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곽을 거닐며 역사를 읽다
홍기원 지음 / 살림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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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곽의 존재는 물론 성곽에 대해 이렇다 할 인식조차 없었던 내게 이 저작이 주는 학습 효과는 솔직히 충격이고 부끄럼이며, 감사한 마음이라 할 수 있다. 조선조를 지나 대한제국과 일제치하, 그리고 한국전쟁과 군부개발독재시대를 거쳐 오늘에 이르기까지 600여년을 한 나라의 도읍지로 위세를 지켜온 서울의 역사는 곧 우리의 얼굴이고, 우리의 모습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거울이라 할 것이다.

조선의 도읍 한양을 에워싸고 있던‘성곽’, 분주히 거니는 도심에서 성곽을 볼 수도 없거니와 설혹 보았다 해도 한 낱 축대나 돌덩이 이상의 무슨 감흥을 가졌겠는가? 도로 옆으로 밀려난 조선조 여느 축조물이겠거니 하고 지나버린 문(門)들이나, 남산, 북악을 오르면서 무심히 지나버린 그나마 남겨진 성곽조차도 어떤 의미로 새겨 본 적이 없으니 내 역사의 인식이란 정말 보잘것없었다는 생각에 이른다. 서울 성곽의 길이는 18.12Km이고, 4대문과 4소문이 있었다는 사실도 이 저술을 통해 비로소 알게 되었으며, 그 파괴되어 없어지고 옮겨진 문과 성곽들마다 서려있는 굴곡의 사연들에서 이제야 그 사라진 쓰라린 곡절들을 접하게 되었으니 책을 읽는 내내 저자의 노고에 고마운 마음이 새롭다.

화마(火魔)에 휩싸여 잿더미로 변하는 숭례문(남대문)을 무참히 바라보던 일이 어제 일만 같은데, 좌우에 성곽이 이어져 있는 1904년의 숭례문 사진은 그야말로 감개무량이다. 그러나 이러한 감흥도 순간에 머물게 되는데, 1907년 일본 황태자 환영도로 건설이라는 미명아래 일제가 한양도성 중 가장 먼저 헐어버린 곳이라는 설명에 그만 내 고장, 내 나라 역사의 무지에 할 말을 잃게 된다. 이후 일제의 근대화라는 각종 명분과 조선의 얼을 훼손하기 위해 파괴하고 없애버리고, 그나마 남아있던 한양을 보듬고 있는 사내산(인왕산, 북악산, 낙산, 남산)의 성곽들조차 군부독재시대의 무식한 전시(展示)개발 행위로 모두 파괴되어버렸으니 문화재에 대한 우리의 인식에 좌절감마저 몰려든다.

개발 독재시대가 지나고 나서, 문화재 복원차원에서 성곽 복원이 점진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으나, 시멘트로 복원한 곳, 표지조차 없는 옹색한 복원 흉내를 낸 곳, 문화유적 앞에는 이유를 불문하고 소나무를 식재하여 생태적 변화에 대한 고려도 없는 무분별함, 본래의 의미는 아랑곳하지 않은 제멋대로의 복원은 물론, 역사적 의미와 유래를 안고 있는 서울시장공관과 같은 장소와 건축물에 대한 공공재로서의 환원에 대한 제안 등은 역사유적의 복원에 대해 시민으로서의 참여와 관심을 자극한다.

이 저술이 제공하는 관점은 이와 같은 문화재 복원행정과 같은 제언은 물론, 역사사회학적 시선으로 시민(국민)의 뜻과는 무관하게 신라호텔 부지와 같이 문화유산을 사적 소유물로 둔갑시킨 독재정권과 재벌의 야합이 빚어낸 어처구니없는 현실은 물론, “뿌리없이 브랜드만 찾는” 신자유주의 교육의 산물인 서울과학고(예전 보성중고)에 내준 성곽과 역사적 의미를 지닌 장소, 서울 성곽을 파괴하여 호텔과 반공센터의 축대로 사용하기도 하고, 남산 정상에 자신의 동상을 세운 이승만이나, 어린이회관을 세우고, 국회의사당 건립계획을 세우는 등 무지몽매하고 안하무인의 무소불위 권력과 탐욕의 현실을 보여주는 것 또한 잠자던 정신을 퍼뜩 뜨이게 한다.

한편 4대문과 4소문에 대한 최초의 축성과 중수, 복원 등에 얽힌 사적(史的) 지식은 물론, 저마다의 특징에서부터 이름의 유래, 얽힌 속설 등에 대해 들려주는 이야기는 그야말로 우리 것에 대한 앎의 지평을 넓혀주고, 그럼으로써 우리의 문화유산에 대한 애정을 공고히 심어준다. 경복궁의 오른팔인 인왕산 능선이 끝나는 지점에 서쪽 문의 위치를 두고 고심하여 8개 문 중 유일하게 두 번씩이나 옮긴 끝에 자리를 잡았다는 돈의문의 얘기나, 북문인 숙정문(肅靖門), 일명 숙청문(肅淸門)이‘수(水)’에 해당하여 열어 놓으면 장안의 여자가 음란해지므로 항상 닫아놓았으나 기우제를 할 때면 열어 놓았다는 설명은 미련한 내게 확실히 기억하는데 도움을 주기도 한다.

또한 서고동저의 지형으로 유일하게 평지 성문인 동대문(흥인지문)은 지반의 연약함과 평지라는 성곽의 단점을 보완하기 위해 옹성을 가졌다는 것과, 이름에 갈‘지(之)’자를 넣은 것은 내사산 중 가장 기운이 허한 낙산을 보호하는 의미라는 것은 선조들의 유산 어느 것 하나 예사로움이 아니라는 점을 새삼 깊이 있게 느끼게 한다.  

자하문 일명 창의문에서, 실질적 북문 역할을 했던 혜화문, 일명 동소문, 그리고 시신이 통과 할 수 있는 두 개의 문인 서소문과 광희문까지, 게다가 사라진 성곽의 터에서 복원 된 성곽이나, 남아있는 성곽에 맺힌 사연들이 촘촘히 문화적이고 역사적인 자취와 함께 쉽고 재미있는 이야기로 들려지고 있다. 여기에 더해 서울 성곽이나 서울을 넓게 조망할 수 있는 환상적인 장소들도 알려주는데, “성곽 탐방로 조성의 모범 답안”이라고 저자가 칭찬하는 장충단 서울 성곽 구간은 꼭 들러 보아야 할 것 같다. 많은 구간에서 복원이 진행되고 있는 모양이다. 1916년 매일신보에 실린 성곽을 한 바퀴 도는데 하루해가 걸렸다는‘순성(巡城)놀이’를 서울 시민들이 함께하며 우리의 문화유산을 둘러보는 기회가 하루 빨리 이루어졌으면 하는 바램도 가져본다. 600여년 역사의 장면들이 화보들과 수려한 글이 어울려 알찬 성곽 길라잡이가 되어주는 서울 역사 기행의 역작(力作)이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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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테말라의 염소들
김애현 지음 / 은행나무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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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된 주체로서 내가 또 다른 독립체인 타인을 이해한다는 것은 그 사람에 대한 동정과 연민, 사랑이 전제되지 않고서는 아마 근처에도 가지 못하는 것일 게다. 내가 그 누군가의 감정에 이입되려고 노력하지 않고서 그를 이야기한다는 것은 얼마나 오만하고 그릇된 이해겠는가? 소설 속 방송작가인 엄마와 개그우먼 지망생인 딸의 어긋나는 대화에서 소통이란 것의 공허한 틈새를 발견한다. 일에 심취해있는 엄마, 자기 삶에 대해 진지한 자세를 가진 엄마, 주변인들의 한결같은 존경의 대상이 되는 커리어 우먼인 엄마이지만‘나(딸)’는 소홀해 보이기만 하는 자식에 대한 불성실한 태도가 마땅치 않기만 하다.

우리들 삶의 여정에서 툭하면 대두되는 일과 가정에 대한 비중, 그 무게중심의 편차에 대해 구성원들의 갈등이란 것의 실체는 어찌보면 이기심이라는 본질을 벗어난 감정때문이 아닐까하는 생각도 든다. 일하지 않으면, 아니 일을 통해 경제적 재화를 획득하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다. 그러나 과연 그 때문이기만 할까. 일이란 우리의 삶에서 어떤 의미를 갖는 것인가. 삶 그 자체가 되어버린 일이라면 그 사람을 그것에서 격리하려는 것은 오히려 고통이며, 삶의 의미를 포기하라는 압박이 될 수 도 있을 것이다.

엄마가 해주는 따뜻한 저녁밥을 기대할 수없는 나에게 엄마의 일은 사랑의 경쟁자이기에, 그 일에 몰두하는 그녀는 더욱 알 수 없는 대상이 되어버린다. 딸에게 미안한 것이 있다면 젖을 먹이지 못했다는 엄마의 말이‘나’의 삶에 결핍을 낳는 근인으로 작용하는 것은 물론 갈망하는 사람의 결여라는 상징이긴 하지만, 그래서 그 공허함을 채우는 무의식의 행위로 젖병에 흰 우유를 넣어 마시는 장면들은 아직은 삶의 이해에 서툴고 에고를 벗어나지 못한 어린 사람의 불안이어서 거북하기만 하다.


한편, 소설의 표제인‘과테말라의 염소’는 교통사고로 식물인간이 되어버린 엄마의 방송프로그램 현지취재 내용의 장면으로서 염소의 젖을 관광객에 팔아 살아가는‘호세’라는 청년의 죽은 엄마에 대한 비로서의 이해와 사랑의 비감한 회고로서 생전에 생계의 원천이었던 염소들이 그녀에게는 “그저 다섯 마리의 염소가 아니었어요.”라는 그 지고한 삶의 원천이자 자식에 대한 사랑의 복합체로서의 깨달음에 대한 일종의 우화이다. 이 이야기는 話者인‘나’의 엄마에 대한 그 먹먹하고 뭉클한 사랑과 그녀의 삶에 대한 새로운 앎의 각성 과정과 중첩되어‘어머니’라는 아릿한 태곳적 그리움에 젖어들게 한다.

중환자실에 아무런 의식조차 없이 누워있는 엄마, 병문안을 위해 찾아오는‘나’의 친구들이 들려주는 엄마의 전문가로서의 모습, 남자친구라는‘전 선생’의 엄마의 여자로서의 관계에 대한 고백과 ‘나’에 대한 사랑의 안타까운 이야기들에서“젖 먹던 힘”의 본질을 알아가고, 결핍의 번민, 그 허전함의 틈새가 채워져 나간다. 엄마에 대한 향수, 일의 이면에 내재한 도덕적 책임이라는 자애(慈愛)의 실재함, 그리고 이별이란 불가피한 통증의 수용이 담담한 필체로 다가와 마음을 적신다. “태풍의 눈처럼 고요한 슬픔의 한 복판”에 놓여 참았던 울음이 막 터져 나올 듯한데도 마치 딴 청을 부리는 느낌의 소설이다. 내겐 참으로 낯 선 감정의‘나’였고, 소설이라 할 수 있다. 이십대의 감성, 언어, 삶의 시선에 대한 놀라운 다름의 시간이었다고 해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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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러독스 논리학 - 제논의 역설부터 뉴컴의 패러독스까지, 세계의 석학들이 탐닉한 논리학의 난제들
제러미 스탠그룸 지음, 문은실 옮김 / 보누스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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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모처럼 사용치 않던 뇌의 어느 부분을 사용하는 부담을 느껴보게 하고, 궤변인지 진실인지 조차 구분할 수 없는 이야기나 멀쩡한 이성이 기만당하는 역설들에 내 사고력과 판단력, 그리고 논리력이 구멍이 숭숭 뚫려있음을 자각하는 겸허한 시간이 되게 한다.
몇 가지 논리학의 난제(難題)는 우리네 이성의 딜레마를 이야기 할 때 단골로 등장하는 것들이어서 살짝 건너뛰어도 되지만, 문제를 이해하기에 더없이 핵심만 압축적으로 제기하고 있어 두뇌에게 반복 학습의 시간을 주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

아인슈타인이 어린 시절 궁리해 낸 수수께끼처럼 의외로 차분히 단서들을 대입하면 해결할 수 있는 문제에서부터 실마리를 찾지 못해 쩔쩔매다 해답란을 보고서야 아하~하고 이해하게 되는 확률의 논리문제도 있다. 또한 어수룩하고 섣부르기 그지없이 잘 속는 우리의 논리적 이성에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르기도 하는데, 언어에 내재하고 있는 마법같은 술수, 확률의 함정을 결코 피해가지 못하는 추론 능력을 확인하곤 인간 지성의 취약성을 새삼스레 인정하는 시간이 된다.

역전의 역설이라고도 하는'심슨의 패러독스(Simpson's Paradox)'에서 각각의 게임에서 진 사람의 합계의 점수에서는 오히려 앞서는 기이한 현상의 진실로부터, ‘저지의 역설’을 대하면 핵전쟁의 발발과 같은‘최후심판 날의 기계’와 같은 자동화, 기계화의 아슬아슬한 위기가 상상되기하고. 연쇄삼단논법의 패러독스와 같이 우리가 세상에 대해 아는 것과 논증의 결론이 일치하지 않는 모순을 보게도 된다. 사실 직관으로는 분명히 옳지 않음을 알지만 진실과 반대되는 논리적 결과를 명쾌하게 반박하거나 그릇됨을 지적할 수 없는 역설들이 해결되지 못하고 존재할 수 있다는 것 또한 이 저작에서 발견하게 되는데, 거듭 인간지성으로 인간의 삶을 해석하지 못하는 것이 있을 수 없으리라는 내 신념의 붕괴를 인정치 않을 수 없는 당혹감에 잠시 휩싸이기도 한다.

특히 이 저작에서 시종 내 관심을 흐트러지게 하지 않는 두 개의 장인 철학적 난제와 패러독스 세계에 대한 것인데, 이 중에서도 자기스스로를 원소로서 포함하지 않는 집합들의 집합은 자신을 원소로서 포함하는가? 하는 일명 러셀의 패러독스나, 인과적 결정론은 인간에게 참 일 수 없다는 주장을 담고 있는‘뷔리당의 당나귀 패러독스’는 자유의지에 대한 의문까지 실로 광대한 사유를 이끌어 내고, 지배원리와 기대효용이론의 지지로 나뉘는 뉴컴의 인간 사고실험이 보여주는 사람들의 논쟁은 얼마나 다르게 생각할 수 있는지를 생각게 한다.

정체성의 딜레마처럼 진지함에 머물게도 하지만, 1달러 지폐를 경매에서 팔면 수지가 남을까하는 계획의 실상처럼 미소 짓게 하는 인간의 심리, 본성, 이성의 맹점을 발견하는 재미도 아울러 지니고 있는 흥미로운 저작이다. 그리고 각 단원마다 짤막한 논리퀴즈(Logic Quiz)가 있는데 이 문제들 또한 단연 압권이다. “벨기에에서는 남자가 자기 과부의 자매와 결혼하는 것이 합법일까?”한 번 풀어보시라!
세계의 지성들이 탐닉한 난제들을 함께 생각하고, 해결해 보는 과정에서 생각지 못한 사고와 논리, 인간의 실체를 발견하는 계기가 될지도 모를 일이다. 몇 자 되지 않는 짧은 문장들로 이루어진 책자이지만 수월치 않은 시간을 요구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꼼꼼히 읽다보면 애장도서 목록에 추가하고픈 생각이 은근히 지배하는 그런 저작임을 느끼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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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시퍼의 복음
톰 에겔란 지음, 손화수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1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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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의 기원과 종교에 대한 고고학적 소재를 지닌 이 작품이 넘나드는 영역은 우주생물학, 천체학과 물리학, 그리고 영적 신비주의에서 A.D.325년 니케아 공회의를 전후한 성서의 정경화에서 배제된 외경(外經)을 둘러싼 신학의 갈등, 첨단 장비로 무장한 현대의 고고학에 이를 정도로 상상의 공간이 무한히 확장되고 있다. 게다가 현재와 과거의 시간을 오가면서 사건의 진실로 다가가게 하는 치밀한 플롯과 작품 곳곳에 쌓인 수수께끼들의 파편을 하나의 유기적인 서사로 엮어나가며 최고의 지적흥분을 불러오는 재미는 그야말로 과학 스릴러의 정수를 보여준다.

 ‘빛의 천사’‘루시퍼?’, 루시퍼는 타락한 천사, 아니 사탄, 악의 화신인가? 그 존재의 의미는 진정 무엇인가?

노르웨이 오슬로국립대학 고고학 조교수인‘비외른 벨토’는 키예프의 수도원 큐레이터로부터 외경과 관련된 한 필사본의 연구의뢰를 받고, 내키지 않는 비밀유출을 돕지만, 곧 큐레이터의 사망 소식을 접하게 된다. 66개의 촛불에 에워싸인 채 피한방울 남지 않은 알몸의 시신으로 발견 된 것이다. 알 수 없는 이단(크리스트교 입장에서 보면)의 제의(祭儀)를 행한 것으로 보이는 흔적들. 그리곤 공동연구를 하기로 했던 동료마저 동일한 형태로 살해되고, 이를 돕기로 했던 프랑스의 고문서연구자인 여성까지 연이어 人身供犧의 희생자로 발견된다.   


 점차 죄어오는 죽음의 그림자가 벨토에게 다가오고, 아이슬란드의 한 연구소에 의문의 설형문자로 써진 필사본의 해독을 맡기고는 살해자들의 연고를 추적하는 과정에서 네덜란드에 은둔하고 있는 사탄 연구자의 요청으로 로마로 향하게 된다. 소설은 여기서 불신과 믿음에서 갈등하는 벨토를 통해, 믿음에는 엄청난 용기가 필요하다는 의외의 진실을 설득력 있게 펼쳐나가는데, 바로 벨토의 손에 들어온 「루시퍼의 복음」의 필사본을 건네줄 것을 요구하는 서로 다른 조직과 마주하게 된다. 양 쪽 모두 인류의 종말을 구원하기 위해 필히 자신들이 이 필사본을 가져야 한다는 당위를 주장한다. 무엇이 인류의 영속을 위한 진정한 행위인지를 알 수 없을 때, 선과 악은 어떻게 구별할 수 있는 것일까?

일명‘루시퍼 프로젝트’의 완결을 위해 미국의 정보기관부터 고고학, 물리학, 우주천제학, 생물학, 신학의 인사들이 망라되어 구성된 비밀 조직으로부터 벨토 자신이 가지고 있는 필사본이 세 부분으로 분리된 루시퍼 복음의 마지막 부분임을 알게 된다. 사탄을 숭배하는‘드라큘라 기사단’의 죽음을 무릅쓴 필사본을 향한 무서운 집념을 피해, 루시퍼의 진실로 한걸음씩 접근하는 과정의 전율이 아찔하다. 결국 <모세의 오경>이 되었든, <에스마엘 서>나, <요한 계시록>등 신앙의 중요한 바탕은 항상 지구의 종말론에 이르는데, 작품 속에서 지적하듯이 “종말의 개념 없이는 존재의 영적 정화는 물론 삶의 목적이나 의미조차 찾기 힘들기에”, 다시 말해서 종말의 날을 어떻게 맞이하느냐의 문제가 종교의 궁극적 목적이라고 할 수도 있기에 그 진실에 대한 인간의 집요한 탐색은 불가피한 것인지도 모를 일이다.
작품은 나아가 상징적 표현인 성서의 문장들을 그대로의 의미로 해석하여 그 예언적 문장을 실현하려는 터무니없는 근본주의자들과 진정의 의미를 과학적 진실을 통해 규명하려는 집단과의 갈등으로 귀결시킨다. 물론 이라크의 사막 한 가운데, 알 힐라, 옛 우르지역에서 전설의 바벨탑 흔적인 지구라트(ziggurat)를 발굴함으로써 과학이 근본주의에 승리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소설의 결실은 그리 단순치가 않다.

지구 종말론의 실체는 무엇인가? 루시퍼의 복음에서 가리키고 있는 지구라트에 숨겨진 진실이란 무엇인가? 최초의 인간, 인간의 기원은 어떤 것인가? 날개달린 하늘에서 내려온 빛의 천사, 그들은 누구인가? 이 모든 것을 밝혀낸다. 구약에서부터 길가메시이야기, 고대문서들에 등장하는 거인족, ‘네피림’의 존재는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가? 200명의 천사가 빛과 함께 하늘에서 내려왔다는 구약의 말은 진정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하마르게돈, 그리고 아마겟돈이라고까지 의미를 오도한 ‘하르가-메-기도-돔’의 진짜 의미, “지구로 되돌아온다.”는 말의 진의는 무엇인가? 마침내 현대과학이 파헤친 진실은“신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창조론”을 만들어 낸다. “우주에서 온 손님, 오우하(Ouah)”, 여전히 미흡한 진화론의 인류 발생학에 대한 답으로서 이 뜬금없는 듯한 과학적 상상력은 꽤나 설득력을 갖는다. 만약 「루시퍼의 복음」에서 말하는 1,640,000일 후에 되돌아온다는 그 누군가의 말을 신뢰한다면 2012년에서 2024년 사이에 빛과 함께 나타나는 그들을 기다려 볼 일이다. 고고학을 비롯한 다채로운 지적도구들, 진정 호감을 가지고 읽어 볼 작품이라 추천하고 싶은 작품이다. 인류의 기원과 종교에 관한 정말의 탁월한 기획이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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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웨덴 장르 소설의 대가, 헤닝 만켈의 신작 [이탈리아 구두]
이탈리아 구두
헤닝 만켈 지음, 전은경 옮김 / 뮤진트리 / 201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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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은 가을 석양이 질 무렵 낙엽을 흩날리는 을씨년스런 바람같은 소설이다. 가끔은 초로(初老)의 내 모습을 그려보기도 하는데, 인적 없는 숲 속 어딘가에 또는 외딴섬 그 어느 곳에서 책을 읽고 글을 쓰며, 느릿하게 산책을 하며 조용히 여생을 보내는 그런 그림이다. 사실 사냥꾼의 대열에서 이탈하거나 내쳐지지 않기 위해 버둥거린 세월에 대한 보상인 것인데, 헤닝 만켈의 이 소설 속 66세의 주인공 ‘프레드리크 벨린’의 모습과 삶의 우연을 보면 그렇지도 않은 모양이다.
환자의 멀쩡한 팔을 절단하는 의료사고로 외과의사를 그만두고 북구의 외딴섬에 자신만의 방호벽을 꼭꼭 둘러치고 은둔의 생활을 하는 이 초로의 남자를 보면서 나를 투영하고, 어쩜 비슷한 인물이 스웨덴의 차가운 바닷가 섬에도 있구나 하는 위안을 가졌는지도 모르겠다.

“방향 감각을 모두 상실한 어떤 삶에 대한 연대기”를 쓴다는 벨린의 간결한 일기는 기껏“사라지는 황여새와 점점 쇠약해지는 반려 동물들에 대한 내용”뿐이듯이, 내용 없는 인생을 살아간다는 사실을 매일 기억나게 하기 때문에 기록을 남기는 행위를 하는 남자를 읽다보면 와락 그 인생의 이해에 대한 공감으로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전혀 관심이 없는 일에 대해 수다를 떨고 자기가 상상한 질병을 진단하라고 요구”하는 우편배달원‘얀손’만이 외딴섬을 찾는 유일한 사람인 그런 일상. 이 고적한 풍경에 취해 있다가 주인공만큼이나 나도 놀란다. 이 남자에게 너무 이입되어서였던 모양인데, 꽝꽝 얼어붙은 빙해위에 쓰러져 있는 여자의 발견은 시선을 피하고 싶어하는 그의 행동만으로 많은 것을 전달한다.

거의 40년 만에 나타난 여자. 그 누구보다 사랑했던 여자였으나 배신당할까봐, 통제할 수없는 감정에 휘둘리고, 구속되는 것이 두려워 비겁하게 먼저 배신하고 삶에서 지워버린 여자,‘하리에트 회른펠트’가 찾아왔다. 이제 외딴섬에 설치한 결코 견고할 수 없는 남자의 방호벽은 조금씩 허물어지기 시작한다. 어둠이 시작하는 경계에 아주 가까이 다가간 불치병을 안은 노년의 여인이 그가 배신하고 떠난 지 40년이 흐른 뒤 앞에 나타나 그녀가 살면서 들은 것 중 가장 아름다운 약속이었던‘노를란드 숲 속 작은 연못’에 가자던 약속을 지켜달라고 한다.

북구의 침엽수들이 울창한 겨울 숲길을 달리는 두 사람의 여정은 뉘엿뉘엿 기우는 황혼의 빛과 닮아있다. 침묵하는 겨울, 주위도 그네들의 내면까지도. 자신을 걸어 잠그고 거짓을 말하는 배반한 남자, 베른을 향한 하리에트의 “사실은 하나도 없어. 당신은 스스로 어떻게 견디지?”하는 질책은 고립과 외로움의 길을 선택하고 자신을 가둬놓은 외딴섬을 돌이켜보게 한다.
40년 전 젊은 연인이 한 약속, 돌고 돌아 숲 속 작은 연못, 노년이 되어서야 비로소 이행된 약속, 그리곤 하리에트가 요구하는 40년의 이자(利子), ‘에움길’의 요구로 성년이 된 베른의 딸,‘루이제’의 존재를 알려 준다. 긴긴 세월을 돌아 가족을 얻게 된 남자, 적막함에 스웨덴의 숲 속에 눌러앉은 구두공‘자코메티’의 삶의 연륜에서 묻어나는 “자기 안에서도 길을 잃곤”하는 우리네가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내내 그 어떤 삶의 귀착점으로 가고 있는 중이라는 말은 아마 인생이란‘그러함’이란 경외처럼 다가온다. 문득 사람이 서로 가까이 있는 이유는 헤어지기 위해서라는 이 엄연한 말의 그 밀도높은 진실이 이처럼 깊이있게 느껴진 적이 없었다는 생각이 든다. 이 작품은 이렇게 삶의 의미를 지독하게 반추하게 한다.

하리에트와 루이제와의 만남이란 삶과 죽음의 의미에 대한 새로운 성찰과 시선이 되어, 마침내 자신을 고립케 한 껍질, 팔이 절단된 여성,‘앙네스 클라르스트룀’을 찾아간다. 그곳에서 베른은 자기가 속한 곳에서 환영받지 못하는 아이들, 버림받고, 분노와 증오에 포획된 아이들을 보게되고, 앙네스의 보호를 받던 소녀의 느닷없는 외딴섬 방문과 자살은 비로소 관계와 소통, 타자의 외로움에 대한 이해로서 숨고, 회피하던 자신으로부터 벗어나게 한다. 사랑하는 이들, 베른과 루이제의 곁에서 임종을 원하는 하리에트를 위한 마지막 파티, 그 소박한 모임이 진정 인생에서 가장‘황홀한 아름다움의 시간’임을 말 할 때, 그리고 빈 술병 속의 메모에 남겨진 하리에트의 “우리 여기까지 왔어.”라는 짧은 문장은 인생이란 이러한 것이라는 뭉클한 진실과 마주하게 한다. 인생이란 외로울 수밖에 없는 것... ‘카라바조’를 좋아하는 딸아이 루이제를 기다리며, 개미탑을 걷어내는 베른의 모습으로 그렇지 않은 것이라고 작품은 끝내려고 하지만 “인생은 심연 위에 걸쳐진 가느다란 나뭇가지”라는 표현에 마음이 더 다가가기만 한다. 때 묻지 않은 숲 속 진실의 언어들을 조용히 귀 기울여 들은 느낌이다. 그리고 내 일천한 어휘력으로 담아낼 수 없는 너무도 아름다운 소설이었다는 소중한 감성을 남기게 한다. 사랑하는 이들에게 이 가을 꼭 읽어보라고 추천하고픈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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