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전 - 관념 속 역사
데이비드 아미티지 지음, 김지훈 옮김 / 글항아리 / 202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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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권자 시민에 반(反)하는 자, 그 무리가 폭도요, 반란자다!


우리의 생각 속에 내전(內戰;civil war)'은 어떤 뜻으로 이해되고 있을까? 그리고 어떤 의미를 지녔을 때 그것을 내전이라 부를까? 바로 그 어떤 의미에 대한 모두가 동의하는 정의가 가능한 것일까? 유사한 현상에 붙이는 단어로 소요, 봉기, 폭동, 반란, 민란, 혁명, 내란 등등이 있다. 내전과 이 유사한 명명들의 차이는 무엇인가? 이 차이를 구별하는 명확한 의미의 경계나 정의가 과연 존재 가능한 것일까? 이러한 물음에 대한 역사적, 정치적, 법적, 사회학적 규명이 이 책의 의의(意義)가 될 것 이다.

 

어떤 개념어를 두고 한 영토 경계 내의 통치 권력을 차지한 소수 권력집단과 다수의 시민집단은 서로 다른 의미를 부여하고 해당 단어를 자신들의 의지에 따른 뜻으로 자리매김하기 위해 다투어 온 것이 역사의 한 궤적이라 해도 무방할 것이다. 비근한 예()가 검찰독재권력의 수장인 자가 뱉어내는 정의(justice)라는 개념어에서 드러난다. 정의라는 말에 대해 대다수 시민들은 구조적 불평등의 심화나 사회적 약자의 불안정성 증가에 대한 우려의 차원에서 간과되곤 하는 평등적 정의로써 공존과 공생, 공유의 윤리를 확산, 정립하고자 하는 의미라고 이해한다.

 

그러나 통치권력을 장악한 이 불의한 권력은 능력주의에 따른 차등 보상의 공고화라는 의미에서 이 개념어를 정의한다. 기득권의 항구 유지를 위한 비례적 정의를 통한 격차의 확보가 곧 正意라고 하는 것이다. 이처럼 명백하게 보였던 하나의 개념어 定意에서조차 그 뜻은 극단적으로 다른 의미로 작용한다. 결국 의미화 권력을 다투고 벌어지는 개념어 전쟁이 인간의 역사에서는 그친 적이 없다는 점이다. 이 책 내전(civil war)'은 이러한 첨예한 의미화의 역사적 현장을 탐사하며 21세기 오늘, 왜 이 단어의 표준적 정의의 마련이 중대한 것인가를 논의한다.

 

내전이라 번역되는 'Civil War'전쟁(戰爭)이라는 적대적 행위와 동일한 정체의 경계 안에 함께 살고 있는 시민의~ 또는 동료의~’라는 긍정적이고 우호적인 단어가 결합한 모순어법의 기이한 단어. 어제의 가족, 친지, 이웃에게 무력을 행사하는 이 그악스런 행위에 내전이라 명명한 기원을 기원전 2세기 고대 로마로 삼고 있는데, 이는 이에 앞선 고대 그리스의 도시국가 전역에 퍼진 일종의 질병으로 투키디데스가 묘사한 스타시스(stasis)’는 친족 및 동족 간 분쟁으로서 내분이었음에도,  "공통의 복종을 요구하는 정치적 통일체인 중앙 기관이 존재하지 않았" 시민권 관념이 부재했으므로 시민간의 전쟁이란 있을 수 없었다는 점에 기초한다. 이 고대사회의 내전에 대한 정의, 그리고 이후 근대적 의미의 내전에 이르는 기본 정의로서 시민권이라는 동일 정체성의 경계 내 주권적 주체간의 다툼에 두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로마인은 자신들의 영토 내에서 그치지 않는 동족간의 분란에 대해 합당한 이름을 붙이고자 했는데, 그것은 단일 정치 공동체 경계 내에서 벌어진다는 것과 대립하는 당사자가 적어도 둘은 있어야 하며, 한 쪽은 공동체를 관리할 정당한 권리를 지니고 있다는 개념을 지닌 전쟁으로서 이것을 '벨룸 키빌레(bellum civile)', 'civil war(내전)'라 명명했다.  로마가 창안한 이 모순으로 가득한 재앙(災殃)적 반복을 문명화의 근본적 구조로 이해하였다는 것이다. 이후 유럽인들은 내전을 문명권의 특징적 표지로 이해하여 문명화된다는 것은 곧 내전을 치를 수 있다는 의미로 이해하였다는 얘기다. 이러한 로마식 내전 개념은 17~8세기 유럽 역사 내 많은 다툼의 토대로 사용되었는데, 이에따른 논의의 활성화로 내전은 역사학, 정치학, 법학, 사회학 등 다양한 학제에서 경쟁적 논쟁의 개념이 되었다.  내전은 되풀이되고 연속적으로 발생한다는 역사학적 이해로부터 엄밀한 정의의 틀 내에 한정하여 법적 절차에 따라 규제하려는 법학의 노력, 전 지구적 현상으로 이해하고자 하는 사회학의 연구 등 그 개념적 논의는 확장 되었다.

 

오늘 한국 정치사회의 실체적 측면에서 주목케 하는 역사적 장면이 있는데, 영국 시민혁명으로 부르는 것에 역사학파들간의 논란이 있는 1649년 영국 국왕 찰스 1세와 시민의회가 각자 주권적 권위를 주장하며 벌인, 소위 코먼웰스(Common wealth, 국가) 내부에서 시민에 맞선 전쟁이 주는 정의의 문제이다. 의회는 중대 반역죄를 내용으로 국왕을 기소하였는데, 그 내용은 이렇다.

 

현 국가가 누리는 자유를 완전히 전복시키려 했고, (...) 전제적이고 압제적 정부를 도입하려고 시도했던점과, 이러한 계획을 관철시키려고 동원했던 모든 악덕 이외에도 이 모든 일을 불과 검을 이용해 행했으며, 의회와 국가에 맞서 잔인한 전쟁이 벌어지도록, 나라가 계속 병들어가며, 국고가 고갈되고, 무역이 쇠퇴하는 한편...“등 그 전횡의 내용이 계속된다.

 

이 사건은 누가 반란자인가 하는 문제에서 주권의 권위를 시민 의회가 지니고 있음의 역사적 증거이기도 하지만, 찰스 1세가 벌인 전쟁을 내란이라 정의함으로써, 국왕이 자신의 신민을 상대로 전쟁을 했다는 것은 주권적 권위에 대한 반란으로 이해했다는 점이다. 즉 반란에 직면한 쪽이 의회였다는 점에서 1649년 영국 의회가 합법적이고 정의상 주권적 권력의 대표였음을 선언한 중대한 전환점으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이는 국민 주권의 대의기관으로서 선출된 입법기관인 국회를 능멸하는 행위는 곧 반란으로 해석할 수 있는 중대한 지표로 해석될 수 있다는 점이다.

 


인민이 세우고 그 외의 그 누구도 세울 수 없는 권위를 파괴하며, 인민이 권위를 부여하지 않은 권력을 도입하여 실제로 전쟁 상태를 야기하는 것은 반란이 된다. 통치자의 공권력 불법 사용은 곧 인민의 저항권을 정당화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한국 헌법학자들이 대통령의 통수권을 어떻게 해석하고 있는지 알 수 없겠으나 현재 벌어지는 한국정치의 난맥상은 현 통치자에 대한 반란죄를 충분히 검토할 수 있으리라 여겨진다. 세심히 검토되어야 할 부분이다.

 

여기서 전쟁상태를 야기한다는 의미는 무력 화기를 동원한 물질적 전쟁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오늘의  정치 자체가 언제나 덜 치명적인 수단으로 치르는 내전의 형태이기에 조금 수사적 표현으로 말한다면 사회적 자살에 이르게 하는 탐욕과 공격적 정치적 적대 행위 일반이 내전의 표식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책은 2000년의 역사를 관통하며 내전의 의미화를 둘러싼 정의의 변화를 열거한다. 1580년 네덜란드 독립전쟁에서 1861년 미국(남북전쟁)내전, 1991년 유고슬라비아 분리 독립 운동 등 수많은 여러 형태의 전쟁 성격을 규명하고, 이러한 전쟁들에 내전이라는 의미의 명명을 둘러싼 헤게모니 투쟁의 이면을 바라보게 한다. 사실 내전을 엄밀히 정의하려는 시도는 시민의(civil)’전쟁(war)’이라는 두 단어 자체에 부과된 개별 속성만으로도 논쟁적 개념이듯 실패할 수밖에 없다.

 

()육군 야전교범에 정해놓은 내전은 동일 국가 내 파벌 간 벌어진 전쟁이며, 교전 당사자들은 영토를 점유하고 있어야 하며, 대외적 인정을 받은 제 기능을 하는 정부가 존재해야하고, 주요 군사작전에 동원되는 식별 가능한 정규군대를 보유해야 한다고 정의하고 있다. 그런데 이 분류법은 오늘날 비대칭전을 벌이는 무수한 분쟁을 전혀 설명하지 못하는 특수하고 아주 드문 경우의 내전(미국 남북전쟁 같은)에만 들어맞는다.

 

인류 역사 내내 정의해온 당대 지성들의 내전 정의들을 살펴보다보면 한결같이 시대적, 당파적 의미를 넘어서지 못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정확히 어떤 특징에 우선순위를 두어야 할지 인류사회는 합의된 바 없으며, 특정 분쟁을 어떤 틀에 맞춰 일률적으로 적용(사회적, 정치적, 법적)할 수 있을지에 대해서도 합의된 바가 없다. 이처럼 정치적 해석에 불가피하게 의존할 수밖에 없는 명명임에도 불구하고 오늘의 세계는 어떤 원칙적 정의와 본질적 요소의 규명을 외면할 수만은 없는 환경에 도달해 있다.

 

그 가장 중요한 요인은 내전 자체가 점차 형식상 국경을 초월해서 벌어질 뿐 아니라, 영향 측면에서도 전 지구적이기 때문이다. 소위 국제적 내전의 성격을 띠고 있기 때문이다. 한나 아렌트는 혁명론에서 세계 전쟁은 마치 혁명에 따른 결과이자 전 지구에 걸쳐서 폭위를 떨치는 일종의 내전처럼 보이는데...”라고 썼다. 오늘날의 전쟁은 모두 지구적 내전으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초국가적 테러리즘의 발흥, ()전쟁 수준의 폭력의 일상화, 비정규전의 급증, 대리전의 양상 등 좀 더 유연한 전쟁 개념의 고안과 같은 상황의 변화로 내전 범위의 한계가 풀려 그 범위가 계속해서 늘어나고 있는 현실이기 때문이다.

 

이제 내전은 동일 영토 경계 내 시민간의 전쟁이라는 정치적 정의의 함의로서만이 아니라 국제사회로부터 조치를 촉발할 수 있는 법적 함의가 내포되었기에 근본속성의 설정은 더욱 중대하게 되었다. 이것은 국제연합과 산하전문기구에서 집행하는 인도적 지원뿐 아니라, 국제사회의 개입을 야기하는 국제전, 지구적 내전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어떤 분쟁에 내전이라는 딱지를 부착할지의 여부에 따라 경제적, 정치적 이해관계가 결부되기에 정확한 정의의 제시에 대한 압박이 증대하고 있다.

 

내전이라는 명칭 자체는 고대 로마의 명명 이래 그 명칭 자체만을 의미하지 않는 시대가 되었다. 통치권의 불의와 부패가 지속적으로 자행될 때 이에 저항하여 일어난 시민의 봉기를 단순히 폭동이나 소요, 내란이라는 범죄적 행위로 일축하여 폭력을 행사하게 되면 내전이라는 정당한 의미를 은폐하게 된다. 반면 진압되거나 맹렬히 비난받았을 폭력의 유형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왜곡이 발생할 수도 있다. 이는 내전으로 불릴 경우 이를 수행하는 전투요원을 국제법은 보호할 의무로 규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내전으로 명명된다면 국제사회가 개입하여 외부 지원이 이루어지게 되고 분명 모호하고 정치적 영향이 섞여들기는 하겠지만 올바른, 정당한 세력을 위해 지원토록 하기 때문에 매우 중대한 의미를 갖는 것이다.

 

내전은 이처럼 상당히 논쟁적인 개념이지만 인도주의적 규제를 추동하는 자극으로 국제사회가 공식적으로 언명함으로써 하나의 중대한 개념주체어로서 위상을 확립하고 있다. 내전을 규정하는 모든 정의는 필연적으로 상황적 맥락을 반영하는 서로 대립적인 단어다. 결국 문제는 어디서부터 대립되는 이해가 발생했는지, 각각의 이해가 무엇을 뜻하는지, 그 명칭으로 불리게 된 일을 겪는 사람들이 체험한 경험으로부터 그 이해가 왜, 어떻게 발생했는지를 묻는 것이다. 이제 내전은 동일 정체를 가진 영토 경계내의 전쟁만을 의미하지 않으며, 또한 무력 충돌만을 의미하지도 않는다. 그 시공간이 확장되어 지구화 내전이라 불리고, 언제나 덜 치명적 수단으로 치러지는 정치 자체도 내전의 한 형태로 인식되는 세계가 되어있다.

 

결국 내전의 복잡 미묘한 정의에 집착하기보다 내전을 이루는 본질적 요소를 찾으려는 시도를 통해, 이 용어가 제시하는 무수한 의미들을 어떻게 줄이고 가다듬어 다루기 용이한 수준으로 만들어 낼 수 있는가가 우리의 과제가 될 것이다. 내전은 인류가 모면하기 어려운 유산(流産)임에 분명하다. 경쟁심, 탐욕, 공격성, 자신의 창자에 스스로 검을 꽂는 인류의 운명을 우리들은 너무도 잘 알고 있다. 어떤 대상을 이해한다는 것은 비슷하지만 다른 사물로부터 구별해내는 일을 뜻한다. 때문에 무엇으로 인해 그 대상이 특색을 갖는지 알고 나면 그 대상의 양식(樣式)과 나타나는 연속성과 차이를 인지 할 수 있게 되며 이해를 증진시킬 수 있다.

 

통상 통치권을 지닌 기존 정부는 내전을 늘 반란이나 폭동이라 부르려 하고, 저항행위가 실패할 때면 더욱 그러하다. 반면 저항에서 승리한 측은 자신들이 벌인 투쟁을 혁명이라 부른다. 혁명가와 반역자는 없다. 다만 동료 시민간의 내전이 있었을 뿐이다. 지금도 한국사회는 극렬한 내전을 치루고 있는 중이다. 주권자인 다수 시민의 정의에 반하는 소수 검찰독재권력의 불의에 맞선

하나의 개념을 둘러싼 끊임없는 논란을 써 내려간 이 저술은 인간들 사이에 벌어지는 가장 비참하고 잔인한 동족간의 전쟁에 대한 이해를 제고시켜 준다. 그 전쟁을 줄이고 사라지게 하기 위한 요인들을 독자들은 이 책을 통해 분명 사유하고 발견해 낼 수 있으리라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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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과 이야기하다, 언어와 춤추다
이시다 센 지음, 서하나 옮김 / 1984Books / 202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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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언가 생각의 말로 포장되기 시작하면 글의 작위성으로 청결함을 잃는 것 같다. 이러한 마음이 들게 한 것은 이 낯선 일본 중견 소설가의 글들이 맑고 깨끗하다는 느낌 때문에 떠오른 생각이다. 몸과 언어, 아니 무엇이 이야기하고 춤추는지와 무관하게 함께 어울려 꾸밈없는 한 여인의 사계절 삶의 모습이 잔잔히 흐르는 스물두 편의 에세이를 읽다보면 어느새 더불어 투명해진 자신을 느끼게 된다. 이처럼 이시다 센(石田 千)’의 글들은 만지고 듣고 춤추는 관능의 언어들이 숨 쉰다.

 

이 글을 읽게 된 동기는 책의 머리말 격으로 써진 한 문장의 글 때문이었다.

 

나그네는 몸에 몇 개의 씨앗을 품은 채 고향으로 돌아간다.”

 

그리곤 나그네의 몸에 딱 달라붙은 씨앗은 바다를 건너고 그네와 함께한 오랜 삶의 여행조차 잊어갈 무렵 작은 정원에 자그마한 꽃이 핀다.” 그 활짝 핀 꽃은 추억이라는 여행의 기억들을 품고 있을 게다. 항구 마을에서 부른 멜로디, 즐거웠던 술집의 활기, 만났던 이들의 그리운 얼굴들..., 이 에세이는 바로 이러한 씨앗의 언어들이다.

 


눈을 떴더니 명치에 물거품이 맺혀 있었다.” 그녀는 떨어지지 않도록, 터지지 않도록, 조심조심 일어난다. 그러나 잃어버리는 매일을 붙잡고 싶은 당치도 않은 소망이라며 단념한다. 그녀는 안다. 본능적으로 움직이는 순간에는 천만가지 말도 소용없다는 것을, 그래서 만지고 감쌌던 이러저런 것을 글로 남기고 싶어 발버둥 치는지 모르겠다고. 홀로 향하는 아득히 먼 생이 다할 때 까지 이 여행을 지속하겠노라고.

 

글들은 해맑고 빛이 투과할 만큼 투명하다. 그리고 말 앞에 그 어떤 형용이 없어 정갈하고 깨끗한 느낌에 내 몸과 마음도 글을 닮아 햇빛이 통과하는 듯하다. 그녀는 도서관에서 책을 읽다가 등지고 들려오는 소리로 동작을 읽을 줄 안다. 고요할 때 눈보다 귀가 더 잘 본다며, 그녀는 등의 시력이 남아있어 다행이라고 즐거워하는 사람이다. 내 등시력은 남아있을까?

 

글에는 사랑도 가득히 실려 있는데, 감기 걸려 홀로 뒹굴며 좋아하는 사람 곁에 머물고 싶으니, 얼른 빨리 낫고 싶다.”며 몸인지 마음인지 모를 언어를 그 어떤 술책도 없이 발설하고, 당신이 나오는 꿈을 꾸었다는 문자에 대해 어떤 얼굴을 하고 있었을까? 예의 바르게, 기분 좋은 얼굴을 하고 있었을까? (...) 꿈에까지 찾아갔다니 참 한심하다.”, 수줍은 사랑의 밀어를 말하는 중년의 그녀가 귀엽기까지 하다.

 

그런가하면 뜨겁게 달군 철 프라이팬에 고기를 집어넣고 지글지글 굽는 듯한 과분함으로 누군가를 좋아하게 되었다.”며 다시 불을 붙이기를 무서워하기도 하고, 좋아하던 모든 것이 희미해지는 마음이 식어 실망하는 일을 견디기 힘들어하는 자신을 책망하기도 한다. 마흔 중턱의 나이가 되면 자신이 얼마나 자주 마음이 식었는지 알게 된다. 그래서 작가는 자신의 마음이 식어 아무렇지 않게 될까봐 두려워하고 스스로를 싫어하게 되는 슬픔이 침범하지 않도록 경계한다.

 

이 에세이에는 좋아하게 된 문장들도 수두룩한데, 할머니의 유골을 흙으로 돌려보내던 기억에서 연유한 글인데, 새벽녘의 길은 이제는 돌아가지 않아도 되는 어두움, 깊은 잠이 들면 흙과 동화된다. 진짜 집은 차갑고 좋은 냄새가 난다. 이후에도 흙이 말끔하게 해 줄 것이다.”라는 이 문장이 고단한 삶의 여정의 끝에서 마주하게 될 미지에 대한 혼란스러움을 평온하게 만들어주었던 까닭일 것이다.

 

【 「기다리다(まつ), 93쪽에서


글들은 슬픔과 신산한 외로움이 한 겹 흐르고 있음에도 더없이 맑은 미소를 떠나지 않게 하는데, 아코디언의 주름상자처럼 점점 길쭉하게 늘어났던 상냥한 이의 부드럽고 따뜻한 쓰다듬음에 히죽히죽 웃음이 날 정도로 기분이 좋았다고 말하는 그 진솔한 몸의 언어가 내 모난 영혼을 쓰다듬어 주는 듯했기 때문이다. 또한 여행에서 돌아오는 버스에서 술 취한 여자가 연인과 엉켜 있는 모습이 좀 좋았다며, 나도 중년 여성이니 다른 사람이 하는 방식을 잘 보아둔다고 할 때 절로 그 거짓없는 마음에 빙그레 공감하며 내심의 응원을 보내기도 했다.

 

살아있음에 언제부턴가 미덥지 않음을 느끼기 시작했다. 마흔일곱 여성, 이시다 센의 글은 서툴지만 그런 기분을 토닥이고 다스리는 내면의 고백들이기도 할 것이다. 그녀는 달리는 것의 반대는 걷는 것도 멈추는 것도 아닌 식는 것이구나.”라며, 그걸 깨달았을 때, (....) 더 울었다.”고 쓴다. 글들은 마치 행복의 증거처럼 목소리 없는 풍경들로 가득해서 힘을 빼고 오감을 잠시 한쪽에 내려놓은 안락함에 빠지게도 한다. 그녀의 들리지 않는 파장을 느끼며 작위가 미치지 않는 곳을 더듬어가는 것만으로 충만한 그런 시간이 되어주는 글이다. 고향 정원에 핀 꽃이 들려주는 나른한 꿈결같은 몸의 언어에 취하게 하는 청결한 글이다. 읽는 이의 마음도 어느덧 추억의 이미지들에서 서성거리고 있을 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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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보다 : 여름 2024 소설 보다
서장원 외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2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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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절마다 간행되는 소설보다는 내게 한국 문학(소설)을 체감하는 하나의 작은 통로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작가들 작품을 읽으면서 내가 품고 있는 언어와 그 개념에 대한 의미의 틈이 벌어졌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세상을 보는 관점, 관심사, 시대가 앓고 있는 현상들, 등등. 그렇다고 근대적 이해에 도전하는 모든 개념에 대한 저항으로서의 보수적 편협성에 집착하고 있다는 것은 아니다. 나는 여전히 유토피아를 꿈꾸는, 현실과 불화하는 희망의 전사이기를 그만 둔 적이 없으니까 말이다. 때문에 나는 내 벌어진 개념의 틈을 이들의 연결하려는 노력과 지혜로부터 배운다.

 

서장원 작가의 리틀 라이프와 예소연 작가의 그 개와 혁명두 작품은 이러한 생각(개념과 의미의 틈)을 하게 골똘하게 만들었는데, 전자는 그 어느 시대보다 강력해진 타자의 시선이 개인 삶에 작용하는 영향이 비대해졌다는 것에 대한 것이고, 후자는 바로 그 벌어진 간극이 틈새가 아니라 의미작용의 변화라며 어떤 유대의 가능성을 주시하게 했다. 이와 달리 함윤이 작가의 천사들(가제)은 두 작품과 결이 다른 익숙한 주제로서 이별과 상실을 마주한 존재의 애도와 회복의 힘에 대한 것으로 여겨졌다.

 

예소연 작가의 그 개와 혁명

 

이번 여름호에 관심을 가진 이유는 내가 좋아하는 예소연 작가가 이끈 것이고, 그 호감의 정체는 조금씩 성장해가는 내적 단단함 속에 내재된 어진 마음의 인물이 어른거리고 있다는 내가 간직한 인상 때문이다. 가장 최근에 작가의 작품을 접한 것은 소설보다 2023, 겨울호에 실린 우리는 계절마다에서 인데, 이 소설의 문장에는 그 이상한 낙차라는 불가해한 타자의 힘과 벌어진 간극이 발산하는 견디기 힘든 그 무엇을 의미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 개와 혁명은 바로 이 낙차, 간극의 이해에 대한 이야기로 읽힌다. 암으로 죽음을 향해 있는 아빠 태수 씨58년생 민주화 운동을 하던 인물이다. 아마 화자인 맏딸 수민이 듣고 자랐던 노동가치니 혁명이니 하는 무언가 도모하는 말들이 시대착오처럼 여겨졌을 것이다. 물질적 풍요와 소비주의에 안주한 지금의 세대에게 이러한 말처럼 낯선 것도 없으리라. 아마 이 시대적 언어를 에워싸고 현재의 삶에서 이것들이 말 되어야 할지 아닐지에 대한 설득의 이야기라면 이 소설은 무척 재미없었을 것이다.

 

남자가 무조건 집을 해 와야 한다는 게 요즘 여자애들 생각이니?”, ‘요즘 여자애들’, 태수씨의 범주화된 언어들이 벌여 놓은 간극, 수민은 태수씨에겐 치열했던 삶이 있다면 자신에겐 참고 견디는 방식으로 이어져 온 삶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녀는 한 사람의 역사에 대한 이해가 그를 미워할 수 없게 된다는 것을 안다. 두 부녀는 함께 울고 웃으며 사랑을 확인하며, 삶을 살아가고자 하는 뜻, 의지, 그런 것들의 동일한 서로 다른 언어임을, 그래서 언어의 벌어진 틈이 이어진다.

 

소설은 죽음을 버티면서 삶을 버티는 행위로써 계획되었던 맏딸 수민이 상주로서 태수씨의 장례식을 치루는 한 바탕 즐거운 소동으로 대미를 장식하는데, 아빠 태수씨의 언어로 수민이 우리의 적은 제도잖아라고 발설하는 장면은 서로 다른 정치적 감정이 변화하는 시대의 다른 언어의 합일같아 영정 사진을 보며 웃는 수민과 같이 나도 활짝 웃었다. 세대의 차이를 웅변하는 서로 알지 않으려는 세상에 연결의 지혜를 말하는 슬프지만 경쾌한 이야기로 내게 남아 있을 것 같다.

 


서장원 작가의 리틀 라이프

 

소설은 퀴어 프렌들리한 콘셉트를 내세운 빈티지 의류를 거래하는 온라인 중개회사에 입사한 남성 트랜스젠더 토미를 통해 이 세계에 벌어진 인식의 틈을 보게 한다. 예소연의 작품이 언어와 의미의 틈을 말하고 있다면, 이 작품은 인식과 감정의 틈을 생각게 한다. 또한 겉모습이라는 시각적 물질성으로서의 인간이 마치 세계의 존재조건처럼 작동하는 세계가 또다른 틈처럼 보인다.

 

길거리에 빈티지 의류를 멋스럽게 차려입은 사람들을 인터뷰해서 올린 동영상으로 회사를 홍보하는 소셜마케팅 팀 오스틴이란 인물은 164센티미터에도 미치지 않는 작은 키로 외모가 멋지지 못한 남자다. 자기 연출에 뛰어난 남자로서 뭇 사람들에게 호감을 주지만 매혹을 일으키는 존재는 아닌 것이다. 화자인 토미는 트랜스젠더 남성으로서 미약한 동지애를 느낀 동료로 가까이 한다. 한편 트랜스젠더인 토미는 성전환을 위한 탑 수술만 마친 아직 완전한 신체적 남성으로의 전환을 한 상태가 아니다. 그는 퀴어 퍼레이드 행렬의 잘 다듬어진 남자들을 서글픈 심정으로 지켜보며, 그들처럼 웃통을 벗고 싶지는 않았다.”고 생각한다.

 

이 작품이 성소수자로 불리는 트랜스젠더 남성을 주인공으로 하고 있지만 나는 오스틴, 토미로 대표되는 인물을 통해 시사하는 그들의 갈망인 매혹하는 존재, 즉 타자의 시선을 집중시키는 존재로서의 욕망에 주목했다. 경쟁의 승패가 외적 이미지로 갈리는 세계에 잠식당한 세상이다. 인터뷰이와 스캔들에 휘말림으로써 정직을 받게 된 오스틴은 자신의 콤플렉스인 신장을 늘리기 위해 사지연장 수술을 하고, 화자가 전 여자친구 혜령에게 성전환 헐리웃 배우의 트랜지션 시기에 대한 토를 달며 외모(신장)가 성공의 한 요소임을 말하는 장면은 세태를 대변하는 것만 같아 씁쓸하다. 시대를 지배하는 인식 속에서 당사자의 고통을 생각해보라고 얘기하는 이도 있을 것이겠지만 왜 이러한 지배적 시선에 길들여져야 하는가, 이러한 시선에 저항하고 다른 길을 개척하려하지 않는가를 생각해 보았는가라고 반문하고 싶다.

 

소설은 분명 좋은 여자도 만나고요, 페미가 아닌 좋은 여자처럼 오스틴의 여성 혐오 발언을 통해, 화자가 반감을 지니게 되는 지점을 알리고 있지만, 화자가 더욱 오스틴에 절망하는 이유는 그가 병원 침대에 누워 토미의 탑 수술을 인지하고 있었다며 우린 그러니까, 전우 같은 거잖아요라는 말에 아니요...저는 다르다고 생각해요, 전혀 달라요.”라고 반발하는 장면에 더 시선이 간다. 아마 이 반발하는 마음은 성의 전환과 신체의 외형적 수술은 그 가치나 지향점에서 결코 같은 것이 아니라는 생각일 것이다. 사실 쳇바퀴 돌 듯 퀴어 문제와 관련한 작품들은 한결같이 편견 없음이 편견이고, 편견 있음 또한 편견이라는 말로 외부 시선을 모두 싸잡아 비난하는 논조들로 가득하다. 물론 타자가 겪는 감정적 고통에 대한 섣부른 예단적 이해가 무례일 수 있다. 그렇다고 소설 속 혜령의 편견 없음이 오히려 몰이해라고 말하는 것은 지나치게 이기적인 발상인 것만 같다. 화자는 이러한 생각을 너무나 집요한 생각이라 말하고 있지만, 자기 성찰을 발견하기는 어렵다. 이 작품은 틈새를 연결하거나 매우기는커녕 그저 그 균열의 빈 허공만이 더욱 두드러져 보인다. 작가의 의도와 다른 오독이라면 좋겠다.

 

함윤이 작가의 천사들(가제)

 

이 단편 소설의 제목이 아직 확정되지 않았다는 말로서 가제가 붙었는지, 아니면 소설 속 세 조로 나뉘어 연기되는 단편영화의 각본이 미완결 상태임을 말하는 것인지, 아무튼 소설의 제목은 소설 속 영화 각본의 제목이기도 하다. 화자 는 친구 항아의 장례식 참석을 위해 무궁화호 열차를 타고 다섯 시간의 부산 여정에 오른다.

 

화자 는 기차 여행 중 창문에 머리를 기댄 채 꿈속에서 항아와 함께 제작하는 단편 영화를 위해 세 사람씩 한 개조로 구성하여 캐스팅을 위한 오디션을 진행한다. 남녀 두 여인과 한 명의 천사로 이루어진 즉흥극이 조별로 연기한다. 그런데 오디션을 진행하기 전에 열 명이 참가한 것으로 화자는 생각했지만 실제로는 아홉 명만이 참석한다. 화자의 생각에 사라진 한 명은 보이지 않는 어떤 미지의 존재로서 즉흥 극 속의 천사와 동형의 존재를 암시하는 것 같다.

 

즉흥극의 내용은 이렇다. 사랑하던 연인이 어떤 갈등으로 인해 이별하려 할 때 이를 중재하는 것이 천사의 역할이다. 각 조는 자신들만의 각기 다른 내용으로 열연한다. 이때 보이지 않으니 그 존재를 지각할 수 없는 이별하는 연인들에게 직접적 화법이나 행위로 영향을 미칠 수 없는 천사의 역할은 불가항력이지만 미세한 변화를 야기한다. 나는 이 소설에서 무대 속 천사와 화자가 꿈속에 느끼는 열 명 째 존재로서의 천사, 이렇게 두 명의 천사만을 인식했으나 작가와 인터뷰를 나누는 이소 작가의 해석에서 또 하나의 천사가 존재하고 있음에 뒤늦게 동의하게 되었는데, 화자가 꿈속에서 빠져나오게 하는 열차의 안내방송이나 철도 여객원으로 느껴지는 누군가에 의해 다시금 꿈의 진행을 돕는 어떤 힘으로서의 천사다.

 

이 천사의 존재를 화자는 장례식에 온 선배에게 묘사하는 데,  서로 엉겨 붙는다, 나뉘어 떨어진다. 수면으로 올라가면 사라진다. 드물게 잔 밖으로 튀기도 한다. 밖으로 튄 방울은 손등에 스민다.”고 유리잔 속 부글거리며 끓어오르는 기포들에 비유한다. 그리고 화자는 항아와 함께하는 오디션의 캐스팅이 종료되기 전에 꿈이 종결될까 안절부절하며 종착역에 이르기까지 집요하게 꿈속으로 향한다. 어쩌면 이 두 제재에 내재된 연약한 소통이 이 소설의 어떤 애절한 애도의 감정들을 견인하고 있는 것이라 느꼈다.

 

사실 이 작품은 두 작가의 인터뷰가 아니었다면 많은 것을 놓치고 읽었을 것 같다. 나와 너의 만남과 이별, 그리고 그 속에서 발생하는 수많은 자잘한 사건들, 이것들에 작동하는 보이지 않는 어떤 미지의 힘, 그것은 소설 속 화자의 애도의 감정일 수 도 있고, 사람들과의 관계 속 작가가 말하는 시절 인연일 수 도 있을 것이다. 그리움과 인연에 대한 아스라함이 한 편의 기차여행 속 꿈결처럼 그려진 아름다운 작품으로 기억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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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여름에게 에세이&
최지은 지음 / 창비 / 202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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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들여다보는 일이 한 사람의 눈을 지그시 바라보는 일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 104, 나는 얌전히에서

 

이 책은 어두운 구멍에 던져 졌던, 아니 작은 상자에 넣어두었던 고유한 상실과 상처의 기억들 속에서 사랑을, 존재에 대한 연민을 길어 올리는 치유와 회복의 기록이라 말 할 수 있지 않을까? 고통을 껴안고 걷고 있는, 그것에 사랑이 깃들어 있음을 알기에, 없음(不在)에서 획득할 수 있었던 마음, 그 돌멩이를 움켜쥔, 불안이 끝나지 않기를 기도하는 시인을 나는 짝사랑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는 시인의 그리움과 사랑의 간절함에 울음을 운다.

 


소금물을 끓여 절인 오이지가 맛있다는 말에 손녀를 위해 한 솥 끓는 소금물을 내리다 큰 화상을 입은 할머니, 손톱을 둥글게 잘라주던 아버지, 어린 시인을 돌보았던 두 분의 죽음을 기억하는 그 쓸쓸함이 너무 맑고 깨끗해서 아파 나도 운다.

 

다섯 살, 아홉 살, 열두 살, 할머니의 보살핌 속에서 외로이 성장해야했던 서러움과 가난, 비뚤어진 성정의 어설픈 어른들의 눈총을 겪어야 했던 외로운 소녀, 불안과 결핍과 부재들이 부과했던 어린 시인의 상처들에 의해 성장한 시인은 그 기억 속 어린 시인을 안아준다.  놀면서도 도망을 가고 가난하고 배고픈 이야기를 하는 기억 속 어린아이가 하던 인형 놀이가 이제 부끄럽지 않다고, 시인은 바로 그것들과 함께 했음을 다행이라 한다. 이 무수한 불안의 요인들이 자신의 성장을 만든 것들이기에 연민과 사랑을 보낼 수 있음을 시인은 알기 때문이라고.

 

이 책은 시인을 이룬 상실과 죽음, 그녀에게서 앗아간 것들을 완전하게 버리기 위해 기억의 심연 속에 흩어진 것들을 하나하나 주워 모아 그 지독한 슬픔과 상처들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는 엄숙하고도 간절한 치유와 회복의 작업이기도 할 것이다.  시인은 스스로 묻는다.  이토록 지독한 여름은 다 무엇일까요라고, 그리곤 답한다. 줄 곧 그 여름을 나 혼자 묻어두고, 꺼내보고, 또 한 겹 덮어두는 동안, 이 무서운 이야기는 저에게 그냥 사랑이었습니다.“라고.

 

상처를 가득 품고 있는 존재이지만 그것은 그저 슬픔이고 아픔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사랑도 있었다는 것을. 시인은 그래서 그 아픔의 모습들과 사랑의 실재들을 되돌아보며 자신을 지켜온 홀로의 힘, 스스로에 대한 사랑에 믿음을 보낸다. 그리고 상실과 죽음으로 잃은 보고 싶은 시인의 영원한 르트루바유(Retrouvailles)인 할머니와 아버지와의 재회와 사랑을 마음에 담는 일, 아마 그것이 곧 시인 자신을 지키는 것이고 자신을 사랑하는 이들을 지키는 일임에 대한 믿음의 기록이기도 할 것이다

 

시인의 해맑은 표정을 보는 내 마음이 좋다, 출처: 최지은 시인 인스타그램


모든 고통과 불안과 슬픔으로 구성된 자신을 꼭 안아주는 이야기다. 그럼으로써 조금 더 의연하고 용감해진 사람을 향한 조심스러운 걸음이기도 할 것이다. 나는 눈시울이 붉어진 채 마지막 페이지를 덮었다. 이시다 센(石田千)이라는 일본 작가는 나그네는 몸에 몇 개의 씨앗을 품은 채 고향으로 돌아간다고 말했다. 그리고 나그네가 여행했던 사실조차 잊어갈 무렵, 고향의 정원에서 자그마한 꽃이 핀다고. 시인의 마음 저 깊은 곳 어린이가 겪었던 구멍들과 어둠의 오고감, 그리고 바다가 출렁이고 파도가 또 오고 갈 때 시인의 이해처럼 사랑과 용기와 신뢰의 씨앗들이 지금 꽃을 피우고 있는 것일 게다. 나는 이 비밀 아닌 비밀의 책을, 그리고 시인을 그냥 좋아하게 되었다. 그녀만의 숨을 쉬는 시의 공간을 기대하게 된다. 간절함과 절실함이 담긴 사랑과 용기의 언어들을.  많은 독자들이 시인의 상자 속 언어들과 교감을 나누었으면 정말 좋겠다.

 

어린 나는 지금의 내가 아니다. 지금의 나는 어린 내가 될 수 없다. 우리는 

서로 달라졌다. 틈이 생겨버렸다. 구멍이 생겼고 어둠이 오갔고 바다가 출렁이고 

그 위로 파도가 오고 또 갔다. (...) 나는 그렇게 지금의 내가 됐다.”

-126, 오틸라, 제가 이룬 것을 보세요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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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아생트의 정원 문지 스펙트럼
앙리 보스코 지음, 정영란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2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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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여기 지상에서 찾은 태초의 정원이 있습니다.

 

그러나 곧 나는 그 애가 그의 손에서 벗어날 수 없으리라는 걸 돌연 깨달았다.

그는 그 애를 마치 짐승처럼 길들여 놓았던 것이다.”

13, 반바지 당나귀의 한 대목, 이 작품 이아생트의 정원

내적 유대를 암시하려는 작가의 의도로써 머리말 격으로 인용된 문장

 

누군가 혹은 무언가에 영혼을 빼앗긴 아이라는 섬뜩한 문장에 사로잡혔던 마음은 퓌를루브 아래 여러 오름 중 첫 언덕에 단단히 기대서 있는 평화와 신뢰 가득한 게리통 내외가 사는 아주 오래된 보리솔의 집에 이르기까지 마을과 풍경, 그곳에 사는 사람들의 고결한 아름다움이 펼쳐지는 문장들에 그만 압도되어 어느새 평생토록 간직할 수 있을 것만 같은 부드러워진 마음으로 바뀌어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리귀제라 이름 붙인 농가, 양 떼와 과원들, 가슴 따뜻하게 맞아주는 아멜리에르 마을, 늙은 신부의 어진 사랑이 가득한 성당, 끊어질듯한 샘물에 의존하여 참으로 적은 것만으로 살아가는 보리솔의 두 노인, 영혼이 끊임없이 새어나가 온갖 개념이 흘러내리듯 사라지는 무기력한 아이 펠리시엔, 고릿적부터 고독을 음미하며 그 추억을 지닌 채 고요하면서 생각깊은 옛 목자시대에 속하는 양치기 노인 아르나비엘, 배려와 열정적 사랑의 서열을 따르는 리귀제의 충직한 안 살림꾼 시도니까지 이들 모두의 침묵과 서두르지 않는 세심한 손길들과 심오한 감정들이 그 어떤 수다스러운 말의 향연을 초월하는 따스함과 평온으로 그득한 천상의 지혜를 펼쳐놓는다. 책을 읽어나감에 따라 생각의 소리를 전달하는 데 침묵이야말로 생각에 동반되는 깊은 의미임을 절로 깨달아가게 된다.

 

겨울과 봄, 그리고 여름, 가을, 계절에 따라 표상되는 자연의 정경들, 온갖 식물들과 동물들, 그리고 사람들, 이 모든 것들의 문장을 따라가다 보면 이 작품 속 아멜리에르와 리귀제, 보리솔, 그냥 거기 그렇게 있음으로 족할 만큼 기쁨과 행복감에 취하게 된다. 머리를 쥐어 짜낼 일도 없다. 물론 이 작품의 무수한 나무들, 꽃과 별과 뱀, 여우 등이 상징하는 종교적 영성의 의미들이 지상의 심원한 비의(秘意)들을 전달하고 있지만, 그저 꿈처럼 부드러운 구름 속으로 녹아드는 듯 초조함 없이 심취하면 그것으로 족하리라. 아마도 절로 가만가만해지고 목소리도 잦아드는 그런 포근한 솜처럼 감싸 안기는 듯한 그런 느슨함의 평화에 잠기게 된다.

 


이야기는 버리듯 맡겨진 텅 빈 시선과 생각과 말이 서로 교응交應하지 못하거나 혹은 간신히 교응하고 있는 듯한 무기력한 어린 소녀 펠리시안의 영혼을 잃은 비인격적 인간 존재에 대한 사랑의 여정을 한 축으로 한 지상에서의 삶의 축복에 대한 찬양일 것 같다. 시프리앵으로 표상되는 마법사 일기로부터 펠리시안이 영혼이 제거되고 그 영혼에 자신의 낙원을 실현하려 했으나 실패한 기록이 전해진다. 시프리앵의 태초의 정원을 완벽하게 재현하려는 시도는 좌절되고, 정원조성의 대상인 펠리시엔이 소녀 이아생트였음을, 그녀의 공허한 영혼은 잃어버린 천국, 인간의 가장 오래된 꿈의 실패한 반영이었음을 어렴풋 짐작케 된다.

 

이와 병행하여 작중 화자인 리귀제의 주인 메종의 현실과 꿈의 경계를 오가며 그의 주변에 펼쳐지는 지상의 풍경은 바로 지상에 실현된 낙원이다. 이것은 그를 신뢰와 배려로 섬기는 늙은 여인 시도니가 생에서 기다리는 것, 비록 그녀 생의 영혼은 다른 세상에 과녁을 두고 있지만 이 지상에서 열정적으로 기다릴 줄 아는 자의 표징 그것일 것이다. 소설은 더없이 아름답게 이야기를 종료하는데, 메종의 리귀제 별채에 찾아든 식물표본 채집을 한다는 수줍음을 실은 신중한 청년과 이아생트의 마주함이다. 청년은 펠리시엔을 바라보자 하느님...그리고 이아생트라고 그녀를 부른다.

 

이아생트는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는 가만있었다. 하지만 심연의 침잠된 고요를 뒤흔드는 생명력이 그녀의 두 눈에 솟구쳐 올라오고 있었다.” -388

 

아마 이 장면을 통해 실패한 태초의 정원은 지상의 정원, 인간 세계의 낙원으로의 가능성이란 바로 여기임을 말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마침 말라버렸던 보리솔의 샘은 다시 물줄기가 흐르고 아몬드 나무 한 그루가 꽃을 피운다. 이제 이야기의 거대한 조류를 장악하는 손가락 사이에서 공기가 빠드득하는 걸 느낄 수 있을 만큼 라일락빛 부드러운 하늘상쾌한 공기의 생기발랄한 빛으로만 어우러진 하늘이 벨벳처럼 감싸는 듯 뺨에 쾌적한자연의 기운에 심취한 읽기를 뒤로하고, 조각조각 손가락 사이로 새어나간 고귀한 상상력이 숨어있는 문장들을 세세히 다시 읽어나가야 할 것 같다


당나귀, , 시프리앵의 정원, 그리고 신비와 경이로운 풍광의 묘사 문장들이 발산하는 시적 메아리들을 음미하도록 숙독을 요청하는 마음의 외침이 격렬하기 때문이다. 켜켜이 쌓인 마음 떼가 씻겨 내려가 정갈해진 듯한 기분이다. 앙리 보스코의 작품을 읽는 독자들 누구든 작품 속 영혼들의 평온을 함께 누리는 시간이 될 것만 같다. 보스코의 이 소설은 모두에게 선익善益을 안겨주는 지혜의 총합이라 해도 무방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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