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수를 불러일으키는 공장 - 기억, 시간 그리고 나이
다우어 드라이스마 지음, 권세훈 옮김 / 에코리브르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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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다는 것, 그리고 나이를 들어가고 인생의 많은 시기가 노년의 삶이라는 것에 대해 생각하는 시간이 많아지고 있다. 이즈음에 중년이란 그럴듯한 시기를 지나 초로의 삶을 그려보기 시작해서 때문일 터이다. 심리적, 신경생리학적 배경이 이 저술의 근간(根幹)이고, 그래서 정신의학적인 조언과 나이듦에 대한 성찰을 보여주고 있지만, 내겐 기억과 시간의 문학적이고 철학적이기까지 한 저자의 담론에 더욱 매료되었다고 하여야겠다. 아마 삶이란, 아니 내 존재에 대한 의미가 시간의 인식과 함께하고 있다는 이해에서 시작되기 때문이며, 그 가운데 불현듯 과거로 연결되는 추억들에 대한 감상적 기운 탓이기도 할 것이다.

지금 어떤 것을 추억한다는 것은 “추억 속에서 오늘 바라본 예전의 자아가 나타날 뿐만 아니라 추억하는 순간의 감정과 생각의 일부”일 것이다. 이처럼 모든 추억은 시간 속에 존재하는 두 극 사이의 접촉을 의미한다. 나이 들어 남은 미래가 짧아지고, 그래서 시선을 과거로 향하게 하는 것은 죽음에 대한 불안한 연결, 즉 현존재에서 기인한 불편한 측면에서 잠시 벗어나게 만드는 무의식적인 메커니즘이라는 설명에 수긍하게 된다.
부쩍 과거의 이야기로 수다스러워진 부모님을 대하면서, 또한 자식들이 마지막으로 찾아 온 시간을 훌쩍 먼 시간으로 이해하는 모습처럼 시간의 흐름과 반대 방향으로 인식을 작동시키는 그 분들의 세상보기를 내 아이들이 20대를 훌쩍 넘기고서야 이해하는 것은 어느새 인생의 계단에서 정점을 찍었다는 자각에서 인지도 모르겠다.

‘늙은 몸’이 섭생, 위생, 보살핌을 통해 어느 때보다 잘 보존되고, 노인들이 오늘 만큼 건강한 시대도 없을 것이며, 노년기가 인생의 어떤 시기보다 길어졌다. 그럼에도 우린 노인, 노년을 말하기를 주저한다. 왠지 방어하고 거리를 두고 싶은 그 시기, 그 만큼“노년을 원래의 의미에 맞게 평가하는 것에 우린 어려움”을 겪는다. 여기엔 우리의 나이에 대한 이중적 태도가 잠자고 있기 때문인데, 대체로 늙음을 자신의 이야기로 말하지 않고 남의 이야기로 하는 모습이나, 세간의 노인을 위한 광고나 잡지, 책들에서 나이에 대한 암시를 피하는 현상에서 목격할 수 있다. 마치 노년은 현명함과 성숙한 인식을 품고 있는 인생의 단계처럼 수식하지만 쇠퇴와 질병, 우둔함과 탐욕스런 노인들이란 실체를 숨길수도 없다. 노년은 그러한 것이다. 자연스러움에 저항할수록 시선은 왜곡될 뿐이다. 이 저술은 이러한 노년의 그러함 중에서도 기억과 시간, 즉 망각에 대한 삶의 철학을 얘기한다.

나는 삶의 나이가 아직 노년에 이르지 않은 탓도 있겠지만 과거의 기억을 떠올리기도 쉽지 않을 뿐 아니라 어떤 선명한 추억도 그려내지 못한다. 그러나‘귄터 그라스’나 ‘올리버 색스’가 그들의 자서전에서 술회하고 있듯이 60세가 넘은 어느 시기에 문득 한 번도 나타나지 않았던 어린시기의 장면들이 뚜렷하게 되살아나기 시작했다고 한다.  이처럼 오래된 기억을 다시 떠오르게 하는 것은 무엇일까? 하는 것이 이 저술의 주요 논제라 할 수 있다.  이것을‘망각의 역현상 효과’라 한다. 노년의 시기에 최근의 사건이나 기억은 흐릿한 반면 오히려 과거의 어린 시절이 선명하게 기억되는 현상이다. “노인에게 미래는 확정적인 불가능한 것들의 합”이며, 내적 시선은 그 어느 시기보다 훨씬 예리해진다. 또한 회고는 노인들이 현재의 요구들에서 벗어나게 만들며, 바로 지금 급박하게 필요한 인지활동의 중단을 촉구한다. 그래서 현재와 불편한 충돌을 회피하게 한다. 그 거북한 죽음의 연결이라는 긴장을 피하고 과거의 행복으로 돌아가게 하는 이 자연의 메커니즘에 숭엄함을 느끼게 된다.

그럼 왜 과거의 행복하고 선명한 기억들이 청소년이나 청년기의 추억에 집중되는 것일까? 기억과 집중력 같은 인지능력은 청년기와 성년기에 최상의 상태에 이른다고 한다. 즉, 이 시기에 체험한 것은 이후 삶에서 일어날 일보다 저장하기에 더 좋은 기회를 갖게 되며, 더 나은 조건에서 저장될 수 있어 나중에 추억으로 더 자주 떠오르게 된다는 것이다. 더구나 자신의 시대를 대표하는 영화나 자신의 삶을 변화시킨‘결정적인 책’역시 우리의 인생에서 결정적인 시기와 관련되는 20대를 전후하고 있으며, 이 시기는 바로‘처음으로’라는 삶에서의 충격적인 기억들이 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까닭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망각의 역현상이 다른 기억력이 감퇴하는 시기에 부상하여, 접근이 허용되지 않았던 추억들이 돌아온다는 점은 얄궂은 당혹감과 신비로움을 동시에 느끼게 한다. 봉인되었던 시간이 진정 필요한 삶의 시기에 열린다는 이 자연의 경외는 감동적이기까지 하다.

사실 내게 있어서 이 저술은 기억과 시간에 대한 깨달음으로서 중요한 영감들을 제공하고 있지만, 여기에는 보다 풍부한 지적영역들이 있다. 노령화사회에 도달한 오늘의 세계에서 약삭빠른 시장의 기만과 허위도 주시하고 있으며, 기억에 대한 사회학적, 문학적 성찰들은 물론 나이의 심리학적, 인구통계학적 담론들을 통한 예리한 인문학적 메타포들로 삶에 대한 투시력을 제고시켜주기도 한다. 한편‘제발트’의 『이민자』들을 상기시키는 시간과 기억이 만들어내는‘향수(Nostalgia)’에 대한 사회학적 성찰의 이야기는 한편의 서사시이자 지구화로 인한 인류의 유목민적 통증에 대한 연민과 문제의식을 자극하기도 한다.

“희망은 미래를, 추억은 과거를 향한다. 젊은이들에게 미래는 길고 과거는 짧다. 그들은 희망 속에 살아간다.” 그러나 “노인은 희망보다는 추억 속에 산다. 과거를 기억함으로써 기쁨을 느끼기 때문이다.”망각의 자연스러움, 삶의 시간과 추억에 대한 그 어느 저술보다 안온한 느낌을 갖게 하여주는 저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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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유럽의 지성사회를 휘저었던 여성이다 보니‘조르주 상드(1804~1876)’를 따라다니는 지적이고 정신적인 여성이라는 후대의 평가를 위선적으로 보이게 하는 원색적인 수식어와 호칭이 만만치 않다. 사회제도와 규범의 위에 군림한 여자, 위선을 거부하고 남녀평등을 주장했던 혁명가로서의 여성을 향한 독설은 돈주앙에 비견되는 그녀의 남성편력 탓이긴 하지만 모욕적이기 조차 하다. ‘보들레르’는‘상드’를 향해 공중변소, 오물을 세척하는 배수구라고까지 모독하였다니 가히 전설적인 스캔들의 여왕소리도 점잖은 측에 속한다.

이러한 비난에도 무려 90여권의 소설을 출간하고 산문 및 서간집 등 250여 편에 이르는 저술활동을 하였다는 것은 매혹적이고 지적인 그녀의 환심을 얻지 못한 비뚤어진 남성들의 시기가 아니었나 하는 생각도 든다. ‘빅토르 위고’는 “사람들이 상드에 대해서 욕 할 때 상드를 더욱더 명예롭게 한다고 느꼈다.”고 했다니 사실 이를 뒷받침하는 증언이라 하여도 될 것이다.
상드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된 것은 그녀의 초기 소설중 하나인『렐리아』란 자전적 작품을 접하면서 부터라 고 할 수 있는데, 작품 속 인물 중 하나인‘스테니아’라는 젊은 시인의 사랑과 좌절을 보면서 당대 낭만주의 시인‘뮈세’를 떠 올리게 하였기 때문이다.

이루 헤아리고 거명하기가 버거울 정도로 상드의 연인은 수두룩하지만, 비록 1년 남짓의 짧은 시간일  망정 뮈세는 상드가 가장 사랑한 남자였다는 점에서 주목하게 된다. 산다는 것은 도취하는 것이고, “사랑한다는 것은 가슴 설레는 일이며, 행복입니다. 천국입니다. 아! 나는 맹세코 예술가의 생애를 살고 싶습니다. 나의 좌우명은 자유입니다.”라고 외칠 정도의 상드에게 6살 연하의 여위고 아름다운 금발의 물결치는 머리칼을 지닌 어린 시인은 그녀의 자유분방하고 열광적이며 야성적인 성격을 충족시키는 데 적절한 대상이었을 것이다.


뮈세는 실연 이후 여러 아름다운 밤의 시편과 상드와의 사랑의 고백서를 남겼는데, <세기아의 고백>이나  <추억>, <슬픔> 등은 이러한 배경을 가진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그럼 대체 상드의 어떠한 측면이 당대 예술과 지성계를 지배하던 남성들을 이토록 헤어나지 못하게 한 것인지 진한 호기심이 발동한다. “미덕과 고귀함은 없어도 사랑은 한다. 강하게, 전적으로 확고부동하게 사랑을 한다.”라는 그녀의 사랑에 대한 신조처럼 허위를 걷어내고 육체의 본능에 충실하며, 사회주의적이고 인도적인 그 분방한 나눔(?)의 정신 탓이었을까? 그러나 그녀의 작품을 보면 인간사를 거의 초월한 신적인 인간을 발견하게 되는데, 아마도 그녀가 발산하는 이러한 신비주의적 광휘, 경외를 느끼게 하는 이상의 숭고함에 매료되었다는 것이 더 옳은 이해가 될지도 모르겠다.

한편 그녀의 인생에서 두 번째로 중요한 남성이 있는데, 오늘날 우리가 감상하는 우수에 차고 때론 아름다운 전원의 햇살을 그리게 하는‘쇼팽’의 음악들이 상드의 사랑과 지원 속에서 창작되었다는 것은 예술에 대한 상드의 이해와 열정을 느끼게 한다. <빗방물 전주곡>이란 것이 있는데, 연인인 상드가 외출했다가 폭우로 강물이 불어나 낡은 마차로 건너다보니 늦게 돌아오게 되었는데, 이를 모르는 쇼팽은 상드가 자신을 버렸다는 상실감으로 눈물을 흘리면서 반미치광이 상태가 되어 연주한 창작이라 하니, 사랑이란 이 착란적 두뇌조작이 없었다면 인간사란 정말 아무 즐거움도 없는 무미건조한 것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도 해보게 된다.

<전원 교향곡>, <야상곡>등 주옥같은 쇼팽의 연주곡들이 모두 상드의 치마폭에서 나왔으니, 과연 보들레르의 독설은 접근조차 하지 못했던 못난 남자의 갈망이란 역설에 불과한 것이 아니었을까?...
그, 남자를 좋아하던 상드가 쇼팽의 예술을 위해 금욕적 생활까지 했다니 평범한 이성으로는 이해하기 쉽지 않은 여성임에는 분명했던 것 같다.
‘나는 사랑한다.’그리고 나의 좌우명은‘자유’라는 신조를 정말 생의 말년까지 지켜나간 그녀의 남성 편력이 사실 혀를 내두르게 하지만 말이다.

그녀의 작품은 대개 4부분의 시대로 분류되는 듯하다. 1832년~1838년까지 주로 사회적 편견이나 인습에 항의하고 자유로운 정열의 권리를 주장한 초기작품으로『발랑틴』,『앵디아나』,『렐리아』, 『앙드레』가 있으며, 1838년~1846년에 이르는 사회주의 소설로서『프랑스여행의 동료』,『오라스』, 『앙지보의 방앗간 주인』, 『앙투완씨의 죄』,『칠현금』등이 알려져 있다. 


그리고 1844년~1853년의 시기에는 『잔』,『마의 늪』, 『사랑의 요정』, 『피리부는 사람들』과 같은 전원 소설을 주로 발표하였으며, 1853년 이후의 말년에는 자서전과 서간집, 『마지막 사랑』, 『타마리스』등 연애모험소설들을 쓰면서 초기의 작품세계로 회귀한 양상을 보인다. 아마 다음의 구절은 그녀를 대변하는 문장이 될지도 모르겠다. “여인은 사랑의 찬가를 요구하기 전에 숭고한 영감이 고무시켜야 되는 민감한 리라와 같은 것이다.”(『렐리아』초판본에서 삭제된 문장 中”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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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라는 자연의 미래 - 자유주의적 우생학 비판 나남신서 553
위르겐 하버마스 지음, 장은주 옮김 / 나남출판 / 200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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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공학이라는 생명 자연에 대한 기술화가 점점 인간이라는 자연의 본성에 간섭하고 개입하는 상황으로 치닫고 있다. 배아 줄기세포를 도구적으로 이해해도 좋다는 공리주의적 인증이 의학적 정당화와 경제적 정당화라는 탐욕의 동력에 기초하여 우리의 도덕적 감수성을 당황하게 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인간이라는 종의 생명윤리에 대한 이러한 논의는 아무리 반복한다 해도 거듭 해야 하는 긴 호흡이 필요한 규범적 해명과정을 요구한다. 이것은 인간 상호간의 대칭적인 책임 묻기의 관계를 제한하고, 인류 전체의 자기이해를 건드리는 본원적인 문제이기 때문이다.

근간에 소개된‘마이클 샌델’은 그의 저술,『생명의 윤리를 말하다』에서 이러한 생명공학 기술을 “인간의 미래를 불투명한 어둠으로 몰아넣고 있다”고 말하면서, “불공정성의 고착화를 내재하는”“이기적 경쟁의 논리가 만들어내는 불평등이라는 프로메테우스 적 욕구”라고 비판하고, 정복과 통제의 가치로 유전학 기술을 사용하려는 계층의 야욕이라는 관점을 보여주었다. 이는 생명공학기술을 경제-정치적 자본의 불평등을 심화시킨다는 공정성의 개념에서 접근한 시각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하버마스’의 이 저술은 보다 근원적인 인간의 도덕성 그 자체에 대한 관점, 즉 생명의 객체화, 대상화, 사물화(생산물화)로 인한 인간 고유의 정체성 변질, 인간 종(種)의 윤리적 자기이해를 허물어 버리는 자유주의 우생학에 대한 비판을 기초로하여 더 이상 자기 삶의 역사의 고유한 저자로서의 주체성을 상실하게 되는 인간 도덕의식의 변질 또는 파괴에 대한 성찰이라 할 수 있다.

생명공학 기술자들과 이들의 투자자, 그리고 자기이익을 고려한 권력의 타협은 유전적 질병들을 유전자에 대한 교정적 간섭을 통해 극복할 수 있을 것이라는 전능한 줄기세포에 대한 연구를 지지한다. 그래서‘착상전 유전자 검사(PID)’, ‘배아에 대해 아직 미숙한 단계에서 예방차원의 유전학적 검사’와 같은 우생학적 자유주의를 주장한다. 다시 말해서, 배아를 사전에 검사하여 성을 구별하고, 재능과 신체적 형질이 부모의 의도된 설계에 부합하는가에 따라 살릴 것인가, 죽일 것인가를 결정하고, 자의적인 유전자 변형을 가하여 기대하는 소질의 형질로 디자인하여 부모인 자신들의 욕망을 반영한 아이를 생산하겠다는 것이다. 이는 “일정한 조건을 만족시켜야 태어날 수 있다는 것이며, 유전적 검사이후에야 비로소 존재할 만 하다고 인정될 경우에 생산하겠다.”는 의미이다. 과연 이러한 행위가 인간 생명의 존엄성에 부합하는가?

이처럼 인간이 다른 인간을 기획할 수 있다는 전망에 우리는 경악하고, 직관적인 도덕적 감수성은 당황하지 않는가?  이는 우리의 가치척도의 바탕에 놓여있는 우연과 결정의 경계를 허문다. 인간 생명을 목적을 위하여 마음대로 해도 좋다는 얘기다. 이에 대해 생명공학기술자와 지지자들은“잘 정의된 심각한 유전병에 제한되는 경우라면 도덕적으로 허용하는 소극적 우생학”은 도덕성에 있어서 문제가 될 것이 없다고 반론을 제기한다. 


그러나 적극적 우생학과 소극적 우생학이라는 둘 사이의 경계가 개념적이고 실천적일 뿐만 아니라 경계가 유동적인 바로 그런 차원에서는 그의 넘나듦에 대한 모호한 기준이 말장난에 불과한 것임을 우리들은 알고 있다. PID결과 유전적 질병의 소견이 예상된다고 배아세포를 폐기해버려도 된다는, 즉 삶과 죽음의 결정이 잠재적 소질이라는 척도에 따라 이루어진다는 생각은 엽기적이기까지 하지 않은가? 도덕적으로 날카로운 경계선을 설정하려는 모든 의도는 자의적일 수밖에 없다. “인간의 생명을 일단 한 번 도구화하기 시작한 사람, 살 가치가 있는 것과 살 가치가 없는 것을 구분하기 시작한 사람은 정지 없는 궤도를 달리게 된다.”

부모라는 디자이너가 자기의 의도에 맞춰, 소위 목적하는 질적 수준에 맞춰 생산한 인간은 대체 자연발생적인 우연과 결정에 의해 출생한 인간들과 어떤 차이가 있을 수 있겠는가? 자연발생적인 것과 만들어진 것 사이의“범주차이가 없어진 인간사회의 규범은 분명 변화”되어야만 할 것이다. 인간 자연의 기술화는 윤리적 자기이해를 변화시킨다. 만들어진 자가 자신의 삶의 저자이자 도덕 공동체의 평등한 권리를 지닌 성원이라 이해 할 수 있겠는가? “변화된 자기이해는 자율적으로 살면서 책임 있게 행위 하는 인격체란 규범적 자기이해와는 더 이상 일치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들은 스스로를 인간으로서 동일시하고 다른 생명체와 구분해주는 직관적인 자기이해를 가지고 있다. 염기서열의 예측 불가능한 결합으로 귀결되었던‘우연적 생식과정의 조작불가능성’을 마음대로 조작하여 자기 도구화와 자기 최적화로 생산된 종을 인격의 불가침성과 인격의 자연발생적 신체적 구현양식의 조작 불가능성에 의해 출생한 우리 인간 종과의 사이에서 눈에 띄지 않는 규범적 협력관계가 제대로 작동 할 수 있을 것인가? 


배양된 난세포의 게놈에 대한 간섭 여부를 부모의 판단에 맡기는 자유주의 우생학 지지자들은 출산의 자유, 부모의 권리라는 고전적 자유주의에 입각하여 국가에 맞서 개인이 누려야 할 기본권의 물질적 확대가 무엇이 문제냐고 항변한다. 자녀의 유전적 소질의 조합은 부모에게 위임되는 것이 자명한 일이라고 말이다. 그러나 생명공학이 암묵적으로 우리들의 유전 존재라는 정체성을 허물고 있는 지금, 전인격적 인간 생명을 단순히 손익계산에 내맡기고, 주관적 권리를 보호할 수 없는 태어나지 않은 생명을 조작, 통제, 폐기하는 것은 공적자유의 권리에 배치된다


어느 날 자식의 바람직한 유전적 소질을 만들어 낼 수 있는 생산물로 여기고 그 생산물을 위해 자식의 선호에 따라 적절한 디자인을 기획하게 되는 순간, 결과물에 대한 지배권을 행사하게 된다. 결코 사람에게 행사되어서는 안 되는 것으로 간주되었던 그런 지배 말이다. 인격과 사물의 경계를 허문 결과, 게놈의 생산자를 고려하면서 사는 삶, 더 이상 인간 자신이 자신의 고유한 저자가 아닌 삶은 자기의식과 책임의 대칭적 균형을 상실케 한다.

급기야는 생명공학 기술자, 자유주의 우생학 지지자들은 도덕적 냉소를 보인다. 우리가 왜 도덕적이기를 원해야 하는가? 고 말이다. 이들 말대로 우리 인간들이 도덕적 존중을 확대해 오지 않았다면 , 도덕적 죄악이 아무런 부정적 감정도 불러일으키지 않았다면, 인간이 살고 있는 우주는 어떤 모습일까? 견디기 힘든 곳이 되었을 것이다.“도덕적 진공상태에서의 삶, 도대체 도덕적 냉소주의가 무엇인지조차 모르는 그런 삶의 형식 안에서 삶은 아마도 살 만한 가치가 없을 것이다.”

인간 생명은 목적을 위해, 도구로 사용되는 사물이 되어서는 안 된다. 인간자연의 기술화가 이와 같이 외적 자연과 내적 자연의 경계를 허물어버리는 순간, 인간의 태도는 변화되어야 한다. 새로운 종의 정의와‘윤리적 신세계’가 성립되어야 하는 것이다. 우리는 자신의 삶에 대해 책임을 진다는 암묵적 전제에서 출발한다.‘자신으로 있을 수 있음’, 즉 “자신의 삶의 기획을 성공시키는 데 무한한 관심에 의해 규정되고 있는 윤리적 자기반성자기선택의 형식”을 말이다. 


인간을 사물화시키고 구속시키며 생명의 죽음과 삶을 자의적으로 결정하겠다는 자유주의 우생학은 그래서 인류 전체의 자기이해와 규범적 동의를 요구하는 것이다. 유전자에 교정적 간섭을 당연시하려는 생명공학 기술, 아니 인류의 자기 도구화에 대한 탈형이상학적 사유의 최고의 저술이라 할 수 있다. 여러 도덕론자들의 관점에서가 아니라 자기 의식적 실존의 단독자인 인간이란 종의 근원에서 고찰한 숭엄한 생명윤리 고찰의 최고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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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를린 알렉산더 광장 1 세계문학의 숲 1
알프레트 되블린 지음, 안인희 옮김 / 시공사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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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황폐함, 혼란과 불안에 유동하는 인간들, 전환기의 이념적 갈등이란 배경 속에서 안착하지 못하고 부유하는 한 인물을 통해 당대의 일상성에 대한 비루함을 시시콜콜 조망하는 작품이다. 베를린 중심부와 동부에서 그렇고 그런 인물들의 흔적을 뒤쫓고, 공적, 사적 사건들이 무질서하게 망라되어 탐색된다. 자기이익과 물질주의, 산업화와 상업화로 갈수록 비대해지고 혼탁해지는 도시의 혼돈과 메마름, 그리고 전후(戰後) 사회주의의 실패와 나치 파시즘의 대두가 교차하는 시대의 클로즈업은 보다 거시적인 역사의 당위성을 생각게도 한다.

이러한 시대의 거칠고 조악한 조명에 못지않게 이 작품을 흥미롭게 대하게 되는 것은 내면, 즉 인물의 심적인 흐름을 통해 피폐한 세상의 단면들과 그로인해 더욱 경외감을 갖게 하는 인간성의 명징한 은근한 회복이라 할 수 있다. 연인 ‘이다’를 살해하고 4년의 수감생활 끝에 대도시 베를린의 사람과 건물 숲에 묻히는 보잘것없는 ‘비버코프 프란츠’ 란 인물의 배경에도 불구하고, 인간 본성에 대한 이해의 직관적 공감을 상실하고 있지 않다는데 매력을 느끼게 한다는 것이다.
작품 초반의 출옥 후 낯설어진 도시의 일원이 된다는 것에 대한 두려움에 당황하는 인물, 그리고 고통스러워하는 타인에 연민을 보이는 유대인의 호의와 삶의 의지를 일깨우는 일화는 사실 잃어버려 알지 못하는 오늘의 감성 탓으로 그 인간적 관심과 동정이 조금 기이하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점차 프란츠란 인물에 내 자신의 대입이 자연스러워지고, 지극히 정당하고 당연한 모습으로 비춰지는 것처럼 시대를 건너뛰는 보편적 공감으로 몰입하게 된다.

시민에게 의식주의 안정적 보장을 해주지 못하는 사회주의, 이것은 이념의 이론적이고 진실성과는 무관한 생활고에 시달리는 사람들에게 어떤 강요도, 지지도 취약하게 한다. 교할하고도 민활하게 이러한 인식의 공백을 침투하는 것은 그럴듯한 물질적 자기만족의 체험이고, 이는 나치의 파시즘이 당시 독일인들에게 쉽게 정착할 수 있었던 이유가 될 것이다. 나치당 기관지를 가판(街販)하면서 살아가는 프란츠에게는 사회주의자들의 공허한 구호보다 이것이 실질적인 것으로 이해된다. 그러나 이들 이념정당과 지배권력 자체에는 어떤 믿음도 없음을 간접적으로 시사한다. “우린 전쟁터(1차 대전)에서 피를 흘렸어요. 사람들은 우리더러 기다리라고 하지요. 무엇이든 지들 하고 싶은 대로요.” 

 

한편, 소, 돼지 등 가축들의 도축장면의 여과 없는 사실적 묘사에서부터, 상인조합과 부패한 지방권력의 힘겨루기, 당대 여성들에 대한 성적착취, 사기와 도둑질이 만연하는 물질에 대한 비루하고 집요한 집착들, 신발 끈, 신문, 과일판매 등 도시 서민들의 생업수단들, 광고문구와 신문기사에 이르는 망라된 도시의 일상과 면모들이 그대로 열거되어, 있는 그대로의 현상을 나타내는 표현주의 기법은 당대를 상징하는 기계화, 산업화, 도시화, 이기적 물질주의화, 생명, 타자에 대한 무관심등의 폐해에 대한 말없는 저항을 보여준다. 이미 타락한 사회, - “로마도, 바빌론도, 니니베도 이렇게 망가졌고, ~ 中略 ~ 이들 도시들이 그 목적을 다했다는 걸 ~ 中略 ~ 이젠 새로운 도시들을 건설 ~ 中略 ~ 새것을 사야지, 그래야 세계가 살지.” - 구태여 어떠한 자기주장 없이도 붕괴되는 정신과 사회의 변화를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이 뚜렷한 주제를 포획하거나 병행하면서 흐르는 프란츠란 인물의 의식을 따라가는 것은 이 소설의 진정한 묘미이다. 활력도 없고 탈탈 말라버린 두뇌가 되어버렸다는 자각으로부터 시작해서 에로틱한 흥분을 제어하는 의학적 유비를 대입한 원시적 두려움의 묘사라든가, 떠나지 않는 죄의식으로 인한 “양심의 가책, 악몽, 불안한 잠, 통증” 에 대한 오이디프스적 은유, 추악하게 오염된 현실을 대치하는 구약의 절묘한 배치는 독서의 풍미를 더해준다.

세상은 살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는 프란츠의 치졸한 쾌락의 여지조차 인물의 됨됨이를 강화 한다. 죽인 연인의 언니를 찾아가 범하고, 자기의 생존에만 골몰하는 이기적이고 본능적이기만 한 인간이지만, 사기와 도둑질 같은 물질적 이기심에 대한 도덕적 혐오를 보이는 모순된 인간상에서 가치관의 혼란을 보게 된다. 비록 불규칙하고 작은 수입이지만 성실한 대가를 위해 생업에 종사하는 인물로서, 또한 여성을 단지 성적 도구로만 여기는 인간에 대한 교화를 뿌듯해하고, 자신을 기만하여 범죄에 개입케 한 인물들과 집단에 대한 반감까지 악의 유혹에 저항하지만 죽음으로 내모는 극단적 폭력에 버려지기까지 한다. 그럼에도 자신을 파괴하려한 인물들에 대한 복수를 관용으로 승화하여 자기 존재의 존엄성을 지키는 것, 즉 평화로운 삶의 희구를 하지만 자기의 범죄행동을 두려워하는 인간들은 은폐와 두려움의 해소를 위해 악을 멈추지 못한다. 아마 악의 관성(慣性)때문일 것인데, 이처럼 인간사회를 표현주의 방식으로 들여다보고 망라적 관찰자의 시점을 갖게 해주는 것은 이 소설의 특성이라 하여야 할 것이다. 그럼에도 이 소설은 독자에게 그리 친절한 작품은 아닌데, 감정이나 심리적 공감의 연결이 뚝뚝 끊어지고, 인간의 고통이나 슬픔, 즐거움이나 기쁨을 굳이 서술하지 않기 때문이다. 사실 이 때문에 초반에는 고생하는데, 조금만 더 나아가면 바로 이러한 기법덕택에 작품이 더욱 흥미롭고 즐거워지기까지 한다. 독일 표현주의의 대표적 걸작을 접한 지적 보상이 분명 있는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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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명
발레리 통 쿠옹 지음, 권윤진 옮김 / 비채 / 2010년 11월
평점 :
절판


쇼펜하우어가 『인생을 생각한다』에서 말하듯이 인간의 생애는 삶을 위한 고달픈 투쟁일까? 사람의 생애가 행복했다는 것은 적극적인 고통을 얼마나 적게 느꼈느냐가 척도라는 주장이 이젠 내 마음과 공명한다. 삶을 이어가기위해 비굴한 직업세계에서 전전긍긍하는 사람들, 부와 명예를 쥐었지만 가족을 지켜내지 못한 사람들, 죽음의 그림자가 가까이 다가왔음을 알게 되는 사람들, 이처럼 어떠한 상황에 처해있든 사람들에게는 고통의 다양한 모습들이 드리워져 있다. 마치 운명이란 것이 그렇게 계획되었다는 듯이 불가항력적으로 우리를 괴롭힌다. 꽤나 염세적으로 들릴지 모르겠지만 삶이란 기나긴 고통과 지나 간지도 모를 만큼의 짧은 순간의 행복, 그리고 권태로 이루어졌다는 말을 부정하기가 쉽지 않다.

소설은 각기 다른 인생길에서 괴로워하고 자학하면서, 그리고 배신당하고 버림받아 좌절하며 생의 의지가 시들어 버리는 사람들을 독립적으로 클로즈업해서 그들의 일상을 쫓는다. 옴니버스 형식을 차용하여 이 개개의 독립된 삶의 단면들이 조명되면서 우리의 모습과 닮은 고통의 실체를 마주하게 한다. 자신의 아이만큼은 최저임금에 시달리는 계층을 벗어나게 하기위해 고용주의 무례함과 욕설, 횡포에도 불구하고“십년을 귀머거리처럼, 장님처럼 굽실거리며” 삶에 몸부림치는 엄마 가장 마릴루가 있고, “자기 자신 만큼이나 타인을 멀리하는 자발적 고립자”의 삶을 선택한 78살의 명망과 부를 쌓아올린 건축사업가 알베르가 있다. 또한 인종에 대한 편견과 그러한 사회적 시선에 굴복하는 삶에 대한 회의에 신음하는 법률자문회사의 변호사인 프뤼당스와 영화감독이자 대학교수로서 세상의 인정을 받고 있는 톰의 실패한 가정과 환멸의 고통이 있다.


눈앞에 전개될 것이 뻔히 예상되는 상사와 고용주의 폭력적 언행과 자신의 수치심, 비굴의 역겨운 냄새를 인식하게 될 때, 부모로부터 버려져 냉대와 차별을 숙명처럼 안고 살아야 했던 고 고립감에 몸서리 칠 때, 사랑의 환희가 배신으로 한낱 환상이요, 꿈이고 착각임을 인정해야 할 때, 이렇듯 인생의 직접적 목적은 괴로움이란 것이 진리로 다가설 때 우리 사람들은 그렇게 운명 지어진 삶에 우리들의 의지를 내어줄 도리 밖에 없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렇듯 삶의 의지조차 훨훨 날아가 버릴 듯한 인생의 어느 순간에 세상은 가끔‘딸꾹’하며 행복을 뱉어내기도 하는 모양이다. 이 작품이 아름답고 고상하게 이해되는 것은 바로 섬세한 삶의 통찰과 진실한 언어들 때문으로 느껴지는데, 특히 등장인물들의 뚜렷한 성격묘사로 깊은 내면의 세계가 제시되고 그네들의 고뇌를 거쳐 표면화되어 세계와 인간의 본성을 분명히 드러내어 예술적 아름다움을 선사하고 있기에 그럴 것이다.

한편 소설은 얄궂을 정도로 재미있는 순환체계를 가지고 있는데, 이는 마치 도미노게임을 보고 있는 듯한 흥미로움에 젖어들게 한다. 삶을 포기하기위해 달려오는 지하철에 몸을 던진 남자, 그로인해 정체한 지하철, 이 우연한 사건은 지각으로, 그 지각은 사무실 폭파로부터 생명을 지키게 해주고, 이로 인해 누군가는 비굴하게 상사의 개나 산책시키는 수고를 피하게 해주지만, 이를 대신한 사람의 부자연스런 걸음은 사고를 만들어 낸다. 이 사고는 사랑의 실체를 깨닫게 해주고, 이로서 이들 낯선 사람들은‘병원’, 즉 치유의 장소에 모여든다. 이 상징적인 공간에 더해 행복의 중개자로서“사람들과 소통하는 재주, 타인에게 먼저 다가가서 손을 내밀고, 어린 아이의 낮은 어깨를 빌려주는”마릴루의 열세살 아들 폴로를 통해 고달픈 투쟁인 삶은 그렇지 않은 것이라고, 쇼펜하우어는 틀렸다고 속삭이기까지 한다.

그래, 가끔은 세상이 이처럼 딸꾹질을 해주어서 도저히 회피할 수 없을 것 만 같았던 고통으로부터 벗어나게 해주기도 할 터이다. 그래서 우리들은 삶의 희망을 애기하고, 인생의 낙관을 말하는지도 모르겠다. 선명하게 포착된 사람들의 묘사, 그리고 사건의 완벽한 흐름과 연결이 주제의식에 더해 이야기의 재미를 만끽하게 해주는 정말 잘 써진 예술작품이다. 내가 내 민 손을 스스럼없이 잡아줄 사람들을 찾아 보아야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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