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용하는 언어가 무엇이건 간에 읽기를 할 때 활성화되는 영역은 똑같이 하측두 피질의 시각단어형태 처리영역이다. 그리스어나 영어처럼 알파벳을 사용하는 언어나 중국어처럼 표의문자를 사용하는 언어나 거의 차이가 없다. 이는 데제린의 병변 연구와 뇌 영상을 이용한 연구를 통해 입증되었다. 또한 같은 영역의 과다 활동으로 기능의 항진이나 왜곡이 야기되는 다양한 ‘과잉‘ 장애로도 입증되었다. 이런 의미에서 실독증의 반대는 어휘 환시나 문서 환시, 즉 헛 문자를 보는 증상이다. 시각 경로(망막에서 시각피질까지 시각에 관련된 부위)에 장애가 있는사람들은 환시를 일으키는 경향이 있는데, 도미니크 피치의 연구진은 환시를 겪는 이 환자들의 4분의 1에게 "텍스트, 낱말, 낱자, 숫자, 음표 환시"가 나타난다고 추정한다. 피치의 연구팀이 밝혀냈듯이, 그런 문자 환각은 왼쪽 후두 측두 부위, 특히 시각단어형태 처리영역(손상을 입는다면실독증을 일으킬 수 있는 바로 그 영역)과 관련이 있다. 따라서 실독증 환자는 어휘 환시를 겪는 환자든 혹은 어떤 언어든 정상적인 읽기가 가능한 환자든 간에, 결론은 똑같을 수밖에 없다. 즉, 글을 배운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대뇌 우세반구(언어가 자리 잡은 반구)에 문자와 낱말을 (그리고 수학이나 음악 등의 다른 시각적 표기 부호도) 인식하는 기능을 담당하는 하나의 신경계가 존재한다는 점이다. - P88
여기서 심오한 물음이 떠오른다. 어째서 모든 사람에게 읽기 기능이 붙박이로 딸려 있는 것인가? 쓰기는 인류 문화의 역사에서 상대적으로 최근에 발명된 것인데? 말로 하는 의사소통(그리고 그 신경학적 기제)에는 자연선택이라는 점진적 과정을 거쳐 진화해온 모든 자취가 남아 있다. 선사시대 인류의 뇌 구조의 변천 과정은 정교한 두개골 속 틀과 여타 화석 증거를 통해 속속들이 밝혀졌으며, 더불어 성도聲道의 변천도 추적했다. 인류가 말을 시작한 시기가 수만 년 전임은 분명하다. 그러나 읽기 능력은 그렇다고 보기 어렵다. 문자를 사용한 역사가 5,000년 남짓이기 때문이다. 자연선택에 의한 진화의 산물로 보기에는 지나치게 최근의 일이다. 사람 뇌의 시각단어형태 처리영역이 읽기에 탁월하게 최적화되어 있다고 해도 특별히 이 목적을 위해 진화했을 리는 없다. 이것을 월리스 문제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앨프리드 러셀 월리스는 사람의 뇌에 잠재된 (언어, 수학 등) 많은 능력(원시 혹은 선사 사회에서는 거의 쓸모없었을 능력)의 역설에 깊이 경도되었다. 윌리스는 자연선택이 당장 유용한 능력의 발생에 대해서는 설명할 수있겠지만, 수만 년 뒤에 나타난 고등한 문화에서나 인정받을 만한 잠재적 능력의 존재는 설명하지 못한다고 느꼈다. 인류의 이러한 잠재력을 어떠한 자연 작용으로도 설명할 수 없었던 월리스는 하릴없이 초자연적 존재에 기댈 수밖에 없었다. 틀림없이 신이 사람의 정신 속에 그런 능력을 심어 넣은 것이라고 말이다. 월리스의 관점에서 신이 내린 선물로 이보다 좋은 예는 없었다. 충분히 진보한 문화가 출현할 때를 기다리며 잠복해 있는 특별한 새 능력 말이다. - P89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는 볼 거리와 들을 거리와 여러 자극들이 가득한 세상이며, 우리의 생존은 이러한 자극을 신속하고 정확하게 평가하는 능력에 달려 있다. 우리를 에워싼 세계를 이해하는 것은 일종의 체계, 빠르고 확실한 환경 분석방법이 토대가 되어야 한다. 보는 능력, 즉 대상을시각적으로 정의하는 능력은 타고난 것처럼 보이지만, 이는 엄청난 지각능력, 온갖 기능의 계층구조 전체를 동원하는 능력을 획득했음을 의미한다. 우리가 보는 사물은 그 사물 자체가 아니다. 일련의 조명 상태나 주위 환경에 따라 그곳에 놓인 사물의 모양, 표면, 윤곽, 경계를 보며, 그사물의 이동 혹은 보는 이의 움직임에 따라 관점이 바뀐다. 이런 변동 많은 복잡한 시각적 혼돈 속에서 시각 대상의 성질을 추론하거나 가정할 만한 불변의 요소를 추출해야 한다. 우리 주위의 그 무수한 사물들 하나하나에 각각 해당 표상이나 기억 심상이 따로 있어야 한다면 무척이나 비경제적인 세계가 될 것이다. 여기에서 힘을 발휘하는 것이 조합인데, 무한한 방식으로 조합될 수 있는 어휘의 유한한 집합이 필요하다. 가령 알파벳 스물여섯 자를 짜 맞춰 하나의 언어를 구사하는 데 들어가는 만큼의 낱말과 문장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사람의 얼굴처럼 태어났을 때나 그 직후에 바로 인식이 가능한 대상도있다. 그러나 그 외에는 보고 만지고 조작하고 느낌과 모양새를 관련시키는 등 경험과 활동을 통해 습득된다. 시각적 물체 인식은 하측두피질에 있는 수백만 뉴런이 담당하는데, 여기에서 신경 기능은 경험과 훈련, 교육 등의 자극에 수용적이고 민감하게 반응하며 대단히 가변적이다. 하측두피질의 뉴런은 시지각 일반을 위해 진화했지만, 다른 목적(그 가운데가장 두드러지는 목적이 읽기 기능)에 동원되기도 한다. - P90
그래서 문자의 형태는 "자연에서 볼 수 있는 윤곽 집합의 닮은꼴로 정선되어 기존의 사물 인지 기제를 활용할 수 있었다"는 가설을 도출했다. 문화적 도구인 문자는 하측두피질 신경이 선호하는 일련의 형태를 이용하도록 진화했다. 드안느는 말한다. "문자의 꼴은 아무렇게나 선택된것이 아니다. 그렇기는커녕 효율성을 확보하기 위해 뇌가 표기 체계의 설계를 얼마나 제약하는지, 문화상대주의는 끼어들 여지조차 없다. 영장류의 뇌는 아주 제한된 수의 문자꼴 집합만 받아들인다." 이는 ‘윌리스 문제‘를 푸는 우아한 해법이다. 실로 여기에는 아무 문제가 없다. 쓰기와 읽기의 기원은 진화 과정의 직접적인 적응으로 이해할수 없다. 그것은 뇌의 가소성에 달린 문제다. 한 사람의 짧은 일생에서조차 경험, 즉 경험선택은 자연선택만큼이나 강력한 변화의 매체가 된다. 다윈의 자연선택은 진화를 통한 발전보다 수십만 배 빠른 시간 범위 안에서 이루어지는 문화적, 개인적 발전을 막기는 커녕 그러한 발전을 위한 기반을 다졌다. 우리의 문자는 신이 개입해서 준 선물이 아니라 문화적 발명품이요. 이전부터 존재하던 신경의 속성을 새로이 영리하게 창조적으로 이용하게 만드는 문화선택의 결과다. - P92
얼굴 인식은 사람들에게 절대적으로 중요한 능력이며, 대다수는수천 명의 얼굴을 식별할 수 있고 군중 속에서 잘 아는 사람의얼굴을 쉽게 찾아낸다. 그러한 구분에는 특수한 전문적 기술이 필요하며, 이 기술은 사람만이 아니라 다른 영장류에게도 보편적으로 나타난다. 그렇다면 얼굴 실인증이 있는 사람들은 어떻게 살아갈까? 지난 수십 년에 걸쳐 뇌의 가소성, 즉 결함이 있거나 손상된 뇌 부위의 기능을 뇌의 일부 혹은 시스템이 대신한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하지만 얼굴 실인증이나 지형 실인증에는 이러한 현상이 일어나지 않는 듯하며, 보통은 나이가 든다고 약화되지 않는다. 따라서 얼굴 실인증을 겪는 사람들은 비상한 수완과 창조적 전략을 발휘하여 그러한 결함을 우회할 방법을 찾아야 한다. 특이하게 생긴 코나 수염, 안경 혹은 의복 형태 따위의 특징을 잡아내는 것이다. 얼굴 실인증을 겪는 많은 사람이 목소리나 자세 혹은 걸음걸이로 사람을 인식하는데, 물론 (학교에서 만나는 사람이면 제자일 것으로 예상하고, 사무실에서 마주친 사람이면 직장 동료일 것으로예상하는 등) 맥락에 따른 예상이 가장 중요하다. 그러한 전략은 의식적이거나 무의식적으로도 발동하여 증세가 심하지 않은 얼굴 실인증 환자들은 자신의 얼굴 인식 능력이 실제로 얼마나 형편없는지 잘 의식하지 못해서 (예를 들면 머리카락이나 안경 같은 부수적 단서를 제거한 사진 테스트 등의) 검사를 통해 그러한 사실을 알면 화들짝 놀라곤 한다. - P109
이처럼 대뇌피질이 등위적이라는 생각이 우세하다가 1860년대에 폴브로카의 연구가 나오면서 바뀌기 시작했다. 브로카는 표현성 실어증을겪었던 많은 환자를 검시하여 모든 시신의 손상 부위가 좌측 전두엽에 국한됨을 입증했다. 1865년에 브로카는 "우리는 좌반구로 말한다"는 유명한 말을 남겼는데, 이로써 뇌가 균질하며 미분화적이라는 생각은 사라진것으로 보인다. 브로카는 좌반구 전두엽의 특정 부위에서 ‘말을 담당하는 운동 중추‘를 찾아냈다고 여겼는데, 오늘날 브로카 영역이라고 부르는 부위다. 이것이 ‘위치 파악‘이라는 개념에 있어서 새 장을 열었고, 신경 및 인지 기능과 뇌의 특정 중추와의 순수한 상관관계를 찾은 것으로 보인다. 이후 신경학은 성큼 전진하여 각종 ‘중추‘를 찾아낸다. 브로카가 말을 담당하는운동 중추를 찾아낸 데 이어, 베르니케는 말을 담당하는 청각 중추를, 데제린은 말을 담당하는 시각 중추를 찾아냈다. 이는 전부 언어 반구인 좌반구에 있으며, 우반구에서는 시지각 중추를 찾아냈다. - P113
일부 연구자는 얼굴 실인증이 있는 (전부는 아니지만 많은 사람이일장소를 인식하는 데도 어려움을 겪는다는 사실은 얼굴과 장소인식을 관장하는 영역이 각기 따로 있으면서도 인접해 있음을 시사한다고 본다. 그런가 하면 두 기능 모두 하나의 구역에서 관장하는데, 한쪽은 얼굴에 치중하고 다른 쪽은 장소에 치중한다고 믿는 연구자도 있다. 하지만 신경심리학자 엘코논 골드버그는 대뇌피질 안에 정해진 기능을 전담하는 독립된 중추 혹은 신경 구성 단원이 장착되어 있다는 발상 자체에 의문을 제기한다. 그는 고위 피질 기능에 어느 한쪽으로 기울어진 영역이 있어서 경험과 훈련에 의해 계발된 기능이 그 경사를 따라 합치하거나 어느 한쪽으로 이동하는 것일 수 있다고 본다. 그는 저서 《내 안의CEO, 전두엽The New Executive Brain) [한국어판, 시그마프레스, 2008]에서 뇌가 기능적 단원들의 집합이라면 유연성과 가소성이 허용되지 않을 것이므로 진화론적으로 단원[모듈] 원리에서 경사 원리로 이동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주장한다. 골드버그는 단원성(정해진 기능, 입력분과 출력분이 정해져 있는 책들의조합)이 시상의 특성일 수는 있지만, 대뇌피질은 경사 구조에 가까워서 1차 감각피질에서 연합피질로, 그리고 무엇보다 최상위에 있는 전두피질로 올라가면서 점점 더 현저해진다고 주장한다. 단원성과 경사성은 서로를 보완하는 이론이 될 수 있을 것이다. - P12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