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여성운동이 하고 싶었다. 여성은 전쟁의 최대 피해자였다. 남성은 전쟁터에서 싸우다 전사하면 ‘조국을 위해서‘라는 명예로운 이름으로 국립묘지에 안장되고 순국선열의 반열에 올라간다. 그러나 후방의 희생자인 여성들에게는 불명예와 수모가 있을 뿐이었다. 몽골군에게 끌려갔다 돌아온
‘환향녀‘는 화냥년으로 일제 강점기에 끌려간 ‘정신대‘는 가문의 수치로, 한국전쟁의 피해자는 ‘양공주‘로 낙인찍히고 멸시당했다. 원인은 가부장제였다. 우리말 속에는 남성을 중시하고 여성을 경시하는 말이 수없이많다. 무심코 던지는 말 가운데 스며 있는 여성 비하는 또 얼마나 많은가.
‘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한다‘, ‘남아일언중천금男兒一言重千金‘, ‘남자는 도둑질 말고는 뭐든지 해도 된다‘ 등등. 나는 유독 ‘그녀‘ 라는 말에 알레르기 반응을 일으킨다. ‘그남‘은 없는데 왜 ‘그녀‘라고 하는지. 이는 일본어 ‘가노조‘ 에서 온 일제 문화의 잔재다. 나는 한때 우리말 속에 은연중에 자리 잡은 남성들의 터무니없는 우월 의식과 그 언사를 연구하여 책을 내려고 한 적도 있다. - P39

커리큘럼 중에는 한 사회집단을 정하고 지속적으로 관찰하면서 리포트를 내는 논문 대용 과목이 있었다. 나는 교회 중에서도 흑인 교회를 선택했다. 남부는 보수적이고 흑인이 많은 곳이다. 당시만 해도 유색인종을 분리대우해서 버스 좌석도 달랐다. 시골 흑인 교회에는 제대로 된 화장실도 없었다. 주일학교 선생이 문맹일 정도로 교육을 받지 못했으며 혹독하게 가난했다. 이런 가난한 흑인 커뮤니티는 내 조국의 농촌 현실과 유사했다. 전쟁으로 폐허가 된 가난한 나라의 유학생이지만 교회에서 한국 전쟁고아 필름을 보여주며 성금을 호소하는 것에 늘 비참함을 느꼈다. 한국에서 온 인사들은 여러 교회를 찾아다니며 도움의 손길을 요청했다. 그 모습이 어찌나 안타깝고 남루하던지. - P48

이사회 승인을 거친 후 1월 3일부터 출근했다. 학기 중이었으므로 Y양해를 받고 이화여대 출강을 병행했다. 당시 YWCA는 여성계를 선도하는 엘리트 집단이었다. 첫 번째로 벌인 캠페인은 ‘혼인신고를 합시다‘였다.
포스터를 만들어 지방 Y로 보내서 전국 곳곳에 붙이고 띠를 어깨에 두른채 가두 캠페인에 나섰다. 좀 더 배우고 젊은 첩이 혼인신고를 해버려서 자식 낳고 살던 조강지처가 오히려 빈손으로 쫓겨나는 일이 비일비재하던 시절이었다. 공개적으로 점을 둔 남자도 많던 때였다. ‘축첩자는 국회에 보내지 맙시다.‘ 5-16 쿠데타 후 첫 국회의원 선거 때 Y가 중심이 되어 각 여성 단체와 연합하여 벌인 가두시위다. 일요일에도 나가서 구호를 외쳤다. ‘첩둔 남편 나라 망친다‘, ‘아내 밟는 자 나라 밟는다‘ 등을 붓글씨로 써서 피켓과 플래카드를 만들었다. 국회가 있는 태평로, 종로, 을지로, 명동 거리에서는 행진으로 시위했다. 지금도 가끔 TV에서 해방 특집 방송이나 시대다큐멘터리에 이 장면이 나온다. - P53

‘부정선거 다시 하자!‘
‘민주주의 사수하자!‘
‘이승만 정부 물러가라!‘
경찰의 발포로 젊은 목숨이 무수히 피를 흘렸다. 4월 25일 대학교수들이 시국 선언을 발표하고 시민들이 합세하자 미국은 이승만 대통령의 하야를 종용했다. 그는 하와이로 망명을 떠났다. 부통령 이기붕 일가는 이승만 대통령의 양아들이기도 했던 장남 이강석이 부모와 형제를 모두 쓰고 자살하는 비극으로 마감했다. 나는 이번에는 솔선해서 Y 직원들과 경복궁 동문앞 수도육군병원에서 열린 추모예배에 참석해 망자에 대한 예우를 다했다. 그때 이승만 박사와 프란체스카 여사가 들어와 앞에 놓인 4개의 관을바라보는 그 모습이 얼마나 참혹했던지. 건국의 국부에서 장기 집권 독재자로 추락한 초라한 뒷모습이 지금도 선명하다.
학생 시위대가 이기붕 집을 습격했을때 냉장고에서 나온 물품 중에서 수박이 단연 화제였다. 수박만 한 황금 덩어리가 나왔다고 해도 그렇게 얘깃거리가 되지 않았을 것이다. 대부분의 국민들에게 냉장고도 생소했지만 비닐하우스도 없던 그 시절의 ‘4월 수박‘은 보통 국민들로선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사망자가 190여 명, 부상자 또한 이보다 많았다. 85세의 노구를 끌고 쓸쓸히 망명 길에 오르는 이승만 대통령을 바라보는 국민들의 심정은 착잡했다. 독립운동과 건국 대통령으로 민주주의에 입각한 삼권분립제도의 기틀을 다진 것은 그의 업적이 분명했다. 북한 공산주의와 맞서 나라를 지킨 국부로서 추앙을 받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일제에 적극 협력한 친일파를 각계에 중용함으로써 ‘사회정의‘가 뿌리째 흔들렸다. 또한 자신의 장기 집권을 위해 헌법을 누더기로 만들었다. 3.15 부정선거는 그에게 치명타를 가했다. - P55

김활란 박사는 1939년 한국인으로 첫 이화여전 교장에 올랐다. 1940년에 선교사들을 추방하고 학교 요직을 차지하고 들어온 일본인들은 김활란교장을 핍박했다. 그들은 한복 대신 몸뻬 바지를 입게 하고 트레머리를 하도록 강요했다. 그리고 또한 창씨개명과 일본어 상용을 독려했다. 그런 가운데 철없는 학생들은 김활란의 서툰 일본말이 재미있어 까르르 웃었다. 나는 선망했던 인물이 망가지는 모습을 지켜본 셈이다. 선교사들이 돌아간뒤 이화여전은 미국에서 지원되던 후원금이 막혀버렸다. 일본인들이 기독교 학교를 없애려고 혈안인 가운데 학교를 지키기 위해 고군분투하며 받은 수모와 오해는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내가 이화여전에 입학한 1942년은 일본이 태평양전쟁을 일으킨 후에 물자와 인적 자원 수탈로 광분한 시기다. 일본인들은 강제징용, 학도병, 정신대로 식민지 백성 총동원령을 내리고 본의든 강제든 저명한 조선인들을 앞장서게 했다. 동원에 그들의 명성을 이용하고 조선인들이 존경하는 인물을 더럽혀 구심점을 없애려는 이중 속셈도 있었다.
김활란 박사는 표적이었다. 조선 여성을 대표하는 인물로 피할 수 없는 운명이었다. 30년 이상 지속된 식민지 조국은 언제 해방될지 모르는 캄캄한 터널 속이었다. 끝내는 학교 간판이 떼어지고 교장직에서 쫓겨났으며, 여기저기 끌려다니면서 일본인들이 강요하는 말을 하고 글을 쓰는 아주 초라한 모습이 되었다. 당시 어용 매체 <매일신보> 등에 실린 글을 지금 읽어보면 그는 변명할 수 없는 친일파다. 1943년 12월 25일자 <매일신보>에 실린 글의 일부다.

반도 학도들은 우렁찬 진군을 일으키어 특별 지원병으로서 오는 1월20일에는 영예의 입영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번 반도 학도들에게 열린 군문으로 향한 광명의 길은 응당 우리 이화전문학교 생도들도 함께 걸어가야 될 일이지만 오직 여성이라는 한 가지 이유 때문에 참여를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싸움이란 반드시 제일선에서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 학교가 앞으로 ‘여자청년연성소 지도원 양성기관‘으로 새로운 출발을 하게 된 것은 당연한 일인 동시에 생도들도 황국 여성으로서 다시없는 특전이라고 감격하고 있습니다.

바로 위의 조치로 이화여전이 문을 닫고 1944년 4월초 재학생들은 강제로 졸업을 당했다. 2년 만에 졸지에 학업이 중단된 나는 망연자실한 채로친구 몇 명과 함께 김활란 박사를 찾아갔다.
"선생님, 우린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나요?"
애처롭게 우리를 바라보시던 그분은 조용히 붓을 들고 글을 써 내려갔다. 명필로도 유명한 그분은 그 글을 내게 주셨다.
‘百忍百勝(백인백승).‘
백번 참으면 백번 승리하리라. 일본인들에게 치욕을 당하면서 자신에게 다짐하는 말이었으리라. 그리고 제자들에게도 참고 살아남으라는 당부를했다. 당시 학생들 사이에서는 ‘교장직에 연연해 일본에 협조한다‘는 빈정거림이 없지 않았다. 글을 받아 든 그때의 이심전심이 내 마음속에 오래도록 깊숙이 새겨져 지금 그를 위해 변명하는 용기와 의무감을 주고 있는 것인지 모른다. 당시 그의 심정을 자서전 <그 빛 속의 작은 생명> 중에서 인용한다.

1944년 여름 나는 그들에게 끌려서 징병 유세를 다녀야 했다. 감시와 강요하에 살이 떨리고 양심이 질식할 징병 유세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한 마디 한 마디가 나의 영혼을 새카맣게 불태우듯 나를 어둡게 만들었다. 나는 그렇게 질질 끌려다니면서 그때까지 이화를 지켜보겠다고 버둥거리며 남아 있다가 이러한 일마저 하게 되었다고 얼마나 후회했는지 모른다.

그가 정작 친일파였다면 일본어에 서툴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외국어는 목적을 갖고 선택하는 언어다. 1918년에 이화학당 대학부를 졸업할때 그는 유창한 영어 연설로 유명했다. 똑똑한 여성의 대명사였던 그가 자발적 친일파였다면 그 도구인 일본어도 무척 잘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 시대 나는 스무 살이 넘는 성인이면서 전혀 저항하지 못했다. 나는 오히려 황국신민을 교육하는 여자청년연성소 지도원 양성 과정에 들어갔다. 이를 두고 남편은 가끔 나를 친일파라고 놀린다. 학업을 중단하지 않으려고, 서산으로 내려가기 싫어서, 농촌 계몽을 할 수 있는 기회로 생각하고 차선책으로 이 과정을 이수했다. 내 나라 없는 설움보다 더한 슬픔이 또 있을까. 빼앗긴 조국은 우리의 사랑이었으며 종교였다.
그 이후 김활란 박사는 5·16 군사 쿠데타를 미국에서 승인하지 않자미국을 설득하겠다고 자청했다. 그는 영락교회 한경직 목사와 동아일보사 최두선 사장과 함께 미국을 방문했다. 정계, 언론계, 교계, 동포 사회에 쿠데타의 필연성을 설명하고 다녔던 분이다. 귀국하여 박정희 장군에게 보고하고 지지를 천명했다. 5·16 이후의 그의 정치적 행적에 나는 결코 동의하지 않는다. 그러나 일제 강점기 당시의 고뇌와 그 현장을 지켜보았던 사람으로서 침묵을 지키는 것도 비겁하다고 생각한다. - P57

박정희 소장 중심의 정치군인들은 이 혼돈을 이용해 1961년 5월 16일쿠데타를 일으켰다. 연일 각종 시위가 벌어졌던 서울 중심은 장갑차에 의해 점령되었다. 무질서에 지친 국민 중에는 혼란 다음의 억눌린 정적을 질서라고 착각하고 총을 든 군인을 반기는 일면이 있었다. 민주주의가 어쩔수 없이 유발하는 혼란에 우리 국민은 익숙하지 못했다. 미국은 쿠데타를인정하지 않았다. 마셜 그린Marshall Green 주한 미국 대리대사와 카터 매그루더Carter Magruder 유엔군사령관은 "우리는 장면 내각을 지지한다"라고 공동성명을 발표했다. 그러나 장면 국무총리는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은 채 혜화동 칼멜수녀원의 깊숙한 방에 숨어버렸다. 행방불명이 된 총리와 군통수권자인 윤보선 대통령은 결과적으로 쿠데타를 인정하게 된 셈이었다. - P68

"당신도 알고 있듯이 나는 가진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러나 나에게는 원대한 꿈이 있습니다. 그것은 이 땅에 참된 민주주의를 꽃피우고 국민들에게 꿈과 희망을 심어주는 것입니다. 나는 당신을 필요로 하며 나와 아이들을 돌보아주기를 바랍니다. 당신을 사랑합니다."
그에게 정치는 꿈을 이루는 길이며 존재 이유였다면 나에게는 남녀평등의 조화로운 사회를 만드는 길 중의 하나였다. 남녀 간의 뜨거운 사랑보다는 서로가 공유한 꿈에 대한 신뢰가 그와 나를 동여맨 끈이 되었다. 타이밍도 작용했다. 그즈음 나는 과거의 굴레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전쟁 중 앓는 사람을 두고 매정하게 유학을 떠나버린 데 대한 죄책감이 나를 괴롭혔다.
다행히 병마와 싸워 기사회생한 그 사람이 같은 서울에 혼자 있어 부담스럽기도 했다. 내가 결혼한 후 그분도 혼인하여 아들을 두었다는 소식을 듣고서야 나는 비로소 홀가분해졌다. 재야 민주화 운동에 평생을 바치며 단벌옷에 흰 고무신을 신고 살았던 그분은 내가 청와대 안주인이던 시절에 타계했다. 소식을 듣고 마음속으로 명복을 빌었다. 끝내 ‘말없이 떠나서 미안하다‘라는 말을 전하지 못한 것이 아쉬움으로 남아 있다. - P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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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석 지난 뒤, 땅이 얼기 전에.
이순일은 여러차례 그렇게 말했고 이제 그때가 되었다.
11월 둘째 주였다. 한세진은 아침 여섯시에 차를 몰아 집을 나섰고 별다른 막힘 없이 올림픽대로를 달려 이순일이 사는 집에 도착했다. 셔터를 내린 차고 앞에 차를 바짝 붙인 뒤 엔진을 끄자 바로 시트가 식었다. 추운 날이었다. 해가 완전히 뜨고 나면 기온이 조금 오르겠지만 그날의 목적지는 군사분계선 근처였고 이맘때 그곳의 한낮은 여기 밤보다 추웠다. 매년 그랬다. - P11

본래도 많지 않았던 일가친척은 대부분 한국전쟁의 전선이 38선 부근에서 오르락내리락하는 와중에 묻힌 곳도 간 곳도 모르게 사라졌고, 살아남은 혈육인 할아버지가 나이 다섯인 이순일을 거둬 밥을 먹이고 심부름도 시키고 하다가 손녀 나이 열다섯 때 먼 친척이 산다는 김포로 보냈다. 이순일은 거기서 시장 일을 돕다가 시장상인의 중매로 만난 한중언과 결혼했다. 길이 멀고 교통도 편치 않아 결혼식에 노인이 못 올 거라고 생각했는데, 할아버지가 낡은 솜두루마기를 입고 찾아와 결혼식장에 앉아 있다가 국수를 먹고 갔다고, 이순일은 한세진에게 말하곤 했다. - P16

그런 거 아냐.
너무 효도하려고 무리할 필요는 없어.
효?
그것은 아니라고 한세진은 답했다.
그것은 아니라고 한세진은 생각했다. 할아버지한테 이제 인사하라고, 마지막으로 인사하라고 권하는 엄마의 웃는 얼굴을 보았다면 누구라도 마음이 아팠을 거라고,
언제나 다만 그거였다고 말하지는 않았다. - P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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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모 사피엔스의 기원지가 유럽이 아닌 아프리카라는 가설이 상당한 지지를 받게 된 계기는 인류학자 리베카 칸Rebecca Cann과 동료들이 내놓은 1987년의 논문입니다. 이 논문에서 현생인류 147명의 미토콘드리아 유전자를 조사한 결과, 아프리카 사람들의 유전적 다양성이 가장 컸고 다른 대륙 사람들의 유전적 다양성은 아프리카 사람들에 비해 작았습니다. 유전적 다양성은 유전적 변이로 이루어집니다. 그런데 선택의 영향을 받지 않는 중립적인 유전자 변이는 무작위적으로 발생하기 때문에 계통이 오래될수록 유전적 변이가 많이 쌓이면서 유전적 다양성이 증가합니다. 이렇게 유전자 변이를 통해 시간을 유추하는 방법은 분자시계라고 불립니다. 유전적 다양성이 크다는 이야기는 오래되었다는뜻입니다. 따라서 현생 인류의 기원점은 유전적 다양성이 가장 큰 아프리카라는 결론이 나옵니다. 그렇지만 전반적으로 현생인류의 다양성은 그렇게 크지 않았습니다. 호모 사피엔스는 그다지 오래된 계통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호모 사피엔스의 역사가 짧고 아프리카에서 기원했다는 결론은 충격적이었습니다. 호모 사피엔스 기원 논쟁의 중심이 네안데르탈인의 유럽에서 아직 화석 자료가 많지 않은 아프리카로 옮겨지게 되었습니다. 고인류학 역사에 큰 획을 그은 이 논문을 계기로 미토콘드리아 유전자 분석을 이용한 시간 여행은 1990년대에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습니다. 고인류 화석 외에 유전자가 고인류학의 주요 자료로 대두되었습니다. - P168

그런데 현생인류가 복수의 기원점과 복수의 조상 집단을 가지고 있다는 가설을 의외로 많은 자료가 뒷받침하고 있습니다. 20만 년 전 남아프리카 오카방고에 살던 고인류가 우리의 조상이 아니라는 뜻은 아닙니다. 우리의 조상입니다. 30만 년 전 서아프리카에 살던 고인류도 그리고10만 년 전 북아프리카에 살던 고인류도 우리의 조상입니다. 40만 년전 유럽에서 살던 네안데르탈인 역시 우리의 조상입니다. 우리의 기원은 하나가 아닙니다.
유전자 계통수를 통해 추정되는 유전자의 기원점은 개체가 이루는 집단의 조상과 같지 않습니다. 사람의 미토콘드리아 DNA의 기원은 16만 년 전이지만 핵 DNA 유전자의 기원점은 100만 년 전에서 500만년 전까지 다양하게 분포되어 있습니다. 30억 개의 염기서열로 이루어진 유전체 중에서 일부를 분석하는 방법은 전장 유전체(게놈)를 분석하는 방법으로 혁명적인 전환을 이루었습니다. 부분적인 데이터를 분석하는 것만으로는 전체를 파악할 수 없습니다. 유전자에 따라 기원점이다를 수 있기 때문입니다. - P173

현생인류의 기원에 대한 논쟁은 현생인류가 호모 사피엔스라는로서 어떻게 시작되었는지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호모 사피엔스가 아프리카에서 새로운 종으로 기원하여 전세계로 확산했다면, 전세계에서 살고 있던 기존의 고인류 집단과는 서로 다른 종이기 때문에 유전자를 교환할 수 없었다는 것이 중요한 포인트입니다. 따라서 호모 사피엔스와 네안데르탈인이 서로 다른 종인지의 여부는 호모 사피엔스의 기원과 상관해서 중요한 화두였으며, 둘 사이에 유전적인 교환이 가능했느냐의 여부로 이어졌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2010년에 발표된 네안데르탈인의 유전체 판독 연구에서 네안데르탈인의 유전자가 소량이나마 현생인류의 유전자에 포함되었다는 주장이 충격적이었습니다.
그런데 2010년 이후 새로운 개념이 화두로 등장했습니다. 혼종의 개념입니다. 서로 다른 종끼리 유전자를 교환할 뿐 아니라 그 사이에서 나온 후손은 생식기능이 있다는 것입니다. 혼종이 처음 대두되었을 때만해도 고인류학계에서는 혼종이 지극히 예외적인 경우라고 생각했습니다. ‘식물에서는 흔한 현상‘이라는 이야기가 나오고 ‘양서류에서는 흔한 현상‘이라는 이야기가 나왔지만 고등동물에서는 흔치 않은 일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런데 연구가 거듭되면서 점차 혼종이 ‘가축화과정에서 흔한 현상‘이라는 것이 밝혀지고 급기야는 야생 영장류에서도 나타나는 현상임이 밝혀졌습니다.
혼종의 개념이 부각되면서 이제 좀 단위의 연구에 대해 다시 생각해야 하는 시점에 왔습니다. 두 집단 사이에서 유전자를 교환했다면 서로 같은 종이기 때문인지, 서로 다른 종이지만 혼종에 의해서인지 그 둘을 구별할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그렇게 중요한 문제인지조차 의심스럽습니다. 고인류에게 몇 개의 화석종이 있었는지, 대답할 수 없는 이 문제보다 더 우리의 관심을 끄는 것은 아니 끌어야 하는 것은 과거에 살았던 고인류종이 어떠한 환경에서 어떻게 살았는지의 문제여야할지도 모릅니다.
데니소바인이 호모 알타이엔시스라는 화석종인지, 네안데르탈인이 호모 네안데르탈렌시스라는 화석종인지의 문제는 차라리 21세기에서는 그렇게 중요한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는 지난 17세기부터 동의한 종의 개념을 다시 생각해야 하는 시점에 와 있습니다. 다양한 종이 섞여 하나의 새로운 종을 탄생시킨다는 관점은 하나의 종에서 두 종으로 분화해야만 새로운 종의 탄생으로 인정한다는 입장에 전면적으로 도전합니다. 20세기의 중요한 문제 중 하나였던 호모 사피엔스의 기원이 21세기에서는 사라질지도 모릅니다. - P176

500만 년 전에 시작하여 근 300만 년을 아프리카라는 엄청나게 큰 대륙에서만 살아온 고인류는 200만 년 전 유라시아라는 새로운 대륙으로확산하면서 새로운 환경에 살기 시작했습니다. 적응해 온 환경과 매우 다른 환경에 들어간 동물은 멸종하거나 종 분화를 겪게 됩니다. 그러나 인류는 멸종도 종 분화도 하지 않았습니다. 인류는 이미 200만 년 전에 북위 40도보다 더 북쪽으로 진출했습니다. 4만 년 전에는 티베트 고지대까지 진출했습니다. 깊은 바다에서 어로를 할 수도 있고, 황제 다이어트처럼 동물성 지방과 단백질에 의존한 식생활도 가능합니다.
특정한 환경에 적응하여 특정한 생김새를 가지게 되는 동식물과는달리 사람은 계속 하나의 종에 속한 채 다양한 환경에 적응하는 방식으로 진화해 왔습니다. 인류는 지구의 어떤 환경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제 인류는 어떤 방향으로 나아갈까요? 화성이나 금성으로 이주해서 다른 행성의 환경에 ‘적응‘하는 것 또한 황당무계한 공상은 아닐 것입니다. - P200

교과서에도 등장하고 박물관에서 자주 전시되어 잘 알려진 한국의고인류 ‘흥수 아이‘는 충청북도 청주시의 남쪽에 위치한 두루봉 동굴의일부인 흥수 동굴에서 발견되었습니다. 흥수 아이는 4만 년 전 고인류화석이라고 알려져 있는데, 그렇다면 동아시아에서 보기 드물게 오래된 매장 유구입니다. 하지만 흥수 아이가 구석기 시대의 유골이라는 가설을 뒷받침해 줄 증거 자료는 희박합니다. 흥수 아이의 뼈는 오래된 화석이라고 보기에는 전반적으로 화석화가 많이 진행되지 않았으며 4만년 전이라는 연대를 분명하게 뒷받침해 줄 절대연대 자료가 없습니다.
흥수 아이의 연대를 측정하려는 시도는 여러 차례 있었으나 대부분 실패하고 17~19세기(1630~1893)라는 방사성 탄소 연대가 유일하게 발표되었습니다. 17~19세기라면 조선 시대의 인골이라는 뜻입니다. 또한 흥수 아이는 많은 충치를 가지고 있는데 구석기 시대 고인류에게 충치는 불가능하지는 않지만 드뭅니다. 충치는 농경이 정착된 이후에 급격히 늘어납니다. 흥수 아이가 4만 년 전까지도 올라갈 수 있는,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구석기 시대의 고인류 화석이라는 주장은 아직 학계의 검증을 거치지 않았습니다. 여러 정황상으로 볼 때 흥수 아이는 구석기 시대에 매장된 고인류 화석이라기보다는 농경이 자리를 잡은 이후인 홀로세의 인골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 P210

2015년에는 타이완근해 수십 60~120미터 지점에서 건져 올린 고인류의 턱뼈가 발표되어 학계가 떠들썩했습니다. 지금은 바닷물 밑에 잠겨 있지만 지난 수십만 년 동안 육지였던 서해 바닥에 묻혀 있던 고인류화석을 건져 올릴 수도 있지 않을까요?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를 찾아갔을 때 목포 앞바다에서 발견될 고인류 머리뼈를 상상해 보았습니다.
한국의 해양 고고학이 크게 발전하기를 기대해 봅니다.
데니소바인은 작은 새끼손가락을 이루는 뼈 중에서도 손톱만 한 뼛조각에서 추출한 유전자에서 처음 발견되어 2010년에 논문으로 발표되었습니다. 화석 없이 고인류의 흔적이 남아 있는 흙에서 채취한 유전자로 고인류의 진화를 분석하는 기술도 점점 발전하고 있습니다. 2021년에는 화석 한 점 없이 동굴 바닥에서 채취한 흙에서 추출한 유전자로고인류 십수 개체분에 해당하는 전장유전체를 수집·분석한 놀라운 연구 결과가 발표되었습니다. 한국에서 계속 발견되는 동굴 유적에서 화석이 발견되지 않더라도 토양 분석을 통해 충분히 고인류에 대한 유전자 분석을 시도할 수 있지 않을까요? - P218

한 민족, 한 핏줄이라는 담론은 한 민족이라는 개념이 역사적으로 가장 필요했을 때 때마침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우리가 단군의 피를 이어받은 단일민족이라는 믿음, ‘민족‘이라는 개념이 시작된 것은 1920년대였습니다. 그 전에는 민족이라는 개념이 없었습니다. 정치학자 베네딕트 앤더손Benedict Anderson이 상상의 공동체 Imagined Communities」(1983)라는라는 저서에서 제시한 ‘상상의 공동체‘라는 표현처럼, 민족이라는 개념은 1920년대 당시 식민지 시대를 살고 있던 사람들이 갈구하여 탄생했습니다.
국가가 건설될 때 정치 지도 계층에서는 자민족의 유구성, 독자성, 우수성을 내놓는 경향이 있습니다. 민족의 우수성 담론을 통해 민족적 통합을 이룸으로써 근대 국가로서의 정체성을 세워나가는 것입니다. 한국 근대적인 국민 국가로 건설되던 당시 불행히도 한국은 식민제국주의를 떠나서 생각할 수 없었습니다. 제국주의의 대안은 민족 논리였습니다. 민족 논리는 사회진화론적인 입장에서 전개되었으며, 제국주의 치하에서 단결을 유지하기 위해 활용되었습니다. 만주의 우랄-알타이 Ural-Altai산맥에서 기원한 민족이 한반도로 와서 한족이 되었다는 내용의 민족기원론에 등장하는 민족은 살아서 이동할 수 있는 집단이라는 인상을 줍니다.
민족을 ‘핏줄‘이라는 단어로 표현하기 때문에 생물학적인 개념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민족에게는 객관적으로 검증되어야 하는 별도의 구성 요건이 필요 없습니다. 단지 구성원들이 스스로를 가리켜 하나의 ‘민족‘으로 지칭하면 됩니다. 민족정체성은 그렇게 만들어집니다. - P224

‘한민족‘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한민족‘은 생물학적인 실체가 아닙니다. 누가 한민족에 속하는지는 생물학으로 연결된 조상과 자손의 관계에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수많은 생물학적 조상 중 특정한 사람을조상으로 인정하고 다른 사람은 조상에서 제외하는 사회적 관계에서결정됩니다. 우리는 과학이 실생활과 동떨어진, 객관적인 분야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특히 고인류학과 고고학은 정치 체제와 떨어져 생각할 수 없는 학문입니다. 북한이 ‘한민족의 조상인 단군‘의 존재를 발표한 시점인 1990년대는 체제를 공고히 하고 내부 단결을 도모한 시기이기도 했습니다. ‘조상‘이나 ‘민족‘이라는 개념은 과학적이고 생물학적인 구분이라는 인상을 주지만 그것은 사실 허상일 뿐입니다. 생물학적 개념이라기보다는 사회적, 문화적 개념입니다.
한반도의 고인류를 찾고 연구하는 일은 단일 민족의 기원을 찾는 일이라서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국경이 없던 시절, 바다가 땅이었던 시절에 지금의 한반도에서 살고 있던 고인류는 한민족이 아니라 인류였다는 사실을 다시 살펴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 P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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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낮에 대해서는 잘 기억하지 못한다. 햇빛이 모든 색깔을 퇴색시키며 짓누른다. 밤에 대해서는 잘 기억한다.
밤의 푸른빛은 하늘이 더 멀리 있는 것처럼 느껴지게 한다. 하늘은 세상의 본질을 덮고 있는 모든 불투명함의 저편에, 그 너머에 있었다. 나에게 하늘은 밤의 푸른빛을 가로지르는 순수한 광채와 모든 색깔을 초월한, 차갑게 녹아드는 빛을 떠오르게 한다. 빈롱에서였다. 때때로 슬픔에 잠길 때면 어머니는 이륜마차에 말을 맨 다음 나를 태우고, 건기의 밤하늘을 보러 들판으로 가곤 했다. 그런 밤이면 나는 어머니를 소유하는 행복을 누릴 수 있었다. 하늘에서는 순수하고 투명한 폭포처럼, 침묵과 부동의 물기둥처럼 빛이 쏟아져 내렸다. 대기는 푸르고, 손에 잡힐 듯했다. 푸른빛, 하늘은 그 반짝이는 빛으로 끊임없이 맥박 치고 있었다. 밤이 모든 것을 비추고 있었고, 눈이 닿는 곳까지 강의 양쪽으로 펼쳐진 들판을 온통 비추고 있었다. 밤은 하루하루 새로웠다. 매 순간마다 새로운 밤이라고 할수 있을 정도였다. 밤의 소리는 들개들의 소리였다. 그들은 신비를 향해 짖어 대고 있었다. 그들은 밤이 만들어 낸공간과 시간이 완전히 소멸될 때까지. 이 마을과 저 마을에서 서로 화답하며 짖어 댔다. - P98

 나는 말했다. "내가 원하기만 하면 난 아무 때고 결혼할 수 있어요."어머니는 그렇지 않다는표정을 지었다. 그렇지 않아. 그녀는 말했다. "여기서는 모든 것이 다 알려지고 말아. 여기선 절대로 불가능해."
그녀는 나를 보면서 잊을 수 없는 말을 했다. "그래도 사람들이 너를 좋아해 줄까?" 나는 대답했다. "그럼요. 여하튼 그들은 나를 좋아해요." 그러자 어머니가 했던 그 말.
"네가 그런 아이이기 때문에 너를 좋아하는 거겠지."
그녀는 또 묻는다. "단지 돈 때문에 그 남자를 만나는거니?" 나는 머뭇거리다 오로지 돈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녀는 또다시 나를 한참 동안 바라본다. 내 말을 믿지 않는눈치다. 그녀는 말한다. "나는 너 같지는 않았어. 나는 너보다는 열심히 공부했어. 나는 아주 진지한 아이였지. 너무 오랫동안, 너무 나이 들도록 그렇게 살다 보니 즐거움을 느끼는 법을 잊고 말았지만." - P111

그녀가 운 것도 배가 첫 번째 작별의 고동을 올렸을 때였다. 배의 트랩이 올려지고 예인선이 배를 끌어당겨서.
배가 육지로부터 멀어지기 시작한 그때였다. 그녀는 눈물을 보이지 않고 울었다. 그가 중국인이기 때문이었고, 또이런 종류의 연인들은 눈물을 흘려선 안 되기 때문이었다.
엄마와 작은오빠의 눈에 띄지 않게 그녀는 괴로워했다. 그들 사이의 습관대로 아무런 내색도 하지 않았다. 그의 큰 승용차가 거기 있었다. 길고 걷은 승용차. 그 앞자리에는 흰옷을 입은 운전기사가 앉아 있었다. 그 승용차는 해운회사의 주차장에서 약간 떨어진 곳에 홀로 서 있었다. 그 모습 때문에 그녀는 그의 승용차를 알아볼 수 있었다. 뒷자리에 보일 듯 말 듯 앉아 있는 게 바로 그였다. 그는 아무런 미동도 없이 풀 죽어 있었다. 그녀는 맨 처음 배에탔을 때처럼 난간에 팔을 괴었다. 그가 그녀를 바라보고있다는 것을 그녀는 알고 있었다. 그녀도 그를 바라보았다. 더 이상 그가 보이진 않았지만, 그녀는 여전히 검은 승용차를 바라보았다. 마침내 승용차도 보이지 않게 되었다. 항구가 시야에서 사라졌고, 곧이어 육지도 사라졌다. - P131

그녀의 기억 속에서 수많은 밤과 밤 사이에 흐릿해져 버린 그날 밤에 대해, 갑자기 그녀는 확신이 들었다. 한 어린 소녀가 그 배 위에서 밤을보냈다는 사실을. 그리고 그 순간, 별이 반짝이는 밤하늘아래 쇼팽의 음악이 큰 소리로 울려 퍼졌을 때, 그녀는 거기에 있었다. 바람 한 점 없었다. 음악은 어두운 여객선 구석구석까지 퍼져 나갔다. 무엇과 관계가 있는지 알 수없는 하늘의 지시처럼, 뜻을 알 수 없는 신의 명령처럼,
그 음악은 울려 퍼졌다. 소녀는 일어섰다. 마치 이번에는 자기가 달려가 자살하려는 것처럼, 바다에 몸을 던지려는것처럼. 그리고 그녀는 울음을 터뜨렸다. 콜랑의 그 남자가 생각났기 때문이다. 그녀는 불현듯 예전에 자신이 콜랑의 남자에 대해 가졌던 감정이 스스로도 미처 깨닫지 못했던 이런 종류의 사랑이었는지 확신할 수 없음을 알았다.
이제 그는 모래 속에 스며든 물처럼 이야기 속으로 사라져버렸고, 이제야,쇼팽의 음악이 큰 소리로 퍼지는 지금 이순간이 되어서야 겨우 다시 기억해 냈기 때문이다.

작은오빠가 죽은 후에야 그의 불멸을 기억해 냈듯이. - P133

전쟁이 끝나고 몇 해가 흘렀다. 몇 번의 결혼과 몇 번의 이혼에서 아이들을 낳고 몇 권의 책을 펴냈을 즈음이었다.
그가 부인과 함께 파리에 왔다. 그는 그녀에게 전화를 걸었다. 나요. 그녀는 목소리에서 이미 그인 줄 알았다. 그는 말했다. "그냥 당신 목소리가 듣고 싶었소." 그녀가 말했다. "나예요. 안녕하세요." 그는 겁을 먹고 있었다. 예전처럼 두려워하고 있었다. 갑자기 그의 목소리가 떨렸다.
그 떨리는 음성 속에서 갑자기 그녀는 잊고 있던 중국억양을 기억해 냈다. 그는 그녀가 책을 쓰기 시작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사이공에서 다시 만난 어머니를 통해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작은오빠에 대해서도 알고있었다. 그는 그녀를 생각하며 슬퍼했다고 말했다. 그러고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했다. 그는 잠깐 뜸을 들인후 이렇게 말했다. 그의 사랑은 예전과 똑같다고. 그는 아직도 그녀를 사랑하고 있으며, 결코 이 사랑을 멈출 수 없을 거라고, 죽는 순간까지 그녀만을 사랑할 거라고.

파리 노플르샤토에서1984년 2월~5월 - P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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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라게르시 동굴에서 보인 식인 행위의 흔적에 대해서는 지난 20년동안 논쟁이 이어졌습니다. 물라 게르시 동굴의 네안데르탈인 화석에서 보인 뼈 손질 흔적은 크라피나 네안데르탈인에게서 보이는 흔적과달랐기 때문입니다. 물라 게르시에서는 사람의 치아 흔적이 분명하게나 있는 손가락뼈도 발견되었습니다. 장례 의식이라고 볼 수 없다는 주장과 장례 의식이라는 주장이 팽팽히 맞섰습니다. 20세기 전반에 고인류의 식인 행위가 당연하게 받아들였던 것과 대조적으로 20세기 후반에는 고인류의 식인 행위가 인정받기 어려웠습니다.
이 논쟁 속에서 네안데르탈인의 식인 행위에 대한 배경을 밝혀낸 것이 고기후 연구입니다. 12만 년 전 남프랑스의 기후를 연구하면서 네안데르탈인에게 닥친 큰 시련이 알려졌습니다. 잘 알려졌듯이 네안데르탈인은 수만 년 동안 빙하시대를 성공적으로 산 사람들입니다. 이들은눈 덮인 계곡에서도 매머드나 순록처럼 큰 몸집의 동물을 사냥할 수 있었습니다. 빙하시대에 몸집이 큰 동물을 사냥하기 위해서는 큰 몸집이필요합니다. 네안데르탈인은 다부진 근육질 몸을 가지고 있었으며, 이를 지탱하기 위해 하루 평균 3,000~5,000칼로리 정도를 먹어야 했던것으로 추정됩니다. 3,000~5,000칼로리는 프로 운동선수의 하루 필요열량과 맞먹습니다.
이렇게 성공적으로 수렵 적응을 해오던 네안데르탈인에게 큰 시련이닥친 것은 13만 년 전 기온이 잠깐 상승했던 무렵입니다. 이때 평균 기온은 현재보다도 섭씨 2도가량 높았습니다. 기온이 따뜻해졌는데 어째서 시련이 되었을까요? 광활한 초원 지대는 눈 깜짝할 새에 우거진 숲으로 변했습니다. 나무가 빽빽하게 들어찬 숲은 매머드같이 거대한 몸집의 동물보다는 토끼같이 작고 빠른 동물에게 유리했습니다. 네안데르탈인에게 고기를 제공했던 몸집 큰 동물들은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매머드 대신 토끼로는 턱없이 부족했을 것입니다.
네안데르탈인은 굶주림에 시달리게 되었습니다. 물라 게르시의 네안데르탈인 화석의 치아에는 성장기에 영양부족을 겪은 흔적이 보입니다. 굶주림 끝에 네안데르탈인이 선택한 방법은 같은 네안데르탈인을 먹는 일이었을지도 모릅니다.  - P124

빙하기는 유례없는 어려움을 가져왔습니다. 그 빙하기를 살아남지못한 고인류 집단도 많습니다. 네안데르탈인이 호모 사피엔스에게 정복당했다는 주장도, 네안데르탈인의 인구가 줄어들어서 현생인류에 비해 수적으로 열세였기 때문에 절멸했다는 주장도 있지만 네안데르탈인의 인구가 줄어든 이유에는 열악한 환경이 있을 것입니다. 네안데르탈인의 출생률 저하로 절멸했다는 것도 어떤 면에서는 열악한 환경의 결과입니다. 출생률의 저하에는 환경이 큰 영향을 주기 때문입니다. 네안데르탈인뿐만이 아닙니다. 에티오피아의 헤르토Herto 에서는 20만 년전 최초의 호모 사피엔스로 알려진 고인류 화석이 발견되었습니다. 이들에게는 머리뼈에 섬세한 칼자국이 나 있습니다. 단지 머리뼈 속의 두뇌를 먹기 위해서뿐만 아니라 머리뼈를 바가지 모양으로 다듬어 냈다고밖에 볼 수 없는 칼자국입니다. 돌칼로 다듬은 흔적은 어른의 머리뼈에서도, 아이의 머리뼈에서도 보였습니다.
식인의 흔적에서는 다른 사람을 죽여서 신나게 먹는 희희낙락한 모습이 아니라 이것을 먹지 않으면 굶어 죽게 되는 극한적인 상황에서 절박한 마음으로 먹는 비장한 모습이 보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해서라도 살아남았던 그들이 우리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 P126

량부아가 특별한 병을 앓고 있던 호모 사피엔스가 아니라 호모 플로레시엔시스라는 새로운 종의 일원이라고 주장하는 학자들은 섬 왜소화현상island dwarfism으로 머리와 몸집이 작아졌다는 가설을 세웠습니다.
인도네시아에서는 거의 200만 년 전부터 고인류의 흔적이 발견되었습니다. 자바인이 대표적인 예입니다. 인도네시아에 살던 호모 에렉투스중 한 집단이 섬에 갇히게 되면서 섬 왜소화 현상으로 인해 몸과 머리가 작아졌고 6만 년 전의 작아진 모습의 새로운 종으로 진화했다는 가설을 세웠습니다. 섬이라는 특수한 환경에서는 섬 왜소화로 몸집이 작아진 코끼리가 발견되는 한편 섬 비대화로 몸집이 커진 쥐도 발견됩니다. 포식자가 없어진 환경에서 몸집이 커지는 종이 있는가 하면 어떤 좋은 먹을 것이 줄어들어서 몸집이 작아지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인도네시아 곳곳에서 살던 호모 에렉투스 중 일부가 플로레스섬에 고립되어 섬 왜소화로 머리와 몸집이 작아진 새로운 화석종 호모 플로레시엔시스가 되었다면 그 시기는 공교롭게도 인도네시아 수마트라sumatra 의 토바Toba 화산이 폭발한 시기와 맞물리게 됩니다. 7만5,000년 전에 일어난 토바 화산의 폭발은 인도네시아와 동남아시아뿐만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 P131

작은 몸집과 작은 머리의 고인류는 우리가 여태껏 생각해 왔던 인류의 다양성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끔 합니다. 작은 머리로 석기를 만들어쓰고 죽은 사람을 매장하고, 벽화를 그릴 수 있을까요? 이 질문에 대한20세기의 답은 결단코 ‘아니요‘였습니다. 고인류학계 대부분이 받아들인 정설에 따르면 벽화와 같이 고도의 인지 능력이 있어야 하는 행위는호모 사피엔스의 특유하고 독특한 행위였기 때문에 당연히 ‘호모 사피엔스급의 몸과 머리‘를 가지고 있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머리가 커야만 가능하다고 생각되던 추상적 사고,
창의력, 복잡한 도구의 제작, 예술 등이 작은 머리로도 가능하다면 도대체큰 머리의 역할은 무엇일까요? 머리가 커야만 가능하다고 생각되던일이 작은 머리로도 가능하다는 발견은 새로운 질문을 만듭니다. 인류의 큰 머리가 생물학적으로 특별한 것은 분명합니다. 맹장처럼 이전 기능을 상실하고 이제는 있으나마나 한 존재라고 하기에는 큰 머리가 너무 대단합니다. 사람처럼 큰 머리를 만들기는 쉽지 않습니다. 큰 머리를 만들고 유지하려면 엄청난 양의 에너지가 필요합니다. 그런데 인류의 머리가 커지는 것은 수백만 년 동안 지속된 경향 중 하나입니다. 그동안 환경은 점점 척박해져 갔습니다. 큰 머리를 만드는 데 들어가는 엄청난 양의 에너지를 빙하기의 척박한 환경에서 확보해야 했습니다. 큰머리를 가지고 있는 아기를 출산하는 과정은 지극히 힘들며, 목숨까지 걸어야 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큰 머리를 돌리기 위해서는 엄청난 에너지를 써야 합니다. 큰 머리는 심지어 쉬고 있는 동안에도 기초대사량의 상당 부분을 차지합니다. 이렇게 제작비와 유지비가 엄청난 비싼 장기를 빙하기라는 힘든 환경에서 계속 유지할 만큼 중요한 두뇌는 어떤기능을 했을까요? 도구를 만들고 예술 활동을 하고 고도의 인지 기능을수행하기 위해 큰 머리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면, 큰 머리는 어떤 기능을하는 것일까요? - P137

심리학자 로빈 던바Robin Dunbar는 사회적 두뇌 가설을 주장합니다. 사회적인 동물일수록 머리가 크다는 내용입니다. 사람의 머리는 부피가를 뿐만 아니라 그 안을 채우는 뇌세포가 쭈글쭈글한 주름을 이루면서 표면적을 최대한 늘렸습니다. 지극히 사회적인 동물인 사람이 서로에 대한 정보와 서로 맺고 있는 관계에 대한 정보를 저장하고 꺼내 쓰는 장기로서 큰 두뇌가 진화했다는 가설은 상당한 설득력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두뇌가 작은 고인류 집단은 복잡한 사회연결망이 없었다는 뜻일지도 모릅니다.
사람의 큰 두뇌를 생물학적으로 연구하는 시도는 계속되고 있습니다. 사람 두뇌와 다른 동물 두뇌를 비교하여 사람에게만 존재하는 조직, 단백질, 유전자를 찾는 노력은 계속되고 있습니다. 언젠가는 큰 두뇌도 설명되기를 기대해 봅니다.
우리는 지금 큰 머리와 지혜, 문화를 하나로 묶어 생각해 왔던 관념이 해체되는 시점에 서 있습니다. 사람다운 지혜와 문화를 만들어 낸 사람다운 머리는 큰 머리가 아니라 독특한 구조를 가지고 있는 머리라는 가설이 힘을 받고 있습니다. 우리는 다양성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하지만 막상 다양한 인류를 받아들일 준비는 되어 있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 P139

그런데 스페인, 이탈리아 등 남유럽까지 확산된 지역에서 발견되는 네안데르탈인 화석은 네안데르탈인의 다양한 모습을 보여줍니다. 남유럽에서 발견된 네안데르탈인은 육식만 한 것이 아니라 채식도 충분히했다는 점이 밝혀졌습니다. 어떤 경우에는 동물성 먹거리를 거의 섭취하지 않았을 정도입니다. 이 사실을 알아낸 과정도 재미있습니다. 통상적으로 인골을 발굴하면 깨끗하게 손질한 후에 분석하게 됩니다. 물론치아도 포함됩니다. 1990년대까지만 해도 치아를 깨끗하게 닦아서 손질했습니다. 치석도 당연히 닦아냈습니다. 칫솔을 사용해서 깨끗하게 솔질한 다음 드러난 치아의 모양을 관찰한 것이지요. 그런데 그렇게 닦아낸 치석에 중요한 단서가 있었습니다. 보다 정확하게 이야기하면, 치석에서 정보를 추출할 수 있는 방법이 그동안 개발된 것입니다. 고인류학 연구자층이 넓어지면서 이전에는 버렸던(?) 자료에서 중요한 정보를 추출하기 시작했습니다. 치석도 그중 하나로 중요한 자료를 제공하게되었습니다.
스페인의 엘 시드론 동굴에서 발견된 네안데르탈인의 치석을 분석한 결과 의외의 사실이 밝혀졌습니다. 치석에 있는 자료를 분석해 보니 버섯, 잣, 이끼 등 다양한 식물성 먹거리의 DNA가 발견된 것입니다. 물론 동물성 위주의 식생활을 했던 네안데르탈인의 치석 자료도 풍부합니다. 벨기에의 스피 네안데르탈인의 치석을 분석한 결과 이들이 예상대로 동물성 단백질 위주의 식생활을 했다는 것이 확인되었습니다.
그러면 같은 유럽에서 살면서도 스피 네안데르탈인은 동물성 식생활을, 엘시드론 네안데르탈인은 식물성 식생활을 했다는 것으로 단순하게 결론을 내리면 될까요? 그보다는 각 네안데르탈인 집단의 구성원이 모두 똑같은 식생활을 하지는 않았다는 결론에 더 설득력이 있습니다.
스페인의 엘살트El Salt 동굴에 남겨진 네안데르탈인의 똥 화석을 분석한 결과 어떤 네안데르탈인은 채식 위주로, 어떤 네안데르탈인은 육식위주로 먹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적어도 그날 하루만큼은) 같은 집단에 속한 네안데르탈인이라도 서로 다른 식생활을 했을 가능성이 충분하다는 것은 이들이 먹거리에 서로 다른 취향 내지는 다양성을 가지고 있었을 가능성을 시사합니다. - P149

네안데르탈인의 두뇌 용량은 현생인류보다 큽니다. 두뇌 용량의 증가는 물론 인류 진화 전반적으로 보이는 특징입니다. 그리고 큰 두뇌 용량은 일반적으로 우수한 인지 능력과 연관됩니다. 그렇지만 네안데르탈인의 두뇌 용량이 크다고 해서 현생인류보다 더 똑똑하다는 결론을내럴 수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네안데르탈인의 큰 두뇌는 달리 해석되었습니다. 두뇌 용량은 크지만 두뇌 세포가 현생인류처럼 촘촘하고 빼곡하게 배열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막상 인지 능력은 현생인류보다 못하다는 해석이 대두되었습니다. 큰 두뇌 용량은 추운 지방에서 살기 위한 적응이라는 해석도 나왔습니다. 또한 발견된 네안데르탈인이 주로(평균적으로 몸집과 머리가 큰 남자이었기 때문에 두뇌 용량이 큰 것으로 관찰된다고 해석하기도 합니다. 모두 하나하나 설득력이 있고 가능성이없지는 않은 해석입니다. 문제는 이러한 설명이 네안데르탈인이 현생인류보다 못하다‘는 전제를 결론으로 받아들인 다음에 제시되었다는것입니다.
네안데르탈인이 뒤떨어진 인지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가정은 많은연구에 의해 도전받고 있습니다. 네안데르탈인은 벽화를 그렸습니다. 맹금류를 사냥하여 발톱으로 장신구를 만들어 몸에 걸쳤습니다. 죽음을 슬퍼하고 죽은 이를 위해 장례를 치렀습니다. 꽃잎을 뿌리면서 죽은이를 애도했습니다. 사슴 발가락뼈에 기하학적인 문양을 새겼습니다. 이 모두가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네안데르탈인은 할 수 없고 현생인류만 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행위입니다. - P151

이들의 유전자 정보는 이들의 삶을 엿볼 수 있게 해줍니다. 무엇보다유전적인 다양성이 낮았습니다. 전 세계를 아우르고 있는 현생인류보다는 멸종 위기에 부닥친 고릴라의 유전자와 엇비슷한 정도의 다양성이었습니다. 그렇지만 10~20명으로 이루어진 집단 안에서도 서로 다른 길을 걷고 있는 사람들을 발견했습니다. 예를 들어 Y염색체보다 미토콘드리아 유전자에서 보이는 다양성이 컸습니다. 남자들보다 여자들이 다양한 곳에서 왔다는 뜻입니다. 남자들보다 여자들이 이동했다는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근처에서 2만 년 전까지도 살고 있던 데니소바인보다는, 비슷한 시기에 유럽 반대쪽에서 살고 있던 네안데르탈인과 더 비슷했습니다. 이제 네안데르탈인에 대한 연구는 대표적인 머리뼈 몇 개를 놓고 또 다른 고인류 화석종과 비교하는 차원에서 한 걸음 나아가 하나의 집단을 이루는 개개인에 대한 연구로 발전하고 있습니다.
네안데르탈인에 대한 연구가 점점 진행되면서 우리가 바라보는 네안데르탈인의 모습도 그에 따라 변화해 왔습니다. 단순히 이랬다 저랬다하는 게 아니라 단편적으로 해석할 수 없는 다양하고 입체적인 모습을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네안데르탈인은 지극히 ‘사람다운‘ 고인류 종이었습니다. - P153

하지만 충분히 논의되지 않은 중요한 문제가 있습니다. 데니소바인은 과연 존재했을까요? 여태껏 데니소바인에 대해서 열심히 설명하고이제 와서 이게 무슨소리냐고 할 수도 있겠습니다. 데니소바인은 뼈가아닌 유전자로만 존재하는 고인류입니다. 새끼손가락뼈 반 마디와 이빨 몇 점만 가지고 데니소바인이 어떻게 생겼는지 알 수는 없습니다. 뉴스 매체 등에 등장하는 데니소바인의 얼굴은 발견된 얼굴뼈 위에 근육의 추정치를 덧입혀서 과학적으로 추정한 복원 모형이 아니라 오히려 상상도에 가깝습니다. 데니소바인이 실제로 존재했던 인류 집단인지조차 아직 확실하지 않습니다. 같은 유전자를 가지고 있다고 해서 그 개체들이 집단을 이루고 있다고 이야기할 수는 없기 때문이죠. 예를 들어 A형, B형, O형과 같은 혈액형은 분명히 존재합니다. 그리고 각각의 혈액형은 유전자를 바탕으로 합니다. 지역별로 많이 분포하는 혈액형이 다릅니다. 예를 들어 O형은 중남미에 많고 B형은 중앙아시아에 많습니다. 그렇지만 같은 혈액형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집단을 이루지는 않습니다. B형 혈액형을 가진 사람들이 존재하고 특정 지역에서 더 많이 발견되기도 하지만 ‘B형 혈액형인‘ 이라는 집단이 따로 존재하지 않는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유전자가 널리 퍼졌었다고 해서 데니소바인이 널리 퍼졌다는 이야기가 바로 성립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데니소바 유전자‘가 있다고 해서 ‘데니소바인‘이라는 집단이 존재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데니소바인‘이라는 집단이 과연 존재하는지는 아직도 의문으로 남아 있습니다. 유전자가 곧 집단이 아니고 곧 종도 아닙니다. 데니소바인이 네안데르탈인처럼 맨눈으로 구별할 수 있는 형질을 가진 집단인지는 앞으로의 연구로 확인해 나가야 합니다. - P1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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