좁은 문 - 펭귄 클래식 펭귄클래식 5
앙드레 지드 지음, 이혜원 옮김 / 펭귄클래식코리아 / 200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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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좁은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음이라." 

내게 ‘알리사’와‘제롬’은 40여년 가까이 이름을 잊지 않은 몇 안 되는 소설 인물이다. 모든 것이 첫 인식일 만큼 어린 시절에 읽었던 작품이어서 그 감성적 영향이 깊었던 탓일 것이다. 간절함과 애틋함이 절절한 사랑에도 불구하고 비극적인 결말에 이를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당시에는 이해하지 못했던 것 같다. 알리사는 그토록 사랑하면서도 왜 제롬을 받아들이지 못했던 것일까? 또한 제롬은 왜 그렇게도 우유부단한 것일까? 뭐가 이렇게 어렵고 복잡해? 라는 안타까움이 감상의 전부였을 것이다.  

이제 나는 이 작품을 어떻게 읽어 낼 것인가? 라는 것은 스스로도 흥미로운 관심사였다. 끝내 사랑의 결실을 이뤄내지 못했던 이유를 탐색하게 된 것인데, 작가가 은밀하게 여기저기 뿌려놓은 장치들을 발견할 만큼 문학적 경험이 축적되었을 것이라는 내심의 생각 때문이라 할 수 있다.

‘알리사 뷔콜랭’에 대해서... 

알리사란 인물을 이해하는데 있어 그녀의 미모(美貌)를 물려준 어머니 ‘뤼실 뷔콜랭’과 청교도적 엄숙주의라는 정신적 닮은꼴인 고모이자 사촌 동생 제롬의 어머니는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자기 존재의 과시와 두려움의 대상으로서의 경고격인 발작의 연기로 허위와 기만, 그리고 사치와 관능적 쾌락을 추구하는 탕녀로서의 뤼실의 기질은 고모의 엄격함이라는 성스러움, 즉 도덕적 억압기제와의 결합을 암시하고 육체와 정신적 본성을 대변한다고 할 수 있다.

알리사가 제롬에게 보낸 편지는 물론 그녀가 남긴 일기는 제롬을 향한 사랑의 진실을 확인하는데 부족함이 없다. 그러나 제롬에 대한 갈망이 깊을수록 그녀는 개인적 행복보다는 의무로서의 성스러움을 쫒으며, 결국 성(聖)이 속(俗)을 누른다는 것이고, 마침내 요양원에서 삶을 마감함으로써 성스러움을 완결한다. 세평(世評)은 이를 종교에 과도하게 매몰된 광신적 인물이라고도 하며, 사랑의 지고함에 이른 고결한 성녀라고도 하지만 구태여 이러한 양극단의 시선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젊은 애인을 따라 남편과 자녀들을 버리고 떠나버린 엄마의 윤리적 배반에 대한 혐오만으로도 육체의 행복, 속세적 쾌락을 초월하고자 하는 그녀의 종교적 신성함으로의 인도를 충분히 설명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알리사는 무의식적 본성까지 통제할 수 있는 인간이상의 초월자로서 표현되지 않는다. 육신을 지닌, 오감을 느끼는 인간이다. “발끝은 옷자락 아래로 삐져나와 한 줄기 램프 불빛을 받고 있었다.”라는 소파에 길게 누워있는 알리사의 관능적 자세나, 이를 보고 아버지가 “마치 네 어머니를 보는 것 같더구나.”라고 확인하고 있듯이 그녀에게 내재된 욕망을 묵시적으로 드러내는 것과 같다.
결국 육체와 정신, 속과 성은 끊임없이 갈등할 수밖에 없는 것이고, 이로서 제롬을 향한 사랑이 순수하고 신비로우며 영원히 고결한 것이어야 한다는 알리사의 믿음, 신을 향한 간구는 선택의 여지없는 당위로서의 지위를 갖는 것이다.

‘제롬’과 ‘알리사’의 사랑의 술책

알리사가 지향하는 성스러움, 그 당위적 결과의 수긍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의 사랑은 다분히 기만적인 데가 있다. 알리사와 그녀의 아버지가 정원에서 자신(제롬)을 화제로 나누는 대화를 엿들었던 제롬이 후일, ‘쥘리에트’를 이용하여 알리사가 엿들을 수 있는 상황을 연출하여 그녀를 자극하는 것이나, 알리사가 ‘플랑티에 고모’에게 보내는 편지가 제롬에게 전해지도록 하는 것처럼 자신들의 내면적 진실을 솔직하고 직접적으로 제시하지 않는 책략을 사용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은폐전략은 시쳇말로 밀고 당기기의 술책인데, 자기 확신에 대한 불확실성이란 문제에서 출발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타자를 읽어내는 것이 어렵기 때문에 발생하는 불가피성이긴 하지만, 두 사람은 서로 자신들을 상대자가 읽는 것을 방해 하는 것이다. 오직 알리사에 대한 자기중심적 사랑에만 몰두하며, 자기와 주변에 대한 인식이나 이해가 결여되어 있는 무관심과 무신경한 제롬의 결함도 일조하고 있으나 알리사의 자기 내면의 기만적 표현도 완벽하게 서로의 읽기를 실패하게 하는 요인이 된다.

 ‘쥘리에트’의 사랑과 좌절 
 
한편 제롬의 무관심과 무신경은 알리사의 여동생 ‘쥘리에트’의 제롬을 향한 사랑을 깨닫지 못하게 한다. 자신이 만들어낸 사랑이란 환상을 사랑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네 사랑의 실체를 되돌아보라는 알리사의 말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쥘리에트는 제롬으로부터 알리사를 향한 사랑의 감정을 들어주고 알리사의 근황을 전해주는 메신저가 되어야하지만, 제롬을 사랑하게 되고 언니와의 경쟁관계에 들어선다. 그러나 제롬의 알리사를 향한 사랑의 확인 후에 사랑 없는 결혼을 진행한다. 알리사의 내적 갈등에 가려져 쥘리에트의 희생은 드러나지 않지만, 그녀의 고통은 결코 알리사의 그것에 뒤지는 것이 아니다.
 
 
알리사의 요양원 죽음 이후, 많은 세월이 지나 쥘리에트의 집을 방문한 제롬과의 재회에서 알리사의 물건을 정리해 모아놓은 방을 소개하며, 쥘리에트가 제롬에게 하는 질문은 무척이나 인상적이다.
 
 
“그럼 오빠는 희망 없는 사랑을 그렇게 오래도록 마음속에 간직할 수 있다고 믿는 거예요?"

“그래 쥘리에트"

“그걸 간직한 채 하루하루 숨 쉬고 살아갈 수 있다는 거군요?”

또한 그녀의 딸을 대녀로 받아줄 것을 제롬에게 요청하면서, 아이의 이름이 ‘알리사’임을 말하는 장면이나, 여전히 알리사를 떨치지 못하는 제롬에게 “자! ~ 이제 깨어나야 해요...”라며, 주저앉아 눈물을 훔치는 쥘리에트에게서 그녀의 사랑이 알리사의 그것만큼 고통스러운 것이었음을 확인하게 된다. 언니와 제롬의 사랑을 위해 자신의 사랑을 희생한 쥘리에트의 완전한 사랑, 신을 매개로한 성스러움을 지향한 알리사의 사랑, 어떤 것이 더 아름다우며, 고결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흥미로운 도구와 장치들 
 
이렇듯 타자읽기의 실패와 맹목성과 기만성의 교차, 완전한 행복의 추구라는 성과속의 갈등과 같은 플롯에 못지않게 풍부한 상징적 의미를 지닌 장치와 도구들을 발견하는 것은 분명 이 소설의 재미이기도 하다.

기억나는 것으로 제롬 아버지의 장례기간인 상(喪)중에 검은색 상복을 착용하지 않고, 뤼실 뷔콜랭이 흰 드레스와 붉은색 숄을 두르고 있는 것인데, 흰 색 위에 붉은 색의 조합은 엄숙함에 관능성을 더한 교묘한 파격이다.  

이것은 뤼실의 방을 본의 아니게 엿보게 된 제롬의 묘사에서 뤼실이 끌어들여 서로 희롱하고 있던 젊은 애인이 바닥에 떨어진 붉은 숄에 걸리는 것인데, 유혹과 쾌락의 세계를 암시하는 기막힌 장치로서 색(color)을 통한 인물들의 내적 심리를 설명하는 도구로서 돋보인다.
색이 하나의 상징체계인 기호로서 하얀 드레스를 입고 정원에 앉아 제롬을 기다리는 알리사를 통해 그녀의 순결함과 성스러움에 대한 내적 지향을 표현하기도 한다.
또 하나 인상적인 도구로 램프가 떠오르는데, 비스듬히 누운 알리사의 드러난 발을 비추는 램프와, 쓰러져 눈물짓는 쥘리에트의 방으로 하녀가 램프를 들고 들어오는 마지막 장면이다. 램프는 육감을 두드러지게도 하지만 그 관능에 빛을 비춤으로써 현세적 욕망을 어떤 성스러움의 세계로 인도하는 손길로 이해되기도 하며, 좌절과 사랑의 고통을 비추어 마침내 새로운 세상의 시작을 알리는 방향등이란 작용을 완수하기도 한다.

1909년 발표된 작품이니 이제 100년을 넘어섰다. 종교적 색채를 떨쳐내지 못하고 성(聖)의 질서와 신념에 인간의 사랑을 지나치게 몰아댄 느낌이지만, 수많은 자아를 지닌 인간들의 사실적 드러내기와 주체와 타자성에 대한 발견처럼 오늘에도 그 신선함 을 잃지 않는 주제의식은 이 소설이 명작의 반열에서 거듭 읽히는 이유가 된다.

비록 연인의 죽음으로 속세적 결합에 실패하는 비극이지만 그 죽음을 통해 영원한 합일, 완전한 사랑의 추구, 그리고 잿빛 땅거미가 방안 물건 하나하나를 덮어내며 복원하듯이 어떤 희망적 기대가 여운처럼 맴도는 것도 사실이다. 모처럼의 낭만적 기운으로 설렘이 있던 옛 추억의 세계에 한동안 머물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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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백 - 제16회 한겨레문학상 수상작
장강명 지음 / 한겨레출판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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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소설의 주제를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선택할 미래가 없는 세대의 삶의 물음, 혹은 고착화된 지배질서에 대한 반동.’ 그러나 이 주제의식를 다루는 창조적 감각이 더욱 주목하게 하는데, 곳곳에 산재하여 기지를 발휘하는 일종의 개념의 전복, 즉 예술적 상상력이라는 새로움, 신선한 문장들의 발견이다. 그리고 곧 유행어가 될법한 표제인 “‘표백’세대”라는 지금의 세상에 대한 정체성의 표상, 시대 의식을 압축적으로 표현하는데 이보다 적확(的確)할 수 없을 만큼 예리한 통찰적 의식이다.

지금의 한국사회를 어떻게 묘사할 수 있을까? 88만원세대?, 청년들이 갈 곳 없어 방황하게 하는 이 사회, 단지 삶의 존재자로서의 의무이외에 별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는 이 사회의 본성을. 자본주의를 시작한 구미(歐美)의 어느 지역보다 철저한 시장자본주의를 교조적으로 숭배하는 나라, 부와 권력의 계층적 구조를 빠르게 고착시켜 체제의 견고함을 구축한 사회, 형식적 민주주의의 실행으로 시민사회의 구조적 흠결이 없어 보이는 사회, 그래서 이 체제는 모든 사람들에게 수용과 적응만을 요구한다. 이처럼 ‘완전한 세상’에서 일탈이나 파괴, 혼란에는 명분이 차단된다. 비록 정의와는 한참 거리가 있고, 부도덕하지만 체제를 운영하는 틀, 지배적 담론, 기성의 질서는 어떤 틈새도 없을 정도로 안정되어 있어 어린 세대들은 한정된 영역에서 단지 몸부림칠 자유만이 부여되어있다.

세대를 초월해서 이러한 체제에 갇힌 사람들이라면 이 견고한 난공불락의 세상에 대항해 어떤 준비와 노력을 하고, 어떻게 삶의 자존감을 확보할 수 있을까? 이처럼 소설은 자유민주주의, 자본주의체제를‘프랜시스 후쿠야마’식으로 완결된 세상, 인류의 이데올로기와 제도의 역사가 끝났다는 인식이 지배하고 있는 듯하다. 그래야만 완전한 세상을 전제로 한 등장인물들의 자살이란 반동의 행위가 의미를 가질 수 있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더구나 오늘의 사회를“그레이트 빅 화이트 월드(great big white world)"라고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은 하얗게 표백된 세계로 표상하고 있는 것처럼 옴짝달싹 할 수 없는 젊은 세대들은 주체성이 지워진 세대로 문자 그대로의 표백세대인 것이다.
결코 원치 않았지만 21세기 초, 한국사회의 젊은 세대는 앞선 세대들의 사회와 구성원을 위한 저항과 혁명과 같은 거대한 명분도 가질 수 없으며, 자본주의 질서에 대한 무력한 수용이외에는 선택항이 없다는 진단은 어느 만큼은 옳다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인식은 즉시적인 변혁, 치열한 1등 의식만 주입된 영웅주의적 자기 확신에 대한 안달이 아닐까? 세상에는 이등도 있고 꼴등도 있으며, 또한 있어야 한다. 그리고 어쩌면 이등이나 꼴등들이 세상을 주도해왔는지도 모른다. 권력과 부라는 지배적 권위를 확보하고, 세상 체제의 일대 개혁, 체제의 대전환에 영향력을 가지는 것만이 삶의 의미는 아닐 것이다. 물론 이 사회의 던적스러움은 새삼 말 할 것도 없다. 물론 세상은 지배적 담론, 권력이 영향을 행사하지만 민중적 각성, 의지를 거스르기는 쉬운 일이 아니다. 시민의 사회 - 정치, 경제, 문화 등의 현상 - 에 대한 보편적 지적역량에 의존하기 때문이다. 각설하고 이렇게 꽉 막힌 불온한 사회의 변화세력으로서 어떠한 출로를 만들어 낼 수 없는 무력감에 빠진 오늘의 젊은 세대의 현실에 공감한다. 그래서‘세연’이란 여대생의 자살선언과 그녀의 추종세력인 이 땅의 젊은이들이 사회적 파장을 가장 센세이션하게 일으킬 수 있는 즉, 기성 질서와 사회변혁의 메시지로서 인식될 수 있는 극명한 수단으로서 자살을 선택하는 것은 어떤 혁명적 행위의 씨앗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자살이 일개 개인의 초라한 상황적 이유로 치부되는 것을 거부하기 위해, 자신들이 소위 가장 잘나가는 삶의 정점, 자본주의 사회의 척도로서 성공적이라는 지위에 이를 때 자살한다. 오직 그 자살이 대(對)사회적 메시지여야 하기 때문에. 이것도 부족해서 재벌 2세의 자살까지 더해서 이 사회의 시스템적 오류, 본질적인 저항의 강도를 더하고자 하지만, 이 사회의 속성, 타자의 고통에 대한 무관심과, 타자의 죽음조차 자극적인 상품으로 취급하는 광기에 젖어든 세계에 대한 몰이해 아니면 여전히 순진하고 유아적인 낭만적 기대로 보이기까지 한다. 아마도 관음증적인 호기심으로 반짝 주목을 끌겠지만 OECD국가 중 자살율 1위 국가라는 오명에도 불구하고 어떠한 사회 시스템적 반성이나 각종 사회 제도와 장치들에 대한 변화를 위한 작은 시도조차 하지 않는 현실이 그것을 입증한다. 한국사회, 다시 말해 한국의 지배 권력들은 결코 자살을 개인적 영역에서 사회적 영역으로 변화시키지 않을 것이다.

화자인‘적 그리스도’는 7급 공무원시험 준비를 하면서 시종 하급관료, 삶의 영원한 패자로서 묘사하고 있다. 서열중심의 계급적 질서를 고착화시키는 이러한 관료임용제도가 오늘의 환경 하에서 옳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 직급이 가질 수 있는 권력적 행위의 지극한 협소가 사회적 영향력에서 거의 무력하기 때문에 변화의 주체가 될 수 없다는 항변은 그야말로 엘리트주의, 기성 질서의 시각을 그대로 고수하는 관점이다. 7급, 9급이 변해야 한다. 기성의 썩은 질서에 물들지 않고, 개개인 스스로 변혁의 일원이라는 자각 말이다. 화자는 이러한 반론에 회의를 보인다. 보다 넓었던 선택의 길이 이처럼 대학생들이 하급 공무원시험에나 매달릴 수밖에 없는 사회구조라는 보다 근본적인 문제를 경시하고 있지 않느냐고. 잘못된 지적은 아니다. 그러나 이것은 지금의 세대에만 해당하는 문제가 아니다. 경제권력적 시각에서 보는 한 궁극적인 물음이 될 수 없다. 순환논리에 빠져 멍청한 논쟁만 하게 될 뿐. 다만 지배적인 사회장치의 심각한 오류들을 바로 잡기위한 저항의 수단이 자살이란 점에는 동의하지 못하겠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자칫 시대에 압도당해 의지를 상실하거나 자유를 상실할 수 있는 젊음에게 선택의 여지없는 상황에 처해 선택을 강요당하는 불행의 무지와 안이함에 머물지 않고 처절한 반동의 자각과 실천적 행동을 제시한다는 점에서는 몇 번이고 갈채를 보낸다.
실 날 같은 소리라도 밖으로 표출하려면 실 날 같은 바람 한 가닥이라도 만나야 하듯이 세계와의 상호작용을 통해 자기인식과 반성없는 사회에 무지와 과욕, 자멸의 이치에 대한 경고를 보내는 것은 절대 필요한 역사적 이치이고 깨우친 이들의 의무이다. 좌절과 절망으로 암흑을 헤매는 표백세대일 밖에 없는 오늘의 젊은 세대들의 고통의 실체가 안이하기 짝이 없는 기성질서에 보내는 냉혹한 메시지로서 이 소설의 의지는 이미 위대하고, 탁월하다. 한 여학생의 자살선언문을 비롯한 유언적 잡기(雜記)와 현실 속 화자의 삶이 병행하며 치닫는 급진적인 속도가 아찔할 정도로 이야기의 재미도 풍성하다. 논리와 감성을 오가며 절묘한 균형을 이뤄낸 보기 드문 지적 역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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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리다 & 들뢰즈 : 의미와 무의미의 경계에서 - 데리다 들뢰즈 지식인마을 33
박영욱 지음 / 김영사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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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이와 차연(differance)의 철학으로 대변할 수 있는 들뢰즈와 데리다의 사유 읽기이다. 이들의 저술을 대하면 그 낯선 개념에 당혹스럽고 좀체 선명한 이해의 세계로 다가서지 못하는 답답함을 느끼게 되는데, 이 책은 이러한 아쉬움을 해소시켜주고, 두 사람의 사상 공간으로 진일보하게 하는데 커다란 도움을 준다.
특히, ‘차이’라고 하는 유사한 개념으로 출발하지만, 어떠한 개념적 구별이 있는 것인지, 그들이 의도하고 전달하고자 하는 세상 읽기가 어떤 것인지를 비교철학적으로 설명하고 있어 한층 명료한 앎을 갖게 된다.

결국 모든 철학이 그러하듯이 우리가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 우리가 보고 진실이라고 여기는 것들을 어떻게 인식하고 인식해야 하는가에 대한 물음의 사색이다. 이러한 질문들이 우리에게 요구되는 이유는 실로 당연한 것임에도 우리들 대다수는 잊고 지내거나, 삶의 운영에 있어서 불필요한 것이라고 저 멀리 치워버리기도 한다. 그러하다보니 서로 어떤 대상을 함께 바라보았지만 인식하는 세계가 다르고 또한 전혀 다른 이해와 판단으로 잦은 갈등과 충돌로 반목하고 적대시하는 상황에 이르곤 한다. 그러나 그 양극으로 갈라진 근원은 놔둔 채 고작 현상을 가지고 해결하려하며 이 때문에 어떠한 타협이나 진실에 이르지 못하고 그 골은 더욱 깊어지기만 한다.
인간들의 이런 일반적인 갈등뿐 아니라 소위 근대라고 하는 오늘의 세계가 지향해 온 세계의 인식방법 - 합리주의, 이성중심, 자본주의, 기계화와 과학적 사고, 물질주의 등등 - 의 획일화는 실로 인간들로부터 많은 것들을 잃게 해왔으며, 그것들을 우리는 소외니, 파편화니, 감성이나 다양성의 상실이라고 부르며 근대의 주류적 가치들을 돌아보게 되었다.

수일 전‘오슬로’에서 발생한 집단 살해사건의 살해범의 주장처럼, 다문화에 대한 적대감은 오늘 우리들의 세계가 인간을, 사회를, 세상을 어떻게 인식하고 있는지에 대한 극명한 실례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사건의 영향은 유럽 국가들의 다문화, 다양성의 부정, 다시 말해 서로 다른 차이에 대한 본격적인 반감으로 이어지고 18세기 계몽주의 시대로 회귀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게 하는 것이다.
바로 이와 같은 퇴화적인 민족주의적, 인종주의적, 국수주의적인 인식으로의 후퇴는 구미 선진국들인 그네들의 탐욕인 세계화, 신자유주의 체제를 스스로 부인하는 꼴이기도 하다. 더구나 소비와 과시라는 현대 물질문명 중심의 사회를 무한히 추구한 결과가 필연적으로 야기할 수밖에 없는 일종의 자승자박의 형국이라 할 수 있다. 지독하리만큼 근대, 모더니티를 추구한 지배적 이성이 만들어 낸 욕심과 수단으로서의 획일화, 동일화의 심각한 모순인 것이다.
 이렇게 편협한 인식에 현대인들이 포획된 것은 무엇이 잘못된 것이기 때문일까? 들뢰즈는 이것을 우리의 ‘표상’체계의 오류 탓이라고 했고, 데리다는 대상을 바라보는 인간의 경직적이고 일면적인 사고방식이라 하였다. 즉 이 세상을 개념적으로만 파악하려는 절름발이식의 왜곡되고 조작된 사유방식에 있다는 것이라 하겠다.

‘개념’이란 인간이 어떤 대상의 존재를 분류하고 체계화하기위해 만들어 낸 것으로 책상, 개, 자동차와 같은 것이다. 일례로 흰색과 육면체의 고체이며 짠맛하면 머릿속으로 소금을 떠올린다. 세상의 사물들을 구분하는 머릿속의 기준, 즉‘표상’을 통해 소금이란 개념을 떠올리는 것이다. 그러나 소금이 이러한 것들로만 구성되어 있진 않다. 우리가 모르는 무수한 성질을 지니고 있으며, 우리의 개념과 사물 그 자체는 사뭇 다르다는 것을 인정하게 된다. 그래서 우리가 고작 개념이라 부르며 알고 있는 것처럼 말하고 있지만 결코 우리는 완전하게 어떤 대상을 인식하거나 지각할 수 없는 것이다.

개념의 불완전성을 보완하기 위해서 칸트는‘이념’, 즉 어떤 개인이나 집단이 믿고 있는 사상체계로서 우리의 지각능력이나 사고 능력으로는 도저히 파악할 수 없는 이 주관적 용어를 도입하였고, 들뢰즈는 이를 자신의 용어로 발전시켜‘다양체’를 도입하였다. 음계 중 어떤 특정 음, 예로써 ‘도(Do)'음을 들었다고 하자. 그러나 그 도음에는 무수한 배경음, 잠재음이 있으며, 그 중에서 우린 주음인 도음만을 듣게 된다. 이는 세상의 모든 것들은 다양체임을 설명하는 것이다. 결국 개념으로만은 사물을 온전하게 드러낼 수 없는 것이며 이 드러낼 수 없는 그 자체의 차이를 들뢰즈는 “차이 자체”라고 표현했다. 즉 이 세상 존재 모두가 다 다르다는 말이다.

데카르트는 물론 헤겔조차도 이 세상을 개념적으로만 파악하였다. 완벽한 지식체계가 현실의 원래 모습과 일치한다고 가정하였으며, 인간의 지식이 곧 세계의 본래 모습을 증명하기 위해 인간의 근본적인 사고 능력과 세계의 본질이 일치한다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이성 우월 관념, 합리주의라는 편의적 사고는 모든 것을 개념으로만 파악하여 차이를 없애고 동일성만 남게 하였다. “같은 것만을 강조하면 다른 점이 드러나지 않는다.” 우리가 가진 표상체계는 이렇듯 물자체를 표현하지 못한다. 현실의 풍부함과 다양성이 억압되고 차이를 무시하는 표상적 사유는 그래서 극복되어야 하는 것이다.

“현실의 모든 존재에 잠재해 있는 저마다의 독특하고 개성적인 목소리”는 해방되어야 한다. 여기에 오늘의 대중매체는 사람들에게 세상 보는 눈, 감각을 획일화하는데 거대자본과 결탁하여 사력을 다한다. 또한 각종 문화산업도 인간의 감성을 무미건조하게 만드는데 앞장서고 있다. 즉 이러한 획일화를 위한 무차별적인 현대의 주류적 담론세계는 인간의 감성적 능력을 획일화시켜 창조적 능력, 비판정신을 상실시켜 자본과 권력의 공고화는 물론 항구화하려든다. 이것은 약소국과 강대국, 빈국과 부국, 빈자와 부자, 약자와 강자의 고착화이고 인류에게 불행한 그늘을 드리우는 시작이다.

들뢰즈와 데리다의 철학은 우리와 괴리된 관념적 허구의 세계가 아니다. 우리들이 살고 있는 세계가 억압하고 있는 인식체계의 오류를 지적하고, 그것으로부터 적극적으로 해방되어야 함을 역설하는 것이다. 이 책은 바로 이들의 실질적 사유로 향하는 길을 안내하는 친절한 입문서이고 통로의 역할을 완벽하게 하고 있다. 일탈과 절단이라는 기계론적 사유의 한계, 리좀적 세계관과 같이 세상을 한층 투명하고 보다 완전하게 볼 수 있는 데리다와 들뢰즈의 사유의 틀로 진입하기 위한 키워드들을 메를로퐁티, 가타리, 소쉬르, 바타이유 등 이들의 사상에 영향을 준 기원적 사유들과 연계하여 풍부하고 수월한 이해를 돕는다. 들뢰즈와 데리다에 입문하는 이들에게 꼭 먼저 읽어 볼 것을 추천하고픈 책이다. 보이지 않고 낯설어 보이던 것들이 밝고 익숙한 것으로 체화되는 것을 느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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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몰리션 엔젤 모중석 스릴러 클럽 28
로버트 크레이스 지음, 박진재 옮김 / 비채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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액션 스릴러물에 이렇게 감성이 촉촉하게 흐르고, 인물들에 연민이 가는 작품도 그리 흔하지 않을 것 같다. 그렇다고 긴장감이나 냉혹한 범죄의 그림이 소홀하다거나 취약한 것이 아닌 것은 물론 여느 유사 작품보다 세밀한 감각적 강박을 종용하고 있어 묘한 쾌감을 지속시킨다. 특히 폭발물처리 수사반원의 죽음과 교활하기 그지없는 폭탄 연쇄 살인범, 이를 쫓는 여성 수사관 ‘스타키’의 조합이라는 비교적 신선한 소재가 몰입의 강도를 한층 부추긴다.

늘 겪는 것이지만 두 눈 부릅뜨고 작가가 얼기설기 엮어놓은 복선들 중에서 암시를 읽어내려고 하지만 결국은 마지막 페이지에 이르러서야 머리를 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독자의 한계인 모양이다. 몇 차례의 절묘한 반전과 마주하게 되는데, 이 반전으로 야기되는 사회적 정의와 사적 연대성의 충돌이란 딜레마는 인간성의 반응을 주목케 하는 힘이 되어 더욱 이야기에서 이탈하지 못하게 한다.

또한 전직 폭발물처리 수사반원으로서 사랑하는 남성 동료를 잃은, 그리고 폭발사고로 심각한 신체적 손상과 정신적 후유증을 겪고 있는 여성 수사관의 자기 치유를 향한 내외적 심리와 행동의 균형을 위한 여정이란 플롯도 하나의 축이 되어 수사관이란 사회적 존재가 아니라 평범한 개인, 하나의 성(性)으로서의 고유한 감성적 본질을 비춘다. 이것은 또 한명의 여성 동료 수사관이 엄마로서, 여인으로서 가지고자 하는 소박한 희망에서 조차 괴리된 고달픈 직업인이자 생활인으로서의 삶에 대한 히스테릭한 고백과 같이하여 인간적 친밀감을 보탠다. 
이처럼 소설은 다채로운 윤리적 의제들을 양념처럼 흩뿌려 놓아 스릴러물이 자칫 허무한 재미에만 방치되는 경박함을 극복하고 세련된 구성으로 탄탄하고 매력적인 지적 독서물로 바꿔놓고 있다.

폭발물 처리요원이 폭탄 해체를 위해 정확하게 폭탄의 위에 몸을 구부렸을 때 누군가에 의해 계획적인 원거리 조정에 의해 폭발한다. 휴지처럼 너덜너덜해진 채 처리수사관은 사망하고, LA경찰국 범죄음모수사과는 긴급히 여형사 스타키를 팀장으로 수사팀을 구성한다. 여기에 연방특별수사요원 ‘잭 펠’이 가담하면서 수사관 한 사람을 죽인 단순 폭탄범죄에서 연방범죄 사건으로 확대된다. 가공할 만한 폭탄제조와 흔적조차 없는 찾을 수 없는 완벽한 연쇄 폭탄범, ‘미스터 레드’라는 미지의 범죄자를 추적하게 된다. 전설적인 인물, 폭탄 범죄자들에게는 신격화되어 숭배되는 미스터레드와 스타키의 한 판 두뇌게임이 시작된다.

변화무쌍한 변장으로 누구도 그 얼굴과 본명을 알지 못하는 범인, 이러한 인물로 접근하기위한 스타키의 저돌적 추진력은 조금씩 그 거리를 좁혀간다. 그런데 이러한 수사 과정에서 작가의 중대한 의도를 읽을 수 있다. 정신적 불안정상태를 벗어나지 못한 스타키에게 지속적인 신뢰를 보내주는 상관, 자신의 완결된 수사에 하자를 인정하는 꼴이 되는 완결 사건 담당 수사관과의 우호적 관계성으로의 변화, 적대적이고 뒤틀린 동료수사관과의 감성적 교감의 교환, 자신의 마음을 여는 것으로부터 얼어붙고 상처 난 마음이 치유될 수 있음과 같이 인간의 관계성이 시련과 장애를 넘어서는 요인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수사권을 빼앗길 수 있는 순간에 도움을 받고, 수사 방법론의 부도덕성으로 퇴출당하는 처벌의 상황에서 사건해결의 유일한 담당자로서의 지위를 인정받는 것이다. 물론 내적 상흔이야 자신만이 극복할 수 있는 주체이지만 이러한 자기치유 과정과 사회적 인간으로서의 복귀를 돕는 것은 주변 사람과의 관계, 인간적 신뢰의 회복, 사람에 대한 믿음과 사랑일 것이다. 이러한 것들이 이 작품의 작품성을 더욱 빛나게 하고 있으며, 숨 막히는 범죄자와의 대결이란 긴장감 넘치는 이야기에 매혹을 더해주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마지막 페이지까지 엎치락뒤치락, 그 진실의 끝을 가까스로 확인하게 해주는 이 소설의 얄궂음조차 먼 길 돌아와 비로소 사랑의 손길에 숨을 헐떡이는 여형사‘스타키 캐롤’의 행복한 모습에 눈 녹듯이 사라진다. 직업으로서의 수사관, 특히 폭발물 처리반과 같이 위험이 항시 상존하는 경찰관이 겪어야 하는 반복되는 육체와 정신적 긴장과 상처를 보기 드문 폭탄의 세계라는 소재에 세밀한 터치를 통하여 긴박감 넘치는 이야기 구조에 멋지게 버무려낸 스릴러 수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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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인종의 요리책
카를로스 발마세다 지음, 김수진 옮김 / 비채 / 2011년 5월
평점 :
절판


“요리, 섹스, 살인”, 이 세 단어만큼 탐욕으로 똘똘 뭉친 어휘도 없을 것이다. 이 낱말들의 심연에 똬리를 틀고 있는 본성에는 허기진 무언가를 채우려는 욕망이 가득하다. 적절히 통제되거나 금지되지 않으면 사악해지고 마는 것. 그러나 교활한 인간은 우아하고 세련된 감각으로 이것들을 고상한 무엇으로 바꾸어버렸다.
우리들을 에워싸고 있는 오늘의 매스미디어가 뿜어내는 프로그램의 구성이나 그 내용만으로도 요리와 섹스가 얼마나 넘쳐나는지, 그러나 짐짓 점잖은 채, 혹은 그것들이 내재하고 있는 은폐된 의미가 무엇인지 모른 채 본질을 외면하고 포장하여 추악한 욕망을 감추는 위선에 몰입한다.
작금의 요리와 섹스의 과잉, 그 과도함은 아마도 광신적이라 해도 부족한 표현일 것이다. 이 과잉의 추구는 누군가를 끊임없이 죽음으로 내몬다. 가히 폭력적이다. 이것은 관념적으로만 그런 것이 아니라 실체적으로 이어진다. 자신들의 욕망을 가로막는 장애, 그것이 제도가 되었든, 윤리의식이 되었든, 사람이나 사물이 되었든, 그 어떠한 유무형의 실재가 되었든 제거 대상이 된다. 이를 부채질하는 자본가와 정치권력, 그리고 하수인 노릇을 하는 우매한 작자들의 탐욕이 만들어내는 형상이다.

아르헨티나의 작가 ‘카를로스 발마세다’는 이것들이 발산하는 광기에서 권력의 사악한 본질과의 ‘유사성’을 보았던 모양이다. 또한 허영심으로 뭉쳐진 인간들의 그칠 줄 모르며, 제어되지 않는 충동으로서의 욕망, 그 역겨움을 지적인 독자들과 함께 조롱하며, 위태로운 세상에 대한 문제의식을 나누고 싶었던 것 같다.

소름끼치게 재밌는 악마적 매혹의 이야기

인간의 오감을 자극하는 최상의 요리, 미각과 향미로 이루어내는 무한 마법, 그 절정의 쾌락이 섬뜩한 아름다움으로 그려져 있다. ‘마르텔 플라타’라는 남부해안도시에 위치한 레스토랑 ‘알마센 부에노스아이레스’를 배경으로 70 여년 4대에 걸쳐 펼쳐진 비극적인 가족사에 권력과 계급적 도약에 탐닉하는 야만적이고 비열한 탐욕과 그 잔인성, 천박성이 경박하지 않은 진지한 풍자와 은유로 버무려진 매혹적 이야기다.

어미의 젖을 물고 있던 아기, 어미의 젖꼭지를 뜯어내어 입속에 오물거리며 그 식감을 헤아리는 첫 장면의 잔혹한 풍경은 아기의‘입’, ‘피와 미각’에 담긴 풍부한 다의성으로 가히 예술적 상상력의 극치를 보여주며, 독자를 압도한다. 아기의 입은 ‘들뢰즈’가 말한 다양체를 떠오르게 한다. 젖을 채취하는 입이자, 성애의 입, 그리고 미각과 폭력성이 일탈과 통합의 복합체로서 하나의 개념으로서가 아닌 물자체를 조명하게 하는 것이다. 세상, 현상, 인간, 사물의 협소한 인식을 넘어 그 본질, 본체라는 전체적이고도 고유한 남김 없는 이해를 가질 것을 제안하는 것이라 하겠다.

어미의 몸을 뜯어먹고 산 아이, 술주정뱅이로 권력의 아첨꾼 장례행렬을 들이박고 황당하게도 강력한 테러리스트 도당으로 변질되어 죽은 아비로 인해 고아가 되어버린 ‘세사르 롬브로소’는 어미의 사촌여동생 부부에 의해 양육된다. 화려하고 찬란한 요리, 시대와 가족사의 형식을 그대로 대변하는 매개체로서 <남부 해안지역 요리책>은 소설전체를 관통한다. 이것은 가문과 역사의 영욕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상징체이다. 알마센의 부흥을 이루어낸, 사람들의 미각을 사로잡았던 레시피의 기록물이지만 그것이 이룩한 성공, 즉 권력자들의 사랑은 정권의 교체마다 참혹한 나락이 된다. ‘단절과 연결’이란 결코 분리된 것이 아니라 하나의 본질이라는 의미이다.

롬브로소 가문의 유일한 명맥인 세사르 롬브로소, “피가 질러대는 의미를 알 수 없는 애절한 절규”, 그것은 롬브로소 가문의 증거인 <남부 해안지역 요리책> 이기도 하다. 세사르의 이 레시피에 대한 광적 탐닉은 온통 인육 맛, 인간의 피 맛을 본 약탈자들이 우글거리는 아르헨티나 정국의 악마적 육식문화, 오늘의 우리사회와 닮아있다. “머리보다 위가 훨씬 더 많은 것을 명료하게 이야기”해준다는 조롱처럼, 뱃속의 탐욕만큼 인간을 적나라하게 설명하는 것도 없을 것이란 말이다.

젊고 아름다운 외모를 한 세사르의 관능을 자극하는 이모, ‘베티나 페리’의 비도덕적 정염, 그것은 “오물과 고름으로 가득 찬 병적인 사랑”으로 치닫는다. 두 사람의 은밀한 정사, 그 열락의 현장을 목격하게 된 베티나의 남편은 살해되어 세사르의 민활한 칼질에 의해 고기로 저며진다. 레스토랑 알마센에 걸린 특별메뉴를 찾아 날아든 손님들의 면면은 정치최고위원, 의원들, 졸부들, 고위공직자, 야심을 불태우는 권력의 조력자, 방송국 임원들...영혼을 팔아버린‘도리언 그레이’ 같은 인간들이다. 게다가 이 인육의 향연은 살인의 은폐를 위해 또 다른 살인으로 이어지고, 그야말로 최고의 코미디가 벌어진다. 인간을 먹어대면서 “성부의 은혜로 모여 음식을 나눈 이들의 영혼을 정결케 해달라고 간구”하는 신부와 정치가의 끓어오르는 감동의 연설을 뱉어내는 장면은 이보다 희극적 일 수 없는 것이다. 채식주의자의 탈을 쓴 흡혈귀들, 범죄자가 순교자가 되며, 영혼을 짓밟은 인간들이 성자가 되고, 권력의 하수인이 미화되는 이 세상의 잔혹한 일면이다.

부패하고 몰염치한 권력의 “문둥병과도 같은 경박함에” 국민전체가 물들어 버린, 신자유주의 물질만능에 대한 광적 숭배에 물든 소비지상의 우리사회, 아니 이 세상의 역겹고 추악함의 우아한 동화이다. 썩은 권력과 결탁한 자본가가 열심히 재촉하는 상식의 파괴와 영혼의 상실이 요리와 섹스에 어둡게 내려 앉아있다. 모두를 죽음의 그 어두운 심연, 공멸의 시공을 앞당기기 위해. 감각의 극한을 넘어서는 지고한 예술의 경지, 최고의 창조적 상상력이 빚어낸 아찔하고 감미로운 이야기 속에 무진장한 비판적 사색이 담긴 절대 걸작이다. 그리고 한 편의 거대한 인간의 욕망사(慾望史)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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