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자의 섬

1

새 원장이 부임해온 날 밤, 섬에서는 두 사람의 탈출 사고가 있었다.
탈출 사고는 실상 새 원장에 대한 우연찮은 부임 선물이었다.
새 원장은 부임 인사를 하지 않았다. 탈출 사고의 경위부터 조사하기 시작했다. - P15

하지만 상욱은 알고 있었다. 원장이 그처럼 감탄해 마지않는 섬의 조경은 실상 섬 자체의 경관이 아니었다. 조경에 관한 한 아름다운 것은 섬이 아니라, 섬 바깥쪽이었다. 섬에서는 그것을 바라볼 수있을 뿐이었다. 화가가 전해준 소녀의 이야기도 섬 안에 남아 있을때는 아름다울 수가 없었던 것이었다. 그것은 화가와 함께 섬을 떠나 섬 밖에서 비로소 아름다운 이야기가 되고 있다. 좀더 분명한 섬의 모습을 그에게 보게 해주고 싶었다. 사람들을 찾아 이야기를 들는 거나, 부하 직원들로부터 사무적인 보고 따위를 듣고 앉아 있는것보다 그 자신이 직접 섬을 돌아보고 그것을 느끼도록 해주고 싶었다. - P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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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대 국회 최대 현안은 한일 국교정상화였다. 연이은 흉작으로 쌀값이 폭등하고 경상수지 적자가 심각하여 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성공시키기 위해 우리는 일본의 보상과 경제원조가 절실했다. 사실 이 경제개발 계획은 민주당이 전문가 그룹과 함께 만든 시안이었다. 1955년부터 꾸준하게 면밀히 다듬어온 계획이었다. 그러나 발표 사흘 전 5.16 쿠데타가 일어났다. 다행히 군사정권은 이를 적극 활용했다. 한일 양국은 1961년 비밀리에 오히라 마사요시 일본 외무성 장관과 김종필중앙정보부장이 두 차례 만난 후에 1962년 11월 12일 합의를 보았다. 이른바 ‘김-오히라 메모‘라는 것으로 국회에서 폭로되었다. 한국에 대해 무상경제협력 3억 달러, 정부 차관 2억 달러, 상업 차관 1억 달러를 제공한다는내용이었다. 비공식 외교 채널에서 비밀리에 진행된 이 교섭은 우선 그 액수가 굴욕적이었다. 게다가 박 대통령이 일본 육사를 나온 일본군 장교 출신이라는 친일 배경이 의혹을 더해 국민적인 저항을 일으켰다.
1964년 3월 6차 한일회담 본회의를 앞두고 야당과 각계 대표들이 ‘대일굴욕외교반대 범국민투쟁위원회‘를 만들었다. 야당의 강경 선봉은 제1야당인 민정당 윤보선 당수였다. 그는 한일 교섭 즉각 중지를 주장하고 교섭 당사자들을 매국노‘라고 매도했다. 민주당의 박순천 당수와 남편은 온건파를 대표하며 제안했다. "국가적 이익을 확보하면서 일본과 한국의 국교정상화를 적극적으로추진해야 할 때가 왔다. 야당도 무조건 반대만 하지 말고 대안을 내놓자."
그 무렵 미국은 소련, 중국, 북한 등 공산권에 맞설 미국, 일본, 한국의 공동 대응 전략을 구상하고 있었다. 그래서 미국은 우리 정부에 일본과의국교 정상화를 강력하게 요구하고 있던 터였다. 김대중은 무조건 반대만하는 사람‘이라고 낙인을 찍어놓은 박 정권으로서는 무척 의외의 반응에 놀랐다. 이는 우선 야당 내부를 뒤흔들었다. ‘공화당 첩자다‘, ‘돈을 먹었다‘, ‘사쿠라다‘ 등등 펄펄 끓는 반일 민족 감정 앞에서 소수 의견은 두렵고 외로운 것이었다. 지역구로부터는 ‘다음에 출마하지 않을 생각이냐며 거센 압력이 밀려들었다. 나 역시 교회와 친구들 모임에서 온갖 비난을 감수해야 했다. 출강하고 있던 이화여대에도 여기저기서 비난의 소리가 날아들었다. 시아버지께서는 편지를 보내 질책하셨다.
‘전도가 바닷길처럼 양양해야 할 아들이 어쩌자고 일본에 나라 팔아먹는 여당의 앞잡이가 돼가지고 세상 사람들한테 손가락질을 받느냐?
정치 생명이 위태로운 순간이었다. 그러나 그는 소신을 굽히지 않았다. - P82

그는 지역구 의정보고대회나 야당의 여러 집회를 통해 논리적으로 설명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쉽지 않았다. 반일 감정과 민족주의를 자극하는 강경파의 선동에 "일본 정부로부터 1억 3,000만 달러를 선도금으로 챙겼다"라는 야당 김준연 의원의 폭로가 기름을 부었다. 이는 일본 기업들이 제공한 것으로 후에 일부 사실로 밝혀졌다. 공화당은 그동안 정권의 부정부패를 폭로해온 눈엣가시 같은 5선의 김준연 의원 구속 동의안을 임시국회 마지막 날인 4월 21일에 상정했다. 공화당이 절대다수였으므로 상정은 바로통과를 의미했다.
남편은 전날 밤 늦도록 준비를 했다. 의사 진행 발언권을 얻어 한일 국교수립 과정의 잘못된 점과 구속의 부당성 그리고 국정의 문제점을 조목조목 지적했다. 저녁 8시까지 김대중 의원의 발언이 계속되자 이효상 국회의장이 일방적으로 폐회를 선언했다. 결국 구속 동의안은 상정되지 않았다. 이날 원고 없이 5시간 19분 동안 계속된 그의 발언은 여당이 비집고 들어와 발언할 틈을 주지 않았다. 이는 의정 사상 처음으로 있었던 가장 긴 의사 진행 방해 flibuster 발언 기록이다. 이 일로 인해 다음 7대 국회에서는 의사 진행 발언을 30분 이내로 제한하는 국회법을 제정했다. - P84

그러나 정작 우리 정부는 굴욕적인 배상 금액을 허용하고 말았다. 한일회담은 1951년부터 시작된 것이었다. 이승만 정부는 20억 달러를, 장면 정부는 28억 5,000만 달러를 국교정상화의 대가로 일본에 요구한 바 있었다. 36년간 강제로 점령당한 채 혹독한 수탈에 시달린 우리가 유상, 무상을 합해 6억 달러에 합의해준 것은 협상의 수준이 아니었다. 3년간 식민 통치를겪은 필리핀이 무상으로 5억 5,000만 달러를 전쟁 배상금으로 받아낸 것에비하면 엄청난 차이가 있었다. 일본에선 보상이 아니라 ‘독립 축하금‘ 이라고 쾌재를 부른 정말 수치스럽고 의혹이 많은 협상이었다. 이때 남편은 그 액수라면 차라리 보상을 받지 말고 자존심을 지키고, 그 대신 한일 무역수지 불균형을 시정하자고 주장했다. 이로부터 7년이 지난 1972년에 중국은일본과 수교 협상을 하면서 침략과 난징학살에 대한 보상에 인색한 일본의 돈을 아예 거부했다. 중국은 이를 국제사회에 자국의 자존심을 세우고일본의 왜소함을 고발하는 계기로 삼았다. 우리 정부는 정말 터무니없이적은 보상으로 대일청구권, 어업권, 문화재 반환권 등에서 너무 많은 양보를 하고 말았다. 그뿐만 아니라 우리의 한이 서리서리 맺혀 있는 한국인 원폭 피폭자, 강제징용, 종군위안부, 사할린 동포 귀환, 독도 문제 등 어느 것하나 명확하게 처리하지 못했다. 뒤돌아보면 보다 큰 국익 앞에서 야당과의 전략적인 공조가 아쉬웠던 협상이다. - P85

그래도 내가 늦게나마 결혼해서 아들을 낳고, 사위가 국회의원이 된 것도 보고 가셨으니 큰 불효는 아니했다고 스스로 위로하곤 한다. 부모님이 일찍 돌아가시기를 바라는 자식이 있을까. 그런데 나는 숱한 고난을 겪으면서 아버지가 나의 모습을 보시지 않게 된 것을 얼마나 하나님께 감사했는지 모른다. 자식의 마음은 같은가 보다. 남편은 납치, 사형선고, 망명 등혹독한 탄압을 받는 아들을 보지 않고 돌아가신 어머니의 별세에 다음과같이 적고 있다.
"어머니는 그때 돌아가신 게 다행입니다. 늙으신 어머니를 더 이상 슬프게 해드리고 싶지 않기 때문입니다." - P89

상대는 쿠데타 때 지대한 공을 세운 헌병사령관이었다. 게다가 체신부장관이라는 국정 경험을 지닌 육군 소장 출신 김병삼 씨로, 거물급적 공천이었다. 이때 선거운동을 할 수 없는 현직 대통령이 지방 순시라는 명목으로 전국을 돌며 총선에 몰두했다. 그중에서도 한 후보를 위한 대중 지원유세를 한 것은 목포가 유일했다.
"김병삼 후보가 당선되면 목포 경제를 활성화하고 대학도 지어주겠다."
박 대통령의 이 목포역 앞 연설에는 2만여 명의 청중이 모여들었다. 우리 진영은 아연 긴장했다. 박 대통령은 청와대를 목포에 옮겨 온 듯 각료들을 대동하고 재차 방문해 국무회의를 열었다. 장기영 경제기획원 장관이자 부총리는 연일 지역 개발을 겨냥한 장밋빛 청사진을 쏟아냈다. 한반도 서남쪽 끝자락 목포 선거전은 전국적인 관심을 모았으며 역설적으로 김대중의 지명도를 높여주었다. 왜 이토록 대통령이 나서서 필사적으로 김대중을 낙선시키려고 하는가? 우리는 의아했다. 재선에 성공해 느긋해야 할 대통령이 일개 국회의원에게 이토록 집요한 데는 필시 이유가 있을 것이었다.
박 대통령을 명석하고 멀리 보고 생각이 깊은 사람으로 평가하는 그는 상대의 의중을 골똘히 탐색하고 꿰뚫었다.
"3선 개헌을 하려는 의도가 분명해요. 걸림돌이 될 수 있는 나를 미리 제거하려는 겁니다."
여당은 목청 돋우는 강경파보다 합리적이며 대안을 내놓는 김대중이더 껄끄러웠던 것이다. 김대중의 역량을 가장 먼저 정확하게 본 사람은 역시 박정희 대통령이었던 것 같다.
그는 마침내 유세에서 공개적으로 질문을 던졌다.
"3선 개헌 의도가 아닌가?"
대통령은 응수했다.
"나는 헌법을 고쳐서 세 번이나 대통령을 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정치적중상모략이다." - P90

마지막 과제는 밤에 이뤄지는 개표 부정 저지였다. 여기서 막지 못하면모든 것이 허사였다. ‘표를 지켜야 한다. 이심전심이었을까. 개표 장소인 유달국민학교 운동장에는 비가 내리는데도 1만여 명의 시민들이 운집했다. 그 당시의 가장 흔한 수법은 정전을 이용하는 것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개표 도중 전깃불이 나갔다. 가상훈련에서 연습했던 대로 몇 명은 엎드려 가슴으로 표를 끌어안았다. 그리고 준비해 온 플래시를 켜려는 순간 갑자기 대낮같이 환해졌다. 국내외 방송 라이트 등 보도진 카메라 플래시가 일제히 터진 것이다.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었지만 내겐 기적처럼 느껴졌다. 역설적이지만 공화당이 스스로 불러들인 보도진이었다. 운동장에서는 시민들이 성난 합성을 올렸다. 정전은 이후에 두 번 더 있었다. 그러나 부정을 저지르기에는 지켜보는 눈이 너무 많았다. 결과는 6,000여 표 차이로 여유있는 낙승이었다. 후일담이지만 박 대통령이 작전을 지휘했던 김형욱 중앙정보부장을 질책하자 김 부장이 한 말이라고 한다.
"3 • 15부정선거 때 마산을 방불케 하는 심상치 않은 분위기였습니다." - P93

우리는 대구 수성못에서 마지막 유세를 장식했다. 19만여 명이 운집했으니 대구 인구의 10%가 모인 셈이었다. 경찰은 3만 명으로 보고를 했고박 대통령은 "김대중 별거 아니구먼"이라고 반응했다고 전한다. 그러나 김재규 보안사령관이 19만 명이라고 보고하는 바람에 대경실색해 공중촬영사진을 재검토하는 소동이 일어났다고 한다. 전국 어디를 가나 정권 교체를 바라는 국민들의 열망에 초조했던 여당은 새로운 술책, 즉 지역감정 유발을 개발했다. 선봉은 국회의장을 지낸 이효상 공화당 의장으로 경상도지역 연설회 단골 연사였다. 그는 노골적이었다. "쌀 속에 뉘가 섞이면 밥이 안 되는 법이다. 경상도 표에 전라도 지지 표가 섞이는 것은 뉘가섞이는것과 마찬가지다", "신라 1,000년 만에 나타난 박정희 후보를 뽑아서 경상도 정권을 세우자" 등등. 이 발언은 호된 비판을 받았다. 대구 시민들은 매를 들었다. 한 달 후 실시된 국회의원 선거에서 거물을 낙선시키고 야당 후보(신진욱)를 당선시킨 것이다. 지역감정이 뿌리내리기 전의 아름다운 이야기다. 그러나 이는 망국적인 지역감정을 유도하는 불행한 신호탄이었다.
경상도 전역의 후보 벽보 ‘2번 김대중‘ 밑에는 다음과 같은 격문을 붙여 지역감정을 자극했다. ‘호남인이여, 뭉쳐라!‘,  ‘호남 후보에게 몰표를 주자!‘, ‘호남인이여, 럭키 치약을 사지 말자!‘ 영남 유권자를 자극하는 원색적인 흑색선전물은 두말할 나위 없이 정보부의 작품이었다. 지역감정을 조장해 선거에 이용하기 시작한 원년으로서 부끄럽고 통탄할 만한 장면이다. - P108

 광주비행장으로 이동하는 중이었다. 무안쯤에서 마주 오던 트럭이 갑자기 핸들을 꺾고 차선을 넘어 돌진해 ‘이제 죽었구나‘ 싶어 눈을 감았다고한다. 기사가 액셀러레이터를 밟아 차 트렁크 왼쪽 부분이 트럭과 부딪치고치는 논바닥으로 떨어졌다. 두 손을 깍지 끼고 있던 그는 양 손목의 동맥을 다쳤다. 동승자 중 가장 가벼운 부상을 입은 편이었다. 만약 순간적으로기사가 브레이크를 밟았다면 그 자리에서 바로 앞 저수지에 떨어졌을 것이고, 그랬더라면 아마도 물에 빠져 목숨을 잃었을 것이다. 그의 일행이 운 좋게 목숨을 부지한 반면에 뒤따라오던 택시는 트럭과 정면으로 충돌했다. 탑승자 2명이 숨진 큰 사고였다.
돌이켜보면 해방 공간에서 김구, 여운형 등 수많은 지도자가 암살당했다. 그런가 하면 위협적인 정적 조봉암을 공산주의자로 몰아붙여 사법 절차를 통해 합법적으로 사형시킨 이승만 독재 정권의 추억이 아직 생생한 때였다. 나는 몹시 두려웠다. 남편은 박정희 독재정권의 정치적 경쟁자 1호가 아니던가. 더욱이 차적 조회 결과 트럭 회사의 사장은 당선이 확실한 공화당 전국구 8번인 당시 변호사협회 회장의 아들이었다. 등장인물이 화려하고 의문과 추리가 무성할 법도 한 대형 사고였다. 그러나 이 사건은 "졸음운전을 했다"라는 트럭 운전사의 진술에 따라 단순 교통사고로 신속하게 처리되었다. 신문에는 또한 보일 듯 말 듯한 1단 단신으로 보도되었다. 백번 양보해 설령 단순한 교통사고였다 하더라도 이슈조차 안 된 것은 여러모로 정상이 아니었다. - P113

자신의 문패를 주문하다가 문득 내 생각이 났다는 것이다. 남녀가 유별하고 남편을 하늘이라 믿고 따르라고 가르친 그 시대에, 더욱이 시어머니를 모시고 살면서 며느리 문패를 단다는 것은 가히 혁명적인 발상이었다.
그가 쓴 <나의 삶 나의 길>에서 인용한다.

나는 가끔 아내에게 억지를 부리곤 한다. 노처녀를 구제해줬으니 나한테 감사해야 한다고 말이다. 물론 농담이다. 아내가 얼마나 어려운결정을 했는지 잘 알고 있었다. 말 만들기 좋아하는 사람들은 전시용문패라고 했다. 그러나 전시용이 필요 없을 때부터 우린 그렇게 살아왔다. 아내에 대한 감사와 존경의 발로였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막상그렇게 하고 나니 문패를 대할 때마다 아내에 대한 동지 의식이 무럭무럭 자라났다. 미처 생각하지 못한 감정이었다.

감옥에서 보낸 옥중서신의 서두인 ‘존경하고 사랑하는 당신에게‘ 와 함께 이 문패는 우리 부부의 동반자 관계를 설명하는 상징이 되었다. 밖에서는 혹시 김대중의 시대를 앞선 여성관을 여성운동가인 이희호의 영향력으로 볼지 모르지만 결코 그렇지 않다. 나는 어떤 경우에도 남에게 무엇을 강요하는 사람이 아니다. 또한 그럴 능력을 가지고 있지도 않다고 생각한다. 이2개의 문패는 오로지 그가 스스로 깨닫고 판단하고 실천한 것이다.  - P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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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은일, 기록으로는 그 아이가 죽지 않은 채로 살아있었다. 아버지도 어머니도 그 아이도 깊은 수풀 속 어딘가에 남은 조그만 집터처럼 거기 있다는 걸 아무도 모르는 채 방치되어 있던 이름들이 그 서류 한장에 남아있었다. 이순일은 혼인신고로 본인의 이름을 지우고 사망신고로 그들의 이름을 지운 뒤 그 서류를 보았다는 걸잊었다. 이름 위에 반듯하게 그려진 곱표들과 거기 기록된 망자를 잊었다. 망실된 그들의 이름은 이순일의 삶이 끝날 때 비로소 완전한 망이 될 것이다. 이순일이그 문서를 닫은 사람이었다. 이순일은 거기 적힌 이름들이 겪은 일을 누구에게도 넘길 생각이 없었다.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말로든 기록으로든 사람은 무언가를 세상에 남길 수 있고, 남기는 데 성공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이순일은 알고 있었지만 그것을 하고 싶지 않았다. 그 숱하고 징그러운 이야기를•••••• 그것을 내가 다시 생각하며 말해야 하는가. 이순일은 아이들이 한영진과 한세진과 한만수가 그 일을 이야기로도 겪지 않기를바랐다. - P132

어른이 되는 과정이란 땅에 떨어진 것을 주워 먹는 일인지도 모르겠다고 하미영은 말했다. 이미 떨어져 더러워진 것들 중에 그래도 먹을 만한 걸 골라 오물을 털어내고 입에 넣는 일, 어쨌든 그것 가운데 그래도 각자가 보기에 좀 나아 보이는 것을 먹는 일, 그게 어른의 일인지도 모르겠어. 그건 말하자면, 잊는 것일까.  - P146

나는 생각해.
양갈보, 양색시.
노먼은 그 말을 한 사람들을 용서할 수가 없어서 그들이 사용하는 말 자체를 용서하지 않기로 한 거야. 안나를 고립시키고 무시하고 경멸한 그들과, 그들의 언어를. 하지만 나는 그것이 아주 강한 동조였다고 생각해. 안나를 양갈보라고 부른 그 사람들과 말이야. 그는 안나의 언어를, 자기 모어를 경멸 속에 내버려둔 거야. - P177

「다가오는 것들」에서 유일하게 로맨스를 경험하는 사람은 나탈리의 남편이었던 하인츠로 그는 영화 초반에 새로운 사랑을 만났다며 나탈리와의 결혼생활을 끝내고 자기 짐을 챙겨 나간다. 공유하던 책들까지 그가 멋대로가져간 것을 알고 나탈리는 분노한다. 하지만 나탈리는 바쁘지. 나탈리는 바빠. 영화 후반에 하인츠가 만찬을 준비하는 나탈리의 부엌에 나타날 때에도 나탈리는 바쁘다. 나탈리는 너무 바빠서 하인츠를 용서한 것처럼도 보이지만 하인츠가 외로움을 호소하며 만찬 자리에 자기도 앉기를 바라자 질색하며 거절한다.
미아 한센뢰베는 「다가오는 것들」에서 로맨스와 화해에 관한 기대를, 그것을 기대하는 사람들을 적절하게 실망시키는데, 그게 정말 좋다고 하미영은 말했다.

하미영이 옳다고 한세진은 생각했다.
그렇게 하지 않아도 삶은 지나간다 바쁘게.
나탈리는 바쁘게.
울고 실망하고 환멸하고 분노하면서, 다시 말해 사랑하면서.
그것이 나탈리를 향해 다가오니까.

가사오니까, 하고 하미영은 말했다. - P1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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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일은 위로 더 올라가보고 싶어했는데 무릎 상태가 좋지 않아 억새를 바라보며 서성이기만 했다. 김원상이 이순일에게 등을 내밀었고 이순일이 그 등에 업혔다. 그 순간을 한영진은 보았다. 찰나에 일어난 일이었고 조금만 더 늦게 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면 보지 못했을 광경이었다.
저 사람은 참 크고, 우리 엄마는 참 작구나. 작은 충격 속에서 그들을 보며 한영진은 생각했다. 김원상이 이순일을 업은 채 오름을 오르기 시작했다. 김원상은 그런 걸아무렇지도 않게 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의식하지도 과시하지도 않은 채 그런 걸 할 수 있는 사람.
실망스럽고 두려운 순간도 더러 있었지만 한영진은 김원상에게 특별한 악의가 있다고 믿지는 않았다. 그는 그냥••••••  그 사람은 그냥, 생각을 덜 하는 것뿐이라고 한영진은 믿었다. 한영진이 생각하기에 생각이란 안간힘같은 것이었다. 어떤 생각이 든다고 그 생각을 말이나 행동으로 행하는 것이 아니고 버텨보는 것. 말하고 싶고 하고 싶다고 바로 말하거나 하지 않고 버텨보는 것. 그는 그것을 덜 할 뿐이었고 그게 평범한 사람들이 하는 일이었다. 평범한 사람들이 매일 하는 일. - P70

새벽에 간호사가 혼곤히 잠든한영진을 깨워 수유실로 들여보낸 뒤 가슴에 아기를 안길 때마다 모멸감을 느꼈다. 한영진은 그 아기가 낯설었다. 바뀐 것 아니냐고 다른 사람의 아기가 아니냐고 간호사들에게 소리를 지르고 싶었다. 아기가 젖꼭지를 제대로 물지 못해 빨갛게 질려 울어대고 그게 산모의 문제인 것처럼 간호사들이 한마디씩 충고할 때마다 한영진은 좌절했고 다시 분노했으며 죄책감을 느꼈다. 모든게 끔찍했는데 그중에 아기가, 품에 안은 아기가 가장 끔찍했다. 그 맹목성, 연약함, 끈질김 같은 것들이 내 삶을 독차지하려고 나타나 당장 다 내놓으라고 요구하는 타인. 한영진은 자기가 그렇게 느낀다는 걸, 그렇게 생각한다는 걸 티 내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썼다.  - P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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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보선 후보는 박정희 후보의 남로당 전력을 폭로하는 색깔론을 들고 나와 오히려 역효과를 내고 분패했다. 1948년 여순반란사건 때 남로당 군사총책으로 군법회의에서 무기징역을 선고받은 박정희 씨는 군의 남로당 조직원 정보를 제공하고 가까스로 살아남아 6·25가 터지자 현역으로 복귀한 사람이었다. 당시는 좌우의 대립으로 많은 피를 흘리고 그 상처가 아직 아물지 않은 때였다. 다시 상처를 헤집는 것을 두려워한 국민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한 처사였다. 그 후 오로지 반공의 화신처럼 되어 무고한 사람들을공산주의자로 조작한 악행을 서슴지 않게 된 박 대통령이야말로 자신의 전력에 대한 콤플렉스가 작용했다는 것이 연구자들의 정설이다. 당시 박정희씨의 반론이다.
"매카시즘이란 프라이팬에 달달 볶아서 새빨간 빨갱이를 만들려는 수법이다."
이렇게 강변했던 그가 유신 통치 이후 수많은 조작 간첩을 양산하고 공산주의자임을 부인하는 무고한 사람들을 관제 용공분자로 만들어 희생시키고 공포 분위기를 조성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는다. - P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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