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누군가를 만난 뒤에는 그 사람의 사유를 적기보다 나의 사유를 적는다. 나의 이상은 우리의 공통된 사유를 더 잘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문자 그대로 적으면서도 나의자유를 적는 것이다. 쓰는 사람은 하나의 관념을 생각하는 사람이다. 그러나 나는 또한 내가 깊이 흡수하는 것, 꿰뚫어보려 애쓰는 것, 단어의 모든 의미를 이해하려 노력하는 것,나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것도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쓰는 동시에 쓰는 것을 내 재산의 일부로 저장한다.
- 앙토냉 질베르 세르티양주, 「공부하는 삶」에서 - P1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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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사를 단순히 ‘베껴 쓰기‘라고 생각한다면 고정관념입니다. 필사는 결국 자기 글을 쓰기 위한디딤돌입니다. 좋은 글을 베껴 쓰다 보면 나중엔 ‘나의글‘을 쓰고 싶은 생각이 자연스레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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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는 아무런 병도 없었다. 사람들은 뼈가 쑤시고 아리는 일이 없었다. 또한 고열이 나는 일도 없었다. 그때는 천연두라는 게 존재하지 않았다. 복통, 폐결핵도 없었다. 그때는 사람들이 두 발로 바르게 서 있었다. 허나 이방인들이 오면서 모든 게 무너져 내렸다.
그들은 공포를 들고 왔다.
그들은 꽃을 말려 죽이러 왔다.  - P298

잉카의 마추픽추가 부분적으로는 피부점막리슈만편모충증의 성행 탓에 선택되었을 가능성이 있다고 본다. "잉카인들은 이 병이라면 학을 뗐어요." 쿠스가 말했다. 리슈만편모충을 옮기는 샌드플라이는 높은 고도에서는 살지 못하지만, 잉카인들이 신성하게 여기는 작물인 코카나무를 경작하는 저지대에는 널리 퍼져 있었다. 마추픽주는 딱 적당한 고도에 자리하고 있다. 따라서 마추픽추에서 왕과 조정 대신들은 가장 무시무시한 병에 걸릴 위험 없이 안전한 장소에서 통치를 하고, 코카 경작과 관련된 제식을 주재할 수 있었다.
16세기에 스페인의 정복자들이 남아메리카에 도착했을 때 그들은 안데스산맥 저지대의 원주민들, 특히 코카나무 경작자들의 안면 기형을 보고 섬뜩함에 몸서리를 쳤다. - P312

 사실 그 병은 제1세계 사람들을 공격한 제3세계 질병이었다. 현재 세계는 구세계와 신세계가 아니라 제1 세계와 제3세계로 나뉜다. 과거에는 제3세계에만 국한되었던 병원균들이 이제는 제1세계를 지독할 정도로 잠식해 들어가고 있는 상황이다. 이는 지구라는 행성에서 벌어질 질병의 미래 궤도인 셈이다. 병원균에게는 경계가 없다. 그것들은 궁극의 여행자들이다. 병원균에게 연료가 되는 인간이라는 땔감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간다. 우리 제1세계 사람들은 질병, 특히 ‘소외된 열대병들‘이 제3세계에 격리되어 있을 것이라고, 병원균들이 못 들어오게 막고서 우리의 공동체 안에서 무사히 살 수 있을 것이라고 과할 정도로 안일하게 생각했다. 머나먼 땅에 있는 가난한 자들과 병든 자들의 고통은 외면한 채 말이다. - P375

 이때껏 영원히 살아남은 문명은 없었다. 하나같이 차례대로 소멸을 향해 움직였다. 해변의 부서지는 파도처럼 말이다. 그 어떤 것도 이러한 우주의 섭리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우리도 예외는 아니다.
- P3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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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단서를 종합해볼 때 그 은닉처는 마지막으로 도시를 버리고 떠나면서 폐쇄 의식을 행한 물건들의 집결지였다. 이 시나리오에 따르면, 그 도시에 가장 마지막까지 잔류했던 주민들이 신성한물건들을 전부 걷어 모은 다음, 떠나는 길에 최후의 공물로 신들에게 바쳤는데 이때 물건들에 깃든 영혼을 자유롭게 풀어주기 위해서 그것들을 깨부순 것이었다. 모스키티아에서 발견된 다른 은닉처들 역시 정착촌을 버리고 떠나는 과정에서 이와 같은 목적에 따다 남겨진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이 도시들의 ‘죽음‘ 을 포함한 문명 전체의 파국은 대략 같은 시기인 1500년경, 바로 스페인 침략기에 발생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스페인 사람들은 이 지역을 조사한 적이 없었다. 탐험은커녕 그 밀림 오지로 들어가지도 못했다.
- P281

 강철 무기와 갑옷으로 무장한 군인들, 십자가를 품은 사제들, 신세계의 생태계를 교란시킬 동물들보다 훨씬 위협적인 것이 배에올라탔다. 콜럼버스와 그의 선원들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현미경으로만 보이는 미세한 ‘병원균‘을 실어 나른 것이다. 신세계 사람들은 한 번도 노출된 적이 없어서 그에 맞설 유전적 저항력이 아예 없는 병원균들이었다. 언제라도 불이 번질 수 있는 바싹 마른 광활한 숲이나 매한가지인 신세계에 콜럼버스가 불을 들고 간 셈이었다. 유럽의 질병들이 신세계에서 걷잡을 수 없이 퍼졌다는 것은 누구나 아는 이야기다. 그런데 최근 유전학, 역학, 고고학에서발견한 사실들로 드러난 절멸의 과정은 그야말로 종말론 그 자체였다. 대학살극이 펼쳐졌던 토착 사회의 실상은 그 어떤 공포영화도 그려내지 못할 정도로 상상을 초월하는 최악의 상황이었다. 스페인 사람들이 세계 최초로 ‘해가 지지 않는 제국‘을 세울 수 있었던 것은 다른 무엇보다도 질병 덕분이었다.
- P2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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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생명의 불협화음에 귀를 기울이며 어둠속에 누워있었다. 페르드랑스의 치명적인 완벽함과 타고난 위엄에 대해 생각했다. 우리가 그 녀석에게 한 행동을 미안하게 여기면서도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것에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런 뱀에 물려 다행히 목숨은 건진다고 하더라도 그건 인생 자체를 바꿀 것이었다. 기이한 방식이기는 하나 그뱀과의 조우로 내가 밀림에 발을 디디고 있다는 감각이 더욱 선명하게 다가왔다. 이토록 훼손되지 않은 태초의 상태로 남아 있는 골짜기가 21세기에도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이 나로서는 대단히 놀라운 일이었다. 진정 ‘잃어버린 세계‘였다. 우리를 원하지도 않고 우리가 속할 수도 없는 세계였다. - P180

우리는 몇 차례 급류를 건너야 했다. 그럴 때는 군인들이 물속에서 서로 팔짱을 껴 인간 다리를 만들어 주었다. 우리는 그들에게 필사적으로 매달려 강을 건넜다. 골짜기에 다다른 우리는 그 계곡에서 처음으로 인간 점유의 흔적을 발견했다. 황무지가 된 야생 바나나 나무 군락이었다. 바나나 나무는 토착종이 아닌 아시아가 원산지로, 스페인 사람들이 중앙아메리카로 가지고 들어왔다. 바나나 나무는 우리가 그 계곡에서 유일하게 발견한 스페인 정복기 이후의 인간 거주 흔적이었다.
- P232

골짜기 사이를 빠져나갈 때였다. 정말로 그 계곡을 떠난다는 생각이 들자 나는 우울한 감정에 휩싸였다. 그곳은 더는 미지의 땅이아니었다. 마침내 T1은 세상에 속하게 되었다. 우리가 발견하고 탐사하며 지도로 만들고 발을 디디며 사진을 찍은 곳이 되었다. 그곳은 더는 잊힌 장소가 아니었다. 나는 최초로 그곳을 탐사하는 행운을 누릴 수 있었다는 것을 다시금 되새기며 짜릿하고 황홀한 기분을 느꼈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이 원정으로 그곳의 비밀을 한 꺼풀 벗겨냄으로써 그곳을 손상시켰다는 점 역시 자각해야 했다.  - P2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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