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년 이상 책장에 손을 대지 않은 채 꽂혀있던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야릇한 제목을 한 상대적이며 절대적인 지식의 백과사전을 읽는 우연과 함께, 미스터리 장르의 소설책이 내 시선을 끌었다. ‘사토 기와무라는 작가가 쓴 테스카틀리포카(Tezcatlipoca란 작품이 독자들을 열광케 했다는 홍보 문장, 그리고 주술 자본주의토대에  칠흑같은 저승에 잠든 욕망들이 벌이는 피의 전쟁이란 표현은 당연 호기심을 불러일으켰다.

 

베르베르의 백과사전 98번 항목, 아스테카 사람들이 상상한 세상의 종말은 아즈텍 신화에서 다섯 번째 태양기인 현세에 앞선 네 번의 종말에 대한 간략한 신화를 담고 있다. 세계의 첫 번째 시기를 주관하는 신이 바로 테스카틀리포카. 연기나는 거울(Smoking Mirror)’이란 의미를 지닌 전능한 신이다. 그의 가슴에 달린 거울에는 우주의 모든 것이 나타난다. 인간의 생각과 마음을 포함한 세상일을 모두 알고 있는 신, 그래서 이 신은 주술(呪術)의 신이기도 하다.

 

이 신은 전능한 신()답게 별칭을 무려 360가지를 가지고 있다. 즉 모든 신의 속성을 지닌 하늘과 땅과 바다의 신이며, 인간 창조자이며, 온갖 생명의 기원이다. 아즈텍인 들이 이 신을 경외한 것은 물론이다. 부귀와 영화를 누리게 하다가 단숨에 모든 것을 빼앗기도 하며, 불화와 적의, 전쟁을 부추기기도 하는 신.

 

사토 기와무의 소설이 마약밀매 조직의 잔혹한 전쟁을 소재로 하며, 이제까지는 없던 피의 비즈니스를 시작하게 되는, 가장 추악한 자본주의, 그 검은 비즈니스의 내막을 상상을 초월하는 디테일로 그려내는 모양이다. 가장 강력한 주술의 도형인 마약 자본주의라는 소설의 주제를 드러내는 문장이 아주 적나라하고 자극적이다.

 

그런데 또한 우연인지, 의도된 맞춤인지 정치철학자 낸시 프레이저의 걸출한 역작, cannibal capitalism(식인 자본주의)좌파의 길이란 제목을 달고 번역되어 출간되었다. 프레이저는 "한계 없이 자본을 축적하고, 가치를 팽창시키려는 절대적 강박"을 내재하고 있는 자본주의 시스템의 비경제적 조건을 드러내며, "마치 전이되는 암처럼 도처에 전체 사회조직이 압도당할 때까지 인구 집단에 고통를 가하게 될 것이라고 자본주의 시스템 자체의 위기, 전 지구적인 파국을 회피하고 인류의 해방적 시나리오를 향한 행동을 만들어내기 위한 숙고이자 각성을 요청하고 있다.

 

주술의 신, 거울의 신인 아즈텍의 전쟁신 테스카틀리포카는 신의 의지를 넘어서려는 이들 자본주의의 마법진을 펼치는 인간들에게 과연 어떤 응징을 내릴까? ‘마약자본주의’, 그야말로 식인자본주의의 그 폭력적 욕망의 전형일 것이다. 아마도 사토 기와무의 소설, 낸시 프레이저를 함께 읽으며, 자본주의, 그 탐욕과 무자비함과 잔혹함의 속성,  그 태생적인 윤리의 결여에 대해 생각해보는 시간을 갖게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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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리노 멜랑콜리 채석장 그라운드 시리즈
장문석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2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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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어느 시기보다 지금의 한국 사회는 담론 빈곤의 시대로 여겨진다. 논쟁은 사라지고 자기와 다른 상대는 아예 존재치 않다는 듯이 퇴행적이고 독단적인 행태가 그 바보같은 얼굴로 모든 언로(言路)를 잠식하고 있다. 이 유아적 독재는 세계를 깊고 넓게 이해할 수 없기에 고작 얄팍한 전략과 기술적 술수의 말()아닌 자기만의 옹알이를 하고 있을 뿐이다. 그래서 소통이 불가능한 시대가 열리고, 바로 지금을 사는 인간들의 삶을 지탱하는 깊은 뿌리에 대한 그 어떤 논의도 실종되고 있다. 파쇼들의 발흥, 그리고 독재는 이렇게 시작된다.

 

이탈리아 북부 도시 토리노의 멜랑콜리를 말하는 이 책은 어쩌면 이 결여(缺如)의 뿌리를 역사적 성찰을 통해서 드러내고자하는 작업으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가져 본 적 없는 대상의 상실로 인해 느껴지는 슬픔이 멜랑콜리다. 자기 마음대로 하기 위해 다른 견해를 가진 존재들을 제거하여, 자기에 순종하는 인간들만 있는 세계를 파쇼 체제라 부른다.

 

파시즘이 일방통행하지 못했던 도시, 산업자본주의와 노동계급의 헤게모니 투쟁, 그리고 세계화 신자유주의를 겪으며 온갖 이데올로기의 상흔을 지니고 있는 토리노를 맴도는 멜랑콜리는 현재의 한국 사회를 휘감아 도는 멜랑콜리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바로 이 책은 이 멜랑콜리, 그 결여와 실패를 직시하여 현재를 인정하기 위한 애도 작업이다. 이 과정을 통과함으로서, 즉 결여의 뿌리를 이해함으로써 비로소 미래로 걸음을 내딛을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1970년대와 80년대의 한국의 정치권력 집단을 파쇼라 불렀다. 권력자의 의지와 다름은 곧 징벌의 대상이었으며, 사회 구성원은 권력에 순종하여 일사불란하게 움직여야 하는 전체주의적 독재가 지배하는 사회였다. 강렬한 자기 집착의 권력, 이들은 타자를 품을 수 없었으며, 자신들의 이익과 쾌락에 대한 그 어떤 상실도 참아내는 방법을 알지 못하는 집단이었다.

 

개인들의 소소한 자율적 행위조차 감시와 간섭, 체포와 감금, 고문의 대상이 되었으며, 인간의 존엄성이란 실체는 부인되는 사회였다. 이 비참한 사회에서 벗어나기 위해 민중들은 세대를 이어가며 30여년의 오랜 고통스러운 저항의 과정을 통해 타자를 자신의 품에 안는 법을 권력에게 가르쳤으며, 상실감을 인내하고 인간의 한계에 의연해지는 법을 인식, 체화토록 했다. 오늘날 우리들이 체감하는 인간의 삶에 대한 이러한 이해의 성숙과 인간 존재에 대한 존엄성과 자유에 대한 고양된 앎은 이렇듯 수많은 희생의 결과라는 토대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이 지난 시절에 대한 복기(復碁)는 잃어버린 과거에 대한 단순한 노스탤지어가 아니다. 지금 한국 사회에서 벌어지는 극단적 갈등을 새롭게 바라보기 위해서, 그래서 개인의 일상적 자유와 이 자유를 지키기 위한 조건을 생각해 보기 위해서이다. 어떤 개인의 소박한 자유는 엄청난 가시적 행위로 갑자기 억압받는 것이 아니다. 경제적 여유의 점진적 축소, 일자리 질의 악화, 다가온 위기에 스스로 대처할 힘의 부족, 언어에 대한 자의적 해석에 의한 보이지 않는 규제 감시와 압박 등처럼 언제 내몰렸는지 알지 못하는 사이에 그것은 개인들의 숨통을 조이기 시작하는 것이다.

 

지금 한국인들은 삶의 불안정성이 급작스레 증가하고 있다고 아우성이다. 경제적 부담의 가중은 정치적 순응의 강제와 직접적 연관성을 갖는다. 20세기 초 근대성의 물결 최()일선 통로였던 이탈리아의 북부 변방도시 토리노를 주목하는 것은 무수한 이데올로기의 각축장으로서 이를 수용하거나 갈등하며 그네들이 겪은 삶의 역사가 남기고 있는 실체들의 발견이 곧 우리의 현실 반성의 거울이 되어 줄 수 있는 까닭이다.

 

저자는 자유를 말한다. 이 자유는 물론 '개인들의 소박한 사적 자유(liberty;작은 자유)'의 가치를 소중하다고 말하고 있지만, 이 자유를 지키기 위한 자유의 전제, 작은 자유를 가능토록 하는 '큰 자유(freedom)'의 중대함을 또한 말하고 있다. 그것은 리버티가 위험에 빠질 때 등장하는 추상적 자유, 진정한 자유, 권리로서의 자유를 보장하는 자율성의 자유를, 위기의 순간에 스스로를 지킬 수 있는 힘으로서의 자유를 가리키고 있다.

 

혁명적 자유에서 혁명이 자유를 넘쳐서는 안 되고,

혁명적 자유는 일상적 자유를 돌볼 수 있어야 한다.” - 205

 

저자는 이러한 자유의 역사를 토리노라는 한 지역의 고유한 특성을 토대로 자본과 노동의 대립, 파시즘과 토리노 지식인들의 비타협적 비판의식을 역사적 맥락에 의한 이념적 계급적 관점을 넓혀 시선의 편협을 극복한 이해로서의 가치판단을 주장하고 있다. 이 역사적 과정에 등장하는 경제적 주체로서 피아트 자동차의 경영집단과 노동운동의 계급적 투쟁, 파시즘에 대한 양심적 거부의 지적 기반의 실체들의 실천적 행위에서 발견되는 자본의 내적 투쟁을 탐사함으로써 이들 무수한 갈등과 충돌 속에서 프리덤의 개념이 창출되고, 바로 토리노가 이 큰 자유의 요람이 되었음을 제시하고 있다.

 

저자는 피아트의 창립자이자 경영주였던 아넬리를 이념 중립적 자본가로 내세움으로써 포드주의의 대량생산 체제의 도입으로 성취한 경제적 부흥, 파시즘에 대한 저항, 새로운 이념형 공장(링고토 공장)으로서 사회주의 문화 모델, 생산자 문명의 신질서 창출이라는 미화된 자본의 이상, 즉 작은 자유는 큰 자유의 희생이 될 수 있다는 의미를 씌운다. 이러한 이해의 기반에서 피아트는 자본주의와 파시즘을 동일하게 해석되는 것을 지지할 수 없는표상이라 주장한다. 여기에 20세기 반파시스트의 대표적 지식인 고베티근대자본주의의 고독한 영웅으로 등장시키기까지 한다.


 


자유주의자였음에도 고베티의 나쁜 부르주아에 대한 가차 없는 비판은 계급적 차원을 비롯한 민족적 차원의 승화된 투쟁이었다면서 그람시와 그의 긍정적 접근을 민족적-민중적 차원의 투쟁이었음을 부각하고, 이러한 토리노의 지적기반이 산업도시 토리노를 상징하는 피아트의 경영 이념의 뿌리였음을 간접적으로 시사하기도 한다.

 

사실 이 민족적이라는 언어와 노동과 자본의 계급투쟁을 반파시즘이라는 시대적 산물의 출현에 대한 저항으로 희석시켜 민족적 민중적 투쟁으로 확대하는 논리는 동의하기 어려운 논증이다. 특히 민족이라는 영토적 환상, 자신들만의 순수한 혈통적 공동체는 자신과 다른 것과의 섞임은 불순과 타락이라는 바보같은 통념으로 이어지고, 타자를 배제, 폭력의 대상자로 낙인 찍는 배타주의라 할 수 있다. 고베티, 더구나 그람시를 민족주의자와 엮어 노동계급의 저항을 민족주의를 저해하는 행위로 바라보게 하는 시각은 어쩌면 의도된 반노동적 관점으로 이해될 수도 있다. 저자가 예시하듯 피아트의 생산 확장에 따른 남부지역 노동자의 유입에서 그네들이 겪게 되는 차별과 배제는 이러한 민족주의가 지닌 태생적 한계, 그 위악의 전형이라 할 수 있다. 이것을 단지 노동자 계급 내의 위계적 차등이나 차별의 문제로 인식하는 것은 곧 민족주의에 매몰된 당대 토리노 지식 엘리트들의 한계로 보아야 하는 것이 아닐까?

 

피아트가 이탈리아 국가경제의 30%를 차지할 만큼 국가 권력이 무시할 수 없는 경제적 권력을 지니고 있을 때, 저자가 말하는 권력과 기업자본의 틈새로서 독립성은 가능할 수 있으며, 또한 실제 현실적인 현상이기도 하다. 이것을 경영주체인 자본가의 리더십이나 이념적 자율성으로 이해하는 것에는 무리가 있다. 1969년의 뜨거운 가을로 표현되는 노동자 파업을 노동자의 방임적 노동적 해태(懈怠)로 인식하고 있는데, 이를 관료화된 노동자와 남부에서 유입된 신진 노동자의 갈등과 충돌의 산물로 읽어내며, 이러한 노동계급의 갈등을 방치하고 경영집단의 새로운 질서 상상’, 즉 자동화 및 생산 분산화 등 노동 체제의 변혁 도모를 야기한 책임이 노동계급에 전가되고 있는 인상을 받게 된다.

 

특히 공장을 벗어난 시내 집회, 행진으로 나타난 1980년 토리노 4만인 시위는 노동계급에게 조종을 울린 검은 화요일로 기록되고 있는데, 노동자 투쟁에 염증을 느낀 시민들이 가세한 반 노동투쟁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결국 경영집단이 노동 권력에 대한 우위를 점하게 된 사태인데, 저자가 기록하고 있듯, “4만 인 행진이 피아트의 주도면밀한 계획 아래 이루어졌음을 암시한 피아트 최고경영진 가루초의 말처럼 자본이 계급투쟁을 주도한다는 사실만 입증할 뿐이다. 이 사건의 중요성은 노동계급의 문화적 패배와 권력 투쟁에서의 패배를 상징한다는 말처럼 대중적 자기 계급 인식에 대한 위기성을 두드러지게 보여준 사태로서 바라보게 한다.

 

이러한 부분적 시선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나는 저자의 자유주의적 관점과 사회주의적 입장의 동행 가능성에 대한 제의, 그 연구 노력에 공감한다. 특히 고베티의 도시라 불릴 만큼 토리노의 지성을 대표하는 고베티의 자율을 해독함으로써, 자유주의=중간계급(유산자), 사회주의=노동계급이라는 획일적이고 전통적인 통상적 인식, 다시 말해서 냉전적 진영 논리의 거부로서 지향의 발견은 오늘의 우리네에게 중대한 시사점을 제공한다. 복종과 순응, 무기력과 절충성이 지배하는 온갖 기회주의에 대항해 진정 품위있는 이탈리아를 추구했던 비판적 용기, 기성 규범에 대한 수동적 순응적 수용을 벗어나 스스로의 법()을 세우는 자율적 노력의 주창은 바로 지금 한국 사회의 구성원인 우리 민중들에게 요구되는 가치일 것이다.

 

차이와 모순을 두려워하지 않고, 또 체계와 원칙에 집착하지 않고

서로 다른 것들을 아우르는 대범함이 필요하다.” -217

 

작지만 강했던 토리노의 옛 사보이아의 귀족적 고귀한 전통이 파시즘의 반동적 보수적 민족주의에 대한 비판적 거부가 가능토록 했음은 소위 니체가 말하는 힘에의 의지, 곧 내적 강인함, 탁월함의 고귀성을 읽도록 한다. 아마 저자의 견해에 대해 오독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자유주의자 고베티와 사회주의자 그람시의 계급 갈등에 대한 공감적 유대가 가능했듯, 서로 다름의 섞임, 배타성이라는 편협과 부정성의 극복은 동일자의 순수성이 아니라 다른 것들이 서로 밀고 들어가 뒤섞이면서 새로운 변화의 개체로 재탄생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인간의 대상화, 사물화, 상처 입은 인간과 사회에 대한 짙게 드리워진 멜랑콜리는 아마 저자가 말하는 대범성, 용기라는 애도의 과정이 필요한 것일 게다. 오늘 우리 한국 사회가 빠져있는 갈등과 충돌, 그 적대의 수렁에서 빠져나오기 위한 사유로서 20세기 험난한 이데올로기 실험장이었던 토리노의 이 역사적 탐사는 귀중한 전범이 되어 줄 수 있을 것이다. 본성상 인간의 세계는 멜랑콜리 할 것인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우리는 이 적막한 정서를 떨쳐내기 위해 발버둥치는 것 또한 본성일 것이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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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현수동 - 내가 살고 싶은 동네를 상상하고, 빠져들고, 마침내 사랑한다 아무튼 시리즈 55
장강명 지음 / 위고 / 202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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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고 싶은, 아니 삶을 사랑하며 살아 갈 수 있는 동네에 대한 바람의 글이라 해도 될 것 같다. 삶에 대한 시선이 물론 같을 수 없지만, 소설가 장강명이 함께 이루고 싶은 동네는 전망 좋고, 자전거 타기 좋으며, 산책로가 있고, 개들과 새들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으며, 도서관이 있고, 역사와 설화까지 있으면 금상첨화라고 말하는 곳이다.

 

이에 이르기 위해 그는 추리고 추려 역사에서 인물, 전설, 상권과 도서관에 이르는 일곱 가지의 더 나은 세상을 위한 현실 가능한 궁리를 펼쳐놓는다. 그것은 삶을 사랑 할 수 있게 해주는 동네라 정의 하는 듯하다. 제목에 표기된 현수동(玄水洞)’은 실제 행정 명칭에는 없는 곳이지만, 마포 광흥창역 일대라는 구체적 위치가 있는 동네의 가상 이름이다.

 

작가는 밤섬을 포함하여 마포구 현석, 신수, 구수, 서강, 하중, 창전동 일대를 가상동네인 현수동이라 부른다. 30대 중반 6년 동안 살며 그 일대를 사랑하게 된 사람의 지역 찬가일 수 도 있겠다. 그럼에도 이들 동네가 지닌 일곱 가지 궁리를 따라가다 보면, 광흥창역 일대가 아니어도, 보통 사람들의 평범한 삶을 기리며, 바로 그 자체를 소중히 여기는 사람들이 있는 곳이면 그 어느 곳이나 현수동이라 불러도 될 것이다.

 

이들 궁리를 말하는 각각의 제목은 작가에게는 없는 것이거나 두려워하고, 가본 적 없고, 질색하며, 모르는 사람이라는 수식어가 붙어있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삶을 충만하게 하는 것들이란 사유가 담겨있다고 할 수 있다. 이를테면 미신을 질색하지만 하소연할 데 없는 사람들의 기원을 들어주고 그네들을 위무하는 마을 수호신을 모아놓은 부군당과 도당굿 전승의 가치를, 그 보존을 말하듯이.

 

또한 도시 서민과 빈민의 무참한 죽음을 야기한 와우시민아파트 붕괴 현장 어디에도 위령비가 없으며, 한국 사회가 이런 죽음들을 적극적으로 지워버리려 함을, 마치 일어나지 않은 척 하는 인간에 대한 무관심을 발견하며, 동네의 역사, 동네를 이루었던 대장장이, 메주 말리는 여인, 양 치던 소년 등 보통 사람들의 동상과 목상이 보행을 방해하지 않으면서 눈을 마주칠 수 있는 있는 곳에 편하게 설치된 곳을 상상한다.


 


이름도 낯선 조선조 양반의 아호는 남아 지명이 되고, 정작 지배당하고 살던 대부분을 차지하던 갑남을녀들의 삶의 현실은 지워버리는 그런 위계와 권력의 언어가 더 이상 주장되지 못하는 세상을 향한 궁리이기도 할 것이다. 지명이나 동네 이름에 전승되는 이야기들은 그 완성도가 심히 떨어지거나 아귀가 잘 맞지 않는다고 한다. 바로 이러한 어설픔과 모순의 이야기 자체가 피지배민인 백성들의 신산한 삶의 비극성의 반영이며, 꿈같은 이야기로나마 타협하려 했던 그네들 심정의 표현이었기에 부득이한 불완전성, 미흡한 모방이었으리라는 것이다.

 

권력과 자본의 폭력이 행사된 1968년 밤섬의 폭파 제거 행위는 여의도 개발을 통한 막대한 사익을 챙기기 위해 홍수 방지 명분으로 강행된 사건이다. 이로 인해 오랫동안 이곳을 거주지로 살아가던 사람들이 쫓겨났다. 그렇게 사라졌던 밤섬의 남아있던 수면 아래 암석에 해마다 토사가 쌓여 이제는 폭파 전보다 큰 섬이 됐다. 그리곤 생태경관보호지역으로 지정되었고, 람사르 습지로 등재되기까지 하며 보호되는 장소가 되었다. 인간들의 몰염치에 의한 파괴는 자연의 힘, 시간의 힘에 의해 되돌려진다. 오만한 한 줌의 권력도 존재할 수 없는 세상을 꿈꾸는 것이 결코 불가능한 것이 아니잖은가!

 

작가는 공공도서관을 동네의 커뮤니티 공간이자 자유롭게 타인의 사상과 마음을 읽고 나누는, 꿈꾸는 이상적 마을의 필수 시설로서 역설하기도 한다. 그리곤 부록인 초단편 소설인 현수동의 아침주인공인 강아지 새롱이의 산책에서 마주하는 평온한 일상의 모습을 통해 반려견과 함께 자유로운 산책이 가능한 지역을 꿈꾸기도 한다.

 

사실 공동체에 대한 이해에는 항상 갈등이 따른다. 어찌 획일적으로 동일한 취향과 요구만 있겠는가. 공공도서관을 이용하며 정신의 교류를 하는 동네라면 슬기로운 협의가 가능할 것이다. 가벼운 마음으로 작가가 전하는 현수동의 각 장소에 깃든 설화에 귀 기울이고, 도시의 미래에 대한 소견을 들어보며, 우리의 동네, 우리들의 세상은 어떤 것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상상의 나래를 펴보는 시간이 된다. 아마 그의 궁리들은 보통사람들의 이해를 그리 벗어나지 않는 푸근하게 공감하며 읽어나갈 수 있는 그런 희망의 이야기들일 것이다.

 

아 참, 작가는 그의 기 발표되었던 뤼미에르 피플의 속편으로 밤섬 새 당주가 등장하는 모험의 이야기로, 가제(假題) <시간의 언덕, 현수동>을 예고하고 있다. 발표된 많은 단편과 장편 소설에는 현수동이 직접 또는 간접적 이미지로 등장하고 있다고 한다. 아마 새해 벽두를 연 이 책을 읽고 나면 작가의 인간미와 친근함 탓에 그의 소설로 다가가게 할지도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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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존재론적 형상을 모두 품고 있는 도시라면 지나친 수사가 될까? 에로스와 타나토스의 두 얼굴을, 그 이중적 내재성을, 인간의 속성이란 그러한 것임을 그 자체로 투영하는 장소에 대한 불가피한 이끌림일지도 모른다. 이 도시에 대한 속설은 밀애와 이별이라는 두 상반된 결과를 발설하곤 한다. 낯선 이들을 사랑의 열정에 휩싸이게 하는가하면 연인들을 갈라서게 만드는 곳, 도시의 여기저기를 가르는 소()운하와 발목까지 물이 차오른 보도, 그 거울 같은 표면위에 불을 밝힌 상점의 간판들, 허영을 부추기는 주위의 장식과 기둥과 벽공들의 아름다움, 그리고 눅눅하고 춥고 좁은 안개 낀 골목길은 인간을 비논리적 동물적 욕망에 침잠하게 한다.



 


프랑스의 젊은 시인 뮈세가 연인 상드를 졸라 한없는 밀애를 기대했던 곳, 그에게 베네치아는 자신과 닮은 욕망의 공간, 열정의 대기였을 것이다. 여기에는 이성(理性)의 냉철이 자리 잡아서는 안 되는 곳이었다. 오갈 데 없는 정신은 시인에게 한 편의 이야기를 쓰게 한다. 방탕한 정열을 한껏 태우는 쾌락의 게으름이 흐르는 세계를.

 

사람들의 눈을 피해 안개 낀 운하 위를 미끄러지듯 유영하며 밀애의 장소로 다가가는 곤돌라는 그야말로 에로티시즘과 일체가 되어 연인을 기다리는 폭발할 것만 같은 부푼 연심, 그 혼돈의 설렘을 감각할 수 있을 만큼 선명하게 각인할 수 있게 한다. 뮈세는 단편 티치아노의 아들에서 자신의 반영인 주인공 피포와 베네치아 최고의 여인 베아트리체 도나토와의 사랑을 그려낸다.


 



최고가문의 상속녀이자 미망인인 귀족 여성의 사랑의 헌신은 연인의 잠자는 재능의 회복에 대한 희망찬 기대다. 나는 베네치아를 떠올리면 미로같은 좁은 골목길, 미궁(迷宮)에서 욕망의 제물을 기다리는 미노타우로스의 이미지와, 이성(理性)과 사랑의 끈을 상징하는 아드리아드네의 실이 내 지각에 재생된다. 길을 잃지 않고 목적을 성취토록 돕는 실, 뮈세가 그린 주인공은 이 실을 끝내 놓지 않으면서도 자기 열정의 자유까지 움켜쥔 인물을 만들어내고 있지만 현실의 삶은 인내 할 수 없을 것이라 내게 말한다. 내 안의 미궁에 웅크린 욕망 덩어리를 인지하기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테세우스는 아드리아드네의 손을 놓음으로써 자멸하지 않았나!

 

이 한 토막의 이야기(뮈세의 소설)는 사랑을 소유하려한 천재 바이올린 장인의 이야기를 읽고 연상 작용이 촉발된 것인데, 장인(匠人)은 첫눈에 순수하고 신적인 목소리의 여인을 향한 사랑에 빠져들고, 그녀의 목소리를, 그녀를 소유하기 위해 혼신의 노력을 기울여 흑단의 바이올린을 제작한다. 그것은 예술의 지고한 고뇌와 절망적 대비를 통해 사랑과 예술의 존재와 소유 양식에 대한 물음으로 이어지며, 인생의 의미를 되뇌게 하는 작품이었다. ‘막상스 페르민검은 바이올린은 이 장인의 주검을 실은 채 망자의 섬인 산미켈레(San Michele)’ 묘역을 향해 떠 있는 검은 곤돌라의 정경을 묘사하고 있는데, 그것은 내게 기억을 파헤치고 상상을 사방으로 펼치게 했다. 이 글은 이 장면으로 비롯된 소박한 단상이다.

 

상여를 실은 검은 곤돌라 ... 베네치아에 비가 내렸다. ...물방울들이 대운하 위에서 내는 소리. 곤돌라의 허리를 때리며 찰랑이는 물의 소리. 이따금 건물들 사이를 지나며 바람이 우는 소리만이 들렸다.       - 막상스 페르민 , 검은 바이올린, 난다 2021.7

 

이 장면은 상반된 감응으로 두 문인에 의해 써지고 있는데, 시인 조지아 브로드스키베네치아의 겨울 빛에서 물 위를 미끄러져 가는 그 길에는 유독 에로틱한 면이 있다며, 고르게 옻칠한 듯한 검은 수면과 완벽하게 합을 이루는 요소들의 에로티시즘을 발견한다. 이와 달리 소설가 토마스 만베네치아에서의 죽음에서 변치 않고 전해 내려온 이 이상한 배는 ...관처럼 보일 정도로 색깔이 너무 특이하게 까맣다. ...그것은 범죄적 모험을 생각나게 할뿐더러, 더욱이 죽음 그 자체같다며, 곤돌라의 타나토스적 아름다움을 묘사하고 있다.


 


사실 타나토스는 에로스의 다른 이름이라 할 수 있다. 황금 화살과 납 화살, 사랑과 생명의 거부, 에로스의 폭주는 타나토스로 탈바꿈하며 존재를 뒤바꾸기 일쑤인 것처럼 우리 인간 삶의 실체이다. 이중성, 태생적, 즉 존재론적으로 이 양면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는 우리는 미궁 속 미노타우로스와 테세우스의 끊임없는 투쟁의 존재자이다.

 

베네치아, 황금 빛 햇살이 튀어 오르는 수면과 수세기 동안 변함없이 인간의 시원적 모습들이 도처에서 존재를 환기케 하는 곳, 이 존재 반영의 도시는 그래서 사람들을 사랑에 도취케 하고, 도취된 인간들은 그 열정에 휘말려 가까이 있는 연인을 잊는다. 사랑과 이별의 도시, 에로스와 타나토스의 도시, 제어되지 않는 욕망과 이성의 실이 함께하는 도시, 베네치아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문학과 예술이 그치지 않는 이유일 것이다. 올 여름 가보게 될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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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화, 치유, 인간 - 삶이 흔들릴 때 신화가 건네는 치유의 말들
신동흔 지음 / 아카넷 / 202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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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네 마음은 항상 무엇인가로 들끓는다. 그것은 기쁨과 행복의 충만한 끓음일 때도 있지만, 무기력과 두려움, 슬픔과 공허의 혼란으로 내몰림이기도 하다. 내적 평화와 복락을 이루기란 얼마나 힘겨운지, 삶의 시선을 새롭게 일신하기에 너무도 고달파 좌절과 포기, 분노와 공격성으로 전락하기는 또 얼마나 쉬운지, 내 존재의 가없는 흔들림에 고통스러워하는 것이 바로 우리 인간들이다.

 

이 책은 바로 이러한 우리네에게 한낱 이야기로서의 들려지던 신화와 전설, 설화로부터 우주자연의 섭리, 우리 안의 선과 악, 힘과 가치에 대한 '자기서사(story-in-depth of self)'를 발견케 하여 내 안에 공존하는 본원(本源)성을 목격토록 견인한다. 신화가 품고 있는 서사 속에서 인간의 이면적 심층에서 삶을 움직여 가는 존재의 본질을 통해 삶의 실체를 목도함으로써, 깊이 잠들어 있는 나의 내적 실존(實存)을 깨워지금의 나를 돌아보고 새로운 삶의 가능성을 사유토록 하는 것이다. 신화는 우리 존재의 본원을 비추는 마법의 거울이라는 것이다.

 

이것을 저자 신동흔 교수는 창조, 자연, 영웅, 애정, 생사의 다섯 신화로 구분하여, 존재의 시원, 그리고 세계와 나와의 관계, 인간적 삶의 한계와 그 극복을 위한 투쟁, 세상과 타자와의 연결과 확장, 삶과 죽음에 대한 이해를 어떻게 우리의 서사로 수용할 수 있는 지를 명상케 하고, 삶의 치유로서의 서사로 이해할 수 있는지의 여정을 안내한다.

 

한국의 신화와 전설은 물론 동서양을 막론한 세계의 신화를 오가며 대체 인간의 본원이란 무엇이며, 창조와 자연의 신화로서 그것들은 우리와 우주자연의 섭리가 어떻게 연결되고 상호 교섭하고 있는지를 깨닫게 한다. 또한 영웅, 애정, 생사의 신화에서는 인간적 존재로서 서사를 바라봄으로써 역동하는 천변만화의 세계와 어떻게 투쟁하고 초극함으로써 내 존재의 거듭남의 길을, 생명적 섭리를, 존재적 숙명을 헤쳐 나갈 것인지를 깨우치게 돕는다.

 

아마 이 책의 덕목은 거의 절반을 차지하는 한국의 신화를 기반으로 우리의 오랜 이야기를 통해 를 돌아 볼 수 있음에 있을 것이다, 물론 잘 알려진 이집트와 그리스, 북유럽의 신화가 또 다른 절반을 차지하며 미처 발견하지 못했던 우리들의 실체, 그 자화상을 통해 삶의 갈래길에서 어느 길을 걸어야 할 지에 대한 신선한 이정표를 발견 할 수도 있다. 인간 존재를 비롯한 우주 자연의 창조에 대한 신화는 서양의 것만이 있는 것이 아니다. 제주 창세 신화 <초감제>’가 있으며, 함경도 구전 신화인 <창세가>’도 있다. 거대한 창조신 미륵이 땅과 하늘이 뭉쳐진 혼돈의 세계를 분리하여 기둥을 받쳐 하늘을 만들고, 땅을 만든 이야기, 그리고 하늘을 향한 축원을 통해 내려진 생명 금벌레, 은벌레라는 원초적 생명체로부터 햇살과 이슬, , 바, 곡식과 열매 등 온갖 자연의 기운을 취해 인간을 만들어 낸 이야기다.

 

수성(獸性)을 지닌 미력한 물질성(物質性)의 존재인 벌레가 맞물린 인성(人性), 세상 만유와 연결된 존재인 바로 라는 존재는 과연 물성을 쫓는 존재인가, 신성(神性)을 쫓는 존재인가를 묻게 된다. 한편 우라노스에서 크로노스로 다시 제우스로 야생 자연의 폭력성, 신들의 투쟁사로부터 세계 질서 체계의 변화를 반영하는 인간 존재의 운명적 서사를 길어 올리고, 우리는 창조적 파괴, 죽어야 다시 태어날 수 있음의 그 근엄한 우주적 질서, 자연의 본성으로부터 내 존재의 살림이란 무엇인지를 반성적으로 사유할 수 있게 되기도 한다. 대홍수 신화는 부조리와 타락으로 퇴행하는 인간에 대한 거듭남의 서사로서 동서를 막론하고 존재한다. 우리에게는 나무도령 이야기로 씻김, 재탄생의 신화가 전해져 온다고 한다.

 

그 내용은 제 욕심만 찾는 사람들로 가득한 세상에서 본래의 자연성을 지키고 있던 유일한 존재인 나무도령만 대홍수에 살아남도록 하였던 신성을 어기고 물에 휩쓸려 죽어가는 소년을 구해 주었으나, 바로 그 소년이 나무도령을 배반하고 자리를 차지하려는 재앙으로 씻음과 재창조가 완수되지 못한 세계가 계속 될 수밖에 없음을 이야기한다. 바로 지금의 세계는 선한 생명의 세계와 욕망과 배반의 세계가 공존하고 있는 세상이라는 것이다. 우리 안에는, 우리들의 세계는 이 둘이 공존하는 것이라는 가르침일 것이다.

 

나는 지금 어떤 삶을 살아가고 있는 존재일까? 그리고 지금 우리들은 어떤 세계, 혹여 대홍수의 물결에 접어든 세계를 살고 있는 것은 아닌가를 반성해야 하는 것은 아닐까? 어쩌면 바로 지금, 우리는 깊은 침잠과 재탄생의 시간을 가져야 하는 것은 아닐까? 문명이란 이름의 광기, 이 방주, 혹은 열차는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일까? 심란한 시대다. 이처럼 우리는 매양 나는 대체 누구인가를 묻는 존재다. 왜 여기에 있는 거지? 대체 내 앞에 길은 있는 건가? 라는 물음이 그치지 않는다. 황막한 세계에 속절없이 휘둘리는 나는 이 부유가 근심스럽기 때문일 것이다. 존재의 뿌리를 묻는 신화를 원형적 신화라 부른다.

 

<원천강 본물이>라는 신화가 있다. 산 사람은 갈 수 없는 본원적 세계, 그 근원의 강이 원천강이다. 주인공 오늘이가 이 존재의 뿌리를 찾아서 원천강을 찾아가는 여정의 이야기다. 여정에서 만나는 무수한 존재들은 자신들이 처한 삶의 곡절에 대한 물음의 답변을 오늘이에게 부탁한다. 여의주를 세 개씩이나 입에 물었으나 용으로 승천하지 못하는 이무기에서부터 그저 책만 읽는 두 남녀 등등, 자기 자신을 돌아보지 못하는 존재의 우매함, 여의주는 입에 한 개면 족하다. 세 개가 필요 없는 것인데, 그 욕망의 무거움을 내재하고 있는 바로 자신인 여의주를 놓지 못하는 것이다. 스스로 빛나고 가벼워지기 위해서는 두 개의 여의주를 입에서 뱉어내야 하는 것, 꽃이 떨어져야 열매가 맺고 다시 새로운 꽃이 피어나는 그 단순한 자연의 이치를 우리는 망각하곤 한다. 가벼워지기. 오늘이가 만나는 존재들의 물음이 곧 존재에 대한 답이다. 우리에게 이러한 신화가 있다는 것을 말지 못했다. 새로운 앎이다.

 



영웅?, 세계에 결연히 맞서서 틀을 바꾸고자 한 예외적 인간들, 불굴의 투지와 도전을 통해 성취한 과업이 세상에 기여함으로써 집단의 존숭 대상이 될 때, 우리는 일컬어 영웅이라 부른다. 나는 이 적극적 힘과 용맹보다는 불굴의 투지와 도전성에 더욱 매료된다. 아마 코린토스의 왕이었던 시시포스가 지옥이라는 거칠고 험한 어둠의 세상에서 끊임없이 반복적으로 굴려 올리는 그 반복된 형벌을 수행함으로써 신적 질서에 도전하는, 세상의 부조리에 맞서 포기하지 않고 살아있음을 증명하는 그 맞섬이야말로 바로 영웅이라는 생각 때문이다.

 

나는 도망치고 싶었던 반복된 과업들에 그 얼마나 진저리를 쳤던지 모른다. 이제 그것이 형벌이 아님을 안다. 삶이란 본디 그런 것임을, 나아가 그것이 삶의 축복임을, 살아서 움직일 수 있음, 그 자체로 강복(降福)임을 이젠 안다. 노예적 삶이라 비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인간 삶의 양태의 그 다양성은 그리 간단히 재단 할 수 있는 것이 아닐 것이다.

 

영웅에 대한 신화 하나를 더 소개하련다. 북유럽 신화의 신이자 영웅인 오딘과 토르, 요즘 신세대가 열광하는 날 것으로 다가오는 그 야생적 면모의 주인공들이다. 망치 묠니르를 휘두르며 자연에 맞서는 길을 여는 존재. 우리에게 이 토르같은 신이 있다. 제주 작은 마을의 신이자 영웅인 궤네깃또, 대륙을 완벽하게 제압하고 제주 구좌읍 김녕마을의 신이 된 존재다. 너무 작은 곳의 신이라고? 신화의 사유 체계는 모든 곳이 세상의 중심이다. 그에게는 바로 그곳이 우주의 중심이었을 뿐이다. 자연에 맞서는 것은 고난의 여정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새로운 길을 위해 때론 맞서 싸워 이겨내야 한다. 우리의 신화를 발견케 하는 이 책의 미덕에 자꾸 감사하는 마음이다. 아마 더 깊은 독서로, 새로운 앎의 세계로 나가는 초석이 될 것 같다.

 

 

이제 오늘의 우리들 행위를 빈번하게 자극하는 어휘, ‘욕망에 대한 신화다. 나는 미노타우로스와 테세우스, 아리아드네가 열연하는 미궁(Labyrinthos)에서의 투쟁을 나의 서사로 품고 있다. 그래서 안개 낀 좁은 골목길의 베네치아를 사랑하는 지도 모르겠다. 크레타 섬의 왕 미노스의 아내 파시파에로 인해 야기된 사연 많은 신화다. 파시파에와 소의 교접 결과가 반인반수의 괴물 미노타우로스다. 즉 인간의 범람한 욕망이 만든 산물, 소유욕과 성욕, 지배욕이 합쳐진 욕망 덩어리다. 테세우스는 이 욕망을 제압하러 나선 존재다. 미노타우로스를 죽여 승리하지만 그는 조력자인 아리아드네의 손을 놓음으로써 자멸한다.

 

아리아드네의 실, 이성의 끈이자 사랑과 인간적 연결을 놓는 것, 즉 자기 안의 라비린토스를 소홀함으로써 무너지게 되는 비극적 신화다. 나는 이 신화에서 영웅과 이성과 타자와의 관계, 그리고 내 안의 선악의 이중성을 반성적으로 돌아보는 모범으로 재생해 보곤 한다. 길을 잃고 헤맬 때면 내가 망각하고 있는 것, 외면하거나 소홀히 하는 것은 무엇인지, 신화는 이렇듯 자기 안의 실제를 반추케 함으로써 내적 존재를 확장해 가는 길잡이, 혹은 치유의 서사가 되어준다.


이 책을 읽게 된다면 아마 저마다의 현실적 상황에 따라 더욱 시선이 가는 장을 마주하게 될 것이다. 지금 사랑하는 연인과의 애정에 고심하고 있을 수도 있으며, 미래의 갈래 길에 서서 삶의 운영을 고민하고 있을 수도 있으며, 삶과 죽음, 필연적으로 도래할 죽음에 대한 상념과의 연결성에 대한 사유에 빠져있을 수도 있다. 어쩌면 이 모든 현실적 고뇌를 새로운 거듭남으로 인도할 단서를 발견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독자들은 지면을 가득 채운 한국을 비롯한 동서양 신화들을 거닐며 자기만의 서사를 분명 발견해 낼 수 있을 것이다.

 

자기 안의 나와 싸워야 한다. 우리는 우리들 각자 고유한 서사를 지닌 존재자들이다. 하늘에 배반당하고 땅에 치여 휘청대기도 하고, 소유 욕망에 시달리며 더 큰 결여와 불화가 만든 문제에 부딪쳐 절망하고 있을 수도 있다. 또한 자신에게는 죽음이란 영원히 도래하지 않을 것처럼 오만과 폭력으로 점철된 삶을 살고 있을 수도 있으며, 나이를 먹었으나 내적으로는 어린아이인 자녀서사에 갇혀 유아적 퇴행의 삶으로 타인을 고통스럽게 하고 있는 존재일 수도 있다. 에로스는 황금 화살과 납 화살 두 개를 지니고 있다. 사랑과 사랑의 거부, 생명력과 스러지는 생명을 상징하는 삶과 죽음의 이중주’, 그는 곧 죽음의 상징 타나토스이기도 하다. 이처럼 우리는 결코 선한 존재도 악한 존재이기만 한 것이 아니다. 에로스가 선을 넘어 폭주하면 부지불식간에 타나토스로 탈바꿈하여 공격적이고 공허로 그득한 존재로 뒤바뀌기 일쑤인 것이 우리들이다


책은 한편으로는 황당하기 그지없고, 다른 한편으론 지엄하고 숭고하기 이를 데 없는 신화에 친근하게 다가가서 자기만의 서사를 발견하게 이끈다. 세계의 신화를 거울삼아 자기서사의 속성과 좌표를 살펴보고 나아갈 방향과 목표를 찾아보고자 하는 이들, 내 안의 나를 찾고자 하는 이들에게 이 저술은 분명 나를 만나고 그 길을 이끌어 줄 것이다. 모처럼 이 책에 감히 추천한다는 문구를 남기고 싶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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