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빵과자유를위한정치>를 읽고 리뷰를 남겨주세요.
빵과 자유를 위한 정치 - MB를 넘어, 김대중과 노무현을 넘어
손호철 지음 / 해피스토리 / 2010년 2월
평점 :
품절


민주주의, 인권, 삶의 질, 폭력성 등 지난 40여 년간 민중이 쌓아 온 자유와 민주주의가 오히려 역진하는 작금의 우리사회에 대한 정치 사회적 진단과 대안의 모색, 그리고 현실정치에 대한 비평과 제언이라 할 수 있다.
지구촌 어디에도 없는 극단적인 신자유주의 시장경제를 지향하는 MB정부가 빚어내는 폐해가 이루 다 표현 할 길이 없을 정도로 빼곡하게 나열되고 있다.

우선 MB노믹스의 참모습을 국가주도의 70년대 삽질식‘발전주의’를 승계하고, 시장중심의 신자유주의라는 모순된 두 경향이 결합된 위험천만의 형태라고 정의하고 있다. 여기에 바로 발전주의의 유산과 세계화라는 신자유주의의 최악의 조합이 가져온 1997년 김영삼 정부의 경제위기를 떠올리면 이 모순된 모습이 파생시키는 절망적 나락의 공포를 이해 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불통의 리더십’, ‘노가다 정치’, 민의를 무시하고 독선적인 불도저식 일방통행의 대표적 실정(失政)의 예가 미국산 광우병 쇠고기의 수입결정으로 인한 국민과의 갈등인데, “광우병이 발생하더라도 우리 정부가 수입이나 검역을 중단 할 수 없도록 검역주도권을 완전히 포기한 비상식적”이고, 비현실적인 정책을 추진한 것이다. 어떠한 국민적 설득과 이해의 요구도 없이 자행되는 이러한 일방통행은 ‘미디어법’의 강행 추진, 지속되는 반대의 목소리에 귀를 막고‘4대강 죽이기’사업을 진행시키는 독단과 같다. 여기에 더해 이와 같은 비판적 여론에 대해, “정책은 옳은데 홍보를 제대로 못하기 때문”이라고 전혀 민의를 듣지 않는 귀머거리 신념에는 이 정부에 대해 그만 할 말을 잊게 할 정도로 오만과 독선을 보게 된다. 

특히 극한적 신자자유주의를 지향함으로써 악화된 양극화를 더욱 심화시키고, 이로인한 사회적 갈등을 통제하기 위해 공권력에 의지하는 공안정치를 노골적으로 표방하고 나서는가 하면, 급기야는 살인적인 속도전에 의해‘용산참사’와 같은 국가폭력의 사태를 낳기도 한다. 실정에 대한 비판을 억압하기 위해서는 ‘사이비 모욕죄’신설, ‘휴대전화 감청 허용’, ‘집시법’의 개악 등 표현의 자유를 박탈하는 퇴행적 행태를 보이기까지 하고 있으며, 이른바‘이명박표 계급전쟁’을 공언하면서 세금이 경제발전의 장애라고 감세정책을 밀어붙이고, 노동조합의 활동을 규제하고, 대중심리를 이용하여 노동자를 노동귀족, 공기업을 철밥그릇 등으로 몰아 노동과 진보진영을 공격하는 등 신자유주의적 포퓰리즘으로 진보진영의 해체를 위한 공격을 노골화하고 있기도 하다.

게다가 “잘사는 사람과 점점 못사는 사람으로 분열시키는‘두 국민 정책’을 추구”하여, 금산(金産)분리완화, 총액출자 제한제 폐지, 감세(減稅)정책 등, 1% 강(强)부자들과 대기업을 위한 정책을 강력하게 드라이브하고 있다. 그러나 감세정책 1년 만에 통합 재정적자가 27조9550억 원에 이르고, 2010년 기획재정부 자료에 의하면 2007년 대비 세수 감소액만 14조4천억 원에 이르는 등 국가재정이 신음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 이르자 부자들의 감세로 인한 부족 세수를 중산층(급여생활자, 자영업자 등)에게 전가하기 위해 비과세와 소득세 감면 혜택을 줄이는 등 그 무능과 몰염치가 극에 이르고 있다. 나아가 “행위의 의도와 내용 등 입법취지에 비춰보고 사회적 정의 관념에 부합하는가를 가려 처벌여부를 결정하는” ‘실질적 법치주의’는 실종되고, 법치주의를‘형식적 법치주의’로 전락시켜, 민주주의 인권에 대한 공격무기로 사용하는 ‘법치 파시즘’적 행태까지 보이고 있다.

우리사회가 왜 이 지경에까지 이르렀는가를 어느 한사람, 한 집단만의 책임으로 돌리기에는 물론 무리가 있다. 무능하고 비겁한 정치인도, 무지하고 무관심한 대중도, 사악하고 탐욕스러운 권력자도, 기회주의적이고 이기적인 자본가도, 부패한 관료도...모두가 자성하여야 할 것이다. “선(善)과 악(惡)의 가치가 전도(顚倒)된 사회”, 진실을 은폐하는 음흉한 대기업 대신에 진실을 밝히려는 자는 피고석에 앉혀 심판하고 처벌하는 정의가 상실된 사법형국, 사회적 약자의 직접적 폭력만 문제 삼고, 은폐된 구조적 폭력은 보지 않으려는 사악함은 이제 일상적이고 당연한 듯 되어있다. 이 위협적이고 위험한‘신자유주의 공안국가’를 어떻게 생명의 활기가 넘치며 모두가 함께 사는 사회, 국가로 변화시킬 수 있을까?

저자는 이러한 상황에 이르게 된 배경으로 김대중, 노무현 정권의 신자유주의 정책이 가져온 분배정책의 실패를 들고 있다. 즉, 두 정부는 표현되는 스타일과는 달리 성장 중심의 정책으로 분배정책을 방치하여 양극화를 심화시킨 책임을 면 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또한 쌍용자동차의 해외 매각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쌍용차 노동투쟁의 사회적 문제에 대한 책임자인 당시 산자부장관이었던 현 민주당 대표의 비겁한 침묵과 같이 기만적인 패권주의를 질타하기도 한다.

한편 이 저술의 커다란 주제이자 정치적 균형과 사회 정의의 회복이라는 질서를 위해 진보신당, 민주노동당등과 같은 진보세력의 대연합과 자유주의적 보수정당인 민주당의 환골탈태를 지적한다. 여당에 비해 턱없이 부족한 야권의 세력이 지금과 같은 분열된 형상으로 현 정국을 대처하기에는 버거운 것이 사실이다. 그럼에도 “이명박 정부의 자살골과 국민들의 견제 심리를 통해서나 먹고 살려는” 민주당의 전략부재와 자기반성 없는 자세, 지난 10년간 반서민적 성장정책에만 몰두해 온 실패를 엉뚱하게도 성장정책을 소홀히 해서 야기된 것이라고 헛 짚어대는 한심한 성찰, 이에 더해 민주당과는 일체의 연대도 부정하는 진보세력의 ‘좌익 소아병’등 야권 세력의 자세는 더없이 안타까운 형세가 아닐 수 없다.

또한 MB에 반대하는 것만이 마치 진보이고 민주인양 20년 전의 단순 논리로 지적 퇴화한 민주당의 反MB 대동단결만 외치는 구태는 민중들의 불안과 관련한 현실분석과 구체적 대안 제시와는 이격되어 궁극에는 자멸하고 말 것이라고까지 냉철한 자성을 촉구하고 있다. 그래서 저자는 민주당의 좌경화와 탈패권주의, 그리고 신자유주의를 결별하는 선행적 체질개혁은 진정한 진보세력의 대연합을 위한 중대한 조건임을 천명하고, 진보정당들의 연대를 향한 세밀하고 구체적 방안을 제시하고 있기도 하다.
이에 더해‘안토니오 그람시’의 “낡은 것은 죽어가고 있는데 새로운 것은 아직 태어나지 않은 상태”라는 인용을 통해 진보세력의 불비(不備)를 안타까워하기도 한다.

“대중을 설득할 대안이 없으면 진보세력의 발전은 어렵다.”는 말은 바로 이러한 의미에서 작금의 진보정당들, 자유주의적 보수 이념에 안존하고 있는 민주당 등 야권 세력에게 시사하는 의미는 자못 크다 할 것이다. 또한 ‘청빈과 비움’의 정치를 실천한 자기성찰의 지도자였던‘故 제정구의원’의 “정의와 연대의식은 동전의 양면이다. 연대 의식이 없는 정의란 전두환 정권처럼 추악한 불의와 폭력이 된다!”는 말은 우리 정치사회를 향해 그 방향을 제시해주는 깊이 새겨야 할 정언(正言)이라 할 것이다. 그래서 MB정권 2년에 즈음하여 갈수록 퇴행하는 우리사회와 정치현황, 그리고 향후 진보 진영이 갖추어야 할 역량과 자세에 대한 냉철한 진단과 대안을 제시한 당대의 독보적 정치평론집인 이 저술은 그대로 우리사회에 필요한 공동체 정신의 진정한 의미를 일깨워주는 탁견이 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눈에 대한 백과사전 - 눈보라 속에 남겨진 이상한 연애노트
사라 에밀리 미아노 지음, 권경희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10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신선한 충격, 아니 진기한 구성이기도 하지만, 기존의 선형적인 시간적 관념에 익숙한 접근으로서는 당혹스럽고 이질적인 작품이 되기도 한다. 소위 근대적 이성과 시간관을 전복하는 포스트모더니즘을 지향하는 이들의 전형이라 할 수 있다. 기억의 편린들을 따라가는 형식은 “‘W.G.제발트’를 위하여”라는 발문처럼 제발트의 <이민자들>이나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연상케 한다. 한편, 폭설이 휘몰아치는 어느 날 찌그러진 픽업트럭에서 한 남자의 시신과, ‘눈에 대한 백과사전’이라는 원고뭉치가 발견되었으며 이를 버팔로 경찰청이 수사하고 있다는 신문기사는 이어지는 이상한 구성을 하고 있는 눈(snow)에 관한 시(詩),희곡, 한 소녀의 성장기, 과학적 진실과 정의, 편지 등을 사건의 단서라는 관점에서 접근케 한다. 사실 이러한 시선을 갖도록 하는 것은 다분히 작가적 의도라 할 수 있는데, 그만큼 주의 깊게 작가의 안내를 따르지 않으면 공감을 형성키 어렵기 때문이라 할 수 있겠다.

사실 이 허구의 백과사전은 여럿의 테마가 반복되는 형태를 통해 그들이 갈등하고 하나의 힘으로 통합되는 과정을 어떠한 인위적인 서사를 통하지 않고 전달하려는 무의지의 의지가 아닐까하는 생각을 갖게 한다. 허나 굳이 하나의 연결된 서사로서 이 작품을 이야기 할 경우 ‘Truth(진실)’이 정점이 되어, 폭설에 갇혀 사망한 아내(도라)의 사건을 야기함으로써, 바로 '눈(snow)'이 야기하는 세상의 모든 의미의 수집을 표면화하고, 그 이면에 숨겨둔 진실을 쫓게 하는, 그래서 그 자리에 그 삶의 진솔한 이야기들이 발견케 되도록 하는 것이라 할 수 도 있다.

또 하나의 읽기 방식을 제안한다면 일종의 제안 링크(link)라 할 수 있는 관련 어휘 및 각주로의 안내를 성실하게 따라가면 헝클어진 선형적 질서를 회복 하여 감성의 연결고리를 맺을 수 있다는 점이다. 어떠한 방식을 취하든지 이 작품은 페이지가 넘어가면서 서서히 누적되는 감정적 공감을 지니게 된다는 것이다. 미묘하고 정밀한 지적 정보에 연결시킴으로써 ‘눈의 결정(結晶)’이 지니는 신화적인 낭만과 과학적 이성, 그리고 이를 아우르는 예술적 개념으로서 승화시키고, 작품 전체를 마치 영혼의 언어를 듣는 것처럼 만들어버린다. 결국 “위대한 예술이란 모름지기 개별성들 안에 보편성을 함유한 홀로그래픽적인 것이 되어야 한다.”는 말을 그대로 실현시키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몇 토막의 서사적 이야기가 등장하지만, 이는 “삶을 조정하기 위해”애쓰는 화자의 분투로써, 또는 “고문처럼 깊은 고통을 주는” 사랑의 날카롭고 강렬한 고통과 삶의 섭리에 대한 이해를 갖추는 보조적 장치라 하는 것이 오히려 옳을 것이다. 소설이 말하려는 많은 형태의 애달픈 사랑 중에서‘양극성’이라는 인간의 어쩌지 못하는 충동, 즉 “극은 극을 열망하며, 순수한 불의 존재와 순수한 얼음의 존재는, 한번 흘끗 본 다음 잊어야 할 희열이라는 사실”은 작품전체를 애틋한 분위기로 몰아간다. 그래서 ‘조화롭지 못한 조화’에서‘완벽한 조화를 이룬 눈 결정의 가지’로 이르는 사랑의 본질을 향한 탐색은 지금껏 이야기되던 사랑의 담론들을 전혀 새로운 세상의 현상들로부터 획득케 한다. 이 기묘한 순백색 결정에 대한 지향, 바로 그 감성적 공명이 이 작품의 진정한 의미일런지도 모르겠다. 손을 뻗지만 닿지 않았던 그 사랑에 대한 이야기, 차마 말하지 못하였지만 비로소 전달되는 그 진실의 이야기들이 신비롭게 펼쳐지는 사랑의, 눈의 우아한 컬렉션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적절한 균형 아시아 문학선 3
로힌턴 미스트리 지음, 손석주 옮김 / 도서출판 아시아 / 2009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1975년 전후 인도 총리 ‘인디라 간디’가 자행한 국가적 폭력의 시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국가의 구조는 엉성하고, 그 권력이 미치는 범위는 불확실하던 사회, 자본의 축적은 오직 뇌물과 횡령, 부정만으로 가능한 사회, 탐욕스럽고 강한 권력을 확보하기위해서 폭력의 독점적 소유를 하고 있던 국가를 장악하고 그 하수인인 경찰과 군대를 활용하는 사회, 그래서 “정의의 살인범들이 성스러운 절차를 우습게 만들고, 차별 없는 정의를 가짜로 만들어서 돈을 가장 많이 내는 사람에게 팔고 있는”사회, 바로 그러한 세상에서 신음하던 인민들의 처절한 이야기다.

이 작품을 손에 들고는 몇 번이고 내려놓았다 다시 들곤 하는 일을 반복했는지 모르겠다. 부패한 국가의 만성적 취약성으로 인간의 존엄성이란 아예 말살된 세상, 지배 권력과 이에 아첨하는 자본가세력들, 지방의 토호들까지 그 더러운 사악함으로 인민을 학대하고 착취하며, 살인까지 마다않는 행태의 묘사들은 허구의 소설임에도 지속하여 치가 떨리는 참담한 기분을 떨치지 못하게 하였다. 마치 우리의 60,70년대 개발독재 시대의 모습과 한 치의 차이도 없어, 그 험악하고 고된 시간을 고스란히 살아온 나로서는 소설 속 하나 하나의 사건들마다 예사로이 건널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미 국내에서도 많이 읽힌 ‘나렌드라 자다브’의『신도 버린 사람들』을 통해서 인도의 비인간적인 계급제인 카스트제도와 아웃 카스트로서 최하층민인‘불가촉천민’의 실상은 잘 알려져 있다. 작품은 무두쟁이 불가촉천민인‘차마르’에서 재봉사가 된 두 남자의 이야기로부터 시작된다.‘이시바’와 그의 조카 ‘옴프라카시’의 가족사는 지배계급인 브라만의 한 토호로부터 정당한 선거권을 요구하다 일가족이 살해당하는 비극적 상황에 이르고, 이를 피한 두 사람은 도시로의 여정을 떠나게 된다. 한편‘디나’라는 여성은 오지에서의 의료 활동 중 의사인 아버지가 사망하자 오빠의 이기심에 눌려 가까스로 학업을 마치지만 대학교의 진학은 불가능한 상황에 이르고, 사랑하는 남자와 결혼하게 되지만 불의의 고통사고로 남편을 잃고 만다. 또한 생활비를 위한 방편으로 디나는 고교동창생의 아들인 대학생‘마넥’을 하숙생으로 받아들이면서 이들을 중심으로 비열한 시대의 참혹한 비극이 펼쳐진다.

“소음에 사람들에, 살 데도 없고 물도 귀하고 온 천지에 쓰레기”인 도시에 몰려드는 사람들에서 산업화와 근대화로 인한 인구의 도시집중의 폐해를 엿보게 한다. 생존을 위한 사람들의 도시를 향한 희망 앞에는 끔찍한 판자촌, 노점들, 빈민굴의 삶만이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어렵사리 마주한 디나와 두 재봉사의 삶을 위한 타협은 단지 기다리는 고통의 연기에 불과하기만 하다. 부패한 권력은 권력의 강화와 축재를 위해 국가비상사태를 선언하고, 인민을 규율하며, 질서를 강제한다. 그리곤 국가 사랑 이라는 권력범위의 확정을 위한 수단으로서 통상적인 민족주의와 애국심을 종용하는 것까지 우리의 70년대 긴급조치법과 국민교육헌장을 떠올리게 한다. 더구나 ‘강철 같은 의지! 근면! 이것만 있으면 우리는 살 수 있다.라는 구호와 거대한 총리의 초상화, 강제 동원된 군중집회와 같은 정치쇼는 그야말로 마치 엊그제 보았던 것처럼 생생한 현실로 다가온다.

하루벌이로 연명하는 도시 하층민을 경찰력과 야만적인 자본가들이 합세하여 공사판에 가두어 놓곤 노예처럼 부리는가하면, 이들의 주거지를 불법이라하여 도시미관을 개선한다고 불도저로 밀어버려 하루아침에 노숙자로, 거리의 부랑자로, 거지로 삶을 바꿔버리는 국가의 폭력은 참담함 그 자체가 된다. 삶의 기반을 송두리째 박탈당한 삼촌과 조카의 시련은 작품이 끝날 때까지 다양한 국가의 폭력에 시달린다. 주거지의 상실, 노숙자로서의 생활과 공사장 노예로, 마침내는 결혼을 앞둔 청년이 국가의 권력이 개인 성생활에까지 간섭하는 이른바 가족계획이라는 웃지 못 할 폭력에 의해 강제 거세당하고, 비위생적 시술로 다리까지 절단케 되는 비참한 지경에 이른다.
당신들의 이야기는 “현대판 마하바라트(註:인도 대서사시)로 책을 낼 수 있겠소.”라 할 정도로 이들의 삶은 하루도 정체되지 못 할 정도로 처참하다.

“곤봉처럼 위협적인 감탄사가 붙은 규율의 시대! 라는 구호”만 난무하고, “살해된 정의의 시체가 누워 있는 타락한 정의의 사원”이자, “원한과 복수를 위한 비열한 무대, 비극과 희극이 공연되는 하잘것없는 장소”로 전락한 법원 등 국가는 온통 썩는 악취로 진동하지만, 그네들은 외려 실종된 정의를 되찾고, 인권과 민주를 외치며 저항하는 시민운동가‘자야 프라카시 나라얀(Jaya Prakash Narayan)’을 가두고 실업통계를 거들먹거리며 2억 명의 인구가 과잉이기 때문에 제거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세상은 사악한 사람들에 의해 통제되고, 아무런 가능성도 없고 단지 고통과 슬픔만 흐른다.

이성을 잃은 권력, 깡패들이 통치하는 시대, 그들에게 절망에 균형을 맞출 만큼 충분한 희망이 있긴 있는 것일까? 하고 내내 의문을 저버리지 못하게 한다. 디나의 연민과 이해가 만들어내는 사람들 간의 잠간의 행복과 평화, 그리고 사랑, 그것을 균형이라 해야 할까? 야만적인 인간 본성의 벌거벗은 본질만 남아 헐떡대는, 차마 눈이 글자를 계속해서 따라갈 수 없을 지경이다.

다행스럽게도 근자에 접했던 ‘소수자의 역사’에 관한 『역사의 공간』이라는 저작과 『세계체제분석』이라는 저작 중 국가체제에 관한 독서는 이 작품을 읽는데 많은 도움이 되었다. 즉 역사의 이성이 볼 수 없는 무능력 지대에 놓인 보이지 않던 인민들의 역사를 가시화하여 정체되고 유지에 급급한 현실을 일깨우려는 작가의 의도를 읽어낼 수 있게 되었다는 점이다. 아마도 국가권력의 다양한 폭력행위와 수단, 인민의 고통과 슬픔, 인간의 존엄성과 인권, 그리고 삶과 죽음이라는 인생의 본질에 대해서 이만큼 사실적으로 그려낸 소설을 접하기는 어려울 듯싶다. 진정 생명력 넘치는 21세기 기념비적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지금껏 당신의 인생에서 감명 깊은 작품이 무엇이냐는 질문에는 항상 망설여왔다. 이제 ‘로힌턴 미스트리’의 『적절한 균형(A Fine Balance)』은 내 인생 최고의 소설이라 당당히 말할 수 있게 되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칠레의 밤
로베르토 볼라뇨 지음, 우석균 옮김, 알베르토 모랄레스 아후벨 그림 / 열린책들 / 2010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한 노회(老獪)한 사제(司祭)가 양심의 목소리(늙다리 청년을 상징)에 저항하여 짐짓 지식인으로서 사회적 책임을 다하였다고 자신을 정당화 해줄 기억들을 술회하는 독백이 흐른다. 이러하다보니 시인이자, 평론가이고 신부(神父)인‘세바스티안 우루티아 라크루아’의 천연덕스러운 회고는 허위의식으로 그득한 채 이야기들 모두가 조롱거리가 되고 만다. 작가의 이 역설적인 독해의 기대는 그의 의도만큼이나 그대로 전달된다. 즉, 자신만은 고고하고 지적이며 책임을 다하는 성인이라 자부하지만 고상한 척 술회하는 일화와 행동에서는 비겁함과 무관심, 기회주의적인 원숭이임을 드러내는 것과 같다.

주인공인 세바스티안 신부의 야심은 당대의 명망있는 문학평론가‘페어웰’과의 대화에서 처음 드러나는데, “그가 열어 놓은 길을 가고 싶고, 책을 읽고 감상을 큰 목소리로 멋들어지게 표현하는 것이 이 세상 제일가는 소망”이라며, 탄탄한 줄을 잡고 편승하여 세속적 명성을 지향하는 탐욕스런 본색이 그것이다. 사제복과 일반적 사복을 교묘하게 입는 그의 무의식적 행위 역시 사람을 대하는 지극히 상업적으로 세련된 태도를 읽게 한다. 
이는 소설적 배경인 당시 미국의 경제적 이익에 반하는 사회주의정권인‘아옌데’정부를 붕괴시키기 위해 사주된 군부쿠데타를 통한 피노체트 독재정권기의 침묵하거나 권력에 편승하여 사적 평화에 안주하는 소위 지식인들에 대한 허위의식의 까발림이라 할 수 있다.

소설 첫 머리에 주인공이 “나의 침묵은 티 하나 없다.”라고 주장하는 구절이 등장하는데, 이는 지주와 보수 기득권 세력들이 끊임없이 정부의 주요 인사를 암살하고 위협을 가하여 마침내 대통령을 죽음(자살)으로 내모는 과정에 이르기까지 그리스 고전이나 읽고 지식인으로서 어떠한 행동도 하지 않는 침묵의 일관과 구역질나도록 몰염치한 자기기만을 목격하게 한다.
“대통령이 자살하고, 모든 것이 끝났다. ~ 참 평화롭군, ~ 정말 조용하군, 하늘은 파랬다.”는 것이 소위 지식인의 감상 전부였다.

특히, 이 작품을 구성하는 두 개의 커다란 사건으로,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장악한 피노체트를 비롯한‘군사평의회’를 위해 마르크스주의 비밀강연 -“칠레의 적들(민중)을 이해하고,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고, 그들이 어디까지 갈 작정인지 짐작하기 위해서”- 을 맡아 권력의 지원을 받는 주인공의 행위와, 정치범을 고문하는 사택으로 위장한 정보요원의 저택에서 공허한 문학의 허영에 합세한 지식인들이 벌이는 파티, 정보요원의 아내로서 문단에 발을 걸친 여성작가 ‘마리아 카날레스’의 몰염치와 사악한 반사회적 행위를 들 수 있는데, 이는 과연 어떻게 이해되고 있는 것인가? 하는 것이다.

자신의 피노체트 정권을 위한 봉사가 산티아고 전체에 파다하게 퍼지자, 동료들과 대중들로부터의 비난을 걱정하지만 어느 누구의 눈곱만한 관심도 없음에 오히려 “어안이 벙벙했다.”고 술회하는 주인공에서 근심의 본질은 도덕적 양심이 아니라 명예의 손상에 있었음을 보게 된다. 더구나 이러한 사람이 훗날 정권이 바뀌자 마리아 카날레스의 비도덕적 행위에 대해 비난을 하는 모습은 몰염치하기까지 하다. 여기에 더해 카날레스의 저택에서 파티를 즐겼던 작가는 카날레스가 누인지 모른다고 발뺌하는 회피를 “해결책이 있을까?”하고 온통 사회의 비양심과 도덕적 해이를 고민하는 지식인의 모습으로 자신을 비추는 자가당착은 저열한 코미디가 된다.

나아가 독재 파쇼정권의 시대가 가고 새로운 사회주의 정권이 들어서자, “희생의 시대와 그 뒤에 오는 건강한 성찰의 시대가 필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고 역사적 선견을 말하는 모습은 천박함과 추악의 모습 그자체이다.
피노체트 독재정권의 열렬한 정신적 지원역할을 수행한 카톨릭 사제조직인 ‘오푸스 데이(Opus Dei)'의 일원으로서 특히나 호모오푸스데이라고 자임하는 이 비열하고 허위의식으로 똘똘 뭉친 지식인의 모습은 바로 오늘의 우리사회를 구성하고 있는 책 한 줄 안 읽는 엉터리 지식인들의 헛소리와 공명하는 듯하기만 하다.

한편 남미에서 신다다이즘을 주창하기도 했던 작가의 문단 영웅 물어뜯기도 이 소설에서 볼 수 있는 또 하나의 흥미로운 포인트가 되는데, ‘네루다’나 ‘파스’에 대해 넌지시 뱉어내는 비평아닌 비평이 그것이다. 어쨌든 무결점의 삶을 살아왔다는 한 지식인의 항변으로 온통 비겁한 침묵이거나 천박한 기회주의이고 속빈 고상함이라는 허위를 적나라하게 드러낸 이 소설이 칠레를 비롯한 남미 나라들의 갑갑하게 막혀있던 민중들의 가슴을 뻥 뚫어 주었으리라 믿는데 어려움이 없다. 아마 열광하고 또 열광 했으리라. ‘로베르토 볼라뇨’의 투사같은 혈기가 어느덧 전해져 오는 것 같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역사의공간>를 읽고 리뷰를 남겨 주세요.
역사의 공간 - 소수성, 타자성, 외부성의 사건적 사유
이진경 지음 / 휴머니스트 / 2010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 저작은 역사를 바라보는 시선을 완전히 처녀지대로 되돌려 놓는다.  지금까지의 역사기술 방식이나 역사관을 전복한다. 과거, 현재, 미래라는 선형적 시간관념에 의해 일렬로 배열되어 필연성과 객관성을 갖는 역사법칙이 존재한다는 선형적 위계화의 역사를 비판한다. 여기에는 역사의 속성인 역사의 주체를 통해 쓰이고 가동되는 역사적 주체의 단일성과 자신의 모습에 따라 세계를 통합하려는 욕망, 즉 보편주의로 구성하는 단수의 역사는 소수의 역사들을 지우고 소수자의 삶을 망각의 어둠속에 밀어 넣는 것이라는 관점이다.

여기서 주목하는 것은 “어떤 요소들이 동조하여 하나의 집합적 리듬을 만들어낼 때 그 리듬과 더불어 탄생”하는 것으로서의 ‘시간’개념에 대한 대결이다. 즉, 시간적인 동조의 요구, 시간적인 통제와 훈육을 통해 상이한 리듬의 신체를 하나의 동일한 것으로 통일하려는 힘, 그래서 자신의 시간 속에 타자의 리듬을 강제로 포섭하는 것으로서의 시간에 대한 대항만이 역사의 개념 자체를 변화시킬 수 있다는 견해이다.

즉 주체성을 장악한 자가 서로 다른 복수의 리듬을 하나의 척도적 중심으로 동일화하고 통합하여 자신만의 역사적 계열화의 선을 만들어내기에, “복수의 리듬들의 차이를 새로운 차이의 생성자로써 긍정하는 역사적 계열화의 선”으로 대항함으로써만 단일성, 통일성에 포함되지 못했던 지워지고 배제된 역사의 기억을 이야기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이 저술은 역사가 담을 수 없는 사건이지만 그렇다고 지워버릴 수도 없는 사건이란 의미에서 ‘역사적 이성’의 무능력 지대에 놓인 것들을 이야기하는 역사, 바로 그러한 역사담론이라 할 수 있다.
또한 소수자들이 역사 속에서 올바른 가치를 인정받고 제대로 된 지위를 할당받게 만드는 단순한 양심의 역사가 아니라, 역사 속에서 역사화 될 수 없는 사건을 역사로부터 돌발하게하고 이로써 역사 안에서 다른 돌발의 지점들이 만들어지도록 촉발하는 역사를 이야기한다.

이러한 ‘소수자의 역사’에 대한 정의는 “그때그때마다 지배적인 척도에 반하여, 척도적인 것과 대결하며 새로운 것을 창안하려는 성분”으로서의 ‘진보’와 결합하여, 어떤 세계로 하여금 내부에 안주할 수 없도록 그 내부를 끊임없이 동요시키고 벡터를 작동시켜 지배적인 것, 주류적인 것, 익숙한 것들을 전복하거나 변형하는 힘이 된다. 이러한 역사적 사건으로서 ‘전태일 분신 사건’이나, 민주화운동이라는 주류의 역사에 포함되기 전에 불리던 ‘광주사태’그리고 어떤 민족의 이름으로도 환원되지 않는 저항의 지대를 상징하는‘재일(在日; 자이니치)’은 ‘거대한 반역사적 돌발’로서 다름 아닌 소수자의 역사인 것이다.

바로 이 저술은 소수자의 역사, 또한 새로운 리듬으로서 계열화 된 선을 잇는 역사들을 수록하고 있는데, 근대와 비근대의 단선이 가져온 비시간적 세계와 시간적 세계를 이원화로 인해 근대이전의 한국사회가 가시화할 수 있었던 것을 볼 수 없게 되어버린 사건으로서‘세시풍속’의 미신으로서의 퇴출에 대한 고찰이나, 근대적 시간관이 문명화와 진보란 이름으로 삶의 깊숙한 곳으로 침투하여 시간 감각이 선험적 형식으로 대체되어 이질적인 삶의 요소들을 하나의 시간적 좌표계 안에서 통일하고 통합하여 구속하는 현상, 그리고 근대적 역사개념의 출현이 가져온 민족과 국민이라는 이중적인 역사적 주체를 수용할 수밖에 없었던 시대적 통찰이나, 생명정치학으로서 작동한 가족계획이라는 국가적 관리전략 즉 권력기술에 대한 새로운 욕망의 성찰, 국가의 군대가 자국 국민들을 향해 총을 쏘며 학살한 비극적 사건, 대중과 감정의 정치학을 이야기하는 현 정권의 몰염치와 무지와 천박함에 대한 비평, ‘카피 레프트 운동’을 포함하는 FTA가 가져올 생명체 고유의 순환이득을 배타적 잉여가치로 변형시켜 자본의 소유물로 만드는 사태에 대한 경고, 이주자들을 착취하는 일반주민들의 경찰시선을 이용한 폭력 등이 다뤄지고 있다.

볼 수 없었던, 아니 보이지 않았던 역사들을 가시화한 이들 역사의 기술 만으로서도 이 저술은 탁월하고 독보적인 지위를 갖기에 충분하다. 그러나 지금껏 접하지 못했던 역사분석 도구로서 ‘개념적 배치’라고 하는 “하나의 단어가 다른 단어들을 구성 요소로 삼으며 일정한 의미를 체계적으로 형성하는 것”임을 통해, 신문 - 독립신문, 황성신문, 대한매일신보 - 에 출현한 용어의 반복적인 계열화의 양상으로 역사관련 용어들의 의미변화를 추적한 근대영토의 개념이나, 지나간 단순한 사건들의 기록이라는‘사기(史記)’가 아니라 근대적 역사개념의 출현, 그리고 민족과 국가 개념에 이르는 역사적 인식의 도출은 앞으로 우리들이 역사를 성찰하는 방법론으로서 시사하는 바가 중대하다.

개인적으로 관심을 이끈 주제가 있는데, 제국주의 일본이 ‘동아협동체’, 또는 ‘대동아공영권’을 부르짖으며, 민족적 경계를 넘어 연대하자는 구호에 대해 “과연 식민지 인민은 어떻게 말하는가?”하는 것에 대한 방법론들이라 할 수 있다. 이는 억압받는 소수자가 권력을 손에 쥔 다수자에게 어떻게 항변할 수 있는가와 어떤 의미에선 일맥상통하는 이야기라 할 수 있다. 특히 김사량의 소설 <덤불 헤치기>, 한설야의 소설<대륙>의 표현방식과 주제를 통해‘내파(implosion)전략’, ‘횡단 전략’, 동일시와 모방의 전략에 대한 설명은 이해의 체화에 효과적으로 기여한다.

저자의 집필 기대처럼 범람하는 흥미중심의 대중 역사서에서는 좀처럼 발견할 수 없는 역사, 서발턴(subaltern)의 역사, 다수자들이 잊고 있는 것, 보지 못하는 것을 보고 듣고 촉발하게 하는 역사서로 읽혀진다. 거대한 폭력의 힘에 의해 기억의 표면에서 지워진 것들, 국민적 기억의 망각에 숨겨진 것들, 그리고 역사화를 둘러싼 힘과의 대립 양상을 급진적 양식에 담아 전달하고 있다.

역사의 이성이 무능력을 나타내는 지대에 갇혀있는 것들을 드러내고, 한편은 역사의 바깥으로 불러내는 역사, 돌발지점에서 만나는 모든 소수자들의 역사가 열정적으로 기술되어, 용기요, 반항이요, 자유요, 새로움이며, 다양성인 클리나멘(clinamen)으로서 끊임없이 해체되고 다시 조성되는 영원도 없고 절대도 없는 정신으로 충만한 저작이며, 우리 자신의 삶을 외부로 잡아끄는, 즉 안일한 내부의 이탈을 촉발시킴으로써 새로운 민중의 도래를 요구하는 저술이다. 뜨고 있었지만 보지 못했던 우리의 눈을 비로소 開眼시켜주는 근현대사의 걸작이다.

[註]서발턴(subaltern): ‘그람시’가  감옥의 검열을 피하기 위해 프롤레타리아를 지칭하는 용어로 대신 사용하였으며, 이탈리아 남부 시골농민들의 비조직적 집단으로서, 헤게모니에 종속되어 비통일적이며 결과적으로 수동적으로 위치될 수밖에 없는 집단을 의미함.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