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학창 시절의 행복은 짧았다. 어머니의 원인을 알 수 없는 병환이 점점 깊어가고 있었다. 아들이 많고 모두 공부를 잘해 주위에서 부러워하던 우리 집에 불행의 그림자가 서서히 드리워졌다.
"희호야, 졸업하고 1년만 내 곁에 있다가 전문학교 가거라."
어머니의 간청으로 나는 전문학교 입학 준비를 중단했다. 졸업식장에서 나는 많이 울었다. 어머니의 병환에 대한 두려움과 꿈을 접어야 하는 설움에 마음이 주체하기 어려울 만큼 답답하고 슬펐다. 나는 곧바로 서산 집으로 내려갔다. - P21

안간힘을 쓰며 발악하던 일본은 결국 원자폭탄 앞에 무너졌다. 하와이 진주만을 공습한 이후 1,348 일을 버티다 항복한 것이다. 나는 학교 사무실에서 해방 소식을 들었다. 가르치던 학생 10여 명을 일본인 교장과 선생들이있는 학교를 피해 자취방으로 소집했다. 나는 영문을 모르는 아이들에게 우리나라가 해방되었음을 설명해주고 애국가를 가르쳤다. 당시 애국가는 지금의 안익태 작곡이 아닌 스코틀랜드 민요 <올드랭사인 Auld Lang Syne>에 우리말 가사를 얹은 애절한 곡조였다. 나는 아이들과 함께 애국가를 부르며 삽교 거리를 행진했다. 확성기가 있는 소방서에 이르러서는 아직도 얼떨떨해하는 마을 주민들을 향해 일본의 항복을 알렸다. 그리고 애국가를 합창했다. 서툴고 소박했지만 무척 감동적인 해방 퍼레이드였다. 해마다 8. 15가되면 난 그날을 회상한다. 일본의 공권력이 아직 시퍼렇게 살아 있던 때로서 매우 위험한 즉흥적 행동이었던 것이다. 그때 함께했던 아이들 중 나중에 삽교에서 사진관을 하던 제자가 있다. 1972년 유신 직후 우리 가족이 거의 유폐되다시피 해서 집이 적막강산일 때, 그가 큰 셰퍼드 한 마리를 보내주었다. 우리는 이 선물을 캡틴이라고 이름 짓고 1982년 미국으로 망명을 떠날 때까지 10년 넘게 가족처럼 지냈다. - P27

사범대학에서 내 별명은 독일어 중성을 뜻하는 ‘다스das‘ 였다. 그동안 여자들만의 학교에서 비교적 민주적인 교육을 받아온 나는 갓 남녀공학이 된 국립대학에서 처음으로 우리나라 남성들에게 깊이 뿌리박힌 가부장제와 남존여비의 의식과 맞부딪쳤다. 남녀공학에서 여학생들은 기를 펴지 못했다. 무엇보다 가정학과 외에는 여학생이 서너 사람에 불과했다. 점심시간이면 여학생들은 도시락을 들고 빈 교실을 찾아다녀야 했다. 빈 교실을 찾으면 거기서 여학생끼리 모여서 조용히 먹었다. 남녀공학에서 여학생들은 신입생 환영회에서조차 수줍어 고개를 잘 들지 못했다. 그런가 하면 남학생들은 술을 마시고 마음껏 호연지기를 뽐냈다. 이 불공평을 참을 수 없었다. 그래서 우선 후배 여학생들에게 고개를 똑바로 들고 당당하게 앞을 볼것을 주문하기도 했다. 모임이 있을 때는 여학생들이 마실 수 있도록 사이다를 준비해 놓을 것을 요구했다. 그때 여자들의 자리는 당연히 안방이나부엌이었다. 그리고 학교와 사회에서는 언제나 뒷자리차지이며 이등 시민이었다. 남녀공학 체험은 여성들이 스스로 권리를 주장해야 한다는 중요한 사실을 깨우쳐주었다. 나보다 두어 살 많은 남학생들조차 덩달아 나를 ‘누님‘이라고 불렀다. 나는 여학생들을 대표해서 묵은 관습을 조금이라도 깨뜨리려고 노력했다. - P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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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가 검은 승용차 안으로 들어간다. 차 문이 다시 닫힌다. 희미하게 느껴지는 나른함이, 일종의 피로가 갑자기 온몸에 퍼진다. 강 위의 불빛이 흐려지면서 보일 듯 말듯하다. 가볍게 귀가 먹먹해지고, 사방에 안개가 퍼진다.

나는 더 이상 원주민용 버스로 여행하지 않게 될 것이다. 앞으로는 리무진이 나를 학교에 데려가고 기숙사에 데려다 줄 것이다. 나는 시내에서 가장 고급스러운 장소에서 저녁을 먹게 될 것이다. 그리고 항상 그곳에서 아쉬워하게 될 것이다. 내가 행한 모든 것, 내가 포기한 모든 것, 좋은것이든 나쁜 것이든 내가 쟁취한 모든 것을, 그리고 그 버스, 나와 늘상 우스갯소리를 하던 버스 운전기사, 뒷자리에 앉아 후추 담배를 씹어 대던 할머니들, 짐 선반 위의 어린애들, 사덱의 우리 식구들, 그 식구들의 혐오, 그들의 놀라운 침묵, 그 모든 것을 아쉬워하게 될 것이다. - P43

그녀가 그에게 말한다. "당신이 날 사랑하지 않는다면 더 좋겠어요.날 사랑한다 해도, 당신이 습관적으로 다른여자들에게 하는 것처럼 대해 주세요." 그는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본다. 그리고 묻는다. "그것이 당신이 원하는 거야?" 그녀는 그렇다고 말한다. 그곳, 그 방안에서, 생전 처음으로 그는 괴로워하기 시작한다. 이 점에 관해서 그는 더 이상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그가 말한다. 그는 이미 그녀가 결코 자기를 사랑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녀는 그가 말하도록 내버려 둔다. 그러기 전에, 글쎄, 잘 모르겠어요 하고 말한 뒤, 그녀는그가 말하도록 내버려 둔다.
그는 말한다. 그는 외롭다고, 그녀에 대한 사랑 때문에 처참하리만큼 외롭다고. 그녀가 그에게 말한다. 그녀 역시 외롭다고. 그러나 무엇 때문인지는 말하지 않는다. 그가 말한다. "당신은 아무나 따라갈 수 있기 때문에 여기까지 날 따라온 것이군." 그녀는 모르겠다고 대답한다. 아직까지는 아무하고도 그 사람 방에까지 가 본 적이 없노라고 말한다. 제발 나에게 아무 말도 말아 주세요. 그냥 늘 하던 것처럼, 당신이 독신자 아파트로 데려오는 다른 여자들을 다루듯이 행동해 주세요. 그녀가 그에게 애원한다. 제발 그런 식으로 대해 달라고. - P48

나는 지금 내가 줄곧 기다려 왔고 또한 오직 나 자신에게서 기인하는 그런 슬픔 속에 빠져 있다고 말한다. 나는 항상 얼마나 슬펐던가. 내가 아주 꼬마였을 때 찍은 사진에서도 나는 그런 슬픔을 알아볼 수 있다. 오늘의 이 슬픔도 내가 항상 지니고 있던 것과 같은 것임을 느꼈기 때문에, 너무나도 나와 닮아 있기 때문에 나는 슬픔이 바로 내 이름 같다는 생각이 든다. 오늘 나는 그에게 말한다. 이 슬픔이 내 연인이라고, 어머니가 사막과도 같은 그녀의 삶 속에서 울부짖을 때부터 그녀가 항상 나에게 예고해 준 그 불행속에 떨어지고 마는 내 연인이라고. - P57

우리의 관계가 계속되는 동안, 거의 1년 반 동안 우리는그런 식으로 이야기하게 될 것이고, 한 번도 우리 자신에 대해서는 얘기하지 않을 것이다. 처음부터 우리는 두 사람이 공유하는 미래는 상상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므로 미래에 대해서는 결코 얘기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신문 기사 같은 것들에 대해서만 얘기를 나눌 것이다. 늘 같은 감정으로.
나는 그가 프랑스에 체류했던 것이 숙명적이었다고 말한다. 그도 시인한다. 그는 파리에서는 모든 것을 돈으로 샀다고 한다. 여자도, 친구도, 지식도, 그가 나보다 열두 살이 더 많다는 사실이 그를 두렵게 만든다. 나는 그가 말하는 대로, 그가 잘못 생각하는 대로, 그가 나를 사랑하는대로, 그에 합당한 동시에 진지한, 일종의 연극적인 감정속에서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인다. - P62

그가 값을 치른다. 돈을 세어서 쟁반 위에 놓는다. 우리 가족 모두가 지켜본다. 첫 번째 식사 때 그는 77피아스트르를 지불했다. 지금도 기억이 생생하다. 어머니는 미친듯이 웃고 싶은 것을 참는 눈치다. 우리는 그만 자리에서 일어선다. 아무도 고맙다는 말조차 하지 않는다. 우리 가족은 아무리 식사 대접을 잘 받아도 고맙다고 말할 줄을모른다. ‘안녕‘ 이라든지 ‘잘 가‘, ‘어떻게 지내?‘ 따위의 말도 우리 가족들 사이에서는 결코 오가는 법이 없다.
큰오빠와 작은오빠는 앞으로도 결코 그에게 말을 건네지 않을 것이다. 마치 그들에게는 그가 투명인간인 것처럼,
그들의 눈에 보이고 그들의 귀에 들리기에는 그의 힘이 너무나 미약한 것처럼. 그런 일들은 바로 그가 나에게 무릎을 꿇었기 때문에, 근본적으로 내가 그를 사랑하지 않고, 단지 돈이 필요해서 그와 함께 있는 거라는 인상 때문에 생기는 것이다. 그리고 나는 그를 사랑할 수가 없을 것이고, 그건 불가능한 일이며, 그래서 그는 이 사랑을 만끽하지도 못한 채, 내 모든 행동을 다 견뎌야만 할 것이라는 선입관 때문이다. 또 그것은 그가 중국인이기 때문에, 백인이 아니기 때문이기도 하다. 계속 침묵을 지키거나 내 연인의 존재를 무시하는 큰오빠의 태도는 바로 그런 사실에 대한 확신에서 생긴 것이다. 우리 모두는 그에 대한 큰오빠의 태도를 따라 한다.  - P64

돌로 된 가족이다. 어떤 접근도 불가능한 두꺼운 퇴적물속에서 화석이 되어 버린 가족이다. 날마다 우리는 자살을, 혹은 살인을 기도한다. 우리는 서로 말을 걸지도 않지만 보지도 않는다. 어쩌다 눈이 마주쳐도 시선을 돌려 버린다. 바라본다는 것은 한순간 그 대상을 향한, 그 대상에대한 호기심을 갖는다는 것이다. 그러니 그것은 불행에 빠지는 행위이다. 누군가를 바라본다고 해서 그 사람이 반드시 그 시선에 합당한 가치를 가지고 있다고 할 수는 없다.
여전히 그는 불명예스러운 사람일 수도 있다. 대화라는 단어는 허영이다. 이 집에 가장 잘 어울리는 어휘는 수치와 자만심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가족이라는 집단이건 혹은 다른 어떤 종류의 집단이건, 공동체라는 형태를 한 모든것은 우리에겐 증오의 대상이자 지저분한 그 무엇이다. 우리 가족은 삶을 살아 나가지 않으면 안 된다는 근원적인 수치심 속에 빠져 있다. 우리 형제들의 이야기 가장 깊숙한 곳에는 우리 세 사람이 사회가 목 졸라 죽인 우리 어머니, 그 선량한 여인의 아이들이라는 생각이 깔려 있다. 우리는 어머니를 절망에 빠뜨려 버린 이 사회의 한편에 비켜서 있다. 그토록 다정하고, 그토록 남을 쉽게 믿는 우리 어머니에게 사람들이 저지른 짓들 때문에, 우리는 삶을 증오하고, 우리 자신을 증오하고 있다. - P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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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따뜻한 기후에 적응하기 위해 필요한 요소가 한 가지 더 있습니다. 바로 몸의 털입니다. 털이 없는 것 또한 땀을 증발시키는 데 도움이 됩니다. 200만 년 전의 호모속 고인류는 더운 지역에서도 태양이 작열하는 낮 시간대에 활동할 수 있게 되었지만 과연 털이 없었는지는 화석으로 확인할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간접적인 증거도 있습니다. 그중 하나가 바로 이 louse 입니다.
이는 짐승의 털에 빌붙어 사는 곤충입니다. 사람에게서 발견되는 이 역시 털에서 알을 낳고 살다가 죽습니다. 사람에게 빌붙어 사는 이는 세종류인데 머리털, 몸, 사타구니 털 등 사는 곳에 따라 서로 다른 종입니다. 사람의 머리에서 발견되는 이는 머리털에 살면서 두피에 쌓인 먹거리를 먹습니다. 머리털에 사는 이(머릿니)와 몸에 사는 이(몸니)는 같은 종(페디쿨러스 휴마너스Pediculus bumanus)이면서 다른 아종이지만 사타구니에 사는 이 사면발니)는 아예 다른 속(티루스푸비스Pbubirus pubis)입니다.
한 몸에 살고 있는 머릿니와 사면발니가 서로 다른 속에 속할 정도로다르다는 점에서 고인류가 털이 없는 맨몸이었다고 추정할 수 있습니다. 온몸에 털이 있었다면 머리털과 사타구니 털 사이에도 털이 있었을것입니다. 그렇다면 머리털에 있는 이와 사타구니 털에 있는 이가 다른종이 되지 않습니다. 서로 사는 생태계를 공유하기 때문입니다. 가령 온몸에 털이 있는 인류의 사촌 침팬지와 고릴라에게는 온몸에 서식하는 이가 한 종입니다. 침팬지에게서 발견되는 이(페디큘러스 스캐피Pediculusclaelfi)는 페디쿨러스속에 속하는 종이고, 고릴라에게서 발견되는 이(티루스 고릴라이Phthirus gorillae)는 티루스속에 속하는 종입니다.
머리털과 사타구니 털 사이에 털이 없다면 이의 입장에서 머리와 사타구니는 바다를 사이에 두고 떨어져 있는 대륙과도 같습니다. 서로 다른 서식지가 되어버린 머리와 사타구니에는 서로 다른 종이 살 수 있습니다. 머릿니는 500~600만 년 전부터 사람과 함께 살기 시작했습니다.
침팬지와 인류의 공통 조상으로부터 분기한 시점입니다. 그렇다면 머릿니는 인류와 가장 오랫동안 함께한 동물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머릿니와는 달리 사면발니는 330만 년 전부터 인류에게서 살기 시작했습니다. 사면발니는 고릴라에게서 보이는 이와 가까운 종입니다. 인류와 고릴라는 800만 년 이전에 갈라졌는데 고릴라의 이와 가까운 사면발니가 330만 년 전부터 인류와 살기 시작했다는 것은 다른 방식으로 인류와 고릴라가 가까웠음을 시사합니다. 아마도 고릴라를 잡아먹었거나 고릴라가 자고 난 숙소를 사용한 인류에게 옮겨 가서 사면발니라는 새로운 계통이 되었을 것입니다. - P53

사람의 몸에서 발견되는 몸니는 사실 몸에서 살지 않습니다. 사람의 몸에는 이가 잘 살 수 있을 만한 털이 없기 때문입니다. 대신 몸니는 사람이 입는 털옷의 털에서 살면서 사람의 피부에 쌓인 먹을 것을 가져가서 먹습니다. 그러니 사람의 몸니는 털옷이 생긴 다음에야 생겼을 것입니다. 머릿니와 몸니 계통이 언제 갈라졌는지 알 수 있다면 털옷은 적어도 그 전에 만들어졌음을 알 수 있습니다. 몸니와 머릿니의 유전체를 비교해 보니 10만 년 전에 분기한 것으로 추정되었습니다. 사실 이는 믿기 어려운결과입니다. 인류가 빙하기에 살기 시작한 것은 200만 년 전인데 털옷을 만들기 시작한 것이 겨우 10만 년 전일 리는 없습니다.
190만 년 동안 옷이 없이 맨몸으로 추운 빙하기를 견뎌냈을까요? 몸니와 머릿니가 10만 년 전에 분기했다는 유전학 계산이 틀렸을까요? 유전학의 분기점이 크게 틀리지 않았다고 전제한다면 지금 사람의 몸니는 그렇게 오래전에 생기지 않았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습니다. 털옷 없이 어떻게 고인류가 맨몸으로 추운 유라시아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을까요? - P56

쾨니히스발트는 기간토피테쿠스의 어금니 크기와 턱뼈 크기만으로 생전 그의 몸집이 어마어마했을 것으로 추정했습니다. 어금니의 크기로 전체 몸집을 추정하는 일은 완전히 허무맹랑한 시도는 아닙니다. 이빨과 턱뼈의 크기만 가지고 몸집 전체의 크기를 어느 정도는 알 수 있습니다. 특히 어금니의 면적은 그 종이 먹는 양과 어느 정도의 상관관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앞니는 먹거리를 한입에 넣을 정도로 알맞은 크기로 자르는 일을 맡고, 어금니는 한입 크기의 먹거리를 잘게 부수는 일을 맡습니다. 몸집이 크면 더 많이 먹어야 하고 그러려면 어금니가 더 많은 먹거리를 처리해야 합니다. 적어도 영장류만 놓고 보았을 때 어금니가 서로 맞물리는 면의 넓이와 몸집 크기는 비례합니다. 많이 먹는 종은 어금니 면적이 넓고 몸집도 큽니다. 적게 먹는 종은 어금니가 작고 몸집도작습니다. 이러한 비례 관계는 현존하는 많은 동물의 평균치를 통해서 대략적으로 확인할 수 있습니다. - P67

파란트로푸스의 큰 어금니는 큰 몸집을 보여주는 자료가 아니라 어쩌면 척박했던 환경을 보여주는 자료인 셈입니다. 고릴라 어금니의 2배 크기라고 해서 반드시 고릴라 몸집의 2배라는 관계는 성립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기간토피테쿠스와 메간트로푸스도 거인이 아닐 수 있을까요? 기간토피테쿠스의 큰 어금니 역시 고릴라보다 큰 몸집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고릴라보다 훨씬 더 척박한 먹거리를 많이 먹어야 했음을 나타내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기간토피테쿠스가 영양이 부실했다는 놀라운 내용은 진즉 발표된 바가 있습니다. 영미권에 잘 알려지지 않았을 뿐입니다. 중국의 고인류학자 장인원은 1987년에 기간토피테쿠스의 앞니를 조사한 결과 상당수가 법랑질 형성 부전 enamel hypoplasia 을 보인다고 발표했습니다. 영장류는 자랄 때 치아도 만들어집니다. 성장기에 영양이 부족하면 치아도 제대로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부족한 영양 때문에 치아의 법랑질(에나멜질)이 만들어지다 말다 하면서 법랑질에 가로로 줄이 생기게 됩니다. 이 줄은 한번 만들어진 다음에는 없어지지 않기 때문에 성장기 동안 겪었을 영양부족을 알려주는 좋은 지표입니다. 어른 인골의 앞니에 법랑질 형성 부전을 나타내는 금을 관찰할 수 있다면 그 사람은 자랄 때 극심한 영양부족을 겪었다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법랑질이 제대로 만들어지지 않은 기간토피테쿠스는 자랄 때 먹거리가 부족했을 것입니다. 고릴라만큼 많이 먹어야 하는 기간토피테쿠스는 그 먹거리를 구비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기간토피테쿠스는 고릴라만큼의 몸집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단지 영양이 부족하고 열악한 먹거리를 많이 먹어야 했던 것뿐일지도 모릅니다. - P72

물론 앞에서 이야기했듯이 두 발 걷기와 사냥은 인류의 진화사에서 한 무대에 동시에 등장하지는 않았습니다. 두 발걷기는 사람의 다른 어떤 특징보다도 훨씬 더 일찍 등장했으니까요. 330만년전 오스트랄로피테쿠스 아파렌시스를 비롯하여 초기 고인류는 두 발로 걸었지만 두발 걷기 외에는 인류의 특징을 갖추지 않았다는 가설이 주류입니다. 그렇다면 사냥과 육식은 언제 인류사에 등장했을까요? 고인류의 역사에서 동물성 먹거리가 등장한 시점을 알리는 자료는 약 260만 년 전 오스트랄로피테쿠스 가르히 화석종과 함께 발견된 동물 뼈에 남아 있는 칼날 자국입니다. 하지만 이때의 고인류는 그다지 크지 않은 머리를 가지고 있었으며, 돌을 깨서 날을 세운 찌개는 살아 있는 짐승을 잡는 사냥도구라기보다는 사체 처리에 쓰였습니다. 상위 포식자가 한 차례 먹고난 다음 하이에나와 같은 사체 처리반과 경쟁하여 두꺼운 뼈를 깨고 그안에 있는 골수 혹은 두뇌를 먹은 것입니다. 돌로 만든 최초의 도구는 살아 있는 짐승을 잡는 것이 아니라 이미 죽어 있는 짐승의 사체를 처리하기 위한 도구였습니다. - P76

전력으로 도망치는 동물을 잡는 사냥은 200만년 전 호모 에렉투스부터 시작되었다고 추정됩니다. 고인류는 약 500만 년 전에 기원하여 300여만 년 동안 줄곧 아프리카에서만 살았습니다. 그런 고인류가 약 200만 년 전에 유라시아로 퍼져나갔습니다. 어째서였을까요? 기후가 변하면서 몸집이 큰 짐승들이 아프리카를 떠나 유라시아로 옮겨 갔고, 이들을 사냥감으로 삼던 고인류 역시 유라시아로 쫓아 퍼져갔다는 것이 정설입니다. 이때 고인류 호모 에렉투스의 사냥 도구는 아슐리안 주먹도끼였습니다.
살아 있는 짐승을 잡아서 고기를 저몄는지, 죽어 있는 짐승의 사체에서 뼈를 깨고 골수를 파 먹었는지는 뼈에 남아 있는 돌날의 흔적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돌날의 흔적은 V자 모양으로 끝이 뾰족하지만 짐승의이빨 자국은 U자 모양으로 끝이 둥급니다. 그래서 뼈에 남아 있는 흔적을 자세히 보면 그것이 돌날의 흔적인지 이빨의 흔적인지 알아볼 수 있습니다. 고인류가 돌로 만든 도구로 뼈를 손질한 흔적과 짐승이 이빨로 뼈를 갉아 먹은 흔적이 함께 발견되는 경우에는 순서에 주목해야 합니다. 현미경으로 보면 뼈에 남아 있는 두 흔적 중 어떤 것이 먼저 새겨진것인지 확인할 수 있습니다. 짐승 이빨의 흔적 위에 돌날의 흔적이 남아 있는 경우는 맹수가 한번 먹고 난 사체를 고인류가 뒤늦게 접수했다는 뜻입니다. 그럴 경우 고기나 내장을 취했을 가능성보다는 뼈를 깨서1차 포식자들이 접근할 수 없었던 골수를 먹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반대로 돌날의 흔적 위에 짐승 이빨의 흔적이 남아 있는 경우는 어떨까요? 그것은 돌로 만든 도구로 직접 사냥해서 고기와 기타 내장을 먼저 처리한 다음에 하이애나같은 2차 포식자가 왔가는 뜻입니다.호모에렉투스의 아슬리안 주먹도끼는 사냥하고 고기를 저미는 데 이용되었고 호모 에렉투스는 상위 포식자로서 뛰어난 사냥 기술을 보유한 것로 알려졌습니다. - P77

호모 에렉투스가 뛰어난 사냥꾼으로서 점차 발달한 사냥 기술로 고기를 얻은 것이 아니라면, 두뇌가 커지면서 필요로 하는 고열량의 먹거리는 어디에서 왔을까요? 고인류학자 줄리 레스닉Julie Lesnik은 이에 대한 기발한 해답으로 곤충식을 제시합니다. 인류가 곤충식을 통해 고칼로리를 확보했다는 주장입니다. 충분히 일리가 있습니다. 곤충을 먹는다고 하면 역겨움과 혐오감을 느낄 수도 있습니다. 다른 ‘제대로 된‘ 먹거리가 없었기 때문에 기근에 나무껍질을 먹는 것처럼 어쩔 수 없이 곤충을 먹었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습니다. 그러나 둘 다 지극히 유럽 중심적인 생각입니다. 우리나라 문화에서도 불과 수 세대 전까지 메뚜기를 잡아먹는 것은 평범한 일이었습니다. 지금도 곤충식을 하는 문화권이적지 않습니다. 이들은 다른 먹거리가 없어서 ‘어쩔 수 없이 곤충을 먹는 것이 아니라 일상적인 먹거리의 하나로 곤충을 먹습니다.
곤충식을 일상의 식생활로 여기는 문화권은 주로 열대 지역에 분포합니다. 사실 인류 진화사에서 대부분의 기간 동안 인류는 열대 지역에서 살아왔습니다. 그렇다면 이들의 식생활에서 곤충식이 먹거리의 적지 않은 부분을 차지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습니다. 열대의 환경이 주는 다양한 생물을 골고루 섭취하는 열대 지역에서 곤충은 다양한 먹거리의 일부일 뿐입니다. 열대에서 멀어지면서 생태계의 다양성이 줄고 먹거리의 종류 역시 감소합니다. 곤충식에 대해 역겨움이나 혐오감을 드러내는 것은 어쩌면 열대 지역의 문화에 대한 혐오감을 가진 유럽중심주의의 소산이 아닐까요? - P80

이 최근의 연구 성과들이 시사하는 점은 무엇일까요? 두 발 걷기, 두뇌 용량, 사냥도구의 제작과 사용이 패키지를 이룬 ‘사냥 가설‘은 그자체로 뛰어난 논리적 정합성을 갖춘 것처럼 보였으며 20세기까지 주류가설로 통용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거기에서 ‘두 발 걷기‘가 떨어져나가고 이제는 두뇌 용량과 사냥, 도구 제작 간의 연결고리조차 끊어지려고 하고 있습니다. 동물성 먹거리를 얻기 위해서는 고기를 얻을 수 있는 큰 짐승을 사냥할 수밖에 없다는 기존의 공식에서 벗어나게 되면서 또 다른 시각이 생기고 있습니다. 동물성 먹거리를 얻기 위한 행동으로서 사냥이 남성의 전유물이었고 여성은 채집을 통해 식물성 먹거리를 확보했다는 경제 분업 가설이 와해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동물성 먹거리의 확보가 남성의 전유물이 아니었다면 사실상 이러한 분업은 존재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곤충 등 다양한 동물성 먹거리와 씨앗, 구근류, 해산물 등으로 고칼로리 고단백질의 먹거리 섭취가 가능해지면서 두뇌는 점차 커졌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호모 에렉투스만이 아니라 약 200만 년 전에 살았던 모든 고인류가 공통적으로 겪은 진화입니다. 어른 침팬지보다 큰 머리를 가지고 있는 고인류가 서로 살아가는 방식을 보고 따라 했을 광경을 머릿속에 그려봅니다. - P83

불은 포유류가 소화하기 힘든 음식을 소화할 수 있게 합니다. 포유류는 생채소를 이루는 섬유소를 소화할 수 있는 능력이 없습니다. 놀랍게도 초식동물조차도 날것의 식물을 직접 소화할 수 있는 효소를 가지고있지 않습니다. 대신 초식동물은 여러 가지 방법을 통해 식물을 소화해냅니다. 그중 하나는 미생물입니다. 장내에 미생물을 키워서 그들의 도움으로 식물을 소화합니다. 또한 소나 양은 네 개의 위를 가지고 있습니다. 본래라면 소화할 수 없는 식물을 몇 차례의 과정을 거쳐서 소화하기 위해서입니다. 이를 위해서 먹은 음식을 토했다가 다시 삼키기를 반복하기도 합니다. 이게 바로 되새김질입니다. 하지만 불에 익히면, 보잘것없는 위 한 개만 가지고도 채소를 소화할 수 있습니다. 불은 그야말로 제2의 위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 P86

식물성 먹거리나 동물성 먹거리 모두 익혀서 먹으면 영양분을 훨씬 더 많이 흡수할 수 있지만, 익힌 음식이 빛을 발하게 된 것은 농경이 본격적으로 자리 잡고 곡류 위주의 식생활을 하면서부터입니다. 곡물에 물을 붓고 끓여서 먹으면 맛도 좋고 소화도 잘된다는 것을 발견합니다. 곡류에 물을 부어 끓인 음식은 무엇보다도 이유식으로 최고였습니다.
농경이 자리 잡으면서 인구가 폭발적으로 증가한 데에는 곡물로 만든 이유식이 큰 역할을 했습니다. 이유식 덕분에 모유 수유 기간이 줄어들었습니다. 그로 인해 모유 수유 기간에 정지되었던 배란주기가 다시 시작되고 임신이 가능해지게 되었습니다. 한 명의 가임 여성 기준으로 4~5년이었던 출산 터울이 2~3년으로 줄어듭니다. 폭발적인 인구 증가가 가능해진 것입니다. - P89

그런데 호모 사피엔스 이전의 고인류 호모 에렉투스 역시 화식에 의존했을까요?
이 문제에 대한 답은 ‘비싼 장기 가설 expensive-tissue hypothesis‘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이것은 고인류학자 레슬리 아이엘로Leslie Aiello 가 두뇌와 소화 장기는 모두 비싼 장기라는 점에 착안하여 내놓은 가설입니다. 비싼 장기라는 것은 제작비와 유지비가 모두 많이 든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비싼 장기인 두뇌와 소화 장기를 둘 다 크게 만들 수는 없습니다. 한쪽을 크게 만들기 위해서는 다른 한쪽을 포기해야합니다. 오스트랄로피테쿠스속은 두뇌 대신 소화 장기를 선택했습니다. 오스트랄로피테쿠스속은 수백만 년의 진화 과정에서 두뇌 용량이 조금 커지기는 했지만 소화 장기는 훨씬 더 컸고 많은 기능을 했습니다. 비록 소화 장기자체는 화석으로 남아 있지 않지만 몸통뼈, 등뼈, 골반뼈의 크기를 통해 그 크기를 가늠할 수 있습니다.
오스트랄로피테쿠스속에 비해 호모속은 몸통이 좁고 골반뼈 역시 키에 비해 좁은 편입니다. 사람의 소화기관은 비슷한 몸집의 영장류가 가진 소화기관의 절반 크기밖에 되지 않습니다. 그 대신에 호모속은 두뇌용량을 놀라울 정도로 키웠습니다. 소화기관 대신 다른 비싼 장기인 두뇌를 선택한 것입니다. 작은 치아, 작은 소화기관을 가지고 오스트랄로피테쿠스속과 같은 먹거리를 먹는다면 큰 두뇌와 큰 몸집을 유지할 만큼의 열량을 도저히 섭취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음식을 익혀 먹었다면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 P91

고인류를 먹잇감으로 삼았던 포식자는 누구였을까요? 브레인의 연구에 등장하는 표범을 꼽을 수 있습니다. 표범은 먹잇감을 잡으면 높은나무 위로 끌고 올라갑니다. 기껏 잡은 먹잇감을 노리는 경쟁자들을 물리칠 수 있고 먹잇감이 도망갈 수도 없으니 여러모로 이득입니다. 나무위에서 천천히 먹고 난 나머지 잔반(?)은 나무 위에서 땅으로 떨어지게됩니다. 남아프리카의 동굴 입구 근처에는 동굴에 고인물 때문에 큰 나무가 자라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표범이 먹고 남은 뼈들이 떨어진 나무 아래는 동굴로 연결됩니다.
남아프리카의 동굴에서 동물 뼈와 발견된 고인류 화석 뼈는 다트가 생각했듯 킬러 유인원 고인류가 동물을 잡아먹고 남긴 흔적이 아니었습니다. 그보다는 나무 위에서 맹수의 먹잇감이 되어버린 동물의 뼈가 나무 위에서 떨어진 다음 쌓여서 생긴 유적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맹수의 먹잇감이 되어버린 동물 중에 고인류도 있었던 것입니다.
결자해지일까요? 킬러 유인원 가설을 내놓은 레이먼드 다트가 발견한 타웅 아기 역시 평화롭게 죽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타 아기의 머리뼈에는 눈구멍뼈도 남아 있습니다. 눈구멍뼈에는 세모난 구멍이 나 있습니다. 고인류학자 리 버거 Lee Berger는 이를 맹금류의 발톱이 남긴 자국이라고 주장했습니다. 맹금류의 행동학 연구가 쌓이면서, 타웅 아기가 맹금류에 의해 들려져서 먹잇감이 된 다음 남은 뼈가 나무 아래로 떨어져 화석이 되었다는 가설을 무시할 수만은 없게 되었습니다. - P114

일련의 연구 결과가 보여주는 인류 조상의 모습은 공격적이고 살상무기를 휘두르는 킬러 유인원이 아니라, 맹수와 맹금에게 잡아먹히는 먹잇감입니다. 인류의 기원은 공격성을 지니고 태어나 무기를 휘두르며 돌진하는 포식자에게서 찾을 수 없습니다. 작은 몸집으로 두 발로 서서 걷다가 맹수를 만나면 나무 위로 도망가고, 미처 피하지 못해 먹이가된 나약한 모습이 지금 지구 위를 뒤덮은 사람의 기원이었습니다.
그동안 인류학계에서는 초기 인류의 모델로서 침팬지만을 주목해 왔습니다. 침팬지의 공격성은 사람의 공격적인 남성성을 설명할 수 있다고 여겨져 왔습니다. 그런데 사람과 계통상 가장 가까운 유인원은 침팬지만이 아닙니다. 침팬지속에는 두 종이 있습니다. 하나는 우리에게 널리 알려진 침팬지이고, 또 다른 하나는 보노보입니다. 보노보에 대한 연구는 뒤늦게 시작되었습니다. 침팬지보다 앞에 나서지 않고 공격적이지 않아 사람의 관심을 덜 받았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보노보에 대한 연구 결과는 매우 흥미롭습니다. 보노보는 침팬지와 대척점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침팬지가 공격적이고 폭력적이라면 보노보는 느긋하고 평화적입니다. 침팬지는 수컷이 주로 연대하는 것으로 유명하지만 보노보는 암컷이 연대합니다. - P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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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어머니에게 대답했다. 다른 무엇보다도 내가 줄곧 원해 온 것은 글쓰기였고, 오직 그것만을 하고 싶다고, 그것만을, 그녀는 질투하고 있었다. 아무 대답 없이 흘깃 보더니 이내 시선을 돌리며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잊을 수 없는 그 몸짓, 내가 맨 먼저 떠나가게 될 것이다. 어쨌든그녀가 나를 잃기에는, 여기 있는 이 아이를 잃기에는 아직 몇 년이 남아 있다. 아들들의 경우에는 두려워해야 할것이 없다. 그러나 이 딸애는 어느 날엔가는 떠날 것이며,
데이트도 하게 될 것이다. 어머니는 그런 사실을 진작부터 알고 있었다. 프랑스어 과목 일등. 담임이 그녀에게 말했다. 부인, 부인의 따님이 프랑스어 과목에서 일등을 했습니다. 어머니는 아무 말도 안 했다. 한마디도 전혀 만족한 기색이 아니었다. 프랑스어 과목에서 일등을 한 것이 아들들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듣기가 싫어서 어머니는 이렇게 물었다. 언제 수학에서도 그럴 때가 올까요? 담임의 대답, 아직 그렇게는 못 되지만 그럴 때가 오겠지요. 어머니가 물었다. 그때가 언제일까요? 담임의 대답. 따님이 수학 일등을 원할 때겠지요. 부인. - P30

그 남성용 모자에는 가난과의 인연이 담겨 있었다. 머잖아 집안에 돈이 들어와야 할 때가 닥쳐올 것이기 때문이었다. 어떤 식으로든 수입이 있어야 했다. 어머니 주위는 온통 사막과 같았다. 아들들이 바로 그 사막이었다. 그들은아무것도 하지 않을 것이다. 터무니없이 비싼 땅값도 역시암담했다. 돈이 바닥나면 모든 게 끝장이었다. 유일하게 남은 것은 나날이 커가는 딸뿐이었다. 그 애는 언젠가는 이집안의 돈이 어떻게 해서 벌어들여진 것인지 알게 될 것이다. 바로 그런 이유 때문에, 딸애는 그 사실을 모르지만, 어머니는 딸이 나이 어린 창녀 같은 옷차림으로 외출하는것을 허락한 것이다. 그래서 딸애는 벌써부터 그런 몸치장을 할 줄 아는지도 모른다. 그것은 사람들이 그 소녀에게 갖게 될 관심을 그녀가 돈을 벌 수 있는 쪽으로 돌리기에충분한 것이었다. 그런 사실이 어머니를 미소 짓게 했다. - P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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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며 :흐르는 강물처럼

현재 지구상에 존재하는 인류는 단 한 명도 빠짐없이 하나의 종, 호모사피엔스Homo sapiens에 속합니다. 호모 사피엔스가 속한 호모속에는 현재 다른 어떤 종도 포함되어 있지 않습니다. 사람같이 생긴 동물은 모두 호모 사피엔스입니다. 사람 비슷하게 생겼으나 딱히 사람은 아닌 종, 호모속에 속한 다른 종은 상상 속에서만 존재합니다. 그러니까 호모 사피엔스, 즉 사람은 외둥이인 셈입니다. - P6

인류의 진화는 마치 정권을 이양하듯, 왕조가 바뀌듯 하나의 계통에서 다른 계통으로 바뀌며 진행된 것이 아니라 하나의 계통에서 두 개의계통으로 갈라지며 진행되었다는 생각이 20세기 후반에 자리 잡았습니다. 계단이 아닌 나뭇가지처럼 뻗어 나가는 모습이 20세기 후반에 자리 잡은 인류의 진화에 대한 이미지입니다. 나무 모양이 만들어 낸 인류의 진화에는 다양한 고인류 계통이 등장합니다. 공통의 조상 계통에서 두 개의 계통으로 갈라져 나가기를 반복하면서 아름드리나무가 만들어졌습니다. 인류 화석종의 이름도 늘어났습니다. 사헬란트로푸스 차덴시스, Sabetanthropus ichadensis, 오로린 투게넨시스 Orrorin ugenensis.
아르디피테쿠스 라미스 Ardipitbecus ramidus, 오스트랄로피테쿠스 가르히 Australopithectus garht, 오스트랄로피테쿠스 세디바 Australopitbecussediba, 파란트로푸스 보이세이 Paranthropus botset, 파란트로푸스 로부스투스Parantbropus robustus, 호모 루돌펜시스Homo rudolfensis, 호모에르가스테르Homo ergaster, 호모 안테세소르 Homo antecessor, 호모 네안데르탈렌시스 Homo neandertbalensis 등 수없이 많은 화석종이 발표되었고 지금도 발표되고 있습니다. 한번 갈라져 나간 나뭇가지가 다시 만나지 않듯이 두 계통으로 분화된 인류는 각자 나름의 진화 역사를 만들며 새로운 종이 되어 다시는 만나지 않게 됩니다. 수없이 많은 화석종 중현재의 인류로 이어져 온 ‘정통‘의 가지가 있고 나머지는 ‘곁‘가지라는생각이 자리 잡았습니다. 곁가지는 막다른 골목길에 마주친 것처럼 더이상 진화하지 못하고 인류의 진화 무대에서 사라지고 마는 ‘루저‘의 역할입니다. 호모 사피엔스처럼 성공한 자손에게 유전자를 물려주지못했다고 생각했죠. 네안데르탈인도 그중 하나였습니다.
21세기에 들어서 다시 새로운 그림이 그려지고 있습니다. 서로 유전자 교환을 하지 않았어야 할 종끼리 유전자 교환이 이루어졌다는 사실이 고유전학의 발달로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 P8

20세기 전반 우리의 생각을 지배했던 계단식 진화, 20세기 후반 우리의 생각을 지배했던 나무식 진화, 이 둘 모두 실제로 일어난 일을 표현하기에는 모자라는 은유였습니다. 인류의 진화는 한 줄로 나란히 서서 앞으로 행진하는 모습도 곁가지와 본가지로 갈라져서 울창한 아름드리나무가 되어 뻗어가는 모습도 아닙니다. 차라리 갈라졌다가 다시 만나고 다시 갈라지는 강줄기의 모습에 가깝습니다. 그리고 많은 물줄기를 이루었던 인류 계통의 다양성은 이전에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큽니다. 작은 물줄기에서 큰 물줄기로 모여 지구 전체를 덮고 있는 우리 호모 사피엔스는 다양한 집단의 다양한 기원이 만들어 낸 모습입니다. - P10

종Species-속Genus-과 Family-목Order-강Class-문Phylum-계Kingdom 가 그것입니다. 비슷한 생물체들을 같은 종으로 묶고, 비슷한 종들은 같은 속으로 묶고, 비슷한 속들은 같은 과로 묶었습니다. 종은 가장 기본적인 생물 분류 단위가 되었습니다. 린네의 이명법에 따라종명은 속명 generic name과 종소명 specific name 의 두 이름으로 이루어집니다. 속명은 대문자로 시작하고 종소명은 소문자로 시작합니다. 그리고 종명은 반드시 이탤릭체로 쓰거나 밑줄을 쳐서 종명이라는 것을 나다냅니다. 호모 사피엔스:Homo sapiens 중 호모 Homo는 속명이고 사피엔스sapiens는 종소명입니다.
두 단어가 아닌 세 단어로 학명을 나타낼 때도 있습니다. 그 경우 세번째 단어가 소문자로 시작하면 종보다 하위 개념인 아종 혹은 변종을의미합니다. 가령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Homo sapiens sapiens는 호모사피엔스의 아종입니다. 한편 세 번째 단어가 대문자로 시작하면 종명을 붙인 사람의 이름을 나타냅니다. 예를 들어 ‘Homo sapiens Linne라고 쓰면 호모 사피엔스 종의 이름을 붙인 사람이 린네라는 뜻이 됩니다.
린네는 일견 혼란스럽고 복잡해 보이는 생물계에 체계적인 질서를 보여줌으로써 자연에 법칙이 있다는 것을 알리고자 했습니다. 사실 린네가 생물계의 자연 법칙을 보여준 이유는 이 세상이 신이 계획한 대로질서 정연하고 완벽하게 짜여 있다는 것을 말하고자 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결과는 그가 의도하지 않은 방향으로 흘러갔습니다. 어째서일까요? 바로 사람에게도 종명을 붙였기 때문입니다. - P18

사람과 유인원은 놀라울 정도로 비슷한 혈청 단백질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 연구 결과에 따라 사람과 유인원은 1,000만 년 전이 아니라 불과 수백만 년 전에 갈라졌다는 가설이 등장했습니다. 충격적이었습니다. 유전학의 발달로 사람뿐만 아니라 침팬지와 고릴라의 유전자 자료까지 모이기 시작하면서 사람, 침팬지, 고릴라 세 계통 중 사람과 침팬지가 가장 가깝다는 것이 드러났습니다. 사람과 침팬지가 유전적으로 비슷한 정도는 사람과 고릴라가 비슷한 정도, 침팬지와 고릴라가 비슷한 정도보다 분명히 컸습니다.
사람과 침팬지가 서로 놀랍도록 비슷하다는 이야기는, 달리 말하면 사람과 침팬지 계통은 서로 갈라진 지 얼마 되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우리‘와 침팬지가 유전자의 98.5퍼센트를 공유한다는 것이 밝혀지고 이것이 후속 연구로 계속 뒷받침되자 충격은 학계 전반으로 퍼졌습니다. - P21

독일의 생물학자인 에른스트 마이어 Ernst Mayr는 종을 1) 서로 생식이 가능하고 2) 자발적으로 서로 간에 생식 활동을 하며 3) 그렇게 해서 나온 자손이 생식 능력을 가지고 있는 무리라고 정의했습니다. 서로 생식이 가능했던 하나의 종種, species에서 서로 생식이 불가능한 다른 종으로 갈라지는 과정은 역동적입니다. 어느 순간 칼로 두부를 가르듯 하나였다가 둘로 갈라지는 것이 아니라 차츰 유전자를 섞지 않게 되면서 서로 다른 점을 쌓아가게 됩니다. 처음 갈라졌을 때는 당연히 서로 유전자를 섞을 수 있지만 점차 차이가 커지면서 서로 유전자를 섞을 수 없게됩니다. 종이 완전히 갈라지는 겁니다. - P24

결국 1990년대를 마무리하면서 학계는 아파렌시스가 두 발로 걸었고 나무 타기에 적응하지 않았으며 남녀 간의 몸집 차가 큰 화석이라는 것으로 입장을 정리했습니다. 최초의 인류 오스트랄로피테쿠스 아파렌시스는 유인원과 별반 다름없지만 사람과 같이 (직립보행 외에 다른 방식으로는 움직이지 않는) 의무적 직립보행을 했던 것으로 학계 전체가 동의하게 되었습니다. 직립보행을 했다는 것이 유일한 사람다운 특징이었습니다. 두뇌는 침팬지 정도로 작고, 몸집은 현생인류의 유치원생 정도였고, 치아는 컸습니다. 만약 그들이 도구를 만들어 썼다면 치아가 작아졌을 것인데 그렇지는 않았던 겁니다. 하지만 여느 유인원의 이빨처럼 무시무시하게 크지는 않았습니다. 침팬지와 그다지 다르지 않은 오스트랄로피테쿠스 아파렌시스가 침팬지의 조상이 아니라 인류의 조상이라고 결론지어진 이유는 인류의 특징인 의무적인 직립보행을 했다는증거 때문이었습니다. - P33

그리고 아르디피테쿠스 라미두스가 발견되었습니다. 1993년에 발견되어 2009년에야 상세한 내용이 발표된 아르디피테쿠스 라미두스는440만 년 전의 고인류 화석종으로, 오스트랄로피테쿠스 아파렌시스보다 100만 년 일찍 등장했습니다. 작은 머리와 작은 몸집은 우리가 알고있는 초기 인류의 모습과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획기적으로 다른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일명 아르디라고 불리게된 아르디피테쿠스 라미두스의 엄지발가락은 의무적 직립보행을 했던 발가락의 모습이 아닙니다. 아르디의 엄지발가락은 우리의 엄지손가락처럼 옆으로 나 있어서 다른 발가락과 맞닿을 수 있는 모습입니다. 나뭇가지를 움켜잡고 나무를 탈 수 있는 모습의 발을 가진 아르디는 나무를 탔을까요? 유인원과 별다르지 않지만 단지 의무적 직립보행을 했기 때문에 인류 계통에 속하게 된 아르디가 나무 타기에 적응했다는 가설은충격을 주었습니다. 인류가 기원한 것으로 알려진 사바나 초지에서 그렇게 탈 만한 나무가 많았을까요?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치아에서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치아를 이루는 물질의 동위원소를 분석하면 주로 어떤 잎사귀를 먹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숲에서 나뭇잎을 주로 먹었는지, 초지에서 풀잎을 주로 먹었는지알 수 있죠. 그런데 아르디의 치아를 분석해 보니 나뭇잎을 주로 먹었음이 밝혀졌습니다. 나뭇잎이 많은 지역에 살았을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초기 인류가 사바나의 너른 초원에서 사람다운 두 발 걷기와 함께 시작했다는 가설에 금이 가기 시작했습니다.  - P34

초기 인류가 사람과 같이 두 발 걷기만을 할 수 있도록 적응했다는 가설이 조금씩 깨지고 있습니다. 인류는 다른 어떤 특징보다도 직립보행을 함으로써 인류다워졌다는 정설에 정면으로 도전장을 던지게 되었습니다. 300만 년 전 인류의 조상은 오스트랄로피테쿠스 아파렌시스 하나뿐이 아니었습니다. 직립보행을 하는 방법은 하나뿐이 아니었습니다.
아파렌시스가 살았던 동아프리카에는 엄지손가락같이 생긴 엄지발가락으로 두 발 걷기를 하던 의문의 고인류가 함께 있었습니다. 이들은 아파렌시스와 만났을까요?
고인류의 시작이 당당한 두 발 걷기에서 시작했다는 가설이 주류가설로 받아들여지기까지 20~30년이 걸렸습니다. 그리고 이제 다시 440만 년 전 아르디와 같이 두 발로 (당당하게) 땅 위를 걷고 나무도 탈 수 있는 모양새를 갖춘 고인류가 366만 년 전 동아프리카에서 아파렌시스와같은 지역을 걸었다는 놀라운 가설이 제시되었습니다. 이 가설은 앞으로 좀 더 많은 자료의 검증을 거쳐야 할 것입니다. 지금은 단지 루시와같은 오스트랄로피테쿠스 아파렌시스가 다른 고인류와 함께 따뜻한 화산재를 밟으면서 걸어다니는 모습을 상상해 봅니다. - P38

사람의 엄지손가락은 보통의 영장류 엄지손가락처럼 다른 손가락을마주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의 엄지손가락에게는 특별한 능력이있습니다. 엄지손가락이 다른 손가락과 마주 볼 뿐 아니라 엄지손가락의 끝이 다른 손가락의 끝과 맞닿을 수 있습니다. 오케이 사인을 만들수 있고 바늘을 잡을 수 있습니다. 사람 이외 영장류의 엄지손가락은 다른 손가락을 마주 볼 수 있지만 짧아서 손가락 끝끼리 맞닿지는 않습니다. 다른 손가락과 맞닿을 수 있도록 생긴 엄지손가락은 도구를 만드는데 중요한 조건이 됩니다. 가령 석기를 만들기 위해서는 돌을 붙잡고 깰수 있을 만큼의 강한 엄지손가락과 아귀의 힘이 필요합니다. 그렇기에 루이스 리키가 호모 하빌리스의 손뼈 화석을 보고 그런 이름을 붙였던것입니다.
그렇지만 최초의 도구는 최초의 도구 제작자로 알려진 호모 하빌리스의 화석과 함께 발견되지는 않았습니다. 사람의 도구로 가장 많은 주목을 받은 것은 석기, 즉 돌로 만든 도구입니다. 최초의 도구는 최초의 석기이기도 한데, 그 이유는 단지 석기가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 최초의 도구는 돌이 아닌 다른 재료, 예를 들면 나무, 가죽, 뼈 등으로 만들어졌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아니, 사람이 사용한 대부분의 도구는 돌이 아닌 재료로 만들어졌을 것입니다. 레이먼드 다트 Raymond Dart는 최초의 도구를 뼈-이빨-가죽 문화osteodontokeratic culture라고 이름 붙였습니다. 그렇지만 돌로 만들어진 도구가 아니면 대부분 썩어 사라지고 남아 있지 않게 됩니다. 돌로 만든 도구는 몇백만 년 뒤에도 남아 있을수 있습니다. - P41

 석기와 함께 발견된 고인류에 대한 해석은 까다롭습니다. 석기와 함께 동물 뼈가 발견되었다면 우리는 고인류가 석기를 사용해서 동물 뼈를 처리했다고 봅니다. 석기와 함께 사람 뼈가 발견되었다면 우리는 사람이 사용하던 석기라고 봅니다.그러나 석기와 함께 발견된 오스트랄로피테쿠스가 과연 석기를 만들어 사용한 쪽인지, 아니면 동물처럼 도축된 쪽인지는 쉽게 알 수 없습니다. 석기를 만들어 쓴 고인류가 호모일것이라는 가설에서 본다면 오스트랄로피테쿠스는 석기를 쓴 주체가 아니라 호모가 석기를 사용해서 도축한 대상이 됩니다. 이 해석은 도구를 처음 만든 고인류가 누구였는지를 전제하고 있습니다. 최초로 도구를 만들어 사용한 고인류는 호모 하빌리스라는 가설이 오랫동안 정설이었기 때문에 오스트랄로피테쿠스와 함께 발견된 석기가 오스트랄로피테쿠스가 만들어 쓴 석기일 수 있다는 가능성은 그다지 고려되지 않았습니다. - P44

그런데 1996년 약 250만 년 전에 살았던 고인류 화석종인 오스트랄로피테쿠스 가르히가 동물 뼈와 함께 발견되었습니다. 가르히와 함께발견된 동물 뼈에는 칼자국이 나 있었습니다. 가르히가 석기와 발견되지는 않았지만 오스트랄로피테쿠스가 석기를 사용해서 남긴 동물 뼈의 흔적은 고인류학계를 놀라게 하기에 충분했습니다. 오스트랄로피테쿠스가 도구를 만들었는지는 몰라도 적어도 도구를 사용했다는 뜻이었기때문입니다. 오스트랄로피테쿠스가 석기를 사용했다면 석기를 제작했을 가능성도 없지는 않게 됩니다.
칼자국이 난 동물 뼈는 계속 발견되었습니다. 340만 년 전 에티오피아의 디키카Dikika 유적에서 발견된 동물 뼈에 남겨진 칼자국은 분명히 호모속이 아닌 고인류가 도구를 써서 동물 뼈를 처리했다는 자료입니다. 340만 년 전에는 호모속이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죠. 330만 년 전숲이 우거진 케냐의 롬퀴 Lomekwi 유적에서 발견된 석기는 최초의 석기인 올도완 석기를 만드는 방법으로 만들어졌습니다. 돌을 깨서 날을 세운찍개의 형태를 가지고 있는 석기를 만든 고인류는 누구였을까요?  - P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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