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스락거리는 바람소리를 안은 계절 탓인가? 어느 샌가 이만큼이나 삶의 시간이 지났구나하는, 마치 관성처럼 살아온 것만 같은 공허감이 제법 묵직하게 내 마음에 들어앉았다. 아마 이러한 심리적 반응이 고미숙의 나의 운명 사용 설명서와 함께 생의 근본적 통찰을 담은의 황금시대로 이끌었던 듯싶다.

 

사주명리학과 안티 오이디푸스라는 부제를 달고 있는 나의 운명 사용 설명서는 인간 개체 마다 지닌 태어난 해와 월, , 시의 천간(天干)과 지지(地支)로 이루어진 팔자(八字), 즉 개별 삶의 좌표를 읽고 해독하여 란 누구인지라는 토대를 이해함으로써 삶의 주도적 운영자로서 일신우일신(日新又日新) 의 자기모색의 길을 안내한다. 사주팔자하면 결정론 아닌가라는 의구심 탓에 외면했던 것이 사실이었지만 언제부턴가 알지 못하는 것에 대한 너그러움이 내 것이 되었던 모양이다. 내 앎의 편협성을 떨쳤다는 증거인 듯이 명리학이 지닌 우주론적 고매함이 발설하는 비전과 그 실용성이 비로소 시선에 들어 온 것이다.

 

의 황금시대는 이 같은 이해가 불러온 인간에 대한 이해의 자연스러운 욕구였을 것이다. 중국의 외교관이자 철학교수인 C.H.의 저술을 소설가 김연수가 번역한 수려한 문체가 더욱 돋보이는 저작이다. 인간 정신의 경지와 선의 역사를 입문하는 데 맞춤이다.

 

이들 저작은 동일성의 반복을 멈추는 것, 그리고 자기의 관찰과 이를 통한 비움과 순환, 나아가 새로움으로의 지속적인 변화를 생의 에너지라 말하는 듯하다. 어쩌면 이러한 정신세계의 속물적이고 비즈니스 세계의 언어로 삶의 성취를 말하는 판본이 조용인언리시;Unleash라 해도 무방할 것 같다.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파악하여 새롭게 재정의 하는 방법론을 기술하고 있다. 자신이 안다고 생각하는 것을 모두 지워 버리고 다시 앎의 세계를 열어나가는 혹독한 노력 과정의 길잡이다.

 

이미 많은 독자들이 읽고 감동의 리뷰를 남긴 룰루 밀러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또한 고립된 삶의 굴레를 벗어나는 길을 집요하게 모색하던 한 여성의 자기 탐색이자 그 구원자로 여겼던 분류학자의 생을 통찰하며, 자기만의 생의 길을 찾아내는 여정으로 여겨진다. 이제 중간쯤에 도달했다. 과학은 믿음을 싫어한다.”는 좌우명, 시련과 고난을 뚫고 고집스레 자기 길을 걸었던 낙천적 과학자의 자기기만과 단호함이 빚어내는 그 모순성에서 자라나는 악의 근원을 목격하고 있다. 첫 페이지를 펼치자마자 매혹을 뿌리칠 수 없다. 읽던 책을 뒤로 미루고 이 책에 꽂힌 시선을 거둬들이지 못했으니까.


 


캐나다 출신의 고전문학자이자 시인 앤 카슨은 내심 올해 노벨문학상 수상자이기를 기대했던 작가다. ()이면서 평론 에세이고 소설인 이 독특한 작품 빨강의 자서전, 언어적 앎 이외에는 알지 못했던 그 분별과 오만한 무지를 여지없이 허물어뜨리는 인식 전환의 내밀하지만 힘찬 외침인 것 같다. 조바심이 일게 만드는, 지금 내 눈길을 기다리고 있다.

 

떠남과 회귀, 중견 작가 이승우의 소설 이국에서20185월부터 20193월까지 문예지 AXT에 연재되었던 장편소설이다. ‘친구가 되세요라는 문구가 써진 작가의 사인본을 받고서는 새로운 관계를, 낯설더라도 그것이 삶의 근본이라고 하는 것인가를 생각해 본다. 시장의 요구로 보보민주공화국이라는 낯선 이방의 나라로 떠나는 인물의 묘사로 시작된다. 내외부와 떠남이 키워드인 것 같다. 어떤 이야기, 아니 어떤 의식의 세계를 펼쳐 보이는지 책장을 더 넘겨야 할 듯하다.

 

알베르 카뮈의 작품들은 대부분 지니고 있음에도 여전히 누락된 작품들이 남아있다. 여름이나 전락은 중복됨에도 불구하고 단두대에 대한 성찰 때문에 전집 한 권을 사야했다,  ‘사형이라는 국가 살인 행위에 대한 불합리한 논리, 비도덕성, 비실증성을 동원한 비판적 평론이다. 국가 자신이 내세우고 있는 본보기에 대한 믿음의 부재를 비롯한 인간 본성에 대한 냉엄한 성찰이다. 가장 견고해 보이는 자기신체권이라는 소유권 박탈의 권리를 국가가 지니는 것, 아마 꽤나 많은 논쟁지점이 있을 것이다. 자유의지에 대한 회의와 비결정론적 믿음을 가진 내가 어떤 반응을 하게 될지 궁금한 저술이다.

 

비트겐슈타인논리 철학 논고는 상당한 시간적 대가를 요구한다. 경험론은 지식에 관한 것이 아니라 무지에 관한 것이다. 즉 버리는 것에 대한 탐구라는 얘기이다.이 세계의 가치를 모두 밀어내고 그곳에 논리로 채우는 것이다.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은 그야말로 논리 자체다. 이 논리라는 것이 어떻게 인간의 운명을 말하고 결정짓는 것인지, 이번 만큼은 독하게 비집고 들어가 보려 한다. 과연 이 난해함의 비밀번호를 찾아낼지가 관건이다.

 

모든 세계는 나의 세계이며, 나의 세계는 언어에 의해 묘사되는 세계이고, 언어의 묘사가 곧 사실의 반영이라고시작하는 이 철학 사유는 명리학이 말하는 나는 곧 우주자연이라는 말과 흡사하다. 사물의 총체가 아니라 사실의 총체라는 말은 팔자가 뜻하는 그 개별적 실체의 총합이지 않을까? 아무튼 상식이라는 보편성의 그 엉터리를 던져버리고 새로운 인식 체계를 수용할 수 있는지의 문제가 될 것 같다. 이 세계의 그 무수한 사유의 세계들로 들어가면 결국은 인간, 나의 의미란 무엇인가로 좁혀지고, 그런 의미 혹은 무의미에서 어떻게 삶의 목적을 구성할 것인가의 문제인 것만 같다. 이것이 아니라면 사실 왜 관심을 가지겠는가?

 

그런데 이 세계에 인간이 복병을 만들어냈다. AI(인공지능)가 그것이다. 이제 블로거, 유튜브 크리에이터는 메타버스의 세계로 이전하기 시작했으며, 가상세계는 실체의 공간과 그 현실적 체험을 옮겨놓고 있다. 파르마코-AI라는 인간과 인공지능이 함께 쓴 이 괴이한 책은 기억과 젠더, 언어와 윤리학을 교대로 대화를 이어가며 써내려가고 있다. 인공지능 언어모델 GPT-3가 쓴 글을 한 번 보자.


우리 문화가 보이는 발전 중독증세는 연표를 제작하는 방식이자, 사회의 경제적 성장에 기여하지 못한 사람들의 노예화와 발전하지 못한 민족들의 학살까지 정당화하는 이데올로기였다.” 포스트사이버펑크를 말하는 가운데 자본주의의 급진적 변혁을 예상한 뉴에이지 사상에 이은 생각이다. 이 컴퓨터 생성 텍스트를 통해 인간 앎의 지평은 조금 깊고 넓어질 수 있을지 모르겠다. 어떻게 공존해야 하는 것일까? 인간의 삶에 대한 태도는 분명 변화되어야 할 텐데 말이다. 사실 두려움도 만만치 않다.

 

그래서 나는 다시 이미지 존재론의 철학자 베르그손을 읽는다. 물질과 기억, 인간은 외적 물리적 자극에 의해 완벽하게 결정되는 존재일 뿐인가? 인간은 심리생리학적으로 통합된 존재인가? 지금 4차 혁명을 주도하는 정보산업의 주체들은 동물기계론을 주장했던 데카르트식 물리환원주의를 외치고 있다. 정말 알아야 할 것도 많고, 후손들을 위해 반드시 해야 할 일이 우리들에게는 그 어느 시대보다 넘치는 듯하다. 아무튼 이 가을, 내 삶의 재설계를 위한 독서는 이렇게 시작되고 있다. 어떤 생각에 이르게 될지 두고 볼 일이지만, 과연 내가 비워내고 새로운 것을 담아낼 만큼 용기가 있을까






P.S. -  아, 몇 권의 책을 빠뜨렸다. 문학사(文學史)상 가장 긴 자살 유서로 불리는  '버지니아 울프'의 마지막 소설인『막간』은 불순하지만 호기심에서 집어 들었다.  또한 '움베르토 에코'의 『위대한 강연』도 꼭 무엇을 얻으려는 지적 욕심이라기 보다는 그의 초지일관하는 이분법적 사유, 강고한 서구 엘리트의 전형적 사유를 보려했을 뿐이다. 


미와 추, 절대와 상대. 완전과 불완전, 진실과 거짓, 거인과 난쟁이..., 사실 애초부터 비판적 시선을 가지고 책을 읽으려 했으니 불순한 동기는 막간과 마찬가지 일 것이다.  아마 이 삐딱한 동기 때문에 빠뜨리게 된 것인지도 모르겠다.  무의식의 짓궂은 방해였을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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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타와 버지니아 - 버지니아 울프와 비타 색빌-웨스트의 삶과 사랑
세라 그리스트우드 지음, 심혜경 옮김 / 뮤진트리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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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타 색빌-웨스트와 버지니아 울프 두 사람의 사랑보다는 이들의 고뇌와 열정어린 삶의 이야기들이 더욱 매혹적으로 느껴지는 저술이다. 책의 서술 또한 비타와 버지니아의 삶을 연대기 형식으로 교대로 비추며 그네들을 기다리는 운명의 마지막 순간으로 치닫고, 인간의 개별성이 빚어내는 단독성의 고귀한 형상들을 통해 독자를 격한 감동과 어떤 정화(淨化)된 감정으로 이끈다. 아마 두 사람의 생명력이 발산하는 그 지고한 숭엄함으로 육신의 일회성, 초월할 수 없는 그 한계가 더욱 선명하고 안타깝게 다가왔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이렇듯 감성적 울림이 이 저작의 배경을 이루며. 두 지성의 사적 삶을 형성하였던 성장과 결혼, 지적 교류관계의 영역들, 그들의 소설과 시, 에세이 등 저작물의 산실이 되었던 풍경과 장소들, 그리고 겪어야했던 당대의 사회적, 역사적 사건들이 유연하게 얽혀들며 문학인생의 의미를 풀어놓는다.

 

이 책의 발견은 버지니아와 그녀의 남편 레너드가 함께 했던 멍크스 하우스의 정원이야기를 펼쳐낸 캐럴라인 줍버지니아 울프의 정원이 야기한 어떤 문학적 향기, 고귀한 영혼에 대한 향수(鄕愁) 때문이었다고 해야 할 것 같다. 특히 이 저작은 여전히 작동되고 있는 성정체성에 대한 이분법적 시선을 벗어나 그 부자연스러움에 종지부를 찍으며 훨씬 더 잘 이해할 수 있는 애정의 다양한 관계성을 아름답게 펼쳐내고 있으며, 올랜도를 비롯한 등대로, 세월, 막간, 3기니에 이르는 버지니아 작품들의 집필 동기나 당대의 반응들, 비타의 다크 아일래드등 시와 소설 작품의 배경들을 만나는 즐거움까지 아울러 제공하고 있다.

 

결혼 전의 성장기

 

책의 첫 챕터는 비타와 버지니아의 가계(家系)와 성장기를 비교적 꼼꼼하게 서술하고 있는데, 아마 이것이 두 사람 인생의 영향에 어떤 근원을 형성하고 있다는 인식 때문이었을 것이다. 영국 황실과의 오랜 유대관계를 지닌 명문 귀족가문의 여식으로 출생한 비타는 놀 하우스라는 조상의 위엄과 긍지가 어린 성채를 터전으로 성장한다. 그녀에게 놀 하우스는 단순히 거주지로서의 주택의 의미만을 갖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숨결이자 자긍심 그 자체이다. 그녀는 떠밀리듯 귀족계의 보이지 않는 위신의 압력에 의해 외교관인 해럴드 니컬슨과 결혼하지만 결코 니컬슨 부인으로 불리기를 원치 않는다. 오직 비타 색빌-웨스트일 뿐이다. 결혼은 놀 하우스와의 불가피한 이별이며, 영혼의 터전이자 자신의 일부에 대한 상실감으로 남는다.

 

버지니아의 아버지는 빅토리아 시대의 유명한 문인인 레슬리 스티븐이다. 한편 어머니 줄리아는 개혁적 여성들로 이루어진 상류가문 출신으로 레슬리의 두 번째 부인으로서 버지니아 등 4남매를 출산했다. 그러나 때 이른 어머니의 죽음 이후 아버지와 이복형제들의 심한 억압과 어머니에 대한 겉치레식 애도는 분노로 이어지고 심각한 우울증으로 발현된다. 무분별하고 동물적인 흉포한 분노를 발산하던 아버지까지 사망하자 언니 바네사, 오빠 토비, 남동생 에이드리언, 4남매는 후일 블룸즈버리 그룹의 활동무대가 되는 퇴락한 고든 스퀘어5층짜리 집으로 이사한다. 이미 이때부터 버지니아의 정신발작은 빈번히 자신과 가족을 불안하게 하는 주요인이 되었던 듯싶다.

 

오빠 토비가 다니던 게임브리지 대학 인근에 자리잡고 있던 이들의 터전은 리턴 스트레이치’, ‘E.M.포스터’, ‘메이너드 케인즈등 문학, 정치, 경제, 문화 분야의 후일 새로운 시대의 주역이 될 인물들이 모이는 블룸즈버리그룹의 산실이다. 언니 바네사는 이 모임의 중추적 역할을 하는 여성으로 버지니아에게 모성적 보살핌 역할을 수행한다. 버지니아는 자기 병을 치료하기 위한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서라도 일을 해야만 했고, 이즈음에서 에세이와 리뷰, 후일 출항으로 발표될 작품 등 치열한 글쓰기에 몰입한다. 결혼의 필요성에 대해, 더구나 남성에 대해 그 어떤 성적 매혹을 떠 올릴 수 없었던 버지니아는 블룸즈버리 그룹의 일원이었던 레너드 울프와 늦은 결혼을 올리고, 호가스 프레스라는 출판사를 차린다.




비타와 버지니아의 만남

 

두 사람의 만남은 언니의 남편인 클라이브 벨의 소개로 비타가 버지니아를 저녁식사에 초대함으로써 192212월 최초로 이루어졌던 듯하다. 이미 버지니아는 작가로서 유명인사가 되어 있었으며, 비타 또한 시와 소설 등을 발표하며 세간의 인기를 얻는 작가이자 명망 있는 귀족 여성으로 알려져 있었다. 버지니아의 비타에 대한 첫 인상은 멋지고 재능있는 색빌 웨스트였으며, 귀족계층의 안락함과 너그러움을 모두 갖췄음에도 불구하고, 예술가로서의 위트는 없어 보이는 여성이었다. 한편 비타가 느낀 버지니아는 너무 수수해서 뭔가 대단한 사람처럼 보였으며, 전혀 가식이나 꾸밈이 없었고, 옷도 아주 형편없었다.... 평범해 보이지만 지적인 아름다움이 느껴지는 사람이었다.

 

이러한 그네들의 일기로 비추어 비타의 버지니아에 대한 인상이 더 좋았던 듯하지만, 버지니아는 온갖 유력한 곳에 줄을 댈 수 있는 영향력을 지닌 비타에 대한 능력을 대단하게 평가했음을 쓰고 있다. 사실 오늘의 감각으로 이는 일견 속물적 인간관이라 할 수 있겠지만 당대의 실정에서는 귀족의 이러한 능력에 대한 경외는 그리 흠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두 사람의 호감은 이렇게 시작되어 우정을 키워나간다. 아주 흥미로운 대목이 있는데, 비타와 버지니아의 사랑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정의하는 대화다. 버지니아는 이렇게 말한다. 사랑은 모두에게 권태를 수반하지만, 삶의 자극은 다른 사람에게 조금 더 다가가려는 작은 몸짓에 있다.”, 이에 대해 비타는 지금껏 살아오면서 뜨거운 사랑을 한 번도 해 본적 없어서 그렇게 생각하는 게 아닐까....”라고 덧붙인다.

 

이 대화는 두 사람이 이후 발전시키는 애정의 방향을 가늠케 한다. 즉 버지니아는 가슴보다 머리를 통해서 사람을 좋아하며, 비타는 열정적이고 헌신적인 사랑을 한다. 이 이루어질 수 없어 보였던 사랑은 버지니아가 스스로 목숨을 던질 때까지 지속된다. 비타는 버지니아로부터 자신에 대한 사랑의 확신이 서자 남편 해럴드에게 편지를 쓴다. 그렇게 커다란 은빛 물고기를 잡은 것이 꽤나 자랑스러우며. 그녀의 우정이 나를 풍요롭게한다고.

 

완숙함과 한껏 부푼 가슴에 끌렸다....비타는 정말이지 해수면이 최고조에 달했을 때

돛을 모두 올리고 항해하고 있는 것 같다.” -142

 

버지니아가 연인에게 바라는 것은 무엇이었을까? 그녀는 자신의 일기에 쓰고 있다. 비타는 나라를 대표하는 외교사절 역할을 하고, 중국산 차우차우 개를 다루는 그녀의 능력과 그녀의 참된 모성애 사이에 연관성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녀는 요컨대 (나는 한 번도 되어 본 적이 없는) 진정한 여성이다.”라고. 이는 언니는 내게 모성애를 아낌없이 베풀어줬는데, 무슨 영문인지 글쎄, 그게 내가 사람들에게 항상 원하던 것이었다.”는 그녀의 언니 바네사에 대한 글에서 나타나는 모성애와도 아주 유사한 감정이다. 버지니아는 바로 이걸 바네사와 레너드로부터 받았고, 비타로부터도 드디어 끌어낸 것이다.

 

비타의 여러 사진중 버지니아가 선택하여 표지에 실은 올랜도』 헌정본, 165쪽 전체인용



■ 『올랜도놀 하우스’, 그리고 시싱허스트

 

소설 올랜도는 사랑하는 연인 비타 색빌-웨스트를 향한 사랑의 찬가이며, 그녀를 위로하고 잃어버린 놀 하우스의 과거와 되찾을 수 있는 희망의 노래이다. 또한 문학적으로 가장 길고 매력적인 러브레터이기도 하다. 즉 아버지 라이어널 색빌-위스트남작이 논쟁의 여지도 남기지 않은 채 사망하자 여성의 상속이 부정되던 당시 제도로 인해 외동딸임에도 작위를 승계한 삼촌에게 넘어가버려 영영 자신의 것으로 돌릴 수 없게 된 비타의 고통을 위로하려는 것이었다. 올랜드는 비타를 찬양하며 그 사랑의 충족감으로 인해 고통을 제어하려는 고상한 지적 사랑의 노래를 쓴 것이다.

 

버지니아는 비타에게 올랜도자필 원고와 함께, 특별히 장정된 책을 주었다. 비타가 버지니아의 이 헌정에 기뻐했음은 물론이다. 놀은 올랜도에 대해 알고 기뻐하는 느낌이었다.”고 남편에게 편지를 썼다. 비타는 놀 자체였으며, 그 상실의 빈자리를 올랜도가 메꾸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올랜도에는 버지니아의 묘한 질투도 스며있다. 비타가 한창 빠져들었던 귀족여성인 바이올렛에 대한 묘사다. 올랜도에서 유혹적이면 무모하고 위험한 기질을 가진 러시아 사샤 공주의 모습으로 등장한다. 그녀는 위험한 난초처럼 사악했다.”고 쓰고 있다.

 

비타의 공허한 정신은 버지니아로부터 이렇게 채워지고 있었지만, 물질적 실체에 대한 그리움까지 충족시키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수세기 동안 포로수용소로, 농부들의 허드레 공간으로 방치되던 엘리자베스 시대의 대저택이 폐허가 된 채 매물로 나오자, 비타는 그것에서 놀 하우스의 환영을 본다. 그녀는 자신이 이 지저분하고 남루한 채 버려진 공간을 구해낼 수 있다고 자신한다. 매입비 12000파운드, 추가보수비용 15000파운드를 들여 구입한 것이 오늘날 영국의 3대 정원으로 대중의 사랑을 받는 시싱허스트.

 

비타는 성채의 탑 위에 비타의 가문 문장을 새기고, 정원 도구들에까지도 모두 V.S-W를 찍었다....그녀의 뿌리가 뻗을 수 있는 곳임을 선언한 것이다. 인간의 영혼이 투사된 공간, 그 집요함이 만들어 낸 작품이다. 비타와 버지니아의 사랑 전선에 항상 햇빛만 비추었던 것은 아니다. 연인의 사랑에는 그 부침이 있기 마련이다. 1931년 비타가 침묵하기 위해 해자에 걸어 들어가 고여 있는 물 아래도 가라앉아 익사하는 자신을 그린 VW(버지니아 울프)에게 바치는 시() 시싱허스트(Sissinghurst)를 내 놓았던 것이다. 그러나 사랑이 그렇게 간단히 무너지겠는가.

 

시싱허스트에서 내려다 본 장미정원, 10~11쪽 부분인용




1931년 이후, 떠남의 세계

 

사실 버지니아의 세계에서 당대의 사회적 현실 세계를 발견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버지니아가 노동자 계급을 비롯한 대중의 목소리를 가져야겠다는 필요성의 인식조차 없었던 것은 아니다. 1931년 여성의 경제 평등을 얻기 위해 설립한 포셋 소사이어티에서의 강연 모음집인 3기니는 아마도 자기만의 방을 넘어서는 강렬한 페미니스트 책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2차 대전의 징후가 감지되던 유럽의 대공황과 무솔리니, 히틀러의 대두로 야기될 수 있는 전쟁에 대한 반전(反戰)의 목소리는 그녀가 사회를 외면한 은둔의 작가, 현실과 간극이 큰 작가라는 세간의 비난을 잠재우기에 충분하다.

 

버지니아가 1939년에 쓰기 시작한 지난날의 스케치는 다가오는 전쟁과, 언니 바네사의 아들인 줄리언 벨의 사망, 어린 시절의 성적 학대와 죽은 오빠 토비와의 정서적 관계에서 생긴 뒤얽힌 상처는 그녀의 정신적 고통을 짐작케 한다. 전쟁이 임박했을 때 영국으로 도피한 지그문트 프로이트와의 만남에서 그의 이론으로 인한 감정의 혼란은 자신의 정신 상태에 대한 또 다른 의문을 제기하는 뇌관이 되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전쟁이 발발하고 영국 남부에 위치한 멍크하우스는 독일 침략의 길목이었다. 머리 위에서 벌어지는 공중전을 견뎌내야 하고, 전업 작가로서의 삶에 대한 걱정은 대중의 완전한 침묵으로 더욱 가중되었을 것이다.

 

이번에는 돌아오기에 너무 멀리 갔다는 느낌이 들어...맞서 싸워보려 버둥쳤지만,

더 이상은 못 버티겠어.” - (언니 바네사에게 남긴 쪽지에서), 234

 

1941328, 멍크스 하우스 인근의 우즈강에 투신하기 전에 그녀는 소설 막간을 발표한다. 올랜도의 동전의 뒷면 같은 소설이다. 이 소설에 대해 어느 비평가는 역사상 가장 긴 자살 유서이며, 또 누군가는 비타 앞으로 보낸 유서라고 하기도 했다. 그러나 아무도 그녀가 자살할 것이라고 예견하지 못했다. 그녀의 시신은 20일이 지나서야 발견되었다. 비타는 버지니아의 죽음 이후 196262일 자기 삶에서 근심걱정과 자책감을 다 내려놓고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시싱허스트의 정원에 매달렸다.

 

맺는 말

 

20세기 초 위대한 문학 세계와 새로운 여성의 세계를 열었던 두 여성의 사랑을 그네들의 저작과 삶의 배경과 함께 우아한 필치로 그려낸 이 저작의 지적, 문학사적 품격과 그 수려함, 지적 공감의 문장들은 깊은 여운과 함께 그들의 세계로 독자를 몰입케 한다.

 

언니 바네사에 헌정했던, 사랑과 결혼이 실제로 여성들에게 반드시 필요한 것인가라는 질문을 에드워드 7세 시대를 배경으로 몇 사람의 회상을 통해 숙고하는밤과 낮에서부터, 그녀가 최초로 의식의 변화를 추구했던 오빠 토비와의 기억이 배어있는 제이콥의 방, 여섯 명의 독백으로 구성하여 하나의 버지니아로 모으는 것의 어려움을 토로한 파도, 50년에 걸친 중산층의 연대기인 세월에 이르는 그 독보적인 작품들의 배경과 동기들까지 이 책으로 독자는 버지니아의 세계에 보다 친근하게 다가갈 수 있다.

 

이러한 문학적 접근과 아울러 이 책의 탁월함은 인간 생의 단독성에 대한 뛰어난 통찰이랄 수 있을 것 같다. 원숙함, 뽐내지 않는 위엄의 기운, 그들이 성취하고자 했던 것이며, 또한 우연히 성취된 무엇들에 대한 것이기도 하다. 이 책이야말로 방대한 애정물에 대한 독보적 기록물이라 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버지니아 울프의 작품들을 읽는 이들에게 더없이 귀중한 책이 되어 줄 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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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빛 사윌 때
최시한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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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이건 곡식이건 줄기까지 휩쓸고 갔구나.” -103

 

 

위 문장은 패망한 나라의 적나라한 실상의 은유다. 나당연합에 의해 멸망한 백제에는 당의 도독부가 설치되어 당()군이 지배하고 그에 아첨하는 배신의 무리까지 백성들을 수탈하여 남은 것이라곤 아무것도 없는 참상의 묘사이다. 소설은 서기 671, 당이 백제를 지배한지 10년이 지났을 무렵, 고구려, 백제, 신라 삼한의 연합세력이 한반도로부터 당을 몰아내는 전쟁을 시작할 즈음의 어느 사흘의 이야기 속에서 멸망한 백제의 무사 오서물참을 통해 나라는 과연 무엇인지를 온몸으로 체험케 한다.

 

무사 물참의 사흘에 걸친 나라 찾기의 물음에는 생존을 위해 떠돌아야 하는 민초들에 대한 가슴 아픈 연민과 유대, 자신들의 잇속을 위해 적에 기생하여 동족을 착취하고 배신하는 무리들에 대한 분노, 이런 현실 속에서 백제의 부흥, 혹은 백제를 살리는 길이 진정 무엇인지를 온몸으로 헤쳐 나가는 패자들의 역사가 놓여있다. 660년 왕의 황음과 귀족들의 분탕질로 자멸하다시피 패망한 후 백성들은 백제 부흥을 도모한다. 백성은 뒤로 한 채 제일 먼저 왜로 도주한 왕족과 귀족들, 남아 있던 장군들과 승려, 민초들은 왕이 항복한 상태에서 부흥전쟁을 3년 남짓 끌어가지만 이 또한 왜에 있던 의자왕의 아들 부여풍을 중심으로 한 간신배들의 이간질과 망상적 욕심으로 자멸의 길을 걷고 만다.

 

백제의 땅은 당의 군대와 당이 설치한 도독부에 봉사하는 백제인들에 의해 백성들은 처참한 수탈의 지경에 내몰린다. 백성은 당으로, 신라로, 고구려로, 왜로 그 이해에 따라 분열되어 같은 족속들끼리 싸움을 이어간다. 나라 잃은 백성, 어지럽고 어리석은 주인 노릇 못하는 족속의 꼴이 지면을 가득 채운다. 자신과 이해관계가 다른 이들에 대해 무참한 적대와 폭력을 자행하는 썩은 냄새 가득한 권력의 모습은 바로 오늘의 것과 다를 바가 없다.

 



혼돈과 폭력이 난무하는 혼란의 시대, 권력은 이러한 상황에서도 금당을 짓기 위해 백성을 쥐어짜 재물을 모으고 노동력을 착취한다. 국민의 혈세를 왜 금당 짓는데 쓰노? 가난한 중생 지옥 보내고,.... 극락 가려구?(104)” 역사는 반복된다고 하지만 어째 지금 하는 작태와 이리도 같을꼬. 한 나라의 붕괴는 항시 이러한 부패와 어리석음의 틈새를 파고든다. 이미 작금의 한국 사회에 대한 해외의 시선도 급속히 냉담하게 바뀌고 있다. 썩은 개들의 나라가 되고 있으니 저 나라는 아마 조만간 수십 년 전의 반()민주화된 후진적 사회로 퇴행할 것이라고.

 

외적과 싸우기 위해 그 어느 때보다 함께 힘을 모아야 할 때에도 제 욕심에 눈 먼 황충(蝗蟲)이들은 싸움과 분열을 일삼는다. 당으로 피신했던 왕족과 귀족의 일행들은 당의 신하가 되어 자신들의 백성이 신음하는 백제 땅에 도독부 관리로 부임한다. 왜구와 도둑들의 만연, 도독부의 수탈, 강간과 폭력, 살인이 넘실대는 지옥의 땅이 펼쳐진다. 당의 관리가 되어 나타난 물참의 이복 형, 친구 천득은 당 황제의 신하됨을 역설한다. 나라 없는 백성, 이제 어제의 연합군이었던 신라와 당이 싸우고, 어제의 적이었던 고구려 유민과 신라가 연합한다. 백제의 땅에서 벌어지는 싸움인데 백제는 오간데 없다.

 

이렇듯 소설 속 무사 물참의 고초와 고뇌를 따라가다 보면 무능력한 권력이 빚어내는 수치는 오로지 백성의 몫이라는 것이다. 유독 잊고 싶지 않은 소설 속 문장이 있다. 물참의 스승이 건네는 말이다. 약하고 작더라도 숨탄것들을 알뜰히 보살피는 마음, 그 마음을 잃지 말아라. 잊었느냐?...지금 세상에 메뚜기가 얼마나 많으냐? (77)” 힘없는 민초들의 삶을 우선으로 돌보라는 말, 그런데 세상에는 그 약자들의 알곡과 줄기까지 훑어가려는 인간들이 득시글대니 경계를 잃지 말라는 주문이다.

 

세상은 끝지는 게 아니라 변한다. 변치 않는 건 없다.” -77

 

외세를 끌어들여 삼한의 동족을 패망시켰던 어제의 신라는, 그 외세를 몰아내기 위해 다시금 삼한(고구려,백제,신라)의 협력을 필요로 한다. 영구하리라 여겼던 당의 지배를 떨쳐내는 데 20여년의 시간이 걸렸다. 그 사이 신음하는 백성의 삶은 무참함 이외의 말은 소용에 닿지 않는다. 물참은 빈번히 당하는 수치를 씻고 평화를 얻기 위한 싸움, 삼한의 얼이 통하고 넋이 위로받는 세상을 위해 어제의 적인 신라와 함께 침입군인 외세, 당을 향해 돌진한다.

 

지금의 세계 역시 어제와 오늘의 상황이 급변하고 있다. 주변 나라들의 자국 중심의 경제와 안보 정책은 그 어느 때보다 서로 첨예하게 부딪치고 있다. 이러한 때에 외교적 무능력을 보이고, 국민을 분열, 이간질시키는 권력의 작금의 행태는 우리가 얼마나 역사에 대해 배우는 것이 없는 족속인가를 되돌아보게 한다. 반복, 그러나 차이있는 반복으로서의 변화를 능동적으로 깨달아야 할 때이다. 어쩌면 1,500년 전 이 땅에서 살다간 우리 선조들의 시린 삶을 지펴낸 이 역사소설은 백성이 주인 노릇을 잃을 때 발생하는 하나의 고통, 그 지독한 고초를 가리키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것은 수치와 모멸, 죽지 못해 살아가는 억압과 폭력의 삶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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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보다 : 가을 2022 소설 보다
김기태.위수정.이서수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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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수록작인 김기태작가의 전조등, 주인공이 운전하는 차량의 전조등은 이 세계에 대한 첫 의심, 아니 자기 삶에 부딪친 최초의 타자에 대한 관심의 사건을 불러오는 지점일 것이다. 제목처럼 소설은 영특함이 빛난다. 문장은 경쾌하고 리드미컬하게 지루함 없이 마지막 문장까지 밀고나가는 힘이 있다. 두 번째 작품인 위수정작가의 오후만 있던 일요일은 초로(初老)의 여성 원희를 중심으로 그녀의 시모와 시집 간 딸을 통해 여성의 연령에 따라 겪게 되는 삶의 개별성을 원숙한 시선으로 그려내고 있다. 이 사회의 소음들이 요구하는 어떤 잣대와도 무관한 글쓰기가 매력적이다. 마지막 수록작인 이서수작가의 발 없는 새 떨어뜨리기는 왠지 감정의 진솔함 때문인지 내겐 다소 낯선 문장들이지만 새로운 유형의 인간관계를 발견하는 신선함이 있다.

 

이번 가을 선집 수록작 세 편에 대한 이 간략한 개괄적 느낌과 달리 하나의 의문이 나를 놓아주지 않았는데, 소설 속 인물들이 한결같이 자신들이 살고 있는 사회적 현실의 제도적, 구조적, 체제적 한계가 지닌 문제를 마주하고 있는데도 정작 그러한 지배적 힘, 그 자체에는 아무런 의문도 제기치 않는다는 점이다. 이러한 의심이 가장 직접적으로 드러나는 작품은 우정 혹은 사랑의 경계를 지나는 독특한 신유형의 인간애를 그리고 있는 이서수작가의 발 없는 새 떨어뜨리기를 지명할 수 있을 것 같다.

 

물질 자본주의가 빚어내는 뒤틀린 삶의 왜곡 양상들이 등장인물들에게는 너무도 당연한 듯 그 지배적 힘의 굴레 안에서 그 힘이 제시하는 정형성의 미달에 그저 시름하기만 하는 듯하기 때문이다. 소설을 쓰며 알바로 생계를 빠듯하게 꾸려가는 가진이란 여성이나 응급실 간호사로서 자기 고통이 최우선이라 생각하는 인간 군상들, 그네들의 질병과 죽음에 감정적 육체적 수고를 요구당하는 사영을 바라보는 것은 사실 안타까움이라 할 수 있다.

 

가진과 사영이 함께 찾아가는 지방도시의 삼천만원 아파트로 상징되는 장소는 갱신되어야 할 세계의 윤리구조에 대한 어떤 창조적 도전이 아니라 다만 현실에서의 도피, 굴종에 대한 소극적 완화의 노력으로 밖에 보이지 않는 까닭이다. 설혹 그녀들이 함께 대지에 내려 앉아 삶의 평온과 사랑을 존속시킨다 할지언정 이 세상은 한 치도 변화하지 않는다. 아무런 변화도 요구하지 않으며 그저 자신들의 보신에 눈물겨워하는 인간에 어떤 긍정성을 씌우는 것은 청년들에게 지나치게 무력(無力)과 굴종을 강요하는 것 같기만 하다.

 

단편 전조등은 아예 지배적 힘의 언어를 그대로 자기 삶의 실천적 지표로 삼는 인물을 등장시켜, 시대의 보이지 않는 지배적 힘(제도, 법률, 관습, 상식 등등)에 어떠한 의심도 보이지 않는 길들여진 인간의 전형을 내세우기까지 한다. 주인공은 자신의 부모로부터 성장기에 배운 것을 이렇게 술회하고 있다. 대개 무언가를 이루기보다는 당하지 않기 위한 지혜를 배웠다고. 세상을 위한 창조나 갱신의 노력 주체가 아니라 수동적인 자기보호의 무기만 갈고 닦았다는 것이란 의미일 것이다. 한발 더 나아가 군청공무원인 그의 아버지는 우리는 이렇게 잘 살고 있으니 얼마나 다행이니?” 라며 현실의 물질적 삶이 제공하는 안정성에 만족스러움을 표시하기까지 한다. 배부른 돼지의 삶이면 족하다는 이 말은 인간의 삶을 지나치게 왜소하게 만들지 않는가?


 


이 소설을 중산층의 탄생, 혹은 그 무사유의 영원성’, 이라 불러도 어울릴 법 할 듯싶다. 주인공은 이러한 인식을 체화하며 성장한다. 서울의 중상층 대학에 입학하고, 완성차 제조 대기업에 취업하여 고액의 연봉. 직장 인간관계에서도 갈등을 피하는 준수한 삶에 만족한다. 수 차례의 연습같은 연애를 거치고 여기서 얻은 이성관계의 지혜로 결혼에 입성한다. 그리곤 딸 아이를 얻는다. 세상의 말, 그 지배적 힘의 언어를 자기의 말로 착각, 내면화한 맹목적 삶의 전형이다.

 

그런데 소설에서 주인공의 삶에 유일한 균열을 낼 뻔 한 장면이 등장하는데, 그것은 그가 운전하던 차에 무언가 부딪친 파열음 소리이다. 차에서 어두운 산길을 둘러보다 군청색 털 고무신 한 짝을 발견한다. 그러나 잠시 어두운 산을 바라보다 이내 한 쪽 신발을 잃어버리고 걷는 사람의 뒷모습을 상상하며 제 갈 길을 가고 만다. 지독한 무관심, 혹여 사람을 다치게 했는지도 모를 일에서 조차 의심을 잃어버린 이 무사유(無思惟)의 정신에 왠지 소름마저 끼친다. 산길을 걷던 노파가 차에 부딪쳐 산 속 어딘가로 튕겨 묻혀있는 것은 아닐까? 왜 이런 의심이 발생하지 않는 것일까? 지금의 이 시대가 인간들을 이렇게 길들이고 있을 것이다. 세상의 이러한 수구적 이기심은 이 사회의 윤리적 갱신을 방해한다.

 

작가는 이러한 무의심, 무사유의 전형적 인간의 무난한 중산층 편입의 정형성을 통해 역설적 읽기를 기대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역설에 이르기에는 요구되어야 하는 문장들이 지나치게 부족한 것이 아닐까? 새로운 윤리적 구조를 향한 외침이 아쉽게만 여겨진다.

 

매끈한 굴곡 없는 삶, 너절하고 하찮은 잡음들이 싹 거두어진, ‘중산층이라는 정형화된 얼굴들, 경제, 사회, 윤리적 전형성을 띤 인물들은 왠지 작가들의 글쓰기 속에 내재된 의지에 의심을 불러일으킨다. 그 수구적 이기심의 은폐성. ‘위수정작가의 오후만 있던 일요일또한 초로의 중산층 여성이 주인공이다. ‘원희라는 인물은 친구 수임과 함께 지방 흡입, 눈매 교정, 성형시술 등의 피부관리를 받으며, 음악연주회를 감상하러 다니는, 경제적 제약을 느끼지 않는 사람이다.

 

이런 연유로 그녀는 자신의 늙어가는 몸, 그 육신의 욕망에 오로지 집중할 수 있게 된다. 물론 치매로 요양원에 있는 시모의 설핏 드러나는 억제된 욕망의 흔적이나, 남편의 노후 징후, 셋 째 아이의 출산을 앞둔 딸이라는 타자를 통해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을 갖추기도 하지만 이를 자기연민과 자기애의 축에서 벗어난 반성적 시선으로 해석하기에는 미흡하기만 하다.

 

수임의 제안으로 젊은 피아니스트의 음악 연주회에 동행하게 되고, 즐기던 음악이 아니었던 기승전결도 없는 불협화음의 음악인 헝가리 작곡가 버르토크를 연주하는 주완에 매료되지만, 원희 자신에겐 이러한 매혹에 대한 적극적 반응이 허락되지 않는, 세상의 연령에 대한 제약의 시선이 있음을 문득 깨닫는 장면 등은 노화하는 인간을 바라보는 길들여진 이 세계의 습속에 깃든 반()윤리성, 그 억압 윤리들의 시의성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는 듯도 하다.

평온 무탈한 삶의 소소한 행복, 우아한 자기를 위한 항상성의 욕구 들을 문제 삼는 것이 아니다. 문제는 우리가 사는 세계에는 강렬한 의심을 제기케 하는 많은 윤리적 구조의 문제가 있으며, 사회가 요구하는 일정의 조건을 입증하지 못하는 존재를 끊임없이 배제하고, 보이지 않게 강제하는 모든 습속과 규율에 굴종을 요구한다. 다시 말해 이 세계는 새롭게 갱신되어야 할 무수한 불의와 부정을 담고 있기에 모든 인간이 이를 모른 체하며 나만 잘 살면 돼라 할 경우 이러한 지배의 힘은 어느 것도 변화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세대를 달리하는 세 명의 여성을 통해 그들의 다양한 가치관과 욕망의 실체를 드러냄으로써 강요된 어머니나 규정화되어 씌워진 여성의 이미지를 탈피한 자연스러움, 해방감을 그려낸 점은 분명 이 작품의 돋보이는 장점이라 할 것이지만, 위수정 작가의 작품에서는 사람들 눈앞에서 지워진 계층들이 보이지 않는다. 하찮은 사태들이 들러붙는 복잡성의 왜곡을 피하는 글쓰기도 중요하겠지만, 사실의 은폐된 문제들은 바로 이 배제된 부분에 더 많은 것들이 드러나기를 기다리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이젠 한국 문학도 자기연민을 핥아대는 지점에서 도약해야 되지 않을까? 이 시대, 이 사회를 지배하는 보편적 가치라는 것들의 맹목과 독단을 파괴하고 새로운 가치를 제안하는 그런 작품들을 기대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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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속의 평등 - 강자를 길들이는 거꾸로 된 위계
크리스토퍼 보엠 지음, 김성동 옮김 / 토러스북 / 2017년 4월
평점 :
절판



"평등주의란 단순히 위계의 부재로 나오는 결과가 아니다. 오히려 평등주의는 아주 특별한 유형의 위계, 즉 반()위계적인 태도들에 기초하는 흥미로운 유형의 위계이다." - 32

 

'지배와 종속'이라는 단어가 품은 개념은 사람들을 긴장하게 만드는 어떤 불쾌감을 수반한다. '누군가가 ''를 지배하고 종속시키려 한다고? 내 자율을 속박하겠다고? 대체 누가 이런 사악한 짓을 하려 한다는 것인가?' 여기에 의식 깊숙이 자리잡고 있는 것은 어떤 개인의 자율을 타인이 해칠 수 없다는 '평등'에 대한 인식이다. 문화인류학자이자 생물학 교수인 '크리스토퍼 보엠'은 바로 이 평등 의식이 과연 인간의 정치적 본성, 다시 말해 자연선택에 의해 오늘의 인류에 유전적으로 내재되어 있는 것인가를 규명하려 한다. 이 물음이 너무도 중대한 것은 급변하는 세계에 대처하기 위해 새롭게 수립되고 구체화하여야 하는 가치와 제도의 창출에 있어서 토대의 견고성과 관련하기 때문이다.

 

대략 B.C.3000년경부터 강력한 일인(一人) 또는 소수의 지배자에 의한 대다수 인간들의 복속이라는 체제가 시작된 이래, 18C 일부 서구 사회의 시민혁명으로 민주주의라는 인간 개인의 자유와 평등이라는 정치 도덕적 덕목이 지역적으로 흩어져 있는 인간 세계에 점진적 확산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인간의 역사시대는 지배와 복종이라는 위계(hierarchy)의 사회였으며, 비록 민주주의 이데올로기로 인해 인간 개인의 존엄성을 근간으로 개인의 자율적 사유와 행위에 대한 권리 보장, 인간 개인의 평등성을 신념으로 하고 있지만, 여전히 계급적인 지배 권력이 법제도에 의해 승인되어 존립하고 있다.

 

이러한 역사적이고 경험적인 실체에 비추어 볼 때, 특히 '인간의 평등성'이란 개념은 왠지 불안정하고, 오히려 불평등의 위계가 인간의 본능으로 여겨지기까지 한다. 만일 위계가 자연선택된 것이라면 인간 사회에서 개개인의 평등을 유지한다는 것은 살얼음판 위를 걷는 것처럼 위태로울 수밖에 없다고 할 것이다. 언제고 이 불안한 평등의 개념은 전복되고 지배와 복속이라는 불평등의 정상화가 자리 잡을 것이라 예견하는 것은 지극히 인간다운 것이 될 수 있다는 얘기이다. 아마 이 저술의 탁월성은 평등과 위계의 종잡을 수 없는 이 미심쩍은 인간의 본성에서 '평등주의'를 현생 인류(homo sapiens)의 시작이랄 수 있는 대략 10만년 전후의 먹거리(수렵채집) 무리로부터 길어 올리는 인류학적, 진화론적 추적 연구라 할 것이다.


 


"우리들 중 하나가 타자들을 지배하도록 허용하기보다는, 우리 모두는 우월자가 될 통계적으로 작은 기회를 포기하기로 동의한다. 우월이나 지배를 추구하기 보다는,

개인적인 자율성에 그저 만족하기로 동의한다." - 210쪽에서

 


침팬지와 보노보, 인간 혈통을 포괄하는 고등 유인원에서 인간 혈통이 분화된 것을 대략 500만년 전으로, 그리고 이 분기에서 엄청난 두뇌와 털 없는 몸뚱이 등 해부학적, 그리고 상징적 문화와 언어를 발달시킨 오늘의 근대적 인간의 출현을 적어도 10만년 전후로 추정하는 데 학계간의 의견 일치가 있는 것 같다. 이 시기의 인간을 수렵채집(먹거리)인이라 부르며, 이들은 무리로 이동하는 군집 생활을 하였으며, 어떤 특정한 지배자 알파가 나머지 무리를 예속시키는 그런 정치 행위가 불가능했다고 지적하고 있다. 인간 조상들은 타인을 정치적으로 위압하는 행동의 실행을 심각한 도덕적 위반들 중의 하나로 보고 이를 금지하기 시작했다고 이해하고 있다.(현생 수렵채집 생활 무리에 대한 민족지학적 보고들 참조)

 

즉 집단이 어떤 잠재적 일탈자도 지배적 알파가 되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려는 "두려움에서 비롯된 지배에 대해 분노에 찬 저항"이 신념화 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이는 보통 개인들이 연대한 집단이 선제적으로 그 잠재적 일탈자에 재갈을 물리는 반응을 수행함으로써 위계 형성 과정을 저지하였음을 의미한다. 일례로 큰 사냥감을 잡은 사람이 성과 배분에 참여하거나 노획을 자랑하는 것은 곧 정치적 권력으로 전환을 시도할 위험으로 간주되었으며, 따라서 겸손한 말과 분배 주체에 관여하지 않는 것이 무리의 정치적 긴장을 완화하는 방법이었다는 것이다. 여기서 흥미로운 양상을 보게 되는데, 자랑스러워하는 사냥꾼은 과도한 부정어법과 완곡어법을 사용함으로써 겸손을 보여 어떠한 권력에의 도전 의도가 없음을 보이는 것과 함께 무리(집단) 구성원들은 그 사냥꾼을 조롱하거나 비난의 표현을 하며 선제적으로 깔아뭉갠다는 점이다.

 

잠재적 알파의 등장을 저지하기 위한 집단의 행동 양식으로 조롱과 무시, 배제, 추방, 살해 등의 통제적 처벌 수단을 통해 집단에 대한 위협을 제거하는 것뿐만 아니라 일탈자를 친사회적 방향으로 되돌리고, 구성원 개개인의 정치적 평등을 강제하는 작은 도덕 공동체를 이루고 있었음을 설득력 있게 전개하고 있다. 결국 이들 수렵채집인 무리가 의도했던 것은 참된 평등과 절대적 평등을 추구한 것이 아니라, 개인의 자율성을 온전하게 내버려두는 상호존중이었다는 것이다. 일종의 '평등주의 기풍'이라는 의도적인 지도 메커니즘을 통해 집단내의 사회적 삶을 조절했음을 의미한다. 아마 반()경쟁적, 반권위적 삶의 형태가 소위 부족국가의 왕과 같은 전제정이 시작되기까지 오랜 시간 인간 조상들의 삶의 형태였음을 발견하는 것은 새로운 시대의 공동체 설계에 어떤 시사점을 던져준다 하겠다.

 

핵심은 이것이다. 인간에게는 약자이든 강자이든 지배 욕망이 바닥에 흐르고 있다는 것이다. 수렵채집인들은 이러한 인간 본성을 이해하고 있었으며, 개인의 자율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반권위적인 도덕적, 정치적 청사진을 내면화하고 있어야 함을 알고 있었다는 것이다. 즉 평등주의 청사진이 공동체에 일단 자리하게 되면, 이러한 비전에 반대하는 어떤 존재가 아무리 강력할지라도 그를 지배 또는 제거할 수 있게 된다는 점이다. 물론 이처럼 평등주의 사회들은 내구력이 있지만 동시에 공격받기도 쉽다는 점이다. 결국 평등주의 삶의 방식을 유지 지속시키기 위해서는 주의 깊은 헌신을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것이다.

 

고등 유인원인 침팬지 등 전제주의적 폭군 알파에 의한 무리의 생활은 팽팽한 긴장의 연속이다. 여기서 분기된 인간이 전제주의적이지 않다는 것은 넌센스라 할 것이다. 그럼에도 10만년 전 인간 먹거리꾼(수렵채집인)들은 평등주의에 기초한 무리의 삶을 정착 시켰으며, 사회적 지배 위계를 역전시켜 평범한 다수의 집단이 알파를 지배하는 평등한 개인이 가능케 했다. 사실 여기에는 역설이 존재한다. 경쟁과 허세, 싸움이라는 지배의 본성이 작동하지 않는다면 지배 위계의 역전이라는 평등주의적 사회적 행위가 필요할 이유가 없게 된다. 유전적 자기 이익을 추구하는 영장류의 경쟁은 회피할 수 없는 본성이다. 즉 지배와 복종이라는 위계적 경향은 인간 종의 특징이다. 다만 종속에 대한 반감 역시 선천적인 것이라는 점이다.

 

"인간 본성이 매력적이지 않게 만드는 성향이 있는, 다른 개인에게 복종해야만 하는 것을 피하기 위하여, 인간 본성이 매력적으로 만드는 성향이 있는, 개인적인 지배 가능성들을 포기한다. 이러한 독특한 '행동적 타협'이 인간의 정치적, 사회적 삶을 변형시킨다." - 370

 

복종 행위를 잘게 잘라보면 몇 개의 경쟁적 동기 요소들로 구성되어 있음을 알게 되는데, 대표적으로 바닥에 숨어 있는 지배 욕망, 그리고 두려움이다. 복종은 '양면 가치'를 가지고 있는데, 복속이라는 부정적 느낌은 지위 경쟁을 향한 경쟁적 기질에서 비롯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복속된다는 것에 대한 분개가 평등으로 이끄는 기질이다. 이 책의 파격성은 바로 여기에 있다고 할 것이다. 오늘의 진화생물학, 진화심리학, 인간생태학, 인류학 등에서 집단간 선택이론과 이타주의적 본성의 유전에 대한 논의가 어떤 결론에 이르렀는지는 모르겠다.

 

이타주의적 유전자가 유전자 공급원에서 유지될 수 있으며, 집단간 선택에 의해서 추가적으로 고양된다고 주장하고 있다. 평등주의가 인간의 정치적 본성으로 오늘의 인류에 내장되어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또한 위계적(지배와 복종) 본성 또한 유전되어 계승되고 있다는 것이다. 특히 하나의 유전자가 여러 개의 표현형 효과를 가질 수 있다는 다면발현(pleiotrophy)의 가능성 또한 수용되어야 한다고 역설한다.

 

인간의 정치적 본성을 이해한다는 것은 이 세계에 대한 도덕적 청사진을 꾸려 낼 수 있다는 의미가 될 수도 있다. 이 책을 읽게 된 직접적인 동기가 있다. 오늘 자본의 거대한 집적과 축적 시스템은 극단적 불평등의 중심적 원인이며, 나아가 제2 기계시대로 불리는 인공지능과 디지털 플랫폼 기반의 기술은 이러한 자본 권력의 첨예한 부상(浮上)을 가속화하고 있다. 또한 실업자의 점진적 양산과 부의 비대칭적 배분, 민주주의 가치의 지속적 훼손으로 인한 껍데기 민주주의만 잔존하는 형국이다. 이들은 인간의 자율과 존엄성을 지속적으로 건드리며, 궁극적으로 인간 평등주의의 근간을 파괴한다.

 

만일 새로운 인간 사회를 설계해야 한다면 과연 어떠한 형태가 되어야 할 것인가에 있어 지금까지 진화해 온 인간의 본성을 고려치 않고서는 1871년 파리 코뮌의 좌절이나 1894년 동학농민들의 새로운 삶의 단위로서 집강소의 실현되지 못한 인간 평등의 공동체를 그려낼 수 없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어쩌면 이 책은 인간 본성에 철저한 현실주의자였던 수렵채집인들의 평등주의 청사진을 통해 인류학적 순진함을 떨치고 새로운 정치적 청사진을 그리는 데 분명 어떤 가능성을 엿보게 해주었다고 말 할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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