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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류 - 바다가 내게 가르쳐 준 것들
스티븐 캘러핸 지음, 남문희 옮김 / 황금부엉이 / 200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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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나의 항해는 결코 끝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죽음보다 더 가혹한 일이다. 내 마음속의 가장 극악한 부분을 찾아 진짜 지옥에 대한 환상을 만들어 낸다면 지금이 정확히 그 장면이라 할 것이다.”거대한 파도와 누더기가 된 구명보트에 실려 오직 죽음만이 엄습하는 검푸른 대양의 한가운데 절망에 빠진 나라면 내 육신에 영원한 안식을 주고 말지 않았을까? 그 고통과 실의의 깊이가 얼마나 깊었을까?

육신이 흐물흐물 완전히 곤죽이 돼 이성의 명령을 잘 이행하려 들지 않고, 그저 휴식만을 원하고 고통에서 구제받을 길만 찾으려 할 때, 그리고 영원히 구원의 손길에 닿을 수 없는 끝나지 않을 극악한 환경의 연속이라면, 우린 그 때에도 살아낼 수 있다고 자아를 재촉할 수 있을까?

대서양의 한가운데 저자‘스티븐 캘러핸’의 6.4M 소형 순양함‘솔로’호가 침몰하고, 구명보트에 다급하게 생존을 의지하기위해 몸을 옮길 때, 그의 뇌리에 수없이 교차하는 당혹스러움과 절망감, 그리고 죽음의 공포, 살기위한 본능적인 구상들이 나의 뇌에서도 공감을 일으킨다. 이제 망망대해에 그야말로 漂流(표류)가 시작되었다. 그에게 주어진 76일간의 잔혹한 삶과 죽음의 시험의 여정에서 오늘에 이르는 나의 인생여정이 이처럼 표류하고 있음을 보게 되는 것은 지나친 비유가 아닐 것이다.

“어제는 내리쬐는 햇빛으로 600그램의 신선한 물을 만들 수 있었는데, 오늘은 그런 행운을 기대하기 어려울 것 같다. 구름덕분에 살이 타 들어갈 것 같은 오후의 햇살은 피할 수 있었지만, 나의 생명수는 그 양이 줄어들 것이다. 삶은 모순투성이다.”이처럼 삶은 양면을 가지고 우리에게 다가온다. 大海(대해)에서 살아남기 위해 그저 끈질기게 반응하는 수밖에 없는 그런 순간이 그칠 줄 모르고 지속되기만 한다면, 그래서 캘러핸의 감정에 불쑥 불쑥 끼어들던 그‘정신적, 육체적 신경의 모든 방어막이 벗겨 나가고 완전히 맨 몸뚱아리가 노출되어버린 듯’한 절망만이 맴돌고 있을 때, “넌 죽어! 죽을 거야. 죽을 거야. 죽을 거야.”하고 정신과 육체의 방임으로 치달을 것만 같다. 그러나 그의 “ 그래. 반드시 이 고비를 넘기고 말겠어. 다시 시작해. 문제를 가려내.”하는 이성의 승리를 견인하는 독백에서 절로 숙연해짐을 느낀다. 주변에 사랑하는 이들이 있고, 평온한 환경이 버젓이 존재하고 있는데 나약해빠진 회피와 절망, 의기소침이 부끄러워진다.

76일간의 표류를 가능케 해준 그의 생명선인 구명보트‘러버더키3호’, 그리고 그의 친구이자 主食(주식)이 되어 준‘만새기’와의 생존을 둔 혈투는, “자연의 경이란 추한 공포에 둘러싸인 아름다움이라 할 만하다.”라는 그의 표현처럼 살아남기 위해 반응하는 강렬한 깨들음과 엄청난 열정의 단순한 아름다움으로 각인된다.

스칠 듯 지나가는 대형선박들을 향해 쏘아 올리는 조명탄에도 불구하고, 묵묵히 지나쳐버리고, 아련히 그 모습이 사라짐을 바라보는 표류자의 심경에서 안타까움이 묻어나고, 구명선 바닥이 찢겨 생존에 대한 희망이 사라져버리는 극한적 좌절에서 취약하고 연약한 인간의 모습을 보지만, “신체적 자아와 본능이 일종의 무대 감독으로서 모든 현실을 재배치하고 통제”하는 캘러핸의 ‘생존의 세계’에서 인간의 숭고한 정신적 승리를 보게 된다.

항로의 끝이 어디가 될지, 그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 아니면 영원히 그 끝에 도달할 수 없을지 모르는 표류자로서 그의 역할 - 그저 해류를 따라 이동하는 구명보트에서 기다리기, 어패류를 잡아먹을 것, 잡은 물고기를 잘 손질해서 저장하고 배분해서 먹기, 증류기를 소중히 다루어 식수를 확보하기 -이지만, 그는 이렇듯 단순하기까지 해 보이는 역할에 미묘한 변화가 생길 때 마다 결정적인 죽음과 삶의 경계를 넘나들게 하는 심각한 파장이 들이친다. 나는 정말 죽고 말았을 줄 모른다. 그러나 그에게서 “가능성에는 한계가 없다. 머리로 상상하는 것은 실제로도 존재할 수 있다. 마음속 창조의 세계는 결코 물리적인 법칙의 제약을 받지 않음”을 이해하게 된다. 그리고 절대적인 음식공급이 결핍된 조난의 혹독한 생존을 위한 시간 속에서 “내 몸에 양분을 공급하기위해 내 감정에게 살해를 강요한다. 나 자신에게 희망을 선사하기 위해 나의 팔과 다리에게 노역을 강요”하는 처절한 극기에서 다시금 작은 장애에도 엄살을 부리기만 하던 내 인생항로의 왜소한 굴절이 가소로워지기도 한다.

아홉 척의 선박이 그를 보지 못하고 지나갔고, 열두 마리의 상어가 그를 위협했다. 그리고 생존과 죽음의 아슬한 싸움의 76일째, 세 명의 검게 그을린 사람들, 그들의 배 ‘클레망스’가 그의 앞에 나타나고, 캘러핸, 그의 앙상하고 상처투성이의 몸에 번지는 환희가 바로 나의 감동이고 승리이고 기쁨이 되어 “삶이란 바로 권리가 아니라 선물이라는 점”을 깊게 이해케 된다.

우리네 삶이 캘러핸의 표류보다 더 악독할 수 있을까? 그렇지 않을 것이다. 그의 공포에서 그리고 생존을 위한 정신과 육체의 갈등에서 바로 우리 인간 본연의 숭엄한 이성과 행동을 본다. 또한 그의 표류처럼 그 항로의 끝을 모르는 여정처럼 우리의 인생항로의 끝을 알기도 힘들다. 그러나 “도전이란 늘 위기를 통해서 우리를 혹독하게 시험”하지 않는가? 그 시험을 끝내고 나면 바로 달콤한 가정이 있고, 평온한 침대와 사랑스런 가족이 있음을 새삼 고맙게 느끼게 되지 않는가? 그의‘숱한 약점과 절망’, ‘존재의 무의미함’에 대한 깨달음에서 삶의 겸손을 배우게 된다. 캘러핸의 표류는 정말 값진 고귀한 경험을 안겨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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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오선 여행 - 과학의 역사를 따라 걷는 유쾌한 천문학 산책
쳇 레이모 지음, 변용란 옮김 / 사이언스북스 / 200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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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과학, 나아가 천체, 우주의 근원적 발생까지, 우리 인간의 위대한 정신적 소산에 대한 자연과학적 발자취를 기반으로 한 철학적인 사색의 여정이다. 오늘의 인류에게 자오선이 갖는 의미는 누구도 의문을 제기하지 않는 지구시간, 아니 우주시간의 기준선이다. 영국의 그리니치천문대를 지나는 북극과 남극을 연결하는 수직의 선인 본초자오선을 경계로 15도 마다 1시간씩의 시간이 빨라지거나 늦어지게 된다.

저자는 바로 이 자오선이 오늘 왜 영국의 그리니치를 지나는 것이어야 했는지에 대한 이해관계국의 갈등과 확정에 이르는 역사적 일화를 소개하며, 인류의 합일점으로서의 그 고귀하고 숭고한 가치를 사유한다. 이렇듯 인류 정신의 합의가 가능하듯이 오늘의 종교간 갈등, 인종간의 갈등도 인간의 위대한 행로에서 이루어지리라는 소망으로 연결 짓기도 한다.

자오선을 여행하기로 한 저자의 위와 같은 인류정신의 숭엄함 위에 놓인 과학적 발견과 그 발견을 위한 노력들의 자취를 시(詩)가 흐르듯 저작의 전체에 자연스럽게 녹여내고 있다. 철저한 기독교 집안의 종교적 환경과 가치에 둘러싸여 성장한 저자가 “신이 우주를 만들어낸 단 한 가지 이유는 죄와 구원의 인간 드라마를 위한 무대로 쓰기 위해서일 뿐이었다.”고 인간 중심적인 종교에 헛웃음을 날리고, 서구중심의 역사적 추진력에 대한 허위에 대해 각성을 하기에는 진실을 쫒는 과학적 탐구의 산물이 있었음을 밝히고 있다.

“자아중심적인 세계에서 직접적인 인식을 뛰어넘는 공간으로, 우리가 결코 경험한 적 없는 과거와, 실현되지 않은 가능성의 미래를 향해 무의식적으로 여행을 시작” 하는 인간의 과학적 창의성에는 절로 숙연해진다. 이 저술은 고대 그리스의 천문학자 아리스타르코스에서 시작하여 케플러, 뉴턴에 이르는 지구와 우주의 탐구에서 퀴비에, 제임스 허턴의 동일과정설과 같은 지구역사의 가설에 이른 탁월한 인간들에 대한 경외를 보여준다.

“허턴은 바위의 흔적을 설명하는 데 신의 간섭 같은 것은 필요 없으며, 오로지 오늘날 우리가 볼 수 있는 변화를 가져오는 자연의 힘을 주시해야 한다.”고 지질학 시간이 인간의 시간과 얼마나 다른 것인지 “그토록 거대한 시간의 심연을 바라보려니 현기증이 날 만큼 마음까지도 넓어지는 듯 했다.”고 지질학적 시간의 탄생에 열정적 탄성을 자아내기도 한다.

한편 헉슬리의 노동자들을 위한 연설문을 인용하면서 과학적 가르침은 “도덕심이 향상되고 자유, 평등, 박애 정신과 새로운 천상세계, 새로운 지상세계에 대한 보편적인 믿음이 널리 퍼지기 바랐다.”고 우리가 과학에서 찾는 믿음에 대한 지식을 주장한다. 많은 과학적 발견이 당시대에는 진실이라 여겨졌지만 오늘에서는 그 과학적 진실이 오류임이 밝혀지기도 한다. 이러한 사실에 대해 저자는 “과학이 밝혀내는 것은 본원적인 진리는 아니라는 의미”라고 하며, “자연 자체의 현실을 있는 그대로 파악하도록 이끄는 완전히 객관적이고 보장된 방법, 즉 절대 오류가 없는 불변의 진리를 낳는 “과학적 방법”같은 것은 없”으며, 다만, “우리가 과학에서 찾는 것은 불변의 진리가 아니라 다른 대안보다 믿음직한 진실로 받아들일 수 있는 지식이다.”라고 하고 있다.

이 저술에 매료되는 것은 이와 같은 과학에 대한 철학적 사색뿐 아니라, “네안데르탈인의 멸종은 분명 거대한 인간 역사 드라마의 일부로서 우연이든 고의이든 같은 종 내의 대량 살상이 이루어졌다는 충격적인 증거일 뿐 만 아니라 ‘호모사피엔스’ 때문에 생물의 다양성에 발생한 가장 중대한 손실이다.”라는 인류기원에 대한 탐험과, ‘다윈’의 자연선택이론을 인간 본성에 대한 연민으로서 “딸의 죽음은 자연에 도덕율 따위는 없으며 모든 생명체는 생존하기 위해 치열하게 경쟁한다는 그의 주장에 통렬한 의미를 선사했다.”와 같이 흥미로운 공감을 조성하는 문체에 있기도 하다.

“과거나 미래의 누구보다도 심오하게 우주의 본성을 들여다 보았는지 모르지만”하고 뉴턴의 우주에 대한 겸허의 소박한 한 구절이 절로 오만한 나의 이성을 잠재운다. “거대한 진실의 바다는 고스란히 미지의 모습으로 내 앞에 펼쳐 있는데 나는 바닷가에서 놀다가 이따금씩 좀 더 매끄러운 자갈이나 조개보다 모양이 더 예쁜 조개껍데기를 찾는 것만으로도 좋아하는 어린아이에 불과했던 듯하다.”

자오선을 따라 영국의 남부 피치헤이븐에서 시작하여 울스소프, 배로올험버에 이르는 인류의 위대한 과학적 발견을 따라 거니는 사색의 여정에서 우리는 무지를 인정하고, 진정한 믿음의 버팀목 없이 단지 두발로 서서 존재의 신비를 맞딱뜨리기 위한 용기를 보게 된다. 저술의 말미에 자오선이 갖는 인류의 의미로 “저마다 스스로를 세상의 중심으로 여기려는 뿌리 깊은 경향을 뒤엎은 과학적 사고의 승리이며, 아직도 격렬하게 우리를 갈라놓고 있는 종교와 정치, 인종의 차이가 언젠가는 무의미한 것으로 사라져 버릴 수 있다는 희망의 징조다.”라고 하는 저자의 인류화합과 과학적 가치에 대한 기대에 그저 감정을 편승해보고 싶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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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저리 클럽
최인호 지음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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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치게 심각하거나 에고에 빠져 자기연민에 몰두하거나, 결손과 상흔, 너무 일찍 세상의 이치를 보아 우주적 고뇌를 짊어진 청춘을 그려내는 작의적 작품이 아니어서 얼마나 다행스러운지 모르겠다. 모 작가는 최근 국내에 이렇다 할 성장소설이 없어 젊은이들과의 소통을 위해 자신이 나섰다고 색 바랜 이데올로기로 포장하여 오만을 부리기도 하지만, 이‘머저리 클럽’은 색을 입히지 않은 지극히 보편적인 다수를 수사(修辭)하지 않은 채 유쾌하게 추억하는 순수성을 기반으로 하고 있어 그 건강성이 돋보인다.

10대가 어른이 되는 과정이 그렇게 참혹하리만큼 고통스럽거나 지난한 방황을 촉발하고, 사회계층의 구분, 부와 가난과 같은 경제적 양극화, 교육제도의 경직성, 기성세대의 부조리에의 회의(懷疑)와 같은 이데올로기적 저항을 수반하는 것이 아니다. 더구나 국내의 몇 안되는 성장소설을 표방하는 근작(近作)들의 주인공하면 결손가정, 도시빈민, 깊은 갈등을 내재한 가족의 아이를 내세워 음울하고 뒤틀린 황색의 세상과 혼돈을 배경으로 하고, 지독하리만큼 정체성이란 주제에 집착하여 자기영혼을 이리저리 핥아대는 것을 성장통이란 비현실적인 상상력으로 끌어다 댄다. 이러한 고답적(高踏的)인 구조에는 10대들을 비롯한 독자들에 대한 계몽적, 교훈적 의도를 포함하는 의도적인 어리석음이 있기 때문인 듯하다.

이와는 달리 이 작품은 보통의 상식을 가진 우리들의 모습 그대로이고 돌이키면 그 찬란하고 쾌하였으며, 뜨겁게 설레던 가슴과 아득한 실연의 슬픔으로 남몰래 눈물짓던 바로 그 순수했던 시절을 그리고 있기에 그 작은 통증들이 아름답고 성숙이란 긍정성에 애틋한 추억을 더해준다. 6인의 남자 고등학생으로 구성된 ‘머저리클럽’의 구성원들과 주인공‘김동진’, 그리고 이들과 합병하는 5인의 여고생 클럽, 이름하여 ‘샛별클럽’의 한사람 한사람에게 살포시 지나가는 슬픔과 고통, 고뇌는 사랑스럽기 그지없다.

빵집에 남학생과 여학생이 마주하는 것이 교칙에 위반되어 처벌받던 시절, 그리고 낙원동, 청진동 분식점이 일탈을 조성하던 60,70년대의 낭만이 그리워진다. 등교시 타고 다니던 만원버스에서 매번 마주치던 그 여(남)학생은 지금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 가방을 무릎에 올려 받아주던,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창밖과 창에 비친 모습만을 흘깃 보던 그 순박하고 사랑스런 모습이 떠오르며, 슬며시 미소가 머금어진다.

저마다 성장의 고통이란 모습이 다르게 찾아오지만 처음 눈뜨는 사랑의 관념, 그리고 결별과 같은 상실이 가져다주는 통증이 가슴을 저리게 하던 시절, 그리고 부모로부터의 관심이 점차 거북해지고 하나의 객체로서 자신을 찾아가는 과정 속 외로움과 고독, 그 철저한 엄습이 친구라는 관계로 서서히 이동하고 비로소 자신을 정립하던 미숙했던 내가 떠오른다.

“접목을 할 때 나뭇가지를 꺽어 상처를 내는 예식을 거행하는 것처럼, 내 마음에 상처를 그어 내린다는 것은 무언가 새로운 접목이 아니겠는가.”하는 동진식의 성숙을 어느 순간에는 나도 모르게 이해했던 것일 게다. 그렇듯 어른이 된다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가끔은 영민이처럼 “안간힘을 이를 악무는 자기혐오”에 휩쓸려 열등감과 자괴감에 한 없이 빠져들기도 하지만 우린 또 다른 사랑과 삶의 긍정 앞에 멋지게 일어서왔다.

작품 속에 ‘겨울이야기’라는 에피소드와 ‘경아’의 이야기는 작가의 옛 작품과 눈송이가 푸르게 내리던 그 겨울 단성사에서 상영되던 동명의 영화가 오버랩 된다. 왠지 그 낭만성이란 것이 시린 가슴을 떠올리게 하고 어른이 되는 과정에서 거치는 마지막 관문처럼 여겨져 더욱 선명하게 남아있는지도 모르겠다.

이 작품의 문학적 성취에 대해서는 많은 아쉬움이 남는 것은 어찌할 수 가 없다. 등장인물들의 이야기가 아닌 어느 낯선 어른이 읊조리는 생경함이 장황하게 포진하여, ‘이 작품은 성장소설입니다.’하는 식의 의도가 흐름을 방해하고 조악하게 하는데 일조한다. 또한, 성장의 통증이란 것이 음울과 깊은 번민, 그리고 가출과 자살까지를 수반하는 부정적 고통이 승화되어야 비로소 긍정과 성숙, 삶의 의미를 발견하는 그런 되먹지 못한 것은 아닐지언정 삶에 대한 진정성이나 인생의 진리를 향한 근원적 의식이 결여되어 있다는 점이다. 다만, 11명의 그 풋풋한 추억들이 책을 읽는 내내 그들과 같이 미소 짓고 가슴 설레는 유쾌함으로 이렇게 오늘을 살아가는 것 아닌가하는 위안을 준다는 것이며, 바로‘그래 세상은 살만한 것이야! ’하고 긍정을 보여주는 것이 이 작품의 매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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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 팡파를로 - 시인 보들레르가 쓴 유일한 소설
샤를 보들레르 지음, 이건수 옮김 / 솔출판사 / 200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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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들레르의 정신세계를 비교적 수월하게 들여다 볼 수 있는 단편 소설이다. 그의 시 “악의 꽃”에 수록된 작품들이 출현하게 된 배경이나 왜 그토록 악을 추구했는지에 대한 역설적 사생활이 자전적으로 기술되었다고도 추정할 수 있는 작품이기에 그 문학적 작품성을 떠나 인류의 문학사상에 분기점이 된 작가를 이해하는 의미 있는 저작물이라 할 수 있다.

 

그의 시 ‘피의 샘물’과 같이 선혈이 쿨쿨 흘러감에서 “저 매정한 계집들에게 내 피를 빨아 먹이기 위해”라든가, ‘인간과 바다’에서 “그런데도 헤아릴 수 없는 세월을 두고 / 그대들은 무자비하고 가책 없이 서로 싸우니 / 그토록 살육과 죽음을 사랑 하는가 / 오 영원의 투사들 어쩔 수 없는 형제여!”식의 인간의 본성으로서의 악을 숭배하기에 이르는 그의 발악적 외침은 19세기 중엽 유럽사회의 퇴폐적 물질주의와 허위와 위선으로 가장된 귀족과 그 아류들에 대한 환멸이다.

 

주인공‘사무엘 크라메’에 대한 인물 설명은 작가 자신의 성격을 정의한 것이라 해도 차이가 없을 정도라는 것이 당시 문단의 평이다. “우울한 성격과 어울리지 않게 외모가 몹시 화려했다. 현실생활에서 그는 단지 몽상만을 할 뿐 이었는데, 그의 내부에서 끊임없이 빛을 발하는...”과 같다. 작품은 한때 연인이었던 대 귀족의 아내가 된 ‘코스멜리 부인’에 대한 욕망에 눈이 먼 크라메가 그녀 남편의 정부인 ‘라 팡파를로’를 해코지하여 남편이 그녀에게 돌아가도록 자신이 나서겠다는 약조로 시작된다. 여기에는 오로지 음란한 욕망과 퇴폐, 허위와 거짓, 배반만이 남는다. 결국 인간의 악만 존재하는 것이고 그것이 시대의 진리이다. 더구나 창녀의 비위를 맞추어 출세하려는 자신의 가면을 여지없이 벗겨내고 “소위 지성인이 그토록 파렴치하다니!”라고 맺는다.

 

지극히 짧은 소설로 오늘의 시각으로 작품성을 평가하기에는 낯설고 결여됨이 있다. 그러나 『악의 꽃』이 출간되는 1857년 6월 25일 보다 10년 앞서 발표된 작품이자 그의 유일한 소설작품이라는 문학사적 위치뿐만 아니라 청년기의 보들레르, 그의 예술적 광기와 고뇌, 퇴폐적 프랑스 사회를 엿보게 하는 중요한 참고자료로서의 의미를 갖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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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중구속
크리스 보잘리언 지음, 김시현 옮김 / 비채 / 200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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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인간이란 얼마나 연약하고 취약한가? 크리스 보잘리언의 이 탁월한 작품은 마지막 페이지에 이르러서 그 허약함을 우리에게 일깨워준다. 이러한 것을 반전이라고 하는가? 반전이란 용어로는 우리인간들의 무능함에 대한 지나치게 협소한 언어처럼 보인다. 능욕을 당한 여린 한 여성의 집요한 추적은 그저 “외상 후 스트레스성 장애의 특징을 강하게 동반한 양극성 1형 장애와 조증”으로 다가올 뿐이다.

이 작품의 묘미는 ‘F.S. 피츠제럴드’의‘위대한 갯츠비(The Great Gatsby)'의 속편인 냥 롱아일랜드의 대저택과 갯츠비, 데이지, 톰과 파멜라등 부캐넌 일가의 후대를 이어간다. 작가는 이 걸작의 변주곡이라고 겸양을 보이지만 서정성과 심리적 추리물로서의 서사를 넘어 견고한 문학적 성취를 이뤄낸 작품이라고 까지 할 수 있다.

대학생이던‘로렐 에스타브룩’은 ‘언더힐’이란 도시의 산악도로에서 두 명의 남자들로부터 강간의 위기에 처하고 그를 벗어나기 위한 몸부림 중 쇄골이 으깨지고 손가락이 부러지는 손상을 입는다. 다행히 지나던 사람들로 인해 구조되고 범인들은 체포되어 수감된다. 이러한 정신적 상흔을 딛고 거리의 부랑자들을 돕는‘쉼터’의 직원으로서 타인을 위한 봉사에 헌신한다. 그러던 중 바비라는 정신분열증을 앓는 노인이 쉼터에 오게 되고 그에 대한 호감을 갖게 된다. 심장마비로 노인이 사망하자 그의 유품인 사진꾸러미가 로렐에게 전달되고, 그 사진의 전시를 통해 쉼터의 재원을 마련하기위한 준비를 맡게 된다.

소설의 재미는 몇 장의 사진 - 롱아일랜드의 갯츠비 저택과 갯츠비가 사망한 수영장, 갯츠비의 정부였던 데이지의 아이들로 보이는 어린 소녀와 소년의 사진, 그리고 언더힐에서 자전거를 타는 한 여자 - 으로부터 시작된다. 죽은 노인 바비의 뛰어난 사진작품과 그 사진들의 의미에 집착하는 로렐의 집요한 조사, 그녀는 바비가 곧 데이지와의 사이에 출생한 갯츠비의 아들이라는 심증을 입증하려한다.

환자 29873번의 정신과의사 상담일지가 뜬금없이 페이지를 수놓는다. 그리고 바비의 생전 생활과 그의 친구들, 이웃들, 가족들을 찾아 주위의 우려스런 시선을 뒤로하고 연민의 추적을 지속한다. 그녀의 상흔을 걱정하는 친구와 동료, 애인들을 피해 자신의 정당성을 입증하기위한 행동에 몰입한다. 복선이라곤 생각지 못했던 무수한 요소들이 치밀한 복선임을 깨우치는 것은 책장을 덮을 때가 되어서이다.

모든 진실을 밝혔다고 생각한 순간 그녀의 앞에 나타난 사람들, 엄마, 이웃, 친구, 직장동료, 그리고 낯익은 남자, 근심과 우려가 그득한 그들의 표정, 그녀에게 가해진 그 정신적, 육체적 상처의 실체는  과연 무엇이었을까? 바비의 사진은 갯츠비와 데이지의 아들임을 증명하는 것일까?

과장된 전율을 요구하지도 않으며, 심리적 긴장을 강요하지도 않는다. 지극히 평이한 문장으로 이처럼 완벽하게 소름끼치는 반전을 이뤄내는 작가의 저력에 감탄을 내지르지 않을 수 없다. 우아한 풍미에 취해 밤새 책을 손에서 놓지 못한다. 책의 서평처럼 허구와 현실의 구분이 모호해지고 넋이 빠진 당신을 보게 될 것이다. 정신적 외상과 관련한 이만한 걸작은 당분간 출현키 어려울 듯하다. 걸작 중 걸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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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브리나 2008-07-30 18: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소설같은 서평이네요,이 작품에 관심을 가져보아야 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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