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조망을 둘러치고 거리를 떼어놓는 것은 불의의 감정 폭발 때문입니다. 아이들이 가끔 철없이 달려들어 제 부모들 품으로 안겨들때가 많습니다."
"그렇겠지. 병을 앓아도 부모 제 부모니까."
"원장님 말씀대로 이 섬 안에서는 모든 일이 입으로 말해지는 것과 실제 행동 사이에 거리를 가지고 있는 게 사실입니다. 그게 오히려 상식이 되고 있는 편이구요."
"구체적으로 어떤 경우가 그렇다는 게요."
원장은 면회 대열에 눈을 주고 있으면서도 상욱의 말을 놓치지 않았다.
"저흰 늘 저 아이들에게 나병은 유전이 아니라고 가르칩니다. 그리고 어떤 다른 병보다도 이 병은 전염성이 약하므로 너희들은 다른 건강한 아이들과 아무것도 다를 데가 없는 떳떳한 어린이라고 말해줍니다. 하지만 보십시오. 저 아이들은 직원들 자녀들이 다니는 고개 너머 국민학교로는 등교를 못합니다. 뿐입니까. 이 보육소의 분교에서마저도 건강한 선생은 수업을 맡아주러 오시는 분이 없습니다. 보육소의 미감아 교실 선생님은 거의 모두가 음성 병력자들뿐입니다."
"그건 아무래도 좀 기분 문제가 있을 테니까." - P51

분홍색이나 벚꽃 소식이란 이 병이 얼굴 근처에 첫 반응을 나타내기 시작할 때 자주 그 벚꽃의 분홍색을 볼 수 있는 데서 연유한 말이었다. 분홍색이나 자주색은 병이 나은 다음까지도 눈두덩 같은 데에선 평생을 두고 떠나가주지 않는 이 병 고유의 색조라 할 수 있었다. 섬사람들은 누구나 그 절망스런 분홍색의 경험을 가지고 있었고 지금도 그것을 저주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 섬에는 무슨 인연인지 붉은 황토색이 많았고, 봄만 되면 그 분홍색 벚꽃이 구름처럼 섬을 뒤덮었다. 육지 사람들은 봄이 되면 떼지어 섬으로 와서 이 붉은 섬을구경하고 돌아갔다. 황톳길과 벚꽃과 그 벚꽃의 분홍색이 원색의 그림자처럼 곱게 점찍힌 사람들의 얼굴을 보고 돌아갔다. 분홍색은 절망의 색깔이었다. 누구나 분홍색을 저주했다. - P54

" 그 사람들은 오늘 낮 원장님을 뵙기 전에 벌써 열 번 이상이나 그곳에 서서 새 원장이 숨겨 가지고 온 주원장의
동상을 보곤 했습니다. 누구든지 이곳에만 오면 주원장의 동상을 새로 세우고 싶어했습니다. 더러는 성공하고 더러는 실패도 했습니다. 어느 쪽이나 원장이 섬을 떠나고 나면 섬에 남는 것은 배반뿐이었습니다. 하지만 솔직하게 말씀드린다면 성공을 하고 간 쪽이 사정은 더 나빴습니다."
"••••••"
"그들은 결국 그런 식으로 어느 원장에게서나 똑같은 주정수 원장의 연설을 듣게 되었고, 그의 동상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런 경험을 그들은 열 번 이상씩이나 되풀이하고 있었습니다. 원장님께선 아까 이 섬 전체가 온통 불신과 배신으로 가득 차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만, 그런 불신과 배반이야말로 바로 그 수많은 주정수의 동상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죄송한 말씀입니다만, 그렇다면그 사람들은 아마 원장님께 대해서도 마찬가지가 될 수밖에 없었겠지요. 원장님의 말씀이 계속되는 동안 그자들은 또 한번 그 주정수의 연설을 들으면서 원장님에게서 그의 동상을 찾으려 하고 있었을게 틀림없었으리라는 말씀입니다." - P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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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직과 복학 조치는 그동안 금압되었던 총학생회 부활로 불붙었다. 학원가는 3월에 학생회를 구성했다. 4월에 교내에서 ‘교련 철폐‘, ‘유신 어용 교수 퇴진‘ 등 학내 민주화 투쟁을 하고 5월엔 거리로 나섰다. 13일 밤 학생들이광화문 일대에서 시위를 벌였다. 14일은 정오부터 전국의 대학 교문이 활짝 열려 ‘전두환 물러가라‘ 구호를 외치며 시위를 벌였다. 서울에선 광화문으로 수만 명이 진출했다. 대학의 교문을 굳게 지키던 전경들이 일제히 사라지는가 하면 인천 지역 대학생들의 서울 진입을 막던 경찰이 오히려 이들을 도심으로 유도하는 이상한 일들이 벌어졌다. 15일 오후에 서울역 광장에는 10만여 명의 학생들이 운집하여 연좌했다. 서울역 광장으로 향하는학생들은 ‘5·16 장례 대행진‘, ‘5·16 사형집행‘, ‘썩은 언론 규탄한다‘ 라고 쓴 플래카드를 들었다. 대학생들의 군사정권에 대한 오랜 반감을 볼 수있는 현수막이었다.
권력 내부의 모든 정보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시민들은 학생들의 움직임의 배경에 대해서도 전혀 알 수 없었다. 그러므로 그저 다소 불안하게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늦어지긴 했지만 국회 개회일인 5월 20일을 기다렸다.
그즈음 신군부는 검열로 언론을 장악하고 일본발 정보인 ‘남침설‘과 ‘휴전선에서의 총격전‘ 등을 유포하면서 국민들의 불안한 마음을 더욱 부추겼다. 그리고 미국 대사관에서는 민주화 운동을 도와온 자국민들에게 어서 한국을 떠나라는 긴급명령을 내리고 있었다. 정치권은 그저 자제를 호소했다. 신현확 총리의 정치 일정 단축 성명과 시민들의 냉담함, 그리고 군 병력이 움직이고 있다는 정보에 각 대학의 학생 대표들은 15일 이른바 ‘서울역 회군‘을 결정하고 학교로 돌아갔다.
5.18 광주민주화운동이 일어나자 이 서울역 회군 결정은 비판을 받았다. 역사에서 가정법은 의미가 없다지만 그때 만약 10만여 학생들이 서울역을 사수했다면 어찌 되었을까? ‘광주사태‘가 아닌 ‘서울사태‘가 일어나고 신군부 등장이 저지되었을까? 때로 매우 궁금해지는 역사의 한 고비가 아닐 수 없다. - P197

국민연합의 문익환목사, 이문영 교수, 예춘호 의원이 15일 동교동을 방문했다. 앞서 7일 성명을 발표했지만 반응이 없자, 문익환 목사가 2차 성명서를 만들고 한완상 교수 모친 상가에서 검토를 거친 후 우리 서명을 받으러 온 것이다. 성명서 중 행동강령은 그저 놀랍기만 했다.

계엄은 원천적으로 무효이므로 계엄군은 상부의 명령을 받을 이유가없다.
군인들은 명령에 불복종하고, 무기를 놓고 방영을 나와라,
모든 노동자는 해머를 놓고 공장을 나와라.
모든 상인은 문을 닫고 철시하라.
모든 국민은 검은 리본을 달고 5월 20일 서울은 장충단공원, 지방은도청과 시청으로 모여라.

재야는 이제 국민들이 궐기할 차례라고 생각해 서둘렀다. 성명서를 검토한 후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정치인이지 혁명가가 아닙니다. 계엄군에게 상부 명령을 받지 말라는 것은 내란 선동으로 몰리기 십상입니다. 20일 국회가 열려 계엄 해제결의를 하게 되었으니 그 결과를 보고 행동해도 늦지 않습니다."
오랜 토론과 조정 끝에 성명 내용은 일반 국민들의 요구 수준을 크게 벗어나지 않은 것으로 결정했다. ‘계엄령 철폐‘, ‘전두환 · 신현확 퇴진‘으로후퇴했다. 그리고 날짜도 국회 소집 이후인 22일로 늦춘 성명서를 가지고돌아가던 그분들의 실망한 모습이 아직까지도 생생하다.
‘김대중은 염려가 너무 많아. 너무 소심해.‘
그분들의 뒷모습은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그러나 훗날 이 소심증과 염려증이 여러 목숨을 구했다. 김대중에 대한 편견과 오해 중에 가장 일반적인게 강경하고 과격하다는 것인데 내가 보는 그는 지나치리만큼 신중한사람이다. 혹독한 군사독재정권에서 일관되게 신념을 지키며 투쟁하면서도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이 같은 자기 절제 덕분이다. 우리는 지금도 그날을 생각하면 모골이 송연하다. - P199

5월 16일, 서울 거리는 폭풍 전야처럼 고요했다. 그는 김영삼 총재와 동교동에서 회동했다. ‘계엄 해제‘, ‘정부 주도 개헌 반대‘ 등 6개 항에 걸친 공동성명에 합의했다. 공화당도 계엄령 일부 해제에 대해서는 공조를 약속했다. 17일 전국의 대학학생회장단도 이화여대에서 모여 마라톤 회의 끝에 학원으로 돌아갈 것을 결정했다. 그러나 이미 늦어버린 시각이었다. 신군부는 국회가 열리기 전 주말을 디데이로 정했다. 그들은 체포할 명단을 작성하고 체포조로 보안사와 수경사 군인들을 집결시켰다. 국회가 계엄 해제를 결의하면 바로 무장해제를 당할 신군부는 중동을 방문중인 최규하 대통령을 하루 앞당겨 급거 귀국하게 했다. 그리고 곧바로 16일 밤 11시에 청와대에서 대책 회의를 했다. 그다음날 비상 국무회의를 소집해 18일 0시 비상계엄령을 전국으로 확대했다. 제외되었던 제주도를 포함시킨 것만 달랐다. 여기에 비상계엄 전국 확대라는 근사한 이름을 달았다.
이렇게 1980년 ‘서울의 봄‘은 막을 내렸다. 1968년 둡체크Dubtek 정권의 인간적 사회주의를 짓밟은 소련의 탱크를 우리는 아직 기억하고 있다. ‘서울의 봄‘은 ‘프라하의 봄‘처럼 짧았다. 모두 잠시 신기루를 본 것이었다.
‘빼앗긴 봄‘ 이후에 찾아온 겨울은 너무나 혹독했다. - P200

발표 직후, 5월 17일에 집을 수색했던 사람 중 한 명이 와서 남편의 내의와 책 몇 권을 달라며 동행을 요구했다. 나는 혹시 면회를 시켜주려나 하고순진하게 기대했다. 그러나 그 동행은 군 검찰로 심문을 당하러 가는 길이었다. 몇 차례에 걸쳐 조사를 받았다. 계엄사는 7월 4일 이른바 김대중 내란 음모 사건을 발표했다. 그것은 완벽한 허구요, 소설이었다. "김대중과 추종자들은 국민연합을 주축으로 복학생들을 행동대원으로 해서 대학생들을 선동하려 했다. 대중을 규합하고 민중봉기를 일으켜 정부를 전복한 이후, 김대중을 수반으로 하는 과도정부를 수립하려고 했다" 라는 발표문 앞에서 나는 말을 잃었다. 그리고 김대중이 공산주의자이며 광주항쟁의 배후조종자라는 것이었다. 보도를 접한 나는 그래도 그가 아직 살아 있음을 확인할 수 있어서 잠시 안도했다.

‘미국의 소리‘에서는 계속 놀라운 뉴스를 보도했다.
"한국 정부가 발표한 김대중에 관한 혐의가 그대로 군법회의에 회부된다면 최고 사형까지 처하게 될 것이다."
천길, 만길 낭떠러지에서 나는 오로지 하나님께 매달렸다.  - P203

정작 그가 광주항쟁 소식을 들은 것은 6월 28일 남산중앙정보부 지하실에서였다. 사정은 이랬다.

40여 일 취조로 심신이 극도로 혼미한 상태에서 날짜를 기억하는 것은 그날 합동수사본부 수사단 이학봉 단장이 왔기 때문이다.
"당신은 지난번에 각서를 썼어야 했다. 지금이라도 우리에게 협력하면 대통령직 외에 어떤 직책이라도 주겠다. 협조하지 않겠다면 우린 살려줄 수 없다. 재판은 요식행위다."
"생각할 시간을 주겠다. 사흘 후에 다시 올 것이다."
그가 돌아간 후 정보부 직원이 신문을 한 무더기 가져왔다. 광주 사건이 실린 신문이었다. 사망자 수를 보고 기절했다. 혈압이 치솟아 의사로부터 치료를 받았다. 나를 지지해준 젊은이들, 광주에서 죽은 사람들, 나를 그토록 신뢰하고 존경하는 가족을 배반할 수 없었다. 죽어서 살자고 결심했다. 사흘 후 그가 왔다.
"협력할 수 없다. 죽음이 곧 삶이다."
그는 이틀 후 또 왔다. 단호하게 거절하자 성질을 내며 돌아갔다. 이같은 회유는 남한산성 육군교도소로 옮겨서도 계속되었다. 임무를 부여받은 군교도소장이 빙빙 돌며 기색을 살폈다.
"왜 자꾸 내 주변을 도는지 알겠는데 헛수고입니다. 나는 죽기를 각오했소."
"참 잘 생각하셨습니다. 진심으로 존경합니다."
- <김대중 자서전>에서 - P204

나는 광주가 남편의 목숨을 구했다고 믿는다. 광주에서 살상을 한 신군부는 김대중을 결코 죽일 수 없었던 것이다. 김대중 역시 민주주의를 위해 피를 흘린 광주를 배반할 수 없었다. 만약 그때 거듭된 고난으로 지쳐서 집요한 회유에 굴복하고 협력했더라면 그 인생이 얼마나 비루해졌을까. 나역시 그런 남편을 용서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불의에 굴복하지 않은 그를 헌신적으로 도운 것은 단지 내가 그의 배우자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남편은 한참 후에 말했다.
"나도 인간인데 어찌 살고 싶지 않았겠소. 해외로 나가 가족들과 조용히살까 하고 마음이 흔들릴 때 제일 먼저 당신의 얼굴이 떠올랐습니다." - P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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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어증aphasia‘은 어원적으로 말을 잃었다는 뜻이지만, 이는 말보다는 언어 자체 (표현 능력이나 이해 능력의 전부 혹은 일부)를 잃어버린 것이다(선천적으로 귀가 들리지 않아서 수화를 사용하는 사람이 뇌를 다치거나 뇌졸중을 얻은 뒤에 실어증이 생겨서 수화를 하지 못하거나 이해하지못하는 경우가 있는데 어느 모로 보든 말하는 사람의 실어증과 비슷한 수화 실어중이라고 할 수 있겠다).
실어증은 뇌의 어떤 부분이 관련되느냐에 따라 아주 다양한 형태로 나타나며, 표현성 실어증과 수용성 실어증으로 뚜렷이 구분된다. 두 상태가 공존하는 경우는 전실어증이라고 한다.
실어증은 희귀한 장애가 아니다. 뇌졸중이나 머리 부상, 종양 또는 퇴행성 뇌질환의 결과로 뇌에 손상을 입은 사람은 300명 가운데 한 명꼴로 영구적 실어증이 생길 수 있다고 추산된다. 하지만 실어증은 완치율이높으며 부분적으로 치료되는 경우도 많다(단 몇 분만 지속되는 일과성 실어증도 있는데, 편두통이나 간질 발작을 겪을 때 일어날 수 있다).
아주 가벼운 형태의 표현성 실어증은 적합한 어휘를 찾는 데 어려움을 겪거나 전체 문장 구조는 무너뜨리지 않으면서 어휘만 잘못 쓰는 특성을보인다. 이러한 장애는 고유명사를 포함하여 특히 명사에 영향을 미친다. 좀 더 중증이면 문법적으로 완전한 문장을 구사할 수 없어서 짧고 빈약한 ‘전보문‘처럼 말하며, 실어증이 아주 심한 환자는 거의 말을 하지 못하고 이따금씩 ("젠장!"이나 "좋아!" 같은) 짧은 말을 내뱉을 수는 있다. 때로는 환자가 한 낱말만 거듭 반복하거나 모든 상황에 단 하나의 문장만 말하는 경우가 있는데, 환자도 이런 자신을 몹시 답답해한다. 한 환자는 뇌졸중이 발병한 뒤로 "고마워요, 엄마"라는 문장밖에는 말하지 못했고, 또다른 환자는 이탈리아 여성이었는데 늘 하는 말이 "tutta la verità, tut-ta la verità (온전한 진실 - 옮긴이)"였다. - P49

만성질환 환자를 문안하러 왔다가 마비되고 앞이 안 보이고 말 없는 ‘불치병‘ 환자 수백 명이 모여 있는 광경에 충격을 받는 사람이 적지 않다. 처음 드는 생각은 보통 이렇다. 이런 상황이라도 인생은 살 만한 것일까? 이 사람들은 어떤 삶을 살아갈까? 또 자신에게 장애가 생겨서 이런 곳에 살게 되면 어떻게 하나 싶은 생각에 불안해지기도 한다.
그러다가 다른 면을 생각하게 된다. 대다수 환자들은 치료법이 아예없거나 차도를 거의 보이지 않는다고 해도, 여전히 많은 환자가 도움을받아 건강을 되찾고 장점을 살려서 다른 일을 할 만한 능력을 계발하며 현실을 극복하고 삶에 적응해간다(물론 이는 신경 손상의 유형이나 정도에 좌우되며, 개개인 환자의 내적 자원이나 외부 환경이 어떻게 뒷받침해주느냐에달려 있다).
병문안 온 사람에게 만성질환 병원의 첫인상이 견디기 힘들다면, 처음 입원하는 환자들에게는 공포스러울 것이다. 많은 입원 환자가 공포와 더불어 슬픔과 씁쓸함을 느끼며 격렬한 분노로 대응하는 경우도 있다(이러한 복잡한 감정 반응이 때로는 중증 ‘입원 정신장애‘를 일으키기도 한다). 내가 팻을 처음 본 것은 그녀가 베스에이브러햄병원에 막 입원한 1991년 10월이었다. 그때 팻은 분노와 좌절감으로 고통받고 있었다. 직원들도 모르고 병원 시설에 대해서도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 팻은 기관이 딱딱한 규정과 질서로 자신을 짓누른다고 느꼈다. 몸짓으로 의사 표현은 할 수 있었지만(그녀의 몸짓은 뜻이 완전히 통하지는 않았어도 늘 열정적이었다) 논리적인 말은 전혀 되지 않는 상태였다(하지만 직원은 팻이 가끔 "젠장!"이나 "꺼져!"라며 소리를 지른다고 말했다). 사람들이 하는 말은 꽤 많이 이해하는듯했지만 테스트해본 결과 말 자체보다는 어조나 표정, 몸짓에 반응하는것으로 밝혀졌다. - P54

매사추세츠 종합병원 낸시 에트코프 연구진의 2000년 <네이처> 논문에서는 실어증을 겪는 사람들이 알고 보면 "언어 장애가 전혀 없는 사람들보다 거짓 감정을 파악하는 능력이 월등하다"는 사실을 보여주었다. 이 논문은 실어증 환자들이 그런 능력을 갖기까지 어느 정도 시간이 걸린다고 주장하는데, 실어증이 발발한 지 몇 달밖에 안 되는 환자들에게는 그 능력이 나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팻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여서 처음에는 타인의 감정이나 의도를 알아차리는 데 능하다고 보기 어려웠지만, 몇 해가 지나면서 초자연적이라고 할 만한 기술을 갖추게 되었다. 실어증을 겪는 사람들이 비언어적 의사 표현을 이해하는 데 탁월한 능력을 얻을 수 있다면, 자신의 생각을 같은 방식으로 전달하는 데도 노련해질 수 있다. 팻은이제 자신의 생각과 의도를 의식적이고 자발적으로 그리고 많은 경우에 창의적으로 표현하는 단계로 들어섰다. - P57

뇌졸중이 발병하거나 뇌 손상을 입은 뒤로 12~18개월 뒤에는 더이상 회복될 수 없다는 이야기가 있다. 때로는 그런 경우도 있지만, 이러한 일반화가 잘못임을 입증하는 환자도 많이 보았다. 게다가 지난 몇십 년 동안 신경과학은 뇌의 회복력과 재생력이 기존에 알려져 있는 것보다 훨씬 강하다는 사실을 입증했다. 또 손상 부위가 지나치게 크지 않을 경우에는 손상되지 않은 부위가 손상된 부위의 기능을 대신하는 ‘가소성‘이라는 위대한 능력도 있다. 개인적인 차원에서는 적응 능력, 즉 원래의 방법이 더이상 통하지 않을 때 새로운, 혹은 다른 방법을 찾는 능력을 발휘한다. 팻은 뇌졸중을 앓은 지 다섯 해가 지나서도 매우 제한적이기는 하나 계속해서 수용력이 높아졌고, 언어를 이해하는 능력을 키워가고 있다. - P59

노엄 촘스키가 언어학에서 혁명을 일으켰다면, 스티븐 코슬린은 심상연구에서 혁명을 일으켰다. 비트겐슈타인이 ‘말하기‘와 ‘보여주기‘ 논했다면, 코슬린은 ‘서술적이고 ‘묘사적인 표현 방식을 논한다. 정상적인 뇌는 두 방식을 모두 구사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상호 보완적이어서 어느한 방식만 쓸 수도 있고 두 방식을 전부 쓸 수도 있다. 팻은 명제 구성 능력, 단언 능력, 서술 능력을 거의 상실했으며, 이 능력을 회복할 가능성을 거의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묘사 능력은 뇌졸중의 영향에서 벗어나언어를 잃은 상태에 적응하면서 현저하게 향상되었다. 그녀의 묘사 능력은 다른 사람의 몸짓과 표정을 읽어내는 능력(수용성)과 자신의 의사를손짓과 몸짓으로 표현해내는 기교(표현성)의 양면성을 띤다. - P60

팻의 딸들조차 그녀의 회복 능력에 혀를 내두르곤 했다. "어떻게 우울해하지 않죠? 우울증 이력이 있는데 말이에요. 처음에는 어머니가 어떻게 이렇게 사실 수 있을까... 생각했어요. 칼이라도 집어 드는 건 아닐까하고요." 다나는 어머니의 몸짓이 ‘세상에 무슨 일이 생긴 거야? 이게 뭐야? 내가 왜 이런 방에 있는 거야?‘ 하고 호소하는 듯하며, 어머니가 날선 뇌졸중의 공포에 사로잡힌 것 같다고 자주 이야기했다. 하지만 팻은 자신이 반신불수 상태이긴 하지만, 어떤 면에서는 아주 운이 좋았다는 점을 알고 있었다. 뇌 손상의 범위가 넓기는 하지만 정신력이나 성격을 허물어뜨리지는 않았다는 점, 딸들이 그녀에게 마음 붙일 일과 활동을 만들어주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하고, 또 한편으로는 개인 도우미와 치료사를 별도로 고용할 경제력이 있었다는 점, 팻을 끊임없이 면밀히 관찰해주는 병리사를 만났다는 점, 인간적으로 용기를 주고 그녀에게 절대적으로 중요한 도구인 ‘경전‘을 준비해서 치료에 도움이 되었다는 점 등 팻은 실로 운이 좋은 사람이었다.
팻은 여전히 적극적으로 세계와 교감하고 있어서 가족에게 "달링"이라고 말하지만 병동에서는 팻이 달링이었다. 팻은 사람을 사로잡는 매력을 전혀 잃지 않았으며(다나가 말하길, "어머니는 선생님도 사로잡았지요, 색스 선생님"), 왼손으로 그림도 그릴 수 있다. 그녀는 살아 있다는 사실, 할 수 있는 한 많은 것을 할 수 있다는 사실에 감사하고 있으며, 다나는것이 어머니가 의욕을 잃지 않고 좋은 기분을 유지할 수 있는 힘이라고보았다. - P64

우리가 생각하는 읽기는 분할할 수 없이 하나로 이어지는 행위이우리 읽을 때는 그 의미와 글로 쓰인 언어의 아름다움에 주의를 기울이면서도 그것을 가능하게 만드는 많은 과정은 의식하지 못한다. 하워드 엥겔이 겪은 것과 같은 상황에 맞닥뜨리고 나서야, 알고 보면 읽기의 단계들이 일렬로 혹은 서열에 따라 연결된 하나의 전체에 종속되어서 어느 순간에라도 무너질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1890년, 독일 신경학자 하인리히 리사우어가 뇌졸중이 발생한 환자가잘 아는 사물을 시각적으로 인지하지 못하는 상태를 "심맹psychic blind-ness" 이라고 기술했다. 이 상태, 즉 시각 실인증을 겪는 사람들은 시력, 색 인지, 시야 등은 완전히 정상일 수 있다. 그러면서도 눈앞에 보이는것을 전혀 인지하거나 식별하지 못하는 것이다.
실독증은 특수한 형태의 시각 실인증으로, 문자언어를 인지하지 못하는 장애다. 1861년에 프랑스 신경학자 폴 브로카가 말의 ‘운동 심상‘을 관장하는 중심부를 찾아내고, 그로부터 몇 해 뒤에 독일의 신경학자 카를 베르니케가 말의 ‘청각 심상을 관장하는 중심부를 찾아낸 뒤로, 19세기 신경학자들은 뇌 안에 말의 시각 심상을 관장하는 부위(손상될 경우에 읽기장에 즉 ‘심맹‘을 일으키는 부위도 있으리라고 가정하는 것이 논리적으로 타당하다고 여겼다. - P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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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회해산으로 남편은 의원직을 상실했고 권노갑 비서는 실직했다. 나는 비서진을 불러 몸조심을 당부하고 생활비를 조금씩 나눴다. 엄영달, 김옥두, 방대엽, 이수동, 이윤수 그리고 내외문제연구소 한화갑 전문위원 등 7명이었다. 남편과 가까운 신민당 소장파 김상현, 조윤형, 김녹영, 김한수, 김경인, 박영록, 조연하 의원 등 11명은 영장도 없이 잡혀갔다. 그들의 비서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로부터 한 열흘 지났을까. 새벽에 일어나 기도를 하고 있는데 김옥두비서가 감시를 뚫고 담을 넘어 숨어들어 왔다. 모습이 말이 아니었다.
"그동안 어디 있었어요? 다른 사람들은요?"
"정보부에서 일주일 동안 혹독한 고문을 받고 방금 나왔습니다. 사모님, 조길환이 고문에 못 이겨 우리를 도운 경제인들 이름을 불었습니다. 알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70대 노인까지도 발가벗겨 몽둥이로 때리고 잠을 안 재우고 코로 물을 들이붓는 등 갖가지 고문을 했다. 그는 바로 아세아자동차 이문환 회장으로, 위험을 무릅쓰고 나를 친정아버지처럼 보살펴주셨던 어른이다. 패션디자이너 이광희 씨의 큰아버지이기도 하다. 치가 떨리는 이 고문 사실을 나는 한참 후에야 알았다. 잡혀간 측근들이 심한 고문의 후유증으로 움직이지 못하고 치료를 받고 있다는 소식을 들을 때마다 나는 정말이지 미칠것만 같았다. 아무런 도움도 줄 수 없는 처지임을 탄식했다. 차라리 그들 대신 남편이나 내가 끌려갔더라면 ••••••. 집은 적막강산이었다. 화를 입을까 두려워 아무도 접근할 엄두조차 낼수 없었다. 설령 오더라도 외부인 출입은 완전히 차단되었다. 나 역시 연행을 각오한 터라 초인종이 울릴 때마다 기도하며 가슴을 진정시켰다.
당당하게 잡혀갈 수 있도록 제게 용기를 주세요. - P127

인적이 끊어진 동교동에 어느 날 외신 기자 두 사람이 조심스럽게 찾아왔다. 미국 CBS방송 한영도 기자와 일본 RKB마이니치방송 미요시 특파원이었다. 그들은 남편의 소식을 가져왔고, 이후의 비밀 메신저를 자원했다. 집에 다시 오기 어려우니 공중전화를 이용하기로 하고 ‘스미요시‘라는 가명을 쓰기로 했다. 나는 몇 차례 조용한 경양식 집을 이용했다. 밤에는 남산 야외음악당에서 만나 그들의 차로 바꿔 탔다. 그리고 당시 개발되지 않았던 강남의 빈 들판으로 가기도 했다. 남편의 근황을 듣고 편지를 교환하고 국내외 정보를 들었다. 캄캄한 밤 허허벌판에 차를 세워놓고 헤드라이트를 끄고 그러고도 소곤소곤하는 것이 마치 007 첩보영화같았다. 남편 소식을 듣고 난 후 안도감으로 눈을 들어 밤하늘을 올려다보면 하늘의별들이 쏟아부어 놓은 듯이 반짝였다. 그즈음 그들은 단절된 바깥세상과 통하는 유일한 길이었다. 남편과 나는 오직 그 외로운 연결 고리를 통해 숨을 나누고 희망을 주고받았다. 그분들이 아니었다면 우리는 서로에 대한염려로 얼마나 더 힘든 시간을 보냈을까. 그 고마움을 평생 잊지 못한다. - P130

남편은 일본에서 성명을 내고 언론에 인터뷰와 기고를 하고 강연을 하는등 반유신 활동을 왕성하게 했다. 그는 7월 6일 워싱턴에서 한민통(한국민주회복통일촉진국민회의) 미국 본부를 결성하고 7월 10일 일본 지부를 만들기 위해 일본으로 갔다. 이에 앞서 박 대통령이 6월 평화통일외교정책‘
에 관한 특별 성명(6.23 선언)으로 북한의 국제기구 가입을 더 나아가 북한과 유엔 동시 가입도 반대하지 않는다는 유화적인 제스처를 보여 통일에대한 논의가 좀 자유로워졌을 때다. 남편은 혹시 내가 염려할까 봐 ‘한민통‘을 하면서 두 가지를 확실히 한다는 자세한 편지를 보냈다. "대한민국 절대 지지‘와 ‘선 민주 회복 후 통일 실현‘이었다. 일부에서는 망명정부를세우자, 통일운동을 우선하자는 의견이 있었다. 그러나 그는 ‘대한민국 절대 지지와 유신 정권 반대‘와 ‘민주화를 이룬 후 국민적인 합의 후 통일 운동을 해야 한다‘는 입장을 일관되게 견지했다. ‘용공의 굴레를 씌우려고호시탐탐 노리는 저들의 속셈을 너무 잘 아는 사람으로서 그는 노선과 선후를 분명히 했으며 항상 편지, 녹음테이프 등 기록을 남겼다. - P132

행방불명 6일째 되던 날인 13일 저녁에 나는 마지막 방법으로 국제적십자사에 호소하기로 했다. 여권 발급을 요청하기로 하고 서류를 작성하고있는데 "국제적십자사가 가족이 요청하면 여권을 발급할 용의가 있다고 9시 뉴스에서 보도했다"라고 전화로 알려주는 사람이 있었다. 희망을 갖고서류를 정리하던 중이었다. 그때 마침 구속자 가족을 돌보던 김한림 여사와 안순덕 씨, 그리고 김정례 씨가 걱정된 나머지 우리 집에 와 있었다. 안방에서 셋이 이야기를 나누는데 응접실에서 갑자기 소란이 일어났다.
"오셨어요!"
"의원님이 오셨어요!"
여러 사람이 외치며 우르르 대문으로 몰려갔다. 급히 현관으로 나가니 남편이 들어서는 게 아닌가 꿈인지 생시인지 분간하기 어렵게 정신이 혼미했다. 한동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는 안방으로 들어서면서 맨 먼저내 손을 잡고 예수님을 보았다고 했다. 우리는 모두 함께 그 자리에 꿇어 엎드렸다. 감사 기도를 바치는 내내 눈물이 흘러 목과 가슴을 적셨다. 남편의 증언이다.

바다에 던져 수장하려고 몸을 나무 판에 누이고 끈으로 꽁꽁 묶었다. 게다가 손과 발에 무거운 추를 달아매기에 이제 꼼짝없이 죽었구나 생각했다. 어떻게 하면 살아날 수 있을지를 궁리하고 있을 때 돌연 예수님이 나타나셨다. 납치당한 후 줄곧 기도를 했는데 정작 이때는 살아날 궁리를 하느라 기도할 생각을 못했다. 예수님의 옷자락을 붙들고 매달렸다.
"살려주십시오! 제게는 아직 할 일이 남아 있습니다. 국민들을 위해할 일이 있습니다. 구해주십시오!"
그 순간 쿵쿵 소리와 함께 "비행기다~" 하고 외치며 사람들이 몰려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한동안 배가 속도를 내며 요동을 쳤다.
그러더니 잠잠해진 다음에 경상도 사투리를 쓰는 남자가 말했다.
"혹시 김대중 선생님 아니십니까?"
"그렇소."
"나는 부산에서 선생님에게 투표했습니다. 이제 살았습니다."
"여기가 어디입니까?"
"도쿠시마입니다."
동여맨 결박을 풀었다. 이때부터 마실 것과 먹을 것을 주었다. 눈은 여전히 가린 채였다. (나중에 밝혀진 바에 따르면 11일 밤 부산 앞바다에 도착해서 하룻밤을 더 지낸 다음 12일 아침 7시 부두에 접안했다. 건강 상태를 진찰받고 차에 실렸다.) 농가를 거쳐 이틀을 지낸 어느 건물에서 잘 훈련된 수사관 같은 젊은 남자 목소리가 말했다.
"김대중 선생, 왜 해외에서 국가를 반대하는 투쟁을 합니까?"
"나는 대한민국을 한 번도 반대한 적이 없소. 내가 반대하는 것은 정권이지 국가는 아니오."
"정부가 국가 아니오. 뭐가 다릅니까? 죽고 싶으면 계속 반대하시오."
그러더니 그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지금부터 선생을 차에 태워 집근처에 풀어줄 것입니다. 상부 명령입니다. 차에서 내리거든 소변을 보고 눈의 테이프를 풀고 집으로 가십시오." - P136

 8월 23일 일본 <요미우리신문>은 서울발 특종기사로 ‘김대중 납치 사건 정보부 기관원 관련‘을 1면 톱으로 보도했다. 국가기관이 관련되어 있다는 것을 처음으로 밝힌 기사였다. 그러자 당국은 <요미우리신문> 서울 지국을 폐쇄 조치하고 3명의 기자를 즉시 추방했다. 이날 일본 국회에서는 법무성 장관이 "내 육감으로는 모국의 비밀경찰이 한 짓이 분명하다. 그러나 국회에서의 답변이므로 모국의 나라 이름을 밝힐 수는 없다" 라고 말했다. 법인 중 한 명이 지문을 남겼는데 도쿄 주재한국 대사관 1등서기관 김동운의 것이었다.
10월 중순 정보부 이용택 국장이 찾아왔다. 그는 이제 자유롭게 되었으니 가족과 더불어 미국으로 떠날 것을 종용했다. 남편도 미국행을 원했다. 재차 방문한 이 국장은 청와대에 들러 박 대통령을 만나고 허가를 받은 사항이라며 서둘렀다. 집안 정리를 하고 나중에 가겠다는 나에게도 즉시 남편과 함께 떠날 준비를 하라고 재촉했다. 부랴부랴 짐을 싸놓고 기다리는데 그다음부터 소식이 없었다.
라이샤워 교수가 가져온 하버드대 초청장으로 여권을 신청해보아도 서류가 반려되었다. 오히려 1974년 6월 1일 서울지방법원으로부터 출두 명령이 떨어졌다. 이유인즉 1963년 윤보선 대통령 후보 대변인으로 선거 기간 중 선거법 위반했다는 것이다. 어서 떠나라고 등을 밀었다가 발을 묶은 갑작스러운 태도 변화는 일본이 미국행을 반대했기 때문으로 알려졌다. 미국에서 납치 문제가 계속 이슈로 떠오르면 곤혹스럽게 될 일본과 한국이 공조한 결과 찾아낸 궁색한 방편이었다. 10년 전 서류 더미에서 건수를 찾아내 ‘재판 중‘이라는 구차하기 이를 데 없는 구실을 만들어낸 것이었다.
한편 한국 정부는 외교관의 면책특권을 주장하며 일본 측의 김동운 서기관 수사를 거부했다. 일본 영토에서 일어난 납치 사건은 명백히 일본 주권의 침해였다. 일본 내의 여론이 들끓자 김종필 국무총리가 일본을 방문하여 사죄하는 선에서 사건을 마무리했다. 그리고 1974년 8월에 일어난 재일교포 문세광의 육영수 여사 저격 사건으로 이번에는 일본이 궁지에 몰리게되자 양국은 야합하지 랂을 수 없었던 것이다. - P140

1975년 목요기도회는 사형 구형이 내려진 인혁당(인민혁명당) 사건으로 뜨거웠다. 4월 9일 청천벽력이 내리쳤다. 어제 사형이 선고된 그들이 오늘 새벽에 전격 처형되었다는 것이다. 함세웅 신부가 시무하는 응암동 성당에서 영결 미사를 본다고 해 우리는 그곳으로 달려갔다. 성당은 텅 비어있었다. 영구차가 녹번동 삼거리에서 대치 중이라고 해 몰려가니 경찰이송상진 씨의 시신을 싣고 성당으로 가려는 영구차를 가로막고 있었다. 나는 한 젊은 부인을 붙잡고 함께 울었다. 유족들은 거리 위로 내동댕이쳐졌다. 경찰은 영구차를 탈취했으나 누군가 껌으로 열쇠 구멍을 막아버려 움직이지 않자 크레인으로 차를 끌고 가 벽제 화장터에서 자기들 멋대로 화장을 했다. 얼마나 고문을 했던지 그 흔적을 은폐하기 위해서였다. 영구차를 빼앗기지 않으려고 차 앞에 누웠던 제임스 시노트 James Sinnot 신부는 곧 추방당했다. 문정현 신부는 차바퀴 밑에 깔렸다. 문 신부는 이로 인해 영원히 다리를 절게 되었다. 이토록 서슬이 시퍼렇던 시절에 ‘인혁당 사건은 조작된 것"이라고 국내외에 용감하게 주장했던 조지 오글George Ogle 목사는앞서 추방당했다.
우리는 울부짖었다. 제네바에 본부를 둔 국제법학자협회는 이날을 ‘사법사상 암흑의 날‘로 선포했다. - P146

신학기 각 대학에서는 민청학련 사건과 인혁당 사건의 진상 규명을 요구하며 대규모 반정부 시위가 벌어졌다. 그러자 박 대통령은 4월 8일 긴급조치 7호를 선포했다. 유신헌법에 대해 말하거나 비방하거나 이를 전파하는행위를 하는 자는 모두 영장 없이 체포, 압수 수색할 수 있는 초헌법적 조치였다. 대학 구내에는 군대를 투입해 모든 집회와 시위를 전면 금지했다.
한편 6개월여간 반유신 민주화 투쟁의 중심에 섰던 김영삼 총재가 5월21일 박 대통령과 청와대에서 독대하고 비밀 회담을 했다. 그러나 그는 이후 당에도 나타나지 않은 의혹으로 인해 도덕성을 잃고 임시 전당대회에서 당권을 잃었다. 악명 높은 긴급조치 9호가 발표된 지 일주일 만의 일이다. 새 총재 이철승 씨의 중도 통합이라는 슬로건 아래 신민당은 노골적으로 유신 체제에 협조해 민주화의 불씨는 허무하게 사그라졌다. - P153

1976년 5월 1심 판결은 김대중 · 윤보선 · 함석헌 · 문익환 4명이 징역 10년에 자격정지 10년, 고등법원 항소심은 5년, 1977년 3월 대법원 전원합의부는 상고를 기각했다. 양심의 마지막 보루 사법부도 권력의 눈치를 보며 검찰의 구형을 그대로, 벽돌처럼 찍어내던 시절이다. 이 사건을 담당한 정치근 검사는 고속 승진을 하고 5공 때 검찰청장, 6공에서 법무부 장관을 지냈으며 판사는 대법관이 되었다. 현역 의원 정일형 박사는 의원직을 박탈당했고 그의 부인 이태영 변호사는 변호사 자격을 잃었다. 최다선 8선의 야당 원로를 제명하다니. 정권이 파국을 향해 치닫고 있었다. 다음은 정일형의원의 최후진술이다.

나는 항일, 반공 반독재 투쟁에 일생을 일관해왔다. 자유민주주의가국시인 대한민국에서 민주회복을 주장했다 하여 재판을 받는다 함은 어불성설이다. 내가 항일 투쟁 할 때 일본군의 앞잡이는 누구이며 내가 반공 대열에 섰을 때 여순반란사건에 가담한 사람은 누구인가? 그리고 내가 민주화 운동을 할 때 독재자로 전락한 사람은 누구인가?

그는 바로 박정희 대통령이었던 것이다. - P157

2차 공판 날에는 덕수궁길 입구에서 방청권 화형식을 했다. 요식행위인재판은 방청할 필요가 없다는 의사 표명이었다. 가족들은 면회실, 지하철, 버스, 자동차, 인권위원회 등 언제 어디서나 짬만 나면 큰 가방에서 털실을꺼내 뜨개질을 했다. 고난과 평화를 상징하는 보라색으로 ‘V‘자형 숄을 짜고 이를 ‘빅토리 숄‘로 이름 붙였다. 4코를 거는데 ‘민‘, ‘주‘, 회‘, ‘복‘ 하면서 박자를 맞추었다. 숄은 주로 미국, 캐나다, 서독, 일본의 교회와 인권 단체로 팔려 나갔다. 한 장에 10달러를 받았다. 수익은 전액 양심수들의 영치금과 무의탁 수감자의 겨울 내복을 마련하고 더러 출옥 복학생의 등록금에 보탰다. 숄뜨기 운동이 확산되자 동대문시장에서 보라색 털실이 자취를감췄다. 정보부 짓이었다. 그래도 우리는 중단하지 않았다. 숄과 털실은 문동환 목사의 아내인 페이 문이 사회복지사로 일하는 미8군 미군 우편을 통하거나 선교사들이 날랐다.
재판이 있는 날에 우리 가족들은 법정 밖에서 모두 보라색 한복을 일제히 입고 나타났다. 한복을 입은 점잖은 부인들에게 함부로 손을 대지 못할것이라고 아이디어를 낸 것이다. 보라색은 평화를 의미하기도 했지만 또한 나라꽃 무궁화 색깔이었다. 우리는 연보라색 숙고사로 통일해 동대문시장에서 한 벌에 3,000원씩 주고 맞췄다. 한복 가슴에 공개재판, 민주 회복 리본을 달았다. 이 리본을 한 움큼씩 가방에 넣어 다니면서 나누어 주기도 하고 기관원이 떼면 즉시 다시 달았다. 때로는 소품을 적절히 활용했다. 흰 양산에다 ‘양심수 석방하라‘, ‘공개재판하라‘라고 쓰고 이를 네거리에서 신호를 기다리는 버스를 향해 폈다 접었다 하면서 주위 사람들의 시선을 끌었다. 둥글고 큰 부채 역시 멋진 소품이었다. ‘공개재판‘, ‘민주 인사 석방‘ 구호를 써서 높이 쳐들기를 반복했다. 붓글씨는 주로 궁체의 멋진 서체를 자랑하는 문익환의 아내 박용길이 쓰고 내가 옆에서 도왔다. - P159

어떤 지독한 고난도 그 내부에 기쁨을 감추어놓고 있는 법이다. 나는 국내외 여러 학교를 다녀 지인은 많았지만 공작과 음해의 대상 김대중의 아내인 나와 희로애락을 함께할 친구가 별로 없었다. 이런 고립무원 속에서 3.1 사건 구속자 가족들과 1년여 함께 민주화 운동을 하면서 나는 누구보다 깊은 우정을 쌓을 수 있었다. 소중한 친구 10명 중 벌써 공덕귀, 이우정, 고귀손, 김석중 네 사람이 차례로 세상을 떠났다.
남편 또한 감옥에서 새로운 인연으로 인해 새롭게 태어났다. 종교, 재야, 학계의 민주 인사들과 만났고 변호인 반대신문의 기회를 이용하여 자신의 신념과 철학을 전개하며 자신을 단죄하려는 집권층의 폐부를 찔렀다. 그는 법정에서 제한된 청중에게나마 오히려 자신의 신념을 알릴 수 있는 기회와 표현의 자유를 한껏 누린 것이었다. 또한 이 사건은 신구교가 같이 참여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정치인 김대중이 재야와만나 이후의 집권으로 가는 돈독한 연대를 맺은 계기가 되었다. 사건을 키운 박 대통령이 맺어준 우정이었다.
"내가 감옥에 오지 않았더라면 어디서 여러분과 같은 좋은 친구들을 만날 수 있겠습니까?" - P166

정국이 극한 대치 상황인 와중에 김영삼 총재는 <뉴욕 타임스>와 인터뷰를 해 YH무역사태가 세계에 알려졌다. 박 정권은 이를 빌미로 김영삼 제거 작전을 시작했다. 야당을 회유, 협박하고 친위대라 할 수 있는 유정희 의원들을 동원해 10월 4일 마침내 김영삼 총재의 의원직을 박탈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이는스스로 무덤을 판 처사였다.
"닭의 모가지를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
의원직을 빼앗긴 김영삼 총재가 이 당시 한 말은 이후로 오랫동안 인구에 회자하는 유명한 어록이 되었다.
이로부터 10여 일이 지났다. 10월 16, 17일 김영삼 총재의 지지 기반인 부산에서 부산대와 동아대학생 5,000여 명이 격렬한 시위를 벌였다. 부산대는 1974년 이후 단 한 차례의 시위도 없던 대학이었다. 그래서 항간에는 서울의 이화여대에서 가위를 포장해 소포로 부쳤다는 해괴한 소문까지 나돌았다. 그런 부산대가 일어난 것이다. ‘유신 철폐‘, ‘언론 자유‘, ‘김영삼 제명 철회‘를 외치며 교내에서 데모를 하다가 경찰이 해산시키자 학생들은 자연스럽게 시내 중심가로 집결했다. 이는 곧바로 시민들도 가세하는 대대적인 시위로 확산되었다. 유신의 손과 발이 되어주는 공화당사, 파출소, 경찰차, 방송국, 신문사 등을 습격하는 격렬한 시가전으로 발전했다. 당국의10시 통행금지 명령을 시민들은 지키지 않았다. 파출소가 불타고 박정희의사진도 끌어 내려져 짓밟혔다.
정부는 18일 자정을 기해 부산에 비상계엄령을 선포하고 공수부대를 긴급 투입했다. 그러나 오히려 시위는 20일에 이르러 인근 마산과 창원으로번져나갔다. 마산은 4·19 혁명의 도화선이 된 3.15 의거의 민주 성지였다. 경남대 학생과 시민들이 화염병과 각목 등으로 경찰과 맞섰다. 정부는마산 창원 지역 공업단지의 노동자들이 일어서는 것을 두려워했던 것 같다. 걷잡을 수 없이 확산되는 사태 앞에 박 대통령은 20일을 기해 마산과 창원에 위수령을 선포했다. 부산과 마산에서 1,563명이 연행되었고 그중 89명이 재판에 회부되었다. 그중 20명이 실형을 받았다. 군대의 힘으로 진압한 이 사건을 우리는 ‘부마항쟁‘이라고 부른다.
박정희와 유신 독재를 향한 국민의 증오와 염증이 이렇게 드러났음에도대통령의 주변 인물들은 이를 철저히 묵살했다. 유신 독재를 지탱하는 가장 큰 기둥이었던 중앙정보부의 눈으로 보아도 더 이상 유신의 지속은 불가능한 것으로 보였을 텐데 말이다. - P181

그러나 우리는 결코 박 대통령의 불행한 죽음을 기뻐하지 않았다. 장기 독재의 종식은 환영할 일이었지만 ‘암살‘이라는 폭력은 정당화될 수 없는 비열한 행동이었기 때문이다. 남편은 애석해했다. 이승만 대통령이 그랬듯이 박 대통령도 조만간 국민들 앞에 스스로 굴복할 수밖에 없었는데 ‘궁정 모반‘이 일어났다고 불의가 불의를 단죄할 수 없으며 그것은 정의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박 대통령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인해 민주화 운동의 흐름이 혹시 단절되고 왜곡되지 않을까 우려했다.
김재규는 군사 법정에서 의인처럼 행동했다. 부마항쟁의 실상을 보고하니 대통령은 몇십만 명쯤 차지철 경호실장은 몇백만 명쯤은 죽어도 좋다고 했다는 것이다.
"박정희 대통령이 건재하는 한 한국의 자유민주주의를 되살릴 수 없다고 판단하고, 같은 고향, 동기, 상관이기도 한 개인적 정분을 끊고 야수 같은 심정으로 유신의 심장을 쏘았다."
남편은 <뉴스위크>와의 인터뷰를 포함해 일관되게 김재규를 의인으로보는 시각과 운동에 반대했다. 그는 말했다.
"민주주의는 국민의 힘으로, 선거를 통해서 이루어지며 쿠데타나 암살로 얻어디운 것이 아니다." - P1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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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9년 1월, 이런 편지를 받았다.

색스 박사님,

제가 겪는 (아주 특이한) 문제를 한 문장으로, 비의학적 용어로 말씀드리자면 읽지를 못합니다. 음악이든, 뭐가 됐든 읽지 못해요. 안과에서는 시력검사판의 맨 아랫줄까지 한 글자씩 전부 읽을 수 있어요. 하지만 낱말은 읽지못하고, 음악에서도 같은 문제가 있습니다. 이 문제로 몇 년을 시달리면서 최고의 의사들을 만났지만 아무도 도움이 되지 못했어요. 박사님께서 시간을 내어 저를 봐주신다면 정말로 기쁘겠습니다.

진심을 다하여,
릴리언 칼리르 드림 - P15

후방피질위축증PCA 을 처음 공식적으로 기술한 것은 1988년 프랭후 벤슨의 연구진이었지만, 알려지지 않았을 뿐 훨씬 오래전부터 있었던 것은 확실하다. 하지만 벤슨 연구진의 논문이 돌풍을 일으켰고, 현재까지 10여 건의 사례가 기술되었다.
후방피질위축증을 앓는 사람들은 시력과 움직임이나 색깔을 인지하는 능력 같은 시지각의 기본 요소는 잃지 않는다. 하지만 글 읽기나 사람 얼굴, 물건을 인지하는 데 곤란을 겪으며 이따금 환각이 나타나는 등 복합적인 시지각 장애의 경향을 띤다. 또한 시지각적 공간지각 결함이 심해질 수도 있는데, 그렇게 되면 사는 동네나 심지어는 집에서도 길을 잃는다. 벤슨은 이를 ‘환경 실인증‘이라고 불렀다. 그밖에 좌우 혼동, 쓰기와 계산 장애, 심지어 자신의 손가락을 인지하지 못하는 실인증의 네 가지 주요 증상을 보이는 게스트만증후군도 많이 나타난다. 일부 환자는 색을 구분하고 분류할 수는 있지만 색의 이름은 말하지 못하는 이른바 색깔실어증을 보일 수 있다. 이보다 희귀한 경우지만, 시각적 조준과 움직임 추적에 장애가 나타나기도 한다.
이런 장애와는 대조적으로 기억력, 지능, 통찰력, 개성은 이 병의 말기까지 보존되는 경향을 보인다. 벤슨이 기술한 모든 환자가 "자신의 과거를 말할 수 있고, 최근 일어난 일도 인지하며, 자신이 처한 곤경에 대해놀라운 통찰을 보여주었다".
후방피질위축증은 분명히 퇴행성 뇌질환이지만, 더욱 흔한 알츠하이머병과는 상이한 특징을 보이는 듯하다. 알츠하이머의 경우에는 기억력과 사고력, 언어의 이해와 사용, 행동과 성격까지 총체적 변화가 나타나며, 일반적으로는 (어쩌면 다행스럽게도) 현재 일어나는 일에 대한 통찰력을 초기에 상실한다. - P28

릴리언이 내 사무실이나 골목길 일대의 많은 상점에 있는 물건들을 잘분간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니 그녀가 익숙한 것, 암기한 것에 얼마나 의존해서 생활하는지, 어째서 자신의 아파트와 동네에서 벗어나지 않는지 명확해졌다. 어떤 장소를 자주 찾다보면 점차 그곳에 익숙해지긴 하겠으나 엄청난 인내심과 비상한 수완, 전적으로 새로운 분류 및 기억 체계가 필요한, 너무나 복잡한 일이 될 것이다. 이번 방문을 계기로 앞으로는 내가 릴리언의 아파트로 찾아가는 왕진 방식을 고수해야겠다는 생각이 확고해졌는데, 릴리언이 스스로 정돈되었다고 느끼고 주인으로서 편안하게 느낄 수 있는 환경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외출은 그녀에게 갈수록 초현실적인 시각적 모험이 되었다. 환상이 넘치지만 때로는 무시무시한 착각이 기다리는 - P36

릴리언은 발병한 후로 11~12년까지 창의적이었고 원기 왕성했다. 시각이면 시각, 음악이면 음악, 감정이면 감정, 지능이면 지능 등, 자기 안에 있는 모든 자원을 끌어내 자신을 지탱해왔다. 가족과 친구들, 특히 남편과 딸이 큰 힘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제자들, 동료들 그리고 슈퍼마켓이나 거리에서 도움을 주는 사람들, 모든 사람이 그녀의 도전을 도와주었다. 그녀가 실인증에 대해 보여준 적응력은 실로 대단했다. 이는 끊임없이 진행되는 영구적 인지 장애에 맞서 자신을 단단히 세우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하는지 가르쳐주는 소중한 수업이었다. 그러나 릴리언이 병에 대처하는 수준을 넘어서서 초월하게 해준 것은 기술, 즉 음악이었다. 이점이 확연하게 드러난 것은 릴리언이 피아노를 칠 때였다. 피아노를 연주한다는 것은 감각과 근육, 육체와 정신, 기억과 환상, 지성과 감성, 자신의 총체, 살아 있음이 총체적으로 융합된, 일종의 초융합적 상태를 필요로 하는 활동이었다. 그녀의 음악적 능력은 천만다행하게도 병에 영향받지 않고 온전히 유지되었다.
릴리언의 연주는 내가 방문할 때마다 조금씩 난해해지는 듯했는데, 그녀에게 예술가라는 사실을 확인시켜주었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했다. 이는 어떤 문제들이 닥치더라도 그녀가 여전히 기쁨을 누리고 베풀 수 있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의미했다. - P41

그런데 내가 그녀가 전에 들려주었던 하이든 4중주곡을 언급하자 릴리언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제가 정말로 홀딱 빠졌던 곡이에요. 전에는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었어요. 연주하는 사람이 아주 드물거든요." 릴리언은 그 음악이 얼마나 뇌리를 떠나지 않았는지, 어떻게 머릿속으로 하룻밤 사이에 피아노곡으로 편곡했는지, 그때 일을 다시 한 번 이야기했다. 내가 다시 연주를 청했다. 릴리언은 못한다고 했지만 다시금 조르자 피아노 쪽으로 몸을 옮겼는데 엉뚱한 방향으로 향했다. 클로드가 살며시 바로잡아주었다. 피아노에 앉은 릴리언은 첫 음을 잘못 쳤는데, 불안하고 혼란스러운 기색이 역력했다. "지금 내가 어딜 친 거죠?" 릴리언은 울음을 터뜨렸고, 나는 가슴이 무너졌다. 하지만 이내 제자리를 찾아 아름다운 연주를 시작했다. 높이 울려 퍼지다가 서서히 녹아들어 안으로 휘감기는 소리였다. 클로드는 놀라고 감동받았다. "2~3주간 전혀 연주하지 않았거든요." 클로드가 내게 속삭였다. 릴리언은 연주하면서 허공을응시했고 입으로는 선율을 흥얼거렸다. 릴리언이 전에 보여주었던 힘과 감정이 온전히 실린 절정의 예술적 연주 속에서 하이든의 음악은 격랑, 음악적 격론에 휘말려 들어갔다. 연주가 피날레를 향하고 마무리 화음이울리면서 릴리언이 말했다. 간결하게 "다 용서했어." - P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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