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천주의자 캉디드
볼테르 지음, 최복현 옮김 / 아테네 / 200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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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학적 풍자로 어처구니없어 보이는 어리석음을 즐비하게 나열한 이 소설의 이야기 전개를 따르다보면 어느덧 인간과 인간사에 대한 끊임없는 의문에 사로잡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주인공의 이름조차 '천진난만'하다는 의미를 지닌 '캉디드(Candide)'이어서 이 순진무구한 인물의 맹목적 형이상학이 소용돌이치는 현실세계와 조우하며 어떠한 반응을 일으킬 것인가에 절로 주목하게 된다는 것이다.
또한 제목이 시사(示唆)하듯이 인생의 의의와 가치 등을 궁극적으로 선(善)이라고 하는‘낙천주의(Optimism)'가 발산하는 왠지 모를 유아적 시선이 오히려 불신의 눈초리를 권유하여 비판적 사유로 이끄는 마력이 있다.

소설은 행복과 감탄의 세계였던 독일의‘툰더 덴 트롱크’ 성(城)에서 아동기를 보내던 캉디드가 성주인 남작의 딸 ‘퀴네공드’와의 사랑이 발각되면서 추방되어 마주하게 되는 현실세계의 파란만장한 대 여정이다. 바로 여정은 “범죄와 혼란, 실수와 편견, 불행과 어리석음을 축적”하는 사건들의 반복이고, 이 반복되는 과정의 사건들을 통해 인간의 조건과 삶의 그러해야 함에 대한 사유의 성숙으로 견인된다. 이것은 볼테르의 치밀한 계산에 의한 것이라 할 수 있는데, 성에서의 추방, 방랑과 도피로 점철된 남아메리카(신대륙)와 유럽여행, 그리고 마지막 정착지인 콘스탄티노플의 작은 농원이라는 캉디드의 인생역정은 인류가 지향하여야 할 궁극의 사회형태를 향한 탐색이며, 당대에 낙천주의를 주창했던‘라이프니츠’의 “어떤 원인 또는 어떠한 결정적인 이유 없이는 그 어떠한 일도 결코 일어나지 않는다.”라는 ‘충족이유’의 진리성에 대한 모순의 실질적 증거를 제시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낙천주의자, 캉디드』는 18세기 당대의 인간사회에서 벌어지던 혐오스런 사건들의 반복적 구조를 가지고 있다. 추방된 캉디드가 체험하고 목격하는 전쟁, 기근, 광신주의, 지진, 난파, 사기, 위태로운 열정과 살인, 도둑, 배신이라는 낙천주의 형이상학을 파괴하는 현실적 사건들의 반복을 통해 충족이유, 원인과 결과의 모순을 보여주는 과정의 연속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더욱 주목하게 하는 것은 등장인물들의 뚜렷한 개성이 품고 있는 세상관(觀)의 대치라 할 수 있다. 이 구별되는 관념의 세계, 즉 낙천주의와 염세주의라는 세상을 서로 다르게 인식하게 하는 지상의 사실적 양상을 이들이 대변하고 있기 때문이다.

캉디드를 낙천주의자로 만든 사람은‘팡글로스’라는 현자이다. 그는 충족이유와 예정조화설에 절대적인 믿음을 가진 인물로서 현실세계는 최선(最善)의 것으로 창조되었으며, 설혹 악(惡)이 있더라도 그것은 최선의 세계를 만드는 예정조화를 돕기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 사람의 인생이란 자신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성에서 추방되어 걸인이 되고, 교수대에 목이 매달리며, 노예로 전전긍긍하는 것인데, 여기서 충족이유를 발견한다는 것은 실로 우스꽝스런 일이 되어버린다.

한편, 우발적 살인으로 남미로 도피하게 된 캉디드가 우여곡절 끝에 다시금 베네치아로 돌아오기 위해 말동무로 고용한 철학자‘마르탱’이란 인물은 우주를 선과 악이라는 두 원리의 투쟁이라고 보고 있으며, 악이 범람하는 세상은 인간의 본성으로서 당연한 상태라 인식한다. 따라서 인간이 근심의 소용돌이에서 사는 것과 권태롭고 무기력한 상태에서 사는 것은 전혀 이상할 것이 없는 것이라 주장한다. 사실 소설은 이처럼 팡글로스와 마르탱으로 대변되는 두 형이상학의 충돌이자 갈등이며, 캉디드는 이 두 세계에서 갈등하는 인물이라 할 수 있다.

또한 캉디드의 체험 세계는 신부와 수사들의 방탕과 탐욕에 희생되는 수많은 사람들, 귀족과 교회의 야심으로 인한 전쟁에 동원되어 약탈과 살인이 그치지 않으며, 개인의 이익을 위해서 배신과 살인을 마다하지 않는 현실에서 악만이 넘쳐나는 세상이다. 이러한 현실세계는 순간순간 오늘의 우리사회에 대입해보게 하는데, 결코 원인과 결과가 일치하지 않는 이 모순의 세계를 순진하게 낙관주의적이고 충족이유가 있는 세계라고 믿을 수 없게 된다는 것이다. 결국 캉디드의 우여곡절의 이 여정은 충족이유가 모순되는 세계를 희극적으로 반복하여 보여줌으로써 새로운 이상의 세계, 형이상학의 세계가 아닌 실체적 삶의 세계를 구상하게 한다.

이렇듯 결코 철학을 말하지 않지만 한없이 철학적인 책, 우스꽝스런 콩트이지만 역사와 사색을 요구하는 책이다. 또한 운명에 순응할 수밖에 없는 여린 인간의 진솔함이 그대로 스며들어 더욱 깊은 감동과 공감을 갖게 하여, 잠든 우리의 의식세계를 일깨운다. 끝내 선과 악, 낙천과 염세에 대한 어떠한 결론을 내리지는 않지만 삶을 견뎌내는 길이 무엇인지를 우린 알게 된다. 형이상학을 포기한 현명한 공동체의 삶을. 이 계몽주의 시대의 철학자와 함께 웃다보면 우리의 본성과 정염이 일치하는 즐거움을 경험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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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 조종자들 - 당신의 의사결정을 설계하는 위험한 집단
엘리 프레이저 지음, 이현숙.이정태 옮김 / 알키 / 201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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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기술결정주의, 특히 정보결정주의 환경의 지배력 확장과 이러한 현상에 무기력하게 종속되어가고 있는 현실 세계에 대한 경종이자 비판이다. 정신없이 쏟아지고 있는 정보통신 기기들과 소프트웨어들은 각종의 융합기술을 동원하여 그 어느 때보다 생활의 획기적인 이기라 선전하면서 미디어의 세계로 인간들의 관심을 집중시키고 있다. 특히 웹기반의 인터넷 환경은 거의 모든 사람들의 일상과 분리하여 생각할 수 없을 정도에 위치하고 있어, 소수의 거대 포탈사이트는 막강한 지배력을 행사한다.

사람들은 그저 사이트가 토해내고 있는 내용을 클릭하는 수동적인 존재가 되어 그들이 노출하는 것만을 본다. 메인화면의 중앙을 차지하고 있는 뉴스를 비롯한 콘텐츠라는 것들은 감각적이거나 달콤한 유혹을 부추기고, 연예인 동정과 같은 거짓 이슈로 채워지고 있다. 정작 인간 세계가 이루어내기 위해 알아야 하는 중요한 사안은 보이지도 않는다. 보이는 것과 믿는 것을 동일시하려는 인간의 경향은 이들이 보여주는 것만이 세상이라고 믿는다. 결국 자기표현과 자기실현에만 가치를 두는 ‘탈물질주의’에 광분하는 기형적 인간과 사회로 몰아가고, 이렇게 공공의 문제가 사라져버린 세상에서 자신의 열망만 부채질하는 인간들에게 정치는 사회의 정의나, 도덕성, 민을 위한 정책과는 무관한 인기만으로도 권력을 재생산하며 수월하게 지켜나갈 수 있게 되었다.

인터넷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초기에는 인간들은 그 다양한 정보의 세계에 탄성을 외치고, 어떤 매개자 없이 직접적인 민(民)의 소통이 이뤄지며, 소수에게 집중된 권력도 분산되어 다수의 민이 참여하는 진정한 민주주의 실현의 플랫폼이 될 것이라 열광하였다. 그러나 지금 어떠한가? 소수에게서 권력을 빼앗아오기는 커녕 오히려 그네들의 권력은 더욱 집중되고 공고해졌으며, 정보의 비대칭은 극단적인 상황으로 치닫고 있다. 대체 30여년의 과정에서 어떤 현상들이 발생한 것이기에 초기의 기대가 이렇게 우울한 상황으로 전환 된 것일까?

웹, 미디어의 실패

저자가 시종일관 중점을 두어 설명하는 것은 ‘인터넷 필터’를 통한 ‘개별화’이다. 거대 사이트들은 물론 군소 사이트들 모두 자신의 사이트에 방문한 개인들을 추적하면서 예측 엔진들을 가동한다. 그리고 그 개인들이 무엇을 좋아하고 실제 무슨 일을 했는지 추론하고 예측하여 행태에 대한 이론을 만들어낸다. 그리곤 이 데이터를 이용하여 정보와 아이디어를 조작하고 개인들의 입맛에 맞는, 그들이 친근함을 느끼는 세상을 펼쳐낸다. 이렇게 “정보를 맞닥뜨리는 방법자체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키는 현상을 ‘필터버블(filter bubble)'”이라 부른다.

이 필터버블, 즉 개별화라는 맞춤식 전개는 일견 소비자중심의 이상적인 진화처럼 보인다. 그러나 여기에는 참담하며 사악한 요소가 압도적으로 우세적이다. 개별화된 맞춤식 필터는 개인마다의 생각만을 더 주입하고 친숙한 욕구만을 더 찾게 한다. 그래서 타자의 견해나 심각하고 복잡한 세상의 문제, 다양한 세상의 현상을 외면하게 하고 중요한 공공문제를 사라지게 해버린다. 사람의 인식을 왜곡하고 인식의 쳇바퀴 속에서 편협한 인간들만을 증식시키는 것이다.
실제 구글에서 동일한 단어를 검색해보라. 평소 서로 술자리를 같이하는 친구이지만 한 사람은 증권분석가이고 다른 한 사람은 소설가라 하면, 그 두 사람이 같은 검색어를 입력 했을 때 전혀 다른 검색결과가 나열되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결국 이 두 사람은 서로 다른 주장의 근거를 찾게 된다는 것이다. 공통의 견해, 자기와는 다른 견해를 알 수가 없게 된다는 의미이다. 인식의 균형은 파괴되고, 자신의 견해만이 고착화되어 확증 편향에 빠져 세상의 소통은 단절되고 만다. 공통의 경험이 사라진 세상, 편협하고 이기적 인간들만 양산된다.

한편 소비자를 우선하는 듯 보이는 이 이상적 진화의 의도 역시 순수함과는 아예 거리가 멀다. 어떤 병명을 검색하면 동시에 컴퓨터에 당사자는 알지도 못하는 사이에 최대 223개의 쿠키가 설치되고, 그 병과 관련한 서비스를 판매하려는 다른 웹사이트에 의해 개인의 온라인 행태가 추적된다. 검색 댓가로 우리의 의사와는 무관하게 우리의 행동을 비롯한 정보가 어둠 속의 누군가에게 제공되고 있는 것이다. 이제 이러한 양상은 심화되어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보험료도 뛰어 오를 수 있다. 익스트림 스포츠에 관심이 있어 무심코 몇 차례 관련 사이트를 방문하면 보험사는 우리가 사고의 위험성이 높은 사람이라고 판단해 버린다. 과연 어떤 개인이 온라인에서 몇 번 클릭 한 과거의 결과, 재산, 직업, 구매성향, 수입, 의료기록이 그 사람을 설명 할 수 있는 것일까? 더구나 현재의 소망이 미래의 욕구를 이해 할 수 있기나 할까? 이 기술 맹신주의가 낳은 오만은 인간을 점점 참혹한 구렁텅이로 내몰고 있다.

무책임하고 비도덕적인 정보기술자들

우리가 사는 오프라인 세상에서 법을 기획하고 제정하는 일련의 작업은 어느 한 사람의 독단에 의해서 결코 이루어지지도 않을 뿐 아니라 이루어 질 수도 없다. 그러나 프로그래머들, 코드를 만드는 사람들은 법체계나 법률가도 없이 만들고 완성되는 즉시 즉각적으로 시행한다. 이들은 무소불위의 권력을 행사하게 되는데, 자신들의 결정이 무엇을 초래하는지 전혀 무관심하며 무책임하다는데 문제가 있다. 페이스북의 ‘저커버그’같은 젊은 사업가는 이러한 사회적 책임과 도덕적 의식의 요청에 대해 “원하지 않으면 사용하지 말라!”는 식으로 책임을 회피한다. 소위 ‘매수자 부담의 원칙’이라는 사악한 상인의 의지만을 고수하는 것인데, 자신에게 천문학적 광고수입을 안겨주는 수십억의 사용자들에 대한 도덕적 책무란 없다고 주장하는 것과 같다.

이들 정치적 사고가 미성숙한 이들에게 엄청난 권력이 손에 쥐어진 것은 진정 인류에게 위험천만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들이 심화시키고 있는 개별화라는 필터버블은 도덕적 개념이 전혀 없는 기계시스템에 인간과 인간사회를 내맡기자고 광분하는 것이다. 귀납적 알고리즘에 의존하는 정보결정주의를 맹신하는 부도덕하고 무책임하며 인간에게 무관심한 이들의 행태는 어떠한 방식으로든 교정되어야 한다. 지금의 온라인 시스템, 그리고 개별화를 강화해 나가는 시스템은 인간들을 일반적인 지식의 통합 대신 과잉 집중에 몰입케 함으로써 인간 내부의 정신과정과 외부 환경간의 상호작용을 방해하고, 동떨어진 아이디어의 병렬을 통해서 가능한 인간의 창의력과 혁신성을 실종시킨다.

더구나 개별화를 통해 획일화된 세상은 ‘J.S.밀’이 그의 『자유론』에서 말했듯이 “반증 가능성이 진리를 찾는 핵심”이라는 여지를 말살함으로써 점점 인간사회는 진리구현과는 멀어지는 어둠의 세계로 전락하는 길을 재촉하게 될 것이다.
이를 달리 표현하면 인터넷에 대한 애초의 기대인 권력 분산의 길이 아니라 집중화의 길로 치닫고 있다는 말이 된다. 이처럼 맥락의존적인 귀납적 시스템의 추구, 고착화와 인식의 왜곡, 공공영역을 멸실시키며 정적인 개념의 개성으로 내모는 무한반복의 함정에 빠뜨리는 시스템은 여론의 조작과 정보의 비대칭을 심화시키게 된다. 지식의 비대칭은 곧 권력의 비대칭을 낳는다. 권력이 없는 민(民)에게서 다시금 권력이 있는 소수에게 정보권력을 재분배하게 되는 개별화, 필터버블은 공동체의 단절과 참을 수 없는 침체의 세계를 만들게 될 것이다.

필터버블의 대항과 감시를 위해서

분리하고, 조작하며, 의도적으로 세분화하여, 대화에 적대적인 공공영역을 만들어 내는 개별화를 향한 웹미디어의 행태는 통제되어야 한다는 것은 이제 이론의 여지가 없다. 기술지상의 광신적 부도덕성의 결말은 인류의 공멸이다. 결국 미디어는 사람들이 하는 일을 그대로 비추는 개별화의 무조건적 추진이 아니라 사람들이 무엇을 모르는지 보여줄 수 있는 미디어로서의 책임을 가져야 한다. 공동체간의 연결도 없고 겹치는 부분도 없는 단절과 불통, 소외의 하위문화가 아니라 삶의 시선과 관점을 폭넓게 인식할 수 있는 균형 잡힌 기술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는 말이다. 사용자가 알 수도 없고 알지도 못하는 사이에 자신들만의 규칙을 무차별적으로 사용하는 체계가 아니라 투명한 시스템이어야 한다. 개별화의 진행은 필히 사용자의 승낙을 받아야 하며 실종된 편집윤리도 도덕적으로 보강되어야 한다.

국가권력 또한 기득 권력의 보존과 확대를 위해 외면하고 이들 거대 웹미디어 세력과의 결탁에 혈안될 일이 아니다. 개인의 행태를 추적하는 금지체계의 기술적 도입을 위한 노력을 하여야 하며, 개인정보 통제권이 지금처럼 사이트에 있어서는 안 된다. 사용자에게 주어지고 승낙이 있어도 그 사용에는 구체적 용도가 개별적으로 피드백되어야 하는 것과 같은 정보사용규칙의 변경과 정보사용 감시체계의 도입을 최우선적으로 검토하여야 할 것이다. 웹미디어 기업들에 옴부즈만 제도를 의무화하는 것도 하나의 제도적 장치가 될 것이다.
툭하면 터지는 개인정보들의 도난과 중개사건을 민사사건이라고 술수방관만 하는 국가는 부도덕하다는 비난을 피할 수 없다. 민주주의의 토대를 말살하고 공공지향의 영역을 사라지게 하는 것은 소수권력이나 사용자인 대다수의 민중에게 공히 위험한 결과를 초래 한다.

정보결정주의에 빠진 웹미디어의 위험천만한 행태를 치밀하게 탐색하고 그의 재앙적 문제점들을 인문학적, 기술적 지식의 토대위에 예리하게 분석해낸 정보기술의 현상학이라 할 수 있는 이 저술은 개인의 이기적 욕망이란 기형화된 자유주의적 삶의 실태를 냉철하게 통찰하고 있다. 우리에게 편협한 이해관계만이 모든 것이라고 주입하는 세계는 우리가 보다 나은 사회를 만들어낼 수 있는 여지를 아예 존재치 않는 것으로 몰아 낼 수 있음을 알리기 위한 진심의 노력이 곳곳에 배어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웹미디어에 의존적인 오늘의 세계에서 코드가 법이라고 외치는 새로운 입법자들이 무엇을 하려고 하는지를 파악하고 이해하는 일의 절대적 중요성에 비추어 볼 때 이 저술의 의의와 가치는 더 없이 중대하다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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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는 왜 증오의 대상인가
자크 랑시에르 지음, 허경 옮김 / 인간사랑 / 201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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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란 우리에겐 결코 낯선 용어가 아니다. 또한 마치 민주주의가 무엇인지 선명하지는 않지만 막연하게 알고 있는 것이며, 민주주의라는 체제 속에서 살고 있다는 생각에 그리 저항감이 들지도 않는다. 게다가 민주주의는 선(善)한 것이지, 악(惡)한 것과는 결코 친한 것이 아니라는 믿음이 있으며, 자신이 소속된 국가의 통치권력은 자신들로부터 나오는 것이며, 통치자들은 당연히 자신의 권리를 위임받아 수행하는 대표자들일 뿐이라는 점에 의문을 달지 않는다. 대체 민주주의에 대한 어떤 이해와 신념이 이런 환상을 갖게 한 것일까? 더구나 정말 우리사회가 민주주의를 실현하는 사회임에는 분명한 것인가?

만일 민주주의가 선한 것이라는 우리들의 믿음이 옳은 것이라면‘자크 랑시에르’는 왜 ‘민주주의는 증오의 대상인가?’하고 묻는 것일까? 누군가는 민주주의라는 것이 결코 옳은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기 때문일 것이며, 증오할만한 명백한 이유가 있다는 말이 될 것이다. 그 누군가란 누구이며, 민주주의가 어떤 속성을 지니고 있기에, 어떤 양상을 타나내고 있기에 그렇게 혐오하는 것인지, 그리고 그 논의와 주장은 정당하고 타당한 것인지를 아는 것은 우리의 삶을 에워싼 환경을 이해하고 삶의 방식을 결정하는데 중대한 양식이 될 것이다.
이처럼 이 책은 민주주의에 내재되 있는 그 이중적 모습과 현대사회에서 민주주의가 어떻게 정착되고 운용되고 있는지, 나아가 민주적 삶이란 것이 오늘날 어떤 형태를 띠고 있는지, 민주주의가 만들어 낸 세계의 실상을 성찰하고 있다.

민주주의는 진정 범죄적인가?

민주주의란 인민의, 인민의 대표의 통치 체제이다. 또한 누구도 타자에 대한 우월성이 존재하지 않는 원칙이며, 따라서 통치를 위한 모든 자격을 배제하는 무정부적 체제이다. 그러하다보니 개인 저마다의 욕망을 충족하려는 열정에 사로잡혀 무질서를 창조한다. 개인과 공통의 이익을 지닌 집단들이 자신들의 이익을 실현하기위해 정부에 압력을 가하고 각종의 요구로 혼란을 증식시킨다. 그런가하면 공동체를 위한 공공선에는 무관심한 인민이 양산 된다. 민주적 삶이란 이런 것이다.

이렇듯 민주주의는 인간들마다의 욕망에 기초한 혼란과 무질서를 속성으로 한다. 우리 사회를 조금만 응시해보면 공동체의 이타성이나 중심을 결여한 채 분산되어 저마다의 목소리를 내는 민주주의적 인간이 만들어내는 실상을 볼 수 있다. 즉 개인들의 무제한적 욕구가 지배하는 사회체제, 이기적 소비자인 민주주의적 인간들의 탈정치화된 삶의 모습, 소수자와 약자의 권리, 문화산업, 줄기세포 등에 무관심한 부(負)의 과잉을 목격하게 된다. 악(惡)으로서의 민주주의이다. 한편으론 사회에 마구잡이로 쏟아내는 분출하는 욕구의 과잉, 다른 한편으론 공공선에 무관심한 이중적 과잉으로 치닫는 것이다.

결국 민주주의 속에는 이기적 개인이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렇다고 이러한 소비지향적 인간들의 경박함을 비난하면서 이것을 이유로 인민의 권력을 제거할 수 있는 것일까? 민주주의가 비록 통치력에 압력을 가하는 요구들의 불가피한 증가를 의미하지만 이것이 없다면 폭정, 독재, 전체주의와 같은 적이 발생한다. 또한 소비주체로서의 개인화에는 민주주의 부재와 평등의 결여를 은폐하려는 거짓된 평등의 개념과 자본주의 경제의 무제한 성장추구를 대중적 개인주의 탓으로 돌리려는 음험한 책략도 숨어있다. 이것은 자신들의 거친 파렴치에 기초하는 이기적 이익을 추구하려는 측들의 편협한 주장인 것이다. “민주주의는 통치되어야 할 사회도 아니며, 한 사회의 통치체제도 아니다. 그것은 통치불가능 자체이며, 이러한 통치불가능성에서 모든 통치행위가 그 기초를 찾아야 한다.”는 말처럼 정치적 장(場)에 집결된 과도한 에너지를 개인적 행복, 사회적 유대관계 등을 추구하며, 이중적 과잉을 제어 할 수 있는 조화의 장으로 전환하는 것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민주주의 스캔들

우린 진정 민주주의 사회에 살고 있는 것인가? 우리가 통치하고 있는 것인가? 실상은 대다수의 인민이 소수의 권력 행사에 좌우된다. 공공영역을 담당할 권한을 가진 소수가 전체를 대표하는 대의제 사회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인구의 엄청난 증가에 대처하기 위한 민주주의 실현 수단으로 만들어진 것일까? 대의제란 민주적으로 보이게 하기위한 하나의 형식으로 만들어진 것이며, 마치 민(民)의 동의를 구했다는 엘리트들의 권력 유지와 행사를 위한 교활한 수단으로 출발한 것이다. 대의제는 민주주의의 정반대의 것이란 의미이다. 그러나 인민은 엘리트들의 기대와는 달리 권력을 행사할 때마다 통치원칙에 훼손을 가하곤 했으니 대의제는 매우 불안정한 타협이라 할 수 있다.

특히 대의제와 민주주의의 모순관계를 잇는‘선거’는 대표성을 통해 엘리트인 소수 지배집단의 이익을 보호하기 위한 지극히 효과적 수단이었으며, 더구나 사회적 동의까지 얻는 것이었으니 일거양득의 기막힌 도구가 아닐 수 없다. 실제 ‘대의제+민주주의’를 형식적으로 채택하고 있는 어느 곳이든 선거는 정권교체라는 형태 하에서 본질적으로 동일한 지배층의 재생산을 보장해주고 있으며, 자신들의 생명의 위협 없이 권력을 유지하는 장치로 활용되고 있음을 이해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이것은 통치논리와 민의 정치적 분열을 연결하는 위선적 논리로서‘국민주권’이 얼마나 허구의 산물인지를 설명하는 것이라 하겠다.

한편 이들 통치집단은 거짓된 민주주의인 개인주의적 민주주의의 논리를 통해 민주적 개인들의 게걸스런 욕구는 인류를 자멸로 이끄는 대재앙이라 하면서 평등에 증오를 내뿜는다. 한국사회의 지배권력이 툭하면 복지포퓰리즘이라 매도하면서 인민을 향해 위협적 언사를 서슴없이 내뱉는 것은 대표적 실례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서 이들은 공공영역을 끊임없이 축소하려고 하며, 자기들의 내부로 흡수하여 사유화하려는 경향을 보인다. 그리곤 국가차원의 과두체제와 경제차원의 과두체의 결탁에 의해 공공영역을 장악하려 든다. 공공영역이란 엘리트 지배계층에 의한 통치와 민(民)의 통치라는 서로 반대되는 두 논리의 만남과 갈등이 충돌하는 영역이다. 따라서 민주주의는 바로 이러한 사유화에 반대하는 투쟁이자 공공영역을 확대하는 과정이기도 하다고 할 것이다.

인민은 공공영역에 대해 하나의 원칙을 구현하려는 정부의 의도를 거부하여야 하는 것이다. 또한 사회 보호망을 마치 국가의 선물처럼 호도하는 통치권력의 간교함은 배척되어야만 한다. 이는 이들 지배계층과 지난한 노동 및 민주투쟁의 결과물이며, 인민인 자기 산물의 정당한 배분일 뿐이다. 대의제가 올바른 민주주의가 되기 위해서는 누구나 권력에 가까이 접근할 수 있는 조건에서만 가능한 것이다. 실제로 우린 민주주의 체제에 살고 있지 않다. 과두제적 법치국가에 살고 있다. 따라서 실질적인 민주주의의, 진정한 민주주의의 실현을 위해 지배계층이 지적하는 거짓된 민주주의인 민주적 삶이라 부르는 악을 퇴치하는 그런 통치를 위한 각성이 필요하다.

결 어

지배 권력이 자신들의 민주주의 부재와 평등의 결여를 은폐하기 위해 인민을 내몰고 있는 민주적 인간의 삶이라는 환상, 얼빠진 소비자의 위치에서 벗어나야 한다. 민주주의를 마치 사회의 한 형태로 간주하면서 국가 과두체제의 지배를 은폐하려하고 불평등의 심화현상을 조건 평등 정책 만연의 탓으로 돌려 자신들의 이념을 정당화하려는 행태 또한 제대로 인식하고 있어야 한다. 민주주의 이중성은 본래 그러한 것이다. 민주주의는 오늘의 사회처럼 이들 지배권력에 휘둘려 무형의 시끌벅적한 군중의 혼란에 갇힐 수도 있다. 그러나 민주주의는 민에 의한 엄격한 정부형태이어야 하고 민의 타협에 의한 사회형태이어야만 한다. 끊임없이 국가권력은 금권과 연합하여 민의 정치공간을 축소하려 하는데 열중한다. “공공영역에서 과두(寡頭)적 정부의 독점을 위한 탐욕을 지속적으로 파괴하며, 민의 생활전반에 대한 유산계급의 강력한 영향력을 끈질기게 뿌리 뽑는 것”이 민주주의인 것이다.

민주주의는 물론 악이고 범죄적이 될 수 있다. 그 이중적 모습에서 이기적이며, 소비적인 욕망에 기초한 무질서에 안주한다면 지배계층의 교활한 탐욕의 영속을 고착화시켜주는 비극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민주주의는 정당성의 근거를 불평등적 우연성 상태를 인정하는‘평등적 우연성’에 두고 있는 통치할 자격을 가지지 못한 인민의 고유한 권력이다. 누구와도 공평하게 권력을 나눠가질 수 있는 사람들에게 용기와 기쁨을 선사해주는 아직은 유일한 덕목이기에 우리에겐 포기할 수 없는 선(善)인 것이다.

민주주의의 이중적 모습을 상반되는 정치철학 논의들과 프랑스혁명, 68 학생운동 등 역사적 사건들에 내재된 민주주의의 양상들을 통해 냉철하게 통찰하고 있다. 그래서 오늘의 지구촌 사회에서 민주주의가 왜 혐오와 증오의 대상으로 지목되었는지, 그 이면의 사실들을 한 꺼풀씩 벗겨내어 범죄적 민주주의라는 오명을 씻어내기 위한 인민의 자성과 진정한 민주주의의 방향을 제시하고 있다. 민주주의에 대한 비난과 고발이 지니는 성격의 특수성을 파헤침으로써 실질적 민주주의와 평등의 의미를 감각적인 경험의 차원에서 규명한 21세기 민주주의가 처한 현상에 대한 탁월한 분석서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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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 : 와이 더 라스트 맨 디럭스 에디션 01 시공그래픽노블
브라이언 K. 본 지음, 박재용 옮김, 피아 구에라 그림 / 시공사(만화) / 201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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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성이 전멸한 세상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Welcome to the unmanned world)"

Gender-cide(성별 말살), 지구상에 공존하던 두 개의 성(性), 여성과 남성 중 하나의 성이 한날한시에 모조리 사라진다면? 그리고 그 사라진 성에서 유일한 생존자가 바로 ‘나’라면 어떤 일을 하여야하며, 할 수 있을까? 그러나 과연 생존을 유지할 수는 있는 것일까? 이처럼 황당하고 쓸데없어 보이기조차 하지만 유전자조작, 인간복제로 치닫는 오만한 인간에 대한 적절한 물음이 이 그래픽노블의 소재이다.

일순간에 지구상의 모든 수컷들이 죽어버렸을 때 세상은 어떤 상황을 맞이하게 될 것인가? 수많은 사회 기간시스템은 제대로 작동될 수 있을지, 본래의 기능으로 복귀하는 것은 가능한지, 종(種)의 번식은 어떻게 될지, 결국 남은 성도 멸종하게 될 것인지, 지구표면의 유일한 남성 생존자를 여성들은 어떻게 취급할 것인지 등 끊임없는 의문이 떠오른다.
종의 번식을 위해 생존 남성을 살려둘까? 아니면 복제기술을 통해 무성생식이란 방법을 선택할까?

이러한 의문들에 인간의 답변들이랄 수 있는 이야기들이 얄궂은 사건들과 마주하면서 성(Gender)이 내재하고, 또한 야기하는 인간사회의 문제들을 새로운 관점으로 조명하고 고찰하게 한다. 여기에 젠더사이드가 일어난 미지의 음모(?), 혹은 배경이었을 듯한 암시와 또다른 변수의 예고들이 펼쳐지면서 인간의 본성, 은밀한 인간사회의 파멸적 징후들을 탐색 한다.

우연인지, 필연인지 Y 염색체를 가진 두 개체(個體)인 살아남은 스물두 살의 청년‘요릭’과 수컷 원숭이‘앰퍼샌드’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멸종과 구원의 각축전은 인류 문명의 기로(岐路)라는 위험천만한 외길을 아슬아슬하게 걷는다. 남성 전멸의 세계, 그 후의 세상이 현실 사회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적 시각과 함께 흥미진진하게 전개된다.
하나 남은 남성의 존재마저 제거하려는 여성 단체‘아마존’, 그리고 생명의 복원을 위해 유일한 남성을 보호하려는 여성들, 게다가 젠더사이드를 조정했을 듯한 미지의 집단까지, 우리들의 지성을 한껏 자극한다. 기발한 소재만큼 그 서사에 도취될 정도로 흡입력이 강한 작품이다.
    
디럭스(Deluxe)판으로 접한 그래픽의 생동감 넘치는 시각적 느낌이 스토리 고유의 감성을 더욱 고조시켜주고, 원본의 초기 이미지들을 알려주는 스케치와 상징적 그림들의 선정적 장면은 시리즈에 대한 기대감을 드높인다. 작품성 못지않게 매혹적인 도판과 양장된 이 판본은 소장품으로서의 가치까지 배려한 것 같다. 탁월한 상상력과 의미심장한 주제의식으로 쏟아진 세간의 격찬이 빈 소리가 아님을 확인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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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의는 아니지만 - 구병모 소설
구병모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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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인간으로 산다는 것, 더구나 가진 것에 의해 삶의 질이 결정되는 생태계에서 산다는 것은 불가항력적 고역이다. 또한 사회적 동물이라느니 공동체의 연대니 하며 타자에 대한 배려와 연민을 긍정적으로 말하지만 실상 그것이 인간의 일상적 삶에서 실천된다든가 이타성을 지니는 것은 아니며, 단지 외형상 그렇게 보일뿐이며, 자기 욕구의 충족을 위해서만 그렇다는 것이 현실임을 훨씬 많이 경험한다.
이 소설집을 구성하는 일곱 편의 단편소설은 이러한 일상의 현실적 삶의 부조리하고 부당하며 불온함으로 점철된 세상과 인간들을 투시하고 있다.

‘구병모’의 작품들이 일관되게 뿜어내는 응집된 무참한 분노의 양상들을 혹자는 “일상적 무감각에 치명적 독을 주입”하고 있다고 과장되게 너스레를 떨어대고 있지만, 결코 무감각한 것도 아니며, 새삼스레 인간의 일상에 독이 주입되는 것도 아니다. 지금의 인간들은 자기 이외에 진정한 관심을 가질만한 여유가 없으며, 그 무관심이 유익하다는 것을 감각적으로 체득한 개체들이다. 따라서 소외니 불통이니 이기적이니 하는 언어의 독성이 마치 외부로부터 주입되어 비로소 깨달았다거나 발견하였다, 창조하였다는 말은 객쩍은 소리에 불과한 것이라 할 것이다.

「타자의 탄생」이란 수록 작품도 있지만 오늘의 인간들, 그리고 현대사회를 이루고 있는 수많은 장치들에 의해 우리는 타자 읽기에 무심하거나 실패하고 있으며, 달리 표현하면 타자이기도 한 자기 역시 읽기에 실패하고 있다는 관점에서 바라보는 것이 오히려 타당한 이해라고 하고 싶다. 이처럼 자기반성도 없고 타자에 대한 이해도 없는 현실 속 일상을 투영해서 그것들이 잉태하고 출현하여 휘젓는 악의적 현상들과 참담하고 잔혹한 현실 세상의 수치스러운 속살을 치욕스럽게 드러내고 있다고 하겠다.

타자 읽기에 무심하거나 실패하는 현대인

눈물이 많다는 이유로 담임선생에게 무참한 폭력을 당하는 아이가 그 불이익을 면키 위해 자신의 감정(感情)선을 꿰매어 버린다는 「재봉틀 여인」이란 작품처럼 인간의 다양성을 이해하지 못하는 현대인의 획일화되고 이기적인 인식능력은 거의 정신질환에 가깝다. 이 행위는 성인이 되어 무표정하며 감정을 나타내지 못하는 기이한 인간을 만들어낸다. 우리의 교육현실과 사회적 장치라는 것은 이처럼 지속적으로 타자에 대한 이해를 차단한다.

「타자의 탄생」은 제목 그대로 공동체나 인간개체로부터의 분리된 경계외적 인간을 탄생시킨 현대의 인간들과 인간사회의 잔인한 몰지각에 대한 비판이라 할 수 있다. 주물에 하반신이 박힌 채 구조를 요청하는 남자에 대한 사회의 관심이란 것의 속성을 파헤치고 있다. 떠들썩한 언론과 방송매체의 관음증적 호들갑, 관련 행정기관의 정치적 행동, 전문가들의 고답적인 탁상론, 시민들의 호기심어린 연민이 휩쓸고 지난 뒤의 무관심과 냉담함, 그리곤 외면을 넘어 자신들의 삶의 경계 밖으로 추방하고자 한다. 사실 이 사회의 공동체라는 것은 거듭 확인하게 되지만 바람에 날리는 모래알갱이만도 못하다는 것이 진실일 것이다. 무력함 속에 간절한 구원을 기대하는 남자를 향해 이혼서류를 날리는 아내의 행위야말로 이 시대의 표상일지도 모를 일이다.

「조장기(鳥葬記)」란 작품에 이르면 그 난감함은 더더욱 곤혹스럽다. 학비와 생활비를 벌기위해 휴학한 유아교육과 여대생의 생존을 위한 분투 속에 어쩔 수 없이 이해하고 수긍해야하는 또 다른 생존의 분투에 대한 목격이기 때문이다. 자기 연민에 헐떡이지만 그 비루한 연민조차 타자에게 사용해야하는 현실에 처하게 되는 것인데, 이 불가항력적이고 불가피한 타자 읽기는 타자 읽기를 배우지 못한 현대인에게는 당혹 그자체가 아닐까?

마지막에 수록된「곤충도감」은 비로소 타자에 대한 연민의 실천, 타자 읽기의 깨우침을 알려주는 작품이 아닐까 싶다. 성추행을 당한 소녀와 성범죄자가 된 남자의 이야기다. 성범죄 예방을 위한 발찌의 효력이 무력해지자 성호르몬에 반응하는 생체기계를 주입하여 예방한다는 발칙한 소재를 가지고 있다. 성적충동의 실행에 이르러 관련 호르몬의 수치가 상승하면 생체기계가 폭발적으로 성장하여 숙주의 몸을 뚫고 나오게 되는 극단적 장치이다. 인간 본능을 차단하는 이 무분별한 조치에 제물이 된 남자에 대한 피해 소녀의 연민이 흐르고 있다.

우리들의 이해는 어느덧 자기본위, 이기심에만 호소하고 있다. 도덕적 양심을 형성하게 하는 가정과 학교교육은 물론 거의 모든 사회적 제도와 창치, 주류의 담론들이 타자 읽기를 방해하고 무관심을 종용하고 있는 양상이다. 이것은 끊임없이 타자를, 자기를, 서로를 상처내고 고통으로 내몰고, 분열을 조장하며 증오와 분노 그득한 적대감을 증식시킨다. 타자가 혐오스럽다면 자기 역시 혐오스런 개체임을 피할 수 없음이다. 타자의 탄생은 그를 올바르게 읽어내고 이해하려는 노력이 있음으로서만 긍정을 가질 것이다.

구별하고 구분 짓는 사회

소설집의 표제작인「고의는 아니지만」에는 부모의 경제력에 의해 구분되어 절로 형성되는 원생인 아이들의 양태로 인해 난감해하는 유치원 선생이 있다. 치열하게 살아가도 허덕이는 부모의 아이들과 유한 집안의 아이들은 의도되지 않았음에도 구별되고 만다. 아이들의 마음을 다치게 하지 않으려는 선생의 배려와 노력은 양면성을 지니고 선의가 악의로 변색되기도 한다.

가진 자는 못 가진 자에 대해 인색하다. 못 가진 자에 대한 배려는 가진 자에 대한 차별이고 분별없음이라고 항변한다. 갖지 못한 자는 무심함이란 부성실과 부당함으로 대처한다. 희생자는 이들 두 분별없는 계층에 세심한 배려를 하려는 자가 되고 만다. 무엇이 이러한 사회를 만들어 내고 있는 것인가? 여기에도 타자의 무관심과 읽기의 실패가 도사리고 있음은 물론이다. 그리고 소유와 경쟁의 이익추구라는 자본주의 미덕만을 칭송하는 체제의 불편한 진실이 자리하고 있다.

그래서 무심히 뱉어내는 작은 모욕에도 인간들은 몸서리치고 분노한다. 오늘의 인간들에게 관용과 이해, 나눔과 연민의 실천이란 미덕이 들어설 자리가 없다.
비유의 언어가 금지된 도시를 배경으로 한「마치.....같은 이야기」란 작품은 바로 이러한 인색하고 외곬의 획일화된 불통의 사회를 그리고 있다. 경제적 효율의 추구라는 미명하에 한 단어에는 하나의 의미만을 지닐 뿐 은유나 상징적 표현을 내재할 수 없다는 것이다. 명확한 의사전달을 위해 의미를 복잡하게 하는 비유는 낭비이기에 금지한다는 것인데, 모든 것을 손익계산과 이익의 추구라는 경제 가치를 최고의 미덕이라 하는 지금의 우리 사회와 다를 바가 없는 것이다. 도덕적 양심과 감성이 효율성에 추방당한 사회. 이러한 사회가 인간이 추구하는 이상이라고 말하는‘미무르’같은 괴물들이 지배하는 사회가 과연 얼마나 지속될 수 있는 것인지 두렵기조차 하다.

이 소설집 전체를 관통하는 의식은 일견 평온하고 정상적으로 유지되는 듯이 보이는 우리들의 사회, 그 평범한 일상에서 수없이 반복되고 자행되는 무분별과 냉혹함, 무관심, 비열함, 이기심, 비정함이 야기하는 잔혹하고 무참한 현실의 각성이다. 도처에서 맹독의 세례를 받아야하는 오늘의 인간들이 건조하고 삭막하며, 증오와 분노로 들끓는 것은 그래서 당연한 모습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 개개인들이 스스로 자초한 자가당착이기도 하다. 일상의, 삶의 고통의 실체, 그 근원이 무엇인지 현미경처럼 들여다보는 작가의 시선이 따갑다. 구병모식의 환상적이고 기이하기조차 한 소재와 괴이할 정도로 척척 이가 들어맞는 이야기의 흐름이 현실의 잔혹한 삶에 와 닿으면서 일으키는 그 충돌의 굉음과 파편들에 화들짝 놀라게 된다. 그 진실의 섬세한 관찰에. 속이 후련해지면서도 한편 그늘처럼 우울한 작품으로 마음에 남게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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