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 년의 침묵 - 제3회 대한민국 뉴웨이브 문학상 수상작
이선영 지음 / 김영사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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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그리스의 식민도시, 오늘날 이탈리아반도 남단의 도시 크로톤과 피타고라스학파를 둘러싼 안팎에서 펼쳐지는 인간 욕망의 충돌들이 다양한 변주 속에 흐른다.
소설작품의 소재로서는 독특하다 할 수 있는‘직각삼각형의 빗변의 제곱은 각 변의 제곱의 합과 같다’는 피타고라스의 정리는 어린 시절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듣고 풀어보았던 것이어서 이러한 소재에 어떤 신비로움과 상상력을 기대할 수 있을까하고 내심 기대를 하지 않았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이러한 진부한 예견은 내 열악한 상상력의 탓이었음이 바로 탄로가 나버린다. 그간의 철학사에서 흘금 엿보았던 피타고라스에 얽힌 비밀스런 이야기들이 어느 순간 풍부하고 사실감 넘치는 장면으로 다가온다. 그리스전역의 인재들이 몰려들고, 엘리트 귀족들의 필수 교육기관으로서 현자(賢者)인 피타고라스가 이끄는 폐쇄된 집단의 왠지 어둡고 투명치 않은 배경과 급하게 쫒기는 현자의 수제자, ‘디오도로스’의 다급한 행동이 이미 끔찍한 죽음을 암시한다. <다빈치 코드>의‘소니에르’가 죽음을 앞두고 다급하게 암호를 남기는 장면을 연상시키듯이...

석연찮은 시신으로 돌아온 형 디오도로스의 죽음의 진실을 밝히기 위해 귀족의원직을 버리고 어려운 입시관문을 통과하여 현자의 학파로 진입하는‘아리스톤’의 형제애와 복수의 의지(意志), 여기에 사형‘히파소스’와의 의문의 죽음의 본질을 추적하는 과정은 명예와 부와 권력이라는 욕망과 관능적인 육체적 욕망이라는 인간의 본성에 대한 성찰을 축으로 하여 흥미로움을 더한다.
‘이루어 질수 없는 사랑’이라는 꽃말을 지닌 보랏빛 아네모네가 흐드러지게 피어난 전경에서 알 수 없는 음모와 숨겨진 진실, 그리고 처연한 전설이 흐르리라는 걸 예상케 한다. 천년을 거슬러 고대 바빌로니아 시대의 것으로 추정되는 사라진 흙서판, 죽음을 감지한 형이 화급히 남긴 듯한 네 개의 직각삼각형으로 이루어진 마름모꼴과 기호들, 결국 그 비밀인 “정수와 유한 소수, 또 순환하는 무한소수”이외의 “우주의 끝에 닿아 있는 수”, 또한 “아네모네 꽃 같은 수”이자, 이루어질 수도 닿을 수도 없는 수는 인간의 끝없는 욕망의 다른 형상이리라.

그래서 이 신비의 수(이 수를 보면 아마 독자들은 활짝 미소 지을 것이다. 아~하~)에 대한 히파소스의 터득은 환희와 자긍심이라기보다는 권력과 불신, 그리고 죽음에 더 가깝다. 여기에 현자의 아내인 ‘테아노’의 디아도로스와의 떨림과 설렘조차 분간이 안 될 관능의 쾌락이나, ‘에우니케’와의 동성애에 탐닉하는 위선적인 피타고라스에서 ‘욕망을 기억하는 몸’이라는 인간의 본질을 보게 되고, 궁극에는 권력의 쾌락이 가져온 두려움에 가려진 지적탐닉이 오히려 “영혼을 타락시키는 칼로”작동함을 목격하게 된다. 이에 더해 지배 권력의 상징으로서 크로톤의 참주이자 귀족대표인‘킬론’이라는 인물을 통해 “자신들의 무지가 착취의 수단이 되고 있음을 깨달은 시민들”즉 시민 권력을 이용하여 대항권력으로 성장한 지식권력인 현자학파를 처단하는 권모술수는 또 하나의 작품 축으로 넌지시 오늘의 사회를 풍자하려는 의도로 작용하기도 하며, 또한 “신전과 관청, 학파건물이 화려해지고... 그러나 냄새나고 지저분한 저잣거리 뒷골목은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는 시민단체의 열성원이자 속물인‘니논’의 불만으로, 무서운 기세로 성장하는 크로톤과 달리 시민의 생활은 조금도 나아지고 있지 않는 현실의 푸념은 작금의 불평등한 부의 흐름을 꼬집기도 한다.
피타고라스의 스승인‘페레키데스’가 운명하며“권력의 맛을 알면 누구든 시궁창같이 부패해. 학자라 해도....몸 파는 유녀와 다르지 않아...”라고 제자에게 남기는 유언 또한 어떠한 숭고한 목적에도 불구하고 제어되지 않는 욕망의 끝이 도달하는 그 추함과 불행은 “상황에 따라 바뀌는 괴물이 바로 사람의 마음이 아닌가.”하는 문장과 결합하여 순간 이 혼돈의 체제를 진중하게 돌아보게 하기도 한다.

이 작품은 의문의 죽음을 파헤친다는 전통적인 추리의 패턴을 지니고 있지만, 통속적인 재미에만 치우치지 않고, 이처럼 나름 예리한 현실 비판적 의식까지 수용하였으며, 게다가 피타고라스의 정리, 무리수(無理數) 등 신선한 수학적 소재의 발굴, 그리고 에로틱한 로맨스까지 곁들여진 진정 탄탄하고 치밀한 플롯으로 안정감을 더한 우리의 장르문학에서 쉬이 발견할 수 없는 매력적인 작품으로 다가오며, 마지막 장을 읽고 나면 아쉬움과 감동이 그리고 뿌듯한 기운까지 느끼게 된다.‘뉴웨이브문학상’심사위원단 만장일치라는 광고문구가 전혀 과장되지 않은 수작임을 확인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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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 샷 잭 리처 컬렉션
리 차일드 지음, 안재권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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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미국 중부 인디애나의 갈색도시, 도로는 공사로 파헤쳐지고 줄어든 차선으로 모락모락 피어나는 교통 혼잡의 짜증이 불쾌하게 전해져온다. 그리고 증축하는 주차건물에 들어선 범인은 퇴근으로 몰려나오는 시민들을 향해 무차별 저격을 가한다. 탁 트인 넓은 공공광장의 대학살, 단 4초 동안 울린 6발의 총성으로 5명의 무고한 시민이 죽었다. 맹목적인 미치광이의 광란 이상의 의미를 찾기 힘든 이 학살사건은 경찰국의 기민한 베테랑 형사 에머슨에 의해 일사불란한 수사가 진행된다.

범인차량 진출입의 명료한 CCTV화면, 범인이 남긴 섬유조직, 사용한 총기에서 벗겨진 에나멜과 사용한 탄피, 게다가 주차계기에 주차비로 넣은 사용코인의 지문까지 더할 수 없는 완벽한 증거를 확보하고 일찌감치 용의자를 확정짓는다.
그러나 이 작품의 흥미로움은 긴박했던 참살극과 김빠지는 용의자 체포로 도저히 더 이상 이야기가 진전 될 수 없으리라는 완벽하고 번복이 불가능한 상황에 있다. 그래서 이 명백한 상황을 뒤집어버리는‘리 차일드’만의 자신감 넘치는 정교한 플롯과 한 치의 틈도 없이 맞추어져 나가는 추리력에 더욱 매료되고 환호하게 된다. 용의자는 저격수 출신의 전 걸프전 참전군인, 집에 급습한 경찰은 수면제와 술에 취해 잠든 ‘제임스 바’를 체포하고, 그의 집에서 사용총기, 차량, 탄환, 의복 등 모든 증거를 발견한다. 현장의 지문과 흔적이 모두 일치하고, 저격수이기까지 했던 용의자가 범인임을 부정할 어떠한 수사상의 오류도 없다.

이때 변호사와의 대면에서 수감된 용의자‘제임스 바’가 요구하는 한 마디, “잭 리처를 불러주세요!” 전직군수사관이자 미스터리하며 터프하지만 진지하고 집요한 사나이의 대명사를 듣는 순간 책장은 급하게 넘어가기 시작한다. 아마‘잘못된 때에 잘못된 곳에 나타난다는 매력의 사나이’라는 인식을 각인시킨‘추적자(Killing Floor)'의 그 맹렬하고 탁월한 기교에 빠져버렸던 기억이 살아났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긴장과 액션, 스릴과 서스펜스, 그리고 로맨스와 에로틱한 열정이 기막히게 조화롭게 어울려 하드보일드 추리소설의 완전한 진수를 확인시켜 주리란 기대 탓이리라.

승소가 가능할 정도의 사건만 지휘하려는 지방검찰청장‘알렉산더 로댕’, 이런 검찰청장을 속속들이 꿰고 있는 경찰국 수사관 ‘에머슨’, 대학살의 범인으로 너무도 확실하여 변호라는 것이 별다른 의미를 지니지 못함에도 무죄라는 믿음으로 오빠를 지키려는 ‘로즈메리 바’와 사건을 수임 받는 검찰총장의 딸이자 변호사인 ‘헬렌 로댕’, 너무도 싱겁게 용의자가 체포되자 낙심한 야심으로 가득한 CNN 여기자‘앤 야니’는 절로 헐리웃 영화를 상상하게 할 정도로 호화멤버의 잘 짜여진 인상을 준다. 여기에 교도소 집단 구타로 혼수상태에 빠진 용의자와 리처의 행동을 감시하고 진실 추적을 방해하는 낯선 인물들의 등장이 더해지면서 사건은 갑자기 혼란과 미궁 속으로 접어든다.

잭 리처의 사건 추적을 못 마땅해 하는 수사관 에머슨, 묘한 거부감을 보내는 검찰총장, 그리고 낯선 이들의 방해, 급기야 리처를 수렁에 빠뜨리기 위해 저질러지는 여자의 살해, 점점 궁지에 몰리고, 에머슨이 지휘하는 경찰에 쫓기는 신세에서도 궁극의 진실로 다가가는 터프가이의 침착성. 그리곤 헬렌을 비롯한 리처와 앤 야니 와의 공조와 갈등, 마침내 팀으로서의 활약이 내뿜는 흥미진진함은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며 환하게 사건의 진실을 보여줄 때까지 긴장으로 옥죈 가슴을 펼치지 못하게 할 정도이다.

게다가 앤 야니와 잭 리처의 입을 빌려 세상에 대한 양극의 담론을 명인들의 문장으로 양념처럼 주고받는 대목은 셔츠와 바지 한 벌로 촌스러움과 궁박함이 묻어나는 리처의 외형만큼이나 현존하는 사회질서에 대한 회의와 세상의 절대 선(善)에 대한 가치의 혼란을 넌지시 비평하려는 작가의 수줍음을 보는 것 같아 살짝 귀엽기까지 하다.
전율, 불안, 흥분, 재미...그리고 이보다 정확하고 논리적이며 명쾌하고 완벽한 구성을 지닌 작품을 당분간은 접하기 힘들지 않을까 할 만큼 리 차일드는 독자를 만족시킨다. 멋지고 멋진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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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러스틴의 세계체제 분석 당대총서 20
이매뉴얼 월러스틴 지음, 이광근 옮김 / 당대 / 200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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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오늘의 우리가 삶의 기반으로 하고 있는 이 세계 체제의 본질에 대해 이처럼 명쾌한 분석은 일찍이 없었다 해도 지나치지 않다. 16세기 이래 지속되어 온 자본주의 세계경제 500년간의 역사사회학적 고찰로서 ‘세계체제분석’이란 사회현상의 개별적 독창성을 강조하는 역사학과 같은 개별기술적 분석양식과 정치, 경제, 사회문화의 법칙정립적 양식의 경계들 자체를 철폐하고‘단일학문적(unidisciplinary)’연구로서 1970년대부터 본격화된 사회분석 방법론이라 할 수 있다.

이 저술은 세계를 인식하는 학문으로서 과학과 인문학의 분기(分岐)와 다시금 인문학의 과거 세계에 대한 인식으로서의 역사학과 현재에 대한 정보의 필요성으로서의 경제학, 정치학, 사회학의 분화를 근대성(modernity)이 지닌 시장, 국가, 시민사회의 분화와 연결하여 설명하고, 이어 유럽 등 서구의 자기중심적 시선에 따라 자신들과 다른, 즉 근대적인 것으로 생각되지 않은 세계의 연구로서 인류학과, 나머지 '고도문명(high civilization)'이라고 불리는 중국, 아랍, 페르시아, 인도 등의 광대한 지역의 연구로서 오리엔탈리즘의 분화가 있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1945년 세계대전의 종결과 함께 제3세계의 지정학적 자립의 선포, 미국의 세계체제 헤게모니 패권의 장악, 세계경제와 민주화 경향의 조합이라는 세계변동은 근대와 비근대의 개념 와해를 가져왔고, 이에따라 종전의 분류형식만으로는 해석할 수 없는 세계에 대한 새로운 인식론으로서 대두한 잘 알려진 ‘발전(development)’론이라는 지적대안의 등장과 이들의 지식구조 기저에 자리잡고 있던 인식론의 의문으로서 핵심부-주변부 개념, 종속이론, 아시아적 생산양식, 봉건에서 자본주의로의 이행논쟁, 전체사(Total history)논쟁을 아우르는 세계체제분석으로의 진행과정을 명료하게 이해시켜주고 있다.

특히 연구대상으로 하고 있는 소체제(minisystem), 세계경제(world-economies)와 세계제국(world-empires)을 포함하는 세계체제를 중심으로 핵심부적 생산과정과 주변부적 생산과정이라는 불평등교환의 현상에서부터 끝없는 자본의 축적이라는 자본주의 세계경제의 속성, 그리고 근대세계체제의 정체성으로서의 보편주의, 민족국가등 국가의 존립기반과 구성요소로서 자본가와 노동자, 핵심과 주변, 반주변국의 현상들, 지문화(geo-culture)를 구성하는 이데올로기의 출현, 반체제운동 및 사회과학의 역할을 통해 작금의 세계체제 위기를 통찰해내는 이 저술의 일관되고 명쾌한 분석은 “내적 모순이 심각할 정도로 악화되고” 혼돈(chaos)에 휩싸인 오늘의 자본주의체제를 승계할 새로운 체제건설을 향한 탁월한 미래학이 되기도 한다.

자본주의 세계경제로서의 근대 세계체제의 본질이란 무엇인가? 우선‘끝없는 자본의 축적’이라는 구조적 메커니즘을 그 첫째로 하고 있으며, 이 메커니즘의 성공적 행동, 즉 생산을 통한 잉여가치의 더 많은 축적을 위해 언제나 독점을 선호하는 자본가들의 행태를 조명한다. 여기에 더해 이러한 독점적 지위를 확보, 유지키 위해 국가장치를 통한 지원으로서 특허권제도, 보호주의정책(보조금,세금감면등), 규제(중소기업은 치명적)를 이용하여 독과점을 심화시켜주는 자기파멸적 체제를 해부하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미국 및 유럽 등 소위 선진국들로 형성된 핵심부적 생산지와 그 밖의 주변부적 생산지의 잉여의 왜곡된 흐름을 설명하는데 그대로 유효하게 적용된다. 즉 준(準)독점에 의해 통제되는 핵심부적 생산과정이 경쟁이 심한 생산과정인 주변부로부터 끊임없이 잉여가치를 가져가는 것은 당연한 흐름이라 할 수 있다. 여기에서 한국이나 브라질, 인도와 같은 핵심부와 주변부의 제품생산이 거의 동등한 비율로 섞여있는‘반(半)주변국’의 위치에 대한 성찰은 우리의 현실을 직시하는데 유용한 시사를 던져준다.

한편 “모든 사람들에게 동일하게 적용되는 일반규칙들에 우선순위가 주어지는 것”이라는 ‘보편주의’의 대표로서 능력주의, 만인의 평등과 같은 공적담론이 지닌 체제유지 수단으로서의 허위를 통찰하고, 핵심부-주변부의 기축적 분업(axial division of labour) 만큼이나 보편주의와 반보편주의의 대립적 양극현상이 이 체제의 근본적인 것임을 이해케 한다. 또한 국가의 역할을 통한 자본의 축적과정이 지닌 비중립적 행태와 외형적으로는 ‘자유방임’을 주장하지만 실제로는 준독점이나 값싼 노동자의 유입을 통한 이윤의 보전, 생산자가 부담하여야 할 하부구조(도로, 항만, 교량, 공항 등) 비용의 비생산자에로의 이전과 같은 잉여의 왜곡된 흐름을 지적하고, 이것이 궁극적으로 잉여가치를 둘러싼 항구적인 갈등, 즉 ‘계급투쟁’을 낳고 있음을 지적하기도 한다. 이러한 배경을 이전에는 존재하지도 않았던 이데올로기를 탄생시킨 프랑스 혁명초기의 보수, 자유, 급진의 역사적 성향과 경과를 통해 설명한다. “모든 사람이 동일한 권리와 의무를 지닌 시민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못마땅해 하고, 위계적 구조를 신뢰하며, 민주주의를 경멸하고, 교육의 대상 확대도 거부하며, 교육은 엘리트 간부의 육성에 국한되어야 한다.”는 보수주의에 대항하여 “재주만 있으면 어떠한 경력이든 추구할 수 있다.”는 기회의 평등과 능력주의를 주장하지만 “대신 군중에 대해서는 배워먹지 못한, 비합리적 존재들이란 인식하에 주도권은 전문가 집단만이 할 수 있다.”는 중도주의를 표방한 자유주의와 보수주의의 갈등으로 19세기의 이데올로기를 설명한다.

그러나 비록 실패하였지만 1848년부터 유럽 국가들의 연쇄적인 급진주의의 혁명은 1차 세계대전에 이르기까지 보수주의자들 및 자유주의자들에게 자유, 평등, 형제애라는 구호를 공공의 영역에 까지 적용시키는 결과를 야기하였으며, 바로 위와 같은 근대세계체제의 작동 메커니즘으로서 사회과학(경제,정치,사회학)이 1968년 혁명까지는 자신들의 도덕적 정당성을 위한 지식 토대를 공급하는 역할이 되었음을 주장하고 있다. 결국 1968년 이후의 반동은 기득권 세력이 질서를 회복하고 새로이 등장하기 시작한 이윤압박으로 인한 당면한 어려움을 남반부를 통해 부분적으로 해소하고, 발전주의를 폐기하는 대신 글로벌리제이션이라는 테마를 들고 나오게 한 역사적 전환점으로서의 의의를 주목하고 있다.

세계경제체제의 남반부를 통한 이윤압박의 해소를 위한 시도는 분명 제로섬 게임에 불과한 잉여가치를 통한 자본축적에 필요한 수요의 한계에 봉착했으며, 궁극적으로 경쟁판매자의 존재여부와 유효수요의 수준으로 인한 가격인상의 딜레마, 갈수록 증가하는 생산비용의 해소를 위한 시골인구의 상실, 폐기물 매립지와 자연자원의 고갈이라는 한계를 극복키 어려운 극점에 도달하게 되었다. 이제 근대자본주의체제는 수명을 다하고 있으며, 스스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들과 마주치고 있고, 체제위기라 부를 만한 상황에 도달해 있다는 것이다. “역사적 체제들은 저마다 수명을 지니고 있다.”고 한다. 생산에서의 이윤압박을 피해 금융영역으로 이동을 추구하였지만 이는 혼돈을 증가시키는 역할만 하였을 뿐, 세계경제는 더욱 불안하고 환율과 고용의 오르내림에 종속되어버렸다. 본질적 분분이라는 모든 구조와 과정들이 격렬하게 요동하는 이 혼돈의 시기는 새로운 체제의 이동 내내 지속될 것이다. 
 

21세기 지금에 이르는 인류사회는“상대적으로 긴 시기에 걸쳐 높은 수준의 폭력이 곳곳에서 분출하고 있지만, 어느 누구도 더 이상 이러한 분출을 효과적으로 제어할 수 있는 힘을 갖고 있지 못하”는 현실에 처해있다. 새로운 체제를 건설하는 참가자들은 과연 어떤 결정을 내리게 될 것인가? 우리는 이러한 체제건설에 참여자가 될 수 있을까? 그 체제는 어떠한 형태일 것인가? 다만 저자인 ‘월러스틴’은 자유(liberty)와 평등(equality), 어디에 무게 중심을 둘 것인가의 문제로서 현존하는 우리의 세계체제를 계승할 다음 체제로서 “다수의 자유와 소수의 자유를 모두 확장하고자 하는 이들과 다수의 자유나 소수의 자유 둘 중 하나를 더 선호하는 것처럼 위장한 채 비자유 체제를 추구하는 이들 사이에서 그어질 것”이라고 예견하는데 그치고 있다. 아마도 그가 그리는 새로운 체제는 결국 다수가 스스로의 자유를 깨닫고 소수의 자유를 신장시키기 위해 다수가 취해야하는 필수적인 입장을 강조하는 것일 게다. 비록 200여 쪽에 불과한 저술이지만, 책 전체에 밑줄을 그어야 할 정도로 지금의 세계체제를 형성하는 탁월한 논리들이 한 치의 빈틈도 없이 질서정연하게 정리되어 우리와 우리사회를 인식하는 데 명쾌한 구조적 지식토대를 제공한다. 16세기 영국에서 시작되어 지문화(geo-culture)를 지배해 온 근대자본주의체제는 붕괴하고 있다. 여전히 미국식 신자유에 기초한 시장자본주의에 집착하고 있는 우리사회의 지배층들은 보다 거시적인 안목의 세계질서를 이해하고 나아가 도래할 신질서를 창조하는데 중추적 역할자로 참여할 수 있는 사상적 전환이 어느 때보다 요구된다 하겠다. 오늘을 형성하는 근대세계체제를 이해하는데 이보다 명쾌하고 지적인 저술은 다시는 출현키 어려울 것이다. 현재의 삶을 사는 모든 이들이 필독하여야 할 20세기 최고의 저술이라 함에 주저치 않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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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통기 - 그리스 신들의 계보
헤시오도스 지음, 김원익 옮김 / 민음사 / 200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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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C. 8세기경 그리스 음유시인 ‘헤시오도스’가 쓴 『Theogonia ; 神統記』와 『Era kai Hemerai ; 노동과 나날』을 번역한 저술이다. 「신통기」라는 다소 이질적으로 보이는 제목을 선명하게 표현한다면 ‘그리스 신들의 가계도’라 할 수 있으며, 「노동과 나날」에서는 노동의 정의와 당시대의 정령숭배 및 터부, 자연과 인간 삶의 조화를 엿 볼 수 있다 하겠다.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수많은 신들의 관계가 우리에게는 낯설고 그 의미의 전달이 쉬이 이루어지 않아 그네들의 문학, 예술, 철학 등의 고전을 읽다보면 곤혹감을 떨치기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이러한 차에 이 저작을 알게 된 것은 어쩜 내게는 광명이라 할 수 있기조차 하다. 대체 ‘제우스’라는 신은 어떻게 생긴 것이지? 그리고 그 많은 그리스 신들은 누구의 자식이란 말인가? 그리고 오이디푸스, 아킬레스, 휘페리온 하는 잘 알려진 영웅들은 누구의 자손이고, 신들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 것인지, 그리고 정작 이들 신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인가? 하는 궁금증이 끊이지를 않았으나, 이 저술은 이러한 의문들을 해소시켜준다.

“태초에는 카오스(혼돈)가 있고 그 다음에는 넓은 젖가슴을 지닌 가이아(대지)가 있었는데...”라고 세상의 생성을 말하는 이 저술의 시작부분은 바로 그리스의 신들이란 곧 우주생성의 각 요소임을 암시한다. 그 다음 타르타로스(지하세계)와 에로스가 차례로 생겨났다. 그러나 헤시오도스가 말하는 신들의 출생과 가계가 호메로스나 오비디우스와 달리 설명되는 부분들이 있는데, 바로 우주생성의 4요소로 태초에 등장하는 에로스와 사랑의 여신 아프로디테의 아들인 에로스가 그러하며, 또한 우라노스의 남근으로부터 태어났다는 아프로디테의 출생에 대한 다양한 충돌이 그것이다.
이처럼 신통기는 그리스 신들의 가계에 걸친 흥미진진한 이야기들을 들려주지만, 서사의 커다란 줄기는 크로노스와 레아 사이에서 출생한 제우스가 폭군인 아버지와 적대적인 신들을 굴복시키고 우주의 전지전능한 신이 되었는가에 대한 권력의 쟁투와 그 속에 사리고 있는 정의로움의 승리에 대한 정신을 담고 있다 하겠다.

한편 이들 신들의 권력싸움에서 묘사되는 “온 땅이 지글지글 끓어올랐고 황량한 바다와 함께 오케아노스의 물결도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中略 ~ 먼지구름이 위로 솟아오르게 했으며...” 하는 부분에서 구약을 떠올리게 한다. 더구나 게토와 포르퀴스의 막내아들인 뱀의 출생과 “뱀은 대지의 어둠 속 깊은 곳, 광활한 대지의 끝에서 황금사과들을 지키고 있다.”는 내용이나, 노동과 나날에서 최초의 인간여성인 ‘판도라’의 창조도 제우스의 명령으로 헤파이스토스가 흙으로 빚어내는 모습은 서구신앙의 모태를 보는듯한 느낌을 주기도 한다.

최근 우리사회에 법과 판결의 공정성 시비가 분분한 가운데 정의의 여신 ‘디케’가 자주 거론되는데, 바로 제우스와 몸에 광채가 나는 여신 테미스의 여식임을 알게 되고, 에우노미아(질서), 에이레네(평화)와 자매라는 가족관계까지 터득케 된다. 또한 우리에게 잘 알려진 트로이 전쟁의 기화가 되는 사건을 목격하게도 되는데, 그 유명한 트로이의 왕자인 ‘파리스의 심판’ 내용은 헤라와 아프로디테, 아테나 세 명의 여신이 서로 자신이 가장 아름답다는 갈등이었다니, 여성의 아름다움에 대한 시기(猜忌)의 역사는 실로 꽤나 거슬러 올라가는 것이다.

이 저작의 두 번째 저술인 「노동과 나날」은 작자인 헤시오도스가 자신의 형제인 페르세스와의 재산으로 인한 재판을 화두로 하여, 선(善)으로서의 성실한 노동의 가치와 제우스신의 권능을 빌어 인간에게 모든 것 중 최고의 선은 ‘정의(正義)’ 라는 인간의 윤리와 정의로운 세계의 질서를 당시 노동의 근간인 농부의 지침서 형식을 빌려 기술하고 있다.  여기서 헤시오도스의 지독한 여성혐오주의자로서의 모습을 보게 되는데, 아마 최초의 여성인 ‘판도라’ 그자체가 악(惡)이라는 의미에서 더욱 그러하지 않았을까 하는 21세기 식 추측도 해본다. 또한 여기서 헤시오도스는 인류의 다섯 시대를 설명하고 있는데, ‘영웅의 종족’으로 반신(半神)인 인류의 네 번째 종족에서 오이디푸스나 아킬레스를 발견하게 된다. 헬레나를 구하기 위한 트로이 전쟁에서 이들 영웅종족이 모두 죽게 됨으로써 오늘의 인류인 다섯 번째 종족인 철의 종족이 창조되는 것으로 설명되고 있다. “정의는 주먹에 있고 배려하는 마음은 없으며, 악한 자가 덕 있는 자를 헤치며 위증을 일삼는” 종족, 그래서 질투의 여신이 음험하고 증오심 가득한 시선으로 따라다니며 감시한다는 것은 이미 인간사회의 타락과 부조리가 오늘의 문제가 아님을 보여주기도 한다.

그리스 신들의 계보를 체계적으로 정리한 것은 이 헤시오도스의 신통기가 최초라 한다. 오디세우스나 일리아드, 그리스신화, 오비디우스의 변신이야기 등을 통해 접했던 그리스 신들의 이해는 물론 철학과 자연문학의 효시로서의 인문학적 의미를 접하는 의미 있는 독서가 되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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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한도 - 천 년의 믿음, 그림으로 태어나다 키워드 한국문화 1
박철상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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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한도(歲寒圖)라는 書畵 한 첩이 지니는 역사, 학문, 예술, 그리고 그 정신에 대한 품격 높은 인문서라 할 수 있다. 텅 빈 초라한 집 한 채와 소나무 몇 그루가 을씨년스럽게 서있는 황량한 이 그림이 무어 그리 대단한 것인가? 하는 의문이 이 책을 잡게 하였는지 모르겠다. 19세기 조선 최고의 학자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의 작품이라는 이유만으로 그리할까?

이 저작은 한 인물의 학문적 성장과 성취를 향한 열정, 시대적 배경부터 찬찬히 소개하고, 정치사적 혼란과 정쟁으로 인한 아버지 김노경의 고금도 유배 등 안동김씨 세력의 터무니없는 무고로 완당(阮堂)선생 일가의 부침 및 이재 권돈인과 황산 김유근과의 석교(石交)의 일화, 그리고 세한도가 그려지게 된 계기와 배경에 대한 지식, 서화의 심도 있는 감상과 이해, 그리고 오늘에 전해져 오기까지의 여정을 품격 높은 고증과 해석, 오랜 자료의 수집과 학문적 노력의 결정으로 담아내고 있다.

여전히 공허하고 피상적인 도학(道學; 유교 도덕에 관한 학문)의 공리공론에 사로잡혀 현실, 즉 동시대를 살고 있는 사람들의 삶에 대한 지식이 전무(全無)한 당시 조선의 풍조를 벗어나 실증적인 연구와 학술에 대한 관심, 그리고 분리된 학문과 예술의 일치를 통해 새로운 세계를 창조하려는 學藝一致와 병세의식(幷世意識) 등 북학(北學)이 도래하던 19세기의 정신사를 기초로 한 당시대의 학문적 흐름이 촘촘히 설명된다. 이는 연행(燕行)과 北學이란 단어가 당시를 대표하듯이 청의 뛰어난 문인들에 추사의 학문적 동경이 있었음은 지극히 당연한 모습이었을 것이다.

이는 추사가 청의 문사들과의 교우와 앞선 서책을 통한 강력한 정보력을 배경으로 19세기 조선최고의 학자로 발돋움 할 수 있었음을 설명한다. 그의 연행에서 어렵게 만난 담계(覃溪) 옹방강 선생으로부터의 배움과 학문의 최고 경지를 향한 문경(門徑;학문의 궁극적 목표에 도달하기 위한 최적 루트)을 찾아 자기고유의 정신과 학문을 정립해 내려는 노력의 과정들을 조명하는 저자 박철상에서 지고한 노고의 흔적을 발견하게도 된다.
또한 고독하고 참담한 제주도 유배지에서 아내를 여의고 그 슬픔을 표현한 완당선생의 시(詩)는 애틋한 사랑과 서러움, 미안함과 원망이 담겨있어 200여년이 훌쩍 지난 오늘에도 그의 지고지순한 성품이 안타깝게 전해져 오는 듯하다.
“어떻게든 월하노인月下老人 저승 법정 세워놓고 / 내세에는 남편 아내 처지 바꿔 태어난 뒤 / 나 죽고 천리 밖에 그대 혼자 남게 하여 / 나의 이 슬픈 심정 그대도 알게 하리.”

이렇듯 천리만리 떨어진 유배지에 그 많던 친교는 모두 떠나버리고 안부조차 찾는 이 없는 추사가 유배가기 전이나 유배 간 뒤나 언제나 똑같이 자신을 대하고 있는 우선(蕅船)이상적의 행동을 보면서 문득 “겨울이 되어서야 소나무나 잣나무가 시들지 않는다는 사실을 느꼈듯이, 사람도 어려운 지경을 만나야 진정한 친구를 알 수 있는 법이다.”라는 『논어』「자한」편의 ‘세한연후지송백지후조(歲寒然後知松柏之後凋)’라는 구절을 떠 올린 것은 결코 우연이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사물의 형상을 묘사하기보다는 마음을 묘사하는 데 초점을 맞추고 보이지 않는 자신의 인품과 학식, 감정과 사상을 황량한 겨울 속에 산수화로 그려낸 세한도는 그대로 문인화의 정수가 된다.
누군가의 아류가 아니라 자신만의 고유한 정신으로 승화시키고 스스로 터득한 초묵법(焦墨法;극도로 진한 먹을 사용하여 그림을 그리는 것)으로 까칠한 종잇조각을 잇대어 그 위에 그린 그림과 제사(題辭)는 조선의 정신과 문경의 정점에 있는 작품으로서 조선 문인화의 전범(典範)으로 추앙된다. 정간(井間)을 쳤으나 칸을 벗어나고 줄이 맞지 않게 쓴 글씨 하나에도 유배생활로 지친 자신의 모습을 드러나게 하려한 치밀함이고 텅 빈 상상속의 초라한 집도 그의 의식세계를 담고 있으며, 종잇조각을 잇대어 붙인 것 역시 당나라 안진경의 <걸미첩 乞米帖>을 연상시키는 궁핍함의 표현 장치라는 해설에 그만 보이는 것에만 집착하고 보이지 않는 진실을 보지 못하던 우매한 정신세계를 들킨 것 같아 움찔하게 된다. 특히 “몸통은 썩고 가지 끝에 몇 개만 남아있는 소나무의 몰골, 끝에 붙어있는 솔잎의 애처로움이 절개를 지킨 이상적의 모습이자 유배생활에 지친 자신의 몰골을 담은 중의적 표현”이라는 해설과, 사마천의 『사기』中 「정세가 鄭世家」, 「급정열전 汲鄭列傳」편을 알아야 비로소 제사(題辭)를 이해하게 되는 것은 무지 속에서 햇빛을 보는 것 같은 기쁨을 선사해주기도 한다.

또한 장서인(藏書印)에 대한 독보적 전문가인 저자의 압봉인(押縫印), 한 장(閑章) 등의 인장에 대한 설명은 물론 세한도의 인장 각각이 지니는 작품 속의 의미와 인주(印朱)의 빛깔이 세한도의 꽃으로 피어나는 대목은 그야말로 탁견(卓見)이라 아니할 수 없다.
그리고 이상적을 통해 청나라 문사들이 완당의 세한도를 보고 제영(題詠)한 시들과 오랜 세월 사람들의 손에서 손으로 이전되다가 일본인이 가져간 세한도를 어렵게 다시 찾아와 장황(裝潢;표구와 같이 서화를 여러 가지 형태로 꾸미는 것)하여 오늘의 우리들에게 우리의 정신을 음미할 수 있게 된 험난한 여정을 쫓아 볼 수 있는 여유가 된 것은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다. 세한도 한 첩의 감상과 이해를 위해 그 관련된 인물들, 서책, 제영들이 읽기에 곁들여져 시각적 지원을 하게끔 편집된 이 저작은 그야말로 품격 높은 하나의 우리정신이자 보물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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