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지코믹스 - 버트런드 러셀의 삶을 통해 보는 수학의 원리
아포스톨로스 독시아디스 & 크리스토스 H. 파파디미트리우 지음, 전대호 옮김, 알레코스 파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1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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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의 정신사는‘푸앙카레’와 ‘힐베르트’의 집합론으로 시작된 직관과 증명의 엄밀성의 갈등인‘칸토어 논쟁’이나, ‘러셀’과 ‘비트겐슈타인’또는 ‘괴델’의 확실성의 존부(存否)와 같이 이성과 감성의 대결, 추상과 구체의 투쟁의 역사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문득 인간 뇌의 두 반구라는 본래적 이원성이 우리의 정신에서 어떻게 갈등하고 투쟁하는지를 규명한‘이언 맥길크리스트’의 두뇌와 인간세상의 조응관계에 대한 통찰이 상기된다.

진리에 이르는 증명 가능한 명확한 길, 인간의 합리적 이성이 알아낼 수 없는 것은 없다는 신화, 수학적 표현으로 말한다면 공리와 같은 항진명제 조차 증명가능 할 것이라는 완전성에 대한 추구, 완전히 논리적으로 엄밀하고 정확하게 증명할 수 있다는 인간의 신념은 과연 도달 할 수 있는 것인가? 에 대한 20세기 초 인류 지성사(知性史)의 중심인물들이 집착했던 소위‘수학적 토대’에 대한 사상적 모험이자, 철학적이며 감성적 갈등의 문화사이다.

특히‘버트런드 러셀’이 『수학 원리』를 통해 그 근원적 해결을 찾으려 했던, 즉 “모든 수학적 진실을 증명할 수 있으리라”는 시도는 영원한 미완성으로 남고 마는데, 가장 단순, 명료, 정확하다는 수학조차 이러할 진대, 인간의 이성이 마치 세상 모든 것의 해법을 증명할 수 있으리라는 것은 사실 존재의 무지(無知) 이상이 되지 못할 것이다. 이처럼 만화형식의 소설로 구성된 『로지 코믹스: 러셀의 수학원리』라는 이 저술은 그리 호락호락한 저술이 아니다. 그러함에도 비유와 예시적 장면들 하나하나에 이의 대중적 이해를 위한 진지한 노력을 기울여 재미와 몰입으로 인류의 본성과 문화라는 가장 유서 깊은 정신사를 즐겁게 탐구하는 터전을 만들어 준다.

엄격한 조모(祖母)하에서의 성장과정과 러셀가의 정신병이라는 유산, 실제에 접근하는 유일한 길, 즉 ‘이성’의 존재를 깨우치게 해준 유클리드기하학에서부터, 생각을 기하학처럼 명확하게 하는 방법으로서‘라이프니츠’의 ‘추론 계산법’, 그리고 “논리학의 목표는 계산이 아니다. 실재를 닮은 모형을 만드는 것”이라는 ‘프레게 교수’의 <개념 표기법>이나, ‘게오르그 칸토어’의 무한에의 도전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과정을 통해 “항진명제(tautology, 恒眞命題)를 생산하는 기계의 존재를 정당화”하려는, 완전성을 향한 도전의 여정이 소개된다. 과연 “1+1=2”이라는 이 당연해 보이는 것을 우리는 증명해낼 수 있을까? 인간들이 그토록 자랑하는 합리적 이성을 뒷받침하는‘논리’란 것은 무엇일까? 그 실체를 보면 고작 “아는 것들을 결합해서 모르는 것에 도달하는 기술”일 뿐이다. 결국 인간 개체들이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의 한계를 벗어 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는‘비트겐슈타인’의 『논리철학 논고』의 핵심인 실재는“논리적으로 말할 수 없다”는 것과 닿는다. 또한 ‘괴델’의 그 유명한‘불완전성의 정리’인, “답이 없는 질문이 항상 존재 할 것!”이라는 산술의 이 필연적 불완전성과 이에 토대를 둔 모든 체계가 필연적으로 불완전하다는 증명은 수학의 토대에 대한 확고한 존재를 여지없이 허물어 내린다.

단순 명료, 개념화, 자기 확신과 자기인식 과잉이라는 이성의 집착, 다시 말해서 논리라는 추상적이고 범주화하며 일관성과 체계화하려는 자기 폐쇄적 독단성의 경향은 논리학의 거장들이 한결같이 정신병에 시달린 이유를 설명하게 한다. 추상과 구체를 알지 못하는, 현재라는 실재를 조각들로 맞추어 알아내려는 시도에는 이미 한계와 메울 수 없는 틈을 만든다. 대 사상가들의 실재와 같은 모델을 찾겠다는 이 무모한 모험, 토대를 찾겠다는 여정은 작자들의 말처럼 ‘미완성의 오디세이’가 될 수밖에 없는 생래적 한계를 가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생명 없는'사실(fact)', 정지한 불변의 지식의 누적이 생명성과 포용성, 변화하는 현재성을 담아 낼 길은 없는 것이다.

“확실성의 모범인 논리학과 수학에서도 완벽한 이성적 확실성에 도달할 수 없다면, 하물며 복잡하고 어지러운 인간사에서는 더 말할 것이 있겠는가?” 그렇다고 합리성과 이성의 추구가 그릇되다는 것은 결코 아니다. 중요한 건 최종 도착점이 아니라 길 그 자체인 것처럼 그 과정에서 우린 우리가 이해하지 못했던 새로운 진실들과 의외의 과실을 획득하기도 하고, 우리 자신을 보다 더 깊이 이해할 수 있게 도와준다.  아이스킬로스의 비극, <오레스테이아>에서 복수의 윤리와 고대의 신들이 여신 아테나의 민주적 투표라는 합리성으로 비합리적인 전쟁과 인종에 대한 증오, 꼬리에 꼬리를 무는 살인의 종식을 맺는 장면은 이성과 합리성의 추구는 인간사에 의미 있는 것임에 분명한 것이다.

이 저술은 러셀의 수학의 토대를 찾기 위한 필생의 도전과 더불어 당대를 대표하는 수학자, 논리학자, 철학자들의 사상과의 관계성을 흥미롭고 지적으로 그려낸 멋진 철학만화소설이다. 아마 이 한 권의 만화책을 읽게 되면 절로 가장 심오한 철학적 사색의 원천, 논리의 진실을 이해하는 지적 과실을 얻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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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풍전후
김원우 지음 / 강 / 201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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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리석은 것이 주제넘고 시건방지다.”라는‘뒤넘스럽다’는 형용사가 첫 페이지를 장식하는 소설이다. 이는 우리사회를 장악하고 있으며, 그 구성원인 한국인들의 어리석고 무식하고 허위와 기만에 찬 그 유치하고 저속한 생각과 행위, 또한 “저질스런 엘리트 의식”에 대한 역겨움일 것이다.
소설은 문학평론가로 보이는 한교수라는 이에게 은퇴한 임모교수(임중근이 본명)라는 이가 자신의 글쓰기에 대한 소회와 함께 이메일로 보내온 회고담을 축으로 하고 있는데, 여기에 담고 있는 엉터리이자 가짜인 인간들과 사회의 냉소뿐 아니라 이의 예외적 인물 일 수 없는 사람으로서 임모를 읽게 되는 것은 어떤 짜증나는 재미를 불러일으킨다.

한 때 지방대학 한국어문학과 선생이었던 노년인 은퇴자 술회의 서문격인 글에서 “머릿속에서 뱅글 뱅글 돌고 있건만 선뜻 불거져 나오지 않았다.”면서 자신의 건망실어증과의 싸움을 표현하는데, 이는 회고담이라는 기억의 진술에 대한 그 진실성의 한계인 것이며, 더구나 “자의의 생략과 삭제기능은 당대의 여러 막강한 이데올로기에 침윤된 흔적이므로 그 결과물은 어차피 생래적인 불구 상태를 못 면하게 됐는지 따위를 한목에 돌아보아야 할 벅찬 작업” 운운하지만, 꼭 막강한 이데올로기의 영향뿐 아니라 출생과 성장, 교육과정의 모든 의식, 무의식적 체험이라는 개별자만의 편벽한 식견이라는 것이 이미 불구를 피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어쨌거나 뒤넘스러운 것은 임모라는 인물도 마찬가지로 여겨진다는 것이다.

머릿속에서 뱅뱅 돌던지 혀끝에서 나오지 못하던지 간에‘키오스크(kiosk)’라는 단어를 떠올리지 못해 갑갑했던 기억을 말하면서, 이와 더불어‘로데오(rodeo)거리’처럼 그 본래의 의미를 이 땅에 엉성하고 조악하게 베끼는 엉터리 의식을 지적하면서, “모르고 있거나 알아도 별것 아닌 일로 여기고, 시끄러운 게 못마땅해서 거론하고 있지 않을 뿐”이라고 이 사회 구석구석에 흔하게 널린 조잡성을 짐짓 식자연하고 조소한다. 그러면서 자신의 청장년기인 70,80년대를 중심으로, “이 몸이 세파를, 그것도 여난(女難)과 국난(國難)과 교난(校難)을 어떻게 겪어냈는지를” 술회한다.

여난이란 것은 임모인 자신과 이웃학과 교수인 심모라는 여선생과의 불륜인데, 우발적이고 예상치 못한 돌발사건으로서의 '해프닝'으로 그럴듯하게 포장하여, 머리 벗겨진 쿠데타 군인이나 이에 부화뇌동하는 기회주의자들이 판을 치던 10.26에서 5.17로 이어지던 국난, 소위‘서울의 봄’이라는 가당치도 않던 시대를 희화화하고 있다. 이는 “꼴같잖은 지면을 노가다판의 웃돈 얹은 노임처럼 흔들어대며 아첨을 떨고 지랄”하더라는 어용언론과 그 세력, 그리고 파벌과 계파로 대변되는 대학 내의 줄타기와 무능력, 무기력, 치졸함이 더해져 사회지성이라는 것들의 교활함, 던적스러움으로 그 천박한 바닥을 드러내 보인다.

이러한 우리사회의 총체적 난맥상이 30~40년을 지난 지금은 조금 개선되었을까? “영수증도 없이 혈세 빨아먹는 정황도 대체로 일치”하는 깡패와 세무공무원의 닮은 두 직업에 대한 일화가 요즈음은 더욱 세련되어 좀체 추적키 어렵거나 거대한 정치권력집단에 연결되어있다는 신성불가침의 신화로 되었다는 것이 다르겠지만 말이다.
또한 여선생 심모와의 관계에서 그녀의 “교태와 교성은 일종의 포즈 같기만”하다고 하면서, “만부득이한 시늉? 우리 모두가 그렇게 살듯이, 그 말이지, 반강제적인 꾸밈? ”이라고 가짜와 허영, 위선, 엉터리로 가득한 이 사회와 구성원들의 은유로 확장되기도 하는데, 이는 글에 있어서 “안 읽히는 글들의 밑바탕에는 추수주의자 내지는 독학자의 그런 만용이나 얌심이 배어있다.”는 뒤넘스러움으로 떡칠을 한 한국인들, 한국의 지성이라는 것들이 그 사회의 조잡한 거짓을 반복하는 것으로 설명하고 있다.

게다가 허무맹랑하게도 뒤넘스러움으로 자신을 알지 못하는 이 엉터리 인간들의 사회를 시정하는 것으로 “사람을 만들게 아니라 제도가 기계처럼 굴러가도록 연구를 해보자 이것이오. 법으로 다스리기에는 사회적 경비도 많이 들고, 이미 그 결과가 형편없는 졸작임이 드러났으니 제도의 정직한 운행을 조금이라도 방해하는 사람이나 관행이나 도구나 기관 같은 제2의 제도가 있다면 즉석에서 감전사를 당하든가”라는 식으로 엉뚱한 진단과 제안을 하고 있다. 임모가 말하는 이러한 ‘제 2의 제도’, 즉 유무형의 장치들이란 것은 결국 인간들의 자의와 무수한 욕망들이 알지 못하는 사이에 무의지적으로 만들어내는 것이다. 사람이 바뀌지 않는데 장치가 변화할 수 있겠는가? 마치 자신만은 이 사회의 경계 밖에서 내려다보고 말하는 것 같은 소설 속의 임모나 한모뿐 아니라 이들처럼 객관적 지위에 있듯이 서술하고 있는 이 3인칭 관찰자 시점도 비위가 상하기는 마찬가지이다. 이것이 바로 뒤넘스러움 아니고 무엇인가? 이러한 의미에서 독자를 자극하는 이 소설적 장치는 성공이라 할 것이다. 끊임없이 반복되는 인간과 인간사회의 구조적 동일성에 대한 지적이 결코 새로운 것은 아니지만, 화자의 말처럼 부족한 인간의 언어, 아니 한글이란 우리말로 표현할 길 없는 얄궂은 현상들이 주석까지 달고서 형용되는 이 소설의 노고는 겸허함이란 미덕을 일깨워준다. 작가의 완강(頑剛)한 고집이 느껴지는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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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씨 비가
쑤퉁 지음, 허유영 옮김 / 비채 / 201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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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품은 그의 소설 『성북지대(城北地帶)』와 시대적, 공간적 배경이 거의 동일한데, ‘펑황’이란 이름의 여인이나, 마을의 중심축이 되는‘참죽나무길’까지 두 작품의 강한 유대감을 지니고 기댈 곳 없는 서민들의 삶의 소묘에서 우러나는 닮은 감성을 느끼게 한다.
그럼에도『화씨 비가』는 반전이 없어서 더욱 쓸쓸하고 울적하다. 맹랑하고 허황되게 삶의 긍정을 그려내야 한다는 도식에 충실한 쓰레기처럼 쏟아지는 대다수의 소설들에 이봐라! 하며 소시민의 대물림되는 가난과 절망을 처절하게 각인시켜준다. 순박함이 곧 무지함으로 인식되는 오늘에야 말할 것이 뭐 있겠는가마는 쑤퉁이 일관되게 귀를 기울이고 시선을 맞추는 배우지 못한 서민들의 목소리와 지친 몸뚱이들이 뿜어내는 삶의 해학은 그 어떤 숭고한 철학적 사유를 능가하는 가공되지 않은 진실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소설의 도입부는 그야말로 우문현답의 향연이다. 아내 펑황이 그녀의 근무 장소인 유류창고에서 목매 자살한 채 발견되자 감정의 혼란을 이겨내지 못하고 그 창고에 불을 지른 뒤 심문을 받는 남편,‘화진더우(화씨)’와 재판장과의 대화인데, 이름을 묻는 답변에 출신성분까지 곁들여 “지주 집안이 아니고 아주 떳떳한 하층 빈농이랍니다.”라고 부연 설명하는가하면, 방화의 이유를 대라는 질문에 “그걸 진짜 모르겠다는 거 아닙니까요. (...)정신이 홱 나가버린 겁니다.(...)누가 내 머릿속에 매듭을 꽁꽁 묶어놓은 것 같기도 하고, 숨이 목구멍에 턱 걸려서는 들이쉴 수도 내쉴 수도 없는 겁니다.”라는 정말의 대답이 형식적이고 거만한 제도의 사회에서는 이해할 수 없으며 요구되는 대답이 되지 못하는 것에서 그 소통의 단절이 얼마나 깊은가를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게다가 이성을 잠시 잃고 길길이 날뛰다보니 자신을 피하지 않고 눈에 들어오는 것이 하필 석유통이었고, 더구나 석유통에 불조심이라고 훈계하는 문자가 방화의 결정적이고 직접적 동기였다는 진술 또한 거짓 없는 사실이었을 것이다. 우린 여기서 피식하고 웃게 되지만 그 이상의 진실을 요구하는 사법제도가 오히려 진실을 벗어난 황당함이라 하여야 할 것이다.

결국은 예정된 판결결과에 대한 좌절과 절망으로 자살하고 마는 화진더우는 여동생과 네 딸, 그리고 아들 두후(獨虎)에 대한 걱정으로 저승으로 가지 못하고 이승과 저승사이인 구천에서 떠도는 궁상맞은 원혼이 된다. 어린 나이부터 생업을 위해 열심이었던 남자, 갓 스물에는 처자식이 있는 가장이 되어 혼자 세 사람 몫의 일을 해 댈 정도로 마소처럼 일한 사나이였지만 졸지에 고아가 된 다섯 남매의 아비로서 도움을 주지 못하는 혼령으로서의 그 애틋한 마음은 아이들을 떠나지 못하고 참죽나무길을 맴돈다.

“남들은 머리굴려 잘 먹고 사는데”, 그렇지 못한, 아니 배움이 없어 그럴 수 없는 사람의 푸념이 육두문자를 피할 길이 있을까? “여기가 어디라고 감히”라는 문장은 계급과 권위를 내포하는 말이다. 재판관이 하는 ‘여기가’하는 말은 웃기는 얘기가 아닌가. 여기가 뭐긴, 인민이 세금내서 지은 법정이고, 인민이 낸 세금으로 월급 받고 사는 인간들이 하찮은 권력을 왈가왈부하는 것이 더 웃기는 것 아닌가! 말이다. 그러나 세상이 어디 그런가. 배운 놈, 가진 놈이 행세하도록 짜여있는 세상에서 화진더우나 그의 자식들, 벽촌에 사는 일가들에게는 아득히 먼 세계인 것을. 시집도 안 간 둘째 딸‘신란’이 덜컥 애를 배서 돌아오자, 알량하게 남은 체면을 지키려고 뱃속의 시한폭탄을 지우다가 사망하는 장면이 있는데 무산계급혁명을 부르짖으며 처단 되었던 부르주아 지주의 여식이 오히려 의사가 되어 화씨 집안에 대한 복수로서 낙태수술 중 절명시키는 것이다. 이데올로기, 체제라는 것도 인간사회의 오래되고 끈질긴 탐욕의 본성과는 무관한 하물며 변할 수 있겠는가 하는 말이기도 하다.

이웃들은 고아가 되어버린 화씨 남매에 대한 보살핌은커녕 회피하고 학대당하는 대상들이 되어 천덕꾸러기로 자란다. 특히 아들 두후에 대한 자긍심을 가지고 내려다보는 망자인 화진더우의 기대와는 달리 탈선과 무위도식으로 누이들과 고모를 고통스럽게 하고 급기야는 동성애자로 화씨의 손을 잇는 사내와는 멀어지는가 하면, 신메이, 신주, 신쥐, 세 딸에 대한 걱정을 떨치지 못하고 안타까움에 겨워 따라다니지만 혼령이란 아무런 것도 그들에게 줄 수 없음을 자책하는 망령의 옹잘거림은 그 애절함을 증폭시키기만 한다. 성인이 되고 짝들을 찾아 혼인하고 또 아이들을 낳는 자식들의 세월과 함께, 화진더우와 펑황을 대신해 아이들을 어미처럼 돌본 진더우의 누이인 고모의 애처로운 죽음에 이르면 이들 화씨에 떠나지 않는 불행이 더해 그 쓸쓸함이 더욱 애달프고, 소시민의 삶이란 이런 것인가? 하고 괜스레 가슴이 아려온다. 세습되는 가난과 소외, 도움을 주지 못하는 어버이의 쓰라린 심정이 구천에서 길을 잃고 헤매는 화진더우와 그의 전용 하늘 당나귀의 눈물이 되어 뿌려지는 듯하다. 외롭고 희망 없는 삶, 그러한 인생을 바라 볼 수밖에 없다는 것, 어찌 해 볼 도리가 없다는 것, 어쩜 그것이 사람의 숙명인지도...작가의 말처럼 운명의 질긴 애증과 고독이 이 보다 절절하게 표현 될 수는 없을 것이다. 처량하고 구슬픈 노래다. 그럼에도 아름답다. 부모의 사랑이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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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덕의 불운 열린책들 세계문학 159
싸드 지음, 이형식 옮김 / 열린책들 / 201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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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과 인간 세상에 대한 환멸과 경멸, 혐오감으로 분노와 증오에 가득 찬 싸드(Marquis de sade)의 냉혹한 눈초리가 느껴지는 작품이다. “가련한 두 발 달린 개체를 짓누르는”, 아직 아마도 그 실체의 정의조차 내리지 못하는 섭리, 숙명이라는 존재의 괴이한 변덕이라는 우화를 통해 악의와 악덕에 익숙한 인간과 세상의 본성을 싸늘하게 그려낸다. “전체가 썩어버린 사회”에서는 미덕이란 그러한 관계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주장처럼 “다수의 이익이 인간들을 부패로 이끌어가고자 할 때, 특정인인 자기만 부패하지 않겠노라고 한다면 다수의 인간들과 싸우게 되고 결국 전체 이익에 대항하여 투쟁하게 되는 것”인데, 다수가 걷는 악덕의 길을 걷지 않으려는 사람은 필연적으로 파멸하는 것이 불가피하니 미덕이나 악덕이나 이 세상을 살아가는 방법에 불과한 것 아니냐는 것이 싸드의 속내였을 것이다.

‘싸드’를 말하면 으레‘싸디즘(sadism)’을 떠 올리지만, 그 가학적 음란성이란 표피성은 결코 본질이 아니다. 이 작품에서도 “쌩뜨-마리-드-부와(Sainte-Marie-des-Bois)”,즉 “숲속의 신성한 마리아”라는 이름의 그 본성과는 걸맞지 않는 수도원이 대표적 싸디스트 집단으로 등장하는데, 더럽고 모독으로 가득한 시궁창이며, 난폭성과 변태적 도착증으로 똘똘 뭉쳐진 괴물들인 수도사들의 위선과 악마성을 통해 온통 악덕으로 떡칠을 한 인간, 인간 세상에 대한 적나라한 고발을 대리하는 도구이다. 외설과 음란성에 관심을 집중하는 세상의 시선은 바로 그 금지라는 규범에 도사린 치졸함, 유치함, 폭로적 관능에 탐닉하는 자들의 자기 은폐일 것이다.

소설은 고아가 되어버린 두 소녀의 인생행로를 극단적인 대비 속에서 보여주는데, 미덕의 화신인 ‘쥐스띤느’와 악덕으로 뭉쳐진‘쥘리에뜨’자매의 삶의 섭리에 대한 서로 다른 이해와 해석의 결과가 인간세상에서 진실이라고 떠들어대는 것, 소위 인간 삶의“궁극적 목표에 이르는 길을 덮고 있는 어둠 위에 빛을 던져준다”는 철학의 승리라는 것의 실체라는 것이 얼마나 무용한 헛소리인가를 증명하려는 것이기도 하다. 일찌감치 큼직한 죄악으로 돌진해서 주도면밀한 매춘으로 귀족들을 갈취하고 살해하여‘로르상주 백작 부인’으로 상류층사회의 일원이 되는 쥘리에뜨와는 달리, 정숙함, 고결함의 미덕을 지키고 고귀한 신앙심으로 똘똘 뭉친 쥐스띤느의 일생은 전대미문의 엄청난 불행의 연속이다.

고리대금업자의 하녀로서 도둑질을 거절한 끝에 도둑의 누명을 쓰고 잔혹하게 쫓겨나는가하면, 어머니를 독살하려는 동성애에 빠져있는 방탕한 후작의 살해 공모를 거절하자 1백대의 채찍질 후에 버려지며, 선의인 줄 알았던 상처 난 몸을 치유해주었던 외과의사는 몸에 낙인을 찍고 매질을 하여 내치고, 지친 심신을 의지하려 찾아간 수도원의 지엄한 제단은 흉측한 괴물들의 집합소이며, 심한 폭행으로 상처 난 사나이를 구조해준 은혜의 결과는 채찍과 노예생활이란 보상으로 돌아온다. 오직 욕스러움과 피투성이 가시밭길로 점철된 그녀의 인생이란 사실 미덕의 저주이다. 악덕이 선(善)의 행세를 하는 세상에서 어찌 미덕으로 살아 가려하는가!

자신의 쾌락에 방해가 된다는 이유로 어머니를 살해하려는 후작의 궤변(詭辯)은 아마 싸드의 역설이자 인간들에 대한 조롱이었을 것이다. 어머니를 살해하는 것은 “자신의 유사체(類似體)를 파괴하는 것이고, 또한 그 파괴의 괴로움”이라는 두 가지 죄악이라 하겠지만 그건 순전한 환상 일뿐이라고 주장한다. 죽음은 단지“형태의 변화이지 절멸은 있을 수 없으며, 자연의 눈에 모든 것은 평등하며, 단지 물질 덩어리는 끊임없이 다른 모습으로 재생”할 뿐이라고 말이다. 즉 죽음은 자연이란 다양성의 실현이라고. 게다가“자연에게 하도 중요하여 인간의 파괴에 자연이 필연적으로 노하게 되었음을 증명”해봐라! 그러면 범죄를 인정하겠다고. 어찌 많이 들어본 말 같지 않은가?...

이러한 싸드의 역설적 궤변은 다 죽어가던 놈을 구해줬더니 채찍과 노예노동으로 보상하는‘달빌르’라는 위폐범이 하는 말에서 반복되는데, 자신은“선행, 인정, 따위 등이 재산을 축적하려는 사람에게는 발부리에 부딪치는 돌이라는 사실을 일찍 깨달”아서, “약자들을 희생시키며, 다른 사람들의 신뢰와 어수룩함”을 이용하여 부를 축적하는 것은 현명함이라고 으스대는 것이다. 또한 죄의식이나 회한이란 것은 일종의 환상으로 “너무 나약하여 그것을 감히 지워버리지 못하는 영혼의 천치같은 독백에 불과”한 것이고 실제 부를 손에 넣게 되면 모두 망각 속으로 사라진다고 강변한다.

범죄 역시“법률이나 국가적 인습을 위반하는 행위에 불과한 것이고, 근본적으로 범죄라 칭할 만한 것은 없으며, 단지 견해와 지역의 문제”일 뿐이라고 설득한다. 현실을 봐라! “세력이 강한 자에게는 법이 미치지 못하고 운이 좋은 자는 법망을 빠져나가”지 않는가! 어찌 보면‘신성한 마리아 수도원’의 원장인 수도사 라파엘이나 앙또냉 같은 변태성욕자들이 탐욕의 대상자“몸에 나타나는 고통스러운 징후를 정성스럽게 포착하여, 그 율동에 자신의 관능적 전율을 조화”시키는 그 가학성과 아주 닮아있다는 생각이 든다.

소설은 사형을 선고받고 경찰에 끌려 호송되던 길 중에 우연히 만난 로르상주 백작부인에게 쏘피(쥐스띤느)가 들려주는 인생의 곡절과 사연의 형식인데, 미덕이 끊임없이 불행이란 보상으로 되돌아온 얘기의 마무리 끝에 두 여인은 얼싸안고 눈물을 흘린다. 18세기, 더구나 세기말의 작품이란 그렇듯이 세상과 삶이 깊은 절망에 휩싸이고 인생의 거의 절반을 감옥에서 보낸 시대의 반항아인 싸드로서는 아마 인간들의 악덕에 진절머리가 났을 것이다. 소설의 마지막에 동생 쥐스띤느의 죽음을 본 쥘리에뜨의 수녀원 귀의를 설명하면서 그녀의“기지의 밝음과 품행의 엄격함으로 모든 사람의 전범이 되었다.”고 이것은 마침내 미덕의 기쁜 보상이라고 너스레를 떠는데, 과연 이 말이 싸드의 진심이었는지, 아니면 빈정거림이었는지는 200년이 지난 지금 그에게 확인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세속화된 종교 권력의 파렴치함과 악덕으로 썩어빠진 인간들의 위선과 허영에 앙다문 이빨을 으드득 가는 차디찬 싸드의 분노가 끓어 넘치는 작품이다. 200 여년이 지났건만 싸드의 주장이 호소력 있게 들리는 건 결코 변하지 않는 인간의 악덕 때문일 것이다. ‘피터 박스올’의‘죽기 전에 꼭 읽어야 할 1001권의 책’에 선정된 작품이라 했던가? 싸드를 이해하고 인간의 본성, 삶의 섭리를 이해하는데 이만한 책이 없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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섹스와 공포
파스칼 키냐르 지음, 송의경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0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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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이 공포와 저주로 변질된 역사, ‘저주의 몫’이 된 섹스의 뿌리 찾기이다. 욕망과 공포가 분리되고 또한 사랑과 섹스가 분리되기 시작한 고대 로마의 공화정이 제국으로 변모하는 바로 아우구스투스로부터 시작되는 성의 정치화와 권력화, 그리고 금기라는 규범화가 낳은 문명사적 고찰을 통해 성의 기원에 대한 풍성한 해석의 터전을 마련하고 있다. ‘미셸 푸코’가 말하는 성의 정치화에 고착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의 또 다른 판본이 될 수 있으며, ‘조르주 바타이유’의 죽음과 동일시하는 에로티즘의 이해, 즉 비생산적 소비로서의 섹스와 비견되는 언어학적 논증을 통한 공포와 섹스의 동일 기원에 대한 해석은 오늘의 우리와 우리사회를 이해하는 새로운 인식의 토대를 제공한다.

이와 더불어,‘파스칼 키냐르’의 이 저술은 그의 사상과 삶에 대한 관점 및 작품들(특히,『혀끝에서 맴도는 이름』이나 『은밀한 생』등)을 이해하는 기본서의 역할을 하고 있다할 정도로 총 16개장(章)에 걸친 신화적, 미학적인 성의 문화사적 성찰은 가히 독보적이고도 귀중한 문헌학적 가치를 지닌다고 말 할 수 있을 것이다. 특히‘루크레티우스’의 『사물의 본성에 대하여』는 물론, ‘아플레이우스’의 『변신』이나, ‘오비디우스’의 『변신 이야기』를 비롯한 접하기 힘든 고대 그리스, 로마의 무수한 작가들의 서사시와 회화들의 해석은 매료될 수밖에 없는 독서의 즐거움을 준다.

매혹(fascinatio), 파스키누스(fascinus)와 직면한 죽음

로마의 제국화, 즉 아우구스투스(옥타비아누스)의 권력독점에 따라 귀족들이 자발적으로 예속적 관리가 되는 것은 문화적 대변혁이라 할 수 있는데, 이는 성 문화에 있어서도 그대로 실현되고 접목된다. 여성의 성에 대한 억압으로 혼인한 여성, 과부의 매력 발산이나 하다못해 강간조차도 피해자인 이들 여성을 처벌하는 까다롭고 엄격한 시민남성 중심의 비상호적 성규범으로 변화한다. 고대 그리스의 영혼과 육체의 통일체로서의 인식은 분리되어 육체는 평가절하되고, 특히 매혹에 대한 여성의 좌절은 욕망과 공포를 분리하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도시민들의 음담패설과 통음난무는 자유분방이라 할 정도로 로마에 넘쳐났는데 이는“남성성의 약화를 방지하려는 의례”의 방식으로 이해되어야 한다고 한다. 이와 같은 외설스런 언어, 남근의 지배라는 권력은“능동적 힘, 태내의 번식력, 다른 국가들에 대한 승리의 힘”을 상징했고 로마인들의 이러한 영웅주의는 훌륭한 죽음이라는 강박관념으로 표출되어, 원형경기장의 잔악한 죽음 앞에 선 노예들, 화가들의 벽화에 그려진‘직면한 죽음’처럼, 죽음의 순간에 매료되어 환호하고 그것을 만끽하는 것으로 형상화 되었다. 이를보면 오늘의 우리사회와 쌍둥이같은 모습이라는 생각을 갖게 하는데, 성은 수치스러운 몰가치로 저 심연 뒤로 규범으로 금지하고 감추어 놓고서는 다양한 기호들로 외설과 음란에 도취케하는 현대정치권력의 양면성과 빼 닮은 것이다. 성과 사랑, 욕망과 죽음, 영혼과 육신은 결코 분리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를 분리하면서 모든 죄악과 위선을 뒤집어쓰고 고통스러워하는 인간사회의 모습은 실로 아이러니라 할 수 있는 것 아닌가?

한편 로마의 왕들은 베누스와 마르스의 아들인 에로스의 추종자가 되어 스스로 베누스의 아들임을 자처하여 성적능력을 곧 권력과 동일시하는 남근지배, 즉 인간 존재로서 비로소 가능성을 획득하는 존재 이전의 이미지, ‘섹스’, 즉 파스키누스(fascinus: 勃起한 남성)에 대한 매혹에 천착하게 되는데, 여기서 죽음에 직면한 공포에 질린 얼굴 - 인간의 고통을 보며 느끼는 쾌락 - 이 suavitas(감미로움)였음은 그 기원의 동일성을 엿보게 되는 것이다. 사실 이 강직(剛直)에서 매혹(fascionatio)이 출현하는데, 이것을 정면으로 마주보는 것은 프랑스어 대경실색(meduser), “피해야 할 것에 도망치지 못하게 만들고 공포 자체를 숭배하게 하며 죽음의 위험을 감수하고서라도 우리 자신보다 공포를 더 좋아하게 만드”는 무엇이다. 그래서 시선은 마주보지 못하고 언제나 곁눈질이며, 매혹은 언어의 사각지대에 대한 인식이라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를 종합하면 로마의 문화적 지표들인 폼페이의 벽화, 서사시에 표현된 직면한 죽음의 광경이나 원형경기장에서 사투(死鬪)의 형태로 연출된 희생이라는 우스꽝스런 죽음, 파스키누스의 풍자적 의례 등은 처벌을 초월한 복수, 위반에 대한 집단적 복수에 참여하는 승리의 시퀀스(sequence)라 할 것이다.

‘신비의 빌라’, 그리고 메두사(medusa)...

키냐르의 모든 작품에 단골로 등장하는‘신비의 빌라’는 존재가 있게하는 시원(始原)의 장소이기도 하며, 도시에 환멸이 난 시민들의‘은둔’의 장소이자, 은밀한 쾌락의 공간인 ‘매혹의 침실’,‘매혹의 빌라’이기도 하다. 아마 이 신비의 빌라에는 “천으로 덮여 키 안에 들어 있는 파스키누스를 향해 일제히 집중되어”있는 공포어린 사람들의 표정이 있는 벽화가 있는 모양인데, 이는 매혹을 마주하는, 또는 죽음에 직면한 놀라움, 바로 아연실색케 하는 매혹의 더없는 조합인 것이다.

사실 자연의 풍광이 그지없이 좋은 교외의 빌라라는 곳이라도 매일의 지리멸렬한 반복이다 보면 그것이 무슨 즐거움이겠는가. 아마 삶의 권태라는 태생적인 인간의 질환이 머리를 쳐들어 댈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흥분의 소멸, 위축되고 수축되는 순간, 그것은 분출되는 것의 고갈, 슬픔이라 할 것이다. 결국 남성은 동물적 쾌락 속에서 침몰한다. 그 침몰은 곧 나른한 권태이다. 지루함이다. 상징적 세계의 수축, 삶의 권태, 쓰라린 감정, 로마는 바로 이 불응기를 축소하기 위한 권태와의 전쟁의 역사인 것이다. 무감각해진 오늘의 인간들을 자극하기 위한 리얼리티 쇼같은 광적인 쾌락주의처럼.

신비의 빌라에 있는 돌처럼 단단한 파스키누스를 바라보는 놀라운 표정은 정신을 몽롱하게하고 죽음을 가져오는 에로틱한 시선이다. 바로 머리에 50마리의 뱀이 우글거리고 입을 활짝 벌린 여자의 얼굴을 한 메두사(medusa)가 바로 그것이다. 그녀를 바라보면 모두 돌처럼 굳어 죽어버린다. 황금비로 변한 제우스와 라르고스 왕의 딸인‘다나에’사이에 출생한 아들, ‘페르세우스’가 폭력적이고 성적이고 마법을 걸어오는, 놀라움으로 얼어붙게 만드는 시선의 메두사의 머리를 잘라오기 위해서는 결코 마주볼 수 없는 것이다. 마주보는 것은 곧 죽음이다. 마주보는 시선이 행사 할 수 있는 힘에 대한 두려움, 정면으로 바라보는 것은 금기이며 이 정면의 파괴적 시선에 대응하는 것이 곁눈질이다. 겁을 내며 수줍게 바라보는 여자의 비스듬한 시선은 바로 페르세우스의 계략이다. 반들반들 거울처럼 닦은 페르세우스의 청동방패에 반사되어 비친 자신의 얼굴을 본 메두사의 공포의 경직은 쾌락의 극치인 것이다. 이는 호수에 비친 자신의 그림자가 아니라 바로“반영(反映)에 잡아먹힌” 나르키소스의‘자기 살해적 시선’, 바로 그것이기도 하다. (*나르키소스 신화의 3가지 판본의 내용이 소개되고 있다. 책 본문 참조)

“쾌락은 육체를 우월한 자아로 느끼게 하고 영혼을 신적인 존재로 끌어올린다.” 자신이 살아있음을 느끼는 경험은 오직 쾌락뿐이다. 육체와 영혼의 결합이 이루어지고서야 비로소 삶은 통합되는 것이다. 그럼에도 노출을 은폐하고 성과 매혹을 금기시하는 사회는 파괴 불가능한 욕망을 알지 못하고 그 수축의 권태와 쾌락, 죽음을 제거하기 위해 기술적 광란에 집착한다. 권태에 집착하는 사회는 파멸만이 기다리고 있었음을 우린 역사에서 본다.“자신이 생겨난 섹스와 자신이 썩는 죽음의 부패 사이에 놓인 육체를 지니고 있다는 인식에서 비롯된 우수와 더불어 권태와 증오”가 잇따르지만, 그것이 바로 우리인 것을, 인간인 것을 왜 부정하고 회피하려 하는가. “삶은 죽음을 배경으로 반짝이는 빛”이란 것을, 그 매혹의 빛, 설혹 돌처럼 굳어진들 정면으로 마주하는 그 아찔함의 순간적 경련과 경직은 아름다운 것이 아닌가! 저 돌처럼 단단하게 굳어 서있는 조각상의 아름다움처럼...

섹스와 공포, 성과 권력, 쾌락과 죽음이 매혹이라는 동일한 기원에서 태어났음을 어원학적으로 그리고, 고대 문헌과 회화를 배경으로 본질을 가려왔던 어둠을 과감하게 걷어내고 선구적인 윤리를 제시 해내는 이 저술은, 에로티즘의 본질을 파헤쳐 우리들이 지닌 왜곡된 선입견을 교정하고 새로운 문명사를 여는 에로티즘 정보의 광산이자 절대 걸작이라 함에 부족함이 없는 대작이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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