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덕무의 편지글에 보면 "옛날에는 문을 닫고 앉아 글을 읽어도 천하의 일을 알 수 있었지요" 라는 구절이 있다. 정작 이해할 수 없는것은 오늘의 우리들이다. 인터넷 시대에 세계의 정보를 책상 위에서 만나보면서도 천하의 일은커녕 제 자신에 대해서조차 알 수가없다. 정보의 바다는 오히려 우리를 더 혼란 속에서 허우적거리게할 뿐이다. 왜 그럴까? 거기에는 나는 없고 정보만 있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내가 소유한 정보의 양이 늘어갈수록 내면의 공허는 커져만 간다. 주체의 확립이 없는 정보는 혼란만 가중시킬 뿐이다.
- P82

납작한 돌을 골라 물결을 향해 몸을 뉘어 던졌다. 물껍질을 벗기며 세 번도 뛰고 네 번도 뛴다. 느린 것은 두꺼비가 물에 잠기는 것 같고, 가벼운 것은 마치 물찬 제비 같다. 어쩌다가는 대나무 모양을 만들면서 마디마디 재빠르게 뒤쫓기도 한다. 혹 동전을 쌓으며 쫓아가기도 하는데, 뾰족한 흔적은 뿔 같고, 층층의 무늬는 탑인 듯도 싶다. 이것은 아이들의 장난인데, 물수제비 뜨기라 한다.
고목이 절벽에 기댄 채 말랐는데, 우뚝함은 귀신의 몸뚱이 같고, 서리어 움츠림은 잿빛 같았다. 껍질을 벗은 것은 마치 늙은뱀이 벗어놓은 허물 같았고, 대머리가 된 것은 병든 올빼미가 걸터앉아 고개를 돌아보는 듯하였다. 속은 구멍이 뚫려 텅 비었고, 곁가지는 하나도 없었다. 산에 의지한 돌은 검고, 길에 깔린 돌은 희며, 시내에 잠긴 돌은 청록빛이었다. 돌들끼리 비벼 표백되고 깔리어 그런가 싶었다. 돌빛은 핥은 듯 불그스레 윤기가 나고 매끄러웠다. 한 필 비단 같은 가을 햇살이 멀리 단풍나무 사이로 펼쳐지자, 또 시냇가의 모래는 모두 담황색인 듯하였다.
- 박제가 <<妙香山小記>> 중에서
- P87

발로 물살을 가르자 발톱에서 폭포가 일어나고, 입으로 양치질하니 비는이빨 사이로 쏟아졌다. 두 손으로 허위적거리자 물빛만 있고 내그림자는 보이지 않는다. 눈꼽을 씻으며 얼굴의 술기운을 깨노라니, 때마침 가을 구름이 물 위에 얼비쳐 내 정수리를 어루만지는구나.
- 박제가
- P90

 대저 속된 자들은 선방(禪房)에서 기생을 끼고 시냇가에서 풍악을 베푸니, 꽃 아래서 향을 사르고 차 마시는 데 과일을 두는 격이라 하겠다. 어떤 이가 내게 와서 묻는다.
"산속에서 풍악을 들으니 어떻습디까?"
"내 귀는 다만 물 소리와 스님이 낙엽 밟는 소리를 들었을 뿐이오."
- 박제가 - P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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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쳐야미친다 - 벽(癖)에 들린 사람들

세상은 만만하지 않다. 그저 하고 대충 해서 이룰 수 있는 일은어디에도 없다. 그렇게 하다 혹 운이 좋아 작은 성취를 이룬다 해도 결코 오래가지 않는다. 노력이 따르지 않은 한때의 행운은 복권당첨처럼 오히려 그의 인생을 망치기도 한다.
불광불급(不狂不及)이라 했다. 미치지 않으면 미치지 못한다는말이다. 남이 미치지 못할 경지에 도달하려면 미치지 않고는 안 된다. 미쳐야 미친다. 미치려면] 미쳐라(), 지켜보는 이에게 광기(狂氣)로 비칠 만큼 정신의 뼈대를 하얗게 세우고, 미친 듯이 몰두하지 않고는 결코 님들보다 우뚝한 보람을 나타낼 수가 없다.
- P13

김득신이 한 번은 만주(晩洲) 홍석기(洪錫箕)의 집에 머물며공부하고 있었다. 홍공은 출타하고 없었고 그만 혼자 있었다. 한종이 솥을 지고 들어오는 것을 보고,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종이 말했다. "빚 받을 집에서 뽑아 왔습니다." 김득신은 책을 기두어 그 길로 서둘러 돌아오려 했다. 홍공이 오는 길에 그를 보고 까닭을 물었으나 대답하지 않았다. 두 번 세 번 굳이 묻자 솥을 뽑아온 일을 가지고 대답했다. 홍공은 "이것은 내가 모르는일이다. 내 집에 과부가 된 누이가 있는데 혼자 한 일이다. 실로내 잘못이 아니다" 라고 하며 간곡히 사과해 마지않았다. 김득신은 그제서야 그만두었다.
김득신은 구당(久堂) 박상원(朴長遠)과 서로 사흘 걸리는 거리에 살았다. 몇 년 전에 아무 해 몇 월 며칠에 서로 방문하기로 미리 약속을 했었는데, 틀림없이 기일에 맞추어 이르렀다. 한 번은약속을 했는데 마침 비바람이 크게 불고 날이 늦은지라 오지 않을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날 저녁에 과연 그가 이르렀다.
그 독실함이 이와 같았다.

빚 대신 가난한 집 솥을 뽑아 오는 각박함을 보고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친구 집을 박차고 나왔다. 그 잊어버리기 잘하는 사람이몇 년 전에 한 벗과의 약속만은 잊지 않고 지켰다. 이런 독실한 품성의 바탕에서 그의 근면한 노력이 꽃을 피울 수 있었다.
- P63

글의 앞부분에서 황덕길은 김득신의 피나는 노력을 말하면서,
부족한 사람은 있어도 부족한 재능은 없다고 했다. 부족해도 끊임없이 노력하면 어느 순간 길이 열린다. 단순무식한 노력 앞에는 배겨날 장사가 없다. 되풀이해서 읽고 또 읽는 동안 내용이 골수에 박히고 정신이 자라, 안목과 식견이 툭 터지게 된다. 한 번 터진 식견은 다시 막히는 법이 없다. 한 번 떠진 눈은 다시 감을 수가 없다.
하지만 그 어려운 책을 몇 번 읽고 줄줄 외웠던 천재들의 글은지금 한 편도 전하지 않는다. 남은 것은 그런 천재가 있었다는 풍문뿐이다. 김득신은 그렇지가 않았다. 공부를 아무리 해도 성적이 오르지 않는 사람은 김득신을, 아니 그의 끝없이 노력하는 자세를 스승으로 모실 일이다.
- P65

만약 한 사람의 지기를 얻게 된다면 나는 마땅히 10년 간 뽕나무를 심고, 1년 간 누에를 쳐서 손수 오색실로 물을 들이리라.
열흘에 한 빛깔씩 물들인다면, 50일 만에 다섯 가지 빛깔을 이루게 될 것이다. 이를 따뜻한 봄볕에 쬐어 말린 뒤, 여린 아내를 시켜 백 번 단련한 금침을 가지고서 내 친구의 얼굴을 수놓게 하여, 귀한 비단으로 장식하고 고옥(古王)으로 축을 만들어 아마득히 높은 산과 양양히 흘러가는 강물, 그 사이에다 이를 펼쳐놓고서로 마주보며 말없이 있다가 날이 뉘엿해지면 품에 안고서 돌아오리라.
- 이덕무 <<耳目口心書>> 중에서 - P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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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이티가 이 고위층 클럽에 미치는 영향력을 지켜보면서 나는 제이티에 대해 자부심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제이티와 어울려 지낸 지 6년이 넘어가고 있었다. 제이티가 어느 정도 업적을 인정받고 있다는 사실이 나는 기뻤다. 이런 생각에는, 내가 마약 판매 갱 단원의 출세에 같이큰 기쁨을 느낀다는 것에 대해 불안감이 항상 따라붙었다. - P343

분명 제이티는 내 인생에서 커다란 부분을 차지한다. 내가 관습을 깨고 규칙을 조롱하면서 괴짜 사회학자가 되어가는 동안 일찍이 내가 했던 가장 파격적인 일이라면, 사회학계와는 동떨어진 한 사람의 입장에서 아주 많은 것을 배우고, 아주 많은 교훈들을 받아들이고, 아주 많은경험들을 얻을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 것이었다.
나는 파리 교외나 뉴욕의 빈민가와 같이 시카고에서 멀리 떨어진 어느 거리를 돌아다니거나 거기서 이야기를 들은 사람들을 만날 때면 여전히 문득, 제이티의 목소리를 듣고는 한다.
- P3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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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주택단지에서 누구라도 죽으면 애도를 올렸지만 그 정도는 달랐다. 마약과 거리 갱단의 삶을 택한 젊은 남녀는 당연히 오래지 않아 죽을 운명이었다. 그런 사람이 죽으면 확실히 애도를 하기는 하지만 큰 충격은 없었고 사람은 언제든 죽기 십상이라는 게 전반적인 분위기였다.
하지만 그런 길을 거부한 캐트리너 같은 사람의 죽음은 충격과 더불어 믿을 수 없다는 듯한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캐트리너는 사회사업가나 경찰 같은 사람들의 관심에서 벗어나 있는 많은 젊은이들 중 하나였다. 이 주택단지의 어른들은 캐트리너같이 교육과 일, 자기향상에 진지한 관심을 지닌 젊은 남녀들을 보면서 미래에 대한 희망을 갖는다. 나 또한 그러했다고 생각한다. 캐트리너의 죽음은 결코 가시지 않는 아픔으로 마음 한편에 남았다.
- P2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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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아. 원래의 질문으로 돌아가보자고, 자넨 흑인들이 이 주택단지에서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 알고 싶어 해. 왜 가난한가. 왜 이렇게 범죄가 많을까. 왜 가족을 부양하지 못할까. 왜 아이들은자라서 일자리를 얻을 수 없을까. 그럼 이제는 백인을 연구하겠나?"
"예." 그제야 나는 베일리 부인이, 이곳 주민들의 일상적인 삶을 결정하고 있는 로버트 테일러 홈스 바깥쪽 사람들에게도 초점을 맞추기를바란다는 것을 이해했다.
"하지만 우릴 희생자로 만들진 마, 우린 우리가 어찌해볼 수 있는 것에 대해서는 책임을 질 거니까. 모든 게 우리가 어찌해볼 수 있는 건 아니거든." - P204

베일리 부인 같은 주민 대표가 권력을 휘두르는 걸 보고 나는 낙담하고 말았다. 이 동네 사람들은 새 현관문을 얻으려고 일주일 이상을 기다려야 할 이유가 없었다. 구급차나 경찰이 귀찮아서 오지 않을 거라고 염려할 필요가 없었다. 대부분 미국인들이 별 걱정 없이 받고 있는 서비스를 위해 베일리 부인 같은 중개인에게 돈을 쥐여줘야 할 필요가 없었다.
내가 자란 교외 지역에서는 아무도 그런 불편함과 무시를 묵인하지 않았다.
이 주택단지에서의 생활은 교외 지역과는 사뭇 달랐다. 이곳의 삶은 더 힘겨울 뿐 아니라 전혀 예측이 불가능했다. 이를 모면하려면 다른 종류의 규칙들이 필요했다. 그리고 주민 대표의 힘이 센 건물에 사는 사람들의 생활은, 더 이상 가혹할 수 없는 극빈층보다는 형편이 조금 나았다. 필요한 걸 얻으려면 좀 더 많은 비용이 들었지만 적어도 그럴 기회는 있었다.
- P2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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