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에
에델 릴리언 보이니치 지음, 서대경 옮김 / 아모르문디 / 200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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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그러시오? 아직도 피가 충분치 않다는 것이오? 권력의 주구들아,

너희 차례를 기다려라. 너희도 곧 먹게 될 터이니!” -401쪽에서

 

이 작품을 읽기에 앞서 쇼스타코비치의 바이올린 협주곡으로 연주되는 등에(The Gadfly’)를 몇 차례 반복하여 들었다. 고독한 격정이 억제된 누군가의 삶의 풍파가 느껴진다. ‘에델 릴리언 보이니치의 이 소설(1897년 발표)1955년 영화화되자 영상 삽입곡으로 작곡되었던 것 같다. 음악을 듣고 소설을 읽는다면 작중 인물들의 내면에 다가가는데 도움이 될 것으로 여겨진다. 그 선율의 비장미로 이미 감응하는데 적합하게 예열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에델 릴리언 보이니치(Ethel Lilian Voynich), 1864~1960

 

소설의 시대적 배경은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등 외세의 억압과 통제에 대한 거센 저항이 시작되던 민족주의에 눈뜬 19세기 이탈리아다. 그러나 이것이 소설의 전경(前景)이라 할 수는 없을 것 같다. 저항과 혁명의 정신이 이야기의 토대로서 저변을 흐르며, 여인에 대한 사랑, 부정(父情)에 대한 그리움, ()과 속()의 갈림길에 선 신부의 고뇌를 통한 신을 향한 사랑의 문제 등이 서로 얽혀들며 내면에 깊은 상처를 안은 한 영혼이 뿜어내는 우정과 헌신성, 사랑이 진한 서정성과 감동을 일으키는 열정적이고 일견 낭만적이기까지 한 작품인 까닭이다.

 

때문에 소설은 혁명이데올로기나 사회적 부조리에 대한 비판의식을 들이대는 그런 상투성의 작품이 아니다. 옮긴이의 설명처럼 오히려 혁명의 관념성이나 종교 이데올로기의 위선성을 정면으로 뚫고 나가는 실존적 삶의 궤적으로서 한 인간의 내면적 열정의 흐름에 관한 이야기라고 해야 할 것 같다. 어머니의 죽음에 시름하던 청년 아서는 오스트리아를 축출하고 자유 이탈리아를 건설하겠다는 비밀 저항 운동 단체인 청년 이탈리아그룹에 관심을 갖게 된다. 가계(家系)내 성장과정에서 겪어야 했던 차별과 억압, 부조리는 자연스레 젊은 영혼의 마음을 장악하는 대상이 된 것 같다


그에게는 아버지와 다름없는 보호와 가르침을 아끼지 않는 피사의 신학교 교장인 신부 몬타넬리가 있다. 아서의 비밀 조직 가입활동을 우려하지만 교황청의 명령을 받아 새로운 교구로 이동하게 되고, 피사에는 새로운 신부가 부임한다. 아서는 소꿉친구였던 젬마를 그룹에서 발견하게 되고 그녀의 조직에서의 역할과 활동에 더욱 호감이 깊어진다. 그녀가 아서의 조직 경쟁자인 볼라와 가깝게 지내고 함께하는 동지임에 아서는 질투를 느낀다. 몬타넬리 신부가 떠남에 따라 신임 신부에게 아서는 젬마와 볼라의 관계로 인한 혼란스러움과 시기심을 고해(告解)하게 되고, 이 과정에서 청년이탈리아그룹 내에서의 사정을 발설하게 된다.

 

그는 영문을 모른 채 체포되어 구속되고, 조직원과 활동내용을 토설하라는 지속되는 고문을 받지만 끝내 입을 다문다. 그럼에도 어느 날 석방되고, 그가 그룹원들을 토설하여 풀려 난 것으로 오해된다. 그로부터 고해를 받은 신부의 배신에 의한 조작임에도 이를 알지 못하는 젬마는 볼라와 동료들의 체포와 구속을 아서의 책임으로 오인하고 뺨을 올려 부치며 배반자로 낙인을 찍고 돌아선다. 아서는 돌아가기 싫은 이복형제들이 있는 집으로 귀가하지만 그의 아버지가 몬타넬리임을 듣게 되고, 성스러움과 고귀함으로 흉측함을 은폐한 존재로서 단정해버린다. 그는 자신의 온 영혼을 차지했던 가톨릭과 사제집단, 신에 대한 신앙을 폐기한다.

 

연인으로부터 거절되고, 신뢰했던 사제에 대한 배신감으로 실의에 잠긴 아서는 자살로 가장하고 아르헨티나로 향하는 선박에 승선한다. 남아메리카 대륙에서의 무일푼 청년을 기다리는 것은 온갖 압박과 폭력의 무한정한 노출이며, 노예보다 못한 지옥 생활로 점철된다. 부러진 팔과 얼굴을 수직으로 찢어놓은 상처, 뒤틀린 신체와 절름거리는 다리로 그는 13년 만에 귀환한다. 귀환은 저항조직을 비롯한 대중에 널리 알려진 풍자가로서 오스트리아에 붙어 권력횡포를 자행하는 예수회파에 대항하는 연합전선 구축에 효과적인 대항책으로 부름을 받은 것이다.

 


예수회파의 음모를 폭로하고, 민중을 일으키는 수단으로서 팸플릿의 글을 쓸 유일한 대안으로 호명된 것이다. 그의 이름은 일명 쇠파리 등에’, 펠리체 리바레즈가 되어 이탈리아 통일전선 조직의 비밀 협력자가 되어 피렌체로 귀환한다. 그가 쓰는 조롱과 풍자의 글에 대한 내부의 옹호와 비판이 갈등하지만, 대중적 지지로 폭넓게 수렴된다. 조직에는 미망인이 된 볼라 부인, 즉 젬마가 있다. 볼라 부인은 리바레즈를 아서로 인식하지 못한다. 거북하고 불쾌한 인상임에도 불구하고 그가 추진하는 사고와 행동에 대해 긍정적 이해를 갖게 되고, 두 사람은 작은 이념적 갈등이 있지만 대의에 대한 공통의 목표를 위해 정치적 동행을 하게 된다.

 

자신이 누구인지를 드러낼 수 없는 아서인 리바레즈, 오해로 빚어진 어린 날의 우정에 되돌릴 수 없는 상처를 주어 자살하게 했다는 죄의식을 품고 있는 볼라 부인으로 불리는 젬마의 리바레즈에 대한 의혹과 내면적 갈등이 끊어질 듯한 실()처럼 연결되며, 봉기를 위한 연대가 이어진다. 이처럼 아서와 젬마의 고귀한 사랑으로의 이행과 더불어, 추기경이 되어 민중으로부터 유일하게 청렴한 성인으로 추앙받는 몬타넬리에 대한 아서의 증오와 연민, 그리움과 사랑의 치열한 갈등이 속과 성의 갈림길에서의 선택과 병행하며 종교와 혁명의 가치의 통합을 통한 참됨에 대한 격렬한 사유가 흐른다.

 

그런데 이 소설의 위대함은 조롱과 독설, 부정을 통해 역설적으로 그 대상에 대한 사랑의 숭고함이 더욱 절절하게 느껴지는 점이랄 수 있다. 소설은 비극으로 맺지만 결코 비극이 아닌, 오랜 생의 격전 끝에 맞이하는 안식처럼 평온이 독자의 정신을 어루만지고 있다는 느낌을 갖게 된다. 이 감상글의 모두에 인용한 추기경 몬타넬리의 민중을 향한 음성은 다분히 중의적이다. 자신이 가장 사랑하던 아들을 신의 선택을 통해 내어 놓아야 했던 성인(聖人)의 피의 울부짖음이다. 그 피를 들이켜라, 기독교인들아...., 그 피를 들이켜라, 너희 모든 사람들아! 그 피는 너희들의 것이 아니더냐? 너희를 위해 붉은 핏물이 풀밭에 흐르고 있지 아니 하냐, (中略) 식인종들아..., 찢겨진 살을 씹어 삼키려므나.(394)“

 

민중을 위해 아버지로서 자식을 희생제물로 내어준, 추기경 몬타넬리의 통한의 외침이다. 그는 자신의 파멸로 어리석은 민중, 압제 권력에 살과 피를 내어 준 자신을 용서하지 못한 것이었으리라. 그럼에도 그는 그럼으로써 신을 배신하지 않는 길을 선택했다. 소설의 마지막을 이루는 3아버지와 아들7,8 챕터의 아서와 몬타넬리의 대화와 아서를 잃은 몬타넬리의 민중을 향한, 그리고 신을 향한 목소리는 핏 멍울이 되어 독자의 가슴에 맺힌다. 아마 소설을 관류하는 주제는 고뇌와 투쟁을 통해 드러나는 영혼의 광채 그것일 게다. 그 고독하고 격정으로 충만했던 한 인간의 삶에 감응하며, 나는 여전히 작은 빛조차 꿈꾸지 않았던 열정 없음의 그 수치심에 몸을 떤다. 때문인지 철지난 로맨티시즘에 자꾸 감정이 이끌리는 시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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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서 코난 도일, 선상 미스터리 단편 컬렉션 - 모든 파도는 비밀을 품고 있다 Short Story Collection 1
남궁진 엮음, 아서 코난 도일 원작 / 센텐스 / 202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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셜록 홈즈가 활약하는 범죄미스터리에 익숙한 독자에게 광활한 대양(大洋)의 고립된 선상(船上)에서 벌어진 이야기는 그 낯섦으로 호기심을 불러일으킨다. 세심한 과학적 추리의 탐정물 작가인 코난 도일을 새롭게 바라보게 하는 작품이다. 지상의 법질서와 문명적 조건과 인간의 시선이 쉽사리 차단되는 선상 사건이라는 제약은 인간지성을 새롭게 해독할 필요를 느끼게 한다.

 

여섯 편의 선상 이야기와 18세기 악명을 떨치던 해적선장 샤키에 관한 네 편의 이야기로 구성되어 신비 또는 초자연적이라는 모호한 언어 뒤에 감추어진 실체를 밝히거나, 엿들은 이야기의 외향만으로 두려움과 적의를 갖는 인간의 연약한 상상력이 몰고 온 해프닝, 금융 사기꾼을 응징하기 위한 한바탕 강도 놀이의 유쾌함과 넉넉한 우의(友誼), 얼어붙은 해양에서의 고립이 가져오는 두려움과 이때 인간이 장악당하는 미신을 배경으로 연인에 대한 그리움, 사랑 한 편을 그려내기도 한다. 어느 입담 좋은 이야기꾼이 세간의 풍문으로 떠도는 신비로운 이야기들을 풀어헤쳐 이성의 세계, 윤리의 세계를 펼치려 했던 듯하다.

 

이러한 관점에서 아서 코난 도일은 여전히 과학적 이성의 계몽가라 할 수 있을 것 같다. 단편 줄무늬 상자를 재밌게 읽었는데, 부러진 돗대, 생명의 징표가 없는 떠도는 함선을 발견한 선장은 이등 항해사와 함께 낯 선 배에 접근하고, 날카롭고 무거운 무기로 머리를 맞아 사망한 듯한 한 선원의 사체를 발견한다. 베에서 살인이 있었으리라 추정되고, 그들은 배 안에서 선적된 물품 목록과 함께 가치 있어 보이는 보물 상자들을 찾아 자신들의 함선으로 옮긴다. 이때 일등 항해사는 나서서 높은 가치의 보물이 들어 있을 것이라며 상자의 개봉을 제안하지만 이 상자를 절대 열지 마십시오.”라는 경고 문구가 그들의 행위를 멈추게 한다.

 

일확천금에 대한 선원들의 보상 심리는 상자의 개봉을 유혹한다. 선장은 이 상자에 권리를 가진 소유자에게 전달 할 때까지 임의 개봉을 금지하고 상자를 보관해 둔다. 호기심과 욕망은 인간의 행위를 멈추게 하지 못한다. 일등 항해사는 밤에 몰래 상자를 열어보려다 사망한다. 조난되었던 배에서 발견되었던 사체와 동일한 모습을 한 채 죽은 것이다.


 

이때 사람들은 창백하게 질려 저주스런 물건이라는 반응을 보인다. 신이시여, 우리를 지켜주소서! 저 지옥 같은 상자가 문제인 것 같습니다!” 온갖 추정 끝에 선장과 이등항해사, 목수 세 사람은 상자를 조심스레 연다. 텅 빈 공간의 한 끝에 정교하게 만들어진 황금 촛대가 있다. 그들은 보물을 보호하기 위한 강철 가시가 야생동물처럼 튀어나와 덮치는 모양을 바라본다. 부당하게 얻은 이익을 보존하기 위한 살인 장치, 수많은 인간들이 탐욕으로 그 기술의 희생자가 되었다. 탐한 물건을 보존하기 위한 흉측스러운 살인 장치, 현대 기술에 대한, 그리고 인간의 그침 없는 호기심과 탐욕에 대한 경계의 목소리 아닐까?

 

단편 폴스타호의 선장은 선원들의 욕망과 달리 얼음이 뱃길을 점진적으로 막아 귀환을 어렵게 할 수 있는 북위 81도의 얼음 바다에서 신속하게 이동하기는커녕 무언가를 기다리는 듯한 선장의 느긋함 속에 점진적으로 확산되는 선원들의 두려움과 이로 인한 환영과 환청, 그리고 미신의 세계에 붙들려가는 상황을 아름다움과 긴장감을 교차시키며 독자를 흡입한다. 신비로움에 휩싸인 선장 니콜라스 크레기는 모비딕의 에이허브를 떠올리게 하고, 바람과 얼음, 유령과 더불어 형태를 알 수 없는 극심한 고요함으로 독자의 시선을 꽉 붙들어 맨다.

 

푸르지만 상기된 밝은 미소를 띤 모습으로 얼어붙은 채 설원 위에 누워있는 선장의 발견은 그가 애처롭게 찾던 연인에 대한 그리움과 마침내 유령이 되어 그에게 입 맞추었음을 상상케 한다. 어둡고 고립된 선상 이야기와 사랑에 대한 그리움에 휩싸인 한 영혼의 이야기가 매혹적으로 교차하는 이야기다. 사랑은 이성을 벗어난 것일 게다. 선장의 동행자인 의사는 더 이상 유령을 이야기하는 선원들의 의견을 비웃지 않기로 했다고 말하는 것을 보면.

 

코난 도일은 다양한 분야에 사회적 관심과 책임을 놓지 않았던 것 같다. 조셉 하바쿡 제프슨의 성명서는 위도 38도에서 발견된 버려진 선박과 실종된 선원에 대한 미스터리를 생존자로서 증언하는 기록을 하고 있는데, 유색 인종에 대한 극심한 차별과 폭력, 죽음에 대한 반발이 야기한 사건임을 밝히고 있다. 한편 작은 정사각형 상자는 영국의 아일랜드 통치에 반대하는 페니안 단원에 대한 팽배한 영국인들의 두려움이 한낱 비둘기 비행의 특별한 경기를 선박 폭파를 하려는 테러리스트로 규정하는 어리석음을 그리고 있다. 구체적으로 아일랜드에 대한 연민을 표현하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영국인들에게 잠재된 피해의식이라는 망상을 비판하려는 작품이리라.

 

아무튼 내겐 코난 도일이라는 작가의 작품 세계를 새롭게 확장해 이해할 수 있는 계기가 된 작품집이라 할 수 있겠다. 책의 후반부를 구성하는 해적 샤키 선장에 관한 네 편은 18세기 시대가 낳은 사악함을 상징하는 작가의 당대에 대한 비유적 비판인 것 같다. 품위 없는 천박한 영국 개들!(Perros! Perros Ingleses! Lepero, Lepero)라고 영국 해적들을 향해 외치는 스페인 처녀의 저주의 웅변처럼 샤키는 어둠 속으로 사라진다. 샤키라는 인물의 해적 연대기라 할 네 편의 단편은 계략과 어리석음, 교활함과 잔악성이 교대로 흐르며, 당대 영국인의 의식을 채우고 있던 약탈경제에 대한 일침이 아니었을까 싶다. 탐정물의 작가만이 아닌 시대의 자기반성에도 시선을 기울였던 또 다른 측면의 작가임을 알게 되었다. 선상에 감춰진 비밀들은 어쩌면 시대가 은폐한 추오의 드러냄을 향한 의지 아니었을까? 그래, 모든 파도는 비밀을 품고 있을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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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부 살인자의 성모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405
페르난도 바예호 지음, 송병선 옮김 / 민음사 / 202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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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은 1980~1990년대의 부패하고 범죄 집단화된 국가인 콜롬비아를 배경으로 한 절망적이고 자조적인 외침이다. 그런데, 저 먼 남미대륙 한 나라의, 그것도 30년 전의 이야기가 지금 우리에게 무슨 의미를 던져줄 수 있는가라는 볼 멘 불평의 소리가 들리기도 한다. 역사는 그 모습을 변조해서 반복된다. 1930년대 나치의 파시즘이 21세기 이 사회에 모습을 드러내는 것처럼, 콜롬비아의 증오가 꼬리를 물고 영속되듯, 이 땅에서도 그것을 빼닮은 듯 범죄 집단화하는 국가권력의 양태가 도처에서 드러나고 있으니 말이다.

 


마약 밀매조직이 곧 정부였으며, 그 쓰레기들이 국가 행정과 공권력을 휘두르고 있었고, 이에 영합한 오래된 부패조직인 관료들은 자기 주머니 채우기에 혈안이 되어 있었으며, 그 구성원인 시민이라는 존재들의 삶 또한 무지막지하고 극악무도한 패악질을 닮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오직 그 짓을 흉내 내야만 생존의 여지가 있었으니 말이다. 화자(話者)는 생존해 있는 마지막 문법 학자로 자처 혹은 추정하는 페르난도(작가의 분신)라는 인물이며, 어느 검사에게 조국 콜롬비아에서의 자기 행적을 술회하는 형식을 하고 있다.

 

청부 살인자(sicario)란 위탁받아 살인하는 아주 젊은 청년이에요

심지어 어린아일 때도 있어요.” -12

 

지구상에서 가장 범죄가 잦은 나라, 증오와 원한의 수도, 메데인은 재앙의 얼굴을 하고 있다. 법은 불()처벌이 원칙이고, 범죄자이면서 처벌받지 않은 첫 번째 인간이 대통령인 나라, 이 시간에 그는 아마도 나라건 일터건 모두 엉망진창으로 만들어 놓고 있을거야”(27). 이 낯설지 않은 익숙한 문장이 이 소설을 더욱 열중하여 읽게 한다. 메데인에는 150개의 성당이 있다. 청부 살인자들이 실수하지 않게 해달라고 성모에게 기도하기 위해서, 총을 쏠 때 목표물에 정확하게 명중하게 해달라고 기도하기 위해 존재하는 수많은 성당, 범죄의 일상성만큼이나 즐비한 성당의 실존은 유일하게 확실한 것이 죽음인 나라에 맞춤처럼 보인다.

 

어디를 걷거나 어떠한 교통수단을 이용하더라도 죽음은 삶처럼 따라붙는 곳, 그 누구도 결백하지 않은 인간쓰레기들, 찌꺼기들만이 있는 나라, 그래서 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이유만으로 죽이는 것이 정당화되는 곳이다. 죽이려는 열망과 재생하고 번식하려는 분노가 서로 경쟁하는 곳, 열두 살이 되면 범죄의 온상지인 코무나의 아이들은 늙은이와 다름없어진다. 살아 갈 날이 얼마 남지 않았기 때문에. 변화에 변화를 거듭하지만 사회는 점차 유대감과 정체성을 잃어버리고, 해지고 누덕누덕 기운 침대보처럼 되어버린 도시, 소설은 온통 총알을 박아버리는 장면의 연속이다. 더 이상 범죄를 저지르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가난의 고통과 벌이의 고됨으로부터 해방을 주기 위해 서로 서로 죽음을 공연한다.

 

택시의 라디오에서는 공공의 젖이나 빨면서 나라의 돈을 빼앗아가는 엿 같은 관리들의 의미 없는 발표문이나 마약 밀매자들의 거슬리는 바나예토 음악이 틀어져 있다. 죽음, 권총, 경찰, 안녕 개새끼야.” 재의 수요일 성 십자가를 그어주는 곳, ! 피할 수 없는 단호한 단 한발의 총알. 사체에 몰려드는 구경꾼들, 야비하고 천한 영혼 밑바닥부터 말 할 수 없이 은밀하게 용솟음치는 기쁨을 어쩔 줄 몰라하는 선천적이고 만성적 비열함을 가진 군중들. 거짓말과 도둑질을 일삼는 가장 비열한 버러지들이 되어버린 시민이란 것들. 뉴스도 더는 새롭지 않다. 단지 죽음의 숫자가 오늘과 내일 조금씩 다를 뿐. 당국이라 말할 수 있는 게 없고, 단지 도둑질하고 공공의 것을 약탈하는 사악한 권력만이..., 그래서 기도의 내용도 이렇다. 이 삶에서 이미 지옥의 악몽을 겪었고, 그것도 아주 충분히 겪었으니, 영원한 저주에서 저를 구하소서. 이웃과 함께, 아멘.”

 

훔친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에게 도둑맞지 않기 위해 피를 흘리며 지켜낸 곳.

주님, 그토록 이상한 생각에서 구하시고 보호하소서.” -89

 

소비주의와 신자유주의의 지독한 약탈자본주의가 시대를 휩쓸면서 이에 도취된 인간들은 타인으로부터 탈취를 영속화한다. 빼앗기 위해 죽이고, 그를 다시 찾아오기 위해 죽이고, 이 반복의 소용돌이 속에서 죽음의 향연은 계속된다. 권력이 곧 불의(不義)한 조직인 세계, 아무것도 생산하지 않으니 수출할 것도 없고 오직 하얀 코카인 가루에 매달려 있다. 자동차도, 가전제품도, 명품 브랜드 옷과 가방도, 모든 것이 마약에 의존해 있는 세계, 마약 밀매 영역다툼으로 반복되는 매일의 죽음과 이 죽음을 괴로워하는 사회를 먹이로 먹고사는 기자라는 것들까지, 어느 한 구석도 악취나는 부패에 오염되지 않은 영역이 없는 곳이 소설 전반을 그칠 줄 모르고 가득 메우고 있다. 그럼에도 개들이 짖는 소리는 이 집에서 저 집으로 가면서 자기들이 더 낫다고 목청껏 소리치고 있는 형국이란 가히 저질 코미디 이상의 촌극이라 할 것이다.

 

하나의 세계가 몰락하는 광경, 인간 군상의 저열한 추락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나 특출한 사건으로부터 시작되는 것이 아니다. 주가조작, 부동산 투기를 위한 국토계획의 자의적 변경, 정적 살해를 위한 공권력의 사적 남용, 하다못해 마약밀매의 개입 징후까지, 이 소설의 극단적 양상들이 결코 먼 나라의 지난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에 절로 전율케 된다. 혐오와 증오를 부추기고, 갈라치기와 적대로 시민 분열을 초래하며, 역사의 부정과 부역자들의 만행이 뻐젓이 저질러지다 보면 아마도 이 사회도 그간 쌓아온 질서와 정신을 상실하게 될 것이다. 약탈자와 파렴치범들이 행세하며 처벌받지 않는 곳인데, 그 누구인들 이를 실행에 옮기지 않겠는가? 사회는 순간 급속하게 저 지옥의 나락으로 곤두박질 칠 것이다.

 

이 소설은 시종 욕하면서 빠져드는 작품일 것이다. 그 역겨움과 비열함과 악랄함, 그리고 그 어떤 사회적 책임도 존재하지 않는 세계, 그래서 죽음은 늘 방치되고, 살인자는 더 이상 추적되지 않는 세계, 어른이 되기 전에 청부 살인자가 되어 또 다른 청부 살인자에 의해 죽어가는 것이 너무도 자연스러운 세계, 인간임에 대한 불명예와 치욕이 넘쳐흐른다. 왜곡된 현실을 더 왜곡하여 보려고 저 무도한 머저리는 마약밀매에 개입한 것인가? 아무튼 이 소설을 읽는 동안 심사가 그리 편하지 않았다. 다만 서사적 힘은 가히 독보적이고 치명적일 만큼 흡입력이 뛰어나다, 페르난도 바예호는 라틴 아메리카의 현존하는 최고의 작가라고 한다. 한 사회가 한번 폭력의 굴레에 갇히기 시작하면 그것을 걷어내는 데는 엄청난 사회적 희생을 필요로 하게 된다. 우리 사회가 이미 정치검찰들에 의해 폭력의 굴레에 갇히기 시작했다. 아마 이것을 이전의 민주사회로 회복하는 데 우리사회는 엄청난 곤혹이라는 고통을 겪어야 할지도 모르겠다.

 

모든 정치인 혹은 관료는 본질상 비천하고 악한 놈들이야 .(...) 절대로 그들이 순진하다고, 죄 없는 사람들일지도 모른다고 기대하지 마. 그게 바로 순진하고 천진난만한 거야.” -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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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디슨 카운티의 다리
로버트 제임스 월러 지음, 공경희 옮김 / 시공사 / 200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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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은 타인의 사랑에 대해서 말 할 수 없다. 여기까지는 아름답고 위대한 열정이며, 바로 여기부터는 한낱 감상이며 천박한 욕망이라고 말이다. 진실하고 심오하며 열정에 찬 사랑의 가능성을 조롱, 멸시하며 불륜, 천한 감상이라 치부하는 태도로는 이 소설을 읽는 데 요구되는 우리라는 창조, 사랑의 세계에 진입하는 것을 어렵게 만들 것이다. 점점 인간 서로의 신뢰가 부서져 나가고, 사랑이란 언어는 단지 편의성의 문제로 전락하는 이즈음의 세계에서 예순 일곱 살 프란체스카 존슨이 쓰다듬는 추억의 손길처럼, 이 작품은 어떤 순간의 기억을 더듬어 보며 오랜 열정을 되살려보려 애쓰게 하기도 했다.

 

모든 세월과 인생 동안 서로를 향해 움직이고 있었던 광활한 초원을 날 던 두 마리 새, 오하이오의 작은 농촌 마을의 마흔 다섯 살 나폴리 출신의 여인 프란체스카 존슨, 내셔널 지오그래픽의 사진작가, 쉰 두 살의 마지막 카우보이 로버트 킨케이드는 달리는 될 수 없었던 듯, 마치 피할 수 없었던 일처럼 만나게 된다. 1965816일 월요일 이른 아침 킨케이드는 아이오와 주 매디슨 카운티에 있는 지붕 덮인 일곱 개 다리의 사진 촬영을 위해 다리들을 답사해 나간다.



여섯 개의 다리는 찾았으나 일곱 번 째 로즈먼 다리를 찾을 수가 없었다. 끝없이 이어질 것 같은 자갈길을 맴돌다 리처드 존슨, RR2’라고 쓰여 있는 길 끝 우편함을 발견하고 길을 따라 올라가 마침내 현관문 앞에 앉아있는 여자를 바라본다. 자세히 그녀를 바라보고, 다시 아름다워질 질 수 있는 아름다운 여자임을, 다루기 힘든 감정을 느끼기 시작한다. 이 최초의 우발적이고 우연한 마주침은 프란체스카의 단 몇 초의 인상과 자기감정의 변화에 대한 자각으로 다시 묘사되는데, 원하신다면 제가 직접 가르쳐 드려도 좋은데요.”라고 말하는 자신에게 놀라며, 바로 그 지점이 그녀를 영원히 변하게 하는 일이 시작될 것임을 느낀다.

 

우리는 얼굴을 채 바라보기도 전에, 먼발치에서 다가오는 사람의 전체 이미지를 분석할 사이도 없이 타인에 대한 자신의 행동과 감정을 결정한다. 더구나 자신도 알 수 없는 이끌림의 감정은 숨어있던 또 다른 자아의 소리에 압도되고 껍질을 스스로 벗어나 배워서 알게 된 모든 것에 배치되는 마법 같은 욕망에 자극되기도 한다. 살랑거리며 소리를 내는 또 하나의 숨어있던 마음이 깨어난다, 나는 개암나무 숲에 갔었네. 내 머릿속에 불이 났기에...”

 

프란체스카는 그렇게 낯선 남자의 낡아빠진 시보레 픽업트럭 해리에 올라타고 로즈먼 다리를 안내한다. 그렇게 두 사람은 집으로 돌아와 함께 음식을 만들고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행크 스노우의 노래와 푸른빛의 저녁을 바라본다. 함께하고 싶은 갈망과 이를 부인하는 어려운 내면의 싸움 속에서 다음날의 촬영 작업을 위해 킨케이드는 떠나고 프란체스카는 아쉬운 마음을 달랜다. 여자는 차를 타고 밤길을 달려 킨케이드가 다시 찾게 될 로즈먼 다리에 쪽지를 붙이고 돌아온다. 아마 소문이 온 마을을 떠도는데 순식간이면 될 곳에서 위험을 무릅쓴, 그 어떤 대가를 치르든지 그녀는 이미 어떤 준비가 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었으리라.

 

“‘흰 나방들이 날개짓할 때다시 저녁 식사를 하고 싶으시면,

오늘 밤 일이 끝난 후 들르세요. 언제라도 좋아요.”

 

자신의 마음을 알리고 싶은 여자의 마음이 온통 드러난 이 쪽지의 내용보다 앞서 두 사람은 킨케이드의 오후 촬영 작업을 함께 하게 된다. 그리곤 늦은 밤 돌아와 낯선 남자에게 자신의 침실방 샤워실을 내어준다. 그리곤 남자의 목욕이 끝 난 후 여자는 몸을 씻어내고 바람의 노래 향수를 뿌리며 이 밤을 위해 낮에 새롭게 마련한 분홍색 원피스와 이보다 엷은 핑크 색조의 립스틱을 바른다. 두 사람은 좁은 부엌에서 서로 맞잡고 춤을 추기 시작한다. 서로의 아름다움에 감탄하면서. 마침 라디오에서는 느리게 편곡된 Les Feuilles mortes(枯葉)이 흐르고, 서로의 내음과 휘감기는 다리와 맞닿은 배를 느끼며 성큼 다가서는 존재에 밀착된다. 그녀는 여자가 된다.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고향으로, 집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둘 다 스스로를 잃고 우리라고 새로 만들어낸 다른 존재 안에 서로 얽혀들어 하나로만 존재하는 그 무엇인가가 된다. 그들은 사랑에 빠졌다. 어찌할 수 없이 가장 깊고, 가장 심오하게.“

 


아이 둘과 남편 리처드는 일리노이의 농산물 축제를 위해 일주일의 여행을 떠났다. 그녀는 킨케이드를 따라 나서고 싶은 마음이 가득하다. 킨케이드는 프란체스카와 함께 떠날 것을 제안하지만, 여자는 책임감이라는 현실로부터 자신을 찢어내 버릴 수 없음을 안다. 길과 책임감과 죄의식. 애매함으로 둘러싸인 이 광활한 우주에서 이런 확실한 감정은 여러 차례 오는 것이 아님을 안다. 두 사람은 목요일 밤 다시 오지 않을 서로의 발견에 감동하며 다시 사랑을 나누고, 흐르는 눈물로 햇빛에 일그러진 서로의 이미지를 뒤로 한 채 이별한다.

 

이 모든 이야기는 예순 일곱 살이 된 프란체스카가 남편 리처드의 죽음 이후 8년이 지난 22년이라는 오랜 세월이 흐른 어느 날의 추억으로 펼쳐지는 격정적 고백일기이기도 하다. 나흘의 사랑, 그 감정이 얼마나 강한 것이었는지, 그녀는 생생하게, 또렷하게 기억을 떠올린다. 남편의 사후 매년 8월의 그날이 되면 킨케이드가 보내 왔던 사랑에 빠진 여인의 얼굴을 한 자신의 사진과 로즈먼 다리를 찍은 사진 두 장, 그리고 킨케이드의 편지와 글, 그가 발표한 내셔널 지오그래픽의 스크랩된 사진들을 꺼내 어루만지며 추억 속 이미지들을 현실로 소환한다. 그녀가 유일하게 느끼며 살고 싶어하는 현실, 짓눌리고 짓눌려 산산이 부서지고 말았을 존재를 버티게 해 주었던 생존의 문제였던 사랑의 기억. 고대의 탑 주변을... 나는 천년 동안 돌고 있네.”

 

두 사람은 19658월의 그 이별 이후 다시는 만나지 못했다. 서로의 간절한 갈망에도 불구하고. 우주를 떠도는 두 점의 먼지처럼 서로에게 빛을 던지고 나흘간의 사랑으로 하나의 존재가 되었지만 두 사람은 함께 보낼 수 없는 시간의 통곡소리를 들으며, 그렇게 이 우주에 단 하나 뿐인 사랑의 실체라는 가능성을 남기고 이울어져 갔다. 1982년 프란체스카는 킨케이드의 변호인을 통해 그의 죽음과 유언에 따른 유품을 전달 받으며, 그의 유해가 로즈먼 다리에 뿌려졌음을 알게 된다. 프란체스카는 19891월 예순아홉 살로 생을 마감했다. 그녀는 두 자식에게 자신의 재를 로즈먼 다리에 뿌려달라는 유언을 남겼으며 그대로 실행되었다.

 

실화 소설이다. 나는 오래되어 잊혀진 노래 고엽(枯葉)을 찾아 몇 차례 귀를 기울이며 일체화로 얽혀드는 그 관능과 열정의 감각에 공감해보려 했지만 역시 그것은 그들만의 배경이었던 모양이다. 구전(口傳)되는 어느 부족의 역사처럼 밀려드는 추억 속에서 해마다 빈틈없이 모든 것을 기억하는 프란체스카라는 여인의 절실하게 현재화된 사랑의 이야기와, 함께 할 수 없었음에도 그녀라는 존재의 발견 사실에 감사하며 깊고, 완벽하게 언제나 사랑하고 있음을 토로하는 킨케이드의 편지 글에 빠져 나는 짧은 시간 동안 이 작품을 수차례 반복하여 읽었다.

 

이 둘의 만남처럼 아마 광대한 이 우주에서 세포 속속들이 자석같은 힘이 작용하는 존재가 그 어디엔가 있을 터이다. 남녀의 끌어당기는 힘, 아마 나는 이 힘의 무한한 아름다움에서 빠져나오기 싫었던 모양이다. W.B. 예이츠의 시집을 다시 주문하고, 호그백 다리, 시더 다리, 로즈먼 다리 등 두 사람의 짧은 여정에 등장했던 매디슨 카운티의 지붕 덮인 다리들을 검색해 보기도 했다. 문화에 의해 적절하다고 일컬어지는, 문명인의 엄격한 규칙에 배치되는 욕망이라고 누군가 손가락질할 수 있으리라. 나는 그러한 폄하의 언어들이 얼마나 오만하고 편협한 것인지를 아는 나이가 되었다. 조금은 더 열려있고 따뜻한 마음으로 이 신비한 사랑의 이야기 속으로 들어간다면 아마 그 고귀하고 우아하며 위대한 감정들과 함께 할 수 있으리라 믿는다. 내 마음이 쓸쓸해질 때면 가끔 이 책을 꺼내 읽게 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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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힐 2024-08-01 15:4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메디슨 카운티의 다리가 실화 였군요. 저는 예전 영화 이미지가 있어서 실화라고는 생각도 못 했습니다. 아름다운 영화 같은 글 감사 합니다.

필리아 2024-08-01 16:22   좋아요 2 | URL
네,로버트 킨케이드는 <내셔널 지오그래픽>에 정식계약 사진작가로 활동했던 실존인물이고, 프란체스카 또한 실존했던 인물이랍니다. 댓글 감사드립니다, 마힐님~

페넬로페 2024-08-01 19:2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정말 오래전에 영화를 보고,
영화가 좋아 책도 읽었어요.
책이 좀 더 디테일하지만
영화가 너무 강렬했어요.
지금도 영화의 거의 끝부분에서
비가 오는데 메릴 스트립이 남편이 운전하는 차를 타고
앞에는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운전해서 가는 차를 따라가는데,
메릴 스트립이 울면서 자동차 문을 열지 말지 망설이는 명연기가 기억나요.
그 나이에도 저런 열정이 있을까 궁금했지만
‘우리가 타인의 사랑에 대해 말할 수 없다‘는 필리아님의 첫 글에 그냥 이해가 되네요^^

필리아 2024-08-01 20:39   좋아요 2 | URL
저는 우주적 만남이라는 킨케이드의 말을 믿고 싶어요. 저 멀리 실루엣 만으로도 어떤 일체성을 느끼게 되었던 설렘이 있었던 기억이 있거든요. 물론 스쳐지나갈 수 밖에 없었지만 말이죠. 상대의 반응이 나와 같지 않았다면 그건 큰 오해고 실례가 될 테니 말이에요. 두 사람이 처음으로 마주하게 될 때 무언가 큰 변화를 맞이하게 됨을 예상하는 각자의 목소리가 소설에서는 묘사되고 있어요. 그래서 저에겐 그 첫 마주침이 너무 인상적이에요. 네, 페넬로페님이 말씀하신 영화 속 자동차에서의 망설임과 소설에는 없는 비를 맞고 바라보는 남자의 시선도 깊은 인상을 남겼죠. 영상의 인상에 대한 말씀 고맙습니다~~
 
이 책은 신유물론이다 - 브뤼노 라투르, 로지 브라이도티, 제인 베넷, 도나 해러웨이, 카렌 바라드의 생각
심귀연 지음 / 날(도서출판) / 202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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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라는 데카르트의 인간 유일의 영혼을 주장하는 문장이 출현한 이래 인간을 제외한 모든 동물, 식물, 사물(물질) 등 비인간 존재는 위계질서에 의해 객체의 자리로 밀려났다. 근대의 인간중심주의는 이렇게 지구 생태계를 이분법으로 구분하여 인간과 자연, 인간과 동물, 인간과 사물로 갈라놓았다. 그리고는 이들 비인간 존재는 수동적이고 억압당하는 대상화된 존재가 되었다. 그런데, 홀로 주체의 자리를 누리던 인간은 객체라고 억압되고 이용되기만 기다리던 비인간존재의 활력을 어렴풋 깨닫기 시작했다. 물질인 이산화탄소의 증가는 폭염과 홍수, 가뭄, 해수면 상승 등 지구온난화라는 초객체(hyper-objects)로서 행위를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그 자체의 활력도 능동성도 없다고 여겼던 비인간존재가 생태계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인류를 지배해 온 근대적 인간중심주의적 이분법은 이제 자신들이 부여한 오만한 주체의 자리에 의문을 제기하기 시작했다. 데카르트 이후 500년에 이르는 정신과 물질’, 이분법에 의한 위계질서는 새로운 사고의 패러다임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이 책 신유물론(新唯物論)’은 이러한 새로운 사고들에 대한 주요 사유들을 통해 인간 인식 우선에 의해 배제되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여겨지던 것들의 가치를 다시 생각해보는 것이다.

 

만물의 궁극적 실재는 물질이며, 정신적 관념적인 것 모두 물질로 환원 설명했던 고대 그리스 자연철학자들의 유물론에 대해 물질을 바라보는 태도가 새롭다는 의미에서 (New)’ 유물론이다. 다시 말해 물질은 외부의 어떤 작용에 의해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 활력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해보는 이론이다. 물질의 활력과 능동성을 인정하고 그 고유성을 발견하는 노력인 것이다. 20세기 후반기부터 이러한 전환적 사유가 발아하기 시작해 21세기에 이르러서는 객체지향이론, 사변 실재론, 유물론적 페미니즘, 행위자 연결망 이론, 비판적 포스트 휴먼, 비판적 생기론, 급진적 관계주의 지향 이론들이 신유물론적 토대위에서 인간과 비인간의 구분적 사고를 해체하고 있다.

 

인간이 판단 통제해야 될 대상으로 바라보는 자연관은 더 이상 지구 생태계의 위계적 관점이 될 수 없다. 실제 벌어지고 있는 현상은 자연과 인간, 물질과 정신이라는 이분법의 경계를 의심케 한다. 지금 이 순간 함께하는 모든 인간, 비인간 존재는 현실 존재로서 무수히 다양한 행위자로 기능을 하고 있다. 인간은 위기와 두려움을 느끼며 자연의 능동성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에 이른 것이다. 세상은 무수한 행위자들이 자신들만의 목소리를 내고 힘을 겨루는 곳이며, 인간, 비인간 존재 모두 동등한 권리를 가진 행위자가 되어 능동적으로 관계를 맺고 있는 것이다.

 

자신이 통제 관리할 수 있다고 여겼던 인간의 정신은 비인간 존재의 부름에 응답할 필요가 없다고 여겼다. 어쭙잖은 이성의 한계에도 불구하고 비인간 존재의 능동성을 이해하지 못했기에 그 부름에 응답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제 그 무관심과 무시, 폄하에 반발한 비인간 존재는 생태계 연결망의 한 행위자로서 본래의 불안정성과 변화 동력으로 인간의 오만한 환상을 깨워대고 있다. 이성적인 것만이 합리적이라 생각게 했던 근대의 사고는 인간 자신의 몸이 물질임을 자각하지 못했던 것이며, 동물이고 자연임을 이해하지 못했던 것이다. 삼림의 파괴와 동물과 식물의 멸종, 즉 자연의 멸종은 곧 인간의 종말임을 알지 못했다는 말이기도 하다. 인식을 바꿔야 새로운 패러다임이 가능하다. 비인간의 행위 능력과 존재 권리를 인정해야 하며 스스로 존재에 대한 권리를 지니고 있음을 인식하고 교만의 지위에서 내려와 이분법 구조를 해체해야 한다.

 


인간, 비인간 모두 행위자이며 행위자들은 모두 연결망에서 자신을 드러낸다며 행위자 연결망 이론을 주장했던 브뤼노 라투르를 출발점으로 하여 미셸 세르, 화이트 헤드의 과정 철학을 경유하여, ‘뤼스 이리가레의 영향을 받아 권력과 억압의 구조를 해체하고 공생방법을 제시했던 유목하는 주체로서 경계를 넘나드는 변신하는 존재를 말했던 유물론적 페미니스트 로지 브라이도티‘~되기의 철학을 검토한다. 변하지 않는 것을 진리로 여긴 오랜 근대적 이분법을 탈피하여 새로운 삶을 만들어 갈 유목자의 떠돌아다님의 자유로운 연결, 다양한 방식으로 존재의 변신을 받아들이는 계급, 연령, 젠더, 인종을 초월한 활기찬 연대의 철학을 소개한다. 데카르트식 주체와 객체의 이분법은 여성을 타자로 배제함으로써 멸시해왔다. 개체화되고 대상화된 존재, 즉 물질적이고 기계적이며 수동적인 존재라는 여성 담론을 해체하고 신유물론을 통해 페미니즘을 윤리적 문제로 전위(transposition)시킨 것이다.

 

책은 이처럼 신유물론이 인간 삶의 미래를 위한 새로운 사고로서 세상을 어떻게 보는 것이 옳은가에 대한 주요 영향력있는 석학들의 실천적 이론을 안내하고 있다. 사실 유물론 하면 마르크스의 사적(史的)유물론을 떠올리기 십상이다. 사회구조와 역사발전의 원인을 물질에 근거해 파악하여 물적 토대가 곧 사회발전의 근원이라 본 유물론이다. 그런데 이 또한 정치철학자인 제인 베넷의 지적처럼 인간의 노동과 그 가치를 최우선시 하는 사고라는 점에서 인간중심주의 이론이라는 비판을 피해가기 어렵다. 가구를 만드는 데는 목재와 망치, , , 인간의 노동이 각기 그 자체의 활력이 서로 관계를 맺으면서 새로운 파급력을 품게 되는 것으로 파악할 수 있다. 인간과 비인간은 동등한 존재라는 것이다. 사실 생명에 대해 여전히 합의된 정의가 없듯, 정신과 물질의 이분법 논리는 수상쩍은 것이다. 물질이나 기계는 수동적이고 죽은 존재라는 기계론적 관점을 벗어나면 우리는 인간중심주의에 깃들어있는 자연관에 의구심을 가지게 될 것이다. 하다못해 인간이 버린 쓰레기조차 매립지 안에서 사라지지 않고 활기 넘치는 화학물질로 휘발성 강한 메탄을 생성하며 스스로 변화한다. 물질은 스스로 영향을 미치는 힘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생기란 이러한 물질의 활력에 관한 것이다. 제인 베넷의 비판적 생기론은 이처럼 신유물론적 사고에 기반을 둔 사유이다. 그녀는 또한 주체와 객체라는 이분법적 위계 권력을 배제하기 위해 브뤼노 라투르의 영향을 받아 행위소라는 스스로 자신이고자 하는 능동적 힘으로서 물질을 설명하기도 했다.

 

이같은 이분법적 권력질서를 해체하고 자연과 문화, 인간과 기계, 남성과 여성의 경계를 없애고자했던 사상가들은 도나 해러웨이’, ‘카렌 바라드에서 그레이엄 하먼’, ‘티모시 머튼에 이르기까지 무수한 석학들이 등장했으며, 오늘 인류의 인식에 커다란 영향을 미치고 있다. 반려종, 사이보그 등 얽혀 연결된 존재로서 서로 감염시키는 관계에 집중하여 개체성이란 관계망에서 생성되는 것이며. 독립적 개체성이란 있을 수 없다고 주장하는 해러웨이의 공동생성의 존재론이나, 양자역학에 터 잡아 얽혀있으되 분리되지 않은 유동적 상태가 현상이며 이 안의 행위 요소들의 움직임인 내부-작용을 통해 비로소 개체가 출현하는 것이라는 물질을 과정에 있는 현상으로 이해한 카렌 바라드는 이 세상의 모든 인간과 비인간을 실재하는 행위자로서 고려케 한다.

 

이제 우리 인간은 다른 존재를 판단하는 주체의 자리가 가당치 않은 것임을 직시할 시점에 도달해 있다. 주체가 있음으로 인해 객체라는 대상화된 존재가 있어 억압당하고 불평등을 강요당하며 무시되고 배제된다. 이러한 데카르트식 이분법적 사고로는 더는 이 세계에 팽만한 문제들에 접근 할 수가 없다. 물질이고 자연이고 타자라며 자신 역시 하나의 타자임을 이해하지 못한 채 타자의 목소리를 무시한 결과 온갖 사회적 불평등이 만연하고 기후온난화와 같은 재앙이 일상화 되는 위기에 직면해 있다. 신유물론은 이러한 구분, 남성과 여성, 인간과 자연, 인간 사물이라는 차별의 경계를 해체하고 세계는 더는 수직적이지 않으며 여러 갈래의 복잡한 연결망임을 인식하는 새로운 패러다임의 사고이다.

 

세계를 바라보는 시각의 전환이 시급한 시대이다. 이 책 신유물론은 일시적으로 유행하는 하나의 철학적 이론이나 사조인 것만이 아니다. 바로 현재하는 인류인 우리들의 일상적 행위를 돌아보아야 할 이유의 직시이다. 책은 이러한 사유의 전환을 위한 첫 번째 문으로 보다 심화된 사유 속으로 이행하는 안내서로 삼기에 적절할 만큼 친절하고 수월한 문장으로 씌어 있다. 늦었다고 여길 때가 어쩌면 가장 빠른 때인지도 모르겠다. 이 세계에 노정된 무수한 불평등과 재앙적 위기를 생각하는 많은 독자들에게 거대하게 변화하는 사고의 조류에 동승할 기회를 제공해 주리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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