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풀의 구원 - 부서진 땅에서도 왕성하게 자라난 희망에 관하여
빅토리아 베넷 지음, 김명남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2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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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도와 사랑, 10년의 꿋꿋한 희망의 기록

 

 

책은 야생의 삶을 실천하는 한 여인의 슬픔과 고통 속에서 길어 올리는 자기의 배움이며, 한 아이의 엄마로서 그 아이가 스스로의 한 인간으로 성장하는 지원자로서, 한편으론 그 아이가 이 지상의 세계를 있는 그대로 바라볼 수 있도록 응원하는 조심스러운 걸음이다. 그러기 위해 엄마와 어린 아들은 살아가는 나날이 한 단위의 기쁨과 슬픔으로 이뤄져 있음을 이해하며, 서로의 사랑과 용기를 발견하는 여정의 기록이기도 할 것이다.

 

가슴시리도록 아름다운 이야기다. 이렇게 쓰고 보니 이 책의 상실과 고통, 쉴 새 없이 교차하는 삶의 어둠과 빛, 그리고 끈질긴 생동성이 발산하는 생의 경이로움에 대해 터무니없이 취약한 문장임에 부끄러움을 느낀다. 한 인생에 담긴 슬픔 속에 깃든 작은 사랑 행위들을 어루만지며 문밖 작은 공영주택 야생의 텃밭, 그 소박한 세상에 미소를 짓고, 우아, 정말 아름답다!”고 말하는 아이와 그 아이의 손을 잡고 삶에 감사하는 여인의 10년 기록에 나는 몇 차례 눈물을 훔쳐대야 했다. 그렇다고 감상(感傷)에만 젖어들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한국어 표제인 들풀은 아마 잡초(雜草)의 순화된 우리말 표현일 것이다. 주류의 언어에 내재된 인간 필요 중심의 편협한 의미를 피하려했음이리라. 빅토리아 베넷은 수시로 혈당을 측정하고 인슐린을 주사해야하는 당뇨병성 체톤산증이라는 불치의 병을 지닌 어린 아들과, 돌과 석면과 공장의 잔해위에 세워진 사방이 밭으로 둘러싸인 공영임대주택단지의 작은 집 마당에 야생의 정원을, 마법의 정원을 만들기로 결심한다. 귀족여성이었던 비타 색빌웨스트의 시싱허스트 같은 화려하고 거대한 정원이 아니다. 값싸게 가꿀 수 있으며, 돌투성이 척박한 토양에서도 잘 자라는 야생의 정원이다. 단순하게 말해서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잡초의 정원’, 교란지에서 잘자라는 식물" 들의 정원을 만드는 것이다.

 

영어 사전에는 잡초를 사람이 원치 않는 곳에서 자라는 야생식물이라 정의하는 모양이다. 우리는 혹시 달리 정의하고 있을까하여 찾아보았다. 한국산림청은 초목(草本)식물로서 묘포(苗圃) 또는 임지(林地)에 발생해서 임업상 해로운 것이라 하고, 한국어사전은 농작물 따위의 다른 식물이 자라는 데 해가 되는 여러 가지 풀이라 하고 있다. 결국 의미상 별 차이가 없다. 인간의 시선에 의해 식물에 자의적 위계를 부여하여 배제하는 대상이라는 점에서. 사람이 그것을 원하지 않을 때면 식물은 잡초가 되어 뽑히고 뭉개지고 폐기되어야 하는 대상이 되는 것이다. (다음의 감상글부터 나는 잡초라는 단어 대신 책의 표제처럼 들풀을 사용하려 한다)

 

이것은 공영주택단지에 사는 저자의 가족을 비롯한 거주자들에게도 동일하게 부여되는 배타적 시선이다. 사정은 저마다 다르지만 사별, 이혼, 외부모, 가족돌봄, 질병, 노령, 직업불안정성, 실업, 저임금, 이유가 무엇이든 사람들은 그들을 다 같은 범주로 분류하여, 외딴 섬같이 분리하여 그들을 따돌리는 것이다. 그들은 잡초(들풀) 취급을 받아야 하는 사람들로서 세계의 일원으로 참여하는 것은 불온한 짓임을 은연히 강요하는 것이다. 야생의 정원을 가꾸는 행위는 처음부터 단지위원회의 퇴거 협박과 아울러 장애를 겪는다. 단지의 품위와 경관을 손상시키는 행위라고. 이웃에 불쾌감을 조성하지 않으며 경관을 해치지 않는다는 조건부로 어린 아들과 빅토리아는 도로의 틈새와 버려진 공장 잔해에서 피어나는 들풀들을 가져와 정원을 만들어 간다.

 

사람들의 뒤틀린 시선으로 인한 구별과 차별의 상황들은 이쯤에서 줄이련다. 저자의 글이 지향하는 것은 이런 부정성의 세계가 아니니 말이다. 주택 소유자와 주택임차자의 가축 돌봄에서조차 규제 적용의 범위가 달라진다. 가진 자와 못 가진 자에게는 적용되는 규칙이 다른 것이다. 우리 집이 아니어서, 우리에게 집 지을 돈이 없어 차별받아야 하는 세계임을 이해한 어린 아들이 조용히 엄마 빅토리아의 손에 자기 손을 얹는다. 아이가 이 행위를 통해 이 세계에 적용되고 있는 하나의 규칙을 깨달았음에 무력함을 느끼지만 한편으로 이것 또한 아이가 이겨내야 할 경험임을 안다.


가시칠엽수, 빅토리아의 아들이 태어났을 때 심은 나무다. 6년이 되면 꽃이 피고, 그로부터 6년이 지나면 열매를 맺는다. 12년이다. 내 나무가 이제 엄마처럼 됐어. (...) 자단색 씨앗을 꺼내며 말한다. 그 씨앗을 어떻게 할 거야? 할머니를 위해 심자. (...) 탄생을 위해 한 그루, 죽음을 위해 한 그루(417)”

 

엄마는 아들에게 식물 알아보는 법을 가르치기 시작한다. 우리가 들여다본다면 식물이 우리에게 자기 특징을 드러낸다고 알려준다. 나는 이 식물과 동물, 물질 등의 그 자체로 나타남이라는 비인간의 자기 발현 존재성을 고작 현상학, 실재론, 객체지향 이론의 책에서 이제야 배우고 있다. 아이는 엄마로부터 그 어떤 채색된 철학보다 더 깊은 의미를 엄마와 함께하는 체험으로 습득한다. 자연 그 자체의 그러함에 따라 생산과 문화를 구축하는 파머컬쳐 농법을, 지속 가능한 원예의 원칙을 함께 공부하며 이 지상의 세계를 배워나간다.

 

핼러윈 데이를 맞아 빅토리아는 아이와 함께 마당에서 가꾼 들풀로부터 얻은 꽃잎과 줄기, 뿌리, 씨앗으로 잼과 과자를 만들어 동네 집들을 방문하기로 한다. 아이는 신이 났다. 자신이 엄마와 함께 만든 것을 선물로 누군가에 준다는 행위로, 아이는 문을 두드린다. 즐거운 핼러윈! 과자 드실래요?” 문을 연 사람들은 어린 아이에게 사탕과 작은 장난감을 답례로 선물한다. 아이의 마음에 마을 사람들의 친절이 씨앗처럼 심겨진다. 엄마는 아이에게 이 세상의 진실이 가끔 가혹할지라도 이런 작은 일로 아이가 세상의 좋은 면을 보게 할 것을 기대한다.

 

아이는 자신의 병인 당뇨병과 싸우는 전투를 벌이지 않는다. 결코 통제할 수 없는 것과는 전쟁을 벌일 수 없는 법이다. 그래서 까다로운 파트너일 뿐이며, 그것과 함께 하는 춤을 배우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 우리는 춤의 스텝과 루틴을 배워야하고 매일 빠지지 않고 춤춰야 하는 것일 게다. 아들의 희망은 엄마의 슬픔에 빛이 되어주고, 엄마의 용기는 아들의 비틀거리는 발을 지탱하여 줄 것이라는 믿음으로 때론 헛디디고 미끄러지며 실패할지언정 인생의 이야기를 춤추는 법을 배우기 위해 동행한다.

 

아마도 원제목인 ‘All my wild mothers'야생의 어머니들‘, 혹은 야생의 여자들은 저자 빅토리아를 비롯한 그녀의 어머니와 언니들, 그리고 그녀가 불공평한 세상에서 늘 다시 일어날 수 있도록 알려주었던 여자들을 총칭하는 것일 게다. 세상에 질문을 던졌을 때, 그녀의 호출에 반응하며 함께 야생성을 칭송하고, 어둠 속에서 시를 짓고, 눈물로 시간의 상처를 함께 적셨던 사람들, 상실과 슬픔으로 만들어진 이 세상이 비록 버거울지라도 함께 씨 뿌린 그녀들에 대한 애도와 경외와 감사의 이야기이기도 한 것이다. 빅토리아는 아이의 위태로운 출산에 임박하여 언제나 그녀가 위협과 모욕과 궁박의 상태였을 때 마법사처럼 나타나 든든하게 방어 공격을 해주던 큰 언니의 죽음, 하나하나의 작은 행위를 통해 자기 꿈의 씨앗을 뿌려 육남매라는 멋진 정원을 만들어준 어머니의 돌봄과 죽음 등 상실의 슬픔 속에서 이 어지럽고 끔찍함에도 아름다운 삶임을, 그 삶에 감사해한다.

 

이 아름다운 글들 속에서 저자가 아들과 둘이 일식을 지켜보는 장면에서 사랑의 고통을 깨닫는 문장이 있다. 문장을 독자들과 나누고 싶어 옮겨본다.

 

다음에 네가 이 나라에서 일식을 본다면, 그때 넌 지금의 할머니 나이와 같은 여든 두 살일 거야. (...) 엄마도 나랑 같이 볼 거야?

엄마가 그렇게 오래 살 것 같진 않아. 아이는 더는 말하지 않는다. 제 손으로 내 손을 덮고, 계속 붙잡고 있는다. 이것이 사랑의 고통이다. 사랑을 찾은 뒤에 그것을 떠나보내야 함을 아는 것, 그때까지는 서로를 계속 붙잡고 있는다. 계속 붙잡고 있는다.“ -345쪽에서

 

죽음은 시계가 조용히 자정을 넘기듯 은근슬쩍 다가온다.” 이별의 약속도, 사랑의 다짐도 없이. 우리 모두 빅토리아 베넷처럼 자기주도적 삶을 살아내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들의 인생에도 수많은 작은 사랑의 행위들이 있었음을, 그것들이 이 기이하고 불순한 세계를 살아가는 우리가 잊고 지내는 힘일 것이다. 빅토리아는 마침내 미래를 두려워하며 너무 많은 시간을 보냈음을, 그래서 그런 마음을 비로소 내려놓는다. 도달해야 할 행복 봉우리, 성취해야 할 완벽한 삶이란 없음을, 팔을 뻗었을 때 내 손을 잡을 사랑하는 그 누구와, 괜찮을 거라 말해주는 누군가 있으면 충분히 이 삶은 족할 것이다.

 

갈망과 결핍이 묘하게 또한 불편하게 병치된 공간인 거대한 은유이자 현실인 망가지고 버려진 곳에 무언가가 꿋꿋하게 생명을 키워나갈 수 있음을 증명하는 끈질긴 희망과 사랑의 찬가이다. 우리 모두 하루하루 살아가는 것이 버겁고 견디기 힘들다는 생각이 거침없이 내습해 올 때가 있다. 빅토리아 베넷은 사물의 가장자리에서, 보도의 갈라진 틈에서, 단정한 부지의 경계선에서 우리가 모른 새에 자라는 들풀처럼 상호의존의 역사를 부정하며 배제와 소외가 거칠게 행해지는 세계일지언정 새 생명은 자라나 삶이 계속됨을 알려준다. 그리고 삶과 죽음 또한 계속되고 시간은 흐르고 또 흐르는 것임을. 슬픔으로부터 벗어날 길을 찾기 위해 척박한 땅을 갈고 마침내 세상의 경이로 돌아가는 길을 발견한 이 고결한 글을 읽을 수 있었음에 감사한다.

 

슬픔은 우리와 함께 산다. 그래도 나는 그것이 우리의 나날을 몽땅 차지하도록

두지 않을 것이다.” - 빅토리아 베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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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의 탄생 - 이 시대 최고의 지성이 전하는 ‘안다는 것’의 세계
사이먼 윈체스터 지음, 신동숙 옮김 / 인플루엔셜(주) / 202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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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지식은 왜 무지로 이끄는가? 잃어버린 지혜는 어디에 있는가?

 

오늘 우리네 사회에서 무언가에 대한 앎(지식)을 물으면 인터넷 검색창을 떠올리거나 스마트폰의 앱을 열어 계산하고 길을 물으며, 자기 고유의 기억이나 생각을 이끌어내는 작업을 멈추었다. 이젠 나아가 챗GPT와 같은 인공지능에게 물어 답변을 얻거나, 자신이 꾸미고 싶은 한 편의 글을 얻어내기도 한다. 우린 언제부턴가 계산하고, 말하고 글을 쓰고 생각하는 일을 기계에 맡기고, 논쟁, 분별, 생각, 가치부여 능력을 상실해가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이 책 지식의 탄생(Knowing what we know)은 이처럼 지식의 획득과 보관, 전달 및 확산이 기술의 발달, 특히 최근 1세기 남짓한 시간에 급격하게 새로운 단계로 변환함에 따라 인류가 꾸준히 존재할 사상과 감정, 도덕적 올바름을 대표하는 사실과 진실에 대한 지식의 본질을 어떻게 이해하고 수용하여야 하는지, 나아가 이 지식이 건전한 판단력이나 분별력을 가지고 행사되고,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진정으로 판단할 수 있으며, 목적 달성을 위해 최선의 수단을 인식하고 채택할 수 있는 현명함이라는 지혜로 발휘되고 있는지를 성찰한다.

 

그 성찰의 영역은 점토 흙판에서 코덱스와 양피지, 종이라는 글의 기록 도구에서부터 도서관, 학교, 백과사전, 지식검증 수단인 시험, 인쇄술과 책, 사진과 신문, TV, 컴퓨터에 이르는 그야말로 광범위하게 아우르며, 이를 통해 지식의 생성과 획득, 보관, 전달 확산의 역사에 깃든 지식과 지혜의 발현에 있어 우리 인류의 태도는 신뢰할 만한 것인가를 묻는다. 다시 말해 이 책은 지혜의 발현에 작용하는 것으로 추정되는 이들 요인들로부터 인류 지혜의 미래는 어두운 것이 아닌가라는 문제의 제기라 하겠다.

 

1. 지식이란, 그리고 지혜란 무엇인가?

 

지식 속에서 잃어버린 지혜는 어디에 있는가?” 

- 34, T.S. 엘리엇,바위(The Rock)

 

지식에 대한 역사적 정의들이 시대별로 소개되고, 오늘날 우리들이 사용하고 있는 지식의 정의, 특히 이 책에서 다루고자 하는 지식의 정의에 이른다. 그것은 사실이나 진실을 알고 있는 상태 또는 상황으로서, 그 사실과 진실에 대한 명확하고 확실한 인식(옥스퍼드 영어사전)”이다. 그런데 이 지식이란 것은 실로 모호하기 그지없는데, ‘사실과 진실에 대한 명확하고 확실한 인식을 어떻게 보증할 수 있는가라고 물으면 논쟁적인 세계로 이끌려 들어가게 된다. 플라톤의 정당화된 참인 믿음(justified true belief)'이라는 아주 오래된, 오늘까지 인식론적 바탕이 되는 정의가 있긴 하다. 그러나 믿음의 조건, 참의 조건, 정당화 조건을 제 아무리 논의해 본들, 과연 이견없는 지식이 존재 가능할까?

 

사실 정당화된 참인 믿음이란 말 속의 믿음처럼 의심스러운 것이 없다. T.S 엘리엇은 연극 바위(The Rock)의 한 대사에서 끝없는 발명, 끝없는 실험에서, 움직임에 대한 지식을 얻지만 고요함에 대한 지식은 얻지 못하고, (...) 모든 지식은 우리를 무지로 이끌고하며 넘치는 지식에도 불구하고 정작 지혜와 삶을 잃어버리고 있음을 비탄조로 읊조린다. 학교, 도서관, 백과사전처럼 지식의 배움, 보관과 전달 수단의 오랜 역사적 발달이 이젠 기하급수적으로 빨라진 지식확장의 진화속도를 따라갈 수 없게 되었다. 엄청난 지식 창출과 저장, 전달확산의 속도처럼 지식의 진위와 선택적 무지라는 부정적 문제 또한 놀라울 만큼 다양하고 빠르게 확산되고 있다. 지식을 정당화된 참인 믿음이라고 하던, 사실 진실에 대한 확실한 인식이라고 하던 지식은 항상 논쟁의 여지를 안고 있어왔다.

 

신문은 끊임없이 변화하는 정책, 욕망, 개인적 악행, 개인적 호불호를 

선전하는 엔진이다.”  -360

 

실제 지금 한국사회에 벌어지는 신문, 방송 등 미디어는 그 지식의 품질에서 이미 신뢰를 상실하고 있듯, 지식이라 불리지만 그것에는 음모와 거짓말, 진실을 가리기위한 온갖 비도적적 거래가 넘실대고, 이익과 자기 선호에 따른 언론 소유주들의 탐욕과 악의로 인해 대중을 현혹시키려는 조작된 지식들이 난무한다. 영국 총리를 낙선시키기 위한 데일리 메일의 악의에 찬 거짓 뉴스와 그 확산의 예에서부터 정치적 대의나 견해를 선전하기 위해 편향과 오해의 소지가 있는 방식으로 정보를 체계적으로 왜곡해 전파하는 프로파간다, , 정보, 지위와 권력의 욕구로 인한 학자를 비롯한 기업, 관료사회의 비뚤어진 지식의 조작 왜곡은 은밀하고도 교활하게 이루어져왔으며, 이루어지고 있다.

 

【「음모와 가짜 뉴스의 시대, 358쪽에서

 

물론 어떤 종류의 지식이든 지식의 확산에서 완전한중립성이란 존재할 수 없을 것이다. 특정한 경향과 편견, 편향성은 불가피할 것이다. 제아무리 공정한 태도를 유지하려해도 미묘한 변화가 명백히 개입함을 부인할 수 없다. 이것을 다른 측면에서 바라보면, 그렇기에 지식이란 것이 요구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결국 논쟁의 여지없는 명백한 사실을 알기 위해 노력해야 하며, 그로부터 생각을 이끌어내고, 역사와 경험을 통해 이해한 바에 따른 생각과 비판, 설득에 일관성을 가질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지식 없이 이러한 태도와 분별능력이 가능하겠는가? 지혜의 미래가 어둡다는 저자의 문제의식 중 하나가 바로 이러한 인간 사회의 실제 때문일 것이다.

 

또 한 측면은 설혹 명확한 진실로서의 지식을 지니고 있다할지라도 그 지식이 어떻게 활용되는가에 따라 지혜로운, 혹은 현명한 사용인가의 문제이다. 노벨화학상 수상자인 러더퍼드는 원자력 현실화란 불가능하다며 핵분열의 실제 사용 가능성을 부정했다. 물리학자 실라르드는 이 의견이 가증스럽고 우려스러웠으며, 아인슈타인에게 부탁해 핵분열의 중요성을 미 대통령(루스벨트,1933)에 알렸다. 이 새로운 현상은 (...) 새로운 유형의 매우 강력한 폭탄이 개발되는 결과를 낳을 것이라고 경고의 편지를 보냈다. 그러나 이 훌륭한 의견은 경멸당했으며, 외면당하고 무시되고 기각됐다. 지식이 지혜로 발현되지 못한 인간 사회의 하나의 전형이다. 편의성과 정치적 계산과 보복의 욕구를 위한 결정이 지식이 지혜가 되는 것을 방해하고 억압하거나 차단시켜온 것이 지식에 대한 인류의 중대한 한 축이다.

 

지식은 겸손을 낳고, 무지는 교만을 낳는다. (...) 겸손과 자신이 

실제로 아는 것이 얼마나 적은 지에 대한 인식이 자부심보다 훨씬 

만족스러운 것이다.” -145

 

책은 17879월 필라델피아에 55인이 모여 논쟁한 연방헌법 입헌회의의 결과기록인 연방주의자 논집지혜가 유익하게 활용된 사례로 예시하고 있는데, 이 논집은 지금 우리 사회에 지식이란 어떤 것이어야 하며, 어떻게 사용되는 것인지를 보여주는 훌륭한 사례가 되어 줄 것 같다. 서로 다른 이해관계로 인해 경쟁하지만 어느 한 사람이 원하는 모든 것을 얻을 수 없음을, 하나의 통일된 사유로 통합하는 존경할만한 지식과 지식인의 모범으로 여겨진다. 이와 달리 작금에 벌어지는 현실부정과 저급한 논쟁으로 국민을 분열과 사지로 몰아넣는 권력의 작태는 어떠한 현명한 자질(지혜)도 발견할 수 없다는 점에서 반면교사의 예라 할 것이다.

 

2. 디지털 기억 상실증 - 더 이상 생각하지 않는 세계


디지털 세계로의 변환은 인식론을 제치고 데이터(D), 정보(I), 지식(K), 지혜(W), DIKW라는 정보이론이 지식의 체계를 차지하게 이끌었다. 데이터란 그 자체로는 아무런 의미도 가지지 못한 기호이거나 신호이며 표시일 뿐이다. 그리고 정보란 그저 눈에 들어오는 사실의 총합이다. 정보들이 결합하여 어떤 맥락과 의미를 가지게 되면 지식이라 할 것이다. 지혜는 이 특별할 것 없는 지식을 인간 개인과 사회에 소중한 유용성으로 발현한 것이다.

 

일례로 책상과 그 위에 책이 있는 사진 한 장과 책상과 책이 바닥에 있는 사진 한 장, 두 장의 사진이 있다. 각각의 사진들은 데이터고, 두 장의 데이터로부터 책상에서 책이 바닥으로 옮겨져 있다는 것이 정보다. 이것을 흔히들 사실(Fact)이라고 말한다. ‘그거 팩트니까 진실이야, 팩트를 보란 말이야, 뭐가 거짓이야?’ 라고들 마치 정보가 진실의 지식인양 말하곤 한다. 그러나 마침 CCTV가 있어 동영상에는 누군가가 지나가며 손에 닿아 책이 떨어지는 것이 보인다. 이제 책은 누군가에 의해 떨어진 것이며, 그 누군가가 왜 책을 떨어뜨렸는지를 파악하게 한다.

 

만일 그 장면에 시계가 있다거나 또 다른 맥락의 어떤 사건을 발견할 수 있다면 점진적으로 참된 지식으로 이동할 수 있을 것이다. 정보는 지식도 아니며, 그저 사실의 총합일 뿐이며, 정보들이 맥락과 결합하여 의미를 가질 때 비로소 지식이 된다. 그리고 그 지식이 어떻게 활용되는가가 지혜의 문제일 것이다. 정보를 조작하거나 날조하고, 무시하거나 왜곡하여 거짓 정보가 만들어지기도 하고, 설혹 진실된 정보가 있어도 핵폭탄이 인류 자멸의 한 시작임을 알면서도 아무런 발언을 하지 않았던 리처드 파인만과 같이 지식을 지혜롭게 사용치 않음으로써 그(원자 핵분열) 오용을 방관할 수도 있을 것이다.

 

위의 예와 같이 참된 지식을 얻기 위해서는 무수한 데이터와 정보의 수집, 그 정보들의 추측과 숙고, 반추와 고려, 상상과 평가 등 신중한 비판적 사고의 능력을 요구한다. 그런데 오늘날 기술의 비약적 발전은 굳이 이러한 복잡한 노력을 요구하는 지식을 습득하지도, 설혹 습득한다할지라도 깊이 배울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다. 알더라도 굳이 기억할 필요가 없어 기억하지 않는다. 온라인에서 자판을 몇 차례 두들기면 검색한 단어와 설명들, 그리고 관련된 하이퍼링크를 통해 찾고자하는 지식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렇게 온라인에서 찾은 지식은 찾자마자 곧바로 잊어버린다. 실제로 곧 잊어버리게 된다는 것이다. 이것을 디지털 기억상실증이라 부른다.

 

인터넷을 통해 지식을 얻는 사람들의 조사에서 이들은 책에서 지식을 얻는 사람들보다 훨씬 엉성하고 얕은 지식을 습득한다.”고 한다. 그저 중요 항목만 표시하고 필요하면 다시 찾으면 충분하다고 여기는 까닭이다. 결국 스스로의 두뇌 신피질에는 아무것도 기억되어 있지 않아, 소위 인식론에서 말하는 선험적 지식은 물론 경험적 지식이 천박하게 된다. 이들과 진실에 대한 진지한 논쟁이나 분별, 생각과 가치부여를 말한다는 것은 공허한 행위에 가깝다. 물론 당사자들은 인정하려 하지 않겠지만 그것이 지식의 본질적이고 인간 지식의 역사적 현실임을 부정할 수 없다.

 


3. 맺는 말 - 지식은 왜 필요한가?

 

인류는 가히 경이적인 기술 역사의 변곡점을 맞이했으며, 이미 상당히 깊숙하게 그 세계 속으로 들어왔다. 낙관주의적이고 낭만적 엔지니어와 연구자, 학자와 기업들은 말한다. 걱정할 것 없다. 인간을 대신하여 생각해주고 가치를 결정하는 기계가 출현하는 것은 오히려 신체능력을 대체한 각종의 기계장치들처럼 인간 뇌의 고된 노동에서의 해방이 될 것이며, 역사에서도 이같은 기술의 변곡점을 맞이할 때마다 냉정하고 침착하게 피해 없이 욕구 전이를 해왔다고 주장한다. 나는 이러한 순진한 낙관론에 공감하지 못한다.

 

기계에 인간의 신체적 활용과 정신의 작용을 맡기고 신체와 뇌의 모든 부담을 던진 채 잠재된 능력의 발견과 편히 앉아 생각할 수 있는 혜택을 과연 만끽할 수 있을까? 인간의 지각 범위를 넘어서는 초지능이 그 어떤 신체적 정신적 능력도 지니지 않은 인간 존재를 어떻게 인식할까? 이 책을 읽다보면 지식의 습득을 위한 무한한 경험과 그 경험에 의해 축적된 인류의 빛나는 지식의 보관과 전달, 확산의 노력을 보게 된다. 학교에서 선조들과 선배들이 쌓은 지식을 전수받고, 그 지식을 검증하고 비판하는 사유능력을 계발하고, 이렇게 체화된 지식을 통해 자기 삶의 건강성과 생명을 유지 존속시키며, 공동체와 결속능력을 강화하고, 나아가 인류의 보다 낳은 삶을 위해 기여하는 지혜가 어떻게 이 세계를 만들어 왔는가를 다시금 반추하게 된다.

 

인간 개체들 각각이 자기 지식의 필요를 더 이상 느끼지 않는다면, 그 지식을 토대로 한 건전한 판단력과 분별력이라는 실제적 문제에 대한 명민한 감각은 사라지고 말 것이다. 그러한 인간들의 사회는 허위와 거짓, 악의와 부적절함에 의해 조작 날조된 지식에 대해 속수무책일 것이다. 20세기 초 아메리칸 타바코 컴패니는 담배 판매를 신장키 위해 여성의 평등과 정의에 대한 욕망을 자극해 판매고를 엄청나게 증가시킨다. 당시에는 공공장소에서 여성의 흡연을 금지했으나, 달리는 마차에서 담배를 꺼내 피워 무는 여성을 자유의 횃불이라는 인식의 선전을 대대적으로 실행한다. 이 선전은 불과 며칠 만에 담배 피는 여성을 자유의 불빛으로 이미지 조작을 함으로써 담배피우는 것이 곧 평등과 자유, 정의의 표상이 되도록 한 것이다. 이러한 선전이 대중에 확산되어 지식이 되는 과정을 비판적으로 사유할 지식이 대중에게 없었다는 점이다. 날조된 파렴치한 거짓 지식을 분별하기 위해서는 인간은 기억과 생각의 세계에서 결코 물러나서는 안 될 것이다. 제 아무리 인터넷 검색기능의 접근이 쉬운 방법일지라도 지식은 인류가 양보할 수 없는 최후의 인간 조건이 아닐까?

 

오늘 지식이 처한 기술환경의 세계에 대한 이 책의 문제의식은 우리들이 상실해가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깨닫는 기회가 될 수도 있다. 정말 우리 인류에게 중대한 질문이 무엇인지, 그 물음에 우린 답할 수 있는 것인가는 또 하나의 엄중한 물음이 되어 울리는 듯하다. 아무튼 이 책은 지식 생성과 보관, 전달과 확산의 역사를 뛰어넘어 인류의 미래 삶에 대한 지식과 지혜에 대한 고귀한 고찰로 안내한다. 호기심 많고 경험하고 생각하는 지적 독자들에게 그야말로 매혹적인 책이 되어 주리라는 믿음을 다시 한 번 강조하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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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머리맡의 사유 - 초심자도 알기 쉬운 현상학 개념 읽기
심귀연 지음 / 경상국립대학교출판부 / 202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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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조금 늦게 객체지향 철학을 접하게 되었다. 비록 늦은 감은 있지만 인간의 주체 독점적 권리에 회의를 갖게 되었고, 지금은 존재론적 실재론과 객체지향의 사고에 깊숙이 빠져있다. 인간과 비인간의 평평한 관계가 이 우주의 진실이며 본질이라고 말이다. 때문에 이들의 사유를 읽다보면 그 뿌리인 현상학이 빈번하게 언급되고, 특히, 메를로-퐁티의 몸지각과 몸틀을 토대로 한 세계 내 관계에 대한 이해의 아쉬움이 계속해서 남아있었다. 이 책을 읽게 된 동기인데, 물론 지극히 입문적 개괄서이기에 마음에 남아있는 과제를 완전하게 해결하는 것은 지나친 욕심일 것이다. 그래서 내 읽기의 연속성을 위해 심귀연 교수의 두 책을 선택했다. 내 머리맡의 사유는 그 첫 번째이고, 두 번째는 몸과 살의 철학자 메를로-퐁티이다. 지각의 현상학을 읽기에서 배제한 이유는 학문적 접근의 야망같은 것은 애초에 없기 때문이고, 심귀연 교수의 두 책의 안내면 미진한 궁금증 해소에 족하리라는 생각에서이다.

 

레비 R. 브라이언트와 그레이엄 하먼, 그리고 티모시 모턴이 바로 이 책으로 이끈 객체이론과 존재론 또는 사변적 실재론의 나만의 주인공들이다. 아마도 주체 없는 객체를 향한브라이언트의 객체들의 민주주의(The Democracy of objects),2011는 내게 그 직접적 영향을 끼친 사유일 것이다. 레비 교수가 제기했듯, 인간은 존재하는 것과 존재하지 않은 것에 관한 주장을 가치 있는 것과 가치 없는 것에 관한 주장으로 전환하는 특이한 경향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 지적처럼 존재에 대한 데카르트의 근대철학 이래 현대인의 인식에 이르기까지 존재자들 사이에 맺어진 관계들에 위계를 부여하려는 이 끈질기고 혐오스러운 망상은 이제 더는 이 세계를 지탱할 수 없을 만큼 위기에 처해있는 것 같다.

 

무수하게 인간과 사물, 동물의 관계를 재배치하고, 대상화 한 결과 기후온난화에서부터 심각한 경제적 문화적 양극화의 극단적 가속현상, 재화에 대한 헤게모니 쟁탈로 인한 적대화와 핵 전쟁의 위기에 이르기까지 주체의 자리를 차지한 이성과 합리주의를 근간으로 하는 인간 인식은 그 신뢰의 근거를 완전히 상실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닐 것이다. 이 세계 우주에 대한 인식에 있어 21세기 지금에 이르기까지 근대철학은 인간 보편적 특성인 이성적 능력으로 대상의 객관성을 파악하고 타자 문제를 증명하는 데 주력해왔다. 그러나 이 근대적 기획은 스스로를 합리적 이성이라는 지식의 원천인 주관성의 영역에 가둠으로써 철저하게 실패한 것 같다.

 


1. 현상학자들과 현상의 정의

 

나는 후설의 의식현상학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다. 다만 근대철학이 인식론에 빠져 이분법적 주체와 객체 구도에 의해 지각활동의 객관성을 입증하는 데 실패했음을 지적하고, 기존의 모든 인식론적 편견이나 관념에서 벗어나 사물 자체를 직관하기 위한 현상 자체의 집중으로 전환적 사고의 틀을 마련했다는 측면의 이해로 족할 것이다. (내 머리맡의 사유)은 주요 현상학 학자인 후설과 하이데거, 샤르트르, 메를로-퐁티, 네 철학자의 각기 다른 현상학의 차이를 소개하고, 현상학의 기술에 등장하는 개념어 스물아홉가지를 의미의 관계성을 가지며 설명하고 있다. 우선 내 입장은 존재론적 실재론자에 가깝다고 해야 할 것 같다. 여전히 오늘의 우리들을 사로잡는 것은 인식론 우위의 관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대철학은 존재론적 철학의 경향으로 나아가고 있는 듯한 인상이다. 인식론자들은 어떤 존재인가를 먼저 파악하기 위해 인식이 앞서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미 여기에는 인간중심적 오만이 깃들어있다고 여겨진다. 인간인 자신들의 인식 판단에 의해 대상이 존재한다고 말하니 말이다. 그러나 돌, 나무, 이산화탄소는 인간의 인식 여부와는 무관하게 이미 거기 있다. 즉 돌은 돌대로, 나무는 나무 그자체로 있다. 현상학은 있음 그 자체인 현상에 집중하라고 말한다. 하이데거의 주장처럼 존재론적 차원에서 사물 자체로 돌아가야 한다는 자기 시현(示現), ‘스스로 자기를 나타내는 바로 그것이 곧 실재라는 말에 나는 동의한다.

 

그런데, 하이데거 또한 알리는 것 자체이지만 근원적인 것을 암시하는 것이 현상이라 정의하며, 마치 실제처럼 보이지만 그렇지 않은 것을 현상의 결여적 변양(變樣)’이라고 말한다. 즉 현상이란 자기를 나타내는 것으로 존재자의 존재, 혹은 존재의 모든 변양이나 파생태를 가리키는 것으로 정의함으로써 현상의 배후나 이면에 어떤 다른 본질이 있는 것으로 설명하고 있다. 샤르트르는 이러한 주장을 거부한다. 나타남(현상)이란 수많은 나타남의 모든 연쇄를 가리키는 것이지 존재하는 것의 전 존재를 독차지하는 그런 숨은 실재가 아니라는 것이다. 나는 샤르트르의 비판에 동조하며, 배후의 어떤 존재를 상정하지 않은 현상(나타남) 그 자체로 확실성이라고 생각한다. 본질은 바로 이 나타나는 것, 바로 그것일 뿐이며, 나타남의 무한 연쇄에 의해 발견된다고. 아마 샤르트르의 실존주의에 대한 가장 명료한 선언의 문장이 되리라.

 

드러난 자신이 곧 본질 자체다. 중요한 것은 나타남의 존재는 존재의 

나타남으로 환원할 수 없다는 것이다. ‘나는 실존 자체다.’”

 - Jean-Paul Sartre, 존재와 무

 

메를로-퐁티는 이를 보다 근원적으로 파고든다. 후설은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라는 자유로운 변경을 통해서 변하지 않는 본질을 파악하려 했으며, 하이데거는 본질은 현상의 이면에 있는 것처럼 주장했다. 그러나 메를로-퐁티는 현상은 현상의 장에서 드러난다고, 중요한 것은 상황이며, 상황 속에 드러나는 것은 사물 자체이며, 이것이 곧 현상이다. 라고 말했다. 배후에 이면이란 것은 애초에 없으며, 현상은 상황 속에 드러날 뿐이라는 것이다. 현상적 장()’으로 파악하는 것이다. 하이데거가 비록 존재론의 철학자로 알려져 있지만, 레비 R. 브라이언트의 비판처럼 하이데거의 존재론 부활의 시도는 그 의미를 철저히 변화시킴으로써 이루어졌을 따름이며, 존재에 대한 현존재, 인간의 접근에 관한 심문으로서 현존재에-대한-존재에 대한 탐구가 되어버렸다. 다시 말해 하이데거의 존재 자체 탐구는 인간에-대한-존재탐구가 되어버림으로써 인간 비인간 구분도식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했다고 읽을 수 있다.

 

현대적 의미의 존재론적 실재론에 가장 근접한 현상에 대한 접근은 단연 메를로-퐁티의 것이다. 이 책의 독서 동기가 현상학과 현상의 거친 개념 및 메를로-퐁티의 일차적 이해였으므로 2개 장으로 구성된 책의 1, 현상학자들의 현상학적 관점이라는 차이를 통한 성찰의 과정에서 이만큼의 수확으로 만족하리라. 2장은 현상학의 스물아홉 가지의 개념설명인데, 이 개념어의 설명 자체가 진행됨에 따라 현상학 이해의 단계적, 상호 연결적 이해의 심화를 돕도록 구성되어 있을뿐더러, 더욱이 해결코자한 내 물음의 개념어들을 중점적으로 이해할 수 있어 지적 해소의 과정이 되기에 충분했다.

 

2. 현상학의 개념어들

 

이 개념어들은 인간을 포함한 동물과 사물 등 비인간과 서로 얽혀 나타나는 이 세계를 직시하는 데 많은 사유의 단초를 제공하고, 이 세계우주에서 인간의 행동이 어떻게 변환해야 하는가를 성찰토록 안내하는 것이다. 오늘 우리들은 어떤 세계를 마주하고 있는가? 인간이 오만하게 주체의 자리에서 자신을 제외한 모든 만물과 현상을 대상화함으로써 질서지우고 통제하려 한 결과가 무엇인가를 생각하며 읽어나가면 이들 개념들이 단순한 철학의 전문 용어만으로서의 소용이 아님을 깨우치게 된다. (부분적 감상의 진술로 몇 개의 개념으로만 정리하련다.)

 

2-1. 본질

 

데카르트를 출발로하여 흄과 칸트, 헤겔에 이르는 전통적 철학은 사실의 가능 근거를 보편적이고 필연적인 본질이라고 한다. 그러나 후설은 구체적이면서 사실적인 주체의 주관성에서 본질은 획득된다고 주장하면서 본질은 체험하는 의식 내용까지 실재의 대상으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본질은 판단중지를 통해 자유로운 상상 속에서 변하지 않는 것을 찾아냄으로써 획득된다는 것이다. 메를포-퐁티는 존재란 사실 자체임으로 본질이 따로 있지 않다.”, 존재는 인식 대상이 아니라고 말했다. 이미 그 자체로 있는 것을 인식대상으로 삼는 순간 수많은 왜곡이 담기는 것은 불 보듯 뻔한 것이었을테니 말이다. 설명되는 순간 존재는 사실성에 벗어난다.”는 말이 바로 그것일 테다.

 

2-2. 지향성, ~에 대한 의식

 

의식은 경험을 통해 순간으로 있는 것이 아니라 연속성을 가지고 종합한다.”, 이 말은 대상은 인식 밖에 있지 않고 인식과 동시에 주어지는 것이며, 의식 체험으로 드러나고, 인식과 인식 대상은 분리 가능한 것이 아니라는 의미일 것이다. 메를로-퐁티는 ‘~을 사유한다가 아니라 ’~을 할 수 있다라며, 전체적 통일성을 가지고 끊임없이 연속체를 이루어 의식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몸은 사물의 부름에 표상없이 대응하는 방식이라고 몸이야말로 지각하는 몸이며, 주체-의식의 상관자로서가 아니라 행위하는 몸이며, 지향성이야말로 몸이 존재하는 방식이라고 정의한다. 사고의 대전환을 요구한다. 우리는 사물 혹은 타인을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과의 관계 속에서 자신을 드러내는 것이라는 말이다. 저자 심귀연 교수는 사랑을 예로 제시하는데, 사랑은 계획도 생각도 아니며, 행위로 드러나는 것이라고. 행위는 느낌을 수반하고 사랑을 함으로써 알려지게 되는 것이라고. 사랑은 관계에 있는 존재들을 사랑이라는 특별한 세계로 이끌어내는 것인데, 몸 없이 어떻게 사랑이 가능하겠느냐고, 몸 없이 어떻게 관계를 맺을 수 있겠는가라는 물음만큼 명료한 묘사는 없으리라.

 

2-3. 지각장(知覺場)

 

근대인식론은 경험에 의존한 지각을 정당화한다. 경험을 객관화하기 위해 대상을 적정 거리에 두고 고정시켜 변화를 제거한 채 인식한다. 이때 대상은 수동적 존재로 격하되고, 그럼으로써 타자의 존재를 증명할 수 없게 되는 딜레마에 빠진다. 이것이 인식론의 근본문제이다. 경험할 수 없는 타자를 안다고 하지만 그것의 타당성을 확증할 길이 없는 것이다. 메를로-퐁티는 객관성을 담보하는 이러한 순수 인상이란 것은 없다고 말한다. 단지 있다면 지각의 상황, 지각장(知覺場)이 있을 뿐이라고 주장한다. 지각이란 개별적이고 순수한 감각들의 연합이 아니라 온몸 지각이기에 공감각적이며, 무엇인가를 아는 것은 모든 상황 속에 드러남으로써라고 말한다. 다시 말해 지각은 이성적 판단의 영역이 아니고, 몸인 지각이 세계에 감정적으로 다가가는 것이라고 한다. 만지고 더듬고 살펴보고 감정을 주고받으며 서로를 이해하는 것이지, 결단코 이성 판단의 영역이 아닌 것이다. 그래서 지각은 교접 작용이자 짝짓기라고 말할 수 있게 된다.

 

2-4. 몸주체

 

메를로-퐁티에게 몸은 대상도 객체도 아니다. 생리적 기계도 아니며, 인과율에 지배받는 물리적 몸도 아니다. 더구나 이성에 의해 통제되고 조절되는 몸도 아니다. 몸은 지각하기도 하며 지각되기도 하는 주체임과 동시에 대상이다. 몸은 주체의 능동성과 수동성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 (두 손을 맞잡아보라) 이로써 그 오랜 세월 배제되었던 존재 권리를 회복한다. 여기에 오늘의 신유물론적 사고의 토대인 객체지향 철학의 뿌리를 발견하게 된다. 몸들은 관계 속에서 세계를 열어간다는 점에서 사실적이다. 몸을 객관화하고 밀어내는 순간 우리 몸은 혐오의 대상으로 전락하고 만다. 불완전한 인간이 자신들의 결핍을 보상하기 위해 만들어낸 장애라는 정상과 비정상 구분의 말처럼 망상이 출현한다.

 

몸틀(신체도식) 151쪽에서


2-5. 몸틀 (1)

 

어떤 몸들이건 그 자체로 고유성을 가진다. 몸의 상태가 어떻게 달라진다 해도 나는 몸인 나이기 때문이다. 어제와 오늘의 달라진 나는 동일한 대상으로서의 영속성을 가진다. 설혹 팔이나 다리가 잘려나가도 나의 동일성을 사라지지 않는다. 그것이 가능한 이유는 습관에 의해 형성된 몸틀때문이라고 한다. 환지통, 시각장애인 등의 예시를 통해 역동적으로 변화가 가능한 몸틀을 확인하게 된다. 개조되고 확장되는 몸틀과 반복에 의해 습관이 됨으로써 드러나는, 스스로 공간성을 확보해가는 몸틀의 변신을 쫓는 우리의 눈길은 세계를 새로운 차원에서 인지하게 될 것이다. 김초엽이나 해러웨이의 사이보그에 대한 바로 그 출발 사유이다.

 

하나의 몸과 다른 하나의 몸이 만나 어색해 할 때 우리는 낯선 세계라고 한다고 한다. 그런데 인식론의 세계에 고착된 사고는 그 낯선 세계의 이질감으로 곧 배제하고 장벽을 쌓아 올린다. 익숙한 우리 사회의 현실이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 익숙해지면 진정 관계 맺음을 통해 새로운 몸틀의 존재가 될 수 있다. 우리는 이러한 내면의 시간을 참지 못한다. 줄곧 주체와 객체의 이분법이라는 근대 인식론에 빠져있기 때문일 것이다. 설명의 예로 소개되는 지팡이 이야기를 짧게 옮겨 읽어보는 것도 유익하리라.

 

시각 장애인의 지팡이는 처음에는 익숙지 않아 부딪치고 넘어지기 일쑤다. 그렇다고 지팡이를 내팽겨쳐 버리면 영영 스스로 걸어 다닐 수 있는 기회를 놓치게 된다. 그러나 계속 사용하다보면 어느 순간 땅과 지팡이 끝의 위치가 가늠되고 자연스레 지팡이는 팔의 감각을 이어받는다. 물론 지팡이에 인간 몸이라는 다른 몸이 생긴 것이기도 하다. 새로운 몸틀이 만들어진 것이다. 이렇게 세계는 인간 비인간이 서로 얽혀들며 새로운 공간적 가치를 만들어낸다. 세계는 지성에 이해 판단되는 그런 세계가 아닌 것이다.”

 

2-6. 몸틀 (2) - 장애와 결핍

 

인간은 몸의 존재이기에 결코 완전하지 못한 결핍의 존재일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인간은 완전을 희구한다. 그것은 결코 도달할 수 없는 환상이다. 인간에게 몸이 없다면 장애란 애초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인간은 자신들의 결핍을 채우기 위해 완벽한 몸을 꿈꾸며 정상적 몸이라는 환상을 만들어냈다. 바로 정상과 비정상이라는 도식으로 장애를 만들어 정상이 아닌 존재를 장애로 간주하고 자신들의 존재론적 결핍을 전가하면서 결핍의 상태에서 빠져나온 것이다. 결국 장애란 관계에서 겪는 트러블이라는 말이다. 장애는 몸의 속성이지 결핍이 아닌 것이다. 장애인에 대한 비뚤어진 시선들이 정치사회 곳곳에서 차별의 시선을 던지며, 배제를 당연시하려 한다. 우리 모두는 몸의 존재자들이다. 그 몸은 다양하고 고유한 것이다. 본디 불완전하고 결핍된 존재인 것이다. 장애란 이 세계에 없다는 진술이 진실이란 말이다.

 

2-7. 조건 지어진 자유

 

자유란 구속됨이 없는 상태를 말한다. 그러나 몸인 인간에게 구속없는 자유란 존재할 수 없을 것이다. 또한 우리는 대상과의 관계에서 자신을 드러내는 불가피한 대자존재(對者存在)이기도 하다. 다만 이때 누구와 어떻게 관계 맺는가는 절대적 주체의 선택의지에 달려있다. 따라서 몸인 인간은 연결되어 있다는 점에서 서로에게 구속되는 존재이다. 때문에 우리가 자유를 말한다면 그것은 조건 지어진 자유일 뿐이라는 것이다. 정신과 영혼을 말하는 자들은 정신의 자유, 영혼의 자유를 말하지만, 몸적 존재인 인간에게 그런 자유로운 영혼 따위는 없다.

 

몸인 나는 상황 속의 나이다. 몸인 수많은 존재들이 상황을 만들어내고 그 상황이라는 조건 속에서만 자유가 존재하는 것이다. 이는 우리는 상황 속에 참여하는 존재라는 말이며, 이 참여의 힘이 없다면 자유도 없다는 말이기도 하다. 조건 없이 자유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얼빠진 한 인물은 자신만의 자유에 빠져 말마다 자유 타령을 한다. 그 자유는 국민이 요구하는 책임의 조건을 못견뎌한다. 인간이 향유할 수 있는 자유란 조건 지어진 자유임을 알지 못하는 우매함 때문일 것이다. 우리는 주어진 상황 속에서 자신들을 변신시킬 수 있는 역량을 가지고 있다. 이것이 자유이며 이 자유를 조건 지어진 자유라 말한다. 상황과 책임을 부정하는 자유를 외치는 것은 망상이외의 것이 아니다.

 

3. 맺는 말

 

이 책은 현상학 공부를 시작하는 입문자를 위한 개념 안내서에 가깝다. 그럼에도 이 책은 현상학의 의미와 윤곽을 잡는 디딤돌이 되기에 충분할 만큼 꼭 필요한 현상학과 존재론에 대한 개념들을 마음에 각인하는 데 도움을 준다. 오늘의 현대철학들은 주체를 더 이상 말하지 않는다. 이제 인간중심적 사고인 인식론적 틀에 근거한 주체와 객체의 구분이 세계를 설명하고 이해하는 데 너무 많은 공허와 왜곡을 가져온다는 것을 인지했기 때문이다. 객체지향의 철학, 존재론적 실재론과 같은 인간과 비인간 모두를 동등한 존재로 파악함으로써만 이 세계가 가능하리라는 사유가 그 토대의 철학으로 길을 이끌었다. 아마 이것도 이 책 스스로 그 자체를 드러낸 현상일 것이다. 내 몸지각과 서로 얽혀들기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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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자처럼 생각하기 (아트 힐링 에디션) - 소진되고 지친 삶을 위한 고요함의 기술
제이 셰티 지음, 이지연 옮김 / 다산초당 / 202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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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별있는 자는 쾌락이 아닌 고통 없는 상태를 추구한다.”고 아리스토텔레스는 니코마코스 윤리학(712)에서 말했다. 아마도 고통은 침해받는 의지를 억제해야 하는 적극성의 상태이기에 이런 말을 했을 것이다. 결국 인간의 삶이란 쾌락이나 즐거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수많은 재앙에서 멀리 피하는 것이라는 얘기이기도 할 것이다. 볼테르 또한 행복은 꿈에 불과하지만, 고통은 현실이다.”라고 했으니, 아무래도 삶의 결실이란 재앙을 무사히 넘긴 것에 따라 작성되는 것이긴 한 모양이다. 이러한 선배 사상가들의 얘기는 인생이란 향락을 즐기기 위해서가 아니라 고통을 이겨내고 처리하기 위한 것이라고 하니 어쨌든 우리는 세상을 헤쳐 나갈 방도를 모색하고 견뎌내야 하는 것일 게다.

 

이처럼 세상 속에 살아간다는 것이 결코 호락호락한 일이 아님을 철저하게 알게 된 것은 아마 갓 스물 무렵 대학생활이 시작되던 즈음이었던 것 같다. 물론 세상의 혹독함에 대한 뼈저린 각성의 시기는 사람에 따라 매우 이르기도 하고 늦기도 할 것이다. 유혹을 참고, 비난을 삼가야 하고, 고통과 불안을 견디며, 자존심을 잠재운다는 것에 대한 진정한 의미를 깨우쳤다는 것은 아니다. 그저 내 의지와는 달리 세상은 흘러간다는 소심한 좌절감과 불안의 심리였을 것이다. 이제 반백년 이상을 살며 나름대로 나와 세상의 타협에 대한 마음이나 관계의 기술에 작은 지혜를 지니게 되었지만, 여전히 사물과 타인, 세상에 초연해지기 어려워하며, 나도 모르게 불필요한 자존심을 자제하지 못하기도 하고, 수시로 목적을 잃고 방황하며, 마음의 평화를 놓치기도 한다.

 

또한 전혀 의도하지 않은 것에 시간을 빼앗기고는 정작 해야 할 일이나 하고자 하는 일은 등한시하고는 무언가 삶의 도달해야 할 목표로 나아가지 못하는 데 전전긍긍하며 근심으로 불안에 사로잡히기도 한다. 그런데 살아가는 지혜에서 무언가 알지 못하고 있는 것이 있다는, 즉 고통을 이겨내고 처리하는 기술에 있어서 무언가 놓치고 있거나 알지 못해 주변부만 빙빙 돌고 있다는 생각이 밀려들었고,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삶에 도달하는 길의 지혜를 들려주겠다는 저자의 들어가는 말은 분명 내게 맞춤의 필요처럼 다가왔다.

 

이 책은 수도자의 금욕과 묵언, 초연함과 무소유 등 세속적 삶과 격리된 삶을 위한 생각이 아니다. 'like a monk'라는 표현처럼 처럼에 방점인 찍힌, 수도승들의 의식적 행위에 깃든 의미들을 통해 온갖 미심쩍은 것들로 가득한 이 세계에서 행복의 허상을 쫓는 데 정신이 팔려 정작 자신을 잃고 좌절과 불만족, 불행의 고통으로 이지러진 현대인들에게 자신을 찾아내는 길을 안내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책은 우선 라고 인식하는 내가 누구인지, 그 실체를 깨닫는 길로 안내하고, 그러한 나의 마음이 수시로 오염되는 부정적 생각, 두려움이 대체 무엇인지 깨닫게 한다. 이렇게 알지 못하던 내적, 외적 환경으로부터 벗어나는 방법들로 초대한다. 즉 아리스토텔레스와 볼테르의 깨우침처럼 고통을 어떻게 인식하고 처리할 것인가에 대한 가르침이고, 그를 통해 궁극에 도달할 삶의 지평으로서 봉사와 사랑하는 마음에 이른 자아의 평온과 초연함, 충만한 만족감에 이르는 길이다.

 

이러한 와 나를 둘러싼 이 세계 실체의 직시를 토대로, 있는 그대로의 나를 발견하고 타고난 성향과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에 이르는 길과 그 구체적 방법론으로서 어떻게 의식적인 내 마음에 열정과 에너지를 투자하고 겸손과 자존감의 존재로 거듭 출발할 수 있는지를 제시하고 있다. 그리곤 나와 공동체의 가치 있는 삶의 행위로서 봉사의 마음가짐, 사랑과 신뢰를 가르쳐 준다. 이렇게 책의 구성을 내 미련한 글로 쓰고 보니 그야말로 평이하고 새로울 것 같지 않아 보인다. 그러나 그 세부의 가르침들은 새로운 인식경험들로 가득해서, 안다고 생각했지만 결코 그 앎을 삶의 행위로 옮겨오지 못했던 그 공백의 지혜를 메워준다. 내 인식을 깨어냈던 문장들의 페이지에 붙인 스티키 북마크들로 책이 가득 채워졌다.

 


내가 나라고 생각하는 나는 정말 나인 것인가? 이 물음이 이젠 더 이상 낯설지 않을 만큼 나는 소위 거울 자아(Looking-Glass Self)'라는 “’남들이 생각하는 나라고 내가 생각하는 존재를 실제의 나라고 여기지 않는다. 그러니 나는 이러한 두 번 반사된 이미지를 나로 인식하지 않으리라는 지성의 존재라 자부해왔다는 것이다. 그런데 정말 그렇게 생각하고 행위 했던가? 자신이 없다. 어쩌면 인식하지 못하고 이 반사된 이미지를 이용해 내 인생의 여러 선택을 해왔던 것은 아닌가라는 물음에 나는 그만 혼란스러워졌다. 진짜 나를 잃어버리고 다른 누군가의 이미지에 등장하는 왜곡된 이미지를 쫓았다면 애초에 무엇이 나를 행복하게 하는 것인지조차 몰랐다는 말이 된다. 아마 지각의 지각 속에서 정작의 자신을 잃어버리고 세상이 정해놓은 의미의 정의를 쫓으며 그것이 내가 추구하는 것이라고 오해하고 있었다는 말일 게다.

 

사실 우리들은 사회가 제시하는 온갖 성공의 모형에 휘둘리며, 그렇게 사회가 정의한 행복한 삶을, 삶의 진실한 목적인양 따른다. 결국 내 타고난 성향과 고유한 재능은 오간데 없고, 오직 문화와 미디어가, 부모와 타인의 시선이 성공과 업적의 모범으로 보여주는 사례들에 현혹되어 저런 사람이 되어야한다고, 저런 일을 행해야 한다고 쫓아대다 보니 그 간극으로 좌절과 불만족, 불행의 고통으로 우울하고 괴로워하는 것은 당연한 귀결일 테다. 수도자처럼 생각하기는 이 지점에서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찾는 것으로부터 시작하는 것이다. 기존의 익숙한 사회 문화적 체제에 도전하고, 초연해지고, 나를 재발견하고, 목적을 발견하고 그것에 초점을 맞추고 절도를 가지고 봉사할 수 있는 가치 있는 존재가 되는 생각을 해보는 것이다.

 

이렇게 우리를 붙들고 있는 외부의 영향력과 내적 장애물, 여러 두려움을 벗어던지려면 수도자의 마음가짐을 가져야 할 텐데, 어떻게 가져야 있는 그대로의 나를 찾아내고, 그런 나의 의도와 목적을 가지고 삶을 재편할 수 있는 의사결정을 내릴 수 있을까? 사물의 뿌리를 찾고 저 깊숙한 곳까지 자신을 점검하기 위해 호기심과 사색, 노력, 깨달음에 이르는 세세한 방법론이 그 길을 환히 비추어준다. 상황과 장소마다 연기했던 나의 수많은 페르소나들, 이 많은 배역들이 진짜 나를 보지 못하게 했을 것이다. 결국 덕지덕지 쌓인 층을 제아무리 잘 소화해도 불만족과 우울, 불안감, 불행으로 나를 일그러뜨렸을 것이다. 자각이 시작이다. 먼지 낀 거울에서 먼지를 걷어내 가려진 진실, 진짜 있는 그대로의 나를 직시하는 것이다.

 

정신 이상이란 똑같은 일을 계속 반복하면서 결과가 달라지기를 바라는 것이다.”

 

책은 보석 같은 나의 직시와 자각에 이르는 길에 빛을 비추어주는 문장들이 빼곡하다. 그리고 삶의 장애와 근심 등 고통을 주는 온갖 두려움에 마주하고 그 두려움의 뿌리를 파악하고 그것을 삶의 긍정적 에너지로 전환하는 방법들도 상황과 장소에 따라 세심하게 안내되고 있다. 우리들의 생각과 행동이란 적극적으로 자신을 새롭게 프로그래밍하지 않는 이상 절대로 바뀌지 않는다. 생각이란 마음속에서 되풀이되면서 믿음을 강화하기에 편집해야 할 의식은 결코 깨어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변화의 노력을 시도하지 않은 채 다른 결과를 맞이하기를 바란다. 아마 부풀려진 자존심, 타인으로부터의 존경을 욕망하는 비대해진 자아 탓일 것이다. 늘 이런 식으로 해왔어”, “이미 알고 있어.”와 같은 이미 안다고 생각하는 오만함으로 그 무엇도 자기 안으로 넘어들어 올 수 없는 장벽으로 막아놓았으니 잠재된 배움의 기회를 상실하는 것은 당연한 귀결일 것이다. 나는 이 지극히 당연한 진리를 전혀 새롭게 인식하게 되었다. 저자 제이 셰티는 이 진부해 보이기조차한 진리를 신체 깊숙이 각성할 수 있도록 세심하게 사색의 경로 곳곳에 이정표를 세워놓고 벗어나지 않도록 이끌어준.

 

특히 목적을 잃고 방황하며 곧잘 삶의 곤혹스러움에 좌절하곤 하는 내가 두려움이라는 생의 모든 범주에서 위력을 발휘하는 감정의 본질을 파악하게 된 것은 최고의 수확이라 하겠다. 두려움이란 버겁고, 불안하고, 상처받고, 경쟁하고, 끊임없이 확인받기를 원하는 감정으로, 온갖 감정의 발원지라고 한다. 그래서인지 이 부정적 감정을 회피하기 일쑤다, 아마 이것이 내겐 익숙한 두려움의 처리 방법이었음을 새삼 깨닫는다. 더구나 두려움의 고통은 현실보다 상상 속에서 훨씬 크게 느껴지고, 증폭되어 그것에 발목이 잡히기 일쑤다. 상상 속에 갇혀버리는 것이다. 도망치면 칠수록 그것은 당신 곁에 더 오래 머물 뿐이다. 당신이 가장 두려워 하는 것을 찾아내어 거기에 가서 살아라.”라고 말한다. 그래야 내면의 풍경이 오염되는 고통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으며, 그 뿌리에 있는 상황이나 욕망을 명확히 파악하고 진단할 수 있으며, 자신에게 설명할 수 있게 되어 그것의 문제를 해결할 가능성이 비로소 열린다는 것이다.

 

또 하나, 과연 나는 내가 믿는 어떤 목적을 위해 기꺼이 앞으로 나아간 적이 있었던가 라는 자문에 멈칫거렸는데, 어쩌면 내 의도에 맞춰 살지 못했던 것이 아닌가라는 반성의 마음이었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한 일이거나 명확한 인식을 지닌 목적을 가졌던 적이 진정 내게 있었던가에 대해 회의적인 기분이었다. 정말 당연한 말인데, 앞으로 나아가야 할 이유가 없었으니 추진력이 생기지 않았을터이다. 이 책은 분명 내면으로의 여행을 위한 안내 가이드다. 정작 내게 호기심을 가져본 적이 없었던 듯하다. 온통 타인의 세계, 외부의 시선에 맞추어져 있던 것은 아니었나하고 생각게 된다. 마음을 열고 호기심을 유지한다면 나의 타고난 성향과 능력인 다르마(Dharma)’가 스스로 나타날 것이라 조언한다. 나는 나의 다르마를 진정 살펴보았는가에 정직하게 답변할 수가 없다.

 

아무도 나를 완성해 줄 수 없다는 말 또한 너무도 당연한 말이다. 그럼에도 실제 나는 이 사회의 온갖 소음에 의존해 살고 있었음을 비로소 깨닫는다. 한 걸음 뒤로 물러나 초연해지기, 있는 그대로의 나를 확인하기 위해 노력해본다. 비록 완벽한 사람이 될 수는 없겠지만, 다른 사람의 진을 빼 놓거나, 평가절하하고, 다름을 이유로 구별하는 존재가 아니라 에너지를 채워주는 겸손하고 베푸는 인간으로서의 자질을 생각한다. 삶은 물론 뜻대로 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내 길을 가면서 그 길에 삶을 데려 갈 수는 있다. 그 길에 도착하기 위해서 나만의 속도로 내가 원하는 때에 내가 삶에서 원하는 것에 반응하고 대처하고 헌신하기 위한 맞춤의 조언과 방법들로 가득한 이 저술을 만나게 된 것은 내게 너무도 소중하고 귀한 기회였다고 말 할 수 있겠다. 이 마음과 자기 삶의 설계를 위한 가르침의 책은 한 번 읽고 감동하는 그런 저술이 아니다. 내 삶의 장애와 고통을 마주할 때나, 길을 잃고 헤맬 때면 언제나 그것의 실체를 헤아리고 새롭게 난 길 또한 있음을 알려주는 그런 삶의 반려서(伴侶書)라 해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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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스 2024-08-27 11:5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반려서!
제목으로 봐서는 그럴만해 보입니다.
저도 반려서를 생각해봐야겠네요

필리아 2024-08-27 12:06   좋아요 2 | URL
안다는 생각을 싹 걷어내고 몰입해 읽었답니다.
많은 문장들이 새롭게 다가왔어요. 아마 제가 조금은 더 제 자신을 각성하는
계기가 되어 준 책이라 해도 될 것 같습니다. 고맙습니다. 그레이스님~
 
일본산고 - 역사를 부정하는 일본에게 미래는 없다, 박경리 유고 산문
박경리 지음 / 다산책방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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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한일 병탄에 이르는 조선의 역사, 일신의 영달만을 위해 일제 부역에 나섰던 족속들의 매국의 행보를 다시금 열거할 필요조차 느끼지 않는다. 숨어있던 그것들의 종자들이 마치 제 세상을 만난 양 기어 나와 대가리를 빳빳이 쳐들고 국민과 국기(國基)를 모욕, 부정하는 사태에 직면하리라고는 결코 예기치 못했다. 박경리선생의 日本散考를 다시금 읽으며, 주구가 되어 일제의 조선 침략을 정당화하는 종자들에 뿌리내린 그 저열성의 근본을 확인한다. 혹여 나와 우리들이 잊고 있는 역사 인식과 저것들에 도사린 역사 지우기의 반민족적 행태의 근인을 보다 명료하게 정리코자 읽는 것이다.

 

이 책의 주요 산문원고들은 일제강점기를 겪은 저자가 일본의 반성 없는 태도에 편승하여 마치 자신들만은 메타적이고 세계시민의 시선을 가진 듯 가식과 위선들을 떨어대며 일본의 시각에 동조하는 종자들의 양태를 목도하면서, 뚜렷한 역사인식을 토대로 철저한 조사를 거쳐 쓴 글들이다. 아마 선생이 생존해 오늘의 이 꼴을 보신다면 우리 공동체가 비극적 역사를 반복하지 않도록 국민대중에 경계의 목적으로 남겨준 일종의 일본 사용 설명서이자, ‘종일(從日) 부역 족속들에 대한 엄중한 자성의 요구서이기도 한 이 통분의 기록 앞에서 우매한 동족들에게 머리를 절레절레 흔드셨을 것만 같다.

 

종일부역 종자들은  그 시절(식민지배기간)이 좋았다고, 근대화가 이루어졌고 먹고사는 걱정이 없어졌으며, 일본인이 되어 자랑스러웠다고, 그렇게 종일 종자들은 말하고 있다.”  그 시절을 그리워하고 돌아가고 싶다고?   “‘천만의 말씀!’ 그 시절로 돌아가지 않기 위해 우리는 현재 반일(反日)하는 것이며, 역사의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해 반일하는 것이며, 오늘과 같은 종일부역자 종자들과 반성없는 일본인이 있기 때문에 반일하는 것이다.”


일제를 위해 부역하고 푼돈을 얻어 쓰며, 그야말로 청풍당상(淸風堂上)에 앉아 나라 팔아먹고 호가호식(豪家好食)하던 양반 족속들, 그리고 그 종자들에게는 일제의 압제가 오히려 그리움이고 아름다운 시절이었을 것이다. 그것들은 말한다. 그 푼돈도 이 나라 발전의 밑천이 되었노라고. 일제에 항거하는 민중들을 빨갱이라고 낙인찍어 지배권력이 알아서 처리해주니 동족을 노예처럼 굴리며 주머니를 채우는데 더없이 우아한 환경이었음을 더 말해서 무엇 하랴.

 

이것들이 오늘 광복절을 부정하고, 민족의 고유 영토를 분쟁화하며, 독립 투쟁에 목숨을 바친 영웅들을 빨갱이라 왜곡하여 테러리스트라 부르기에 이르렀다. 민족의 정신을 깡그리 뒤엎어 한 줌도 되지 않는 더러운 종자무리들이 역사와 국가 정체성을 전복하려 하고 있다. 가히 반역의 무리들이며, 반민족 행위자들이다. 급기야 일본의 마음을 헤아려야 한다며 국민을 향해 존재하지도 않는 열등감, 패배의식이라는 단어를 내밀며 국민의 역사정신에 훈계까지 해대기에 이르렀다. 수치심도, 역사 인식도, 민족 정체성도, 그 어느 하나 갖추지 못한 가장 저열한 것들이 뚫린 주둥아리라고 똥 내지르듯 배설하고 있다. 그 악취가 온 나라의 대기를 더럽히고 있다. 감정적으로 들리는가? 그래 감정의 문제를 어찌 배제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이 감정에는 논리적이고 역사적 사실이라는 근거가 있다.

 

박경리 선생의 이 모음 글들은 종일 부역배들이 숭배하는 일본인, 일본의 정신이라는 그 텅 비고 공허한 망상과 이 빈 정신에 들어 찬 잔인성과 왜곡된 죽음의 미화, 역사적 무의식에 켜켜이 쌓인 반도와 대륙에 대한 열등감과 침탈, 섬을 탈출하려는 확장에 대한 야욕의 역사를 관류하며, 한국의 지식인이라 자처하며 종일하는 밀정들에 대한 경고와 민중적 경계의 필요성을 역설한다. 이 책은 일본과 일본인의 실체에 대한 철저한 통찰을 주요 논제로 하고 있다. 이 통찰을 통해 이들의 밀정 노릇을 하는 이 땅의 종일부역 종자들의 허상과 역사 왜곡, 부정의 망상을 꾸짖는 것이다.

 

바로 지금, 일본의 반성 없음을 비난하는 한국인의 반복되는 요구가 일본인을 피로하게 하고, 그렇게 강제된 반성의 언어가 무슨 의미가 있느냐고, 일본인의 마음을 헤아려야 한다고 괴이한 말아닌 오물을 쏟아내는 종자까지 고개를 내밀고 있다. 한국인의 의식 깊은 곳의 원한은 열등감에 불과하다고 말이다. 웃기는 개수작이다. 일제에 강점된 식민 36년은 일본에게 우리가 일방적으로 당해왔다는 사실이며, 때문에 그 원한이 일방적인 것은 지극히 당연한 것일 뿐 아니라, 이 증오의 가시는 자연스레 뽑아지는 것이 아님을 알지 못하는 무지의 소치이다. 그런데 더 아이러니한 현상은 외려 일본인과 이들 종일 부역자들이 이러한 한국인의 원한과 증오보다 더 극악한 원한을 한국인에게 품고 있는 현상이다.

 

나는 40년 전에 일본의 도쿄에 첫 걸음을 했으며, 그 때 도쿄역 건너편 야에수(八重洲)지구에 있는 마루젠(丸善)서점에 가게 되었었다. 이러한 행태는 업무 차 방문 때마다 하는 나의 루틴이었으며 이는 40여년간 계속되었다. 들어서자 제일 먼저 시선에 들어오는 것은 가장 눈에 띄는 위치에 대규모로 진열된 혐한(嫌韓)서적들이다. 한국과 한국인을 조롱하고 폄훼하며 비난하기 위해 그 많은 종류의 책들이 써지고 있으며, 날개 돋친 듯 팔린다는 것은 가히 아연실색이었다.

 


이러한 양상은 오늘까지 한 치도 변하지 않았다. 튀르키예에 한국 건설업체가 건설한 해양 현수교가 완공되자 일본 공영방송에서는 조만간 붕괴할 것이라는 조롱과 함께 저주를 퍼부었다일본인들의 신체에 켜켜이 쌓여온 질투의 심술궂은 사촌인 샤덴프로이데(Schadenfreude), 타인의 고통에서 기쁨을 느끼는 던적스럽기 그지없는 저열함 그것일 것이다. 그리곤 최근 튀르키예 정부가 해당 교량의 수려함과 안전성에 감사의 말을 표시했음이 해외 매스컴을 장식하자 근거 없는 원한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이 집요한 한국에 대한 원한의 근본은 무엇일까? 이는 역사적 열등감과 정복자로서의 오만함의 발로만으로는 이해되지 않는 구석이 있다.

 

저자는 일본 사회 전반에 걸쳐 오랜 세월 선험적인 것, 즉 무의식 속에 깊이 박힌 한국이 자신들의 원류임을 부정하는 광적 부인의식에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 사실 이러한 역사의 원류는 어떻게 해석되든 좋다. 이미 터럭만큼도 동질성이 없는 마당에 이것이 무엇이 문제가 될까. 이보다 근저를 차지하고 있는 오늘날 신도(神道)라는 그들의 정신이라는 것의 생명없이 텅 빈 도구화적 속성과 아무런 본질도 없이 기만과 닫힌 정신세계이다. 이들의 건국신화라는 고사기에 기록된 구전의 이야기는 전체가 날조와 삭제, 표절로 미화된 짜깁기임을 입증하고, 후일 한일합방을 정당화하기 위한 수단방법으로 무수한 땜질로 역사를 수정, 왜곡하였음은 이의가 없는 정설이다.


이들의 창조신화에는 현실의 권력 상속에 관한 실질 문제이외에는 그 어떠한 약속이나 계율, 정신적 메시지가 없다는 것이다. 그저 현실적이고 실질적인 만세일계의 위력만이 넘실대며 그것을 신국(神國)이라 포장한다. 정신적으로 아무것도 없는, 단지 기만성만이 가득한 텅 빈 상자라는 것이다. 때문에 이 신국이라는 상자에는 어떤 본질 없이 그때그때 써 먹을 수 있는 도구만이 담기고, 사상적 내용이 없어 실체와 본질에 대해 무심할 수밖에 없다고 지적한다.

 

더구나 일본인들이 미화하고 자랑하는 자기네 정신의 표본이라 하는 하라키리(切腹)’는 생선 배 갈라 내장 꺼내듯, 복부이기에 절명까지 시간이 걸리고 배 가른 사람의 목을 쳐주는 가이쿠샤라는 존재에 의해 두 번의 죽음을 맞는다.(여기에만 두 개의 피 묻은 칼이 필수가 된다) 이 추악하고 야만적인 자살방법에 일본인들은 비단을 휘감아 치장하고 미화한다. 자기 고통의 하수인이 자기 자신이며 자신의 죽음을 바라보게 하는 잔인무도한 의식일 뿐, 사디즘과 마조히즘이 복합된광적 잔혹함이다. 이것을 대단한 죽음의 철학인양 미화된 죽음을 강요하는 사회적 분위기는 체념의 타의성만이 넘실댈 뿐이다. 일본인의 의식 속에는 오직 도구성이라는 기회주의적 수단과 민족정신이란 것 없이 공허한 빈 상자만이 있다.

 

그 상자는 항시 남의 것을 베껴 만든 조악함, 그것을 경제라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물질 자본주의에 영합하는 데는 긴요할 것이지만 의식은 야만에서 한 걸음도 내딛지 못했다. 인간이 인간으로서 가장 귀중한 것인 생명의 지엄함과 창조의 정신이 없다. 텅빈 공허한 정신과 잔인하고 어두운 죽음의 세계, 그 수동성과 무감증만이 있는 일본의 망상을 숭배하며 종일 부역배들의 종자들은 말한다. 삶의 터전을 잃고 국토가 유린당하며 민족이 살육당하는 것을 바라보아야 했던 식민시대를 살았던 우리들이 마땅한 권리 쟁취를 하기 위해 민족주의와 반일사상을 간직하는 것이 열등감과 패배의식을 떨치지 못한 저열성이라고. 이런 무식한 개소리가 어디 있겠는가?

 

우리들의 민족주의와 반일 사상은 몇 푼의 물질 피해가 아니라 환산이 불가능한 민족적 정기와 민중의 돌이킬 수 없는 정신적 상처이다. 마치 평등의 세계주의자인 양 한국인의 민족주의와 반일을 조롱 비난하며 이상주의자처럼 지적 허영을 떨어댄다. 강자 편에서, 가해자 편에 서서 양심을 비판하는 것은 피해자의 불이익을 바라보지 않는 외눈박이의 사시(斜視)이며, 허구이자 망상일 뿐이다. 일본인, 일본은 단 한 차례도 진실어린 반성도 사죄를 한 적이 없다, 고작 통분에 공감한다느니, 과거사의 불편이 있었음을 인정한다느니 하는 유체이탈 화법으로 뻔뻔스레 빠져나갈 뿐 아니라 여전히 한국인과 한국의 민족주의와 반일정신을 조롱, 폄훼하며 나아가 한국의 자랑을 자신들의 피해로 간주하며 못 견뎌한다.

 

일본의 극우를 대표하는 독재 정당인 자민당은 도대체 마음의 문제를 외교 레벨에서 사죄로 풀 수 있는 것인가라고 사죄의 무의미성을, 불필요성을 주장한다. 지금 이 땅의 종일 부역배 종자들이 따라 하는 말이 바로 이 터무니없는 말이다. 일본인과 일본은 사죄할 용기조차 없는 족속들임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우리 또한 그까짓 사죄를 듣고자 하는 것이 아님을 누가 모르겠는가! 방자하고 양심없는 시정잡배나 하는 소리를 일본을 대변해 지껄이는 종일 종자들의 이치에 닿지도 않고 천박하기 그지없는 언어 오용에 이처럼 시시콜콜 따지고 입증해야 하는 오늘의 상황이 서글픈 생각조차 든다.

 

지금 반일의 대중화와 대중의 민족주의가 그 어느 때보다 필요해 보인다. 외세와 불의한 매국노들이 판칠 때면 항상 부녀자들과 승려들, 힘없는 백성이 일어나 항쟁했다. 일본을 이웃으로 둔 우리 민족의 불운이었다는 선생의 통찰에 공감한다. 일본이 이웃에 피해를 주지 않는 때 우리는 비로소 민족을 떠나 인간으로서 인류로서 손을 잡을 수 있을 것이다. 식민사관에 물들어 역사적 사실을 왜곡하고 전복하려는 종일 부역 종자들이 지금처럼 노골적으로 횡행한 적이 없을 것이다.

 

박경리 선생은 일본인에게 예()를 차리지 말라!”고 했으나, 이를 수정해서 종일 부역배 종자들인 일본의 밀정들과 일본인에게는 예를 차리지 말라고 해야 할 것 같다. 한 가지 지적하고 맺어야 할 것 같다. 이 책에 수록된 글을 선별 편집한 문학평론가 이승윤은 이 문장을 도발적 발언이라 하고 있는데, 이 표현은 심히 불쾌감을 불러일으킨다. 누구를 도발한다는 것인가? 일본을 도발한다고? 종일 부역배들에게 도발적이란 말일 텐데, 그것들에게 도발할 것이 무엇이 있다는 것인가? 선생이 한국의 동족들인 민중에게 경계삼아 하는 말인데 어떻게 도발이란 말이 가능한지 모를 일이다. 아무튼 이 책은 작금 한국 사회의 어지럽혀진 역사의 부정과 전복 사태를 냉철하게 인식하는 계기가 되어 줄 터이다. 나도 민족주의와 반일을 내던지고 싶다. 그러나 상황이 그렇지 않으니 너무도 답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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