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5년의 진보적인 유권자들이 어떻게 해서 공화당원들이 메디케어에 생각이 열려 있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는지를 이해하기는쉽다(실제로 많은 공화당원이 메디케어에 생각이 열려 있었다). 그러나오늘날 어떤 정당이 더 많은 건강보험 보장을 지지하는지를 두고서 유권자들이 혼란스러워하지는 않을 것이다. 두 정당 사이의 선택은 훨씬 더 선명해졌다. 또 다른 예로 임신중단 문제를 보자. 1982년 상원의원 조 바이든은 ‘로 대 웨이드 사건Roe v. Wade‘의 판례를 뒤집을 수 있는 헌법 수정안에 찬성했다. 그는 당시 그 투표를 두고 "미국 상원의원으로서 내가 던진가장 어려운 투표"였다고 말했다. 독실한 가톨릭 신자인 바이든은 자신의 양육 과정을 들어 그 결정을 설명했다. "여러분이 뭐라고 표현하고싶으시든 간에, 나는 아마도 내 배경의 피해자이거나, 부산물일 것입니다." 그는 또한 정치적 순간의 산물이었다. 제럴드 포드 대통령은 ‘로 대 웨이드‘ 사건 판결에 반대했지만, 그의 부통령 넬슨 록펠러는 뉴욕주 주지사로서 임신중단 제한 조치를 폐지했다. 1976년 공화당 정강은 임신중단을 "우리 시대의 가장 어렵고논쟁적인 질문들 가운데 하나"라고 일컬었다." 이어 "우리 당에는 필요한 경우 임신중단을 허용하는 대법원의 결정을 전적으로 지지하는 사람들이 있고, 모든 임신중단을 금지하는 개헌으로 대법원의 결정이 바뀌어야 한다는 의원들도 있다"라고 하며 공화당 내부의 분열을 인정했다. 의회에서도 비슷한 수의 공화당원과 민주당원이 임신중단에 반대하는 투표를 했다. 여론조사에서도 민주당원이든 공화당원이든 상관없이 임신중단은 어떤 경우라도 합법이어야 한다고 말할 가능성과 어떤경우라도 불법이어야 한다고 말할 가능성이 같았다. 오늘날 바이든은 ‘로 대 웨이드‘ 사건 판례를 뒤집으려는 보수 진영의 노력에 대해 "그것은 잘못된 것이며, 유해합니다. 그리고 우리는그것을 막아야 합니다"라고 말한다." 마찬가지로, 오늘날의 공화당 정강은 이 문제에 대해 어떠한 말도 하고 있지 않다. 공화당의 2016년 정강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우리는 인간 생명의 존엄성을 확고히 하며, 태어나지 않은 아이도 침해 불가한 생명에 대한 기본권을 가지고있음을 단언한다." 임신중단에 대한 자유로운 선택을 지지하는 공화당원들을 인정하기는커녕, 그러한 입장을 견지하는 민주당원들을 공격한다. 또한 그 정강은 "민주당의 임신중단에 대한 거의 무조건적인 지지와 임신중단에 대한 기본적인 제한에 대한 강경한 반대는 그들을 미국국민의 생각과 극적으로 멀어지게 한다"라고 선언한다. 건강보험 문제와 마찬가지로, 1970년대 공화당 내에는 임신중단에 찬성하는 사람이있었고, 또한 임신중단에 반대하는 유권자는 민주당원들 사이에서 비빌 언덕을 찾을 수 있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그런 여지가 없다. 민주당은 ‘로 대 웨이드‘ 판결을 지지하고 공화당은 반대한다. 정치에 대해 거의 아는 게 없어도 이것은 알 수 있다. - P43
캘리포니아대학교 버클리 캠퍼스 하스연구소Haas Institute의 인종정치 프로젝트 책임자인 이안 헤이니 로페즈lan Haney Lopez는 20세기 미국을 ‘헤렌볼크Herrenvolk -지배 민족만을 위한 민족주의-옮긴이 자유 민주주의‘라고 부른다. 다수 인종 집단에게는 민주주의이지만 나머지 사람들에게는 매우다른 정치 제도다. 헤이니 로페즈는 "헤렌볼크 자유 민주주의는 백인들의 문제를 해결했습니다. 사회의 부를 어떻게 하면 계속 아래쪽으로, 바깥쪽으로 확산시킬 수 있을까 고민하며 번영을 공유하고 확장했습니다. 백인들에게 민주주의는 매우 잘 작동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백인이 아닌 사람들에게는 자유주의도 민주주의도 아니었다. - P55
사실상 남부연합의 정치적 위계질서가 남부에서 복원되면서 미국은 백인 우월주의의 힘과 정치적 거래주의의 힘을 합치는 길로 나아가게 되었다. 심지어 전국 단위의 민주당이 옛 영토를 회복하고자 하는인종주의자들에게 이끌리지 않았을 때도, 영토가 종종 군벌들에게 내맡겨지는 것과 같은 이유로 남부는 군벌들의 손에 내맡겨졌다. 그리고 남부 민주당은 권력자들의 이익에 봉사했다. 전국 단위의 민주당은 뉴딜 정책의 의회 통과, 대통령 선거 승리, 인프라 건설에 신경을 썼다. 전국 단위 민주당은 그들에게 중요한 표를 줄 수 있는 남부 민주당과 함께 일하는 것과, 탈당해서 민주당 국정 과제를 방해할 수 있는 남부 민주당에 도전하는 것 중 하나를 선택해야 했다. 그리고 남부 민주당을받아들이는 것을 선택했다. - P56
남부와 민주당의 연합은 결코 순수하게 이기적인 것만은 아니었다. 그들은 정말로 민주당원이었고, 당에 대한 충성은 지역 정체성으로굳건하게 자리 잡혀 있었다. 에이브러햄 링컨은 최초의 공화당 출신 대통령이었다. 따라서 공화당에 대한 남부의 적대감은 뼈에 새겨진 것처럼 확고했다. 민주당은 부자에게서 가난한 사람에게로 부를 재분배하는 것을 지지했다(북부는 부유했고 남부는 가난했다). 프린스턴대학교교수 하워드 로젠탈Howard Rosenthal은 "20세기가 될 무렵, 남부 민주당은 민주당 내부의 좌파를 대표했습니다"라고 말한다. "그들은 기본적으로 포퓰리스트였습니다. 당시 부의 재분배는 상대적으로 부유한 북부에서 걷어서 가난한 남부에 주는 것이었습니다. 의회에서 인종 문제는 의견 불일치의 영역으로서 논의 대상이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이후 인종은 의견 불일치의 영역이 되었다. 민주당은 부유한 북부 백인들에게서 가난한 남부 백인들에게 부를 재분배하는 것만을 원하지 않았다. 민주당은 부유한 백인들에게서 가난한 흑인들에게로 부를 재분배하기를 원했다. 더군다나 1948년부터 해리 트루먼 대통령이 내린 군대 내 인종 분리 폐지 명령과 함께 민주당은 남부와의 기본 협약을 배반했다. ‘주의 권리‘를 정강으로 내걸고 출마한 배리 골드워터가 공화당원으로서는 처음으로 옛 남부연합의 많은 부분을 대변했다. 민주당이 어떻게 민권을 포용하게 되었는지에 관한 이야기는 복잡하다. 이 이야기에는 린든 존슨이나 휴버트 험프리와 같은 정치인들의 이상주의뿐만 아니라, 북부에서 비백인 유권자들을 포함하기 시작한 선거 연합체들이라는 냉정한 계산법이 포함된다. 하지만 무엇보다 경제학적 진보주의의 논리적 결론에 따라, 왜 비백인 미국은 계속 가난한지에 대한 관심이 요구되었기 때문이다. - P58
카바서비스는 "결국 하원 투표에서와 마찬가지로 상원에서도 민주당 의원들보다 공화당 의원들이 훨씬 더 높은 비율로 민권법의 토론 종결과 통과에 찬성표를 던졌다. 공화당의 경우 5분의 4가 넘었지만, 민주당의 경우 3분의 2에 불과했다"라고 썼다. 그런데 왜 민주당이 민권법을 통과시킨 정당으로 여겨지는 것일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은 간단하다. 왜냐하면 그들이 민권법을 통과시킨 당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상원과 하원 모두에서 다수당이었고, 대통령도 민주당 소속이었다. 그들은 정의를 추구하기 위해 딕시크랫과의 동맹을 끝내기로 했다. 존슨의 특별보좌관으로 일했던 빌 모이어스Bill Moyers는 존슨이 민권법에 서명한 날 밤 침실에서 골똘히 생각에 잠긴 대통령을 보았던 일을 회상했다. 존슨이 "난 우리가 앞으로 오랫동안 남부를 공화당에 넘겨주게 되었다고 생각하네"라고 말했다고 모이어스는 기억한다."상원 다수당 원내 대표 시절 남부 민주당에 의한 인종적 평등 봉쇄를 시행했던 존슨의 말이 옳았다. 민주당의 남부 지역에대한 장악력이 사라지기까지는 시간이 더 걸렸지만, 바로 그때가 약해지기 시작한 순간이었다. - P59
남부는 민주당 텃밭이었지만, 한때 진보주의의 비전이었던 주의 재분배와 계층 상승이 흑인에게까지 확대되자 민주당에 등을 돌렸다. 남부 민주당은 공화당과 타협할 이념적 이유가 있었고, 전국 단위 민주당과는 타협해야 할 정치적 이유가 있었다. 남부 권력은 민주당을 원래보다 덜 진보적으로 만들었고, 공화당의 의회 권력을 원래보다 약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두 당이 그 시대의 가장 깊은 정치적 분열을 두고 갈라지는 것을 막았다. 여기서 우리는 혼합 정당들 시대의 표 분할의 힘과 목적을 확인할수 있다. 남부 민주당은 대통령 선거에서는 공화당에, 의회와 주지사 선거에서는 보수적인 딕시크랫 민주당에 투표할 수 있었다. 당시 미국 정치가 날카로운, 심지어는 폭력적인 의견 차이로 분열되어 있지 않았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단지 그러한 싸움이 정당과 깔끔하게 들어맞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것은 지속될 수 없었고, 그러지도 않았다. 민주당이 민권을 포용하고 공화당이 그 법안에 반대하는 지도자 뒤로 결집하기로 한 것은 남부 보수주의자들이 공화당에 합류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었다. 그리고이것은 이후에 일어난 모든 일의 발판이 되었다. - P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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