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을 시작하며

나의 삶, 나의 기도

참으로 먼 길을 걸어왔다.
나는 일본 제국주의가 우리 강산을 침탈하던 때에 태어나 해방과 분단, 전쟁의 소용돌이에서 젊은 날을 보냈다. 상처받고 신음하는 가난한 조국의 딸로 생명을 받았지만, 그래도 꿈을 보듬으면서 학창과 유학 시절을 싱그럽게 보낼 수 있었다. 유복한 가정과 배움의 기회를 부여받은 건 참으로 행운이었다.
1962년 남편 김대중과 결혼하면서 내 삶은 길고 험난한 여정을 시작했다. 남편은 수차례 죽음의 문턱을 넘나들었다. 어둡고 쓸쓸한 감옥과 연금의 긴 나날들, 이국에서의 망명 생활 등은 신산하고 고통스러운 세월이었다. 남편이 차디찬 감방에 있는 기간에 홀로 기도하고 눈물로 지새운 밤도많았다. 독재는 잔혹했고, 정치의 뒤안길은 참으로 무상했다.
하지만 유신 통치와 제5공화국이 지속되는 고통의 심연 속에서 지순한 아름다움을 목격하기도 했다. 민주주의라는 우리의 ‘공동선‘을 실현하기위해 숱한 젊음이 스스로 고난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수없이 많은 이의 거룩한 죽음과 투옥이 연이었다. 어떠한 억압과 시련 속에서도 의義를 추구하는 인간의 본성은 결코 절멸하지 않음을 똑똑히 볼 수 있었다. 그토록 수많은 국민의 소망이 헛되지 않아서 민주주의는 점차로 결실을 맺었다. - P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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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2시 55분. 강아지 세 마리와 그동안 인듀어런스 호의 마스코트였던 고양이 ‘치피 여사‘ 를 크린이 총으로 쐈다. 한 번도 썰매를 끌어본 적이 없는 강아지 시리우스의 처리는 맥클린에게 맡겨졌다. 시리우스는 총구를 빤히 쳐다보며 맥클린의 손을 핥았고, 맥클린은 손을 너무 떠는 바람에 총알을 두 방이나 쏘아야 했다. 총소리가 얼음 위로 울려퍼지며 모두의 마음을 우울하게 만들었다. - P81

"배가 가라앉는다!"
황급히 밖으로 뛰어나온 대원들은 높은 망루 위에 서서 인듀어런스 호의 최후를 말없이 지켜보았다. 뱃고물이 하늘 높이 치솟더니 곧 이어 뱃머리부터 서서히 물 속으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대원들을 태우고 처녀 항해에 나섰던, 헐리에 의하면  ‘바다의 신부‘였던 인듀어런스 호가 마침내 눈앞에서 영원히 사라지는 순간이었다.
"모두들 아무 말도 못하고 묵묵히 지켜보기만 했다." 베이크웰은 그날의 상황을 이렇게 적었다. "나는 목구멍에 무엇인가 걸린 것 같았는데 삼길 수가 없었다 •••••• 이제 우리는 완벽하게 외로운 처지가 되고 말았다."
섀클턴은 일기에 이렇게 적었다. "오후 5시에 인듀어런스 호는 머리부터 천천히 가라앉기 시작했다. 가장 상처를 많이 받은 뱃고물이 맨 마지막으로 물 속에 들어갔다 •••••• 도저히 더 이상 쓸 수가 없다." - P94

가장 심각한 것은 식량 문제였다. 주변에는 사냥할 만한 물개가 흔치 않았으며, 오션 캠프에서 가져 온 고기와 고래기름도 점점 바닥나고 있었다.
1월 14일, 와일드, 크런, 맥클로이, 마흔이 맡고 있던 개 27마리가 모두 총을 맞았다.
더 이상 필요할 것 같지도 않았고, 개들이 먹어치우는 식량의 양도 무시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개에게 줄 먹이는 이제 히기에 지친 대원들의 식량이 되었다.
"이 임무가 나에게 떨어졌는데, 내 생애 가장 끔찍한 일이었다." 와일드는 그때의 심정을 이렇게 적었다. 이 어쩔 수없는 사태는 모두에게 큰 충격이었으며, 맥니쉬의 표현대로
"고향을 떠나 온 이래 가장 슬픈 사건" 이었다. 그날 밤, 헐리와 맥클린은 오션 캠프에 다녀오는 위험한 임무를 맡았다. 다음날 그들은 400kg이나 되는 물품들을 썰매에 싣고 돌아왔는데, 헐리의 개가 썰매를 끈 것도 이번이 마지막이었다.
오후에 와일드가 내 개들을 총으로 쏘아 죽였다." 헐리는 자기가 좋아했던 개들의 명복을 오랫동안 빌었다. "개들의 우두머리였던 늙은 셰익스피어에게 작별 인사를 했다. 두려움을 모르고 충직하며 부지런했던 나의 사랑스런 개들을 항상 기억할 것이다."
••••••
3월30일, 마지막 개를 죽이고 어린 강아지를 먹었다. 이제 대원들 사이에는 딱히 슬퍼하는 기색도 없었다. 그저 어쩔 수 없는 현실을 묵묵히 인정하며 ‘예상치 못한 고기 맛을즐길 뿐이었다. 대원들은 2주 만에 처음으로 배불리 먹었다.  - P96

4월 20일. 섀클턴이 대원들을 모아 놓고 중대 발표를 했다. 그의 지휘 아래 몇몇 대원들이 제임스 커드 호를 타고 사우스 조지아 섬에 있는 포경기지로 간다는 것이었다. 이제 막 엘리펀트 섬에 도착한 처지에서 그건 실로 엄청난 계획이었다.
여기에서 사우스조지아 섬까지는 무려 1,000km. 지금까지 온 거리의 10배가 넘는다. 그토록 멀고 까마득한 곳을, 겨우 6m 길이의 갑판도 없는 배를 타고, 지구에서 가장 험난한 바다 위로, 그것도 겨울에 지나가야 하는 것이다.
그 바다에는 시속 100km의 바람이 불고 20m 높이의 거대한 파도가 기다리고 있다. 운이 따르지 않으면 훨씬 심한 상황을 만나게 될지도 모른다. 육분의와 크로노미터만을갖고 중간에 육지가 전혀 없는 바다를 지나 그 작은 섬을 향해 가야 한다. 게다가 날씨 또한 항해에 적당하지 않다. 이 계획은 만만찮은 것이었을 뿐만 아니라, 대원들 중 선원이라면 누구나 그렇게 생각했듯이 "도저히 불가능했다." - P112

하지만 정부 역시 구조작업을 지원할 여력이 없었다. 영국은 여전히 전쟁중이었고, 남는 배는 단 한 척도 없는 상황이었다. 더욱이 남극 바다의 얼음을 헤쳐나갈 크고 튼튼한 배를 구한다는 건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 스콧이 탔던 디스커버리 호가 유일한 대안이었지만, 그 배 역시 10월이나 되어야 항해에 나설 수 있었다.
섀클턴이 배를 찾아 여기저기 헤매는 동안 영국 외무성은 우루과이, 아르헨티나, 칠레 정부에 긴급한 도움을 요청했다. 다행히 6월 10일에 우루과이 정부가 작은 탐사선인
‘인스티투토 드 페스카 1호‘ 와 선원들을 무료로 보내왔다. 하지만 이 배 역시 엘리펀트섬 부근에서 얼음에 의해 심한 손상을 입은 채 뱃머리를 돌려야 했다.
세 번째 시도는 푼타아레나스(칠레 남단의 항구도시-역주)에서 영국협회가 지원해 준 ‘엠마‘ 호에 의해 이루어졌다. 그러나 이 배마저 기상악화로 인해 엘리펀트 섬을 150km앞둔 지점에서 되돌아오고 말았다. 몇 주면 된다고 생각했던 일이 몇 달째 실패를 거듭하자섀클턴은 필사적으로 다른 배를 찾아 헤매기 시작했다.
"이때의 심정은 이루 말로 표현할 수 없다." 워슬리는 이렇게 적었다. "섀클턴은 거의 미친 사람처럼 보였다. 얼굴엔 날마다 주름이 새로 늘어났고, 검고 두껍던 머리카락은 차츰 흰색이 되어갔다. 맨 처음 구조작업을 시작했을 때 그에게는 회색 머리카락이 하나도 없었다. 하지만 세 번째 구조작업을 나서는 그의 머리는 완전한 회색이었다."
섀클턴이 느꼈던 초조함은 사진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오션 캠프에서 헐리가 찍은 사진을 보면 섀클턴은 무표정하게 얼음 위에 앉아 있지만 어딘지 모르게 명랑한 느낌을준다. 그러나 이 시기의 사진에서는 과거의 얼굴을 거의 알아볼 수 없을 지경이다. 긴장의 나날을 보내는 동안 그의 얼굴은 몰라볼 정도로 늙어버렸다. 때는 8월 중순, 제임스커드호가 출발한 지 벌써 4개월이 지난 뒤였다. - P144

"습지에 불이 난 것 같은 강한 향기가 퍼졌다." 헐리는 이렇게 적었다. "만일 먹을 것과 담배가 풍족했다면, 우리의 정신상태는 아주 위태로워졌을 것이다. 이런저런 궁리와 실험이 없었다면 우리의 사기는 심각하게 떨어졌을지도 모른다." 이 실험은 실패로 끝났지만 어쨌든 베이크웰의 생각은 훌륭한 것이었다.
사라진 즐거움은 담배만이 아니었다. 대원들이 별 생각 없이 자기 몫의 설탕을 오늘리의 다른 물건들과 교환하고 오들리가 그 설탕을 모아 두는 사태가 벌어지자, 와일드는음식물 교환 자체를 아예 금지시켜 버렸다. 설탕은 생존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탄수화물공급원이라는 경고와 함께.
7월에는 술을 만들어 마시는 일이 늘어났다. 그러나 술을 만들 재료 역시 떨어져 갔고, 더 중요한 비스킷과 귀중한 닛푸드도 바닥이 났다. 분말 우유도 모두 바닥났다. 이제먹을 것이라고는 오직 펭귄이나 물개밖에 없었다. 살아남기 위해 그들은 끊임없이 모진 ‘학살자‘ 가 되어야 했다. - P156

8월 30일 새벽은 맑고 추웠다. 눈 치우는 작업을 마친 대원들은 조개를 잡기 위해 설물 시간인 오전 11시쯤 바다로 나갔다. 12시 45분. 대부분의 대원들이 돌아와 점심 식사를 했고, 마층과 헐리는 밖에서 조개를 다듬고 있었다.
와일드는 밖에서 마츤이 허겁지겁 달려오는 소리를 들었다. 하지만 관심을 기울이는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는 단지 식사시간에 늦어서 뛰어오고 있을 뿐이니까. 잠시 후,
마츤이 벽을 뚫어버릴 듯한 기세로 오두막에 머리를 들이밀며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배가 왔어요!"
그리고 이어지는 얘기.
"연기로 신호를 올려야 하지 않을까요?"
오두막 안에 짧은 침묵이 흘렀다. 그리고 ••••••.
"미처 대답할 겨를도 없이 대원들은 엎치락뒤치락 서로 엎어지고 국그릇을 뒤엎으며 출입구로 한꺼번에 달려갔다. 출입구를 가린 천이 찢어졌고, 그리로 나가지 못한 대원들을 부수고 밖으로 몰려나갔다."
오들리는 이렇게 적었다.
밖에 있던 헐리가 파라핀, 고래 기름, 말린 풀을 섞어서 황급히 불을 붙였다. 연기가끝나지 않았지만 상관없는 일이었다. 배는 불과 1.5km 떨어진 곳에 있었으니까. 그리고정확히 해변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으니까.
맥클린이 깃대에 바바리 재킷을 달아 높이 흔들었다. 오두막 안에 혼자 누워 있던 블레보로를 허드슨과 오들리가 밖으로 데리고 나왔다. 대원들은 그 신비의 배에서 칠레 해군의 깃발을 보고 다들 놀란 표정을 지었다.
배가 점점 가까이 다가왔다. 흥분을 이기지 못한 대원들이 일제히 발을 구르며 괴성을 질러대기 시작했다. 해안으로부터 150m 떨어진 곳에 배가 멎었고, 작은 보트가 내려졌다. 섀클턴이 거기에 타고 있었다. 크린의 모습도 보였다.
"너무 기뻐서 눈물이 났다. 몇 분 동안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와일드는 당시의 심정을 이렇게 표현했다. 베이크웰은 "모두들 환호성을 질렀다"라고 적었다.
대원들은 숨을 멈추고 섀클턴이 다가오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이윽고 서로의 소리를 알아들을 수 있는 거리가 되자 그들은 일제히 한 목소리로 외쳤다.
"모두 무사합니다!" - P158

모험이 끝나자 지나간 일들이 그리 나쁘지는 않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엘리펀트섬에서의 일상은 절망적이기보다 그저 조금 불편한 정도에 불과한 것인지도 몰랐다.
"나는 절대 감정적이지 않다 ••••••." 헐리는 이렇게 적었다. "그러나 안개 속으로 섬의 봉우리가 사라져 가는 순간, 우리에게 많은 것을 베풀어주었던 저 땅을 영원히 떠난다는 슬픔이 밀려왔다. 우리가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유일한 흔적인 오두막을 이제는 펭귄들이 드나들며 둘러볼 것이다. 이제는 저 멀리 사라진 엘리펀트 섬."
당시 섀클턴의 심정은 푼타아레나스에 도착하여 아내에게 보낸 편지에 잘 나타나있다.
"드디어 해냈소•••••• 한 사람도 잃지 않고, 우리는 지옥을 헤쳐나왔소" - P1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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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마다 그랬다. 그 점만은 분명하다. 격렬해지는 때도 있었을 것이다. 날마다 거의 일정한 시각에 절망이 모습을 드러내곤 했다. 그러면 더 이상 아무 일도 할 수가 없었다. 잠도 잘 수 없었고, 때로는 그 어떤 일도 불가능했다. 아니면 때로는 정반대로 집을 사거나, 이사를 하거나, 전혀 예기치 않게 기분이 들뜨다가도 좌절하거나, 그도 아니면 때로는 여왕이라도 된 듯 우리가 어머니에게 요구하는것, 그녀에게 제안하는 것을 모두 들어주었다. 아버지가 죽어 가는데도 아무 이유 없이 사들인 ‘작은 호수‘ 위의 그 집, 딸이 원하니까 사준 남성용 중절모, 금박으로 장식된 하이힐 등. 아니면 아무것도 안 하거나, 자거나, 죽은 듯 있기도 했다. - P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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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이런 황당한 논쟁이 벌어졌을까요? 다시 ‘현생 인류의 정의 문제로 돌아와보겠습니다. 앞서 이야기했듯, 오스트레일리아 원주민은 다른 사람들과 생김새가 꽤 다릅니다. 6만 년이나 고립돼 있었으니 고유한 특성이 많이 생겼겠죠. 그래서 만약 오스트레일리아의 원주민을 같은 종(인류)으로 포함시킨다면, 생김새가 몹시 다양한 다른 사람들고인류 포함)도 같은 종으로 인정할 수 있지 않느냐는 질문이 가능해집니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게 바로 네안데르탈인입니다. 생김새는 비로 많이 다르지만, 그렇다고 오스트레일리아 원주민과 유럽인 사이에서 볼 수 있는 생김새의 차이보다 월등히 그 차이가 큰 것도 아니거든요. 네안데르탈인의 생김새는 현생 인류가 지닌 생김새의 다양성 범위안에 충분히 포함됩니다. 네안데르탈인 역시 현생 인류의 일부가 될가능성이 있는 것입니다. 더구나, 최근에는 네안데르탈인과 현생 인류사이에 자손이 나왔고, 그 결과 우리를 비롯해 지구 곳곳의 현생 인류의 몸 안에 네안데르탈인의 유전자가 있다는 사실이 밝혀졌습니다. 그렇다면 둘을 다른 종으로 구분하는게 과연 옳을까요? ‘호모 네안데르탈렌시스‘인지 ‘호모 사피엔스 네안데르탈렌시스(현생 인류의 아종)‘인지 논쟁이 그치지 않는 이유입니다. - P261

1960년대의 저명한 인류학자 레슬리 화이트(Leslie White)는 "인간이라는 유기체에게 문화란 체외 적응 기재다(Culture is the extra-somaticmeans of adaptation for the human organism)."라는 말을 남겼습니다. 인간은 문화를 통해 환경에 적응한다는 뜻입니다. 이 말에 따른다면, 이런가정을 해 볼 수 있습니다. 문화와 문명이 발전할수록 인간은 몸을 통해 환경에 적응하기보다는 도구를 통해 환경에 적응하게 될 거라고요. 예를 들면 춥다고 두꺼운 지방층을 발달시킬 필요 없이, 따뜻한 난방을 해서 견디면 되거든요. 문화는 계속해서 엄청나게 발전하고 있으니, 굳이 몸으로 적용할 필요는 줄어들 것입니다. 논리적으로는 틀린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정말 그런가요? 우리는 진정 진화의 법칙마저 초월하고 있을까요? - P267

하지만 21세기에 유전학 분야에서 새로운 연구 결과가 발표되며 사정이 바뀌었습니다. 인간의 대표 게놈이 판독되고, 판독된 개인 게놈의 수도 나날이 늘고 있습니다. 이제는 여러 사람의 유전자를 서로 비교해 볼 수 있을 만큼 많은 유전 정보가 쌓였습니다. 이를 통해 어떤유전자가 얼마나 다양하게 변화했는지 추적해 보니, 기존의 주장과는달리 변화한 유전자가 하나둘씩 나타났습니다. 인간의 유전자는 계속 진화를 해 왔을 뿐 아니라, 놀랍게도, 문명이 발달하면서 더욱 그 진화속도가 빨라졌습니다. 그리고 그 변화를 ‘일으킨‘ 주체는 다름 아닌 문화였습니다. - P269

피부색을 결정하는 유전자는 1999년에야 처음 발견돼 현재까지 10개 이상이 밝혀졌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대륙마다 분포가 다릅니다. 피부색이 대략 비슷한 정도로 검거나 희다고 해도 그 유전적인 조합은 다른 것이죠. 유럽인의 흰 피부는 아시아인의 흰 피부와 다른 색깔을 띱니다. 그런데 유럽인의 흰 피부는 인류가 아프리카를 떠나 북쪽으로 퍼지고 나서 한참 뒤인 지금으로부터 5000년 전 비로소 처음 나타났다는 사실이 드러났습니다. 인류가 북쪽으로 진출한 직후는 지금으로부터 200만년전인데, 그보다 훨씬 뒤에 일어난 일입니다. 비타민D가설이 간단하게 들어맞지 않는 것입니다.
이에 학자들은 새로운 가설을 제시했습니다. 중위도 지방에 산 이후에도 인류는 사냥 등으로 고기와 생선을 풍부하게 먹었습니다. 이런음식에는 비타민 D가 풍부했고, 따라서 굳이 피부로 합성할 필요가없었습니다. 이미 피부에 있던 멜라닌 색소를 없앨 필요도 없었기 때문에, 흰 피부도 한동안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농경이 시작된 1만년 전부터 이런 생활에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고기와 생선 대신 곡물을 주로 섭취하게 되면서 비타민 D를 충분히 섭취하지 못하는 상황이 됐습니다. 그 결과, 결국 부족한 비타민을 합성하기 위해 피부로 햇빛을 받아들이는 방법을 택하게 됐습니다. 이제 자외선을 통과시켜 비타민 D를 만들 수 있는 흰 피부가 검은 피부보다 유리해졌고, 이 사람들의 피부는 하얘졌다는 것입니다. 농경이라는 문화적 요인이 흰 피부의 선택을 초래한 셈입니다. 문화가 진화를 대체한 게 아니라, 반대로진화를 촉진했습니다. - P270

플라이스토세와 비교할 때, 최근 5000년 동안 인류는 그 이전 인류에 비해 100배나 빨리 진화했습니다. 여기에 영향을 미친 요인은 다양합니다. 먼저 아주 신선한 가설로 ‘인구 증가‘를 내세우는 사람이 있습니다. 1만 년 전 농경이 발달하며 인구가 늘어나자 유전자의 돌연변이수도 함께 늘었습니다. 돌연변이 발생률이 똑같더라도, 인구가 더 많으면 실제로 일어나는 돌연변이 수는 늘어나게 마련입니다. 돌연변이 수는 다양성과 연결됩니다. 그래서 인류의 다양성도 늘어났습니다. 다양성은 진화의 전제 조건이기 때문에, 다양성이 높은 집단에서 진화는 활발해졌습니다. 이렇게 인류의 진화는 점점 빨라졌습니다.
인류 집단 사이의 교류도 진화를 촉진했습니다. 원래 인류는 초기부터 끊임없이 여러 지역과 유전자를 교환했습니다. 그러다 1만 년 전에 농경이 발달하고 그 후 국가가 세워지고 대규모 전쟁과 이주가 이루어지기 시작했습니다. 인류는 유라시아와 아프리카의 대륙을 넘나들게 됐고, 교류가 폭발적으로 늘며 유전자의 다양성을 무서운 속도로 퍼뜨렸습니다.
의학의 발달도 다양성을 빚어내는 새로운 요인이 됐습니다. 예전에는 살아남지 못했을 사람의 유전자도 후대로 전수할 수 있게 되었기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농경 사회나 네안데르탈인 시대에 태어났더라면 단명했을지도 모를 만큼 심한 근시인 저도 이렇게 살아남아서 사회에 생산적인 일을 하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인류 다양성의 숨 막히는 증가는 다시 전에 없던 또 다른 형태의 다양성을 낳았습니다. 바로 지역성입니다. 최근 티베트 지역에 사는 사람에게서 고산 지역에 적응할 수 있는 유전자(EPAS1) 돌연변이를 발견한 것이 그 예입니다. 이 돌연변이는 불과 1000년 전에 생긴뒤 퍼져서 ‘세계에서 가장 빠르게 진화한 유전자‘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였습니다. 이전에는 선택에 유리한 돌연변이가 나타나면 금세 인류 전체에 퍼졌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이런 새로운 다양성과 지역적 환경이 어우러져 지역적인 특징으로 남게 됐습니다. 새로운 환경에 대한적응으로 문화와 문명이 생기면, 다시 그 대응으로 각기 크고 작은 다양한 환경이 생겨났습니다. 이런 다양한 환경에 각각 인구 증가로 생겨난 다양한 특징의 인류가 적응하고 진화하면서, 인류의 형질은 한층더 복잡하고 다채로워졌습니다. - P272

첫째로, 진화의 기본 재료는 형질의 다양성입니다. 기존의 유전자와는 색다른 새로운 것이 출현하여 다양성이 생깁니다. 간단한 예를들면, 둥근 귀를 가진 집단에 돌연변이가 생겨서 뾰족한 귀가 생기게됩니다. 이전에는 둥근 귀, 한가지 유형밖에 없었는데, 이제는 둥근 귀와 뾰족한 거의 두 가지 귀가 있게 되었습니다.
둘째로, 형질의 다양성과 연결된 재생산의 다양성입니다. 위의 예를계속 들어 보겠습니다. 만약 둥근 귀를 가졌던지, 뾰족한 귀를 가졌던지, 후손을 남길 확률이 똑같다면 진화는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만약 둥근 귀를 가진 개체들보다 뾰족한 귀를 가진 개체들이 후손을 남기는 확률이 높다면, 시간이 흐르면서 뾰족한 귀를 가진 개체들의 비율이 늘어나고, 따라서 뾰족한 귀를 일으키는 유전자의 비율이늘어나게 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절대적인 숫자가 아닙니다. 그보다는 상대적인 차이, 그러니까 비율, 시장 점유율입니다. 진화는 본질적으로 집단적이고 상대적인 개념입니다. - P294

이렇듯 진화나 선택에 의미 있는 다양성돌연변이)은 우리에게 관찰되지 않으며 관찰되는 다양성은 선택에 중립적인 것뿐입니다. 이런 생각을 체계화한 중립 이론은 선택이 아닌 시간, 집단 크기 등에 의한 무작위적인 변화가 진화의 원동력(메커니즘)이라고 주장하였습니다(18장 ‘미토콘드리아 시계가 흔들리다). 여기서 집단유전학이 크게 발달하게 되었지만, 한편으로는 선택에 대한 학문적인 관심이 멀어지는 계기가 되기도 했습니다. 21세기에 들어서서 선택은 또다시 화두로 등장하고 있습니다. 한바퀴 돌아온 느낌입니다.
최근에 부상하고 있는 후생유전학(epigenetics)의 발전은 진화론의 또 다른 장이 열릴 것을 예고합니다. 장 바티스트 라마르크(Jean-Baptiste Lamarck)가 행복하게 웃을 일입니다. 라마르크는 획득 형질이 유전된다는 이론을 주장했습니다. 기린의 긴 목은 윗가지에 난 잎을뜯어 먹기 위해 목을 점점 늘리다 보니 목이 길어졌다는 설명입니다.
어쩌다 생긴 돌연변이 중에 긴 목이 있었는데 마침 환경에 들어맞아서긴 목이라는 돌연변이 형질을 가진 기린이 더 많은 후손을 남기게되었다는 다윈의 자연 선택과는 다른 설명이죠. 살아가면서 우리의 몸은 변합니다. 운동을 열심히 하여 근육을 키우거나, 성형 수술을 받아서 턱이 작고 뾰족해진다 해도 낳은 아이에게 커진 근육이나 작은턱을 기대할 수 없다는 것은 이미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 라마르크의 획득 형질 유전설은 틀린 이론으로 그동안 낙인찍혀 왔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속도로 발전하고 있는 후생유전학에 따르면, 획득형질이 그대로 유전될 수도 있습니다. - P296

아프리카에서 유라시아로의 확산은 어떻게 이뤄졌을까요? 세계로의 확산은 민족의 대이동과 같은 의도적인 이동이 아닙니다. 오히려 인구 증가와 인구압에 의해 자연스럽게 이뤄졌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확산의 배경에는 출산율의 증가 혹은 사망률의 감소가 있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근대화 과정에서 인구 폭발을 걱정하는 경우도 많지만, 정착 생활을 하지 않을 경우엔 출산율의 증가는 쉽지 않습니다.
이동 생활을 할 때 아이가 하나 이상이면 이동을 하기가 어렵기 때문입니다. 아이 하나를 낳아서 그 아이가 어느 정도 집단을 따라 혼자 힘으로 이동할 수 있게 돼야 그 다음 아이를 낳을 수 있습니다. 현대인의 경우, 아이가 독립적으로 움직일 수 있는 나이를 6~7세로 봅니다. 이동 생활을 하는 아프리카의 !쿵족부시먼)의 경우, 두 아이 사이의 터울은 5년 정도입니다. 터울이 그보다 짧다면 엄마는 제대로 걷지 못하는 아이들 둘을 안고 메고 짐까지 든 채 이동해야 하므로 생활하기가 어렵습니다. 만약 인구 증가에 의한 확산이 출산율의 증가 때문이라면, 이 말은 아이를 낳고 기르는 터울이 짧아졌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는 둘 이상의 아이를 키울 수 있는 사회적인 기재가 마련됐다는 뜻입니다. 이 사회적인 기재는 ‘아버지‘였다는 가설(남자의 가족 부양설)과, ‘할머니‘였다는 가설(할머니 가설)이 제기돼 있으며 지금도 팽팽한 논쟁을 벌이고 있습니다. - P305

이 모든 호모속 종 혹은 집단이 현대 인류(호모 사피엔스)와 어떤 관계가 있을까요? 이 질문은 호모 사피엔스의 기원을 어떻게 보느냐에따라 두 가지 대답을 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아프리카 기원론(Recent African origin of modern humans, 완전 대체론)입니다. 호모 사피엔스는 인류의 진화 역사에서 보면 최근이라고 할 수 있는 10만 년에서 6만 년 전정도에 아프리카에서 발생한 새로운 종이라는 관점입니다. 이에 따르면 새로운 종인 호모 사피엔스가 아프리카에서 유라시아로 확산하면서 이미 각 지역에서 살고 있던 원주 집단과 하나도 섞이지 않았으며(서로 다른 종에 속하므로), 우월한 문화와 언어에 힘입어 원주 집단과의 경쟁에서 이겼고, 원주 집단은 전멸했습니다. 최근 발견된 에티오피아의 허토(Herto)에서 나온 화석이 주축으로, 이들은 호모 사피엔스의 아종인 호모사피엔스 이달투(Homo sapiens idaltu)로 불립니다. 이 집단이 아프리카에서 확산하여 전 세계로 퍼졌으며, 원주 집단과 연계가되지 않는다는 내용입니다.
또 하나는 ‘다지역 연계론(Multiregional origin of modern humans, 혹은다지역 기원론)‘입니다. 다지역 연계론은 현생 인류가 한 곳에서 기원한새로운 종이라고 보지 않습니다. 현생 인류의 조상이 하나가 아니라는 입장입니다. 각 지역의 집단끼리, 그리고 다양한 시점의 집단끼리 계속 문화와 유전자를 교환하면서 200만 년 동안 계속돼 왔다는 관점입니다. 그동안 멸종하거나 새로 발생한 집단들은 종 아래의 분류 단위인 집단일 뿐이지, 새로운 종이 발생한 것은 아니라는 입장입니다. - P307

다지역 연계론의 문제는 호모 사피엔스가 궁극적으로 200만 년의 역사를 가진, 아주 오래된 종이라는 결론에 도달할 수밖에 없다는 점입니다. 모든 집단이 시공간을 아우르면서 지속적으로 유전자를 교환했다면, 생물학적인 종의 정의에 따라 유전자를 교환할 수 있는 모든집단은 하나의 종에 속하게 됩니다. 호모 에렉투스가 아프리카에서 발생한 이후 모든 집단들이 하나의 종에 속하게 된다면 호모 에렉투스와 호모 사피엔스는 결국 같은 종이 되며, 종명 부여 원칙에 따라 호모 에렉투스도 호모 사피엔스로 통합돼야 합니다. 이에 따르면 100년을 넘게 사용해 온 호모 에렉투스 명칭을 종이 아닌 집단명으로 바꿔야 하고, 호모 사피엔스를 200만 년 이상 지속돼 온 종으로 봐야 하며, 호모 하빌리스를 제외한 다른 모든 호모속 종은 호모 사피엔스가 돼야 합니다. 이는 논리적으로는 당연하지만, 관습의 힘을 무시할 수 없으므로 벽에 부딪힙니다. - P309

21세기에 들어서서 고인류학 연구는 새로운 장을 열었습니다. 데니소바인처럼 뚜렷한 화석 없이 DNA로만 존재하는 인류 조상도 발견되었습니다. 고DNA 추출 기법이 계속 발달하고 비용이 절감되면서 유전학은 고인류학에서 화석과 동등한, 어쩌면 더 중요한 자료가 될 전망입니다. 그에 못지않게 새로운 고인류 화석 역시 계속 발견되고 있습니다. 새로운 자료를 수집하고 분석하는 기술이 고도로 발달하고연구가 쌓여 가면서 우리는 근원적인 질문을 새롭게 묻고 대답을 찾습니다. 인간은 어디에서 왔으며 어떻게 지금의 모습으로 있게 되었는가? - P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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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초의 남극 탐험은 지구상의 다른 곳을 탐험하는 것과는 달랐다. 탐험대의 앞길을 가로막는 위험한 맹수나 야만인은 없다. 시속 300km의 바람과 영하 70도의 추위에 맞서야 하는 남극 탐험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자연의 위대한 힘을 받아들이는 순수한 마음과 한없는 인내력이었다.
1914년에 시작하여 1917년에 끝난 ‘인듀어런스 탐험‘ 은 극지 탐험 영웅시대의 마지막 모험으로 불린다. 1901년 8월, 로버트 스콧이 이끄는 ‘디스커버리‘ 호가 남극의 맥머도 협만을 향해 출발하면서 영웅시대의 서막이 열렸다. ‘과학 발전‘ 이라는 명분으로 진행된 이 탐험의 실제 목적은 남극점에 영국 국기를 꽂는 것이었다.
스콧은 이 첫 번째 남극 탐험의 동반자로 의사이자 동물학자인 윌슨 박사와 28살의 젊은 선원 섀클턴을 선택했다. 11월 2일, 세 사람은 썰매를 끌 개 19마리와 짐을 가득 실은 썰매 5대로 탐험을 시작했다. 지도에도 없는 완벽한 미지의 땅에서 왕복 2,500km가 넘는 엄청난 도전을 감행한 것이다.
그들은 아주 조금씩 힘겹게 전진했다. 그러다가 밤이 되면 모자라는 식량을 나누어먹은 다음 얼어붙은 슬리핑백 속으로 들어갔다. 굶주림과 괴혈병으로 인해 세 사람은 차츰 지쳐가기 시작했다. 병든 개들이 한 마리씩 쓰러졌고, 그렇게 죽은 개들은 살아남은 개들의 먹이가 되었다.
남위 82도 17분, 남극점에서 북쪽으로 1,000km 가량 떨어진 곳에서 스콧은 결국 절망적인 상황을 인정하고 후퇴 명령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괴혈병으로 신음하던 섀클턴은 피를 토하며 쓰러진 채 썰매에 실려 오는 신세가 되었다. 생존을 위한 처절한 사투 끝에 그들이 귀환한 것은 출발 3개월 만인 1903년 2월 3일이었다.
이 첫 번째 남극 탐험은 이후 남극 대륙에 상륙한 영국 탐험대들이 공통적으로 겪은영웅적인 고난의 전형이 되었다. - P17

1912년 1월 16일, 스콧과 그의 탐험대는 남위 89 도 지점에서 아문센 탐험대가 이미그곳을 지나갔음을 보여주는 흔적을 발견했다.
"최악의 상황이 벌어졌다." 스콧은 일기에 솔직하게 적었다. "모든 꿈이 사라졌다." 다음날 스콧 탐험대는 지칠 대로 지친 상태에서 남극점으로 향했다. 가까스로 도착한 남극점에서 스콧은 예감처럼 이런 일기를 남긴다. "이제 다시 돌아간다. 아마도 필사적인 투쟁이 될 것이다. 해낼 수 있을지 모르겠다."
그들은 결국 해내지 못했다. 스콧 탐험대는 한 명씩 차례로 얼음 위에서 죽었다. 천신만고 끝에 보급창고에서 18km 떨어진 곳까지 와서 텐트를 쳤을 때, 생존자는 스콧을 포함하여 겨우 세 명으로 줄어든 상태였다.
눈앞에 다가온 최후. 스콧은 조용히 펜을 들었다. 그리고는 영국에 있는 탐험대 회계책임자에게 역사에 길이 남을 비장한 편지를 썼다.

우리는 신사처럼 죽을 것이며, 불굴의 정신과 인내력이 남아 있음을 보여주겠다••••••
우리가 살아난다면 모든 영국인들의 가슴을 뒤흔들 탐험대의 용기와 인내를 말해 줄수 있을 텐데•••••• 이 짧은 글과 우리의 시체가 그 이야기를 대신 해줄 것이다.

그리고 3월 29일, 스콧은 마지막 일기를 적었다.

안타깝지만, 더 쓸 수 없을 것 같다. - P19

섀클턴은 극지 탐험용 배를 만들어온 노르웨이의 유명한 조선소에서 300톤 규모의 목조 범선 ‘북극성‘ 호를 구입했다. 80cm 두께의 참나무와 노르웨이 전나무로 만든 44m길이의 튼튼한 배였다. 남극 바다의 얼음을 헤치고 항해하기에 안성맞춤인 그 배의 이름을 섀클턴은 ‘인듀어런스(Encturance : 인내‘로 정했다.
집안의 가훈인 ‘Fortitudine Vincimus(인내로 극복한다는 뜻여주)‘ 에서 따온 것이었다.
탐험에 필요한 배는 두 척이었다. 인듀어런스 호가 웨들해로 가는 동안 또 한 척의 배가 보급 팀을 싣고 건너편의 로스해로 가야 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반대편에서 오는 섀클턴의 횡단 팀을 위해 곳곳에 물품 창고를 세워 두는 임무를 맡는다. 보급 팀을 싣고 갈 배는 1876년에 건조된 물개 사냥선 ‘오로라‘ 호였다.
영국 언론들은 섀클턴의 탐험에 커다란 관심을 보였다. 하지만 1914년 8월 1일 런던에서 인듀어런스 호가 출발할 때 다른 사건이 터지는 바람에 그의 탐험은 세상의 관심에서 지워져 버렸다. 독일이 러시아를 상대로 선전포고를 하면서 유럽 전역에 전운이 감돌기 시작했던 것이다. 영국 영해를 채 벗어나기도 전인 8월 4일에 ‘총동원령‘ 이 내려졌고, 섀클턴의 탐험은 자칫 시작도 하기 전에 중단될 위기에 처하고 말았다.
하지만 다행히도 그의 걱정을 씻어주는 짤막한 전보가 해군성에서 날아왔다. "계속 진행하시오." 당시해군성 장관으로 있던 윈스턴 처칠 역시 "당국은 탐험이 계속 추진되기를 바란다"는 내용의 전보를 섀클턴에게 별도로 보냈다.
8월 8일 인듀어런스 호는 영국을 떠나 대서양 남쪽으로 본격적인 항해를 시작했다. - P21

탐험가로서 가장 소중한 자산은 다름 아닌 그의 낙천성이었다. 만일 그가 냉정하지못했거나 욕심이 더 많았다면 지난 두 번째 탐험에서 남극점 최초 정복의 주인공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랬다면 그와 그의 대원들은 스콧 일행과 마찬가지로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을 것이다. 당시 섀클턴이 후퇴하기로 결정한 것은 실로 용기 있는 행동이었으며, 그의 특징인 낙천적 성격을 잘 보여준다. 죽지 않고 살아 있으면 언젠가는 또 다시 기회가 찾아오는 것이다.
"남극점 정복 경쟁을 아문센과 섀클턴이 했다면 섀클턴은 중간에 되돌아와 아문센 탐험대를 만나서 성대한 축하 파티를 열었을 것이다." 언젠가 유명한 극지 탐험 역사가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아문센과의 경쟁에서 패배한 스콧을 짓눌렀던 극심한 좌절을 새클턴이라면 겪지 않았을 것이라는 설명이다. - P22

얼음에 갇힌 인듀어런스 호는 웨들해의 해류에 밀려 부빙군과 함께 표류했다. 섀클턴이 그토록 우려했던 최악의 상황이 기어이 현실로 닥치고 말았던 것이다.
배는 육지에서 점점 더 멀어졌다. 그리고 겨울은 점점 더 다가왔다. 남극의 겨울이 얼마나 혹독한지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모른다. 과학자와 선원들은 남극 탐험을 함께할 준비는 되어 있었지만 남극의 겨울을 함께 보낼 준비는 전혀 되어 있지 않았다.
"여름이 지나갔다." 섀클턴은 이렇게 적었다. "여름이 너무 짧았다•••••• 물개가 사라졌고 새들도 떠났다. 날씨가 좋은 날에는 먼 수평선에 아직 육지가 보였지만, 지금 우리는 그리로 갈 수가 없다."
2월24일, 섀클턴은 항해 중단을 명령했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얼음에 붙박힌 인듀어런스 호는 더 이상 배이기를 포기한 채 대원들의 월동기지가 되었다. 이제 좋건 싫건 이곳에서 겨울을 보내야 했고, 그 사이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는 아무도 알 수 없었다.

섀클턴의 심정은 참담했다. 그는 이번 탐험에 자기의 모든 것을 걸고 있었다. 마흔이 넘은 나이, 그리고 전쟁중인 유럽, 이번에 실패하면 남극 탐험에 나설 기회는 더 이상 주어지지 않을 게 분명했다. 봄이 되어 얼음이 녹으면 탐험을 재개할 수도 있겠지만, 섀클턴은 날이 갈수록 그것도 불가능하게 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초조하고 미칠 것만 같았다" 의사로 참가한 알렉산더 맥클린은 일기에 이렇게 적었다. "그러나 섀클턴은 진정으로 위대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전혀 화를 내지 않았고 실망하는 모습을 보이지도 않았다. 그저 얼음 위에서 겨울을 보내야 한다고 짤막하게 말했을뿐이었다. 그는 절대 비관적인 모습을 보이지 않고 겨울을 준비했다. - P38

단조롭고 지루한 생활이 하루하루 이어졌다. 남극 겨울의 으스스한 고요와 기나긴 어둠이 주는 독특한 심리적 영향을 섀클턴은 경험을 통해 잘 알고 있었다. 지금 가장 시급한 것은 대원들이 겨울을 날 수 있는 쾌적한 숙소를 만드는 것이었다.
새클턴은 맥니쉬를 시켜서 갑판 사이에 있는 창고를 선실로 개조했다. 3월 11일에 새로운 숙소로 거처를 옮긴 대원들은 그곳을 ‘리츠(고급 호텔 경영자 시저 리츠의 이름을 딴 것 역주)‘ 라고 불렀다. 대략 1.8m×1.5m 크기의 작은 선실마다 두명이 들어갔으며, 각각의방에는 ‘빌라봉(물이 새지 않는 곳)‘, ‘앵커리지(은둔처)‘, ‘세일러스 레스트(선원 휴게실)‘ 와같은 다양한 이름들이 붙었다. - P47

인듀어런스 호의 이같은 평화는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섀클턴이 대원을 뽑았던 방식을 보면 그런 사실이 확연히 드러난다. 제임스가 면접 장소에 나타났을 때 이 위대한 탐험가는 탐험 경력이나 과학 지식 따위는 전혀 묻지 않고 느닷없이 노래를 부를 수 있느냐고 물어 상대를 당혹스럽게 했다.
"카루소(이탈리아의 테너 오페라 가수 역주)처럼 노래를 잘 불러야 한다는 뜻은 아니오." 섀클턴이 말했다. "다른 대원들과 함께 마구 소리를 지를 수는 있겠지요?" 이 질문은 매우 적절한 것이었음이 훗날 증명되었다. 섀클턴이 원했던 건 화려한 경력의 이력서가 아니라 ‘마음 자세‘ 였던 것이다.
섀클턴은 규율을 특별히 강조하지 않았지만 모든 일은 그의 동의를 받아 이루어졌다. 대원들은 그의 말이 ‘명령‘ 이어서라기보다는 합리적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에게 복종했다. 그는 늘 공정했으며, 의복을 비롯한 모든 물품을 선발대나 고급 대원들보다 일반대원들에게 먼저 분배했다. - P53

10월 27일 오후 5시, 섀클턴은 배를 포기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개들을 대피시키고 모든 물품들을 얼음 위로 내렸다. 갑판 위에 서 있던 섀클턴은 떨어져 나간 엔진이 바닥에 구르는 것을 기관실 위창을 통해 말없이 지켜보았다.
"도저히 글로 표현할 수가 없다." 새클턴은 비통한 마음으로 기록했다. "뱃사람에게배는 바다에 떠있는 집 이상의 의미가 있다•••••• 비명을 지르고 부서지고 온 몸에 지독한 상처를 입으면서, 인듀어런스 호는 천천히 삶을 포기하고 있었다."
헐리는 이미 물에 잠긴 리츠를 마지막으로 바라보았다. 어둠 속에서 뭔가 부서지는소리가 요란하게 들려왔고, 그는 그제서야 정신을 차린 듯 서둘러 배에서 내렸다. 온갖소리들로 뒤범벅이 된 아수라장 속에서도 휴게실에 걸린 시계는 여전히 똑딱거리고 있었다.
섀클턴은 마지막으로 배에서 내렸다. 그는 인듀어런스 호의 푸른 함기를 높이 들어올렸고, 얼음 위의 대원들은 다들 그 깃발을 향해 경의를 표했다. 인듀어런스호의 붉은 비상등이 마지막 인사처럼 조용히 깜박거렸다. - P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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