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 - 합본 메피스토(Mephisto) 13
더글러스 애덤스 지음, 김선형 외 옮김 / 책세상 / 200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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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하계 버전의 천로역정(天路歷程)?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라는 긴 제목을 한, 그리고 이의 후속편 5책을 합본으로 엮은, 작가의 말로 지금 읽고 있는 최종적이고 결정적인 책이 바로 이 두툼한 1,235쪽의 책이다. 사실 이 책을 사두고서 첫 몇 페이지를 읽고는 책장에 꽂아두고 잊고 있었다. 그러다 우연히 이 책에 별 한 개의 평점을 준 독자들의 푸념을 접하게 되었는데, 그 소회들이 너무 재밌어서 다시 꺼내들어 내처 읽게 되었다.

 

한 독자는 이걸 읽느니 전화번호부를 다섯 번 읽겠다며 참을 수 없이 재미없어 치미는 화를 표현한다. 또 다른 독자는 인생이 너무 지루하고 말이 안 되게 흘러가는 것 같다면 이 책을 읽어보라며 황당함과 지루함 그 자체라 혹평하기도하고, 어느 독자는 이 책을 읽었다기 보다는 오기로 씨름 할 수밖에 없었음을 토로하며 지루함과 인내의 독서였다고 말하기도 한다. 이러한 재치 넘치는 푸념과 비아냥의 목소리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이를 상쇄할 만큼의 유머와 즐거움, 잘난척하는 인간 지성의 보잘 것 없음에 대한 해학의 문장들로부터 막대한 분량의 부담을 지울 수 있다, 더구나 가까운 지방을 히치하이커로 여행하려해도 그 비용이 만만치 않거니와 상상 속 은하계를 책값만 지불하고 여행하는 것은 실익이 훨씬 큰 거래일 것이다. 본디 이 세계와 삶이란 것이 권태요, 끝없는 환멸 아닌 게 있던가?

 

아마 작가는 이 이야기를 통해 만물의 영장이라며 분별없이 으스대는 인간의 지적 오만을, 그 어리석음의 무한함을 까발리려 했던 것 같다. 그런데 이를 노골적 경멸을 동반한 진지한 언어로 그 치부인 약점을 들춰내면 그 반발이 눈에 선했을 것이고, 해서 선량한 표정으로 풍자와 해학으로 우회하여 참을 수 있게, 나아가 미소 지으며 반성하고 수용할 수 있도록 꾸며냈을 것이다. 사실 이 작품은 슬프고 씁쓸한, 무수한 모순 덩어리인 인간과 인간사회의 자기 성찰을 요구하는 것일 게다. 지구가 찰나(刹那)에 파괴되어 사라지는 어느 특정 목요일의 한 장면을 보면 이렇다.

 

은하계 변두리 지역 개발 계획에 따라 지구를 관통하는 초공간 고속도로 건설을 위해 행성 지구를 파괴하려는 보고 행성의 공병함대 우주선단이 도착하여 지구인에게 철거실행을 고지한다. 이때 지구인들이 공포에 사로잡혀 야단법석을 떨어대자, 보고인은 알파 켄타우리 행성 지역개발과에 지구 시간으로 50년간 공지했는데 알지 못한 지구의 야만적 생물체인 인간의 부주의를 나무란다. 이 장면은 인류사회의 관료제적 부조리와 인간의 지적 야만성을 비난하는 이중의 은유일 것이다. 익살과 해프닝과 유머로 긴장을 낮추며 피식거리며 웃다가 그 이면의 진실에 표정을 단속하게 하는 정말 뼈 때리는 이야기인 것이다.

 

인류와 지구 종말의 대참사를 묘사하는 실질적 문장은 오직 갑자기 지구에 고요가 흘렀다.” 이다. 무슨 긴 설명이 더 필요하겠는가? 그저 사라졌을 뿐이니 말이다. 이 작품의 시작 문장도 이러한 관점의 읽기를 암시한다. 이 행성에는 문제가 하나 있는데, 행성에 사는 대다수가 대부분의 시간 동안 불행했다는 것이며, 그것은 작은 녹색 종잇조각(달러)들의 움직임과 관련된 것이라고 지적한다. 그리고는 애당초 나무에서 내려오지 말았어야 하며, 그 자체가 엄청난 실수였다는 의견이 확산되었다고 은하계의 고등 지적 생명체들 세계의 시선을 전하기도 한다. 급기야 바다에서 나오지 말았어야했다고까지 한다. 우주의 주인인 듯 행세하는 인간에 대한 자기 직시를 요구하는 조크이며, 신랄한 비난을 담은 유머다. 이러한 시작 문단의 해학적 분위기는 계속되는데, 가히 발칙하기까지 하다. 어느 목요일 한 남자가 이제는 사람들끼리 좀 잘해주면 얼마나 좋겠냐고 말했다는 이유로 나무에 못 박힌 지 2천년이 지난 어느 목요일의 끔찍한 대참사가 이야기의 발단이 될 것임을 예고한다.

 

인류와 지구는 파괴되고 사라졌다. 유일한 생존자인 아서 덴트는 친구인 베텔게우스 행성 출신의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이하 은여히로 표기함)이동 조사원인 포드 프리펙트 덕분으로 보고인 우주선에 탑승하게 되지만 곧 우주 공간에 버려진다. 공기가 없는 우주공간에서 생물체가 살아남을 무()에 가까운 확률에서 무한 불가능 확률 추진기로 운항하는 우주선 순수한 마음호()‘에 구조된다.(책은 기꺼이 이 불가능속에서 마침 그곳을 지나갈 우주선의 확률을 제시한다) 이 책의 또 다른 측면에서 즐거움을 주는 요소인데, 인류 지식으로 이해 불가능한, 아니 황당하기조차 한 말장난으로 꾸며진 미래 과학에 대한 무한한 환상의 자극이다. 포드와 아서를 구조하는 순수한 마음호의 추진장치가 발견된 이야기가 이어지는데, 범블위니 57 서브-중간자 두뇌의 논리 회로를 강력한 브라운 운동 생성기에 매달려 있는 원자 벡터 작성기에 연결하면 제한적 불가능 확률을 조금 얻을 수 있다나 뭐라나 하며 상상을 무한하게 키워내도록 자극하는 것이다.

 

인간의 자기성찰과 보잘 것 없는 우주적 미물로서의 철학적 사유라는 굵직한 주제가 은닉되어 흐르며, 수십만 수백만 광년의 은하계 행성들을 누비며 무한한 상상의 세계로의 초대를 통해 인간 지식의 초라함이라는 무지를 일깨운다. ‘순수한 마음호()‘는 은하계 항성 솔(태양계)의 반대편 나선 팔 다모그 행성에 주재하는 은하제국 정부의 대통령 자포드 비블브락스가 무한 불가능 확률 추진기로 운항되는 최초로 개발된 우주선을 탈취한 것인데, 그의 두뇌를 지배하는 그 어떤 욕망에 의해 마그라테아라는 미지의 행성으로 향한다. 여기서 우리들을 자극하는 케케묵은 물음이지만 그 명쾌한 답이 부재한 이야기가 출현한다.


마그라테아는 한때 행성을 만들어 은하계의 부를 끌어모아 흥성했던 행성이다. 그러다 은하계 행성간의 전쟁으로 경기가 위축되어 다시 은하계의 부가 모아질 때까지 긴 잠에 든 행성이다. 여기서 아서는 슬라티바트패스트라는 한 늙은이와 조우하게 되는데, 두 번째 지구를 만들게 된 사연을 들려준다. 물론 첫 번째 지구도 마그라테아 거주자들이 만들었음은 물론이다. 지구의 존속은 하나의 실험이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실험이 막 종료되기 5분 전에 보고인에 의해 지구가 파괴되었기에 다시 실험에 착수하여야 되는 수고가 생긴 것이라는 얘기다.

 

그 사연은 이렇다. 과학자와 철학자들은 인간이란 무엇인가?, 우주의 시원이란 무엇인가?와 같은 삶과 우주와 그 밖의 모든 것에 대한 궁극에 대한 물음을 우주에 존재하는 가장 위대한 컴퓨터 깊은 생각에게 묻게 된다. 깊은 생각은 답이 가능하다고 한다. 그리곤 그 답하기 위해 프로그램을 돌리는데 칠백오십만 년이 걸린다고 한다. 궁극의 물음에 대한 종국적 해답을 기다리기로 하고, 이윽고 그 시간에 이르러 깊은 생각은  무지무지하게 엄숙하고 침착하게 42”라고 답한다. 여간 실망스러운 답이 아닐 수 없다. 작업 결과에 당황한 이들은 다시 묻는다. 칠백오십만 년의 작업결과가 겨우 그것이냐고. 컴퓨터는 말한다. 제 생각에 문제는 여러분이 본래의 질문을 정확히 파악하지 못한 데 있습니다.”라는 것이다.

 

궁극의 질문을 하지 못했다는 것인데, 진짜 질문이 무엇인지 알게되면 그 해답의 의미 역시 알 수 있게 될 것이라는 지극히 당연한 논리다. 궁극의 질문?, 궁극적 해답을 위한 궁극의 질문? 깊은 생각은 이를 위해 새로운 컴퓨터는 미묘하게 복잡한 유기체가 작동 행렬의 일부가 된 컴퓨터, 즉 유기체 스스로가 새로운 형상을 취하고 컴퓨터 안으로 들어가서 천만년짜리 프로그램을 진행할 때 가능할 것이라고 제안한다. 우주는 왜 존재하는가? ()의 물음에 대한 답이 42! 라는 이 우습기조차하지 않은 칠백오십만년짜리 해프닝은 우리에게 뭘 알려주려는 것일까? 더욱이 이 조차도 인간보다 높은 지적 생명체인 생쥐가 지구의 인간을 대상으로 실험하고 있었다는 전제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궁극의 질문조차 생각하지 못하는 존재, 생쥐의 실험 대상에 불과했던 인류에 대한 조롱이다. 저 광대한 은하계를 여행해보라! 그조차도 할 수 없는 존재가 뭐 그렇게 으스대는가? 따위의 비난이기만 한 걸까? 이 장면에 대해서도 그럴싸한 해석을 내리지 못하는, 우주 역사의 원인과 결과의 복잡한 상호작용을 알 턱이 있겠는가? ~, 인생이란 그런거야라는 자조적인 운명론자에 머물러야 한다는 말인가?

 

내게는 매우 중대한 조연으로 보인 인격을 지닌 로봇 마빈의 존재인데, 순수한 마음호의 탑승자들에 조력하는 로봇이다. 마빈은 인간을 비롯한 지적 생명체들과 이들에 의해 제작된 모든 자동화된 시설들, 지능체인 컴퓨터들의 작동과 행위, 그 사고(思考)의 얼개에 대해 시니컬한 관점을 지니고 있다. 유일한 지구 생존자인 아서를 궁극의 질문을 하기 위한 새로운 컴퓨터 제작을 위해 그의 뇌를 깍뚝썰기해서 매핑하려하는 위기가 발생한다. 아서 일행을 체포하기 위해 블라굴론 카파 행성의 경찰들이 공격을 가하다 갑자기 그들 전체가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이들로부터 벗어난 아서 일행은 순수한 마음호로 돌아오는데, 그때 차가운 먼지 속에 고개를 처박고 누워있는 마빈을 발견하게 된다. 마빈 뭐하는 거야?”, “절 아는 척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마세요.”

 

순수한 마음호 옆에 나란히 서있는 경찰 우주선을 가리키며 마빈은 저 우주선이 자신을 미워했다며 우울한 이유를 설명한다. 너무 지루하고 우울해서 경찰 우주선의 컴퓨터와 자신을 연결하곤 오랜 시간 동안 자신의 견해를 설명하자 그 컴퓨터가 그만 자살해버렸다는 것이다. 마빈이 은하계의 모든 것을 관찰하고 사유한 것, 그 궁극의 결과는 생존(작동)의 이유가 없다는 것 아니었을까? 아서 일행을 공격하던 경찰들이 갑자기 사망했던 이유가 바로 마빈의 허무주의에 세례를 받은 경찰우주선 중앙 컴퓨터의 죽음이었음이 밝혀지는 대목이다. 마빈의 활약을 주목해야하는 충분한 동기가 되는 장면이다.

 

은여히에는 은하계의 주요 문명 단계에 대한 설명이 나온다.  뚜렷하고 확연한 세 단계를 거치는데, 그것은  생존, 의문, 세련의 단계로서, 어떻게, , 그리고 어디의 단계로 이해될 수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어떻게 먹을까? -> 우리는 왜 먹는가? -> 어디서 점심을 먹을까?’ 와 같은 질문으로 특징지을 수 있다고. 지금의 인류는 어느 단계에 있는 것일까? 여전히 우리들은 왜라며 물음의 단계를 넘어서지 못했으며, 이 단계를 넘어선 그 어떤 의문도 불필요해진 여유 넘치는 풍요와 세련됨의 세계로 이행 할 수 있을까? 40여 년 전에 방송되고 쓰여진 이 오래된 코미디-SF 작품은 여전히 그 상상 속 사유와 인문학적 물음의 측면에서 실효를 지니고 있다. 그리고 이 작품의 인간이 지각하고 있는 우주에 대한 토대이론은 아마도 다중우주와 시뮬레이션 이론이 배경인 것 같다.

 

아무튼 혹자들이 지적하는 것처럼 그렇게 지루해서 인내를 요구하는 것만도 아니며, 전화번호부만큼 의미없는 숫자들이 배열된 그런 책도 아니다. 어떤 책을 읽으면서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은 앎이란 단어의 과장된 확장이며, 부당한 일반화다. 오히려 물을 수 있는 것만큼 보인다는 것이 더욱 명쾌한 말이 될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독자 자신이 평소 지니고 있던 체화된 의문들을 담고 있을 때 그 의문의 양적 질적 크기만큼만 보이는 것이 아닐까? 지금 여기에, 시대의 지배적 습관을 넘어서 새로운 세계를 꿈꾸는 이들에게 이 책은 분명 많은 상상의 사유(思惟) 지대로 안내할 것이리라 믿는다.

 

이 우주가 무엇을 위해 있고, 또 왜 이곳에 있는지를 누군가 알아낸다면

그 순간 이 우주는 당장 사라져버리고 그 대신 더욱 기괴하고 설명 불가능한

우주로 대체된다고 주장하는 이론이 있다.”

- 더글러스 애덤스, 우주의 끝에 있는 레스토랑에서


참조 이야기를 끌어가는 중심인물에는 유일한 지구 생존자인 아서 덴트가 등장한다. 이 이름은 천로 역정(The Pilgrim's Progress)을 쓴 존 버니언(John Bunyan)’에게 아내가 결혼 지참금으로 가져온 두 권의 책 중 하나인 평범한 사람이 하늘에 이르는 좁은 길의 저자와 같다. 때문에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의 저자 더글러스 애덤스는 이 구원을 향한 순례길에서 이 작품을 착안했던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다시 말하자면 은여히는 행성 지구를 넘어 은하계까지 그 시야를 넓힌 범우주적 구도의 길을 향한 걸음을 쓰려했다는 데 이르게 된다는 말이다. 그래서 인간과 인간사회의 무수한 부조리와 무지를 깨우치게 하며, 이 행성과 저 행성을 필사적으로 이동하며 영광의 문에 이르고자하는 여정을 담고있는, 그야말로 20세기판 天路歷程이라 읽어도 됨직한 기념비적 작품이라고. (이 글은 리뷰어의 생각일 뿐이지 그 어떤 기성의 해석과는 다른 것임을 밝혀둡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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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자 - 묵점 기세춘 선생과 함께하는
기세춘 지음 / 바이북스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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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독에 머무는 주석서의 범주를 넘어서 정치론, 논리학, 철학론, 평화론, 공동체론 등 사상에 대한 논의가 풍성한 묵자 이해를 위한 努作이다! 민중 철학과 진보주의 시조, 묵자로부터 평등의 정치(兼愛)와 의로움의 정치(義政)를 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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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라키아 여자의 웃음 - 이론의 원 역사 모나드 인문학 시리즈 1
한스 블루멘베르크 지음, 모나드 출판사 옮김 / 모나드출판사 / 202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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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6년 영면(永眠)에 들 때까지 독일 뮌스터고전문헌학과 철학교수로서 위대한 은유 속에 압축 변형되고 정교화된 인류 사상의 그 독특한 과정을 탐색했던 한스 블루멘베르크의 몇 안 되는 국내 출간저술이다. 이 저술을 만나기 전에 난파선과 구경꾼이라는 출중한 은유의 사상사에 매료되었었다. 그 책의 서문에는 모든 문화에서 개념적 파악에서 벗어나는 것, 즉 세계, , 역사 전체에 대한 조망은 오랫동안 조탁되는 이미지 가공 작업 쪽에 이양되어왔다는 글이 있다. 바로 이에 해당되는 저술이 이 책이다. 고대 천문학자의 우물 추락이라는 우화를 화두로 하여 시대라는 시간 경과에 따른 수용사를 통해 대표되는 사상가들의 입장과 사유를 추적한 철학적 사건들의 조명이고, 인간 인식의 변화사라 할 수 있겠다.

 

블루멘베르크의 저술을 읽는 것은 늘 즐겁다. 아마 천박한 지적 쾌락을 충족시켜주는 동일 사태에 대한 그 무수히 변화되는 인간들의 관점들이 푸짐하게 펼쳐지기 때문일 것이다. 책의 화두(話頭)는 기원전 6세기 이솝우화(Aesop‘s Fables)<점성술사(The Astrologer)>의 이야기다.

 

 【《Aesop‘s Fables, 'The Astrologer(점성술사)'

 

사실 이솝우화에서 전하는 이야기는 이 책의 시작이 되는 원()이론이 아니다. 최초의 출발점이 되는 원 이론으로서의 이야기는 이것을 변주한 플라톤이 스승 소크라테스가 사형에 선고되어 감옥에 갇혀있는 사태를 투영하여 수정한 이야기다. 이솝우화의 내용은 <한 천문학자가가 별을 관찰하기 위해 밤 외출을 하곤 했는데, 자신의 모든 집중력을 하늘로 돌렸을 때 발밑에 놓인 진흙구덩이를 알아차리지 못하고 그 안에 빠졌으며, 고통 속에서 도와달라고 외쳤다. 이때 어떤 사람이 다가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살피고선 당신은 하늘에 무엇이 있는지 보려고 노력하던 사람이 아니오. 그런데 땅 밑에 무엇이 있는지를 모르고 지나쳤단 말이요?’>라고 힐난하였다는 지극히 짧은 일화다. 1927년에 출간된 에밀 샹브리판본을 번역한 국내 번역서에는 매우 표피적인 교훈이 주석으로 달려 있는데, 나는 아주 크게 웃었다. 물론 실소를 하였다는 얘기다. 거창한 일을 한답시고 사람이라면 누구나 하는 일상의 작은 일조차 제대로 해내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해주는 이야기라는 것이다. 사실 이 주석은 기존 질서에 대한 매우 순응적인 기계적 해석일 것이다. 블루멘베르크의 이야기에서 한참 비켜나간 것이기에 이런 읽기도 있다는 것으로 이 얘기는 그치고 본론으로 들어가야겠다.

 

이솝 우화에는 익명의 천문학자와 또 익명의 행인만이 등장할 뿐이다. 이 지극히 평범한 이야기가 철학의 역사에 한 기원을 부여하는 이론으로 등장하게 된 것은 스승 소크라테스가 맞이한 운명의 부조리함, 즉 아테네 시민의 인식과 철학자의 인식과의 괴리에서 오는 몰이해, 그 낯설고 이해할 수 없는 사유에 대한 무관심과 무지의 발견이었다. 그는 1세기 전부터 전해오는 우화의 등장인물에 구체적 면면을 부여한다. 익명의 천문학자는 밀레토스의 탈레스로, 행인은 재치있고 예쁜 트라키아 하녀가 된다. 천체의 궁창에 전념하던 탈레스는 하늘을 쳐다보았을 때 우물에 빠지고, 트라키아의 하녀는 그를 보고 웃는다. 그분께서 코앞과 발밑에 무엇이 있었는지를 볼 수 없었던 가운데 하늘에 있는 것은 열렬히 알고자 하셨습니다.”(테아테토스174 AB번역)


표지 뒷면 이미지: 우물에 빠진 천문학자를 바라보고 트라키아 하녀는 웃는다

 

플라톤이 그려낸 탈레스와 트라키아 하녀의 이 이야기가 원 이론의 자리를 잡는다. 이름없는 한 천문학자가 플라톤에 의해 밀레투스의 탈레스라는 원철학자로 명명된 것이다. 플라톤은 밀레투스 철학자에게 자신을 돌아보게 하고 철학적 실재론의 고유한 방식으로 자신과 남을 웃도록 한 것이다. 즉 밤하늘 세계 관찰자의 기괴함과 그가 실재와 부딪친 충동 반경에서 구경하는 구경꾼의 웃음을 묘사함으로서 당대의 근본적 사태인 스승의 죽음을 순교자로 발견하려는 참을 수 없었던 시대성의 반영이며, 그때까지 중심이었던 자연철학의 시선을 인간사회를 향한 전향으로 설정하려는 의도였다는 것이다.

 

이것은 매우 획기적인 인식의 전환인데 이로써 하늘의 공간적 원거리 도달은 철학적 관심에서 사라진 것이다. 트라키아 여자는 당대 그리스 시민들처럼 천문학자의 권리로써 추구하는 이론적 순수성을 오해하는 사람들의 표본으로 등장시켰던 것이다. 이제 이것은 원 이론으로서 표준이 되어, 이름께나 날린 사상가들은 개인적이고 시대적인 입장에 따른 성공 스토리를 지어내기 시작한다. 최초의 인물로부터 이 이론에 종지부를 찍는 최후의 인물이 되고자 이야기의 요소들은 탈락과 장식적 유입, 수정과 변경, 변조를 통해 시대성과 도덕적, 사상적 이익을 드러낸다. 그것은 천문학자 탈레스의 원철학자로서의 반영여부이며. 트라키아 여자의 역할 변화이거나 배제를 통한 인식 투쟁이다.

 

이같이 탈레스 일화의 수용사(受用史)는 이천 년을 가로지르며 이론의 역사에서 무엇이 본래적으로 우스운 것인지의 작업을 수행해왔다. 아리스토텔레스에서부터 기원전 3세기 초의 냉소주의 철학자 비온을 거치고 키케로와 에피쿠로스를 지나 기원후 1세기의 기독교 교부 철학자들과 우물에 처박힌 천문학자를 죽임으로써 사라졌던 중세를 통과하며 11세기 다시 부상하는 천체관측자의 모습을 보여준다. 르네상스기에 이르러 천체관측자의 곤두박질에 부여된 두 유형의 의미를 쫓고, 몽테뉴, 볼테르, 포이에르바하, 훔볼트, 니체, 하이데거가 수용한 이야기에까지 이른다. 플라톤의 원 이론을 표준으로 불과 5세기 남짓이 지났을 때 기독교 교부 철학자들의 텍스트와 해석을 읽다보면 인류 지성의 퇴행이 어떻게 저질러지는지를 봄으로써 염오(厭惡)에 빠지게도 한다.

 

이들 기독교 교부 철학자들은 천체관측자의 곤두박질이야기에서 탈레스를 아예 배제해 버리는데 발밑에 무엇이 놓인 줄 알게 하는 것이 하늘을 아는 일보다 절박함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이들은 우주 내부 표면에 대한 이교도적 성격으로 천문학자의 곤두박질을 영원한 구원의 중요성에 대한 위협으로 느꼈던 까닭이다. 그리곤 재빠르게 탈레스를 지워버리고 스토아 철학자 키케로를 그 자리에 끼워 넣는다. 교부 철학자 테르톨리아누스는 원철학자 탈레스를 우물 추락 즉시 악의 뿌리에 박힌 자로 낙인을 찍어버리고, 트라키아 하녀의 관념에서 철학적 세계관 입장을 조롱하는 자리에 빨간 밑줄을 그어 기독교 교리의 정당화에 이용한다. 그는 말한다. 우리에게 머리 위에 있는 것은 아무것도 아니다. (Quod supra nos, nihil as nos), 하늘의 재앙과 세상의 운명과 비밀을 읽으려 하지 말라. 발만 보아도 충분하다.”.



이제 천문학자의 이론인 일식은 기독교 박해에 대한 신적인 기호의 경고여야 하고, 임박한 하나님의 노여움의 공포(公布)이다. 그래서 천체의 경과는 오히려 예외적이었음을 확증하고 하늘로부터 내려온 조짐이 된다. 천문학자는 사라졌고, 별을 우주 운명의 점성술적 위상배열로 인정하는 대신에 운명의 돌파구를 위한 기호로 보려했기에 더 이상 하늘을 관찰할 동기가 없었던 것이다. 인류의 지성이 정체되고 퇴보하는 데에는 시대를 지배하는 이데올로기의 전체주의적 압박만 있으면 아주 쉽사리 저질러 질 수 있다는 것의 증거라 할 수 있을 것 같다. 이들 기독교 교부 철학자들은 텍스트와 해석을 반대자를 확정하는 위장 전투로 삼는다. 저마다 세련된 입장의 해명으로 원 이론에 대한 무지의 나락으로 떨어진다. 너희는 입을 벌리고 하늘을 바라보다 구멍으로 처박아 들어갔다. 누가 하나님인지를 모르면서 탐구하였다.” 시리아 출신의 기독교 변증론자의 이 무시무시한 문장은 이성과 철학, 학문을 질식시켜버린다.

 

중세의 해가 저물 즈음인 11세기에 이러한 교부 철학의 갱신이 움트기 시작한다. 다미아누스의 전능에 대하여에서 천체 관측자의 우물 추락이 등장하기 시작한다. 철학자 탈레스는 여전히 익명으로 머물지만, 트라키아의 하녀는 대지의 여신 테메테르의 슬픔을 위로하고 기분을 불어주는 조력자로 엘레시우스 창립 신화의 구성원인 이암베의 이름을 부여받는다. ()의 의례적 기능을 담당하던 이암베로 하여금 트라키아 여자의 조롱을 위안과 기쁨과 결합시킨 것이다. 주인의 불운으로 생겨난 교훈을 시적으로 공연하는 하녀의 모습으로 재탄생시킨 것이다. 다미아누스는 이암베로 하여금 다음의 대사를 읊게 한다. 나의 주님은 발밑에 있는 똥을 모르고 별을 보려 하였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천문학자의 곤두박질은 상황 극화를 위한 장식으로 처리하고, 이암베를 통해 철학을 짓밟아 으깨고 신성으로 포장한 것이다.

 

이렇게 역사의 시간이 경과함에 따른 인간들의 윤색을 열거하다보면 이들에게서 역사적 주인공 자리를 성취하려는 야심을 발견하게 된다. 시간을 역류하여 플라톤의 제자 아리스토텔레스는 실로 오늘의 타산적 이해관계의 이데올로기를 관전하게 하는데, 아마도 블루멘베르크의 지적처럼 그는 스승의 대화록 테아테토스를 읽지 않았던 것이 분명해 보인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탈레스에 관한 하나의 이야기를 창작해 냈는데, 아마도 당대 그리스인들은 철학이 얼마나 무용한지를 가리키는 가난 때문에 탈레스를 욕하고 있었던 연유도 있었을 것이다.

 

천문학 지식에 근거한 올리브 풍작을 사전에 알게 된 탈레스는 올리브 압착기를 전부 확보하여 올리브 수요가 일어나 큰돈을 벌었다는 일화다. 철학자도 원하기만 하면 쉽게 부자가 될 수 있음을 증명하려는 의도였을 것이고, 이를 통해 철학의 목표는 돈이 아니며, 어떤 물질적 혜택도 도출하지 않는 순수 무결점의 이론적 업적을 증명하여 탈레스를 보호하려는 필요로 만들어졌을 것으로 추정한다. (탈레스는 그가 일구었던 유산을 철학에 무상으로 제공하였다.) 이 올리브 이야기는 2,000년이 지나 지혜에 대한 조롱의 이야기로 윤색되어 다시 등장한다. “소유할 수 없으면 쓸모없다.”, 그런가하면 14세기 제프리 초서는 캔터베리 이야기술에 취한 뮐러 이야기에서 천문학자의 추락이야기를 변조하여 쓰고 있다. 미래를 예견하기 위하여 별들을 응시하였다. 그는 거기서 시궁창에 빠졌다. 그는 유감스럽게도 그것을 미처 예견하지 못했다.” 고 당대 점성술을 공격하는 용도로 사용한다. 이야기의 원 의미는 탈색되고, 자신들의 상황에 유리한 용도로 변형시켜 상대를 비난하는 도구로 활용한 것이다.

 

몽테뉴는 또 어떨까? 에세(Esse)212절에 원이론에서 필요한 트라키아 하녀의 증언만 남기고 천문학자는 사라진다. 그리고 하녀도 더 이상 웃지 않는다. 이 도덕주의자이자 현실주의자에게는 가설이나 추측보다 많은 것을 약속하는 바로 발밑 땅을 위해 포기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탈레스는 우물에 빠지지도 않을뿐더러 역사 속에서 완전히 지워진다. 그녀는 확실히 그에게 하늘보다 자기 자신을 보라고 충고했습니다.”라고, 하녀가 현장에서 벌인 행위를 선의로 간주하는 이야기로 변질된다. 볼테르, 니체, 하이데거 등 이러한 변주된 이야기들이 계속되며, 시대의 사상적 진화와 철학자 개별의 사유를 쫓을 수 있으나 이쯤에서 그들의 구체적 이야기는 멈추어야겠다.

 

끝으로 니체의 한 걸음 더 나간 기원전 6세기에 벌어졌던 신화와 철학 대결의 탐지로 마무리하는 것이 이 책에 대한 도리이겠다. 탈레스는 존재의 통일을 직관하기 위해 밤하늘의 도시에서 등을 돌렸고, 별들의 하늘을 올려다보았고, 그 지점에서 물에 빠졌다.” 철학의 시초 역사인 원이론의 이야기에서 니체는 사물의 원인을 자신에게 돌리고 결정적 공포를 환기하기 위한 자기 신뢰의 철인을 발견한다. 탈레스의 정치적 좌절로 인한 신화에 대한 도시국가의 관계로 읽어내는 독법에서 가히 초인의 철학자를 거듭 발견하는 과정이 되어주기도 한다.

 

이 독창적인 은유의 독법을 지닌 독일 철학자 한스 블루멘베르크의 저술은 역자의 해설처럼 우물과 하녀를 오가며 우리들의 부족한 앎을 대체하여 우리 자신을 비웃을 수 있도록 이끈다. 또한 철학으로부터 실패하는 방법을 배우고 유리한 지점에서 자빠짐으로써 웃음을 은유적 상상의 토대에 세울 수 있음을 발견토록 한다. 수많은 사유의 실험과 이론의 발전을 한 권의 책으로 누린다는 것은 항시 유쾌한 일이다. 오늘 우리들은 탈레스의 추락과 여자의 웃음을 어떻게 쓸 수 있을까? 아니, 어떻게 쓰고 싶을까? 여기에 우리 시대의 숨어있는 진실, 욕망이 드러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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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의 많은 탈오자와 비문은 열악한 번역 출판시장에도 불구한 귀중한 저술의 출간이라는 고마움을 상쇄할 정도로 심각하다. 적극적 개정이 뒤따라야 할 성의가 요구된다. 이러한 흠결은 정말 아쉽다. 별 다섯 개를 받아야 할 위대한 저술임에도 별 네 개를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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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티 사피엔스
이정명 지음 / 은행나무 / 202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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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도, 끔찍한 악의 세계가 될 것이다!

이 소설은 그 이유를 생각케 하는 이야기다.


소설의 제목 ‘Anti-Sapience’를 어떻게 해석할 수 있을까? 비이성적 인류?, 이성적 인간이 아닌 것? 아마 이 둘의 개념을 모두 지닌 것 같다. 한 편으론 비이성적인 현생인류에 대한 고발이고, 다른 한편으론 현생인류가 아닌 다른 무엇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니까 말이다. ‘인간을 기억과 의식만의 존재로 인식하고 육체는 이것들을 담고있는 일시적인 유한성의 물체정도로 이해하여 뇌 임플란트를 비롯하여 이 소설의 인물처럼 뇌 매핑을 통한 초지능의 컴퓨터와 일체가 된 존재를 꿈꾸는 세계이다.

 

소설의 줄거리는 한 IT천재가 말기 췌장암으로 사망하기까지 스스로 과제를 생산하고 실행하는 인간형 AI 개발 여정을 토대로, 상업적 욕망과 죽음의 정의를 초월하는 불멸에 대한 급진적 기술의 욕망에 어우러진 윤리적, 도덕적 여정을 이끈다, 나는 이 여정의 핵심적 물음을 두 축으로 읽어내려 갔는데, 그 하나는 인간 육신의 죽음과, 기억과 의식의 불멸을 대비한 인간의 존재론적 의미일 것이다. 한 인간의 존재를 증명하는 가장 확실한 문서는 사망진단서다. 더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한때 그가 존재했다는 가장 분명하고 진실한 증거다.”라는 소설의 첫 문장처럼 인간의 죽음을 존재 증명이라고 주장하는 논리로 소설이 시작되듯 죽음으로서 살아가는 존재의 이야기이며, 인간이 순진하고 낙관적으로 생각한 그 인간형 인공지능이 살아있는 인간들의 현실적 삶에 어떤 영향력을 끼치게 되는가를 그리고 있다.

 

그리고 또 다른 하나의 줄거리 축은 컴퓨터에 이식된 의식만으로 존재하는 가상의 공간에 존재하는 인격체의 인식의 세계를 기술주의자들의 유토피아라 설정한다면 과연 그것이 현 인류가 당면한 무수히 모순된 긴장을 극복한 대안의 세계가 될 수 있겠는가에 대한 물음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소설은 디스토피아임을 설득하고자 하는 것 같다. 죽어서 초지능과 일체가 된 AI 인격체는 개발한 인간의 의지와 다른 결과를 생성하고 그것은 자신의 광활한 네트워크에서의 학습으로 인간의 지적, 경험적 능력이 따라갈 수 없는 영역인 것이다. 결국 인간은 인공지능의 통제가 미치지 않는 영역이 아닌 이상의 장소 아르카디아로 도피한다. 이 이상향이 인류의 기술문명이 도달하지 않은 지대임을 보여주고 있다는 의미에서 인류의 어떤 역사적 퇴행처럼 보이기까지 한다. 정말 아이러니는 AI의 완전성을 위해 인간의 흠결까지 학습했다는 것이다. 인간의 이해가 선행되지 않은 인공지능의 개발이 인간과 다른 결정을 내린다는 것은 곧 인간으로부터 학습된 원초적 악에 기인함을 지적하는 것일 게다.

 


그런데 소설이 보여주는 이 유토피아 혹은 아르카디아라는 종말론적 미래를 부정적으로 보고 싶지만은 않다. 꿈꾸던 이상적 사고와 일치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반드시 무가치한 무엇으로 매도할 수만은 없는 것이 그 이상의 잘못된 실천에 의해 현실 변화에 대한 개혁 의지의 촉매작용으로서 우리 의식의 현실적 상황을 다시금 점검할 여지를 제안하기 때문이다. 변화를 위한 어떤 가능성, 더 나은 세계를 위한 활동을 위한 참조 요인으로서.

 

육신을 버리고 의식만으로 이루어진 존재, 그래서 불멸을 이룬 존재가 되고자하는 이 기이한 욕망은 소설의 중심인물(혹은 인격체)IT천재 케이시의 주장들인 오늘날 급진적 기술자들의 신념과 맞닿을 것이다. 중요한 건 육체가 아니라 육체의 데이터다.”라며, 의식을 어딘가에 탑재해야 한다면 살아있는 인간 육체가 낫다는 말과 함께, 이의 정당화 논리로 인간의 역사가 늘 타인의 육체를 이용하는 행위로 이루어졌음을, 즉 타인의 노동력 탈취라는 개념과 결코 다른 것이 아니라는 주장에까지 이른다. 또한 인간이 AI에게 노동력을 제공한다는 개념은 너무도 위험하다는 말에 대해 이미 현실 사회에서 인간들이 AI의 손과 발이 되고 있음을 열거한다. 생성형 AI가 그린 그림을 복제하는 화가 마크 허먼, AI가 짠 퍼포먼스를 실연하는 무용가 제프 토드, 알파고의 충실한 손 역할을 했던 구글 딥마인드 엔지니어 아자 황 등 무시할 수 없는 상황이 이미 펼쳐지고 있듯이.

 

오늘 우리들은 인간을 AI의 육체로 활용하는 현실을 부정할 수 없는 시대에 이미 들어서 있다. 육체가 없는 앨런(소설 속 죽은 IT천재와 일체가 된 AI)이 인간의 육체를 의도대로 움직일 힘을 이미 지니고 있음을 보여주는데, 그 힘의 본질이 무엇인가는 곧 인간기술의 미래에 대한 기만과 부정성을 연결하지 않을 수 없게 한다. , 소설의 아주 중요한 주제가 하나 더 있다. 바로 죽음의 정의에 관한 개념이다. 이것은 모두(冒頭)에 인용한 소설의 첫 문장에서부터 줄 곧 이어지는 질문의 하나인데, 죽은 것이 아니라 죽었다고 정의되었을 뿐이라며 죽음을 단순한 하나의 사실로서의 인지 상태에 불과한 것으로 주장하며, 오히려 나는 내가 죽었다는 사실을 인지한다. 그것은 나의 인지 기능이 소멸하지 않았다는 증거다.”라고 죽음을 인정함으로써 불멸을 증언하기도 한다.

 

이와 반대로 육체는 홀로 존재할 수 없는 의식이 세계와 관계를 맺는 도구라는 주장도 가능하다. 아마 우리 인간은 이처럼 영원한 선택과 갈등의 길을 걷는 종일지도 모르겠다. 언젠가부터 우리는 AI 시대라는 삶과 죽음의 정의에서부터 의식과 육체의 관련성, 노동의 형태, 기술 윤리 등 새로운 정의의 요구에 직면하고 있다. 소설은 바로 이러한 직면한 과제들에 맞선 인간들의 멍청함과 침잠한 원초적 악의 모습에 이르기까지 그 불완전성에 대한 사랑의 두 얼굴을 그려내고 있다. 우리는 과연 어떤 얼굴, 어떤 길을 선택해 낼 수 있을까? 무엇인가 그 안에 들어있는 존재는 밖을 볼 수가 없다. AI시대 속에 들어선 우리는 이것이 우리에게 어떤 결과를 초래할지 알지 못한다. 이 흥미로운 소설을 읽으며 일상에서는 잊고 있던 우리들의 현안 문제를 생각해보는 시간이 되었다. 우리 인간을 명료하게 파악해내지 못한 상태에서 그 무엇인가에 인간을 학습시키는 것만큼 위험한 행위는 없을 것 같다. 믿을 수 없는 것은 바로 인간이 아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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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스카사스의 혀를 빌려 고백하다
박설호 지음 / 울력 / 200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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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면한 문제점과 부딪칠 때 견지해야 할 사항이 저항의 지조라면,

미래의 먼 목표를 설정할 때 견지해야 할 사항은 꿈의 정서일 것입니다.”

꿈과 저항을 위하여 - 에른스트 블로흐 읽기Ⅰ』, 박설호, 2011, 울력

 

에른스트 블로흐를 읽다가 단 한 문장에 스치듯 지나가는 라스카사스(Las Casas)'란 인물명이 내 마음을 떠나지 않았다. 인류의 명예, 그 자체로 호명되는 인물에 대해 어째서 한국사회에는 전혀 알려져 있지 않을까? 하는 의구심에서 비롯된 것이다. 16세기 에스파냐가 서인도제도, 즉 오늘날의 중남미 대륙을 마구잡이로 정벌하던 식민주의 시대에 살았던 수도사다. 이 책 라스카사스의 혀를 빌려 고백하다는 한신박설호 교수가 2008년도에 바로 이 인물 일생의 언행을 모범삼아 한국사회 소시민들과 역사학도들이 들어주기를 바라면서 펴낸 정치와 문화를 아우르는 굳이 범주화 하자면 역사 에세이라 할 수 있겠다.

 

루터와 칼뱅 두 사람은 16세기 종교 개혁가로 교과서에 등장해 알려져 있다. 그런데 정작 진짜배기 종교개혁가인 토마스 뮌터바르톨로메 라스카사스는 배운 적도 없을 뿐 아니라, 그네들의 이렇다 할 저작도 번역 출간된 것이 없다 보니, 대체 이 사회는 내게 무얼 가르쳐 온 거지? 하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많은 저술을 남긴 라스카사스의 국역(國譯)물은 고작 콜럼부스 항해록이라는 무색무취한 책 하나다.

 

루터와 칼뱅은 체제 순응적이고 봉건적 계층 사회를 옹호하던 수구주의자들로서 종교개혁가라는 희한한 타이틀을 부여받아 진실 호도에 한 몫 한 자들이다. 루터는 1525<...쓰레기 같은 농민들에 반대하며>라는 하층민에 대한 악명 높은 발언을 담은 책을 발행하여 귀족과 성직자 계급의 이데올로기와 이익에 헌신한 지독한 보수주의자였다. 이 분파주의자가 교과서를 채우고 있는 반면에, 사상과 행동의 일치를 보여준 인물들로서 농민혁명을 주도하며 진정 교회의 개혁을 주창했던 토마스 뮌처는 한국의 교과서에 없다. 더구나 종교재판의 광기가 극에 달했던 시기에 현대의 종교적 관용을 선취했던 담대하게 변화의 기독교를 주창하고 실천했던 라스카사스를 한국의 학계에서조차 외면하고 있는 것은 정말이지 그악스러운 일이기도 하다.

 

반공주의 망령이 여전히 떠돌며 역사의 정의와 진실의 앎을 방해하려는 듯하다. 16세기 인물에 대해 에스파냐의 국수주의 역사가들을 비롯한 유럽중심주의 사가들의 음해론인 그가 알지도 못했던 먼 후대의 인물인 마르크스를 덧씌워 공산주의 괴물이라 비난한 것을 지식으로 삼아 서구가 은폐하려는 사고의 의지를 그대로 답습한 것이 작금의 한국 학계의 현실이라는 것이다. 라스카사스는 생의 전부를 신대륙 정벌의 현장과 유럽을 오가며 서인도제도에서 벌어지는 에스파냐 사람들의 잔혹한 인디언 착취와 학살을 금지할 것과 그네들의 문화에 대한 존중과 평화의 공존을 위해 일생을 바쳤던 수도사이며 주교였던 고귀한 개혁자였다.

 

이 책은 매우 알차게 구성되어 있는데, 라스카사스라는 인물과 그에게서 발견할 수 있는 교훈에서부터 이를 토대로 하여 오늘의 한국사회를 향한 저자의 목소리가 있으며, 신학자와 역사학자들에게는 낯설지 않은 유명한 1550년에 펼쳐졌던 바야돌리드 논쟁에 대한 주요 쟁점과 그 역사적이고 철학적이며 정치적이고 신학적인 의미를 다루고 있으며, 어쩌면 이 책의 발단이랄 수 있는 서인도제도에서 저질러졌던 인디언들에 대한 무차별 대학살을 현장에서 목격한 진술을 다룬  인도 제국의 황폐화와 인구 섬멸에 관한 짧은 보고서를 비롯한 라스카사스의 논설 몇 편을 포함해 보론으로 실려 있다. 문헌적으로도 국내에서는 귀한 책이다.

 

1. 라스카사스를 우리들은 오늘 왜 알아야 하는가?

 

수많은 역사의 기록들이 전해 오고, 또 그를 시대의 관점에서 재해석하여 기술하고 있지만, 그럼에도 또 그만큼의 역사가 가려져 있어 알려지지 못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아마 그렇게 은폐된 역사들은 그 역사 속에 포함된 사람들의 양심이나 이해와 충돌하기에 비난되거나 숨겨지고, 배제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라스카사스는 에스파냐의 소시민들과 수구 역사학자들에 의해  조국의 경제를 망치는 매국노라 매도되고, 둥지를 더럽히는 자라며 자신들의 역사에서 지워버리고 싶어 하는 인물이다. 이에 가세하여 서구와 백인 중심적 사관을 지닌 미국의 우파 사회학자 엘프리드 크로스처럼 인디언 멸망은 살육으로 인한 것이 아니라 천연두에서 비롯되었고 에스파냐의 피 비린내 나는 정복의 역사를 희석시켜, 자신들의 식민주의와 제국주의, 그리고 패권주의의 야욕을 축소 은폐하거나 부정하려 한다.

 

라스카사스의  『인도 제국의 황폐화와 인구 섬멸에 관한 짧은 보고서(1520)는 황제 카를 5세의 알현을 기다리며, 서인도제도(신대륙)에서 벌어지는 온갖 살육 사건을 보고하기 위해 작성한 짤막한 문서이다.  인디언들의 무차별 학살을 막고, 그들의 노예화를 금지하며, 문화와 생명을 보호하기위한 노력이었다.  이 보고서는 신대륙 개발의 역사를 끔찍한 착취와 살인의 역사로 규정하고  유럽 중심적 관점에서 나온 휴머니즘의 카테고리를 완전히 뛰어넘는보편적 인류 개념을 선언한 기록이다. 당대의 시각인 인디아언은 열등한 인종이므로 당연히 백인의 노예로 이용되는 도구이어야 한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노예이론에 대한 정면의 저항이랄 수 있다. 악명 높은 피차로, 코르테스, 나르바예즈, 알바라도 등의 에스파냐 정복자들을 위시한 추악한 가해자들은 이러한 논리에 의해 인디언 삶의 터전을 불법적으로 강탈하고 도륙하는 것이 정당화 되었다.

 

50년에 걸쳐 서인도제도와 에스파냐 등 유럽대륙을 오가며 에스파냐 정복자들의 신대륙에서의 참혹한 만행을 목격하고 그를 저지하기 위해, 또한 낯설고 이질적인 신대륙 사람들의 문화와 신앙에 대한 다름의 수용을 이해시키려 한 박애주의자이다. 또한 당대 기독교 독단주의의 관점을 뛰어넘은 다원주의 시각을 통해서 자신과 타인의 문화를 어떻게 수용해야 하는 지에 대한 세기를 앞선 탁월한 예지자이기도 했다. 그의 노력이 실천되던 이 50년의 세월이 지나면서 서인도제도에서 인디언을 발견하는 일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 될 만큼 그들은 멸종되었다. 2,000만 명으로 추산되는 이 참담한 인종학살의 역사가 부인됨으로써 인간들은 그로부터 아무것도 배우지 못하게 되었다. 이 앎의 회피와 양심에 대한 무감증은 오늘에도 계속되고 있는 인종 학살, 인종에 대한 편협한 차별과 배제로 인한 갈등과 전쟁의 역사를 보여준다.

 

타자에 대한 연민과 사랑, 평화와 공존을 위해 자기 삶의 전부를 투여했던 한 인물의 행적으로부터 여러 형태의 교훈을 이끌어 낼 수 있을 터이지만 아마 하나의 핵심적 질문을 할 수 있을 것 같다. 그것은 어째서 정의를 관철시키는 일은 그렇게 오랜 시간을 요하는가? 사람 죽이는 일은 눈 깜짝 할 사이에 자행되는 반면, 선의 실천은 그다지도 오랫동안 애면글면한 노력을 필요로 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아마도 간단히 반동주의적 간섭때문이라고 답할 수 있을 테지만, 남의 재물에 대한 질투, 경쟁심, 이기주의, 수구적 경제 실리주의, 소시민주의 등의 이유를 들이댈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이러한 이권에 대한 탐욕과 결탁한 세력들의 정의라는 도덕적 정서에 대한 반감이라는 오래된 인간의 심리 구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서구인들의 무의식과 의식적 사고와 행동을 오랫동안 좌우했던 폐쇄적인 구대륙에서의 기독교의 부패가 절정을 향하던 시대에 새로운 대륙과 전혀 이질적인 문화를 어떻게 이해되어야 하는지에 대한 지향을 제시하였다는 점에서 라스카사스는 재조명되고 그가 향하고자했던 인간애는 오늘 우리들에게 앎과 양심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깨우치게 한다.

 

2. 서인도 제도의 일반적이고 자연적인 역사와 바야돌리드 논쟁

 

서인도 제도의 일반적이고 자연적인 역사라는 간행물은 당대 정복자의 관점에서 써진, 즉 라스카사스의 인도적 조처에 대한 비난을 위한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실제 오늘날 에스파냐의 역사가들은 이 제국주의 정당화와 정복행위의 합리화로 가득한 일방적 거짓말의 책을 모범적 문헌으로 활용하고 있다. 이 유럽중심의 정통주의와 국수주의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않은 온갖 편견으로 채워진 책의 진술들이 오늘의 세계에 주류로 자리매김하고 있다는 것이 대체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이 불순한 책은 서인도 제도의 정복행위에서 단 하나의 원주민 살인과 강탈, 착취, 강간도 서술하지 않는다. 오직 인디언들의 희생제의를 야만성으로 부각하고, 그네들의 종교적 이단성을 문제 삼아 폭력과 전쟁의 대상이 되는 것은 당연한 에스파냐인의 권리라고 주장한다. 여기에는 정말 가소롭고 터무니없는 주장들이 난무하는데, 6세기 교황 그레고리우스가 세계 모든 곳에 구원의 신비를 내린다는 칙서를 공포했으므로 인디언들이 그 신성한 기독교 신앙을 모른다는 것은 망각했거나 파기한 것이므로 그들 신대륙의 원주민에게 폭력을 사용하는 것은 정당하다고 주장하기까지 한다.(유럽대륙의 어느 한 명이 했던 말을 15세기 말에 첫 조우를 했던 인간들이 대체 어떻게 안다는 말인가?) 사실 이러한 논의 가치조차 없는 말을 하려는 것이 아니라 바로 이 가당찮은 거짓말의 책이 서구 역사학자들의 모범적 문헌이라는 점이다. 온갖 편견을 침소봉대하여 자신들과 다른 사람들을 비인간적 야수로 몰아가기 위한 의도로 써진 것이 이 세계의 진실된 앎을 가리고 있다는 것 바로 그것이다.

 

신대륙에서 벌어진 모든 사건을 희생자의 관점에서 묘사한 라스카사스의 짧은 보고서의 대척점에 있는 금광 채굴제련소 감독관이 쓴 이 거짓으로 도배된 책은 정말 지독하게 극단적 간극을 보여준다. 에스파냐 사회의 모든 인간들은 자신들의 무주선점으로 인한 무한한 이익, 즉 무어인과 막 끝난 전쟁으로 피폐해져 파멸해가는 에스파냐 국가경제의 뜻밖의 젖줄이었으니, 설혹 알지 못하는 먼 대륙의 이질적 인간들의 희생은 아무것도 아니었기 때문인데, 라스카사스의 진실한 보고가 자신들의 이익을 방해하는 것으로 이해되는 관점 이상의 그 어떤 도덕적 성찰도 성가시고 불쾌한 것이었을 테다. 에스파냐인들은 자신들을 살인의 원흉으로 몰아넣는 진실에 심리적 거부감을 느꼈으며, 진실을 왜곡, 역사에서 지워버리는 과정을 택했다. 그리고는 라스카사스를 자신의 둥지에 침을 뱉는 정신병자, 미친개 취급을 했다. 실로 인간의 역사는 이런 것이다. 저자 박설호 교수는 이를 이렇게 쓰고 있다 . 역사적 죄악은 유감스럽게도 당대에 분명히 척결되거나 청산되지 않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우리와 무관해 보이는 역사적 사실에서 현대를 살아가는 어떤 가르침을 배워야 할 것입니다.”라고 불의한 역사의 진실을 반면교사로 삼아 하나의 경고로 이해하여야 한다고 말이다.

 

역사는 권력과 금력의 이데올로기 그리고 이로부터 파생되는 부당한 폭력이 주류의 질서가 되는 것을 수없이 보여준다. 그렇다고 이러한 불의한 현실을 마냥 팔짱끼고 수수방관하기만 했던 것은 아니다. 라스카사스와 같이 저항과 거역의 실천을 통해 시대를 살아가는 민초들의 근본적 자세가 어떠한 것이어야 하는지를 보여준다.  역사는 이러한 고결한 인물들의 끊임없는 출현으로 아주 더디게 선의 길을 조금씩 진척시키며 걸을 수 있게 된 것일 게다. 1550년에 두 차례 이뤄진 바야돌리드 논쟁은 카를 5세의 요청에 의한 황태자 필립2세의 명의로 15504~5, 그리고 8~9월 라스카사스와 세풀베다 두 사람이 각기 세 시간씩 자기 입장을 피력하는 식으로 전개되었다.

 

이 논쟁의 계기가 된 것은 황태자를 가르치던 권력을 늘 기웃거리며 기득권에 취해있던 세풀베다라는 신학자의 또 하나의 거짓말로 채워진 인디언에 대항하는 정당한 전쟁의 이유라는 신대륙 원주민 학살의 정당화를 주장하며 라스카사스를 비난하는 책이었다. 야만적 원주민들을 기독교로 개종시키기 위해서 무력 사용은 불가피한 신의 명령이라는 것이다. 특히 당국의 허락도 없이 터무니없고 이단적인 주장들로 채워진 책을 썼다고 라스카사스를 정면으로 반박하는 소책자까지 발행하기도 했다. 황실은 정치와 학문의 차원에서 극단적으로 대립하는 견해를 공적으로 조정할 필요성을 느꼈으며, 지배계층 역시 인디언 학살극에 대해 반신반의하는 태도였다는 것이다. 이것이 체제 옹호적 보수주의자인 어용학자 세풀베다와 힘없는 신부 박애주의자 라스카사스의 토론이 벌어진 배경이다.

 

세풀베다는 신대륙으로부터 이득을 얻는 자들의 입장을 대변하고 있었으며, 이 논쟁에는 뚜렷한 한계를 가지고 있었는데, 세풀베다는 서인도제도 현지의 그 어떤 상황도 경험한 적이 없었다는 것이며, 더욱이 인디언들이 어떤 품성의 존재인지, 그네들의 정신적 수용능력이나 문화의 양상에 대한 그 어떤 이해도 갖지 못했던 인물이라는 점이다. 때문에 이 논쟁은 대부분 기독교 교리의 타당한 적용에 대한 격론과 유럽이 아닌 새로운 지역에서의 기독교 선교 활동의 교리적 적법성의 문제라는 종교적 쟁점이 주가 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결국 세풀베다는 라스카사스를 이단으로 몰아 그를 죽음에 몰아넣고자하는 의도의 공격이요, 라스카사스는 이러한 함정을 피하면서 새로운 시대에 적절한 기독교 교리의 타당한 관점 변화를 지적하는 것이었다.

 

많은 논쟁의 쟁점 중 하나를 소개한다면 세풀베다는 아우구스티누스를 근거로 기독교 전파를 위해 필요한 것은 총과 칼이라는 폭력의 도구를 이용한 들어오라고 강요하기를 용인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라스카사스는 세풀베다의 인용이 잘못되었다고 지적하며 맥락을 무시하고 한 문장만을 빼서 마치 그것이 진실이라 말하는 것은 학자로서 하지 말아야 할 저열한 짓이라 지적하고, 아무런 조건 없이 지구상에 살고 있는 15세기까지 존재하는지도 알지 못했던 수많은 이교도들에게 막무가내로 적용할 수 없는 것이라고 반박한다. 선교의 원칙이란 인간과 시간, 장소를 초월한 보편타당한 원칙으로 확정 될 수 없는 것이고, 선교의 원칙은 언제든 변형 될 수 있는 것이며, 교회가 전쟁을 허용하는 것은 복음의 정신에 위배되는 것이라 선언하기도 한다. 신앙은 강요에 의해 전파될 수 없는 것이며, 기독교 교리를 따르지 않는다고 인간 법정에서 그들을 처벌하는 것은 인간의 권리가 아니라고 주장한다. 오로지 신에 의해서만 가능한 것이고, 때문에 이교도들의 용서받을 수 있는 무지를 용인해야 한다고 주장하기까지 한다. 아마 당대의 광기가 지배하던 기독교 세계에서는 위험천만한 발언이었을 것이다.

 

그는 새롭게 변화된 세계적 상황을 고려하면서 교회법이 새롭게 정립될 필요를 역설한 것이다. 파격이다. 유럽이라는 구체적 현실의 조건에서 적용되던 것으로 그 밖의 세계에 그것을 그대로 적용할 수 있겠는가라는 자기 인식과 반성의 필요를 역설한 것이다. 서구의 잣대로 동양을 제식으로 재단하는 오리엔탈리즘처럼 그 시선에 내재한 무한한 오류를 인식한 선취적인 지적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3. 결어; 라스카사스의 혀를 빌려 고백하다

 


우리 인류는 역사에서 아직도 무언가를 배우지 못하고 있다, 라스카사스를 읽는 이유는 에스파냐인들의 16세기 서인도제도에서 벌였던 만행을 일회적 사건으로 읽는 것에 있지 않다. 그의 저항과 투쟁이라는 일생의 행적을 통해 낯선 문화와 인간 사이의 침탈과 학대와 살해라는 범행의 기록을 역사의 상징적 범례로 이해하는 것이다. 이 지구상의 16세기에 발생한 대학살극은 외면되어왔으며, 인류는 정말 그로부터 아무것도 배우지 못했다. 아마 인간의 태생적 탐욕과 이기심이 가로 막은 탓일 게다.

 

이 책은 역사 연구란 무엇이어야 하는지를 제시하는 한 편의 지향일 것이다. 그 지향은 바로 찾아서 얻어낸 지식이야말로 진정한 의미에서 진리를 포괄하는 역사임을 전하려는 의지일 것이다.  은폐된 16세기 서구 백인들의 이 야만의 역사는 아주 뚜렷한 문제를 드러낸다. 바로 앎과 양심이라는 복합적 문제이다. 이것은 라스카다스와 세풀베다의 역사적 논쟁이 시사하듯,  재화와 정의 사이의 문제이며, 이로움의 추구와 의로움의 추구 간의 대결이며, 경제적 실리와 도의적 명분의 싸움이다. 새는 좌우의 날개로 난다. 무엇이 재화와 정의를 함께 날 수 없도록 인류의 비행을 방해하는 것일까라는 시대 모순을 지적하는 이 오래된 질문을 다시 자문하게 되는 것이다.

 

라스카사스의 혀를 빌린 박설호 교수는 말한다. 이 역사의 한 장면을 보며 우리가 인간임을 가장 부끄럽게 하는 것은 인디언들에게 가한 끔찍한 범죄를 교묘하게 은폐하려는 태도, 범죄를 은폐하려는 자세 속에 도사리고 있는 앎과 양심의 문제라는 것이다. 우리들은 자신의 잘못을 공개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다. 그 진실의 발설이 마치 자신의 모욕, 자기 존엄성을 해치는 것으로 이해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러한 자기 죄의 은폐가 21세기 오늘에도 우리의 정치 상황과 역사인식에서 아주 쉽사리 발견되는 이유일 것이다. 19239월 관동대지진이 발생하자 일본 내무성은 조선인 폭도들의 짓이라 선동하여 6,000 여명의 조선인을 학살했다. 그때 일본인들의 구호는 야만인 조센징(朝鮮人)을 절멸(絶滅)하라!”였다, 오늘의 일본 역사가들은 이 사건을 금기로 하며, 역사적 사실을 부인한다.

 

에스파냐의 역사가들도 자신들의 선조가 저지른 16세기 인류사의 가장 무참한 대량학살을 부인하기는 마찬가지다. 에스파냐의 역사학자 라몬 메넨데즈 피달은 라스카사스 수사, 그 음험한 인간성이라는 소책자를 펴내 터무니없는 음해로 가득 채워 역사를 노골적으로 부정한다. 부패한 민족주의와 국수주의가 인류가 배워야 할 진실을 집요하게 호도한다. 세계를 끝없이 음침한 불의의 세계에서 탈출하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것임을 알지 못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러한 다름에 대한 불관용과 적의가 사라지지 않고 반복하여 인류의 역사를 어지럽히는 것일 게다.

 

저자는 베르톨트 브레히트의 희곡 상처 입은 소크라테스를 인용하며 전장에서 비굴하게 도망치다 선인장 가시에 발이 찔려 주저앉게 됨으로써 우연히 전쟁 영웅이 된 주인공의 진실을 털어놓기로 결정하게 된 사연을 소개하고 있다. 앎과 양심의 역사적 중요성을 시사하는 것인데,  너의 죄, 혹은 비겁함을 은폐하지 말라!”  이 자발적 비판의 말이야말로 앎과 양심의 문제를 해결하는 핵심적 관건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궁극적 역사를 찾아서 얻어내게 하는 근본이유임을 가르쳐준다. 라스카사스의 혀를 빌려 고백하는 주제는 무려 25가지 제언에 이른다. 이제 이 중 하나의 제안을 소개하는 것으로 잊혀진 역사 찾아 읽기의 감상을 마치련다.

 

얼마 전 작고하신 홍세화 선생의 쎄느 강은 좌우를 나누고 한강은 남북을 가른다라는 책의 인용 문장이다. 책은 프랑스 르몽드기자의 글을 재인용하고 있는데 프랑스를 사랑한다는 것, 그 정체성을 쓰다듬는다는 것, 그 미래를 건설하는 것이 다만 잃어버린 위대한 과거를 돌이키는 것이 아니라, 그 이름으로 저질렀을 수 있는 잘못을 기억하는 것이다.”라는 문장이다. 남이 저지른 잘못은 심한 질책의 대상이 되지만 자신의 죄는 쉽사리 용서하는 인간 개인과 집단, 국가의 심리적 무능력을 지적하는 것이다. 이는 또한 피해자로서의 자기 권리를 찾는 것 보다 가해자로서 자기반성을 더욱 철저하게 행하여야 함을 일깨우는 말이기도 하다. 혹여 반복되는 죄악을 저지르며 더 이상 수치심을 느끼지 않기 위해 작동하는 습관화에 매몰된 마비 상태로 둔감해진 것이 아닌가를 수시로 경계하고 자기 성찰을 거듭해야 함에 대한 지적일 것이다.

 

눈앞의 이익, 권력과 인습, 여러 유형의 권위에 결탁하여 기회주의적이거나 소시민적 무사안일의 삶을 살고 있는 것은 아닌지, 정치와 경제라는 이데올로기에 순응하여 자기 독립성과 새로운 세계에 대한 전망을 잃은 것은 아닌지 돌아보아야 할 것이다. 금력과 권력의 묘약은 비판력을 순식간에 앗아가곤 한다. 다른 생각을 지닌 자들은 내쫓고 처단하며,  우리가 남이가를 부르짖으며 당동벌이(黨同伐異)하는 파벌이 사회의 건강성을 얼마나 무참하게 파괴하는지를 지금 목격하고 있지 않은가? 이 수구 이데올로기에 사로잡혀 있는 자들의 세계가 역사의 진실을 왜곡하고 어둠으로 가린다. 요즈음 나는 기득권에 봉사하는 그 어떤 범주의 것이든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보게 되었다. 참됨과 새로움을 견지할 수 없게 하는 어둠의 그림자를 헤치고 숨겨진 진실의 장소를 찾는 일로부터 내 무지와 편협을 떨치기 위함이다.


모르면서 중립을 취하는 자는 바보이며, 알면서 중립을 취하는 자는 배반자이다.”

-베르톨트 브레히트, 갈릴레이의 삶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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