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뭔가 착각한 모양인데, 주주들이 계속 남으려는 건 돈을 벌기 위해서예요. 그걸 바로 자본주의라고 하죠. 만일 그들에게 돈을 잃게될거라고 말한다면 당장에 주주를 그만둘 겁니다."
"내가 손해를 보라고 제안하는 건 아니지만 그렇게 될 가능성은충분히 있죠. 주주가 된다는 건 책임을 진다는 뜻입니다. 방금 당신도 말했듯이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건 자본주의예요. <SMP> 주주들은 수익을 내고 싶어하죠. 시장이 수익과 손실을 결정하는 게 바로 자본주의 법칙 아닌가요? 그런데 당신은 그 법칙이 <SMP> 직원들에게만 적용되어야 하고 당신과 주주들은 예외라는 듯이 얘기하는군요" - P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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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펜하이머는 나중에 신비로운 버섯구름이 하늘로 떠오르는 것을 보았을 때 기타의 구절을 떠올랐다고 말했다. 1965년 NBC 다큐멘터리에서 그는 "우리는 이 세상이 예전 같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몇몇은 웃었고, 몇몇은 울었습니다. 대부분은 말을 잇지 못했습니다. 나는 힌두교 경전인 바가바드기타의 한 구절을 기억했습니다. 비슈누 왕자에게 그의 임무를 완수해야 한다고 설득하고 있습니다. 그에게 감명을 주기 위해 비슈누는 팔이 여러 개 달린 형태를 취하고서는 ‘이제 나는 죽음이, 세계의 파괴자가 된다(Now I am become death, the destroyer of worlds).‘고 말합니다. 우리 모두가 근본적으로는 이와 같이 생각했을 것입니다."라고 기억했다." 오펜하이머의 친구인 에이브러햄 페이스는 이 인용문이 오피의 "승려 같은 과장"처럼 들린다고 말하기도 했다. 오펜하이머의 마음에 어떤 생각이 떠올랐건, 그의 주변 인물들이 있는 그대로의 행복을 느꼈음에 틀림없다. 로런스는 그의 기사에서 그들의 감정을 묘사했다. "큰 폭발음이 거대한 섬광이 번쩍한 지 약 100초후에야 울렸다. 새로 태어난 세상의 첫 울음이었다. 그것은 침묵에 잠긴 부동의 실루엣에 생명을 불어넣고 목소리를 주었다. 고함 소리가 공기를 채우기 시작했다. 지금껏 땅에 선인장처럼 뿌리 내린 듯 서 있던 사람들은 그제야 춤을 추기 시작했다. " 몇 초 후 사람들은 춤을 멈추고서로 악수를 나누기 시작했다. 로런스는 그들이 "서로 등을 두드리며행복한 아이들처럼 웃어대기 시작했다."라고 보고했다. 폭발로 땅바닥에 내동댕이쳐졌던 키스티아콥스키는 오펜하이머를 끌어안고 10달러를 내놓으라고 했다. 오펜하이머는 자신의 지갑이 비어 있다는 것을 보여 주며 다음에 주겠다고 말했다" (나중에 로스앨러모스로 돌아와 오피는 키스티아콥스키에게 자신이 서명한 10달러짜리 지폐를 증정하는 의식을 거행했다.)
통제 센터를 떠나면서 오펜하이머는 베인브리지와 악수를 나눴다. 베인브리지는 그의 눈을 쳐다보면서 "이제 우리는 모두 개새끼들이다(Now we‘re all sons-of-bitches)."라고 중얼거렸다. 본부로 돌아와서 오펜하이머는 동생 프랭크와 패럴 장군과 함께 브랜디를 나눠 마셨다. 한 역사가에 따르면, 그러고 나서 그는 로스앨러모스에 남아 있던 비서에게전화를 걸어 키티에게 메시지를 남겨 달라고 부탁했다. "그녀에게 이제 침대보를 갈아도 좋다고 전해 주게." - P472

오펜하이머의 지휘 하에 만들어진 원자 폭탄이 이제 곧 사용될 것이었다. 하지만 그는 그것이 소련과의 군비 경쟁을 촉발하지 않는 방식으로 사용될 것이라고 스스로에게 되뇌였다. 트리니티 시험 직후, 그는 바네바 부시로부터 임시 위원회가 폭탄의 존재와 곧 일본에 사용될 것임을 러시아에 알려야 한다는 그의 권고를 만장일치로 받아들였다는 것을 듣고 안도했다. 그는 당시 포츠담에서 처칠과 스탈린을 만나고 있던 트루먼 대통령이 그에 대한 단도직입적인 토론을 하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나중에 이 3자 회담에서 실제로 어떤 일이 있었는지를 알게된 오펜하이머는 아연실색했다. 무기에 대한 허심탄회하고 솔직한 토론을 하기는커녕, 트루먼은 의뭉스럽게도 수수께끼 같은 말을 하는 것에 멈췄던 것이다. 트루먼은 그의 회고록에 "7월 24일, 나는 스탈린에게우리가 파괴력이 매우 강한 신무기를 만들어 냈다고 넌지시 말했다. 러시아 수상은 별로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그는 단지 그 소식을 듣게 되어 기쁘며 ‘그것을 일본에 대항해 사용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을 따름이었다."라고 썼다. 이것은 오펜하이머의 기대에 훨씬 못 미치는 것이었다. 역사가 앨리스 킴벌 스미스가 나중에 썼듯이 "포츠담에서 일어난일은 어이없는 희극이었다." - P479

로버트 윌슨은 히로시마로부터의 소식에 큰 충격을 받았다. 그는 후기가 사용되지 않기를 바랐으며, 사용되지 않을 것이라고 믿을 만한 이유가 있다고 생각했다. 오펜하이머는 1월에 폭탄이 시범 단계에 이름때까지만 일을 지속하도록 그를 설득했다. 그리고 그는 오펜하이머가임시 위원회 심의 과정에 참여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성적으로 그는 오펜하이머가 그에게 확실한 약속을 할 수 없는 위치에 있음을 이해했다. 그것은 장군들, 전쟁부 장관 스틸슨,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대통령이 내릴 결정이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신뢰가 무너졌다고 느꼈다. 월슨은 1958년에 "나는 일본인들과의 토론이나 그 위력을 평화적으로 보여줄 수 있는 시범 없이 폭탄이 사용되었을 때 배신당했다고 느꼈습니다."라고 썼다.
윌슨의 아내 제인은 히로시마 소식을 들었을 때 샌프란시스코를 방문중이었다. 그녀는 로스앨러모스로 서둘러 돌아와 남편에게 축하의 미소를 지었으나 그가 "매우 우울해하고 있음을 발견했다. 그리고 3일 후 두번째 폭탄이 나가사키를 파괴했다. 제인 윌슨은 "사람들이 쓰레기통 뚜껑을 두들기며 기뻐했지만 남편은 거기에 참가하지 않았어요. 그는 골난 사람처럼 불행했습니다."라고 회고했다. 로버트 윌슨은 "나는 아프고 속이 안 좋아서 토할 것 같았습니다."라고 회고했다.
윌슨 같은 사람은 또 있었다. 로스앨러모스 금속학자 시릴 스미스의 아내 앨리스 킴벌 스미스는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많은 사람들이 감정의 변화를 겪었고, 심지어는 전쟁을 끝낸 것이 폭격을 정당화한다고 믿었던 사람들조차도 악이 실재한다는 것을 극히 개인적인 차원에서 느끼게 되었다."라고 썼다. 히로시마 이후, 메사 위의 사람들은 대부분 잠시나마 기쁨을 느꼈다. 하지만 샬럿 서버에 따르면, 나가사키의 소식이전해진 후에는 암울함이 연구소를 뒤덮었다. 곧 "오피가 원자 폭탄은 지나치게 끔찍한 무기이기 때문에 이제 전쟁은 불가능하다고 말했다."라는 말이 돌았다. 한 FBI 정보원이 8월 9일에 보고한 바에 따르면 오펜하이머는 "신경 쇠약에 걸릴 지경이었다. " - P483

1945년 8월 8일, 스탈린이 얄타 회담에서 루스벨트에게 약속했고 포츠담에서 트루먼에게 확인했던 대로 소련은 일본에 전쟁을 선포했다. 이것은 천황의 주전파 각료들에게 치명적인 소식이었다. 그들은 그동안소련을 잘 이용하면 일본이 미국의 "무조건 항복" 원칙보다 다소 완화된 항복 조건을 얻어낼 수 있도록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해 왔던 것이다." 이틀 후 나가사키가 플루토늄 폭탄으로 황폐화된 다음 날 일본 정부는 항복 제안을 전해 왔다. 조건은 단 하나였다. 일본 천황의 지위를 보장하라는 것이었다. 그 다음 날 연합국은 항복 조건을조금 바꾸는 것에 합의했다. 천황의 통치권은 "연합국 총사령관에 위임한다."는 것이다. 8월 14일, 라디오 도쿄(Radio Tokyo)는 정부가 이 조건을 받아들였다고, 즉 항복하기로 결정했다고 발표했다. 전쟁은 끝났고,
그로부터 몇 주 지나지 않았을 때부터 저널리스트들과 역사가들은 폭탄이 없었어도 전쟁이 비슷한 조건으로 같은 시기에 끝났을지를 두고논쟁을 벌이기 시작했다. - P484

오펜하이머는 안심하지 않았다. 그는 그 주말의 대부분을 과학 패널의 이름으로 스팀슨 장관에게 보내는 최종 보고서 초안을 작성하는 데 보냈다. 그의 결론은 비관적이었다. "핵무기의 사용을 효과적으로 막을수 있는 적절한 군사적 대응책은 없다는 것이 우리의 의견이다." 게다가 폭탄은 지금도 대단히 파괴적이지만 점점 더 커지고 더 큰 파괴력을갖게 될 것이었다. 미국이 전쟁에서 승리한 지 사흘 만에 오펜하이머는 스팀슨과 대통령에게 이 신무기들을 막을 방법이 없다고 말하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는 앞으로 수십 년 동안 미국이 핵무기 분야에서 주도권을 장악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세울 방법이 없다. 게다가 설령 주도권을 잡는다고 하더라도 우리 스스로를 가장 끔찍한 파괴력으로부터 지킬 수 있는 방법도 없다•••••. 우리는 과학적, 기술적 능력을 키우는 것으로 적국에 피해를 가할 수는 있어도 이 나라의 안전을 보장할 수는없다고 믿는다. 안전은 오직 앞으로 전쟁 자체를 불가능하게 만드는 것으로만 보장받을 수 있을 것이다."
보고서를 완성한 오펜하이머는 바로 워싱턴으로 향해 바네바 부시와 함께 스틸슨의 전쟁부 보좌관인 조지 해리슨을 만났다. 오펜하이머는 8월 말 로런스에게 "시기가 안 좋았어. 투명성을 보이기엔 너무 일러."라고 전했다. 오펜하이머는 과학자들이 왜 원자 폭탄에 관련된 일을 하는 것이 무의미하다고 느꼈는지를 설명하려고 했다. 그는 "지난 전쟁에서 독가스가 그랬듯이" 원자 폭탄 역시 국제 사회에서 금지되어야할 것이라는 주장을 넌지시 비추었다. 하지만 오펜하이머는 워싱턴에서만난 사람들 중 누구도 자신을 지지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나는포츠담에서 일이 아주 틀어졌다는 명확한 인상을 받았다. 즉 러시아 인들과 함께 협력이나 통제하는 것에 대해서는 아무런 진전도 이루어지지않았다." - P485

오펜하이머는 맨해튼프로젝트가 근복적인 의미에서 바로 라비의 예상을 현실화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것은 "지난 3세기 동안의 물리학의 결과로" 대량 살상 무기를 만든 것이다. 그리고 그는 이 성취가 물리학을 피폐하게 만들었다고 생각했다. 이는 단순히 형이상학적인 차원에서만이 아니었다. 그는 곧 과학적 성과로서의 폭탄을 비하하기 시작했다. 오펜하이머는 1945년 말 상원 위원회에서 "우리는 잘 익은 과일이 많이 달린 나무를 세게 흔들어 레이더와 원자 폭탄을 만들었습니다. (전쟁 동안에) 우리는 이미 알려진 지식을 광적이고 무자비하게 착취했습니다." 그는 이 전쟁이 "물리학에 현저한 영향"을 주었다고 말했다. "실질적으로 멈추게 했지요." 그는 전쟁 중에 "학생을 길러내는 것을 포함해 물리학 분야의 전문 활동을 완전히 멈추었음을 볼 수 있다."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전쟁은 또한 과학에 관심을 집중시키기도 했다. 바이스코프가 나중에 썼듯이 "전쟁은 과학이 모두에게 가장 직접적인 중요성을 가진다는 것을 가장 잔인한 방식으로 명확하게 보여 주었습니다. 이것이 물리학의 성격을 바꾸어 놓았습니다."
1945년 9월 21일 금요일 정오, 오펜하이머는 스팀슨에게 작별 인사를하러 갔다. 그날은 스팀슨의 전쟁부 장관 임기의 마지막 날이자 그의 78세 생일이었다. 오펜하이머는 스팀슨이 그날 오후 백악관에서 이임식을 할예정이며, 그 자리에서 "원자력에 대한 열린 접근"을 "뒤늦게" 주장할 것임을 알고 있었다. 스팀슨의 일기에 따르면, 그는 트루먼 대통령에게
"적절한 반대 급부(quid pro quo)가 있다면 폭탄에 대한 정보를 공유할 기회를 줄 수도 있다고 러시아에게 즉시 제안해야 할 것"이라고 단도직입적으로 말할 생각이었다.
오펜하이머는 스팀슨을 진심으로 좋아했고 신뢰했다. 오펜하이머는 전쟁이 끝나고 원자 폭탄을 어떻게 다루어야 할지에 대한 논쟁이 중요한 전기를 맞고 있을 때 스팀슨이 은퇴한다는 것을 안타깝게 생각했다. 이날 만났을 때, 오펜하이머는 폭탄의 기술적 측면에 대해 다시 한번 설명했고, 스팀슨은 그에게 펜타곤 이발소에 같이 가자고 했다. 스팀슨은 그의 가느다란 은색 머리를 다듬었고 이발이 끝나자 의자에서 일어서서 오펜하이머와 악수를 나누고는 "이제 당신에게 달려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 P490

 "현대의 프로메테우스들은다시 한번 올림푸스 산으로 돌격해 인간을 위해 제우스의 벼락을 가지고 돌아왔다." <라이프(Life)》는 물리학자들이 이제 "슈퍼맨 옷"을 입은듯하다고 비평했다.
오펜하이머는 이와 같은 찬사에 익숙해졌다. 그는 마치 지난 2년 반동안 메사 위에서 새로운 역할을 준비하는 훈련을 받은 것 같았다. 그는 과학자-정치가로 탈바꿈했고, 심지어 시대의 우상이 되었다. 파이프를 피우고 중절모를 쓰는 등 조금은 가식적인 그의 행동들조차 곧 전세계에서 알아보게 되었다.
그는 곧 자신의 개인적인 생각들을 퍼뜨리기 시작했다. 그는 미국 철학 협회(American Philosophical Society)의 청중들에게 "우리는 대단히 끔찍한 무기를 만들었고, 이는 세계를 한순간에 완전히 바꾸어 놓았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자란 세계의 기준에서는 사악한 것이었습니다.
그것을 만듦으로써 우리는 과연 과학이 인간에게 유익하기만 한 것인가라는 질문을 던지게 되었습니다." 원자 폭탄의 "아버지"는 자신의 창조물이 개념상 공포와 침략의 무기라고 설명했다. 게다가 그것은 저렴하기까지 했다. 이 조합은 언젠가 인간 문명 전체에 치명적일 수도 있을 것이었다. 그는 "지금 우리가 가지고 있는 초보적인 핵무기도 값싸게만들 수 있습니다•••••. 누구나 손쉽게 핵무장을 할 수 있다는 것이지요. 히로시마가 핵무기 사용의 본보기가 되었습니다." 그는 히로시마에투하된 폭탄이 "사실상 패배한 적을 향해" 사용되었다고 말했다. "그것은 침략자의 무기입니다. 놀라움과 두려움은 분열하는 원자핵만큼 그것의 근본적인 성질입니다." - P493

트루먼 대통령이 1945년 10월 3일 자신의 메시지를 국회에 전달했을때, 많은 과학자들이 처음에는 안도했다. 이 메시지는 애치슨 밑에서 일하는 젊은 변호사인 허버트 마크스(Herbert Marks)가 작성했는데, 그는이 메시지에서 의회에게 산업 전반을 규제할 권력을 가진 원자력 에너지 위원회를 만들어야 한다고 역설하고 있었다. 당시에는 워싱턴 내부인들조차 알지 못했지만, 마크스는 오펜하이머의 도움을 받았다. 그래서인지 이 문서는 오펜하이머가 원자력 에너지의 위험성과 잠재적 편익의 양면성에 대해 느끼던 급박한 마음 상태를 반영하고 있었다. 트루먼은 원자력 에너지를 이용하는 것은 "낡은 사고방식으로는 상상할 수없을 정도로 혁명적인 새로운 힘이다."라고 선언했다. 시간이 가장 중요한 변수였다. 트루먼은 "가능하다면 원자 폭탄의 이용과 개발을 포기하기 위한 국제 사회의 조율만이 인류의 희망이 될 것이다."라고 경고했다." 오펜하이머는 자신이 핵무기를 폐기하겠다는 대통령의 약속을 받아 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오펜하이머는 큰 메시지를 만드는 데에는 성공했을지 모르지만, 다음 날 콜로라도 상원 의원 에드윈 존슨(Edwin C. Johnson)과 켄터키하원 의원 앤드루 메이(Andrew J. May)가 입안한 법안에는 영향을 미칠방법이 없었다. 메이-존슨 법안이 구현하는 정책은 근본적으로 대통령의 연설과 상충하는 것이었다. 대부분의 과학자들은 그것이 군부의 승리라고 생각했다. 무엇보다도 이 법안은 보안 규정을 어기는 것에 엄격한 징역과 높은 벌금을 부과할 것을 제안했다. 오펜하이머의 동료들은그가 메이-존슨 법안을 왜 지지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10월 7일, 그는 로스앨러모스로 돌아와 로스앨러모스 과학자 협회의 집행 위원회 위원들에게 법안을 지지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그는 특유의 설득력으로 그들을 설득하는 데 성공했다. 이유는 단순했다. 시간이 가장 중요한 변수였고, 재빨리 국내 원자력 에너지 관련 사안을 규제하기 위한 법률을만들지 않으면 핵무기를 금지하는 국제 협약은 생각할 수조차 없다는것이었다. 오펜하이머는 어느새 워싱턴 내부인이 되어 있었다. 그는 회망과 순진함으로 가득 차서 정부에 협력적인 지지자가 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법안의 구체적인 조항을 살펴본 과학자들은 경악했다. 메이존슨 법안은 대통령이 임명한 9인 위원회에 원자력 에너지에 관한 모든 권력을 집중시킬 것을 제안했다. 군 관계자들도 위원회에 참가할 수있도록 허용할 것이었다. 과학자들은 경미한 보안 규정 위반으로도 최고 징역 10년까지 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오펜하이머가 1943년 로스앤러모스 과학자들을 육군 소속으로 하는 계획을 승인했을 때처럼, 그의동료들을 걱정시켰던 구체적인 조항들의 함의는 정작 오펜하이머는 놀라게 하지 못했다. 전쟁 중의 경험을 토대로 생각해 보았을 때, 그는 그로브스와 전쟁부와 같이 일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다른 사람들은 이에 동의하지 않았다. - P497

 몇 분 후, 뜨거운 뉴멕시코의 태양을 받으며 단상 위에 앉아 있던 오펜하이머는 그로브스 장군으로부터 감사장을 받기 위해 일어섰다. 낮고 조용한 목소리로, 그는 앞으로 연구소의 작업에 참여했던 모두가 자부심을 가지고 그들의 성취를 돌아볼 수 있기를 기원했다. 하지만 다른 한편 그는 말했다. "오늘 그 자부심은 깊은 우려와 함께해야 합니다. 원자 폭탄이 무기고의 신무기에 불과한 것이 된다면, 인류가 로스앨러모스와 히로시마의 이름을 저주할 날이 올 것입니다." 그는 계속했다. "전 인류가 단결하지 않으면 반드시 멸망할 것입니다. 이것이 엄청나게 파괴적이었던 이번 전쟁이 우리에게 준 교훈입니다. 원자 폭탄은 모두가 이해할 수 있도록 보여 주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다른 시기에, 다른 전쟁에 대해, 다른 무기에 대해 같은 말을 했습니다. 그들은 승리하지 못했습니다. 우리들 중 몇몇은 잘못된 역사의식을 가지고 이번에도 승리하지 못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그렇게 믿을 필요는 없습니다. 우리의 작업을 통해 우리는 법률과 인류애의 이름으로 단결된 세계에 헌신했습니다. - P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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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제게 전화를 걸어왔어요"
에리카는 한심하다는 듯 한숨을 쉬었다.
"그가 왜 자네에게 전화했을 것 같은데?"
"리스베트가 수배중일 때 그 사람을 여러 번 인터뷰했습니다. 그래서 그가 저를 잘 아는 것이고요."
"그래. 그는 자넬 잘 알고 있어. 스물일곱 살 먹은 임시기자이고 검사가 퍼뜨리고 싶은 정보가 있을 때 써먹을 수 있는 편리한 통로라는 걸."
"그건 저도 압니다. 하지만 형사에게서 전화를 받았고, 나가서 커피를 한잔 했고, 거기서 그가 얘기해줬어요. 저는 그 말을 그대로 받아적었고요. 자, 그다음엔 어떻게 해야 합니까?"
"난 자네가 그의 말을 정확히 인용했다고 믿어. 그다음에 해야 할일은 안데르스에게 그 정보를 보고하는 거였고, 그는 나를 찾아와 상황을 설명해야 했지. 우리가 함께 상의해서 취해야 할 입장을 결정할수 있도록 말이야."
"압니다. 하지만 전......"
"자네는 그 정보를 안데르스에게 가져다줬어. 그래, 잘했어. 문제는 안데르스였지. 그건 그렇고 기사를 한번 분석해보지. 첫째, 한스파스테는 왜 이 정보가 세간에 유포되기를 바랐을까?"
요한네스가 어깨를 으쓱했다.
"글쎄요, 모르겠습니다."
"오케이. 그럼 내가 이 기사는 거짓이고, 리스베트는 스테로이드와아무런 관련이 없다고 말했다면 자넨 뭐라고 대답할 거야?"
"그건 증명할 수 없는 일이라고 하겠죠."
"그렇지. 다시 말해 어쩌면 거짓일 수도 있는 기사를, 그것이 거짓임을 증명할 수 없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발표할 수 있다는 게 자네 생각인가?" - P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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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베르트는 리스베트의 병실 앞으로 다가가 문고리를 돌렸다. 문고리는 무언가에 걸려 단 1밀리미터도 움직이지 않았다.
아주 짧은 순간, 그는 확실한 판단을 내리지 못하고 엉거주춤 문앞에 서 있었다. 방안에 안니카 잔니니가 있다는 건 알고 있었다. 만일 그녀의 서류가방에 군나르의 보고서 사본이 들어 있다면 ••••• 그러나 문은 굳게 닫혀 있었고, 그걸 부술 힘이 그에겐 없었다.
어차피 그의 계획에 없는 일이었다. 안니카는 프레드리크가 맡아서 처리할 것이다. 자신은 실라첸코만 끝내면 그만이었다.
에베르트는 복도를 둘러보았다. 스무 명쯤 되는 간호사에 환자와면회객들이 문을 빼꼼히 연 틈으로 자신을 주시하고 있었다. 그는 권총을 치켜들어 복도 끝 벽에 걸려 있는 그림에 대고 한 방 쏘았다. 마치 요술 지팡이라도 휘두른 듯 구경꾼들이 일시에 자취를 감췄다.
그는 꽉 닫혀 있는 문에 다시 한번 눈길을 던진 뒤 결연한 걸음으로 살라첸코의 병실로 돌아와 문을 닫았다. 그런 다음 면회객용 의자에 앉아 오랜 세월 그의 삶에서 내밀한 부분이었던 소련 망명자의얼굴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그렇게 꼼짝 않고 앉아 있은 지 십 분이나 되었을까, 복도에서 들려오는 웅성대는 소리로 그는 경찰이 도착했음을 알았다. 그 순간, 특별히 생각나는 건 없었다.
그는 마지막으로 권총을 들어 자신의 관자놀이를 겨누고 방아쇠를 당겼다.

이어진 일들은 살그렌스카 병원에서 자살을 기도하는 일이 얼마나 신중치 못한 선택이었는지를 잘 보여주었다. 에베르트는 급히 외상 전문 응급실로 옮겨졌고, 안데르스 요나손은 곧바로 필수적인 생체 기능을 유지시키기 위한 응급조치를 취했다. - P206

프레드리크가 말을 끊었다.
"그는 암에 걸렸어. 위와 대장, 그리고 방광에 벌써 여러 달 전에사망선고를 받았고, 살날은 두 달밖에 안 남아 있었지."
"암?"
"그는 여섯 달 전부터 그 권총을 가지고 다녔네. 더이상 고통을 견딜 수 없는 정도가 되면, 자신이 중환자실에 누운 고깃덩어리가 되면 사용하겠다는 생각으로 말이야. 하지만 섹션을 위해 마지막 봉사를해야 했지. 참으로 위대한 마지막 출정이었어."
비리에르는 멍한 얼굴이 되었다.
"그럼 당신은 알고 있었던 겁니까? 그가 살라첸코를 죽일 생각이었다는 걸?"
"물론이지. 살라첸코가 입을 열 가능성을 아예 차단하는 것, 이게바로 그의 임무였어. 자네도 잘 알잖나. 우린 그자를 위협할 수도 설득할 수도 없었다는 걸."
"이 일로 어떤 스캔들이 일어나게 될지 몰라요? 당신도 에베르트만큼이나 돈 거예요?"
프레드리크가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그는 비리에르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면서 팩스로 받은 종이 한 뭉치를 건넸다.
"그건 작전상 내린 결정이었어. 난 지금 내 친구를 애도하고 있고, 얼마 후엔 나도 그의 뒤를 따르게 될 거야. 그리고 스캔들은...... 어느 전직 세무 변호사가 편집광 증세가 명백히 드러나는 편지들을 써서 신문사, 경찰, 그리고 법무부 장관에게 보냈네. 그중 하나를 봐. 여기서 에베르트는 살라첸코에게 갖가지 혐의를 씌우고 있어. 팔메 수상을 암살하고, 스웨덴 국민을 염소로 전부 독살하려고 했다는 식으로, 이 편지들을 살펴보면 정신질환자의 작품이라는 걸 명백히 알 수있지. 제대로 읽히지도 않는 데가 한두 곳이 아니고, 툭 하면 나타나는 대문자와 밑줄과 느낌표, 그리고 이렇게 여백에다 깨알같이 적어높은 방식이 특히 마음에 들어." - P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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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펜하이머는 세 문단으로 이루어진 짧은 추도사를 준비했다. 그는 "우리는 거대한 악과 공포의 시대를 살고 있고, 이러한 시대에 프랭클린 루스벨트는 "전통적이고 진정한 의미에서 우리의 지도자였습니다."라고 말했다. 오펜하이머는 그답게 바가바드기타의 한 구절을 인용했다. "인간은 믿음으로 만들어진 존재이다. 한 인간이 믿는 바가 바로 그자신이다." 루스벨트는 전 세계 수백만의 사람들이 희생된 이 전쟁이끝나면 "인간이 살기에 보다 좋은 세상"이 올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을 심어 주었다. 오펜하이머는 다음과 같이 그의 추도사를 마무리지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그 희망을 이루기 위해 노력해야만 합니다. 그가시작한 일이 그의 죽음과 함께 끝나지 않도록."
오펜하이머는 여전히 루스벨트가 보어와의 만남을 통해 그들이 만들고 있는 신무기의 특성과 관련된 정보를 일부만 공개할 수밖에 없다는사실을 이해했기를 바랐다. 나중에 그는 호킨스에게 "글쎄, 루스벨트는위대한 건축가였고, 트루먼은 어쩌면 좋은 목수가 될 수 있겠지"라고말했다. - P445

해리 트루먼(Harry Truman, 1884~1972년)이 대통령직을 승계할 무렵, 유럽에서의 전쟁은 거의 이긴 것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태평양에서의 전쟁은 절정에 달하고 있었다. 1945년 3월 9일과 10일 저녁, 334대의 B-29기가 수톤의 젤리 가솔린(네이팜)과 고성능 폭약을 도쿄에 투하했다. 이 대공습으로 10만 여 명이 사망했고 625제곱킬로미터가 전소했다. 이를 시작으로 공습은 계속되었고 1945년 7월 무렵에는 일본의5대 도시가 공격을 받았고 민간인 사상자만 수십만 명에 달했다. 이는적국의 군사 시설만을 노리는 것이 아니라 국가 자체를 파괴하는 전면전이었다.
소이탄 폭격은 비밀이 아니었다. 미국인들은 신문에서 공습 에 대한소식을 읽을 수 있었다. 생각 있는 사람들은 대도시에 대한 전략적 폭격이 깊은 윤리 문제를 불러일으킨다는 것을 이해했다. 오펜하이머는 나중에 "나는 스팀슨(전쟁부 장관)이 대일본 공습에 항의하는 미국인들의 시위가 없었다는 사실에 놀랐다고 말했던 것을 기억합니다. 도쿄의 경•우에는 대단히 많은 수의 사상자가 있었지요. 그는 공습을 중단해야 한다고 말하지는 않았지만, 여기에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이 없는 이 나라에 뭔가 문제가 있지 않은가 생각했습니다."1945년 4월 30일 히틀러가 자살했고, 그로부터 8일 후 독일은 항복했다. 세그레가 그 소식을 들었을 때, 그의 첫마디는 "우리가 너무 늦었군"이었다. ‘로스앨러모스의 연구원들은 모두 "장치"를 완성시키는 작업의 유일한 정당성은 히틀러를 굴복시키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던것이다. 세그레는 그의 회고록에 "이제 폭탄이 나치스에 사용될 수 없게 되자 의구심이 고개를 들었다."라고 썼다. "이와 같은 의구심은 공식보고서에는 나타나지 않았지만 사적인 자리에서 많이 토론되었다" - P446

시카고 대학교 야금 연구소에서 레오 질라르드는 마음이 급해지고있었다. 이 떠돌이 물리학자는 시간이 많이 남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있었다. 원자 폭탄은 곧 완성될 것이고, 그는 그것이 일본의 도시에 사용될 것이라고 예상했다. 그는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핵무기를 만들기위한 프로그램을 시작해야 한다고 처음으로 건의한 사람이었지만, 이제는 핵무기의 사용을 막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그는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보내는 메모에서 "우리의 원자 폭탄 ‘시범‘ 발사"는 소련과의 무기 경쟁을 촉발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하지만 질라르드가 만날 기회를잡기 전에 루스벨트가 죽자, 그는 신임 대통령 해리 트루먼과 5월 25일만나기로 간신히 약속을 잡았다. 그는 트루먼을 만나기 전에 오펜하이머에게 편지를 써서 "원자 폭탄 제조 경쟁을 피할 수 없다면 이 나라의미래는 그리 밝지 못할 것입니다."라고 경고했다. 질라르드는 이와 같은 무기 경쟁을 피할 수 있는 명쾌한 방법이 없는 한 "일본에게 원자 폭탄을 사용함으로써 우리 패를 전부 보여 주는 것이 과연 현명한 일인지모르겠다."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는 폭탄 사용에 찬성하는 쪽의 의견을 들었지만, 그들의 주장은 "나의 의구심을 불식시킬 수 있을 정도로 강하지 않았다" 오펜하이머는 답장을 보내지 않았다. - P447

5월 31일 전쟁부 장관 스팀슨이 의제를 통제한 이 회의에서는 일본에 폭탄을 투하할 것인지의 여부에 대해서는 토의조차 하지 않았다. 그것은 이미 결정된 것이 나 다름없었다. 스팀슨은 그 사실을 강조라도 하듯 대통령에게 군사 관련 자문을 하는 자신의 책임에 대해 개괄적인 소개를 하는 것으로 회의를 시작했다. 폭탄의 군사적 이용에 관한 사안은 지난 2년간 폭탄을 만들어 온 과학자들의 의견과 관계없이 백악관이 단독으로 결정하게 될것임을 회의 참가자들 모두 느끼고 있었다. 하지만 스팀슨은 핵무기가가진 의미에 대한 토론에 귀를 기울여 온 현명한 사람이었다. 오펜하이머와 다른 과학자들은 스팀슨이 자신과 다른 임시 위원회 위원들이 폭탄을 "단지 새로운 무기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인간과 우주의 관계에서 혁명적인 변화"로 여긴다고 말하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원자 폭탄은 "우리를 잡아먹을 프랑켄슈타인"이 될 수도, 세계 평화를 지키는 수단이 될 수도 있었다. 어느 쪽이든 그것의 중요성은 "이번 전쟁에서의 필요성을 훨씬 뛰어넘는 것이었다." - P449

하지만 번즈는 이미 폭탄을 미국의 외교를 위해 사용할 수 있는 무기설의 주장을 무시하고 로런스 편을 들었다. 그들은 "가능한 한 핵무기 생산과 연구에서 우리가 한발 앞설 수 있도록 하고 그와 동시에 러시아화의 관계를 진전시키기 위해 모든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는 것이었다.
의사록에는 번즈의 의견에 "참석자 모두가 대체로 동의"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하지만 오펜하이머를 비롯한 여러 참석자들은 미국이 핵무기에서 "한발 앞서" 있으려면 필연적으로 소련과의 군비 경쟁이 촉발될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 중대한 모순은 콤프턴이 "자유로운 연구"를 통해 미국의 지도적 위치를 유지하는 동시에 러시아와 "협조적 이해"에 도달하는 것을 강조하면서 적당히 봉합되었다. 이와 같은 애매한 결론에 도달한 채로 회의는 오후 1시 15분에 휴회하고 말았다.
점심을 먹으면서 누군가 일본에 폭탄을 사용하는 문제를 거론했다. 이는 기록되지 않았지만, 회의가 속개되었을 때 토론의 초점은 계속해서 임박한 폭격의 효력에 맞추어져 있었다. 어떤 결정이든 정치적 함의가 있다는 것을 잘 아는 스팀슨은 의제를 바꿔 토론을 계속할 수 있게했다. 누군가 원자 폭탄 1개의 효력은 지난 봄 일본 도시에 행해진 대규모 공습 이상은 아닐 것이라고 말했다. 오펜하이머도 여기에 동의하는듯했으나 "원자 폭탄의 시각적 효과는 대단할 것입니다. 그것은 3,000에서 6,000미터 높이의 엄청난 빛의 기둥을 동반할 것입니다. 폭발로 인한 중성자 효과는 최소한 반지름 1킬로미터 안에 위치한 모든 생명체에 위협을 가할 정도일 것입니다."라고 덧붙였다.
그러고 나서 스팀슨 장관이 모두가 대체로 동의한 것으로 보이는 결론을요약했다. "우리는 일본에게 어떤 경고도 줄 수 없다. 민간인 지역에 집중할 수는 없다. 하지만 가능한 한 많은 수의 사람에게 깊은 심리적 인상을 남길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만 한다." 스팀슨은 "가장 바람직한 목표물은 많은 노동자가 일하고 있고, 노동자 거주 지역으로 둘러싸인 중요한 군수공장"이라는 제임스 코넌트의 제안에 동의한다고 말했다. 즉 하버드 대학교의 총장은 이와 같은 근사한 완곡어법으로 세계 최초의 원자폭탄의 목표물로 민간인들을 선택했던 것이다. - P453

예를 들어 5월 28일, 전쟁부 차관 존 매클로이는 스팀슨에게 "무조건항복"이라는 단어가 일본에 대한 미국의 요구 사항에서 제외되도록 건의하라고 역설했다. 20 그들이 도청한 일본 기밀 전보(코드명 ‘매직‘)를 해독한 매클로이와 다른 고위 장교들은 도쿄 정부의 핵심 관료들이 워싱턴의 요구대로 전쟁을 끝낼 수 있는 방법을 찾고 있음을 알았다. 같은날 임시 국무부 장관 조지프 그루(Joseph C. Grew)는 트루먼 대통령과의긴 면담에서 같은 이야기를 해 주었다. 목적이 무엇이건 간에 일본 정부관료들은 단 하나의 포기할 수 없는 조건을 가지고 있었다. 당시 스위스 주재 전략 정보국 요원이었던 앨런 덜러스(Allen Dulles)가 매클로이에게보고한 바에 따르면, "그들은 천황과 헌법을 지키고 싶어 했다. 군사적 항•복이 사회 질서와 규율의 몰락으로 이어질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다."216월 18일, 트루먼의 참모총장인 윌리엄 대니얼 레이히 (William DanielLeahy, 1875~1959년) 제독은 일기에 "내 의견에는 현재 일본이 받아들일수 있을 만한 조건으로 일본의 항복을 받아 낼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라고 썼다.  같은 날 매클로이는 트루먼 대통령에게 일본 군대의 상황은 "일본의 항복을 받기 위해 우리가 러시아에 도움을 요청해야 하는지" 자문해야 할 정도로 좋지 않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는 트루먼에게 일본 본토를 침공하기 위한, 또는 원자 폭탄을 사용하기 위한 최종 결정을 내리기 전에 정치적인 방법으로 일본의 완전한 항복을 받아낼 수 있는 방법을 강구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일본인들에게 "천황과 그들이 원하는 정부 형태를 그대로 두도록 할 것"이라고 말해 주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나아가 "게다가 그들이 항복하지 않으면 우리가 엄청나게 파괴적인 무기를 사용할 수밖에 없다고 말해 주어야 합니다."라고 말했다.
매클로이에 따르면 트루먼은 이런 제안을 받아들이는 듯했다. 7월17일 무렵이면 미국의 군사적 우위는 매클로이가 일기에 다음과 같이쓸 수 있을 정도로 확고했다. "지금 경고를 보낸다면 그들이 가장 취약한 순간에 그것을 받게 될 것이다. 그것은 어쩌면 우리의 목적을 이루어줄지도 모른다. 전쟁의 성공적인 종료를" - P459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장군에 따르면, 그는 7월에 열린 포츠담 회담에서 폭탄의 존재에 대해 처음 듣고서는 스팀슨에게 "일본인들은 이미 항복할 준비가 되어 있으니 그런 끔찍한 무기로 그들을 타격할 필요가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트루먼 대통령 역시 일본이 항복하기 일보직전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대통령은 1945년 7월 18일 개인 일기장에 친필로 최근 일본으로부터 도청한 "일본 천황이 평화를 요청하는 전보"에 대해 쓰고 있다. 천황은 모스크바 특사에게 보내는 이 전보에서 "무조건 항복이 평화의 유일한 걸림돌이다."라고 말했다. 트루먼은 스탈린에게서 소련이 8월 15일 일본에 선전포고를 할 것이라는 약속을 받아 둔 터였다. 트루먼은 "그는(스탈린은) 8월 15일에 일본과의 전쟁을 시작할 것이다."라고 일기에 썼다. 그렇게 되면 일본은 끝장일 것" - P460

이곳에 육군은 가로 29킬로미터, 세로 39킬로미터의 지역을 점령하고 몇 명의 목장주들을 징발권을 발동해 퇴거시킨 후 야전 실험실과 원자폭탄의 첫 폭발을 관측하기 위한 벙커를 짓기 시작했다. 40 오펜하이머는 시험 부지를 "트리니티(Trinity)"라고 이름 붙였으나, 나중에 왜 그이름을 골랐는지 기억하지 못했다. 그는 막연하게 "나의 심장을 쳐라,
삼위일체의 신이여."라고 시작하는 존 돈의 시를 떠올렸던 것을 기억했다. 하지만 이는 그가 다시 한번 바가바드기타로부터 영감을 얻었음을보여 준다. 힌두교 교리의 삼위(트리니티)는 창조자 브라마(Brahma), 보존자 비슈누 (Vishnu), 그리고 파괴자 시바(Shiva)였던 것이다. - P465

오전 2시 30분, 시험 부지에는 시간당 49킬로미터의 바람과 심한 천둥을 동반한 비가 내리쳤다. 허바드와 그의 일기 예보 팀은 여전히 폭풍이 동트기 전에 잦아 들 것이라고 예측했다. 오펜하이머와 그로브스는 벙커 밖에서 초조한 듯이 걸어 다니면서 몇 분에 한번씩 하늘을 보며 날씨의 변화가 있는지를 확인했다. 오전 3시경, 그들은 벙커로 들어가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두 사람 모두 시험이 연기되는 것을 참을수 없었다. 오펜하이머는 "계획을 연기한다면 부하들이 다시 제 속도를찾게 만들 수 없을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그로브스는 시험이 예정대로 진행되어야 한다고 더욱 완강하게 고집했다. 마침내 그들은 결정을내렸다. 오전 5시 30분으로 시간을 조정하고 행운을 바라겠다는 것이었다. 한 시간 후, 먹구름이 걷히기 시작했고 바람도 잦아들었다. 오전5시 10분, 시카고의 물리학자 샘 앨리슨(Sam Allison)의 목소리가 통제센터 바깥의 스피커를 통해 흘러나왔다. "이제 시작 20분 전입니다."

파인만이 색안경을 건네받았을 때 그는 트리니티 부지에서 32킬로미 - P469

더 떨어진 곳에서 있었다. 그는 색안경을 쓰면 아무것도 볼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해 대신 앨라보고도 쪽을 향하던 트럭 운전석에 올라탔다. 트럭의 창은 해로운 자외선을 차단해 줄 것이었고, 그는 섬광을 볼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엄청난 섬광이 지평선 위로 떠오르자 반사적으로 고개를 숙였다. 다시 고개를 들었을 때, 그는 흰색의 빛이 노란색으로 그리고 오렌지색으로 바뀌는 것을 보았다. "중심이 매우 밝은 오렌지색의 거대한 공이 떠올랐고, 약간 소용돌이치더니 가장자리가 조금 검게 변했다. 연기로 만들어진 거대한 공안쪽에서 섬광이 보였고, 불꽃과 열이 빠져나가고 있었다." 폭발 후 1분30초가 지나고 나서야 파인만은 거대한 폭발음과 인공 천둥의 떨림을느낄 수 있었다.
 코넌트는 빛이 비교적 빨리 나타나리라고 예상하고 있었다. 하지만 백색 광선이 하늘을 메웠을 때 그는 잠시 "뭔가 잘못됐다."라고, "온 세상이 불길에 휩싸였다."라고 생각했다. 서버 역시 32킬로미터 떨어진 곳에서 땅바닥에 엎드려 용접용 안경을 쓰고 있었다. 그는 나중에 "팔이 아파서 안경을 잠시 내렸을 때 폭탄이 터졌다. 나는 섬광 때문에 눈이 부셔 아무것도 볼 수 없었다."라고 썼다. 30초쯤 후 그의 시력이 돌아왔을 때, 그는 6,000~9,000미터 높이로피어오르는 밝은 자주색 기둥을 보았다. "32킬로미터 거리에서도 열기를 느낄 수 있었다. 폭발로 인한 방사능 낙진을 측정하는 임무를 맡은 화학자 허시펠더는 나중에 이 순간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갑자기 밤은 낮이 되었고, 그것은 엄청나게 밝았다. 그 열기는 추위를 몰아냈다. 불덩어리는 점점•커지면서 흰색에서 노란색으로 다시 붉은색으로 색깔을 바꿨고 하늘로서서히 떠오르기 시작했다. 약 5초 후 어둠이 다시 깔리기 시작했지만 하늘은 여전히 북극광과 같은 자주색 빛으로 가득 차 있었다....... 폭풍에 날린 흙덩이가 우리를 지나쳐 날아다녔지만, 우리는 경외감에 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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