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 청문회는 시민들의 항쟁을 유발한 발사 명령을 누가 했는가 하는 진상 규명이 초점이었다. 남편도 증인으로 채택되었다. 그 밖에 신현확(국무총리), 정웅(제31사단장), 이희성(계엄사령관), 최규하(대통령), 정호용(특전사령부 사령관) 등이 증언대에 섰다. 관련자들이 아직 권력을 잡고 있는 상황이었다. 발포는 자위권 행사라는 적반하장의 변명들이 버젓이 나돌았다. 아물지 않은 상처가 다시 헤집어지는 아픔이었다. 소득이라면 청문회를 통해 광주민주화운동에 대해 무관심했던 많은 국민이 그 실상의 일부를 알게 되었다는 점일 것이다.
1988년 11월 23일 전두환 전 대통령은 백담사로 사실상 유배를 떠났다. 그리고 1989년 12월 31일 그는 국회에 출석해 증언대에 섰다. 예견된 것이지만 핵심적인 내용은 비껴갔고 자신의 통치 행위에 대한 해명성 답변으로일관했다. 열쇠를 쥐고 있던 최규하 전 대통령은 시종 침묵했다. 14시간의증언 중 정작 전두환 씨의 증언은 2시간여에 불과했다. 분노의 감정만으로는 진실을 규명할 수 없다는 교훈을 주었다. - P289

1990년 1월 22일, 전날부터 눈이 많이 내려 전국이 꽁꽁 얼어붙었다. 저녁 9시 뉴스에서 충격적인 장면을 보았다. 청와대 접견실에서 노태우 대통령을 가운데 두고 제3당 통일민주당 김영삼 총재와 제4당 신민주공화당 김종필 총재가 나란히 선 긴급 기자회견 모습이었다. 3당이 합당하여 민주자유당(민자당)을 만든 것이다. 바로 그날 저녁 박태준 민정당 대표위원이 초청한 상임위 경제과학위원회 위원 부부 만찬에 참석했는데 그 자리에서도 합당 이야기는 없었다. 놀라운 일이었다. 남편도 전격적인 합당 발표를 사전에 몰랐던 모양으로 놀라움과 분노를 금치 못했다.
정계 개편 소문은 1989년 여름부터 솔솔 불었다. 여소야대 정국에서 노대통령은 야당 총재들과 만남이 잦았다. 이보다 앞서 정계 개편 구도를 기확한 사람으로 알려진 박철언 정무장관으로부터 김원기 원내총무 채널을통해 남편 역시 제안을 받았다고 한다. 그리고 차기 대통령을 보장하겠다는 언질이 있었다고 했다.
"대통령은 국민이 시켜주는 것이지 누구로부터 보장받는 자리가 아니다. 우리는 야당으로 국민의 심판을 받아 집권할 것이다."
그는 단호하게 거절했다는 것이다. 그는 이번에도 시험에 들지 않았다. 남편은 자서전 구술 작업을 하면서 파란만장했던 지난 인생에서 이 대목을 회고할 즈음 감회에 젖어 말했다.
"내가 어떤 세상을 살아왔습니까! 원칙을 지키지 않고 지혜롭지 않았으면 벌써 죽었을 것입니다." - P293

통치에 익숙한 집권당은 여소야대의 불편함을, 김영삼 총재는 제2야당이라는 불명예를, 김종필 총재는 군소 야당의 비애를 각각 견디지 못해 한테이블에 앉은 것이다. 각각 꿈이 달랐을 것이다. 민정당은 집권 연장을, 김영삼은 대권을, 김종필은 내각제를 추구했을 것이다. 이 동상이몽을 노태우는 ‘역사적 사명‘, 김영삼은 ‘하나님의 뜻‘, 김종필은 ‘구국의 결단‘이라고 말했다. 좀 불편하더라도 여야가 협조할 것은 협조하고 견제할 것은 견제하면서 국민이 선택하고 명령한 정당 구도를 노태우 대통령이 끝까지 유지했다면 우리나라의 민주주의는 훨씬 성숙한 모습으로 자리를 잡지 않았을까. 권위적이지 않으며 기다릴 줄 아는 그분의 성품이 역사에 큰 기여를 할 수 있었는데 아쉬운 대목이다. 노태우 대통령이 선거공약으로 약속한 ‘중간 평가‘를 제1야당 당수가 유보시키고 야당이 여당의 도움을 받아 여성들의 염원인 가족법 개정안을 통과시켰던 것처럼 말이다. - P294

그러나 정작 단식투쟁으로 쟁취한 두 차례 지자체선거는 참패였다. 두어가지 원인이 있었다. 강경대군 사망 사건과 정원식 총리 밀가루 봉변 등과격해지는 운동권에 대한 국민들의 냉담한 시선이 야당으로부터 등을 돌리게 한 것이었다. 이때의 상황에 대한 원로 두 분의 우려도 매우 컸다. 그는 몹시 당황하고 난감해했다.

1980년대 후반에 젊은 투사들 사이에서 드러났던 현실 대응에 대해서는 내가 공감할 수 있는 영역이 별로 없어 냉담했다. 세계의 정치개혁 운동사에서, 어느 나라의 경우에나 큰 공통점이 있다. 즉, 우익은 이권으로 뭉치고 좌익은 이념으로 모이지만 동시에 우익은 이권분배의 크기로 분열하고 좌익은 이념을 지나치게 정밀화, 세밀화하는 ‘작음‘의 고질적 아집 때문에 망한다는 역사적 경험이다.
- 리영희

안기부, 언론도 모르는 사이에 지하 골방에서 하룻밤에도 몇 명씩 약관 20세 나이의 운동권 지도자들이 탄생했다. 대여섯 개의 가명을 바꾸어가며 사용하는 그들의 사회적, 역사적 실천에 대한 ‘비평‘은 대학가와 공단 주변을 넘나들며 엄청난 학습 열풍을 불러일으켰다. 어른들은 젊은 세대가 급격히 마르크스주의레 경도되는 것을 깊이 염려했다.
-문익환 - P295

김대중-김영삼-정주영-권영길, 야당의 오랜 동지가 여당으로 나오고 재벌 총수와 노조 대표도 출마한 대선이었다. 그의 나이 67세였다. 이번이 마지막 도전이라고 보았으며 승리할 것이라는 믿음이있었다.
그러나 우리는 관권, 금권, 언권 어디에서도 약세였다. 그즈음 독재가 물러간 자리에 새로운 권력이 등장했으니 바로 거대 언론이었다. 그들 일부 언론은 펜을 칼같이 썼다. 이 일부 언론의 노골적인 여당 지지에 정주영의 국민당이 광고지면을 통해 공공연한 비밀을 폭로했다.
"언론계에는 김영삼 장학생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조직적으로 신문·방송에 영향력을 심고 있는 것은 이제 비밀이 아닙니다."
이 역시 민주사회에서는 놀라운 일이었다. ‘뉴 DJ 플랜‘ 전략을 세워 대응했다. 오랫동안 굳어진 ‘강경한 DJ‘ 이미지를 혁신하려는 취지였다. 그는가만히 있어도 왠지 엄숙하고 근엄해 보인다. 젊은이들에게는 무섭게 느껴진다고 한다. 사실 그는 전혀 그렇지 않은 사람인데도 말이다. 그는 웃을 때시골 사람처럼 순박해 보이고 때로 어린이같이 천진해 보이기도 한다. 나는 그에게 가능하면 자주 많이 웃으라고 충고했다. 특히 유세 중 목소리를 높일 때 표정이 굳어지니 톤을 낮추고 천천히 말하도록 권했다. 그가 톤을 높일 때가 문제였다. 얼굴이 굳어지고 급하게 말하면 사투리가 불쑥 튀어나오기도 한다. 사투리를 쓰지 말 것을 주문한 전문가의 조언에는 한두 번해보더니 단호하게 거절했다.
"자연스럽게 나오는 사투리도 쓰지 말라면 내 정체성을 부정하라는 것입니다."
그는 1992년 11월 인촌 김성수 선생동상 제막식에서 전두환 대통령과 처음으로 대면했다. 그냥 웃으면서 만났다고 한다. 그리고 박정희 대통령묘소를 참배하고 화합의 메시지를 천명했다. 이때부터 텔레비전에 출연할때 여자처럼 화장을 했다. 지금은 대통령 후보들이 다 하고 있지만 본격적인 화장은 그가 처음일 것이다. 그리고 1971년 대선부터 주장해온 텔레비전 토론을 이번에도 제안했다. - P299

부산 초원복국집 사건이었다. 김기춘 법무부 장관 주재로 12월 11일 새벽 주요 기관장들이 선거 대책 모임을 갖고 ‘지역감정을 유발해서김영삼 후보를 대통령으로 당선시키자고 모의했다‘는 폭로였다. 대화를 담은 녹음 테이프의 녹취 내용과 참석자들의 면면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부산시장과 경찰청장, 안기부 지부장, 기무사 지부장, 교육감, 검찰 지검장,
상공회의소 회장 등 부산 지역 기관장들을 집합시켜놓고 법무부 장관이란사람이 한 말이다.

지역감정이 유치한지 몰라도 고향 발전에는 긍정적이다. 이번에 김대중이나 정주영이 어쩌고 하면 부산,경남 사람들 영도다리에 빠져 죽읍시다. 하여튼 민간에서 지역감정을 좀 불러일으켜야 돼. 좀 노골적이어도 괜찮지, 뭐. 아마 우리 검찰에서도 양해할 거야. 아마 경찰청도 양해••••••.

정말 믿고 싶지 않은 사실이었다. 확실히 김영삼 씨는 특이한 분이었다. 우리 같으면 백번 사죄할 대목에서 그는 자신을 떨어뜨리기 위한 공작이며 자신이 이 사건의 최대 피해자라고 펄펄 뛰었다. 주요 언론 또한 사건의 본질을 놔두고 곁가지 불법 녹음에 초점을 맞추었다. 김영삼 41%, 김대중33%, 정주영 16%
- P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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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우리 국민의 힘으로 민주화를 이룩하는 것은 시간문제입니다."
체포될지 모른다는 긴박함에서 연금 해제로 반전된 상황을 당시 주한 미국 대사였던 제임스 릴리가 《아시아 비망록>(원제는 중국통China Hands)에서 밝히고 있다. 레이건 친서가 완벽히 준비해놓은 계엄령을 무산시키는데 결정적 역할을 한 것이었다.

친서가 도착한 것은 17일이었으나 청와대는 면담을 거절했다. 딘롭정치 담당 참사관이 의분을 터뜨리며 싸워 19일 오후 2시 단독으로전 대통령을 예방했다. 그날 우연히 한미연합사 사령관(윌리엄 리브시William Livsey)을 오찬 자리에서 만나 ‘친서 전달 예정 사실을 알리고 시위를 진압하는 데 군을 동원하지 말라‘고 강조할 뜻을 알렸다.
아무 말이 없어 동조라고 생각했다. 미국 대통령으로부터 서울에 와있는 가장 높은 장군과 외교관까지 의견 일치를 강조할 수 있게 되었다. 전 대통령은 90분 면담 내내 굳은 표정이었다. 언제나 활기에 차있고 대화를 독점해왔는데 이날은 깊은 고뇌에 빠진 사람처럼 보였다. 레이건 대통령의 친서는 미국의 안보 공약을 재확인하면서 한국대통령의 평화적 정권 교체 공약에 대한 격찬을 잊지 않고 한국의 계속적인 정치 발전을 위해 정치범을 석방하고 권력을 남용한 정치 탄압 관리를 처벌하고 자유 언론을 신장하라고 권했다. 전 대통령이 친서를 읽은 다음 나는 계엄령 선포에 대한 미국의 입장을 단호하고 분명하게 언급함으로써 레이건 대통령의 우정 어린 친서 내용을 보충하면서 사태의 심각성을 그에게 각인시켰다. - P273

한편 6.10 대회를 앞둔 하루 전날 연세대 출정식의 맨 앞줄에 참여했다가 직격 최루탄을 맞고 중환자실에서 사경을 헤매던 이한열이 7월 5일 끝내 사망했다. 그는 6월 항쟁이 진행되는 걸 지켜보고, 그리고 그 성공에 안도했던 것일까? 이한열은 6월 항쟁이 저물고 온 국민이 승리의 기쁨을 누릴 때 스물두 살의 젊음을 거두었다. 그의 장례식이 9일 ‘애국학생 이한열열사 민주국민장‘으로 연세대에서 거행되었다. 학생, 시민, 정치인, 재야 단체 등 10만여 명이 교정을 가득 메웠다.
남편은 아침 일찍 연세대로 출발했다. 나는 집안일을 보고 나중에 합류했다. 이날의 하이라이트는 이한열의 어머니와 문익환 목사였다. 추도사릴레이 마지막 순서는 전날 진주교도소에서 석방되어 방금 진주에서 올라온 문 목사였다. 그는 연단에 올라 목숨을 던진 젊은이들의 이름을 한 사람씩 목 놓아 불러 26명을 초혼했다. 교정은 오열의 바다가 되었다. "전태일열사여! (・・・) 김상진 열사여! (・・・) 김종태 열사여! (・・・) 김세진 열사여!
(···) 박종철 열사여! (··…) 이한열 열사여!" 마지막으로 ‘이한열 열사‘를 부르자 허우적허우적 연단으로 올라간 이한열의 어머니 배은심 여사는 절규했다.
"이제 다 풀고 가거라. 엄마가 갚을란다. 한열아! 한열아! 가자. 우리 광주로!"
부모는 죽어 청산에 묻고 자식은 죽어 어미 가슴에 묻는다고 하지 않던가. 오, 어머니! 어머니의 외침에 교정은 모든 게 얼어붙은 듯 일시에 적막해졌다. 그리고 이내 천지가 떠나가는 듯한 오열이 덮쳤다. 소복 차림의 이애주 교수는 이한열어 쓰러진 자리인 교문 앞에서 살을 풀어 부활하는 춤을 바쳤다. 그 얼마나 오랜만의 현장 참여인가. 남편은 지팡이를 짚은 채.
나는 관절염으로 무거운 다리를 끌고 행렬과 함께 갔다. 앞줄에 김대중, 김영삼, 문익환이 나란히 서고 나는 이태영 선생 등과 바로 뒷줄에 섰다. 여성들은 민가협 회원들과 함께 머리에 삼베 수건을 쓰고 행렬 뒤를 따랐다.
거리 가득 만장을 펄럭이며 도도히 흐르는 장례 행렬은 시청 앞 광장으로 향했다. 장관이었다. 신촌 로터리에서 노제를 지낼 때는 30만 명이던 햄렬이 서울시청에 이르자 100만여 명으로 늘어났다. 선두가 시청앞 광장에도착했음에도 장례 행렬의 후미는 아직 연세대 교정을 빠져나오지 못하고있었다.
행진 중간에 뉴스가 나왔다. 정부는 김대중, 김상현, 문익환, 예춘호, 백기완 등 2,335명의 사면복권을 발표했다. 박종철이 던진 불씨 하나가 빈들의 불길로 번진 그 민주화 들불은 이한열의 장례식에서 마지막으로 타올랐다. 박종철은 부산에서 태어나 성장한 영남의 아들이고 이한열은 광주가낳고 기른 호남의 아들이다. 6월 항쟁의 성격을 이보다 더 잘 웅변하는 현상이 있을까? 이 거룩한 두 죽음은 역사를 창조했다. 그들은 한 알의 밀알처럼 썩어 온 들판에 풍성한 민주화의 열매를 선사했다. 박종철은 모란공원 민주열사 묘역에, 이한열은 망월동 5·18 묘역에 잠들어 있다. 이 두 청년은 1980년대 반독재와 민주화를 위해 목숨과 미래를 던진 젊은이들의 상징이었다. 우리는 시대정신을 구현하고 대중의 동의를 얻어낸 이들을 영웅이라고 부른다. 그런 의미에서 그들은 진정 이 나라 민주주의의 영웅이다.
남편의 나이 이제 62세, 박정희가 18년 집권하고 운명한 나이다. 그러나그는 이제야 출발선에 다시 선 것이다. 나역시 자유로워져 1987년 7월부터는 다이어리가 존재한다. 나는 그동안 압수 수색이 두려워 기록을 하지않고 살았다. 사화가 많았던 조선 시대에 글을 숭상했으면서도 기록 문화가 발달하지 못한 이유를 알 것 같다. - P2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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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년 5월에 광주항쟁 3주년을 기해 가택 연금 중인 김영삼 전 총재가 무기한 단식투쟁을 시작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그것은 1980년 5.17 계엄령 이후 야당 정치인의 투쟁으로는 처음이었다. 이는 야당과 재야 민주세력을 다시 결집시킨 깃발이 되었다. 목숨을 담보한 23일간의 단식은 민주화추진협의회(민추협)가 태동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이어서 신민당이 탄생했다. 우리는 김영삼 씨의 단식투쟁을 지지하기 위해 6월 4일 70여 명의 교포들과 함께 워싱턴의 듀폰 서클에서 ‘김영삼을 구출하라‘ 등의 팻말을 만들어 시위했다. 피켓을 손에 들고 목에 걸고 한국 대사관과 국무부, 백악관으로 이어지는 가두에서 시위를 했다. 남편은 6월 9일 자 <뉴욕 타임스>에 칼럼을 기고했다. 김영삼 씨의 단식이 한국 민주화 운동의 전기가 될 것이라고 큰 의미를 부여했다. 미국 조야의 여론이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워싱턴의 문동환, 뉴욕의 임정규, 로스앤젤레스의 김상돈, 샌프란시스코의김재준 목사가 각각 그 지역 대책위원회 위원장을 맡는 조직을 만들어 교포들과 함께 미국 전역에서 모국의 민주화 운동을 원했다. 또 8월 12일에는 김재준 목사 송별 만찬이 있은 후 김영삼 씨와 공동성명을 발표했다 - P247

정부는 2월 12일 총선 전에 있을 그의 귀국을 막기 위해 필사적이었다.
서울에서 안기부전 단장이 워싱턴으로 날아왔다. 총선 전에는 귀국을 절대 허용할 수 없으며 신변이 위험할 수 있다고 겁을 주었다. 청와대 정무비서관도 귀국하면 다시 구속될 것이라고 위협을 했다. <뉴욕 타임스> 기자가이 말을 전하면서 그래도 귀국할 것이냐고 전화를 했다. 그래도 귀국한다고 하니 이를 크게 보도했다. 그런 이후 ‘제2의 아키노가 되게 하지 말자‘라는 이슈로 텔레비전과 신문 인터뷰 요청이 쇄도했다. 굉장한 반응이었다. 사태가 이쯤 되자 미국 정부도 태도를 바꾸었다. 그들은 남편을 초청해국무부 직원 200여명 앞에서 강연하는 자리를 만들었다. 그의 안전 귀국보장과 전 대통령 방미 안건을 연계하는 무언의 압력이었던 셈이다. 그즈음전 대통령의 두 번째 미국 방문이 추진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키노 상원의원이 공항에서 사살(1983.8.21) 당한 일이 생생했을 때이므로, 20여명의 저명인사들이 신변 안전을 위해 그와의 동행을 자원했다. 하원의원 2명(에드워드 페이건Edward Feighan, 토머스 폴리에타Thomas Foglietta), 카터 행정부 국무부 인권 담당 차관보 퍼트리샤 데리언 Patricia Derian 과 전직 대사 토머스 화이트Thomas White, 퇴역 해군 대장, 세계변호사협회 회장, 대중 가수, 목사 등등이 자원했다. 그리고 수십 명의 기자단이 동행 취재를 했다.
우리는 1985년 2월 6일 정든 워싱턴을 떠나 일본 나리타공항에서 1박을하고 8일 낮에 귀국했다. 《뉴스위크》지는 커버스토리로 선정해 ‘폭풍의 귀국Storming Homecoming‘이라고 제목을 달았다. 우리 일행은 일반 승객과 함께줄을 서서 입국 심사를 받기로 약속했다. 공항 빌딩에 들어서자 한 무리의 사복 경찰이 뛰어나와 우리 내외만 떼어 끌고 가려 하자 동행인들은 우리를 놓치지 않으려고 결사적이었다. 이 과정에서 경찰이 폭력을 휘두르는모습을 동행 기자들이 고스란히 기록해 전 세계에 방영되었다. 부끄러운시절의 한 풍경이다. 특히 적극적으로 우리를 보호하려고 한 데리언 여사가 많은 폭행을 당했다. 자신의 차관보 사무실 문에 ‘김대중을 구출하자‘라는 스티커를 붙여놓았던 데리언은 남편을 로버트 케네디 인권재단 자문위원으로 추천하는 등 많은 도움과 격려를 해준 열렬한 지지자였다.
우리는 결국 일행과 격리되어 커튼이 쳐진 마이크로버스에 강제로 태워졌다. 동교동 집은 공사할 때 두르는 가림막에 에워싸여 있었다. 참으로 위험한 귀환이었다. 2년 3개월 만의 착잡한 귀환이었다. 2만여 명의 환영 인파가 마중을 나왔다는데 우리는 한 명도 못 보았다. 우리 대신 동행한 인사들이 영웅적인 환영을 받았다니 정말 감사하고 잘된 일이었다. - P251

친위 쿠데타를 일으켜 계엄령을 선포할지 모른다는 루머도 떠돌았다. 1986년 가을 아시안 게임 후가 될 것이라는 불길한 소문이 돌았다. 훗날의기록을 보면 이는 사실이었다.

11월 2일 장세동 부장이 또다시 전 대통령의 지침을 전달했다. 전 대통령의 구상은 11월 8일 토요일 저녁 11시에 비상 국무회의를 소집하고 자정을 기해 국회를 해산하고 계엄을 선포하면서 비상조치를 발표한다는 것이었다. 김대중은 군에서 죽이기로 했으니 정계에서 은퇴시키고 재수감과 외국행을 택일하도록 하겠다는 것이었다.
-- 박철언, 바른 역사를 위한 증언에서

이 같은 계엄 선포와 비상조치안이 나온 배경에는 10월 28일 일어난 전국 26개 대학 학생들의 건국대 점거 농성 사건이 있었다. 농성 나흘째 무려 1,274명의 학생을 연행해 구속한 학생운동 역사상 최다 구속을 기록한 사건이다. 그들은 그만큼 ‘사형수 김대중‘이 대통령 되는 것을 두려워했다.
그동안 외신 기자들의 질문이 있었다.
"만일 당신이 대통령에 출마하지 않는다면 그들이 직선제를 수용할 의사가 있다고 하는데 당신의 생각은?"
고심하던 남편은 더 이상 젊은이들의 희생을 두고 볼 수 없다며 11월 5일 제안했다.
"직선제를 받아들이면 대선에 출마하지 않겠다."
의외의 곳에서 화답이 왔다. 그즈음 서독을 방문 중인 김영삼 민추협 공동의장이 남편의 불출마 선언 소식을 듣고 기자들에게 말했다.
"김대중 씨의 복권이 이루어지면 내가 차기 대선 후보를 양보하겠다."
그 후 남편은 ‘불출마 선언‘을 뒤집었다고 비난을 받았다. 그러나 김영삼씨의 ‘대선 후보 양보‘ 기자회견은 문제를 삼지 않았다. 이렇게 김대중과 김영삼을 재는 잣대는 처음부터 달랐다. 그러나 이번에도 비상조치설의 디데이는 조용히 지나갔다. 김대중이 불출마 선언을 해서인지 아니면 미국 중간선거에서 민주당이 승리했기 때문인지 아무튼 별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언제 다시 잡혀갈지 모르는 상황에서 그는 책을 골라 쌓아놓았다.
"내가 감옥에 가거든 이 책들을 차입해주오."
남편은 그저 덤덤하게 말했다. - P262

5.18 광주민중항쟁 7주년 기념 미사가 거행되던 5월 23일이었다. 김수환 추기경의 의미심장한 미사 강론에 이어 7주기 및 희생자 추모 미사가 끝나자 김승훈 신부가 단상에 올라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 명의의 성명서를 읽어 내려갔다.
"‘박종철 군 고문치사 사건은 수사 내용이 조작되었습니다. 그를 직접 고문해 죽음에 이르게 한 진범은 따로 있습니다. 범인 조작의 각본은 경찰에의해 짜여졌고 또 현재도 진행되고 있습니다."
이 한 장의 성명은 국민의 의분을 폭발시켰다. 종교계와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민통련)을 비롯한 재야의 각계각층, 그리고 마지막으로 통일민주당은 손을 잡고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약칭 국본)‘를 5월 27일 창립했다. 해방 후 최대 조직이었다. 국본은 고문으로 김수환 추기경, 함석헌 선생, 문익환 목사, 김영삼 민주당 총재, 연금 중인 김대중 상임고문을 선임했다. 국본은 전두환 대통령이 노태우 씨에게 권력을 승계하는 절차를 진행하려는 6월 10일 민정당 전당대회 날짜에 맞추어 전국적인 대규모 집회를기획했다. ‘6.10 대회‘의 정식 명칭은 ‘고문살인은폐조작규탄 및 민주헌법쟁취 범국민대회‘였다. 이날 전국 16개 도시에서 150만 명이 참여했다.
국민들은 국본의 행동지침을 따랐다.
청년들은 최루가스가 안개처럼 자욱한 거리를 질주하고 여성들은 손수건을 꺼내 흔들어 이들을 응원했다. 그런가 하면 운전자들은 경적을 울리며 달렸다. 전국의 교회와 사찰은 타종으로써 참여했다. ‘독재타도‘, ‘호헌 철폐! 천지를 뒤흔드는 함성이었다. 사무실의 직장인 넥타이 부대가 거리로 뛰쳐나왔으며 빌딩에서는 두루마리 화장지와 손수건 등이 꽃잎처럼떨어졌다. 길거리의 상인들은 시위대에게 음료수를 무료로 나눠 주었다.
가정주부들은 김밥으로 시위대를 격려했다. 영호남이 하나로 외쳤으며 남녀노소가 한 몸이었다. 해방 후 우리에게 그 같은 대동제를 지낸 날이 또 있었을까? - P2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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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인가, 굳게 닫힌 대문이 열리더니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 들어왔다. 그 맨 앞에는 학생처럼 보이는 청년이 포승에 묶여 있었다. 그들은 현관에 들어와 서서 응접실 의자를 가리키며 무엇인가 그 청년에게 이야기하더니 또 우르르 나갔다. 그 청년은 당시 서울대 총학생회장이며, 지금 한나라당 심재철 의원인데 그의 허위 자백을 받아 사건을 조작하려고 해도 그가우리 집에 온 사실이 없어서 내부 묘사를 못하니까 현장 답사를 시킨 것이었다. 고문에 굴복해서 허위 자백을 하고 법정에서 결정적으로 불리한 증언을 한 또 한 사람이 정년이다. 광주사태 배후조종 자금의 금액을 정하는 단계에서 수사관이 했다는 말이다.
"학생이 1,000만 원을 받았다면 너무 많지. 그러니까 500만 원을 받은것이다. 잘 기억해두어라. 500만 원이다."
정동년이 출옥하여 양심선언을 하며 폭로한 말이다. 왜 정동년인가. 그들이 가택수색을 해서 가져간 방명록에서 종이 한 장을 통째로 사용해 호기롭게 서명한 ‘전남대 복학생 정동년‘을 발견했던 것이다. 그때 남편은 부재중이었으며 그리고 더욱이 학생들은 만나지 않던 때였다. 우리가 그를 처음 대면한 것은 1985년 미국 망명에서 돌아온 후 그가 사죄하러 동교동을 방문했을 때다.
처음에는 ‘국기문란 사건이던 것이 수사 과정에서 ‘내란 음모 사건‘으로, 다시 ‘김대중 내란 음모 사건‘으로 발전했다. 오직 김대중 한 사람을 죽이기 위한 시나리오의 변화 과정이었다. 공소장은 13만 자로, 낭독하는 데만 6시간 20분이 걸렸다. 6명의 검찰관이 교대로 했다. 우리는 처음에 내란음모죄로 기소된 줄 알았는데 유독 남편에게만 국가보안법이 추가되었다. 내란 음모는 법정형의 상한이 무기징역이므로 사형 죄명이 하나 더 필요했던 것이다. 국가보안법상의 ‘반국가단체 수괴‘로 꾸며낸 것이 바로 ‘한민통의장‘이었다.
이야기는 거슬러 올라간다. 1973년 ‘한민통‘ 미국 지부를 만들고 일본지부를 결성하려던 차에 납치당해 끌려왔던 것이다.  - P214

면회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서의 슬픔은 이루 형언할 수 없었다. 눈물로 기도하며 남편과 아들의 한복 수의를 매만지면서 나마저 무너져선 안된다고 마음을 다졌다. 9월 13일 남편의 최후진술이다.

작년 11월 5일 박 대통령의 국장을 집에서 단 1초도 빼놓지 않고 지켜보았는데 아직도 내 기억에 깊게 남아 있는 것은 김수환 추기경이 말씀한 "하느님께서 우리 모두에게 박 대통령의 죽음의 뜻을 깨닫게 해주십시오"라는 말이었습니다. ( ••• ) 나는 공동 피고 여러분께 유언을 남기고 싶습니다. 내 판단으로는 머지않아 반드시 민주주의가 회복될것입니다. 그때가 되거든 먼저 죽어간 나를 위해서든, 또 다른 누구를위해서든 정치적인 보복이 이 땅에서 다시는 행해지지 않도록 부탁하고 싶습니다. 내 마지막 남은 소망이기도 하고 또 하느님의 이름으로하는 내 마지막 유언입니다. - P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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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용하는 언어가 무엇이건 간에 읽기를 할 때 활성화되는 영역은 똑같이 하측두 피질의 시각단어형태 처리영역이다. 그리스어나 영어처럼 알파벳을 사용하는 언어나 중국어처럼 표의문자를 사용하는 언어나 거의 차이가 없다. 이는 데제린의 병변 연구와 뇌 영상을 이용한 연구를 통해 입증되었다. 또한 같은 영역의 과다 활동으로 기능의 항진이나 왜곡이 야기되는 다양한 ‘과잉‘ 장애로도 입증되었다. 이런 의미에서 실독증의 반대는 어휘 환시나 문서 환시, 즉 헛 문자를 보는 증상이다. 시각 경로(망막에서 시각피질까지 시각에 관련된 부위)에 장애가 있는사람들은 환시를 일으키는 경향이 있는데, 도미니크 피치의 연구진은 환시를 겪는 이 환자들의 4분의 1에게 "텍스트, 낱말, 낱자, 숫자, 음표 환시"가 나타난다고 추정한다. 피치의 연구팀이 밝혀냈듯이, 그런 문자 환각은 왼쪽 후두 측두 부위, 특히 시각단어형태 처리영역(손상을 입는다면실독증을 일으킬 수 있는 바로 그 영역)과 관련이 있다.
따라서 실독증 환자는 어휘 환시를 겪는 환자든 혹은 어떤 언어든 정상적인 읽기가 가능한 환자든 간에, 결론은 똑같을 수밖에 없다. 즉, 글을 배운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대뇌 우세반구(언어가 자리 잡은 반구)에 문자와 낱말을 (그리고 수학이나 음악 등의 다른 시각적 표기 부호도) 인식하는 기능을 담당하는 하나의 신경계가 존재한다는 점이다. - P88

여기서 심오한 물음이 떠오른다. 어째서 모든 사람에게 읽기 기능이 붙박이로 딸려 있는 것인가? 쓰기는 인류 문화의 역사에서 상대적으로 최근에 발명된 것인데?
말로 하는 의사소통(그리고 그 신경학적 기제)에는 자연선택이라는 점진적 과정을 거쳐 진화해온 모든 자취가 남아 있다. 선사시대 인류의 뇌 구조의 변천 과정은 정교한 두개골 속 틀과 여타 화석 증거를 통해 속속들이 밝혀졌으며, 더불어 성도聲道의 변천도 추적했다. 인류가 말을 시작한 시기가 수만 년 전임은 분명하다. 그러나 읽기 능력은 그렇다고 보기 어렵다. 문자를 사용한 역사가 5,000년 남짓이기 때문이다. 자연선택에 의한 진화의 산물로 보기에는 지나치게 최근의 일이다. 사람 뇌의 시각단어형태 처리영역이 읽기에 탁월하게 최적화되어 있다고 해도 특별히 이 목적을 위해 진화했을 리는 없다.
이것을 월리스 문제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앨프리드 러셀 월리스는 사람의 뇌에 잠재된 (언어, 수학 등) 많은 능력(원시 혹은 선사 사회에서는 거의 쓸모없었을 능력)의 역설에 깊이 경도되었다.
윌리스는 자연선택이 당장 유용한 능력의 발생에 대해서는 설명할 수있겠지만, 수만 년 뒤에 나타난 고등한 문화에서나 인정받을 만한 잠재적 능력의 존재는 설명하지 못한다고 느꼈다.
인류의 이러한 잠재력을 어떠한 자연 작용으로도 설명할 수 없었던 월리스는 하릴없이 초자연적 존재에 기댈 수밖에 없었다. 틀림없이 신이 사람의 정신 속에 그런 능력을 심어 넣은 것이라고 말이다. 월리스의 관점에서 신이 내린 선물로 이보다 좋은 예는 없었다. 충분히 진보한 문화가 출현할 때를 기다리며 잠복해 있는 특별한 새 능력 말이다.  - P89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는 볼 거리와 들을 거리와 여러 자극들이 가득한 세상이며, 우리의 생존은 이러한 자극을 신속하고 정확하게 평가하는 능력에 달려 있다. 우리를 에워싼 세계를 이해하는 것은 일종의 체계, 빠르고 확실한 환경 분석방법이 토대가 되어야 한다. 보는 능력, 즉 대상을시각적으로 정의하는 능력은 타고난 것처럼 보이지만, 이는 엄청난 지각능력, 온갖 기능의 계층구조 전체를 동원하는 능력을 획득했음을 의미한다. 우리가 보는 사물은 그 사물 자체가 아니다. 일련의 조명 상태나 주위 환경에 따라 그곳에 놓인 사물의 모양, 표면, 윤곽, 경계를 보며, 그사물의 이동 혹은 보는 이의 움직임에 따라 관점이 바뀐다. 이런 변동 많은 복잡한 시각적 혼돈 속에서 시각 대상의 성질을 추론하거나 가정할 만한 불변의 요소를 추출해야 한다. 우리 주위의 그 무수한 사물들 하나하나에 각각 해당 표상이나 기억 심상이 따로 있어야 한다면 무척이나 비경제적인 세계가 될 것이다. 여기에서 힘을 발휘하는 것이 조합인데, 무한한 방식으로 조합될 수 있는 어휘의 유한한 집합이 필요하다. 가령 알파벳 스물여섯 자를 짜 맞춰 하나의 언어를 구사하는 데 들어가는 만큼의 낱말과 문장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사람의 얼굴처럼 태어났을 때나 그 직후에 바로 인식이 가능한 대상도있다. 그러나 그 외에는 보고 만지고 조작하고 느낌과 모양새를 관련시키는 등 경험과 활동을 통해 습득된다. 시각적 물체 인식은 하측두피질에 있는 수백만 뉴런이 담당하는데, 여기에서 신경 기능은 경험과 훈련, 교육 등의 자극에 수용적이고 민감하게 반응하며 대단히 가변적이다. 하측두피질의 뉴런은 시지각 일반을 위해 진화했지만, 다른 목적(그 가운데가장 두드러지는 목적이 읽기 기능)에 동원되기도 한다. - P90

 그래서 문자의 형태는 "자연에서 볼 수 있는 윤곽 집합의 닮은꼴로 정선되어 기존의 사물 인지 기제를 활용할 수 있었다"는 가설을 도출했다.
문화적 도구인 문자는 하측두피질 신경이 선호하는 일련의 형태를 이용하도록 진화했다. 드안느는 말한다. "문자의 꼴은 아무렇게나 선택된것이 아니다. 그렇기는커녕 효율성을 확보하기 위해 뇌가 표기 체계의 설계를 얼마나 제약하는지, 문화상대주의는 끼어들 여지조차 없다. 영장류의 뇌는 아주 제한된 수의 문자꼴 집합만 받아들인다." 
이는 ‘윌리스 문제‘를 푸는 우아한 해법이다. 실로 여기에는 아무 문제가 없다. 쓰기와 읽기의 기원은 진화 과정의 직접적인 적응으로 이해할수 없다. 그것은 뇌의 가소성에 달린 문제다. 한 사람의 짧은 일생에서조차 경험, 즉 경험선택은 자연선택만큼이나 강력한 변화의 매체가 된다. 다윈의 자연선택은 진화를 통한 발전보다 수십만 배 빠른 시간 범위 안에서 이루어지는 문화적, 개인적 발전을 막기는 커녕 그러한 발전을 위한 기반을 다졌다. 우리의 문자는 신이 개입해서 준 선물이 아니라 문화적 발명품이요. 이전부터 존재하던 신경의 속성을 새로이 영리하게 창조적으로 이용하게 만드는 문화선택의 결과다. - P92

얼굴 인식은 사람들에게 절대적으로 중요한 능력이며, 대다수는수천 명의 얼굴을 식별할 수 있고 군중 속에서 잘 아는 사람의얼굴을 쉽게 찾아낸다. 그러한 구분에는 특수한 전문적 기술이 필요하며, 이 기술은 사람만이 아니라 다른 영장류에게도 보편적으로 나타난다. 그렇다면 얼굴 실인증이 있는 사람들은 어떻게 살아갈까?
지난 수십 년에 걸쳐 뇌의 가소성, 즉 결함이 있거나 손상된 뇌 부위의 기능을 뇌의 일부 혹은 시스템이 대신한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하지만 얼굴 실인증이나 지형 실인증에는 이러한 현상이 일어나지 않는 듯하며, 보통은 나이가 든다고 약화되지 않는다. 따라서 얼굴 실인증을 겪는 사람들은 비상한 수완과 창조적 전략을 발휘하여 그러한 결함을 우회할 방법을 찾아야 한다. 특이하게 생긴 코나 수염, 안경 혹은 의복 형태 따위의 특징을 잡아내는 것이다. 얼굴 실인증을 겪는 많은 사람이 목소리나 자세 혹은 걸음걸이로 사람을 인식하는데, 물론 (학교에서 만나는 사람이면 제자일 것으로 예상하고, 사무실에서 마주친 사람이면 직장 동료일 것으로예상하는 등) 맥락에 따른 예상이 가장 중요하다. 그러한 전략은 의식적이거나 무의식적으로도 발동하여 증세가 심하지 않은 얼굴 실인증 환자들은 자신의 얼굴 인식 능력이 실제로 얼마나 형편없는지 잘 의식하지 못해서 (예를 들면 머리카락이나 안경 같은 부수적 단서를 제거한 사진 테스트 등의) 검사를 통해 그러한 사실을 알면 화들짝 놀라곤 한다.  - P109

이처럼 대뇌피질이 등위적이라는 생각이 우세하다가 1860년대에 폴브로카의 연구가 나오면서 바뀌기 시작했다. 브로카는 표현성 실어증을겪었던 많은 환자를 검시하여 모든 시신의 손상 부위가 좌측 전두엽에 국한됨을 입증했다. 1865년에 브로카는 "우리는 좌반구로 말한다"는 유명한 말을 남겼는데, 이로써 뇌가 균질하며 미분화적이라는 생각은 사라진것으로 보인다.
브로카는 좌반구 전두엽의 특정 부위에서 ‘말을 담당하는 운동 중추‘를 찾아냈다고 여겼는데, 오늘날 브로카 영역이라고 부르는 부위다. 이것이 ‘위치 파악‘이라는 개념에 있어서 새 장을 열었고, 신경 및 인지 기능과 뇌의 특정 중추와의 순수한 상관관계를 찾은 것으로 보인다. 이후 신경학은 성큼 전진하여 각종 ‘중추‘를 찾아낸다. 브로카가 말을 담당하는운동 중추를 찾아낸 데 이어, 베르니케는 말을 담당하는 청각 중추를, 데제린은 말을 담당하는 시각 중추를 찾아냈다. 이는 전부 언어 반구인 좌반구에 있으며, 우반구에서는 시지각 중추를 찾아냈다. - P113

일부 연구자는 얼굴 실인증이 있는 (전부는 아니지만 많은 사람이일장소를 인식하는 데도 어려움을 겪는다는 사실은 얼굴과 장소인식을 관장하는 영역이 각기 따로 있으면서도 인접해 있음을 시사한다고 본다. 그런가 하면 두 기능 모두 하나의 구역에서 관장하는데, 한쪽은 얼굴에 치중하고 다른 쪽은 장소에 치중한다고 믿는 연구자도 있다.
하지만 신경심리학자 엘코논 골드버그는 대뇌피질 안에 정해진 기능을 전담하는 독립된 중추 혹은 신경 구성 단원이 장착되어 있다는 발상 자체에 의문을 제기한다. 그는 고위 피질 기능에 어느 한쪽으로 기울어진 영역이 있어서 경험과 훈련에 의해 계발된 기능이 그 경사를 따라 합치하거나 어느 한쪽으로 이동하는 것일 수 있다고 본다. 그는 저서 《내 안의CEO, 전두엽The New Executive Brain) [한국어판, 시그마프레스, 2008]에서 뇌가 기능적 단원들의 집합이라면 유연성과 가소성이 허용되지 않을 것이므로 진화론적으로 단원[모듈] 원리에서 경사 원리로 이동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주장한다.
골드버그는 단원성(정해진 기능, 입력분과 출력분이 정해져 있는 책들의조합)이 시상의 특성일 수는 있지만, 대뇌피질은 경사 구조에 가까워서 1차 감각피질에서 연합피질로, 그리고 무엇보다 최상위에 있는 전두피질로 올라가면서 점점 더 현저해진다고 주장한다. 단원성과 경사성은 서로를 보완하는 이론이 될 수 있을 것이다. - P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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