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먼 윈체스터에게 편지를 써서 저서 《대영제국의 유산Outposts)의오디오북을 얼마나 즐겁게 들었는지 모르겠다고 인사했다. 나는 책의 세계에 살며, 무언가를 읽지 않고는 못 배기는 사람이다. 아니, 내 인생의 많은 부분을 읽는 데 바쳤다. 하지만 지금은 오른쪽 눈은 ‘부재중‘이고 왼쪽 눈은 왼쪽 눈대로 오래전부터 문제가 있는 터라 읽는일이 쉽지가 않다. 어렸을 때 왼쪽 눈을 맞은 일이 있는데, 그 일로 백내장이 생겼고 그 뒤로 줄곧 시력이 아주 낮다. 주로 사용하는 오른쪽 눈의시력이 10일 때는 상관이 없었지만, 지금은 문제가 된다. 평소 책을 읽을 때 쓰는 안경이 왼쪽 눈의 시력에는 충분하지 않아 돋보기를 써야 하는데, 그러자니 읽는 속도가 더디고 페이지 전체를 한번에 훑어볼 수가없다. 케이트와 서점으로 나가 대형 활자로 인쇄한 서적을 몇 권 샀다. 하지만대형 활자 서적의 대다수가 입문서나 로맨스 소설인 것을 보고는 의기소침해졌다. 대형 활자 서적 구역에서 괜찮은 책을 단 한 권도 찾을 수 없었다. 시각에 장애가 있으면 지적으로도 장애가 있는 줄 아는가 보다. <타임스>에 이 문제에 대해 격렬한 칼럼을 보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다. 오디오북은 범위가 넓지만, 평생을 독자로 살아온 나는 남이 읽어주는 것을 듣는다는 일 자체가 내키지 않는다. 다행히도 사이먼 윈체스터가 이 법칙의 예외가 되었다. - P190
검고 불투명한 커다란 무언가가 중심시를 흐리는 것이 보이는데, 위족이 돌출한 아메바처럼 생겼다. 이것은 팽창했다 수축했다 하면서 율동적으로 움직이지만, 그 테두리는 면도날처럼 예리했다. 손가락으로 찔렀더니 블랙홀에 집어삼켜진 것처럼 손가락이 사라졌다. 화장실 거울에 내모습을 비쳐 보는데, 오른쪽 눈으로는 머리가 보이지 않았다. 눈에 보이는것은 어깨와 턱수염 아래쪽뿐이었다. 글 쓸 때는 펜촉이 보이지 않았다. 다음 날 아침 외출했을 때는 길 다니는 사람들의 하반신만 보였다. 조이스의 <율리시스>에서 더블린을 돌아다니는 "펑퍼짐한 바지 한 벌"로묘사되는 아티포니 씨가 떠올랐다. 길은 온통 치마와 바지, 상체 없이 움직이는 다리와 엉덩이들뿐이었다(이로부터 며칠 뒤에는 암점이 더 커져 사람들 발만 보였다). 물론 이 현상은 왼쪽 눈을 감았을 때만 나타난다. 양쪽 눈을 다 쓸 때면시력은 상당히 ‘정상‘이어서 지난 몇 달 동안의 상태보다도 훨씬 좋다. 이제는 오른쪽 눈의 시각이 왼쪽 눈의 시각을 방해하지 않기 때문이다. 적어도 중심시만큼은 가망 없이 완전히 멀었다. 이상하게도 이렇게 된 것이 얼마나 해방감을 주는지 모르겠다. 이 레이저 치료를 몇 달 전에 받았더라면 참 좋았을 텐데…. 하지만 단안시가 되고 보니 입체시는 제대로 발휘되지 못하는데, 시야의 상반부에서 3분의 2까지 사라졌다. 하지만 하반부는 손상되지 않아서주변시는 어느 정도 남아 있다. 그래서 사람들의 하반신은 입체시로 보이고, 상반신은 완전 평면의 2차원으로 보인다. 물론 하반신을 남은 중심시로 볼 때면 이 또한 평면으로 변한다. - P197
모든 것이 평평하게 보이는 것이 싫고 입체감을 잃었다는 사실이 슬펐지만, 가끔은 나의 2차원 세계가 고마울 때가 있다. 방이나 조용한 거리, 가로로 놓인 탁자가 시각적으로 아름답게 구성된 정물로 보일 때면, 나는 화가나 사진가가 평면 캔버스나 필름에 담은 아름다운 작품으로 상상하곤 한다. 이렇게 구성이 만들어내는 아름다움을 의식하면서 그림이나 사진을 감상하는 기쁨을 누리게 되었다. 그림이나 사진 작품이 입체적 착시 효과은 주지 못하지만, 이런 면에서은 더 아름다울 수 있다. - P213
손상된 것은 깊이감과 거리감만이 아니었다. 때로는 공간에 나열된 고체들의 세계에 살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데 너무도 중요한 원근감마저 소실되는 경우도 있다. 롱아일랜드에 사는 친구의 헛간을 찾아갔을때였는데, 처음에는 그곳이 헛간인지 몰라보았다. 하늘에 새겨진 도형같은 가로선, 세로선, 대각선밖에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더니 갑자기 원근감이 생겨서 사진이나 그림 같은 평면이기는 했어도 헛간이라는 것이 인지되었다. 깊이나 거리 지각 능력을 상실한 뒤로 나에게는 가깝고 먼 사물이 결합하거나 융합하여 기이한 변종 괴물이 되는 일이 생겨났다. 하루는 이상하게도 손가락 사이에 잿빛 거미줄이 보여서 뭔가 했더니, 내가 1미터 아래의 잿빛 카펫을 보고 있는 것이었다(발이 손의 일부가 되어 수평으로 보였다). 그 순간 겁에 질려 친구의 옆모습을 보았는데, 친구의 눈에서 어린가지 같기도 하고 은백색 나무토막 같기도 한 것이 뻗어 나오는 게 아닌가. 하지만 이것은 길 건너편 나무에 붙은 가지라는 것을 금세 알아차렸다. 그리고 유니언스퀘어에서 길을 건너는 남자가 보였는데, 그 사람은 어깨에 거대한 토목 구조물을 짊어지고 있었다(미치지 않고서야 저런 물건을 지고 갈 수가 있나…). 그런데 알고 보니 그 구조물은 그 사람으로부터 10미터 뒤에 있는 다른 구조물에 붙어 있는 것이었다. 또 소방차 꼭대기가 내 차 지붕에 꽂힌 적이 있는데, 그 소방차는 내 차에서 10여 미터 떨어져 있었다. 하지만 이를 알고 고개를 움직여 운동 시차로 확인했는데도 이상하게 착시는 그리 달라지지 않았다. 혼잡한 도로의 차량 사이에서 보았던 높이 30미터가 넘는 거대한 평저선은 내 바로 앞에 있는 자동차의 측면 거울이었고, 한 여자의 이상한 초록 우산은 그 여자로부터 30미터 뒤에 서 있는 나무였다. 정말 무서운 일도 있었는데, 어느 날 밤 침실에서 책을 읽는데 천장에 매달린 선풍기가 머리맡의 독서등 위로 추락하려는 것이 ‘보였다‘. 두 물건이 최소한 1~2미터는 떨어져 있다는 것을 ‘알고‘는 있다. 그러나 그렇게 갑자기 일어나는 착시를 무슨 수로 막겠는가. 이제 더는 내 앞에서 무언가가 불쑥 튀어나오지도 움푹 꺼지지도 않는다. ‘앞‘이나 ‘뒤‘를 바로바로 지각하는 능력도 사라지고 중첩감과 원근감을 토대로 추론할 수 있을 따름이다. 공간은 나를 포근하게 감싸주며 내가 드나들고 마음 내키는 대로 배회하던 입체의 영역이었다. 나는 그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고 그 안에 살았으며, 내가 볼 수 있는 모든 것이 공간 속에서 나와 관계를 맺었다. 이제 나에게는 그 공간이 시각적으로 (혹은 정신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 P215
우리는 주변시를 고마워할 줄 모른다. 평소에는 그 존재를 거의 느끼지 못하기 때문이다. 무엇인가를 보고 응시하고 초점을 맞출 때 사용하는 것은 중심시다. 하지만 중심시를 에워싸고 하나의 맥락에서, 즉 우리가 보고 있는 것이 더 넓은 세계에서는 어떤 위치에 속하는지를 알려주는것은 주변시다. 보고 있는 대상이 움직일 때 우리가 의지하는 것이 바로주변시다. 주변시가 어느 쪽에서 예상치 못한 움직임이 발생하는지 경고하면, 중심시가 그 경고를 받아 움직임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다. 그런데 나에게는 오른쪽 눈의 주변시에서 큼직한 한 부분(케이크를 크게 잘라낸 조각만 한, 40도 이상 되는)이 잘려나갔다. 대략 코 오른쪽으로는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오른쪽 눈의 중심시는 이미 잃었지만 남은 주변시가 오른쪽에서 일어나는 일을 암시해주어 미리 주의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그것마저 상실했다. 오른쪽으로는 자각이 전혀 없어서 시야에 무엇이 나타나건 뜻밖의 사태요 놀라운 일이 된다. 그래서 사람이나 물건이 오른쪽에서 불쑥 나타날 때면 하릴없이 당황하고 만다. 심지어는 쇼크 상태가 되기도 한다. 공간의 큼지막한 한 부분이 나에게는 더이상 존재하지 않으며, 그 공간 안에 무엇이 되었건 ‘있을 수 있다‘는 생각도 함께 사라졌다. - P219
헐이 말하는 심맹은 시각적 표상과 기억의 상실만이 아니라 본다는 생각 자체를 잃어버려서 ‘여기‘, ‘저기‘, ‘마주 보기‘ 같은 개념이 의미가 없어진 상태다. 생김새라든가 시각적 특징 같은 개념이 사라진 것이다. 그는 허공에 손가락으로 그려보지 않는 한 3이라는 숫자가 어떻게 생겼는지 상상할 수 없었다. 말하자면 3의 ‘운동‘ 표상은 있으나, ‘시각적 표상은 없는 것이다. 이런 변화가 처음 나타났을 때는 아내나 아이들의 얼굴을 떠올릴 수 없고 좋아하는 장소와 정든 풍경이 마음속에 그려지지 않아서 몹시 괴로웠다. 하지만 그것이 실명에 대한 자연의 반응이라는 생각이 들자 놀랍도록 차분하게 받아들일 수 있었다. 사실 그는 시각적 표상 능력의 상실을 다른 감각 기능이 강화되는 다음 단계를 위한 필요조건으로 여긴 듯하다. 완전히 맹인이 된 지 2년 뒤, 헐의 시각적 표상과 기억 능력은 선천적 맹인과 비슷한 수준이 되었다. 헐은 심오한 종교적 색채를 띠며 때로 요하네스(1542~1591, 에스파냐의 신비주의자이자 시인, 수도원 개혁 운동가옮긴이)를 연상시키는 언어로 희열과 묵종으로써 심맹 상태에 자신을 내맡겼다. 그는 심맹 상태란 "정법한 자율의 세계, 스스로 존재하는 세계요..… 혼신으로 본다는 것은 사람이 누릴 수 있는 가장 집약적인 상태로살아가는 것"이라고 말한다. 헐이 말하는 "혼신으로 본다"는 것은 주의를 돌리는 것, 무게중심을 다른 감각으로 이전하는 것, 그리하여 다른 감각기관들이 새로운 힘과 자양분을 얻는다는 뜻이다. 그리하여 그는 이제껏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던빗소리가 어떻게 새로운 풍경의 윤곽을 보여주는지 말한다. 비가 잔디밭이나 정원의 수풀을 두드릴 때와 정원과 차도를 가르는 담장을 두드릴 때각각 다른 소리가 난다고.
비는 모든 것의 윤곽을 드러내주며 이전에는 보이지 않던 것에 다채로운 빛깔의 담요를 드리운다. 간헐적인 소리로 가득하며 그래서 파편들로 존재하는 세계와 달리, 꾸준히 떨어지는 빗소리가 만들어내는 청각적 경험에는 연속성이 있어서 하나의 상황 전체를 하나로 묶어내며..… 원근감을 제시하며 세계의 한 부분과 다른 부분이 실제로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 P230
인지신경학에서는 지난 몇십 년 사이에 사람의 뇌가 통념만큼 불변적인 장치가 아닌 것으로 밝혀졌다. 이 분야의 선구자 헬렌 네빌은 언어를 배우기 전에 귀가 들리지 않은 사람들(즉, 선천적 농아나 2세 이전에 농아가 된 사람)의 뇌에서 청각을 담당하는 부분이 퇴행하지 않았음을 증명했다. 이들의 청각 기관은 살아서 기능을 수행하는데, 다만 그 기능과 활동이 새로운 범주, 즉 시각 언어를 처리하는 기능으로 변신한다. 네빌의 용어로 말하자면 ‘재할당‘된 것이다. 선천적 맹인이나 아주 어려서 맹인이 된 사람들을 대상으로 한 연구를 보면, 시각피질의 일부영역이 재할당되어 청각과 촉각을 처리하는 기능을 수행한다. 이렇게 시각피질 일부가 재할당되면서 맹인의 청각과 촉각 외의 감각기관은 시력이 있는 사람들은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로 예리한 기능을 수행한다. - P232
헐의 경험이 시각을 상실한 사람들에게 전형적으로 나타나는 반응일것이라고 여긴 것이 잘못이었을까? 적어도, 일방적이었던 것일까? 내가 반응의 한 형태만 과하게 강조하다가 이와는 전혀 다른 여타 유형의 반용도 있을 수 있음은 그만 간과해버린 것일까? 이런 생각이 떠오른 것은 몇 해 뒤, 졸탄 토리라는 오스트레일리아의 심리학자로부터 편지를 받았을 때였다. 그의 편지는 실명에 관한 것이아니라 뇌에서 정신을 만드는가, 정신이 뇌를 만드는가 하는 문제와 의식의 본질을 다룬 자신의 책에 관한 이야기였다. 편지에는 그가 스물한살에 사고로 실명했다는 사실도 언급했다. 실명에 적응하는 방법으로 받은 조언은 시각에서 청각으로 전환하는 것이었지만, 그는 반대 방향으로움직여서 내면의 눈을 키우는 훈련을 받자고, 그래서 시각적 표상 능력을 가능한 한 끌어올리자고 결심했다. 이 훈련은 대단히 성공적이어서 마음으로 이미지를 만들어내고 그 이미지를 유지하고 조작할 수 있는 놀라운 능력을 얻었는데, 어느 정도였느냐면 그에게는 예전에 상실한 시각 표상만큼이나 사실적이고 강렬하게 느껴지는 때로는 그보다도 사실적이고 강렬한 가상의 시각 세계를 건설할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이러한 표상화 능력은 실명한 사람으로서는 도무지 가능할 것 같지 않은 일까지도 가능하게 해주었다. "저는 우리 집 다중 박공지붕의 홈통 전체를 저 혼자 힘으로 교체했습니다. 정밀하게 반응하는 정신적 공간의 힘만으로요." 그는 이렇게 썼다. - P2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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