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사회/과학/예술 분야 주목 신간 작성 후 본 글에 먼댓글 남겨 주세요.

이번 달에 주목할 책들은 그 분량에서도 만만찮기에 네 권의 욕심에 머물러야 할 것 같다. 그 첫 번째인 『비평 이론의 모든 것』은 책 좀 읽는다 하면 꼭 읽어야 할 필독서에 가깝기에 시선을 거두기가 쉽지 않다. 그리고 『현실, 그 가슴 뛰는 마법』은 이름만으로도 이미 역작의 기대를 하게하는‘리처드 도킨스’의 신간인데, 지금까지와는 달리 과학 전반에 대한 화려한 해설서이다. 끝으로 인류 정치미래에 대한 깊은 사유가인‘자크 아탈리’의 『세계는 누가 지배할 것인가』는 점점 혼돈에 빠지는 지구촌 헤게모니 쟁탈의 궁극의 귀결을 제안하고 있어 관심을 증폭시킨다. 그리고 이택광의 문화비평 속으로....

 

1. 비평 이론의 모든 것

 

문학작품이나 문화, 예술작품에 대한 평론들을 보면 가히 낯설기 짝이 없는 용어들로 무장한 채 ‘어디 한번 이해해봐라’하며, 시험을 하고 도발을 해댄다. 그렇다고 이들 작품을 이해하는 다양한 해석을 간과할 수만은 없다. 비평이론을 통해 세상을 더욱 잘 이해하게 되고, 이를 통해 더 생산적으로 생각 할 수 있는 토대가 마련되기 때문이다. 1999년 초판에 정신분석비판, 여성주의 비판, 비판적 인종이론 등을 대폭 추가 보완하여 다시 출간된 이 책이 특히 일반 독자에게 친근하게 다가오는 것은 이론에 대한 막연한 불안과 거부감을 일소하는 언어와 문장으로 써졌다는 점이다. 또한 저자도 본문에서 말하고 있지만 모호하게 생각되던 이론적 개념들을 일상의 경험과 관련지어 파악하고. 이론적 관점들이 문학작품에 어떻게 적용되는지, 다양한 비판 이론들이 실재 어떻게 상호 관련하고 차이와 유사성을 드러내는지를 보여주고 있어, 정신분석비평, 마르크스주의비평, 신비평, 구조주의비평, 신역사주의비평 등 10 여 비평이론들을 이해하는 귀중한 기회가 되어준다. 독서인들이면 필히 읽어보아야 할 매혹적인 개념서가 될 것 같다.

 

2. 현실, 그 가슴 뛰는 마법

 

과학의 경이를 대중에게 친절하게 전해주던‘칼 세이건’도, ‘스티븐 제이굴드’도 이제 이 세상에 없다. 그러나 진화생물학자‘리처드 도킨스’가 여전히 노익장을 과시하며 가슴 설레는 과학의 황홀경을 우리에게 전달하고 있다. 아마 이 책은 그의 과학 전도사로서의 소명의식을 총합한 걸작이라 해도 무방하리라. 다채로운 컬러 화보와 그래픽이 촘촘히 문장의 이해를 보충하며, 소행성 지구의 지각판에서부터 무지개와 빛의 파장, 유전자, 우주의 신비 등 과학의 안목을 갱신시켜줄 천재적 해설서라 할 수 있다. 제목처럼 과학에 대한 새롭고 무진장한 경이로의 안내에 동승하는 것도 괜찮은 독서가 되지 않을까.

 

 

 

3. 세계는 누가 지배할 것인가

 

『인간적인 길』, 『호모 노마드; 유목하는 인간』으로 잘 알려진 프랑스 정치비평가의 미래‘세계정부 체제’의 건설을 위한 전략 연구라 할 수 있다. 신이 지배하던 시대에서, 제국이, 독재자가, 시장경제 등으로 세계 지배자는 변천되어왔다. 이제 미국의 독주는 중국의 등장과, 유럽연합, G20등의 다중심적 지배체제라는 혼돈의 양상으로 전환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러한 지역과 영역별로 분산된 세계지배체제가 영속할 수 있겠는가에 대해서는 역사나 그 누구도 회의적이다. 결국 분열과 갈등, 혼란을 종식시키는 인류의 공존을 위한 체제는 ‘세계정부’여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세계정부란 어떤 것이어야 하며, 어떻게 축조할 수 있는 것일까? 그 제안으로 들어가 보자. 아시아 동쪽의 작은 분단국가에 사는 우리는 미래를 위해 어떤 준비를 하여야 할 것인지를.

 

4. 한국문화의 음란한 판타지

 

이 책 또한 10년 만에 재출간되는 개정판이다. 저자도 말하듯이

“한국처럼 보수주의가 절대적으로 주류를 차지하는 사회에서라면 필연적으로 억압될 수밖에 없는” 리얼리티라고 하는 자본주의적 모순에 대한 비평이다. 또한 ‘음란한 판타지’라고 명명한 것은 보수주의 다른 이름이다.

한국의 수구세력이 주요 동력으로 삼는 문화의 음란성에 대한 신랄한 비판이 될 것이다. 한국사회의 주요부를 구성하는 이데올로기의 실체, 그 집단적 심리기제를 파헤치는 역작이다.

 

[*다음은 이 책의 본문중 머리말의 일부를 발췌한 것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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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연 2012-05-06 20: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이번 기수 파트장이 된 가연입니다. 얼마나 이렇게 댓글을 남기며 체크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하는데까지 한 번 해보려고..ㅎㅎ 현실, 그 가슴뛰는 마법을 한 번 훑어본 적이 있는데..ㅎㅎ 재미있을 것 같더군요. 확인했습니다.

필리아 2012-05-07 08:21   좋아요 0 | URL
수고 많으시네요. 어떤 책이 선정될지? 기대되는군요...
 

속도를 조금만 줄여도 삶의 새로움이 넘쳐난다~


그저 스피드도 모자라 그 앞에‘초(超)’자를 붙여야 직성이 풀리는 속도경쟁의 시대에 안단테(andante: 조금 느리게)를 말하는 자는 무능과 낙오의 낙인까지 찍히기 십상이다. 지쳐있고 급격히 피로에 시달리고 있으면서도 속도의 감각을 늦추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타인을 누르고 차지한 높은 지위, 명예, 권력을 통해 궁극적으로 부를 더 많이 소유하기 위한 경쟁에서 뒤쳐질까봐 하는 안달일 것이다. 결국 물질과 소비의 능력을 보다 더 갖기 위한 속도이다. 그런데 이것을 타인에게 과시하지 못하면 쓸 데 없는 것이어서, 정작 삶의 필요와는 관련이 없는 것들이다.


상황이 이렇고 보니 과시를 위해서는 남보다 먼저 새로운 것, 고가여서 감히 넘볼 수 없는 것을 구입하기 위해 정신없는 속도로 뛰어다닌다. 물질의 소비에 노예가 되어 인생의 참 맛을 느낄 겨를도 없이 시간을 소모한다. 사실 타인에게 관심도 없는 개인주의에 찌든 사람들이 과시하기 위해 삶의 제 속도를 잃어버린다는 것은 기이하기 그지없는 현상이다. 기이함! 바로 광기에 휩싸여 있다는 것이다. 아마 몇 세대가 지나 21세기 전후의 시대를 평가할 때, 분명‘광기의 시대’라고 명명할지도 모를 일이다. 이젠 장사꾼에 불과한 영어강사에게 스타 칭호를 붙이고, 청년들을 대상으로 인생강의를 하게 한다. 실소를 멈출 수 없는 이 사회의 실종된 정신 상태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대목이다. 돈 만 많이 모으면 인생의 교본이 된다고 생각하는 가히 미친 사회이다. 오직 돈벌이를 위해 정신없는 속도로 뛰어다니는 자들이 과연 인생의 무엇을 알고 있다는 것일까?  결코 초고속의 빠르기로는 인생의 본질적 가치의 아무것도 보지 못하고 말 하지 못한다. 산책하듯이 거닐 때 비로소 주변의 사물이 뚜렷하게 보이고, 번잡스러워 정작 생각다운 생각을 하지 못했던 뇌에서 참말의 생각을 할 수 있게 된다.

 

이 책은 바로 이렇게 잃어버린 우리의 인생 속도를 찾아준다. 안단테! 의 속도로. 그래서 우리들이 관심을 가지지 못했던, 혹은 볼 수 없었던 일상의 세세한 것들, 이웃들의 소소한 이야기가 우리의 인생을 얼마나 여유 있고 따뜻하며, 풍요롭게 하는지 잠시나마 순박한 웃음을 지으며 안온한 행복에 젖어들 수 있게 해준다.

작가‘호어스트’는 질주를 미덕이라고 칭송하고 새 것을 창조라 치켜세우는 무지하고 몰염치한 이들의 세상을 비판한다고 핏대를 세우거나 목청을 돋우지 않는다. 그의 일상 자체가 유머고 위트이며 해학이어서 그의 재밌는 생활이야기에 빠져들다 보면 어느새 그 속에 진중한 가치의 언어들이 힘을 발휘하고 있음을 깨닫는다. “인류사의 많은 위대한 발명과 발견은 무지와 실수에서 비롯됐다.”면서 구글의 검색에 의존하려했던 에피소드에서‘생각’의 가치를 말하며, 전자책 단말기를 받아들며 “그걸로 DVD도 볼 수 있나요?”라고 능청을 떠는 모습에서 우린 우리들이 상실하고 있는 가치들을 발견하게 된다.

 

또한 딸아이와 함께한 쓰레기가 된 지구를 청소하는 로봇이 주인공인, 소비지상주의에 대한 비판적 메시지라는 교육적 효과 높은 <월-E> 라는 영화 감상의 일화에는 “자막이 올라가고 마침내 불이 들어왔을 때 눈에 들어 온 것은 종이컵, 팝콘 찌꺼기, 비닐봉지 따위의 쓰레기로 뒤덮인 의자들”이라면서 세상을 헛된 소비로부터 구제하는 일은 이토록 재미있을 수도 있다고 너스레를 떨기도 한다.

오늘의 소비사회가 만들어내는 인류의 숭고한 가치들에 대한 훼손은 이루 다 열거하기가 벅찰 정도일 것이다. 현대의 소비는 자기과시를 지향한다. 그렇다보니 외형, 표피, 거죽의 포장에 열을 올린다. 사내들은 근육 만들기와 매력적 육체를 만들고 꾸준한 운동은 기대수명을 늘린다고 매일 한 시간씩 조깅을 한다. 하지만 기대수명은 2년이 늘어나는 데 비해 달리는데 총 4년을 소비해야 한다. 책을 한 줄 더 읽고, 타인을 위해, 사회의 건강을 위한 시간이라면 모두가 행복해질 텐데 말이다.


한편 작가의 재치에 반하게 되는 여유작작한 이야기들도 시름을 잊게 해주는데, 프랑크푸르트 국제도서전에서의 천연덕스런 장난이다. 자기계발서, 주식투자 등 돈 버는 법과 같은 아무런 것도 말하지 않는 허접한 책들을 조롱하며, “그날 내가 용서를 빈 책은 모두 17권이었다.”며 할 말 다하고는 은근슬쩍 용서를 비는 것이다. 이 도서전시회의 에피소드는 노벨상 수상자인 ‘귄터 그라스’와의 그닥 유쾌하지 않은 사건으로도 이어진다. 엉겁결에 귄터그라스의 커피 심부름을 하게 된 일종의 모욕사건 일 수 있는데, 아주 멋지게 관용의 해석으로 마무리 짖는다. 나중에 작가인 걸 안 그라스가 미안했던지“호어스트, 그는 심부름을 하는 것보다 글 쓰는 솜씨가 훨씬 더 낫다!”고 말했다면서 용서하는 것이다. 그도 높이고 자신의 자존감도 회복하면서 말이다.


세상을 향한 은근한 비판만으로 이 책이 채워진 것은 물론 아니다. 독일‘니더작센’의 작은 마을에서 태어난 작가의 사 계절에 걸친 벗과, 이웃들, 가족들과의 기억들이 수놓아 지고 있는데, 갈등으로 얼굴을 붉힐 만한 사건의 술회에도 웃음이 떠나지 않는다. 그리고 회색과 어둠, 차가운 바람에 나뭇잎 떨어지고 보슬비마저 내리는 가을의 니더작센을‘완벽하고 좋은 우울증 패키지’라면서 단점일 수 있는 고향의 짙은 색채를 긍정의 언어로 반전시키기도 한다. 소년 시절의 연애 사건도 들려주는데, 티끌만큼도 낭만이 없는 자신은 “여자의 매력과 소유토지의 크기가 비례 한다고 믿는 그런 곳에서 성장”한 탓이라고 슬쩍 비판의 메시지도 담아내면서, 최초의 데이트 신청에 사용했던 자작시를 자랑하기도 한다.


「네 별빛 머리카락을 꿈꿔

  그리고 우리가 한 쌍의 연인이기를 꿈꿔」


히힛, 이 순박한 소년의 연애시가 간지럽고 풋풋하다. 아마 이 책의 모든 이야기들을 쓴 작가의 심성이 어떤 모양인지 그려지지 않는가? 세 송이 장미꽃과 이 연시(戀詩)를 받은 소녀는 자신과의 데이트를 수락했단다. 바쁜 일상에 쫓겨 오늘의 우리들은 자신의 일상을 볼 수가 없다. 모처럼의 짬을 내서 우리들의 모습이 어떠한지를 바라볼 수 있게 하는 책이다. 한 걸음 쉬어 가보자. 훨씬 많은 것들이 새롭게 보이고 해석될 것이다. 삶의 의미가 더욱 풍성해질 것이다. 라르고까지는 아니더라도 안단테정도는 생의 속도에서 꼭 필요한 감각일 것이다. 웃음과 여유 속에서만 진실을 발견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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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쇠렌 키에르케고르’의『이것이냐 저것이냐』中 「유혹자의 일기」을 읽고...


이 작품은‘키에르케고르’의 처녀작인 『이것이냐 저것이냐』에 수록된 자전적 소설이다. 아니 문학과 미학의 경계를 오가는‘소설철학’이라 해야 할까?  작품을 읽어나가면서 후일 발표된 『불안의 개념』에서 언급되던 아담의 원죄 이전의 그 불안에 대한 정의가 되살아나는데, 이미 젊은 철학가의 마음에 심미안과 윤리적 양심, 종교적 교의 사이에서 처절한 갈등이 있었음을 발견하는 것은 일종의 경외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야기의 골격은 의외로 단순하다. 그의 현실의 삶 속에서 유일한 연인이었던‘레기네 올센’을 모델로 하여 순진무구한, 말 그대로 이성과 연애, 세상에 대한 어떤 인식을 가지지 않은 여인(작중 이름;코델리아)이 이것들을 자유의지에 의해 선택 할 수 있을 정도의 정신적 위치로 올려놓아 삶의 역사를 비로소 시작하게 하는 유혹의 기술과정이다. 따라서 세상과 단절한 듯 살아가는 한 소녀를 탐미적으로 바라보며 그녀가‘여성’으로서의 선택의 길로 들어서게 하는 치밀한 작업의 이야기만으로 이미 소설적 흥미를 달성하고 있지만, 사실 그렇게만 읽어서는 작품의 본질을 거의 이해 할 수 없게 된다.


여기에는 키에르케고르가 말하는‘불안’에 대한 개념의 사전적 이해가 요구되는데, 그것은‘원죄’, 인류 최초의 죄의식의 주입에 대한 고찰로 이어진다. 최초의 인간, 아담이 저지른 죄가 바로 원죄이다. 그런데 원죄라면 그 이전에는 죄가 없었다는 얘기이고 당연히 아담은 존재하지 않았던 죄에 대해 알지 못한다. 즉 선악의 구별에 대한 지식이 없었다는 얘기이다. 어떤 행위를 하면 안 된다는 계시를 듣게 된다. 순진무구한, 그야말로 무지(無知)의 아담은 행위의 이행에 따른 막연한 불안감을 갖게 된다. 바로 불안을 낳는 것은 무(無), 순진무구, 알지 못함으로 인해 출현하는 것이란 말이 된다. 그리고 주어진 행위를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를 선택하는 것, 다시 말해 가능성의 자유로운 선택으로 인해 주어지는 것이라는 점이다. 내가 무언가를 선택하는 것이 오직 나의 자유의지에 주어졌을 때 그 알지 못하는 저 쪽의 무엇에 대한 감정이 불안인 것이다.


이러한 기초적인 이해만을 가지고 읽더라도 이 작품의 의미는 자못 심오하게 다가온다. ‘유혹자’의 일기와 편지에 기록된 내용들이 얼마나 치밀하게 계산된‘불안’으로 이끄는 작업인가를 발견하게 된다. 달콤한 불안, 정체모를 불안, 소심한 불안...

이 불안의 심리 끝에 결정케 되는, 그러나 완전히 자기 주체적인 자유로운 의지에 의해 하게 되는 선택의 결과는 이른바‘죄성(죄의 성질)’의 비로소의 입장이다. 이것은 케에르케고르의 주장에 의하면 욕망을 일깨우고 성의 분별을 가져오며, 죽음을 알게 한다. 무에서 가능성에 대한 인지(認知), 그리고 불안, 혼돈 뒤에 욕망과 성과 죽음이란 죄성이 들어온다는 것이다.

 

그래서 유혹자의 일기는 무지의 소녀, 중성적(中性的)이기조차 한 여인, 코델리아가 완전히 자유로움의 경지에 놓일 수 있도록, 자신의 결정이 오직 자신의 의사에 기초해서 이루어졌다는 상황에 도달하게 하는 작업계획서라 할 수 있다. 코델리아의 환심을 사기위해 애를 태우는 친구‘에드바르’와, 그녀의 고모를 대화상대자로 활용하여 무심한 듯 상대의 관심을 서서히 자극하는 전술을 벌이는데, 짐짓 “나의 높은 긍지, 나의 고집, 나의 냉담한 비웃음, 나의 비꼬인 냉소, 이것들이 그녀의 마음을 끌어당기는 것이다.”는 것은 하나의 일례가 될 것이다.


즉, 유혹이란 어떤 부담이 가해지지 않으면서 완전히 자유의지로 매혹되는 것, 자유 속에만 사랑이 있고, 자유 속에만 즐거움과 영혼의 기쁨이 있기 때문에 그녀에게 자유로운 선택의 위치로 교묘하게 다가가게 하는 수법이다. 그래서 결정적 일격을 가하기 위한 체계적인 유혹의 절차를 이행한다. 이 작업 공정의 탐미적 의지에서 우리는 감정의 다양한 스펙트럼을 겪게 된다. 아마 그것은 불안의 당혹이며, 두려움이자 어떤 떨림 같은 것일 것이다. 여기서 미학의 세계, 우리들을 달짝지근한 미열의 환영에 황홀하게 하는 그런 시간으로 빠지게 하는 것이다.


결국 이 작품은 “처녀의 마음속에 들어가 그것을 창조하는 것은 이미 하나의 예술적 재능이며, 창조적으로 처녀의 마음에서 빠져나오는 것 또한 고도의 기술이다.”라고 유혹자가 쓴 것처럼 한 탐미가의 사랑의 본질과 요체에 대한 해부라 할 수 있다. 코델리아가 여성으로서 자신을 이해하고 유혹자의 여자가 되는 순간 유혹자는 그녀를 떼어버리는 작업에 돌입한다. 이 역시 고도의 기교를 통해서.

이것으로 이 유혹자의 일기는 그 자체로 탐미적인 것이 된다. 바로 미학의 교본이 되는 것이다. 돈 후안(Don Juan)이 아가씨들을 유혹하고 차버리지만 그는 아가씨들을 차 버리는 것을 즐긴 것이 아니라 유혹하는 것 자체를 즐겼다는 변론에서 거듭 확인된다. 유혹자는 이처럼 인생을 향락하는 것으로서의 미적 생활의 실천을 보여준다. 흥미로움에 대한 끊임없는 추구, 둔해지려는 감각 및 감정과 의지를 자극해서 따분함과 권태로움을 밀어내는 작업, 인생을 시처럼 살아내려는 시도라 할 수 있다.


그러나 키에르케고르의 인생이 코델리아로 분(扮)한 현실의 레기네 올센과의 관계를 보면 유혹자의 실천처럼 미학적이지는 못했던 것 같다. 1년 남짓의 약혼 생활 중 돌연 파혼을 선언한 것 까지는 젊은 키에르케고르로서는 더없이 시적인 삶의 실체화였겠지만 그녀에 대한 사랑을 잊지는 못했던 것 같다. 그에게 무한한 고뇌와 고난의 원인이 되었고, 화해와 자신의 진실을 알리려는 시도가 성공하지 못했다는 사실이나, 그녀와의 연애의 경험을 바탕으로 한 많은 작품들과 자신의 저작 전체를 그녀에게 유산으로 바친 것에서 미적 삶과 윤리적 삶의 번민이 얼마나 치열했는가를 발견 할 수 있을 뿐이다. 이것이냐, 저것이냐, 삶의 즐거움, 욕망의 추구인가, 아니면 윤리적 겸허와 신에 대한 복종인가. 이것에 대한 답변인 그의 저서 『반복』과 저것에 대한 답변서인 『두려움과 떨림』으로 독서의 행보가 계속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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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데이아(Medea)’는 어떤 여인인가!


'Medea'는  메데이아, 혹은 메디아라 표기하는데 2500년 전 그리스인들이 어떻게 발음했는지는 모르겠으나, 내게 익숙한 ‘메데이아’로 부르기로 하자. 이 여인을 새삼스레 말하려는 것은 기원전 431년 그리스 비극작가 '에우리피데스(Euripides)'가 『Medea』를 그네들의 전설과는 다소 변형된 여성상, 즉 자신의 자식들을 죽인 잔혹한 엄마, 연적을 살해한 복수의 화신으로 묘사한 이래 마치 여성을 바라보는 시대정신을 반영이라도 한 듯 수없이 차용되어 새로운 이미지를 부여받은 몇 안 되는 여인이라는 점 때문이랄 수 있다.


에우리피데스가 메데이아를 자신의 비극작품으로 쓰기 이전부터 이 여인에 대한 전설은 여러 형태로 전해져 왔던 듯하다. 그 가장 중심에 놓인 사건은 역시 자식들을 누가 죽였는가 하는 문제인데, 기원전 8세기 서사시인‘에우메로스’의 「메데이아」에 의하면 헤라 여신의 신전에 숨겼다가 잘못되어 죽게 만들었다는 것이며, 주석에는 바로 그 자식들을 죽인 자들은 코린토스의 아낙네들이라는 설과, 메데이아가 죽음에 이르게 한 코린토스의 왕 크레온의 친족들이 헤라신전에 숨겨진 아이들을 죽이곤 메데이아가 죽였다고 소문을 퍼뜨렸다는 설이 있다고 설명하고 있다.

 

이 전설이 다시 400여년후인 기원전 431년에 에우리피데스에 의해 메데이아를 자신의 자식들을 직접 죽인 여인으로 변형 시킨 것인데, 이는 작품 내용에서 여성이 남성의 소유물이자 종속물로서 수동적 삶만을 강요당해야 하는 시대에 대한 강력한 저항 정신의 극단적 상징이라 할 수 있다.

“공연히 영리하다는 이유로 사람들에게 원한을 사고, 쓸모없는 인간이라 욕을 먹고, 오히려 반대로 다루기 힘든 여자라는 말을 듣기까지 한다.” 그러면서 “제가 그렇게 똑똑한가요?”라고 코린토스의 아낙네들에게 반문하는 장면은 이러한 점을 역설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이렇게 울분을 토하는 메데이아는 당연히 동정을 받아야 할 대상이다. 숙부‘펠리아스’왕의 교활함에 속아 ‘아르고 호’를 타고 양털을 찾으러 ‘코르키스’로 원정한‘이아손’을 코르키스의 왕녀인 ‘메데이아’가 위험에서 구원해주고 임무를 완수하도록 돕는다. 그리곤 두 사람은 혼인하여 이아손의 고향 ‘이올코스’로 돌아가 펠리아스를 처단한다. 메데이아는 이아손에게는 아내이기 전에 생명의 구원자이며, 그를 명예의 반석위에 올려놓은 인생의 귀중한 조력자이다. 그럼에도 코린토스로 옮겨온 이아손은 코린토스의 왕, 크레온의 외동딸과 혼인하기 위해 메데이아와 자식들을 방치하고, 마침내는 크레온으로부터 일방적인 추방과 처형의 위협을 받게까지 한다. 메데이아가 느낀 배신의 참혹한 심경은 여염집 여인네들의 분노 이상이었을 것이다.


배신한 남편 이아손의 변명 또한 걸작인데, 아내와 자식들의 삶을 보다 윤택하고 확고한 미래의 기반을 얻기 위해 선택한 원대한 방편임에도 속 좁은 여인네인 메데이아가 이를 인정하지 못하고, 자신과 크레온 왕과 딸에게 반목하는 것은 잘 못된 행동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메데이아라는 여인은 순순히 쫓겨날 여성이 아니다. 코린토스 아낙네들의 코러스가 울려 퍼지는데,


“ 여자야말로 세상에 찬양 받고,

영예 받는 몸이 되리라.

약한 이름은 여자를 떠나리라.”


남성적 권위에 일방적으로 눌리기만 하는 강요된 여성상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아폴론의 신탁을 받고 돌아오는 판티온 왕의 아들인‘아이게우스’에게 그의 소원인 자식을 얻게 해주겠다는 약속을 통해 자신의 보호를 언약 받는다.(도피처를 마련함) 그리곤 치밀한 책략을 통해 이아손에 대한 처절한 복수를 실행한다. 자신은 추방명령에 따라 떠날 것이며, 다만 아이들만은 거두어 줄 것을 사정하고, 아이들을 통해 죽음의 독이 묻은 비단옷과 황금관을 이아손의 새로운 아내가 될 공주에게 선물로 보낸다. 이로써 메데이아의 연적인 크레온 왕의 딸이 죽고, 딸을 안고 애통해하던 왕마저 독으로 사망한다. 그런데 여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이아손의 자식이자 자신의 자식인 아이들을 도륙한다. 배신한 남자가 받을 수 있는 가장 처절하고 참혹한 복수를 하는 것이다. ‘암 표범’, 메사나 해협의 사나운 여괴‘스킬라’라고 불러도 부족할 만큼 잔인한 앙 갚음을 하고 고통과 좌절에 신음하는 이아손을 조롱하며 도주한다.


이것이 에우리피데스가 그린 당대의 여인상이다. 결코 남성중심의 권력에 지배되는 피동적 여성이 아니라 자신의 정당한 권리를 주장하는 여성상이다. 이러하니 당대의 그리스 지배계급이 이 작품을 좋아했을 리는 만무하다. 비판과 비난이 쏟아지고 외면당했음은 불 본 듯이 뻔하다. 그의 사후인 기원전 4세기부터 비로소 조명 받기 시작했으니 천재, 시대를 앞선 자는 동시대의 공감을 받기가 수월치 않았던 것은 예나 지금이나 같다. 그리곤 피상적으로 ‘자식을 살해한 잔혹한 여인상’, 혹은 ‘복수의 화신’이라는 표피적인 이미지만이 차용되어 회화나 문학, 철학에 인용되어 왔다.

그런데 21세기 오늘, 메데이아는 또 다른 여인으로 새롭게 해석되고 새로운 여인으로 변형되어 시대를 상징하는 여성상을 발산하고 있다.


‘카를로스 발마세다’와 ‘테스 게리첸’의 소설에 나타난 ‘메데이아’


‘카를로스 발마세다’와‘테스 게리첸’, 두 작가가 그려 낸 그들의 작품 속‘메데이아’는 21세기의 여인들이다. 바로 오늘을 사는 여성, 이 시대의 여성들 초상이다. 그래서 두 작가가 부여한 메데이아의 매력은 예사롭지 않다고 할 수 있다.

발마세다의 『서른살, 최고의 날』과 게리첸의 『악녀의 유물』이 그것인데, 전자의 메데이아는 잠든 우리의 모든 감각적 세포들을 깨어나게 할 만큼 강렬한 열정, 관능적 사랑의 고고학을 대변하는가 하면, 후자의 메데이아는 강인한 여성상, 철저하리만큼 자식에 대한 보호본능으로 뭉쳐진 헌신적인 모성애를 보여준다.


『서른살, 최고의 날』에서 메데이아의 화신은 문학 전공의 대학 강사인‘파울리나’라는 여성이다. 이 여성은 “사랑은 육화된 열정”이라고 정의하며 철저하게 자신의 욕망에 진솔하다. 그래서 사랑과 육체의 불가분성을 주장하며, 육체에 대한 욕망의 속성을 탐색한다. 육체를 잃어버린 사랑이란 이미 사랑이 아니며, 따라서 여자를 배신하는 것. 즉 떠나는 것은 생명을 담보로 한 무지가 되어버린다. 그녀의 사랑을 배신한 남자와 단지 그 남자의 새로운 연인이 된 여자는 그녀에게서 육체를 빼앗아간 무지 때문에 응징당해야 하는 것이 된다. 메데이아는 바로 사랑의 배신이 가져올 귀결이다. 복수!


반면에『악녀의 유물』에서는 이름이 그대로 차용된다. ‘메데이아 소머’, 여성을 단지 욕망의 도구, 영원히 소유하기 위해 살해하여 미라로 보관하는 사이코패스 남자를 피해, 자신의 딸을 지켜내려는 강인한 어머니이다. 막강한 권력과 잔혹한 악인으로 상징되는 남성의 권력, 기성의 지배 권력에 강하게 맞서는 의지와 행동의 실천을 보이는 헌신적인 모성애로 뭉쳐진 여인이다. 그러함에도 역시 인간으로서의 욕망을 솔직하게 드러낼 줄 아닌 여인이기도 하다.

이처럼 오늘의 여성은 자신의 성적 진실이 남성에 의해 억압되고 은폐되어야 하는 은밀한 것이 아니라 인간이란 생물학적 동질성만큼이나 동등한 것이기에 드러내고 결핍을 요구할 수 있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럼에도 이 두 작품의 종결이‘복수’라는 에우리피데스 메데이아의 플롯을 그대로 따르고 있는 것은 수천 년의 시간이 흘러도 바뀔 수 없는 보편적 진리라는 것이 있다는 얘기가 된다. 여성의 물신화, 다시 말해서 쾌락을 위한 대상화를 무심히 반복하는 남성적 권위의 몰지각과 파렴치에 대한 경종이다. 여자도 똑같이 인간의 신체를 대상화 할 수 있다는 얘기이다. 바로 죽음, 생명을 빼앗는 복수를 통해 물질화시켜 버릴 수 있다는 말이다. 문자 그대로의 의미야 잔혹하기까지 하지만 남자들의 여자들에 대한 전통적인 젠더(gender)가 부여하는 성의 차별화된 기능, 역할에 대한 인식의 변화를 촉구하는 것이라 할 것이다.


25세기 전에 영리하다고 원한을 사고, 똑똑하니 다루기 힘든 여자라고 학대받던 메데이아는 오늘에 없다. 더 이상 그녀들은 한탄하지 않는다. 적극적이고 거침없이 자기의 욕망을 주장하며, 분노할 줄 알고 복수하는 존재이다. 기원전 431년의 메데이아가 기원후 2011년의 메데이아로 여러 문학 작품들에 환생하는 것은 여전히 몽매하고 각성되지 않은 남자들에 대한 배려일지도 모르겠다. 메데이아, 그녀는 우리들의 딸이고 어머니이며 연인이다. 어찌 사랑스럽고 매혹적이지 않을 수 있겠는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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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움과 소멸, 늙음과 젊음, 그 환상적 관능의 서사시 

   - 『잠자는 미녀』 와 『내 슬픈 창녀들의 추억』에 대해서

언젠가는 임박한 죽음을 느끼게 되는, 설혹 여기까지는 아닐지언정 신체의 노쇠함, 노년에 접어들었음을 자각하는 나이가 될 것이다. 최근의 경험보다는 어렸던 시절, 먼 시절의 기억이 더욱 생생하게 떠오르는 그런 때가 올 것이다. 그래서 살아온 날들 속에서 꿈틀대던 욕망이 깃든 추억들을 반추하며 그 어떤 표정들을 지을 것이다. 그 표정들을 만들어내는 감정이란 어떤 것일까? 안타까움, 아쉬움, 그리움처럼 나이 들어 할 수 없게 되는 많은 것들로 인한 비참함, 수치심, 자괴감 같은 것들일까? 아니면 삶의 부조리에 대한 저항, 나아가서 거부를 통한 도전일까? 그때 나에게는 정말 어떠한 것들이 절실하게 되는 것일까? 과연 늙음은 죽음에 대한 수동적 겸허만을 미덕으로 하는 것인가? 이러한 질문들이 쉴 새 없이 스쳐지나간다.  

‘가와바타 야스나리’와 ‘가르시아 마르케스’, 이 두 문호가 각기 쓴 『잠자는 미녀』와 『내 슬픈 창녀들의 추억』이란 작품은 이러한 의문에 답변을 하고 있다. 그것도 아주 진솔하고 대담하게 말하고 있다. 마르케스의 작품은 야스나리의 오마주에 가깝다. 『내 슬픈 창녀들의 추억』의 시작페이지에는 『잠자는 미녀』의 한 문장이 실려 있다. 또한 ‘잠자고 있는 젊은 아가씨’라는 소재 역시 그대로 차용하고 있으며, 주인공인 노인이 잠자는 여자를 바라보며 젊음과 여성에 대한 감각적 느낌을 구술하는 것 역시 다름을 발견할 수 없을 만큼 유사하다. 더구나 이 대가들의 말년인 노년기에 쓰였다는 점에서 소설 속 인물들의 심리와 행동은 더욱 진실성을 띤다.
  
야스나리가 만들어 낸 67세의 노인‘에구치’, 마르케스가 숨을 불어넣은 ‘서글픈 언덕’이라는 닉네임을 가진 90세의 노인. 본인들의 의지나 의사와는 무관하게 남성성을 상실해가는 성(性)의 구분이 그야말로 의미를 잃어버리는 단지‘노인’이라는 외부적 시선이 그들의 정체성을 규정한다. 누군가가 사람의 나이란 ‘그 사람에 관한 많은 것을 숨기고 있는 익명의 예언자’라고 말했듯이 나이가 들어 노인이라는 한 꾸러미에 담기게 된다는 것은 쇠퇴를 포괄하는 어떤 범주의 존재임을 의미하는 것일 게다.

야스나리의 에구치는 성적 능력을 잃지 않은 늙은 남자의 욕망으로부터 살아있음에 대한 확인에 그치지만 마르케스의 노인은 새로운 사랑의 시작으로까지 나아간다. 문화적 배경은 제법 끈질기게 인간 본능의 표현에까지 영향을 미치는 듯하다. 그러나 사그라지지 않는 인간의 보편적 욕정이라는 이 불가해한 본성이 늙음에 대한 사회적 시선, 즉 통념적 고정관념과 충돌하는 것은 모든 인간적 고뇌이자 난문제이다.

에구치는 동료의 소개로‘잠자는 미녀의 집’이라는 진기한 여관을 소개받는다. ‘안심 할 수 있는 손님’, 즉 남자가 아닌 노쇠한 노인만이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고 깊은 잠에 빠진 나신(裸身)의 젊은 아가씨와 동침할 수 있는 장소이다. 잠들어 있는 미모의 젊은 아가씨를 시각, 촉각, 후각을 동원해 탐하는 에구치의 노인성은 과거의 기억들로 연결된다. 그 기억들은 여인들과의 추억이며, 혼전에 처녀성을 상실한 둘째 딸아이로, 그리곤 마침내 어머니에 대한 생래적 귀환으로 맺어진다.

싱싱한 젊음의 육체, 어린 여체가 발산하는 내음, 입술, 벌어진 입 속에 드러나 이와 혀, 머릿결, 탄력적 피부가 전해주는 촉감..., 노추(老醜)와 배덕(背德), 마성(魔性)이 휘몰아치고, 억제된 관능이 환상적 희열을 고조시킨다. 남자를 잃은 노인들의 애처로움과 달리 여전히 남성을 지닌 에구치 노인의 감성은 붉은 비로드 커튼이 쳐진 은밀한 밀실이란 공간 안에서 젊음과 늙음, 삶과 죽음, 아름다움과 소멸을 극단적으로 대비시킨다. 그래서 에구치란 인간의 보편적 욕정을 보는 우리의 시선은 더욱 난해해진다.

죽음 같은 깊은 잠에 들고 싶다는 에구치의 소원에는 죽음의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 있음을 보게 된다. 노년의 에로티시즘, 즉 죽음과 성, 그리고 어머니의 자궁으로 이어지는 이 환상적 관능의 서사시는 삶과 죽음으로 이어지는 경유지대인 그 회색지대를 이해하게 해주고 고뇌를 쓰다듬어 준다.

반면 마르케스의 노인은 보다 적극적인 삶을 추구한다. 자신의 아흔 살 생일을 자축하기 위해 성적 희열, 일락(逸樂)을 선물한다. 매음굴에 처녀를 주문하는 노인의 욕망은 에구치의 출발과 다르다. 또한 다섯 차례에 걸쳐 매번 다른 아가씨와 동침하는 에구치와는 달리 그는 단지 열네 살 소녀에 대한 사랑으로 치닫는다. 환희와 열정, 희열이 뒤엉킨 새로운 사랑, 삶의 역설적 복귀이다.
잠자는 여인들은 그녀들의 상대가 누구인지 알지 못한다. 이는 노인들의 수치심과 교묘하게 교차한다. 또한‘죽은 듯이 자’는 여체는 살아있는 생명이지만 또한 죽음이기도 하다. 이러한 도식이야말로 노인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더할 수 없는 장치일 것이다.

대문호인 가르시아 마르케스가 “이것이 내가 쓰고 싶었던 바로 그 소설”이었다고 야스나리의 『잠자는 미녀』에 매혹되었듯이, 그의 『내 슬픈 창녀들의 추억』또한 노년의 고독과 에로스와 죽음의 관계성을 이해시켜준 걸작중의 걸작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마르케스의 작품은 수년전에 읽었던 것이지만 그의 작품의 기원이 된 야스나리의 작품을 당시에는 읽을 수가 없었다. 몇 년 후에야 『잠자는 미녀』가 국내에 번역 출간되었는데, 그나마 조기 품절되고, 다시금 초판 2쇄가 얼마 전 출간되었음에도 이 역시 일시에 품절되어 구하는데 애를 먹었다. 어렵사리 손에 넣고 나니 그 독서 맛이 여느 작품보다 더욱 깊다. 이 여운을 오래 지속시키고 싶은 탓에 작품의 본격적인 감상을 미루고 있다. 이 두 거장의 작품은 오랜 감동과 이해를 내게 보존하라고 말하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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