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의 위대한 여행
앨리스 로버츠 지음, 진주현 옮김 / 책과함께 / 201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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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오늘날의 인류, 현생인류라고 하는 종(種)은 과연 언제부터 이러한 모습을 하고 있었을까? 또는 대체 최초의 기원이라 할 수 있는 어떤 출발지가 있었을 텐데 그곳은 어디일까? 그리고 어떻게 지구상의 모든 대륙과 섬에 퍼져 나갔을까? 황색과 흑색, 백색의 피부색과 눈과 코 등 얼굴의 윤곽이 뚜렷하게 차이나는 것은 왜일까? 아무튼 뿌리를 찾아가다 보면 이러한 의구심들이 해결되지 않을까하는 기대를 하게 된다. 그렇다면 우리들, 즉 현대호모사피엔스에 대한 학계의 통일적이고 확정적인 결론이 있다는 것일까? 사실 호모일렉투스니 호모하이델베르겐시스, 네안데르탈인 등 호미닌 種에 대한 분류에 있어서 고생물학계도 병합파와 세분파로 나뉘어져 있는 모양이다. 다양한 형태의 화석을 하나의 종으로 묶으려는 병합파와 화석간의 차이점에 주목하려는 세분파는 호모사피엔스니 나아가 호모사피엔스사피엔스니 하는 식의 모호한 각축장이 되고 있다. 게다가 현생인류의 동아프리카 기원을 주장하는 서구중심의 다수파와 오늘의 중국인은 호모일렉투스로부터 진화했다고 주장하는 중화중심의 지역 기원설까지 그야말로 다종다양한 견해들이 있다.

이처럼 절대적이고 결정적인 이론이 정립되지 못하는 것은 입증할 수 있는 구체적 증거의 희소성과 불확실하고 불명료할 밖에 없는 화석에 의존하기 때문이라 할 것이다. 지질학, 생물학, 해부학, 유전학 등을 전문배경으로 한 유능한 고고학자들이 엄청난 과학기술의 도움으로 연구 매진하고 있음에도 수 만년, 수 십 만년 전의 흐릿한 흔적들을 통해 그 계통의 논리성, 역사성을 규명하는 일에는 한계가 존재하는 것이 어쩜 당연한 현상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저자인 영국의 해부학 의사인 이 여성학자가 현생 인류의 지난한 발걸음을 좇으며 들려주는 다양한 관점과 고고학적 방법들, 그리고 그 증거인 화석과 유물, 유적에 대한 이야기들은 주류의 주장을 수용할 수도 있으며, 혹은 새로운 돌파구를 발견하거나 반론을 지닐 수도 있게 안내한다. 특히 현학적인 접근을 피하고 인류화석의 발굴지들을 중심으로 아프리카에서부터 아시아, 유라시아, 오세아니아, 유럽, 아메리카대륙에 이르는 직접의 체험적 여정을 에세이로 담아내 자칫 지루할 수 있는 고고학을 유쾌한 지식여행으로 이끌고 있어 수월한 이해를 도와준다.

현생 인류에 대한 기원과 그들이 지구촌 곳곳에 이르게 되는 경로는 저자가‘아프리카 기원설’에 학문적 동의를 하고 있다는 의미이지만, 다른 이론이나 주장을 경시하는 것은 아니다. 반대 이론이나 그들이 제시하는 화석과 지질학적 증거, 유물과 흔적들을 그대로 제시하고 있다. 다만, 그 과학적 접근이나 증거물에 대한 연대측정의 불완전성에 대해 논리적인 비판을 하고 있어, 이에 대한 수용은 그대로 독자의 몫이란 판단에 맡겨지고 있다 할 수 있다. 한편 이 저술이 지향하는 대중적 접근이라는 친절함이 돋보이는데, 대략 30여 쪽에 달하는 서문에 지구의 지질학적 연대인 플라이스토세(홍적세), 즉 빙하기의 연대별 세분을 통해 인류의 이동과 기후, 환경의 영향을 연결 지을 수 있게 하여주고, 화석의 연대측정 기법인 발광 연대 측정, 방사성 탄소 연대측정, 포타슘-아르곤 연대측정, 전자스핀 공명법 등이 어떠한 방법을 통해 그 연대성을 적확하게 측정해내는지 그 과학적 신뢰성을 알려주기도 한다. 더구나 모계(母系)로부터만 물려받는‘미토콘드리아 DNA’를 통해 인류의 모계를 역추적하여 그 기원에 이르는 유전기술은 강력한 과학적 신뢰의 기반이라는 새로운 이해를 안겨주고, 이후 본격적인 고고학적 발견들과 주장들을 독자적으로 해석하고 비판할 수 있는 길을 열어준다.

저자는 호모사피엔스의 화석이 가장 많이 발견된 동아프리카인 에티오피아‘헤르토’와 ‘오모 키비시’의 발굴 현장을 시작으로 현생인류의 위대한 흔적을 따라간다.  호모사피엔스는 동아프리카를 벗어나 언제부터 동쯕으로 또는 북쪽과 서쪽으로 이동하기 시작했을까? 넓게 막아선 사막과 빙하, 산맥을 넘어설 수 있었던 시기는 과연 언제였을까? 그 가능한 이동 경로는 어느 곳이 될 수 있었는지 화석 발굴지들을 연계하여 인류의 조상들의 발자취를 좇는 과정은 진정 신비로울 정도로 경이롭기만 하다. 해안을 따라 대륙에서 대륙으로 그래서 인도를 지나고 동남아시아의 인도네시아로, 그리곤 오늘보다는 해수면이 낮아 근접해있던 섬들을 건너 오스트레일리아로, 또는 동북아시아로 이동하는 대 여정은 그야말로 호모사피엔스라 명명된 4만5천 년 전의 인간 조상들의 생존을 향한 감동적인 집념과 슬기를 느끼게 한다. 그들은 바다를 어떻게 건널 수 있었을까? 배를 만들었을까? 가능한 추측일까? 아니라면 대체 어떻게 오스트레일리아에서 현생인류의 화석이 발견될 수 있겠는가! 인도네시아 밀림의 풍부한 대나무와 줄기들, 다양한 식생들, 그래서 대나무로 엮은 원시적 배를 타고 실험항해를 직접 해보기도 하는데, 과연 그네들은 성공한다. 이를 실험고고학이라고 한단다.

이러한 흥미로움이 이 저술 곳곳에 빼곡하다. 동북아시아를 거쳐 베링해를 건너 알래스카, 아메리카 대륙으로 이동하는 인류는 또한 어떤가? 1만2천년 전에야 비로소 간빙기에 접어드는데, 1만4천년~1만8천년 전의 남아메리카에서 발견되는 호모사피엔스의 화석은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엄청난 빙하가 북아메리카 대륙에 놓여 모든 생명의 존재를 부인하던 그 삭막한 지대를 어떻게 통과했을까? 아니면 유럽에서 대서양을 건너 아메리카 대륙에 도착한 인류가 있었던 것은 아닐까? 매머드의 멸종과 인류의 아메리카대륙에의 도착은 과연 우연일까? 1만2천년 전의 대운석 충돌로 인한 것일까? 이에 대한 가능한 이론과 고고학적 발견들이 저자의 여행체험에 실려 생생하게 수를 놓는다. 아마 저자의 이 인류기원 대탐사의 여정은 엄청난 감동으로 가득했을 것만 같다.

그러나 여전히 풀리지 않는 미궁들이 있다. 유럽대륙에 공존하다 어느 순간 사라져버린 네안데르탈인은 호모사피엔스와 어떤 관계가 있었을까? 왜 그들은 사라지고 호모사피엔스만이 오늘의 인류로 진화했을까? 서로 유전자가 교환되는 일은 없었을까? 그러면서 자연스레 종이 합쳐진 것은 아닐까? 남아메리카 호모사피엔스의 화석은 동북아시아인의 생김새와 다르다. 그럼 그들은 또 무어란 말인가? 무궁무진한 의문과 과학적 해석이 더해진다. 호모사피엔스의 기원과 확산에 대해 이렇게 풍부하고 다채로운 해석을 풀어 놓은 저술은 없을 것이다. 아프리카 기원설, 다지역 기원설, 그리고 중간이론인 아프리카에서 출발한 호모사피엔스와 지역의 원시 호미니드와의 교배설까지 아무튼 흥미롭고 절묘한 고인류학이 독서의 여정을 내내 즐겁게 해준다. 어쨌든 우리 모두는 이들 호모사피엔스의 독창성과 적응력 덕택에 꿋꿋하게 살아남아 문명을 일으키고 이렇게 존재하고 있으니 그들에게 감사해야 하지 않을까? 재미와 지식과 감동을 함께 느끼게 해주는 따분함하고는 거리가 한 참 먼 걸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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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금의 역습 - 내 몸속 세포가 말라 죽고 있다
클라우스 오버바일 지음, 배명자 옮김 / 가디언 / 201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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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한국인의 식단은 유독 자극적인 음식이 많다. 맵고 짠맛이 사실 특징이랄 수 도 있는데, 그래서인지 신장질환자를 주변에서 많이 발견하게 되는 사유인 모양이다. 염화나트륨, 바로 소금이 우리네 음식, 특히 장류인 간장, 고추장, 된장은 물론 김치, 젓갈, 장아찌에서부터 전골, 찌개, 탕, 조림 등을 통해 엄청난 양이 우리 몸속으로 유입된다. 게다가 각종 냉동식품, 즉석식품, 통조림 등 염화나트륨 덩어리인 가공식품까지 가세하여 그야말로 소금이 한국인의 몸을 절이고 있다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닐 것이다.

이 책을 들게 된 이유도 손발이 붓는 것 같고, 소화능력도 석연찮은 것이 혹 너무 짜게 먹는 것 아닌가하는 나름의 의심과 진단 때문에 소금이 인간의 신체에 미치는 영향, 그 질환은 물론 예방책이나 저염식 식단에 대한 정보를 얻기 위해서였다 하겠다. 그러나 실제 염화나트륨(소금)이라는 미네랄이 우리 신체의 각 기관이나 호르몬, 그리고 생체장치로서 수행하는 역할을 접하고는 그 기능상의 중요성과 민감성에 놀라움이 생각보다 컸다고 할 수 있다.  

소금이 혈액순환을 담당하는 림프계에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이나, 신장 사구체의 기능을 저하시켜 소변 항상성의 기능을 훼손하고, ‘혈압 상승 터보장치’인 ‘노르아드레날린’이란 호르몬에 민감하게 반응해 혈관을 수축시켜 혈압을 올린다든가, 생체 중에 압수용체라는 혈압조절 역할장치가 유독 한 물질로부터 큰 영향을 받는데 그것이 바로 소금으로서 생명의 결정적 위협이 되기도 한다는 것이다.

또한 소금은 혈액 속으로 파고들어가 그곳에서 물과 결합하고 혈액은 빼앗긴 물을 보충하기 위해 세포에서 물을 빼내와 생명장치를 파손하고 생체의 균형을 망가뜨리기도 하며, 관절활액을 희석시켜 점성을 떨어뜨려 관절의 손상을 야기하기도 한다.
이러한 위협적인 기능에도 불구하고 가장 시선을 잡는 것은 소금이 인간의 본질적인 생명장치라 할 수 있는 ‘심장’의 펌프강도를 조절하고 혈관의 저항력을 조정하는 핵심적 영향을 미친다는 설명이다. 이는 단순히 짠맛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던 내 무딘 감각이 벌떡 일어나게 하는데, 게다가 피부노화, 시력감퇴 등 수분과 관계하는 모든 신체적 현상에서 과다한 소금이 가져오는 결정적 폐해는 지금까지 나의 식생(食生)을 전면적으로 전환 할 것을 요구한다.

염화나트륨이 우리의 몸에 결코 불필요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생명유지를 위한 필수적 미네랄임에 분명하지만 성인기준 하루 섭취량의 한계인 5~6그램 이상을 먹는 우리의 과다한 소금식단이 가져오는 가공할만한 폐해가 문제인 것이다. 아마도 이 한계기준량의 몇 배를 우린 별 생각 없이 그 짠맛에 중독되어 자기 신체를 학대하고 손상시키는지도 모르며 죽음에 가까워진다는 경고이다.
이 책은 이처럼 소금의 무서운 신체적 해악의 설명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의학적, 생리학적 지식을 통해 적정한 식습관과 신체관리를 지원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보여주고 있다.

나트륨과 염화물이라는 필수 미네랄의 결정체인 소금이 인체에 심각한 위협을 가한다는 것은 달리 해석하면 그만큼 중추적 역할을 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몸 속 수분조절, 영양소 수송, 수소이온 농도조절, 뇌의 신진대사, 근육유지 및 혈압유지 조절, 단백질 소화 등 그 기능은 그야말로 절대적이라 할 수 있기조차 하다. 그러나 인체가 요구하는 양 이상이 투입되고 있어 그 균형을 상실한 신체들은 그 만큼 비극적 상황에 처해있는 것이기도 하다는 의미가 된다. 자연의 산물에는 굳이 소금을 별도로 섭취하지 않더라도 이미 충분한 염화나트륨을 포함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는 우리가 별도로 가미하는 각종 장류와 가공식품, 음식은 이미 지나칠 만큼 많은 소금을 포함하고 있어 주의하여야 할 것임을 말하는 것이다.

아보카도, 양배추, 바나나, 감자, 브로콜리, 시금치 등 과일과 야채에는 이미 인간이 섭취할 충분한 일일 나트륨과 칼륨이 들어 있는 만큼 별도의 염화나트륨은 과잉 섭취가 되는 것이며, 그러나 우리 식습관이란 단숨에 바뀔 수 있는 것도 아니니 염분 배출을 돕는 감자, 고구마, 오이, 부추, 버섯, 대두, 토마토, 감귤의 섭취는 훌륭한 건강관리 대안이 되어 준다. 더구나 소금이 아니더라도 풍부한 미네랄과 염화나트륨을 포함한 타임, 로즈마리, 바질 같은 채소이자 양념의 제안, 저염식 요리와 간식, 주스, 염분 배출 식단의 친절한 소개는 기꺼이 실천하는데 유용한 도움이 된다.

‘나트륨-칼륨 펌프’에서부터 ‘세포외액', '푸린(purine)의 덫', 각종 호르몬의 작용까지 소금의 인체 내에서의 생리학적 역할과 기능을 대중적으로 쉽게 풀이하여 섭생에 경각심을 갖게 하여주고, 나아가 소금과 관련한 역사적 일화나 당뇨 등 관련된 질환까지 아우르고 있어 편하게 읽을 수 있는 건강 지침서이자 저염식 식생활 실천 가이드로서 효과적인 역할을 수행한다. 짠맛, 거부하기 어려운 맛의 유혹이지만 우리의 말라죽는 체세포들, 고달픈 신장의 장치들, 신경계들을 위해서 점진적으로라도 소금을 줄여나가야 할 것 같다. 짧은 저술이지만 유익함이 큰 저작이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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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위대한 명연설
에드워드 험프리 지음, 홍선영 옮김 / 베이직북스 / 201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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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역사에 어떤 새로운 흐름, 또는 전환을 만들어 낼 정도의 연설, 그것은 대중의 마음을 자신의 신념이나 이기적 목적의 실현을 위해 설득하는‘말(語)’일지언정 분명 무언가 인간의 감성을 꿰뚫는 통찰을 지니고 있을 것이다. 이를 조금 비딱하게 말하자면 사람, 군중의 심리를 선동할 줄 아는 기술에 능한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고, 반대로 우호적으로 표현하자면 자기희생, 겸허와 같은 진심으로 느껴지는 감동이 담겨있기 때문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연설집에는 17세기 영국여왕‘엘리자베스 1세’의 오늘의 시선으로 읽자면 오만방자한 의회연설부터 21세기 미국 최초의 흑인 대통령인‘버락 오바마’의 취임연설까지 영미권(英美圈)을 대표하는 40여 명연설이 수록되어 있다. 이 중에는 시대의 간극 탓으로 명문이라 할 수도, 또는 감동이나 공감을 가질 수도 없는 것들, 서구중심이라거나 자국중심의 이해관계에 얽혀있어 반감을 일으키는 것들도 있다. 그럼에도 여러 의미에서 중요한 가치를 지니고 있음을 부정하기는 쉽지 않은데, 근현대사의 생생한 현장을 볼 수 있다는 것과 역사적으로 잘 알려진 명문들을 포함하고 있는 연설의 전체와 맥락을 접할 수 있다는 유익함 등이라 하겠다.

특히 부수적으로 획득하게 되는 유익성이 어떤 측면에서는 명연설의 구성적 측면을 넘어선다 할 수 있다. 미국의 대 영국 식민지 독립투쟁, 인디언 원주민에 대한 백인의 악행, 흑백 인종차별의 지난한 역사, 양차대전 당사국의 현황과 입장, 구미 열강과 소비에트 러시아 및 국제 공산주의와의 팽창주의 대결, 식민지배에 대한 영미의 관점, 여성 참정권을 비롯한 민주주의 실현의 과정, 하물며 지구 생태계보존, 사형제도, 인종간의 화합을 향한 진정의 목소리까지 정의와 도덕적 가치에 이르는 폭넓은 식견들을 목격 할 수 있게 된다. 따라서 『위대한 명연설』이라는 이 저술의 가치는 단순한 연설집의 의미를 뛰어넘어 근대 역사와 사상의 향연이랄 수도 있다.
한 인디언 종족의 추장인‘테쿰세’의 만족 할 줄 모르는 백인들의 탐욕에 대한 적극적 저항의 외침이나, 오늘의 흑인 대통령 탄생의 밑거름이 된 노예해방전쟁기의‘프레더릭 더글러스’가 외치는 백인들의 이중적인 도덕성의 잣대와 위선에 대한 주장, 여성 참정권의 당위성에 대한 투쟁의 연설에서 뿌리깊은 인종과 성적차별, 제국주의적 본성을 보면서, 오늘의 서구사회가 역사에 대한 반성은커녕 잃어버린 19세기의 제국주의적 자신들의 힘의 회복을 부르짖는 가증스러움도 확인하게 된다.

1918년 미국 대통령 ‘우드로 윌슨’이 주창한 ‘평화조약 14개 원칙’을 포함하는 유명한 연설은 당시 식민지 상태였던 한국으로서는 중차대한 의미를 지니는데, “타인에게 정의가 실현되지 않는다면 우리에게도 정의는 실현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뚜렷이 확인하였다.”고 짐짓 평화와 정의를 말하지만 식민지 주권문제는 지배국가의 뜻에 맡긴다는 터무니없는 내용을 담고 있음에서 단지 자국의 이익을 위한 평화전략이상이 아니었음을 알게 되는 것과 같다. 
우리 입장에서 보면 이러한 아전인수식의 연설들을 새롭게 발견하게 되는 것인데, 그들, 영국이나 미국 등 서구 제국주의 국가들의 자국민에게는 더없이 열정과 희망을 자극하는 것이었겠으나 그들과 반대쪽에 서있는 아시아인, 동양인으로서는 입맛이 쓸 수밖에 없다. ‘윈스턴 처칠’에 대한 영미국가들의 존경을 모를 바는 아니나, 그의 연설에서 나는 한 마디로 전쟁광의 모습과, 패권주의자의 야심만을 읽게 된다. 그의 연설은 ‘평화의 핏줄’이라는 별명까지 붙어 다니는 모양이지만 “미영 양국의 공동기지는 전 세계 수많은 섬에 퍼져있다. 우리군의 군사기지가 될 것”이라는 한껏 들뜬 팽창주의적 야심이나 “물질적 풍요에 이의를 다는 것은 국가의 자유를 저지하는 인간 이하의 범죄다”와 같은 근시안적 가치관에서 사실 좌절감이 더 깊어지기만 할 뿐이기도 하다.

그러나 다행인 것은 윌슨이나 처칠같은 서구 제국주의 지도자들의 모순된 내용에 대한 서구인들의 열광만이 있는 것이 아니니 말이다. 미국의 대통령‘프랭클린 루스벨트’나 영국 수상 ‘해럴드 맥밀런’ 같은 이들의 서로의 차이에 대한 이해,  그러면서 차이를 넘어 먼 미래의 앞날까지 내다보고자 노력하는 다원성과 자유와 관용의 모습이나, “물질적 부가 성공의 기준이 아니어야 한다.”면서, “도덕적인 자극이 더 이상 맛없는 이윤에 대한 맹목적인 추구 때문에 가려져선 안 된다.”는 윤리적 변화와 행동의 실천에 대한 반성과 요구는 그야말로 보편적 진리를 내재하는 명연설의 귀감으로 새겨지기도 하는 것이다. 

한편 잘 알지 못하던 오스트레일리아(호주)의 수상, ‘케빈 러드’가 호주원주민에 대한 이주민인 백인들이 수백 년간 자행한 야만적 폭력과 차별을 진심으로 사죄하는 2008년 국회연설은 진정 진한 감동을 안겨준다. “타들어가는 괴로움이 종이를 뚫고 나올 듯이 고함을 내지릅니다. 그들에게 가해졌을 상처와 모욕, 멸시, 어머니와 자녀를 물리적으로 갈라놓는 그 터무니없는 잔인함이 우리의 감각을, 인류애를 깊숙이 찌릅니다.”라는 절절한 이해와 속죄의 표현, 더구나 “이렇게 사죄드리지만 겪은 고통을 없앨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말은 그리 강력하지도 않고 슬픔은 지극히 개인적인 까닭에...”하는 구절에서는 감동으로 눈물이 다 나올 정도이다. 이러한 진심의 사죄를 더욱 빛나는 하는 것은 세 번 거듭되는 사죄의 말이다.
“오스트레일리아 총리로서 사과드립니다.  오스트레일리아 정부를 대신해 사과드립니다.  오스트레일리아 의회를 대신해 사과드립니다. ” 그는 이렇게 'I am sorry'를 세 번이나 말했다. 어느 누가 그를, 백인들을 용서치 않겠는가! 이것이야말로  21세기 최고의 명연설이 아닐까?

‘마하트마 간디’의‘비폭력, 비협력 운동(사티하그라하(satyagraha))’의 의지를 그대로 드러낸 재판정 연설, 사랑을 위해 왕위를 내던진 시대의 로맨티스트로 기억되는 영국 왕‘에드워드8세(윈저공)’의 퇴임사, ‘워터게이트’라는 파렴치 행위로 중도 사임하게 된 ‘닉슨’의 몰염치하고 졸렬한 자기변명에 급급하는 연설, 영미권 국가들의 소위 20세기 4대 명연설이라는 프랭클린 루스벨트 취임연설, 윈스턴처칠의 나치침략 전쟁 독려사, 존F.케네디의 취임연설, 마르틴 루터 킹의 워싱턴 평화행진 연설, 신자유주의를 주창하는 마거릿 대처의 공기업 민영화, 공공지출의 감축, 노동조합의 규제, 나아가 패권주의 부활의 외침같은 한심하기 짝이 없는 연설까지 다양한 역사적 사건을 포함하는 진귀한 자료들은 이 연설집의 또 다른 기능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사람들에게 열정과 감명을 불러일으키는 이들 명연설 테크닉을 배우는 참고로서는 물론 역사적 사실과 인류의 보편적 진실로서의 도덕성과 정의에 대한 성찰까지 실로 일거양득, 일석삼조의 저작으로서 면모를 갖추고 있다. 한 권 쯤 읽어보고 지닐 만한 도서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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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곱 번째 이름 모중석 스릴러 클럽 27
루스 뉴먼 지음, 김지현 옮김 / 비채 / 201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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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을 집어 들었다면 에필로그의 마지막 페이지를 읽고 책장을 덮을 때까지 결코 내려놓을 수 없다. 명문 케임브리지대, 젊은 대학생 무리들, 반사회적 성격장애자, 성적 학대, 살인사건과 같은 소재도 흥미로운 요소이지만 끊임없이 현혹되는 사건의 장치들에 기만당하고 그 전복이 거듭되는 함정에 빠지게 되는 의식의 향연, 그리고 '에어리얼(Ariel)'칼리지라는 케임브리지 29개 칼리지에는 없는 허구의 배경과 함께 억압받는 여성의 고통을 섬뜩하고 처절하게 그려내곤 했던 시인(詩人) '실비아 플라스(Sylvis Plath)'의 자살과 그녀의 정신병원 경험, 소외와 자기파괴라는 음침함이 고스란히 스며있는 유고시집 『에어리얼(ariel)』이 연결되어 기묘한 환상을 키운다.

단지 살해사건의 용의자 추적이라는 궤적이 주는 흔한 스릴이나 범죄수사과정의 추리에 머물지 않는다. 피로 낭자한 살인 현장에 온 몸에 피를 뒤집어 쓴 채 텅 빈 눈을 하고 자아를 잃어버린 것 같은 여학생 ‘올리비아’, 피살자의 흘러내린 내장을 안으로 밀어 넣는 남학생‘닉 하드캐슬’처럼 눈에 보이는 사실은 있으나, 살인자는 그야말로 오리무중이라는 아이러니가 맨 먼저 호기심을 이끈다. 그리고 시간을 거슬러 발생한 살인 사건과 세 명의 피살자, 동료 학생들의 관계성이 암시와 복선을 내재하고 인간들의 복잡한 심리와 행동, 그 갈등들을 매혹적으로 그려낸다. 게다가 이성에 대한 유혹과 소유욕, 질투와 배신이라는 젊은 남녀들이 발산하는 본능의 무대창치로서 캠퍼스 생활은 감각적 재미를 더하고, 소설의 중심 플롯이 되는 정신분석과 심리치료의 장면들에서 펼쳐지는 지적 게임과 그 곳에서 드러나는 아동의 성적 유린과 인간의 가학성을 보게 되는 것은 또 다른 의미에서 독자의 의식을 지배한다.

한편 이번 한글 번역본의 제목인‘일곱 번째 이름’은 한 인간의 내면에 여러 교대인격을 지닌, 세칭 다중인격자를 상징하고, 소설 내에서도 반복되어 설명되고 있지만 원제목인‘twisted wing', 즉 ’비틀린 날개‘라는 기생곤충을 통해 “뒤틀린 내면을 지랄 맞게 잘 숨기는 몸”을 비유함으로써 반사회적 성격 장애자의 성향을 효과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제목에서부터 시작된 이러한 소설적 장치들은 반전요소의 시발점이 되고 있는데, 이는 몇 차례의 거듭되는 반전에도 실마리를 잡을 수 없는 눈가리개이기도 하다. 범인에 대한 심증이 굳어지는가하면, 이윽고 형사 판결조차도, 수사지휘자, 용의자의 심리분석자까지도 반전을 회피하지 못할 정도이니 작가의 교묘한 구성에 그만 혀를 내두르게 된다.

작품 초반부에 범인의 프로파일링에서 추정하는 내용들, 즉 추상적이고 막연하며 도식적인 일상적 표현들이 얼마나 정교한 단서들이었는지를 책을 마치고 나서야 깨닫게 되니 싱겁고 겸연쩍은 웃음이 절로 나오기도 한다. “오랫동안 공상하던 놈의 짓 같거든. 이렇게 극단적인 시나리오에 대한 환상을 키우려면 세월이 필요한 법이다.”라는 문장의 구체성을 어떻게 흩어진 내용들에서 독자가 꿰어 맞추느냐의 능력이라고 할 수 도 있을 것이다.

사실 주제의식에 대한 이해보다 이 소설은 심리상담 장면, 목격자의 진술, 피해자 동료 학생들의 진술과 같은 단서와 작품의 호흡을 끊을 수 없도록 마력을 가하는 작가의 교활할 정도의 심리 지배력이 훨씬 매력적이겠지만, 구태여 주제성을 부각한다면, 평생을 가족과 기성사회로부터 고문 받고 학대받고 경멸 받은 사람이 성장하여 사회에서 어떤 인간으로 살아 갈 수 있겠는가하는 연민이기도 하며, 혹은 그 증오와 분노의 실체에 대한 성찰을 통해 우리 사회의 건강성에 대한 회의와 반성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인간의 행위나 본성을 심판하는 일에 있어서 인간사회와 그 제도가 보이는 한계를 찾을 수도 있고, 해리성 정체성 장애의 과학적 판단에 대한 의심의 눈초리나 반사회성이 지니는 정신분석학적 연민에 대한 반대 가설의 입증이기도 하다.

상대방을 짓밟는 법을 잘 아는 사람들, 누군가의 행복에 독을 한 방울 떨어트리지 않고는 못 배기는 사람들, 지나치게 타인의 상처와 고통에 연민을 보내는 사람들이 피살자들의 성향이다. 타인에게 적절히 섞여들어“숙주의 몸을 의태(擬態)”할 줄 아는 인간들은 이러한 인간들의 목숨을 빼앗는다. 특히 순종을 가장하고 수동적이며 헌신적인 연인이 그럴듯하게 의태하고 나타날 줄 어떻게 알겠는가? 궁극적 목적이 난도질 그자체인 연쇄 살인자가 대반전을 알리는 달콤한 목소리, 웃음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아~절묘하게 잘 쓴 소설이다! 아마 재미의 지존, 반전의 종결자! 라 하여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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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셸 푸코의 휴머니즘 - 진정한 휴머니즘을 향한 푸코의 사유와 실천의 여정 철학 스케치 2
디디에 오타비아니 지음, 심세광 옮김, 이자벨 브와노 삽화 / 열린책들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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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푸코의 비판적(?) 방법론 또는 사유방식을‘지식의 고고학’이라고 한다. 고고학이란 본래 땅 속에 묻힌 역사적인 것의 기원을 통해 그 시대의 삶의 방식을 연구하는 것이라 할 수 있으니, 알려져 있지 않거나 알지 못하는 지식의 층위에 드러나지 않은 어떤 관계성을 탐색하는 것이 바로 지식의 고고학이라 이해해야 할 것이다. 이 저작은 이처럼 푸코가 천착한 사유의 거대한 틀을 기반으로 인간 사회가 내재하고 있는 경향들에 대항해 그가 일관되게 말하고자 했던 저항의 담론을 생성해 낼 수 있는 도구들을 깔끔하게 정리하여 전달해주고 있다 하겠다.

푸코의 고고학적 방법론이란 특정 시대의 담론들은 그것들이 지니는 이질성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결합규칙과 상호관계를 이해하게 되면 그 시대를 지배하는 공통의 토대를 노출시키는 복잡한 관계들을 밝혀낼 수 있다는 관점이다. 그래서 그는 시대의 서로 다른 언표(言表)들과 문서고들이 외부성과 연결되어 만들어 낸, 그 어떤 한 시기를 총합하는 인식론적 형상들이나 형식화된 체계들을 발생시키는 관계를 이해해 보려고 시도한다.  그의 저술 중 『광기의 역사』에서 등장하는 대감호나 정신병원과 같은 공간이 인간의 정의, 즉 광인(狂人)이나 사회적 일탈자들이 어떻게 취급되는지를 해독해 내는 것과 같은 예라 할 수 있다. 대감호라는 격리시설은 광인들, 걸인, 빈자, 방탕자들과 같이 사회질서를 동요시킬 수 있는 모든 사람들을‘이성적인 동물’로 규정된 인간의 범주에서 배제하여 이성(理性)의 도식 밖에 있는 공간으로 내모는 장치이다. 바로 이러한 사회적 실천행위는 당대의 가치관이나 사상적 토대가 된 어떤 담론들의 형상화이며, 이를 통해 그 사회의 도덕성, 정치적 선택 등의 관계성을 이해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같은 언표인 광인이라도 르네상스시대에 그들은 “은밀한 진실, 이성이 모르는 지식을 소유한 자”라하여 사회에서 배제되거나 격리되지 않았다. 그러나 고전시대에 들어서면 소위 데카르트의‘생각하는 나’와 같은 코기토(cogito)의 이성 중심의 사고관이나, 광기를 착각, 오류, 합리적 길을 벗어난 부도덕한 도덕적 주체로 취급하여 이성의 장으로부터 완전히 격리시키듯이 특정시기의 언표들과 실천들의 관계를 분석하면 그 시기가 의도하는 담론적 질서들을 통일 할 수 있는 관계들의 총체를 알 수 있게 된다. 이처럼 담론간에 존재하는 관계인 언표들 총체의 공통 토대를 푸코는 '에피스테메(episteme)'라 부르는데, 이것은 어떤 사회의 잠정적 형식화된 체계들을 발생시키는 지배적 담론들을 추정하고 분석, 비판, 저항할 수 있는 도구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러한 담론과 광인, 이성, 대감호, 정신병원과 같은 이질적 언표들에서 푸코가 읽어낸 ‘규율사회’와 ‘권력’과 같은 인간사회의 특징적 인식이 어떻게 사람들을 예속시키고 통제하며 조작하는지, 그 작용의 현상들을 발견하게 된다. 대감호라는 일방감시체계는 보여 질 수 있고 또 처벌받을 수 있다는 개인의 공포감을 지속적으로 유지하는 장치이다. 이는 바로 인간의 정신을 붙잡고 일탈을 예방하게 하여 규율에 맞는 동질화 된 인간, 온순하게 순종하는 신체를 만드는 일종의 기술인 것이다. 그래서 지식에 통합된 권력은 “인간을 복잡하고 규율화하는 복잡한 생산구조 내에서 기능하는 신체 상태로 환원시켜 개인을 모두 유사하거나 혹은 적어도 비교 가능하고 양립 가능한 존재”로 바꾼다. 즉 권력은 규율을 금기로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생산을 최적화하려는 사회구조를 창조하는 도구로 사용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담론이 형성하는 지배적 질서요 권력의 심급이라 할 수 있다.

이렇듯 자기 자신들이 어디로 가는지 모르는 사이에, 스스로들 발화한 담론의 질서에 예속된다. 일시적 사건에 대한 허용과 금지의 이분법으로 심판하는 법과는 달리 규율은 일군의 규범들로 사람을 항시적으로 평가하고 압박한다. 그리고 이는 조사에서 점검으로 그 방법론을 진화시켜왔으며, 보이지 않는 눈들, 잠재적 통제의 임무와 같은‘내치’의 기술을 가다듬어 왔다. 사실 우리는 무한히 작은 정치권력이 포위한 환경 속, 촘촘히 들어찬 감시의 망 속에 살고 있다는 의미이다. 비근한 예로  우리는 자신들이 내면화한 규범체계에 부합하지 않는 타인에 대해,‘정상이 아니야’라고 무심히 말하지만, 이 언표에는 단지 자각하지 못했을 뿐 이미 무수한 외부의 담론적 질서에 학습되고 노출된 무의식을 내재하고 있는 것이다. 즉 동일한 인간으로 변형시키려는 규율사회의 권력에 침식되어 차이를 제거하고, 일탈을 금지하여 시민을 ‘온순한 신체’를 가진 부품화 하는데 저항 없이 동조하는 것인데, 그러나 정상과 비정상이란 그 본질을 보면 사실 어이없는 다양성의 배제, 차이의 제거와 같은 전체주의적 권력의 도사림을 볼 수 있다. 이처럼 동일화시키려는 규율체계에 종속된 사회체계가 다양성으로 풍부한 낯선 세계와 마주할 때에도 지속적인 존재가 가능할까?

그래서 푸코가 말하는‘주체’를 발견하는,‘주체화’에 대한 이해는 예속을 선택한 오늘의 사회를 극복하고 참된 인간관계, 다양한 사유와 행동, 문화를 존중하고 함께 살아가는 인류를 위해 절대적인 과정이 된다. 내가 말하는 것들, 마치 나의 언표나 담론이라 생각하는 것이 자신의 의식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접근 할 수 없었던 숨겨진 토대, 즉 무의식의 차원에서 발화되는 것인데, 발화하는 대다수의 담론들은 우리들의 것이 아니라 우리가 속한 사회와 제도의 산물임을 깨닫는 것이다. 결국“내 자신을 구성하게 될 이 일련의 담론, 규칙, 그리고 규범과 직면해 나는 여전히 주체일 수 있는가?”하는 의문이 당연히 터져 나온다. 이의 대답은 일견 단순하다 할 수 있는데, 우리를 포위하고 있는 예속의 절차를 깨닫고, 그리고 벗어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푸코는‘자기 배려’를 강조한다. 이는 자기 연민과 같은 자기에 대한 핥고 빨기나, 카르페 디엠(carpe diem; 지금의 매순간에 충실하라)류의 하루하루 사는 삶의 권유가 아니라, '멜레테 타나토(melete thanatou)', 즉 막 죽으려 할 때처럼 내 자신의 행동을 사유해 보려고 목표하는 것, 그럼으로써 “내 자신으로의 회귀, 내가 영위한 영원한 삶으로의 회귀, 죽음의 척도에 비추어 내가 실현하고자 하는 행동의 가치로 회귀”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우리 자신을 주체화할 때 비로소 자기로의 회귀, 예속되지 않은 진정 인간다운 삶, 곧 휴머니즘을 회복할 수 있게 된다.

이 짧은 저술이 과연 푸코에 대해 얼마나 얘기해 줄 수 있을까하고 의심의 눈초리를 가졌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인간의 죽음’을 선언한 푸코, 안티-휴머니스트로 인식된 푸코야말로 진짜배기 휴머니스트라고 말하는 이 저술이 채택한 푸코 읽기와 해독은 그 설명과 주제의 뛰어난 연결성을 확보한 유연함과 명료한 해석으로 엄청난 지성의 광휘를 보여준다. 아마 푸코가 일관되게 제시하려 한 저항의 담론을 생산해 낼 수 있게 해주는, 사유의‘연장통 같은’개념적 도구들을 이처럼 체계적이고도 수월하게 제공한 저작은 감히 없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미셸 푸코’의 저술들을 읽었던 사람에게는 그의 사상에 대한 완벽한 정리가 되어주고, 앞으로 읽으려 하는 모든 사람들에게는 기막힌 길잡이가 되어줄 저작이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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