다. 이렇듯 건축 및 축조물은 인간의 정신을 길들이고 지배자가 요구하는 질서에 순응케 하는 상징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 또한 이러한 의미에 더해 소수의 지배계급에 무한히 착취당하여야만 했던 우리 선조들의 눈물과 땀이 배어있다.
한 가지 빼놓을 수 없는 의문이 있다. 1907년 일본인으로 구성된 성벽처리위원회의 주도하에 서울의 성곽과 그 출입구인 돈의문(서대문), 소의문(서소문), 혜화문(동소문)등 빠짐없이 모두 철거되었음에도 일제가 왜 숭례문과 흥인지문은 남겨두었을까 하는 물음이다. 이는 300년을 거슬러 1592년 임진년 왜군이 서울을 함락을 위해 입성한 곳이 이 두 개의 문이었기에 승전문이라는 유래를 지녔다는 것이다. 침략자인 일제에게는 전승 기념물로 보존할 역사적 유산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문경 조령의 관문, 전주 풍남문 등이 남았다. “철거된 성벽재는 신작로와 철도 바닥 다지기 재료로 소모”되었다. 우리의 유산은 이렇게 일제에 의해 파괴, 유린되었다. 이처럼 한 나라의 정신과 물질적 유산을 철저하게 파괴한 적을 적이라고 하지 않는 세칭 친일파라는 인간들이 오늘 한국인의 정신을 다시금 유린하고 있다.
【경북 안동 도산서원, 이황이 지은 서당을 모태로 안동과 예안 지역민이 주도해 건립, 305쪽에서】
아마 저 산간벽지와 촌락의 백성에게까지 성리학이라는 유교적 질서, 즉 소수 지배계급의 이익을 위한 분리 차별책을 강요하고 착취하는 권력의 끝판 왕이라 할 서원과 향교를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퇴계 이황이 설립한 영남 사림의 본산인 도산서원은 오늘에도 그 위용을 떨치고 있다. 서원이 지방 교육기관의 기능을 가지고 사회규범과 생활전반을 규율하는 유교화 진행의 첨병 역할을 했음은 굳이 설명이 필요치 않을 것이다. 일제 치하에서도 이들 서원은 백성을 착취하는 세력들의 단체로 그 악명을 떨쳤는데, 1920년의 서원철폐 운동이 대두된 것은 이들이 소작인을 비롯한 인근 백성을 얼마나 심하게 착취했는가의 반증적 사건일 것이다.
이들 서원에 소속된 유림은 군역 면피는 물론 잡역까지 면제받았다. 특히 이들 유림은 대지주 양반들로 구성되어 지배층의 이익을 담보하는 착취기구이자 일종의 권력기관으로 행세했다. 인근 사찰과 점촌(店村)의 예속을 통해 경제기반으로 삼음으로써 서원세력은 확보된 재력으로 고리대 놀이를 함으로써 더욱 백성의 삶을 핍박했다. “이황조차 이 식리(殖利)를 서원 재정 확보 수단으로 인정했을 정도”이니 사대부 계급이 백성을 어떻게 취급하고 있었는지, 그 골 깊은 신분 차별책의 사악함을 볼 수 있다. 일제하에 서원 세력은 식민지 지배정책에 참가하여 총독부 정책에 적극 부응하는 세력이 되었으며, 총독부 정책 보조 선전도구 역할에 앞장서기까지 했다. 오늘 우리들은 자연 경관과 어우러져 고즈넉하고 학문적 분위기를 자아내는 서원을 찾으며 옛 선조의 고상한 취향을 칭송한다. 그러나 이들이 훼손되지 않고 남아 문화유산이 된 것은 그리 고상한 이유 때문이 아니다. 조선조에는 지배권력의 착취기구였으며, 일제식민체제에서는 적국의 부역에 충성했기 때문이다. 실로 아이러니한 역사 아닌가? 민족을 착취하고 배신함으로써 문화유산이 되어 그 고유의 사적(史的) 미(美)로 후손들의 내방을 받고 있으니 말이다.
■ 맺으며 - 차가운 이성을 위해서
저자의 지적처럼 많은 이들이 “서원을 두고 장식을 멀리한 엄숙한 건축물이라 평가하며, 인공물과 자연과의 흔쾌한 조화미”를 칭송한다. 그러나 자기 당파의 위상을 높이고 영향력을 확장하기 위한 지배권력의 파당적 공작공간이었으며, 농민을 압박하고 관권을 대행하여 권세가로 주민을 통제하는 파렴치한 이익기구이자 권력기관이기도 했다. 이와 같이 조선조의 건축물, 축조물들은 조선의 지극히 철저한 신분제 질서를 위한 상징물의 성격을 지니고 있다. 그 내부의 설계와 배치에서부터 그것들의 경영에 소용되는 각종 의례와 제도에 이르기까지 차별과 분리라는 위계질서의 장치였다.
"시각질서와 제국권력은 불가분의 관계였다....로마의 판테온도
남자들과 여자들로 하여금 보고 믿고 복종하게 하려는 그러한 노력의 일환이었다."
- 리처드 세넷 著, 『살과 돌 (Flesh and Stone)』, 문학동네刊
한결같이 이들은 백성들의 눈물과 땀이 밴 노역과 물질적 공역에 의존한 산물들이다. 양반과 왕가는 결코 이러한 산물을 위해 어떠한 공여도 한 것이 없다. 오직 착취만 있었을 뿐이다. 더욱이 오늘 남아 전해지는 문화유산이라는 것들의 많은 것들이 불의를 통해 존속하고 있다는 점이다. 저자는 맺는말에서 유려한 문장으로 반추할 문장을 남기고 있다. “산세 그윽한 저 왕릉은 누구를 위해 그리도 오래 엄숙했는지 눈 시리게 되물을 수 있을 것이다.”라고. 문화유산에 배어있는 아프고 쓰라린 민초의 고통을 외면하지 말고 오롯이 그것을 우리들의 것으로 품어낼 수 있을 때 그 유산은 정말 우리들의 얼과 혼으로서 존속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을 통해 조선 시대의 왕릉과 궁궐, 읍치와 성곽, 서원과 향교 등이 지배질서를 정당화하며 “신분우위와 특권행사의 근거를 마련하던 지배전략의 산물이었음을, 양반 지배집단의 헤게모니 전략의 본거지”로서 기획된 진지였음을 알게 된다. “지배이념 주입과 순치의 전진기지였음을.” 이처럼 이들 유적이 전하는 어두운 이면이 비록 암울하고 부정적으로 다가오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이들의 문화적 가치와 예술적 미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빛과 그림자, 양면을 모두 끌어안음으로써 비로소 그 유산의 역사적 의미는 보다 견고해지리라는 앎의 믿음이다. 그저 감탄하고 자긍심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조상들 피땀의 무덤이기도 하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고. 그래야 오늘 권력을 지닌 자들이 무엇을 숨기려 하고 무엇을 주입하려하는지를, 또한 무엇을 욕망하는지를 차디찬 이성으로 판별할 수 있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