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토
조정래 지음 / 해냄 / 201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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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20세기 근대사는 모멸(侮蔑)의 역사다. 인접국에 침탈당하고, 이데올로기의 최전선으로 동족상잔의 비극을 겪었으며, 산업화의 명분하에 독재와 민중의 고통스런 희생이 강요되었고, 권력에 눈먼 군부에 의해 민간인의 무참한 학살이 자행되었던 시기이다. 그리고는 마침내 국가경제의 붕괴로 국제긴급구호자금까지 굴욕적으로 빌려 써야하는 참담함과 민중의 또 한 번의 허리띠 졸라매기라는 고통을 통해서야 가까스로 오욕(汚辱)의 20세기를 벗어날 수 있었다.

1974년 발표되었던 중편을 21세기 초인 2011년 전면 개작하여 발표하는 작가의 의지는 이 모멸과 오욕에 수반되었던 정리되지 못한 찌꺼기를 그대로 간직한 채 은폐하고 오히려 기득세력이 되어 한국사회를 유린하는 인간들에 대한 상기와, 그 상처를 오롯이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던 민중들의 아픔이란 것은 존재한 적도 없다는 듯이 까마득한 망각으로 접어두고 다시금 오욕의 길로 달려가는 이 사회에 대한 경계일 것이다.
한편은 이미 고인이 되었거나 80~90세의 고령자가 된 20세기를 온통 겪어온 우리의 부모세대들에 대한 연민과 그 아픔의 이해에 대한 요청일 것이다. 역사는 결코 단절된 적이 없다. 오늘의 우리와 우리 사회는 역사의 진실들을 자주 잊곤 한다. 가해자가 권력을 가지면 그 사악한 가해의 진실을 숨기고 지워버리려 한다. 우리들의 앞에는 그러한 자들이 활개치고 뻔뻔스럽게 권력과 부를 차지하고 여전히 민중을 기만하고 있다. 동족을 괴롭힌 가장 파렴치한 인간들을 청산하지 못하고 21세기에 이른 것이다.

소설은 이 오욕의 층위들 모두를 자신의 몸에 그대로 새긴 한 여인을 통해 우리 민중들의 고통과 한(恨)을 처절하게 드러내고 있다. 일제 식민치하에서는 황국신민이 되어야 했고, 그래서 침탈자인 일본인들과 민족을 배신하고 그들의 주구가 되어 동족을 궁지에 몰아넣던 앞잡이들로부터 육신과 정신의 희생을 강요당했으며, 해방의 시기에는 미군정(美 軍政)치하에서 물질과 영혼의 혼란을 겪으며, 이데올로기의 분열이 만들어낸 폭력을 그대로 뒤집어써야 했다.
아리따운 열일곱 처녀, ‘점례’, 20세기를 이 땅에서 그야말로 버텨냈다고 말 할 밖에 없는 그녀의 일생을 좇는 일은 차마 못할 짓이다. 우리의 20세기가 그랬다는 얘기다. 억울하고, 분하고, 고통스럽고, 그러나 어디 하소연 할 곳 없었던 바로 우리들의 어머니, 아버지인 대다수 민중의 삶이란 것이 오직 상처의 수용자로서만 존재하였다는 말이다.

왜(倭)인의 겁탈에 저항했다하여 모진 고문과 죽음에 내몰리고, 끊임없이 수탈당하고 착취당하여 가진 것 없는 민중이, 더구나 어린 여성으로서 이런 궁지를 모면하는 길이란 그 선택의 여지가 극도로 협소해진다. 겁박과 죽음에 몰린 부모를 살리기 위해 일본인 주재소장의 성적 노리개가 되고, 원수의 자식을 낳는다. 그리고 맞이한 해방은 그녀에게 외세에 의한 치욕스런 노리개로부터의 탈출이 아니라, 외려 희생자를 왜놈의 처자로 몰아대고 모욕을 주는 구속과 억압의 연장일 뿐이다.
과거의 흠 아닌 흠을 숨기고 결혼하지만 노동자와 농민, 빼앗기기만 했던 민중의 삶다운 삶을 희망했던 남편은 공산주의자가 되어 떠난다. 이데올로기가 만들어 낸 이 땅의 또 하나의 비극이다. 인민위원회 부위원장이었던 남편의 신분은 그녀의 삶을 다시금 파괴 하는데, 권력자들의 탐욕을 이념의 대립이란 것으로 덧씌운 파렴치는 공산주의자의 아내였다는 이유만으로 핍박의 대상이 된다.

보잘것없는 권력까지도 약자의 가녀림과 무지를 이용한다. 상황의 불리는 여성을 쉽게 소유하는 방편이 되고, 점예는 다시금 미군의 아낙네가 되는 운명을 벗어나지 못한다. 양갈보, 우린 우리의 형제와 자매의 고통을 지나치게 쉽사리 매도하고, 자신들의 무능과 무기력을 권력자가 아닌 희생자들을 손가락질 하는 것으로 회피하려한다. 식민지약탈자의 노리개로서 출산한 아들, 공산주의자가 되어 떠나버린 남편으로부터 얻은 딸, 미군의 쾌락도구로서 낳은 아들, 이 세 명의 자식은 그녀, 아니 우리들이 겪어야 했던 이 땅의 고통과 모멸의 역사이다. 그러나 우린 이 역사의 상처, 흔적, 의미들을 어떻게 바라보는가? 큰 아들‘태순’이 셋째인‘동익’을 향해 내뱉는 빈정거림과 모욕은 그대로 우리와 우리사회의 초상이다. 식민지의 치유되지 않은 태순이란 흔적이 동익이란 서구사대주의를 비난하는 이 아이러니, 또한 혼혈아인 동익의 냉대받는 인간 파편이라는 자기역사의 부정, 어머니 점예와 가족의 부정은 우리의 지배적 의식에 내재하고 있는 몰상식과 몰염치, 은닉된 자기비하의 콤플렉스인 것이다.

정의롭지 못한 사회, 악을 치유하지 않는 사회, 타인의 탓만을 하는 사회, 역사의 진실을 외면하고, 왜곡하는 사회는 결코 오래갈 수 없을 것이다. 그것이 안으로 계속해서 곪아가다 끝내는 자멸할 것이다. 20세기를 과거사라 치부할 수 없는 것은 바로 이와 같은 이유에서이다. 지금에도 그 욕된 역사는 계속되고 있으니 말이다. 노 작가가 펜을 다시 들어 37년 전의 작품을 오늘에 다시 쓴 이유는 그래서 의미심장하고 시의적절하다. 이처럼 국민적 기억의 망각을 다시 불러내는 것만으로도 우리들의 역사적 이성을 일깨우는 중요한 작업인 것이다. 기억하자, 외면하지 말자, 그리고 지금이라도 청산하자. 그래야 우리의 후손들이라도 덜 고달플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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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드르디, 태평양의 끝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91
미셸 투르니에 지음, 김화영 옮김 / 민음사 / 200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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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신념을 구성하게 한 것들은 가정과 학교교육, 사회가 쏟아내는 말들과 이미지들, 제도, 법, 담론 등 조직과 체제가 조성하는 보이지 않는 틀, 의식적, 무의적으로 체득된 경험과 지식들의 융합일 것이다. 아마 이러한 것들의 실체를 내밀하게 들여다 볼 수 있다면 신념을 어떤 방향이나 궤도로 수정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생각건대 시간의 흐름이 더 이상 지속되지 않고, 공간적 경계가 없는 초월의 어떤 곳, 인간의 발길이 닿지 않았던 무인도 같은 그런 곳이라면 대체 나를 이루었던 것들이 무엇인지 여실히 드러날 것 같기만 하다. 오직 대자연과 나만이 존재하는 곳에서 내 몸과 정신의 관습을 만들어낸 것들이 어떻게 표현되고 이용되는지를 보게 된다면, 그것들이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인지 냉엄하게 성찰할 수 있을 것만 같다.

‘미셸 투르니에’가 ‘로빈슨 크루소’와 ‘무인도’를 다시금 배경으로 삼게 된 이유도 여기에 있었을 것만 같다. 기독교관에 세뇌되어있으며, 근대문명과 화폐자본주의에 적응된 인간의 습속이란 것의 정체란 무엇인지를 투명하게 관찰할 수 있는 절대적 공간으로 제격이라는 얘기다. 나를 포획하고 있는 근대화(modernity)를 규정짓는 요소들이란 지속적이고 급속하게 흐르는 시간을 강박적으로 인식하며, 현재보다는 가능성이라는 미래의 삶을 위해 부단히 부를 축적하고, 각종의 규율장치들을 통해 규격화된 삶을 재단하며, 모든 타인과 물질을 욕망의 대상화 시키는 것들이라 정리해도 무방할 것이다. 내가 살고 있는 이 사회를 특징짓는 이러한 것들이 과연 나와 우리들을 어떻게 만들어 놓았을까를 유리창 너머에서 지켜본다는 것은 정말 흥미로운 일이 아니겠는가?

유일한 생존자가 되어 깨어난 곳, 무인도를 로빈슨은 ‘탄식의 섬’이라고 명명하듯 그를 길들였던 현대문명의 질서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박탈감을 생각하면 이러한 의식은 꽤나 자연스러워 보인다. 무한한 자유와 자연이 펼쳐져 있지만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느낌을 갖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태평양의 외딴섬에 인간이란 나 혼자란 자각을 한 로빈슨이 착수한 일이란 난파된 선박(버지니아호)에 남아있는 물건들을 섬의 동굴 속으로 옮겨 저장하는 것이고, 동물들을 잡아 우리에 가두며, 대지를 경작하고 수확하여 미래라는 걸 위해 쌓아두는 행위이다. 즉, 자연을 지배하고 통제하겠다는 의지이며, 현대라는 문명의 습관을 이식하는 행동이다. 게다가 성서와 기독교제단을 설치하고, 물시계를 만들며, 자기 한 사람을 위한 섬의 통치체제인 법률을 제정, 선포하는 일련의 통제적 장치들을 설정하는 모습은 희화(戱畵)적이기까지 하다. 무릇 섬의 통치자로 군림하는 것인데, 문명인이란 것이 이처럼 우스꽝스런 모습을 하고 있다는 것일 게다.

한편 ‘다니엘 디포’의 『로빈슨 크루소』와 결정적인 분기점이자 차이랄 수 있는데, 원주민‘방드르디’의 출현이다. 현대적이지 못하기에 야만인일 수밖에 없는 방드르디를 대척점에 두는 현대인 로빈슨이 만들어내는 긴장관계 때문이다. 성서를 읽고 설교하는 로빈슨의 낯설고 기이한 행동에 웃어 재끼는 방드르디에 대한 로빈슨의 분노, 이 야만인을 길들이기 위한 법률과 화폐거래 제도를 통한 훈련은 그 진지함만큼이나 우습다. 아무런 의미를 지니지 못하는 반복적 노동을 부여하곤 버지니아 호에서 노획한 금화를 댓가로 주고는 방드르디가 요구하는 물건이나 반일의 휴식을 구매하도록 하는 것인데, 돈에 대한 이러한 종교적 답습은 그의 청교도적 신앙과 결합하여 현대를 포획한 자본주의의 체험을 내보이는 것이다. 그러나 반일의 휴식을 선택하곤 빈둥거리는 방드르디의 늘쩍지근한 게으름에서 이미 로빈슨의 체제는 그 한계를 드러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근대적 시간관, 합리주의 지성이라는 미덕, 거래수단으로서의 화폐제도, 각종 법적 제도장치들, 수확물의 축적과 같은 이식은 섬 스페란차에서 무익하기 짝이 없는 것이다. 로빈슨의 이러한 행위는 근대적 인간관, 문명에 대한 맹신이랄 수 있는데, 이 진보와 야만이라는 기만적 도식관계가 그야말로 천박하기 이를 데 없을 정도로 취약하다는 것이, 이 둘의 관계에서 드러나기 시작한다는 점이다.

로빈슨 내면의 갈등은 야만인 방드르디에 대한 혐오에서 기인하는 것이지만, 이 부정적 관점은 불가피하게 변화할 수밖에 없는 어떤 당위를 보이기 시작한다. 무인도 스페란차의 대지에 대한 여성화이고 대자연과 합일화되는 초월적 느낌과 성적 구분의 무위에 대한 비인간화의 깨달음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나 더욱 극적인 전환은 동굴에 쌓아둔 화약의 폭발로 인한 문명의 시간과의 결별, 시간 인식의 소멸이다. 더 이상 근대적 시간이 머물지 않는 섬은 그의 신념을 이루고 있던, 그를 장악하고 있던 근대의 찌꺼기들의 위선이다. 방드르디에게서 발견하는 분명하고도 과격한 아름다움, 자연스럽고도 상쾌한 우아함은 로빈슨의 독실한 청교도였던 시절의 번쩍하는 초월의 그 어떤 교감 같은 것으로 다가온다.

이 소설을 그 어떤 하나의 주제나 관념적 이상으로 말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현대사회, 즉 모더니티에 대한 비판적 맥락을 핵으로 하고 있지만, 문장들마다에서 숨 쉬고 있는 철학적 단상들은 인간 본연에 대한 무수한 사색을 말하고 있음에서이다. 또한 금요일, 비너스를 상징하는 방드르디와 같은 다의적 어휘들로 인하여 가히 신화적 상상력이란 의미의 풍성함을 더하고, 어떤 문장에서는 니체를 느끼게 되며, 또 어디에서는 루소를, 짐멜을, 보들레르를 보는듯 철학의 대 향연과 같은 도취감에 휘말리기도 하는 것이다. 위대한 작품들에 감히 눈길을 고정하기 시작하면 발견하게 되는 그 웅숭깊은 사유와 통찰에 그저 넋을 잃고 마는 것은 괜한 이유에서가 아니다. 가히 투르니에의 로빈슨은 오늘의 나와 우리는 물론 미래의 인간들에게도 인간을 이해하고 읽어내는 존귀한 기준이 될 것이다. 그야말로 명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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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더니티의 다섯 개 역설
앙투안 콩파뇽 지음, 이재룡 옮김 / 현대문학 / 200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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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사회학적 비평이기에는 논의의 범주가 지극히 협소하다. 산업자본주의의 유의어로서의 모더니티를 총합적으로 접근하지 못하고 있다는 측면에서 그러하지만, 예술사적 범주에 국한하면, 특히 모더니티가 지닌 한계 - 근대적 시간관, 물신주의 및 소비주의, 인간의 소외 등 - 를 극복하기 위한 사조들의 또 다른 한계성을 갈파하고 있다는 점에서 의미를 찾을 수 있는 책이라 하겠다.

그럼에도 특수주의적 시각을 버리지 못한 프랑스 자국 및 서구중심주의의 기술이며, 일부 문학이나 건축, 음악분야를 거론하기는 하지만 미술사에 편중되어있어 보편성으로 확대하여 이해하기에는 그 결여를 인식하지 않을 수 없다는 한계를 가지고 있다. 특히 포스트모더니티에 이르면 극단적으로 프랑스적 관점에서 기술되고 있어 저자 스스로의 말처럼 혼란스러움을 조장하여 그 의미를 애써 초기 모더니즘이나 전위주의에 휘감기게 하여 퇴행적 의지로까지 읽힌다.

저자의 시선을 대변하는 서문을 보면‘현대적 전통’이라는‘현대’와‘전통’이 결합한 괴이한 이 언어가 내재하고 있는 모순어법을 통해 모더니티라는 새로움의 시작이 곧 과거가 되고 마는 것과 같이 현대라는 언어가 지닌 과거와의 단절을 통찰하고, 그래서 그 단절 자체가 전통을 구성해버린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이 관점은 19세기 보들레르로부터 기원을 찾을 수 있는 모더니티가 21세기에 이르기까지 어떠한 자각과 변화를 도모했는지를 관찰하는데 핵심적 의미로 작동하고 있다 하겠다.

보들레르와 마네가 활동하는 19세기는 새로운 시간관의 인식이라 해야 할 것이다. 결국 이러한 속도가 만들어낸 미래성과 미결성, 파편성은 극복되어야 할 문제로 인식되었을 것이다. 사실 이러한 맥락의 파악은 진부하기조차 한 분석이지만, 1800년대 중반의 예술이 모더니스트틀이 모던에 대해 어떤 비판적 이해를 지니고 있었는지에 대한 비교적 심층적인 관찰을 가능하게 해준다. 한 예로써 마네의 「풀밭위의 점심 식사」나 「올랭피아」가 역사성을 관심 밖으로 한 것이나 그림의 의미를 그림 자체 안에서만, 즉 표면에 머물도록 의도하였음을 통해 전통적 아카데미즘의 조롱과 시간성을 무시간대로 몰아넣은 일종의 반항을 목격하는 것과 같다. 이러한 측면에서 이 책을 읽는다면 나름 의미를 지니는 독서가 되기도 한다.

이러한 형식의 글쓰기가 전위주의(아방가르드), 추상파와 초현실주의, 추상표현주의와 팝아트, 그리고 포스트모더니즘에 이르는 비평까지 어떤 의미에서는 동어 반복적으로 거듭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모더니스트들의 현실에 대한 반발로서 탈현실화를 외치며 나선 전위주의자들의 공허한 초월, 침묵, 비개인화, 나아가 산업자본주의 사회 속에서의 예술과 시장이라는 제도 자체에 대한 부정을 해독하지만 이 역시‘새로움’에 대한 끝없는 인식의 갈등을 벗어나지 못한다.

이 새로움이란 시간관에 대한 갈등, 내면의 시간과 외면의 시간을 타협시키기 위한 방법론으로서 추상화의 대두로 이어지고, 다분히 실험적이고 지금에서 보면 유치하기 짝이 없는 브루통과 같은 초현실주의자들의 무조건적인 현실세계에 대한 위반의 가치에서 이상한 것에 대한 숭배라는 미학적 모순, 그리고 그 대표주자인 마그리트가 빠진 상투성과 소비사회의 상표처럼 전락하는 운명에서 그 한계를 폭로하기도 한다.

한편 유럽에서 미국으로 그 주도권이 이전된 세계대전 전후시기에 시장의 전폭적 지원 하에 태어난 잭슨 폴록으로 대변되는 추상표현주의의 이미지의 거부, 즉석 실행의 창조행위, 배경과 형상의 구분을 없애는 기획과 바로 그러함으로서 대형 캔버스에 서서 물감을 흘려대는 육체성에서 외부적 관습의 배제라는 의도를 발견한다. 이러한 현상은 엘리트 예술과 대중예술의 일대 교란, 상호 위치 바꿈으로 이어지고 필연적으로 팝아트의 형식을 낳는다. 이것은 예술성의 파괴를 통해 제도와 시장으로 환원되어버린 예술을 부정하겠다고 나선 라우선버그와 같은 팝아티스트가 소비사회에 의존하는 경향이 되고 마는 역설로 이어지는 것은 실로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사실 이러한 비판적 예술사조의 발생을 탐사하는 시선에는 어쩔 수 없는 산업자본과 소비자본주의에 포획될 수밖에 없는 예술의 그 내재적 한계를 들추어내는 사례로서 활용되고 있다고 할 수 있는데, 이 지난한 작업을 통해서 우리가 이해하고 궁극적으로 찾아내고자 하는 것은 무엇인가를 생각한다면 그리 훌륭한 통찰력을 발견 할 수 없다는 점에서 실망스럽다는 것이다. 물론 어떤 획기적이거나 단절적인 대전환의 방법론을 기대하는 것은 아니더라도 모더니티가 발생시킨 인간의 파편화와 소외, 물신지상주의가 가져온 폭력적 폐해를 최소한 점진적으로나마 축소시키고 상실한 인간성을 회복시키는 틈새나 지향점을 발견해내는 것이어야 할 것이어야 한다는 점에서 아쉬움을 낳는다는 것이다.

끝으로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해서 저자는 소비사회의 물신화에 포섭된 단절의 전통에 실망한 예술, 즉 모던한 것에 대한 반작용으로 해석하고 있다. 그러나 이 포스트모던이란 용어가 모더니티와 단절인지, 연속인지, 긍정인지, 부정인지가 혼돈이라고 말하고 있다. 만일 모던과 결별하겠다는 의미라면 이처럼 모순이 어디있는가고 묻는다. 즉 단절이라는 현대(모던)의 특징을 그대로 반복하면서 구별하려는 것처럼 역설이 어디 있겠느냐는 의미이다. 이 혁신의 논리, 이미 새로움을 표상하는 의미이기에 모던의 반복에 불과한 것은 아닌가하는 의문을 버릴 수 없기도 하다. 어찌 보면 언어의 유희 같기만 하다. 포스트모던을 지향한 건축물들은 절충주의로 나타났고, 단절의 단절을 통합한다는 우스꽝스런 말처럼 그 속을 들여다보면 한없는 모순이 드러남을 알아차리게 된다.  

 

단절을 의미하는 모던을 단절한다면 그것은 바로 모던의 극치 아니냐는 말이 가능한 것이다. 그렇다면 포스트모던은 퇴행, 복고를 의미한다는 말인가? 결론적으로 하버마스, 리요타르, , 잔니 바티모등을 인용하면서 포스트모던에 대한 대립된 이론들을 소개하지만, 저자는 보들레르로 회귀한다. 그리고 현대적 환상의 특징이 사상과 예술 사이의 시차라고 말하면서 이 연속적인 사조들의 궁지(窮地)를 인식하는 역사적 의식과 진보의 교리의 존재를 인정할 도리 밖에 없는 것 아니냐는 패러독스를 외친다. 결국 모더니티의 초기, 19세기 보들레르가 “자유와 숙명이라는 두 개의 모순된 개념이 결국 동일하다는” 신념에 만족해야만 한다는 것인지?  하나의 담론으로서 인식될 수 있는 결론이 지극히 취약하고 산만하다는 단점은 못내 아쉽지만, 모더니즘에 대한 저항의 역사로서 예술 사조들의 다양한 변주의 모습을 파악한 예술비평론으로서는 참고할 가치는 충분히 있다고 판단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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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이 가득한 심장
알렉스 로비라 셀마.프란세스 미라예스 지음, 고인경 옮김 / 비채 / 201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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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영원의 상징이다.
시간의 모든 의미를 쓸어버리고
시작의 모든 기억과
끝에 대한 모든 두려움을 파괴한다.         - 마담 스탈

경주하듯 달려야만 하는 일상은 내가 속한 이 사회가 잃어버릴 것을 강요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차릴 겨를도 없게 한다. 타인을 향해 진지한 마음, 관심을 보낸다는 것은 어느덧 사치에 가까운 것이 되어버렸고, 감성 속에서조차 사라져 버린 것만 같다. 무심하고 냉담한 얼굴을 하고, 경계하며, 대기의 작은 동요에도 화를 내는 성마른 사람으로 변해 버렸다. 누군가를 위해, 모든 생명과 대자연에 사랑 가득한 그윽한 시선을 보내는 것이 무엇인지, 태초의 숭고한 감성들을 기억내기 어려운 사람이 된 것이다. 사랑을 얘기하면 이상한 표정을 짓게 된다. 낯설고 기이한 얼굴...,다름 아닌 내 얼굴인지도...

그래서 내 손에 쥐어진 동화 같은 이 아름다운 이야기는 정말 뜻밖이라 할 수 있다. 기억의 저 뒤편으로 사라져 잊고 있던 것, 진정 소중한 것인 사랑하는 법, 삶을 어떻게 대하여야 하는지를 보게 된 것이다. 버려진 아이들이 수용된 고아원, 세상에 대한 기대가 없는 아이들만큼 누군가의 사랑이 필요한 이들도 없을 것이다. ‘미셸’의 의지이자 사랑인 소녀‘에리’, 그러나 에리는 어둠의 심연, 코마상태에 빠져 병원으로 실려 가고, 이 상황은 소년 미셸에게는 인정할 수 없는 두려움이 된다. 의술로는 치료할 수 없는 방기의 상태, 그녀의 생명, 심장의 박동은 꺼져 들어가고 있다.

실의에 잠긴 소년에게 다가온 구원의 빛은 열흘 내에 사랑을 상징하는 아홉 개의 별을 가져올 것을 주문한다. 내가 상실한 믿음과 순수성으로는 착수조차 할 수 없는 일일게다. 커다란 잿빛 외투에 작은 몸이 감추어진 소년, 사랑을 간직한 사람들의 옷에서 별을 오려내고, 전쟁 후유증으로 경제적 어려움을 겪고 있던 알프스의 소도시‘슬롱스빌’은 이 이해할 수 없는 이 행위로 흉흉해지기만 한다. 가위를 든 소년, 사랑의 별을 제한된 기간 내에 모으기 위해서는, 언제 멈출지 모르고 약해지기만 하는 에리의 심장이 멈추지 않도록 하기위해서라도 각기 다른 사랑의 별을 모아야 한다. 아홉 개 씩이나 다른 사랑이 있다니, 난 그 사랑의 유형을 상상해내지도 못했을 것이다. ‘낭만적 사랑, 오래 지속되는 사랑, 자식에 대한 무조건적 사랑, 우정, 동물에 대한 사랑, 자연에 대한 사랑, 책과 문화 예술에 대한 사랑, 생명에 대한 사랑, 자신에 대한 사랑’, 이들 사랑을 온화하게 발산하는 사람들을 오늘의 우리세계에서, 내가 사는 도시에서 구별하고 찾아낼 수 있을까?

“가장 소중한 것은 우리들의 눈에 보이지 않는다.”는‘생텍쥐베리’의 말은 자기 내면을 보아야 한다는 말일 것이다. 백마 탄 왕자, 아름다운 공주는 우리 내면에 살고 있을 뿐인데, 우린 환영을 만들어내고 터무니없는 물질에 정신을 희생시키곤 불행해한다. 맹인과 추녀의 낭만적 사랑에서 허영과 표피에 현혹을 부추기는 몽매한 우리 사회의 온갖 소음들이 더없이 수치스러워진다. 사랑의 별을 오리기 위해 찾아가는 사랑의 형태들에서 이 처럼 사랑의 고귀한 가치들과 숭고함을 목격하게 된다. “사랑은 언제나 불속에 나무를 집어넣는 것”,  그래서 불길을 살리기 위해서 장작을 찾는 노력을 멈추지 않는 남자는 그저 사랑이 변했다고 말하는 편의성과 단순성의 오늘의 우리들이 망각한 것을 깨우치게 한다. 하나의 편지지 안에도 시간, 공간, 땅, 비, 구름, 태양, 만물, 우리의 모든 정신, 온 우주가 담겨있다는 자연과 생명에 대한 경외의 인식, 피보다 강하게 연결되는 우정이란 관계 등의 일화들은 하나하나 모두가 깊은 감동을 뿜어낸다.

그러나 모두 모아진 아홉 개의 별, 이것들로 만들어진 심장, 이것만으로 멈추어가는 에리의 생명을 되살릴 수 있을까? 우리의 너무 인색한 사랑한다는 행동과 표현, “사랑해, 에리”라고 귓가에 속삭이는 그 간절함의 순간 심장이 멈추어졌던 소녀는 새로운 삶의 생기를 되찾을 수밖에 없지 않을까?
별 사냥꾼이 된 소년, 미셸이 보여주는, 그리고 그가 실행하는 사랑의 여정 모두가 그렇게 안온하고 아름다운 기운에 휩싸이게 할 수가 없다. 기적 같은 일화에는 늘 사랑의 비밀이 간직되어 있으리라는 믿음이 생긴다. 나와 우리들 모두가 이 사랑의 어느 한 쪽만이라도 회복하고 품으려고 노력한다면 이 세상은 그야말로 어떤 심오한 사회이론과 사상적 세뇌가 필요치 않을 것이다. 아홉 개의 사랑 이야기, 이 사랑 이야기를 전했던 걸출한 명인들의 경구와 싯구, 명언들이 또 하나의 장으로 수록되어 사랑 복음서를 더욱 완성도 있게 만들어 주기도 한다. 잃어버렸던 내 한 쪽의 기억들, 감성들이 되 살아난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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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처받지 않을 권리 - 욕망에 흔들리는 삶을 위한 인문학적 보고서
강신주 지음 / 프로네시스(웅진)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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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우리의 신체와 정신들이 끊임없이 상처받는 지금의 이 세계, 그 가해자의 속성이란 무엇인가? 가해자인 그것의 본성과 기원을 찾고, 또한 가해자가 이용하는 우리들의 약점과 그 결과적 현상을 사회학자들, 철학자들, 시인 등 예술가들의 역작들과 비평을 통해 분석하고 진단하고 있다.
가해자란 화폐자본주의이며, 산업자본주의이고 소비자본주의 이다. 즉 세상의 모든 가치들을 포획한 자본주의 체제와 그 포획된 영역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못하고 종속되어 허덕이고 상처받는 우리 사람들의 얘기를 들려주며, 궁극에는 어떻게 이 지독한 체제를 극복하고 상처받지 않는 세상을 실현 할 수 있는지를 고민해보는 장이라 하겠다.

저자는 무엇보다 먼저 이러한 자본주의가 언제 어디서 어떠한 형태로 발생하여 세계를 점령하고 새로운 종교적 지위에 이르게 되었는지를 추적하는데, 그것은 소위 모더니티(modernity), 근대화라는 표현으로 우리에게 이해된 것의 내면이라는 관점에서 시작된다. 우리에게는 20세기 초 서구 근대화, 산업사회로 우리보다 앞서 접어든 일본을 통해 식민지 수탈체제에 실려 경성에 들어왔으며, 서구의 경우에는 19세기 초 프랑스 파리가 모더니티, 즉 자본주의의 출발지라고 보고 있다. 당시의 사회현상들과 사람들의 모습 등 시대상을 묘사하고 그 현상에 내재한 가치들을 성찰하는 과정은 감칠맛 나는 문예비평이며, 일종의 문서고(文書庫)들이 외부성과 연결되어 만들어낸 한 시기를 총합하는 인식론적 형상들이나 형식화된 체계들을 규명하는 고고학적 방법론으로 다양하고 풍부한 석학들의 명 저술들의 해설의 형태를 띠고 있다. 20세기 모던보이를 자처했던‘이상’의 소설 『날개』와 사회학자‘게오르그 짐멜’의 모더니티 현상들에 대한 저술들을 통해 화폐(돈)가 사람들의 가치관, 물질관을 어떻게 변화시켰는지를 추적한다.

일례로 이상의 소설 속 인물인‘나’는 돈의 교환가치에 대해 눈을 뜨지 못한 인물이다. 낯선 남자들과 잠자리를 해서 돈을 버는 아내가 매일 주는 약간의 돈은 그런 그에게 아무런 의미를 지니지 못하지만 어느 날 문득 아내의 옆에서 자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그때 그는 그간 아내가 주었던 돈, 5원을 아내에게 건넨다. 돈을 받은 아내는 그런 나를 거부하지 못하고 자신의 방에 들어오게 한다. 이로서 나는 돈의 교환가치, 그것이 자유, 의도한 목적을 이룰 수 있게 해 준다는 것을 이해하기 시작한다. 이처럼 당대의 이상으로부터 자본주의, 돈의 가치가 인간, 바로 우리 한국인들에게 내면화하는 과정을 목격한다. 이와 병행하여 개인의 독립성과 자율성이란 것이 오직 돈을 가질 때에만 확립된다는 짐멜의 이론을 통해 사랑, 신뢰, 우정과 같은 인간의 소중한 가치들이 돈에 포획되는 현상들을 폭로하고, 화폐 물신성의 기원과 모더니티의 속성인 항상 강박적으로 새로움을 추구하는 삶의 모습에서 자본주의가 어떻게 인간의 내면에 침착하는지를 갈파한다. 나아가 모더니티의 한 현상인 도시화, 현란한 차이의 공간인 도시적 삶의 양식이 사람들을 어떻게 고립시키고 또한 수동적 자유의 상태로 전락시키는지를 탐색한다.

 

이렇듯 자본주의가 만들어 낸 인간의 내적 양태의 변화, 도시화와 같은 공간적 변모, 산업자본의 생리를 다양한 관점들에서 탐사해 나간다. 시선을 자본주의, 모더니티의 발원지인 파리로 돌리면 우리의 ‘이상(李箱)’에 대입되는 인물로서‘보들레르’를 얘기하게 되며, 자본주의의 시작을 19세기 파리에서 찾았던 사상가‘발터 벤야민’의 『아케이드 프로젝트』로 향하게 한다. 사창가와 도박, 매일매일 새로운 상품이 현란하게 진열되는 아케이드는 인간의 욕망을 끊임없이 유혹해대고, 그 욕망을 실현시키기 위해 돈의 위력은 견고해 진다. 여기서 보들레르라는 모더니티의 신경증을 앓던 인물의 욕구와 욕망의 구분을 통해 돈이 자본주의의 숨겨진 종교로서 탄생하는 그 비극성을 보여주고, 인간으로부터 사랑조차 불가능하게 하는 자본주의의 가공할 폭력성을 목격하게 한다.

한편 자본주의하면 대개의 사람들이 떠올릴 수 있는 키워드들이 있다. 바로 우리들이 사는 곳에서 감관(感觀)할 수 있는 모든 것이라 할 수 있는데, 패션과 떨어질 수 없는 유행이란 단어나, 신상품, 그리고 이를 사고파는 매개 수단인 돈, 그리고 과시의 욕망과 이로부터의 출현하는 계층의 구별, 등등 소비자본주의사회의 여러 모습들을 열거할 수 있을 것이다.
유행은 누가 만들어내는 것일까? 산업자본이 잉여자본을 만들기 위해 주도한다. 역시 새로운 상품이란 것도 기존의 것을 가능한 빠른 시간에 낡은 것으로 인식시켜 보다 거대한 잉여자본을 획득하기 위한 자본가들이 발견한 자본주의논리이다. 인간의 치명적 약점인 허영심을 재빠르게 이해한 산업자본가들의 전략적 산물이라 할 수 있다. 이 인간의 약점을 꿰뚫어 본 사회학자가‘부르디외’이다. 그의 명저인 『자본주의의 아비투스』와『구별짓기』는 경제적 자본이 넉넉히 있다는 걸 외적으로 과시하려는 행위, 즉 상류층이 자신들을 타 계층과 구별 짓고자하는 의지로서 문화적 자본 등으로 대표되는 폭력적 현상이다. 이들 산업자본가들과 상류층이 하는 구별짓기의 작동원리를 보면 그것은 단지 돈의 축재를 통해 후천적으로 획득된 취향의 문제에 불과하지만 이것이 하류층, 중류층에게는 도달하고자하는 욕망을 부추긴다. 실은 껍데기이고 부질없는 것임에도 소비자본주의를 지탱하는 소비의 논리는 모든 인간들을 이 대열에 서게 한다. 그래서 현재의 노동을 통해 벌어들인 재화를 미래를 위해 희생하는 고통을 감수한다. 마치 기독교가 말하는 내세라는 미래를 위해 현재의 고통을 감수해야 한다는 논리와 닮아있다. 자본주의가 곧 기독교를 대체하는 인류의 유일종교가 되었다는 논리이기도 하다.

이와 유사한 소비적 측면에서 자본주의의 폭력성과 폐해, 인간의 고귀한 가치들의 파괴성을 통찰한 석학들이 있다. ‘좀바르트’와 ‘보드리야르’가 그들인데, 허영을 부추겨 소비를 촉진하려는 산업자본의 음모와 소비자가 노동자이기도하다는 사실을 은폐하려는 교활한 전략들을 간파했는가하면, 상품을 사용가치가 아닌 관념적 가치, 예로서 세탁기를 행복과 에로틱함, 새로움, 위세와 같은 가치로 받아들이도록 끊임없이 유혹하는 소비의 논리를 들추어내기도 하였다. 이처럼 이 저술은 오늘의 자본주의가 지니고 있는 은폐된 속성들을 다양하고 풍부한 지적 성찰들의 예시와 분석, 해설을 기반으로 그 도사린 문제점을 보다 쉽게 대중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풀어냄으로써 우리 세대는 아닐지언정 우리들의 후손들이 더는 상처받고 사는 고통의 세상이 아닌 자기존중과 평온과 행복을 누리는 세상을 만들 수 있을 것인가를 함께 고민할 수 있는 장을 마련하고 있다.

 

우리들은 더 이상 교환(화폐)을 통해서가 아니라‘바타이유’가 말하는 유쾌한 비생산적소비, 보드리야르의 고유한 선물을 주고받을 수 있는 체제를 만들어내야 할 것이다. 자신의 삶을 영원히 수단으로 간주하게 하는 삶이 아니라 목적이자 수단일수 있는 세상을 말이다. 돈을 가진 자의 자유에 불과한, 다시 말해 소비의 자유만이 허락되는 자본주의 사회가 지닌 한계는 극복되어야만 한다. 우리가 가진 자유라는 것은 이처럼 협소하고 환영에 불과한 것이다. 벗어나야 한다. 관념적 쾌감, 그것도 순간적인 관념상의 쾌락에 불과한 돈에 종속된 이 체제는 인간들을 불행하게 한다. 오늘의 과시적 소비주의, 광신적인 물신주의에 대한 대중을 향한 저자 강신주의 세심한 배려가 책 전체에 배어있는, 그래서 엄청난 수고와 인간에 대한 연민이 깊게 깃든 역작이다. 저자에게 고마움을 느낀다. 책 속에 인용되고 있는 저작들을 이미 읽고 이해를 가진 이들에게도 이 책은 오늘의 종교적 질서가 된 거대한 자본주의체제를 그들을 통해 집약화 된 하나의 잘 정리된 질서로 새기는데 도움을 줄 것이다. 동료와 친지들 모두와 이 책을 나누어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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