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행자- 심시선씨, 유일하게 제사 문화에 강경한 반대 발언을 하고 계신데요. 본인 사후에도 그럼 제사를 거부하실 건가요?
심시선- 그럼요, 죽은 사람 위해 상다리 부러지게 차려봤자 뭐하겠습니까? 사라져야 할 관습입니다.
김행래- 바깥 물 좀 드셨다고 그렇게 쉽게 말하는 거 아닙니다. 전통문화를 그리 우습게 여기고 깔보면 안 돼요.
심시선- 형식만 남고 마음이 사라지면 고생일 뿐입니다. 그것도 순전 여자들만, 우리 큰딸에게 나 죽고 절대 제사 지낼 생각일랑 말라고 해놨습니다.
진행자- 아, 따님에게요? 아드님 있으시잖아요.
심시선- 셋째요••••••? 걔? 걔한테 무슨 나 죽고 나서 모든 대소사는 큰딸이 알아서 잘할 겁니다.
김행래- 몹쓸 언행은 아주 골라서 다 하시는군요.
심시선- 선생 생각이랑 내 생각이랑 어느 쪽이 더 오래갈 생각인지는 나중 사람들이 판단하겠지요.
-TV토론 <21세기를 예상하다>(1999)에서 - P9

염을 할 때 보았다. 그 희미한 흉터를. 20세기에 생겨 21세기에 불타사라진 흉터에 대해 회수는 자주 오래 생각했다.
빈 찻잔을 앞에 두고 허벅지가 불편할 때까지 앉아 있었더니, 액자에 햇빛이 들어 반사가 심해졌다. 화수는 액자 유리에 비친 자신을 보았고 관자놀이와 턱, 목 아래로 이어지는 흉터를 살폈다.
분노로 겨우 자리에서 일어날 수 있었다. 테이블을 손바닥으로밀며, 한 발을 딛고 또 한 발을 디뎠다. 무릎과 어깨가 어색하게움직였지만 무시하고 벽을 짚었다. 숨을 고르고 욕실로 걸었다.
분노를 연료 삼아서는 안 된다고 말하는 사람들을 비웃어주고싶었다. 당신들은 아무것도 모른다고, 나와 내 할머니만 알고 있다고 쏘아붙이고 싶었다.
십 분쯤은 활기가 지속될 것이었다. - P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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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이 맡은 일에서 어떻게든 잘해 보려고 노력하는 것이 그렇게 잘못되고 이기적인 일인가요? 그게 설사 남에게 피해를 주는일이라는 걸 알았더라 하더라도 말이에요. 하지만 그걸 알고서야누가 그러겠어요? 그 정도까지 생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어요.
우리는 근시안적이었고 무관심했어요.
- 브룬힐데 폼젤, 2013년 뮌헨

브룬힐데 폼젤은 역사상 최악의 범죄자들 중 한 사람, 즉나치의 대표적 나팔수 노릇을 한 요제프 괴벨스의 최측근이었다. 그녀는 제국 선전부 소속으로 괴벨스의 속 타자수겸 비서로 일했다. 처음엔 아돌프 히틀러가 권력을 잡은직후 제국 방송국에 취직하려고 NSDAP(국가 사회주의 독일노동자당, 나치)에 입당했다. 그러다 1942년에 국민 계몽선전부로 자리를 옮겼고, 1945년 5월 항복 선언 때까지괴벨스 선전부 장관의 비서실과 국가 사회주의 엘리트 수뇌부에서 일했다. 소련군이 베를린에 진입해서 시가전을벌이던 전쟁 막바지에도 도주할 생각을 하지 않고 벙커에서 타자를 쳤고, 심지어 히틀러의 공식 항복을 알리는 깃발을 만들었다. 그 후 70년이 넘게 침묵으로 일관했다. - P10

폼젤의 이야기로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이 드러난다. 공감능력과 연대감의 상실을 수반하는 광범한 시민 계층의 정치적 무관심이 나치의 비상과 성공을 부른 한 원인이었다는 점이다. 비록 그녀 자신은 그 사실을 인식하지 못했고,
인식할 수 없었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브룬힐데 폼젤의 이야기는 우리 모두에게 각자 지금 어디에 서 있고 무엇을 하고 있는지 자문하게 만든다. 폴란드작가 안드르제이 스타시우크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 유권자들이 불안에 떨수록 우리는 더 큰 겁쟁이들을 뽑게 된다.
그러면 불안을 관리해야 할 이 정치인들은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우리와 우리 나라, 우리의 유럽 대륙을 제물로 삼는다.> 우리는 이대로 비겁하게 숨을 것인가 아니면 맞서 싸울것인가? - P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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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은 한마디로 원장님과 섬사람들의 길이 다르기 때문이었습니다. 원장님이 아무리 섬사람들을 생각하고 섬을 위해 노고를 바치고 계셨다 해도 원장님은 결국 그 섬 사람들과 같은 운명을 사실 수는 없었기때문입니다. 그런 까닭에 원장님께서 꾸미고자 하신 섬사람들의 나가 원장님과 섬사람들의 공동의 천국은 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원장님은 저들의 천국이라 하고 저들은 원장님의 천국이라 말하게 되겠기 때문이었습니다.
사람과 사람의 운명이라는 것이 그 거리가 얼마나 깊고 멀다는걸 전 섬을 나온 후로부터 더욱더 절실하게 느끼고 있습니다. 전 섬을나온 이후부터 이것저것 참 여러 가지 일을 해봤습니다. 일을 통해 육지 사람들의 생활과 의식 속으로 자신을 섞여들어보려구요. 하지만 섞일 수가 없었습니다. 섬 생각이 사라지게 하질 않았어요. 육지 사람들이 절 그렇게 만들었고, 저 자신이 저를 그렇게 만들고 있었습니다.
흔적 없이 섞인다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억지로 섞여들면 숨는 꼴이 되었구요. 초인적인 인내와 용기가 없는 한 운명을 같이하기란 그토록 힘이 드는 일이었지요. 그래서 전 저 자신에게서나마 숨어산다는 생각이 가실 때까지 이 육지를 견뎌보려고 오늘까지 이 안간힘을 써가며 버티고 있는 꼴입니다. - P379

여기 너희 천국이 마련되어 있는데 원장님께서는 이미 섬을 빠져나가려는 원생들을 이 섬과 동환에 대한 배신자로 낙인찍고 계십니다.
문둥이들만을 위한 천국- 여기에 또한 원장님의 그 눈에 보이지않는 또 다른 모습의 철조망이 마련되고 있었던 것입니다.
비록 불행한 병을 앓는다 하더라도 저들에게도 온갖 인간적인 소땅과 자기 생의 실현욕은 근본적으로 여느 인간들과 다를 바가 없을것입니다. 기구한 생의 역정을 걸어온 사람들이라 하더라도 저들이 기구해온 천국이 여느 세상 사람들의 그것과 다를 수는 없습니다. 저들이 비록 그것을 망각했다 하더라도, 우리는 그것을 잊지 말아야 하며, 우리가 저들에게 그것을 다시 찾아주어야 합니다.
원장님께서는 그러나 저들에게 그냥 인간의 천국을 지어주시려는것이 아니라, 문둥이의 천국을 지으려 하고 계십니다. 원장님의 천국계획은 처음부터 이 나라의 나환자를 한데 모으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섬 원생들이 섬을 떠나지 않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섬안에 낙토를 꾸미시겠다는 원장님의 계획은 섬을 나가기만 하면 육지사람들의 무서운 복수를 면할 수 없으리라는 협박으로 원생들의 발목을 섬 안에 붙들어두고 싶어하는 사람들의 소망과 방법이 다를 뿐 효과에 있어서는 목적이 같은 것이었습니다. 원장님께서는 저들을 그냥한 인간으로서가 아니라 특수한 조건과 양보 위에 그것을 수락할 수있는 문둥병 환자로서만 이해하려 하심으로써 오히려 저들로 하여금 원장님 자신의 문둥이 천국을 짓게 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야 가난한 자의 천국은 우선 재산을 누리는 곳에서, 병을 앓는자의 천국은 건강을 되찾는 곳에서 먼저 만날 수 있을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재산이나 건강은 그것이 극도로 결핍된 처지에서나 어떤 특수한 천국의 내용이 될 수 있을 뿐, 그것들이 언제 어디서나 모든인간의 궁극적인 천국의 내용일 수는 없습니다. 너희는 이 세상 누구에게서도 너희 병을 용서받아보지 못한 가엾은 문둥이들이므로-. - P387

도대체 어떤 절대 상황 안에 격리된 인간 집단 안에서는 그 지배자와 피지배자 사이의 협의 관계에 의한 지배 질서란 궁극적으로 그 상황의 벽을 무너뜨리는 순교자적 용기와 희생 없이는 가능할 수가 없는 것이었습니다. 다스리는 자의 선의나 정의와는 상관없이 그리고 그의 지배권이 어디에서 연유했든 그것만은 끝끝내 절대 전제가 되어 있는한 다스림을 받는 쪽은 항상 감당해낼 수 없는 상황 자체의 압력 때문에 스스로가 무력해져버리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런 불행한 사회의 질서란 우리가 흔히 믿고 있듯이 다중의 희망이나 기도 같은 것과는 일단 상관이 없이 우선은 그 지배자 한 사람의 책임과 각성에 의해 좌우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 저의 슬픈 결론입니다.
결코 장로회 사람들을 나무랄 수는 없습니다. 원장님께서는 다만그 원장님의 천국을 끊임없이 강조하고, 섬을 나갔을 때 그들이 육지사람들로부터 당하게 될 지주와 학대를 적절히 설명하심으로써 원생들 스스로 그들의 울타리를 높여가게 하고, 그 울타리 안에 고정된 적절한 상황의식을 되풀이 환기시켜줌으로써 그 장로들과 섬사람들을얼마든지 뜻대로 조작해오실 수 있었던 것입니다.
전 결국 이 몇 년 동안 원장님과 원생들의 관계에서 한 선의의 지배자와 피지배자들 사이의 어떤 대등한 상호 지배 질서, 만인 공유의화창한 지배 질서가 탄생하는 것을 본 것이 아니라, 한 지배자가 어떤불변의 절대 상황 속에 갇힌 다수의 인간 집단을 얼마나 손쉽게 그리고 어느 단계까지 저항 없는 조작을 행해갈 수 있는가 하는 슬픈 지배술의 시범을 보아왔던 셈입니다. 그 지배자가 최초에는 아무리 성실한 인간성과 선의의 명분을 지닌 사람이라 하더라도, 그리고 그 갇힌인간의 무리가 아무리 그들의 지배자를 바로 경계한다 하더라도 다스리는 자와 다스림을 받는 자가 다 함께 그들을 가두고 있는 울타리에대한 깊은 각성에 도달하지 못하는 한, 다스리는 자는 결국 그의 무리를 일방적으로 조작해나가게 마련이며, 다스림을 당하는 자들 또한다스리는 자의 뜻을 재빨리 수락하고 그것에 봉사해나갈 수밖에 없게된다는 말씀입니다. - P397

"자유나 사랑을 행함에는 차이가 큰 일이었지요. 섬사람들과의 한운명 단위 속에서 서로 믿음을 얻고 나면 일단 그 자유나 사랑을 함께 행해나갈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그 자유는 무엇으로 행해가겠소, 사랑은 무엇으로 행해가겠소. 자유나 사랑을 행함에는 절대로힘이라는 것이 전제가 되어야 합니다. 힘이 없는 자유나 사랑은 듣기 좋은 허사에 불과할 뿐입니다. 자유나 사랑으로 이룩해져나감은그 자유나 사랑 속에 깃든 힘으로 해서일 겁니다. 사랑이나 자유의원리가 바로 힘이 아니더라도 그것들이 행해지고 그것들이 이룩해나가는 실현성이나 실천성의 근거는 그 힘이 되어야 한다는 말이지요. 그리고 자유나 사랑이나 다 같이 그 실천적인 힘에 근거하여 비로소 제 값을 지닐 수 있는 것이라는 점에선 두 가지가 같은 차원의가치 개념으로 이해될 수 있는 것들이겠구요. 내 말은 결국 같은 운명을 삶으로 하여 서로의 믿음을 구하고, 그 믿음 속에 자유나 사랑으로 어떤 일을 행해나가고 있다 해도 그 믿음이나 공동 운명 의식은 그리고 그 자유나 사랑은 어떤 실천적인 힘의 질서 속에 자리를잡고 설 때라야 비로소 제 값을 찾아 지니고, 그 값을 실현해나갈 수있다는 이야깁니다."
"원장님께서는 결국 원장으로 다시 섬을 들어오지 못하셨기 때문에, 원장의 권능으로 섬을 다스릴 수 없었기 때문에 또다시 그 자우와 사랑을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는 말씀입니까?"
"운명을 같이하지 않는 한에서의 어떤 힘의 질서는 무서운 힘의 우상을 낳을 뿐이겠지요. 하지만 운명을 같이하려는 작정이 있은 다음엔 내게 그 원장의 권능이 필요했어요. 그래서 그 허심탄회한의 질서 속에서 섬의 자유와 사랑이 행해져나가야 했었어요. 하지난 이미 이 섬 병원의 원장이 아니었어요." - P408

결혼식 아침날은 기대했던 대로 남해안 특유의 따스하고 화창한 봄날씨를 보이고 있었다. 산간을 뻗어 돌아간 황톳길들은 밤사이 함성처럼 피어난 벚꽃 무리로 하여 불을 켠 듯 환하게 뚫려나가고, 벌판을 휘돌아 어우러진 보리밭의 푸르름은 바야흐로 한창 봄의 약동을 합창하고 있는 듯했다. 십자봉을 비껴 흐르는 하늘은 정봉의 소나무 가지보다도 드높았고, 섬을 휘감아 돌아간 득량만의 물빛은 어느새 그 선뜩선뜩하고 암울스런 겨울빛을 말끔히 벗고 있었다. - P413

하지만 이제 자기 목소리에 열이 오를대로 오른 조원장은 자신이 이미 식장의 시간을 늦은 사실조차도 까맣게 잊고 있었다. 시간이이미 늦어버린 가운데에 그 조원장의 능청스런 축사 연습은 그리고자신의 광기에 못 이긴 기이하고도 진지한 연기는 아직도 한동안이나 더 도도하게 계속돼나갔다.
"이제 두 분에 대한 저의 당부를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는 비로소 윤해원과 서미연 두 사람에 대한 그의 당부라는 것을말하기 시작했다.
"두 분에 대한 저의 당부라는 건 다른 것이 아닙니다. 앞서도 이미말했듯이 두 분은 기왕에 남다른 사랑과 용기로 이 일을 이룩하였으니 앞으로도 계속 자신들의 방을 허물어뜨리지 말고 누구보다 굳세게 그를 지키고 살찌워나가주시라는 것입니다. 벽을 허물어뜨리고그 벽 대신 따뜻한 인정이 넘나들 믿음과 사랑의 다리가 놓여야 할곳은 많습니다. 다리의 이쪽과 저쪽이 한 동네 한 마을로 섞이고 화목해야 할 자리는 많습니다. 제가 두 분의 신접살림을 직원 지대와병사 지대의 중간에 마련케 하고자 했던 것도 사실은 그런 뜻에서였습니다. 두 분의 결합과 정착지를 시발점으로 하여 하루빨리 이 섬에서부터 두 마을이 하나로 합해지게 되기를 바랍니다. 두 분의 정착지가 하루빨리 새로운 마을로 번창하여 이 섬 안엔 건강 지대와병사 지대가 따로 없는 하나의 마을로 채워지기를 빕니다. 이제 두사람으로 해서 그 오랜 둑길이 이어지고 길이 뚫렸습니다. 그리고 당신들의 이웃은 힘을 합해 그 길을 지키고 넓혀나갈 것입니다••••••." - P4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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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관이 된대도 할 수 없는 일이지."
"그게 정말로 장로님의 진심일 수가 있습니까?"
"진심일 수 있지. 우리 우리가 할 일을 다했을 뿐이고, 우리들한테 땅을 조금이라도 나눠주고 안 나눠주고는 다음번 일을 맡아간 사람들의 일이니까. 설사 그 사람들이 우리한텐 한 조각의 땅도 나눠주고 싶지 않다 해도 그 역시 이젠 그 사람들의 일이거든."
"이 섬 5천 원생들의 생각도 모두가 장로님처럼 태연스러울 수 있을까요?"
"같지 않아도 할 수 없는 일이지. 아, 원장도 알지 않은가? 문둥이들이란 원래가 그런 식으로 살아온 걸 말야. 그런 건 다들 벌써 익숙해 있을 거야."
"••••••."
"그렇다고 뭐 그 문둥이들을 너무 안되어할 것도 없는 일이지. 안되어할 게 없는 것이 언젠가 그 문둥이들은 남 위해 일하는 법 없다고 말했지만 문둥이들도 이 일을 해오면서 벌써 제 누릴 몫의 은혜는 다들 누려온 셈이거든. 문둥이들이 제 힘으로 일하면서 제 힘으로 살아갈 땅을 얻겠다고 이 몇 년 동안 제법들 땀을 흘려보지 않았나 저마다 제가 살 천국도 그려보고. 그만만 해도 문둥이들한텐 대단한 은혜지. 너무 못미더워 안되어할 건 없어. 내 원장이 아직 잘모르고 있을 게란 것도 바로 그 점이지. 그 점을 잘못 알고 있길래 원장은 여태도 그 사람들하고 쓸데없는 실랑이를 벌이고 있는 게야.
그야 기왕지사 섬을 떠나게 된 마당에 원장으로서도 일을 좀 만족스럽게 마무리지어두고 싶긴 하겠지. 그걸 나무랄 순 없을 게야. 하지만 내 보기엔 그게 아무래도••••••."
"그게 아무래도 제가 이 섬 사람들의 공로를 온통 저의 것으로 만들어 또 다른 동상을 짓고 싶어하는 증거가 아니냔 말씀이시지요." - P329

"바로 저 나무뿌리가 그런 것 중의 하나지요. 산에만 올라가면 저런 고목나무 뿌리는 얼마든지 많습니다. 모두가 땅속에 숨어 있어요. 놔두면 제물에 썩어 없어져버릴 것들이지요. 하지만 내가 올라가 땅을 파고 썩어가는 뿌리를 찾아주면, 저것들은 제 몫의 아름다움을 되찾아 지니고 저렇게 내게 말을 하기 시작합니다. 요즘 사람들 현상의 실체가 뭔가를 찾아낸다고 생유리창을 주먹으로 두들겨깨기도 하고, 새끼줄을 이리저리 얽어매는 따위의 별스런 짓까지 하는 모양입니다만, 이 나무뿌리는 그렇게 힘이 들 필요가 없어요. 일부러 뭘 만들어낼 필요가 없어요. 제가 원래 지닌 아름다움이 있거든요. 그 숨어 묻혀 있는 아름다움을 찾아내주기만 하면 그만이니까. 놔두면 그냥 땅속에서 썩어 없어질 나무뿌리를 찾아내주기만 하면 그만이란 말이다. 그게 예술이 안 됩니까. 그래선 예술 작품이안 되는 거웨까?" - P3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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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인하고 싶으실지 모르겠습니다만, 원장님께서 그간 이 섬에 이룩해놓으신 일은 참으로 큰 것이었습니다. 원장님께선 이미 이 섬에서 너무도 큰 일을 이룩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그것은 원장님께서 절강제를 치르게 되시든 안 되시든 원장님께서 염려하고 계시듯 오마도 간척장을 다른 사람에게 억울하게 빼앗기는 경우에 있어서까지도 이 섬에선 이미 훌륭하게 성취된 것입니다. 절강제나 원장님의 전출 때문에 그것이 달라질 수는 없습니다. 한데도 원장님께선 아직이 일에 다른 사람의 힘이 보태지는 것을 원하지 않고 계십니다. 다른 사람의 힘이 더 보태질 여지가 없을 만큼 이 일은 원장님 혼자서 결말을 지어놓고 싶어하십니다. 그것은 원장님의 지나친 욕심입니다. 왜냐하면 원장님 스스로도 이제 이 일엔 더 보태실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원장님 자신이 기어코 이 일을 결말내고 싶어하시는 것은원장님께서 이미 이 섬에 이룩해놓으신 것에 대한 원장님의 당연하면서도 인색스런 권리의 주장이 될 뿐이기 때문입니다."
"동상 때문이겠군. 이과장은 아직도 그 동상의 망령이 내게 되살아날까 봐 겁을 집어먹고 있는 거 아니오?"
원장은 이제 노골적으로 불쾌한 어조로 말하고 나서, 그러나 그동상의 망령에 대해서라면 전혀 안심을 해도 좋다는 듯 자신만만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하지만 상욱은 이제 그만한 여유조차도 원장에게 용납하지 않으려는 기세였다. - P305

"원장님께서 부임 초에 말씀하셨던 대로 이 섬은 애초 누구도 어쩔 수 없는 유령들의 섬이었습니다. 원장님께선 그 유령들을 깨워일으켜 땅 위를 걸어다니는 인간으로 만들었습니다. 자신들의 생대한 희망과 신념을 갖게 하고 이웃간의 신뢰도 심어주셨습니다. 그런데 그 모처럼 만의 희망과 신념이 또 다른 속박에로의 안내등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동상이란 언제 어느 곳에 세우게 되든 그것을 세우는 사람들에게는 일종의 자기 속박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물며 이 섬에 다시 누구의 동상이 세워지게 된다면 그 동상이 이 섬 사람들에게 말하게 될 바는 조금도 짐작하기 어려운 일이아닐 것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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