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회해산으로 남편은 의원직을 상실했고 권노갑 비서는 실직했다. 나는 비서진을 불러 몸조심을 당부하고 생활비를 조금씩 나눴다. 엄영달, 김옥두, 방대엽, 이수동, 이윤수 그리고 내외문제연구소 한화갑 전문위원 등 7명이었다. 남편과 가까운 신민당 소장파 김상현, 조윤형, 김녹영, 김한수, 김경인, 박영록, 조연하 의원 등 11명은 영장도 없이 잡혀갔다. 그들의 비서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로부터 한 열흘 지났을까. 새벽에 일어나 기도를 하고 있는데 김옥두비서가 감시를 뚫고 담을 넘어 숨어들어 왔다. 모습이 말이 아니었다. "그동안 어디 있었어요? 다른 사람들은요?" "정보부에서 일주일 동안 혹독한 고문을 받고 방금 나왔습니다. 사모님, 조길환이 고문에 못 이겨 우리를 도운 경제인들 이름을 불었습니다. 알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70대 노인까지도 발가벗겨 몽둥이로 때리고 잠을 안 재우고 코로 물을 들이붓는 등 갖가지 고문을 했다. 그는 바로 아세아자동차 이문환 회장으로, 위험을 무릅쓰고 나를 친정아버지처럼 보살펴주셨던 어른이다. 패션디자이너 이광희 씨의 큰아버지이기도 하다. 치가 떨리는 이 고문 사실을 나는 한참 후에야 알았다. 잡혀간 측근들이 심한 고문의 후유증으로 움직이지 못하고 치료를 받고 있다는 소식을 들을 때마다 나는 정말이지 미칠것만 같았다. 아무런 도움도 줄 수 없는 처지임을 탄식했다. 차라리 그들 대신 남편이나 내가 끌려갔더라면 ••••••. 집은 적막강산이었다. 화를 입을까 두려워 아무도 접근할 엄두조차 낼수 없었다. 설령 오더라도 외부인 출입은 완전히 차단되었다. 나 역시 연행을 각오한 터라 초인종이 울릴 때마다 기도하며 가슴을 진정시켰다. 당당하게 잡혀갈 수 있도록 제게 용기를 주세요. - P127
인적이 끊어진 동교동에 어느 날 외신 기자 두 사람이 조심스럽게 찾아왔다. 미국 CBS방송 한영도 기자와 일본 RKB마이니치방송 미요시 특파원이었다. 그들은 남편의 소식을 가져왔고, 이후의 비밀 메신저를 자원했다. 집에 다시 오기 어려우니 공중전화를 이용하기로 하고 ‘스미요시‘라는 가명을 쓰기로 했다. 나는 몇 차례 조용한 경양식 집을 이용했다. 밤에는 남산 야외음악당에서 만나 그들의 차로 바꿔 탔다. 그리고 당시 개발되지 않았던 강남의 빈 들판으로 가기도 했다. 남편의 근황을 듣고 편지를 교환하고 국내외 정보를 들었다. 캄캄한 밤 허허벌판에 차를 세워놓고 헤드라이트를 끄고 그러고도 소곤소곤하는 것이 마치 007 첩보영화같았다. 남편 소식을 듣고 난 후 안도감으로 눈을 들어 밤하늘을 올려다보면 하늘의별들이 쏟아부어 놓은 듯이 반짝였다. 그즈음 그들은 단절된 바깥세상과 통하는 유일한 길이었다. 남편과 나는 오직 그 외로운 연결 고리를 통해 숨을 나누고 희망을 주고받았다. 그분들이 아니었다면 우리는 서로에 대한염려로 얼마나 더 힘든 시간을 보냈을까. 그 고마움을 평생 잊지 못한다. - P130
남편은 일본에서 성명을 내고 언론에 인터뷰와 기고를 하고 강연을 하는등 반유신 활동을 왕성하게 했다. 그는 7월 6일 워싱턴에서 한민통(한국민주회복통일촉진국민회의) 미국 본부를 결성하고 7월 10일 일본 지부를 만들기 위해 일본으로 갔다. 이에 앞서 박 대통령이 6월 평화통일외교정책‘ 에 관한 특별 성명(6.23 선언)으로 북한의 국제기구 가입을 더 나아가 북한과 유엔 동시 가입도 반대하지 않는다는 유화적인 제스처를 보여 통일에대한 논의가 좀 자유로워졌을 때다. 남편은 혹시 내가 염려할까 봐 ‘한민통‘을 하면서 두 가지를 확실히 한다는 자세한 편지를 보냈다. "대한민국 절대 지지‘와 ‘선 민주 회복 후 통일 실현‘이었다. 일부에서는 망명정부를세우자, 통일운동을 우선하자는 의견이 있었다. 그러나 그는 ‘대한민국 절대 지지와 유신 정권 반대‘와 ‘민주화를 이룬 후 국민적인 합의 후 통일 운동을 해야 한다‘는 입장을 일관되게 견지했다. ‘용공의 굴레를 씌우려고호시탐탐 노리는 저들의 속셈을 너무 잘 아는 사람으로서 그는 노선과 선후를 분명히 했으며 항상 편지, 녹음테이프 등 기록을 남겼다. - P132
행방불명 6일째 되던 날인 13일 저녁에 나는 마지막 방법으로 국제적십자사에 호소하기로 했다. 여권 발급을 요청하기로 하고 서류를 작성하고있는데 "국제적십자사가 가족이 요청하면 여권을 발급할 용의가 있다고 9시 뉴스에서 보도했다"라고 전화로 알려주는 사람이 있었다. 희망을 갖고서류를 정리하던 중이었다. 그때 마침 구속자 가족을 돌보던 김한림 여사와 안순덕 씨, 그리고 김정례 씨가 걱정된 나머지 우리 집에 와 있었다. 안방에서 셋이 이야기를 나누는데 응접실에서 갑자기 소란이 일어났다. "오셨어요!" "의원님이 오셨어요!" 여러 사람이 외치며 우르르 대문으로 몰려갔다. 급히 현관으로 나가니 남편이 들어서는 게 아닌가 꿈인지 생시인지 분간하기 어렵게 정신이 혼미했다. 한동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는 안방으로 들어서면서 맨 먼저내 손을 잡고 예수님을 보았다고 했다. 우리는 모두 함께 그 자리에 꿇어 엎드렸다. 감사 기도를 바치는 내내 눈물이 흘러 목과 가슴을 적셨다. 남편의 증언이다.
바다에 던져 수장하려고 몸을 나무 판에 누이고 끈으로 꽁꽁 묶었다. 게다가 손과 발에 무거운 추를 달아매기에 이제 꼼짝없이 죽었구나 생각했다. 어떻게 하면 살아날 수 있을지를 궁리하고 있을 때 돌연 예수님이 나타나셨다. 납치당한 후 줄곧 기도를 했는데 정작 이때는 살아날 궁리를 하느라 기도할 생각을 못했다. 예수님의 옷자락을 붙들고 매달렸다. "살려주십시오! 제게는 아직 할 일이 남아 있습니다. 국민들을 위해할 일이 있습니다. 구해주십시오!" 그 순간 쿵쿵 소리와 함께 "비행기다~" 하고 외치며 사람들이 몰려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한동안 배가 속도를 내며 요동을 쳤다. 그러더니 잠잠해진 다음에 경상도 사투리를 쓰는 남자가 말했다. "혹시 김대중 선생님 아니십니까?" "그렇소." "나는 부산에서 선생님에게 투표했습니다. 이제 살았습니다." "여기가 어디입니까?" "도쿠시마입니다." 동여맨 결박을 풀었다. 이때부터 마실 것과 먹을 것을 주었다. 눈은 여전히 가린 채였다. (나중에 밝혀진 바에 따르면 11일 밤 부산 앞바다에 도착해서 하룻밤을 더 지낸 다음 12일 아침 7시 부두에 접안했다. 건강 상태를 진찰받고 차에 실렸다.) 농가를 거쳐 이틀을 지낸 어느 건물에서 잘 훈련된 수사관 같은 젊은 남자 목소리가 말했다. "김대중 선생, 왜 해외에서 국가를 반대하는 투쟁을 합니까?" "나는 대한민국을 한 번도 반대한 적이 없소. 내가 반대하는 것은 정권이지 국가는 아니오." "정부가 국가 아니오. 뭐가 다릅니까? 죽고 싶으면 계속 반대하시오." 그러더니 그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지금부터 선생을 차에 태워 집근처에 풀어줄 것입니다. 상부 명령입니다. 차에서 내리거든 소변을 보고 눈의 테이프를 풀고 집으로 가십시오." - P136
8월 23일 일본 <요미우리신문>은 서울발 특종기사로 ‘김대중 납치 사건 정보부 기관원 관련‘을 1면 톱으로 보도했다. 국가기관이 관련되어 있다는 것을 처음으로 밝힌 기사였다. 그러자 당국은 <요미우리신문> 서울 지국을 폐쇄 조치하고 3명의 기자를 즉시 추방했다. 이날 일본 국회에서는 법무성 장관이 "내 육감으로는 모국의 비밀경찰이 한 짓이 분명하다. 그러나 국회에서의 답변이므로 모국의 나라 이름을 밝힐 수는 없다" 라고 말했다. 법인 중 한 명이 지문을 남겼는데 도쿄 주재한국 대사관 1등서기관 김동운의 것이었다. 10월 중순 정보부 이용택 국장이 찾아왔다. 그는 이제 자유롭게 되었으니 가족과 더불어 미국으로 떠날 것을 종용했다. 남편도 미국행을 원했다. 재차 방문한 이 국장은 청와대에 들러 박 대통령을 만나고 허가를 받은 사항이라며 서둘렀다. 집안 정리를 하고 나중에 가겠다는 나에게도 즉시 남편과 함께 떠날 준비를 하라고 재촉했다. 부랴부랴 짐을 싸놓고 기다리는데 그다음부터 소식이 없었다. 라이샤워 교수가 가져온 하버드대 초청장으로 여권을 신청해보아도 서류가 반려되었다. 오히려 1974년 6월 1일 서울지방법원으로부터 출두 명령이 떨어졌다. 이유인즉 1963년 윤보선 대통령 후보 대변인으로 선거 기간 중 선거법 위반했다는 것이다. 어서 떠나라고 등을 밀었다가 발을 묶은 갑작스러운 태도 변화는 일본이 미국행을 반대했기 때문으로 알려졌다. 미국에서 납치 문제가 계속 이슈로 떠오르면 곤혹스럽게 될 일본과 한국이 공조한 결과 찾아낸 궁색한 방편이었다. 10년 전 서류 더미에서 건수를 찾아내 ‘재판 중‘이라는 구차하기 이를 데 없는 구실을 만들어낸 것이었다. 한편 한국 정부는 외교관의 면책특권을 주장하며 일본 측의 김동운 서기관 수사를 거부했다. 일본 영토에서 일어난 납치 사건은 명백히 일본 주권의 침해였다. 일본 내의 여론이 들끓자 김종필 국무총리가 일본을 방문하여 사죄하는 선에서 사건을 마무리했다. 그리고 1974년 8월에 일어난 재일교포 문세광의 육영수 여사 저격 사건으로 이번에는 일본이 궁지에 몰리게되자 양국은 야합하지 랂을 수 없었던 것이다. - P140
1975년 목요기도회는 사형 구형이 내려진 인혁당(인민혁명당) 사건으로 뜨거웠다. 4월 9일 청천벽력이 내리쳤다. 어제 사형이 선고된 그들이 오늘 새벽에 전격 처형되었다는 것이다. 함세웅 신부가 시무하는 응암동 성당에서 영결 미사를 본다고 해 우리는 그곳으로 달려갔다. 성당은 텅 비어있었다. 영구차가 녹번동 삼거리에서 대치 중이라고 해 몰려가니 경찰이송상진 씨의 시신을 싣고 성당으로 가려는 영구차를 가로막고 있었다. 나는 한 젊은 부인을 붙잡고 함께 울었다. 유족들은 거리 위로 내동댕이쳐졌다. 경찰은 영구차를 탈취했으나 누군가 껌으로 열쇠 구멍을 막아버려 움직이지 않자 크레인으로 차를 끌고 가 벽제 화장터에서 자기들 멋대로 화장을 했다. 얼마나 고문을 했던지 그 흔적을 은폐하기 위해서였다. 영구차를 빼앗기지 않으려고 차 앞에 누웠던 제임스 시노트 James Sinnot 신부는 곧 추방당했다. 문정현 신부는 차바퀴 밑에 깔렸다. 문 신부는 이로 인해 영원히 다리를 절게 되었다. 이토록 서슬이 시퍼렇던 시절에 ‘인혁당 사건은 조작된 것"이라고 국내외에 용감하게 주장했던 조지 오글George Ogle 목사는앞서 추방당했다. 우리는 울부짖었다. 제네바에 본부를 둔 국제법학자협회는 이날을 ‘사법사상 암흑의 날‘로 선포했다. - P146
신학기 각 대학에서는 민청학련 사건과 인혁당 사건의 진상 규명을 요구하며 대규모 반정부 시위가 벌어졌다. 그러자 박 대통령은 4월 8일 긴급조치 7호를 선포했다. 유신헌법에 대해 말하거나 비방하거나 이를 전파하는행위를 하는 자는 모두 영장 없이 체포, 압수 수색할 수 있는 초헌법적 조치였다. 대학 구내에는 군대를 투입해 모든 집회와 시위를 전면 금지했다. 한편 6개월여간 반유신 민주화 투쟁의 중심에 섰던 김영삼 총재가 5월21일 박 대통령과 청와대에서 독대하고 비밀 회담을 했다. 그러나 그는 이후 당에도 나타나지 않은 의혹으로 인해 도덕성을 잃고 임시 전당대회에서 당권을 잃었다. 악명 높은 긴급조치 9호가 발표된 지 일주일 만의 일이다. 새 총재 이철승 씨의 중도 통합이라는 슬로건 아래 신민당은 노골적으로 유신 체제에 협조해 민주화의 불씨는 허무하게 사그라졌다. - P153
1976년 5월 1심 판결은 김대중 · 윤보선 · 함석헌 · 문익환 4명이 징역 10년에 자격정지 10년, 고등법원 항소심은 5년, 1977년 3월 대법원 전원합의부는 상고를 기각했다. 양심의 마지막 보루 사법부도 권력의 눈치를 보며 검찰의 구형을 그대로, 벽돌처럼 찍어내던 시절이다. 이 사건을 담당한 정치근 검사는 고속 승진을 하고 5공 때 검찰청장, 6공에서 법무부 장관을 지냈으며 판사는 대법관이 되었다. 현역 의원 정일형 박사는 의원직을 박탈당했고 그의 부인 이태영 변호사는 변호사 자격을 잃었다. 최다선 8선의 야당 원로를 제명하다니. 정권이 파국을 향해 치닫고 있었다. 다음은 정일형의원의 최후진술이다.
나는 항일, 반공 반독재 투쟁에 일생을 일관해왔다. 자유민주주의가국시인 대한민국에서 민주회복을 주장했다 하여 재판을 받는다 함은 어불성설이다. 내가 항일 투쟁 할 때 일본군의 앞잡이는 누구이며 내가 반공 대열에 섰을 때 여순반란사건에 가담한 사람은 누구인가? 그리고 내가 민주화 운동을 할 때 독재자로 전락한 사람은 누구인가?
그는 바로 박정희 대통령이었던 것이다. - P157
2차 공판 날에는 덕수궁길 입구에서 방청권 화형식을 했다. 요식행위인재판은 방청할 필요가 없다는 의사 표명이었다. 가족들은 면회실, 지하철, 버스, 자동차, 인권위원회 등 언제 어디서나 짬만 나면 큰 가방에서 털실을꺼내 뜨개질을 했다. 고난과 평화를 상징하는 보라색으로 ‘V‘자형 숄을 짜고 이를 ‘빅토리 숄‘로 이름 붙였다. 4코를 거는데 ‘민‘, ‘주‘, 회‘, ‘복‘ 하면서 박자를 맞추었다. 숄은 주로 미국, 캐나다, 서독, 일본의 교회와 인권 단체로 팔려 나갔다. 한 장에 10달러를 받았다. 수익은 전액 양심수들의 영치금과 무의탁 수감자의 겨울 내복을 마련하고 더러 출옥 복학생의 등록금에 보탰다. 숄뜨기 운동이 확산되자 동대문시장에서 보라색 털실이 자취를감췄다. 정보부 짓이었다. 그래도 우리는 중단하지 않았다. 숄과 털실은 문동환 목사의 아내인 페이 문이 사회복지사로 일하는 미8군 미군 우편을 통하거나 선교사들이 날랐다. 재판이 있는 날에 우리 가족들은 법정 밖에서 모두 보라색 한복을 일제히 입고 나타났다. 한복을 입은 점잖은 부인들에게 함부로 손을 대지 못할것이라고 아이디어를 낸 것이다. 보라색은 평화를 의미하기도 했지만 또한 나라꽃 무궁화 색깔이었다. 우리는 연보라색 숙고사로 통일해 동대문시장에서 한 벌에 3,000원씩 주고 맞췄다. 한복 가슴에 공개재판, 민주 회복 리본을 달았다. 이 리본을 한 움큼씩 가방에 넣어 다니면서 나누어 주기도 하고 기관원이 떼면 즉시 다시 달았다. 때로는 소품을 적절히 활용했다. 흰 양산에다 ‘양심수 석방하라‘, ‘공개재판하라‘라고 쓰고 이를 네거리에서 신호를 기다리는 버스를 향해 폈다 접었다 하면서 주위 사람들의 시선을 끌었다. 둥글고 큰 부채 역시 멋진 소품이었다. ‘공개재판‘, ‘민주 인사 석방‘ 구호를 써서 높이 쳐들기를 반복했다. 붓글씨는 주로 궁체의 멋진 서체를 자랑하는 문익환의 아내 박용길이 쓰고 내가 옆에서 도왔다. - P159
어떤 지독한 고난도 그 내부에 기쁨을 감추어놓고 있는 법이다. 나는 국내외 여러 학교를 다녀 지인은 많았지만 공작과 음해의 대상 김대중의 아내인 나와 희로애락을 함께할 친구가 별로 없었다. 이런 고립무원 속에서 3.1 사건 구속자 가족들과 1년여 함께 민주화 운동을 하면서 나는 누구보다 깊은 우정을 쌓을 수 있었다. 소중한 친구 10명 중 벌써 공덕귀, 이우정, 고귀손, 김석중 네 사람이 차례로 세상을 떠났다. 남편 또한 감옥에서 새로운 인연으로 인해 새롭게 태어났다. 종교, 재야, 학계의 민주 인사들과 만났고 변호인 반대신문의 기회를 이용하여 자신의 신념과 철학을 전개하며 자신을 단죄하려는 집권층의 폐부를 찔렀다. 그는 법정에서 제한된 청중에게나마 오히려 자신의 신념을 알릴 수 있는 기회와 표현의 자유를 한껏 누린 것이었다. 또한 이 사건은 신구교가 같이 참여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정치인 김대중이 재야와만나 이후의 집권으로 가는 돈독한 연대를 맺은 계기가 되었다. 사건을 키운 박 대통령이 맺어준 우정이었다. "내가 감옥에 오지 않았더라면 어디서 여러분과 같은 좋은 친구들을 만날 수 있겠습니까?" - P166
정국이 극한 대치 상황인 와중에 김영삼 총재는 <뉴욕 타임스>와 인터뷰를 해 YH무역사태가 세계에 알려졌다. 박 정권은 이를 빌미로 김영삼 제거 작전을 시작했다. 야당을 회유, 협박하고 친위대라 할 수 있는 유정희 의원들을 동원해 10월 4일 마침내 김영삼 총재의 의원직을 박탈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이는스스로 무덤을 판 처사였다. "닭의 모가지를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 의원직을 빼앗긴 김영삼 총재가 이 당시 한 말은 이후로 오랫동안 인구에 회자하는 유명한 어록이 되었다. 이로부터 10여 일이 지났다. 10월 16, 17일 김영삼 총재의 지지 기반인 부산에서 부산대와 동아대학생 5,000여 명이 격렬한 시위를 벌였다. 부산대는 1974년 이후 단 한 차례의 시위도 없던 대학이었다. 그래서 항간에는 서울의 이화여대에서 가위를 포장해 소포로 부쳤다는 해괴한 소문까지 나돌았다. 그런 부산대가 일어난 것이다. ‘유신 철폐‘, ‘언론 자유‘, ‘김영삼 제명 철회‘를 외치며 교내에서 데모를 하다가 경찰이 해산시키자 학생들은 자연스럽게 시내 중심가로 집결했다. 이는 곧바로 시민들도 가세하는 대대적인 시위로 확산되었다. 유신의 손과 발이 되어주는 공화당사, 파출소, 경찰차, 방송국, 신문사 등을 습격하는 격렬한 시가전으로 발전했다. 당국의10시 통행금지 명령을 시민들은 지키지 않았다. 파출소가 불타고 박정희의사진도 끌어 내려져 짓밟혔다. 정부는 18일 자정을 기해 부산에 비상계엄령을 선포하고 공수부대를 긴급 투입했다. 그러나 오히려 시위는 20일에 이르러 인근 마산과 창원으로번져나갔다. 마산은 4·19 혁명의 도화선이 된 3.15 의거의 민주 성지였다. 경남대 학생과 시민들이 화염병과 각목 등으로 경찰과 맞섰다. 정부는마산 창원 지역 공업단지의 노동자들이 일어서는 것을 두려워했던 것 같다. 걷잡을 수 없이 확산되는 사태 앞에 박 대통령은 20일을 기해 마산과 창원에 위수령을 선포했다. 부산과 마산에서 1,563명이 연행되었고 그중 89명이 재판에 회부되었다. 그중 20명이 실형을 받았다. 군대의 힘으로 진압한 이 사건을 우리는 ‘부마항쟁‘이라고 부른다. 박정희와 유신 독재를 향한 국민의 증오와 염증이 이렇게 드러났음에도대통령의 주변 인물들은 이를 철저히 묵살했다. 유신 독재를 지탱하는 가장 큰 기둥이었던 중앙정보부의 눈으로 보아도 더 이상 유신의 지속은 불가능한 것으로 보였을 텐데 말이다. - P181
그러나 우리는 결코 박 대통령의 불행한 죽음을 기뻐하지 않았다. 장기 독재의 종식은 환영할 일이었지만 ‘암살‘이라는 폭력은 정당화될 수 없는 비열한 행동이었기 때문이다. 남편은 애석해했다. 이승만 대통령이 그랬듯이 박 대통령도 조만간 국민들 앞에 스스로 굴복할 수밖에 없었는데 ‘궁정 모반‘이 일어났다고 불의가 불의를 단죄할 수 없으며 그것은 정의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박 대통령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인해 민주화 운동의 흐름이 혹시 단절되고 왜곡되지 않을까 우려했다. 김재규는 군사 법정에서 의인처럼 행동했다. 부마항쟁의 실상을 보고하니 대통령은 몇십만 명쯤 차지철 경호실장은 몇백만 명쯤은 죽어도 좋다고 했다는 것이다. "박정희 대통령이 건재하는 한 한국의 자유민주주의를 되살릴 수 없다고 판단하고, 같은 고향, 동기, 상관이기도 한 개인적 정분을 끊고 야수 같은 심정으로 유신의 심장을 쏘았다." 남편은 <뉴스위크>와의 인터뷰를 포함해 일관되게 김재규를 의인으로보는 시각과 운동에 반대했다. 그는 말했다. "민주주의는 국민의 힘으로, 선거를 통해서 이루어지며 쿠데타나 암살로 얻어디운 것이 아니다." - P1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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