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인식과 진리의 세계, 그 상상력의 시공(時空) 속으로

우린 이 세계를 온전하게 말 할 줄 모를뿐더러, 사실 아는 것도 별로 없다. 더구나 우리 인간들이 이성이란 것으로 합의한 논리나 법칙, 제도는 이 세계의 지배 질서가 은닉하거나 배제시키고 있는 근원을 표현하지 못하거나 하지 않는다. 그래서 우린 허구의 소설, 문학의 세계가 펼쳐내는 상상력에서 이러한 한계를 넘어서 본질, 대상에 도달하려는 욕구에 시달리고, 현실에서 부재하지만 상상 속에서 실재하는 인식 가능한 세계로 그 결핍을 충족한다.

언어라는 기호가 우리의 생각을 얼마나 편협하게 묘사할 뿐인지 우린 잘 알지만 그 배제와 불완전함을 넘어서는데 미숙하다. 이러한 언어의 불완전성에 활기를 불어넣고 원래적 지시세계, 기의(記意)의 세계로 가는 동력이 바로 상상력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상상, 환상의 낯선 시간적 공간적 세계, 현실과 전혀 다른 새로운 질서의 세계를 재구축하는 하는 것은 이 세계가 정말의 실재이며 진실이고 본질인가 하는 점에 대한 반발이기도 할 것이다.
이러한 사고에서 출발한 것, 즉 단절의 세계인식이나 언어가 확보한 독단론을 거부하고, 직선적 시간성의 교란이나 인식의 파편화, 현실과 가상을 전복하여 독자적인 세계를, 모든 사물의 존재 방식을 재질서화 하고자 하는 것은 분명 보다 풍부한 세계의 인식에 대한 당위적 관점을 제시해 준다.

이러한 작품 세계를 구축한 중남미작가 계열의 작품들을 바로‘마술적 사실주의’라 하는데, 이는“환상, 동시성, 파편성, 인과관계의 파괴 등과 같은 시간형식과 더불어 소설 행동 공간을 영화의 콜라주 기법과 같이 여러 층위를 중첩 사용”하여 세계의 다양한 관점을 제시하고, 특히 “환상과 현실, 심리적 실재와 현실성, 역사와 허구 등의 경계 해체를 통해 상호 교환되는 특성을 공유”하는 특징을 지닌다고 한다. 이들의 대표적인 작가로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나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께스’,‘이탈로 칼비노’를 떠올리면 자연법칙이나 논리, 합리성의 지배와 완전히 결별하고 새롭게 창조된 세계의 인식론적 망설임의 순간을 기억 할 수 있을 것이다.

나 역시 이들의 작품을 접하면서 초현실주의와 혼동하곤 했는데, 초현실주의는 경이적, 아름다움을 인간 정신의 순수한 상상력에서 찾는 반면에, 마법적 사실주의는 우리들이 몸담고 있는 일상적 현실에서 출발하고 있다는 차이점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 즉 자연적, 사회적, 역사적, 심리적 현실에서 출발하여 창조적 상상을 통해 환상에 이르도록 가공되는 것이 마법적 사실주의라는 것이다. 새로운 것은 이미 존재하는 것들을 조합하거나 그 모든 것을 총합한다고 하더라도 결코 설명될 수 없다. 그러니 인간의 감관이 지각하고 통합할 수 있는 한계를 초월한 상상이 창조한 세계, 그 가공의 미학적 현실은 우리의 미숙함, 불완전함, 부조리함에 대한 비판이요, 반성의 자극제며, 겸허한 인류의 새판짜기이다.

1950년대부터 비평가들에 의해 본격적으로 조명되기 시작한 이러한 계열의 작품은 이후 걸출한 작가들에 의해 폭넓게 수용되어 현대 문학의 중요한 방법론으로 사용되고 있다. 이 계열에 포함되고 있는 작가들로는 보르헤스나 마르께스, 칼비노는 물론‘코르타사르’‘토니 모리슨’, ‘이사벨 아옌데’, ‘밀란 쿤데라’, ‘파트릭 쥐스킨트’, ‘오사리오 끼로가’, ‘실비아 오깜뽀’, ‘존 업 다이크’, ‘살만 루시디’등이 거론 되는데, 아마 이들의 작품을 읽어본 독자들은 고개를 끄덕일 것이다. 이들처럼 우리가 합의한 논리의 바깥에는 어떤 세계가 있는지를 이해하려는 작업은 감성과 이성의 더없는 균형과 조화를 만들어 주고 풍부하고 열정적인 삶을 살아가는데 도움을 줄 것 이다. 마법적 사실주의, 환상의 문학에 다가가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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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구보씨'는 대체 누구인가? 

우리문학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새로운 발견이 아닐지도 모르겠으나, 내겐 무척이나 흥미로운 현상으로 여겨진 것인데, ‘소설가 구보씨’에 대한 것이 바로 그것이다. 소설가 구보씨가 등장하는 소설, 시 등 문학작품은 물론 구보씨의 소설 속 동선을 정리해 놓은 책이 나올 정도이고, 나아가서는 “좌절한 의식”을 대표하거나 ‘박태원’의 소설 속 시대인 일제강점기의 무력한 대중의 감성이나 시대상을 상징하는 기호가 되어 사용되기까지에 이르렀음을 보게 된다. 

이러한 상황의 기원이 된「소설가 구보씨의 일일(1935년 발표)」이라는 박태원(1909~1986)의 단편소설은‘소설가가 주인공인 소설’의 효시로 알려져 있다. 소설가 구보씨의 매일이라는 것은 무수히 찍어낸 하루처럼 반복의 반복을 이루며, 무목적성의 하루를 사는 인물이다. 물론 소설의 주제는 다분히 시대의 불온성이나 불의의 사회가 지닌 한계성에 대한 탐험이라 할 수 있겠지만, 특히 시대를 달리하며 작가들이‘소설가 구보씨’를 반복하는 이유는 변혁되고 시정되어야 할 우리사회의 무언가가 여전히 존재하고 있다는 의미일 것이다.

그렇다고 단순히 해결되지 못한 사회적 문제나, 구보씨로 대변되는 인물상이 오늘에도 동일하다는 착상만으로 이러한 현상이 빚어졌다고 단언하기에는 이상의 무엇이 있을 것이다. 그 이유는 박태원의 소설 표제를 반복한 후대 작가들의 작품에서 발견하여야 할 것이다. 아마도 현대문학에 있어서‘소설가 구보씨’만큼 많은 패러디와 오마주를 남긴 작품도 없으리라. 최인훈의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1972년 발표)』처럼 제목이 완전히 동일한 오마주 작품에서부터, 주인석의 『검은 상처의 블루스-소설가 구보씨의 하루』나, 시인, 건축가, 사진작가에 이르는‘구보씨’는 그야말로 무수히 변형되어 재현되고 있을 정도이다. 구보씨와 문학작품과의 無言의 끊을 수 없는 관계가 알 수 없는 힘으로 그네들의 작품으로 끌어댄다. 시대와 상황을 달리하는 이들 작품을 하나하나 접하는 시간은 흥미롭고 지적인 탐험이 될 것만 같다....  

아! 본론을 빠뜨렸다. 내가 이해한 구보씨가 누구인가?에 대한 답 말이다. 좀 현학적으로 말하면 ’동시대인’이라 해야 할까? 시대에 들러붙어 사는 인간이 아니라, 시대의 어둠, 부러진 등뼈의 틈새를 인식하는 사람이 아니겠는가! 어쩜 파편화된 오늘의 사회에 통증을 느끼는 우리들 모두의 표상일 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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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유럽의 지성사회를 휘저었던 여성이다 보니‘조르주 상드(1804~1876)’를 따라다니는 지적이고 정신적인 여성이라는 후대의 평가를 위선적으로 보이게 하는 원색적인 수식어와 호칭이 만만치 않다. 사회제도와 규범의 위에 군림한 여자, 위선을 거부하고 남녀평등을 주장했던 혁명가로서의 여성을 향한 독설은 돈주앙에 비견되는 그녀의 남성편력 탓이긴 하지만 모욕적이기 조차 하다. ‘보들레르’는‘상드’를 향해 공중변소, 오물을 세척하는 배수구라고까지 모독하였다니 가히 전설적인 스캔들의 여왕소리도 점잖은 측에 속한다.

이러한 비난에도 무려 90여권의 소설을 출간하고 산문 및 서간집 등 250여 편에 이르는 저술활동을 하였다는 것은 매혹적이고 지적인 그녀의 환심을 얻지 못한 비뚤어진 남성들의 시기가 아니었나 하는 생각도 든다. ‘빅토르 위고’는 “사람들이 상드에 대해서 욕 할 때 상드를 더욱더 명예롭게 한다고 느꼈다.”고 했다니 사실 이를 뒷받침하는 증언이라 하여도 될 것이다.
상드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된 것은 그녀의 초기 소설중 하나인『렐리아』란 자전적 작품을 접하면서 부터라 고 할 수 있는데, 작품 속 인물 중 하나인‘스테니아’라는 젊은 시인의 사랑과 좌절을 보면서 당대 낭만주의 시인‘뮈세’를 떠 올리게 하였기 때문이다.

이루 헤아리고 거명하기가 버거울 정도로 상드의 연인은 수두룩하지만, 비록 1년 남짓의 짧은 시간일  망정 뮈세는 상드가 가장 사랑한 남자였다는 점에서 주목하게 된다. 산다는 것은 도취하는 것이고, “사랑한다는 것은 가슴 설레는 일이며, 행복입니다. 천국입니다. 아! 나는 맹세코 예술가의 생애를 살고 싶습니다. 나의 좌우명은 자유입니다.”라고 외칠 정도의 상드에게 6살 연하의 여위고 아름다운 금발의 물결치는 머리칼을 지닌 어린 시인은 그녀의 자유분방하고 열광적이며 야성적인 성격을 충족시키는 데 적절한 대상이었을 것이다.


뮈세는 실연 이후 여러 아름다운 밤의 시편과 상드와의 사랑의 고백서를 남겼는데, <세기아의 고백>이나  <추억>, <슬픔> 등은 이러한 배경을 가진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그럼 대체 상드의 어떠한 측면이 당대 예술과 지성계를 지배하던 남성들을 이토록 헤어나지 못하게 한 것인지 진한 호기심이 발동한다. “미덕과 고귀함은 없어도 사랑은 한다. 강하게, 전적으로 확고부동하게 사랑을 한다.”라는 그녀의 사랑에 대한 신조처럼 허위를 걷어내고 육체의 본능에 충실하며, 사회주의적이고 인도적인 그 분방한 나눔(?)의 정신 탓이었을까? 그러나 그녀의 작품을 보면 인간사를 거의 초월한 신적인 인간을 발견하게 되는데, 아마도 그녀가 발산하는 이러한 신비주의적 광휘, 경외를 느끼게 하는 이상의 숭고함에 매료되었다는 것이 더 옳은 이해가 될지도 모르겠다.

한편 그녀의 인생에서 두 번째로 중요한 남성이 있는데, 오늘날 우리가 감상하는 우수에 차고 때론 아름다운 전원의 햇살을 그리게 하는‘쇼팽’의 음악들이 상드의 사랑과 지원 속에서 창작되었다는 것은 예술에 대한 상드의 이해와 열정을 느끼게 한다. <빗방물 전주곡>이란 것이 있는데, 연인인 상드가 외출했다가 폭우로 강물이 불어나 낡은 마차로 건너다보니 늦게 돌아오게 되었는데, 이를 모르는 쇼팽은 상드가 자신을 버렸다는 상실감으로 눈물을 흘리면서 반미치광이 상태가 되어 연주한 창작이라 하니, 사랑이란 이 착란적 두뇌조작이 없었다면 인간사란 정말 아무 즐거움도 없는 무미건조한 것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도 해보게 된다.

<전원 교향곡>, <야상곡>등 주옥같은 쇼팽의 연주곡들이 모두 상드의 치마폭에서 나왔으니, 과연 보들레르의 독설은 접근조차 하지 못했던 못난 남자의 갈망이란 역설에 불과한 것이 아니었을까?...
그, 남자를 좋아하던 상드가 쇼팽의 예술을 위해 금욕적 생활까지 했다니 평범한 이성으로는 이해하기 쉽지 않은 여성임에는 분명했던 것 같다.
‘나는 사랑한다.’그리고 나의 좌우명은‘자유’라는 신조를 정말 생의 말년까지 지켜나간 그녀의 남성 편력이 사실 혀를 내두르게 하지만 말이다.

그녀의 작품은 대개 4부분의 시대로 분류되는 듯하다. 1832년~1838년까지 주로 사회적 편견이나 인습에 항의하고 자유로운 정열의 권리를 주장한 초기작품으로『발랑틴』,『앵디아나』,『렐리아』, 『앙드레』가 있으며, 1838년~1846년에 이르는 사회주의 소설로서『프랑스여행의 동료』,『오라스』, 『앙지보의 방앗간 주인』, 『앙투완씨의 죄』,『칠현금』등이 알려져 있다. 


그리고 1844년~1853년의 시기에는 『잔』,『마의 늪』, 『사랑의 요정』, 『피리부는 사람들』과 같은 전원 소설을 주로 발표하였으며, 1853년 이후의 말년에는 자서전과 서간집, 『마지막 사랑』, 『타마리스』등 연애모험소설들을 쓰면서 초기의 작품세계로 회귀한 양상을 보인다. 아마 다음의 구절은 그녀를 대변하는 문장이 될지도 모르겠다. “여인은 사랑의 찬가를 요구하기 전에 숭고한 영감이 고무시켜야 되는 민감한 리라와 같은 것이다.”(『렐리아』초판본에서 삭제된 문장 中”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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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오 바르가스 요사’에 얽힌 몇 가지 에피소드


작품 면면이 저항적이고 비딱함이 뚝뚝 묻어나는‘마리오 바르가스 요사’라는 2010 노벨문학상 수상작가의 몇 가지 주목되는 일화가 이 작가를 처음 접하는 독자들에게 왜 작품의 제재들이 그럴까하는 의문을 부분적으로 해소시켜줄 것 같다.

마리오의 인생 전반에 아마 결정적이고도 커다란 영향이 되었을 사건이라 할 수 있으리라. 고모 훌리아(Julia urqui di illanes)와의 결혼이다. 아버지의 극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29살 유부녀와 19살 조카의 결혼은 페루 상류계층이었던 이들 사회에서는 도덕적으로 수용할 수 없는 버거운 사건임에 분명했다. 뛰어난 가문을 가진 미모의 여성인 고모와 미소년 마리오의 사랑은 그의 자전적 소설 『나는 훌리아 아주머니와 결혼했다』에서와 같이 감각의 떨림, 밤의 신화가 아니었을까?

1955년 결혼하여 1964년 마리오의 배신으로 헤어지기까지 10년간 이어진 이들 부부생활을 엿보게 하는 몇 몇 사진을 보면 훌리아가 주도하는 그들의 관계를 추측케 하는데, 그녀가 1988년 출간한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와 함께한 나의 인생』이란 자서전에서 마리오의 작가적 역량이 꽃을 피우게 하는 절대적 존재였음을 주장하는 것처럼 그녀의 헌신적인 지원은 그의 사회진출에 중대한 기반이었던 것 같다.

이후 두 번째 아내인 파트리샤(patricia Llosa)의 출현이 이들을 갈라놓았으니 훌리아의 증오와 상처는 꽤나 충격적이었던 것 같다. 어쨌건 이 결혼 생활은 『새엄마 찬양』이나 『리고베르토씨의 비밀노트』라는 작품에서 변조된 모습으로 표현되고 있다 할 수 있는데, 결코 배신은 아니었던 것 같기도 하고, 오히려 여신으로서 숭배되었던 대상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도 들게 한다.

또 하나 마리오와 남미문학의 거두로 잘 알려진‘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Gabriel Garcia Maerquez)’와 치고받은 사건은 폭소를 자아낸다. 마르케스와 요사는 부부가 함께 어울릴 정도로 친근한 사이였는데, 요사가 한동안 스웨덴 여성과 바람이 나자 요사의 아내인 파트리샤를 위로하던 마르케스부부에 적의를 갖게 되었고, 급기야 요사가 마르케스에 주먹을 날려 그의 눈에 시퍼런 멍과 상처를 남긴 사건은 1976년 남미사회를 시끌벅적하게 하였을 정도로 대형 스캔들이었던 모양이다. 이 자유로운 영혼(?)의 여성에 대한 소유욕은 그야말로 그의 작품 속 작중 인물처럼 집요한 것 아니었을까? [사진: 멍든 마르케스]

이후 마르케스와 요사의 사이는 원수지간으로 변하였고, 2002년 마르케스가 자서전의 추천사를 요사에게 요청하면서 근 30년간의 오해를 풀었다고 하니, 이 에피소드는 거장들을 인간적 친근함으로 다가오게 한다. 성 모럴에서부터 종교, 정치, 경제, 문화를 아우르는 주류의 정신에 예리한 반란과 저항의 성향이 그의 사생활과 오버랩되어 미소를 머금게 한다. 매력적인 소년이 75세의 노작가의 얼굴에 남아있는 것 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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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딧불이 2010-10-18 23: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재미있는 에피소드에요. 요즈음 제가 요사에 대한 모든 정보를 필리아님으로부터 얻고 있어요. 고맙습니다.

필리아 2010-10-19 08:50   좋아요 0 | URL
훌리아의 자서전이 출간되면 꽤 인기가 있을 것 같은데요...,감사합니다~~

릴케 현상 2010-10-19 02: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 정말 재미있네요. 잘 읽었습니다.

필리아 2010-10-19 08:52   좋아요 0 | URL
눈탱이가 밤탱이가 된 마르케스의 미소짓는 얼굴이 재미있잖아요..ㅋㅋ, 감사합니다~~

프레이야 2011-05-25 18: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뒤늦게 '나는 훌리아 아주머니와 결혼했다'를 읽다가
이 페이퍼를 읽게 되었어요. 정말 재미있는 에피소드네요.
특히 훌리아의 실물을 보게되다니요.
마르케스의 눈탱이 밤탱이도 ㅎㅎ
요사의 다른 책들도 더더 읽고 싶게 만들어요.
 

인간사회의 모순은 시대의 현상에 따라 그 원인은 다른 형태를 띠지만 삶의 본질이라 할 수 있는 자유와 상충하는 속박과 억압의 고통은 변질되지 않을 뿐 아니라 더욱 다양한 모습을 하고 인간을 절망하게 한다.
노동으로부터의 자유, 차별과 억압으로부터의 해방, 물질의 편향성과 양극화의 해소 등등 인간사회가 안고 있는 해결되어야 할 부정적 모습은 이젠 생태계 복원과 보전의 문제, 신자유주의를 근간으로 하는 시장자본주의가 출산해내는 병폐까지 더해져 암울해 보이기만 한다.  

 

  

그래서인지 인류의 지성들은 시대가 안고 있는 인간사회와 삶의 태생적 문제에 대한 본원적 현상을 진단하고, 미래를 위한 대안 사회를 설계하고 전망하려는 노력을 끊임없이 지속시켜왔다. 이처럼 인간 세계를 다시 생각하고 모든 억압과 차별로부터 해방된 완전한 자유의 장소, 이상향을 꿈꾸는 것은 인간의 당연한 모색이라 할 수 있다.

’어디에도 없는 나라(ou + topos)’, 즉 인간의 세계에는 결코 존재할 수 없는 유토피아(Utopia)를 그리워하는 인간의 꿈은 실패한 낙원, 암울한 현대의 세상에 머물 수밖에 없는 운명인지도 모르겠다. 결국 이상적 사회를 꿈꾸지만 오히려 그 추구는 반(反)유토피아, 디스토피아의 세상을 낳기도 하고, 경계와 비판의 사회로서 실로 다양하게 그려지기도 한다. 케케묵은 갈등으로 그 균열이 날로 커져만 가는 듯한 오늘의 우리 사회를 돌아보고 새로운 가치와 이상을 실현키 위한 사색의 시간으로서‘대안사회’에 대한 지성사의 뼈대를 성찰하는 것은 아마 유익하고 또 유익할 것이다. 

 

*[참조]반(反)유토피아 소설인 <멋진 신세계>나 <1984>는 ’예브게니 자마찐’의 작품<우리들>의 계보를 잇는 작품들이라 할 수 있다.“자유가 없는 행복이냐, 아니면 행복 없는 자유냐”의 딜레마를 떠올리게 하는 디스토피아 작품의 최고 걸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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