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아버지를 죽였다
마리오 사비누 지음, 임두빈 옮김 / 문학수첩 / 201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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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제목의 선정성, 패륜성이 시사하는 부도덕성에서 이를 변호하려는 논리의 기만성을 보고자 했는지도 모르겠다. 존속살해(尊屬殺害), 아비를 죽이는 아들의 행위에는 대체 어떤 이유를 거론 할 수 있을까? 하는 이성적 거부로 인한 비난의 시선을 작가는 어떻게 설명하려는가에 대한 엿보기의 심리라 하여야 할까? 아무튼 이러한 독자로서의 심리를 꿰뚫듯이 “숨 쉬듯이 아무렇지도 않게 아버지를 죽였다.”고 하는 문장에 휘말려 그만 내쳐 읽을 수밖에 없게 된다.

3장으로 나뉘어져 있는데, 2장은 살해자가 쓴 소설사이의 소설인「미래」라는 미완성 소설이 놓여있다. 살해자가 심리 상담자에게 진술하던 중 자신의 심리를 이해하기 위해서 요구되는 읽기라고 제안된 이야기이다. 이는 아버지를 살해하기 이전의 시기에 소위 “지적인 야망을 즐기고 그것들이 우리들 삶에서 점점 더 멀리 떨어뜨린다는 사실을 안 사람이 수확한 결실”이라는 반(反)지성주의와 원죄를 찬양하는, 즉 “악도 성스러운 구도의 통합체의 일부일 뿐 아니라 신의 본질가운데 일부를 차지”한다는 자신의 초월자로서의 깨달음, 살인의 당위적 결론을 위한 배경이라 할 수 있다.

진술은 아동기부터 시작해서 살인을 한 당일까지의 기억과 사실로 이어지는데, 엄마에 대한 절대적 애정과 이 애정의 경쟁자로서 아버지와 자신의 갈등이 얘기되고 있다. 이러한 계기가 된 사건으로 바다에 빠진 자신을 아버지가 구해준 것은 바로 자신의 최초의 굴욕이라는 것인데, 경쟁자에 대한 수치심, 이 사건으로 인한 엄마와 아버지의 공고해진 결합으로 인한 상대적 박탈감으로 이해되는 것이다.
이러한 심리적 현상을‘오이디푸스 콤플렉스’라고 간단하게 해석할 수 있지만, 화자는 그러한 얕은 틀의 정신분석으로 접근하지 말라고 경고한다. 사춘기가 오기 전 엄마의 암으로의 사망은 금융자본가로 사회적 성공을 거두고 있는 부자인 아버지와의 관계를 극단적으로 벌려놓는다. 자본주의적 성취는 분주함을 요구하고 그런 아버지는 아들과의 친밀감을 만들지 못하는데, 화자에게는 이 무관심이야말로 곧 적대감의 표현으로 수용되고 부자의 감성적 간극은 더욱 벌어지기만 한다.

이 소설은 이처럼 이야기 구조를 따라 감으로써 화자가 왜 존속살해라는 사회적 터부(taboo)를 실행할 수밖에 없었는지에 대한 이유들을 작품 전체의 구석구석에서 찾아내고 마침내 사실의 행위로서 직접적 동기를 접할 수도 있지만, 화려하달 정도로 선과 악, 삶의 본질, 의식과 감각, 이성과 본능에 대해 뿜어내는 인간정신의 성찰을 위해 끌어대는 철학적 사유의 빈정거림과 패러독스에서 획득하는 보다 큰 그림으로부터의 진실의 발견도 꽤나 즐거운 작업이 된다. 일례로 소설 속 소설에 등장하는 지적 삶의 대척에 있는 표층문화만으로 지혜롭게 또 다른 정신의 삶을 사는 친구의“이성에 대한 본능의 승리를 축하하기 위해 고안된 장소”로서의 레스토랑 장면에서‘바타이유’가 현현하고, ‘이반 카라마조프’의 존속살해를 고안한‘도스토엡스키’를 통해 악이 도덕성을 어떻게 초월하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식이다. 또한 단지‘질투’라는 감정적 현상을 말하는데 조차‘나와 너’라는 주체와 타자성이란 말장난을 일삼는 현대철학의 허위성을 꼬집는 데에서는 헛웃음이 나오기조차 한다.

그리고 소설의 또 하나의 재미는 도처에 흩뿌려 놓은 살해자의 살해 동기나 심리적 본성이라 할 수 있다. 이는 심리상담자를 마주하는 피상담자의 자세가 거의 기만적이고 우월적, 자기도취적 위치에 있다는 것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데, 그래서 독자는 읽어나가면서 계속 본질에 접근하는 증거들을 줍게 만드는 것이다. “심리분석가가 내 속을 속속들이 들여다 봐주기를 원하는 최고의 나르시시스트”라고 자신의 정신적 일면을 진단한다든가, 심리상담자에게 읽게 한 자신의 미완성 소설에 심리적 해석을 통해 자기 정신의 초월성을 확정하는 것들이랄 수 있다.
결국 이러한 소설적 도구들은 살해의 동기가 신으로서의 행위, 즉 초월자로서의 행위였음을 강변하기 위한 수단이다. 그의 소설 속 소설에 등장하는 악의 화신인‘파르파렐로 신부’의 ‘정신적 인간’이 지니지 못한 도덕성까지 내재하는 새로운 신적 본질의 깨달음, 악과 선은 무한대에서 만나며 그 무한대가 곧 신이라는 그만의 진실에 이르는 것이다.

자기 삶의 장애자로서 고통스러운 존재인 아버지를 극복하는 새로운 삶의 길은, “신의 성스러운 계획에 필수적인 그 더러운 역할을 맡는 것은 인간의 자유의지의 산물로서 신에 의해 특별한 은총을 받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수행”하는 것이라는 결론에 이른다. 나아가 선악의 통합체를 완성하는 것, 곧 신으로, 초월자로 완성되는 것이기도 하다. 이제 정신적으로 존속살해에 대한 명백한 교리를 획득한 자는 이를 실행하면 되는 것이다. 화자의 말을 빌면 아버지를 살해한 동기로서, “나는 유전 인자와 심리학적 사회적 격발 요소들 이외의 것에 관심을 두고 있었다.”는 것이다. 다시말해, 초월적인 것, 악을 처단함으로서 신적 합일에 이르는 성스런 행위인 것이다.

자신의 인생을 지옥으로 만들어버린 한 비정상을 제거하는 것이며, 그(아버지)를 “악마성으로부터 해방시켜 주고 포용하는 것과 다름없으며”, 그럼으로써 “한 명의 아버지로 축복받을 수” 있게 해주는 사랑의 행위였다는 것이다. 더구나 아버지의 가학성을 죽음으로 돌려준 것은 바로 ‘도덕적 동종요법’이라고 주장한다. 아마 독자들이 이러한 사이비 종교식 궤변에 현혹될 리는 없겠지만, 인간 심리에 도사린 나르시시즘의 이러한 탐색에는 머리를 끄덕 일 수 있을 것이다.

어지간한 자극에는 감흥이 없는 무감각증으로 인한 현대인의 권태로움이 얼마나 많은 악을 낳고 있는지 우리들은 알고 있을 것이다. 또한 성취일변만을 지향하는 인식구조는 가정마저 파편화시키는 지경에 이르고 있음을 부인하기 어렵다. 오늘을 사는 우리들, 그 자녀들에게 부지불식간에 누적되는 분노가 바로 악을 창조한다. 이와 같은 형이상학적 이유를 반전시키는 살해의 직접적 동기가 읊어지는 데에 이르면 그 처벌이 진정 도덕성을 잃지 않았다는 판단에 이르게 된다. 이는 어떤 의미에선 작가에게 실컷 조롱당한 기분까지 느끼게 되는데, 그야말로 오늘의 표층문화의 얄팍한 실용주의와 종교적, 철학적 허영심과 위선에 대한 기막힌 역설의 한 마당이었다는 당혹감 때문일 것이다. 아마“문학이란 이미 불행하다고 생각하는 인간들의 불행을 확인시켜주는 예술이며, 인간의 행복이 얼마나 유한한가를 보여주는 예술이다!”하는 화자의 진술은 이 작품 전체를 은유하는 또 다른 막강한 이미지가 아닐까? 서사의 독특하고도 새로운 재미는 물론이고 인간세상 면면의 부조리함에 대한 통찰력 또한 손색없는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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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사의 회전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22
헨리 제임스 지음, 최경도 옮김 / 민음사 / 200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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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이 꼬리를 물기시작하면 그 생각의 심연에서 빠져나오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나사의 회전처럼 돌아 갈수록 더욱 죄어지고 깊어진다. 그래서인데 표현되지 못한 욕망이란 타인의 시선, 기성의 가치와 제도에 억눌려 은폐되곤 하지만,  이러한 억압의 환경을 벗어나 독단적 권력을 행사할 수 있게 되었을 때, 그 은밀한 내면의 욕망은 환상적인 자아도취가 되어 절제 없는 자기 심화의 외곬으로 빠져든다. 아마 그 끝은 어둠의, 악의, 죽음의 그 언저리가 되지 않을까?
무의식 속에 잠재한 욕망을 실현하려는 충동은 환상을 만들어 내고, 존재하지 않는 환상을 실재하는 것으로서의 믿음을 강화하도록 이끈다. 이 강화의 행위는 절대적인 욕망충족의 과정이므로 이에 대한 장애의 제거는 필수적인 것이 된다. 그래서 누군가가 유령(환상)을 보았다면 자신의 심리적 욕망을 투영시키기 위한 욕구의 실재(實在)화라 해도 실수는 없을 것이다.

이 오래된 소설이 지금에도 많은 사람들에게 회자되는 이유는 이와 같은 인간 내면의 어두운 심리를 선구적으로 탐색했기 때문이지만, 이를 더욱 매혹적으로 느끼게 하는 것은 부존하는 대상에 대한 진술과 믿음을 주변사람들로부터 승인받으려는 심리적 기만과 강요의 모습, 그리고 타자의 심리와 진실성을 자기심리와 동일하게 취급하는 반사회적 성향 등 모호하지만 항상 자가당착적으로 작용하는 인간의식 흐름의 세련된 묘사라 할 수 있다.

작품의 도입부인 프롤로그를 제외하면 소설 속 등장인물은 환영(幻影)이나, 화자인 가정교사의 주인인 내용상의 인물을 제외하면 네 사람에 불과하다. 가정교사인 화자(話者)와 집사격의 그로스 부인, 그리고 삼촌에 의해 양육되는 고아가 된 어린 남매인 마일스와 플로라, 즉 구성원의 간결성은 폐쇄성과 권력이 용이하게 행사될 수 있다는 의미의 배경이다. 글을 읽지 못하는 선한 마음씨의 집사여인이나 아이들은 가정교사의 지적사고나 사회적 위치를 넘어설 수 없는 인물이며, 이것은 가정교사에게 더 할 수 없는 욕망 분출의 장소가 되고, 자기 의지대로 타인을 조종할 수 있는 기회이기도한 것이다.

아이들의 가정교사로 저택에 도착하자 화자는 저택의 여주인으로서의 지위와 자유의 행복감에 젖지만, 이내 첫날 밤 어슴푸레한 어둠 속에서 어떤 소리가 반복해서 들려왔다면서, 그 소리는 자연이나 외부에서 들려온 것이 아니라 바로 자신의 내부에서 울려온 소리라고, 웅크리고 있던 억압된 욕망의 현재화를 위한 잠재적 준비가 그녀의 내면에서 이미 시작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너무도 아름다운 어린 소녀와 고귀한 모습의 소년, 충실한 집사, 그리고 고즈넉한 저택의 환경은 충만한 애정과 소유의 집착을 불러일으킬 만하다. 결국 이러한 환경은 그녀의 상상력과 기질, 허영심이 혼합된 산물로서 유령의 존재를 만들어내기에 이른다. 화자는 결코 유령이 자신의 정신세계가 만들어 낸 존재임을 인식하지 못하지만 독자들은 유령의 출현이 위선과 거짓된 상상임을 모호하지만 알게 된다. 이러한 정황은 자기“내부의 예민한 기질이 결국 모든 것에 대한 함정이 되고 말았다.”라던가, “환상에 사로잡힌 나의 끔찍한 습성을 내 동료가 놀라움과 동정심이 반씩 섞인 채”와 같은 식으로 암시한다.

결국 유령의 부존재를 아는 독자는 가정교사의 심리를 쫒게 되는데, 자신이 본 유령의 악마성과 위협으로부터 어린 아이들을 지켜내기 위해 보호막으로서 속죄하는 희생양이 될 것이라고 집사를 설득하고 동료화시키는 자기 확신모습이나, 무심한 순수함의 어린 아이들의 행위에서 그들의“노골적인 매력이 계산적일지 모른다.”고 생각하거나, 자기 눈앞에 펼쳐지는 아이들의 평화로운 모습을 기만이라고 단정하는 판단에서 인간 본성으로서의 욕망이란 것이 사회의 제약을 상실했을 때 얼마나 파렴치하고 폭력적으로 변하는지 목격하게 된다. 이는 순진무구한 아이들의 천연스러움을 “계속 순진한 표정을 가장”한 것으로 인식하고, 예전에 아이들의 보호자였던 이미 망자가 된 주인의 시종과 전임 가정교사를 유령의 정체로 함으로서 악의적인 적대세력으로 정의하여, 확신을 강화하고 심화시키는 나르시시즘(narcissism)에 이른다. 더구나 아이들은 알지 못하는 유령의 출현을 아이들의 은밀한 비밀로 간주하고는 아이들과 유령의 교통이라는 존재하지 않는 진실을 추궁하고 강요하는 상황으로 치닫는데, 경계를 허문 낯선 존재로서의 유령에 대한 공포보다 환상이라는 무의식에 감추어진 인간의 추악한 욕망, 그 본성을 보는 것에서 오히려 수치스러운 외마디 비명을 지르게 된다.

마침내 소년‘마일스’를 추궁하던 끝에 그의 거짓 없음과 완전한 순수성을 보게 되지만, 욕망에 가려진 의식세계가 고작 하는 말이란, “만일 그가 순진하다면 나는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고 자문하는 것일 뿐이다. 아이들의 운명을 자신의 욕망에 일치시켜 권력을 행사하는 가정교사가 아이를 절명 시키면서 내뱉는 마지막 선언, “악령을 쫒아 낸...”에서는 그만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꽉 죄인 나사 같은 숨 막히는 절망감을 느끼게 된다.  심리소설의 선구작(先驅作)이라 불리는 이유를 입증하듯이 독자의 의식흐름까지 지배하는 사악하고 불길한 기운이 느껴지는 이 소설의 탁월성을 무엇이라 해야 할 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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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인식과 진리의 세계, 그 상상력의 시공(時空) 속으로

우린 이 세계를 온전하게 말 할 줄 모를뿐더러, 사실 아는 것도 별로 없다. 더구나 우리 인간들이 이성이란 것으로 합의한 논리나 법칙, 제도는 이 세계의 지배 질서가 은닉하거나 배제시키고 있는 근원을 표현하지 못하거나 하지 않는다. 그래서 우린 허구의 소설, 문학의 세계가 펼쳐내는 상상력에서 이러한 한계를 넘어서 본질, 대상에 도달하려는 욕구에 시달리고, 현실에서 부재하지만 상상 속에서 실재하는 인식 가능한 세계로 그 결핍을 충족한다.

언어라는 기호가 우리의 생각을 얼마나 편협하게 묘사할 뿐인지 우린 잘 알지만 그 배제와 불완전함을 넘어서는데 미숙하다. 이러한 언어의 불완전성에 활기를 불어넣고 원래적 지시세계, 기의(記意)의 세계로 가는 동력이 바로 상상력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상상, 환상의 낯선 시간적 공간적 세계, 현실과 전혀 다른 새로운 질서의 세계를 재구축하는 하는 것은 이 세계가 정말의 실재이며 진실이고 본질인가 하는 점에 대한 반발이기도 할 것이다.
이러한 사고에서 출발한 것, 즉 단절의 세계인식이나 언어가 확보한 독단론을 거부하고, 직선적 시간성의 교란이나 인식의 파편화, 현실과 가상을 전복하여 독자적인 세계를, 모든 사물의 존재 방식을 재질서화 하고자 하는 것은 분명 보다 풍부한 세계의 인식에 대한 당위적 관점을 제시해 준다.

이러한 작품 세계를 구축한 중남미작가 계열의 작품들을 바로‘마술적 사실주의’라 하는데, 이는“환상, 동시성, 파편성, 인과관계의 파괴 등과 같은 시간형식과 더불어 소설 행동 공간을 영화의 콜라주 기법과 같이 여러 층위를 중첩 사용”하여 세계의 다양한 관점을 제시하고, 특히 “환상과 현실, 심리적 실재와 현실성, 역사와 허구 등의 경계 해체를 통해 상호 교환되는 특성을 공유”하는 특징을 지닌다고 한다. 이들의 대표적인 작가로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나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께스’,‘이탈로 칼비노’를 떠올리면 자연법칙이나 논리, 합리성의 지배와 완전히 결별하고 새롭게 창조된 세계의 인식론적 망설임의 순간을 기억 할 수 있을 것이다.

나 역시 이들의 작품을 접하면서 초현실주의와 혼동하곤 했는데, 초현실주의는 경이적, 아름다움을 인간 정신의 순수한 상상력에서 찾는 반면에, 마법적 사실주의는 우리들이 몸담고 있는 일상적 현실에서 출발하고 있다는 차이점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 즉 자연적, 사회적, 역사적, 심리적 현실에서 출발하여 창조적 상상을 통해 환상에 이르도록 가공되는 것이 마법적 사실주의라는 것이다. 새로운 것은 이미 존재하는 것들을 조합하거나 그 모든 것을 총합한다고 하더라도 결코 설명될 수 없다. 그러니 인간의 감관이 지각하고 통합할 수 있는 한계를 초월한 상상이 창조한 세계, 그 가공의 미학적 현실은 우리의 미숙함, 불완전함, 부조리함에 대한 비판이요, 반성의 자극제며, 겸허한 인류의 새판짜기이다.

1950년대부터 비평가들에 의해 본격적으로 조명되기 시작한 이러한 계열의 작품은 이후 걸출한 작가들에 의해 폭넓게 수용되어 현대 문학의 중요한 방법론으로 사용되고 있다. 이 계열에 포함되고 있는 작가들로는 보르헤스나 마르께스, 칼비노는 물론‘코르타사르’‘토니 모리슨’, ‘이사벨 아옌데’, ‘밀란 쿤데라’, ‘파트릭 쥐스킨트’, ‘오사리오 끼로가’, ‘실비아 오깜뽀’, ‘존 업 다이크’, ‘살만 루시디’등이 거론 되는데, 아마 이들의 작품을 읽어본 독자들은 고개를 끄덕일 것이다. 이들처럼 우리가 합의한 논리의 바깥에는 어떤 세계가 있는지를 이해하려는 작업은 감성과 이성의 더없는 균형과 조화를 만들어 주고 풍부하고 열정적인 삶을 살아가는데 도움을 줄 것 이다. 마법적 사실주의, 환상의 문학에 다가가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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앨리스의 미궁호텔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26
야자키 아리미 지음, 권영주 옮김 / 비채 / 201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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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편의 소주제를 지닌 연작 혹은 장편 소설이다. 삶의 열기를 잃어버리거나, 희망을 저버리고 낙심하는 사람들, 목표를 이루지 못해 고뇌하는, 사랑의 진정함을 찾으려 하는 사람들에게 열정, 꿈, 희망의 메신저가 되어주고, 사랑하는 가족, 친구, 연인들의 찢겨진 마음들을 봉합하고 복원해주는 작품이다. 이렇게 소설의 메시지를 정리하고 보니 왠지 딱딱하고 거창해 보이지만 내용은 한 없이 부드럽고 친근한 범인(凡人)들의 일상 이야기여서 말하는 빛바랜 분홍색의‘돼지인형’이라는 낯설고 당혹스러운 존재의 등장에도 불구하고 우리들의 인식에 별 저항감 없이 수용된다.

굳이 장르를 구분하려한다면 일종의 환영(幻影)문학이라 해야 할까? 그렇다고 현실세계를 이탈한 이질적 세계를 이야기하는 결코 아니며, 단지 삶의 현실을 아름답고 가치 있게 복원하는 수단으로서 꿈과 희망의 환상성을 도입했다고 하여야 할 것 같다. 소설의 기초는 현실에 단단히 뿌리박고 있으며, 간절한 무엇을 간구할 때에만 현실과 비현실적 세계의 경계가 해체되어 현실적으로 가능치 않을 것 같은 존재와 조우하고, 도달할 그 무엇을 발견하게 하는 기본에 충실한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어머니의 병간호, 가업인 꽃가게를 꾸리는 남동생의 부족한 일손을 위해 각본가로서의 꿈을 접고 고향으로 돌아온 여성의 잃어버린 자신감을 일깨워주고 마침내 아마추어 연극제의 연출보조자로서 다시금 충만한 삶의 열정을 되찾게 하거나, 사랑을 이용하는 여자의 진실을 드러내게 하여 진정한 자아와 사랑에 대해 생각게 하고, 해체된 가족, 상처받은 자존감을 어루만져 주고, 진정 원하는 것의 실체를 발견하게 준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에서 방향을 잃고, 때론 좌절하거나 상처받고 앓아눕기도 할 때면 해안가의 고상한 고급 리조트호텔인, 그랜드 호텔의 버틀러(집사), 핑크빛 봉제인형 돼지돼지 씨는 그네들의 눈에 보이는데, 움직이고 말하는 인형의 발견이라는 그 당혹스러움이 공포로 느껴지지 않는 것은 그 작고 둥글둥글하며 천으로 만들어진 소박함과 귀여운 얼굴 모습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이성적으로 독립적인 주체성을 지닌 봉제인형을 받아들이기가 용이한 일이 아니다. 해서, 작가는 중간 중간 모호함, 신비함, 부존재성의 암시를 남긴다. 대화 속에서 돼지돼지 씨가 “예컨대 저를 보실 수 있는 분이라든지요.”라든가, 앓아누워 몽롱함과 잠에서 깨어났을 때 그 인형의 존재를 확인 할 수 없으며, 특정인물에게는 보였으나 제3의 인물은 감지하지 못하는 장면들에서 그 것은 환각, 환상 속의 환영으로 인식되기도 한다. 그러면서 존재하지 않을 것이지만 존재하는 것이기도 한 이 인형의 존재는 우리 사람들의 심리적 욕망이 투영된  일종의 구조로서의 은유물로 이해되기도 한다. 어쨌거나 나로서는 이러한 논리적 이해 수단을 마련하고서야 온전히 이 봉제인형이란 존재를 수용할 수 있었으니 이러한 유치한 단서를 마련하려 한 것은 타당한 것일 게다.

나는 다섯 편의 에피소드 중 특히 넷째 편인 <겨울 이야기>가 인상 깊었는데, 아마 여기저기서 읽었거나 보았던 기억들의 어떤 유사함이라는 친근함 때문이었을 것이다. 작품 속에서도 직접적으로 거명하고 있는‘코언형제’의 영화 <바톤 핑크>나, ‘스티븐 킹’의 소설 <샤이닝>에 공히 등장하는 호텔과 호텔에 묶인 작가라는 소재처럼 역시 이야기의 중심인물이 집필을 위해 호텔에 머무는 호러소설가이다. 즉 이들의 오마주라는 측면에서만이 아니라, 이 소설, 물질에 인간성을 부여한 의외적 존재가 등장함에도 기괴함이나 공포가 존재하지 않는 점에 대한 일종의 변명이 흥미로움을 일으키고, 더구나 환상성이란 장치가 기대하는, 현실이 결여하고 있거나 인간 세상의 위선이나 그릇되어 있음에 대한 비판성의 원론을 노골적으로 들먹이는 대사라 할 것이다. 사람들에 대한 불신이 연장되어 환각, 상상의 세계에서조차 타자를 믿지 못하는 것인데, 자신을 진심으로 간호하려는 돼지돼지 씨에 대하여 “방심시켜놓고 덮칠지도 모르는 일”이라는 중얼거림과 같다. 또한 “환각은 좋은 소재야”라든가, “꿈과 현실이 분간이 안 되는”것처럼 독자를 향해 환상문학에 대한 직접적 학습을 주문하는 모습에서 작가적 열의와 집착을 발견하는 즐거움도 한 몫 했다 할 수 있다.

빠른 속도로 사람들의 소외를 심화시키고 진정한 소통은 오히려 사라져가는 오늘에, 또한 격심한 경쟁에 지친 우리들은 그 어느 시대보다 작고 따뜻한 정말의 위로의 말 한마디, 행동이 간절하다 할 것이다. 그래서인데, 작품 속 돼지돼지 씨 같은 이가 꿈이건 우리의 상상의 공간에서건 모습을 보인다면 아마 삶의 커다란 활력이 되고 행운이 무럭무럭 자랄 것만 같다. 중년 남성을 위한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라 했던가? 어른들을 위한, 삶에 지친 사람들을 위한 행운의 부적, 행운의 소설이라 불러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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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루 아라베스크 - 한 점의 그림으로 시작된 영혼의 여행
퍼트리샤 햄플 지음, 정은지 옮김 / 아트북스 / 200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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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언가가 내 시선, 내 맘을 멈추게 하는, 내게 직접 어떤 것을 얘기하는 대상과 마주했던 적이 있었던가? 내 발길을 붙잡아 채는, 내 고동을 멎게 하는, 옴짝달싹 하지 못하게 하는 그런 상황 말이다. 아마 너무도 급속하게 달려가는 산업적 시간에 적응하느라 내 초조해진 육체가 이런 정신적 경험에 노출 될 여지조차 없었던 때문일 것이지만, 왠지 관조(觀照)라는 여유의 언어가 사치스럽게만 여겨지듯이 한가함과 쌍둥이인 은밀함, 관능성에 대한 위선적 거부의 습관에 절어있었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문득 멈추어서 응시하게 되는 그 어떤 것, 내 마음을 붙잡는 그 미지의 대상에 대해 알고자 하는 까마득한 매혹의 순간, 상상만으로도 설레는 그것, 그런 상황에 돌연 서고 싶다는 충동이 인다.

작가‘퍼트리샤 햄플’은 20대의 젊은 시절, 약속 장소인‘시카고 아트 인스티튜트’를 지나던 중 우연히 보게 된 ‘앙리 마티스(Henri Emile BenoIt Matisse)’의 <어항 앞의 여인>앞에 시선을 빼앗긴 채 영원처럼 서있었던 영혼의 전환적 순간을 얘기한다. 그림에 대해 아무런 지식도 없었던 그녀를 멈추게 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테이블에 손을 괴고 어항 속 금붕어를 응시하는 여인, 그리고 그녀의 뒤에 푸른색 아라베스크 문양의 스크린이 있을 뿐인 그다지 관심을 이끌 요소가 없어 보이는, 마티스의 명성을 얻은 작품 군에 속하지도 못하는 그런 그림에도 불구하고.
응시를 버리고 힐끗 보기에 자리를 양보한 현대인의 시선과는 자못 괴리된 한가함, 이국적인 스크린 뒤에 펼쳐질 상상의 방, 알 수 없는 세계에 대한 욕망이었을까?

    

색채의 본질성을 굳게 믿었던 화가의 신성한 빛을 향한 여정, 특히 이국적 나른함이 물씬 풍기는 ‘오달리스크’들에 대한 호기심은 삶의 여행, 영혼의 여행과 잇닿는다. 그녀의 말처럼 “인생은 중단 없는 응시의 투명한 빛으로 가득차야 마땅”한 것일 터이지만 어디 우리네 삶이란 것이 그렇던가.  햄플에게 세상을 천천히 응시하며 살도록 영감을 준 마티스는 인생의 은인일 수밖에 없다. 그것도 젊은 나이에 그녀를 붙잡아 주었으니 어항과 어항 속 금붕어, 어항을 바라보는 여인, 푸른 아라베스크 스크린이 어울린 바로 그 구조의 그림은 신의 계시와도 같은 것이었을까?

1919년에서 1929년에 이르는 10년 사이에 하렘의 여자들 - 오달리스크 - 을 그린 마티스의 그림은 무려 50점이나 된다.  서구인들의 눈에 동양의 신비스러움, 이국적 관능의 향기를 물씬 안겨준 오달리스크는 진정 어떠한 의미였을까? 그리고 마티스에게는 또 어떠한 것이었을까? 마티스의 오달리스크의 연원은 그보다 1세기 앞서 하렘과의 짧은 만남에 황홀경에 취해 사악한 오리엔탈리즘을 번득였던 ‘들라크루아’의 오달리스크나, 방구석에 틀어박혀 고작‘레이디 메리’의 터키여인들과의 욕장의 단상에서 심상을 얻어 서구인의 식민지적 왜곡을 덧씌운‘앵그르’의 몽상의 계보를 잇는다. 그러나 마티스의 오달리스크들은 이들처럼 단지 이야기에 불과하고 보이는 대상을 그리는 것으로서의 그림이 아니라“보는 행위를 그리는 그림”, 즉 재현된 게 아닌 창조된 세계, 자신의 정신에 대한 것이 되려는, 인지와 의식에 대한 것이라는 점에서 경계를 짓는다. 마티스에게 오달리스크는 한가함의 미학, 삶의 관조, 오랜 노동 뒤의 안식, 아름다움에 대한 꿈, 사치와 노동자의 자긍심과의 연계...그러한 것들이었다.

햄플의 에세이는 오달리스크들을 쫒아 잠시 동양을 서성인다. 중동지역의 관광여행, 관광여행의 속성이란 살짝은 가벼운 식민주의 아니런가? 공허하며 서성대고 하는 일 없이 종일 킁킁대고 돌아다니고, 별나고 맛난 것, 노천카페에서 거피를 마시고 무지한 눈빛을 하고는 미지의 땅에서 흘끗 본 이미지를 가지고 돌아오는 것.  “소비의 쿵쿵대는 형판(型版) 아래에서 인간의 욕망의 마그마는 계속 끓어오른다.”는 그녀의 표현처럼 왠지 은밀하고 속물적인, 흘끗 보기 속의 덧없는 순간 같은 경박함이 느껴지지만, 바로 이 편안한 겉핥기 관광이 스케치와 기록의 기술을 창출했으며, 이것은 내밀한 자아의 고통을 지탱하는 형식의 기술이라고 연결 짓는다.

1920년부터 1905년 <살롱도톤>에서‘야수’로 불리기 시작한 마티스는 소위 야수파의 영지‘폴리우르’, 프랑스 남부의 어촌인‘카시스’를 그의 영원한 예술 공간으로 삼는데, 그 지중해 빛, 낭만적 태고의 시원을 간직 한 곳, 이국의 꿈을 지닌 비현실적 땅이어서 그랬던지, ‘스콧 피츠제랄드’, ‘캐서린 맨스필드’부터, 일종의 문화그룹이었던 ‘블룸즈버리 그룹’의 멤버들이었던 ‘버지니아 울프’, ‘E.M.포스터’, ‘존 메이나드 케인즈’,‘로저 프라이’,‘버네사 벨’등 오늘날 이름만으로도 화려한 문인, 사상가, 경제학자, 화가들의 무대로서 조명되고, 소녀시절의 기억을 다리 삼아  동네친구의 엄마였던‘도리스’라는 여인이 건네준‘캐서린 맨스필드’의 <일기>와 <서간집>, 그리고 실험영화인이자 거부(巨富)였던 ‘제임스 힐’의 <필름 포트레이트>라는 영화의 개인적 교감에 대한 추억들의 에피소드들을 정말 무심한 즐거움으로 묘사한다.

    

맨스필드의 “자신의 영혼을 발가벗길 수 있었던 사심없는 권위의 글쓰기”와 그녀의 자유분방함,‘버지니아 울프’가 “싸구려에 냉혹하고...파렴치하다.”고 편지글에 남겼던 맨스필드의 인상부터, 결핵으로 단명하였다고 알려져 있지만 실은 “‘자유’시대에 걸린 진단 미확정의 임질”이 죽음의 원인일 것이라고 발칙한 소문도 살짝 퍼뜨린다. “레몬 빛 태양이 내리쬐는 방통의 빌라, 이졸라 벨라”에서의 맨스필드는 마티스의 태양과 신선한 빛과 조우한다. 색채와 빛, 에로티시즘과 오달리스크, 프랑스 남부를 맴돌며 예술의 창조성에 응시한 시선을 멈추지 않는다. 다시 오달리스크, 서양인들의 오만방자한 동양의 왜곡과 서구인의 하렘 바라보기를 뒤집어 놓는다. 오달리스크는 ‘방’,‘학교’의 뜻을 가진 터키어 오다(oda)를 어원으로 하는데, 이를 서양인들이 열을 올리며 상상하는 모든 성 노예의 이미지로 둔갑시켜 ‘타락’,‘순결을 잃다’와 같은 탐욕스러운 상상의 산물로 뒤바꿔 놓았음을‘바이런’, ‘제임스 조이스’까지 일조하며, 마침내 ‘옥스퍼드 영어사전’에 유한여성, 첩으로 왜곡시켜 버리는 여정을 추적한다. 또한 유럽인이 하렘의 여인들을 구속된 성적 노예라는 음탕함으로 변질시켜버린 것처럼, 코르셋을 입은 유럽인을 바라보는 터키의 여자들이 영국 여자들의 예속, 새장 속의 새를 발견하는 모습으로 관찰자의 시선에 따른 역전을 보여준다.

새장 속의 새, 어항 속의 금붕어, 하렘을 바라보는 서구인의 시선은 그런 것이었다는 점은 마티스의 <어항 앞의 여인> 속 여인의 응시는 오히려 서구인의 자기 성찰, 자아에 대한 인식의 촉구가 아니었을까? 기억과 기록, 여행의 여정, 에세이의 종착지는 마티스의 마지막을 지켰던 젊은 간호학교 학생이었던‘모니카 브루주아’, 훗날 ‘자크-마리’수녀가 되어 마티스의 예술적 혼이 배어있는 ‘로사리오 예배당’을 지키며,  마티스적인 얼굴을 한 그녀와의 만남은 허구의 공간을 맴돌던 것 같은 나른한 기분을 순간, 현실로 돌려놓는다. 소설 같은, 회화와 문학을 오가는 햄플의 기억을 따라가다 보면 어느덧 그녀처럼 성스런 무심함에 젖어든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마티스의 오달리스크들을 그린 회화를 중심으로 전개되는 이 예술적 향취 그득한 에세이는 소소한 지적 즐거움과 함께, 아름다움, 열정, 재능,  묵상적 삶의 정수, 인생의 이미지들이 기분 좋게 다가온다. 힐끗 보는 경박한 삶과 세계가 아니라 햄플이 기대하는 인생, “바라보고 생각에 잠기는 것, 혼자 남겨져 끝나지 않는 소설을 읽는 것, 이따금 몇 분씩 고개를 들어 창밖을 내다보는 것, 세계를 응시해 거기서 지나가는 이미지의 문장을 만드는 것”일 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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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딧불이 2011-03-04 23: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항을 응시하는 여인의 눈빛이 예사롭지 않아 보입니다. '오달리스크'의 원뜻이 저렇게 이상한 쪽으로 변질되었으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하고 변질된 의미로만 알고 있었어요. 그런데 이 책을 보려면 그림에 대한 일정정도의 상식을 갖춰야 할 것 같은데요.

필리아 2011-03-05 09:32   좋아요 0 | URL
마티스의 그림이 플롯의 중심이긴 하지만 그림의 해독이나 작가의 일화보다는 <어항 앞의 여인>의 '응시'라는 관조의 모습이 시발점이 되어 삶의 진정한 미덕에 대해 문학,영화,문화적 현상들을 자신의 경험과 추억들을 통해 더듬어보는 에세이에요. 그러나 그림에 대한 일정한 상식의 전제를 요구하는 책은 아니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