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설주의보
윤대녕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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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혀 낯설지 않은 인물들, 뭔가 지나친 일과는 거리가 먼 우리들의 지극히 평범한 얼굴들, 바로‘나’들을 만나는 것만 같다. 그래서 수록된 작품들에서 근자의 자극성 짙은 젊은 작가들의 그것과는 다른 어떤 안식과 안도 그리고 가을 햇살이 튀어 오르는 잔잔한 호수의 물결 같은 마음의 진정을 느끼게 된다.
여기에 칼날 같은 비평가의 시선이 요구될 여지가 없다. 윤대녕이 들려주는 이야기들은 내 기억이고 나의 삶들이어서 긴장감을 상실한 채 나의 내면이 되어 가슴이 먹먹해져 올 뿐이다. 그렇다. 작품들은 “사람이 피할 수 없는 운명의 바람이 불고 있어 아프고, 하릴없이 그 바람 맞으며 만나고 헤어지는 사람들이 있어 아리다.”아마 마지막 수록작인 <여름, 여행>의 話者가 “가슴 속에서 무언가 뭉텅 빠져나간”,‘밀물 같은 그리움’을 되뇌는 심정과 같은 것이리라.

작품 속 인물들을 따라가다 나는 가만히 나의 기억들을 쫓는다. 아득히 돌아서 마주하는 그리움의 진짜 모습을 발견하고 내 일처럼 고개를 끄덕이게 하던 <대설주의보>의 윤수와 해선에게서, 지나간 시간을 간직하고 있는 동대문 뒷길의 화랑과 아련한 한 장의 사진을 떠올리게 하는 <풀밭위의 점심>에서 평론가의 말처럼 “삶의 온갖 휘장을 걷어내고 난 뒤에 남는” 나의‘맨 얼굴’을 보게 된다.
익숙한 삶의 심리적 동요와 갈등들, 은폐되고 드러내지 못했던 그 감정의 찌꺼기들, 감히 표현되지 못했던 아련한 일상의 관계들이 애잔하게 떠돈다.

이 소설집에 수록된 7편의 작품들 모두에서 진정한 원형의 사람, 삶을 구성하는 그 시시해 보이기만 하는 일상성의 진실을 읽으며, 우리 사람들의 삶을 표상하는 수많은 소설 작품들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가까이의 나와 우리를 느끼게 하는 작품은 흔치 않았다는 생각을 갖는다.
한 남자의 情婦로서의 삶을 끊어내기 위해 자해에 가까운 단절의 의식을 치루는 <보리>의 주인공, 수경의 안간 힘에서, “여름 한 낮 햇빛에 뜨겁게 타고 있는 빈 마당을”을 바라보며, 견디기 힘든 시원적 고독의 통증을 앓는 <꿈은 사라지고의 역사>의 인물들에서 여리고, 다치기 쉬운 인간 본원의 아릿한 유대의 고통을 느낀다.

알고 있지만 비켜가던 사람들의 민낯으로 드러난 비릿한 자기연민의 사연들은, “알고 보면 서로 사정이 똑같더이다.”가 된다. 어느 한 계절이 다가 올 때면 애써 자신을 감추고 무덤덤한 낯 선 이야기만 하다 돌아서왔던 그녀에게 지금이라도 달려가고 싶고, “마음의 불이 식어가는”그래서 “나이 들어가는 남자의 떨림과 만성적 피로와 허무함”을 달래던 오랜 동안 보지 못했던 친구도 불현 듯 가슴 가득히 그리움과 함께 몰려온다. 이별도, 해후도, 용서도, 미처 챙기지 못한 결백의 양심도, 외로움과 그리움까지도 정말의 우리의 감성과 우리의 문체로 다가온다.

우리의 지명(地名)들, 그 산하(山河)에 내린 눈과 비와 햇살을 오롯이 품고 있는 익숙한 자연의 모습들, 그 자연을 닮은 사람들, 바로 우리문학 고유의 애상과 서정성을 물씬 담고 있는 윤대녕의 이 소설집은 그대로 나와 우리와 일체가 되고, 허무와 공허, 잔인해 보이기만 하는 삶을 어루만져 준다.
한편의 이야기와 나의 회상을 반복하며 어느덧 7편을 끝낼 때의 그 휘감아 도는 적요한 느낌이 모처럼의 차분한 진정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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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 인간의 신비를 재발견하다>를 읽고 리뷰를 남겨 주세요.
과학, 인간의 신비를 재발견하다 - 진화론에 가로막힌 과학
제임스 르 파누 지음, 안종희 옮김 / 시그마북스 / 201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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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19세기 후반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인류사회 전반의 사고를 포획하고 있는 3대 전환적 사고로서 마르크스와 프로이트, 그리고 다윈을 꼽는다. 저자는 마르크스와 프로이트의 이론은 부실함이 이미 입증된 것이라 단정 짓고, 21세기에도 여전히 인간을 해독하는 사고인 진화론에 대해 명백한 오류를 지닌 과학이라 지적함으로써 물질주의적 기반의 과학은 이제 새로운 패러다임을 위해 물러나야 한다는 주장을 전개하고 있다.

이 저술의 전체를 유유히 흐르는 핵심적 사고는‘이중 실재’, 즉 인간의 이해에 있어서는 물질적인 것과 비물질적인 형성력의 존재를 인정해야한다는 논리라 할 수 있다. 인간의 정신작용을 단지 두뇌의 전기적 화학적 작용의 단순한 결과로 말하는 것은 사실을 호도하는 물질중심 과학의 오만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결과론적인 내용만 얘기할 경우 마치 그럴듯한 주장처럼 보일 수도 있다. 이러한 주장의 배경에는 플라톤과 기독교 이원론의 부활, 그리고 데카르트의 영혼설까지를 포함하여 기독교라는 제도종교의 복권이라는 의도가 있으며, 보다 궁극적인 의지는 진화론을 대체할 수 있는 인류미래를 위한 진정한 패러다임으로서‘지적 설계론’을 내세우는 것이다.

사실 책을 구성하고 있는 내용은 과학적 접근처럼 보이지만, ‘신비’와 ‘영혼’이라는 단어의 위력을 설득키 위한 의사과학(擬似科學;pseudo)이라 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이들은 과학을 비판할 때 항상 신비주의와 영혼을 얘기하며 본질을 흐리게 하는 일관된 패턴을 사용한다.
또한 이 책이 아주 흥미로운 것은 ‘리처드 도킨스’의 저술 중 진화론에 입각한 시정(詩情)넘치는 과학을 이야기하는 『무지개를 풀며』에 대한 모방을 하고 있다는 점인데, 특히 영국 시인‘존 키츠’의 동일한(물론 반대의 의미로서)인용에서부터 유전자와 뇌과학이라는 정확히 일치하는 소재를 이용하고 있음을 발견하면서 마지막까지 자신의 속내를 감추는 저자의 광신적 의지에 실소를 멈출 수 없다는 것이다.

저자가 주장하는 다윈의 진화론이 오류로 점철된 비과학적 이론이라 비판하고 폄훼하며 조롱하는 논리는 그야말로 단순하다. 왜 진화의 과정을 볼 수 있는 증거, 즉 수 백 만년, 수 천 만년 전의 화석뼈가 발견되지 않느냐는 것이며, 또한 캄브리아기의 지층에서 발견되는 고생물 화석의 경우 전 시대에서는 볼 수 없었던 생물이 무진장 발견되는 것으로 보아 다윈의 점진적 진화이론으로는 해석할 수 없다는 것을 들고 있다. 그러나 저자가 비판의 대상으로 인용하는 진화생물학자인‘스티븐 제이 굴드’는 진화양상은 대부분의 기간 동안 큰 변화 없는 안정기와 비교적 짧은 시간에 급속한 종분화가 이루어지는 분화기로 나뉜다는‘단속 평형설(punctuated equilibrium)'에서 입증하고 있음에 대해서 외면하는 것으로 대처하고 있으며, 화석뼈의 발견은 화학적, 물리적 현상을 이해하고 있다면 거의 억지에 가깝다는 것을 모르는 이가 없을 것이라는 판단을 하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한편, 이와 같은 진화론의 공박을 지원하기위한 기반으로 게놈프로젝트와 두뇌지도가 사실상 실패한 과학으로 지금까지의 결과 이상의 과학적 성취는 불가능하다고 단언을 내리고 있다.
저자의 이 두 과학적 시도가 지니는 한계와 과학의 오만에 대한 경고가 타당성 있는 지적이라는 점에 공감한다. 인간게놈 프로젝트를 통해 DNA의 서열들과 암호가 말하는 의미를 알았다고 해서 그 암호가 어떻게 인간의 개별 장기들을 만들고 영향을 주는지, 더구나 ‘조절 유전자’의 경우 파리, 쥐, 인간에게 완전히 동일함에도 다른 생물, 형태를 만들어내는 지를 설명치 못하고 있다는 지적은 가능하다고 판단된다. 그리고 뇌의 영역별 기능을 파악할 수 있다고 자만하였지만 뇌의 활성화 상태는 오히려 뇌 전체가 일사불란하게 시스템화되어 움직이는 모습을 당혹스럽게 봐야 하는 결과거나, 동일한 사고와 판단의 상황에서 청년과 노인의 뇌 활동영역이 전혀 다른 곳에서 이루어지는 것과 같이 오히려 더욱 이해할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이다.

다만, 이 저작에 있어서 원형질적인 두뇌에서 일어나는 전기자극이 어떻게 엄청난 범위의 정신생활과 독특한 생각, 기억, 신념이라는 비물질적 형상화를 만들어 내는지에 대한 의문과 이를 위한 반증들은 과학으로서 보다는 철학적 숙고를 요하는 과제라 하는 것이 타당하다 할 수 있을 것 같다. 이에 더해 진화론을 비롯한 과학 만능적 사고가 조성해 낸 오늘의 물화된 세상에 대한 폐해의 지적은 현대 과학에 대한 준엄한 비판으로 수긍할 수 있다. 그러나 과학은 가설에서 출발하여 이를 입증하고 오류를 수정하며 진일보된 이론으로 정착하며, 진리로서의 지위를 획득하는 것이 아닌가?
한계와 불가능이라는 단언적 선언이나 말하지 못함을 이유로 과학을 부정하는 논리는 올바른 도리는 분명 아닐 것이다. 과학이 반성하여야 할 부분은 이 저작의 지적을 넘어 근대산업사회가 시작된 이래 작금의 시장자본주의가 끊임없이 저지르는 인간의 상품화처럼 사고의 대전환과 진정한 새로운 패러다임의 요구는 수없이 지적되고 시도되고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진화론을 전면부정하고 지적설계론을 부르짖을 일은 아닌 것이다.

인간의 정신이라는 비(非)물질계에 대한 성찰, 그리고 신유전자 프로젝트들의 겸허한 되돌아봄을 생각케 하는 저술임에 틀림없음에도 불구하고, 마치 배려하는 척하면서 멸시하는 사이비 과학의 대표적 방법론을 구사하며, 진정한 과학에 동기를 부여해야 할 경이로운 감정 대신 그 사생아인‘신비주의’와‘초월성’과 손잡은 음흉한 엉터리 과학을 표방하고 있는 점은 안타까운 점이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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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법>을 읽고 리뷰를 남겨 주세요.
헌법 비타 악티바 : 개념사 17
이국운 지음 / 책세상 / 201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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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은 민주 공화국이다. 대한민국의 모든 권력은 국민에게 있고, 국민으로 부터 나온다.”이는 우리 대한민국의 헌법 제1조 1항과 2항이다. 그러나 작금의 정치현실에서 이와 같은 내용이 실현되고 있다고 확신할 수 있을까? 즉 ‘주권’이 국민에게 있음을 국민으로부터 권리를 위임받은 입법, 행정, 사법부의 구성원들이 깨닫고 있는 것일까?
현실에서, 국민으로부터 주권을 수임 받은 대의정부의 모습은 점점 1인, 1정당, 1국가 독재에 귀결되는 양상을 보이며, 민주주의의 본질을 상실해가고 있다. 자유주의 또한 그 본래의 의미가 왜곡되거나 와해되어 사전적 규제의 부정을 통하여 민주적 정당성에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이처럼 대의정부, 삼권분립이라는 민주적 헌정주의는 심각한 도전에 직면해 있으며, 당초 국민들의 “삶의 근원적 다양성을 수호하고, 동시에 삶 그자체가 다원적 이익들로 용해되어버리지 않도록 하기 위해 공공성을 보전”하려는 헌법의 기획은 심하게 손상되고 있다.
이제 극단적 자유주의의 팽창이 낳은 화폐권력에 대해 사후적 판단에만 의존해야 하는 상황은 법률의 해석자인 법률가들에게 헌법을 판단케 하는 법률가 수호주의라는 위험한 현상까지 빚어내고 있다.
이 저술은 바로 이러한 주권과 민주헌정의 변질이라는 우려스러운 현실에 대해 어떻게 대응하여야 하는가를 표상정치의 역사적 변화양상과 그 의미 해독, 근대적 헌정주의의 본질과 의의 등 배경지식의 전개를 기반으로 하여‘표상정치’와 ‘헌정권력’이라는 핵심개념을 통해 탈근대적 민주주의를 위한 표상정치의 새로운 모델을 제시하고 있다.

아마‘표상정치’라는 어려운 어휘가 이 저술보다 쉽게 설명된 책은 없으리라 여겨지기까지 하는데, ‘호머’의『일리아드』속 인물들이기에 더욱 친근함을 느끼게 된다. 그리스와 트로이의 전쟁, 즉 수많은 전사(戰士)들과 시민들이 결부된 전쟁이지만 단 두 사람만의 대결로 끝내려고 한다. 바로 ‘파리스’와 ‘메넬라오스’의 대결인데, 이처럼 전쟁이나 정치를 단 두 사람의 결투로 환원하려는 것, 이런 식으로 정치를 생각하는 것을 바로 ‘표상정치’라 하는 것이다. 물론 여기에는 ‘헥토르’의‘개입(介入)’으로 표상정치는 붕괴되고 다시금‘아킬레우스’와 ‘헥토르’의 또 다른 대결(표상정치)이 이루어지지만 살육전은 중지되지 않는다.

왜 표상정치는 실패하는 것일까? 즉 시민과 전사들을 대표하는 자들을 내세운 합의가 번번이 깨지는 이유가 무엇일까 하는 것이다. 헥토르의 개입이나, 오디세우스의 간계처럼 바깥으로부터의 개입이 표상정치를 무너뜨리는데, 이는 탐욕과 야심, 속물근성에 근거하기 때문이다. 결국 표상정치는 다시 건설해도 곧이어 붕괴될 수밖에 없는 것이라면, 즉 정치적 현안이 표상정치를 통해 해결 될 수 없는 것이라면 어떻게 해야 하겠는가? ‘표상’이란 것은 태생적으로 불완전 할 수밖에 없는 속성을 지니고 있다. 표상정치의 결과를 받아들여야 하는 사람들과 표상정치를 수행하는 사람들의 이해관계가 반드시 같을 수 있겠는가? 결코 같을 수 없는 것이며, 단지 ‘닮음’의 묘사에 불과할 수밖에 없다는 한계를 가진다.

그래서 표상정치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기획들이 역사 속에서 수 없이 착안되고 진전되어 왔다. 선거제도를 정교하게 설계하여 대표제를 합리화하지만 여전히 대표되지 않는 사람들이 존재하고, 궁극에는 표상정치의 동일성에 대한 보다 정밀한 접근으로서의 집착이나 아예 불가능의 인정을 통한 포기라는 딜레마의 해결방안으로서 “표상정치에 투항하지도 포기하지도 않는”기획으로서 ‘헌법’의 고안, 즉 '헌정주의(constitutionalism)'의 발상이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시대와 장소를 초월하는 보편적 법이 존재한다는 고차법 사상의 저변이나 혼합정체의 논리, 근대적 헌정주의의 역사적 이론들의 친절한 설명이 배경지식으로 풍부하게 전개되고 있다.

이러한 노력들은 자연권의 실정화를 통해 성문헌법을, 헌법과 법률을 구조화하고 의회를 탄생시켰으며, 법의 지배를 체계화하는 식으로 표상정치를 재건하여 왔다. 그러나 이러한 표상정치는 오늘날 “대중적 산업화와 이에 따른 사회내부의 계층 분화가 심화 되면서 의회주의의 전제라 할 시민적 동질성이 급격히 상실”됨으로써 민주주의가 오히려 지도자 체제로 대표되는 1인 독재주의를 초래하였으며, 자유주의는“자유에 기초한 계약적 사회 구성이 가능하다고 보고, 그 모델을 모든 대상을 화폐가치로 환원하여 개인의 선호에 따라 교환 할 수 있다는 완벽한 자유 시장에서”찾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민주주의는 자유가 없으면 작동 할 수 없는 비대칭성으로 인하여 자유주의는 민주주의를 따돌리고 표상정치를 넘어서는 독자적인 팽창을 먼저 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화폐권력의 그림자 노릇이나 하는 근대적 헌정주의의 전제가 붕괴된 현실에서 저자는‘주권 개념해체와 재구성’을 위해‘헌정권력’의 개념에 주목한다.
이를 위해 우리헌법의 주어는 무엇인가? 고 묻는다.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 대한국민...”에서와 같이 ‘대한국민’이 우리 헌법의 주어다. 바로 헌법의 발화자는‘대한국민’이다. 발화자가 있다면 수화자는 누구인가? 물론 수화자도‘대한국민’이다. 허나 저자는 “조선총독부에게는 해방의 선언이며, 미군정에는 독립선언이고, 다른 독립국가에는 평등의 선언”이듯이 수화자는 여럿이 될 수 있음과 같이 새로운 읽기를 주장한다.

이는 “헌정권력에는 다양한 차이 속에서 공통의 것을 이끌어내려는 다시 말해, 그 누구도 특권적일 수 없다는 평등한 네트워크”를 전제로 하고, “장애인, 할아버지, 주부, 아이, 여고생, 예비군, 이주 노동자 등 이들의 차이를 그대로 둔 채 그들 사이에서 공통의 것을 끌어내 그들 자신의 권력이 바로 헌정권력”이며, 이로써 헌정권력은 소통과 대동의 현장이 될 수 있다는 의미가 된다. 또한 차이의 정치를 실현하기 위한 기획으로서 헌법민주주의의 강화를 통한 소수자의 정치적 기회제공과 이러한 틈새를 활용한 헌법민주주의 정당성 입증, 나아가 탈근대적 민주주의의‘차이에 대한 공적 확인’과 ‘정치화의 성취’, 다소 급진적으로 이해 될 수도 있겠으나 규범의 강약에 따른 지역공동체, 국가, 국제사회의 존재를 그리는 새로운 모델은 표상정치를 극복하기위한 단순 이론으로서가 아니라, 그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갖가지 시행착오와 시련을 마주하는 집단적 실천의지가 된다.

이 저술은“법치의 논리로 입법을, 민주의 이념을 밀어내는 것은 민주공화국의 본질에 부합하는가?”, “민주적으로 선출된 의회의 입법을 법률가들이 헌법해석으로 무효화시키는 것은 정당한가?”, “누가 헌법재판관이 되느냐가 어떤 법률을 만드느냐 만큼 결정적인 문제가 된 사회”의 부정의를 떠나 본질적으로 어떤 문제를 내포하고 있는 것인가? 에 대한 답변을 사유케 한다. 심각하게 훼손되고 비뚤어진 오늘의 헌정질서와 표상정치의 왜곡을 시정하고 근원적인 대안을 창출하기 위해서 그 어느 때보다 대한민국 헌법의 새로운 읽기는 중차대하고 우리에게 요구되는 각성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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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미친 사내의 고백 모중석 스릴러 클럽 7
존 카첸바크 지음, 이원경 옮김 / 비채 / 200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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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심리스릴러란 바로 이런 것이구나! 라는 경외(敬畏)의 탄성을 절로 질러대게 한다. 단순히 인간 내면 심리묘사의 디테일이 뛰어나다거나 사실성에 있어 명료하다는 성격의 것이 아니라, 말하지 않으나 그 내밀함과 몽환적 비현실의 세계를 이야기하고 기억과 상상, 그리고 현실의 구분을 경계 짓지 않은 내용과 형식에서까지‘광기’에 대한 작가적 의지를 드러내는 것, 이성과 광기라는 비이성이 빚어내는 충돌의 전개까지 작품의 견고함이 하나의 흐트러짐도 없이 짜여 져 있다는 점이다.

정상인이라 자처하는 인간들이 구성하고 있는 사회, 그러나 자신들의 이성으로 독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에 대한 격리, 이를 구분하는 담장의 폭력, 바로‘미친 사람’이라 치부하고 그들을 거부하는 바깥세상과 담장안의 세상은 어느 곳이 더 무서운 것인가?
이성과 합리성이라는 척도는 과연 격리된 정신병동에서 어떠한 형태로 발현되는 것일까? 안 과 밖에서 달리 작동되는 이 허위의 개념이 환자로부터가 아닌 감시자인 의사, 심리치료사 등의 비이성으로 먼저 파괴되는 모순을 발견케 된다.

‘앰허스트 스테이트 정신병원’, 미국 북동부 뉴잉글랜드에 자리 잡은 정신병자들의 거대한 격리수용소의 다름 아니다. 작품은 내면의 여러 목소리에 시달리는 정신질환자‘프랜시스’의 버려짐과 격리, 그리고 죽음의 공포가 떠나지 않았던 정신병원에서의 기억과 현실의 망상을 교차한다. 자신을 “정상적인 세상의 가장자리에 선 인간”으로, 즉 스스로를 경계선에 위치한 인간으로 인식한다. 아마 이는 이 작품의 주제를 관통하는 핵심 주제라 하여도 무방하지 않을까 싶다. 광기에 대해 이성의 폭력이 빚어내는 그 권력의 위선, 바로 그것은 또 다른 광기가 되어 수용자들에게 공포의 대상이 된다. 정상과 광기의 분별없음...

‘짧은 금발’이라는 손가락이 잘린 간호사의 사체가 발견되면서, 심리 게임은 본격의 국면으로 접어든다. 종교의 권위에 숨어 아동을 상습적으로 추행하는 성직자, 이를 처단하기 위해 교회에 불을 지르고 정신이상자로 수용된 소방수‘피터’라는 지극히 정상적 사고의 인물, 그리고 연쇄살인범을 추적하는 대학시절 강간이라는 육체적, 정신적 외상을 지닌 여검사‘루시’를 통해, 미친 자들의 세상이라는 정신병원에 바깥세상을 이식한다. 주임의사‘걸프틸리’라는 인물은 광기에 대한 정상인의 폭력적 권력을 뚜렷하게 대변하고, 환자들의 심리치료와 감시자인‘에반스’란 인물은 환자에 대한 통제의 집착이 “어떤 고집스런 환자의 광기도” 비할 바가 못 되는 광기를 지니고 있다. 이러한 첨예한 정상과 광기의 대결은 광기와 광기의 대결에 다름 아니며, 바깥세상과 바깥세상의 대결이 된다.

악마를 처단해야 한다는 천사의 목소리, 바로‘천사’로 불리는 살인자와의 게임은 물론, 모든 것을 미친것이라는 이름하에 곡해와 무책임, 뒤죽박죽의 망상으로 버무리고 말려는 의료진과의 싸움까지 해야 하는 검사 루시와 소방수 피터, 바닷새 프랜시스의 절망과 비합리, 그리고 생생하게 밀려오는 공포와의 뒤엉킴은 시종 팽팽한 긴장으로 신경을 고추 세우게 한다.

“살인이야!”라고 소리치거나 비명을 질러도 그 어느 누구에게도 관심을 받지 못하는 세계, 그래서 악몽은 스스로 처리해야 하는 병원, 정신병을 낫게 하는 곳이 아니라 오히려 강화시키는 곳, 환자의 쾌유를 위해 힘쓰는 사람이 없는 정신병원에서 살인자 천사의 숨결이 점점 이를 쫓는 루시와 피터, 그리고 프랜시스에 다가온다. 밤이면 굳게 잠기는 환자들의 방과 수없이 많은 문들이 잠겨 지지만, 이 강력한 살인자는 실질적인 힘, 접근권력인 열쇠를 지니고 있음이 분명하다.

살인자를 찾으려는 자와 살인자의 치열한 추적과 추적의 게임, 잠긴 문의 세상에서 진정한 승자는 누가 될 수 있을까? 악마를 추적하는 수도사처럼 변해버린 여검사와 부패한 종교의 협상에 무릎을 꿇어버린 피터, 살인자의 숨결을 아는 프랜시스와 살인자 천사의 호흡을 끊어버릴 듯한 장면에 이르기까지 스릴러의 진수를 만끽하게 하여준다. 완벽하고 깨끗하고 근사하지 많은 세상. “삶이란 그런 법이야. 누군가 상흔을 남겨도 우린 계속 살아가야지, 하지만 넌 자유로울 거야. 날 믿어.”라는 피터의 격려처럼 이성과 낙관이 통하지 않는 절망적이고 섬뜩한 세상의 구속에서도 인간의 자유로움에 대한 본성은 결코 부숴 질 수 없는 것이리라. 인간 의지의 숭고함이 섬세하게 그려진 심리스릴러 문학의 정수이다. ‘존 카첸바크’의 이 작품이‘심리소설의 교본’이라함에 그 누가 저항할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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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의 물고기
권지예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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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을 쓰고, 생활인으로서 요가강사를 하는 30대의 여성,‘서인’, 여성잡지 인터뷰에서 마주한 사진작가‘선우’는 그녀에게 야릇한 인상으로 마음에 새겨진다. 어둠이 내린 호수는 이야기 주위를 항상 맴돌고, 그곳은 어둡고 깊은 인간들의 욕망을 묻는 거대한“욕망의 쓰레기장”으로 소설의 사건들을 연결시키는 지위를 갖는다.


추리적 맥락을 삽입함으로써 등장인물들의 마음 속 깊은 곳에 가둬져 있는 지워진 기억들을 시간의 진행에 따라 복원하는 전개구조는 전형적인 심리 스릴러물을 연상시킨다. 밤이면 호수가로 나가 열락의 정사(情事)를 벌이는 엄마에 대한 기억, 마침내 자식들을 버리고 집나간 엄마를 자살이란 가상의 흔적으로 지워버린 ‘서인’의 상처는, 몽유병 증세로 그리곤 성폭행의 희생자란 정신적 외상을 남긴다. 한편 상대역인 ‘선우’또한 고아로서 프랑스로 입양되었으나 이란성 쌍둥이 여동생‘안나’의 죽음을 호수에 던져 넣고서는, 파양(罷養)되어 돌아와야만 했던 깊은 심리적 상처를 지니고 있는 인물이다.

이렇듯 정신적 상처를 지닌 두 사람의 사랑은 서로의 숨겨진 고독을 감지할 수 있었던 모양이다. 여기에는‘사람을 만나 사랑의 감정을 느낄 때 우리는 타자를 가장 강하게 느낄 수 있다.’는 ‘레비나스’식의 타자성을 읽게 되는데, 누군가를 알아서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해서 점차 알아가는 것, 즉 그 사람을 알고 싶다는 강렬한 욕망에 사로잡히는 것이 바로 사랑이라는 것인데, ‘서인’이 ‘선우’의 낯선 행동에 대해 “선우에 대한 서인의 의혹이 서서히 자라고 있었다. 그는 비밀이 많은 사람. ~ (中略) ~ 점점 알 수 없는 사람 같았다.”와 같은 기묘한 비대칭적 자각을 보여주는 것에서 읽을 수 있다.

이야기는 이러한 서로의 알아감, 자기만의 내밀한 것들을 드러냄으로서 사랑의 본질 속으로 향하게 되는 두 연인의 변질 될 수 없는 마법의 세계를 보여준다. 자신의 목숨까지도 내어 줄 수 있는 그런 사랑, 선과 악이라는 인간 내면의 투쟁도 잠재울 수 있는 자기희생, 이타적 사랑은 상대를 온통 이해하는 과정이고 그러함의 과실이라는 것이다.
호수에 던져진 여자들의 주검, 실종 된 여자들, 건져진 사체들의 죽음은‘선우’와 그의 또 다른 인격 ‘미카엘’을 보여줌으로써,‘서인’이라는 여인의 사랑을 숭고함의 경지로 올려놓는다.

호반(湖畔), 악의 꽃,‘삐아졸라’의 광인을 위한 발라드, 검은 스타킹 등 암시와 복선을 적절하게 배치하여 읽는 재미를 더한 이 또 하나의 사랑 이야기가 오늘의 사람들에게 진지하게 들려지기를 기대해본다.
다만, 트라우마, 정체성장애를 필연성을 확보하지 못한 작품들이 우연성을 보완하기 위한 소재로 빈번하게 사용하다보니 그 진부함을 극복하고 차별화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결국 소재의 빈곤과 식상함이란 한계를 넘어서지 못하고 주저앉아버린 흔하디흔한 이야기들이 될 수밖에 없는 위험을 갖게 된다. 이 작품 역시 이러한 경계를 걷다보니 얼개는 부담 없이 수용되지만 세밀(細密)에서는 엉성한 거칢의 거북함이 있다는 아쉬움이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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