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러드 워크 - 원죄의 심장, 판타스틱 픽션 블랙 BLACK 3-23 판타스틱 픽션 블랙 Black 3
마이클 코넬리 지음, 김승욱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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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소설 제목‘블러드 워크(Blood Work)’는 채혈, 심장이식수술 등의 본래의 의미를 갖는다. 작품 속 주인공인 전직 FBI요원‘매케일렙’역시 심장질환으로 은퇴하고, 천우신조로 심장이식수술을 통해 생명을 연장한 자이다. 그러나 소설 초입에 매케일렙의 목소리를 빌어 작가는 다의(多意)성을 부여한다. FBI연쇄살인 전담반 요원들이 자신들의 일을 지칭하는 것으로 ‘피의 작업'이라는, 바로“피로 진 빚은 반드시 피로 갚아야 했다.”고 들려주면서 말이다.

이 작품은 이처럼 다양한 암시와 각종의 복선이‘마이클 코넬리’의 다른 어떤 작품보다 친절할 만큼 많이 등장한다. 달리 말하자면 그만큼 치밀하고 정교한 얼개를 지니고 있다 할 수 있다. 또한 상당히 얄궂은 상황으로 시작케 되는데, 악을 규정하는 데에 어떤 도덕적, 철학적 주저함이 없는 것도 투박한 만큼 독특하다. 자신의 생명을 연장시켜준 심장이 강도의 살인으로 희생된 여인의 것이라는 점은, 악(惡)의 행위가 살인범과 악을 쫓던 자신에게 생명을 주었다는 아이러니이다. 매케일렙의 가슴에서 뛰고 있는 심장은 그 악인이 절명(絶命)시킨 여인의 심장 아닌가. 하는 감성적이고 다소 신비적 결론이 작품에 생명을 불어넣게 하고 있는 것도 사실 색다른 느낌이라고 할 수 있다.

프롤로그의 단 두 쪽에 표현되는 슈퍼마켓의 강도 살인 장면은 마치 슬로우 비디오를 보는 듯, 작품을 모두 읽고 난후에도 영상으로 남아있을 정도로 강렬하다. 처절하거나 잔혹한 묘사가 있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피살되기 직전의 평온한 한 여인의 미소와 순간의 차가운 철의 느낌, 그리고 아득히 내리는 적막과 암전의 그 극단적 대비가 주는 선명함, 생과 사, 선과 악의 갈림길이 주는 찰나의 공포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무능한 경찰국 형사들과 FBI, 보안관서 등 수사관들의 영역싸움, 범죄 억제제도로서의 삼진제도가 오히려 강도행위를 더욱 극악하게 하는 원인제공이 되어버렸다거나, 의료정보시스템의 보안부실 등 사회 생태계의 문제를 슬쩍 제기하기도 하며, 점진적으로 사건의 중앙부로 접근하는 천연덕스런 작가의 역량은 리얼리티를 제고하는데 일조한다. 그리고 악을 쫓는 행위의 한편에‘그래시엘라’라는 메케일렙 심장의 주인인 피살된 여인의 언니를 등장시켜, “아주 오랫동안 내 속이 텅 비어 있었기 때문에 이젠 빈 곳을 채우고 싶어요.”하는 인간에 대한 믿음과 사랑, 삶의 희망을 찾으려는 고독한 은퇴수사관의 모습이 삶의 균형을 조절케 하고, 사랑 후에 “아무것도..., 그냥 행복해서 그래요, 그뿐이에요.”하는 진정 사랑의 기쁨이 전달되는 하나의 문장에서 작가의 저력을 또 한 번 확인하게 되기도 한다.

단순한 노상강도 같았던 사건이 사회적 권위에 콤플렉스를 지닌 살인자로 또는 사회병리적 현상으로, 청부살인일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으로 확장되는 과정은 독자를 미궁에 빠뜨렸다가 다시 건져내주고, 또 다시 오리무중으로 내던지곤, 슬며시 단서와 암시로 현혹시키며, 살인자의 실체로 안내한다. 어떤 의미에서 매케일렙에게 커다란 은혜를 베푼 자, 그를 영원히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버릴 수도 있는 악과의 대면을 향한 속도가 심장을 무겁게 느끼게 할지도 모른다. 악에 잠재한 고립, 그 고립의 다른 표현인 고독이 깊게 내재해있는 은퇴 수사관, 메케일렙이 발견하는 신뢰와 사랑이 이 작품의 또 다른 얼굴로 다가오기도 한다. 재미, 스릴, 사색... 다양한 즐거움을 만들어내는 작품이다. 인간의 깊고 근원적인 본질을 탐색한 소수의 뛰어난 스릴러 작품 중 하나로 불릴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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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덜란드 오바마 북클럽 1
조지프 오닐 지음, 임재서 옮김 / 올(사피엔스21)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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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환희도 열정도, 낙심도 절망도, 삶의 어느 순간순간마다 다가오는 느낌들에 감정의 과장된 기복을 표현하지 않게 되었는지는 명확히 그 기점이 기억나지는 않는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세상에 그다지 기대할 것이 많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그래서 기쁘다고 외치지도 슬프다고 쳐지지도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이 작품의 화자인 ‘한스 판 덴 부르크’안에 잠복해 있는 운명론적 견유주의는 내겐 공감을 넘어선 일체감을 형성할 정도였다 할 수 있다. 어떤 의미에선‘프루스트’를 떠올리게 하는 기억의 여정이고, 관조적인 내면의 일기 같아서 이야기 구조에 익숙한 사람들에게는 엄청난 인내심을 요구하는 소설이 될 수도 있겠다 싶은 생각이 든다. 또한 ‘크리켓’이라는 과거 영연방국가들에서 볼 수 있는 스포츠가 주요 제재이고, 화려한 소비문화와 현란한 욕망의 무대를 기대케 하는‘뉴욕’을 배반하고,‘한스’의 일상에 있는 갈색과 흑색의 피부를 가진 이주민들의 단조로운 모습을 만나는 것은 더더욱 독서를 어렵게 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나 수다스런 치장과 감각적인 형용사들이 배제된 담백하고 일관된 아웃사이더들의 삶에서 오히려 치열한 삶의 의욕과 화해와 화합의 희망을“독선적 망상”에 빠져있는 거대제국에 뿌리려 하는 작은 행동들을 발견하는 것은 소박한 희열을 안겨주기도 한다.
변호사인 영국인 아내의 미국시장 진출을 위한 이주로 뉴욕생활을 하게 된 네덜란드인‘한스’의 이야기다. 금융투자분석가로 낯선 이국의 환경에서 그런대로 금융가에서 인정받는 애널리스트로 직장생활을 꾸려가는 서른여덟 살의 남자, 그에겐 친구도 없고 이렇다 할 여가활동도 없다. 아내와 아들이 있는 가정에 길들여 있는 그런 소박하고 평범한 남자.

그의 시선에 들어온 랜돌프 워커공원에 흰색 유니폼을 입고 크리켓을 하는 사람들의 모습은 고향 네덜란드 헤이그에서의 어린 시절의 기억으로 이어진다. 항상 운동장에 아들의 시합이 끝날 때까지 자리를 지키시고 계시던 어머니의 모습이 왠지 애틋한 사랑을 기억케 하고, 눈시울이 붉어지게 한다.

‘한스’의 일상 속에서 스쳐가는 사물과 사건에 이어지는 기억들, 시간과 공간을 마구 거슬러 떠오르는 회상들, 거기에는 어머니의 배려와 사랑이 담긴 표정이 있고, 아들 제이크를 바라보는 아버지의 진지한 의지와 소망이 있다. 그리고 아내에 대한 부끄러움과 미안함, 실망과 부당함의 통증도 있고, 이민자의 스포츠로 치부되는 크리켓을 미국사회에 스며들게 하려는 트리니다드 사람‘척 램키순’의 열망에 대한 회의도 자리 잡고 있다.
“아무리 발버둥 쳐도 거대한 결과는 우리의 노력과 관계없이 결정되며, 우리가 고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사랑은 떠나가기 마련이고, 해야 할 말은 끝끝내 할 수가 없고, 온 세상이 지리멸렬함 투성이고, 붕괴는 피할 수 없는 것”이라는‘한스 ’의 운명론은 마치 작품전체를 아우르는 예언 같다.

항상 분명한 목소리를 내는‘한스’의 아내 ‘레이철’이 쏟아내는 독설처럼 “병든 이데올로기가 난무하는 나라, 대중이나 지도자가 미국과 세계뿐만 아니라 광신적인 기독교 복음주의 덕분에 우주에 대한 독선적인 망상에 빠져있는 나라” 한마디로 “‘악성 정신병에 걸린’비현실적인 나라”에서 자신들의 자아에 상처를 입지 않고 꿈을 꾸려하는 이민자들의 비릿한 삶의 모습들이 흔들거린다.
이처럼‘한스’의 기억의 여정에는 미국의 배타적 독선이 빚어낸 망상과 이민자들의 기대어린 꿈이 어울려 있고, 어머니와 아내, 아들, 그리고 친구에 대한 연민과 사랑이 흐른다. 그리곤 이민자들의 마음 저 밑바닥에 흐르는 어린 시절 고향의 아버지와 어머니, 형제들에 대한 깊은 향수가 서려있다.

그런가하면 뉴욕에서의 운전면허 신청을 위한 외국인에 대한 하찮은 인간들이 행사하는 부당하고 냉담한 권력의 메스꺼움에 대한 일화에서부터, 떠나버린 아내로 인한 극도의 무감각으로 인생자체가 해체되었음을 느끼는‘한스’에서와 같이 그의 촘촘히 엮인 내면의 기억들, 세밀한 심리의 묘사들을 좇는 진지한 즐거움이 있다.‘한스’가 털어놓는 작은 기억의 기록들에서 잃어버렸던 우리들의 기억을 찾게 되는 것은 바로 이 소설의 형식이 가져다주는 빼어남일지도 모르겠다. 이주민들의 땅(nether-lands)이란 은유적 의미도 지닌‘네덜란드’는 뉴욕의 또 다른 얼굴을 우리에게 드러내준다. 절정도 리듬감도 어떤 굴곡도 느낄 수 없는 문장으로 참을 수 없는 지루함이 엄습하지만 그 어떤 소설보다 우리들 마음을 커다랗게 진동케 한다. 지적이고 아름다운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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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망하는 테크놀로지 - 과학기술학자들 '기술'을 성찰하다
손화철 외 지음 / 동아시아 / 200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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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오늘의 우리들은 과학기술의 존재 없이 밥알 한 톨이라도 먹을 수 있을까? ‘과학기술’에 대한 어떠한 인식도 없이 살아가고 있지만, 이처럼 그 존재 없이는 생존할 수 없을 정도로 인간을 에워싸고 있는 것이 바로 기술이라는 점을 부인할 수 없다. 어느덧 공기와 같은 인간존재의‘배경’이 되어있다.
그러나 기술의 발전이 인간에게 긍정적 혜택만 주는 것은 아니며, 생명의료 윤리의 문제에서부터 인간성의 훼손, 기술에의 종속이라는 자유의 박탈 등 부정적 문제를 야기하고 있기도 하다.

독특하게도『‘욕망하는’테크놀로지』라는 제목처럼, 과학기술이 마치 생명체라고 주장하는 듯한, 이 저술을 구성하는 28편의 과학기술시론은 인간과 기술, 기술과 사회, 기술의 현재와 미래의 관계라는 성찰을 통해 과학기술의 정체와 특징을 탁월한 이론과 예화로 전달해 주고 있다.
기술은 “인간이 세계를 특정한 방식으로 대하는 태도”라고 정의하였던‘하이데거’의 말처럼, 형체가 있는 인공물로서, 이것이 만들어내는 무형의 서비스와 노하우, 그리고 인공물과 같은 대상을 만들어내는 과정과 기초가 되는 공학 지식을 의미하는 기술에 더해, 인공물이 만들어내는 사람들과의 관계를 바꾸려는‘의지’까지를 포함하기에 이르렀다.

이제 기술은 세상을 특정한 방식으로 바꾸려는 의지가 각인되어 있다는 의미이다. 오늘의 기술들은 서로 네트워크로 연결되어 거대한 기술시스템을 형성하고 있으며, 한 두 사람의 의지만으로 통제할 수 없는 상태에 있으며, 결국 기술은 그 자체의 내적 논리에 따라 발전하고, 자체 생명력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이고 있다. 기술철학자‘자크 엘륄’의“현대 기술이 자율적이 되었다!”는 상징적 표현처럼 “인간이 기술을 발전시키고 사용하는 것이 맞긴 한데, 발전시키지 않을 자유도, 사용하지 않을 자유도 인간에게 없다면 인간은 기술의 주인인가? 하인인가?”하는 질문이 절로 터져 나올 밖에 없는 것이다.

근대이후, 인간의 오만이 만들어낸 자연의 지배 욕구는, 그 자연에 인간 자신마저 포함되어 스스로 지배의 대상이 된 꼴이 되고 말았다. 과학기술을 통한 눈부신 성취 뒤에는 공허함과, 권태만이 남아 있을 뿐이고, 스스로 대상으로 전락했으니 주체는 없어지고 의지만 남은 셈이 되고 말았다는 것이다. 인간의 삶은 기술시스템의 일부가 되어버렸고, 거대 기술시스템은 효율성의 법칙에 따라 움직일 뿐이다. 여기에 인간의 가치나 필요는 효율성의 논리 앞에 무력하고,“인간이 더 이상 자유롭지 않다는 것을 인정 할 자유밖에 남지 않았.”음의 다름 아닌 것이다.



이러한 기술과 인간관계에 대한 문제의식은 기술결정론, 사회결정론, 사회구성주의론 등 과학기술학 및 기술철학자들의 다양한 통찰들을 기반으로 하여 기술의 윤리와 도덕성, 기술의 정치성, 기술의 인간사회에 대한 영향과 책임에 대한 화려한 사색이 풍부하게 수 놓여 지고 있다. 일례로 기술철학자 ‘랭던 위너’의 기술의 정치성에 대한‘뉴욕 존스비치 공원’진입로에 놓인 고가도로가 흑인이 이용하는 버스의 통행을 막기 위해 낮게 설계되었다는 예화나, 숙련노동자의 노조를 무력화시키기 위해 전자동 수치제어 공작기계를 만들어내는 것과 같은 지적은 기술의 새로운 범주로의 확장된 이해와 시각을 제공해주기도 한다.

또한 세탁기와 같은 가사기술이나 휴대전화가 과연 인간을 보다 자유롭게 한 것일까? 하는 질문의 답변 역시 낭만적인 긍정만을 하지 않는다. 오히려 사람들에게 기대행동의 패턴을 변화시킴으로써 새롭게 인간을 구속하기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이러한 예는 부지기수로 등장하는데, 체외수정의 생식보조기술이나 피임기술 역시 여성을 출산이라는 우연적 위험에서 해방시키기는커녕, 사회적 맥락을 달리함으로서 기술을 사용하라는 압력에 시달리게 하는 것과 같이 암묵적으로 기술을 사용하지 않는 것은 비합리적이라는 전제에 지배당하게 하고 말았다는 것과 같다.

특히 기술후발국으로서 세계 경쟁시장에서의 생존이라는 명분하에 기술개발에 윤리적, 법적, 사회적 영향은 물론 사회적 합의를 무시하는 한국의 끔직한 현실을 비판하고 있기도 하다. 기술의 잠재적 혜택만 부각하고 불확실한 위험은 축소하거나 무시하며, 윤리의 문제를 제기하거나, 과학기술 발전의 당위성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면 국익을 무시하는 반역행위처럼 취급되는 후진적 현실이 궁극에 얼마나 막대한 폐해를 야기하는지 우리 과학기술의 현주소를 반성케도 한다.

기술의 발전이 인류에게 편리와 자유의 확장, 그리고 엄청난 물질적 혜택과 성취를 제공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기술발전의 신화만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는 순간, 기술은 인간의 자율성을 넘어선다고 경고한다. 인터넷이 시공간을 뛰어넘을 수 있는 자유를 인간에게 선사하였지만, 중독과 같은 그 자유에 도리어 묶이게 하는 측면도 있다. 나아가 최근의 “언제 어디에나 동시에 존재”한다는 ‘유비쿼터스’의 환경은 우리가 피부로 느끼거나 의식할 수 없을 정도로 기술은 우리의 일상 곳곳에 자연스럽게 스며들어 확산된다. 아마 ‘조지오웰’의 『1984년』에 등장하는‘빅브라더(Big Brothers)’들이 통치하는 ‘제레미 벤담’의 전자‘파놉티콘’의 감시사회로의 이행도 우려 할 수 있는 것과 같이, 기술이 제공하는 기회만을 강조하다보면 필연적으로 동반되는 다양한 문제에 꼼작 없이 갇히는 신세가 될 지도 모를 일이다.

이 저작은 기술의 철학적, 인문학적, 사회과학적 측면에서 조명된 화려한 통찰들로 오늘의 기술사회에 대한 냉정하고 진지한 성찰을 가능케 한다. 과학기술학에 낯선 독자들에게조차 익숙한 언어로 새롭고, 다채로운 이론적 배경과 지식으로 무장하여 지혜롭게 과학기술의 면모를 이해시키고 있다. 또한 과학기술 지상주의나 이와는 반대로 사회결정론과 같은 편협된 주장을 페기하고, 균형된 시각을 지니기 위한 노력의 흔적들이 더욱이 기술철학과 과학기술학이라는 생소한 분야를 접하는 대중에게 고마운 저술이 아닐 수 없다는 생각을 갖게 한다.


기술이 자체의 힘으로 도덕적인 사회를 만든다거나 행복한 사회를 만들어 나갈 것이라고 주장하는 과학기술자, 엔지니어, 사회집단을 향한 기술의 책임에 대한 교훈들은 더 이상 다루기 쉬운 도구가 아닌 기술에 대한 명철한 통찰 이상의 조언이랄 수 있다. “인간을 닦달하는 테크놀로지”, 존재자 중심의 사유가 극에 달한 것이 바로 현대기술이라는 하이데거의 지적은 어찌 보면 인간소외의 미래사회를 향한 우울한 예언이었는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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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 면허 프로젝트 - 드로잉 기초부터 그림일기까지, 삶을 다독이는 자기 치유의 그림 그리기
대니 그레고리 지음, 김영수 옮김 / 세미콜론 / 200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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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자신만의 이야기를 쓸 때면 머리에 떠 오른 그 상상의 이미지를 글 옆에 그려 넣어 남기고 싶은 욕망이 일곤 했다. 이와는 반대로 눈앞에 펼쳐진 어떤 이미지를 빠르게 그려서 이를 글로 연결시키고 싶을 때도 있곤 했다. 그러나 번번이 그리기 능력이 젬병인 자신을 원망하고 아쉬워하는 것이 전부이었던 터에 이 저작은 그야말로 나에게는 맞춤인 내용이 아닐 수 없다.

보이는 것을 어디서부터 어떻게 그려야 할지, 그림공부라곤 어린 시절 미술시간에 의무적으로 수행했던 기억이 전부인 내게는 불가능해 보이는 도전이고, 시도조차 엄청난 두려움이라 해야 할 것이었다. 이제 우리들 삶의 과정과 별반 다르지 않은, 대학졸업하고 번듯하다는 직장에 들어가고 그 조직에서 성장하는 것이 인생 최대의 목표이자 의당 그러해야하는 것이 삶이라고 여겼던 사람, 저자인‘대니얼 그레고리’의 진솔한 그의 이야기를 통한 그림그리기의 설명, 조언은 자신감과 긍정, 그리고 용기를, 나아가 순수한 마음으로 어떤 저항도 없이 그리기를 따라하게 만들어 버린다.
 
이 책은 성인이 되어 그림그리기에 첫 도전을 하는, 아니 “세상을 다양하게 보고 느끼며 그걸 설명하기 위한 연결고리를 짓는 일”에 처음 나서는 우리들에게 어려운 첫 걸음을 떼게 해 준다. 나만의 그림을 그릴 수 있도록 해주는 친절한 초보적 설명에서부터 혹 포기하려는 마음까지 다잡아주고, 한편으론 자극하며, 용기를 잃지 않고 꾸준히 완성하고, 발전할 수 있도록 꼼꼼하게 길을 안내한다.

이처럼 그림 그리기의 길잡이는 물론 저자의 성숙한 삶의 조언들과 어울려 엄격함과 사랑을 가진 한 명의 미술선생님이 옆에서 친절하게 안내해주는 느낌을 받게 한다.

그래서“자신의 참 모습을 부정하고 창조의 불씨를” 계속 억누르며, 결국 일상의 무기력함에 빠져 헤어나지 못하고 더 없이 편협해진 우리들의 내면에 잠들어 있는 강력하고 찬란하고 놀라운 창조력을 깨워준다.
잘 나가는 대형광고기획사의 간부직, 그러나 “더 이상‘관리감독 아래’있지도‘성공의 사다리’를 오르지도 않는” 자신의 자유로운 영혼을 위한 새로운 행보는 매일의 얽매인 일상에서 주춤거리는 우리에게 우리들의 가치, 능력을 깨우치게 해 준다. 
드로잉 하기, 그림일기 만들기, 충격주기, 예민해지기, 극복하기, 평가하기, 정체성 찾기, 확장하기에 이르는 일련의 그림그리기에 대한 치밀하고, 세심한 실기에 대한 설명들은 경험에서 우러난 이야기들로 가득 차 있어, 정말 책에서 도망칠 수 없을 정도로 붙들어 준다.

어느덧 나는 펜을 들고 그의 지시에 따라 드로잉 연습에 착수한다. 내게 이러한 용기를 부여하는 책이라니! 내겐 아무런 이의도 저항감도 일지 않는다. 절대적으로 신뢰케 하는 그의 가르침을 계속해서 따라가고자 하는 의지가 솟구친다.
“중요한 것은 보는 것이다. 지금 보는 것과 다른 시각으로 봐야 한다는 뜻이다. ~ 선입견을 버리고 속도를 늦출 필요가 있다.” 정말 그렇다는 것을 느끼면서 “세상을 좀 더 자세히 관찰 할 수 있게 훈련”이 되는 자신을 발견케 된다. 그렇다고 내내 친절하지만은 않다. “친절함과 위로는 때론 최악의 승객”이 되는 법. 포기하려 들면 그는 우리를 마구 자극해댄다. 이 책을 손에 들면 누구나 자신만의 그림을 그릴 수 있을 것이다. 단 숨에 읽어버리고 책장에 치워둘 책이 아니다. 내겐 고마운 삶의 스승으로 나의 그림그리기가 어느 정도의 궤도에 오를 때까지 귀중한 길잡이가 되어 줄 터이다.

“삶을 더 명확하게 보게 되면 그림도 더 잘 그릴 수 있게 된다.” 정말 멋진 말이지 않은가? 삶을 다독이는 치유의 그림그리기라는 이 책의 부제는 정말의 사실이다. 지금도 나는, 나의 집 거실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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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의 기쁨과 슬픔
알랭 드 보통 지음, 정영목 옮김 / 이레 / 200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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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 화성인에게 인간 사회를 이해시키는 데에는 최고의 참고서가 될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외계인에게 보여 주기위한 것이 이 글의 본질이 아닌 이상 ‘일’에 매여 있는 대부분의 인간에게는 그리 훌륭한 영감을 던져주는 데는 이르지 못한 느낌이다.

21세기 인간사회가 만들어낸 거시적 산업의 흐름을 내다볼 수 있는 직업군을 대표하는 물류산업에서 생산공장, 로켓과학, 직업상담, 그림, 회계, 송전공학, 항공산업 등 일견 빼어난 선택과 “일이 삶의 의미를 준다는 그 엄청난 주장을 파헤쳐 보고 싶었다.”는 당찬 의도와는 사뭇 다른 이방인의 시선만 담겨있음을 발견하는 것은 당혹스럽기조차 하다. 그래서 그 속에 있어 익숙한 자들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것들을 세세히 묘사할 수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소위 직업사회에 발을 담근 대다수의 사람들에게는 유치한 접근으로 보일 밖에 없다.

다만, ‘프루스트’식, 아니 ‘보통’식 연상 작용에 의한 꼬리에 꼬리를 무는 단상의 독특한 연결이 창출하는 때론 시니컬하고, 때론 해학적인 사색을 만나는 즐거움은 여전하다. 각 산업에 대한 속성을 풀어나가는 지루한 여정을 따라가는 따분함이 있지만, 순간순간 던져지는 이러한 의외의 사유에서 냉정함, 미소, 진정함의 발견으로 공감의 머리를 끄덕여지게 하는 매력을 발견 할 수 있다.
일례로 물류산업의 거대한 창고를 보고는 “적어도 산업화된 세계에서는 우리 인간이 수천 년의 노력 끝에 마침내 다음 끼니를 어디서 찾아 먹을까 안달하는 일로부터 벗어난 유일한 동물이 되었음을 보여준다.”는 것과 같이‘창고’에서‘끼니로부터 해방된 인간’을 떠올리는 탁월한 사고의 진행을 보는 흥미로움 같은 것이다.

사실 우리들은 왜 일을 하거나 해야만 하는가? 하는 질문은 어리석기조차 해 보인다. 현대사회에서 일이란 곧 생존을 위한 수단을 의미하기에(물론 일 하지 않아도 먹고 즐기는 예외계층이 존재하기는 한다.) 여기에 성취감 같은 구차한 이유를 붙여보아야 궁색한 답변밖에 되지 못한다. 그럼에도 가능하면 우리는 일에서 행복과 즐거움과 같은 만족감을 찾으려한다.
저자는 “경제적 요구는 사람을 노예나 동물과 같은 수준에 놓는 것, 그래서 만족과 보수를 받는 자리는 구조적으로 양립할 수 없다.”는 인류사회를 2000년간이나 지배해 온‘일’에 대한‘아리스토텔레스’의 식견을 설명하면서, 일이 형벌이나 속죄 이상의 의미를 갖게 된 것은 우리가 사는 사회가 처음이라고 알려준다.

그렇다면 근대이전의 일과 오늘의 일은 무언가 다른 것이 되었다는 이야기이다. 일에서 의미를 찾으려는 현대인들의 정신과 행동을 설명하는 무엇인가 있다는 것인데, ‘보통’은 18세기 부르주아 사상가들이 그리스 철학자가 여가와 동일시했던 만족을 일의 영역으로 옮겨왔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일에서 의미를 찾는 방향으로 행동하려는 갈망은 지위나 돈에 대한 욕심만큼이나 완강하게 우리의 한 부분을 이루고 있는 것 같다.”는 최면은 왠지 석연찮은 구석이 있다. 아마도 이 저작의 마지막 구절중 하나인 “우리의 일은 적어도 우리가 거기에 정신을 팔게는 해 줄 것이다.”라는 단순한 한마디가 오히려 정직해 보이기까지 한다.

물론 획일적으로 일을 정의하는 것처럼 편협한 것도 없을 것이다. 이 글에 소개되는 화가처럼 “평소의 우리 모습보다 더 우아하고 지적인 대상을 창조하기 위하여 기꺼이 희생하는 인간 본성의 비실용적인 측면”도 있으니 말이다. 그러함에도 우린 일이란 것에 내몰려 외형적으로는 사회에 순응하여 고분고분하게 살아가고 있지만 어쩔 수 없는 분노도 쌓여가는 것을 부인하기 힘들다. 이러한 이해하기 힘든 분노는 비스킷 공장의 관심인 비스킷에 부여되는 중요성과 그 물건들의 요구에 부응하느라 애를 쓰는 인간들이 상대적으로 무시당하는 것과 같은 가치의 불균형에서 무수히 양산되고 있을 것이다. 그러함에도 우린 일에서 풀려나기는 힘든데, 무언가 일의 속성에서 위안을 만들어 내야 하지 않을까. ‘일’은,

「완벽에 대한 희망을 투자할 수 있는 완벽한 거품을 제공해 주었을 것이다. 우리의 가없는 불안을 상대적으로 규모가 작고 성취가 가능한 몇 가지 목표로 집중시켜줄 것이다. 우리에게 뭔가를 정복했다는 느낌을 줄 것이다. 품위 있는 피로를 안겨 줄 것이다. 식탁에 먹을 것을 올려 놓아줄 것이다. 더 큰 괴로움에서 벗어나 있게 해 줄 것이다.   - P 368 中에서」

이 저술이 본원적으로는 현대인들이 겪고 있는‘일’에 대한 다양한 고통스러운 심리적 적응과 우아한 정신적 특징을 말하고 있지만, 소개되는 직업들마다에서 발견하는 감동과 경외의 이야기들도 풍부한 소재들로 흥미로움을 제공하는데 결코 뒤처지지 않는다. 또한,‘보통’의 한국독자들에 대한 배려인 듯, ‘한국’의 이미지를 수시로 차용하는 친절함이 겸연쩍지만 반가운 읽기를 지원한다. 또한, 상품과 서비스를 만들어내는 데는 날로 세련되고 전문가가 되고 있지만, 여전히 인간의 감정적 안정조차도 믿음직한 수단을 찾지 못해 헤매는 우리에게 일에 대해 모처럼의 작은 사유의 틈을 제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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