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가 검은 승용차 안으로 들어간다. 차 문이 다시 닫힌다. 희미하게 느껴지는 나른함이, 일종의 피로가 갑자기 온몸에 퍼진다. 강 위의 불빛이 흐려지면서 보일 듯 말듯하다. 가볍게 귀가 먹먹해지고, 사방에 안개가 퍼진다.
나는 더 이상 원주민용 버스로 여행하지 않게 될 것이다. 앞으로는 리무진이 나를 학교에 데려가고 기숙사에 데려다 줄 것이다. 나는 시내에서 가장 고급스러운 장소에서 저녁을 먹게 될 것이다. 그리고 항상 그곳에서 아쉬워하게 될 것이다. 내가 행한 모든 것, 내가 포기한 모든 것, 좋은것이든 나쁜 것이든 내가 쟁취한 모든 것을, 그리고 그 버스, 나와 늘상 우스갯소리를 하던 버스 운전기사, 뒷자리에 앉아 후추 담배를 씹어 대던 할머니들, 짐 선반 위의 어린애들, 사덱의 우리 식구들, 그 식구들의 혐오, 그들의 놀라운 침묵, 그 모든 것을 아쉬워하게 될 것이다. - P43
그녀가 그에게 말한다. "당신이 날 사랑하지 않는다면 더 좋겠어요.날 사랑한다 해도, 당신이 습관적으로 다른여자들에게 하는 것처럼 대해 주세요." 그는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본다. 그리고 묻는다. "그것이 당신이 원하는 거야?" 그녀는 그렇다고 말한다. 그곳, 그 방안에서, 생전 처음으로 그는 괴로워하기 시작한다. 이 점에 관해서 그는 더 이상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그가 말한다. 그는 이미 그녀가 결코 자기를 사랑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녀는 그가 말하도록 내버려 둔다. 그러기 전에, 글쎄, 잘 모르겠어요 하고 말한 뒤, 그녀는그가 말하도록 내버려 둔다. 그는 말한다. 그는 외롭다고, 그녀에 대한 사랑 때문에 처참하리만큼 외롭다고. 그녀가 그에게 말한다. 그녀 역시 외롭다고. 그러나 무엇 때문인지는 말하지 않는다. 그가 말한다. "당신은 아무나 따라갈 수 있기 때문에 여기까지 날 따라온 것이군." 그녀는 모르겠다고 대답한다. 아직까지는 아무하고도 그 사람 방에까지 가 본 적이 없노라고 말한다. 제발 나에게 아무 말도 말아 주세요. 그냥 늘 하던 것처럼, 당신이 독신자 아파트로 데려오는 다른 여자들을 다루듯이 행동해 주세요. 그녀가 그에게 애원한다. 제발 그런 식으로 대해 달라고. - P48
나는 지금 내가 줄곧 기다려 왔고 또한 오직 나 자신에게서 기인하는 그런 슬픔 속에 빠져 있다고 말한다. 나는 항상 얼마나 슬펐던가. 내가 아주 꼬마였을 때 찍은 사진에서도 나는 그런 슬픔을 알아볼 수 있다. 오늘의 이 슬픔도 내가 항상 지니고 있던 것과 같은 것임을 느꼈기 때문에, 너무나도 나와 닮아 있기 때문에 나는 슬픔이 바로 내 이름 같다는 생각이 든다. 오늘 나는 그에게 말한다. 이 슬픔이 내 연인이라고, 어머니가 사막과도 같은 그녀의 삶 속에서 울부짖을 때부터 그녀가 항상 나에게 예고해 준 그 불행속에 떨어지고 마는 내 연인이라고. - P57
우리의 관계가 계속되는 동안, 거의 1년 반 동안 우리는그런 식으로 이야기하게 될 것이고, 한 번도 우리 자신에 대해서는 얘기하지 않을 것이다. 처음부터 우리는 두 사람이 공유하는 미래는 상상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므로 미래에 대해서는 결코 얘기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신문 기사 같은 것들에 대해서만 얘기를 나눌 것이다. 늘 같은 감정으로. 나는 그가 프랑스에 체류했던 것이 숙명적이었다고 말한다. 그도 시인한다. 그는 파리에서는 모든 것을 돈으로 샀다고 한다. 여자도, 친구도, 지식도, 그가 나보다 열두 살이 더 많다는 사실이 그를 두렵게 만든다. 나는 그가 말하는 대로, 그가 잘못 생각하는 대로, 그가 나를 사랑하는대로, 그에 합당한 동시에 진지한, 일종의 연극적인 감정속에서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인다. - P62
그가 값을 치른다. 돈을 세어서 쟁반 위에 놓는다. 우리 가족 모두가 지켜본다. 첫 번째 식사 때 그는 77피아스트르를 지불했다. 지금도 기억이 생생하다. 어머니는 미친듯이 웃고 싶은 것을 참는 눈치다. 우리는 그만 자리에서 일어선다. 아무도 고맙다는 말조차 하지 않는다. 우리 가족은 아무리 식사 대접을 잘 받아도 고맙다고 말할 줄을모른다. ‘안녕‘ 이라든지 ‘잘 가‘, ‘어떻게 지내?‘ 따위의 말도 우리 가족들 사이에서는 결코 오가는 법이 없다. 큰오빠와 작은오빠는 앞으로도 결코 그에게 말을 건네지 않을 것이다. 마치 그들에게는 그가 투명인간인 것처럼, 그들의 눈에 보이고 그들의 귀에 들리기에는 그의 힘이 너무나 미약한 것처럼. 그런 일들은 바로 그가 나에게 무릎을 꿇었기 때문에, 근본적으로 내가 그를 사랑하지 않고, 단지 돈이 필요해서 그와 함께 있는 거라는 인상 때문에 생기는 것이다. 그리고 나는 그를 사랑할 수가 없을 것이고, 그건 불가능한 일이며, 그래서 그는 이 사랑을 만끽하지도 못한 채, 내 모든 행동을 다 견뎌야만 할 것이라는 선입관 때문이다. 또 그것은 그가 중국인이기 때문에, 백인이 아니기 때문이기도 하다. 계속 침묵을 지키거나 내 연인의 존재를 무시하는 큰오빠의 태도는 바로 그런 사실에 대한 확신에서 생긴 것이다. 우리 모두는 그에 대한 큰오빠의 태도를 따라 한다. - P64
돌로 된 가족이다. 어떤 접근도 불가능한 두꺼운 퇴적물속에서 화석이 되어 버린 가족이다. 날마다 우리는 자살을, 혹은 살인을 기도한다. 우리는 서로 말을 걸지도 않지만 보지도 않는다. 어쩌다 눈이 마주쳐도 시선을 돌려 버린다. 바라본다는 것은 한순간 그 대상을 향한, 그 대상에대한 호기심을 갖는다는 것이다. 그러니 그것은 불행에 빠지는 행위이다. 누군가를 바라본다고 해서 그 사람이 반드시 그 시선에 합당한 가치를 가지고 있다고 할 수는 없다. 여전히 그는 불명예스러운 사람일 수도 있다. 대화라는 단어는 허영이다. 이 집에 가장 잘 어울리는 어휘는 수치와 자만심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가족이라는 집단이건 혹은 다른 어떤 종류의 집단이건, 공동체라는 형태를 한 모든것은 우리에겐 증오의 대상이자 지저분한 그 무엇이다. 우리 가족은 삶을 살아 나가지 않으면 안 된다는 근원적인 수치심 속에 빠져 있다. 우리 형제들의 이야기 가장 깊숙한 곳에는 우리 세 사람이 사회가 목 졸라 죽인 우리 어머니, 그 선량한 여인의 아이들이라는 생각이 깔려 있다. 우리는 어머니를 절망에 빠뜨려 버린 이 사회의 한편에 비켜서 있다. 그토록 다정하고, 그토록 남을 쉽게 믿는 우리 어머니에게 사람들이 저지른 짓들 때문에, 우리는 삶을 증오하고, 우리 자신을 증오하고 있다. - P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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