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크하는 악마
테오 R.파익 지음, 박미화 옮김 / 수북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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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표제 탓에 마치 스릴러 문학작품처럼 보이는 이 책은 인간의 주요 역사를 장식한‘악(惡)’의 실체를 규명해 보려 한 당찬 인문서이다. 단순해 보이고 또한 늘 자신의 도덕적 잣대를 벗어나면 통칭하여 싸잡아 부르는 악이란 단어는 실상 그리 간단하게 정의할 수 없기조차 하다. 악덕, 죄악, 악령, 악마, 사악, 악의와 같이 도덕적 규범을 벗어나거나 이성으로 이해할 수 없는 것들에 부정적 의미를 더해 포괄적으로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어떤 것은 악에 해당하는 것인지 분류가 모호하고, 분명 악의 본질임에도 이 사회가 칭송하거나 합리화하기까지 하는 것을 볼 때면 더욱 그 정의를 내린다는 것이 가능키나 한 것인지 의문스러운 것이다.

악은 선(善)의 반대급부이자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부정적이고 파괴적인 것의 대명사임은 분명하다. 고대 자연 신앙에서는 악은 금기를 깨는 것, 즉 나쁜 기질이나 성품으로 이해하였으며, 스토아학파는 도덕적 이성과 의무를 저버리는 행위라 정의하기도 했다. 그런가 하면 악이 인간의 본성에 내재하는 것인가 아니면 외부적 영향과의 교섭에 의해서 발흥하는 것인가하는 인간의 보편적 본능에 대해 묻기도 하였으며, 악의 요소에 대한 규명도 꾸준하게 논의되었다. 인간은 왜 이렇게 악에 대해 안절부절, 애처롭게 매달렸을까?

악이란 인간 자신이 만들어 낸 산물이란 자각 때문이었을 것이다. 아니 바로 인간 자신이라는 진실을 보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이 역겨운 진실을 회피하기 위해서, 그리고 죄책감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마치 자기와는 다른 존재인 악을 탄생시키고 그 악의 탓으로 돌려 면죄부를 받으려 한 것일 게다. 또한 자신들의 이해 불가능하고 불가항력적 무능을 감추기 위해 불가사의하고 초자연적 힘이 있는 악을 핑계 삼기 시작했을 것이다. 어찌보면 이 행위자체가 이미 교활하고 사악하기조차 한 인간 본성의 표현 이라 해야 할 것이다.

인간 본성에 내재한 악, 스스로 규율할 수 있는가?

‘칸트’는 악을 근본적인 인간의 본성이라 하였다. 그러나 자유의지에 의한 것이기에 억제하고 조절할 수 있는 것이라 하였다. 과연 이 말은 옳은 주장일까?
설혹 인간이 보편적 도덕본능을 가졌다는 주장이 옳다고 가정하더라도 악을 누르고 도덕성이 승리 할 것이라는 보장은 그 어디에도 없다. 사실 인간의 역사 어느 한 페이지를 보더라도 악이 보이지 않는 곳이 없지 않은가!

악의 기원을 보면 오히려 인간은 꾸준히 악을 연마하고 학습해왔다고 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자기 생존, 종족보호를 위해 이웃을 공격했으며, 소박한 원시무기부터 시작해서 인류를 한꺼번에 사라지게 할 정도의 가공할 첨단 무기까지 약탈문화를 발전시켜온 것이 그 증거이다. 더구나 <구약성서 출애굽기> 32장에 묘사된 수송아지로 만든 우상 숭배를 하였다는 이유로 3천명을 처형한 모세의 행위는 아마 종교라는 미명하에 폭력을 행사하기 시작한 최초의 사례일 것이다.

사실 종교만큼 인간의 사악한 본성을 잘 드러내는 것도 없을 것이다. 사탄을 만들어내고, 마녀를 조작해대며 선천적 공격본능을 교묘하게 은폐시키려 한 역사의 거대한 주체이니 말이다. 이 본질을 보면 권위에 대한 탐욕과 지배욕, 맹목적 이데올로기의 강요, 급기야는 종교에 몸을 감춘 지배자들의 경제적 욕망이외에는 어떠한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억압된 성적 망상과 욕구의 강박적 관념에 기인한 마녀사냥, 지배욕과 교만을 숨기고 감찰관으로 재직한 23년 동안 무자비한 박해와 처형을 서슴지 않았던‘칼뱅’의 종교적 광신, 14세기 유럽을 휩쓸었던 페스트의 창궐을 기회로 이단자라는 황당한 명분하에 2억5천만 명을 살해한 종교는 인간의 악을 설명하는데 빠질 수 없는 증거가 된다.
“종교는 늘 그랬듯이 피에 든 독이다”라는 ‘살만 루시디’의 말이나, “선한 사람이 악행을 한다면 그것은 종교 때문이다.”라고 한 ‘리처드 도킨스’의 악의 기원, 악의 근원에 대한 규명은 이러한 현상을 명료하게 전달하고 있다.

더구나 20세기에 이르면 히틀러의 유대인 학살이라는 기독교전통에 강하게 뿌리를 내리고 있는 형용할 수 없는 인류의 악을 보게 된다. 여기에 더해 자신의 정치권력의 보존과 유지를 위해 2천만 명을 학살한‘스탈린’, 국가사회주의 실현을 위해서라는 이름하에 5천만 명을, 그리고 문화혁명을 통해 7천만 명을 살해한 ‘마오쩌둥’, 그리고 ‘폴포트’등 이루 다 열거할 수 없을 정도의 잔혹한 대학살이 그치질 않았다. 단지 자신들의 정신세계를 실현하기 위해 자기에 반하는 계층이나 민족, 단체를 말살하려는 정신 이상적 잔혹행위는 지금 이 순간에도 도처에서 자행되고 있다.

온갖 악을 축약해 놓은 듯한 각종 고문이 ‘국가는 피를 부르는 원천과 같다’는 말을 입증이라고 하려는 듯이 2006년 국제사면위원회 발표와 같이 100여개 국가에서 은밀하게 실행되고 있다.
“인간은 자연의 힘을 지배하는 과정에서 자신이 살아남기 위해서는 마지막 한 사람까지도 말살시킬 수 있을 것”이라는 정신분석학자‘프로이트’의 말처럼 인간에 내재한 악의 본성을 완벽하게 압축하기도 힘들 것이다. 결국 악을 통제하고 조절하는 것은 인간의 존속을 위해서 절대적이고 최우선적 과제여야 한다는 것이다. 인간의 도덕성이 악을 넘어서는 우위를 점하기란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 역사가 증명하고 있지 않은가!

악이 지배원리로 작동하는 현대사회

오늘의 우리는 사악한가? 그렇지 않은가? 우린 양심이란 것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개개인의 양심이란 것이 같은 정도의 도덕적 기준을 가지고 있을까? 아마 엄청난 정도의 차이를 지니고 있다는 것이 옳은 판단일 것이다. 오늘의 인간들은 양심을 기초로해서 사회규범을 배운다. 그리고 그 양심이라 것의 대부분은 부모의 가르침을 받아들이고 그것을 내면화함으로서 자신들의 도덕적 규범의 원칙으로 사용한다. 그렇다면 그 부모들의 소소한 생활양식에서부터 이웃에 대한 인식, 사회와 정치현상의 이해 정도, 경제관념 등과 같이 오늘의 한국사회의 중추적 담론 세계란 어떤 것인지는 지극히 중대한 것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이 양심을 형성하는 세계는 어둡다. 나만 잘되면 되는 것이고, 동료를 눌러버리고 이겨야만 된다고 가르치고 있으며, 이익이 도덕에 우선한다는 자본주의 원리가 작동하고, 폭력이 선을 위한 정당한 도구라고까지 설명하고 있다. 자기 자식만은 지배계층에 속하여야한다고 지배욕의 환상을 끊임없이 주입하고 있으며, 반사회적이기까지 한 자만심과 교만을 미덕으로 부채질 한다. 그리고 진실함보다는 그럴듯한 과대포장과 환상, 즉 사기와 위선, 범죄의 경계를 넘어서지 않을정도의 교묘한 속임수를 쓰는 것이 능력이라고 큰소리친다. 이기주의와 방종, 음모와 거짓말, 차별과 따돌림을 합리화함으로써 타자를 이해하고 존중할 줄 모르는 괴물들, 악인들, 사악한 인간들을 칭송하며 반사회적 인격장애자들을 양산하고 있다.

「자신의 목적 달성을 위해 아첨도 잘하고 다른 사람을 교묘히 활용, 철저한 계산에 따라 겉으로는 상냥함하고 매력적 사람으로 변하지만, 차갑고 잔혹한 폭력을 휘두르면서 자기 자신에게는 매우 관대하고 자기 연민에 빠져 눈물로 호소하며, 실패와 좌절은 남의 탓, 불행한 환경이라 변명」하는 파렴치한 ‘공공의 적’들이 세상을 누빈다. 그러하다보니 고위관료의 후보청문회가 부패와 부정의 더러운 죄악에도 아무런 죄책감조차 느끼지 못하는 인간들의 전시장으로 변질된 것이다.
일반적 강도, 집단 살인범, 연쇄살인범과 이들 정치권력자, 고위관료, 부도덕한 경제인들과의 차이란 어떤 것일까? 살인범이나 강도와 이들과는 무슨 도덕적 차이가 있는 것일까? 살상욕구를 수반한 정신착란에 의한 살인범이나 억압받고 착취당하여 사회로부터의 냉대와 부당함의 반작용인 강도범들보다 이들이 덜 악한 것일까?

이들은 훨씬 교활하다. 이들은 명확하게 보이지 않는 악을 행한다. 따돌림, 차별, 부당한 대우, 억압, 사기, 비관용, 동점심 결여, 교만과 같은 구체적으로 드러나지 않는 심리적 폭력을 행사하고 치밀하고 용의주도한 계획 하에 은밀하게 실행한다. 이처럼 사악한 의도와 동기에 의해 저질러지는 악행은 사회를 훨씬 불행하게 만든다. 사실 이들의 반사회적 행위가 저질러대는 악은 사회 전체를 병들게 하고 좌절하게 한다. 더욱 악질적인 것이다. 오늘의 한국사회는 이처럼 악이 지배원리로 작동하는 사회라 할 것이다. 반사회적 인격 장애자들로 들끓는 사회, 모두 광인이 되어 악이 내뿜는 마력에 심취하여 그 사악함에 환호하는 그런 사회가 되고 있다는 것이다.

인간의 내면에 묶여있던 악의 사슬이 풀려나 마구 휘젓기 시작한 형국에 돌입하고 있는 양상이다. 악이란 본질적으로 평화로운 것이 아닐 게다. 악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악의 맹렬한 잔혹성이 설쳐대면 그것의 귀결은 공멸이 되고야 말 것이다. 또한 우리 개별 인간들 역시 자신들 속에 맹수를 잠재우기 위해서는 지속적인 달램이 필요 할 것이다. 그 달램, 도덕적 성숙을 위한 자양분이 어느 때보다 필요한 시대이다. 인간의 선천적 공격성을 여하하게 자제하는 가는 질서유지와 평화로운 미래의 삶을 위해 필수적일 것이다. 지나치게 악해져 있다. 본성 탓만 할 것도, 그렇다고 악(마)의 탓이라 핑계만 댈 일도 아니다. 결코 인간의 결함 때문이라 해서 정당화되지 않는다.

클로징

악의 기원에서부터 인류의 역사를 장식했던 악의 화신들과 그 면모들, 악의 유형으로서 살인을 비롯한 범죄의 동기와 행태들, 그리고 악을 야기하는 생물학적, 심리학적 성찰들과 인간의 욕망, 본성에 깃든 악의 유혹까지 악의 근원과 계보, 인식에 대한 다채로운 성찰을 통해 인간의 역사에 악이 어떠한 영향을 끼쳐왔으며, 사회 시스템, 장치, 인간 내면에 작동하고 있는지를 설명하고 있다. 굳이 인간은 악하다느니, 선하다느니 하는 순환론적 헛소리는 차치하더라도 현상적으로 드러나는 악의 현현이 인간과 인간사회를 불행하게 하는 것은 현실이다. 타자를 상실한, 도덕성이 경제 가치에 밀려난 오늘의 사회가 그 규범성을 회복하는 것은 낭만적이고 학문적인 악의 타령이 아니다. ‘노크하는 악마’를 떨쳐낼 지혜가 절실하게 필요한 것이다. 악의 사회학적 성찰 등 부분적으로 미흡하기는 하지만 총합적으로 인간 본성으로서의 악(惡)을, 사회시스템 속에서의 악을 이해하는 데 충분히 유용한 지식을 제공하고 있는 책이다. 행동생물학, 정신병리학, 심리학, 철학, 신학을 망라한 고찰이 매력적이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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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마의 공놀이 노래 시공사 장르문학 시리즈
요코미조 세이시 지음, 정명원 옮김 / 시공사 / 200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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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작품을 읽지 않으신 분은 참조바랍니다.]

민간에 오랜 세월 전승되는 노래 말에는 시대의 불온함이나 부조리, 또는 은폐된 진실을 은연히 표현하려는 완곡함이 담겨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요코미조 세이시’가 창조한 ‘악마의 공놀이 노래’라는 이 민간전승의 노래는 그래서 이미 그 자체에 진실을 담고 있기에 소설의 시작부인 프롤로그에 소개되고 있는 <귀수촌 공놀이 노래>에 대한 유래와 가사는 사건의 전개를 강력하게 암시한다.

이 정도의 암시라면 독자를 너무 쉽게 보는 것 아닌가? 아니면 사건의 흐름을 이렇게 미리 예상하게 해도 추리의 재미를 반감시키지 않을 자신만만한 또 다른 장치들이 있다는 것인가? 이런 반감과 기대가 교차하는 애매함에 이끌려 전설적인 탐정‘긴다이시 코스케’의 정양지인 오카야마현 한 시골마을인 귀수촌(鬼首村; 오니코우베 마을)에 이르는 여정에 동원 가능한 지력을 집결시키게 된다. 혹여 작가가 배치해 놓은 사소한 장치를 놓쳐 이 오만한 암시를 인정하게 되는 결과를 맞이하지 않기 위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머리를 조아릴 수밖에 없는 국면이 일찌감치 찾아오고, 최초의 사건에서 조차 완벽하게 장벽에 막히고 오리무중에 빠져들고 만다. 긴다이시 코스케 시리즈 작중 왜 최고의 작품으로 지칭되는지, 수많은 오마주들이 만들어질 정도로 일본 탐정 추리물들의 원형적 기원으로 일컬어지는 지 확인케 된다.

긴다이시 코스케는 요양지로 머물게 된 온천여관 거북탕, 그리고 20여 년 전 남편‘겐 지로’의 피살이라는 여주인 ‘리카’에 얽힌 사연을 오카야마 현 경찰‘이소카와’ 경부로부터 듣게 된다. 마을의 양대 지주인‘유라’와‘니레’ 두 가문의 경쟁에서 뒤진 유라 가문의 욕망을 비집고‘온다’란 외지인이 새로운 사업을 들여왔으나 이를 시기한 리카의 남편인 겐지로가 항의를 위해 찾아갔다가 얼굴을 알아 볼 수 없는 사체로 발견되었으며, 온다란 인물은 홀연히 사라졌다는 미제 사건의 이야기다. 이소카와가 오래된 이 이야기를 긴다이시에게 들려주는 이유는 사건에 대한 막연한 석연찮음을 떨쳐내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며, 넌지시 당대 최고 탐정의 호기심을 자극하여 진실에 도달하고픈 기대라 할 수 있다.

여기에 더해 두 대지주 집안의 인물들 면면과 여색에 취해 몰락한 토호집안으로 마을의 어른 격인 촌장‘호안’노인, 거북탕의 사람들, 사라진 온다와 정을 통했던 여인들의 비밀, 유명 가수가 되어 귀향하는 사생아 ‘유카리’등 얽히고설킨 가문들의 은밀한 부정(不貞)의 소문이 쌓이면서 그야말로 추리력의 혼탁함으로 내몰린다.
이윽고 미모의 유카리가 귀향하는 날, 흔적도 없이 촌장 호안이 사라진다. 살해된 것으로 추정되지만 피살로 위장된 것 같기도 한 사건이 발생하고, 촌장의 집 앞 늪을 수색하지만 찾지 못한다. 어딘지 20여 년 전의 미제 사건과 관련이 된 듯한 실종 사건, 현장수사본부가 거북탕에 차려지지지만, 유라가의 미모의 여식이 살해된 채 다시금 발견된다. 프롤로그를 꼼꼼히 읽었다면 이 연쇄 살인의 순서를 예측할 수 있다. 그러나 탐정 긴다이시나 이소카와 경부는 사건의 방향을 알려주는‘귀수촌 공놀이 노래’를 알지 못한다. 이처럼 이 소설은 소설 속 인물이 알지 못하는 것을 독자에게 먼저 알려줌으로써 우월적 지위를 독자에게 선사한 것 같지만 사실은 아무것도 알려준 것이 없다는 것을 깨닫는데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살인의 동기도, 살인자도 오리무중이다. 등장한 수십 명의 인물들을 모두 용의자로 지목 할 수도 있지만 이렇다 할 동기를 발견할 수 도 없으니, 피살될 자가 누구인지 예측한들 이는 공허하기 짝이 없는 지식에 불과해 버리고 마는 것이다. 결국 작가가 제시한 암시에 현혹되어 거미줄처럼 얽힌 복선들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허우적거리게 된다. 그리곤 양대 가문의 동년배 처녀들이 연이어 살해되면서 발산되는 공통의 무엇이, 어렴풋이 20 여 년 전 사건의 흐릿함, 그 실체를 암묵적으로 드러낸다.

사건의 윤곽이 모두 드러나고서야 문득 허를 찌르는 반전의 아이디어에 감탄한다. 1인 다역(多役)이란 과감하고 혁신적인 발상이라 할 수 있는데, 이후 많은 문학 및 영상 작품들의 기원이 되었을 법하다. 살인의 순서까지 알려주었음에도 소설에서 눈을 떼지 못하게 하는 작가의 역량, 전근대적 신분의 차별의식이 낳은 뒤틀린 위선, 그리고 탐욕적인 성의 추구, 모욕된 성의 분노 등 인간의 심성을 자극하는 본원적인 소재와 스토리의 정교한 구성, 기발한 전환 장치들이 어우러져 만들어내는 화음은 가히 완벽한 합창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민간전승이라는 토속성에 깃든 인간의 비원과 욕망을 배경으로 하여 불세출의 탐정‘긴다이시 코스케’가 탐색해내는 악의 근원조차 연민으로 승화되는 것은 이 작품이 기교와 장치의 픽션으로서 만이 아니라 문학작품으로서의 성취까지 달성한 것이라 하여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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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스트 차일드 - 판타스틱 픽션 블랙 BLACK 13-1 판타스틱 픽션 블랙 Black 13
존 하트 지음, 박산호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1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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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인의 고통에 우린 얼마나 공감하는 것일까? 그 아픔을 어루만져주고 삶의 일상으로 복귀하는데 필요한 견고한 연대를 위한 진정의 시선과 노력을 지속적으로 보낼 수 있는 것일까? 우리가 어떤 고난에 이르렀을 때 누군가 내민 따뜻한 손을 잡아 본 적이 있긴 한가? 우리의 믿음이 함께하는 공동체라는 것이 존재하기나 하는 것인가? 어쩌면 메마르고 조각난 오늘의 인간들의 심성에 이러한 신뢰와 지원과 같은 애정의 유대를 기대한다는 것이 터무니없는 환상일지도 모르겠다. 아니 상당부분은 현실일 것이다.

누군가의 사랑하는 자식이 실종되고, 살해되거나, 가족의 불행한 사건이 사회, 공동체의 관심을 받는 것은 아주 순간적이다. 고작 관음증을 자극하는 미디어의 상업적 호기심이나 마치 도덕적 사회인 냥 가벼운 연민을 표시하는 것이 전부일 게다. 자신만은 자기의 가족만은 그런 고통에 연루되지 않았다고 가슴을 쓸어내리고, 지나친 자극으로 무뎌진 분별력이 곧 무감각과 무관심으로 잊혀지고 결국은 고통 받는 자에게 혐오의 시선을 보내며, 자신들의 연대에서, 공동체에서 격리시키기까지 하는 것이 진실이기조차 하다. 이때 굳건할 거라 믿었던 법과 제도와 사회적 장치들, 사람들에 대한 믿음이 모래알 같은 것이었음을 확인하게 될 때 우린 어느 곳으로부터 보호를 받고 도움을 기대할 수 있을까?

열 세 살의 어린 소년, ‘조니’에게 세상은 이미 어떠한 연대도, 믿음도, 도움도 기대 할 수 없는 냉엄한 곳이다. 오히려 사악하고 기만적이며 위선과 폭력, 잔혹함만이 무성한 곳이다. 이란성 쌍둥이 여동생인‘앨리사’의 실종은 아빠의 가출과 헤어날 수 없는 상실감에 휩싸인 엄마의 무기력으로 가족을 끝없이 몰락시킨다. 무력한 미모의 미망인은 더러운 욕구를 충족시키려는 추악한 인간들의 사냥감이다. 성욕의 탐닉에 장애물인 아이에게 가해지는 상습적 폭력, 약물에 취해 사는 엄마, 사회의 무관심은 소년을 절망하게 한다.

「이제 조니는 그 모든 것, 그렇게 강한 확신을 가지고 배웠던 모든 것에 의심을 품게 됐다. 신은 사람의 고통에 신경 쓰지 않는다. 적어도 어린 아이들의 고통에는. 정의나 인과응보, 지역 공동체 같은 건 존재하지 않는다. 이웃은 서로 돕지 않았고, 착한 사람들은 보상받을 수 없다, 그 모든 말이 헛소리였다. 교회, 경찰, 엄마, 누구도 문제를 해결 할 수 없었다, 그렇게 할 힘도 없었다. 1년 동안 조니는 자신이 혼자라는 새롭고도 냉엄한 진실 속에서 살아왔다.」

결코 세상은 그와 그 가족의 고통을 이해하지도, 돕지도 않았다. 신은 없었다. 아이가 인식한 세상은 선하지 않았으며 어떠한 믿음도 존재하지 않은 냉혹한 세계였다. 실종된 누이동생을 찾기 위해서, 그가 나서야 하는 것이었다. 오직 자신만이 가족을 구원할 수 있는 것이다. 삼촌도, 이웃도, 공동체도, 경찰과 같은 공권력도 아무런 힘을 발휘하지 않는다. 세상은 본디 그런 것이라는 확신...
지역사회가 더 이상 기억하지 않는 소녀의 실종이 1년이 지났을 무렵, 또 한명의 소녀가 실종 된다. 경찰 서장은 자기 조직의 체면과 자기 지위의 보전이란 이기심에서 이 새로운 사건을 이해한다. 어린 생명의 구출, 가족의 고통, 범죄의 규명, 공동체의 안전 보장이란 본원적 소명의식이나 의지가 아니다. 모든 것이 자신들의 이해관계에 대한 손익계산에서 출발한다.

피폐한 사회에 정의와 신뢰를 회복하려는 양심은 항상 있기 마련이라는 다소 고답적인 구태의연함이 있긴 하지만 조니 가족의 고통을 잊지 않는 경찰이 있다. 형사반장, ‘헌트’의 조니에 대한 보호와 미해결 시건인 앨리사 실종에 대한 수사는 출세욕에 찌든 서장의 적대적 시선을 피해 지속된다. 세상이 제아무리 추하고 믿음이란 존재하지 않는 곳일지언정 살아있는 단 하나의 연민, 신뢰라는 불꽃이 어둠을 걷어내는 법인 모양이다. 여기에 사랑, 믿음의 복원을 위해 위험을 무릅쓰는 소년 조니의 용기 있는 탐색과 도전이 더해져 우리들이 잃고 있는, 아니 이 사회에 절실히 요구되는 미덕들의 실체를 보여준다.

소아성애자의 광기가 저질러대는 수없는 어린아이들의 살해, 알콜과 약물에 취해 약자들을 착취하고 그녀들의 성을 유린하는 파렴치한 부자들의 광란, 하찮은 권력이라도 지니면 자기 이익을 위해서 범죄도 서슴지 않는 공적 권력의 하수인들, 쾌락을 위해서는 유아조차 밀폐된 차안에 방치하는 탕자들, 자기자식의 성공을 위해 남의 자식의 죽음을 은폐하는 두렵기만 한 오늘의 인간들의 일그러지고 뒤틀린 세계가 소년의 용기와 형사반장의 연민에 그 추악한 모습들을 드러낸다.

어린아이들의 죽음과 비열한 인간들의 조합만큼 인간세계의 타락과 추악성을 설명하는 말도 없을 것이다.
인간의 사악함이 빚어내는 고통이 얼마나 많은지 우린 인정해야 할 것이다. 이런 자각을 넓혀나가지 못하는 사회만큼 암울하고 절망적인 곳은 없을 지도 모른다. 가까이는 이웃, 그리고 우리주변의 약자, 어디선가에서 시름하는 사람들에 대한 고통의 공감과 연민의 실천에 대해 되돌아보게 하는 작품이다. 사건이나 사건현장의 추리적 수사라는 진부한 궤적을 벗어나 사건이 지닌 본질적 배경, 인간사회의 실제, 그 파멸적 도덕과 붕괴된 정의에 대해 생각게 하는 구성은 더욱 절실하고 감동적인 새로운 스릴러문학의 방향을 제시한다. 다층적 스토리의 전개, 악의 의외성과 그 실체가 빚어내는 반전 , 예리하게 포착된 인간사회의 통찰 등 실로 품격 있는 빼어난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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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얼구나 강의 오른쪽 일루저니스트 illusionist 세계의 작가 23
츠쯔졘 지음, 김윤진 옮김 / 들녘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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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쪽만 넘겨도 내 삶의 시원(始原), 태곳적 어느 곳을 거니는 듯한 향수를 느끼게 된다. 자연에 대한 경외와 사랑, 순수함, 섭리에 대한 넓디넓은 포용의 숭고한 정신이 그대로 마음속으로 조용히 스며드는 것만 같다. 아니 잊혀졌던, 잠자던 그 순수의 겸허가 비로소 깨어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이 느낌을 무어라 해야 할지, 담아낼 길 없는 조악하기만한 언어의 최고표현으로서 그저 아름답고 숭고하다 할 밖에 없다.

내몽고지역 중러국경을 흐르는 헤이룽 강 지류인‘어얼구나 강’의 오른쪽, 울창한 삼림지대에 태고의 삶의 방식을 지켜왔던 작은 부족인‘어원커 족’여인의 따뜻하지만 또한 시린 한 세기의 이야기가 초연하게 그리고 도저하게 흐른다. 그녀의 담담한 듯 치장되지 않은 운명에 대한 순결한 이해가 그 어떤 기교와 세련됨으로 무장한 문명의 목소리를 압도한다. 순록의 먹이인 이끼와 사냥할 동물이 있는 숲 속 자연을 찾아 이동하는 유목민, 20명 남짓한 씨족 단위인‘우리렁’의 소박한 삶의 면모는 그 옛날 그렇게 살았던 것만 같은 잊었던 기억의 그리움처럼 내게 다가온다.

삶의 방식의 변화를 강요하는 문명은 이들의 우리렁에도 더 이상 항거 할 수 없는 세상이 오고, 피붙이들이 떠난 외로이 남은‘시렁주’밖을 응시하는 그녀의 기억은 마냥 원시의 자연에서 삶을 일구던 어린 시절, 그리고 여인이 되어 사랑을 얻게 되고, 또한 사랑하는 이들을 잃게 하는 운명과 마주하며, 떠나보내는 슬픔까지 삶을 오롯이 껴안아왔던 그 순수의 세계로 향한다.
시렁주 밖에 차가운 북풍이 몰아치는 밤, 엄마‘다마라’의 달뜬 목소리와 아빠‘린커’의 소곤거림 속에 일어나는 바람소리조차 순박함과 신비로운 생명력을 지닌 고결한 언어가 되어 향기롭고 유쾌한 세계로 침잠하게 한다.

순록의 무리와 함께하는 이들의 생명과 자연과의 교감, 자연과 일체가 된 어울림, 그리고 존중과 경외의 정신이 만들어내는 의식(儀式)이 금기의 요소들과 교우하며 신성함, 고결한 인간 정신을 자아낸다. 그러나 삶에 도사린 죽음은 우리렁을 떠나지 않는다. 큰아빠인‘니두’ 무당의 신무(神舞)에 내재한 신성과 인간애를 오가는 절제의 비애감이 깃들고 , 니두의 죽음에 이어 무당이 된 동생의 처 ‘니하오’의 숙명적인 삶의 질곡(桎梏)에 비추어지는 고통은 공동체를 향한 사랑과 희생의 숭고함, 도덕적 지고함이 발산하는 숭고미에 이른다.

우발적인 어린 죽음들, 숲의 정령인 자연이 부르는 죽음들, 그리고 문명과 인간탐욕이 재촉하는 강요된 죽음들로 아비와 어미, 형제들, 사촌들, 씨족들의 죽음이 그치지 않는다. 소나무 때론 자작나무위에 누인 주검들, 그 풍장(風葬)의식이 담고 있는 사랑과 영원함에 대한 약속들의 기원은 운명에 대한 또 다른 포용, 가없는 운명의 사랑이란 웅숭깊은 인간정신을 보여준다.
아흔이 된 숲 속의 어원커 족 여인, 그녀 인생의 새벽과 정오, 황혼에 이르는 삶의 시간에 깃든 사랑과 상실, 그녀를 둘러싼 사람들의 오열과 고통, 화해와 결별, 새로운 생명의 탄생과 성장, 그리고 죽음의 일련의 사건들이 오늘, 우리가 겪는 것들의 오염됨, 추함과 얼마나 격이 다른지 그곳으로 달려가고플 정도이다.

일본의 만주침략은 이들 숲속 우리렁에도 손길이 미치고, 남자들의 군사훈련 동원, 그리곤 일본의 패망과 함께 진행된 중국의 공산화와 문화혁명의 이념적 회오리는 이들 때 묻지 않은 자연인들을 비루한 잣대로 훼손하고, 개발이란 명목 하에 삼림의 무참한 벌목은 이들과 순록의 터전을 몰아댄다. 사랑했던 이들의 얼굴과 순록과 산과 강을 바위에 그리며 그리운 이들이 떠난 세계의 아득함을 담아내던 여인, 도시로 나가 유명한 화가가 된 손녀‘이렌나’가 도시를 떠나 어원커 우리렁의 삶과 자연을 그리고, 마침내 강물에 뛰어들 수밖에 없는 것은 우리들이 문명이라 길들여 놓은 것들이 결코 시원의 숭고함에 이를 수 없다는 상실의 고통 때문이었을 것이다. 우리들의 마음의 고향, 그 순결한 자연, 한 없이 너그러운 운명에 대한 사랑이 낮은 목소리로, 그러나 세차게 가슴을 파고든다.

이 작품을 읽게 된 것은 내게 행운이다. 그리고 작가‘츠쯔젠’을 알게 된 것 역시 더 없는 문학적 발견이라 하겠다. 작은 손바닥에 올려놓은 소금을 핥는 순록의 모습과 듬성듬성 지어진 시렁주들, 니하오 무당의 슬픈 영혼곡, 바람소리들, 우리렁을 위해 사냥을 나간 남자들의 사랑 가득한 자부심, 여인들의 투기와 기다림, 이 모든 순수함이 울려대는 아름다움에 어찌 매혹되지 않을 수 있을까! 작가의 말처럼 인류가 갈망하고 도달하고픈 성스러운 경지, 그 너그러움과 선량함, 애틋함을 품은 마음의 경지를 마음껏 거닐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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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기와 우연의 역사
슈테판 츠바이크 지음, 안인희 옮김 / 휴머니스트 / 2004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인간의 역사에서도 그러하겠거니와 평범한 개인의 삶에 있어서도 어떤 짧은 순간에, 또는 이해할 수 없는 모순 속에서 숙명적인 결과가 일어난다는 것은 실로 당혹스러운 진실이 아닐 수 없다. 그 결정적 순간이나 몰락으로부터 무한한 상승의지가 솟아나는 위대한 모순을 알 수 있었다면 우린 천재로 불리고 삶과 역사의 전환자로서 우뚝 서있을지도 모른다.

‘슈테판 츠바이크’는 ‘순간’, 그리고 ‘위대한 비극’을 포착했다. 이것들에 드리운 광기, 바로 인간 내면의 심층에서 역동하는 어리석음과 무서운 본능이 지배하는 인간사와 인류의 역사의 전환적 사건들의 실체를 보았다는 것이다. “본질적이고도 지속적인 것은 모두 아주 드물고도 짧은 영감의 순간에 창조된다.”는 그의 말은 이 책에 소개되는 인물들과 역사적 사건 모두를 정의하기에 충분하다. 빼어난 이야기꾼이 문학적 향기 그득한 문장에 담아 들려주는 운명의 진실들, 우린 한 걸음 더 우리 자신의 역사에 다가가게 된다.

선택의 순간, 단 1초의 무의식적이기도 하고 의식적이기도 한 망설임, 그리고 역사의 페이지는 넘어간다. 한 개인은, 인류는 오늘의 세계와는 전혀 다른 길을 걷고 있을지도 모른다. 또한 이길 수 없는 운명의 거대한 힘에 맞서려는 광기가 없었다면 예술도, 과학도, 문명도 없었을지 모른다. 그래서 우리의 삶은, 역사는 우연과 광기가 낳은 위대한 모순의 산물이라고도 할 것이다.

세계사를 바꾼 ‘1초’

1815년, 유럽, 나아가 세계를 뒤흔든 ‘워털루 전투’는 나폴레온이라는 인물의 정치생명과 유럽대륙의 패권 향방을 가름 짓는 절대 절명의 역사로 기록되고 있다. 그러나 이 세계사적 전투가 운명의 부름에 귀 기울이지 못하는 어리석고 무능한 장군, ‘그루쉬’라는 인물의 한 농가에서의 1초, 순간적 오판의 결과였다는 것은 인류의 엄청난 역사라는 것도 사실은 대부분의 일상적이고 지루함이며 본질적인 것은 그 속의 아주 짧은 순간뿐이라는 것을 말해준다. 그 우연의 순간 말이다. 이미 이 미련한 프랑스군 장수를 따돌리고 영국군을 지원하기 위해 워털루로 달려간 프로이센군의 흔적만을 찾는 그루쉬의 1초는 세계의 시간이었던 것이다.

이 1초라는 순간의 시간, 어떤 우연함에 의해 찾아든 시간은 그 순간만큼 무한히 확장되는 시간이다. 도스토예프스키가 정치범으로 처형대에 끌려가 검은 두건에 시야가 가려지고 사형되기 직전에 교차하는 불타오르는 죽음의 키스, 영원한 빛으로 나아가는 기쁨과 행복이 어울린 지상의 마지막 고통, 그리곤 삶의 달콤함에 미련을 떨치지 못하는 그 찰나(刹那)의 상념들이 이루어지는 시간이다. 칼이 내려치려는 직전의 순간, 처형은 정지되고 생의 순간으로 복귀하는 도스토예프스키의 얼굴에 매달린“창백한 노란 웃음”은 실로 형언 할 수 없는 인간의, 삶의 미지의 숭고한 무엇이다.

역사의 우연, 그 순간들이 소설이 되어 흐르고, 웅장한 서사시가 되어 호수의 잔잔한 물결처럼 우리의 가슴에 파문을 일으킨다. 삶과 역사의 대부분은 지리멸렬하고 초라하다. 어떠한 것도 지속으로 내내 운명적이지 못한 것이다. 그 짧은 찰나의 시간이 우리의 영원을 규정하고, 지탱한다. 흔해빠진 역사의 소재가 아름다운 문학적 문장으로 변신하여 웅숭깊고 지고한 삶의 교훈으로, 인간 본성에 대한 경이로운 통찰이 되어 심장을 파고든다.

인간의 진실, ‘광기’, 그 모순의 세계

감성의 억제, 이성의 채로 걸러진 이지적 감성을 말하던 대문호 ‘괴테’의 노년에 찾아든 열정, 아마 죽음이 임박한 일흔 네 살의 노(老) 대가에게도 그 불안의 강렬함은 마지막 욕망과 마지막 체념의 경계를 오르내리게 했던 모양이다. 열아홉 살 소녀, ‘울리케 폰 레베초프’를 향한 연정, 다시금 청춘을 소유하고 싶다는 열망, 늙은 베르테르가 다시 깨어나는 그 전환적 외침은 광기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광기! 그 인간적 진솔함, 가장 깊고 가장 성숙하고 정말로 가을처럼 이글거리는 문학작품이라 불리는 『마리엔바트의 悲歌』의 탄생을 가져왔으니 말이다.

“어찌 다시 만나기를 희망하랴,
이 날에도 아직 닫혀있는 저 꽃 봉우리를.
낙원도 지옥도 네 앞에 열려 있으니
마음 속 생각들은 얼마나 불안하게 흔들리는지!”

울리케의 키스를 받으며 이별하고 돌아오는 노인의 체념에는 잊을 수 없는 내적 갈등이 안타깝게 출렁인다.

이처럼 광기는 열정이요, 집념이며, 생래적 부조리에 대한 대항이다. 동로마제국을 멸망시킨 마흐메트 2세의 콘스탄티노플 성벽공략을 향한 집념의 산물들, 거대한 대포, 노출된 바다를 우회하기위해 산을 오르는 배는 그야말로 욕망의 실현을 위해 인간이 행하는 광기의 정수를 보여준다.
또한 유럽인들에게 신대륙의 진면을, 광활한 대양 태평양을, 나아가 잉카에 이르는 길을 최초로 드러낸‘발보아’란 인물의 불멸을 향한 도주의 행로는 한 인간의 광기가 세계사의 흐름을 어떻게 뒤바꾸는지를 찬란하게 드러내며, 성공이라는 우연성에만 집착하며 불타올랐던 남극탐험가 스콧의 장엄한 도전은 위대한 비극의 진한 감동을 일깨운다.

더구나 근대적 시간관, 지상에서의 속도, 그 규모나 리듬에 있어서 근본적 변화를 가져온 1837년의 세계사적 사건을 주목하게 하는데, 한 인간의 굽히지 않는 소박한 용기, 그래 광기다. 격리되어 있던 인간 체험을 동시적인 것으로 만들어 준 대 역사, 구대륙과 신대륙을 잇는 대서양의 해저 케이블 설치는 미친 짓이었을 것이다. 모르스부호가 전신(電信)을 타고 순식간에 세계를 연결하였으니, 오늘날의 이동통신기술은 사실 이 최초의 진보를 향한 도전에 비할 것이 못된다.

에필로그

일생의 작품세계에서 인간의 숨겨진 악마성, 광기와 욕망의 본성, 그 순간의 우연에 천착한 ‘슈테판 츠바이크’의 시선이 녹아든 이 저작은 예리한 역사적 통찰을 문학 향기 그득한 소설로, 서사시로, 희곡작품으로 둔갑시켜 우리네 삶의, 감성의 한복판으로 흐르게 한다. ‘헨델’의 숭엄한 <메시아>의 선율로, 공병장교‘루제’의 하룻밤 열정이 조국 프랑스의 국가인 <라마르 세예즈>가 되어 울려 퍼진다.
그리고 ‘톨스토이’의 미완성 희곡 『그리고 어둠속에 빛이 비친다』는 폭력과 권력에 대한 이중 잣대로 가장했던 대문호의 양심을 하나의 희곡으로 완성하기도 한다. ‘아스타포보’ 기차역 대합실에 붙어있는 작고, 좁고, 낮고 가난한 침대에서 가장 가까운 사람들로부터 가장 멀리 도망쳐야 했던 노 작가의 죽음을 승화시키면서.

가끔 우리는 거대한 당위를 거스르는 위험한 광기에도 휩쓸리며, 우연한 어느 순간에 자신의 길을 벗어날 필요도 있을 것이다. 거부할 수 없는 운명에 한없이 작기만 한 인간이지만 그것에 저항하는 위험한 우리의 모순된 행동이야말로 바로 위대한 비극 아니겠는가? 삶이란 역사란 그런 것이라고 우리에게 말하고 있다. 위대한 전기 작가이자 소설가이며 시인인 츠바이크의 역사, 세상, 인간보기에 다시금 매혹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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